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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Ἀτλαντίς / Atlantis[1]아틀란티스란 플라톤이 《크리티아스》에서 처음 언급한 장소로, 오래 전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하는 섬과 그곳에 있는 도시를 말한다.
플라톤의 원저에서는 일단 실제로 존재한 도시를 묘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2] 오늘날까지 다른 기록에서 교차 검증되지 않으며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고고학적 흔적을 찾을 수 없어[3] 전설로만 여겨지고 있다.
이름의 기원은 이아페토스와 아시아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 아틀라스로, 아틀란티스의 지배자들은 아틀라스의 자손이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4]
서구에서는 무 대륙과 함께 '사라진 지역' 전설로 유명하다.[5] 이러한 이야기들에 대한 호기심은 훗날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이르는 등 미지의 남방대륙[6]과 더불어 모험 및 대항해시대, 신항로 개척 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에는 미스터리 분야에서 초고대 문명설로 소비되는 경우도 잦다. 사실 《크리티아스》의 묘사를 곧이곧대로 따르면 거의 초고대 문명설에 가깝다.[7]
아래 미케네 문명 설 문단에서 언급하지만 알려진 바와는 달리 대륙은 아니고 섬이다.[8]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를 '대륙(ēpeiros)'라고 칭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큰 '섬(neos)'이라고만 표현했다. 아틀란티스가 '아시아'보다 크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 '아시아'는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아시아 대륙이 아니라 당대의 지명 '아시아'( 소아시아)를 말한다. 《크리티아스》내의 묘사 역시 그레이트브리튼 섬보다 조금 작은 정도로 바다에 가라앉은 땅치곤 터무니 없이 크긴 하지만 현대 기준으로도 대륙은 아니다.[9] 어쨌거나 오늘날에는, 특히 초고대 문명설 계열의 묘사에서는 매우 큰 대륙으로 묘사되곤 한다.
만약 대화편의 아틀란티스가 유력한 가설대로 테라 섬(산토리니 섬)을 가리킨다고 독해한다면, 아틀란티스는 실존한 고대 문명이 전설적 색채로 과장되었거나 와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전승
πάντων δὴ πρῶτον μνησθῶμεν ὅτι τὸ κεφάλαιον ἦν ἐνακισχίλια ἔτη, ἀφ᾽ οὗ γεγονὼς ἐμηνύθη πόλεμος τοῖς θ᾽ ὑπὲρ Ἡρακλείας στήλας ἔξω κατοικοῦσιν καὶ τοῖς ἐντὸς πᾶσιν: ὃν δεῖ νῦν διαπεραίνειν. τῶν μὲν οὖν ἥδε ἡ πόλις ἄρξασα καὶ πάντα τὸν πόλεμον διαπολεμήσασα ἐλέγετο, τῶν δ᾽ οἱ τῆς Ἀτλαντίδος νήσου βασιλῆς, ἣν δὴ Λιβύης καὶ Ἀσίας μείζω νῆσον οὖσαν ἔφαμεν εἶναί ποτε, νῦν δὲ ὑπὸ σεισμῶν δῦσαν ἄπορον πηλὸν τοῖς ἐνθένδε ἐκπλέουσιν
Now first of all we must recall the fact that 9000 is the sum of years since the war occurred, as is recorded, between the dwellers beyond the pillars of Heracles and all that dwelt within them; which war we have now to relate in detail. It was stated that this city of ours was in command of the one side and fought through the whole of the war, and in command of the other side were the kings of the island of Atlantis, which we said was an island larger than Libya and Asia once upon a time, but now lies sunk by earthquakes and has created a barrier of impassable mud
그러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헤라클레스의 기둥 바깥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안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 이후, 대략 9000년이 지났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할 걸세. 이제 그 전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야겠네. 전해지기로, 우리나라는 그 한쪽 군대를 지휘하여 전쟁의 전 과정을 치러 냈고 다른 쪽이었던 상대편 군대는 아틀란티스 섬의 왕들이 지휘하였는데, 우리는 앞서 아틀란티스 섬이 당시 리비아와 아시아보다도 큰 섬이라고 말한 바 있네. 그런데 지금은 지진으로 가라앉아 이쪽에서 대양 쪽으로 항해하려는 사람들을 가로막는 뻘이 되어 버렸지.
《크리티아스》 108e 부분 그리스어 영어1 영어2[10]
이 땅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크리티아스》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아틀란티스 전설을 담고 있는 《크리티아스》는 원래 《
티마이오스》Timaeus, 《크리티아스》Critias, 《헤르모크라테스》Hermocrates 3부작 중 2부로 계획된 저서이다.[11] 《티마이오스》는 그가 제시한 이상 사회의 모습과 합치되는
우주관을 펼치는 저서이고[12] 《크리티아스》는 그에 따른 이상 사회의 모습을 실제로 제시해 보이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완성된 것은 1부 《티마이오스》뿐이며, 2부인 《크리티아스》는 중간에서 끊겼고 3부 《헤르모크라테스》는 아예 집필조차 하지 못했다.[13]Now first of all we must recall the fact that 9000 is the sum of years since the war occurred, as is recorded, between the dwellers beyond the pillars of Heracles and all that dwelt within them; which war we have now to relate in detail. It was stated that this city of ours was in command of the one side and fought through the whole of the war, and in command of the other side were the kings of the island of Atlantis, which we said was an island larger than Libya and Asia once upon a time, but now lies sunk by earthquakes and has created a barrier of impassable mud
그러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헤라클레스의 기둥 바깥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안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 이후, 대략 9000년이 지났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할 걸세. 이제 그 전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야겠네. 전해지기로, 우리나라는 그 한쪽 군대를 지휘하여 전쟁의 전 과정을 치러 냈고 다른 쪽이었던 상대편 군대는 아틀란티스 섬의 왕들이 지휘하였는데, 우리는 앞서 아틀란티스 섬이 당시 리비아와 아시아보다도 큰 섬이라고 말한 바 있네. 그런데 지금은 지진으로 가라앉아 이쪽에서 대양 쪽으로 항해하려는 사람들을 가로막는 뻘이 되어 버렸지.
《크리티아스》 108e 부분 그리스어 영어1 영어2[10]
《크리티아스》에서 플라톤은 '자기 가문의 할아버지였던 솔론이 말년에 이집트에 갔을 때 만난 고위 사제와 세계의 종말과 고대 문명에 대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으며, 솔론이 그에 대한 저술을 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솔론의 전언만이 가문 대대로 내려왔다'라고 서술한다. 솔론과 플라톤은 같은 가문 출신이라, 집안에 전해진 솔론의 전언을 150년쯤 뒤에 태어난 플라톤이 듣고 기록했다는 것.
플라톤이 전하는 솔론과 사제의 대화는 아테네인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는 사제의 비판으로 시작된다. 사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래된 기록'이 이집트에 존재하며, 이런 '고귀한' 기록은 자신들의 신전에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훗날 이 기록들을 놓고 솔론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를 원한다고 한다. 사제의 말에 따르면, '세계는 여러 시기 동안 여러가지 방법으로 종말을 맞은 바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불과 물로 인한 멸망'이지만[14], 그 외에도 멸망의 역사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라면서 훌륭한 문명이 물로 멸망한 예를 드는데, 그것이 바로 아틀란티스다.
2.1. 형태와 특징
포세이돈도 아틀란티스섬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 사멸하는 자인 인간 여성에게서 자기의 아이들을 낳아 이 섬의 다음과 같은 곳에 살게 했던 것일세. 바닷가에서 섬 중앙에 걸쳐 전체가 평야였는데 그것은 실로 모든 평야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자 기름진 곳으로 일컬어졌으며, 또 평야 근처, 섬의 중앙 방향으로 50스타디온(8.88km) 떨어진 곳에는 사방 어디에서도 봐도 나지막한 산이 있었네. [113c]
(…) 그러자 포세이돈은 (…) 동산을 빙 둘러 돌아가며 잘라 파내, 바닷물과 땅으로 된 크고 작은 고리형 띠들을 서로 번갈아 가며 둘러쳤네. 그 고리형 띠들 중 둘은 육지 띠이고, 셋은 해수 띠였는데 포세이돈은 그 고리형 띠들을, 이를테면 선반을 깎듯이 섬 중앙에서 전방위로 같은 폭으로 잘라냈지. [113e]
(…) 그들[15]은 우선 옛 도시 중앙부를 감싸고 있었던 해수 띠들에 다리를 놓아 궁전으로 출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네. (…) 그들은 바다를 기점으로 폭 3플레트론(88.8m), 깊이 100푸스(29.6m), 길이 50스타디온(8.88km)의 운하를 파서 가장 바깥쪽 해수 띠와 연결시켜, 마치 항구로 들어가듯 바다에서 그 해수 띠 쪽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했다네. 어떠한 큰 배라도 충분히 진입할 수 있도록 입구를 터놓았던 것이지. 게다가 그들은 해수 띠들을 갈라놓고 있는 육지 띠들은, 다리가 놓인 곳마다 삼단노 군선이 해수 띠들 사이를 항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절개하고 그 위를 덮었네. 그리하여 그 밑으로 배가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지. 육지 띠의 가장자리 높이가 바다 수면보다 꽤 높았거든. 그리고 해수 띠들 중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가장 큰 해수 띠는 폭이 3스타디온(532.8m)이고, 그 다음의 육지 띠고 그것과 폭이 같았네. 그러나 해수 띠들 중 두 번째 해수 띠는 폭이 2스타디온(355.2m)이었고, 그 바로 다음 육지 띠의 폭 역시 그 앞 해수 띠의 폭과 같았네. 그리고 중앙에 있는 섬을 둘러싸고 흐르는 해수 띠는 폭이 1스타디온(177.6m)이었네. [115d~e]
그리고 궁전이 있었던 중앙 섬은 직경이 5스타디온(888m)이었네. 그들은 또 이 섬 둘레와 육지 띠들, 그리고 폭이 1플레트론(29.6m)인 다리 양옆을 돌담으로 둘러쌓고 다리들의 바다 방향 출구 양쪽에는 망루와 문을 만들었네. [116a][16]
(…) 그러자 포세이돈은 (…) 동산을 빙 둘러 돌아가며 잘라 파내, 바닷물과 땅으로 된 크고 작은 고리형 띠들을 서로 번갈아 가며 둘러쳤네. 그 고리형 띠들 중 둘은 육지 띠이고, 셋은 해수 띠였는데 포세이돈은 그 고리형 띠들을, 이를테면 선반을 깎듯이 섬 중앙에서 전방위로 같은 폭으로 잘라냈지. [113e]
(…) 그들[15]은 우선 옛 도시 중앙부를 감싸고 있었던 해수 띠들에 다리를 놓아 궁전으로 출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네. (…) 그들은 바다를 기점으로 폭 3플레트론(88.8m), 깊이 100푸스(29.6m), 길이 50스타디온(8.88km)의 운하를 파서 가장 바깥쪽 해수 띠와 연결시켜, 마치 항구로 들어가듯 바다에서 그 해수 띠 쪽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했다네. 어떠한 큰 배라도 충분히 진입할 수 있도록 입구를 터놓았던 것이지. 게다가 그들은 해수 띠들을 갈라놓고 있는 육지 띠들은, 다리가 놓인 곳마다 삼단노 군선이 해수 띠들 사이를 항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절개하고 그 위를 덮었네. 그리하여 그 밑으로 배가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지. 육지 띠의 가장자리 높이가 바다 수면보다 꽤 높았거든. 그리고 해수 띠들 중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가장 큰 해수 띠는 폭이 3스타디온(532.8m)이고, 그 다음의 육지 띠고 그것과 폭이 같았네. 그러나 해수 띠들 중 두 번째 해수 띠는 폭이 2스타디온(355.2m)이었고, 그 바로 다음 육지 띠의 폭 역시 그 앞 해수 띠의 폭과 같았네. 그리고 중앙에 있는 섬을 둘러싸고 흐르는 해수 띠는 폭이 1스타디온(177.6m)이었네. [115d~e]
그리고 궁전이 있었던 중앙 섬은 직경이 5스타디온(888m)이었네. 그들은 또 이 섬 둘레와 육지 띠들, 그리고 폭이 1플레트론(29.6m)인 다리 양옆을 돌담으로 둘러쌓고 다리들의 바다 방향 출구 양쪽에는 망루와 문을 만들었네. [116a][16]
아틀란티스 섬에 대한 묘사는 특이하게도 동심원 형태의 여러개의 외섬과 하나의 중앙섬이 바다와 연결된 원형 운하에 둘러싸인채 하나의 운하로 중앙 섬까지 연결되었다고 서술된다. 각 외섬과 운하의 폭은 운하와 안쪽의 섬이 같아서 각각 530 m, 350 m, 180 m, 중앙 섬은 450 m라고 한다. 이 특징적인 동심원 구조 묘사 덕분에 아틀란티스 상상도는 대동소이한 편이다. 이 동심원으로 된 운하로 통하는 긴 운하가 약 9km 가량 이어졌다.
도시 주변부 전체는 평야로, 그 평야는 그 기슭이 바다에 닿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전체적으로 높이가 고른 직사각형 모양이었는데, 그 한 쪽의 길이가 3,000스타디온(약 532.8km)이었고, 바다에서 중앙을 따라 내륙으로 통과하는 한 쪽의 길이는 2,000스타디온(약 355.2km)이었네. [118a]
(…) 이 평야는 애당초 대부분이 곧고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이었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어서 빙 돌아가며 해자를 파 똑바르게 만들었지. 그런데 이 해자의 깊이와 폭과 길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들의 다른 위대한 성취와 더불어 손으로 이런 일까지 해냈다는 것을 자네들이 들으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거야. 그러나 우리는 들은 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즉, 이 해자는 하나같이 깊이가 1플레트론(29.6m)에 폭 1스타디온(177.6m)인데, 평야 주변 전체에 걸쳐 만들었기 때문에 전체 길이는 1만 스타디온(1776km)에 이르렀네. 이 해자들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받아 평야 주변을 감싸 돌면서 양쪽에서 도시를 통해 바다로 흘러 나가도록 했네. 그리고 그 위쪽 해자에서 대략 100푸스(29.6m)의 폭을 가진 수로들을 평야의 종단 방향으로 파 바다 쪽 해자로 다시 연결하게 만들었는데 이 수로들끼리는 각각 100스타디온(17.76km)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네. 게다가 그들은 종단 수로도 서로 잇고 도시와도 통하는 횡단 수로까지 만들어 실로 이런 수로를 통해 산에서 나는 목재들을 도시로 내려보냈던 것이고 그밖에 계절별 산물들을 배를 이용해 운반했던 것이네. [118c-e]
아울러 도시는 남쪽에는 바다를 끼고 맞은편 북쪽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광대한 평야를 끼고 있었다. 동서로 530km, 남북으로 350km로 족히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면적보다도 넓다. 그런데다가 그 평야의 둘레에 30m 깊이의 해자를 팠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평야는 애당초 대부분이 곧고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이었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어서 빙 돌아가며 해자를 파 똑바르게 만들었지. 그런데 이 해자의 깊이와 폭과 길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들의 다른 위대한 성취와 더불어 손으로 이런 일까지 해냈다는 것을 자네들이 들으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거야. 그러나 우리는 들은 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즉, 이 해자는 하나같이 깊이가 1플레트론(29.6m)에 폭 1스타디온(177.6m)인데, 평야 주변 전체에 걸쳐 만들었기 때문에 전체 길이는 1만 스타디온(1776km)에 이르렀네. 이 해자들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받아 평야 주변을 감싸 돌면서 양쪽에서 도시를 통해 바다로 흘러 나가도록 했네. 그리고 그 위쪽 해자에서 대략 100푸스(29.6m)의 폭을 가진 수로들을 평야의 종단 방향으로 파 바다 쪽 해자로 다시 연결하게 만들었는데 이 수로들끼리는 각각 100스타디온(17.76km)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네. 게다가 그들은 종단 수로도 서로 잇고 도시와도 통하는 횡단 수로까지 만들어 실로 이런 수로를 통해 산에서 나는 목재들을 도시로 내려보냈던 것이고 그밖에 계절별 산물들을 배를 이용해 운반했던 것이네. [118c-e]
그들은 (…) 막대한 부를 누렸으며 도시와 그 밖의 지역에서 공급받을 필요가 있었던 모든 것들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네. (…) 섬 자체가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네. 그러한 것들로서 우선, 딱딱한 것과 녹기 쉬운 광물이 채굴되었고 지금은 이름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당시에는 이름 이상의 것이었던
오레이칼코스가 섬 여러 지방에서 두루 채굴되었다네. 그것은 당시의 광물들 중에서 금을 제외하고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지. [114e]
(…) 그들은 가장 바깥쪽 육지 띠를 둘러싼 외벽은 마치 물감으로 칠해 놓은 것처럼 온통 둘러 가며 구리판으로 덮어씌웠고 안쪽의 외벽은 주석판으로, 그리고 아크로폴리스를 바로 둘러싸고 있는 외벽은 불처럼 빛나는 오레이칼코스로 덮어씌웠다네. [116b] (…) 그들은 신전의 바깥쪽 전체를 은으로 장식했으나 파풍(破風)[17]만은 예외로 해서 금으로 장식을 했네. 그리고 안쪽의 경우 상아로 된 천장 전체는 금이나 은이나 오레이칼코스로 꾸며 다채롭게 보이도록 했고, 그 밖에 벽과 기둥, 그리고 바닥은 모두 오레이칼코스로 덮었네. [116d]
포세이돈이 수호하는 대륙으로
오리할콘이라는
귀금속이 특산품이었으며, 다른 귀금속도 매우 풍부했다. 그러나 아틀란티스의 탐욕과 사치, 교만이 심해져 자신들의 강성한 국력을 믿고 아테네를 침략했다가 크게 패배했다. 이에 분노한 포세이돈이 화산을 폭발시키고
홍수를 일으켜서 바다 속으로 침몰시켰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가장 바깥쪽 육지 띠를 둘러싼 외벽은 마치 물감으로 칠해 놓은 것처럼 온통 둘러 가며 구리판으로 덮어씌웠고 안쪽의 외벽은 주석판으로, 그리고 아크로폴리스를 바로 둘러싸고 있는 외벽은 불처럼 빛나는 오레이칼코스로 덮어씌웠다네. [116b] (…) 그들은 신전의 바깥쪽 전체를 은으로 장식했으나 파풍(破風)[17]만은 예외로 해서 금으로 장식을 했네. 그리고 안쪽의 경우 상아로 된 천장 전체는 금이나 은이나 오레이칼코스로 꾸며 다채롭게 보이도록 했고, 그 밖에 벽과 기둥, 그리고 바닥은 모두 오레이칼코스로 덮었네. [116d]
3. 실존 여부
위치를 어디로 잡든간에 원전에 기록된 수치만큼의 규모와 등장 시기는 현실에 존재하기가 어렵다.크리티아스 본문 그대로의 거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지닌 것에 반해 아틀란티스에 관한 언급은 플라톤 전후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크리티아스》에 아틀란티스가 (플라톤으로부터) 9천 년 전, 즉 기원전 9300년 무렵에 아테네 침공 후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등, 설정이 현실적이지 않다.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권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조차 이때는 아직 거대 문명국이 등장하지 않았다.[18] 아무튼간에 문자 그대로 9000년 전에 그런 도시가 있을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인 테라 설에서도 9000년이라는 숫자는 와전된 것으로 본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솔론이 말년에 이집트를 견학한 것은 사실로 밝혀졌지만, 거기서 이집트의 고위 사제와 아틀란티스에 대한 담론을 나눴다는 것을 시사하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플라톤의 기록에 대해선 동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도 '허무맹랑하다'라고 비판했으며[19] 《영웅전》을 집필한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도 플라톤의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출했다. 단, 두 사람 모두 플라톤의 모든 기록의 진실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20]에서 학자들끼리 아틀란티스가 실존했는지에 관해 토론회가 열린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고대의 문서들이 소실되기 이전 시대 학자들조차도 아틀란티스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나는데,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를 얘기하게 된 경로는, 솔론이 이집트 사제로 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리스인 크리아티스에게 전해주었고, 크리아티스는 그의 손자에게, 그의 손자가 소크라테스의 친구여서 플라톤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도서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일하던 학자들도 아틀란티스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3.1. 기록 오류와 와전 가능성
9천 년이라는 시간은 아직까지 연구가 끝나지 않은 괴베클리 테페를 비롯하여 오늘날에도 인류 문명의 극초기를 상고하여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시대이고, 당대의 일반적인 사관에서는 신화와 다름없는 영역이었다. 또한 아틀란티스의 평야의 크기는 약 18만 9215 제곱킬로미터나 되며, 아틀란티스 평야를 둘러싼 운하의 길이는 1만 스타디온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약 1776 km에 해당하여 서울-부산 간 거리의 4곱절보다 길다. 운하의 깊이 역시 괴이할 정도로 거대하다. 약 100분의 1 정도라고 가정해야 산토리니 섬 정도로 추릴 수 있는데, 현대라도 쉽게 만들 수 없을 거대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이 아테네와의 전쟁에 패배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플라톤의 인용을 제외한 그 어디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류와 와전 가능성이 제기된다.우선 9천 년이 아니라 9백 년인데 번역 과정에서 오역이 발생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스인들이 100을 뜻하는 감겨진 로프 모양의 이집트 숫자를 1천을 뜻하는 연꽃 모양의 이집트 숫자로 착각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두 숫자가 착각할 만큼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또 하나의 추측은 당대 사초에서 이집트 연대의 계산법을 잘못 파악했을 가능성이다. 이집트의 연대 계산법은 달을 기준으로 하는 것과 해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있는데, 솔론이 개월수를 햇수로 잘못 알아들었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 아틀란티스의 멸망연대는 기원전 9500년에서 기원전 1340년으로 바뀌어 납득할 만한 수치가 된다. 다만 이쪽도 문제가 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아틀란티스가 멸망하기 전까지 꽤나 오랫동안 이집트나 아시리아, 수메르, 히타이트, 바빌로니아 등 여러 동방문명과 병립했단 소리인데, 이집트 등에서 아틀란티스라 생각함직한 세력을 언급한 기록이 전무하다.
사실 9천 년이라는 숫자는 고고학을 떠나 본 문헌 내에서도 상호 내용상의 모순을 일으킨다. 전작 《티마이오스》에서는 이집트가 아테네보다 천 년 늦은 8천 년 전에 건국되었다고 언급하며 아틀란티스의 침략 대상에 이집트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티아스》에서 말한 대로 9천 년 전에 전쟁이 있었다면 아틀란티스는 건국되기도 전의 이집트를 침략한 셈이 되어버린다. 역사가 단절된 별개의 두 이집트가 있었다고 하면 해결이 되기는 하지만 다소 부자연스럽다. 이 때문에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가 전작-후속작으로 이어지기는 해도 바로 이어서 저술된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21]
이에 관해서는 아래 미노스 문명 가설에서 인용된 《크리티아스》의 역주에서 더 자세히 다루었다.
3.2. 플라톤의 창작 설
3.2.1. 긍정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조지 오웰의 1984처럼, 플라톤이 당시의 아테네 사회를 풍자,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비유를 고안했다는 설로, 당대 전해진 여러가지 국가적 사건들과 멸망에 대한 전설을 조합해 아틀란티스라는 그럴싸한 나라가 존재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플라톤은 평생 아테네의 해군을 상당히 비난하던 사람이었다. 아테네의 군대는 중장보병에서 해군 중심으로 바뀌었는데, 해군 갤리선의 노잡이를 충당하기 위해 무산자(無産者)들을 동원해야 했고, 이 무산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얻어 민주주의가 성립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겨냥해 "아테네가 '악덕'에 차 있다." 하고 비난할 정도로 평생동안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해군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이런 배경에서 아틀란티스 전설을 기록한 플라톤의 저서《크리티아스》는 반(反) 민주주의 정서가 흐른다고 해석할 만한 여지가 있다.
- 《크리티아스》의 제목은 플라톤의 5촌 당숙 '크리티아스'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에 스파르타와 결탁해 30인 참주가 되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해군을 해체하며 무산자들을 탄압하다가 그 반발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에 죽은 독재자였다. 이런 사람의 이름을 따 제목을 지었다는 점에서 목적성을 의심할 수 있다.
- 크리티아스 이후 민주주의를 회복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맞서기 위해 해군을 재건하려고 한다. 페리안드로스는 부유층 1,200명을 모아 갤리선 함대를 구축하는 비용을 부담시키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이야기 속 아틀란티스의 함대도 딱 1,200척이다.
- 아테네의 반격에 몰리던 스파르타의 최후 잔존 함대는 코린토스만(灣)남부 헬리케의 오래된 포세이돈 신전 앞에서 지진과 해일에 휩싸여 전멸한 일이 있었다. 포세이돈의 분노 어쩌고 하는 아틀란티스 몰락 이야기가 연상될 수 있는 부분.
- 플라톤이 태어나던 무렵 아틀란테라는 섬이 지진과 해일로 두 동강이 난 사건도 있었다. 스파르타 함대의 전멸과는 별개로 아틀란테라는 섬이 아틀란티스가 물에 잠겨 사라졌다는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기타 자잘한 부분들로 비추어보면,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플라톤이 지어낸 허구이고, 특정 디테일들이 플라톤 개인의 反민주주의 성향을 시사하거나, 그러한 목적성이 없더라도 플라톤이 주워들은 이야기들로 짜깁기하여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아틀란티스 프로파간다설'의 요체이다. 아예 모든 걸 지어내면 금방 거짓이 탄로나겠지만 여러 사실들을 섞으면 호소력을 높일 수 있으므로[22] 그러한 의도로 짜깁기를 행했을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아니고 신화적 은유라는 설도 있다. 동방의 대륙 제국 페르시아의 정반대 국가( 안티테제)로 서방의 해양 제국 아틀란티스를 설정했다는 것이다.[23]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페르시아가 전제군주제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처럼 아틀란티스도 민주주의와 해군이 강조되는 것으로 설정한 것일 수 있다. 아래 언급하는 광대한 수치는 이 관점으로 보면 더 잘 설명이 가능하다. 어차피 상징적으로 설정한 '서방의 해양 대제국'이니 신화적 규모인 것이 더 자연스러운 셈이다.[24] 이 견해를 따르면 플라톤이 자기 조상을 걸고 맹세한 것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데, "조상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 자체는 사실일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 본인으로서는 믿기 힘들었을지 몰라도 고고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이를 부정할 명명백백한 증거도 없으니, 집안 대대로 전승되어 본인이 직접 전해들었다면 사실일 것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다.[25] 영어 위키백과 아틀란티스 문서는 이 관점을 개요로 최상단에 제시하며 실제 아틀란티스를 찾으려는 시도를 다소 허황된 것으로 치부하는 논조이다(2023년 11월 기준).
3.2.2. 부정론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 집안의 솔론과 크리티아스의 이름을 걸고 사실이라 강변했다. 물론 두 명 모두 이미 사망한 시점이므로 작정하고 조작하는 것이면 이름을 팔아먹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없었다. 플라톤은 이런 종류의 사기나 간단한 거짓말 조차 친 전력이 없으며, 심지어 플라톤은 그런 식으로 허구를 창작해내는 행위 자체를 '진실을 속이는 거짓'이라고 비난하며 혐오했고, 그 연장선에서 아예 '시인 추방론'을 주장했는데, 고작 효과도 불분명한 선동을 목적으로 자신이 혐오하던 창작 내지 날조를 했다는 것은 내로남불에 가까운 행위로 납득하기 어렵다. 이러한 행적을 종합할 때 아틀란티스의 진실 유무와 관계 없이 최소한 플라톤 본인은 진실이라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하라 사막 북부에서 서쪽으로)[26] 이어서 또 열흘의 노정을 거치면 다른 소금언덕과 물이 있고 그 주위에 사람이 산다. 이 소금언덕에 접해서 아틀라스란[27] 산이 있다. 이 산은 폭이 좁고 주위가 동그란 데다가 그 정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다고 한다. 겨울 여름의 구별 없이 그 꼭대기에서 눈이 녹을 새가 없으므로 고장의 주민은 이 산을 하늘의 기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곳 주민의 이름은 이 산의 이름을 따 아틀란테스인으로 불린다. 이 종족은 살아있는 동물을 먹지 않고, 또 꿈도 꾸지 않는다고 한다.
이 아틀란테스인까지는 나도 사막지대에 거주하는 주민의 이름을 들 수가 있으나 그 너머로는 나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사막지대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내지 그 밖에까지 미칠 것이다.[그리스어][영어]
헤로도토스 《 역사》 - 4. 멜포메네,[30] 755-756.[31]
헤로도토스 《
역사》에서도 '아틀라스'와 '헤라클레스의 기둥' 등의 지명이 나타나는 마을이 명시된다. 헤로도토스는 플라톤보다 60년 정도 전 시대 사람이므로[32] 플라톤의 저술의 영향을 받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사》에서의 묘사는 소략하여 플라톤이 묘사한 거대한 아틀란티스에는 전혀 못 미치지만 적어도 '
아틀라스'와[33] '헤라클레스의 기둥'과 관련된 종족 집단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위의 짜깁기 설에 따르자면 이 역시 짜깁기의 소재 정도로 쓰였으리라고도 짐작해볼 수 있다.이 아틀란테스인까지는 나도 사막지대에 거주하는 주민의 이름을 들 수가 있으나 그 너머로는 나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사막지대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내지 그 밖에까지 미칠 것이다.[그리스어][영어]
헤로도토스 《 역사》 - 4. 멜포메네,[30] 755-756.[31]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치가 너무 터무니 없다는 점은 위 프로파간다 설의 설득력을 다소 떨어뜨리는 감이 있다. 정말로 그럴 듯한 선전을 하려고 했다면 당연히 있을 법한 수치를 쓸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의 주 무대였던 에게 해에 필적할 만큼 커다란 데다 그런 섬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식의 이야기는 당시 그리스 사람들로서도 터무니 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9천 년 전이라는 시기도 그렇다. 고대 그리스 암흑시대보다 훨씬 이전 시기이니 지어내려면 마음껏 지어낼 수 있겠지만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사람들이 믿을 가능성도 별로 없다는 뜻이다. 당장 500년 전인 암흑시대도 잘 모르는데 9천 년 전의 일을,[34] 그것도 다른 사람 그 누구도 얘기하지 않고 플라톤 혼자 주장하는데 믿는 쪽이 오히려 바보에 가깝다. 아무리 당시에 판 구조론도 없었고 그간의 역사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고 해도 그런 것을 대중들이 믿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고, 실제로 플라톤의 수제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믿지 않을 정도였다. 이래서야 위 언급된 反민주주의적 사실들을 그대로 전하는 게 낫지 짜깁기해서 오히려 더 손해를 보는 수준이다. 당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아무개라면 관심을 끌려는 목적에서라도 부풀리기를 할 동인이 있겠지만[35] 플라톤은 당대에도 누구나 다 아는 지식인이었으니 굳이 거짓을 섞어서 자기 논지를 약화시킬 이유가 없다.
아래 산토리니 설에서는 9000년 → 750년 오역 (1달을 1년으로 잘못 보았다) 설을 채택했는데, 만약 플라톤이 지어낸 이야기거나 어디서 들은 얘기를 짜깁기해서 선전에 써먹었다면 플라톤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글 쓰기 전에 이미 그런 보정을 해서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을 만한 숫자로 썼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데에서 숫자만큼은 플라톤이 들은 대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할 수 있다.[36]
4. 위치 가설
4.1. 미노스 문명 산토리니 설
그러나 아틀란티스의 위치에 관한 여러 가지 주장들 중에는 매우 설득력 있는 논문으로 발표된 것도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는 아틀란티스가 지중해에서 지진으로 그 일부가 궤멸된 테라 섬(현재의 산토리니 섬)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1969년, 그리스의 고고학자 앙겔로스 갈라노풀로스(A. G. Galanopoulos) 교수가 처음으로 제기했다.[37] 그에 의하면, 아틀란티스는 미노스 문명의 일부이며, 기원전 1500년 에게해 남부 퀴크라데스제도의 테라 섬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로 궤멸되었다. 그 화산 폭발은 그리스의 섬들 대부분과 그리스 동부 및 크레타 섬 북부 연안 지대에도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 플라톤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폭발은 아테네에도 분명 심대한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플라톤은 9000년 전 아틀란티스가 아테네와 전쟁을 했다고 기술했지만, 그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가 그렇게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 시기는 플라톤보다 9000년 앞선 시기가 아니라 900년 앞선 시기인 기원전 1400년경으로, 미노스 문명이 영화를 누리고 있었던 시대와도 일치한다.
또, 그들은 아틀란티스가 "헤라클레스의 기둥의 바깥쪽에 있는 큰 섬"이라는 기술이 그것이 대서양에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전까지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지브롤터 해협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장소, 즉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불리는 구역이 존재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그 구역은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이며, 테라 섬은 그 미케네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를 가리켜 어디에서도 '대륙(ēpeiros)'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큰 '섬(neos)'이라고만 표현했다.(《티마이오스》 24e). 그것이 '리비아와 아시아보다 크다'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지리관에 근거한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에 필적할 만큼 크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테라 섬이 궤멸한 것은 아테네의 입법가 솔론이 살아 있었던 시기보다 약 900년 앞선 시기이다. 9000년 전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갈라노풀로스는 기록자들이 숫자를 잘못 써 10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필사자들은 100을 나타내는 이집트의 문자 '감긴 로프'를 1,000을 나타내는 이집트의 문자 '연꽃'으로 혼동했다고 한다. 확실히 플라톤이 가리키는 숫자는 모두 비정상적으로 크다. 아틀란티스 평야를 둘러싼 운하의 길이 1만 스타디온(약 1776km)은 현대 런던 둘레의 20배나 되고, 또 운하의 폭과 깊이는 각각 약 90m와 30m 정도로 너무 거대하다. 페리클레스 시절 그리스 선박의 크기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폭과 길이가 각각 9m와 3m인 규모의 운하가 훨씬 현실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로 세로 각각 355km X 533km로 기술된 직사각형 모양의 평야의 크기도 가로 세로 각각 36km X 53km가 되는 셈이므로 섬의 규모는 훨씬 작아진다. 실제로 현재 산토리니 섬에서 함몰된 부분에 100을 곱하면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 대륙의 둘레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이집트에는 해를 중심으로 연대를 산하는 방법 외에 달을 중심으로 연대를 계산하는 방법도 있었으므로, 이런 점을 고려하면 9000년은 9000개월일 수도 있다. 솔론이 개월 수를 햇수로 잘못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솔론이 활동하던 기원전 590년에서 9,000개월(750년)을 거슬로 올라가면 기원전 1340년이 되는데, 이는 결국 산토리니 섬에 발달해 있었던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시기와 매우 근접해 있다. 실제, 당시 미노스인들은 해상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고 궁전을 장식하는 릴리프나 벽화 및 토기의 도안에는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에 대해 기술한 것과 유사한 수소 사냥 광경이 그려져 있었다. 당초 산토리니 섬은 미노스 문명과는 동떨어진 변경의 땅으로 여겨진 탓에, 낙원으로 묘사된 아틀란티스와는 많이 어긋난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1967년 그리스의 고고학자 마리나토스(S. Marinatos)는 산토리니 섬에서 크노소스에 버금가는 고대 청동기 시대 유적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아틀란티스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과 유사한 환상 수로와 직선 수로가 이곳에서도 역시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처럼 많은 학자들이 미노스 문명은 아틀란티스인이 건설했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어 아틀란티스 섬이 테라 섬이라는 주장은 나날이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다. 어쨌든 산토리니 섬의 궤멸이 아틀란티스 전설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는 여전히 심각한 의문들이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 필사자들이 이집트 숫자를 오해하기에는 100과 1,000을 나타내는 상형문자가 시각적으로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또, 1977년에 독일 과학자들이 화산 분출물들을 분석한 결과, 산토리니 섬의 폭발은 크레테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근에는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것은 지진 때문이 아니라 지진이 일어난 후 약 1세기 뒤에 있었던 미케네군의 공격 때문이라는 주장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크리티아스》 이정호 옮김 2판 1쇄 112-115쪽[38]
또, 그들은 아틀란티스가 "헤라클레스의 기둥의 바깥쪽에 있는 큰 섬"이라는 기술이 그것이 대서양에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전까지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지브롤터 해협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장소, 즉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불리는 구역이 존재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그 구역은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이며, 테라 섬은 그 미케네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를 가리켜 어디에서도 '대륙(ēpeiros)'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큰 '섬(neos)'이라고만 표현했다.(《티마이오스》 24e). 그것이 '리비아와 아시아보다 크다'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지리관에 근거한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에 필적할 만큼 크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테라 섬이 궤멸한 것은 아테네의 입법가 솔론이 살아 있었던 시기보다 약 900년 앞선 시기이다. 9000년 전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갈라노풀로스는 기록자들이 숫자를 잘못 써 10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필사자들은 100을 나타내는 이집트의 문자 '감긴 로프'를 1,000을 나타내는 이집트의 문자 '연꽃'으로 혼동했다고 한다. 확실히 플라톤이 가리키는 숫자는 모두 비정상적으로 크다. 아틀란티스 평야를 둘러싼 운하의 길이 1만 스타디온(약 1776km)은 현대 런던 둘레의 20배나 되고, 또 운하의 폭과 깊이는 각각 약 90m와 30m 정도로 너무 거대하다. 페리클레스 시절 그리스 선박의 크기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폭과 길이가 각각 9m와 3m인 규모의 운하가 훨씬 현실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로 세로 각각 355km X 533km로 기술된 직사각형 모양의 평야의 크기도 가로 세로 각각 36km X 53km가 되는 셈이므로 섬의 규모는 훨씬 작아진다. 실제로 현재 산토리니 섬에서 함몰된 부분에 100을 곱하면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 대륙의 둘레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이집트에는 해를 중심으로 연대를 산하는 방법 외에 달을 중심으로 연대를 계산하는 방법도 있었으므로, 이런 점을 고려하면 9000년은 9000개월일 수도 있다. 솔론이 개월 수를 햇수로 잘못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솔론이 활동하던 기원전 590년에서 9,000개월(750년)을 거슬로 올라가면 기원전 1340년이 되는데, 이는 결국 산토리니 섬에 발달해 있었던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시기와 매우 근접해 있다. 실제, 당시 미노스인들은 해상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고 궁전을 장식하는 릴리프나 벽화 및 토기의 도안에는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에 대해 기술한 것과 유사한 수소 사냥 광경이 그려져 있었다. 당초 산토리니 섬은 미노스 문명과는 동떨어진 변경의 땅으로 여겨진 탓에, 낙원으로 묘사된 아틀란티스와는 많이 어긋난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1967년 그리스의 고고학자 마리나토스(S. Marinatos)는 산토리니 섬에서 크노소스에 버금가는 고대 청동기 시대 유적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아틀란티스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과 유사한 환상 수로와 직선 수로가 이곳에서도 역시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처럼 많은 학자들이 미노스 문명은 아틀란티스인이 건설했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어 아틀란티스 섬이 테라 섬이라는 주장은 나날이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다. 어쨌든 산토리니 섬의 궤멸이 아틀란티스 전설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는 여전히 심각한 의문들이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 필사자들이 이집트 숫자를 오해하기에는 100과 1,000을 나타내는 상형문자가 시각적으로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또, 1977년에 독일 과학자들이 화산 분출물들을 분석한 결과, 산토리니 섬의 폭발은 크레테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근에는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것은 지진 때문이 아니라 지진이 일어난 후 약 1세기 뒤에 있었던 미케네군의 공격 때문이라는 주장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크리티아스》 이정호 옮김 2판 1쇄 112-115쪽[38]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테라 섬( 산토리니 섬)[39] 이야기라는 설이다. 1969년 대두된 학설로서 비교적 최근까지 가장 통설로 통하고 있다. 이 설의 강점은 다음과 같다.
- 실제 유적이 존재한다. - 가장 강력한 근거이다.
- 아테네와 이집트를 가르는 에게 해에 위치해있어 아테네, 이집트와의 전쟁을 설명하기 좋은 적절한 위치에 있다.
- 침몰 원인을 화산 폭발로 설명할 수 있다. 산토리니섬은 실제로 거대한 화산 지형이며 고대에 대폭발한 적이 있다. 섬의 형태 자체도 지금의 지형은 과거의 대폭발로 일부분이 바다 속으로 무너져내린 것으로, 고대에는 좀 더 원형 형태 지형이었다.
다만 위에서 보듯 이 학설은 전승에서의 숫자가 와전됐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성립한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원전의 숫자가 터무니없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바이므로 무언가 오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렇게 지나치지 않다.
지브롤터 해협 안에 있는 미노아 문명이 왜 아틀란티스냐는 반론도 있지만, 위 인용에서도 보듯 고대 그리스에서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여러 곳이 있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스의 기둥' 중 하나로 여겨진 미케네라 상정하면[40] 산토리니도 그 너머가 된다.
산토리니 섬이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잘 알려져있던 에게 해에 위치해있다는 점은 위 2번 요소를 설명하기 좋지만 반대로 의아한 점도 된다. 다들 잘 알고 있는 위치라면 플라톤도 들으면서 산토리니일 것이라고 짐작을 했을 텐데 전혀 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다만 고고학이 발전하기 이전 시기에는 멸망한 지 몇 백 년만 지나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을 수 있으니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41]
4.2. 북해 도거랜드 설
도거랜드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대략적인 연대는 기원전 1만 8천 년부터 5500년까지로, 실제로 도거랜드에 해당하는 지역들에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오래전에 이 지역에 존재한 문화권이 있음이 밝혀져, 이곳이 바로 아틀란티스가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네이버 기사#, 내셔널지오그래픽 기사# 이후 해수면이 점차 높아지면서 도거랜드 지역이 완전히 수몰돼 현재처럼 되었다는 것.
아틀란티스 도거랜드설은 아틀란티스 전설에서 말하는 수몰이 바로 도거랜드가 물 밑으로 가라앉은 것을 가리키고, 아틀란티스 문명도 이 도거랜드 어딘가에[42] 존재했다고 추정하는 가설이다.
2014년엔 이 지역이 엄청난 쓰나미로 잠겼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서, 전설상의 아틀란티스와의 연계성이 더욱 주목받았다. 네이버 기사#
4.3. 스페인 타르테소스 설
현 스페인의 카디스(Cádiz)와 헤레스(Jerez de la Frontera) 근방에 위치했던 타르테소스 왕국이 아틀란티스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타르테소스 관련 기록이 나오는 것은 기원전 600년 정도로, 해당 왕국이나 그 전신의 문명을 상정한다 해도 시기가 크게 다르고 지형이나 관련 전설 내용과 부합하는 것도 적어, 지브롤터 해협 근방에 있다는 것 외에는 타당성이 크게 떨어진다.아틀란티스 전설을 다룬 일본 만화 '일리어드'와 일본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 아틀란티스 침몰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타르테소스 문명을 이룩했다는 주장.
4.4. 모로코 수스마사(Souss-Massa) 설
독일의 컴퓨터 전문가 미하엘 휘프너(Michael Hübner, 1966~2013)가 제기한 설.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 나온 지형적 특징을 근거로 아테네에서 반경 4700 km 이내의 지형을 400개 구역으로 추리고, 지형적 특징이 일치하는 만큼 점수를 매겨 가장 점수가 높은 지역을 뽑아냈다. 실제로 크리티아스에서 등장하는 동심원 모양의 지형이 꽤 많았고, 크기도 플라톤이 말하던 것에서 10%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그러나 해당 지역이 모로코 국왕의 개인 소유지였기 때문에 발굴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고, 모로코 국왕도 발굴에 큰 관심이 없으며, 이 설을 연구하던 휘프너마저 2013년 불의의 사고로 인해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진실 여부를 말할 수가 없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영어나 설명글 참조.
실제로 모로코에 많이 거주하는 베르베르족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곳을 섬으로 부른다.
4.5. 모리타니 사하라의 눈 설
자세한 내용은 사하라의 눈 문서 참고하십시오.4.6. 그 밖의 주장
* 대항해시대에는 대서양에 위치했으리라는 가설이 유행했다. 위 이미지는 1678년 대서양에 아틀란티스를 표시한 지도이다(상단이 남쪽). 개요에서 짧게 다루었듯이 아틀란티스와 대서양의 유럽권 원어인 Atlantic ocean은 유래가 아틀라스로 동일하기 때문에[43] 연상시키기 쉬운 면이 있다.
더 나아가 아메리카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믿음이 널리 퍼졌던 것과는 별개로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메리카가 접촉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44]
- 유사역사학자 그레이엄 핸콕을 위시한 자칭 신고고학파들이 주장한 것으로, 남극이 아틀란티스였다는 주장이 있다. 1만여 년 전에는 남극이 빙하에 덮여 있지 않았고 남대서양에 있어서 그곳에 초문명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남극이 눈에 뒤덮인 시기나 그리스와의 거리로 봤을 때 전혀 신빙성이 없다. 비슷하게 남미까지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다.[45] 혹자는 미국이 옛 아틀란티스 자리에 재건된 국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 바하마 비미니제도라는 설도 있다. - 넷플릭스 고대의 아포칼립스 4편 침수된 세계의 유령편
-
에드거 케이시(1877-1945)의 최면 리딩을 분석한 지나 서미나라 박사의 『윤회』(파피에 p.116)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무튼 케이시의 리딩을 긍정한다면 아틀란티스는 명백히 존재했다.
케이시에 따르면 피라미드 속의 아직 열리지 않은 어떤 방이 언젠가는 이 아틀란티스의 역사와 문명에 관한 모든 기록을 밝혀줄 것이라고 한다. 그 기록들은 이 저주받은 대륙의 주민 일부가 기원전 약 9,500년 무렵 제3차, 바로 최후의 대홍수에 휩쓸렸을 때 이집트로 피난을 하면서 가지고 간 것이라고 한다.
케이시는 또 플로리다, Florida 주 마이애미Miami의 비미니(Bimini) 섬이 옛날에 아틀란티스의 산봉우리였다고 한다.
그는 그 지점 해저에는 아틀란티스 시대에 태양 에너지를 모아 무한하게 동력을 공급해주는 장치였던 수정이 설치된 놀라운 사원이 가라앉아 있다고 했다. 리딩에 따르면 아틀란티스는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훨씬 높은 과학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것 같다. 전기·라디오·텔레비전·비행기·잠수함·태양과 원자 에너지의 동력화 등 그들의 과학 기술은 엄청나게 발달해 있었다. 그들은 현대의 것보다 훨씬 효율이 높은 난방·조명·수송 기술을 누렸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각자의 자유이지만 매우 흥미로운 화제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이것을 진지하게 살펴본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아틀란티스는 그 거대한 힘을 함부로 썼기 때문에 파멸했다.”라고 라이프 리딩이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틀란티스에서는 전기 에너지나 심령 에너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최면술을 성욕의 만족이나 남을 강제로 노동시키기 위해 이용했으며, 그 때문에 인간은 극도의 타락에 빠졌다는 것이다.
- 중남미 일대가 과거 아틀란티스였거나 옛 중남미 문명의 문화들이 아틀란티스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가설도 있다.
[1]
라틴어로는 Atlantis(단수 주격) - Atlantidis(단수 속격)으로 활용되는
여성명사로 처리한다.
[2]
반면
일리아스 같은 서사시는 애초부터
신이 개입하는 등 어느 정도 허구적인 창작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그게 실화라고 믿었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100% 사실일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3]
아래에서 보듯 산토리니 섬 가설이 그나마 가깝다. 다만 이 역시 문헌의 묘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4]
여담으로
대서양을 뜻하는 영어 단어 'atlantic ocean'도 마찬가지로 아틀라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북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맥 역시 아틀라스의 이름을 딴 지명 중 하나이다.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이 대서양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 아래 아틀란티스의 위치 가설 중 대서양을 끼고 있는 것들도 몇몇 있다.
[5]
사실
무 대륙과
레무리아는 근대 시기 이후에나 생겨난 이야기로 아틀란티스에 비하면 전승의 역사가 매우 짧다.
[6]
이것은
지구과학적으로 '남반구에도
북반구와 비슷한 크기의 대륙이 있어야
지구의
무게중심이 맞을 것이다.'라는
(오늘날 폐기된) 과학 이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초고대문명설 따위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7]
일례로 《크리티아스》의 아틀란티스는 9000년 전에 이웃국과
전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묘사되는데, 이는 현재 알려진 문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한 것이다. 역사가 길기로 유명한 그
고대 이집트의
초기 왕조도 플라톤 시기로부터 고작(?) 3000년 전이다.
[8]
한편 종종 같이 언급되는
무 대륙과
레무리아는 초기에 전승될 때부터 대륙이었다.
[9]
잘 알려진 대로
섬과
대륙의 현대적 기준은
그린란드로, 그린란드는 그레이트브리튼 섬보다 약 10배 정도 크다.
[10]
번역: 크리티아스(2020), 아카넷, 이정호 역, 30쪽.
[11]
유희왕 듀얼몬스터즈에 나오는
전설의 삼기사가 바로 플라톤의 이 3부작에서 따온 것이다.
[12]
현대의
자연과학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는 작품이다. 실제로
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인 '부분과 전체'의 첫 장에는 자신이 젊은 시절에 '티마이오스'에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며, 마지막 장 제목은 아예 '
소립자와 플라톤 철학'으로, 자신의 연구와 《티마이오스》의 우주관을 총체적으로 고찰한다.
[13]
이는 노년의 플라톤이 최후의 대작인 《법률》Nómoi의 집필에 전념하고자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에 《법률》도 출간되지 못했다. 플라톤은 80세에 사망했는데 《법률》은 이때 내용상으로는 완결되었으나 퇴고 과정을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14]
여기서 사제는 물로 인한 멸망으로
데우칼리온 신화를 언급하며, 불로 인한 멸망으로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의 신화를 인용한다.
[15]
아틀란티스의 지배자
[16]
상기 현대
미터법 환산은 번역서 원문을 따른 것이다.
[17]
지붕 옆에 붙이는 🔺 모양의 판. 박풍, 박공이라고도 한다.
[18]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괴베클리 테페라는 기원전 9000년대의 건축물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종교로 뭉쳐진 마을이지 이때부터 거대 문명이 발생한 게 아니다. 다만 2021년 조사결과 괴베클리 테페 주변지역에서도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규모의 신전이 즐비하고 곡식을 빻는데 사용한 맷돌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집단이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19]
아틀란티스(동음이의어) 문서에서 다루듯 만화
히스토리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인공
에우메네스에게 아틀란티스 설을 비판하는 대사가 1컷 나온다.
[20]
화재 이전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21]
아카넷 출판사 번역(2020)의 61쪽 주석을 참고.
[22]
현실의
사기꾼처럼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이유로 어느 정도는 진실을 섞어서 거짓말을 할 때가 많다.
[23]
여담으로 서방 + 거대한 영토 + 해양국가 + 민주주의 등의 이미지는 오늘날
미국과 잘 맞는다. 동방 전제군주 제국의 안티테제 설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그 안티테제가 미국의 형태로 실현된 셈이다. 서방 세계는 오랫동안 동방 전제군주국과 대조되는
고대 그리스 시대를 강조하고 부각해왔으니 결국에 동방 제국의 안티테제로 발전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24]
비슷한 예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서
트로이 전쟁 자체는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으나 일리아스에서 묘사된 수치는 과장 혹은 와전됐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25]
언뜻 생각하기에 플라톤처럼 합리주의의 대명사인 사람이 아틀란티스 전설처럼 믿기 어려운 것을 믿었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근대 인쇄 시대 이전에 구전 전통의 무게는 매우 강력했다. 사실 한
가문의 체제나 관습이란 명문화된 것이 아니라 대대로 구전되어오는 것이다. 그런 문화 속에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에서 계속 전해져온 이야기이니 어지간해서는 거짓말일 리 없다'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정보화 시대인 오늘날에는 워낙에 떠도는 낭설이 많으니 그런 얘기를 믿는 사람이 바보지만, 인쇄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과거로부터 전해져온 정보를 전할 수 있는 집단과 매체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26]
이 앞 즈음에
이집트 서부의 유명한
오아시스 도시인
시와가 언급되기에 이 대목에서 설명하는 지역이
북아프리카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암몬-아우길라-가라만테스-아타란테스-아틀란테스로 이어진다.
[27]
그리스신화의
아틀라스와의 관계는
베르베르어로
산을 '아드랄'이라고 하기 때문에 음이 닮은 데서 왔을 것이란 설이 있다(인용 원문 번역자 주).
[그리스어]
μετὰ δὲ δι᾽ ἀλλέων δέκα ἡμερέων ἄλλος κολωνὸς ἁλὸς καὶ ὕδωρ, καὶ ἄνθρωποι περὶ αὐτὸν οἰκέουσι. ἔχεται δὲ τοῦ ἁλὸς Τούτου ὄρος τῷ οὔνομα ἐστὶ Ἄτλας, ἔστι δὲ στεινὸν καὶ κυκλοτερὲς πάντη, ὑψηλὸν δὲ οὕτω δή τι λέγεται ὡς τὰς κορυφὰς αὐτοῦ οὐκ οἶά τε εἶναι ἰδέσθαι. οὐδέκοτε γὰρ αὐτὰς ἀπολείπειν νέφεα οὔτε θέρεος οὔτε χειμῶνος. τοῦτο τὸν κίονα τοῦ οὐρανοῦ λέγουσι οἱ ἐπιχώριοι εἶναι. ἐπὶ τούτου τοῦ ὄρεος οἱ ἄνθρωποι οὗτοι ἐπώνυμοι ἐγένοντο· καλέονται γὰρ δὴ Ἄτλαντες. λέγονται δὲ οὔτε ἔμψυχον οὐδὲν σιτέεσθαι οὔτε ἐνύπνια ὁρᾶν. Μέχρι μὲν δὴ τῶν Ἀτλάντων τούτων ἔχω τὰ οὐνόματα τῶν ἐν τῇ ὀφρύῃ κατοικημένων καταλέξαι, τὸ δ᾽ ἀπὸ τούτων οὐκέτι. διήκει δ᾽ ὦν ἡ ὀφρύη μέχρι Ἡρακλέων στηλέων καὶ τὸ ἔξω τουτέων.
#
[영어]
Once more at the distance of ten days' there is a salt-hill, a spring, and an inhabited tract. Near the salt is a mountain called Atlas, very taper and round; so lofty, moreover, that the top (it is said) cannot be seen, the clouds never quitting it either summer or winter. The natives call this mountain "the Pillar of Heaven"; and they themselves take their name from it, being called Atlantes. They are reported not to eat any living thing, and never to have any dreams. As far as the Atlantes the names of the nations inhabiting the sandy ridge are known to me; but beyond them my knowledge fails. The ridge itself extends as far as the Pillars of Hercules, and even further than these.
#
[30]
멜포메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학예의 아홉 여신들인
무사이 중 한 명이다. 《
역사》는 총 9권 구성이며 각 권에는 아홉 여신들의 이름이 각각 붙어있다.
[31]
역사(2023), 박현태 역, 동서문화사.
[32]
헤로도토스가 죽은 즈음(기원전 420년 경)에 플라톤이 태어났다.
[33]
사하라의 눈 문서에서 보듯 '아틀라스'라는 고유명사 자체가 북서아프리카에서 자주 출현한다. 위 번역서 주석에서도 보듯 '아틀라스 산' 역시 이 일대에서 쓰이는
베르베르어에서 왔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34]
사실 9000년 전의 일은 플라톤 시대로부터 2500년이 지나
고고학적 지식이 대폭 확장된 현대인들도 확실하게 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수메르 문명이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이다. 그 이전에는
문자를 지닌
문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전의 인류 행적은 오로지
유물로 추측할 뿐이다.
[35]
실제로
동방견문록 등 일반인의 답사기는 이러한 이유로 조금씩은 부풀려지는 편이다.
[36]
위 본문에서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믿기지 않겠지만 들은 대로 쓰겠다"라고 밝혔다. 헤로도토스 역시 "역사"를 저술하면서 본인 스스로는 믿기지 않지만 들은 그대로 적었다고 밝히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37]
책 속 주석: Galonopoulos. A. G. & E. Bacon "Atlantis : The truth behind the legend", Nelson, London, 1969.
[38]
2020년판은 163-167쪽이다.
[39]
테라가 미노스 문명의 일부이다 보니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가설이 말하는 곳은
크레타가 아니라 테라이다.
[40]
혹은
펠로폰네소스 최남단의 라코니아 만 역시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만의 모양새가 딱
지중해를 향해 열려있기 때문이다(영문 위키백과 참고).
[41]
일례로,
말리 제국의 번성한
대학 도시였던
팀북투는 멸망은커녕 말리 제국이 쇠퇴한 후에도 멀쩡히 유지되던 도시이지만,
중세 이후로
유럽인과
중동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전설의 도시로 취급받았다. 실크로드 시기에 멀쩡히 국제교역망에 편입되어 있던
일본 역시 실크로드가 끊어지자 황금의 섬 지팡구 전설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42]
주로 위 사진 속 Dogger Bank 구역을 뜻한다.
[43]
단어 구조로만 보면
인도(India) -
인도양(Indian ocean)과 크게 다르지 않다.
[44]
여담으로 현재 역사상으로 밝혀진 가운데 아메리카와 가장 일찍 접촉한
유럽인은
바이킹이다.
10세기 경 개척한
빈란드가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즈음이라고 한다.
[45]
이집트가 남미와
코카인 무역을 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고대 이집트의 유적지를 발굴하던
이집트인 인부들이 코카인을 피웠던 흔적을 오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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