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E40001><tablebgcolor=#E40001> |
김정일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cccccc,#333333> 일생 | 일생 · 사망 | |
관련인물 | 가계도 · 김일성 · 김정숙 · 김정은 · 고용희 · 김정남 · 김정철 · 김여정 · 후지모토 겐지 | ||
외교 | 남북정상회담 ( 2000 · 2007) · 북일정상회담 | ||
사건사고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 고난의 행군 ·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 이한영 암살 사건 · 심화조 사건 · 송림사건 · 북한 조선무역은행 강도사건 · 제1연평해전 · 제2연평해전 · 북한의 1차 핵실험 · 대포동 2호 발사 사건 ·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 평양 10만호 건설사업 · 북한의 2차 핵실험 · 대청해전 ·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 천안함 피격 사건 · 연평도 포격전 | ||
창설단체 | 기쁨조 · 왕재산경음악단 | ||
우상화 | 김정일장군의 노래 ·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 김정일화 · 김정일훈장 · 정일봉 · 광명성절 | ||
기타 | 선군정치 · 호칭 및 별명 · 대중매체 · 여담 · 성격 · 태양호 | ||
공산주의 · 주체사상 | |||
광둥어: 申相玉和崔銀姬綁架事件
영어: Abducation of Shin Sang-ok and Choi Eun-hee
1. 개요
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로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북되고 그녀를 찾으러 왔던 신상옥 감독까지 동년 7월 19일에 납북된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함께 당시만 해도 아직 베일에 가려진 김정일이라는 존재를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사건이다.[1]
2. 납북 과정
당시 최은희는 신상옥과 이혼한 뒤[2][3] 안양영화예술학교 교장직을 역임하며[4]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그때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인들과 조총련 관계자들이 최은희에게 합작 작품 및 지원을 의논하고 싶다며 최은희를 홍콩으로 초청했다. 신상옥 감독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후원 교섭을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최은희는 학교의 발전을 생각하며 홍콩으로 갔는데 며칠 일정대로 움직이더니 마카오로 넘어갔다가 뜬금없이 중국 본토로 가는 배에 태우고 "우리는 지금 장군님 품으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최은희는 울며불며 내려 달라고 외쳤지만 결국 이들이 준비했던 마취제에 의해 기절했다고 하며 배 안의 침대에서 깨어났는데 벽에 걸린 거대한 김일성 사진을 보고 다시 한 번 기절했다고 한다.
신상옥 감독은 홍콩에서 실종된 최은희를 수소문하다가 자신의 지인과 친한 사이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게까지 정황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는데 '납북이 틀림없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아무리 이혼한 사이지만 수십 년 동안 같이 지낸 동반자가 사라졌다는 것으로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이유가 납북이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5] 결국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던 신상옥 감독도 납북되고 말았다.[6] 현지에서 신필림 홍콩지사를 운영하던 교포 이영생이 사실은 북한의 공작원이었다. 거기에 신상옥의 지인이자 신필림 홍콩지사장을 맡고 있던 김규화가 그들이 쥐어주는 돈에 넘어가서 거짓 일정을 만들어준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을 복역했다.
납북 루트는 홍콩에서 당시 북한 공작원의 아지트였던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북한에 들어간 것이었다. 북한인의 홍콩 입국은 까다로운 관계로 일본으로 귀화한 조총련계 인사들을 앞세웠으며 이들은 일본 여권을 들고 있어 홍콩 이민국의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홍콩 경찰은 형사조사국(CID)을 앞세워 두 사람을 중국 본토로 끌고 간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을 추적했고 이들의 정체가 북한 공작원임을 밝혀냈지만 이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3. 월북 루머
사실 신상옥과 최은희는 지금이야 납북이라고 밝혀졌지만 당시 남한에서는 북한으로 밀입국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놓고 돌았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과 신상옥의 불화가 배경이었다. 시작은 신상옥이 겁도 없이 전태일 분신사건을 영화로 찍겠다고 말하고 다닌 것이다. 당연히 분노한 박정희 정권은 신상옥의 영화 촬영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여기에 화가 난 신상옥은 1975년 '장미와 들개'라는 자신의 영화에서 검열당한 오수미의 상반신 노출 장면을 예고편에 집어넣는 반항을 했다. 이 사건으로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의 인가를 취소당했고 신상옥이 여기에 행정소송을 냈다가 남산으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결국 뒤에 행정소송은 취하되었지만 이미 정권에 의해 제대로 낙인 찍힌 신상옥이 영화 제작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7]최은희가 납북되는 계기인 안양예술고등학교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신상옥이 이사장인 학교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면 정치적 외압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라졌으니 납북보다 밀입국 설이 신빙성을 갖고 회자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신상옥과 최은희의 자녀들은 '월북한 빨갱이의 자식들'이라면서 오랜 시간 동안 손가락질 당하면서 억울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4. 북한에서의 생활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북한에 끌려왔지만 비교적 환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최은희는 남포항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일이 인사하러 직접 나와서 기다렸고 그녀를 보자마자 크게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8] 최은희는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겨 악수를 했고 공식 사진도 남아 있다. 최은희는 주변에서 자꾸만 사진을 찍어대서 움찔움찔 놀라고 신경질적으로 찍지말라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신 감독은 납치당한 직후에는 배후를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라고 생각하여 박정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9] 자신을 납치한 것이 북측의 공작원들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죽일 속셈은 아닐 거라고 여기고 여유있는 모습을 취하며 배 안에서 영화를 보는 등 공작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누렸다. 북한에 끌려온 다음엔 벤츠 승용차를 탈취해서 청천강까지 달려간 후 정주 즈음에서 기차로 갈아타서 중국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석탄간 위에서 꼬박 잠드는 바람에 기관사에게 들켜 끝내 잡히고 수용소에서 상당한 고생을 했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오자마자 다시 숙소의 군관 방에 숨어 2차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몇 년이나 수용소에서 사상 교화를 빙자한 고문을 당했고[10] 큰 고생을 하곤 교화소로 이동했다. 거기선 대접이 좀 나아서 비곗덩어리도 제공되었는데 이웃 죄수들과 대화하는 게 금지였음에도 이웃 죄수들과[11][12] 수다를 떨면서 정보를 얻다 걸려서 징계를 받았다. 눈에 띄게 형편없어진 식사에 저것들이 설마 '나를 죽이려나?' 싶어서 그들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단식했다. 처음 간수들은 "그래봐야 당신이 손해다. 단식질 하다가 나중에 빌던 놈 많다.", "나중에 그쪽에서 밥달라고 애원할 걸?"이라고 비웃었지만 6일을 내리 굶은 신상옥이 똥오줌을 싸고 기절하자 온 교화소가 발칵 뒤집혔고 정치보위부장[13] 김병하가 달려와서 "저 사람 죽으면 니들도 다 죽는다!"라고 길길이 날뛰어 그를 의무실로 옮겨 그때부터 잘 대우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신상옥의 '반성문'을 접수한 다음 그를 풀어주어 최은희와 재회하게 했다.
이후 이들은 북한에서 재결합했고 부부는 매우 대접을 잘 받아서 최은희는 납치 직후 아무나 못 간다는 김정일의 생일 파티에 김정일 본인이 초대해 줬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은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아버지 김일성에 못지 않은 최고의 실권자였다. 당연히 김정일의 생일 파티에는 북한에서도 엄청난 상류층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었다. 최은희의 감시원인 강해룡과 김학순은 자기들도 아직 못 가 본 자리라고 엄청나게 부러워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시 7세였던 김정남과 성혜림까지 만났으며[14] 최은희가 김정남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감히 자신의 이름을 묻는 사람을 처음 본 김정남이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남의 이름을 다 물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꽁무니를 빼자 곧바로 김정일이 "어른이 말씀하시면 '예' 저는 누굽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라고 타일렀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이 일화는 최은희의 입장만 알려져 있지만 김정남의 입장도 이한영 수기를 통해 기록되어 있다. 김정남은 최은희를 보고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자기 앞에 있다고 놀랐다고 하며 최은희에게 이름을 물었는데 최은희라는 이름을 듣고 이름이 곱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환대를 받고 김정일과 가깝게 지냈다고 해도[15] 가족들이 남한에 있는 마당에 억지로 끌려와서 경험하게 된 북한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우선 탈출 우려 때문에 늘 도청과 감시를 받고 있었고 언제라도 자신들이 필요없다고 여겨지면 제거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에 최은희는 이동만 시켜도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였으며 사상 교육과 개조를 한다며 주체사상과 김일성 교시 등을 교육시켰는데 이걸 수시로 받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래도 예술계에서 오래 종사한 둘 답게 한동안 북한식 표현과 문법을 교정받은 후에 그럴듯한 편지들을 써서 바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흡족한 김정일이 최은희에겐 국기훈장도 내렸으며 가명을 쓰고 주요 외교 행사에도 수차례 불러 방북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겸 국무원 총리 화궈펑도 본 적이 있다.
최은희는 밤 11시에 남한의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들었는데[16] 자신의 실종 소식을 안타까워하는 라디오 진행자[17]가 울먹이며 "언니, 어디 있어?"라고 하는 목소리를 듣고 수도꼭지를 틀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이들은 북한에 끌려온 지 5년이 지난 후에야 김정일의 주선으로 재회하게 되는데 그들은 너무도 큰 충격으로 너무도 어색하게 서로를 쓸어안았다. 신상옥은 만약 자기 배우들이 그랬으면 화내면서 컷을 외쳤을 동작이라고 했다.[18] 파란만장했던 북한에서의 생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상옥이 자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북한에 똑같이 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한다.[19]
여차저차 하던 중에 목적을 갖고 이들을 납치했던 김정일의 권유를 받고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차리게 된다. 애초에 김정일은 문화,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20] 영화 분야를 발전시키고 싶어 이들을 납치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었고 몇 년 후에 북한에서 신필름을 차리게 된 것인데 참 여러 가지로 영화 같은 이야기다.
사실 남북분단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나 문화 예술인들은 대우가 그야말로 형편없었던 데다 딴따라, 저급 문화라며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어 공산주의 사상에 감화되는 경우가 많았고 북한이 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적이었으므로 인재풀 자체는 남한보다 더 풍부했지만 김일성이 차츰 차츰 권력을 강화했고 대중문화 부분에 있어서 그야말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일일이 간섭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승희, 안막, 임화처럼 정치 투쟁에 휘말려 숙청되거나 백석, 심영처럼 중앙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좌천당하거나 하방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소재 제한도 강화되었다. 북한의 문화 예술인들이 한직으로 내몰리거나 예술계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소재 제한을 의식해 연극과 영화, 노래, 소설, 만화, 드라마 등을 만들었고 결국 문화 예술 부분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실상을 따지고 보면 남한도 당시에는 영화나 만화, TV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이런저런 제약이 많기는 했고 실제로도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이 끊기거나 배우들을 강제로 반공 영화, 반공 드라마에 출연시킨다는 등 온갖 말도 안 되는 전횡들이 횡행했지만 국가에서 배우와 작가들의 일거리를 보장해 주 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벌어먹을 방법을 찾아야 했고 북한이 검열의 끝판왕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북한보다는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했기는 했다. 여하튼 북한의 김정일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력하지 않는 북한의 예술 관련 인민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하고 경쟁하는 예술인들이 더 뛰어나더라."라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인정하게 된다.[21]
김정일은 대외 선전용으로 영화 예술의 힘을 빌리고 싶었으나 북한 내부의 인력들은 수많은 제약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분야로는 워낙 인재가 없었기 때문에 두 부부를 일찍이 점찍어 놓고 납북을 계획했다고 한다.[22] 한 번은 북한과 친한 캄보디아의 국제영화제를 노리고 영화를 만들어 출품한 적이 있으나 게릴라를 미화하는 내용 때문에 시아누크가 자기보고 망하라고 굿판을 하는 영화를 가져왔다고 노발대발해서 날뛰는 바람에 싹싹 빌고 달아난 일도 있다고 한다.
신상옥과 남한 언론에서는 김일성에게 바치기 위해 최은희를 납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최은희도 이미 50대였고 김일성도 칠순을 앞둔 노인이었다. 김정일은 오히려 최은희를 어머니 대하듯이 깍듯이 모셨으며[23] 최은희의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 " 최선생, 저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니까?"라며 개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신상옥에게는 '내가 최선생을 아버지한테 바치려고 데려왔다는 소문이 돈다던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깨끗이 최선생을 돌려드립니다.'라고까지 했다. 다만 최은희는 김정일이 자신을 유혹하려고 하지 않았냔 의혹에 대해서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김정일이 자신이 김일성을 잘 만나지 못하게 하고 한복, 양복 등 온갖 옷을 입혀 사진을 찍은 후에 김일성에게 보내는 것 때문에 자신을 김일성에게 바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를 느끼긴 했다고 덧붙였다. 김일성은 최은희의 사진을 보고 대단한 미인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유럽 쪽의 영화제에 여러 편의 작품들을 출품했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 탈출기', ' 소금' 등을 출품했으며 ' 춘향전', ' 불가사리' 등 여러 작품을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24] 하에 제작했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작품은 당대 북한 영화계 기준으로는 블록버스터급 작품이거나 참신한 영화들이었기 때문에 북한 인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고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도 흡족할 만큼 작품성도 뛰어난 작품들도 찍어서 해외영화제에서 상도 탔다. 최은희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 신상옥 감독은 감독상 타던 와중에 런던의 영화제에서 한국의 영화배우 남궁원과 김지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남궁원과 김지미가 북에서의 생활이 어떻냐고 운을 띄우자 놀라울 정도로 쌀쌀맞게 이들을 대하던 신상옥은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배려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영화제작도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당의 지원을 받고 있고 최대한으로 자유분방한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공화국밖에 없다."고 체제 선전을 하면서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접근하지 말라고 두 사람에게 엄포를 놓았다. 물론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상옥은 이 말을 하고 나서 엄청나게 속이 상했다고 한다.
이 일 덕분에 남궁원도 남한 귀국 후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되었다.[25] 이 성공적인 퍼포먼스 덕분에 김정일은 크게 흡족해하면서 두 사람에 대한 대우를 더욱 개선하였고 이후 자유로운 해외여행도 허락해 주었다. 이렇게 북한에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한편 한국 정부는 체제 경쟁, 언론통제 등의 명목으로[26] 이들의 납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다가 이들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납북으로부터 6년 후인 1984년 4월 2일에 와서야 이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과 배우가 동시에 사라진 후 난데없이 북한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로 예를 든다면 박찬욱이나 이영애가 실종되었다가 6년 만에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공개된 것이나 같은 일이다. 사실 박찬욱이나 이영애 이상으로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신상옥과 최은희의 비중은 컸다.
이때 증거로 제시된 건 두 사람이 북한의 명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육성 테이프, 그리고 자필 편지였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이 미국 입양(혹은 유학)을 미끼로 신상옥의 두 아들을 해외로 유인 납치하기 위해 두 사람을 사주해 조총련과 연계된 일본인을 통하여 서울로 사진 등을 보냈다고 발표했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실 그 일본인은 멀쩡한 교도통신 기자 에노키 아키라(榎彰, えのき あきら)로, 신상옥의 지인이었으며 우리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북한에 살게 됐다는 암묵적인 언질까지 서울의 가족들에게 넌지시 전해준 상태였다.[27] 즉, 신상옥은 북한의 추가 납치 공작을 역으로 이용해 부부가 함께 납북되었음을 전세계에 공표한 셈이었다.
5. 탈출 과정
1986년 3월 13일에 영화 촬영과 관련하여 중립국 오스트리아의 빈을 방문하던 중 미국 대사관으로 기습 입장하는 데 성공하여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했다.[28]신상옥은 앞서 언급한 에노키 아키라에게 빈에 갈 것이라고 알렸으며 점심 약속을 핑계로 불러냈다. 북한 감시원들의 감시를 따돌린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에노키가 탄 택시가 도착하자 동승하여 숙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는데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음을 확인한 이들은 택시 기사에게 미국 대사관으로 방향을 바꿔 줄 것을 요구했고 에노키에게 자신들은 자진 월북한 게 아니라 납북당했으며 자신들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털어놓았고 빈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뛰쳐나와 뒤도 안 돌아보고 미국 대사관 안으로 뛰어들었다.[29] 이렇게 망명에 성공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곧장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거주하였는데 바로 한국으로 갔다간 워낙 북한과 지척이라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추격자나 스파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두려웠다고도 한다. 북한의 이름으로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여 해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아서 한국에서는 이들이 배신, 변절했다는 이야기도 돌았으며 영화사 허가 취소를 받은 신상옥 감독이 최은희를 찾을 목적 겸 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진 월북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지만 이들은 납북수기에 살기 위해서 한 행동들이라고 분명하게 기술했다.
말 그대로 영화처럼 탈출에 성공한 부부는 미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택해서 북한의 암살공작원들이 자신들을 해코지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한국 정부(정확히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자신들을 북한의 영화 발전에 기여하고 동조했다면서 추궁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책임을 물을 걱정들을 영화처럼 일거에 날렸다. 실제로 안기부는 훗날 신상옥을 취조하면서 무조건 그가 자진 월북했다고 멋대로 결론 짓고 "십수년 전 홍콩에서 머문 호텔 방 번호를 불어라!"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심문을 했고 신상옥이 써낸 탈출기는 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수사나 심문기법이 후진적이었던 데다 눈돌리기에 눈이 멀어 살인범을 영웅으로 만들고 살인 피해자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을 때가 이 시기였는데 못된 버릇이 신상옥에게도 도진 것이다. 정작 일본의 뉴 오타니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도쿄 경시청장은 신상옥을 보고 "선생님이 쓰신 수기를 모든 직원들이 돌려 보고 있습니다."라며 그에게 존경을 표해 신상옥은 한동안 벙쪘다고 한다.
한편 강명도의 증언에 따르면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고갑종의 주도로 북한의 신필름 배우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사상투쟁이 벌어졌으며 신상옥을 수백명의 여배우들을 유린한 인간말종으로 만드는 작업이 이어졌다고 한다. 최은희, 신상옥을 관리하던 선전선동부 부부장 최익규도 이때 상당히 고생하게 된다.
6. 미국 생활
미국의 CIA는 자국에 망명한 이들 부부의 목숨에 50만 달러의 현상금이 북한에 의해 걸려 있는 상황에 맞서 언제나 그들을 경호해 주었으며 LA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집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북한은 영화 제작 비용으로 쥐어준 230만 달러를 횡령하기 위해서 부부가 배신했다고 날뛰었지만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돈을 돌려 주자 말을 바꾸어[30] 미국의 납치극이라고 날뛰었고 신상옥에게는 없던 일로 할 테니까 돌아오라고 수 차례 접촉하기도 했다. 신상옥은 그래도 북한에서 잘 대접받은 것 때문에 북측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자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CIA가 그럼 경호하기가 어렵다고 허락하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않았다.이 부부는 CIA에 중요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일상적인 대화[31]를 녹음해 왔는데 그야말로 희귀한 육성 테이프를 미국 정보기관 CIA에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 정부는 이들 부부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했다.
이듬해인 1987년에 《김정일 왕국》이라는 납북 수기를 써서 동아일보의 김일수 특파원의 도움을 받아 출판했다. 8년간의 북한에서의 생활과 김정일과 고위층들과의 만남, 여러가지 북한에서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소망하던 탈출을 이루기까지 적나라하게 밝혀낸 서적이지만 앞서 말한대로 시기가 시기였으며 1989년 노태우 정부의 방한을 권유받아 일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국가보안법에 따라 안기부에서 21일 간 조사를 받았다. 상술한 말도 안 되는 심문이 벌어진 것이 바로 이 때다. 이후 신상옥 감독은 1990년에 대한민국 복귀작을 내놓았는데 북한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영화화하여 마유미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에 개봉했다. 영어 제목은 《Virgin Terrorist》.[32] 마유미의 촬영은 한국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김현희가 김승일과 머물던 부다페스트 호텔 씬을 현재 그랜드 힐튼 호텔이 된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촬영했으며 이후에도 미국에서 계속 활동했다.
신상옥은 1994년 증발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극중 이름은 다르지만 노골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디스하는 영화로서 지금까지 말이 많은 김형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과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실상을 전달하려고 했다. 한국에선 일부 장면이 가위질당하고 흥행엔 실패했지만 칸 영화제 초청작에 오를 정도였다.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날선 비판이 어느 정도였냐면 본인이 북한에 납치당했던 감독이 영화 속 대사를 통해 "북한도 있는데 어디서 데모질이나 하냐"고 중앙정보부에서 여대생 강리나를 고문하고 강간하는 장면이 나오고 북한을 빌미로 독재를 시행하는 군사정권을 적나라하게 비판할 정도다. 사실 1990년대 중반 정도면 꽃잎이나 모래시계, 제3공화국, 제4공화국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크게 민감했을 때였다. 그런데 신상옥의 증발의 수위는 지금 봐도 상당한 수준이라서 권력자들이 나체의 여성을 덮치는 장면이 수두룩하게 나올 정도였으니 한국 배우들은 아무도 대통령 역을 맡으려고 하지 않아서 미국 배우 조지 타케이[33]가 대통령 역을 맡았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역은 대배우 김희라가 맡았다. 초기 시놉시스는 아시아의 어떤 국가라고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고 한국어를 쓰며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면 뉴스 영상에서 대통령 유고 후 미국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항모를 파견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최은희는 신상옥 사후 남편의 기념사업에 전념하다가 2018년 노환으로 타계했다.
7. 매체에서
최초로 다뤄진 건 1984년 6월 19일 KBS 1TV에서 방영된 6.25 전쟁 특집 연속기획 9탄 드라마 '함정'이었는데[35] 불과 두 달 전인 4월에 안기부가 두 사람의 납북 사실을 발표했을 뿐 그 외 자세한 정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최은희가 홍콩에 가서 납치되는 과정까지만 실제 사실과 똑같고 이후 북한에서의 행적은 그냥 창작에 불과했다. 최은희가 북한 수뇌부의 온갖 겁박에 도리어 독기를 품고 대남 방송을 강력히 거부하자 김정일이 부들부들거리는가 하면 손목을 그어 자살 시도를 한 게 미수에 그친 뒤 군인들의 감시 속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누워있는 모습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실제로는 김정일이 최은희를 깍듯이 대하며 조심스럽게 어르고 달랬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어차피 실제와 차이가 있었더라도 반공 드라마라서 그렇다.그로부터 11년 후인 1995년 12월 MBC에서 방영된 제4공화국 19~20화에서는 두 사람의 증언을 기반으로 시나리오가 진행된다. 신상옥은 박영태, 최은희는 양금석이 맡았는데 실제 인물과 비교해 보면 외모가 꽤 흡사했고 엔딩 화면에는 두 부부의 실제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나왔다. 특히 20화에서는 두 부부가 납북 후 처음으로 서울에 귀국한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실제 두 사람의 증언의 일부가 반영되지 않았는데 일례로 신상옥이 탈출을 시도하는 건 최은희를 만나기 이전 딱 1번만으로 묘사되었고 김정일·김일성과 대화할 때 녹음기를 켜는 모습도 생략되었으며 나중에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할 때는 지인인 에노키 아키라가 직접 몰고 온 승용차를 타고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내용으로 나왔다.
덧붙여 그들의 납북과 탈출에 대한 논픽션 영화를 만든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는데 2016년 Ross Adam, Robert Cannan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The Lovers and the Despot이 이 영화로 보인다.[36] 아래는 영화 예고편. 한국에서는 2016년 9월 연인과 독재자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그런데 한국어 자막이 심각해서 영어가 되는 사람이면 그냥 영어로 듣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얼마나 개판인지 예시를 조금 언급하면 조선 혁명을 한반도 개혁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를 노동위원회로 번역하는 등 용어를 사실상 2차 창작을 했으며 북한에서 최은희를 납치하기 위해 홍콩에서 영화 사업을 하는 부자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최은희를 꾀어냈다는 대사를 이해를 못해서 홍콩은 영화하는 사람과 부자인 사람이 많은 도시라고 오역할 정도다. 근데 중간중간에 신상옥이 일본어로 회고한 대목은 영어 번역에 비해서는 수준이 높다.
|
8. 사건 이후
김정일 사망 직후 최은희는 "납치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지만 죽었다니 안 됐다."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 기사)김정일 육성녹음 1부, 김정일 육성녹음 2부는 김정일의 육성파일로, 조갑제 기자가 입수한 뒤 정리해서 최초로 일반에 공개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녹취를 바로 최은희가 몰래 녹음하였다. 김정일의 육성은 생전에 일반대중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 이유는 김정일이 연설을 싫어했고 발음이 안 좋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7] 해설 기사 네 부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기사 1부, 2부, 3부, 4부
신상옥, 최은희 부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간혹 이들이 납북된 게 아니라 자진 월북을 하였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상술했듯이 지금도 이들 부부의 입북에 대해 납북이냐, 월북이냐 말이 많은데 특히 어떤 감독은 자신의 회고록에 자신이 신상옥에게서 월북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써 놓았다. 물론 그 감독의 회고록 내용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지만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에 눈 밖에 난 신상옥은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기는커녕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도 힘든 지경에 있었다.
최은희가 먼저 납치되자 당시 한국의 어떤 언론은 신상옥이 돈 문제로 최은희와 다투다가 최은희를 살해하였다는 황당한 내용을 보도하기도 하였고 박정희 독재 정권은 어떻게든 신상옥을 영화계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매장시키려고 하였다. 이 상황에서 신상옥은 정처 없이 해외를 떠돌다가 급기야는 망명을 타진하기도 하였으며[38] 결국 납북이든 자진 월북이든 북한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와 별개로 성혜랑은 자신의 회고록 '등나무집' 에서 이들 부부의 납북, 탈북에 대해 잠깐 언급하는데 최은희에 대해서는 김정일 비위를 저 정도로 잘 맞추는 걸 봐서 대단히 똑똑한 여자인 것 같다고 했지만 신필름의 영화에 대해서는 저리 비싼 돈을 들여서 찍는데 영화에 저리 돈을 낭비해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맞이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면서 대단히 냉소적으로 보고 자본주의 나라에서 온 두 사람이 북한이 얼마나 숨막히는지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라면서 탈출한 것에 대해서 이해는 표하지만 둘이 달아나서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는 식으로 언급한다. 한 번은 김정일에게 저 둘은 북한에 적응 못하고 달아날 것이라고 하자 김정일이 눈을 끔뻑이더니 세상에 영화 찍고 싶다고 기차까지 터트려줄 정도로 지원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면서 영화인으로서 그럴 리가 없다고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둘을 잘 대해준 김정일이 불쌍했다고 서술했고 두 사람의 영화에 대해서도 북한에선 환영 받지 못했으며 다들 두 사람이 떠나서 속이 시원했다고 주장한다.[39] 여기서 최은희, 신상옥 두 사람의 수기에는 없는 내용까지 언급하는데 성혜림의 서울 말씨를 눈치챈 최은희가 술에 만취해서 성혜림의 무릎을 붙들고 제발 집에 보내달라고 울고불며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에 김경희가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서 왜 나가고 싶어하느냐?'라고 체제 선전을 하자 최은희가 김경희의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시끄럽다! 나가라!'라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탈북 후 《김정일 왕국》이라는 수기를 발표하였는데 이 수기에서 나오는 북한이라는 나라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너무나도 말이 안 되어서 신상옥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마적떼들 소굴'이었기 때문에 당시 "세상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미친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거 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려고 지어낸 얘기 아니냐."라며 수기의 내용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엄밀히 얘기하면 이때는 북한의 경제가 제대로 돌아갔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인세지옥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AVGN이 영화 불가사리 리뷰를 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고도 꽤 깊이 있는 언급을 한 바가 있다. 한국 괴수물 역사까지 파악한 것을 봐서는 리뷰를 위해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최은희가 납치되기 1년 전인 1977년에도 프랑스에 살고 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가 북한으로 납치될 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 백건우 - 윤정희 부부는 납치 직전에 눈치채고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해 위험을 면했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블로그로.
외국에서 김정일에 대해 다루는 영상[40]에서도 이 납치사건은 김정일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언급되고 있다.
[1]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건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때다.
[2]
신상옥은 배우 오수미(본명 윤영희)와의
불륜으로 두 아이를 낳았다. 최은희는 첫째 아들을 낳았을 때는 화를 내면서도 내가 아들을 못 낳아줬으니 어쩔 수 없다며 어느 정도 이해를 해 주었으나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땐 참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했다. 신상옥은 둘째 아이가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잡아떼다가 결국 이혼도장을 찍어주었지만 이혼 후에도 둘의 예술 세계가 워낙 얽혀 있는 관계로 최은희의 활동에 대해서 여러 조언을 해주곤 했다고 한다.
[3]
오수미는 신상옥이
납북되자 홀로 아이들을 키우다가 유명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했으나 1986년 그녀의 동생인 유명 모델
윤영실의 실종 사건이 일어났고 김중만과도 석연찮은 과정 끝에 이혼한 후 1992년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사건의 단초였던 윤영실의 실종이 최은희-신상옥이 한국에 돌아온 직후 벌어졌기 때문에 이 사건들이 최은희-신상옥과 어떤 연관성이 있고 당시 정부에서 이 실종 사건에 관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이 있다. 자세한 건
윤영실 실종 사건 문서로.
[4]
안양영화예술학교는 신상옥이 설립했던 학교였지만 신상옥의 납북 이후 1982년 학교법인 연암학원으로 매각되었다. 훗날 최은희라는 사람이 안양예고 교장과 이사장을 맡게 되지만 이 사람은 배우 최은희와
동명이인이다.
[5]
안 그래도 최은희가 사라진 후 신상옥이 최은희를 보험금 노리고 죽였니, 내연녀와 작당해서 해코지 했니, 죽여서 바다에 던졌네 하는 소문이 돌아 맘고생이 심한 터였다. 결국 신상옥은 이 길로 자식들을 친척에 맡기고 "꼭 너네 엄마 찾아서 돌아 올 거니까 잠깐만 있어!"라고 말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서 최은희를 찾으러 나갔다고 한다. 신상옥의 아들의 말로는 그때가 납북당하기 전에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6]
신상옥 감독은 리펄스 베이 해안에서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에게 납치당해 그대로 중국 본토로 끌려갔다. 이들의 정체는 일본 국적의 조총련이었다.
[7]
두 사람의 자녀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시기에 영화 제작에 돈을 댔던 빚쟁이들이 한 겨울에 눈을 소복하게 맞으면서까지 돈을 내 놓으라고 신상옥네 집안 마당에서 밤새도록 농성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8]
실제로 김정일은 상당한 영화광이었다. 학창시절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김정일 전용 상영관에서 영화만 줄창 볼 정도로 영화에 심취했으며 후계자 시절에는 영화 제작을 비롯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강한 육성 의지를 드러냈다. 일설에 의하면 남한에서 나오는 영화는 물론
람보처럼 미국 영화들도 꽤 즐겼다고 한다. 당연히 신상옥과 최은희가 연출하고 출연한 작품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2007 남북정상회담 때는 이같은 김정일의 취향을 반영해
대장금,
겨울연가 등 남한 드라마와 남한 영화가 담긴 DVD를 선물로 줬는데 김정일이 매우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9]
신상옥 본인은 박정희와 친분이 깊었고
10.26 사건을 동료 죄수들에게 주워듣고 한동안 침울하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영화인 모임에서 정부의 영화 정책을 비판했다가 그게 박정희에게 신상옥이 반정부 모임의 책동자라고 과장돼서 보고되는 바람에 박정희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격노했고 신필름의 허가도 취소해서 이미 이민이나 망명을 고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외교부에서 비자 발급을 해주지 않으려고 하자 무비자로 방문이 가능한 프랑스로 가서 다시 서독으로 피신할 계획까지 꾸몄고 서독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윤이상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망명 자금 마련을 위해 동남아에 자신의 옛날 영화 수출을 추진하고 홍콩 은행에 있는 예금도 찾을 겸 홍콩에 돌아왔다가 납치됐다.
[10]
하루에 열 시간 이상 꼼짝도 안 하고 정좌를 취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11]
말로는
월북한 국군 장병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믿었지만 어느날 중정에서 김정일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가짜 뉴스를 내보낸 것을 두고 너네 중정은 대체 뭐하길래 멀쩡히 살아서 행사도 다니고 신상옥이도 북한으로 납치해온 김정일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떠드냐고 괜히 화풀이를 했는데 식물인간이 뭐냐고 멍청하게 되묻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 사람들이 자신의 의중을 캐보려는 보위부 첩자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이후 일부러 이들 앞에서 북한이 체제 경쟁에서 이길 것이 틀림 없다면서 북한을 찬양했다.
[12]
자기가 해방 직후 남한 연예계의 대부였다고 주장하는 최 지도원과 1967년에 숙청당한 북한 역사학자 리나영 등과도 친해졌는데 리나영은 아직도 조선혁명박물관에 김옥균 초상화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지식한 양반이었고 최 지도원은 남한 연예계에서 빠삭하게 아는 것을 보아서 실제 연예계 종사자로 보이긴 하는데 탈북 후에 남한 초기 연예계 역사에 대해 정통한 배우 황해를 통해 교차검증해 보니 허풍을 친 것이 워낙 많았다고 한다.
[13]
당시 명칭은 국가정치보위부였고 1982년에 국가보위부로 개칭되었다.
[14]
성혜림의 존재를 몰랐던 최은희는 성혜림을 김정일의 본처로 알려진 김영숙으로 지레짐작했지만 서울 말씨를 썼다는 점, 김정남과 같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성혜림이다.
[15]
김정일은 1942년생,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둘 다 모두 1926년생이다.
[16]
당시
KBS 사회교육방송을 통한 라디오
대북방송이 송출됐는데
단파라디오의 특성상 북한에서도 남한의 라디오 전파 수신이 가능했다. 게다가
김씨 왕조 일가가 남한의 TV를 즐겨보기도 했다.
[17]
성우
고은정이었다고 한다.
[18]
최은희도 영화에서 연기하거나 나오던 장면들이 다 거짓이었고 실제 상황이면 이러는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19]
"그럼요. 시간이 갈수록 더 그리워요. 요즘도
꿈을 많이 꾸는데, 항상 제 곁에 있어요. 촬영하는 장면이라든지..."(노배우의 목소리가 젖었다.)(
#)
[20]
이 때문에 최은희, 신상옥은 김정일의 영화 아카이브를 접할 기회가 있었고 지금도 떡밥으로 회자된다. 그 중 가장 큰 떡밥은 소실되었다고 알려진
만추 필름이 있더라는 떡밥이다.
[21]
신상옥, 최은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어디까지나 지금 우리가 사회주의에만 국한시켜, 그저 사회주의에만 나가고 있어, 자본주의 국가에는 마음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중략) 지금 딱 말하자면, 울타리 안에서 자기 것만 보고, 자기 것만 좋다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중략) 인제 앞으로 10년 만에 못 따라가면은 인제 솔직히 말하면 세계적인 분포에서 보게 되면 우리 영화 예술이 낙후한 데서 아마 제일 낙후한 데서 1번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출처: 와다 하루키 (2014) <북한현대사>, p. 192~193)
[22]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김일성·김정일과의 면담한 적이 있는데 최은희가 목숨 걸고 카세트 플레이어의 녹음 버튼을 몰래 누르고 녹음한 육성이 있다.
[23]
김정일은 생모 김정숙이 사망한 후에는 어머니라는 존재 없이 살아 왔는데 특히 계모
김성애와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최은희를 어머니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북한의 최고 실권자라고 할 수 있는 김정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최은희를 직접 어르고 달래느라 쩔쩔맸다.
[24]
특히 영화 '
탈출기' 제작 과정에서의 일화가 유명하다. 신상옥이 김정일에게 '
열차를 폭발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진짜 열차를 폭파시켰다고 한다.(
관련 뉴스)
[25]
김정일과 최은희의 전화 통화가 녹음된 육성 테이프에 의하면 김정일은 최은희가 남한 측 인사들과 만난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이걸 갖고 뭔가 의심한 게 아니라 그냥 최은희의 안부를 묻던 도중 자연스럽게 그 부분을 언급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나저나, 일 끝나고
김희갑 만나기로 했다며, 왜 안 봤음?", "기자들 우글우글하다보니 귀찮아서...", "하기야 기자들이 참 거지같은 종자들이지..ㅋㅋㅋ.." 식의 대화였다고 한다.
[26]
이때는
막걸리 보안법이 현역인 데다 남북간 경제력 차이도 크지 않던 시절이었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 엄청나게 신경 썼다. 북한에 지하철이 먼저 개통되었거나 컬러방송이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을 얘기만 해도 코렁탕 먹었을 정도였다.
[27]
참고로 북한에선 신상옥과 최은희가 자식들이 남한에 있는데 우리가 어찌 여기 살겠냐면서 되돌려보내달라고 하소연했는데 이에 북한 측은 "에이 겨우 그런 게 문제면 언제든지 자식들 데리고 올 수 있는데 그런 쉬운 일로 걱정했냐?"라고 '자식들까지 납치해주마'라는 역제안을 하는 패기를 보였다.
[28]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CIA의 한국인 직원과 미리 이야기를 맞추었기 때문에 수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29]
미국 대사관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혹시 북한 감시원이 따라붙지는 않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당시 숙소에서 미국 대사관까지는 약 10분 거리였다.
[30]
사실 북한에서 계속 돌려 달라고 징징대서 어쩔 수 없이 돌려 준 것이다. 신상옥 감독과 가까웠던 한 영화인은 미국에서 그를 만나 왜 굳이 돈을 가져왔느냐고 면박을 줬는데 당시 신상옥의 대답은 "야, 내가 거기서 그만큼 고생했는데, 이것도 못 가지고 나오냐?" 최은희는 나중에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김정일이 기어이 자신들을 죽였을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31]
주로 면담할 때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다고 한다.
2000년대까지 자주 사용되던 그
찍찍이다.
[32]
일본어,
영어,
한국어가 섞여 있다.
[33]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히카루 술루 역을 맡았다.
[34]
이 중에는
불가사리의 리메이크작인 갈가메스도 있다. 미국에서 만든 만큼 배경은 고려 대신 중세 유럽이다.
[35]
사실 당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지금 평양에선의 100분 특집이었다.
[36]
시놉시스가 납치 사건과 일치한다.
[37]
실제로 녹취를 들어보면 아무리 평안도 사투리가 끼어 있지만 발음이 부정확하고 말이 빨라 알아듣기 힘들다. 김정일은 당시 나이도 젊은 편이었다. 북한 언론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공개된 김정일의 육성은 1992년 조선인민군 열병식 때 외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 단 한 마디뿐이며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때 만찬장에서 건넨 몇 마디가 한국 측 녹음 자료로 공개되었다.
[38]
그의 수기를 보면 박정희 정권이 여권을 연장 안 해줘서 위조 여권을 구입하는 내용까지 나온다. 이때 신상옥은 미국에서 김형욱의 초대를 받아 김형욱의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한 적도 있었는데 김형욱은 아직 출판되지 않은 자신의 회고록 원고를 신상옥에게 보여주며 자신이 이 회고록으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며 자랑했다고 한다. 신상옥은 당장 신변이 위협받는 와중에도 김형욱에게 자신의 영화에 투자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39]
반면 강명도는 처음으로 극장에서 신상옥의 영화를 보고 눈이 뒤집혀서 계속 보러갔다고 사술했다.
[40]
유튜브 영상이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