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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03:16:39

히틀러가 되었다

히틀러가 되었다
파일:히틀러가 되었다.jpg
장르 대체역사, 전쟁
작가 종이호랑이
출판사 영상출판미디어
연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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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간 2022. 12. 30. ~ 2024. 04. 15.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등장인물
4.1. 독일
4.1.1. 나치당4.1.2. 군부4.1.3. 민간인
4.2. 영국4.3. 프랑스4.4. 이탈리아4.5. 덴마크4.6. 노르웨이4.7. 유고슬라비아 → 세르비아4.8. 스페인4.9. 포르투갈4.10. 터키4.11. 소련4.12. 자유 러시아4.13. 미국4.14. 중국4.15. 일본4.16. 한국4.17. 베트남4.18. 인도네시아4.19. 인도4.20. 에티오피아4.21. 아르헨티나4.22. 쿠바
5. 개변된 역사
5.1. 독일5.2. 영국5.3. 프랑스5.4. 이탈리아5.5. 북유럽5.6. 남유럽5.7. 동유럽5.8. 소련5.9. 자유 러시아5.10. 미국5.11. 중국5.12. 일본5.13. 한국5.14. 동남아시아5.15. 인도5.16. 에티오피아5.17. 아르헨티나5.18. 쿠바
6. 평가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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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작가는 종이호랑이.

히틀러에 빙의한 현대인을 소재로 삼은 판타지 소설이다. 약칭은 히틀러됨 혹은 히틀됨.

2. 줄거리

하루아침에 히틀러가 되었다. 그저 게임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본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가능할까?
폰게임이 취미인 백수 한국인 주인공이 강철의 심장이란 폰게임[1]을 발견하고 아돌프 히틀러로 플레이하는 순간, 진짜 히틀러에 빙의했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역사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군대에 말뚝을 박지만 그 결과 독일에서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켜 내전이 터지고 폴란드군이 쳐들어와 싸우다가 사망,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더니 또 공산당 때문에 내전이 터지고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아 사망, 스위스로 이민을 갔더니 트럭에 치여 사망, 간신히 트럭을 피했더니 강도에게 칼을 맞아 사망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다가 게임 시작 시에 봤던 미션 문구를 떠올리고 회귀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독일 총통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된다고 판단, 히틀러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 독일의 고토를 대부분 되찾고 평화롭게 지내려 했으나 갑자기 융커들이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감금당하고, 내전이 터지자 주변국들이 끼어들면서 결국 소련군이 베를린에 입성하기 직전 지하실에서 끌려나와 총살당했다.

결국 다섯 번째 회귀에선 히틀러처럼 총통이 되긴 하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미래지식을 이용해 원 역사의 나치 독일이 저지른 실수를 답습하지 않고 독일을 개혁해나가며 승리로 이끌기로 결심한다.

3. 연재 현황

문피아 연재 이전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연재되었다.

이후 문피아에서 2022년 12월 30일부터 연재를 시작하였다.

2023년 2월 24일 유료화되었다.

2024년 4월 15일에 총 366화로 완결되었다.

4. 등장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4.1. 독일

4.1.1. 나치당

4.1.2. 군부

4.1.3. 민간인

4.2. 영국

4.3. 프랑스

4.4. 이탈리아

4.5. 덴마크

4.6. 노르웨이

4.7. 유고슬라비아 → 세르비아

4.8. 스페인

4.9. 포르투갈

4.10. 터키

4.11. 소련

4.12. 자유 러시아

4.13. 미국

4.14. 중국

4.15. 일본

4.16. 한국

4.17. 베트남

4.18. 인도네시아

4.19. 인도

4.20. 에티오피아

4.21. 아르헨티나

4.22. 쿠바

5. 개변된 역사

5.1. 독일

폴란드 침공 때까지는 대체로 원 역사와 같은 길(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 뮌헨 협정, 체코 합병)을 걸어갔다. 다만 원 역사와 달리 빙의자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인종차별을 공식적으로 배격하고 인종보다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우선시한다. 때문에 이 세계에서는 유대인이 나치 독일에 호의적인 아이러니를 보이고 있다. 독일 공군에 유대인 표식인 육망성을 그린 Bf 109가 날아다니고 폴란드에는 폴란드 저항군을 사냥하는 유대인 부대 존더코만도가 편성되어 엄청난 지원자가 모였으며 독일과 영국이 협상하자 영국 유대인 협회가 찬성 선언을 했다. 흑인, 일본 외 동양인들 역시 히틀러와 독일에 호의적이다. 또한 히틀러유겐트 BDM은 정치교육은 일절 없고 가입도 자유인 국가 공인 헬스클럽으로 변모했고 덕분에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독일의 거의 모든 청소년이 가입했다.

원 역사에서 동맹이었던 이탈리아는 안슐루스를 위해 에티오피아에 군사고문단 파견과 무기 지원으로 이탈리아군의 전설과 국력 소모를 만들었고, 일본 역시 중국에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지원하며 거리를 두었다. 또한 히틀러의 미래지식을 활용해 3호 전차 계획을 폐기하고 4호 전차 비스마르크급 전함,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 등의 전쟁병기를 훨씬 효율적이고 우수하게 설계, 생산하였으며 독일군 미니어처 시리즈와 젠가 등을 개발해 판매하며 고정 수입원을 만들었고, 폴란드를 정복한 뒤 유화책을 실시해 독일의 폴란드 통치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폴란드 전역 이후에는 영국이 먼저 노르웨이를 공격하게 되면서 발트 지역에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35] 그리고 노르웨이 전역에서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둘을 잃는 대신 영국 해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36] 승리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를 원 역사의 6주보다도 빠른 4주 만에 무너뜨리고, 됭케르크 철수작전마저 차단하며 압승을 거둔다. 이후 핼리팩스가 집권한 영국과 강화조약을 맺고 페탱이 집권한 프랑스로부터 알자스-로렌을 할양받고 프랑스 해군 대부분을[37] 뜯어갔으며 에티오피아 지원 때문에 사이가 악화되어 선전포고하였던 이탈리아도 힘으로 털어버리며 안슐루스 이전 오스트리아가 상실했던 영토를 모두 되찾고 이탈리아 해군 일부를[38] 인도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병합한 에티오피아 알바니아를 독립시켰다.

이후로는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이 해방된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독립 보장으로 참전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응징한다.[39] 그리고 베오그라드까지 뚫어버리며 유고전에서 가볍게 승전하고 유고를 해체하고 슬로베니아를 할양받는다. 그리고 그리스 역시 알바니아와 불가리아를 지원하여 간접적으로 응징한다.

그러나 그 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미국에게 예고했으나 무시당하고, 영국에서는 처칠이 핼리팩스를 내쫓고 집권하고 독일에게 IRA를 지원했다는 누명을 씌워 반독 여론을 고조시키고,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국경을 봉쇄하여 독일과 중국 간의 교류를 끊는 것도 모자라 기어코 독일을 선제공격할 계획을 세우는 등, 본래 적대할 생각이 없었던 국가들이 적으로 돌아서는 상황이 된다.

결국 소련의 선제공격을 당하지만, 직전에 탈영병을 통해 공격 시점을 파악하고 동원령 선포 및 대비를 맞춰놓았기에 역공을 가해 소련에 큰 피해를 입히고 종속됐거나 동맹을 맺은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을 독소전에 호출한다. 그리고 신무기와 뛰어난 전술을 바탕으로 소련군을 역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원 역사의 나치가 저지른 실수를 담습하지 않기 위해 레벤스라움 계획은 폐기하고, 친독 괴뢰국들을 동유럽에 세우기로 방침을 잡는다. 다만 영토 확장을 바라는 부하들과 국민들의 눈치를 봐서 벨라루스 서부, 갈리치아까지는 독일의 영토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영국도 선제공격을 하자 그동안 빽빽하게 건설한 대공망과 루프트바페를 이용해 영국 공군을 사냥하고, V2 미사일로 영국을 폭격하고 식민지 각지에서 반군을 지원하고 주요 해역마다 기뢰를 도배하며 영국을 고립시킨다.

이후 영국이 전세를 뒤집기 위한 도박으로 디에프에 상륙하지만 미리 요새화를 시켜 손쉽게 막아냈으며 되려 지진폭탄 레제와 유도폭탄 프리츠 X전함 4척, 항공모함 2척을 격침시켜 영국 해군을 빈사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소련군 최후의 공세까지 막아내며 독소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자유 러시아 공화국을 세운다. 그 다음 영국을 쓰러트리기 위해 바다사자 작전을 시행하여 영국에 상륙하고, 미국이 선전포고하자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자신의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내부 분열을 유도한다. 마침내 영국을 상대로 승리하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전쟁이 끝나 동원령을 해제하고 병사들을 제대시키며 경제회복에 들어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당초의 계획을 수정, 유럽에서 소련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청색 작전을 개시, 2차 독소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침내 우란프로옉트의 성공으로 핵무기를 개발해 소련에 투하하여 항복을 받아내며 2차 독소전쟁까지 승리한다.

그렇게 유럽 전체를 손에 넣는데 성공하는데, 한때 적으로 싸웠던 미국으로부터 대일전 참전 요청을 받자 이를 승낙,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극동에 병력을 파병하여 만주에 있는 관동군을 분쇄해버린다. 그리고 일본의 항복마저 받아내며 마침내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전후 공을 세운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한편, 모스크바에서 전범재판을 치른다.

미국과의 냉전에 접어들면서 인도의 독립을 지원하는 한편 미래를 대비해 수도를 재개발하고, 정상회담을 통해 전 세계를 독일과 미국의 영역으로 양분하고[40] 소아마비 백신을 공동 연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아시아 순방을 떠나 중앙아시아, 인도, 티베트, 중국,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여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 경제가 안정되면서 집집마다 폭스바겐 비틀이 보급된다.

한편 독일에게 패배한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정국이 불안해지자 예의주시하다 내전이 터지자 그리스 정부의 요청으로 먼저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 와중에 아르헨티나에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일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 의사를 밝힌다. 그 뒤 이탈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내전에도 개입하여 두 내전을 빠르게 끝낸다.

이후 스위스까지 중립을 포기하고 추축국에 가입하며 바티칸을 제외한 유럽 전체가 추축국에 가입하자 유럽연합을 창설한다. 그리고 원자폭탄을 넘어서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니체 프로옉트와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바그너 프로옉트를 진행한다. 그 뒤 중국-몽골 전쟁에서 중국이 밀리기 시작하자 자유 러시아를 움직여 소련을 압박해 전쟁을 끝낸다. 그리고 1950년 V4 로켓 개발에 성공하고, 1951년 니체 프로옉트에도 성공해 수소폭탄을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대구 전쟁이 터지자 미영독 3자 회담을 통해 빠르게 끝내고 해가 가기 전에 IRBM인 V5 로켓 개발까지 성공한다. 또한 오록스 복원 연구가 계속된 끝에 오록스와 비슷한 거대한 소 품종 개발에 성공, 이를 이용해 라이히스부르거라는 맥도날드 비슷한 프랜차이즈를 창설한다.

그리고 미국에게는 미독 공동 우주 탐사와 핵무기 감축을 제안하고,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자 중립을 지키기로 한다. 그리고 ICBM인 V6 로켓 개발까지 성공하여 인공위성 발사를 준비하고, 마침내 1953년 10월 4일 최초의 인공위성 바그너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11월 3일에는 저먼 셰퍼드 블론디를 태운 바그너 2호를 발사하고, 1954년 5월에 바그너 3호까지 발사한다.

그 뒤 미국에서 소아마비 백신이 개발되자 이를 축하하며[41] 미국에게 백신을 공급받아 유럽에 배포하는데,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과 폴란드 보호령, 세르비아에서 독일에 대한 의심 탓에 백신 반대 운동이 일어난다. 다른 둘은 소아마비가 확산되자 얼마 안 가 사그라들었지만, 세르비아에서는 백신 반대 운동도 모자라 반독 시위가 갈수록 심해지다 폭동이 터지자 주변국들과 함께 개입해 폭도들을 진압한다. 그리고 1958년 4월 12일, 체펠린 1호를 발사하며 최초의 우주 비행사 베른하르트 크라머를 배출한다.

그리고 미국과 서로간에 정찰기를 보내고 있던 중 유럽 상공에서 U-2를 격추하고 조종사 게리 파워즈를 생포했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닷새 간의 회담을 통해 서로 정찰기를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게리 파워즈를 미국으로 송환하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미독간 핫라인을 설치하고 군비 제한을 논의하였다.

이후 미국과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져 전략무기제한협정과 미독 우주 개발 상호협력을 결정한다. 그리고 라이히스부르거를 통해 벌어들인 돈과 미국이 지원해준 돈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우주 개발에 투자한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 7월 21일, 에두아르트 샬모저가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32년 만에 히틀러가 은퇴를 선언하자 전국에서 반대 시위가 열렸지만 히틀러가 이를 철회할 생각이 없음을 밝히며 설득한 끝에 시위는 잦아들었으며, 괴링이 2대 총통으로 취임한다. 그 외의 히틀러의 측근들도 대부분 은퇴한다.

1972년 4월 30일 히틀러가 사망한 후 3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으며, 각지에서 400여 명이 충격으로 졸도했고, 베를린은 추모객들이 밀려들어 대중교통이 마비되었고, 무려 3천만 명에 달하는 역사상 최고 기록의 조문객들이 다녀갔으며, 150개국에서 조문 사절이 파견되었고, 수많은 나라에서 히틀러의 장례식을 생중계하여 무려 8억 명 이상이 이를 시청했다. 히틀러는 베를린의 전사자 묘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괴링에 의해 총통기념관이 건설되어 거기 매장되었고, 히틀러가 말년을 보낸 집과 생가는 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히틀러가 주창한 국가사회주의는 히틀러주의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타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1982년에는 화성에 최초로 지크문트 얀을 태운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것에 성공했다.

현대 시점에는 미국과 더불어 GDP 2위, 군사력 1위의 양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노닐며 일상을 영위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또한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은 아돌프 히틀러 국제공항으로 개명되어 여전히 운영 중이며, 뮌헨 국제공항은 헤르만 괴링 국제공항으로 개명되었다. 라이히스부르거는 맥도날드와 함께 버거업계를 양분하며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히틀러가 한식을 즐겼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한식도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고 화성에 지크문트 얀 유인 우주기지의 건설을 추진 중이다.

5.2. 영국

우리 시대의 평화까지는 원 역사와 같았으나 처칠 노르웨이 침공의 실패로 실각하고 이후 집권한 핼리팩스 경에 의해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개전 후 처칠이 핼리팩스 경에게 책임을 돌려 실각시키고 총리 자리에 올라 뒤에서 소련과 손을 잡고 독일이 IRA를 지원했다는 누명을 씌워 반독 여론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일본이 영국령 식민지를 침공해 일본과 전쟁 중이고 말레이 해전에서 죽을 쒀버린 상황에서 일본과 적대하고 암묵적인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독일을 굳이 공격할 명분이 없고, 인도 독립 세력과 아일랜드 정부, 심지어 처칠이 누명을 씌운 것에 열받은 IRA까지 정말로 독일에 붙어버린데다, 소련의 선빵으로 독소전쟁이 개전된 후 소련이 독일의 거센 반격에 일방적으로 털리게 되면서 함부로 독일을 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럼에도 소련을 지원하려 했지만 소련의 스파이였던 케임브리지 5인조가 적발되며 명분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IRA의 과격파가 폭탄 테러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이를 명분 삼아 기어코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에 폭격을 퍼부으나 빽빽하게 건설된 독일의 대공망과 분노에 미쳐서 추격해오는 루프트바페에게 사냥당함은 물론, 국토 전체가 V2 미사일의 사정권인지라 매일 폭격을 맞게 생겼다.[42] 그리고 북아일랜드, 인도,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 각지에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들고 일어났으며 바브엘만데브 해협, 지브롤터 해협, 수에즈 운하가 기뢰로 도배당하며 전쟁 수행에 엄청난 차질이 생겼다. 그리고 디에프 상륙작전도 실패하고 독일의 공격으로 전함 4척, 항공모함 2척이 격침되며 해군이 빈사 상태가 된다.

이후 독소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며 독일의 병력 상당수가 서부전선에 배치되는 와중에도 히틀러의 삼자회담 제안도, 중국의 중재 제안도, 내부의 반전 여론도 계속 무시하며 독일과의 전쟁을 이어가지만, 바다사자 작전이 시행되며 독일군이 영국 본토에 상륙하고 런던까지 독일군이 밀고 들어오자 그제서야 미국을 끌어들여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지만 결렬된다. 더군다나 독일군의 폭격으로 국왕 부부가 사망하였으나 이 일이 영국군의 소행으로 알려지며 사기가 바닥을 치게 되었고, 결국 독일에게 전 국토가 유린당하며 패배한다.

그 뒤 다수의 식민지들은 독립하거나 추축국에 할양, 북아일랜드 아일랜드에 할양, 본토에는 독일의 지령을 받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괴뢰정부가 설립되어 퇴위했던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복위한다. 다만 영향력은 본토에 한정되고 있다. 이 파시스트 영국이 아이슬란드와의 어업 분쟁으로 인해 대구 전쟁이 발생한다. 다행히 미영독 3자 회담을 통해 대구 전쟁을 끝냈지만, 아이슬란드의 소요 사태를 틈타 또다시 인근 해역에서 대구를 잡기 시작해 충돌의 여지가 남아있다.

한편 애틀리를 비롯한 내각이 캐나다로 도망쳐[43] 망명정부를 세웠는데, 영국 망명정부는 여전히 정통정부로 인정받으며 영연방 국가들을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식민지의 독립 물결은 막을 수 없어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 버마, 트란스요르단 등은 이미 독립해버렸고, 인도만이라도 지키려고 애를 썼으나 이미 인도의 독립은 시간 문제나 다름없는 상황에 돈과 인력을 갈아넣다 보니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에게도 적대감을 사게 되었고, 결국 인도를 포기하고 독립시키는 대신 종교, 민족, 카스트 간의 갈등을 이용해 분열시킨다. 그래도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세계 곳곳에 위성국과 식민지가 남아있어 다른 망명정부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 포클랜드 제도를 노리며 기어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자 위성국과 식민지에서 군대를 소집해 아르헨티나와 싸우고 승전한다. 이 덕분에 망명정부의 위상은 지켜내면서 남아있는 식민지들은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5.3. 프랑스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의 맹공으로 원 역사의 6주보다도 빠른 4주 만에 무너진다. 이후 필리프 페탱이 집권해 독일에게 알자스-로렌을 할양하고 프랑스 해군 대부분을[44] 넘겨주는 대신 프랑스군 포로 전원 석방, 프랑스 군정청 계획 취소[45] 식민지 유지, 재무장 허용을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후 히틀러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미리 엘리베이터를 지키도록 지시해서 원 역사와 달리 에펠 탑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며, 앵발리드 참배 후에는 르 트랑 블루에서 여유롭게 식사까지 하고 떠났다. 한편 샤를 드골이 영국으로 망명해 프랑스 망명정부를 세웠지만 어느 국가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독소전쟁이 개전된 후 소련에 선전포고를 날린다. 그리고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서 영국군에게 폭격을 맞은 후 독일군과 함께 영국을 공격한다. 이후 독일이 영국을 상대로 승리를 앞두자 빈 회담에서 전후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 대다수를 넘겨받게 되면서 아프리카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된다. 다만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이 여전히 망명정부에게 충성하며 프랑스군을 번번이 격퇴하고 있어 실제로 점령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는 차지하지도 못하고 되려 동남아시아 식민지가 독립하고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도 독립 여론이 일어나는 등 입지가 좁아져가자 어떻게든 남아있는 식민지라도 유지하기 위해 페탱이 식민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모든 식민지인들을 프랑스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마을마다 학교와 병원도 지어주고, 최대한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독립만 하지 않으면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이러한 선언은 실제로 식민지인들의 환심을 사고 독립 여론을 가라앉혔으나, 정작 프랑스 본토에서는 불만을 사면서 쿠데타 미수 사건이 터지고 이를 빌미로 독일의 간섭이 더 심해진다. 그나마 페탱의 권력이 더 강해져 페탱의 의도대로 식민지는 유지하고 있는 중.

페탱의 사망 후 라발이 국가원수 직위를 물려받으며 더더욱 친독 성향을 보이고 있다. 라발이 죽고 미테랑이 국가원수가 된 후 68운동을 연상케 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미테랑은 시위대의 요구를 즉시 받아들여 빠르게 시위를 해산시킨다. 시위대가 독재의 완화를 외치긴 했어도 반독을 외치진 않았고, 미테랑도 반독 성향은 보이지 않았기에 독일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5.4. 이탈리아

원 역사처럼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켜 에티오피아를 공격해 점령했으나 독일의 에티오피아 지원과 오스트리아 병합 때문에 독일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2차대전에서 연합국 편으로 참전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무솔리니의 공격은 독일 산악 사단에 막히고(...) 역공을 당해 독일에게 이탈리아 북부가 점령당하고 주요 도시들이 폭격당해 무솔리니가 원 역사보다 일찍 총리직에서 잘리게 되고,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트롤링으로 로마가 불바다가 된 끝에 결국 항복하고 독일에게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이스트리아 반도를 할양하고 이탈리아 해군[46] 대부분을 독일에게 넘겨주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알바니아, 에티오피아를 독립시켰다. 그나마 리비아,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는 유지하고 있다.

이후 처칠이 독일과의 재전쟁을 준비하면서 이탈리아에 사람을 보내 참전 의사를 타진해보나, 압도적인 패배로 인하여 독일에 승산이 없는 것을 깨달은 바돌리오에게 피해 복구가 우선이라는 명목으로 단칼에 거절당한다. 이후 에마누엘레 3세가 독일에게 배상금 탕감과 영국 식민지 할양을 대가로 자기들도 대영전에 참전하겠다고 제안하지만 히틀러에게 단칼에 거절당한다.

전후에도 여전히 왕실과 파시스트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경제가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어 미국이나 남미로 이민을 가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으며, 국왕과 파시스트당은 물론 독일에 대해서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바로 체포될 정도로 독일의 눈치를 살피다 보니 반대 세력이 늘어나며 왕실과 파시스트당이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세를 불리고 로마에서 폭탄 테러 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등 점차 심각해지다가, 로마에서 시위대가 검은 셔츠단을 구타하자 검은 셔츠단이 발포하며 '피의 토요일'로 불리는 대참사가 일어나면서 왕정 폐지와 국가 파시스트당 해체를 내건 국민해방위원회가 결성되어 로마를 점거하고, 국왕과 파시스트당이 나폴리로 도주하며 내전이 터지고 만다.

국민해방위원회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4할 정도 되지만 여전히 국왕과 파시스트당을 지지하는 국민들도 6할 정도로 제법 많아 내전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는데다, 로마 외에도 여러 도시에서 파업과 시위가 일어나고 있고, 내전으로 안 그래도 높은 물가가 끝을 모르고 치솟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등 수렁에 빠지고 있다. 갈수록 국민해방위원회가 유리해지자 별 수 없이 독일에 지원을 요청한다. 독일이 개입하자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정부의 승리로 내전이 끝나지만, 국왕과 파시스트당도 민심을 잃었기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내전의 책임을 지고 아들인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하고 퇴위했고, 파시스트당 역시 해체 후 독일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정당이 창당되어 집권한다.

하지만 리비아의 독립운동은 이미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리비아의 독립을 승인한다.

5.5. 북유럽

원 역사에서는 독일이 베저위붕 작전으로 노르웨이를 침공하며 적국이 되었지만, 여기서는 처칠이 윌프레드 작전으로 노르웨이, 덴마크를 공격하고 스칸디나비아 3국의 국민들에 피해를 입혀 북유럽을 적으로 돌리는 바람에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47] 3국이 독일의 동맹국이 되었다. 종전 이후로도 독일의 주요 우방국으로 대우받아 무기를 수입하고 있다.

한편 핀란드 겨울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패한 뒤 독일의 지원을 받아 재건되며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이후 독소전쟁이 터지자 친독 성향의 국가들이 일제히 소련에 선전포고를 날린다. 핀란드는 소련과 또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소련군기가 독일을 폭격하려다 밀려나서 핀란드 영공을 침입한 것을 격추하자 얼른 생존자를 반환하였지만 의심병에 걸린 스탈린이 핀란드 재침공을 지시하며 계속전쟁이 시작되었다. 북유럽 국가들의 참전병력들은 핀란드 전선에서 소련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은 지원대로 받아먹으면서 레닌그라드와 무르만스크 공략에 힘을 보태달라는 독일의 요구를 무시하고 겨울전쟁 당시 빼앗긴 자국 영토를 되찾는 것에만 집중하는 트롤링을 저지른다. 정작 그러고도 자국 영토 탈환을 실패한 건 덤.

독소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승전국이 되었지만 전쟁 내내 핀란드의 트롤링을 잊지 않았던 히틀러는 카렐리야 콜라 반도를 합병하게 해달라는 만네르하임의 요청을 무시하고 자유 러시아의 영토로 확정짓는다. 이 일로 독일과의 관계가 냉랭해졌지만 유일한 끈이 독일뿐임을 아는지라 어쩌지도 못하고 설설 기는 중.

이후 스칸디나비아 3국은 대영전에도 참전하여 활약하는데, 윌프레드 작전으로 반영 감정이 극에 달한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점령지의 영국인들을 독일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탄압하는 바람에 영국인들이 저항군을 결성해 이들을 공격하고 노르웨이와 덴마크도 영국인들을 더 심하게 탄압하는 등 점령지가 개판이 되었고, 영국이 패배한 후 영국 본토 관리를 맡게 되지만 워낙 가혹한 모습 때문에 영국인들의 반발을 우려한 히틀러에 의해 물러나고 핀란드가 그 자리를 대신 맡게 된다.

한편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는 윌프레드 작전 당시 영국이 점령했다가 핼리팩스가 집권한 후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덴마크에 반환했으나, 처칠이 집권한 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다시 연합군이 점령하였다가 매각 형식으로 미국에 넘어갔고, 전후 그린란드는 미국에 합병되었고, 아이슬란드는 독립했다.

그런데 독일이 영국을 점령하면서 영국에 있던 피난민들이 아이슬란드로 몰려들었고, 전후에도 나치가 싫은 유럽인들이 자꾸 아이슬란드로 넘어와서 아이슬란드인은 14만 명인데 이민자가 그 3.5배에 이르는 50만 명이 되었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대비해 연합군이 상시 주둔하며 아이슬란드인들을 통제하는 탓에 계속해서 불만이 쌓여가던 중, 파시스트 영국과의 어업 분쟁으로 대구 전쟁이 발생한다. 다행히 미영독 3자 회담을 통해 대구 전쟁을 끝냈지만, 이 과정에서 아이슬란드의 의중은 반영되지 않았고 결국 민심이 폭발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다. 결국 미국이 아이슬란드의 요구를 받아들여 지원을 늘리고, 통행 제한 조치를 대거 해제하고, 이민자들을 미국, 캐나다, 영프의 속령으로 이주시켜 사태를 마무리짓는다.

5.6. 남유럽

이탈리아가 독일에게 패배한 후 알바니아가 독립하였고, 스페인은 내전 후 철저히 친독 기조를 유지하며 독일에게 협력하고 있고, 포르투갈은 독일에게 굴복하여 군의 현대화를 대가로 아조레스 제도 마데이라 제도를 조차하여 대서양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이후 독립한 알바니아를 유고슬라비아 그리스가 침공하였고, 독일의 중재 시도가 무시당하고 베오그라드에서 독일 대사관이 습격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결국 독일은 알바니아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는 철저히 유린당하고 항복하였고 결국 해체당하게 된다.[48] 그리스는 독일이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를 지원하며 간접적으로 응징하였고 결국 둘에게 배상으로 영토를 넘기고[49] 독일의 자유로운 항구 이용과 독일군 주둔 허용을 조건으로 종전하게 된다.

이후 독소전쟁이 터지자 친독 성향의 국가들이 일제히 소련에 선전포고를 날린다. 그 뒤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자 스페인은 지브롤터를 공격해 점령하고 전후 영국령 서인도 제도를 할양받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거기까지 갈 방법이 없고 미국이 자기 앞마당에 추축국 식민지가 들어서는 걸 용납할 리 없어서 실제로 점령하지는 못하고 있다.

터키는 친독 성향을 보이면서도 독소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제안으로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키프로스를 점령해 차지한다.

전후 그리스에서 공화파와 공산당이 세를 불리며 왕정 폐지를 부르짖고 있다. 다만 이탈리아에 비하면 공산당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보니, 사람들을 선동해 시위를 일으킨 후 시위대에 섞인 공산당원들이 먼저 경찰에게 발포하고, 당황한 경찰들이 응사해 시민들이 죽게 만든 후 그 책임을 경찰에게 덮어씌우는 방법을 사용했고, 분노한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이자 이때를 틈타 봉기를 일으키며 내전이 터지고 만다. 여기에 터키, 불가리아, 알바니아가 내전을 틈타 침공할 기미를 보이며 나라가 삼갈죽당할 위기에 처하자 독일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후 독일이 개입하면서 반군이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하고, 반군 점령지에서 학살까지 일어나며 여론이 정부 쪽으로 돌아선다. 그렇게 순식간에 정부의 승리로 내전이 끝난다.

한편 스페인령 모로코 스페인령 사하라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일에게서 존더코만도와 형벌부대를 지원받아 이를 진압한다.

이후 세르비아에서 신 흑수단이 결성되어 유고슬라비아 시절로의 회귀를 외치며 추축국, 유럽연합 탈퇴, 1940년 국경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백신 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갈수록 세를 불리며 기어코 폭동을 일으켰다가 독일을 비롯한 주변국의 개입으로 진압된다.

그 뒤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포르투갈은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랬듯이 식민지에게 최대한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대신 저항세력들은 철저히 진압하여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한다.

5.7. 동유럽

폴란드는 원 역사처럼 폴란드 침공에서 패배해 병합된다. 그러나 히틀러가 폴란드인 탄압을 금지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폴란드 제2공화국 치하에서 탄압받은 폴란드 유대인들을 우대하며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민족갈등을 부추겨 원활하게 분할통치를 하고 있으며, 유대인들로 구성된 존더코만도 부대를 통해 파르티잔을 소탕하고 있다. 이후 존더코만도는 폴란드 외에도 동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는 반독 게릴라들을 소탕하고 스페인령 모로코와 사하라에도 파견되어 독립운동을 제압하였다.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해당 국가들을 점령하고 현지인들과 협력 체제를 갖추기로 하면서 이들은 독립한다. 발트 3국은 스웨덴으로 망명했던 정부가 다시 복귀했다. 벨라루스는 망명정부가 반독 성향을 띠고 있어 이를 대신해 새로운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우크라이나는 강경파 OUN-B 소속인 스테판 반데라와 야로슬라우 스테츠코가 각각 대통령, 총리로 취임하고 온건파인 멜닉이 대통령 상임고문 겸 민족위원회 최고의장으로 취임하며 견제 체제가 갖추어진 정부가 수립되었다.[50] 이후 영국 본토 침공이 시작되자 독일을 돕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였다.

5.8. 소련

원 역사처럼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패배시키자 스탈린이 두려움을 느끼고 독일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 뜻이 맞던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남사할린을 다시 할양받는 대가로 자작극을 일으켜 중국-소련 국경을 봉쇄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흘린 역정보에 낚여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숙청시켜버린다.

그리고 독일을 선제공격하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하며 큰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소련군의 공습을 함께 당한 루마니아, 헝가리, 독일에 우호적이거나 종속된 국가들인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수많은 국가들의 선전포고 스팸을 맞게 된다.[51] 그리고 바쿠 유전이 독일군의 지진폭탄 폭격으로 인해 약 6개월 이상 가동 중지되는 치명타를 입었다. 그 와중에 당장 참전할 생각은 없던 핀란드까지 의심하며 핀란드를 침공해 스칸디나비아 극단부터 흑해까지 전선을 지나치게 늘리는 악수를 두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루마니아에게 헝가리, 불가리아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게 해줄 테니 편을 바꾸라는 제안을 하나 거부당하고 이것이 독일을 거쳐 불가리아에게 흘러가 불가리아가 단교를 선언하고 독일 편으로 참전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우호국마저 잃고 말았다. 유일한 우호국은 괴뢰국인 몽골뿐이라서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설상가상으로 영국과 미국에 스파이를 심어놨다는 사실까지 히틀러에 의해서 뽀록나면서 미국에게서 오던 랜드리스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서 기름이 부족해져서 풍전등화인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방어 태세로 전환하였지만, 스탈린선을 믿고 남부의 루마니아, 헝가리 방면에 군사를 집중시켰다가 독일이 열차포와 지진폭탄으로 정면돌파를 선택하며 통수를 맞고 밀리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도 스탈린이 후퇴 금지령을 내린 것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독립해 독일에 붙어버렸고 병력 대다수가 죽거나 항복해 포로가 되거나 자유 러시아군으로 전향하였고, 내부에서는 스탈린의 숙청과 소수민족 탄압이 이어지며 혼란이 극에 달하고, 믿었던 영국의 상륙작전마저 실패하자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지만 결렬된다.

결국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며 독일군에게 모스크바가 함락되고 스탈린은 도망친다. 더군다나 히틀러에 의해서 카틴 학살까지 폭로되며 소련에 대한 이미지가 전 세계적으로 바닥을 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군사력을 영끌해 남부전선에서 소련판 아르덴 대공세를 펼치지만 결국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독소전쟁에서 패전,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캅카스 3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모스크바를 비롯한 볼가강 서쪽 유럽 영토에는 자유 러시아 공화국이 세워진다.

볼가강 너머로 밀려난 뒤에도 신무기를 개발하며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었지만, 스탈린의 대숙청과 소수민족들의 무장 봉기가 이어지며 혼란이 심해지고, 특히 반유대주의가 더 심해져 소련 내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유대인 자치주로 강제 이주당하고 반발하는 이들은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그러나 쿨리크의 반란이 기폭제가 되어 내전 상태에 빠지고, 유대인들도 반란에 호응해 유대인 자치주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였고, 그 틈을 타 독일이 침공을 개시하여 2차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그나마 쿨리크와 유대인들의 반란은 진압하는데 성공했으나, 독일군은 당해내지 못하고 끝내 독일의 핵무기를 맞고 항복, 중앙아시아 5국의 독립까지 인정하고 유럽 영토 전부를 자유 러시아에 넘겨주고 물러나며 아시아 국가로 전락한다. 이후로도 독일에게 배상금을 갚느라 영토 탈환이나 공산주의의 확산은 꿈도 꾸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미독 냉전에 접어든 후 보로실로프가 새로운 서기장이 되어 이르쿠츠크로 천도하고 굴라그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공포정치를 완화하는 한편, 비록 국민감정은 좋지 않아도 일단 독일의 적국인 만큼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52] 악착같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 장제스가 몽골을 침공하자 소련군을 보내 중국군을 격퇴하고 이 참에 내몽골까지 차지할 생각으로 밀고 들어갔으나 독일의 압박으로 진군을 멈추고 전쟁을 끝낸다. 내몽골은 먹지 못했지만 몽골을 지키는데 성공해 사실상 승전하며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낸다.

현대 시점에도 해체되지 않고 남아있으며 몽골도 여전히 괴뢰국으로 두고 있지만 자유 러시아, 중국과는 여전히 국경에서 자주 충돌하고 있다.

5.9. 자유 러시아

러시아 파시스트당 자유 러시아군이 독일의 지원을 받아 독소전쟁에서 소련과 싸웠고, 소련이 볼가강 너머로 밀려나면서 모스크바를 비롯한 볼가강 서쪽 유럽 영토에 세워졌다. 사실상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셈. 일단 소련에게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교류는 이어졌다.

이후 2차 독소전쟁에서 패배한 소련이 나머지 유럽 영토까지 넘겨주면서 독립국들을 제외한 소련의 유럽 영토 전부를 차지하고 소련에게 정식 국가로 인정받는다. 이후 미국 내 백계 러시아인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이 역이민을 오게 된다.

현대 시점에도 친독 국가로 남아있으며 소련과는 여전히 국경에서 자주 충돌하고 있다.

5.10. 미국

원 역사처럼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히틀러가 제시 오언스를 환대한 것이 나비 효과가 되어 유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해 독일계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물론 파시스트, 흑인, 유대인 단체와 미국 공산당까지 반전파를 지지하고 특히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흑인들의 여론이 불타오르자 되려 KKK가 적극적으로 참전을 주장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리고 일본에게 진주만 공습을 당하며 태평양 전쟁이 터지게 된다. 독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루스벨트가 전쟁 중인 일본보다도 독일을 더 경계하고 있어 독일에게 가장 큰 불안 요소로 남아있는 상태. 그러나 독일의 공작에 의해 미국 정부 내부에 소련 스파이가 있던 사실이 드러나 랜드리스를 중단하게 되었다.

작가가 미리 밝힌 바에 따르면 결국 독일과 붙는다고 한다. 사실상 최종 보스. #[53] 결국 영국에 독일군이 상륙하자 거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상원에서 단 1표 차이로 대독 선전포고 결의안이 통과되며 참전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자신의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나고 특히 제시 오언스를 필두로 흑인들이 들고 일어나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벌였으나 시위 진압대가 이들을 쏴죽이는 대형 사건이 터진다. 이로 인해 분노한 흑인들이 흑인 파시스트 반군(BFR)을 결성해 백인들을 학살하고 KKK 역시 흑인들을 학살하는 등 준 내전 상태에 빠지고 버티지 못한 루스벨트가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 와중에도 원정군 파견을 밀어붙이지만 독일군에 비하면 질도, 양도 터무니없는 수준이고, 병사들이 유럽행을 거부해 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54] 흑인 병사들이 아예 자기를 차별하던 동료와 상관을 쏴죽이고 무장탈영하는 일까지 빈번하게 일어난다.

결국 루스벨트가 고혈압이 악화되어 사망한 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월리스가 터스키기 사건과 오언스의 사망으로 분노한 흑인들을 달래고, BFR과 KKK를 강경 진압해 혼란을 수습하면서도 선전포고를 철회하지 않고 영국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지만, 결국 전쟁이 영국의 패전으로 끝나게 되자 독일의 유럽 패권을 인정하는 대신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얀마옌 섬을 구매하는 형식으로 차지하는 조건으로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종전된다.

한편 대일전에서는 원 역사대로 승기를 잡아 일본을 몰아붙이고 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피로도가 쌓이자[55] 한때 적으로 싸웠던 독일에 돈을 미끼로 참전을 요청한다. 이 작전이 먹혀들어 결국 일본이 항복하면서 원 역사처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한다. 전후 도쿄에서 전범재판을 치른다.[56]

독일과의 냉전에 접어들면서 극동 지역의 식민지들의 독립을 승인하여 극동에서의 영향력을 굳히고[57] 독일을 경계해 핵무기를 비롯해 신형 전차, 전투기 등 각종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지만,[58]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토머스 E. 듀이가 승리해 정권이 공화당으로 교체된 후 정상회담을 통해 전 세계를 미국과 독일의 영역으로 양분하고[59] 소아마비 백신을 공동 연구하기로 했다. 다만 미국과 독일 사이에서 간을 보는 국가들이 있다 보니 독일에 이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막대한 양의 원조를 약속하거나, 한국이 독일에게서 무기를 수입하자 이에 질세라 한국에 무기를 팔고 원조도 늘려주는 등 외교전은 벌이고 있는 중. 그러나, 월리스와 듀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한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듀이가 무난하게 승리하였으며, 중국이 몽골을 침공할 계획이라는 걸 눈치채고 중국에 경고하지만 중국이 기어코 몽골을 침공하자 열받아서 원조를 축소해버린다.

그리고 1949년 8월 29일, 독일에 이어 두 번째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독일이 수소폭탄을 개발하자 이에 질세라 수소폭탄 개발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대구 전쟁이 터지자 미영독 3자 회담을 통해 빠르게 끝냈지만, 결국 아이슬란드의 민심이 폭발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내부에서는 매카시즘이 확산되자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어떻게든 아이슬란드 문제는 수습한다.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맥아더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기조가 바뀌어, 매카시를 시작으로 내부의 적으로 지목된 인종차별주의자, 파시스트, 공산주의자들을 작정하고 때려잡고, 인종차별 성향이 강한 남부에서 일어난 시위도 강경 진압하며 혼란에 휩싸인다. 이 틈을 타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자 당장 포클랜드 제도에서 철수하라고 경고하지만 듣지 않자 먼저 브라질을 움직여 아르헨티나를 공격하고 경제제재를 가하는 사이 군대를 소집해 본격적으로 아르헨티나와 싸우고 승전해 아르헨티나를 철저한 미국의 사냥개로 만들어버린다.

한편 독일이 로켓 개발과 인공위성 발사까지 성공하자 바그너 쇼크에 휩싸여 자신들도 로켓 개발을 밀어붙이면서 DARPA NASA를 신설, 본격적으로 우주 경쟁에 뛰어든다.

그 뒤 1954년 4월 12일,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한다.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맥아더가 무난하게 승리하였으며, 이번엔 인도네시아에서 북보르네오와 뉴기니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살벌한 경고를 보내 전쟁을 막는다. 1958년 1월에는 독일에 이어 두 번째로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였고, 그 뒤 뱅가드 위성을 발사했지만 두 차례 모두 처참하게 실패하고 익스플로러 1호만 간신히 발사에 성공한다. 그리고 쿠바 혁명이 일어나자 바티스타 정권을 손절하고,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의 몰수가 시작되자 쿠바에 경제제재를 가한다.

그리고 독일과 서로간에 정찰기를 보내고 있던 중 유럽 상공에서 U-2가 격추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당황했지만 뜻밖에도 독일에게서 정상회담을 제안받자 응한다. 그리고 닷새 간의 회담을 통해 서로 정찰기를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게리 파워즈를 미국으로 송환하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미독간 핫라인을 설치하고 군비 제한을 논의하였다.

독일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쿠바 침공을 결정, 순식간에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고 신정부를 세운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맥아더가 승리하며 3선을 달성했고, ICBM 개발에 성공했으며, 독일과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져 전략무기제한협정과 미독 우주 개발 상호협력을 결정한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태프트가 당선되었다. 태프트는 독일의 달 착륙에 자극받아 5년 안에 미국도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고 발표했고, 원 역사보다는 2년 늦었지만 끝내 유인 우주선 개발에 성공해 정말로 5년 안에 닐 암스트롱이 미국인 최초, 인류 세 번째로 달 착륙에 성공했다.

현대 시점에는 독일과 더불어 GDP 1위, 군사력 2위의 양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다만 멕시코에서 내전이 터지거나 남미 각국에서 히틀러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는 등,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남미에서 자꾸 문제가 터져서 골칫거리인 모양.

5.11. 중국

히틀러 집권 이전 중국의 성장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나의 투쟁이 유통되자 그를 우호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으며, 이후 독일에게 군사고문단을 지원받는다. 또한 빙의된 히틀러의 도움으로 장쉐량을 사전에 처단하고 제6차 초공작전을 수행, 중국공산당을 완전히 박멸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이 현실과는 다르게 잔류하여 중국을 돕고 있다. 이후 장제스가 독일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으며 장제스의 심복인 다이리가 직접 독일로 파견되어 무기 거래를 맡는 등 독일은 중국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거의 유일한 우방 열강이 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자작극을 일으켜 중국 국경을 봉쇄하고 양국 간에 육로를 통한 교류가 끊기게 되고, 국경 봉쇄가 해제된 뒤에도 독소전쟁으로 인해 독일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대신 태평양 전쟁 개전 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 대한 항전을 이어나간다. 이 덕분에 친미, 친독 성향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

이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우방국들끼리 전쟁을 하는 꼴이 되어 양국에 중재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그 뒤 영국이 패전하고 미국과 독일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소련이 2차 독소전쟁에서 패전하여 중앙아시아 5국이 독립하면서 마침내 독일과의 육로가 다시 연결되어 교류가 재개되고, 독일에 미국의 대일전 참전 요청을 전달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며 영토가 해방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한다. 국민당이 집권하고 있어 여전히 수도는 난징이며 베이징은 베이핑으로 불리고 있고, 천안문에는 장제스의 사진이 걸리게 되었다. 전후 피해 복구에 힘쓰면서 군벌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한편, 사실상 독립국이 된 티베트에도 지배욕을 보이고 있었으나 독일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면서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바람에 티베트 합병은 시도도 하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대신 장제스가 몽골을 침공해 합병할 생각을 하고 있다.

문제는 독일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티베트와 달리 몽골은 소련의 괴뢰국이라 미국은 몰라도 소련은 반드시 개입할 것이고, 아무리 소련의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중국도 그다지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 여전히 전쟁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고, 아직도 군벌들이 각지에서 날뛰고 있는데다, 중국국민당의 고질적 문제인 부정부패가 매우 심각해 미국의 지원으로 먹고 사는 처지인데도 얼마 안 되는 원조물자까지 횡령하는 탓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상황이다. 히틀러와 팔켄하우젠도 이런 이유로 우려를 표했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고 있다.

미국도 장제스의 계획을 눈치채고 마셜이 장제스에게 몽골 침공 계획을 포기하고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않으면 원조를 끊을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장제스는 이마저도 듣지 않고 기어코 몽골을 침공했으나 히틀러와 팔켄하우젠의 우려대로 중국군은 소련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되려 내몽골까지 밀려나지만 독일의 압박으로 소련군이 진군을 멈추며 간신히 내몽골은 지킬 수 있었다. 이후 전쟁을 끝내는 대가로 몽골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몽골,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어야 했으며, 전쟁을 일으킨 것에 열받은 미국이 원조를 축소한데다 늦게나마 부정부패를 척결하려 하자 사실상의 패전도 모자라 밥줄까지 끊기게 생긴 군벌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것은 장제스의 계획이었고, 장제스는 몽골 침공 당시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일 때부터 진작에 군벌들을 의심하고 다이리를 시켜 각 군벌의 중심부에 남의사 요원들을 심어둔 뒤였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군벌들을 암살하여 반란을 진압, 부정부패 척결과 군벌들의 처리, 권력 강화까지 이뤄내고 본격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인다.

장제스의 개혁이 진행되고 외국의 투자까지 더해지며 경제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끝에 현대 시점에는 GDP 3위, 군사력 3위의 강대국이 되었다. 공산국가인 소련, 몽골, 베트남과는 여전히 국경에서 자주 충돌하고 있지만 한국을 비롯한 다른 주변국들과는 관계가 원만하며, 동북공정과 내정간섭도 없다. 한국군, 중국군, 미군이 합동군사훈련을 하는 수준이라고. 다만 위구르 독립운동은 원 역사처럼 일어나고 있으며 중국 정부는 이를 탄압하고 있지만, 그래도 신장 재교육 캠프 같은 건 없고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5.12. 일본

독일이 성장하는 동안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독일에 항공모함 설계도 및 각종 건함 기술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독일에서 개발 중지된 3호 전차의 설계도를 받아오는 등 군사적으로 협력했지만, 독일이 예상과 달리 중국의 손을 잡고 중국에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지원하는 등 서서히 거리를 두자 이에 맞서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기로 한다. 이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남사할린을 다시 할양하는 대가로 중국-소련 국경을 봉쇄하여 독일의 지원을 차단시킨다.

이후 기어코 진주만 공습을 일으키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과 동남아도 연이어 침공하면서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유럽도 적으로 돌리게 된다.

그러나 초반에만 승기를 잡았을 뿐 원 역사대로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역 등에서 패전을 거듭하며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되고,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독일에 동맹을 요청하지만 이미 일본의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 개인적인 감정까지 겹쳐서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던 히틀러에게 거절당하고, 독일이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은 뒤 미국과의 평화협정 중재를 요청해보지만 역시 거절당하고 되려 미국의 참전 요청으로 독일마저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결국 더 이상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하며 원 역사처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다. 그나마 핵을 맞지는 않았고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아 쿠릴 열도도 남아있지만, 원 역사의 나치의 나쁜 이미지를 전부 일본이 가져갔고, 소련이 아닌 독일과 미국 사이에 냉전이 일어나게 되면서 극동의 중요성이 낮아져 미국이 굳이 일본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사라졌으며, 한국이 분단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질 일도 없어졌으니 전쟁특수로 경제회복 가능성도 없어졌기에 앞날이 좋지 않을 것이 암시된다.[60]

전후 GHQ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는데, 그나마 천황제 유지라는 조건은 지켜졌지만 전범재판이 원 역사에 비해 훨씬 더 철저하고 강경하게 치러지면서 히로히토를 포함한 전쟁 책임자들이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줄줄이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전쟁 병기들은 해체되거나 수장되거나 식민지였던 신생 국가들에게 넘어갔고, 일본군은 완전 해체되고 향후 재무장도 금지되어 일본의 재무장 가능성도 사라졌으며, 재벌도 해체되고 기업인들도 전범재판에 회부되었고, 화족 제도도 폐지되고 방계 황족들도 모두 신적강하되었다.

현대 시점에서는 늦어지긴 했어도 경제 성장에 성공해 원 역사보다는 못하지만 GDP 15위의 선진국이다. 다만 자위대는 존재하지 않아 경찰과 해상보안청뿐이며 여전히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고, 맥아더가 일본인들의 교육을 철저히 했기에 역사 관련 문제로 타국과 마찰을 일으키는 일도 없다.

5.13. 한국

원 역사처럼 일본의 식민지였으나 소련과 일본이 손을 잡으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덜해지자 역설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민심을 잃었고, 자연스럽게 일본과 전쟁 중인 미국으로 민심이 쏠렸다. 1944년 6월 2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원 역사보다 1년 빠른 35년 만에 해방되었는데, 소련이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한반도에 개입하지 못해 온전히 미국에 의해 해방된 덕에 분단되지 않고 친미 국가인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이승만이 대통령, 김구가 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지원으로 먹고 사는 가난한 처지에, 군대를 키우고 싶어도 미국이 무기는 지원해주지 않아 이승만이 독일에게 무기를 팔아달라고 부탁해 이를 경계한 미국이 무기를 비롯한 각종 지원을 하게 만들 생각을 한다. 그런데 히틀러는 예상보다 많은 무기를 지원해주었고, 이승만의 계획대로 미국도 한국에 막대한 양의 원조를 퍼주면서 자주국방과 경제 성장의 길이 열렸다.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4.19 혁명 등이 일어나지 않아 12년의 임기를 마친 후 무사히 퇴임, 김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범석이 3대 대통령으로 취임, 베를린을 참고해 서울을 재개발하면서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고 국회의사당도 독일 국회의사당과 비슷하게 지어졌다. 독일 대사관도 미국 대사관에 준할 정도로 크고 견고하게 지어졌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철거하는 대신 위치를 옮겨 보존했다.

현대 시점에서는 GDP 13위의 선진국이며 국제사회에서의 위상도 큰 편이지만, 북한이 존재하지 않아 모병제이며 대한민국 국군 병력도 12만 명에 불과할 정도로 군사력은 원 역사보다 약하다. 그래도 장애인 징병이나 사회복무요원, 예비군 제도 등은 없다.

5.14. 동남아시아

원 역사대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다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그 뒤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줄줄이 독립하여 미국의 영향권에 편입되었다.

독립국이었던 태국은 원 역사대로 2차대전 중 일본에 점령되었다가 연합군 쪽으로 편을 바꿨고, 버마 아웅 산에 의해 독립, 라오스, 캄보디아는 왕국으로 독립했지만 베트남은 미국이 직접 호찌민이 집권하도록 지원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공산화되었음에도 친미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일본이 물러난 후 독립해 수카르노가 집권했다. 자유 프랑스나 네덜란드 망명정부 등은 이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망명정부 신세에 미국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등으로 피를 보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서 북보르네오와 뉴기니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미국이 살벌한 경고를 보내 전쟁을 막았다.

5.15. 인도

영국의 탄압으로 불만이 쌓여가던 중 독일의 지원을 받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마자 봉기를 일으킨다. 영국군의 진압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드는 듯 했으나, 영국이 끝내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다시 독립 열기가 강해진다.

영국 내각이 캐나다로 도망쳐 망명정부를 구상한 뒤에도 계속해서 인도를 유지하려고 발악했으나 독일의 무기 지원, 군사 훈련으로 잘 무장한 인도 독립군에게 영국이 밀려나기 시작하고, 결국 영국이 인도를 포기하면서 마침내 독립을 이룩하지만, 막상 영국의 수작으로 인해 종교, 민족, 카스트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분열되어간다. 간디, 네루, 보스가 어떻게든 분열을 막으려고 했으나, 간디가 암살당하며 서로를 향한 테러가 연이어 일어나며 걷잡을 수 없어지고,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이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 진나도 암살당하며 분리독립이 무위로 돌아가자 기어코 힌두교 무슬림 간에 내전이 터지고 만다.

내전이 2년 넘게 이어지면서 무려 6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고 어마어마한 사상자에 반전주의가 퍼지면서 내전이 탄력을 잃고 힌두교, 무슬림 할 것 없이 모두 지쳐버리자, 결국 협상 끝에 무슬림이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최대한의 자치권을 부여받기로 하면서 내전이 끝난다. 이후 보스가 대통령, 네루가 총리를 맡되 내각은 힌두교보다 무슬림, 시크교가 더 많이 자리를 차지하는 식으로 정부가 수립되고, 독일의 영향권에 편입된다.

이후 내전의 참화를 수습하고 독일의 투자를 받으며 성장을 거듭해나가 강대국이 되었다.

5.16. 에티오피아

이탈리아와의 전쟁 전 히틀러의 제안으로 독일과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독일의 지원 덕에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어느 정도 버텼으나 결국 이탈리아에게 밀려 식민지가 되었지만, 이탈리아가 독일에게 패배하며 해방되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독일 편을 들며 참전을 선언, 독일을 돕기 위해 유럽으로 병력을 파견한다. 이후 하일레 셀라시에가 영국에서 망명 생활 중 푸대접을 받은 것 때문에 독일에게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공격하겠다고 제안하지만 히틀러가 이를 사양하고 대신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의 방어를 부탁하자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영국군을 방해한다.

5.17. 아르헨티나

기본적으로 친미 국가이기는 하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무기를 수입하고 독일 군사고문단을 파견받는 등 친독 성향도 보이고 있다. 전후 후안 페론이 아내 에바 페론과 함께 독일에 방문해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지만, 히틀러가 사실상 거절하며 포기하라고 충고했는데도 야심을 버리지 못해 기어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을 일으키자 마자 포클랜드 제도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몇 차례에 걸친 미국의 경고도 무시하고, 미국의 사주를 받은 브라질의 침공도 손쉽게 격퇴하면서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자만심에 빠져 연합군 전체를 적으로 돌려버린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경제가 작살난 상황에서도 포클랜드 제도를 포기하려 하지 않다가 본격적으로 연합군이 공격해오자 순식간에 아르헨티나군은 작살나고 포클랜드 제도도 도로 빼앗긴데다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공습받자 결국 민심이 추락하고 쿠데타가 일어나 페론은 축출당하고 아람부루가 집권한 후 연합군에 항복, 대규모 군축과 배상금 지불, 연합군 상시 주둔 등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철저한 친미 국가로 탈바꿈한다.

5.18. 쿠바

바티스타 정권이 쿠바 혁명으로 붕괴되고 카스트로가 집권해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그리고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의 몰수가 시작되자 미국의 경제제재를 맞아 순식간에 경제가 나락으로 갔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공 게릴라가 날뛰자 별 수 없이 미국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단호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해 협상은 파탄났다. 이에 국제사회에 지지를 호소했지만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 몽골, 베트남 모두 거절했고, 결국 미국의 침공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함락되어 카스트로 정권은 붕괴, 미국에 의해 신정부가 세워진다.

원 역사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를 핵전쟁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것과 달리 역사 개변으로 인해 미국에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하고 조용히 변화를 맞이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맞게 되었다.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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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3.68 / 5.0 | 참여자 11명 2024. 03. 27. 기준



히틀러에 빙의했다는 흥미로운 소재로 인기를 끌고 있으나, 일부 전개에 대해서는 비판받고 있다.

초반에 1차대전 부분에서 주인공이 회귀를 여러 번 했다는데 너무 어리숙하다는 반응이 있었고, 특정 인물을 처음 본다는 듯 행동하는 것도 말이 되냐는 반응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독자들이 불타오른 것은 중화민국 사절단과 함께 독일에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히틀러가 환대하는 에피소드였는데, 독자들은 국뽕도 국뽕이지만 독소전도 안 벌어졌는데 한국을 지원하는 건 너무 빠르다며 비판했고 결국 작가가 사과문을 올리고 전개를 대폭 수정했다. # 다만 작가 역시 마뜩찮았지만 출판사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한국 파트를 넣었다고 하며, 본인도 한국 관련 부분이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국 관련 부분이 나오기는 할 예정이라고.[61]

전투 과정에서 등장하는 병사 시점에 대해서도 매번 똑같은 방식(간략한 상황 묘사-전투 개시-전사 혹은 후퇴)으로 진행되어 지루하다는 의견이 있다. 작가도 해당 비판을 인지하여 병사 시점을 줄이고 전개 방식을 다양화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후에도 병사 시점이 많다는 의견이 간간이 보인다.

영국의 참전 과정도 억지라는 말이 많다. 전황만 봐도 영국이 엄청나게 불리하고, 소련 스파이 건으로 개전 명분도 없어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독일의 지원을 받는 IRA의 과격파가 폭탄 테러를 계획 중에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 여론이 반독으로 뒤집혀 참전하는 전개가 나왔기 때문. 이에 대해 그 처칠이니 아예 말이 안 되는 가정은 아니다, 예전에도 영국이 참전할 예정이라고 언급했었고 고구마 전개라 욕하는 독자들 때문에 급전개를 한 것이라는 의견과 그걸 감안해도 전개가 너무 빠르다, 전개를 천천히 하더라도 밑밥을 더 깔아 독자들에게 충분히 납득을 시켰어야 한다는 의견이 난무하고 있다. 독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운 편.

이 때문에 작가가 미국의 참전을 예고했을 때도 과연 납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그리고 미국 참전 과정도 우려대로 되어가고 있는데 주인공은 철저하게 미국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만 일개 유보트 함장이 그 명령을 씹는 모습을 보여서 독자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나마 이 사건 자체가 미국의 선전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이후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한 것을 계기로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히틀러가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자신의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을 터트려서 내분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리 미국의 참전이 예정되어있었다고 해도 빠르게 터트렸으면 미국의 참전을 막거나 늦출 수 있었을 텐데 타이밍이 너무 뜬금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해서는 작중에서 미국에서 필요 이상으로 내분이 일어나면 태평양 전쟁의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루스벨트를 지나치게 자극해 참전을 유도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62]

이후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을 때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미국에 넘겨주는 것을 두고 독일이 훨씬 유리한 상황에서 미국에 너무 굽히고 들어가는 것 아니냐며 댓글창이 불타올랐다. 이후 작가가 이에 대한 입장문을 올렸다. #

냉전 파트에 들어서는 2차대전 파트에 비해 재미가 없다는 평가가 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긴 하나, 핵 맞고 우랄 산맥 너머로 쫓겨난 소련이 중국을 너무 쉽게 이기는 것, 미독 공동 우주 탐사까지 제안할 정도로 자꾸 미국에 저자세로 나가는 것, 친독 국가인 아르헨티나 문제에 침묵하는 것, 소련이 사실상 망한 상황인데도 쿠바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은 그걸 묵인한 것 등 전개에 대해 비판받고 있다. 그래도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개연성을 확보했고 완결 직전 연참을 하며 깔끔하게 완결을 내며 나름 호평을 받았다. 완결 후기

7. 기타



[1] 물론 실제 HOI 시리즈가 모바일 버전으로 나온 적은 없으며, 패러독스사 게임 특유의 어마어마한 요구 사양을 생각하면 문명: Reign of Power처럼 MMOSLG로 갈아엎지 않는 한 앞으로 나올 가능성도 없다. [2] 부산 출신이며 동래구에 거주하고 있고 병역은 현역 육군 병장 만기 제대다. 작가의 전작인 대영제국의 폐급장교의 주인공과 이름이 똑같다. [3] 죽을 때마다 시간이 더욱 더 뒤로 가는 페널티를 받는다. 처음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였으나 회귀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복무 중인 시간대까지 밀려나 전장에서 개고생을 한다. [4] 일단 기본적인 연설 능력도 뛰어나긴 한데 실제 연설들을 베껴서 써먹는 짓도 자주 한다. 윈스턴 처칠의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를 베낀 게 대표적인 예시. [5] 내가 히틀러라니!를 의식했는지 독일에 의해 한국이 해방되면 파시즘 정권이 들어설 확률이 높고, 그렇다고 내버려뒀다가 원 역사처럼 분단되거나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기에 온전히 미국에 의해 해방되어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6] 본인이 개발한 요리 중 치킨이나 티라미수(퓌러쿠헨)나 컵라면(퓌러누델) 같은 음식들은 인기를 끌었지만, 하와이안 피자나 김치 그라탕 같은 것들은 괴식 취급받았다. 그러나 김치 그라탕은 히틀러가 한식을 즐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현대에 와서야 인기를 끌게 되었다. [7] 실제로도 히틀러는 지독한 금연주의자였으며, 본인 주변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거나 대중교통에서 담배를 금지한 것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작중에서는 아예 흡연자인 군인에게 포상금과 휴가를 미끼로 금연서약서까지 받아내는 걸 보면 현대 한국인이었을 때도 담배를 매우 싫어한 듯하다. [8] 특히 1929년의 대공황, 일본의 침략 행보와 중국의 비상을 예측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대공황 발생 이후 세계 곳곳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다만 인터넷이나 인공지능, 화성 탐사 같은 너무 먼 미래 이야기는 터무니없다고 여겨질 거라며 뺐다. [9] 원래는 뒤에서 암암리에 배격하려 했으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은 이후 일부러 독일의 여러 주 출신 인물들을 맨 앞 방청객으로 앉힌 후 자신도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앞에 앉은 이들도 전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았지만 우린 모두 독일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인종이 아닌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뭉치자고 연설하여 공식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배격하였다. [10] 히틀러 입장에서는 그냥 정답지대로 한 것뿐이고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는데 되려 적수들이 히틀러를 안 믿어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히틀러도 어쩔 수 없이 반격해서 승전하고, 그렇게 독일이 또다시 팽창하고, 적수들이 또다시 히틀러를 안 믿어주고...의 반복이 되어버렸다. [11] 다만 영토 확장을 바라는 부하들과 국민들의 눈치를 봐서 벨라루스 서부, 갈리치아까지는 독일의 영토화하기로 했다. [12] 은퇴 선언은 샤를 드골의 하야 연설을 표절했다. [13] 이는 히틀러가 원 역사와 달리 대선에 출마하지 않아서 악감정이 생기지 않은 것 덕분이기도 하다. [14] 21세기면 군주제가 관광상품으로는 쓸모가 있겠지만 지금 시대에는 무슨 소용이 있냐고 했다. [15] 정작 원 역사에서는 본인이 돌대가리 밑에서 굴려지다가 자살한 게 개그 포인트다. [16] 사실 히틀러도 핵무기의 사용이 가져올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을 주저했으나, 상대인 스탈린이 어린아이까지 자폭병으로 전선에 갈아넣으면서까지 발악을 하자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총대를 매었다. 이에 아인슈타인도 데꿀멍해서는 돌아가는 장면이 압권. [17] 이 소식을 의무병으로 복무하고 있는 원 역사에서 하얀 장미를 이끄는 한스 숄이 듣고는 삼류 소설가가 배은망덕하다고 깐다. [18] 원 역사와 달리 홀로코스트도 없고 공산당과 사민당 외의 정당 해산도 없었기에 비교적 고분고분한 태도로 바뀌었다고. [19] 처칠의 연설 중 가장 유명한 "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인 연설이다. [20] 아예 내레이션에게 정부 호소인 집합소라고 까이는 처지다. [21] 이때 댓글이 압권이다. '그러게 누가 지랬냐?\'라고(...). [22] 이 대답을 들은 히틀러는 하와이안 피자를 대접했던 바돌리오와는 달리 무솔리니에게 티라미수를 대접한다. [23]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음식에 마개조를 가하는 걸 싫어하니 이탈리아 정부수반에게 하와이안 피자를 대접하는 건 외교상 결례다. 사실상 능욕. 히틀러에게 아첨을 일삼는 카이텔도 이 접대만큼은 커버를 쳐주지 못했다. [24]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키릴 메레츠코프 등의 장성들과 세르게이 코롤료프, 발렌틴 글루시코, 미하일 얀겔 등의 과학자들. [25] 히틀러도 원래는 이 정도만 요구할 생각이었으나 측근들이 이 영토들은 이미 손에 넣은 것들이니 더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 약한 태도를 보였다가는 소련이 전황을 유리하게 해석할 우려가 있다는 점, 그리고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을 더 깎아야 한다는 점들을 들어 반대하자 생각을 바꿨다. [26] 다만 초반 밀릴 때의 전문을 보면 남러시아 전체를 넘겨줘야 할 거라 생각하긴 했다. [27] 후퇴 금지, 작전 회의에 자기 멋대로 참여하기, 히틀러 벤치마킹한다고 대역을 썼다가 대역이 사망함 등등 세기도 어려울 정도다. [28]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더 심해졌는데, 원 역사의 나치 독일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러시아도 유서 깊은 반유대주의 국가인데 여기서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에게 호의적인 만큼 반대로 소련의 유대인 탄압이 더 심해져 소련 내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유대인 자치주로 강제 이주당하고 반발하는 이들은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원 역사에서 유대인 자치주로의 이주는 어디까지나 자원 형식으로 이뤄졌고 이주자에게 지원도 해줬던 걸 생각하면 사실상 소련판 홀로코스트로 변모한 셈이다. 그런데 쿨리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자치주의 유대인들이 이를 틈타 녹우크라이나가 있던 지역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고는 하켄크로이츠를 휘두르면서(???) "히틀러 만세!(???)"를 외치면서 격렬하게 저항해댔다. 천하의 히틀러도 이 소식을 듣고는 어이없음에 멘탈이 나가서 뇌정지가 왔을 정도였다. [29] 화력은 T-34와 동급, 기동성은 살짝 우세, 방호력 우세로 전차 자체의 성능은 T-34의 상위 호환이지만 생산성에서는 T-34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평을 받는다. 차체 중심이 전면에 쏠려있어 신뢰성도 T-34보다 떨어지는 것은 덤. 거기다 화력도 작중 88mm를 도입하고 있는 독일에 밀린다. 제식명은 T-43으로 변경되었다. [30] 앞의 두 사건과 달리 히틀러의 짓이 아니었는데, 존 에드거 후버가 한 짓이라는 게 암시된다. [31] P-80 슈팅스타, F-84 썬더제트, F-86 세이버, F2H 밴시, F9F 팬서 등. [32] M46 패튼이 차체 장갑 150mm, 주포 190mm, 중량 50t으로 개발되고, 그 외에도 차체 정면 150mm, 포탑 정면 300mm, 측면 200mm, T53 120mm 전차포를 탑재한 M29 중전차, M1 240mm 곡사포를 탑재한 M92 자주포 등이 개발되었다. [33] 태도가 다른 전범들과 같이 사형을 선고하게 되면 미국의 일방적인 보복으로 보이게 될 점을 우려한 면도 있다. [34] 히로히토가 처형당한 후 일본 각지에서 수천 명이 히로히토를 따라서 자살했다고 한다. [35] 스웨덴은 영국의 노르웨이 폭격에서 자국민이 사망하여 참전, 덴마크는 독일군의 자국령 통과를 허락했다가 영국에게 폭격당해 참전하였다. [36] 전함 3척( 리나운, 워스파이트, 후드) 격침, 항공모함 3척( 글로리어스, 커레이저스, 퓨리어스), 중순양함 2척(1척은 노르웨이군이 격침), 구축함 7척 이상 격침. [37] 구축함 16척, 순양함 7척, 전함 3척( 리슐리외급 전함 리슐리외, 됭케르크급 전함 됭케르크, 스트라스부르), 항공모함 1척( 조프리급 항공모함 조프리). [38] 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와 비토리오 베네토,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4척, 구축함 일부. [39] 이때 처음부터 힘으로 밀어붙인 건 당연히 아니고 두 차례에 걸친 경고부터 했다. 1차 경고는 당연하게도 씹혔고 2차 경고에서는 유고 정부 측도 독일이 진심이라는 걸 뒤늦게나마 눈치까고 경고를 수용하려 했으나 이전까지 유고의 거짓 선전에 홀린 유고 국민들이 잘 되어가던 전쟁이 독일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며 분노해 독일 대사관을 습격해 그 직원들을 죽이거나 강간해버리는 사고를 치고 만다. 유고 정부는 당연히 경악하면서 이번 일은 유고 정부와 무관하며 범인들을 수사 중이라고 독일에 해명했지만 이미 독일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버렸고 결국 대규모 침공이라는 결과로 돌아온다. [40] 독일의 영역은 본진인 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아프리카의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지와 독립국들이다. 중국은 공동 영향권. [41] 독일도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도움을 주긴 했지만 어차피 미국이 개발을 주도한 이상 굳이 지분을 주장해서 미독관계를 해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축하하는 메시지만 보냈다. [42] 이때 영국을 조질 생각에 신난 육군 병사들의 묘사가 압권이다. [43] 이 과정에서 자유 프랑스,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영국에 있던 망명정부들도 같이 도망쳤다. [44] 구축함 16척, 순양함 7척, 전함 3척( 리슐리외급 전함 리슐리외, 됭케르크급 전함 됭케르크, 스트라스부르), 항공모함 1척( 조프리급 항공모함 조프리). [45] 덕분에 페탱의 프랑스 정부는 비시로 가지 않고 그대로 파리에 머무르게 되면서 비시 프랑스라는 단어는 탄생하지 않게 되었다. [46] 전함 2척( 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 비토리오 베네토), 경순양함 4척(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구축함 일부. [47] 영국의 노르웨이 폭격에서 자국민이 사망해 참전했다. [48] 슬로베니아는 독일에 할양, 크로아티아 독립, 메지무레와 바라냐는 헝가리에 할양, 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에 할양, 몬테네그로 독립, 코소보는 알바니아에 할양. [49] 불가리아에게는 서부 트리키아 할양. [50] 실제 역사에서 OUN-B는 나치도 곤란해할 정도로 제노사이드에 협력하다 못해 폭주했기에 이를 막기 위함이다. [51] 직접 선전포고한 국가들 외에도 불가리아, 터키, 그리스, 포르투갈 등의 남유럽 국가들이 독일군의 자국 내 군사기지 이용을 허락하는 등 유럽 내에서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는 영국을 빼면 씨가 말랐다. 그 영국도 소련이 된통 당하는 걸 보고 바로 참전하지 않고 간을 보고 있는 중이다. [52] 다만 루스벨트와 달리 듀이는 미국이 지원해준 만큼 목재, 광물, 금괴 등을 받아오고 있으며 극동의 항구 및 기지를 조차하는 등 받을 것은 받아먹었다. [53] 사실 미국의 참전은 어느 정도 예상되고 있었는데 최종 보스를 맡아줄 것으로 예상된 소련이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처발렸기 때문(...). 그렇기에 밸런스 패치를 위해서라도 소설상의 미국의 대독전 참전은 필요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마침 작가가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도 루스벨트의 특성이 독일 혐오자라 나오기에 이것도 복선 아니었냐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게임에서는 민주독일 루트를 갈 경우 민주국가끼리 전쟁이 안 되기에 남미 건드리는 게 아닌 이상 미국이 독일 때릴 일은 없다. 그런데 게임에서도 민주독일의 선결과제는 히틀러 축출(...)이라 히틀러가 있는 한 어지간해선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긴 어렵다. (물론 원 역사에서는 히틀러는 집권한 이후 독재정을 펼치긴 했으나 집권을 하는 과정은 민주적 절차를 거치긴 했다. 그래서 작가도 1차대전 시기 히틀러에 주인공을 빙의시킨 것으로 보인다.) [54] 당연히 이들은 민간의 열렬한 지원을 받았고, 이들을 위해 무료로 변호를 해주겠다는 변호사들이 쏟아졌다. [55] 아인슈타인이 독일에 남으면서 핵무기의 존재 자체가 우란프로옉트가 성공한 뒤에나 알려지며 맨해튼 계획이 한참 뒤로 미뤄졌고, 소련이 독일에게 패배하며 소련의 대일전 참전 가능성도 없어지면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면 몰락 작전 정도는 시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56] 이때 영국 망명정부를 의식한 미국이 인도인 판사를 임명하지 않아 친일 성향의 라다비노드 팔이 임명되지 않았고, 원 역사에서 불기소된 이들도 대부분 기소되었고 심지어 히로히토마저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는 등 재판이 더욱 철저하고 강경해졌는데,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치르는 전범재판을 의식해 정의로운 이미지를 챙길 필요가 있었고, 냉전에서 일본의 중요성이 낮아져 미국이 굳이 일본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 [57] 이때 베트남에서 호찌민이 집권하도록 지원하고 친선을 맺어 베트남 전쟁 가능성도 사전에 차단되었다. [58] 아이러니하게도 유럽 전체가 독일의 손에 떨어진 덕분에 원래라면 마셜 플랜에 들어갔을 돈이 미국에 남아서 무기 개발에 투자되었기에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개발할 수 있었다. [59] 미국의 영역은 본진인 북미, 중남미, 아이슬란드, 소련,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사우디아라비아, 아프리카의 영국, 벨기에 식민지다. 중국은 공동 영향권. [60] 공교롭게도 작중에서 일본이 항복한 날이 1944년 6월 25일이다. [61] 결국 한국 관련 부분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한참 뒤 히틀러가 직접 방한하면서 나오게 되었다. [62] 역사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데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고 바로 언론부터 통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저런 폭로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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