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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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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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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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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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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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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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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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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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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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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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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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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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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07070><colcolor=#ffffff>
파일:Bundesarchiv_B_145_Bild-F057884-0009,_Willy_Brandt.jpg
출생 1913년 12월 18일
독일 제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뤼베크
사망 1992년 10월 8일 (향년 78세)
독일연방공화국 라인란트팔츠 주 운켈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
[[노르웨이|]][[틀:국기|]][[틀:국기|]](1940~)
재임기간 제4대 연방총리
1969년 10월 21일 ~ 1974년 5월 7일(4년 28주 3일)
서명
파일:빌리 브란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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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70707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욘 하인리히 묄러 (1887년 출생 1958년 사망)
어머니 마르타 프람 (1894년 출생 1969년 사망)
배우자 카를로타 토르킬드센 (1941년 결혼, 1948년 이혼)
루트 브란트 (1948년 결혼, 1980년 이혼)
브리짓 시바커 (1983년 결혼)
자녀 장녀 닌자 브란트 (1940년 출생)
장남 피터 브란트 (1948년 출생)
차남 라스 브란트 (1951년 출생)
삼남 마티아스 브란트 (1961년 출생)
학력 요하네움 고등학교 ( 중퇴)
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 (합격)
종교 개신교
소속 정당

약력 세계 민주 사회주의 단체 서기장
베를린 연합군 관리 위원회 노르웨이 대표단 공보 담당
사회민주당 베를린 대표
서베를린 시의원
서베를린시의회 의장 (1955년 1월 11일 ~ 1957년 10월 2일)
제4대 서베를린 시장 (1957년 10월 3일 ~ 1966년 11월 30일)
제9대 연방참의원 의장 (1957년 11월 1일 ~ 1958년 10월 31일)
제3대 사회민주당 대표 (1964년 2월 16일 ~ 1987년 6월 14일)
제4대 외무장관 (1966년 12월 1일 ~ 1987년 10월 20일)
제5대 부총리 (1966년 12월 1일 ~ 1969년 10월 22일)
제4대 연방총리 (1969년 10월 21일 ~ 1974년 5월 7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대표 (1976년 ~ 1992년)
유럽의회 의원 (1979년 ~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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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가족2.2. 사회주의 활동2.3. 정계 진출2.4. 연방총리 시절2.5. 기욤 간첩 사건과 성추문2.6. 퇴임 후 (사민당 총재, SI 의장)
3. 사생활4. 어록5. 소속 정당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bpb.de/174259-st-original.jpg
Jetzt wächst zusammen, was zusammengehört.
원래 하나였던 것이, 이제 함께 성장한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포스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을 방문하여.
독일 사회민주당(SPD) 소속의 독일연방공화국( 서독)의 정치인. 서독의 제4대 총리를 지냈다.

독일연방공화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정을 통해 원내 제1당 당수를 제치고 총리로 등극한 사례가 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동독, 소련, 동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골자로 하는 '동방정책'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출생 및 가족사가 워낙 복잡한 관계로 그의 가족사는 그가 정계에 진출한 1949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빌리 브란트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내용을 대부분 철저히 함구했고, 지인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켰다.

때문에 적어도 브란트가 정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가족사의 상당 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었고, 무성한 의문과 의혹을 낳기도 했다. 빌리 브란트가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처음으로 소상히 밝힌 것은 그가 사망하기 3년 전인 1989년 자서전을 통해서였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친부에 대해 언급했고, 또 자신의 본래 성을 물려주었던 루트비히 프람이 사실은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는 의붓외할아버지였다는 사실 또한 여기서 밝혔다. 이후 그의 사후 언론에 의해 구체적인 사실이 일부 탐사되기도 했는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달리 미화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특히 1948년 이전 그의 행적 및 가족사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빌리 브란트 본인의 진술 및 저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정계 입문 시절부터 그가 은퇴한 이후까지 남긴 다양한 진술과 증언, 저서들에는 상충되는 내용들도 있다. 그의 충직한 전기 작가들조차도 그가 진술한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2.1. 출생과 가족

1913년 12월 13일 북독일의 항구도시 뤼베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빌리 브란트의 생물학적 친아버지는 함부르크 출신의 욘 하인리히 묄러(John Heinrich Möller)였다. 빌리 브란트는 친아버지인 묄러와 평생 만난 적이 없다. 그의 친부 묄러는 빌리 브란트가 태어나자마자 도망치듯 뤼베크를 떠나 고향 함부르크로 돌아갔으며, 거기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2] 그의 친아버지 욘 묄러는 자신의 혼외 아들인 빌리 브란트에게 평생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한번도 혼외 아들을 찾지 않았다.[3] 빌리 브란트 역시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친아버지를 증오했고 친부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빌리 브란트는 출생 후 1914년 2월 성로렌츠 교회에서 영아세례를 받았으나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당안에서 세례를 받지 못했다.[4]

빌리 브란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프람(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 Herbert Ernst Karl Frahm)이었는데, 사생아였기에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을 수 없어 외할아버지의 성인 프람(Frahm)을 물려 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니 마르타도 사생아 출신이고, 외할아버지조차 어머니의 친부가 아닌 계부였던 관계로 프람이라는 성은 그와는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1914년 이후 4살 때까지 빌리 브란트는 편모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 마르타는 가게의 현금출납원으로 일을 나갔기 때문에 어린 시절 빌리 브란트는 주로 이웃집에서 키워졌다고 한다.

1918년 말부터 빌리 브란트는 (의붓) 외할아버지인 루트비히 프람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가정은 매우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다. 루트비히 프람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메클렌부르크의 한 영지에서 농노[5]와 마부로 일하면서 빌리 브란트의 외할머니인 빌헬미네 에베르트(Wilhelmine Ewert → 빌헬미네 프람)와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결혼했다. 루트비히 프람은 자녀가 없었지만, 빌헬미네는 프람과 만나기 전에 19살 때 낳은 사생아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바로 빌리 브란트의 친어머니 마르타였다. 루트비히와 빌헬미네가 결혼하면서 프람은 마르타의 계부가 되었고, 마르타는 계부의 성을 따라 마르타 프람이 되었다. 그런데 마르타 역시 10대 후반의 나이에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가 빌리 브란트였다. 빌리 브란트는 1913년에 태어났고,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친 외할머니 빌헬미네는 사망했다. 그리고 1914년 전쟁이 터졌고, 루트비히 프람은 징집되어 전장에 나갔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트비히 프람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다. 마르타는 돌아온 계부 루트비히 프람의 집에서 아들인 헤르베르트 프람(빌리 브란트)와 함께 살기로 했다. 루트비히 프람과 빌헬미네는 마르타가 세 살 때 결혼했으며, 이미 마르타가 한 살 때 관계하여 마르타의 남동생을 낳았다. 때문에 마르타는 어린 시절부터 계부 루트비히 프람과 함께 살아왔었다. 브란트 입장에서는 한살 때 헤어진 프람을 기억할 수는 없었고, 다섯살이 되어 전장에서 돌아온 외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셈이었다. 그런데 루트비히 프람은 제대한지 석달 후인 1919년 1월 뤼베크에서 도라 살만이라는 여자와 재혼했다. 도라 역시 사민당 지지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루트비히 프람, 도라 살만, 마르타 프람, 헤르베르트 프람(빌리 브란트) 이렇게 네 사람이 동거를 하게 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루트비히 프람이 진짜 외할아버지라고 믿었지만, 도라 살만이 친 외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라 살만에게는 한번도 할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고 아줌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빌리 브란트는 의붓 외할아버지인 루트비히 프람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사실 루트비히 프람과 빌리 브란트의 나이 차이는 38세여서 할아버지-손자 나이차가 아니고 아버지-아들 나이 차이에 가까웠다. 어머니 마르타가 19살 때 빌리 브란트를 낳았고 마르타의 어머니 빌헬미네 역시 이른 나이에 마르타를 사생아로 출산했기 때문. 빌리 브란트는 어린 시절 루트비히 프람을 'Papa'라고 불렀다. 그는 자서전에서 친부가 없었던 자신에게 루트비히 프람이 대신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예를 들어 학교 성적표의 부모 확인 사인을 받아야 할 때 루트비히 프람이 아버지란에 서명을 했다. 하지만 루트비히 프람과의 관계가 원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빌리 브란트는 루트비히 프람이 4년 동안 전쟁에 나가 있다가 돌아온 진짜 친외할아버지인 줄 알고 자랐다.

루트비히 프람은 노동자(공장의 운전사)로 일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열성 행동 당원이었고, 자신이 다니던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마르타와 그의 아들인 빌리 브란트에게 어린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주입시켰으며 그들이 청소년 시절부터 SPD에 가입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루트비히 프람은 어린 빌리 브란트에게 SPD의 역사에 대해 자주 설명했으며, 빌리 브란트가 훌륭한 사민당 인재가 되길 바랬다. 브란트가 일곱 살 때 루트비히 프람이 일하는 공장 주변의 빵집의 빵을 바라보고 있자 공장의 관리인이 그걸보고 브란트에게 빵을 사주었다고 한다. 루트비히 프람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화를 내며 빵을 돌려주라고 말했다. 루트비히는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어떤 선물도 맏지 않는 거야! 우리는 적들로부터 매수당해서는 안돼! 우리 노동자는 적선을 받는 거지가 아니야!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원하는 것이지 선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당장 빵을 돌려주라고 말했고, 이는 일곱 살짜리 브란트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람과 브란트는 갈등이 컸다. 이런 관계는 빌리 브란트에게 유년 시절 큰 결핍을 가져다 주었으며, 올바른 인격 형성의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브란트는 유년 시절 기댈 곳을 간절히 찾았지만 기댈 곳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여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억압하자 루트비히 프람은 깊은 좌절에 빠졌고, 같은 시기 빌리 브란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을 탈출하여 스칸디나비아에서 도피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34년 도피처에서 빌리 브란트는 외삼촌[6]으로부터 루트비히 프람이 자신의 친외할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다. 1935년 나치의 집권으로 실의에 빠진 루트비히 프람이 결국 자살했다. 빌리 브란트는 스칸디나비아에 도피해 있다가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빌리 브란트의 친어머니 마르타 역시 열성적인 사회민주당(SPD) 행동 당원이었다. 마르타는 주 6일간 일을 해서 일요일에나 빌리 브란트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일요일에도 그녀는 당의 모임과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사민당 동아리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나중에 아들 헤르베르트(빌리 브란트)를 데리고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빌리 브란트는 훗날 어린 그에게 어머니와 외출하여 사민당 집회 참석하는 것이 기분 전환이 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빌리 브란트가 14세 때인 1927년 마르타는 에밀 쿨만이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쿨만은 벽돌공이었고, 역시 사회민주당(SPD)원이었다. 마르타와 빌리 브란트는 쿨만과 그의 자녀와 함께 재혼가정 아닌[7] 재혼가정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결혼함에 따라 이름이 마르타 쿨만으로 바뀌었고, 헤르베르트 프람(빌리 브란트)만이 쿨만 가족 중에서 다른 성을 쓰게 되었다. 1928년 마르타와 쿨만 사이에서 이부형제인 귄터 쿨만이 태어났다. 빌리 브란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편모가정과 재혼가정에서 자라며 애정 결핍과 아버지가 없다는 박탈감으로 많은 방황을 했던 시기라고 밝혔다. 어머니가 재혼가정을 꾸린지 2년 후인 16살 때 브란트는 SPD 청년부에 가입했고 이듬해인 17살에는 정식 성인 당원이 되어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당시 노르웨이 국적자였던 빌리 브란트는 귀국하여 다시 독일 국적을 취득하길 원했고, 이때 절차상 친부의 이름을 기재할 필요가 있었다. 빌리 브란트는 어머니에게 친아버지의 이름을 물었고 어머니 마르타는 편지로 John Möller라 답했다. 그때 빌리 브란트는 처음으로 친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는 독일 국적을 재취득할 때 헤르베르트 프람이라는 본명을 버렸고, 망명 중에 썼던 가명 중 하나인 '빌리 브란트'로 아예 개명했다. 프람은 그와 혈연적으로 무관한 성이라 쳐도 헤르베르트는 그의 친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긴 했다. 욘 묄러와 빌리 브란트는 서로를 찾지 않았고, 평생 만난 적이 없다. 빌리 브란트가 1950년대에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을 때 욘 묄러는 서베를린 시장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들을 찾지 않았고, 이웃에게도 서베를린 시장이 자기 아들이라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의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욘 묄러가 사망한 후에야 묄러 측 친척이 빌리 브란트에게 생부의 사망 사실을 알렸다.

빌리 브란트는 자신의 복잡다단한 가족사, 특히 그의 친부에 대해서 만년까지 거의 진술을 회피했다. 그가 정계 거물인 만큼 당연히 언론과 정계에서는 그의 출생의 비밀과 가족사에 대해 여러 관심과 의혹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가 정치 활동을 하던 당시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친부에 관한 이야기는 철저히 터부시되었다. 그의 친부 욘 묄러(John Möller)는 빌리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있던 1958년까지 생존해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빌리 브란트의 친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빌리 브란트의 본명이었던 프람이 사실은 그와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 역시 그가 사망하기 3년전인 1989년에 자서전이 출간되기 전까지 독일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2.2. 사회주의 활동

16세인 1929년 그는 청소년 당원을 거쳐 17세인 1930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정식 성인 당원이 되었다. SPD에 대해 모태 신앙과 조기 사상 교육으로 투철하게 무장된 그는 곧바로 SPD의 핵심 당원으로 성장해 나갔으나, 1년만인 1931년에 SPD를 탈당하고 보다 급진적인 신당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D) 창당에 참여했다. 같은 시기 선박 중개인 겸 대리인의 도제로 취업했다.

1930년대 초반 독일 정치계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심했으며, 특히 독일 공산당 등은 과격한 폭력 투쟁을 일삼았고 이틈을 이용해 공산당 타도를 외치던 나치당이 세를 불렸고, 정국 혼란을 이용하여 1933년 정권을 잡았다. 직후 나치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브란트는 1933년부터 '빌리 브란트'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4년 사민당의 청년 분과로서 국제 혁명 청년국(IBRYO, International Bureau of Revolutionary Youth Organizations)을 창설했고, 브란트는 이 조직의 서기가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창설했으나 네덜란드 경찰에 의해 해체되어 일부 대표들이 독일로 넘겨졌다.

1933년 1월, 19세의 헤르베르트 프람(빌리 브란트)은 자신이 일하던 선박 회사의 배를 훔쳐 노르웨이로 달아났다. 그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근거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가 이끌던 IBRYO 역시 네덜란드에서 해체된 후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거점으로 재건했다. 그는 노르웨이식 이름인 '군나르 가슬란(Gunnar Gaasland)'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독일과 노르웨이, 스웨덴을 오가며 활동했다.

그의 노르웨이 망명 시절, 특히 1930년대 그의 행적은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고 불분명하다. 그는 노르웨이로 건너간지 반년 후인 1933년 7월 자신의 여자친구이자 SPD 동지였던 게르트루트 마이어를 노르웨이로 밀항시켰고 둘은 동거에 들어갔다. 빌리 브란트와 게르트루트 마이어는 1940년 무렵까지 동거하며 사실혼 관계로 지냈다. 하지만 이 둘은 동거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여러 복잡한 사생활을 가졌다. 게르트루트 마이어는 브란트와 동거 중임에도 불구하고 군나르 가슬란이라는 노르웨이 남자와 결혼을 했다. 이는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던 게르트루트(와 빌리 브란트)가 노르웨이에서 합법적인 신분을 얻기 위한 위장 결혼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빌리 브란트도 이를 용인한 것으로 본다. 심지어 빌리 브란트는 게르트루트의 남편의 본명인 군나르 가슬란으로 신분을 속여 활동하였다.

1935년 브란트와 게르트루트는 오슬로에서 저명한 성심리학자인 빌헬름 라이히의 섹스 오르가슴 실험참가자 모집 포스터를 보고 그를 찾아갔고 곧 그들은 빌헬름 라이히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게르트루트는 빌헬름 라이히의 섹스 실험 조교로 일하였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서방 각국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이를 지원하기 위해 자원 입대하자는 운동이 일었는데, 브란트는 이때 군인으로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기자로 스페인 내전에서 취재를 하였다. 1938년 독일 정부는 그의 독일 국적을 박탈했다. 그는 곧장 노르웨이 국적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기까지 2년이 걸렸다. 노르웨이 국적 신청이 받아들여진 1940년까지 2년간 빌리 브란트는 무국적자 신세였다.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 브란트는 2년만에 노르웨이로 귀국(?)했다. 그러나 2년 동안 게르트루트와 떨어져 있는 동안 둘의 관계는 소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빌리 브란트가 스페인에 있는 동안 빌헬름 라이히의 섹스-정치론이 노르웨이 국내외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독일에서 추방당했던 빌헬름 라이히는 노르웨이에서도 비자 갱신이 거부되며 몇개월 안에 노르웨이를 떠나지 않으면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 빌헬름 라이히는 영국 등 여러 나라에 망명 신청을 했다가 거부당한 후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가까스로 망명 허가를 받아 1939년 8월 곧바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빌헬름 라이히는 조수인 게르트루트에게도 함께 미국으로 떠나자고 권유했고, 동거남 빌리 브란트의 간절한 만류했지만 게르트루트는 이를 뿌리치고 빌헬름 라이히와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게르트루트가 라이히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자 빌리 브란트는 심한 좌절을 겪었다.

게르트루트와 빌헬름 라이히가 미국으로 떠난지 불과 한달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빌리 브란트의 삶은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1940년 독일 국방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한 뒤, 그는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다. 노르웨이군 군복을 입은 채로 붙잡혔기에 독일은 그를 노르웨이 군인 군나르 가슬란으로 파악했고, 독일인 헤르베르트 프람(빌리 브란트의 본명)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브란트는 노르웨이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곧 그를 풀어주었다. 사실 당시 그의 노르웨이어 실력은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그를 붙잡은 독일군도 노르웨이어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속아 넘어갔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당시의 활동으로 인해 추후 정치계에 입문한 후에도 독일 유권자들에게 상당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했다. 나치 당원이라는 의심을 받은게 아니라 노르웨이군 소속으로 독일군과 교전했다는 의심. 실제로 브란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독일 점령군에 대한 정보를 연합국에 제공했다는 사실이 그의 사후 밝혀지기도 했다.

이는 어쨌거나 조국을 위해 전쟁에서 목숨바쳐 싸운 독일 국민들 입장에서는 민족과 나라에 대한 배신과 다를 바 없다 인식될 수 있었다. 정계 입문 초반 이런 의혹이 제기되자 브란트는 도망치는 도중에 노르웨이군으로 신분을 속였을 뿐이지 진짜 노르웨이군 소속으로 독일군과 교전하진 않았다고 변명해야 했다. 이런 변명은 독일에 위치한 빌리 브란트 기념관에서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나치와 싸운 독일인은 여전히 스스로를 배신자가 아니라고 변호한다는 것.[8]

여튼 독일군에게서 풀려난 후 그는 스웨덴으로 달아났고, 얼마 후인 1940년 8월 노르웨이 국적 신청이 받아들여져 노르웨이 시민(국민)이 되었다. 스톡홀름의 주노르웨이 공사관에서 노르웨이 여권을 발급받았다.

한편 게르트루트가 미국으로 떠난 후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브란트는 여러 여자들을 만났는데 그 과정에서 안나 카를로타라는 여자가 브란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안나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녀의 친정 가족과 친척들이 브란트의 거처를 찾아내어 찾아와 난리가 났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의외로 안나 카를로타의 집안의 재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알게된 브란트는 마음을 바꿔 안나 카를로타와 1941년 결혼했다.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꽤나 상류층에 잘나가던 와이프 집안 배경으로 빌리 브란트는 노르웨이 상류층 사회에 진입하게 되었고 노르웨이 정계와 언론계 인맥을 쌓게 되었다.

1940년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으로 이후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는 급격히 반나치 정서가 형성되었고, 이와 동시에 스칸디나비아에서 빌리 브란트는 반나치 운동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빌리 브란트는 1942년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결혼식장에서 신부인 루트 한센(→ 루트 베르가우스트)을 보고 반했다. 얼마 후 둘은 불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46년 루트의 남편이자 본인의 친구였던 베르가우스트가 병으로 죽자 빌리 브란트는 안나와 이혼 소송을 했고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루트와 재혼했다.

전쟁이 나치의 패전으로 기울면서 그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사회주의 계열 정치인들과 밀접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사이가 가장 가까웠던 대표적인 인물이 그 유명한 올로프 팔메이다.

2.3. 정계 진출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그는 노르웨이 정부 관계자 자격으로 베를린으로 왔다. 1948년까지 그는 노르웨이 국적이었다. 1948년 그는 독일 사민당에 정식으로 복당했고, 가명이었던 빌리 브란트를 본명으로 개명하며 독일 국적을 회복했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 미국 방첩부대(CIC)의 비밀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독 정세 등에 대한 리포트를 200여 차례 작성해서 보고했고, 그 대가로 미국 CIA로부터 자금을 받은 사실이 2021년 이후 밝혀지기도 했다. #

1949년 서독 총선에서 서베를린의 사민당 대표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독일 연방의회에 진출하며, 정치인으로서 공식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이후 약 10년간 그의 정치 역경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보수 진영 뿐만 아니라, 사민당 조직 내에서도 주도권 경쟁 과정에서 숱한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의 망명 시절 시절 행적에 대한 의문과 출신에 대한 공격을 당했다. 나치 정권 기간은 물론이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폐해가 된 고국으로 당장 돌아오지 않고 노르웨이에 있다가 상황이 안정되자 귀국한 그는 국내 독일인들이 보기에는 이방인이었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 있었다.[9]

이러한 시선은 사민당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국내에서 활동했던 사민당 주류들이 보기에 브란트는 나치 집권 직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오랜기간 해외에 망명해 있으면서 국내에 남아서 나치의 탄압을 직접 온몸으로 받아내던 자신들에 비해서 신변의 직접적인 위협을 거의 느끼지 않으며 편하게 지냈고, 해외인사라는 특수성 때문에 노르웨이 노동당 등 해외 고위층과 쉽게 연결되며 상대적으로 빠르고 쉽게 정치 거물로 성장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 브란트는 사민당 베를린주 의장직, 연방 의장단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해외 활동의 특수성 때문에 브란트는 오히려 빠르게 거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는데, 앞서 언급된 것처럼 해외인사로서 비교적 쉽게 거물급들과 교류하며 빠르게 커리어를 쌓아나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망명 활동 덕분에 국내파 사민당 인사들에 비해 과격한 이미지가 덜했다. 사민당 지도자치고 비교적 온건한 그의 이미지는 그가 중도층의 지지를 얻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브란트는 실제로는 사민당에서도 강경 성향이었지만 적어도 외부적으로는 비교적 온건한 이미지를 가꾸어 나갔다. 특히 그의 아내 루트 브란트의 세련된 이미지는 그가 사회주의자면서도 상류층 인사 같은 느낌을 주는 모순된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전달했다.

1957년 서베를린 시장이 되었다. 서베를린의 유력 정치인으로서 그는 당시 집권 기민련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이 강대강 전략을 구사한다고 비난하며 소련 및 동독과의 긴장 완화를 주장했다. 당시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가 힘으로 밀어붙이려 하며 그렇게 되면 전쟁이 터질 것이라 주장하며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먼저 서독 동독의 위치를 동등하게 끌어올린 후 미국-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베를린에서 위기는 심화되었고, 급기야 1961년 동독과 소련은 불시에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며 베를린에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그동안 동독 및 소련과의 관계 완화를 주장해 왔던 그에게는 정치적 위기가 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여 미국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1962년 8월에는 페터 페히터 사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베를린의 민심은 격앙되었고 흥분한 서베를린 시민들이 장벽으로 돌진하여 미군들이 저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빌리 브란트는 성명을 통해서 분노에 미쳐 흥분하는 것은 정확히 적들이 원하는 것이라면서 시민들의 안정을 촉구하였다.

특히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 시기는 하필 서독 총선 직전이었는데, 당시 브란트는 사민당의 대표 겸 총리 후보로 선거에 나선 상황이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 직후 언론들은 브란트의 사민당이 참패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베를린 위기 상황에서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사태의 중심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으며, 노회하고 인기가 전같지 않았던 아데나워가 이끄는 CDU/CSU는 관심에서 소외되어 갔다.

게다가 소련과 직접 대화하겠다 주장하면서도 미국에도 지원을 요청하는 등 양다리 전술을 구사하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동준서주하는 모습이 연일 언론에 집중 조명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 빌리 브란트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몰랐던 서독 국민들도 이때 본격적으로 브란트의 연설을 접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선거 초기 사민당의 총선 패배가 예측되자 온건 중도좌파 성향 지지자들이 대거 결집하였고 이런 일련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선거에서 예상과 달리 사민당은 오히려 의석을 증가시켰다. 이후 사민당은 1962년 12월 19일 슈피겔 스캔들[10]을 빌미로 과반에 미달하게 된 CDU/CSU의 대연정을 거부했고 다시 CDU/CSU-자민 연정이 성립되었다. 이 선거에서 정치적 위신이 크게 손상된 아데나워는 결국 1963년 경제부 장관 에르하르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퇴임한다.

베를린 위기가 그에게 정치적 타격이 될 것이라는 초기의 전망과 달리 오히려 이를 역이용하여 지지율의 반등을 경험한 브란트는 이후에 베를린 장벽 건설 때문에 동서베를린 간의 통행이 갑자기 전면 중단되면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년 동안 동독과 협상을 진행했고, 서독 중앙정부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베를린에 와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연설을 하여 베를린 시민을 열광케 했고, 케네디 옆에 서있었던 브란트는 이 연설의 후광 효과를 제대로 입었다.[11] 이후 1963년 12월 결국 통행증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브란트의 지지도는 더욱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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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는 1963년 에리히 올렌하워의 뒤를 잇는 사민당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바탕으로 당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며 당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1965년 총선에서도 역시 기민련/ 기사련에 뒤지는 2당이었으나 경제위기, 외교 노선 갈등[12] 등으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내각의 인기가 떨어지고, 기민/기사련이 자유민주당과도 갈라서면서 결국 1966년 11월, 제1당 기민련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재와 제2당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재의 협상에 의해서 독일 역사상 최초의 대연정이 성립하였다. 90.1%(447/496석)의 의석이 내각에 참여한 것이다.

당초 브란트는 자민당과의 소연정을 고려하고 있었다. CDU/CSU와는 동방정책 공약을 두고 전격적으로 충돌한 전력이 있었고 또 선거 과정에서 브란트의 과거사를 공격한 구원이 있었고, 사민당과 자민당의 하원 의석만으로도 하원의 과반을 넘길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 그러나 사민당 원내대표 헤르베르트 베너의 강력한 설득과 함께 자민당 에리히 멘데 대표 역시 사민당과의 연정에 미온적 태도로 나오면서 결국 전격적으로 입장을 바꿔 대연정을 수락했다.

제1당 기민련의 키징어 총재가 총리를 맡고, 제2당 사민당에서는 빌리 브란트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포함해서 총 9명의 장관이 내각에 참여하였다.[13] 사민당 역시 연정 참여로 수권정당으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쌓게 되었다.

외무장관으로서 브란트는 자신의 안보 참모인 에곤 바를 정책기획국장에 임명하는 등 동방정책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장하려 했다. 동방정책 추진은 대연정 당시 브란트가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브란트는 구체적으로 소련과의 상호 무력 사용 포기 협정,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선 조정 협정을 추진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비롯해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국교가 단절됐던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도 정상화하였다.

키징어 역시 처음에는 동서독 화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근본적으로 기존의 공산권에 대한 강경정책을 고수하는 기민련과 공산권과의 적극적인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동방정책을 내건 사민당의 충돌로 대연정은 무너진다.

1969년 총선에서 전국 단위 유세를 위해 기존 지역구인 서베를린을 떠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비례대표로 선거구를 옮겼다.

2.4. 연방총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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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 총선에서 CDU/CSU가 242석, 사민당이 224석, 자민당이 30석을 얻었다. 또 다시 야당에 머무르는 듯했으나, 브란트는 예상을 깨고 독일 자민당과의 연정을 성공시킴으로써 극적으로 판을 뒤엎고 총리가 되었다.

키징어 정권 말기에 CDU/CSU와 사민당의 관계는 경색되어 있었는데, 키징어와 자민당과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다. 키징어가 선거 기간에 "자민당을 의회에서 쫓아내 버리겠다"라고 발언하는 식으로 도발을 일삼은데다가 독일식 비례제의 철폐를 핵심 공약 중 하나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지역구로 의원을 배출할 능력이 없어 비례제로 연명하던 자민당에게 키징어의 해당 공약은 재앙과도 같은 소리였다.

키징어의 이같은 행보는 같은 중도우파 표밭을 두고 경쟁하던 자민당의 세력을 약화시켜 그 표를 기민당/기사당 연합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겠지만, 상황은 얘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브란트는 이 틈을 이용해 자민당과의 연정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총선 전에 사회자유주의 성향의 발터 셸이 자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선출된 점도 브란트가 연정을 이루어내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키징어가 뒤늦게 내각의 절반을 자민당에 내주겠다는 파격 제안까지 했음에도, 결국 CDU/CSU는 자민당과의 연정에 실패했고, 키징어는 전후 서독 역사에서 선거에서 이겼음에도 총리가 되지 못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빌리 브란트는 서독 수립 이래 최초의 사민당 출신 총리이자, 최초로 제2당 당수가 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다만 총리 인준이 수월하지는 않았는데, 사민당과의 전후 첫 연정 수립에 반대하던 자민당의 몇몇 의원들이 반란표를 때려서였다. 3표만 모자랐으면 브란트의 총리 취임은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14]

브란트는 총리 취임 직후부터 공약대로 사회복지제도를 대폭 확대했다. 사회부조 제도, 의료보험의 보장 범위와 대상, 실업급여와 퇴직자 연금도 강화했다. 주택 정책에서 임차인의 권리를 강화하거나 주거 관련 지원금을 늘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특히 브란트 집권 이후 사민당 정권은 독일의 교육 제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이원적인 교육 체계 대학 평준화를 전면적으로 도입 실시했고, 이때 바꾼 제도는 현재까지 큰 틀이 이어지고 있다. 이를 위해 교육예산을 160억 마르크 정도에서 500억 마르크까지 확대하여 초·중등교육 및 직업교육 학교를 증설, 보수하고, 교사의 질을 강화하는 등 교육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강화했다. 또 대학 정원을 크게 늘리고 대학 입학을 위한 입시 문턱을 대폭 완화하였다. 실제로 브란트의 취임을 전후해 대학생 수는 10만 명 수준에서 65만 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부분도 있듯이 사민당 정권이 지향했던 이원화 및 대학 평준화 교육 정책으로 독일 대학들의 경쟁력이 약화되어 과거 세계적 대학이 수두룩했던 독일 대학이 이후 국제적 경쟁력을 잃게 되었고, 나아가 놀랍도록 성장하던 독일의 국가 경쟁력이 70년대부터 미국, 일본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체되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반대급부로 나온다. 현재 독일 대학 중에서 세계 랭킹 200위 안에 들어가는 대학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학 평준화 문서 참조.

여담으로 이후 독일의 엘리트 학생들은 자국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스위스의 세계적인 명문대 ETH나 영국의 명문대 유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실제 ETH에 진학하는 우수한 학생들의 다수는 독일 출신 학생들이라고 한다.[15]

일반적으로 대대적인 사회 복지 투자가 이루어지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 십상이었고 실제로 많은 개도국들이 그런 악순환에 빠진 사례가 있지만, 50년대부터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오던 서독 경제의 저력 덕분에 브란트 내각 시기에도 서독은 여타의 선진국들보다 비교적 낮은 인플레이션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증가했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상승해 빈부격차가 감소했으며 빈곤률이 감소했다. 석유 파동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경제적 지표들도 나쁘지 않았다. 복지 정책을 통한 소득 재분배가 강력한 효과를 받으려면 경제 성장을 통한 파이 확대가 필수적인데, 그것이 함께 일어난 매우 성공적인 사례인 셈.

외교적으로는 콘라트 아데나워 이래로 독일 정부가 고수하던 " 동독과 수교를 맺은 국가와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적극적으로 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 동방정책'을 표방했는데, 이는 때마침 미국 공화당 출신 대통령 리처드 닉슨 데탕트(냉전 긴장 완화) 정책을 추구하던 것과 맞아떨어지며 힘을 얻었다. 이로 인해 소련 및 동구권 공산권 국가와 교류를 확대하며 긴장관계를 완화했고 이 과정에서 소련으로부터의 천연가스 공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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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당시 브란트는 외교, 국제 협력 및 대화를 강력히 옹호했다. 이런 브란트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던 정치인이 바로 스웨덴 올로프 팔메 전 수상이었다. 이 두 사람은 국제 무대에서 평화, 군축, 그리고 사회 정의를 적극적으로 촉진하며 비슷한 가치와 목표를 공유했다. 더불어 이들은 외교 정책에서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된 세계 질서에 대한 변함 없는 헌신을 강조하며 세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두 지도자는 특히 개발도상국들과의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발 원조, 부채 탕감, 공정 무역의 확대 등을 옹호했다. 특히 팔메는 이 분야에서 매우 적극적이기로 유명했고, 강대국이 개도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행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둘은 또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적으로도 자주 협력하는 사이였지만 사적으로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있다.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해왔던 브란트는 스웨덴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고, 발트 독일인 어머니를 둔 팔메는 독일어에 매우 유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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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맞아가며 눈물을 보이며 참회의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일명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라고 불리는 사건이다.[16]

사실 브란트 총리가 추념비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인들은 서독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엄청난 고초를 겪은데다, 참혹한 독일과 소련의 전투 와중에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폴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선은 여전히 쟁점이었다. 따라서 그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반가워할 리가 없었는데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 와중에 추념비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뒤에는 서독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졌다. 폴란드 총리가 브란트에게 감사의 말을 할 정도. 혹자는 당시 브란트의 파격적인 사과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는 그가, 이렇게 해야 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무릎을 꿇었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브란트는 당시에는 보수우익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과거 영토의 소유권을 자기 맘대로 일방적으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항목 참조할 것. 당시까지만 해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인해 소련 등에 의해 동방 영토를 강제로 상실한 것은 연합국의 일시적인 조치였으며, 동방 영토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회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에 의해 분리되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던 자를란트의 경우 1957년 다시 외교적인 노력으로 서독이 재병합한 바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인들에게 통일은 동독은 물론,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등 동방 영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서독에서는 한때 동방 영토에서 강제로 쫓겨난 실향민들이 정당을 구성하여 총선에서 수십 석씩 차지했을 정도였다. 당시 많은 독일인들은 동방 영토 역시 자를란트처럼 외교력에 의해 언젠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17]

하지만 브란트가 동방 정책을 밀어붙이며 이를 위해 일방적으로 동방 영토를 포기해 버리자 대해 거센 역풍이 있었다. 특히 실향민들에게 브란트는 조상 대대로 수백년간 살아온 고유한 영토를 개인의 영달과 1972 뮌헨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마음대로 팔아먹은 매국노로 여겨졌을 정도이다.

또한 브란트 내각은 동독과의 관계 개선 및 경제 지원을 골자로 하는 '동서독 기본조약'을 추진했다. 당시 동독과 소련은 서독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국인 동독에 대해 경제 지원을 하려는 브란트 내각의 대외정책에 대해 보수 정당들은 반발했다.

야당인 기민당은 물론이고, 연정 파트너 자민당 내에서도 상당한 반발이 일어나 급기야 의회에서 불신임 결의를 받게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 사상 최초이자 유이한 불신임 투표가 치러졌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불신임 투표에서 2표 차이로 극적으로 부결되면서 간신히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다. 2표 차이로 간신히 불신임을 면했지만 이미 연정이 붕괴되어 내각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의회에서 과반을 잃게 되어 향후 정권의 존립 당위성이 사라진 상태였다.

한편 당시 브란트의 불신임 투표에 1968년부터 서독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있던 소련은 발칵 뒤집어졌다. 1971년 정상회담을 통해 브란트에게 개인적 호감을 느끼기도 했던 소련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브란트를 지켜달라고 부탁했고 유리 안드로포프 독일 연방의회를 매수하는 계획까지 검토하기도 했다. 실제로 동독 슈타지는 브란트 불신임표를 차단하기 위해 기민련에 5만 마르크를 퍼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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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브란트는 독일연방공화국 사상 최초의 의회 해산을 실시하고 조기 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선거권이 21세에서 18세로 낮아진 1972년 11월 총선에서 동서독 기본조약 조인 여부 등 브란트 내각의 동방정책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 속에 치러졌고 투표율이 무려 91.1%에 이르며 사상 최고치에 정도로 치열했다. 선거 결과 예상을 깨고 사민당은 지난 총선 때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얻었으며, 사상 최초로 CDU/CSU을 누르고 1당을 차지했다. 이런 민심의 압도적인 지지를 확인한 기민련과 자민당 내 우파는 브란트에게 다시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이 다시 구성되었고 브란트는 총리로 재집권하게 되었다.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 브란트는 총선 직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조약 체결 직후 브란트 정권은 당장 연내에 7억 마르크 가량의 차관을 동독에 제공했고, 이후 서독은 동독에 총 1044억 마르크를 지원하였다. 이렇게 자신있게 2기를 맞이하는 듯했지만 행복을 오래 가지 않았다.

1973년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서독 경제와 함께 브란트의 사민당 정권은 큰 타격을 받았다. 사실 오일쇼크가 발생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의외로 브란트 내각이 큰 공헌(?)을 했다. 1971년 5월 브란트가 이끄는 서독이 브레튼우즈 체제를 탈퇴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의 방아쇠를 당겼다. 당시 세계 3위 경제대국 서독이 브레턴우즈 체제를 탈퇴하자 세계는 충격에 빠졌고 공포에 휩싸인 유럽 각국은 미국으로 몰려가 금태환을 요구했다.

유럽 각국들이 금태환을 요구하며 아우성치자 결국 그해 8월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금태환 중단을 선언했다. 이로써 브레턴우즈 체제는 붕괴되었고 세계 경제는 닉슨 쇼크라 불리는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달러 가치가 급격히 절하되자 달러를 사용하던 중동 산유국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유가를 대폭 상승시키자 오일쇼크가 야기된 것이었다.

사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60년대 내내 미국과 다른 독자 노선을 추구하던 샤를 드골이 계속 딴지를 걸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강조한 기민련 정부는 드골에 동조하지 않으며 브레튼우즈 체제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아데나워, 에르하르트, 키징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자 외교를 강조한 브란트의 사민당 정권은 미국 달러화 기반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브레튼우즈 체제 탈퇴라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고, 이는 결국 세계 경제의 큰 충격을 불러오는 도화선으로 작용한 것.

오일쇼크로 인한 에너지 가격 급등은 수출 경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서독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서독은 기존의 성과를 뒤로 하고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사상 최악의 경기 침체를 겪어야 했다. '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던 50~60년대의 고도 성장은 오일 쇼크를 계기로 완전히 끝났고 이후 서독은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때마침 서독과 비슷하게 발빠른 성장 가도를 걷던 일본에 세계 경제 2위의 자리를 내주는(그래도 미국 등 서구권 기준으로는 2위를 유지했지만) 충격을 겪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오일쇼크로 인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 대책 및 동독 지원을 두고, 브란트 총리와 재무장관인 헬무트 슈미트가 마찰을 빚었다. 슈미트는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 관료 출신이었고, 케인즈주의자였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당내에서도 강성파였던 브란트와 중도적 성향의 슈미트는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온건한 성격으로 유명한 슈미트는 브란트의 동방 정책이 과도한 동독 퍼주기라 여겨 달가워 하지 않았지만 당내 2인자로서 진영 논리에 입각해 브란트에게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18] 하지만 오일쇼크가 터지자 슈미트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재정정책을 강하게 주장하며 브란트와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슈미트는 경기 침체 완화를 위해 확장적 재정정책 실시와 수출 산업에 대한 인센티브를 주장했고, 브란트의 과도한 동독 경제 지원 정책을 반대했다.

하지만 동방 정책을 자신의 정치적 생명으로 여겼던 브란트는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 와중에도 원래 계획대로 동독에 대한 대규모 경제 지원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확장 재정을 통한 조기 경기 부양의 타이밍을 놓친 서독 경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은 커녕 더욱 상황이 악화되어 사상 최악의 불황으로 이어졌고, 그동안 5%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고속 성장을 이뤄왔던 서독 경제는 사상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실업율은 증가했고 한때 기민련을 앞섰던 사민당의 지지율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2.5. 기욤 간첩 사건과 성추문

1차 오일 쇼크의 충격이 여전하던 1974년 브란트의 비서 귄터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이 동독의 간첩이었던 사실이 드러났다.[19] 빌리 브란트 본인도 동독의 간첩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브란트는 이를 철저하게 부인했으며, 브란트가 이에 관여했다는 증거나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조사 결과 귄터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들 중에 국가 안보에 심각하게 위해가 될만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다. 기욤은 브란트의 개인 비서였지만 공적인 직책을 맡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높은 사람의 비서라고 해도 국가의 존망을 흔들 수 있는 정보에 접근하는것은 과거든 현재든 어렵다. 실제로 상당한 정보가 동독으로 흘러들어가기는 했으나,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특급 정보는 기욤이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에는 브란트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브란트는 자신은 간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총리직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연방범죄청이 기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브란트의 섹스 스캔들, 심한 음주 행각 등이 추가로 드러난 것. 귄터 기욤이 브란트의 섹스 중독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시로 브란트에게 매춘부를 공급했음이 밝혀졌다. 기욤은 브란트가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외에 순방을 나갔을 때나 선거 유세를 위해 지방을 순회할 때도 브란트의 개인적 취향에 맞는 창녀들[20]을 엄선해서 브란트의 호텔방이나 총리 전용 열차에 계속 공급했다.[21]

이에 브란트의 소속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브란트의 실추된 이미지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브란트를 내치고 재무장관인 헬무트 슈미트를 차기 총리로 내세우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하고,[22] 독일 총리직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티고 있던 브란트에게 동독이 섹스 스캔들 자료를 압박 수단으로 삼을 것이라며 사임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를 버텨내지 못한 브란트는 취임 4년여 만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표면적으로 브란트는 기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한 우울증으로 총리직을 수행하기 어려워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후임 총리로는 예정대로 슈미트가 취임했다. 어쨌거나 섹스 스캔들이 언론에 본격 이슈화되기 전에 사퇴했기 때문에 일반 독일 국민들은 그가 단지 기욤 간첩 사태 때문에 사퇴한 줄만 알고 섹스 스캔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성중독에 가까웠던 그의 사생활은 퇴임 후 한참이 지나서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2.6. 퇴임 후 (사민당 총재, SI 의장)

총리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사민당 총재 자리는 여전히 유지했다. 그는 무려 1987년까지 사민당 총재 자리에 있으면서 당과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임 총리인 헬무트 슈미트는 브란트나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달리 사민당 총재로 선출되지 못한 처지였다. 슈미트는 사민당 내에서 가장 우파[23]에 속했기에 총리 재임 기간 내내 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 내 강성 주류의 심한 견제를 받았다.

70년대 이후 사민당은 브란트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주류에 68세대가 가세하며 강경파가 더 득세하게 되었고, 슈미트의 중도 내지는 (경제 정책 면에서) 때로는 우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행보에 지속적인 태클을 걸었지만, 슈미트는 훤칠한 외모와 탁월한 말솜씨, 친화력 있는 성격, 비교적 중도에 가까운 온건한 정책 성향으로 국민적 인기가 높았기에 사민당 주류는 슈미트를 내치지는 않고 정권 유지를 위한 일종의 얼굴 마담으로 그를 전면에 계속 내세웠다. 실제로 슈미트가 퇴임한 이후로도 브란트가 재도전에 나선다거나, 좌파 성향 후보가 전면으로 나오는 일 없이 당의 총리 후보는 주로 중도좌파 성향의 인물이 맡게 되었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무너지자, 브란트는 포르투갈 정치에 개입하여 포루투갈의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포르투갈에 좌파 사회당 정권이 집권하도록 노력했지만, 동시에 포르투갈 공산당에는 명백히 반대하며 포르투갈이 공산화되어 소련의 수족이 되는 것에는 반대했다.

1976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즉 국제 사민주의 정당 모임의 의장이 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죽을 때까지 종신으로 SI 의장직에 있었다. 국내에서 사민당 총재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국제적으로는 SI 의장 자격으로 각종 국제 회의에 참석하거나 해외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10월 유신 독재를 비판한 통일사회당 김철 당수와도 인연이 있어서, 프랑스 사회당 프랑수아 미테랑과 함께 김철을 지원했다고 한다. 도쿄에서의 SI 대회에서는 김철의 귀국을 위해 일본사회당 의원들을 대동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

김대중 일본 납치 사건이 발생한 후 김대중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고, 198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것을 주도했다. 이후 김대중은 매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꾸준히 올랐고, 마침내 2000년에 수상했다.

1987년 건강이 크게 쇠약해졌던 그는 장기집권하던 사회민주당 대표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나 명예대표직에 취임했다. 퇴임한 직후 자서전을 집필을 시작했고 세번째 아내와 주로 여행을 다니는 등 신변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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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자, 서독 내 좌파 인사들 가운데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2국 연방제' 혹은 과도 정부 구성이 아닌 '신속한 재통일'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듬해 3월에는 동독을 직접 방문하여, 동독 정부 하에서 실시된 최초이자 유일의 자유 총선을 위한 공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해 10월 3일 독일 재통일 선포식에 독일의 여러 정치인들과 함께 참석했다.

여담으로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독일에 없었다. 방한 중이었기 때문.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면담하며 "언제 독일이 통일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먼 훗날 즈음에는 되지 않겠느냐"고 답했는데, 불과 몇 시간 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독일로 귀국했다고 한다. 이미 노년인 자신이 죽기 전에 조국 독일이 통일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먼 훗날 언젠가"를 이야기하다 살아생전에 통일을 현실로 접하게 된, 놀라움과 기쁨의 순간이었던 셈.

이후 통일된 조국 독일에서 3년여를 더 살다 1992년 10월 8일, 라인 강변 운켈의 자택에서 지병인 으로 타계했다. 향년 78세. 장례는 전국적인 추모 열기 속에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시신은 베를린에 안장되었다.

3. 사생활

4. 어록

"Unter der Last der jüngsten Geschichte tat ich, was Menschen tun, wenn die Worte versagen. So gedachte ich Millionen Ermordeter."
오늘의 역사의 무게 아래서, 나는 사람들이 그 무게를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때 행하는 바로 그런 행동을 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의 죽음을 나는 그렇게 기렸다.
"Wir wollen mehr Demokratie wagen."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고자 한다.
"The discipline of the Third Reich is toadyism and not freedom. Its anti-Semitism and its inflammatory nationalist propaganda are narrow mindedness and not intellectual breadth. Fascism is intellectual slavery."
나치 독일의 규율은 자유가 아니라 사디즘입니다. 이들의 반유대주의와 선동적인 민족주의 선전은 지적인 폭넓음이 아닌 편협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파시즘은 지능적인 노예제입니다.
― 1933년
"Everything indicates that the fascist dictatorship is not a question of weeks and months, but of years."
모든 것이 파시즘 독재가 주 단위, 월 단위 문제가 아니라 년 단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 1933년
"The day will come when the hatred that seems unavoidable in war will be overcome. One day the Europe in which Europeans can live must become a reality."
전쟁에서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는 증오를 극복할 날이 올 것입니다. 유럽인이 살 수 있는 유럽은 언젠가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 1943년 #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해도, 서로에겐 외국이 아닙니다. 그들의 관계는 그저 "특별한 관계"일 뿐입니다.
― 1969년 10월 28일, 정부의 정책 발표회 때[27]
"War is no longer the ultima ratio but rather the ultima irratio. Even if this is still not a generally held view, I personally understand a policy for peace as a genuine Realpolitik of this epoch."
이제 전쟁은 ultima ratio(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ultima irratio(최후의 비이성)이 되었습니다. 비록 이것이 여전히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견해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는 평화를 위한 정책을 이 시대의 진정한 현실 정치로 이해합니다.
― 1971년 노벨상 연설. #
우리는 이 아니라 투표자들에게 선택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민주주의에 공헌한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한 권력자의 말 한 마디가 법적인 근거로써 효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회는 독재 정권이나 다름없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규율을 무시한 독재자는 사회를 파멸로 이끕니다.
올해 여름에 신문을 다시 내려놨습니다. 베를린은 살아남을 것이며, 은 무너질 것입니다.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시청에서[28]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30-1931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1931년)|
사회주의 노동자당
]]
1931-1933


1948-1992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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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3000F>생애 <colbgcolor=#fff,#1f2023> 생애 및 정치 경력
정책 고데스베르크 강령 · 동방 정책
역대 선거 제6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 제7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사건사고 스페인 내전 · 제2차 세계 대전 · 베를린 장벽 · 브란트의 무릎꿇기 · 귄터 기욤 사건 · 독일 재통일
관련 정치인 쿠르트 슈마허 · 에리히 올렌하워 ·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 발터 셸 · 헬무트 슈미트 · 올로프 팔메 · 브루노 크라이스키 · 존 F. 케네디 · 김대중
기타 독일 사회민주당 · 빌리 브란트 국제공항
파일:빨간색 깃발.svg 사회주의 }}}}}}}}}


[1] 출생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은 노르웨이 망명 시절 가명이었다가 1948년에 독일 국적을 회복하면서 개명하여 본명이 되었다. [2] 즉 배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했다. [3] 최근까지도 독일의 언론과 작가들은 빌리 브란트의 친부인 욘 묄러의 행적을 조사해 왔다. 욘 묄러는 생전에 혼외 아들인 빌리 브란트를 위한 양육비를 제공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욘 묄러가 법적 책임과 처벌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친사민당 언론조차도 욘 묄러가 그의 혼외 아들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기울였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4] 비슷하게, 브란트의 후임 총리 헬무트 슈미트 사생아 집안 출신으로, 10대 시절 나치에서 출세해 보려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했으나, 사생아였던 아버지를 버린 친할아버지가 실은 유대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뉘늦게 알고 방황했다고 한다. 나치 기준은 1/4 이상, 즉 조부모 중 1명 이상이 유대인이면 유대인 혈통으로 간주되었다. 헬무트 슈미트는 이 기준에 따르면 유대인으로 구별되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는 유대인인 자신이 결코 출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치에 반감을 품었다고 후술했다. [5] 당시까지 독일 제국이었고, 토지 귀족 용커들은 여전히 독일의 기득권층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중세시대 농노처럼 신분적으로 평생 완전히 예속된 상황은 아니었고, 본인의 의지로 농노가 되고, 또 그만둘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이 외삼촌은 루트비히 프람과 빌헬미네 사이의 아들이며, 마르타 프람의 이부형제였다. [7] 그의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외자로 빌리 브란트를 낳았기 때문에 쿨만과의 결혼은 재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타와 에밀 쿨만 모두 자녀를 데리고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재혼가정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8] 이런 식의 침묵과 부정을 걷고 독일이 제대로 과거사에 대한 재인식과 자기 비판을 시작한 것은 68혁명 이후의 일이었고 바로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아래 서술되어 있듯이 브란트가 총리가 되고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68혁명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68혁명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나치당이나 친위대 간부들을 일종의 '민족 엘리트' 로 여기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치고 히틀러고 난 모르겠고, 여튼 우리는 조국을 위해 싸운거 아니냐', '우리가 져서 전범/역적 취급이지 이겼으면 영웅 아니냐'으로 생각했다. 1966년 발생한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내걸기도 했던 68혁명 당시 서독 청년들이 분노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나치를 막지 못한 부모 및 조부모 세대에 대한 분노였다. 서독의 청년 세대들은 나치가 정권을 잡았던 부모, 조부모 세대 때문에 지금 자신들이 낙인 찍혀 피해를 보고 있다는 피해 의식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 분노를 고스란히 기성 세대에게 돌렸던 것이다. [9] 이웃 국가들에 비해 징집 기간이 길었던 독일에서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미국이나 캐나다, 남미 등 이민을 핑계로 해외로 도망가는 경우가 제법 있어서 사회 문제가 되었다. 독일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 출국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참고로 미국의 45대 대통령을 역임한 도널드 트럼프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트룸프는 17세때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30대 때 독일에 재정착하기 위해 돌아왔으나 독일 당국으로부터 병역 기피 혐의로 영구 추방당했고 결국 그와 그의 가족들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야 했다. [10] 슈피겔 지가 나토의 군사 작전에 대해 보도하자, 국방부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를 위시로 한 기민련 내각이 슈피겔 기자들과 편집부를 반역죄로 체포한 사건 [11] 이를 두고 만약 케네디가 함부르크(Hamburg)에서 연설했다면 "나는 햄버거(Hamburger)입니다"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왔다. [12] 반(反)앵글로색슨 유럽주의 대 친미 대서양주의 [13] 독일에서는 연립정부의 2당 대표가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맡는 것이 관례다. 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닌데, 2017년 제19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로 출범한 앙겔라 메르켈 4차 내각에서 당시 사민당의 수장 마르틴 슐츠는 입각하지 않았으며, 사민당 몫 부총리직은 올라프 숄츠 당시 함부르크 시장이 재무장관으로 입각하며 가져갔다. [14] 독일에서 총리 인준안은 무기명투표로 치른다. [15] 영국 대학들이 개강을 하거나 방학을 하는 시즌이면 독일 유학생들을 실어나르는 전용기나 헬기가 뜨기도 한다고 한다. [16] 당시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폴란드 총리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다음 행선지로 가는 차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울었다. 치란키에비치 자신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피해생존자 당사자였는데도 그랬다. 그리고 "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라고 말했다. 브란트는 갑자기 머리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답했고 바르는 이를 두고 "만행을 저지르지 않은 한 사람의 머리에 떠오른 한 순간의 영감으로 우리는 역사적인 죄과를 고백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17] 그러나 독일-프랑스 국경 지대의 중서부에 위치해있었고 1950년대 프랑스의 보호령 기간 동안 현지 거주 독일계 주민들을 프랑스 정부에서 독일 본국으로 강제추방하지 않았던 자를란트와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전후 폴란드와 소련에 합병된 동방영토들은 폴란드와 소련 당국에 의해 현지에 거주하던 독일계 주민들이 대거 추방된데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바로 동방 영토들 중 폴란드 회랑에 가로막혀 독일 본토와 단절되어 있었던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국을 연결하여 폴란드를 침공한 히틀러와 나치당의 야욕에서 비롯됐기에 독일이 1950년대 후반 손쉽게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아 되찾았던 자를란트와는 그 성질이 매우 달랐다. [18] 또한 슈미트는 자기를 키워준 브란트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브란트가 사퇴를 선언하자 이런 식으로 사퇴해서는 안된다고 막기도 했다. [19] 당시 서독에는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에서 파견한 다량의 간첩이 사회 각계각층에 깊숙히 침투해 있었음이 통일후 슈타지 재판에서 드러났다. 통일 당시 서독에 최대 3만 명에 이르는 고정간첩과 정보원이 있었다는 추정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동독에 가족이 살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슈타지는 서독의 계층별 인사들을 파악한 후 가족들이 동독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접근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였다고 한다. 가족들의 안위 때문에 스파이가 되긴 했지만 타의적인 것이기에 자발적인 스파이들에 비해서 그 효과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20] 배우 출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21] 입막음 비용은 슈타지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22] 하지만 정작 슈미트 본인은 브란트의 사임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3] 슈미트는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함부르크 시청의 경제 부처에서 주로 활동한 경제통이다. 이런 배경으로 슈미트는 사민당 소속이지만 경제 정책에서 특히 기민당에 가까운 자유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당내에서 많은 견제와 비판을 받았다. [24] 이혼 및 재혼 절차가 시작된 것은 1947년, 이혼과 재혼을 위한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것은 1948년이다. [25] 경향신문은 브란트와 제바허의 관계를 손녀뻘되는 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 끝에 네번째 결혼했다고 표현했다. [26] 후임 총리였던 슈미트 역시 엄청난 골초여서 퇴임 후에도 금연 시설은 물론 방송국 인터뷰 도중에도 제멋대로 담배를 피는 것으로 유명했다. 워낙 정치적 거물이어서 그럴때면 주변에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뒀다. [27] 이 개념 자체는 대한민국 북한의 관계와 같다. 무엇보다 자국을 서독과 별도의 국가로 주장하고 외교부로 대화했던 동독의 입장에 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할슈타인 원칙에서 한 발짝 물러선 것이며, 또한 상대를 국가로서 존중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위 비교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1민족 2국가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 듯, 국가로 존중하되, 특수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28] 그리고 장벽이 무너지고 1년 뒤인 1990년 독일은 통일되었다. [29] 라 스트라다의 광대 일 마또로 잘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