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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er Kniefall von Warschau (Brandt Kniefall)Ukęknięcie Willy’ego Brand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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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가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האנדרטה לזכר גיבורי הגטו Pomnik Bohaterów Getta w Warszawie / Der Warschauer Ghetto-Ehrenmal)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맞아 가면서 눈물을 보이며 참회의 무릎을 꿇은 사건.[1]
2. 반응
브란트 총리가 추념비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인들은 서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는 당연한데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엄청난 고초를 겪은 데다 참혹한 독일과 소련의 전투 와중에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면서 자국민들이 학살당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폴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선은 여전히 쟁점이었다. 따라서 그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반가워할 리가 없었는데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 와중에 추념비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뒤에는 서독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졌다. 폴란드 총리가 브란트에게 감사의 말을 할 정도였다. 혹자는 당시 브란트의 파격적인 사과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는 그가, 이렇게 해야 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무릎을 꿇었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서독이 전쟁범죄를 반성하고 뉘우치고 있다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으며 반독 감정이 심한 폴란드인들도 매한가지였다.
3. 독일에서의 반응
3.1. 기성세대의 비판적 반응
정작 독일 내에서는 사과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기성세대가 많았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잘못한 것은 나치일 뿐 독일군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국방군 무오설이 정설로 퍼져있었고, 심지어 독일이 전쟁에 패배했을 지언정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널리 퍼져있었다.[2] 게다가, 빌리 브란트가 나치를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을 간 것도 논란이 되었다. 자신들이 조국을 위해 싸웠는데, 브란트는 사회민주주의적 신념을 지키려고 노르웨이로 도망간것도 모자라 노르웨이군으로 입대해 독일군과 싸웠다며 브란트를 불신하던 기성세대가 많았다.[3]당시 여론조사에서도 사과가 정당했다는 의견은 41%로, 부당했다는 의견인 47%보다 낮았다. 나치를 겪지 않은 청년층과 양차대전을 모두 겪은 노년층에서는 긍정평가가 높았지만, 기성세대에서만큼은 20%p차가 넘게 부정평가가 우세했다. 젊은 시절 무의식적으로 나치즘에 동조되었으며 그 신념을 쭉 유지한 사람들도 많았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구태여 역사를 들춰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욕보이는 것'에 거부감을 지니는 중장년층이 매우 많았다.
3.2. 청년층 중심의 재평가
그러나 나치 독일에 대한 독일의 미진한 청산에 비판적이었던 당대 진보 청년층에게 있어서는 역으로 브란트가 환영을 받았는데, 이들은 브란트야말로 나치 독일의 잔재를 청산하고 독일을 더 진보적으로 이끌어나갈 리더로 인식했다. 위 여론조사에서도 청년층은 기본적으로는 부정평가가 44%, 긍정평가가 43%로 부정평가가 약간 더 높았지만[4] 모든 세대를 통틀어 긍정평가가 가장 높았고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진보성향의 청년층에게는 긍정평가가 90%를 넘었다.오히려 보수파가 불신임을 운운하자 과거사에 대해 뉘우치지 않는다는 역풍이 불었고, 의욕적으로 일을 하는 신임 총리가 마음에 안든다고 빌미를 잡아 마구 흔들어댄다는 반응도 있었다. 브란트가 자신의 명운을 걸고 의회를 해산해 치룬 1972년 총선에서 브란트는 예상을 꺾고 압승을 거두었고, 안정적인 재선에 성공하게 되는데, 이는 청년층의 압도적인 브란트 지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후로도 청년층들은 브란트가 퇴임한 뒤에도 브란트가 주도한 사회민주당 내 좌파 그룹의 충실한 지지자로 남아, 1980년대까지도 헬무트 슈미트를 위시로 한 사민당 보수파를 압박하는 당내 소장파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주도한 나치 청산 역시 빛을 발하게 되었다.
4. 번외: 오데르-나이세 국경 확정 논란
한편 브란트의 무릎 꿇기가 또다른 의미로 논란이 된 것은, 그가 사과를 빌미로 과거 영토의 소유권을 자기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항목을 참조할 것. 당시까지만 해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인해 소련 등에 의해 동방 영토를 강제로 상실한 것은 연합국의 일시적인 조치였으며 동방 영토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회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에 의해 분리되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던 자를란트는 1957년에 외교적인 노력으로 서독이 재병합한 바 있었다.이때까지만 해도 독일인들에게 통일은 동독은 물론,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등 동방 영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서독에서는 한때 동방 영토에서 강제로 쫓겨난 실향민들이 정당을 구성하여 총선에서 수십 석씩 차지했을 정도였다. 당시 많은 독일인들은 동방 영토 역시 자를란트처럼 외교력에 의해 언젠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브란트가 동방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이를 위해 일방적으로 동방 영토를 포기해 버리자 대해 거센 역풍이 있었다. 특히 실향민들에게 브란트는 조상 대대로 수백년간 살아 온 고유한 영토를 개인의 영달과 1972 뮌헨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마음대로 팔아먹은 매국노로 여겨졌을 정도이다.
이로 인해 야당이었던 기민당은 물론이고 연정 파트너 자민당에서도 상당한 반발이 일어나 급기야 의회에서 불신임 결의를 받게 되었다.[5] 결국 독일연방공화국 사상 최초이자 유이한 불신임 투표가 치러졌지만 우여곡절 끝에 불신임 투표에서 2표 차이로 극적으로 부결되면서 간신히 총리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2표 차이로 간신히 불신임을 면했지만 이미 연정이 붕괴되어 내각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의회에서 과반을 잃게 되어 향후 정권의 존립 당위성이 사라진 상태였다.
한편 당시 브란트의 불신임 투표에 1968년부터 서독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있던 소련은 발칵 뒤집어졌다. 1971년 정상회담을 통해 브란트에게 개인적 호감을 느끼기도 했던 소련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브란트를 지켜 달라고 부탁했고 유리 안드로포프는 독일 연방의회를 매수하는 계획까지 검토하기도 했다. 실제로 동독 슈타지는 브란트 불신임표를 차단하기 위해 기민련에 5만 마르크를 퍼붓기도 했다.
[1]
당시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폴란드 총리 유제프 치란키에비치(Józef Adam Zygmunt Cyrankiewicz)는 다음 행선지로 가는 차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울었다. 치란키에비치 자신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피해생존자 당사자였는데도 그랬다. 그리고 “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라고 말했다. 브란트는 갑자기 머리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답했고 바르는 이를 두고 "만행을 저지르지 않은 한 사람의 머리에 떠오른 한 순간의 영감으로 우리는
역사적인 죄과를 고백할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2]
무릎꿇기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 민족민주당이라는 네오나치 정당이 원내 입성 목전까지 갔다가 실패했을 정도였다.
[3]
때문에 브란트는 노르웨이군에 입대했을 뿐 독일군과 싸우지 않았다고 여러차례 인정해야했다.
[4]
노년층은 부정 42%, 긍정 41%로 유보층이 더 많았다.
[5]
브란트가 동독에게 경제지원을 하는 '동-서독 기본조약'까지 체결하여 반발이 더 거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