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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9:20:41

중세/정치사/중기/이베리아 반도

1. 개요2. 레온 왕국
2.1. 11세기2.2. 12세기2.3. 13세기
3. 카스티야 백국 ⇒ 카스티야 왕국 ⇒ 카스티야 연합 왕국
3.1. 11세기3.2. 12세기3.3. 13세기
4. 아리곤 백국 ⇒ 아라곤 왕국
4.1. 11세기4.2. 12세기4.3. 13세기
5. 팜플로나 왕국 ⇒ 나바라 왕국
5.1. 11세기5.2. 12세기5.3. 13세기
6. 포르투갈 백국 ⇒ 포르투갈 왕국
6.1. 11세기6.2. 12세기6.3. 13세기

1. 개요

중세 중기의 이베리아 반도는 여전히 레콩키스타가 진행 중인 상태였다. 남부는 여전히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레콩키스타를 저지하던 알 만수르가 죽자 쇠락해가는 왕조를 지탱해줄 사람이 없는 상황 속에서 후우마이야 왕조는 1031년 멸망하게 되고 이후 알안달루스는 타이파(طائفة)라는 소규모 왕국들로 분할되어 기독교 세력에 각개격파되기 시작했다.

한편 북부의 기독교 세력은 1004년 즉위한 나바라의 산초 3세에 의해 1034년 잠시나마 통합되었지만 산초 3세 후 도로 분할되었으며, 나중에 107년대 나바라는 아라곤마저 분리되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 사이에 끼게 되면서 영토를 확장할 수 없어 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나바라의 카스티야의 왕들은 때대로 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칭했는데, 나바라의 세메로 왕가의 산초 3세와 레온-카스티아의 국왕인 알폰소 6세와 그의 딸 우라카, 나바라의 산초 3세의 후손으로 우라카와 결혼했지만 이혼한 알폰소 1세(아라곤), 외손자인 알폰소 7세에 걸쳐 스스로 내세웠다.

1137년부로 카탈루냐 공국의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아라곤 여왕 페트로닐라와 결혼하면서 아라곤 연합 왕국이 성립되었으며 1139년 포르투갈 백국이 레온 왕국으로부터 포르투갈 왕국으로 독립했다. 이후 13세기경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성립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봉건제 역시 후작위를 제외하면 공작, 백작, 같이 원래 있던 직위들이 점차 세습화되면서 귀족 작위화 되었으며, 프랑크 왕국을 통해서 카스티야와 나바라를 제외한 아라곤, 포르투갈에서 남작위 또한 추가 되었고, 레콩키스타와 함께 기사들 또한 무작위 귀족들을 의미하는 히달고와 세뇨르와 같은 귀족 힝호들도 생겼지만 피레네 산맥 이북과 비교하면 귀족들의 권한은 크지 않았다. 후술한 왕과의 대립 역시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을 때의 경우이며 대개 귀족들의 힘이 왕권을 압도하지 못했다.

이베리아 국가들은 정복지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기독교 유민들을 정착 시키는 등 행정적 장악을 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이과정에서 Fuero라는 도시 자치권이 제도화되었고, 이후 후술할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카스티야, 아라곤 양 왕국이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리잡았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은 서고트 왕국 시절부터 로마식 법제가 잘 유지되었고, 그에 따라 도시 위주의 행정과 의회 개념이 잘 이어졌다. 의회(cortes)에 투표권이 있는 주도급 각 도시들은 일부 교구와 귀족의 라티푼디움을 제외한 주변의 행정을 장악하였다.

때문에 스페인, 포르투갈은 대토지 귀족이 군벌로 성장하여 왕에게 개기는 일보다는, 의회에서 귀족들만이 아닌 도시 부르주아나 성직 귀족들 등 다양한 계층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충돌하고 왕은 그러한 문제들을 조율하는 위치로서 권위를 행사했다.

2. 레온 왕국

2.1. 11세기

알폰수 5세의 섭정기간 동안 왕의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와 가정교사를 맡고 있던 포르투갈 백작 멘도 곤살베스 섭정했다. 이때 레온 왕국을 연이어 침략하는 알 만수르의 침략에 맞서 싸웠지만 1002년 알 만수르가 사망한 후 1003년 만수르의 뒤를 이어 후우마이야 왕조의 실권을 잡은 아브드 알 말리크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랍 측 기록에 따르면, 1004년 레온 귀족 산초와의 분쟁에 시달리던 멘도가 알 말리크에게 분쟁을 중재해달라고 청원했고, 아브드 알 말리크의 대리인이자 코르도바의 판사인 아스바그 빈 아브드 알라 빈 나빌이 멘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1008년 멘도 곤살베스가 '폭력적인 상황'에서 사망한 시점과 맞물려 알폰수 5세가 14살이 되었을 때 성년으로 인정받아 친정을 시작했다. 통치 초기엔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카스티야 백국과 우호관계를 이어갔지만, 1014년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후원를 받던 바누 고메즈 가문이 레온 왕국에 반기를 들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1017년 3월 산초 가르시아가 사망하면서 입지가 약화된 엘비라는 오비에도의 어느 수도원에 은거한 후 그 해에 사망했다. 알폰수 5세는 산초 백작이 사망한 뒤 지도자 선출에 난항을 겪고 있는 카스티야 백국을 침공해 케아 강과 피수에르 강 사이의 영토(현재 팔렌시아 지방)을 장악했다.

당시 후우마이야 왕조는 기독교 세력을 상대로 맹공을 펼치던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1002년 사망한 뒤 내란에 휩싸여 있었다. 알폰수 5세는 이 때를 틈타 알 만수르의 침략으로 파괴된 레온 시를 재건하고 행정 체계를 개편하는 등 파탄에 빠진 국가를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017년 레온 대성당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푸에로 데 레온(Fuero de León, 레온 헌장)>이란 제목의 법률을 공포했다. 군주의 권한과 종교적 규제를 적시한 20개 계율에 레온 시의 생활을 규제하는 28개 계율이 결합된 이 법령은 레온 왕국 최초의 성문법으로서 기능했다.

20여 년간 왕국의 질서를 회복하고 군대를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인 알폰수 5세는 1028년 포르투갈 지역의 비세우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해 8월 7일 공성전을 지휘하던 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후 레온 왕위에 오른 베르무두 3세는 11살에 불과했기에, 계모이자 팜플로나 왕국 국왕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의 딸인 우라카가 섭정했다. 그러나 알폰수 5세가 레온 헌장을 반포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제한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루고 백작 오베코 루린데스가 먼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 그의 재산은 루고의 주교에 넘겨졌다. 오르비고, 갈리시아, 아스토르가 등 레온 왕국의 동부 영역에서도 그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팜플로나 국왕 안초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레온 정부는 이를 막을 여력이 없었다.

1029년, 우라카 왕비는 팜플로나 왕국이 레온 왕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와 베르무두 3세의 누이인 산차의 결혼을 약혼을 주선했다. 그런데 가르시아 산체스가 결혼식을 치르러 레온으로 향했다가 카스티야에서 추방됐던 귀족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르시아 산체스가 후손을 두지 못한 채 죽자, 팜플로나 국왕 안초 3세는 즉시 카스티야 백작령을 점거한 뒤 자신의 아들이자 죽은 백작의 조카인 페르난도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세워서 카스티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했다. 이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의 바로 위에 있는 차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국경 지대를 점령하고, 전임 백작을 살해한 레온 왕국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레온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다.

1032년 중반 15세의 나이에 친정을 시작한 베르무두 3세는 안초 3세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누이 산차와 안초 3세의 아들 페르난도 사노이츠의 결혼을 주선하고 안초 3세가 빼앗아간 영토를 '지참금'으로 가지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안초 3세는 얼마 안가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고, 1034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과 사모라, 아스토르가 등을 함락시키고 베르무두 3세를 갈리시아로 축출한 뒤 스스로 레온 국왕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레온과 아스토르가를 비롯한 레온 왕국의 동쪽 영역은 팜플로나 왕국의 영역에 들어갔고, 베르무두 3세는 오직 갈리시아 일대만 다스렸다.

1035년 10월,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일대를 모조리 석권하며 '히스파니아의 렉스(Hispaniarum rex)'를 자칭하던 안초 3세가 사망했다. 그가 건설한 왕국은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장남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는 팜플로나 국왕이 되었고, 차남 페르난도 사노이츠는 카스티야 백작을 맡았으며, 삼남 온잘루 사노이츠는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이 되었다. 베르무두 3세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시를 탈환했지만, 안초 3세의 아들들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안초 3세의 딸 히메나 사노이츠와 결혼했다.

그러나 1037년, 카스티야 백작이자 매형인 페르난도 사노이츠는 그를 몰아내고 레온 국왕이 되기로 마음먹고 팜플로나 국왕이자 자신의 형인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와 연합하여 레온 왕국으로 진격했다. 1037년 9월 4일, 양군은 타마론 계곡에서 맞붙었다. 베르무두 3세는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던 중 전투의 열기에 지나치게 휩쓸린 나머지 적진에 무리하게 침투했다가 적병들에게 에워싸이고 말았다. 그는 곧 낙마했고, 창에 16번 찔러 사망했다. 베르무두 3세는 생전에 안초 3세의 딸 히메나 사노이츠와 결혼하여 아들 알폰수를 낳았지만, 알폰수는 며칠 만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아스투리아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카스티야의 백작인 페르난도가 페르난도 1세 히메네스 왕조가 레온 왕국의 새로운 지배 가문이 되었다.

페르난도 1세는 베르무두 3세를 처단한 뒤 레온 국왕이 되려 했다. 레온 왕국의 대표적인 귀족인 페르난도 플라네즈 백작은 찬탈자에게 도시를 양도할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더라도 그의 지위와 직책을 유지해주고 상당한 보상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자 이내 페르난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페르난도는 아내 산차와 함께 레온에 입성한 뒤 성 마리아 성당에서 레온 주교 세르반데스에 의해 레온 국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는 고인이 된 장인 알폰수 5세가 부여한 레온 헌장을 재확인하고 서고트 왕국의 법전을 레온 왕국의 기본법으로서 계속 준수하도록 했으며, 왕국의 관습법과 귀족들의 권리 역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1043년, 아라곤 국왕 라미로 1세가 이복형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가 소유한 팜플로냐 왕위를 빼앗을 의도를 품고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등 무슬림 토후국들과 함께 팜플로냐로 쳐들어갔다.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는 페르난도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했다. 양측은 타팔라에서 맞붙었고, 가르체아 3세-페르난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가르체아 3세는 수많은 무기와 보급물자를 노획했는데, 그 중 라미로가 타고 다녔던 검은 말을 노획해 자신에게 바친 알페레스(alférez: 중세 이베리아의 왕실 고위 관리) 오르티 사노이츠에게 오로비아 마을을 하사했다. 그 후 가르체아 3세와 라미로는 무니아도나의 중재하에 화해했고, 때마침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 온잘루 사노이츠가 사망하자 라미로가 그 땅을 물려받게 했다.

1054년경 병환에 시달리던 가르체아 3세는 자기가 죽으면 페르난도가 자신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팜플로나 왕국을 삼키려 들 거라 예상하고, 병문안을 하러 온 페르난도를 체포해 카에 성에 가두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간수를 매수해 극적으로 탈출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가르체아 3세가 무슬림들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하자, 아라곤 백작 라미로 사노이츠와 함께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양군은 아타푸에르카 계곡에서 맞붙었는데, 전투 도중에 가르체아 3세가 전사했다. 다만 팜플로나군은 해질 무렵까지 전투 대열을 유지했고, 왕의 시신을 수습한 뒤 팜플로나로 이송하여 안장했다.

그 후 팜플로나 왕국의 서쪽에 있던 많은 영주들이 페르난도에게 귀순했다. 이에 가르체아 3세의 뒤를 이어 팜플로나 왕위에 오른 안초 4세는 아라곤 왕을 칭한 라미로 1세와 동맹을 맺고 페르난도와 대립했다. 그러다가 1062년 12월 29일, 안초 4세와 페르난도는 그들의 국경을 확정짓는 조약에 서명했다.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단독 군주로 인정받았고, 안초 4세는 리오하, 알라바, 비스케이 등지를 돌려받았다.

한편, 페르난도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국가들을 상대로 레콩키스타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1057년 포르투갈 북부의 라메고(Lamego)를 공략했으며, 뒤이어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해 몬데고 계곡을 확보했다. 1058년 7월 포르투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비제우(Viseu)를 접수하면서 대서양으로 진출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1060년, 페르난도는 무슬림의 치하에 있던 사라고사를 침공해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 베를랑가, 바도르레이 등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톨레도와 사라고사 사이의 로마 가도까지 진격했다. 당시 사라고사의 에미르 아흐마드 알 무콰디르는 사라고사와 이웃한 토르토사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던 터라 이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알 무콰디르는 지금까지 팜플로나 왕국에 보내던 조공을 레온 왕국에 보내고 충성을 서약하며, 페르난도가 빼앗아간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사라고사를 복속시킨 뒤, 페르난도는 톨레도 에미르 야히아 이븐 이스마일 알 마문에게 관심을 돌렸다. 1062년, 페르난도는 톨레도 토후국으로 쳐들어가서 탈라마아를 공략하고 알칼라 데 헤나레스를 포위했다. 알 마문은 도저히 대항할 방도가 없다고 여기고 알 무콰디르처럼 레온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했고, 페르난도는 이에 만족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1063년, 세비야와 바다호스의 아랍 토후국들에 대한 대규모 약탈을 감행했고, 세비야와 바다호스 토후국들은 그가 철수하는 조건으로 내걸은 몸값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했다. 1064년 1월 몬데고 강 어귀에 있던 코임브라(Coimbra)를 포위하고 6개월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064년 7월 25일에 함락시켰다. 페르난도는 모자라비아 백작 시스난도 다비디즈(Sisnando Davídiz)에게 코임브라를 비롯하여 대서양에서 두에로 강을 따라 이어지는 레온 왕국의 남쪽 국경 지대를 관장하게 했다.

1065년 발렌시아 토후국을 침공해 수 개월간 포위했지만 함락할 기미가 없는 데다 중병에 걸리자 철수하기로 했다. 이때 페르난도는 적이 추격할 것을 예상하고 파테르나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발렌시아 에미르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아브드 아지즈 알 무샤파르는 레온 왕국군을 추격하다가 페르난도가 숨겨둔 매복병에 걸려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발렌시아는 톨레도 에미르 알 마문의 수중에 넘어갔다.

1065년 12월 24일에 레온에 도착한 페르난도는 산 이시도르 교회를 방문해 승리를 연이어 안겨준 하느님을 칭송했고, 성탄절 새벽에 거행된 미사에 참석해 영성체를 받았다. 12월 26일에는 주교, 대수도원장, 성직자들을 불러 왕의 망토와 면류관을 건네고 교회로 가져가라고 명령한 뒤, 성 이시도르의 유해가 담긴 관이 놓인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달라고 간청했다. 다음날인 12월 27일, 레온 왕국 히메네스 왕조의 초대 군주는 눈을 감았다.

페르난도 1세는 생전에 상속인 사이에 왕실 소유물을 분배하는 것을 금지한 서고트 및 레온 법 대신 왕국을 분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나바라 법 원칙을 따르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장남 산초 2세는 카스티야를 물려받았고, 차남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3남 가르시아 2세 갈리시아를 물려받았다. 여기에 누이 우라카와 엘비라는 평생 결혼하지 않는 대가로 각각 사모라와 토로를 영지로 수여받고 왕실에 속한 모든 수도원의 수입 일부를 받을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장남 산초 2세가 자신에게만 유산이 상속되어야 했는데 다른 형제들에게도 영토가 분배되어 버려서 카스티야에서만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불만을 품으면서,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067년 11월 7일 세 형제들을 중재하던 모후 산차 왕비가 사망하자, 산초 2세는 본격적으로 골육상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068년 5월 1일 알폰소 6세가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공격하느라 레온 왕국을 비워두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바다호스 타이파 알 무자파르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왔다.

1068년 7월 19일 피수에르가 강 인근의 린타다 전투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이 전투의 승자가 상대방의 왕국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전투 결과 산초 2세가 승리했지만 알폰소 6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알폰소 6세가 1069년 5월 26일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을 때 산초 2세가 결혼식에 참석한 것을 볼 때 곧 화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71년,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막내 동생 가르시아 2세가 다스리던 갈리시아를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고 힘을 합쳐 갈리시아로 쳐들어갔다. 갈리시아 2세는 두 형의 공세에 패배하고 포르투갈 중심부로 도주했다가 산타렝에서 산초 2세에게 체포되어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 그 후 갈리시아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 의해 양분되었다. 포르투갈 백작령은 알폰소 6세의 레온 왕국으로 편입되었고, 갈리시아는 산초 2세의 카스티야 왕국에 편입되었다. 또한 양자는 3년간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산초 2세는 약속을 어기고 엘 시드와 함께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미처 대항하지 못하고 사로잡혔고, 산초 2세는 레온에 입성한 뒤 1072년 1월 12일 레온 국왕에 즉위했다. 그 후 여동생인 사모라의 우라카의 중재에 따라 알폰소 6세를 사하군 수도원에 유폐시켰지만, 알폰소 6세는 페드로 안수레스 등 몇몇 귀족들과 함께 탈출한 뒤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의 궁정에 망명한 뒤 그곳에 수 개월간 지냈다.

산초 2세는 자신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레온 귀족들을 진압하는 한편, 누나 우라카 역시 자신에게 반기를 들 거라고 의심했다. 그는 우라카에게 사모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명령했으나 거절당하자 반역자와 밀통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사모라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던 1072년 8월 7일, 산초 2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사망에 관해 전승에는 벨리도 돌포스라는 귀족의 의한 암살, 알폰소 6세를 산초 2세 암살 사건의 배후라고 지목했지만, 중세 히스파니아 역사의 주요 사료로 취급되는 <로데리크의 역사(Historia Roderici)>에는 산초 2세의 사인이 암살이었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많은 학자들은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그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거나 병에 걸려 죽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설령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고 해도 당시 톨레도에 멀리 망명한 그가 산초 2세를 처단하는 데 관여하기 어렵다며, 사모라의 우라카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더욱 그럴듯하다고 본다.

산초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기존에 맡고 있던 레온 왕국에 더해 형이 군림했던 갈리시아-포르투갈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을 겸임했다. 13세기 후반에 카르데냐 수도사들이 작성한 연대기인 <카르데냐의 전설(Cardeña Legend)>에 따르면, 엘 시드는 모두가 보는 광장으로 알폰소를 부른 뒤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만인에게 발표하라고 했다. 알폰소는 엘 시드의 지시에 따른 뒤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데리크의 역사> 등 신뢰성이 높은 사료들에서는 이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일화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한편,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가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하고 풀려난 후 세비야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의 궁정으로 망명했던 가르시아 2세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가 서로 전쟁을 벌이느라 자신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세비야 타이파의 후원을 받으며 갈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073년 2월 13일 자신과 만나서 협상하자는 알폰소 6세의 제의를 따랐다가 알폰소 6세가 파견한 군대에 체포된 뒤 루고 성에 투옥되어 1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090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6세는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포르투갈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알폰소 6세는 아버지의 왕국을 재통합한 뒤 망명 기간 동안 자신을 보호했던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과 굳건한 동맹을 맺고, 그와 함께 그라나다 토후국을 공격해 타격을 입힌 뒤 주변의 타이파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상당량의 공물을 받았다. 또한 클뤼니 대수도원과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산 이시드로 데 두냐, 산티아고 데 아스투딜로, 산 후안 데 에르메데스 데 세라토 등 여러 수도원 건립을 허가했으며, 연간 2,000 디나르를 클뤼니 대수도원에 기부했다. 여기에 더해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친척인 콩스탕스와 결혼했으며, 이후에도 새 아내를 정할 때마다 클뤼니 대수도원의 조언을 받았다.

그러던 1076년 6월 4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4세가 나바라 마을 인근의 페날렌에서 사냥하던 중 형제 라몬 가르세이츠가 고용한 암살자가 내지른 단검에 찔려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라몬 가르세이츠는 팜플로나 왕국의 새 국왕이 되려 했지만, 귀족들이 형제를 살해한 그를 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하자 사라고사 궁정으로 도주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때를 틈타 팜플로나 왕국으로 쳐들어가 비즈카이아, 기푸스코아 등 여러 영토를 빼앗아갔고,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는 팜플로나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팜플로나 국왕을 겸임했다. 1077년, 알폰소 6세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칭했다.

이 무렵, 알폰소 6세의 동맹자였던 알 마문은 코르도바에서 독살당했고, 뒤이어 톨레도 타이파가 된 알 카디르는 톨레도 시에 대한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1079년 바다호스의 타이파인 알 무타와길 이븐 알 아프타스가 톨레도 타이파국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톨레토 타이파국이 점유하고 있던 코르도바 등 남쪽 영토를 빼앗았다. 알 카디르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일단 엘 시드를 세비야로 보내 그들과 동맹을 맺고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협공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엘 시드는 그라나다 타이파국이 세비야를 침공하자 다른 카스티야 기사들과 함께 세비야와 손잡고 카브라 전투에서 그라나다군을 격파했다. 이때 그라나다군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과 다른 카스티야 귀족들은 포로로 잡혀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후 엘 시드는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엘 시드가 허락 없이 타이파들간의 전쟁에 뛰어들고 카스티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격분해 1080년 5월 8일 엘 시드를 추방했다.

1080년, 알 카디르가 톨레도 시민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고 알 무타와킬이 톨레도에 입성하여 자기 영지로 삼았다. 이에 알폰소 6세는 알 카디르를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바다호스 타이파국과의 전쟁을 감행했다. 1081년, 알폰소 6세는 마드리드와 탈라베라를 공략하고 에스칼로나에 요새를 건설했다. 1082년에는 코루체를 공략하고 알 카디르를 그곳에 안착시킨 뒤 톨레도를 압박했다.

이 무렵, 사라고사 타이파국에 속한 레우데 데 하이온 성채의 총독인 알부파크(Albufac)는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만( Al-Mutaman)에 대항하는 알 무자파르(Al -Muzáffar)를 지지했다. 그는 알폰소 6세의 지원을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기고, 알폰소 6세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이 요새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루에다 데 하이온 성채는 하이온 강 계곡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알폰소 6세는 이를 받아들여 요새로 출진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알 무자파르가 사망하자, 알부카프는 알 무타만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요새를 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083년 1월 6일, 알폰소 6세가 이끄는 군대가 루에다 성채에 입성했다. 이때 알부파크가 돌연 성문을 닫고 성안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로 인해 산초 가르시아, 라미로 데 팜플로나, 곤살로 살바도레스 등 유력 귀족들이 살해되었다. 당시 후방에 있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알폰소 6세는 격분해 사라고사와 전면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알 무타만의 부하로 지내던 엘 시드가 "이 일은 알부파크가 타이파의 지시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벌인 짓이니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의 중재 아래 알부파크를 처형하고 배상금을 받고 루에다 요새를 넘겨받는 대가로 사라고사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1084년 가을, 알폰소 6세는 톨레도 남쪽에 진영을 세워 톨레도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게 한 뒤 본국에 귀환했다가 1085년 3월 주력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진군했다. 이후 2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주변 타이파들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톨레도 시민들은 그해 5월 6일에 생명, 재산, 자유 및 종교적 표현에 대한 보장을 약속받고 항복했다. 그는 "톨레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하는 한편, 알바르 파네스에게 알 카디르가 발렌시아의 타이파가 되도록 발렌시아를 압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사라고사가 공물 지불을 중단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라고사로 쳐들어가 1086년 봄 도시를 포위했다. 그해 3월 초 발렌시아는 알바르 파네스의 압박에 굴복하여 알 카디르를 타이파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톨레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발렌시아에 속국 군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알폰소 6세는 자신을 "두 종교의 황제"라고 칭했다. 그는 정복지의 무슬림들이 기꺼이 복종하게 하게 위해 그들의 재산을 존중하는 것 외에도 모스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톨레도 대주교로 부임한 베르나르드 데 세디락은 왕의 뜻을 거부하고 모스크를 대성당으로 개조했다. 또한 알폰소 6세는 현지 기독교인들의 언어와 관습을 존중해야만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겼기에, 새로 정복한 영토에 사는 주민들에게 라틴어와 로마 교회식 예배를 강요하라는 교황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우르바노 2세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자, 그들의 지원을 얻어낼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들의 뜻대로 이베리아 교회의 예배 방식을 로마 교회식으로 통합하고 오직 라틴어만 사용하게 했다.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공략하고 발렌시아를 복속시키는 등 이베리아 반도 내 타이파국들을 상대로 강력한 압박을 행사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군주들은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급기야 카스티야군에게 포위된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는 모로코, 세네갈 등지를 장악한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유수프 이븐 타슈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유수프는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이후 세비야로 진군해 세비야, 말라가 등 각지의 타이파들이 이끌고 온 군대와 합세한 뒤 바다호스로 행진했다.

알폰소 6세는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라고사 포위를 풀고 발렌시아에서 군대를 소집하는 한편,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후 바다호스로 진군한 그는 1086년 10월 23일 사그라하스 또는 잘라카에서 유수프의 군대와 마주쳤다. 기독교측 기록에 따르면, 알폰소 6세는 레온과 카스티야 기병 1,500명을 포함해 약 2,500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며, 이중 750명은 기사였다고 한다. 반면 무슬림측 사료에 따르면 6만에서 8만에 달했다고 한다. 유수프의 군대 규모는 3배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규모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유수프는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조공을 바치거나 전투를 벌이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알폰소 6세는 전투를 벌이겠다고 답한 뒤, 아라곤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미루자는 부하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 초반엔 기독교군이 강력한 돌격을 감행해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유수프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적절히 활용해 기독교군을 포위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알폰소는 정강이뼈에 큰 상처를 입고 패주했고, 500명의 전사만이 목숨을 건진 채 왕의 뒤를 따라갔다.

유수프와의 전투에서 완패한 알폰소 6세는 톨레도에 돌아가 수성전을 준비했지만, 유수프는 본국에 있던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후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기병대만 남기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일단 한시름을 놓게 된 그는 1086년 말 또는 1087년 초에 엘 시드와 화해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복귀시켰다. 이후 엘 시드에게 왕국의 동쪽 국경지대를 지키게 했고, 알바르 파네스에게 발렌시아와 톨레도 사이의 방위를 맡겼으며, 페드로 안수레스에게 서쪽 국경 방위를 맡겼다.

알폰소 6세는 유럽 각국과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해달라고 호소했다. 십자군 선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앙리( 엔히크 드 보르고냐) 등 부르고뉴 공국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했다. 그들은 1086년 또는 1087년에 투델라 공방전을 치렀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한편 1087년 또는 1088년에 갈리시아에서 루고 성에 갇힌 가르시아 2세의 복위를 노린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폰소 6세는 이를 순조롭게 진압하고 갈리시아 지역의 주교 7명 중 2명을 해임하는 등 갈리시아 통치 체계를 개편했다.

1088년 유수프가 두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서 알레도를 포위했다. 그러나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미드가 유수프가 이베리아 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고 포위된 수비대에 보급품을 은밀히 공급했고, 이로 인해 알레도는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알레도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한 유수프는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와 마드리드를 일시적으로 공략했지만 과달라하라에서 격퇴당하자 코르도바로 물러났다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 후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자 노력했고, 유수프를 경계하던 그라나다와 사라고사 등 여러 타이파들은 알폰소 6세에게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그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세비야 에미르는 공물 납부를 거부했고, 카스티야군이 압박을 가하기 위해 공세를 가해오자 유수프에게 재차 구원을 요청했다.

1090년 6월, 유수프는 세 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그는 타이파들이 기독교 군주에게 복종하는 등 종교적으로 해이해지고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고 주장하며, 교조적인 종교학자들의 지지를 명분삼아 타이파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그라나다 (1090년), 세비야 & 알메리야 (1091년), 알리칸테 (1092년), 바다호스 (1094년) 등의 타이파들이 모조리 축출되고 무라비트 왕조가 이 도시들을 직할 통치했다.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복위시키기 위해 유수프와 전쟁을 벌였지만 모든 전선에서 실패했다. 동쪽 방면에서는 제노바 함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토르토사 공략에 실패했고, 남쪽에서는 발렌시아의 타이파 알 카디르가 반란으로 축출되었으며, 서쪽에서는 바다호스-카스티야 연합군이 유수프의 군대에게 연전연패해 리스본, 신트라, 산타렘 일대를 빼앗겼다. 오직 엘 시드만이 1094년 6월 발렌시아를 탈환하고 10월에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096년 11월, 아라곤 국왕 페드로 1세가 우에스카를 포위 공격하던 중 우에스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 빌라흐를 알코라즈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에 알폰소 6세는 봉신인 사라고사를 돕기 위해 친히 그곳으로 향했다. 유수프는 이 때를 틈타 알폰소 6세가 자리를 비운 톨레도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황급히 군대를 돌려 1097년 8월 15일 콘수에그라에서 유수프를 저지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기독교 전사들이 적 보병 대열을 돌파했지만, 기병으로 구성된 무라비트 양익이 기독교인들을 포위섬멸했다.

알폰소 6세는 콘수에그라 성으로 도피한 뒤 수백 명 밖에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압도적인 수로 몰아붙이는 적에 맞서 항전했다. 당시 성채에는 물과 식량이 거의 없었지만, 왕이 성벽 위에 몸소 나아가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전의를 끌어올리며 침략자에 맞서 싸웠다. 유수프는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8일 동안 성채를 공략하지 못하자 적 지원군이 도착할 것을 우려해 철수했다.

그 후 알폰소는 군대를 재건하고 국경 지대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지만, 1099년 6월 유수프가 재차 대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쳐들어왔을 때는 군대 재건이 덜 된 상태였기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무슬림군은 톨레도를 지키던 성채 대부분을 공략하면서 레온 왕국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2.2. 12세기

무슬림의 군대는 1100년까지 톨레도까지 진격한 후 도시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주변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돌아갔다. 이제 카스티야 왕국은 톨레도 남쪽 지역을 모조리 상실했고, 톨레도는 국경 도시가 되어버렸다. 알폰소 6세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101년 살라망카와 아빌라에 요새를 새로 세워서 톨레도를 지키게 했고,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에게 톨레도 수비를 맡겼다.

1102년 무라비트 왕조군이 발렌시아로 쳐들어왔다. 당시 발렌시아를 지키던 엘 시드는 1099년에 무슬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정부(情婦) 히메나가 발렌시아를 다스렸다. 히메나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즉시 군대를 보냈다. 양측은 쿨레라 전투에서 막심한 손실을 입고 돌아갔다. 하지만 알폰소 6세는 적의 영역 주변에 튀어나온 형국인 발렌시아를 지키는 건 무리라고 여기고 히메나를 설득해 발렌시아에서 철수하게 했다. 기독교인들은 3~4월에 발렌시아를 파괴한 뒤 철수했고, 무라비트 왕조군은 5월에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이 갈수록 수세에 몰리자, 사라고사 타이파국은 알폰소 6세에게 더 이상 공물을 납부하지 않고 유수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발렌시아를 상실하면서 동쪽 국경 지대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알폰소 6세는 1104년 7월 메디나 셀리를 공략한 뒤 이곳을 요충지로 삼아 동쪽 국경을 지키게 했다. 이후 1104~1106년에 안달루시아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해 무슬림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1108년 코르도바 총독이자 유수프의 아들인 타밈의 군대가 우클레스에 쳐들어왔다. 고령의 나이에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알폰소 6세는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아들 산초 알폰세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기독교군이 또다시 참패했고 산초 알폰세스는 전사했다. 알폰소 6세는 급히 군대를 수습한 뒤 무슬림군의 추가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남쪽 국경으로 향했지만, 무슬림군이 의외로 공세를 더 이어가지 않자 톨레도로 돌아갔다.

알폰소 6세는 생전에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우라카 외에는 자식을 보지 못했고, 정부로 삼은 여인들로부터 두 딸 엘비라, 테레사 데 레온를 두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설득에 따라 정실 아내로부터 얻은 우라카를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결혼시키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또한 포르투갈 백작이 될 엔히크 드 보르고냐와 정부로부터 얻은 테레사의 결혼을 주선해, 그가 차기 후계자를 보좌하게 했다.

그러던 1093년, 알폰소 6세의 정부 중 한 명인 자이다가 아들 산초 알폰세스를 낳았다. 그는 친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해주기로 마음먹고, 산초 알폰세스를 합법적인 아들로 삼았다. 그러나 1105년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우라카 부부가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낳으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자이다와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산초 알폰세스가 성년에 가까우니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라카와 부르고뉴 측 인사들은 알폰소 6세의 합법적인 자식은 오로지 우라카 뿐이며 그녀의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야말로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한 끝에 1107년 5월 레온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15살이 된 산초 알폰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해 9월 레이몽이 사망한 후, 알폰소 6세는 딸 우라카를 갈리시아의 단독 영주로 삼고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갈리시아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후계 구도가 정해지는 듯했지만,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산초 알폰세스가 전사해버리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알폰소 6세는 남쪽 국경으로 가서 무슬림의 추가 공세에 대한 방비를 수행한 뒤 톨레도로 귀환한 후 귀족들을 소집한 뒤 우라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우라카를 재혼시킬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여러 후보가 우라카와 결혼하러 나섰는데,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라라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알폰소 6세의 측근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폰소 6세는 신하였던 자가 자기 딸을 밀어내고 왕권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고, 레온 귀족들과 카스티야 귀족 중 한 명을 택하면 다른 쪽이 반발할까 걱정했다.

알폰소 6세는 고심 끝에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를 딸의 결혼 상대로 낙점했다. 알폰소 1세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우라카와 같은 신분이고, 군사적 역량이 출중하고 용맹해서 무슬림들의 침략으로부터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을 거뜬히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국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레온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곘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레사 데 레온과 엔히크는 자신들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직후인 1109년 7월 1일, 알폰소 6세가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딸 우라카가 레온과 갈리시아, 그리고 카스티야의 여왕에 등극했고, 알폰소 1세와 공동으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와 알폰소 라이문데스의 가정교사를 맡던 트라바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해 알폰소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군대를 이끌고 레온으로 진군해 몬테로소 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더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기사들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러 요새와 성채를 접수하게 했으며, 1110년 내내 우라카의 영지인 레온과 카스티야를 돌며 공물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알폰소 1세가 발바네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하다, 산살바도르 데 오냐 등 여러 수도원에 기부한 것에 대해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어 우라카를 따르는 귀족들을 견제하게 하려는 수단이라고 추정한다.

우라카는 남편의 이같은 행보에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기고 분노했다. 그녀는 비스카야와 하로의 영주이자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의 후계자인 디에고 로페스 데 하로에게 특권을 부여해 알폰소 1세에 적대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귀족들은 알폰소 1세가 자기들 영지 내에 있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자기들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우라카의 지원에 반색하며 알폰소 1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몄다.

사라고사 토후국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은 알폰소 1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이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문제에 전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타우스테를 탈환하고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즉각 대응에 나섰고, 1110년 1월 24일 발티에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알 무스타인을 처단했다. 이후 사라고사 토후국은 쇠락했고, 그동안 사라고사 토후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들 상당수가 알폰소 1세의 봉신을 자처했다.

발티에라 전투의 승리로 알폰소 1세의 위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지만, 그와 우라카와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에서 집필된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가 우라카를 손과 발로 허구헌날 구타했다고 서술했다. 이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저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우라카와 알폰소 1세 부부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1110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니 인정하기 어렵다는 교황청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을 비롯한 반 알폰소 세력은 우라카의 친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으로 받들고 우라카와 알폰소의 결혼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대응해 우라카를 긴급 체포한 뒤 그녀의 정신 상태가 통치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며 아라곤의 엘 카스텔리아 성채에 투옥시킨 뒤 레온과 카스티야의 반란자 토벌에 나섰다. 그는 몇 주 만에 팔렌시아, 부르고스, 오스마, 사하군, 아스토르가, 오렌세 등 레온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민중들이 분노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진군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엘 카스텔리아 성채를 습격해 우라카를 석방시킨 뒤 사하군 수도원에 이송시켰다가 다시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는 군대를 돌려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의 영지가 있는 카스티야 남부로 진격했다. 1111년 4월 13일 교황에게 두 사람의 혼인 무효를 요청했던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를 축출한 뒤 아라곤 수비대를 톨레도에 배치했다. 이 무렵 포르투갈 백작이며 알폰소 6세의 또다른 딸인 테레사 데 레온의 남편인 엔히크 드 보르고냐가 우라카를 돕기 위해 진군하자, 알폰소는 엔히크에게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9월 17일,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우라카로부터 갈리시아 왕위만 먼저 물려받았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사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시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한편, 우라카의 지지자인 페드로 프루엘라스 데 트라바 백작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조직한 군대가 우라카의 어린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와 함께 레온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가 1110년 원정 당시 공략했던 루고를 탈환한 뒤 수비대를 배치한 후 레온으로 계속 진군했다. 알폰소는 이 소식을 듣자 군대를 돌려 비아당고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페드로 프루엘라스는 체포되었고, 디에고 헬미레스는 어린 알폰소를 데리고 포르티 카스텔로 오르질리오네(forti Castello Orzilione)로 도주해 그곳에 숨어있던 우라카와 합류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1112년 여름 동안 휴전을 맺고 양자가 동의할 수 있는 평화 협약을 맺으려 애썼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커서 협의에 실패했다. 알폰소 1세는 어떻게든 레온과 카스티야를 장악하고자 아라곤 수비대들을 곳곳에 배치했지만,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좀처럼 통제하지 못한 데다 아라곤 귀족들마저 본국 귀환을 종용했다.

1112년 9월, 알폰소와의 협상이 무익하다고 여긴 우라카는 전쟁을 재개했다. 그녀는 케아 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해 케리온 강 서쪽의 카스티야 영역을 탈환했다. 부르고스 남쪽의 두에로 상류 영토 역시 우라카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알폰소 1세는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병력을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녀의 공세를 저지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 우라카와의 결혼을 이어가려 했으며, 교황 특사의 중재 제의를 거절했다.

1113년, 우라카는 갈리시아 귀족군과 함께 또다시 공세를 개시해 사하군과 카리온을 공략하고 부르고스를 포위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맞서 라 호야로 진군해 반란 세력을 제압했고, 4월에 로스 아르코스로 진군해 부르고스에 포위된 지지자들을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알바르 파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톨레도를 공략했다. 이렇듯 기독교도들이 내전을 일삼자, 사라고사 토후국은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했다. 무슬림군은 오레하 성을 공략하고 톨레도 주변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1113년 6월, 우라카는 부르고스를 손에 넣은 뒤 무슬림군의 위협에 시달리는 톨레도 구원에 착수했다. 이후 양자는 무슬림에 맞서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114년 팔렌시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했고,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으로 군림하되 레온과 카스티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바스크, 라 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툴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라카 역시 사망할 때까지 전히스파니아의 여제를 자처했다.

1116년, 우라카는 갈리시아의 왕으로 세워둔 아들 알폰소에게 두에로 강 남쪽 땅과 톨레도 일대의 통치권도 양도했다. 젊은 알폰소는 이때부터 카스티야를 여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탈취하려 드는 알폰소 1세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라카의 배다른 누이 테레사가 그녀에게 반기를 들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신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워서 일부는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그녀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그녀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테레사에 대한 원정을 취소하고 레온으로 귀환한 우라카는 때마침 아들이 톨레도에 입성해 알폰소 1세의 세력을 축출한 덕분에 카스티야에서의 입지가 강해졌다. 이에 아들 알폰소가 후임 왕이 되는 것을 보장하는 탐브레 협약에 서명했다. 1118년, 우라카는 자치권을 무제한적으로 누리면서 알폰소 1세와 내통하는 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카스티야 동부로 진군했다. 그해 6월에 세고비아에서 그녀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갈리시아를 확고히 장악하고자 그곳으로 향하면서도 알 안달루스와 맞서는 톨레도 대주교에게 일부 병력을 보냈다.

1119년 1~3월, 우라카는 부르고스에 남아서 알폰소 1세의 대 무슬림 전쟁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전 집사 구테 페르난데스가 참여한 위험한 음모에 직면해야 했다. 구테 페르난데스는 우라카의 연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을 만실라 성에 잠시 가두고 레온에서 여왕의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다. 우라카는 이 반란을 가까스로 제압한 뒤 음모에 가담한 카스티야 귀족 여럿을 처벌하고 1119년 9월 알폰소 1세와 화해했다.

1120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란호소 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두오로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성공에 취했기 때문인지, 우라카는 이 시점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디에고 헬미레스의 권세가 갈수록 커져 정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 거슬렸고, 장차 아들 알폰소를 등에 업고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하려 들 거라고 의심했다. 결국 그녀는 1120년 7월 말에 아리아스 페레스를 통해 헬미레스를 카스트렐로에서 체포하여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권신이긴 했지만 그녀를 지금껏 따랐던 주교를 하루아침에 가둬버린 일은 심각한 후폭풍을 야기했다. 헬미레스의 추종자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여왕을 압박했고, 어머니가 자신을 해칠 지도 모른다고 여긴 알폰소는 산티아고 인근에 머물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와 합세했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한 우라카는 얼마 후에 헬미레스를 석방했지만, 그로부터 빼앗은 영지와 성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헬미레스는 테레사와 그녀의 연인이 된 트레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의 편에 섰다. 그해 가을에는 주교를 체포하고 주교의 영지를 몰수했다는 소식에 진노한 교황 갈리스토 2세[1]가 우라카에게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121년 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행진한 뒤 헬미레스 주교와 프루엘라스 백작과 면담한 뒤 그들의 직위를 돌려주며 크리스마스 이전에 주교의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내전은 겨우 수습되었지만, 1121년 8월 사하군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헬미레스의 지지자들과 여왕의 반대자들이 우라카를 몰아내고 알폰소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하는 등, 사건의 여파는 이어졌다. 게다가 여름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123년 3월 다시 갈리시아로 행차한 우라카는 헬미레스 주교와의 동맹을 갱신하는 대신 페드로 프루엘라스 백작과 그의 아들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남쪽으로 이동해 톨레도에 도착한 뒤 시구엔사를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1124년 5월 25일, 헬미레스 주교가 우라카 여왕의 허락을 받고 산티아고에서 알폰소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124년 여름, 테레사가 휴전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우라카는 1125년 늦봄에 아들과 갈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대면한 뒤 카스티야로 떠나 말년을 보내다 1126년 3월 8일 리오 카리온 강변 살다냐에서 병사했다. 이리하여 히메네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아들 알폰소 7세가 레온, 갈리시아, 카스티야 국왕에 선임되면서 보르고냐 왕조가 레온 왕국의 지배 가문이 되었다.

알폰소 7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알폰소 7세가 자신이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사이 카스티야 전역을 석권해버리자 현실을 받아들여 1128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경계를 확정지은 타마라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알폰소 7세는 우라카 치세 말년에 갈리시아를 침략하여 자기 영역으로 삼은 이모 테레사를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포르투갈 백국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파괴한 뒤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은 뒤 테레사부터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게 한 후 레온으로 돌아가 1128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의 딸 베렝겔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1128년 6월 24일 상 마메데 전투에서 테레사의 아들인 아폰수 엔히크스가 알폰소 7세에게 굴복했던 어머니 테레사와 페드로 페르난데스 등 레온-카스티야 왕국군 장성들을 물리치면서, 알폰소 7세가 복속시켰던 포르투갈 백국이 또다시 독립했다. 아폰수 엔히크스는 1129년에 자신을 포르투갈 프린스라 선언하며 알폰소 7세에 대항했고, 1139년에는 아예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

1130년 바르셀로나 백작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우려해 베렝겔라와의 결혼에 반대한 레온, 살라망카, 오비에도 주교들을 체포했다. 이에 귀족들은 대거 반발했고, 라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이었던 페드로 곤살레스는 우라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드로 페레스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그들을 포섭해 반기를 들었다. 반란군은 한때 팔렌시아, 아스투리아스, 코얀사 등지에서 기세를 드높였지만, 오소리오 마르티네즈가 이끄는 정부군에게 패배했다. 알폰소 7세는 그해 6월에 팔렌시아를 공략하여 페드로 곤살레스를 축출하고 나머지 반란자들과 화해했다.

1134년 아라곤과 팜플로나 국왕 알폰소 1세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팜플로나 대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며 아라곤 왕국에도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모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왕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국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1135년 5월 26일 레온 대성당에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 행사에서 처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고,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톨로사 백작 알폰소 호르다네스, 가스코뉴 및 프랑스 남부의 여러 영주들,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6세, 루에다 데 하온의 영주이자 사라고사의 마지막 타이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아들 아흐메드 알 무스탄시르 사이프 알 다울라(자파둘라)도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라곤 국왕 라미로 2세와 포르투갈 프린스 아폰수 1세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듯 아라곤 왕국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그의 처남인 라몬 베렝게르 4세가 라미로 2세의 딸 페트로닐라와 결혼한 뒤 장인이 수도원에 은퇴한 뒤 아라곤 왕국의 통치를 주관하게 되면서 양국의 사이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반면 포르투갈 왕국과의 전쟁은 이어졌다. 아폰수는 집권 이래로 포르투갈의 '프린스'를 칭하면서 알폰소 7세의 인정을 받고자 사절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자 않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13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시아로 진격해 어머니의 옛 연인이었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갈리시아 귀족들을 상대로 체르네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뒤 투이 등 일부 요새를 공략했다.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알폰소 7세는 어쩔 수 없이 투이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아폰수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알폰소 7세의 충실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했으며, 이번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고, 무슬림 및 기독교 통치자와의 전쟁을 치르는 황제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7세는 그를 포르투갈 백작으로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39년,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로 쳐들어왔다. 아폰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에 맞섰고, 그해 7월 25일 오우리케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군대와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초대 국왕에 선임되었다. 레온 왕국의 알폰소 7세가 이 소식에 격분해 아폰수를 참칭자라고 비난하자, 아폰수는 투이 협약을 깨고 갈리시아를 침공해 미뉴 강을 건너 발데베스 계곡의 여러 성채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7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에게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방어하게 한 뒤 1140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출진해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아폰수는 즉시 역습을 가하여 적군 선봉장 라미루 프로일라스 백작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뒤 발데베스 계곡에서 알폰소 7세와 본대와 대치했다. <황제 알폰소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자는 펜하 다 레이하 성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진영이 좀더 높고 거친 지형에 자리잡았다. 이후 전투가 쉽게 결판나지 않고 양측의 여러 기사들이 생포되자, 포르투갈의 늙은 귀족들이 "기독교인끼리 무익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를 페허로 만들 것이니 이쯤에서 황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자"고 제안했다. 아폰수는 그들의 진언에 따라 알폰소 7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알폰소 7세 역시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143년, 알폰소 7세와 아폰수는 사모라 대성당에서 교황 대표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이 치켜보는 가운데 조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7세는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양자는 그동안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이후 레콩키스타에 전념하기로 한 그는 1138년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1139년 오레자 요새를 공략했고 1142년에는 코리아를 공략했으며, 1144년에는 하옌과 코르도바를 점령했다. 여기에 알 안달루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 근처에서 발흥한 무와히드 왕조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면서, 무라비트 왕조는 급격히 몰락했다.

1145년 3월, 사라고사의 왕자 자파둘라는 알 안달루스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알폰소 7세의 지원을 받아 그라나다를 공략했다. 그러다가 무라비트 왕조의 알 안달루스 총독 이븐 가니야의 반격으로 그라나다를 빼앗기자 알폰소 7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알폰소 7세는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자파둘라는 카스티야군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과 전쟁을 벌이다 1146년 2월 5일 친칠라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알폰소 7세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다가 이븐 가니야로부터 우베다와 바에자를 할양받고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철수했다.

카스티야 왕국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메르톨라의 이븐 알 카시는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하며 원군을 요청했다. 무와히드 왕조의 지도자 아브드 알 무민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146년 5월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무와히드군이 접근해오자, 이븐 가니야는 곧바로 무와히드 왕조에 항복했다. 이후 무와히드 왕조와 대치한 알폰소 7세는 1147년 알메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는 이를 위해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의 실권자 라몬 베렝게르 4세, 제노바 공화국 함대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에 응한 프랑스 십자군의 지원을 받았다. 그 결과 그해 10월 알메리아 공략에 성공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처음으로 지중해 해상에 진출할 수 있었다.

1150년 11월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가 사망하자, 알폰소 7세는 1151년 1월 27일 투딜렌에서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만나 나바라 왕국의 영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안초 6세는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투딜렌 협약을 따르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여동생 블랑카를 알폰소 7세의 장남인 산초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소 7세의 호의를 얻어내려 애썼다. 1153년 중반에는 소리아에서 알폰소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봉신 협약을 갱신했으며, 1157년 6월 2일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현재 팔렌시아)에서 알폰소 7세의 딸 산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7세는 1157년 중순에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맺었다. 1157년, 무와히드 왕조가 알메리아를 습격해 순식간에 탈환했다. 알폰소 7세는 알메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 원정에 착수했으나 실패하고 귀환하던 중 8월 21일에 사망했다.

생전의 알폰소 7세는 큰 아들 산초 3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주고, 작은 아들 페르난두 2세에게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에 속해 있던 티에라 데 캄포스, 사하군, 아스투리아스 데 산티아나는 산초 3세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알폰소 7세 사후, 두 아들은 아버지의 생전 지시에 따라 영토를 분할했다. 1158년 5월 23일, 페르난두 2세와 산초 3세는 사하군 시에서 상호 원조 협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서로 힘을 합쳐 무슬림과의 전쟁을 이어가며, 알 안달루스를 정복한 후에는 니에블라에서 리스본까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이 차지하고 나머지 영토는 카스티야 왕국이 차지하기로 했다. 또한 둘 중 한 명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 다른 한 명이 형제의 영토를 관할하기로 했다.

1158년 8월, 산초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알폰소 8세가 3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라라 가문과 카스트로 가문의 인사들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했지만, 곧 최고 권력을 놓고 내전을 벌이면서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에 빠졌다. 그는 이를 이용해 카스티야 왕국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고 내전에 개입했다. 수세에 몰린 카스트로 가문의 가주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레온에 망명하자, 페르난두 2세는 그를 지원해 라라 가문과의 전쟁을 이어가게 했다. 여기에 1159년 카스티야 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해 부르고스 시를 점거했다.

1160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이끄는 카스트로 가문 추종자들은 바야돌리드 지방의 빌라브라마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로브레갈 전투에서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누뇨 페레스 데 라라가 이끄는 라라 가문 추종자들을 격파하고 누뇨 페레스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장인 오소리오 마르티네스가 목숨을 잃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라라 가문은 여전히 알폰소 8세의 섭정직을 유지했다.

1160년 9월 카스트로 가문과 라라 가문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지만, 페르난도 2세는 페드로 로드리게스가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불허했다. 이에 분개한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인이 혼합된 군대를 이끌고 최근에 세워진 도시인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방문한 페르난두 2세를 포위했다. 페르난두 2세는 한때 목숨이 위험했지만, 살라망카와 사모라의 민병대가 구해주러 온 덕분에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페르난두 2세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와 곧 화해했고, 그를 쿠엘라르, 두냐스, 살라망카, 토로, 바야돌리드, 사모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가 나중에는 아스투리아스와 베나벤테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1162년,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로부터 톨레도를 무력으로 빼앗은 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를 톨레도 총독으로 선임했다. 페르난두 2세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라라 가문은 페르난두 2세가 톨레도와 세고비아를 자국의 영역을 삼는 것을 용인했다. 1164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카스티야 왕국 깊숙이 진격해 그해 6월 또는 7월에 벌어진 우에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적장인 만리케 페레즈 데 라라 백작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라라 가문은 알폰소 8세를 호리타 데 로스 카네스로 피신시켰다가 다시 아빌라 시로 피신하면서 저항을 이어갔고,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알폰소 8세 확보에 실패하자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1165년, 페르난두 2세는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1세의 딸 우라카와 결혼하고 평화 협약을 맺음으로써 선대 때부터 이어졌던 양국의 갈등을 종식하려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라데스마와 사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고 주민들을 거주시키고 총독을 선임했다. 이에 과거에 라데스마 시를 소유했던 살라망카 주민들이 "우리의 땅을 우리의 동의 없이 빼앗아걌다"고 여기고 라데스마 총독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난두 2세는 이 소식을 듣자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격파한 뒤 다시는 반역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고 살라망카로 돌려보냈다.

아폰수 1세는 자국의 국경 인근에 있는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는 것은 장차 그곳을 요새화해 포르투갈을 공격하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그는 그 전에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166년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침공하게 했다. 산슈 1세는 곧바로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여기에 무와히드 왕조가 알칸타라와 알부르케르케를 공략하며 톨레도를 위협하자, 페르난두 2세는 어쩔 수 없이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1166년, 그는 라라 가문의 구성원들과 소리아에서 만나 톨레도를 카스티야 왕국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때 무슬림으로부터 톨레도 시를 방어하기 위해 우클레스 성채를 성전 기사단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는 나중에 카스티야 왕국 역시 아폰수 1세처럼 평화 협약을 깨뜨릴 것을 걱정해 나바라 왕국 안초 6세와 투델라에서 만나서 알폰소 7세가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는 대가로 서로를 지원하기로 한 투델라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하여 카스티야 왕국과 화해한 페르난두 2세는 1168년 갈리시아로 달려가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포위 공격하던 포르투갈군을 급습해 격파했다. 하지만 아폰수 1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갈리시아를 침공해 투이 등 여러 성채를 공략하고 1169년에는 카세레스 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폰수 1세는 곧 마음을 바꿔 일부 병력을 갈리시아에 남겨두고 무슬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바다호스 공략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군의 전력이 분산되자, 페르난두 2세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끌어모아 갈리시아에 침투한 포르투갈군을 격파한 뒤 바다호스 공방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아폰수 1세를 습격했다. 아폰수 1세는 급히 피신하려 했지만 도중에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진 채 사로잡혔다. 그 후 페르난두 2세는 바다호스를 마저 공략한 뒤 레온 왕국의 봉신 노릇을 하는 무슬림들에게 바다호스 성채를 맡겼다.

1070년, 페르난두 2세는 장인 아폰수 1세를 석방시키는 대가로 지난날 아폰수 1세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받고 카세레스, 바다호스, 트루히요, 산타 크루스 데 라 시에라, 몬탄체스 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중 트루히요, 몬탄체스, 산타 크루즈 데 라 시에라 등지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의 영지가 되었다. 같은 해에 무와히드 왕조가 포르투갈의 도시인 산타렝을 포위하자, 페르난두 2세는 장인을 도우러 달려와서 무슬림군을 격파했다. 1173년 포르투갈을 공격했다가 아폰수 1세에게 패배한 무슬림군은 방향을 돌려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기습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를 조기에 파악한 페르난두 2세는 레온, 사모라, 갈리시아 등지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향해 진군하던 적을 역습해 대승을 거뒀다.

1175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페르난두 2세와 우라카 왕비가 사촌 관계[2]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를 선고했다. 물론 이것은 명목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포르투갈과 결혼 동맹을 이어가봐야 이득이 없겠다고 판단한 페르난두 2세가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인과 결혼해서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이 하나로 힘을 합쳐서 레콩키스타를 완수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페르난두 2세 역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를 왕비로 삼고 있었던 알폰소 8세는 레온 왕국보다는 잉글랜드와 손잡는 게 낫다고 여겼기에 무산되었다. 그 후 페르난두 2세는 1177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트레바 백작 페르난데 페레스와 테레사 데 레온 사생아이자 누누 페레스 데 라라 백작의 미망인인 테레사 페르난데스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카스티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라라 가문과 갈리시아의 거물 귀족인 트리바 가문과 동시에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1178년, 카스티야 왕국의 연이은 침략에 시달리던 나바라 국왕 안초 6세의 구원 요청을 받은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을 전격적으로 침략했다. 그는 알폰소 8세가 미처 대처하기 전에 카스트로헤리스, 두에나스를 공략했다. 알폰소 8세는 이에 맞서 포르투갈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아폰수 1세는 페르난두 2세가 다수의 병력을 카스티야 방면으로 보낸 틈을 타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공격해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1180년 페르난두 2세와 알폰소 8세는 토르데시아스 마을에서 만나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 해 2월 6일 페르난두 2세의 두번째 왕비 테레사 페르난데스가 둘째 아들을 낳다가 사망하고 레온의 산 이시도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파드론, 리바다비아, 노이아, 카스트로 칼델라스, 폰테베드라, 투이, 루고 등 여러 영지를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종신 연금을 수여했다. 또한 1170년 카세레스 시에 산티아고 기사단이 선립되어 순례자들의 순례길을 지키고 무슬림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184년 무와히드 왕조 칼리파 아부 야쿱 유수프가 북아프리카에서 모집한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을 침공해 그 해 5월 산타렝에서 아폰수 1세를 포위했다. 이에 산티아고 기사단이 출격해 그해 6월 무슬림군을 격퇴했다. 이후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순례하러 찾아오면서,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의 경제가 상당히 호전되고 문화, 에술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1187년 5월, 페르난두 2세는 비스카의 영주 로페 디아스 데 하로의 딸이자 세온의 영주 누뇨 메넨데스의 미망인인 우라카 로페스와 결혼했다. 그는 새로 맞이한 아내에게 아길라르와 몬테아구도의 영주권을 주었다. 우라카 로페스는 적어도 1180년 5월부터 페르난두 2세의 정부였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알폰소 페르난데스, 산초 페르난데스를 낳았지만 오직 산초 페르난데스만이 유년기에 죽지 않았다. 1188년 1월, 페르난두 2세의 죽음이 임박하다는 것을 눈치챈 우라카는 그의 맏아들인 알폰수 9세를 몰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는 알폰수 9세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우라카'가 교황에 의해 결혼 무효 처리되었으니 알폰소 9세가 후계자로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우라카 로페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알폰수 9세를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1188년 1월 22일 베나벤테에서 병사했다.

페르난두 2세 사후, 우라카 로페스는 자기 아들 산초 페르난데스를 새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페르난두 2세의 두번째 부인 테레사 페르난데스와 연관이 있던 라라 가문과 트라바 가문은 알폰수 9세를 지지했고, 다른 귀족과 성직자들 역시 오랫동안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왕자를 하루아침에 추방하고 어린 아이를 세울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 결과 알폰수 9세는 무사히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우라카 로페스는 아들 산초와 함께 카스티야 왕국으로 피신했다.

계모 우라카 로페스의 음모를 물리치고 레온 국왕에 선임된 알폰수 9세는 1188년 4월에 레온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와 레온, 오비에도, 살라망카, 시우다드 로드리고, 사모라, 아스토르가, 토로, 베나벤테, 레데스마 등 각 도시 대표들을 소집한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무슬림 세력과 카스티야, 포르투갈, 아라곤 등 이웃 국가들의 압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면 국방을 강화해야 하며, 그러려면 세금을 더 많이 거둬야 하니 양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세금을 늘리는 것을 동의해준다면 사법 행정을 개선하고 귀족들이 도시민들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귀족들과 잦은 마찰을 벌이던 도시 대표들은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88년 6월, 알폰수 9세는 카리온에서 카스티야 국왕이자 사촌인 알폰소 8세와 만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려 했다. 알폰소 8세는 사촌을 기사로 선임하는 의식을 거행했고,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손에 키스하고 검과 허리띠를 받았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스와비아 공작 콘라드 역시 이 자리에 참석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콘라드는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렝겔라와 결혼하고자 이곳에 찾아왔지만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이후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상호 방위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얼마 안가 협약을 깨고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가 발렌시아 데 돈 후안과 발데라스를 포함한 여러 영토를 공략했다. 여기에 포르투갈의 산슈 1세 역시 새 국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어수선한 레온 왕국을 공격해 갈리시아의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에게 이중으로 전쟁을 치르게 된 그는 포르투갈 왕국과 화해하기로 했다. 그는 산슈 1세를 만나 평화 협약을 맺고 산슈 1세의 딸 테레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산차, 페르난도, 둘세를 낳았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두 부부가 사촌 관계이니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다며 교황청에 재소했다.

이시기 레온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국가들 중 최초로 성직자, 귀족, 중산층으로 구성된 의회 코르테스를 제도화한다. 이전까지의 코르테스는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로만 구성되었으며 1037년과 1091년 간혹 자유농을 동석시켜 새로운 세금에 관한 입법에 대해 논의한 것이 전부였음에 비해 알폰소 9세는 제한적이지만 세신분에 의한 의결제도를 공식화시켰다.

한편,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알폰소 8세가 당초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과 함께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사신을 보내 반 카스티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산슈 1세, 그리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1191년 5월 12일 우에스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나바라-레온-아라곤-포르투갈 4개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한 국가가 공격당하면 다른 국가들이 즉시 원조하기로 했다.

우에스카 협정이 체결된 후, 나바라-아라곤 연합군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119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다른 연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우에스카 협정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1194년 나바라 국왕 안초 6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협정을 파기했다.

여기에 알폰수 9세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무와히드 왕조의 침공을 우려해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이 역효과를 초래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알폰수 9세가 근친상간을 범하여 교회법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이교도와 손잡기까지 했다며 레온 왕국에 파문과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은총을 레온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포르투갈 국왕 산슈 1세는 레온 왕국과 동맹을 끊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투이와 폰테베드라를 공략했다.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 역시 레온 왕국의 남부를 공격하여 베나벤테를 포위했지만 함락에 실패했고, 뒤이어 북쪽으로 이동해 아스토르가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푸엔테 카스트로를 공격해 며칠 만에 함락시키고 도시민들을 도륙한 뒤 레온 성벽에 도달했다. 알폰수 9세는 레온 시를 겨우 빠져나갔지만, 미처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도륙되었고, 유대인 구역과 회당은 파괴되었다.

1194년, 알폰수 9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반격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는 카리온까지 진군하면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해 레온 시의 참상을 복수했다. 이에 교황 사절이 양국의 갈등을 중재했고, 알폰수 9세와 알폰소 8세는 1194년 4월 20일 바야돌리드 지방의 토르데후모스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카스티야 국왕은 페르난두 2세 사후 레온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알바, 루나, 포르티야, 발데라스, 볼라뇨스 등지를 돌려주기로 했으며,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장녀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앞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96년 알폰수 9세는 포르투갈의 테레사를 포르투갈로 돌려보냈다. 베렝겔라와의 결혼식은 1197년 12월 초 산타 마리아 데 바야돌리드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1195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마라케시에서 중병을 앓고 있으며, 그의 동생인 알 안달루스 타이파 아부 야히아가 지중해를 건너 왕을 자칭하며 마라케시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때를 틈타 세비야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야쿱은 아부 야히야의 반란을 신속하게 제압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와서 카스티야 왕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알폰소 8세는 대규모 전투가 임박하자 레온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빼앗아갔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해놓고 아직 돌려주지 않은 점을 들며 지원을 보내길 거부했다.

결국 알폰소 8세는 단독으로 야쿱 알 만수르와 맞붙었고, 1195년 7월 19일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야쿱은 여세를 몰아 말라곤, 베나벤테, 칼라트라바, 카라쿠엘, 토레 데 과달페르사 등 여러 성채를 함락하였다. 이제 툴레도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려버리자, 알폰소 8세는 다시 한 번 레온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알폰수 9세는 톨레도로 가서 알폰소 8세와 만나 이제라도 영토를 돌려준다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이번에도 확답을 피했고, 알폰수 9세는 격분한 채 톨레도를 떠났다.

이후 야쿱의 군대는 2년간 엑스트레마두라, 타구스 계곡, 라 만차, 톨레도 주변을 초토화했고, 몬탄체스, 트루히요, 플라센시아, 탈라베라, 에스칼로나 등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야쿱은 곧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베리아 반도에 흥미를 잃고 1187년 수도 마라케시로 돌아간 뒤 1199년 2월 사망했다.그의 뒤를 이은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이프리키야의 바누 가니야의 반란 진압에 몰두하느라 알 안달루스에 신경쓰지 못했고,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왕국은 이 때를 틈타 알 안달루스를 갉아먹었다.

2.3. 13세기

1197년 12월 베렝겔라와의 결혼이 거행된 이래, 알폰수 9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사촌간의 결혼은 무효이니 당장 헤어지라는 압박을 받았고, 여러 차례 파문 위협을 받았다. 그는 이교도와의 항쟁을 위해 이웃 국가들끼리 단합하고자 단행한 것이니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교황은 끝내 거부했다. 다만 그들의 자녀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는 인정받았다. 그는 베렝겔라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지만, 교황의 강요에 못 이겨 1204년 베렝겔라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1212년 바누 가니야 진압에 성공한 앗 나시르는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가 톨레도와 코르도바 사이에 위치한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본부인 살바티에라를 공략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이교도와의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알폰수 9세는 확답을 피했지만, 알폰소 8세는 죽음을 각오하고 레콩키스타에 뛰어들겠다고 답했다. 이에 교황은 카스티야 국왕을 도울 십자군을 선포하고, 알비파 십자군을 이끌던 아르노 애므리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였다. 알폰소 8세가 "내가 이교도들과 싸우고 있을 때 레온 국왕이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며 빈 틈을 노릴까 걱정된다"고 호소하자, 아르노는 레온 등 이베리아 각국에 "카스티야인들이 이교도와 싸우는 동안 카스티야를 공격한다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자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신하들이 카스티야군과 함께 싸우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면서도 레온 왕국 국경 너머의 카스티야 점령지를 은밀히 탈환했다. 1212년 7월 12일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함마드 앗 나시르의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상당한 영토를 확보하고 귀환한 알폰소 8세는 자신이 거둔 대성과에 고무되었기에 알폰수 9세의 이같은 행동을 굳이 따져묻지 않았다. 그 대신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2세를 초대하여 코임브라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페냐피엘과 알만자를 레온 왕국에 돌려주기로 했다.

1214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가 사망하고 10살의 엔리케 1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1217년 6월 6일, 엔리케 1세는 팔렌시아의 에피스코팔 궁전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지붕 위에서 떨어진 타일에 머리를 직격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베렝겔라는 알폰수 9세가 엔리케 1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왕실의 혈통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그녀는 일단 엔리케 1세가 죽었다는 것을 숨기고 알폰수 9세에게 아들 페르난도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올 때까지 임시로 카스티야 여왕을 맡았다.

알폰수 9세가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페르난도를 보내자, 베렝겔라는 곧바로 엔리케 1세의 사망을 대내외에 공개한 뒤 아들 페르난도 3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알폰수 9세는 베렝겔라가 자신을 속였다며 격분했고,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엔리케 1세의 전 섭정이었던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와 손잡고 카스티야를 전격 침공해 우루에냐, 비야가르시아, 카스트로 몬테, 아로요를 점령했다. 그 후 베렝겔라로부터 협상을 요청받자, 그는 베렝겔라와 재혼하고 그녀가 카스티야 여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며, 그와 베렝겔라가 죽고 난 뒤 페르난도가 레온과 카스티야의 유일한 왕으로 군림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카스티야인들이 제안을 거부하자, 알폰수 9세는 무력으로 밀어붙이기로 하고 부르고스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조언에 따라 라구나 데 두에로, 토르케마다, 토르도마르를 거쳐 부르고스로 향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민중들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병력이 계속 소모되자, 그는 부르고스를 공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레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돌아가는 동안 팔렌시아를 통과하면서 기론과 메네세스 가문의 영지를 초토화했다. 한편 페르난도 3세는 아빌라와 세고비아, 라라, 팔렌시아 일대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곳의 병력을 차출해 1217년 8월 중순 부르고스에 입성해 민중의 환호를 받고 8월 31일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1217년 9월 페르난도 3세가 부르고스를 떠나 팔렌시아로 향했을 때, 알바로 누녜스의 형제 페르난도가 레빌라 발레헤라에서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격퇴되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에레루엘라 데 카스티야레라에서 또다른 매복 공격을 시도했지만, 수에로 텔레즈 데 메네세스가 이끄는 적군의 역습을 받고 사로잡혀 바야돌리드로 호송되었다. 그는 알라르콘, 카네테, 타리에고, 아마야 및 빌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등 자신이 통제하는 요새들을 모조리 헌납해야 했다.

1217년 11월, 알폰수 9세는 풀려난 후 레온으로 망명한 알바로 누녜스와 함께 페르난도 3세와 만나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218년 봄 카스티야를 재차 침공해 메디나 데 리오세코 인근의 발데네브로 요새를 공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로베 데이즈 데 하로, 알바로 디아즈 데 카메로스,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빌라마요르를 파견해 레온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알폰수 9세와 라라 가문에게 격퇴되어 카스트레혼 데 라 페냐 요새로 퇴각했다. 알바로 누녜스는 이 요새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끌던 중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요새에 갇혔던 카스티야군은 적이 지휘관의 사망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강경파였던 알바로 누녜스가 사망한 뒤, 알폰수 9세와 페르난도 3세는 베렝겔라의 중재에 따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양자는 1218년 8월 26일 토로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아버지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알폰수 9세는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고 다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그 후 알폰수 9세는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쇠락해가는 무와히드 왕조를 공격하기로 했다. 1218년 말, 그는 카세레스를 공략하고자 가스코뉴 십자군과 칼라트라바와 알칸타라 기사단과 함께 출진했다. 그러나 3개월간 이어진 공방전에도 함락되지 않아 철수해야 했다. 이후 두번째 원정에 착수한 그는 브라가와 가마랑스에서 포르투갈인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모두 격파했고, 1219년 6월 13일 포르투갈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뒤이어 세비야로 쳐들어가 적군을 격파하고 상당량의 전리품을 확보했다. 1221년 알칸타라 기사단이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공략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1222년 카세레스를 재차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223년, 1225년, 1226년에 잇따라 카세레스를 공격했고, 1229년 마지막 공격에서 카세레스를 마침내 공략했다.

1230년, 알폰수 9세는 메리다를 포위하고 이 도시를 구하려고 달려오던 이븐 후드를 격파했다. 메리다 수비대는 구원군이 격파당하자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했고, 뒤이어 바다호스, 엘바스, 탈라베라 라 레알이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렇게 많은 영토를 확보하고 귀환한 알폰수 9세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방문해 대 야고보에게 경의를 표한 뒤 레온으로 향하던 중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에서 중병에 걸렸고, 1230년 9월 24일에 사망했다.

알폰수 9세는 당초 첫 왕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페르난도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베렝겔라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르난도가 왕위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페르난도가 이미 카스티야의 국왕인 점이 걸림돌이었다. 카스티야 왕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은 알폰수 9세에게 테레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산차와 둘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유했다. 알폰수 9세 역시 자신의 동의 없이 카스티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베렝겔라와 감히 자신에게 대항한 페르난도 3세 모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의 설득에 따랐다. 그리하여 알폰수 9세 사후 산차와 둘세가 레온과 갈리시아의 공동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성직자와 레온 시민들은 두 여왕을 인정하지 않고 페르난도 3세를 초청했다. 페르난도 3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토로에 입성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힘을 합쳐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을 제압했다. 이후 페르난도 3세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산차와 둘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협상한 끝에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에서 연간 3만 메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왕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리하여 레온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었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탄생했다. 레온 귀족들은 이에 반감을 품어 2년간 저항을 이어갔지만, 끝내 페르난도 3세에게 토벌되었다. 1252년 페르난도 3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알폰소 10세는 1275년 장남 페르난도가 에시아 전투에서 무와히드 왕조- 나스르 왕조 연합군과 맞붙다 전사하자 페르난도의 아들들에게 레온 왕국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알폰소 10세의 둘째 아들 산초 4세가 연장자만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카스티야 관습법에 근거해 자신이 모든 영토를 상속받아야 한다며 반기를 들었다. 1282년 알폰소 10세는 산초 4세에게 굴복해 그를 유일한 왕위 후계자로 세웠다.

1284년 알폰소 10세가 사망한 뒤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산초 4세는 조카들을 레온 왕위에 올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모조리 토벌했다. 1295년 산초 4세가 사망한 뒤 9살된 아들 페르난도 4세가 왕위에 오르자, 페르난도의 삼촌 후안이 1296년 레온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레온, 갈리시아, 세비야의 왕을 칭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왕국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결국 1300년 페르난도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퇴위했다. 이후에도 레온 왕국을 부활시키기 위한 반란이 종종 일어났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3. 카스티야 백국 ⇒ 카스티야 왕국 ⇒ 카스티야 연합 왕국

3.1. 11세기

카스티야는 9세기 중엽부터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거쳐 레온 왕국과 팜플로나 왕국 사이를 줄타기하는 듯이 충성 대상을 바꿔가면서 자치권을 확고히 다지고자 노력하면서,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영토를 차츰 늘렸다.

1010년경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는 딸 무니아도나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3세에게 시집보내고 팜플로나 왕국의 봉신을 자처했다. 1017년 산초 가르시아가 사망한 후 미성년자였던 가르시아 산체스가 백작에 오르자, 안초 3세는 그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카스티야 백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029년, 가르시아 산체스는 레온 국왕 알폰수 5세의 딸인 산차와 약혼한 뒤 결혼식을 치르러 레온으로 향했다가 카스티야에서 추방됐던 귀족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초 3세는 즉시 카스티야 백작령을 점거한 뒤 자신의 아들이자 죽은 백작의 조카인 페르난도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세워서 카스티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했다.

페르난도 1세는 1032년 가르시아 산체스의 약혼자였던 레온의 산차와 결혼했다. 이때 레온 왕국은 지참금으로 케아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땅을 카스티야 백국에 넘겼다. 1035년 아버지 안초 3세가 사망한 뒤 비로소 카스티야 백작으로서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1037년 레온 왕국의 국왕이었다가 안초 3세에게 패배해 갈리시아로 망명했던 베르무두 3세가 왕국을 되찾기 위해 쳐들어오자, 그는 형이자 팜플로냐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와 연합해 대항했다.

1037년 9월 4일, 페르난도는 타마론 전투에서 베르무두 3세를 전사시키고 레온 국왕이 되려 했다. 레온 왕국의 대표적인 귀족인 페르난도 플라네즈 백작은 찬탈자에게 도시를 양도할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더라도 그의 지위와 직책을 유지해주고 상당한 보상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자 이내 페르난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페르난도는 아내 산차와 함께 레온에 입성한 뒤 성 마리아 성당에서 레온 주교 세르반데스에 의해 레온 국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는 고인이 된 장인 알폰수 5세가 부여한 레온 헌장을 재확인하고 서고트 왕국의 법전을 레온 왕국의 기본법으로서 계속 준수하도록 했으며, 왕국의 관습법과 귀족들의 권리 역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이리하여 레온 왕위에 오른 페르난도 1세는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카스티야의 왕으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후대에 카스티야 군주제의 창시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형제 및 조카들과 정쟁을 벌여가며 이득을 최대한 보고자 노력하는 한편,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국가들을 상대로 레콩키스타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1057년 포르투갈 북부의 라메고(Lamego)를 공략했으며, 뒤이어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해 몬데고 계곡을 확보했다. 1058년 7월 포르투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비제우(Viseu)를 접수하면서 대서양으로 진출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1060년, 페르난도는 무슬림의 치하에 있던 사라고사를 침공해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 베를랑가, 바도르레이 등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톨레도와 사라고사 사이의 로마 가도까지 진격했다. 당시 사라고사의 에미르 아흐마드 알 무콰디르는 사라고사와 이웃한 토르토사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던 터라 이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알 무콰디르는 지금까지 팜플로나 왕국에 보내던 조공을 레온 왕국에 보내고 충성을 서약하며, 페르난도가 빼앗아간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사라고사를 복속시킨 뒤, 페르난도는 톨레도 에미르 야히아 이븐 이스마일 알 마문에게 관심을 돌렸다. 1062년, 페르난도는 톨레도 토후국으로 쳐들어가서 탈라마아를 공략하고 알칼라 데 헤나레스를 포위했다. 알 마문은 도저히 대항할 방도가 없다고 여기고 알 무콰디르처럼 레온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했고, 페르난도는 이에 만족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1063년, 세비야와 바다호스의 아랍 토후국들에 대한 대규모 약탈을 감행했고, 세비야와 바다호스 토후국들은 그가 철수하는 조건으로 내걸은 몸값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했다. 1064년 1월 몬데고 강 어귀에 있던 코임브라(Coimbra)를 포위하고 6개월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064년 7월 25일에 함락시켰다. 페르난도는 모자라비아 백작 시스난도 다비디즈(Sisnando Davídiz)에게 코임브라를 비롯하여 대서양에서 두에로 강을 따라 이어지는 레온 왕국의 남쪽 국경 지대를 관장하게 했다.

1065년 12월 27일, 발렌시아 원정에서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귀환하던 페르난도 1세는 도중에 중병에 걸려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상속인 사이에 왕실 소유물을 분배하는 것을 금지한 서고트 및 레온 법 대신 왕국을 분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나바라 법 원칙을 따르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장남 산초 2세는 카스티야를 물려받았고, 차남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3남 가르시아 2세 갈리시아를 물려받았다. 여기에 누이 우라카와 엘비라는 평생 결혼하지 않는 대가로 각각 사모라와 토로를 영지로 수여받고 왕실에 속한 모든 수도원의 수입 일부를 받을 권한이 부여되었다. 산초 2세가 카스티야 국왕을 자처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아버지 페르난도 1세에 의해 카스티야 왕국 최초의 국왕이 된 산초 2세는 자신에게만 유산이 상속되어야 했는데 다른 형제들에게도 영토가 분배되어 버려서 카스티야에서만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불만을 품었다. 1067년 11월 7일 세 형제들을 중재하던 모후 산차 왕비가 사망하자, 산초 2세는 본격적으로 골육상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068년 5월 1일 알폰소 6세가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공격하느라 레온 왕국을 비워두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바다호스 타이파 알 무자파르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왔다.

1068년 7월 19일 피수에르가 강 인근의 린타다 전투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이 전투의 승자가 상대방의 왕국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전투 결과 산초 2세가 승리했지만 알폰소 6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알폰소 6세가 1069년 5월 26일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을 때 산초 2세가 결혼식에 참석한 것을 볼 때 곧 화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71년,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막내 동생 가르시아 2세가 다스리던 갈리시아를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고 힘을 합쳐 갈리시아로 쳐들어갔다. 갈리시아 2세는 두 형의 공세에 패배하고 포르투갈 중심부로 도주했다가 산타렝에서 산초 2세에게 체포되어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 그 후 갈리시아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 의해 양분되었다. 포르투갈 백작령은 알폰소 6세의 레온 왕국으로 편입되었고, 갈리시아는 산초 2세의 카스티야 왕국에 편입되었다. 또한 양자는 3년간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산초 2세는 약속을 어기고 엘 시드와 함께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미처 대항하지 못하고 사로잡혔고, 산초 2세는 레온에 입성한 뒤 1072년 1월 12일 레온 국왕에 즉위했다. 그 후 여동생인 사모라의 우라카의 중재에 따라 알폰소 6세를 사하군 수도원에 유폐시켰지만, 알폰소 6세는 페드로 안수레스 등 몇몇 귀족들과 함께 탈출한 뒤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의 궁정에 망명한 뒤 그곳에 수 개월간 지냈다.

산초 2세는 자신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레온 귀족들을 진압하는 한편, 누나 우라카 역시 자신에게 반기를 들 거라고 의심했다. 그는 우라카에게 사모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명령했으나 거절당하자 반역자와 밀통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사모라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던 1072년 8월 7일, 산초 2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벨리도 돌포스(Vellido Dolfos)라는 귀족이 사모라에서 카스티야군 진영에 들어간 뒤 산초 2세에게 도시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산초 2세는 이를 믿고 그를 따라가다가 돌연 손에 쥐고 있던 황금 창을 빼앗기고 창에 복부를 찔러 사망했다. 돌포스는 엘 시드의 추격을 피해 곧바로 사모라로 돌아와서 우라카를 향해 "도냐 우라카, 약속을 이행할 때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히스파니아 역사의 주요 사료로 취급되는 <로데리크의 역사(Historia Roderici)>에는 산초 2세의 사인이 암살이었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많은 학자들은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그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거나 병에 걸려 죽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후대의 많은 전승과 연대기에는 알폰소 6세를 산초 2세 암살 사건의 배후라고 지목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설령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고 해도 당시 톨레도에 멀리 망명한 그가 산초 2세를 처단하는 데 관여하기 어렵다며, 사모라의 우라카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더욱 그럴듯하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우라카가 알폰소 6세와 비밀 협의를 하고 산초 2세를 암살한 뒤 알폰소 6세를 왕으로 옹립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산초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기존에 맡고 있던 레온 왕국에 더해 형이 군림했던 갈리시아-포르투갈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을 겸임했다. 13세기 후반에 카르데냐 수도사들이 작성한 연대기인 <카르데냐의 전설(Cardeña Legend)>에 따르면, 엘 시드는 모두가 보는 광장으로 알폰소를 부른 뒤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만인에게 발표하라고 했다. 알폰소는 엘 시드의 지시에 따른 뒤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데리크의 역사> 등 신뢰성이 높은 사료들에서는 이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일화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한편,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가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하고 풀려난 후 세비야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의 궁정으로 망명했던 가르시아 2세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가 서로 전쟁을 벌이느라 자신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세비야 타이파의 후원을 받으며 갈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073년 2월 13일 자신과 만나서 협상하자는 알폰소 6세의 제의를 따랐다가 알폰소 6세가 파견한 군대에 체포된 뒤 루고 성에 투옥되어 1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090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6세는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포르투갈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알폰소 6세는 아버지의 왕국을 재통합한 뒤 망명 기간 동안 자신을 보호했던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과 굳건한 동맹을 맺고, 그와 함께 그라나다 토후국을 공격해 타격을 입힌 뒤 주변의 타이파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상당량의 공물을 받았다. 또한 클뤼니 수도원과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산 이시드로 데 두냐, 산티아고 데 아스투딜로, 산 후안 데 에르메데스 데 세라토 등 여러 수도원 건립을 허가했으며, 연간 2,000 디나르를 클뤼니 수도원에 기부했다. 여기에 더해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친척인 콩스탕스와 결혼했으며, 이후에도 새 아내를 정할 때마다 클뤼니 수도원의 조언을 받았다.

그러던 1076년 6월 4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4세가 나바라 마을 인근의 페날렌에서 사냥하던 중 형제 라몬 가르세이츠가 고용한 암살자가 내지른 단검에 찔려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라몬 가르세이츠는 팜플로나 왕국의 새 국왕이 되려 했지만, 귀족들이 형제를 살해한 그를 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하자 사라고사 궁정으로 도주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때를 틈타 팜플로나 왕국으로 쳐들어가 비즈카이아, 기푸스코아 등 여러 영토를 빼앗아갔고,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는 팜플로나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팜플로나 국왕을 겸임했다. 1077년, 알폰소 6세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칭했다.

이 무렵, 알폰소 6세의 동맹자였던 알 마문은 코르도바에서 독살당했고, 뒤이어 톨레도 타이파가 된 알 카디르는 톨레도 시에 대한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1079년 바다호스의 타이파인 알 무타와길 이븐 알 아프타스가 톨레도 타이파국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톨레토 타이파국이 점유하고 있던 코르도바 등 남쪽 영토를 빼앗았다. 알 카디르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일단 엘 시드를 세비야로 보내 그들과 동맹을 맺고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협공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엘 시드는 그라나다 타이파국이 세비야를 침공하자 다른 카스티야 기사들과 함께 세비야와 손잡고 카브라 전투에서 그라나다군을 격파했다. 이때 그라나다군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과 다른 카스티야 귀족들은 포로로 잡혀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후 엘 시드는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엘 시드가 허락 없이 타이파들간의 전쟁에 뛰어들고 카스티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격분해 1080년 5월 8일 엘 시드를 추방했다.

1080년, 알 카디르가 톨레도 시민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고 알 무타와킬이 톨레도에 입성하여 자기 영지로 삼았다. 이에 알폰소 6세는 알 카디르를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바다호스 타이파국과의 전쟁을 감행했다. 1081년, 알폰소 6세는 마드리드와 탈라베라를 공략하고 에스칼로나에 요새를 건설했다. 1082년에는 코루체를 공략하고 알 카디르를 그곳에 안착시킨 뒤 톨레도를 압박했다.

이 무렵, 사라고사 타이파국에 속한 레우데 데 하이온 성채의 총독인 알부파크(Albufac)는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만( Al-Mutaman)에 대항하는 알 무자파르(Al -Muzáffar)를 지지했다. 그는 알폰소 6세의 지원을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기고, 알폰소 6세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이 요새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루에다 데 하이온 성채는 하이온 강 계곡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알폰소 6세는 이를 받아들여 요새로 출진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알 무자파르가 사망하자, 알부카프는 알 무타만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요새를 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083년 1월 6일, 알폰소 6세가 이끄는 군대가 루에다 성채에 입성했다. 이때 알부파크가 돌연 성문을 닫고 성안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로 인해 산초 가르시아, 라미로 데 팜플로나, 곤살로 살바도레스 등 유력 귀족들이 살해되었다. 당시 후방에 있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알폰소 6세는 격분해 사라고사와 전면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알 무타만의 부하로 지내던 엘 시드가 "이 일은 알부파크가 타이파의 지시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벌인 짓이니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의 중재 아래 알부파크를 처형하고 배상금을 받고 루에다 요새를 넘겨받는 대가로 사라고사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1084년 가을, 알폰소 6세는 톨레도 남쪽에 진영을 세워 톨레도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게 한 뒤 본국에 귀환했다가 1085년 3월 주력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진군했다. 이후 2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주변 타이파들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톨레도 시민들은 그해 5월 6일에 생명, 재산, 자유 및 종교적 표현에 대한 보장을 약속받고 항복했다. 그는 "톨레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하는 한편, 알바르 파네스에게 알 카디르가 발렌시아의 타이파가 되도록 발렌시아를 압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사라고사가 공물 지불을 중단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라고사로 쳐들어가 1086년 봄 도시를 포위했다. 그해 3월 초 발렌시아는 알바르 파네스의 압박에 굴복하여 알 카디르를 타이파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톨레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발렌시아에 속국 군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알폰소 6세는 자신을 "두 종교의 황제"라고 칭했다. 그는 정복지의 무슬림들이 기꺼이 복종하게 하게 위해 그들의 재산을 존중하는 것 외에도 모스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톨레도 대주교로 부임한 베르나르드 데 세디락은 왕의 뜻을 거부하고 모스크를 대성당으로 개조했다. 또한 알폰소 6세는 현지 기독교인들의 언어와 관습을 존중해야만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겼기에, 새로 정복한 영토에 사는 주민들에게 라틴어와 로마 교회식 예배를 강요하라는 교황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우르바노 2세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자, 그들의 지원을 얻어낼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들의 뜻대로 이베리아 교회의 예배 방식을 로마 교회식으로 통합하고 오직 라틴어만 사용하게 했다.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공략하고 발렌시아를 복속시키는 등 이베리아 반도 내 타이파국들을 상대로 강력한 압박을 행사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군주들은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급기야 카스티야군에게 포위된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는 모로코, 세네갈 등지를 장악한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유수프 이븐 타슈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유수프는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이후 세비야로 진군해 세비야, 말라가 등 각지의 타이파들이 이끌고 온 군대와 합세한 뒤 바다호스로 행진했다.

알폰소 6세는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라고사 포위를 풀고 발렌시아에서 군대를 소집하는 한편,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후 바다호스로 진군한 그는 1086년 10월 23일 사그라하스 또는 잘라카에서 유수프의 군대와 마주쳤다. 기독교측 기록에 따르면, 알폰소 6세는 레온과 카스티야 기병 1,500명을 포함해 약 2,500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며, 이중 750명은 기사였다고 한다. 반면 무슬림측 사료에 따르면 6만에서 8만에 달했다고 한다. 유수프의 군대 규모는 3배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규모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유수프는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조공을 바치거나 전투를 벌이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알폰소 6세는 전투를 벌이겠다고 답한 뒤, 아라곤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미루자는 부하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 초반엔 기독교군이 강력한 돌격을 감행해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유수프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적절히 활용해 기독교군을 포위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알폰소는 정강이뼈에 큰 상처를 입고 패주했고, 500명의 전사만이 목숨을 건진 채 왕의 뒤를 따라갔다.

유수프와의 전투에서 완패한 알폰소 6세는 톨레도에 돌아가 수성전을 준비했지만, 유수프는 본국에 있던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후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기병대만 남기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일단 한시름을 놓게 된 그는 1086년 말 또는 1087년 초에 엘 시드와 화해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복귀시켰다. 이후 엘 시드에게 왕국의 동쪽 국경지대를 지키게 했고, 알바르 파네스에게 발렌시아와 톨레도 사이의 방위를 맡겼으며, 페드로 안수레스에게 서쪽 국경 방위를 맡겼다.

알폰소 6세는 유럽 각국과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해달라고 호소했다. 십자군 선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앙리( 엔히크 드 보르고냐) 등 부르고뉴 공국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했다. 그들은 1086년 또는 1087년에 투델라 공방전을 치렀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한편 1087년 또는 1088년에 갈리시아에서 루고 성에 갇힌 가르시아 2세의 복위를 노린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폰소 6세는 이를 순조롭게 진압하고 갈리시아 지역의 주교 7명 중 2명을 해임하는 등 갈리시아 통치 체계를 개편했다.

1088년 유수프가 두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서 알레도를 포위했다. 그러나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미드가 유수프가 이베리아 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고 포위된 수비대에 보급품을 은밀히 공급했고, 이로 인해 알레도는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알레도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한 유수프는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와 마드리드를 일시적으로 공략했지만 과달라하라에서 격퇴당하자 코르도바로 물러났다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 후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자 노력했고, 유수프를 경계하던 그라나다와 사라고사 등 여러 타이파들은 알폰소 6세에게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그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세비야 에미르는 공물 납부를 거부했고, 카스티야군이 압박을 가하기 위해 공세를 가해오자 유수프에게 재차 구원을 요청했다.

1090년 6월, 유수프는 세 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그는 타이파들이 기독교 군주에게 복종하는 등 종교적으로 해이해지고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고 주장하며, 교조적인 종교학자들의 지지를 명분삼아 타이파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그라나다 (1090년), 세비야 & 알메리야 (1091년), 알리칸테 (1092년), 바다호스 (1094년) 등의 타이파들이 모조리 축출되고 무라비트 왕조가 이 도시들을 직할 통치했다.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복위시키기 위해 유수프와 전쟁을 벌였지만 모든 전선에서 실패했다. 동쪽 방면에서는 제노바 함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토르토사 공략에 실패했고, 남쪽에서는 발렌시아의 타이파 알 카디르가 반란으로 축출되었으며, 서쪽에서는 바다호스-카스티야 연합군이 유수프의 군대에게 연전연패해 리스본, 신트라, 산타렘 일대를 빼앗겼다. 오직 엘 시드만이 1094년 6월 발렌시아를 탈환하고 10월에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096년 11월, 아라곤 국왕 페드로 1세가 우에스카를 포위 공격하던 중 우에스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 빌라흐를 알코라즈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에 알폰소 6세는 봉신인 사라고사를 돕기 위해 친히 그곳으로 향했다. 유수프는 이 때를 틈타 알폰소 6세가 자리를 비운 톨레도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황급히 군대를 돌려 1097년 8월 15일 콘수에그라에서 유수프를 저지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기독교 전사들이 적 보병 대열을 돌파했지만, 기병으로 구성된 무라비트 양익이 기독교인들을 포위섬멸했다.

알폰소 6세는 콘수에그라 성으로 도피한 뒤 수백 명 밖에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압도적인 수로 몰아붙이는 적에 맞서 항전했다. 당시 성채에는 물과 식량이 거의 없었지만, 왕이 성벽 위에 몸소 나아가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전의를 끌어올리며 침략자에 맞서 싸웠다. 유수프는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8일 동안 성채를 공략하지 못하자 적 지원군이 도착할 것을 우려해 철수했다.

그 후 알폰소는 군대를 재건하고 국경 지대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지만, 1099년 6월 유수프가 재차 대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쳐들어왔을 때는 군대 재건이 덜 된 상태였기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무슬림군은 톨레도를 지키던 성채 대부분을 공략했다.

3.2. 12세기

주변 요새를 점령한 이슬람군대는 1100년에 톨레도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주변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돌아갔다. 이제 카스티야 왕국은 톨레도 남쪽 지역을 모조리 상실했고, 톨레도는 국경 도시가 되어버렸다. 알폰소 6세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101년 살라망카와 아빌라에 요새를 새로 세워서 톨레도를 지키게 했고,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에게 톨레도 수비를 맡겼다.

1102년 무라비트 왕조군이 발렌시아로 쳐들어왔다. 당시 발렌시아를 지키던 엘 시드는 1099년에 무슬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히메나 디아스가 발렌시아를 다스렸다. 히메나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즉시 군대를 보냈다. 양측은 쿨레라 전투에서 막심한 손실을 입고 돌아갔다. 하지만 알폰소 6세는 적의 영역 주변에 튀어나온 형국인 발렌시아를 지키는 건 무리라고 여기고 히메나를 설득해 발렌시아에서 철수하게 했다. 기독교인들은 3~4월에 발렌시아를 파괴한 뒤 철수했고, 무라비트 왕조군은 5월에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이 갈수록 수세에 몰리자, 사라고사 타이파국은 알폰소 6세에게 더 이상 공물을 납부하지 않고 유수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발렌시아를 상실하면서 동쪽 국경 지대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알폰소 6세는 1104년 7월 메디나 셀리를 공략한 뒤 이곳을 요충지로 삼아 동쪽 국경을 지키게 했다. 이후 1104~1106년에 안달루시아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해 무슬림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1108년 코르도바 총독이자 유수프의 아들인 타밈의 군대가 우클레스에 쳐들어왔다. 고령의 나이에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알폰소 6세는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아들 산초 알폰세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기독교군이 또다시 참패했고 산초 알폰세스는 전사했다. 알폰소 6세는 급히 군대를 수습한 뒤 무슬림군의 추가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남쪽 국경으로 향했지만, 무슬림군이 의외로 공세를 더 이어가지 않자 톨레도로 돌아갔다.

알폰소 6세는 생전에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우라카 외에는 자식을 보지 못했고, 정부로 삼은 여인들로부터 두 딸 엘비라, 테레사 데 레온를 두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설득에 따라 정실 아내로부터 얻은 우라카를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결혼시키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또한 포르투갈 백작이 될 엔히크 드 보르고냐와 정부로부터 얻은 테레사의 결혼을 주선해, 그가 차기 후계자를 보좌하게 했다.

그러던 1093년, 알폰소 6세의 정부 중 한 명인 자이다가 아들 산초 알폰세스를 낳았다. 그는 친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해주기로 마음먹고, 산초 알폰세스를 합법적인 아들로 삼았다. 그러나 1105년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우라카 부부가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낳으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자이다와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산초 알폰세스가 성년에 가까우니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라카와 부르고뉴 측 인사들은 알폰소 6세의 합법적인 자식은 오로지 우라카 뿐이며 그녀의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야말로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한 끝에 1107년 5월 레온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15살이 된 산초 알폰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해 9월 레이몽이 사망한 후, 알폰소 6세는 딸 우라카를 갈리시아의 단독 영주로 삼고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갈리시아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후계 구도가 정해지는 듯했지만,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산초 알폰세스가 전사해버리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알폰소 6세는 남쪽 국경으로 가서 무슬림의 추가 공세에 대한 방비를 수행한 뒤 톨레도로 귀환한 후 귀족들을 소집한 뒤 우라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우라카를 재혼시킬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여러 후보가 우라카와 결혼하러 나섰는데,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라라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알폰소 6세의 측근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폰소 6세는 신하였던 자가 자기 딸을 밀어내고 왕권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고, 레온 귀족들과 카스티야 귀족 중 한 명을 택하면 다른 쪽이 반발할까 걱정했다.

알폰소 6세는 고심 끝에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를 딸의 결혼 상대로 낙점했다. 알폰소 1세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우라카와 같은 신분이고, 군사적 역량이 출중하고 용맹해서 무슬림들의 침략으로부터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을 거뜬히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국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레온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곘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레사 데 레온과 엔히크는 자신들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직후인 1109년 7월 1일, 알폰소 6세가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딸 우라카가 레온과 갈리시아, 그리고 카스티야의 여왕에 등극했고, 알폰소 1세와 공동으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와 알폰소 라이문데스의 가정교사를 맡던 트라바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해 알폰소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군대를 이끌고 레온으로 진군해 몬테로소 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더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기사들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러 요새와 성채를 접수하게 했으며, 1110년 내내 우라카의 영지인 레온과 카스티야를 돌며 공물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알폰소 1세가 발바네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하다, 산살바도르 데 오냐 등 여러 수도원에 기부한 것에 대해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어 우라카를 따르는 귀족들을 견제하게 하려는 수단이라고 추정한다.

우라카는 남편의 이같은 행보에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기고 분노했다. 그녀는 비스카야와 하로의 영주이자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의 후계자인 디에고 로페스 데 하로에게 특권을 부여해 알폰소 1세에 적대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귀족들은 알폰소 1세가 자기들 영지 내에 있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자기들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우라카의 지원에 반색하며 알폰소 1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몄다.

사라고사 토후국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은 알폰소 1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이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문제에 전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타우스테를 탈환하고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즉각 대응에 나섰고, 1110년 1월 24일 발티에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알 무스타인을 처단했다. 이후 사라고사 토후국은 쇠락했고, 그동안 사라고사 토후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들 상당수가 알폰소 1세의 봉신을 자처했다.

발티에라 전투의 승리로 알폰소 1세의 위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지만, 그와 우라카와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에서 집필된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가 우라카를 손과 발로 허구헌날 구타했다고 서술했다. 이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저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우라카와 알폰소 1세 부부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1110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니 인정하기 어렵다는 교황청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을 비롯한 반 알폰소 세력은 우라카의 친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으로 받들고 우라카와 알폰소의 결혼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대응해 우라카를 긴급 체포한 뒤 그녀의 정신 상태가 통치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며 아라곤의 엘 카스텔리아 성채에 투옥시킨 뒤 레온과 카스티야의 반란자 토벌에 나섰다. 그는 몇 주 만에 팔렌시아, 부르고스, 오스마, 사하군, 아스토르가, 오렌세 등 레온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민중들이 분노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진군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엘 카스텔리아 성채를 습격해 우라카를 석방시킨 뒤 사하군 수도원에 이송시켰다가 다시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는 군대를 돌려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의 영지가 있는 카스티야 남부로 진격했다. 1111년 4월 13일 교황에게 두 사람의 혼인 무효를 요청했던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를 축출한 뒤 아라곤 수비대를 톨레도에 배치했다. 이 무렵 포르투갈 백작이며 알폰소 6세의 또다른 딸인 테레사 데 레온의 남편인 엔히크 드 보르고냐가 우라카를 돕기 위해 진군하자, 알폰소는 엔히크에게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9월 17일,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우라카로부터 갈리시아 왕위만 먼저 물려받았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한편, 우라카의 지지자인 페드로 프루엘라스 데 트라바 백작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조직한 군대가 우라카의 어린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와 함께 레온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가 1110년 원정 당시 공략했던 루고를 탈환한 뒤 수비대를 배치한 후 레온으로 계속 진군했다. 알폰소는 이 소식을 듣자 군대를 돌려 비아당고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페드로 프루엘라스는 체포되었고, 디에고 헬미레스는 어린 알폰소를 데리고 포르티 카스텔로 오르질리오네(forti Castello Orzilione)로 도주해 그곳에 숨어있던 우라카와 합류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1112년 여름 동안 휴전을 맺고 양자가 동의할 수 있는 평화 협약을 맺으려 애썼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커서 협의에 실패했다. 알폰소 1세는 어떻게든 레온과 카스티야를 장악하고자 아라곤 수비대들을 곳곳에 배치했지만,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좀처럼 통제하지 못한 데다 아라곤 귀족들마저 본국 귀환을 종용했다.

1112년 9월, 알폰소와의 협상이 무익하다고 여긴 우라카는 전쟁을 재개했다. 그녀는 케아 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해 케리온 강 서쪽의 카스티야 영역을 탈환했다. 부르고스 남쪽의 두에로 상류 영토 역시 우라카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알폰소 1세는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병력을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녀의 공세를 저지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 우라카와의 결혼을 이어가려 했으며, 교황 특사의 중재 제의를 거절했다.

1113년, 우라카는 갈리시아 귀족군과 함께 또다시 공세를 개시해 사하군과 카리온을 공략하고 부르고스를 포위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맞서 라 호야로 진군해 반란 세력을 제압했고, 4월에 로스 아르코스로 진군해 부르고스에 포위된 지지자들을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알바르 파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톨레도를 공략했다. 이렇듯 기독교도들이 내전을 일삼자, 사라고사 토후국은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했다. 무슬림군은 오레하 성을 공략하고 톨레도 주변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1113년 6월, 우라카는 부르고스를 손에 넣은 뒤 무슬림군의 위협에 시달리는 톨레도 구원에 착수했다. 이후 양자는 무슬림에 맞서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114년 팔렌시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했고,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으로 군림하되 레온과 카스티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바스크, 라 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툴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라카 역시 사망할 때까지 전히스파니아의 여제를 자처했다.

1116년, 우라카는 갈리시아의 왕으로 세워둔 아들 알폰소에게 두에로 강 남쪽 땅과 톨레도 일대의 통치권도 양도했다. 젊은 알폰소는 이때부터 카스티야를 여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탈취하려 드는 알폰소 1세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라카의 배다른 누이 테레사가 그녀에게 반기를 들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신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워서 일부는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그녀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그녀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테레사에 대한 원정을 취소하고 레온으로 귀환한 우라카는 때마침 아들이 톨레도에 입성해 알폰소 1세의 세력을 축출한 덕분에 카스티야에서의 입지가 강해졌다. 이에 아들 알폰소가 후임 왕이 되는 것을 보장하는 탐브레 협약에 서명했다. 1118년, 우라카는 자치권을 무제한적으로 누리면서 알폰소 1세와 내통하는 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카스티야 동부로 진군했다. 그해 6월에 세고비아에서 그녀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갈리시아를 확고히 장악하고자 그곳으로 향하면서도 알 안달루스와 맞서는 톨레도 대주교에게 일부 병력을 보냈다.

1119년 1~3월, 우라카는 부르고스에 남아서 알폰소 1세의 대 무슬림 전쟁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전 집사 구테 페르난데스가 참여한 위험한 음모에 직면해야 했다. 구테 페르난데스는 우라카의 연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을 만실라 성에 잠시 가두고 레온에서 여왕의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다. 우라카는 이 반란을 가까스로 제압한 뒤 음모에 가담한 카스티야 귀족 여럿을 처벌하고 1119년 9월 알폰소 1세와 화해했다.

1120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란호소 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두오로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성공에 취했기 때문인지, 우라카는 이 시점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디에고 헬미레스의 권세가 갈수록 커져 정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 거슬렸고, 장차 아들 알폰소를 등에 업고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하려 들 거라고 의심했다. 결국 그녀는 1120년 7월 말에 아리아스 페레스를 통해 헬미레스를 카스트렐로에서 체포하여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권신이긴 했지만 그녀를 지금껏 따랐던 주교를 하루아침에 가둬버린 일은 심각한 후폭풍을 야기했다. 헬미레스의 추종자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여왕을 압박했고, 어머니가 자신을 해칠 지도 모른다고 여긴 알폰소는 산티아고 인근에 머물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와 합세했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한 우라카는 얼마 후에 헬미레스를 석방했지만, 그로부터 빼앗은 영지와 성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헬미레스는 테레사와 그녀의 연인이 된 트레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의 편에 섰다. 그해 가을에는 주교를 체포하고 주교의 영지를 몰수했다는 소식에 진노한 교황 갈리스토 2세[3]가 우라카에게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121년 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행진한 뒤 헬미레스 주교와 프루엘라스 백작과 면담한 뒤 그들의 직위를 돌려주며 크리스마스 이전에 주교의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내전은 겨우 수습되었지만, 1121년 8월 사하군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헬미레스의 지지자들과 여왕의 반대자들이 우라카를 몰아내고 알폰소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하는 등, 사건의 여파는 이어졌다. 게다가 그해 여름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123년 3월 다시 갈리시아로 행차한 우라카는 헬미레스 주교와의 동맹을 갱신하는 대신 페드로 프루엘라스 백작과 그의 아들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남쪽으로 이동해 톨레도에 도착한 뒤 시구엔사를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1124년 5월 25일, 헬미레스 주교가 우라카 여왕의 허락을 받고 산티아고에서 알폰소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124년 여름, 테레사가 휴전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우라카는 1125년 늦봄에 아들과 갈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대면한 뒤 카스티야로 떠나 말년을 보내다 1126년 3월 8일 리오 카리온 강변 살다냐에서 병사했다. 이리하여 히메네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아들 알폰소 7세가 레온, 갈리시아, 카스티야 국왕에 선임되면서 보르고냐 왕조가 카스티야 왕국의 지배 가문이 되었다.

알폰소 7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알폰소 7세가 자신이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사이 카스티야 전역을 석권해버리자 현실을 받아들여 1128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경계를 확정지은 타마라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알폰소 7세는 우라카 치세 말년에 갈리시아를 침략하여 자기 영역으로 삼은 이모 테레사를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포르투갈 백국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파괴한 뒤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은 뒤 테레사가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게 한 후 레온으로 돌아가 1128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의 딸 베렝겔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1128년 6월 24일 상 마메데 전투에서 테레사의 아들인 아폰수 엔히크스가 알폰소 7세에게 굴복했던 어머니 테레사와 페드로 페르난데스 등 레온-카스티야 왕국군 장성들을 물리치면서, 알폰소 7세가 복속시켰던 포르투갈 백국이 또다시 독립했다. 아폰수 엔히크스는 1129년에 자신을 포르투갈 프린스라 선언하며 알폰소 7세에 대항했고, 1139년에는 아예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

1130년 바르셀로나 백작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우려해 베렝겔라와의 결혼에 반대한 레온, 살라망카, 오비에도 주교들을 체포했다. 이에 귀족들은 대거 반발했고, 라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이었던 페드로 곤살레스는 우라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드로 페레스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그들을 포섭해 반기를 들었다. 반란군은 한때 팔렌시아, 아스투리아스, 코얀사 등지에서 기세를 드높였지만, 오소리오 마르티네즈가 이끄는 정부군에게 패배했다. 알폰소 7세는 그해 6월에 팔렌시아를 공략하여 페드로 곤살레스를 축출하고 나머지 반란자들과 화해했다.

1134년 아라곤과 팜플로나 국왕 알폰소 1세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팜플로나 대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며 아라곤 왕국에도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모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왕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국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1135년 5월 26일 레온 대성당에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 행사에서 처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고,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톨로사 백작 알폰소 호르다네스, 가스코뉴 및 프랑스 남부의 여러 영주들,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6세, 루에다 데 하온의 영주이자 사라고사의 마지막 타이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아들 아흐메드 알 무스탄시르 사이프 알 다울라(자파둘라)도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라곤 국왕 라미로 2세와 포르투갈 프린스 아폰수 1세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듯 아라곤 왕국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그의 처남인 라몬 베렝게르 4세가 라미로 2세의 딸 페트로닐라와 결혼한 뒤 장인이 수도원에 은퇴한 뒤 아라곤 왕국의 통치를 주관하게 되면서 양국의 사이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반면 포르투갈 왕국과의 전쟁은 이어졌다. 아폰수는 집권 이래로 포르투갈의 '프린스'를 칭하면서 알폰소 7세의 인정을 받고자 사절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자 않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13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시아로 진격해 어머니의 옛 연인이었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갈리시아 귀족들을 상대로 체르네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뒤 투이 등 일부 요새를 공략했다.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알폰소 7세는 어쩔 수 없이 투이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아폰수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알폰소 7세의 충실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했으며, 이번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고, 무슬림 및 기독교 통치자와의 전쟁을 치르는 황제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7세는 그를 포르투갈 백작으로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39년,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로 쳐들어왔다. 아폰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에 맞섰고, 그해 7월 25일 오우리케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군대와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초대 국왕에 선임되었다. 레온 왕국의 알폰소 7세가 이 소식에 격분해 아폰수를 참칭자라고 비난하자, 아폰수는 투이 협약을 깨고 갈리시아를 침공해 미뉴 강을 건너 발데베스 계곡의 여러 성채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7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에게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방어하게 한 뒤 1140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출진해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아폰수는 즉시 역습을 가하여 적군 선봉장 라미루 프로일라스 백작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뒤 발데베스 계곡에서 알폰소 7세와 본대와 대치했다. <황제 알폰소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자는 펜하 다 레이하 성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진영이 좀더 높고 거친 지형에 자리잡았다. 이후 전투가 쉽게 결판나지 않고 양측의 여러 기사들이 생포되자, 포르투갈의 늙은 귀족들이 "기독교인끼리 무익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를 페허로 만들 것이니 이쯤에서 황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자"고 제안했다. 아폰수는 그들의 진언에 따라 알폰소 7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알폰소 7세 역시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143년, 알폰소 7세와 아폰수는 사모라 대성당에서 교황 대표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이 치켜보는 가운데 조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7세는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양자는 그동안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이후 레콩키스타에 전념하기로 한 그는 1138년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1139년 오레자 요새를 공략했고 1142년에는 코리아를 공략했으며, 1144년에는 하옌과 코르도바를 점령했다. 여기에 알 안달루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 근처에서 발흥한 무와히드 왕조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면서, 무라비트 왕조는 급격히 몰락했다.

1145년 3월, 사라고사의 왕자 자파둘라는 알 안달루스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알폰소 7세의 지원을 받아 그라나다를 공략했다. 그러다가 무라비트 왕조의 알 안달루스 총독 이븐 가니야의 반격으로 그라나다를 빼앗기자 알폰소 7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알폰소 7세는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자파둘라는 카스티야군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과 전쟁을 벌이다 1146년 2월 5일 친칠라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알폰소 7세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다가 이븐 가니야로부터 우베다와 바에자를 할양받고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철수했다.

카스티야 왕국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메르톨라의 이븐 알 카시는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하며 원군을 요청했다. 무와히드 왕조의 지도자 아브드 알 무민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146년 5월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무와히드군이 접근해오자, 이븐 가니야는 곧바로 무와히드 왕조에 항복했다. 이후 무와히드 왕조와 대치한 알폰소 7세는 1147년 알메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는 이를 위해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의 실권자 라몬 베렝게르 4세, 제노바 공화국 함대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에 응한 프랑스 십자군의 지원을 받았다. 그 결과 그해 10월 알메리아 공략에 성공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처음으로 지중해 해상에 진출할 수 있었다.

1150년 11월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가 사망하자, 알폰소 7세는 1151년 1월 27일 투딜렌에서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만나 나바라 왕국의 영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안초 6세는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투딜렌 협약을 따르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여동생 블랑카를 알폰소 7세의 장남인 산초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소 7세의 호의를 얻어내려 애썼다. 1153년 중반에는 소리아에서 알폰소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봉신 협약을 갱신했으며, 1157년 6월 2일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현재 팔렌시아)에서 알폰소 7세의 딸 산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7세는 1157년 중순에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맺었다. 1157년, 무와히드 왕조가 알메리아를 습격해 순식간에 탈환했다. 알폰소 7세는 알메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 원정에 착수했으나 실패하고 귀환하던 중 8월 21일에 사망했다.

알폰소 7세는 생전에 큰 아들 산초 3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주고, 작은 아들 페르난두 2세에게 레온 왕국과 갈리시아 왕국을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다만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에 속해 있던 티에라 데 캄포스, 사하군, 아스투리아스 데 산티아나는 산초 3세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1157년 알폰소 7세가 사망한 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생전 지시에 따라 영토를 분할했다. 1158년 5월 23일, 페르난두 2세와 산초 3세는 사하군 시에서 상호 원조 협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서로 힘을 합쳐 무슬림과의 전쟁을 이어가며, 알 안달루스를 정복한 후에는 니에블라에서 리스본까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이 차지하고 나머지 영토는 카스티야 왕국이 차지하기로 했다. 또한 둘 중 한 명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 다른 한 명이 형제의 영토를 관할하기로 했다.

1158년 8월 31일, 산초 3세는 톨레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3살이었던 아들 알폰소 8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고, 구티에레스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와 만리케 페레스 데 라라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카스티야 왕국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이었던 카스트로 가문과 라라 가문이 최고 권력을 놓고 내전을 벌이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레온 왕국의 국왕이자 산초 3세의 동생이었던 페르난두 2세는 이를 이용해 카스티야 왕국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었다. 수세에 몰린 카스트로 가문의 가주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레온에 망명하자, 페르난두 2세는 그를 지원해 라라 가문과의 전쟁을 이어가게 했다. 여기에 1159년 카스티야 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해 부르고스 시를 점거했다.

1160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이끄는 카스트로 가문 추종자들은 바야돌리드 지방의 빌라브라마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로브레갈 전투에서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누뇨 페레스 데 라라가 이끄는 라라 가문 추종자들을 격파하고 누뇨 페레스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장인 오소리오 마르티네스가 목숨을 잃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라라 가문은 여전히 알폰소 8세의 섭정직을 유지했다. 1162년,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로부터 톨레도를 무력으로 빼앗은 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를 톨레도 총독으로 선임했다. 페르난두 2세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라라 가문은 페르난두 2세가 톨레도와 세고비아를 자국의 영역을 삼는 것을 용인했다. 또한 나바라 왕국 안초 6세도 로그로뇨와 라리오하 일대를 카스티야로부터 빼앗았다.

1164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카스티야 왕국 깊숙이 진격해 그해 6월 또는 7월에 벌어진 우에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적장인 만리케 페레즈 데 라라 백작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라라 가문은 알폰소 8세를 호리타 데 로스 카네스로 피신시켰다가 다시 아빌라 시로 피신하면서 저항을 이어갔고,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알폰소 8세 확보에 실패하자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알폰소 8세를 보호한 아빌라 시는 훗날 알폰소 8세에 의해 "아빌라 데 로스 라알레스(Ávila de los Leales: 충성스러운 아빌라)" 칭호를 수여받았다. 1166년, 페르난두 2세는 라라 가문의 구성원들과 소리아에서 만나 톨레도를 카스티야 왕국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내전은 종결되었지만, 알폰소 8세는 자신과 왕국을 심하게 괴롭힌 이웃 국가들에 대한 뼈저린 적대 의식을 마음 속 깊이 간직했다.

1170년 성년이 된 알폰소 8세는 부르고스에서 카스티야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고 가스코뉴 백국을 지참금으로 지불했다. 이리하여 서유럽에서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잉글랜드-아키텐 연합 왕국의 후원을 받게 된 그는 이웃 국가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우선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1170년 6월, 알폰소 8세와 아라곤 왕 알폰소 2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중재로 사하군에서 어떠한 적을 만나든지 서로 힘을 합치기로 합의하고,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알폰소 8세의 고모인 산차와 알폰소 2세의 결혼을 주선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 내부사정과 무슬림과의 전쟁으로 인해 나바라 왕국에 큰 압박을 가하지 못했고,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던 안초 6세는 1173년 카스티야를 공격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뒤 알마잔에서 빼앗은 영토를 귀족들에게 분배했다. 1174년 봄,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군대가 나바라 왕국을 합동으로 공격했다. 그해 7월 아라곤 왕 알폰소 2세는 밀라그로 성을 공략하고 파괴했으며,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군을 격파한 뒤 안초 6세가 있던 르귄 성을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다. 안초 6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산골짜기로 도주했고, 양군은 나바라 각지를 파괴한 뒤 철수했다.

1175년 여름 아라곤과 카스티야 연합군이 재차 나바라를 침공해 타격을 입히고 돌아갔고, 1176년 여름엔 카스티야군이 쳐들어와 르귄 성을 재차 공략했다. 이에 안초 6세는 그해 8월 25일 알폰소 8세와 7년간의 휴전 협약을 맺은 뒤 영국 국왕 헨리 2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1177년 3월 16일, 알폰소 8세와 안초 6세는 헨리 2세의 중재에 따라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두 나라는 1158년의 국경으로 돌아가야 했다. 안초 6세는 로그로뇨, 나바레테, 엔트레나, 아우세호를 반환해야 했고, 알폰소 8세는 레귄 등 여러 성을 복구하기로 했다. 또한 알폰소 8세는 안초 6세에게 10년간 매년 3,000 마라베디를 보상금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1177년, 알폰소 8세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와 함께 쿠엔카를 공격해 공략에 성공했다.

1179년 4월 15일, 안초 6세와 알폰소 8세는 나헤라와 로그로뇨 사이의 지점에서 만나 국경을 명확하게 정의해 영토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도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때 나바라 왕국은 더이상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이 되지 않고 오로지 아라곤 왕국에 복종하겠다는 문구가 협약서에 삽입되었다. 이후 두 나라는 서로에게 빼앗았던 영토를 상호 반환했다. 알폰소 8세는 뒤이어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와 카솔라에서 만나서 아라곤 왕국이 무르시아를 공략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가로 아라곤 왕국이 발렌시아에 대한 주권을 더이상 주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또한 양자는 할 수 있는 한 알안달루스를 합동으로 공략하고 빼앗은 영토를 공평하게 나눠가지기로 했다.

한편, 레온 왕국의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이 나바라 왕국을 연이어 침략하는 틈을 타 1178년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해 카스트로헤리스, 두에나스를 공략했다. 알폰소 8세는 이에 맞서 포르투갈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1세는 페르난두 2세가 다수의 병력을 카스티야 방면으로 보낸 틈을 타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공격해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1180년 페르난두 2세와 알폰소 8세가 토르데시아스 마을에서 만나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하면서 양국간의 전쟁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1186년 알폰소 8세는 톨레도를 수호하기 위해 결성된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무슬림에게서 빼앗은 모든 영토의 1/5를 기사단에게 넘길 것이며, 왕실 수입의 1/10을 기사단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사단은 이에 고무되어 무슬림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공격해 카스티야의 영역을 계속 늘려줬다.

1188년 1월 22일, 레온 왕국의 페르난두 2세가 사망하고 알폰수 9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폰소 8세와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했다. 그해 8월 알폰수 9세가 카리온에 찾아오자, 알폰소 8세는 사촌을 기사로 선임하는 의식을 거행했고,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손에 키스하고 검과 허리띠를 받았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스와비아 공작 콘라드 역시 이 자리에 참석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콘라드는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렝겔라와 결혼하고자 이곳에 찾아왔지만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이후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상호 방위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얼마 안가 협약을 깨고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가 발렌시아 데 돈 후안과 발데라스를 포함한 여러 영토를 공략했다.

1189년, 알폰소 8세는 당초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과 함께 분할하기로 했던 협약을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동맹을 맺고 아라곤 왕국을 도모하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사신을 보내 반 카스티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산슈 1세, 그리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1191년 5월 12일 우에스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나바라-레온-아라곤-포르투갈 4개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한 국가가 공격당하면 다른 국가들이 즉시 원조하기로 했다.

우에스카 협정이 체결된 후, 나바라-아라곤 연합군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119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가 다른 연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우에스카 협정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1194년 나바라 국왕 안초 6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협정을 파기했다. 여기에 알폰수 9세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무와히드 왕조의 침공을 우려해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자,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레온 왕국에 파문과 성무 금지령을 내리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은총을 레온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알폰소 8세는 이 기회를 틈타 레온 왕국의 남부 지역을 공격하여 베나벤테를 포위했지만 함락에 실패했고, 뒤이어 북쪽으로 이동해 아스토르가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푸엔테 카스트로를 공격해 며칠 만에 함락시키고 도시민들을 도륙한 뒤 레온 성벽에 도달했다. 알폰수 9세는 레온 시를 겨우 빠져나갔지만, 미처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도륙되었고, 유대인 구역과 회당은 파괴되었다. 알폰수 9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반격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는 카리온까지 진군하면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해 레온 시의 참상을 복수했다.

이후 교황 사절이 양국의 갈등을 중재했고, 알폰수 9세와 알폰소 8세는 1194년 4월 20일 바야돌리드 지방의 토르데후모스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카스티야 국왕은 페르난두 2세 사후 레온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알바, 루나, 포르티야, 발데라스, 볼라뇨스 등지를 돌려주기로 했으며,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장녀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앞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95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마라케시에서 중병을 앓고 있으며, 그의 동생인 알 안달루스 타이파 아부 야히아가 지중해를 건너 왕을 자칭하며 마라케시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때를 틈타 세비야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야쿱은 아부 야히야의 반란을 신속하게 제압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와서 카스티야 왕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알폰소 8세는 대규모 전투가 임박하자 레온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빼앗아갔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해놓고 아직 돌려주지 않은 점을 들며 지원을 보내길 거부했다.

결국 단독으로 무와히드 왕조와 상대하게 된 알폰소 8세는 1195년 7월 19일 알라르코스 전투를 치렀다. 그는 적병이 아군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바라 왕국 안초 7세가 파견한 원군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전투를 벌여도 괜찮을 거라 판단하고 전투를 감행했다. 그러나 카스티야군은 이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전승에 따르면, 2만에서 2만 5천 명에 달하는 카스티야인이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기사단 500명 역시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과장된 수치이겠지만, 카스티야군이 이 전투에서 참담한 대패를 당한 건 분명하다. 야쿱은 여세를 몰아 말라곤, 베나벤테, 칼라트라바, 카라쿠엘, 토레 데 과달페르사 등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이제 툴레도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자, 알폰소 8세는 다시 한 번 레온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알폰수 9세는 톨레도로 가서 알폰소 8세와 만나 이제라도 영토를 돌려준다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이번에도 확답을 피했고, 알폰수 9세는 격분한 채 톨레도를 떠났다. 알폰소 8세에게는 그나마 다행히 야쿱이 군대의 손실이 크고 다들 지쳤다고 판단하여 툴레도를 공격하는 대신 세비야로 철수한 덕분에 톨레도를 상실할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야쿱의 군대는 엑스트레마두라, 타구스 계곡, 라 만차, 톨레도 주변을 초토화했고, 몬탄체스, 트루히요, 플라센시아, 탈라베라, 에스칼로나 등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야쿱은 곧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베리아 반도에 흥미를 잃고 1187년 수도 마라케시로 돌아간 뒤 1199년 2월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이프리키야의 바누 가니야의 반란 진압에 몰두하느라 알 안달루스에 신경쓰지 못했고,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왕국은 이 때를 틈타 알 안달루스를 갉아먹었다.

3.3. 13세기

1212년 바누 가니야 진압에 성공한 앗 나시르는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가 톨레도와 코르도바 사이에 위치한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본부인 살바티에라를 공략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이교도와의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알폰소 8세가 죽음을 각오하고 레콩키스타에 뛰어들겠다고 답하자, 교황은 카스티야 국왕을 도울 십자군을 선포하고, 알비파 십자군을 이끌던 아르노 애므리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였다. 알폰소 8세가 "내가 이교도들과 싸우고 있을 때 레온 국왕이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며 빈 틈을 노릴까 걱정된다"고 호소하자, 아르노는 이베리아 각국에 "카스티야인들이 이교도와 싸우는 동안 카스티야를 공격한다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1212년 7월, 알폰소 8세를 중심으로 아라곤의 페드로 2세, 나바라 왕국 안초 7세가 직접 참전하고 포르투갈 왕국과 레온 왕국의 귀족들이 참여하고 성전 기사단이 가세한 연합군이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함마드 앗 나시르가 이끄는 무와히드 왕조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알폰소 8세는 여세를 몰아 칼라트라바를 수복하고 뒤이어 알라르코스, 베나벤테를 탈환했다.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참패를 당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무와히드 왕조는 급격히 쇠퇴했다.

이 무렵,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는 교황의 경고에 따라 카스티야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레온 왕국 국경 너머의 카스티야 점령지를 은밀히 탈환했다. 나중에 귀환한 알폰소 8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이 거둔 대성과에 고무되었기에 굳이 따져묻지 않았다. 그 대신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2세를 초대하여 코임브라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페냐피엘과 알만자를 레온 왕국에 돌려주기로 했다.

1214년 10월 5일, 알폰소 8세는 쿠티에르-무뇨스에서 열병으로 사망했고 당시 10살이었던 아들 엔리케 1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다. 알폰소 8세는 죽기 전에 아내 엘레오노르에게 섭정을 맡겼지만, 엘레오노르 마저 남편이 죽은 지 24일만에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장녀 베렝겔라에게 엔리케 1세의 섭정을 맡겼다. 그러나 베렝겔라의 섭정은 엔리케 1세의 가정교사를 맡은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 백작의 방해를 받았고, 베렝겔라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의 압박에 못 이겨 엔리케 1세의 후견인 자리를 그에게 넘겼다.

알바로 누녜스는 1215년 엔리케 1세와 포르투갈 국왕 산슈 1세의 딸 마팔다의 결혼을 주선했다. 두 사람의 약혼식은 부르고스 시에서 거행되었지만,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두 부부가 사촌 지간이니 교회법에 어긋난다며 불허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에 알바로 누녜스는 레온 국왕 알폰수 9세의 딸 산차와 그의 결혼을 주선해,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을 통합시키고 베렝겔라의 아들 페르난도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려 했다.

1217년 6월 6일, 엔리케 1세는 팔렌시아의 에피스코팔 궁전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지붕 위에서 떨어진 타일에 머리를 직격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엔리케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부르고스와 두에냐스 사이에 위치한 타리에고 데 세라토 마을에 그 시신을 숨겼다. 그러나 베렝겔라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두에냐스 시를 점거하고 엔리케 1세의 유해를 확보한 뒤 팔렌시아와 부르고스의 주교들을 보내 유골을 관리하게 했다. 훗날 엔리케 1세의 유해는 데 라스 우엘가스 데 부르고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베렝겔라는 알폰수 9세가 엔리케 1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왕실의 혈통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그녀는 일단 엔리케 1세가 죽었다는 것을 숨기고 알폰수 9세에게 아들 페르난도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올 때까지 임시로 카스티야 여왕을 맡았다. 알폰수 9세가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페르난도를 보내자, 베렝겔라는 곧바로 엔리케 1세의 사망을 대내외에 공개한 뒤 아들 페르난도 3세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옹립했다.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조언에 따라 라구나 데 두에로, 토르케마다, 토르도마르를 거쳐 부르고스로 향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민중들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병력이 계속 소모되자, 그는 부르고스를 공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레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돌아가는 동안 팔렌시아를 통과하면서 기론과 메네세스 가문의 영지를 초토화했다. 한편 페르난도 3세는 아빌라와 세고비아, 라라, 팔렌시아 일대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곳의 병력을 차출해 1217년 8월 중순 부르고스에 입성해 민중의 환호를 받고 8월 31일에 부르고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217년 9월 페르난도 3세가 부르고스를 떠나 팔렌시아로 향했을 때, 알바로 누녜스의 형제 페르난도가 레빌라 발레헤라에서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격퇴되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에레루엘라 데 카스티야레라에서 또다른 매복 공격을 시도했지만, 수에로 텔레즈 데 메네세스가 이끄는 적군의 역습을 받고 사로잡혀 바야돌리드로 호송되었다. 그는 알라르콘, 카네테, 타리에고, 아마야 및 빌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등 자신이 통제하는 요새들을 모조리 헌납해야 했다.

1217년 11월, 알폰수 9세는 풀려난 후 레온으로 망명한 알바로 누녜스와 함께 페르난도 3세와 만나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218년 봄 카스티야를 재차 침공해 메디나 데 리오세코 인근의 발데네브로 요새를 공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로베 데이즈 데 하로, 알바로 디아즈 데 카메로스,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빌라마요르를 파견해 레온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알폰수 9세와 라라 가문에게 격퇴되어 카스트레욘 데 라 페냐 요새로 퇴각했다. 알바로 누녜스는 이 요새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끌던 중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요새에 갇혔던 카스티야군은 적이 지휘관의 사망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강경파였던 알바로 누녜스가 사망한 뒤, 알폰수 9세와 페르난도 3세는 베렝겔라의 중재에 따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양자는 1218년 8월 26일 토로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아버지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알폰수 9세는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고 다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토로 협약이 체결되면서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은 여전히 페르난도 3세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는 이들을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하면서 화해를 도모하는 한편, 부르고스와 팔렌시아 등 자신을 지지하는 지역의 귀족 및 주교들을 중용하여 라라 가문을 견제했다. 또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외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했다. 1219년, 그는 어머니 베렝겔라의 조언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이자 슈바벤 공작 필리프의 딸인 슈바벤의 베아트리스와의 혼사를 추진한 끝에 성사시켰다.

1222년,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 베렝겔라의 권유에 따라 남동생 알폰소를 최근에 사망한 몰리나 백작 곤살로 페레즈 데 라라의 상속녀인 마팔다와 결혼시키고 라라 가문과의 갈등을 종식하기 위한 자프라 협정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또한 1224년에는 여동생 베렝겔라를 예루살렘 국왕 장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수 9세가 포르투갈의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산차를 장 1세와 결혼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1230년, 레온 국왕 알폰수 9세는 메리다, 바다호스, 엘바스, 탈라베라 라 레알 공략에 성공한 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방문해 대 야고보에게 경의를 표한 후 레온으로 향하다가 그해 9월 24일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당초 첫 왕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페르난도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베렝겔라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르난도가 왕위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페르난도가 이미 카스티야의 국왕인 점이 걸림돌이었다.

카스티야 왕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은 알폰수 9세에게 테레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산차 둘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유했다. 알폰수 9세 역시 자신의 동의 없이 카스티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베렝겔라와 감히 자신에게 대항한 페르난도 3세 모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의 설득에 따랐다. 그리하여 알폰수 9세 사후 산차와 둘세가 레온과 갈리시아의 공동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3세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토로에 입성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힘을 합쳐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을 제압했고, 페르난도 3세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산차와 둘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협상한 끝에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에서 연간 3만 메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왕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국왕에 이어 레온과 갈리시아 국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2년간 두 왕국의 통합에 반대하는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잇따랐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모든 반란을 평정한 후 1233년에 왕국을 카스티야, 레온, 갈리시아의 3개의 행정 단위로 나누고 각 도시들과 영주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형태로 행정 체계를 개편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페르난도 3세 레콩키스타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당시 알안달루스를 지배하던 무와히드 왕조는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급격하게 쇠락했다. 특히 1224년 9월 칼리파 유수프 알 무스탄시르가 압둘라 알 아딜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 무와히드 왕조는 심각한 내분에 시달렸다. 모로코 등지에서 알 아딜에 반발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알 안달루스에서는 하옌의 총독 아브드 알라가 칼리파 압둘라 알 아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알 아딜은 알 안달루스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모로코로 대거 이동시켰고, 알 아딜의 사촌이며 알안달루스의 대리 통치자인 알 바야시는 아브드 알라에게 패전을 거듭하자 페르난도 3세에게 아브드 알라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고, 1225년 톨레도에서 출진해 알 바야시와 합세한 뒤 하옌 시를 포위 공격했다. 비록 공성 장비가 부족해서 공략엔 실패했지만, 하옌 시 주변 지역과 베가 데 그라나다 일대를 황폐화하고 연밀이 오기 전에 코르도바에 성공적으로 입성해 알 바야시를 총독에 복위시켰다. 알 바야시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페르난도에게 비뇨스 데라 엔시나, 살바테리아 및 카필라 등 국경 지대의 전략적 요충지를 제공했다. 얼마 후 알 바야시가 코르도바에서 민중 봉기로 피살당하자, 카스티야군은 알 바야시가 소유하고 있던 안두하르, 바예자, 마르토스 일대를 점거했다.

1228년, 압둘라 알 아딜을 처단하고 새로운 무와히드 왕조 칼리파가 된 이두리스 알 마문은 알안달루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마지막 병력을 모로코로 철수시켰다. 이후 알안달루스에는 사라고사의 타이파 무함마드 이븐 유수프 이븐 후드 알 유드하미 등 각지의 타이파들이 다스리는 토후국들이 난립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를 틈타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 포르투갈의 산슈 2세와 함께 알안달루스를 거의 매년 공격했다. 이븐 후드는 이들을 막으려 애썼지만 1230년 메리다를 포위한 알폰수 9세를 물리치려 했다가 오히려 격파당해 전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이후 기독교 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알안달루스를 마음껏 유린했다. 다만 1230년 6~9월에 추진된 카스티야군의 하엔 공략 작전은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카스티야 연합 왕국 최초의 군주가 된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 베렝겔라에게 내치를 위임하고 자신은 레콩키스타에 몰두했다. 1231년 카졸라, 1233년 우베다를 공략했으며, 1235년 토레스 데 알반체스 성을 공략했다. 또한 1235년 코르도바를 지키는 두 요새 이즈나토라프, 토레 데 포야토를 공략한 뒤 코르도바의 무와히드 총독과 1년 휴전 협정을 맺고 430,000 마라베디(maravedi)를 매년 공물로 받기로 했다. 1236년 1월 무어인 탈영병들로부터 코르도바가 무방비 상태라는 정보를 입수한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살라망카, 사모라, 토로 일대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코르도바로 진격했다.

그해 2월 코르도바에 도착한 페르난도 3세는 4달간 공성전을 벌였다. 시민들은 에미르가 구하러 와 줄 거라 믿고 항전했지만, 끝내 구원군이 오지 않자 낙담하여 6월 29일 항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알 안달루스의 핵심 도시였던 코르도바에 입성한 뒤 알폰소 텔레스 데 메네스와 알바 페레스 데 카스트로에게 도시 관리와 방비를 맡겼으며, 코르도바 주교구를 신설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코르도바 공략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페르난도 3세에게 경제적 및 정치적 특권을 부여했다.

1235년 슈바벤의 베아트리스 왕비가 사망했다. 당시 페르난도 3세는 7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베렝겔라는 아들이 여러 정부와 관계를 맺고 있어 왕의 미덕이 훼손되는 상황을 우려해 새 왕비를 들일 것을 강하게 권고해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아들의 재혼 상대를 몸소 물색한 끝에 퐁티외 백작 시몬의 딸이며 당시 퐁티외 여백작이었던 잔 드 퐁티외를 아들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결혼식은 1237년 11월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1238년 기독교 세력의 공세를 상대로 조직적인 저항과 타협을 병행하면서 알안달루스를 이끌어가던 이븐 후드가 사망했다. 이후 알안달루스는 여러 타이파들의 난립으로 사분오열되었고, 페르난도 3세는 이 기회를 틈타 확장 정책을 이어갔다. 1240년 초 무르시아를 공략하고 대부분의 코르도바 지방을 정복했으며, 1241년 알바세테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1243년까지 칠론, 가헤테, 페드로체, 산타 에우페미아, 오베조, 세테필라, 호르나추엘로스, 알모도바르, 루케나, 루세나, 산타엘라, 몬토로, 아길라르, 바에나, 에시하, 마르체나, 모론, 오수나, 에스테파 일대를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했다.

이렇듯 알안달루스를 순조롭게 공략했지만 아라곤 왕국 역시 영토를 급격히 늘리면서 서로 충돌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에 페르난도 3세는 1244년 3월 알미즈라에서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만나 알미즈라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비야르에서 부소트를 거쳐 비야호요사까지 이르는 전선 이북 지역은 아라곤 왕국이 갖고, 그 남쪽은 카스티야 왕국이 가지며, 양국은 상대방에게 할당된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로 했다. 이 협약은 나중에 하이메 1세가 카스티야에 할당되었던 카우데테, 빌레나, 사스를 장악하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왕자가 아라곤에게 할당된 샤티바를 장악하면서 깨졌지만, 양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걸 자제했기에 넘어갔다.

1245년 8월, 페르난도 3세는 하엔 시를 3번째로 포위 공격했다. 하엔 시는 1246년 2월까지 7개월간 버티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침략으로 1244년 수도 아르주나를 빼앗기고 그라나다를 새 거점으로 삼은 무함마드 1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무함마드 1세는 어떻게든 하엔을 구하려 했지만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그라나다로 피신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신변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하엔 시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1246년 3월 하엔에 입성했다. 1246년 세비야 인근의 알칼라 데 과다이라 요새를 공략한 그는 그동안 자신을 대신해 내치에 전념하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에 귀환하여 부르고스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에가스 수도원에 어머니의 유해를 안장했다.

1247년 세비야 공략 작전에 착수한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왕국 최초의 제독으로 대상인이었던 라몬 데 보니파스(Ramón de Bonifaz)를 선임했다. 라몬은 칸타브리아로 가서 13척의 대형 선박과 약간의 갤리선 및 소형 선박을 건조한 뒤 과달키바르 강으로 항해해 수적으로 우세한 무슬림 함대를 격파하고 세비야를 해상에서 봉쇄했다. 여기에 페르난도 3세가 1247년 8월 20일 세비야 인근 지역을 모조리 장악하고 외벽을 세우면서, 세비야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세비야의 총독 악사타프(Axataf)는 1년여간 항전하면서 하프스 왕조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좀처럼 구원이 오지 않자 결국 1248년 11월 23일에 항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에 입성한 뒤 궁정을 이곳으로 옮겼다.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정복 후에도 전쟁을 이어갔다. 1249년 레브리하를 공략했고, 1250년에는 폰타나르, 보르노스, 아르코스 데 라 프론테라를 공략했다. 여기에 니에블라와 알가르베의 에미르인 이븐 마흐푸즈로부터 알가르베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았으며, 헤레스 데라 프론테라, 메니다 시도니아, 알칼라 데 로스 가줄레스, 에헤르 데 라 프론테라, 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 카디스, 산루칼라 시장, 로타, 트레부예나 일대의 무슬림 영주들을 봉신으로 삼았다.

몇몇 연대기에 따르면,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정복 후 마그레브 원정을 계획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알제리 북서부의 도시 오랑을 공략한 뒤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의 해협 양쪽을 통제하고 십자군과 연합해 마그레브의 무슬림들을 복속시키려 했으며, 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아들 알폰소에게 세비야에 조선소를 건설하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폰소 10세는 1257년 가자우에트와 오랑, 1260년 살레 등 알제리 북서부의 해안 도시들을 해상에서 습격하는 등 마그레브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페르난도 3세는 치세 내내 정복 전쟁을 단행하면서도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왕국의 통합을 이루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국왕 레케스윈트가 654년에 반포하고 에르위그 왕이 681년 개정한 <Liber Iudiciorum(심판의 책)>을 카스티야어로 번역한 <Fuero Juzgo>를 반포했다. 그는 이 법률을 일종의 '관습법'으로서 새로 확보한 영토에 그대로 적용했다. 또한 지금까지 왕실과 국가의 공식 언어로 쓰이던 라틴어를 카스티야어로 대체했다. 아들 알폰소는 갈리시아어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노래인 <칸타가스 데 산타 마리아(Cantigas de Santa María)>를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1237년경에 12명의 학자들이 작성한 < 고귀함과 충성의 책(Libro de la nobleza y lealtad)>을 출간했다. 이 책은 좋은 정부를 위한 통치자의 의무와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미덕에 대한 정치법과 규범을 담았는데, 스콜라 학파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 많이 반영되었다. 그 외에도 가톨릭 신앙이 투철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부르고스 대성당 등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세우거나 막대한 기부를 했으며, 여러 병원을 왕국 각지에 신설하여 많은 병자들에게 치료받을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에 살라망카 대학이 유럽 최고의 대학이 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지원했으며, 말년에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기도 했다.

1252년 5월 30일, 페르난도 3세 부종에 시달린 끝에 세비야에서 사망했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폰소 10세는 아버지의 정복 전쟁으로 영토가 급격하게 불어난 왕국을 안정시키는 것을 중점으로 삼았다. 우선 레온과 카스티야의 모든 목동들을 관리하는 평의회를 설립하고, 이들에게 병역 면제, 재판에서의 증언 우선권, 통행권, 방목권 등 여러 특권을 부여했다. 이 평의회는 1273년에 3,000마리의 크고 작은 양을 소유한 협회인 메스타(Mesta) 로 발전했다. 이 조치는 잉글랜드로 수출보내야 하는 양모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내려졌다.

또한 평민들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 국내 거래를 원활하게 하려 노력하면서도, 왕실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수출과 수입에 관세를 부과했으며, 국가가 대외 무역을 담당하는 상인을 지명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여기에 동인한 화폐와 도량형이 도입되었으며, 통치 기간 동안 25개의 주조소를 설립해 백성들이 화폐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대외 무역에 상당한 투자를 하던 귀족과 성직자들이 상당한 세금을 내는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알폰소 10세는 왕국 각지에 난립한 법전들을 통합한 새 법전을 편찬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왕국의 각 도시들에 적용되는 <푸에로 레알 데 에스파냐(Fuero Real de España)>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 헌장은 왕이 자유 재량에 따라 여러 도시에 부여한 경제적 특권을 명시한 것으로서, 봉건 귀족들의 권세를 견제하고자 도시를 키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때 그는 국법의 발의, 심의 및 후속 승인은 오직 왕만이 책임을 가진다고 명시해, 국왕만이 국법을 제정 및 반포할 권한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뒤이어 법률 개론서인 <법의 표본(El espéculo de las leyes)>을 작성해 각 도시에 발송했다. 카스티야 왕국에 통용되는 관습법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이 저서는 1255년에 공포될 예정이었지만, 125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야심을 품은 알폰소 10세가 반포를 중단시켰다. 이후 10년간 여러 법학자들과 함께 법률 편찬에 몰두한 끝에, '법의 표본'과 신성 로마 제국의 법을 결합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참조한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를 1265년에 반포했다. 이 법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 최초의 성문법으로, 19세기까지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본법으로 활용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세비야 공방전에 참여했을 때 임시로 창설된 함대가 세비야 항구를 봉쇄하여 도시 함락에 기여한 것을 지켜보고, 앞으로 강력한 해군을 육성할 필요성을 확실히 느꼈다. 1253년 카스티야 제독 직책을 정식으로 신설했고, 세비야에 조선소를 조성해 함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게 했다. 여기에 안달루시아와 무르시아에 마요르(mayor)가 신설되었으며, 뒤이어 알라바와 기푸스코아에서도 마요르가 신설되었다. 이들은 할당된 영지에서 사법 활동을 독립적으로 수행하고 외적으로부터 영지를 지키는 등 군사 업무도 맡았다. 그는 뒤이어 1188년 레온 왕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코르테스(Cortes)를 정식으로 도입했다. 이전에도 카스티야에도 코르테스로 불리만한 회의가 있기는 했으나 그의 치세에 정식으로 도입되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빈번하게 열린 코르테스에는 귀족, 성직자, 마을과 도시의 검찰관 등 다양한 신분이 참석했다. 코르테스를 소집한 주된 목적은 왕국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 신분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알폰소 10세의 치세 동안 시행된 정책 중 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손꼽는 정책은 정복지에 인구를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는 세비야 전역을 카스티야 왕국 곳곳에서 이주해온 기독교인들에게 분배했고, 정복지에 남은 무슬림들이 하엔, 세라노, 무데자르 일대에서 집단촌을 이뤄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상당한 '종교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1264년 무데자르의 무슬림들이 나스르 왕조의 선동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반란을 진압한 뒤 무슬림들을 대거 추방하고 과달레테 지역과 카디스 만에 살던 백성들을 과달키비르 계곡 등 무슬림이 떠나서 생긴 공백지에 대거 이주시켰다. 또한 세구라, 에스테파, 메디나 시도니아 등 나스르 왕조와의 국경지대에 군사 총독을 설치하고 그들이 자율적으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을 용인했다.

알폰소 10세는 외치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1253년, 그는 포르투갈 왕국으로 친정해 알가르베 일대를 공략했다.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3세는 알폰소 10세의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고 그 땅을 베아트리스에게 지불할 지참금으로 삼겠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1267년, 알폰소 10세는 아폰수 3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나서 알가르베 일대를 포르투갈에 돌려주고 포르투갈과 상호 방위 협약을 맺는 데가로 아라세나, 모우라, 세르파, 아로체 등 과디아나 강 동쪽의 포르투갈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이 가진다는 내용의 바다호스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는 재위 초기에 나바라 왕국의 종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나바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나바라 국왕 티발트 2세는 이를 두려워해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에브로 강변에서 만나 하이메 1세를 주권자로 섬기고 아라곤 왕국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그들이 전쟁을 보낼 때 병력을 반드시 보내주겠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알폰소 10세는 이에 맞서 아키텐 공국을 소유하고 있던 잉글랜드와 손잡기로 하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자와 자신의 누이인 레오노르를 결혼시키고 가스코뉴 일대를 지참금으로 양도하는 대가로 나바라 문제에서 잉글랜드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아라곤 왕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벌일 필요는 없다고 여기고 1256년 하이메 1세, 티발트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알폰소 10세는 하이메 1세를 나바라 왕국의 보호자로 인정하기로 했고, 하이메 1세는 카스티야 왕국이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탈취했던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1256년 독일왕 빌렘 2세가 프리지아인과의 전쟁 도중 전사하자, 피사 공화국의 사절이 알폰소 10세를 찾아와서 독일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알폰소 10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1257년에 전 유럽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인 베아트리스가 자신의 어머니인 점을 들며 독일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선언했다. 그 후 이탈리아의 기벨린파(친 황제파) 도시들에 외교관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고, 나중에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무력으로 복종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는 그의 계획은 많은 장애에 부딪쳤다. 카스티야 귀족들은 황제가 되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군대를 보내라는 왕의 요구에 난색을 보였고, 소리아에서는 과도한 세금에 반발한 지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카스티야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까지 겸임한다면 너무 강해진다고 여겼기에 반대했다.

한편, 신성 로마 황제를 선출할 자격이 있는 7명의 선제후 중 4명은 알폰소 10세를 지지하기로 했지만, 3명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를 지지했다. 알폰소 10세가 카스티야 왕국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반면, 리처드는 재빨리 아헨으로 이동해 1257년 5월 카롤루스 대제의 묘지를 참배한 뒤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알폰소 10세는 십여 년간 리처드를 꺾고 교황의 마음을 돌리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지원하고자 막대한 돈을 지출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272년 리처드가 사망하면서 그가 황제로 인정받는 듯했으나, 독일 제후들은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루돌프 1세 독일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역시 루돌프 1세를 지지하고 알폰소 10세의 독일왕 폐위를 선언했다.

설상가상으로, 알폰소 10세는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1271년 초 레르마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누뇨 곤잘레스 데 라라가 이끄는 대다수 귀족들은 국왕에게 "귀족에 대한 지나친 과세와 보조금 요구를 중단하고 착취를 일삼는 대리인들을 해임하며, 신법 집행을 중단하고 오랫동안 따라온 관습법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알폰소 10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귀족들은 1272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알폰소 10세는 이 반란에 곤욕을 치르다 1273년 신법을 다소 완화하고 귀족들에게 부과된 보조금 액수를 줄이는 등 온건책을 써서 가까스로 그들과 타협했다.

1275년 초, 알폰소 10세는 몬페라토 후작이며 자신을 독일왕으로 받들었던 기욤 7세와 만나서 앙주 공작 샤를 1세로부터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하면서 자신이 롬바르디아에서 독일왕으로 즉위하려 하니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기욤 7세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다시 리옹 공의회에 참석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교황은 공연히 독일왕이 되려 하지 말고 카스티야로 돌아가라고 답했다. 그러다가 본국에서 마린 왕조가 쳐들어왔다는 급박한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는 뜻을 완전히 접고 본국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선 1274년, 나스르 왕조의 군주 무함마드 2세는 알폰소 10세에게 연공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카스티야 왕국이 왕조 내부의 불만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자, 마린 왕조의 아미르 아부 유수프 야쿱에게 타리파, 알헤시라스, 론다 등을 할양하고 충성을 바칠 테니 카스티야 왕국을 정벌해달라고 요청했다. 야쿱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275년 4월 대군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타리파와 알헤시라스를 공략했다. 뒤이어 카스티야령 안달루시아를 습격했고, 무함마드 2세는 독자적으로 코르도바를 공격했다. 카스티야의 왕자이자 본국을 떠난 알폰소 10세를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던 페르난도가 반격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7월에 병사했다.

야쿱은 기세를 이어가 세비야와 코르도바 사이의 요충지인 에시하로 진격했다. 카스티야령 안달루시아 총독 누뇨 곤살레스 엘 부에노가 출진했지만, 1275년 9월 8일에 벌어진 에시하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야쿱은 뒤이어 에시하를 공격했지만 공성 무기가 준비되지 않아 철수한 뒤 9월 18일 알헤사리스에 개선하여 누뇨 곤살레스의 수급을 효수했다. 톨레도 대주교이자 알폰소 10세의 동생인 산초는 이에 맞서 톨레도, 마드리드, 과달라하라, 탈라베라 일대의 기사들을 모아 남하하다가 10월 21일 하엔 부근 마르토스에서 노획물과 포로들을 대등하고 이동 중이던 적군을 포착했다.

산초는 뒤따라 오는 기사들을 기다리자는 조언을 듣지 않고 곧바로 돌격했으나 참패를 당하고 생포된 후 마린 왕조군과 나스르 왕조군이 산초를 어찌 처리할 지를 놓고 분쟁을 벌이던 중에 살해되었다. 카스티야에 급히 돌아온 알폰소 10세는 군대를 수습해 국경지대에 집중 배치하는 한편 야쿱에게 휴전 협정을 맺자고 청했다. 원정이 장기화되면서 병력 손실이 많은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 야쿱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라곤 왕국이 그라나다를 기습 공격하는 바람에 얼른 돌아가야 했던 무함마드 2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과의 휴전에 동의했다.

1277년 6월, 알폰소 10세의 동생 파드리케가 알폰소 10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역을 꾀했다. 파드리케는 지난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려드는 알폰소 10세에게 불만을 품고 카스티야 왕국을 떠나 시칠리아의 만프레디 왕을 섬겼다가 만프레디가 카를루 1세에게 패망하자 다시 콘라딘을 섬겼다가 그 역시 카를루 1세에게 주살되자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산초 왕자를 왕으로 모시고 알폰소 10세를 수도원에 유폐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조기에 발각되었고, 알폰소 10세는 아들 산초에게 이들을 직접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산초는 이에 순종해 음모자들을 부르고스 인근의 트레비노에서 화형에 처했다.

1277년 6월, 야쿱이 재차 카스티야로 쳐들어왔다. 야쿱이 이끄는 무슬림군은 8월 2일 세비야 외곽에서 카스티야군을 격파하고 과달키바르 강을 따라 몇몇 성채를 공략한 후 8월 29일에 알헤시라스로 개선했다. 10월 30일에 재차 출병하여 아르키도나 부근에서 무함마드 2세와 합류한 뒤 베나메지 성채를 공략했다. 이후 연합군은 코르도바를 포위하고 근교를 약탈했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알폰소 10세가 배상금을 지불할 테니 휴전을 맺자고 청하자, 야쿱과 무함마드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났다. 야쿱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숙부인 우마르 이븐 야흐야를 알안달루스 총독으로 선임하고,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말라가의 타이파 바누 이쉬킬룰라와 동맹을 맺었다.

나스르 왕조의 군주 무함마드 2세는 마린 왕조가 자신의 정적인 비누 이쉬킬룰라와 손잡고 알안달루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끝에 그들과 갈라서기로 하고 알폰소 10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알폰소 10세는 이를 받아들여 세비야 함대 100척을 동원하여 알헤시라스 공격을 준비했다. 1278년 8월 5일, 알폰소 10세는 3만에 다랗는 육군을 이끌고 알헤시라스 근교에 당도했고, 24척의 선박과 80척의 갤리선으로 이뤄진 함대가 지브롤터 만을 봉쇄해 마린 왕조의 본토인 북아프리카에서 알헤시라스로 수송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무함마드 2세가 말라가로 진격해오자, 야쿱은 일단 무함마드 2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말라가 지배권을 포기하고 바누 아쉬킬룰라에 대한 보호를 철회할 테니 카스티야 왕국에 협력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무함마드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그라나다로 돌아갔다.

알폰소 10세는 무함마드 2세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1년간 알헤시라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우마르 이븐 야흐야가 이끄는 수비대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고, 장병들은 물자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역병에 시달렸다. 특히 해상 봉쇄를 수행하던 선원들은 괴혈병에 시달린 끝에 선박을 육지로 두고 육상 포위망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 야쿱의 아들 유수프가 72척의 함대를 이끌고 알헤시라스로 이동했고, 무함마드 2세 역시 12척을 보태줬다. 1279년 7월 20일 또는 25일, 나스르 왕조-마린 왕조 연합 함대는 기강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카스티야 함대를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고, 사로잡은 적군 중 장교를 제외한 이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이에 사기가 뚝 떨어진 카스티야군은 철수했고, 수비대는 이들을 즉각 추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알폰소 10세는 어쩔 수 없이 마린 왕조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고, 야쿱은 포위측 진영이 있던 비야 누에바 쪽에 성채를 건설하여 알헤시라스의 수비를 강화했다.

알폰소 10세는 이번 패전은 나스르 왕조의 배신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여기고 1280년 아들 산초에게 나스르 왕조의 수도 그라나다를 공격하게 했다. 마침 무함마드 2세와 갈등을 벌이고 있던 야쿱도 알폰소 10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해 6월 모슬린 전투에서 산초가 적의 매복에 걸려 패배하자, 1281년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 부근까지 진격했지만 그라나다의 방비가 워낙 강고해서 공략할 가망이 없자 퇴각했다. 그 후 무함마드 2세는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와 동맹을 맺고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했다.

이렇듯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위신이 떨어진 알폰소 10세에게 또다른 악재가 닥쳤다. 그는 당초 장남 페르난도를 왕위 후계자로 삼았지만, 페르난도는 1275년 빌라 레알에서 마린 왕조군과 대적하던 중 병사했다. 카스티야 관습법에 따르면, 장자가 사망할 경우 차남이 왕위 계승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반포한 신법인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에 따르면, 장자가 사망할 경우 장자의 자녀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알폰소 10세는 처음에는 산초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기로 했다. 1278년, 산초는 세고비아의 코르테스에서 카스티야 왕국의 차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비올란테 왕비는 혹여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 페르난도의 두 아들 알폰소와 페르난도를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의 궁정에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유대인 세금 징수관 이샤크 데 라 멜라하가 산초의 요청에 따라 왕실 수입의 일부를 산초가 진 빚을 갚는 데 쓴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급기야 1279년 7월 알헤시라스 공방전에서 참패한 뒤 이사크가 횡령을 저질러 물자가 부족해지는 바람에 패전을 초래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사크를 처형했다. 또한 알폰소 10세는 장남 페르난도의 자녀들이 하옌 일대를 독자적으로 이끌도록 해주려 했다. 그러나 산초가 "왕국의 모든 영토는 온전히 국왕 단 한사람만이 이끌어야 한다"며 반대하자, 알폰소 10세는 그가 조카들을 배제하려 든다며 반감을 품었다.

결국 1282년, 알폰소 10세는 세비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장남 페르난도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페르난도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새 국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산초 왕자는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귀족들을 결집해 아버지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바야돌리드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선포했다. 다수의 귀족과 성직자, 심지어 비올란테 왕비와 마누엘 왕자까지 산초의 편을 들자, 그는 세비야로 피신했다. 하지만 교황 마르티노 4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가 알폰소 10세를 지지하고 알폰소 10세의 동맹자였던 야쿱 역시 알폰소 10세를 돕기 위해 개입하려 하자, 반란군은 폐위를 감행하는 대신 타협하기로 했다. 알폰소 10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받을 수 있었지만, 치세 내내 실시했던 재정 및 입법 정책을 전면 중단하고 예전의 관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1284년 4월 4일, 세비야 궁정에 사실상 유폐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알폰소 10세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을 심하게 대하는 아들 산초를 저주하고 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산초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1284년 4월 30일 툴레도에서 산초 4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알폰소 10세와 비올란테 왕비의 4남 후안과 로페 디아스 3세 데 하로 등이 선제의 유언을 받들어 찬탈자 산초를 몰아내고 페르난도의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겠다고 선언하며 우클레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1285년 4월 야쿱이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를 건너 헤레스를 포위 공격하고 분견대를 파견해 메디나 시도니아, 카르모나, 에시하, 세비야 일대를 습격했다. 산초 4세는 일단 야쿱부터 물리치기로 하고 세비야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함대를 과달키바르 하구로 보내 적 함대의 세비야 공격을 방지했다.

1285년 8월, 산초 4세는 대군을 이끌고 헤레스 구원 작전에 착수했다. 그때까지 헤레스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만 입었던 야쿱은 구원군이 다가오자 알헤시라스로 철수한 후 협상을 제의했다. 그해 10월 양측은 5년간의 휴전에 합의했고, 마린 왕조가 카스티야 왕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카스티야 역시 마린 왕조와 나스르 왕조의 영지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이때 산초 4세는 레콩키스타 전쟁으로 교회가 획득한 안달루스 장서들 중 아랍어 책들을 선물하였고, 야쿱 역시 습격과 약탈로 인한 카스티야 측의 피해에 금전 보상을 해주었다.

이리하여 야쿱을 돌려보낸 산초 4세는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반란군은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인 토벌대에게 참패했고, 후안과 로페 디아스 3세 데 하로는 체포되었다. 산초 4세는 로페 디아스를 처형하고 후안을 지하 감옥에 투옥했다. 여기에 조카들을 추종하던 바다호스 시민 4,000명과 탈라벨라 시민 400명, 아빌라와 톨레도의 많은 주민들을 집단 처형했다. 또한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독립을 꾀한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도 진압했다. 1288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3세가 알폰소 10세의 손자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으로 옹립해 산초 4세에 대적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수차례 벌어졌지만 큰 전쟁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291년 카스티야 왕국과 마린 왕조와의 휴전 협약이 종결되었다. 마린 왕조의 아미르 아부 야쿱 유수프 앗 나스르가 알제리의 도시이자 자얀 왕조의 수도인 틀렘센을 포위 공격하느라 바쁜 사이, 산초 4세는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2세와 동맹을 맺고 안달루스의 마린 왕조의 영토인 타리파, 알헤시라스, 론다 공략에 착수했다. 1292년 10월, 산초 4세는 나스르 왕조군의 도움으로 타리파를 공략했다. 이때 그는 나스르 왕조에게 타리파를 넘기기로 약조했지만, 막상 공략한 후에는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무함마드 2세는 유수프에게 접근해 타리파가 수복되면 마린 왕조가 다시 가지는 것을 받아들이되 알헤시라스와 론다는 자신이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맺었다.

한편, 지난날 산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던 후안은 형의 용서를 받고 풀려났지만 마린 왕조에 사절을 보내 형에게 복수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유수프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1294년 안달루스에 상륙하여 후안과 합세한 뒤 타리파를 공격했다. 카스티야 귀족 알폰소 페레스 데 구즈만은 성채에서 완강히 저항했다. 이에 후안이 인질로 잡고 있던 구즈만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지만, 구즈만은 오히려 칼을 던져주며 그 칼로 어서 죽이라고 대꾸했다. 이리하여 포위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을 때, 리프 지역의 베르베르계 와타스 부족이 자얀 왕조의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비보를 접한 유수프는 어쩔 수 없이 회군하기로 했다. 유수프는 작전의 실패에 크게 좌절했고, 알안달루스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하고 알안달루스 내의 마린 왕조의 영역을 전부 나스르 왕조에 넘기고 북아프리카로 되돌아갔다.

1295년 4월 25일, 산초 4세가 톨레도에서 사망하고 9살된 아들 페르난도가 페르난도 4세로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새 국왕이 되었다. 1295년 바야돌리드의 코르테스에서 엔리케 데 카스티야 왕자[4]가 어린 왕의 후견인이 되는 듯했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시민 대표들을 포섭한 끝에 투표에서 앞서면서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산초 4세 치세 때부터 종종 반기를 들었던 후안 왕자[5]가 "산초 4세와 마리아의 결혼은 교황청으로부터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니[6]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산초 4세에게 밀려난 뒤 아라곤 왕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알폰소 드 라 세르다[7]를 국왕으로 추대했고, 비스카야의 영주 디에고 로페스 5세 데 하로, 라라 가문의 영주인 누뇨 곤살레스 데 라라, 후안 누녜스 데 라라도 여기에 가세했다. 게다가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한 틈을 타 이득을 마음껏 보려는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프랑스 왕국이 반란군을 은밀히 지원했다.

1295년, 후안 왕자는 나스르 왕조의 지원을 받으며 바다호스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고, 그 대신에 코리아와 알칸타라 성을 공략했다. 이후 포르투갈 왕국에 귀순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알폰소 드 라 세르다를 왕으로 옹립하는 데 동참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해 여름 바야돌리드 코르테스를 마친 마리아 왕비는 엔리케 왕자와 함께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와 대면했다. 그들은 포르투갈 국왕의 딸 콘스탄사와 페르난도 4세의 결혼을 예정대로 집행하고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를 디니스 1세의 아들 아폰수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와 동시에, 디에고 로페드 5세 데 하로가 비스카야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허용되었고, 후안 왕자 역시 산초 4세에게 몰수당한 재산을 회복하는 대가로 반란을 멈추기로 했다.

그러나 1296년 초, 후안 왕자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스투딜리오, 파레데스 데 나바, 두에냐스를 공략했고, 그의 아들 알폰소는 만실라 데 라스 물라스를 점령했다. 1296년 4월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가 빌려준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군해 레온 시로 입성한 뒤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로부터 레온, 세비야 갈라시아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후안 왕자와 합세한 뒤 사하군으로 갔고, 이번에는 후안 왕자가 카스티야, 톨레도, 코르도바, 무르시아, 하옌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국왕을 자처한 두 사람은 마요르가를 포위 공격했지만, 갑작스러운 전염병으로 인해 후안 왕자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페드로 데 아라곤 등 수많은 장교와 장병이 병사하면서 기세가 꺾이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후안 왕자와 후안 누녜스 데 라라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포르투갈군과 합세해 마리아 왕비와 페르난도 4세가 있는 바야돌리드 시를 공략하려 했다. 아라곤 왕국은 이와 별도로 무르시아와 소리아를 약탈했고,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는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하며 각지를 약탈했으며, 비스카야 영주 디에고 로페스 5세는 페르난도 4세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다.

마리아 왕비는 디니스 1세에게 알폰소 데 라 세르다와 후안 왕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면 전년도에 맺은 협정을 파기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디니스 1세는 더 이상 반란군을 돕지 않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 점령한 영토에 관료를 임명한 뒤 본국에 돌아갔다. 포르투갈군이 끝내 오지 않자, 후안 왕자는 레온으로 철수했고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아라곤 왕국으로 돌아갔다. 1296년 10월, 마리아 왕비는 반격에 착수해 후안 왕자의 아내인 마리아 디아즈 데 하로가 아들 로페와 함께 있던 파레데스 데 나바를 포위했다.

한편, 엔리케 데 카스티야는 반란군을 지원하는 나스르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그라나다에 가 있었다. 그는 협상 도중 아라곤 왕국과 포르투갈이 물러났고 마리아 왕비가 친히 파레데스 데 나바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러다간 마리아 왕비에게 완전히 밀려나 페르난도 4세의 가정교사 직마저 잃겠다고 여기고 카스티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나스르 왕조가 카스티야 왕국을 다시 공격하자,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과 다른 기사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을 물리치기로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아르요나 전투는 카스티야군의 완패로 끝났고, 엔리케는 알폰소 페레스 데 구즈만이 구출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으로 귀환한 엔리케는 파레데스 데 나바 공방전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아 왕비는 이를 강력히 반대했지만, 기사들은 무슬림들이 쳐들어왔는데 내전을 이어가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겨 엔리케의 말에 따랐다. 이리하여 정부군은 1297년 1월 파레데스 데 나바 공격을 중단하고 바야돌리드로 귀환했다. 엔리케는 뒤이어 나스르 왕조의 침략을 멈추게 하려면 타리파를 저들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타리파를 지키던 알폰소 페레스 데 구즈만이 강력하게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국경을 설정하는 알카니케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캄포마요르, 올리벤자, 오우겔라, 산 펠리시아스 데 로스 갈레고스 등 알폰소 10세가 탈취했던 포르투갈 영토를 돌려주고, 알메이다와 카스텔로 봄, 카스텔로 메호르, 케스텔로 로드리고, 몬포르테, 사부갈, 사스트레스 비야 마요르 일대도 포르투갈 국왕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것을 그만두고, 두 왕국의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은 서로를 지원하고 자신들의 영지와 특권을 지키는 데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은 두 왕국의 군주뿐만 아니라 카스티야 도시 길드, 카스티야와 레온 귀족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렇게 정해진 양국의 국경은 현대까지 거의 변경되지 않았기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국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이 다시 확인되었고,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약혼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디니스 1세는 마리아 왕비를 돕기 위해 300명의 기사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어낸 마리아 왕비는 1297년 말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을 레온 왕국으로 보내 레온 영토를 계속 지배하고 있는 후안 왕자를 물리치게 했다. 후안 왕자는 후안 누녜스 데 라라의 지원을 받으며 이에 맞서 싸우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듥기 위해 위조된 동전을 대량으로 주조했다.

1298년, 후안 왕자와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한 마리아 왕비는 토로에서 디니스 1세와 재차 만나서 후안 왕자와의 전쟁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이를 거절하고 페르난도 4세와 후안 왕자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후안 왕자는 점령한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영토가 페르난도 4세에게 귀속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야돌리드에 모인 카스티야 코르테스는 마리아 왕비로부터 뇌물을 받고 디니스 1세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1298년, 마리아 왕비는 또다른 아들 펠리페를 갈리시아 왕국으로 보내 그곳의 귀족들이 카스티야 왕국에 순응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레모스와 사리아의 영주 후안 알폰소 데 아부케르케와 페르난도 로드리게스 데 카스트로 등 몇몇 갈리시아 영주들은 펠리페 왕자를 신경쓰지 않고 사실상 독립했다.

1299년 봄,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무함마드 2세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마린 왕조의 지원군과 합세한 뒤 세비야 인근에서 카스티야군을 격파했다. 엔리케는 다시 한 번 타리파를 할양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반대에 부딪쳐 실패했다. 무함마드 2세는 무력으로 타리파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알카우데테를 공략하고 하옌 일대를 약탈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해 4월, 마리아 왕비가 파견한 군대가 알폰소 데 라 세르다 추종자들의 손아귀에 있던 몬손과 베세릴 데 캄포스를 탈환했다. 그리고 카메로스의 영주인 후안 알폰소 데 하로와 알폰소 데 라 세르다의 지지자인 후안 누녜스 데 라라를 체포했다. 여기에 아라곤 왕에게 포위된 로르카를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그해 8월 왕실군을 동원해 팔렌추엘라를 포위 공격했다.

감옥에 갇힌 후안 누녜스 데 라라는 그의 여동생 후아나가 엔리케 왕자와 결혼하고 페르난도 4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다시는 반역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오스마, 팔렌주엘라, 아마야, 두에냐스를 헌납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마리아 왕비는 이 땅을 충성파 귀족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자신와 페르난도 4세에 대한 충성심을 확고히 다지려 했다.

4. 아리곤 백국 ⇒ 아라곤 왕국

4.1. 11세기

1035년까지 아라곤은 팜플로나 왕국의 백작령으로 유지되었으나 1035년, 팜플로나 왕국의 전성기를 일궜던 안초 3세가 사망했고 그가 생전에 확보한 영토는 자식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때 아라곤 백작위는 라미로 사노이츠의 수중에 들어갔고, 얼마 후 아라곤 왕을 자칭했다. 이리하여 아라곤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라미로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산초 라미레스는 1064년 공성 기술을 갖춘 프랑스인들을 포함한 원정대를 파견해 킨카 강과 베로 강이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잡은 바르바스트로(Barbastro) 시를 공략한 뒤 장인인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3세에게 맡겼다. 1065년 4월 사라고사 에미르 아흐마드 알 무콰디르가 지하드를 선포하고 바르바스트로로 쳐들어오자, 에르멘골 3세는 이에 맞서 항전해 도시를 지켜냈지만 그 과정에서 병사했다. 이후 산초 라미레즈가 반격에 나서 1067년 이전에 부에라, 콜룽고, 아다우에스카 마을을 포함한 알케자르 일대를 공략했다.

1068년 2월 14일, 로마를 방문해 교황 알렉산데르 2세를 알현하고 아라곤 왕국을 교황청에 봉헌한 뒤 연간 500만 금화를 교황에 바치기로 했다. 교황은 그에 대한 대가로 아라곤 왕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성직자들을 아라곤에 파견해 주교구를 신설하게 했으며, 유럽 각국에 무슬림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아라곤 왕국을 도우라는 교령을 반포했다. 이후 많은 이탈리아 성직자들이 아라곤에 들어오면서, 아라곤에 로마 가톨릭 의식이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다.

1067년 레온과 카스티야의 산초 2세가 팜플로나 왕국 국경지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팜플로나를 위협하자, 팜플로나 국왕 안초 4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라곤에 구원을 요청했다. 산초 라미레스 역시 산초 2세의 확장 정책에 위협을 느끼던 터라 팜플로나 왕국을 돕기로 했다. 이리하여 발발한 "세 명의 산초 전쟁"은 엘 시드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안초 4세는 부레바, 알타 리오하, 알라바 일대를 카스티야에 넘겨줘야 했다.

1076년 6월 4일, 안초 4세는 나바라 마을 인근의 페날렌에서 사냥하던 중 형제 라몬 가르세이츠가 고용한 암살자가 내지른 단검에 찔려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라몬 가르세이츠는 팜플로나 왕국의 새 국왕이 되려 했지만, 귀족들이 형제를 살해한 그를 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하자 사라고사 궁정으로 도주했다. 이후 팜플로나 귀족들의 추대를 받으면서, 산초 라미레스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위를 겸임했다. 그는 레온-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의 승인을 받아내는 대가로 비즈카이아, 기푸스코아 등 팜플로나 왕국의 서쪽 영토를 넘겨줬다.

1077년 푸에로 데 자카(Fuero de Jaca)를 반포해 카미노 데 산티아고 마을을 도시로 승격하고 아라곤 왕국과 주교 본부의 수도로 삼았으며, 자크 대성당의 건설을 명령했다. 이는 피레네 산맥 반대편의 가스코뉴 등 프랑스인들과의 무역 활동을 용이하게 수행해 국부를 늘리기 위한 조치였다. 1078년에는 사라고사에서 20km 떨어진 에브로 강둑에 엘 카스텔라 요새를 건설하여 사라고사를 압박했다.

1083년 지난날 아버지가 공략에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던 그라우스를 공략했고 뒤이어 아예르베(Ayerbe)를 제압했다. 이로써 아라곤 왕국이 킨카 강변과 우에스카 저지대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에스카의 남서쪽에 자리잡은 알 무데바르, 바르뷔에스, 상가렌, 타베르나스, 비시엔을 포함한 12개 마을들은 아라곤 왕국에 복속되어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084년 4월 5일에는 투델라 시에서 15km 떨어진 아르게다스(Arguedas) 시를 공략했다. 그는 새로 확보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로아레(Loarre) 요새를 재건했으며, 오바노스(Obanos), 가리사(Garisa), 몬테아라곤(Montearagón), 아르타소나(Artasona)에 요새를 건설했다.

1087년 킨카 강과 에세라 강이 교차하는 지점인 에스타다를 새로 공략했으며, 1092년 프라가에서 12km 떨어진 자이딘(Zaidín)을 공략했다. 이렇게 확보한 영토 일부는 리바고르사를 관장하고 있던 장남 페드로 1세의 소유로 귀속되었다. 한편 1086년 10월 23일 알폰소 6세가 이끄는 레온군과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맞붙은 사그라하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알폰소 6세에게 지원군을 파견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1094년 6월 4일 우에스카 시를 포위해 맹공을 퍼붓던 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몬테아라곤 수도원으로 옮겨졌다가 나중에 산 후안 데라 페냐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산초 라미레스 왕이 전사한 후, 장남 페드로 1세가 장병들의 추대를 받아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교황청에 왕국을 봉헌한 아버지의 서약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에 교황은 아라곤의 왕과 왕비는 교황의 허락 없이는 파문을 받을 수 없음을 보장하는 교령 <쿰 유니버시스 상크테(Cum universis sancte: 모든 성도들)>를 반포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레콩키스타를 전개했다. 1095년 나발과 살리나스 드 트리요를 공략하여 바르바스트로와 우에스카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으며, 1096년 우에스카를 재차 포위했다. 1096년 11월 15일 알코라즈 전투에서 우에스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 빌라흐를 격파했다. 11월 27일 우에스카 공략에 성공한 뒤 이 도시를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한편, 페드로 1세는 보리아나에서 발렌시아에 거점을 삼고 할거하던 엘 시드와 동맹을 맺었다. 1096년 엘 시드를 만나고자 발렌시아로 떠난 그는 발렌시아 왕국의 국경지대인 베니카델에서 엘 시드와 대면했다. 이후 발렌시아로 나아가다가 바이렌에서 알 무스타인의 조카인 무함마드의 습격을 받았지만 격퇴하고 엘 시드와 함께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그는 몬순의 영주 라미로와 엘 시드의 맏딸 크리스티나를 결혼시킴으로써 엘 시드와의 동맹을 돈독하게 다졌다.

4.2. 12세기

1100년, 페드로 1세는 에브로 계곡에서의 공세를 재개하여 1099년부터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바르바스트로를 정복한 뒤 여세를 몰아 사리녜나를 공략했다. 이 무렵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그는 이에 가담하려 했다. 하지만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교황 파스칼 2세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을 상대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만큼의 가치가 있다"며 아라곤 왕의 예루살렘 순례를 막았다. 그 대신, 사라고사를 조속히 공략할 것을 촉구했다. 페드로 1세는 교황의 뜻에 따라 1101년 프랑스-카탈루냐 기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라고사를 공격해 그해 6월부터 포위 했다. 그러나 사라고사의 방비가 강건했고 병력도 부족했기에 더 이상 몰아붙이지 못했고, 단지 사라고사 인근에 쥬시볼(Juslibol) 요새를 짓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페드로 1세는 정복한 영토에 인구를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 주요 도시에 특권을 부여했으며, 가스코뉴 등 아라곤 왕국과 가까운 국가의 민중들에게 이주를 권장했다. 점령지에 이주한 주민들은 현지에서 방위 임무를 수행하되 원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혜택을 누렸다. 또한 교황청에 주교들을 현지로 보내 가톨릭을 전파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기독교를 왕국 전역에 전파해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동시에 우르헬 교구의 확장을 저지한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1103년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엘 시드가 세웠던 발렌시아 왕국을 재정복한 뒤 아라곤에 쳐들어왔다. 무슬림들은 아라곤 왕국의 남부 일대를 석권한 뒤 우에스카를 위협했다. 그는 이에 맞서 페랄타 데 칼라산츠를 장악했고, 우르헬 백작 아르멘골 6세와 함께 피라세를 포위해 공략에 성공했다. 1104년에는 사라고사를 재포위했으나 이번에도 공략에 실패했다.

1104년 9월 28일, 페드로 1세는 사라고사 공략에 실패한 뒤 우에스카로 귀환하던 중 발다란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인 아그녜스와 결혼했고, 1097년 아그네스가 사망한 뒤 베르타[8]와 결혼했다.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피에르, 아그네스를 낳았지만 각각 1103년과 1104년에 사망했고, 베르타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페드로 1세가 이렇듯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기에,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위는 이복형제인 알폰소 1세에게 넘어갔다.

이복 형 페드로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폰소 1세는 즉위 직후부터 선왕이 공략에 실패했던 사라고사를 반드시 함락시키겠다고 선포했고, 1105년에 왕국 전역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해 타우스테를 공략했고, 1106년 말 아라곤 왕국 남서쪽 국경과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인 마디나(현재 에헤아 데 로스 카바예로스)를 공략했다. 또한 사라고사 주변의 엘 카스텔라, 폴라, 산타 이네스 등 산초 라미레스와 페드로 1세가 지은 요새들을 보강하게 해, 사라고사 토후국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1106년 중반 우르헬 백국이 무슬림으로부터 발라게르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레리다 북쪽의 무슬림 방어선이 뚫렸고, 알폰소는 이를 잘 활용해 라 호야 데 우에스카 일대를 평정하는 등 동쪽에서 사라고사 토후국을 압박했다. 다만 에브로 강 북쪽의 일부 지역은 여전히 무슬림의 손에 남아 있었다. 특히 프라가와 메퀴넨자는 아라곤 왕국의 공세를 번번이 격퇴하면서 사라고사 토후국과 레리타 토후국간의 연결망을 보장했다. 여기에 사라고사 북쪽의 갈리고 강둑에 자리잡은 주에라, 알무데바르, 구레아 데 갈레고 등지는 사라고사의 방위를 책임졌다. 알폰소 1세가 사라고사를 도모하려면 이들을 별도로 평정할 필요가 있었다.

1109년, 알폰소 1세는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의 딸 우라카와 결혼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곘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Alfonso Raimúndez)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고메스 곤잘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직후인 1109년 7월 9일,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가 숨을 거두었다. 알폰소 1세는 자신이 장인의 직위를 그대로 승계받았다며 알폰소 6세가 생전에 누렸던 '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자기 것으로 삼아 '전히스파니아의 여제' 우라카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 직후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헬미레스와 알폰소 라이문데스의 가정교사를 맡던 트라바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해 알폰소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군대를 이끌고 레온으로 진군해 몬테로소 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더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기사들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러 요새와 성채를 접수하게 했으며, 1110년 내내 우라카의 영지인 레온과 카스티야를 돌며 공물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알폰소 1세가 발바네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하다, 산살바도르 데 오냐 등 여러 수도원에 기부한 것에 대해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어 우라카를 따르는 귀족들을 견제하게 하려는 수단이라고 추정한다.

우라카는 남편의 이같은 행보에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기고 분노했다. 그녀는 비스카야와 하로의 영주이자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의 후계자인 디에고 로페스 데 하로에게 특권을 부여해 알폰소 1세에 적대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귀족들은 알폰소 1세가 자기들 영지 내에 있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자기들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우라카의 지원에 반색하며 알폰소 1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몄다.

사라고사 토후국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은 알폰소 1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통합 문제에 전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타우스테를 탈환하고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즉각 대응에 나섰고, 1110년 1월 24일 발티에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알 무스타인을 처단했다. 이후 사라고사 토후국은 쇠락했고, 그동안 사라고사 토후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들 상당수가 알폰소 1세의 봉신을 자처했다.

발티에라 전투의 승리로 알폰소 1세의 위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지만, 그와 우라카와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에서 집필된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가 우라카를 손과 발로 허구헌날 구타했다고 서술했다. 이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저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우라카와 알폰소 1세 부부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1110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니 인정하기 어렵다는 교황청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을 비롯한 반 알폰소 세력은 우라카의 친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으로 받들고 우라카와 알폰소의 결혼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대응해 우라카를 긴급 체포한 뒤 그녀의 정신 상태가 통치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며 아라곤의 엘 카스텔리아 성채에 투옥시킨 뒤 레온과 카스티야의 반란자 토벌에 나섰다. 그는 몇 주 만에 팔렌시아, 부르고스, 오스마, 사하군, 아스토르가, 오렌세 등 레온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민중들이 분노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진군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엘 카스텔리아 성채를 습격해 우라카를 석방시킨 뒤 사하군 수도원에 이송시켰다가 다시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는 군대를 돌려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의 영지가 있는 카스티야 남부로 진격했다. 1111년 4월 13일 교황에게 두 사람의 혼인 무효를 요청했던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를 축출한 뒤 아라곤 수비대를 톨레도에 배치했다. 이 무렵 포르투갈 백작이며 알폰소 6세의 또다른 딸인 테레사 데 레온의 남편인 엔히크 드 보르고냐가 우라카를 돕기 위해 진군하자, 알폰소는 엔히크에게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한편, 우라카의 지지자인 페드로 프루엘라스 데 트라바 백작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조직한 군대가 우라카의 어린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와 함께 레온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가 1110년 원정 당시 공략했던 루고를 탈환한 뒤 수비대를 배치한 후 레온으로 계속 진군했다. 알폰소는 이 소식을 듣자 군대를 돌려 비아당고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페드로 프루엘라스는 체포되었고, 디에고 헬미레스는 어린 알폰소를 데리고 포르티 카스텔로 오르질리오네(forti Castello Orzilione)로 도주해 그곳에 숨어있던 우라카와 합류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1112년 여름 동안 휴전을 맺고 양자가 동의할 수 있는 평화 협약을 맺으려 애썼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커서 협의에 실패했다. 알폰소 1세는 어떻게든 레온과 카스티야를 장악하고자 아라곤 수비대들을 곳곳에 배치했지만,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좀처럼 통제하지 못한 데다 아라곤 귀족들마저 본국 귀환을 종용했다.

1112년 9월, 알폰소와의 협상이 무익하다고 여긴 우라카는 전쟁을 재개했다. 그녀는 케아 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해 케리온 강 서쪽의 카스티야 영역을 탈환했다. 부르고스 남쪽의 두에로 상류 영토 역시 우라카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알폰소 1세는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병력을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녀의 공세를 저지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 우라카와의 결혼을 이어가려 했으며, 교황 특사의 중재 제의를 거절했다.

1113년, 우라카는 갈리시아 귀족군과 함께 또다시 공세를 개시해 사하군과 카리온을 공략하고 부르고스를 포위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맞서 라 호야로 진군해 반란 세력을 제압했고, 4월에 로스 아르코스로 진군해 부르고스에 포위된 지지자들을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알바르 파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톨레도를 공략했다. 이렇듯 기독교도들이 내전을 일삼자, 사라고사 토후국은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했다. 무슬림군은 오레하 성을 공략하고 톨레도 주변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1113년 6월, 우라카는 부르고스를 손에 넣은 뒤 무슬림군의 위협에 시달리는 톨레도 구원에 착수했다. 이후 양자는 무슬림에 맞서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114년 팔렌시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했고,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으로 군림하되 레온과 카스티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바스크, 라 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툴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알폰소 1세는 무슬림과의 전쟁에 전념했다. 우선 툴레도를 포위했던 무슬림군을 격퇴했으며, 1117년에 피테로, 코렐라, 신트루에니고, 무르칸테, 몬테아구도, 카산테 일대를 공략했다. 1118년 툴루즈 공의회가 사라고사 정복을 지원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하면서 많은 프랑스인이 아라곤군과 합세했다. 그는 이를 활용해 알무데바르, 구레아 데 갈레고, 쥐라를 점령하고 그해 5월 말부터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6개월간 이어진 공성전 끝에 12월 18일 사라고사가 마침내 함락되었고, 알폰소는 사라고사에 입성한 뒤 이곳을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치하에 들어간 무슬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그들이 세금을 바치는 한 이슬람교를 그대로 믿도록 허용하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다.

1119년 세르베라, 투데옌, 카스텔론, 타라소나, 아그레다, 마갈론, 보르하, 알라곤, 노비야스, 말렌, 루에다, 에필라를 공략하고 소리아로 진군한 뒤 칼라타유드를 포위하다가 1120년 무슬림들이 사라고사를 탈환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포위를 거두고 그들을 향해 진군해 쿠탄다 전투에서 격파했다. 얼마 후 칼라타유드를 공략한 그는 여세를 이어가 부비에카, 알하마 데 아라곤, 아리사, 다로카를 공략했다. 1123년에는 바르셀로나 백국을 공격해 레리다를 공략했다. 이후 1124년 겨울부터 1125년 9월까지 알 안달루스 깊숙이 침입해 그라나다 인근까지 진군하여 많은 현지 기독교도들을 생포한 뒤 아라곤으로 귀환했다.

1125년부터 1126년까지 그라나다와 코르도바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1127년 롱가레스를 재정복했다. 한편 1126년 우라카 여왕이 사망한 뒤, 우라카의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로 즉위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1127년 알폰소 7세가 자신이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사이 카스티야 전역을 석권해버리자 현실을 받아들여 1128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경계를 확정지은 타마라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1129년 몰리나 데 아라곤과 몬손을 공략한 뒤 엘 시드 사후 무슬림에게 넘어갔던 발렌시아를 포위했다. 그러다가 피레네 산맥 너머 아키텐에서 공작 승계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자, 그 여파가 아라곤 왕국에 미칠 것을 염려해 군대를 물렸다. 이후 1130년 10월에서 1131년 초 사이에 피레네 산맥을 건너 아키텐으로 가서 바욘을 포위 공격한 끝에 아키텐 귀족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아라곤으로 귀환한 뒤, 알폰소는 무슬림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1133년 메퀴넨차를 공략했으며, 1134년 프라가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1134년 여름 가스코뉴에서 온 프랑스 병사들이 그들의 땅으로 한꺼번에 돌아가는 바람에 프라가 요새 포위전에 투입된 병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발렌시아 총독이 이끄는 무슬림군이 이 때를 틈타 프라가 구원에 나섰다. 1134년 7월 17일, 알폰소 1세는 수적으로 우세한 무슬림군의 급습을 받았다. 그는 이 전투에서 패한 뒤 병력을 가까스로 수습해 철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후 사라고사로 귀환하다가 9월 7일 폴레니노 마을에서 부상이 악화되면서 숨을 거두었다.

알폰소 1세는 바욘 공방전을 전개하던 중에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성묘 기사단에 왕국을 맡기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고 수도 생활을 하던 알폰소의 형제 라미로를 속세로 끌어내 아라곤 왕 라미로 2세로 즉위시켰다.

알폰소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라미로 2세는 팜플로나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라곤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아타레스 가문의 일원인 페드로 데 아타레스를 왕으로 추대하려했지만, 그가 무척 거만한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들을 깔보자 마음을 바꿔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라미로 2세가 이에 반대하면서 양국간 내전이 벌어질 조짐이 보였지만, 1135년 1월 양자는 바돌루엥고 조약을 통해 화합했다. 가르체아는 아라곤 왕국이 팜플로나 왕국의 주권자임을 인정하며 라미로를 아버지로 모시기로 했고, 라미로 2세는 그가 팜플로나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르체아는 1135년 7월에 입장을 바꿔 자신이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의 봉신이라고 선언하고 알폰소 7세의 보호를 받았다. 알폰소 7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가르체아에게 사라고사를 봉토로 내줬다.

한편, 아라곤 왕국내 귀족들은 오랜 수도원 생활로 인해 통치 경험이 전무한 왕이 막 즉위한 터라 자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 세력 다툼을 벌였다. 이로 인해 왕위를 잃을 위기에 몰린 그는 베살루 수도원으로 피신한 뒤 그곳의 수도원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수도원장으로부터 "왕국의 미래를 위해 잡초를 뽑아라"라는 조언을 받고 돌아온 라미로 2세는 왕국 전체에서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종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귀족들이 그의 어리석은 행위를 비웃기 위해 그 종을 보러 오자, 왕은 종이 있다는 방으로 한 명씩 들어오게 했다. 잠시 후, 방안에서 귀족들이 목 베이면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울러퍼졌다. 왕은 충격으로 얼어붙은 귀족들을 돌아보며 한 마디 했다.
"들어보라, 들어봐! 종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들어보라!"

이날 학살된 귀족들은 휴전 기간에 무슬림 캐러밴을 공격해 약탈을 일삼고 사병을 길러서 왕의 명령을 무시한 자들이었다. 이후 귀족들은 다시는 라미로 2세를 거역하지 못했다고 한다.

라미로 2세는 수도자로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아라곤 왕위가 후계자 없이 남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1135년 11월 13일 자카 대성당에서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1117년 투아르 자작 아이메리 5세와 결혼해 1127년 에이메리 5세가 사망할 때까지 기욤 1세, 가이, 제프리 4세를 낳았다. 라미로는 출산 경험이 많은 그녀가 후계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녀와의 결혼을 감행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공식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육체적 욕망 때문이 아니라 왕실의 혈통을 잇기 위해 아내를 얻었다."

1136년 8월, 아그네스는 딸 페트로닐라를 낳았다. 그 후 아그네스는 1136년 10월 산 페드로 데 안테프 루엔초 수도원에 남편과 함께 방앗간과 말을 공동으로 기증한 것을 끝으로 더이상 기록에서 전해지지 않는데, 얼마 안가 죽었거나 남편의 권유에 따라 수도원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1137년 8월 11일, 당시 1살이었던 페트로닐라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약혼했다.

이때 작성된 약혼 계약문서가 현재까지 전해지는데, 이에 따르면 라미로 2세는 왕권을 라몬 베렝게르에게 넘기고 베렝게르가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되 아라곤 국왕은 딸 페트로닐라가 선임되며,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페트로닐라는 퇴위하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로 했다. 이는 여성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왕국의 소유나 양도할 권리를 부정하지 않은 아라곤 왕국의 법을 준수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그 후 1137년 11월 13일 라미로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나 산 페드로 엘 바에흐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딸 페트로닐라가 1살의 나이로 아라곤 여왕이 되었고 실권은 약혼남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주관했다. 페트로닐라는 15살 때인 1151년 정식으로 라몬 베렝게르 4세와 결혼했으며, 1152년 4월 4일 자신이 출산하던 중 사망할 경우 왕국을 남편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렇지만 5명의 자녀를 무탈히 낳을 수 있었고, 남편이 통치를 행사하는 동안 궁궐에 조용히 지냈다. 다만 1156~1157년 남편이 프로방스에 가 있는 동안 바르셀로나에 들러서 신하들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걸 보면 아예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닌 듯하다.

1162년 남편이 사망한 후 바르셀로나 백국과 발 데 리브스 일대를 상속받았다. 이후 2년간 아라곤 왕국을 홀로 통치하던 페트로닐라는 1164년 6월 18일에 아라곤 왕국과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7살된 아들 알폰소 2세에게 맡기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 후 아직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1166년 프로방스 후작이자 라몬 베렝게르 4세의 조카였던 라몬 베렝게르 3세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니스를 포위하던 중 사망하고 딸 둘세만 남았다. 이에 페트로닐라는 프로방스 백작령을 라몬 베렝게르 3세의 사촌인 알폰소 엘 카스토에게 넘겼다. 툴루즈의 레몽 5세가 이에 반발하여 지지자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자, 1167년 몽펠리에, 프로방스 주교관, 보 가문의 지원을 받은 아라곤군이 프로방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레몽 5세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시키지 못했다.

한편, 라몬 베렝게르 4세는 1157년 레온-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레리다 협약을 이행하기 전인 1157년 8월 2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뒤를 이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산초 3세 역시 1158년 8월 3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갓난아기였던 알폰소 8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라몬 베렝게르 4세 역시 1162년에 사망했기에 레리다 협약은 제때에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페트로닐라는 나바라 왕국을 적대하는 대신 화해하기로 하고, 1168년 안초 6세와 13년간의 휴전을 맺었다. 이때 앞으로 무슬림으로부터 정복한 땅을 나바라 왕국과 분할하기로 했다.

1173년 10월 15일, 페트로닐라 여왕이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히메네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라몬 베렝게르 4세와 페트로닐라의 아들 알폰소 2세가 개창한 바르셀로나 왕조가 아라곤의 지배가문이 되었다.

1173년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비로소 친정을 시작한 알폰소 2세는 1174년 1월 18일 16세의 나이에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전 국왕 알폰소 7세의 딸이자 현 국왕 알폰소 8세의 고모인 산차와 결혼했다. 이후 무슬림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 알폰소 2세는 발렌시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그곳의 타이파로부터 공물을 2배 더 받기로 합의하고 물러났다. 뒤이어 자티바와 무르시아를 공격하던 중 안초 6세가 아라곤 왕국 국경지대를 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대를 돌렸다.

1174년 7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함께 나바라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2세는 밀라그로 성을 공략하고 파괴했으며,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군을 격파한 뒤 안초 6세가 있던 르귄 성을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다. 안초 6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산골짜기로 도주했고, 양군은 나바라 각지를 파괴한 뒤 철수했다.

알폰소 2세는 1177년 카스티야 왕국의 쿠엥카 정복전에 협력했으며, 1179년 카솔라 협약에서 알폰소 8세로부터 아라곤 왕국이 무르시아를 공략하는 것을 허용하게 하는 대가로 발렌시아에 대한 주권 주장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한 뒤 무르시아로 진군해 그곳의 타이파로부터 그동안 자신에게 바치지 않은 공물들을 납부하라고 강요했다.

한편 1176년 프로방스 일대의 패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던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와 타라스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툴루즈 백작은 이 조약에서 3만 리브르의 은화를 받는 대가로 프로방스, 가발다, 카라데스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 이후 프로방스의 지배력 확대에 관심을 가진 그는 프로방스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항하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구엘프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1181년, 프로방스 일대에 대한 아라곤 왕국의 입지는 위기에 처했다. 먼저 툴루즈 백작 레몽 5세가 이끄는 군대가 나르본을 침공했고,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이에 맞서다 몽펠리에 인근에서 살해되었다. 알폰소 2세는 동생 산초를 프로방스 새 백작으로 임명했지만, 1185년 툴루즈, 제노바를 상대로 자신의 허락없이 비밀 협상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를 해임했다. 하지만 레몽 5세는 툴루즈에서 일어난 반란 토벌에 애를 먹으면서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못했고, 1189년 양자는 1176년에 맺었던 타라스코 협약과 동일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후 알폰소 2세는 프로방스, 밀하우, 가발다, 로에르가 등 피레네 산맥 북부의 영토를 공고히하는데 힘을 기울였으며, 부라케스 델 피에몬테, 몽펠리에, 라세즈, 푸아, 비고라, 님스, 베지에, 카르카소나, 그리고 베른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 무렵 라 리오하 공략에 성공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를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했으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손잡고 아라곤 왕국을 도모하려 했다. 이에 아라곤 2세는 1190년 카스티야 왕국의 적국인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과 사신을 교환해 반 카스티야 동맹을 결성하려 했다.

1192년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잉글랜드 국왕 겸 아키텐 공작 리처드 1세는 알폰소 2세에 맞서 툴루즈 백작 라몬 5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알폰소 2세는 아들 알폰소를 레몽 5세의 이전 동맹이었던 포르칼퀴에의 기욤 6세의 딸인 가르센다 데 사르단과 결혼시키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하지만 양자간의 큰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고, 1195년 알폰소 2세와 레몽 5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레몽 6세 사이에 평화 협약이 다시 맺어지면서 갈등이 종식되었다.

1195년 7월 19일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왕국군이 야쿱 알 만수르가 지휘하는 무와히드 왕조군에게 참패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내 기독교 세력이 약화되자, 교황 첼레스티노 2세는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 왕국에 공동으로 힘을 합쳐 무슬림을 무찌르라고 권고했다. 그는 이에 따라 반 카스티야 동맹 결성을 미루고 알폰소 8세와 함께 무슬림에 대한 합동 공격을 계획했지만 실행되지는 못했다.

1196년, 알폰소 2세가 프로방스 지역의 페르피냥에서 사망했고 장남 페드로 2세가 아라곤 국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카스티야 국왕의 딸이었던 점을 살려 카스티야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사촌인 알폰소 8세가 레온 왕국 나바라 왕국에 대항하는 것을 지원했다.

1198년, 무와히드 왕조의 봉신이 된 나바라 국왕 안초 7세가 무와히드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의 부름을 받고 마그레브로 향했다. 이에 페드로 2세는 알폰소 8세와 칼라타유드에서 만나서 안초 7세가 없는 사이에 나바라 왕국을 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알폰소 8세는 1199년 페드로 2세가 보내준 병력과 합세한 뒤 가스테이스(현재 스페인 바스크 지방 알라바 주의 주도 비토리아)를 포위 공격했다.

4.3. 13세기

가스테이스 공방전은 1200년 1월까지 이어지다가 함략했으며, 뒤이어 알라바, 두랑갈데와가, 기푸스코아 지방을 빼앗았다. 안초 7세는 마그레브에서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듣고 급히 귀국했지만, 무와히드 왕조가 내전에 시달리던 중이어서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기에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을 상대로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200년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의사 셰흐트 벤 아이작 벤 요셉 벤베니스테(Sheshet ben Isaac ben Joseph Benveniste)를 무와히드 왕조에 보내 카탈루냐 해안을 연이어 습격하여 황폐화시키는 바르바리 해적을 단속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얻지 못했다. 1201년에는 성 호르디 알파마 기사단을 창설해 토르토사 인근 영지를 주고 그곳을 깁간으로 삼아 무슬림에 맞서 싸우게 했다. 1204년 몽펠리에 백작 기욤 8세의 딸 마리와 결혼하여[9] 외아들 하이메 1세를 낳았다.

1210년 카탈루냐 해안을 끊임없이 침략하는 무슬림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링콘 데 아데무즈로 쳐들어가 알 다무스와 카스텔파비를 공략했다. 또한 1212년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레온 왕국- 나바라 왕국- 성전 기사단 연합군이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의 군대와 맞붙은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 참전해 기독교 세력의 완승에 기여했다.

한편, 피레네 산맥 이북의 프로방스 백작령은 페드로 2세의 형제 알폰소 2세가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프로방스와 그 주변 일대에 관심이 많았고, 1204년 자신과 동맹을 맺은 포르칼퀴에 백작과 갈등을 벌이는 동생을 꾸짖는 서신을 보냈으며, 1206년 몽펠리에 주민들이 아라곤 왕국의 통치에 반기를 들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했다. 그러던 1209년 시몽 4세 드 몽포르[10]가 베시에와 카르카손을 공략하고 랑그도크의 영주들을 복속시키고 툴루즈, 코망주, 푸아 백국의 조공을 받는 등 위세를 떨치자, 그는 아들 하이메의 후견인을 시몽 드 몽포르로 삼기로 했다. 또한 여동생 레오노라와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약혼을 주선했다.

1213년, 시몽 4세 드 몽포르가 이단인 카타리파를 보호하는 툴루즈 백국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툴루즈로 쳐들어가서 레몽 6세를 몰아냈다. 레몽 6세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페드로 2세는 시몽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툴루즈로 진격했다. 그해 9월 10일 뮤레에 도착한 그는 레몽 외 남부 프랑스 영주들이 이끄는 랑그도크 부대와 합세했다. 그는 툴루즈 민병대에게 뮤레 성벽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기고, 본대는 인근 언덕에 배치해 장차 뮤레 성을 구하러 오는 시몽을 상대하기로 했다.

시몽은 기병대를 이끌고 진군하던 중 적과 마주치자 기병대를 3개의 전열로 나누고 자신은 3번째 대열에 섰다. 페드로 2세는 이에 맞서 2개 대열을 편성하고 자신은 2열에서 빌린 갑옷으로 변장한 채 부하들과 함께 섰다. 이윽고 시몽의 이복형제인 바레스의 기욤이 이끄는 카타리파 십자군 선두 부대가 적 중앙 대열을 향해 달려들었고, 두 번째 십자군 대열이 뒤를 따라갔다. 아라곤-랑그도크 연합군 선두 대열은 십자군의 돌격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십자군은 두번째 대열로 진격했다. 이와 동시에, 몽포르는 3번째 대열을 이끌고 적 좌익을 측면에서 요격해 격파한 후 적 후방을 향해 질주했다.

아라곤-랑그도크 연합군은 강력한 전투력과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십자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페드로 2세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동시대의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왕이 여기에 있다!"고 외쳤지만 적 기사들이 알아듣지 못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시몽은 2개 대열에게 적 추격을 맡긴 뒤, 자신은 포위된 뮤레로 이동해 그때까지 성을 공격하고 있던 툴루즈 민병대를 섬멸했다. 이리하여 아라곤 왕국은 랑그도크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페드로 2세가 뮤레 전투에서 전사한 뒤, 5살된 아들 하이메 1세가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군영에 머물렀다가 시몽 4세 드 몽포르에게 붙잡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어머니 마리는 아라곤 왕국의 궁재 시메노 코르넬 1세, 아라곤 왕국에 있는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장 기욤 드 몽트레돈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로마에 보내 시몽이 아들을 돌려주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인노첸시오 3세는 피에트로 디 베네벤토를 파견해 시몽에게 아이를 몽펠리에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시몽은 즉각 동의했고, 1214년 4월 18일에서 25일 사이에 어린 하이메를 특사에게 넘겼다. 이후 교황 특사단은 하이메와 함께 아라곤 왕국으로 가서 아라곤과 카탈루냐 귀족들의 영접을 받았다. 1214년 8월 중순 레리다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서, 팜플로나 주교인 아스파레그 데 라 바르카는 모두를 대표하여 하이메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세르다냐의 산초 1세와 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의 셋째 아들 페르난도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이메의 어머니 마리는 아들과 재회하지도 못한 채 1213년 4월 21일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성전 기사단장 기욤 드 몽트레돈을 아이의 가정교사로 삼고 교황 특사에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아라곤 왕국의 섭정으로서 국정을 도맡게 된 피에트로 디 베네벤토는 먼저 유대인 아이작에게 아라곤 왕국과 이베리아 반도 무슬림들과의 평화 협약을 맡겼다. 이것이 성사된 후, 피에트로는 정식으로 아라곤 왕국의 섭정을 맡을 이를 모집했다. 그 결과 1214년 11월 로셀로, 프로방스, 세르다냐 백작 산초 1세가 섭정에 선임되었다. 하이메의 삼촌이며 몬테아라곤 성의 수도원장이었던 페르난도는 자신이 왕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니 마땅히 섭정이 되어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16년 1월 23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어린 왕을 보좌할 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위원회에는 타라고나 대주교 가르시아 프론틴 1세, 세메노 코르넬 1세, 팜플로나 주교를 맡다가 타라고나 대주교로 승진한 바르카의 에스파라고스, 카르도나 자작 기욤, 기욤 드 몽트레돈 등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유력 귀족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섭정을 맡은 산초 1세에게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산초 1세는 뮤레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고 피레네 산맥 북부의 옥시타니 지역에 대한 아라곤 왕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군대를 그곳으로 파견해 시몽에 맞서는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를 도왔다. 그러나 시몽 4세 드 몽포르에게 연이어 패해 오히려 많은 영역을 상실한 데다 새 교황 호노리오 3세 카타리파 십자군을 자처한 시몽을 지지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의 사이가 나빠졌다. 몬테아라곤 성의 수도원장 페르난도는 이 때를 틈타 교황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는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어 산초 1세에 대적했다.

1217년 12월 28일과 29일, 호노리오 3세는 두 개의 교령을 반포해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섭정 산초 1세를 각각 파문하며, 그들이 카타리파의 수괴로 규탄받는 레몽 6세를 계속 돕는다면 그들의 영역에 대한 십자군을 승인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대내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산초 1세는 1218년 9월 섭정에서 물러난 뒤 프로방스 백국으로 이동했다. 이후 1219년 타라고나 대주교 가르시아 프론틴 1세가 이끄는 새로운 왕립 평의회가 수립되어 하이메 1세 대신 국정을 돌봤다.

1220년, 소몬타노의 영주 로드리고 데 리카나가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기사 로페 달베로를 체포해 리카나 성에 가둬버린 뒤 로페가 다스리던 알베로 성을 약탈했다. 로페의 사위인 펠레그린 다트로실로는 아라곤 왕국의 수도 우에스카에 이 사실을 고발했고, 가르시아 프론틴 1세가 이끄는 왕립 평의회는 로드리고 데 리카나에게 로페를 즉시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이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220년 5월 토벌대가 리카나 성을 포위해 수 개월간 맹공을 퍼부은 끝에 공략에 성공하고 로데 달베로를 석방시켰다. 이후 토벌대는 로드리고 데 리카나가 피신한 알바라시 영주령으로 향했다. 이후 2달간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토벌전에 참여했던 귀족들이 중앙 정부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을 우려해 로드리고와 내통하는 바람에 공략에 실패했다. 그 후 왕립 평의회는 알바라시 영주 페로 페르난데즈와 로드리고가 왕에게 사죄하고 왕은 두 사람을 용서하는 형식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1221년 2월 6일, 하이메 1세는 13세의 나이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의 딸 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이로써 하이메 1세의 입지가 다져지는 듯했지만, 1222년 중반 몽카다 백작 기욤 2세가 하이메 1세의 사촌이자 아라곤 왕국의 전 섭정 산초 1세의 아들인 누누 산체스의 영지 일부를 침탈하고 1223년 양자간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이메 1세는 누누 산체스를 돕기 위해 귀족들을 소집했다. 그러나 왕을 따라 프로방스로 향한 귀족들은 몽카다 백작 기욤 2세와 내통하여 왕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심지어 누누 산체스 마저 그들에게 회유되어 왕을 배신하기로 했다.

하이메 1세는 긴밀히 아뢸 이야기가 있으니 알라곤(Alagón)에서 만나자는 누누 산체스의 요청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는 귀족들에게 대다수 병력을 알라곤 인근 마을에 머물게 하고 4~5명의 기사만 거느리고 알라곤에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날 밤 누누 산체스는 400명의 기사와 함께 알라곤에 몰려든 귀족들을 들여보냈고, 하이메 1세는 순식간에 레오노르 왕비와 함께 체포되었다. 귀족들은 왕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질나쁜 조언자들로부터 왕을 분리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라면서, 왕과 왕비를 사라고사 인근의 수다 성으로 이송시켰다. 그 후 1년간 연금되던 그는 20,000 모라베틴(morabetin)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타라고나 대주교 가르시아 프론틴 1세는 이 일로 실각했고, 오랫동안 권력에 눈독을 들였던 몬테아라곤 성의 수도원장 페르난도가 실권을 잡았다.

1225년, 당시 17세였던 하이메 1세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페니스콜라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소집령에 응하지 않는 바람에 병력이 충분하지 않아 공략에 실패했다. 1226년 다시 발렌시아 원정을 계획했지만 귀족들이 이번에도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자 원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아라곤 국왕의 위협적인 행동에 부담을 느낀 발렌시아 타이파 자이드 아부 자이드는 아라곤 왕국과 휴전을 맺는 대가로 발렌시아와 무르시아에서 얻은 수입의 1/5를 매년 지불하겠다는 협약을 제시했고, 하이메 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227년 초, 실권자 페르난도가 왕이 자이드 아부 자이드와 맺었던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벌이려 하는 것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은 귀족들이 전횡을 일삼은 페르난도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하이메는 병력을 원활하게 확보한 뒤 페르난도를 몰아붙였다. 그러던 중 교황 호노리오 3세가 파견한 사절의 중재에 따라, 양자는 1227년 3월 22일 알칼라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를 비롯한 반란 귀족들은 왕에게 용서를 구해 사면을 받고 앞으로는 왕을 위해 싸우기로 맹세했으며, 교황청은 무슬림과의 전쟁에 앞장서겠다고 서약한 하이메 1세의 권위를 인정했다.

1228년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8세가 딸 아우렘비아이스(Aurembiaix)를 남긴 채 사망했다. 그러자 카브레라 백작 게라우 4세가 "여자는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우르헬로 쳐들어가서 그녀를 축출했다. 아우렘비아이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하이메 1세는 "충직했던 가신의 자녀를 보호하고 군주의 허락없이 영지를 빼앗은 부덕한 신하를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게라우 4세를 공격했다. 게라우 4세는 바르셀로나 백작과 손을 잡고 대항했지만 패배한 뒤 다시는 이웃 영지를 무단으로 침략하지 않고 왕에게 복종하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후 아우렘비아이스는 레리다를 아르곤 왕국에 넘기는 대가로 우르헬 여백작이 되었다.

1229년 9월 5일, 하이메 1세는 155척의 전선과 1,500명의 기병, 15,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마요르카 공략에 착수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병사 대부분은 카탈루냐인이었다. 원정군은 9월 7일 마요르카 섬의 해안지대인 팔로메라와 드래고네라에 상륙한 뒤 9월 10일 산타 폰사 전투와 9월 12일 포르토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했다. 이후 마요르카 섬의 주도인 마드나 마요르카를 석달간 포위 공격한 끝에 12월 31일에 함락시켰다. 이후 카탈루냐에 살던 주민들을 마요르카 섬에 이주시키고 가톨릭 주교구를 설립해 마요르카 섬을 단시일에 기독교화시키고자 노력했다.

1231년 6월 17일, 하이메 1세는 메노르카 섬의 지도자 아부 아브드 알라 무함마드와 카프데페라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협약에서 무함마드가 섬을 계속 점유하는 것을 허용하되 자신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 이후 1235년 야비차와 포르멘테라를 정복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 소식에 기뻐하며 두 도시를 정복한 카탈루냐 원정대에게 십자군 칭호를 수여했다. 또한 1232년부터 발렌시아 토후국을 상대로 공세를 펼친 끝에 1238년 9월 28일 마침내 발렌시아 공략에 성공하고 수도를 우에스카에서 발렌시아로 이전했다. 다만 발렌시아 공방전 도중 아라곤 사령관이며 하이메 1세의 사촌인 베르나트 굴렘 1세 엔텐사가 전사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아라곤 왕국의 지배에 놓이게 된 발렌시아 무슬림들은 자신들을 차별대우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1244년, 그들은 알 아즈라크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알 아즈라크는 반란을 일으킨 직후 암브라 성, 알칼라 성 등을 공략했고, 이듬해에는 사티바, 데니아, 알리칸데 성을 공략했다. 여기에 아라곤 왕국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우려한 그라나다 술탄국이 반란을 지원했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 역시 이베리아 반도의 경쟁자인 아라곤 왕국의 약화를 노려 반란을 지원했다.

게다가 하이메 1세가 " 십일조를 면제해줄 테니 무슬림을 추방하라"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압력에 굴복해 아라곤 왕국의 모든 영토에서 무슬림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린 뒤 추방된 이들 상당수가 반군에 합류하면서, 반란 진압은 더욱 힘들어졌다. 하이메 1세는 반란 진압을 위해 루첸테 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죽을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그동안 알 아즈라크는 베니카델 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을 뚫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 양자는 잠정적으로 휴전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1248년 하이메 1세가 세비야를 포위하고 있던 카스티야 왕국을 돕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하자, 알 아즈라크는 이때를 노려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전쟁 초기에는 알 아즈라크가 아라곤 왕국의 정복지를 모조리 탈환할 기세로 몰아붙였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아라곤 왕국군의 거센 반격으로 차츰 밀렸다. 1251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중재에 따라 휴전을 맞고 수년간 불안한 평화를 이어갔다. 그러던 1258년 알 아즈라크의 고문이 성에 저장되어 있는 곡물들을 하이메 1세에게 모조리 팔고 황금을 잔뜩 챙기는 사건이 벌어졌고, 하이메 1세는 적이 식량 궁핍에 빠진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그 결과 알리칸테의 플레인, 페고, 카스텔 드 카스텔스를 공략했다. 그 후 알 아즈라크는 항복했고, 알칼라, 임브라, 데니아, 알리칸데 등 나머지 요새들을 넘긴 뒤 추방되었다. 이후 하이메 1세는 그곳에 사는 무슬림들을 모조리 몰아내라는 교황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그들을 개종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 하이메 1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코르베유 조약을 체결해 피레네 산맥 이북의 옥시타니아 영지를 몽펠리에, 칼라데스, 오멜리스를 제외하고 프랑스 왕국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는 아라곤 왕국이 그 지역에서 통치력을 행사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여겼고, 프랑스 왕국과 공연히 전쟁을 벌이는 것을 피하고 무슬림과의 전쟁에 집중하고 싶었기에 이 조약을 맺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왕국이 카탈루냐에 대한 어떠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포기하게 했다.

1264년, 카스티야 왕국의 속국이었던 무르시아의 무슬림들이 그라나다 술탄국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카스티야 왁국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하이메 1세는 귀족들을 소집했다. 아라곤 귀족들은 어떤 종류의 보상도 없이 카스티야를 돕기 위한 군사 작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지만, 카탈루냐 귀족들은 잠시 주저한 끝에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이메 1세의 아들 페드로가 이끄는 카탈루냐군은 무르시아로 진격해 반란군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후드 비하 알 다울라를 격파하고 그라나다군을 물리쳤다. 그 후 카탈루냐 수비대와 민간인들이 무르시아에 대거 정착했고, 하이메 1세는 이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에 그대로 양도했다.

1267년, 하이메 1세와 교황 클레멘스 4세는 하이메 알라리크 데 페르피냥을 일 칸국 아바카 칸에게 파견해 무슬림을 대상으로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라고 촉구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했다. 1269년 아바카 칸의 답신을 가지고 돌아온 하이메 알라리크는 칸이 십자군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알렸다. 이에 흥분한 하이메 1세는 그해 9월 바르셀로나에서 조직된 함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많은 배가 흩어졌고, 그는 몽펠리에 인근의 에그모르트 항으로 피신했다. 다만 하이메 1세의 사생아 페드로 산체스가 11척의 배는 시리아의 기독교 항구도시인 아크레에 도착했다. 이후 아크레를 포위 공격한 바이바르스에 맞서 싸워 아크레를 지켜내는 데 일조한 뒤 시칠리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이메 1세는 1274년 5월 7일부터 7월 17일까지 프랑스 리옹 대성당 에서 열린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 공의회가 6년 동안 기독교계의 모든 이익의 10분의 1을 십자군에 사용하는 안건을 내걸자, 그는 즉시 시행하자며 찬성 의사를 표명했지만, 다른 참석자들이 머뭇거리면서 결론이 나지 않자 아래의 말을 남긴 뒤 교황과 작별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Barons, anar nos ne podem que huy es honrada alle España"
"남작들이여, 우리는 스페인에서 명예롭게 도망칠 수 없다."

1275년, 카르도나의 라몬 폴크 5세, 로카베르티의 조프레 3세, 팔라르소비라의 아르나우 로제 1세, 에스푸리의 위그 5세 등 카탈루냐 귀족들이 아르탈 데 루나, 페리즈 데 리차나, 페레 코르넬, 시메노 도레아 등 아라곤 귀족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하이메 1세의 사생아인 카스트로 남작 페르난도 산체스를 지도자로 받들었다. 페르난도 산체스는 아크레에서 바이바르스를 상대로 상당한 용맹을 떨쳤으나, 하이메 1세에게 반항하는 귀족들 편을 자주 들었고, 만프레디를 제압하고 시칠리아를 장악한 카를루 1세와 접촉해 병력과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러다가 하이메 1세의 장자인 페드로가 자신과 귀족들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고발하면서 하이메 1세로부터 출두 명령이 내려지자, 이대로 끌려가서 죽음을 맞이하느니 저항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는 즉시 토벌군을 이끌고 산치스를 격파한 뒤 1275년 6월에 포마르 드 싱카( Pomar de Cinca) 성에 가둬놓고 공성전을 벌였다. 성이 곧 함락되려 하자, 산치스는 양치기로 변장한 뒤 탈출을 시도했지만 싱카 강을 건너려던 중 체포되었다. 페드로는 이복 형제를 강에 던져 익사시키라고 명령했다.

1276년, 발렌시아 사라센들이 알 아즈라크의 지휘하에 아라곤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발렌시아 전역을 초토화했다. 사라센들은 여세를 이어가 루첸트(Llutxent)를 파괴한 뒤 알바이다 계곡을 통과하여 바르셀로나로 진격했다. 이렇듯 상황이 위급해지자, 하이메 1세가 이를 토벌하고자 출진했지만 알지라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국왕에서 물러난 뒤 포블레 수도원으로 은퇴하려 했으나 그해 7월 27일에 사망했다. 이후 아라곤 본토와 발렌시아, 카탈루냐는 1276년 11월 사라고사에서 페드로 3세로 즉위한 페드로에게 돌아갔고, 마요르카와 피레네 산맥 너머의 카탈루냐 영역은 페드로 3세의 친동생인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아갔다.

하이메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페드로 3세는 즉위 직후 아라곤 왕국으로 쳐들어온 사라센들을 격파하고 발렌시아로 진격해 1277년 반란군이 농성하던 몬테사 시를 정복해 발렌시아 반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사라센 봉기로 인해 발렌시아가 황폐해지면서 국고가 큰 손실을 입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귀족들의 동의를 얻지 않고 카탈루냐에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에 카탈루냐 귀족들이 분노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 3세는 발렌시아와 카탈루냐의 충성스러운 귀족들을 소집한 뒤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전쟁은 3년간 이어지다가 1280년 반란군의 최후의 근거지인 발라게르를 공략하면서 페드로 3세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귀족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뒤, 페드로 3세는 바르셀리나 왕실 조선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 조선소는 모서리에 4개의 탑이 있는 직사각형 평면의 큰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로 구성되었는데, 이중 2개의 탑이 현존한다. 그는 이 조선소를 통해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여 장차 지중해에 영향력을 행사할 야망을 품었다. 특히 시칠리아가 그의 주요 목표였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멸족시킨 카를루 1세에게 원한을 품은 왕비 쿠스탄차는 남편에게 시칠리아를 도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카를루 1세에게 축출된 인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시칠리아 원정을 은밀히 준비했다.

페드로 3세는 먼저 시칠리아로 갈 때 왕국에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 국가들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1279년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와 페르피냥 조약을 맺음으로써, 그가 자신을 주권자로 받드는 선에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도록 허용했다. 여기에 1281년 알폰소 10세의 후계자 산초와 아그레다 조약을 맺음으로써 양국간의 동맹을 더욱 굳건히 했으며, 포르투갈 왕국 디니스 1세와 자신의 딸인 아라곤의 이사벨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려는 카를루 1세에게 위협을 느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제공받고, 이를 통해 함대를 건조하고 용병을 끌어모았다.

1282년 초, 사라센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튀니지로 출진했다. 그 후 그곳에 정박하면서 시칠리아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해 3월 말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발발하면서 시칠리아 전역이 카를루 1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시칠리아 귀족들은 처음엔 아라곤 왕을 주군으로 섬기는 것에 마뜩치 않아 했다. 그들은 오직 교황만이 자신들을 이끌 수 있다며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충실한 동맹자인 카를루 1세와 갈라설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그들은 카를루 1세의 보복을 두려워한 끝에 튀니지 해안에 주둔 중이던 페드로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자, 페드로 3세는 곧바로 시칠리아로 진군해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이후 팔레르모에 입성해 9월 4일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카를루 1세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시칠리아로 진격해 메시나를 포위했으나, 페드로 3세가 이미 시칠리아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폴리로 퇴각했다. 이후 카를루 1세는 교황청에 "이단인 정교회를 토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십자군을 저지한 아라곤 왕을 정죄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티노 4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선포했다. 카를루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도 이에 호응해 아라곤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페드로 3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 길렘 갈세란 데 카르텔라(Guillem Galceran de Cartellà)를 알모가바르 보병, 석궁병, 창병으로 구성된 육군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를 선임했다. 두 장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세를 개시해 1283년 2월 칼라브리아 해안 지대의 대다수 도시를 장악했다. 이에 카를루 1세는 피에르에게 " 결투로 분쟁을 해결하자"고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페드로는 이를 받아들이고, 양자는 6월 1일 보르도에서 100명의 기사를 대동한 채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또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결투를 중재하기로 했다. 페드로는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공동 여왕인 쿠스탄차 2세에게 시칠리아를 맡긴 뒤 아라곤으로 돌아간 후 변장한 채 보르도로 잠입했다. 그러나 결투는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고, 페드로는 아라곤으로 귀환했다.

한편 시칠리아와의 전쟁을 앞둔 1282년 타라조나와 사라고사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아라곤 왕국 또한 신분제 의회 형식의 코르테스를 공식화시키고 일반 특권(Privilegio General)이란 명칭으로 특권을 부여받고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한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칼라브리아 해안지대를 공략한 뒤 몰타를 공략하고 몰타 인근의 앙주-프랑스 연합 함대를 섬멸했다. 이후 1384년 나폴리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앙주 해군 전체를 격멸하고 42척의 적선을 포획했으며,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를 생포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를로를 처형하자고 주장했지만, 쿠스탄차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쿠스탄차가 베아트리체 외의 다른 형제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은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확실하지만, 그들이 돌아오면 남편의 시칠리아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에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베아트리체가 돌려보내졌지만, 카를로 왕자는 1285년 카를루 1세가 사망한 뒤 몸값이 지불되지 않았기에 옥고를 계속 치러야 했다.

한편,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를 파문하면서 아라곤 왕위를 필리프 3세의 형제인 발루아 백작 샤를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다. 샤를은 즉시 군대를 소집해 아라곤으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했다. 여기에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가 프랑스에 가담하면서, 프랑스군이 발레아레스 제도와 루시용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게 했다. 1284년,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와 샤를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루시용에 입성했다. 이후 지역 주민들의 거센 저항을 무릅쓰고 그 일대를 약탈한 그들은 12185년 지로나를 포위 공격해 아라곤군의 거센 저항을 물리치고 지로나를 공략했다. 샤를은 그 곳에서 임시로 제작된 아라곤 왕관을 썼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선에서 스페인으로 달려온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가 프랑스 함대를 습격해 레 포르미게 해전에서 섬멸했다. 여기에 프랑스 진영에서 이질이 유행하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갔고, 필리프 3세 역시 병마에 시달렸다.

결국 필리프 3세와 샤를은 철수를 결심하고 페드로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얌전히 돌아갈 테니 피레네 산맥을 통과하는 길목을 내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페드로 3세는 단호히 거부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콜 드 파니사르 전투에서 대파했다. 필리프 3세는 자기를 쫓아오는 페드로 3세를 피해 마요르카의 페르피냥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한 뒤 나르본에 묻혔다.

1285년 11월, 페드로 3세는 프랑스와 손잡은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하다가 급병에 걸리자 빌라프란카 델 페네데스의 별궁에 실려갔다. 임종을 눈앞에 두자, 포로로 잡힌 모든 프랑스인을 석방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이 시칠리아를 공략한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십자군을 막으려 한 게 아니라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였다며 교황청에 사면을 요청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11월 11일 성 마르틴 축일에 사망했다. 2010년에 발굴된 그의 유해에 대한 법의학 연구에 따르면, 사인은 폐질환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와 대적한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와 교황 마르티노 4세 역시 같은 해에 사망했다. 마르티노 4세 이후 신임 교황에 오른 호노리오 4세는 페드로 3세를 사면했다.

페드로 3세는 아버지 하이메 1세가 그랬던 것처럼 왕국을 아들들에게 나누었다. 아라곤을 장남 알폰소 3세에게, 시칠리아를 차남 하이메 2세에게 물려줬다. 마요르카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귀환하던 알폰소 3세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1286년 2월 2일 발렌시아에 도착해 아라곤 국왕으로서 즉위식을 거행했고, 남동생 하이메 2세를 시칠리아 총독으로 삼았다. 이후 1231년 하이메 1세에게 굴복해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자치를 인정받았던 메노르카 토후국을 공략하기 위한 원정대를 준비했다. 1286년 10월 18일 우에스카에서 회의를 소집해 메노르카 토후국이 겉으로는 봉신으로 굴고 있지만 실제로는 카탈루냐 해안가를 끈질기게 습격하는 무슬림 해적들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들을 응징하겠다고 선포했다.

1286년 11월 21일 2만 병력과 100척 이상의 카탈루냐, 아라곤, 시칠리아 선박을 이끌고 마요르카에서 출발한 원정대는 1287년 1월 5일 마혼 항구에 도착했다. 무슬림들은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린 끝에 센트 아가이즈 성으로 후퇴한 뒤 며칠간 공격당한 끝에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고 요청했다. 1월 20일, 섬의 주민들은 아라곤 국왕의 백성이 되어야 하며 6개월 동안 정해진 금화를 납부하지 못하면 옷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압수당한다는 내용의 센트 아가이즈 협약에 체결되었다. 납부할 능력이 없는 자들은 트리폴리 등 북아프리카의 노예 시장에 노예로 팔렸다.

메노르카의 지도자 아부 우마르는 아버지 사이드 이븐 하킴의 유골과 200명의 친척, 50개의 검과 서적들을 가지고 모로코로 떠났다. 메노르카 영지는 귀족들에게 분배되었고, 카탈루냐, 발렌시아, 아라곤 등지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또한 시우다델라의 오래된 모스크 위에 대성당 건설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건설된 시우타데야 데 메노르카 대성당은 그가 사망한 후인 130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알폰소 3세는 북아프리카와 동방에도 눈독을 들였다. 1286년 틀렘센의 술탄을 가신으로 삼았고 모로코의 술탄과 동맹을 맺어 튀니스 술탄을 압박했다. 1290년에는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와 무역 협약을 체결하여 알폰소 3세가 지배하는 영토에 거주하는 상인들이 동로마 제국과 자유롭게 무역하는 대가로 3%의 세율을 납부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3세는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가 지난날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는 아라곤 왕국을 돕겠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에 불신을 품고 반 카스티야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1288년 9월 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손자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으로 옹립해 산초 4세에 대적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수차례 벌어졌지만 큰 전쟁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알폰소 3세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확보한 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교황령, 프랑스 왕국의 공세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3국과의 전쟁으로 소모되는 전쟁 비용이 과도해지는데다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여파로 성직자들과의 갈등도 생기자, 그는 전쟁을 조속히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시칠리아에 포로로 잡혀 있던 나폴리 왕국의 국왕 카를로 2세를 1289년에 석방시키는 대가로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양도받기로 했고, 나폴리로 돌아온 카를로 2세 역시 약속을 이행하려 했지만, 교황 니콜라오 4세는 파문당한 자와 약속한 것은 무효라며 석방을 위해 맺었던 약속을 준수할 의무를 면제하고 시칠리아를 한시바삐 정벌하라고 독촉했다.

이후 알폰소 3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요청에 따라 카를로 2세 대신 인질로 잡았던 카를로 마르텔 왕자를 카를로 2세의 다섯번째 아들 레몽 베렝가르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이후 알폰소 3세와 카를로 2세간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에드워드 1세는 일전에 맺은 평화 협약을 준수하라고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니콜라오 4세는 아라곤과 나폴리 왕국의 화해를 막기 위해 2명의 추기경을 보냈지만, 두 왕은 교황보다는 에드워드 1세 쪽을 따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2년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이후 프랑스, 나폴리 왕국, 아라곤 왕국, 교황의 사절단은 페르피냥에서 잉글래드 대표단의 중재하에 협상을 벌였다.

1291년 2월,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그리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브리뇽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의 파문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은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았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게 더 이상 군사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교황청은 알폰소 3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약속하자 조약을 승인했다. 이에 시칠리아 귀족들이 반발했고,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하이메 2세 역시 시칠리아를 내줄 수 없다며 버텼다.

1291년 6월 15일, 이집트로의 원정을 준비하던 알폰소 3세는 갑작스러운 경색증으로 쓰러졌고 사흘 만인 6월 18일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딸인 엘레오노르와 약혼했지만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사망해서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라곤, 발렌시아, 마요르카 왕국과 카탈루냐 백작령을 하이메 2세에게 물려주고 또다른 동생인 페데리코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양도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하이메 2세는 즉각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해 7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위를 동생인 페데리코에게 물려주라는 형의 유언을 무시하고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위를 겸임했다. 페데리코는 그저 총독 자격으로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해야 했다. 또한 일전에 프랑스와 손잡고 페드로 3세에 대항했다가 알폰소 3세에게 축출된 후 앙주에 피난가 있던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발레아레스 제도를 넘긴다고 합의했던 브리뇽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필수적인 영토이니 절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는 하이메 2세를 재차 파문했고 전쟁이 재개되었다.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 사이, 카를로 2세는 1293년 말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중재를 통해 아라곤 궁정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들을 보내주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1294년 오랜 공백기 끝에 비로소 선출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카를로 2세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고, 뒤이어 선출된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하이메 2세와의 평화 협약을 지지했다.

그 결과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앙주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5. 팜플로나 왕국 ⇒ 나바라 왕국

5.1. 11세기

1000년 7월 29일 카베라 전투에서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체스, 살다냐의 가르시아 고메스 백작과 함께 알 만수르에 대적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의 아들 안초 3세가 처음으로 왕으로 언급되는 1004년까지의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그가 카베라 전투의 여파로 사망했고 사촌인 비구에라 왕 산초 라미레스가 팜플로나를 이끌었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부족하다.

안초 3세가 즉위할 당시 팜플로나 왕국은 알 하지브 알 만수르의 연이은 침략으로 인해 후우마이야 왕조의 봉신으로 전락하여 코르도바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1002년 알 만수르가 사망한 후 후우마이야 왕조가 내란에 휩쓸리면서 기독교 국가들을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자, 안초 3세는 이 때를 틈타 기독교 국가들을 통합하기 위한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 1010년경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딸 무니아도나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백국과 연합했고, 1015년 무슬림들을 소브라베 주에서 밀어내고 그 땅을 점거했다. 1017년 2월 5일 장인이 사망한 뒤 카스티야 백작에 오른 가르시아 산체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1018년 초 리바고르자 백작 기예르모 이사네스(Guillermo Isárnez)가 발 다란(Val d'Aran)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공세를 벌이던 중 암살당했다. 당시 리바고르자는 1010년 기예르모 이사네스와 필라르 백작 레이몽 3세, 그리고 레이몽 3세의 아내인 카스티야의 마요르 가르체아 사이에 분할되어 있었다. 레이몽 3세가 기예르모의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아 리바고르자 백작을 자처했지만, 안초 3세는 자신 역시 리바르고자 백국의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동원해 레이몽 3세를 축출하고 그 땅을 점거했다. 이들간의 분쟁은 1025년 안초 3세가 레이몽 3세의 주군이 되고, 마요르 가르체아는 레이몽 3세와 결혼을 무효화한 뒤 수도원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리바르고자로의 귀환을 허용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1029년,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가 레온 국왕 알폰수 5세의 딸인 산차와 약혼한 뒤 결혼식을 치르러 레온으로 향했다가 카스티야에서 추방됐던 귀족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초 3세는 즉시 카스티야 백작령을 점거한 뒤 자신의 아들이자 죽은 백작의 조카인 페르난도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세워서 카스티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했다. 이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의 바로 위에 있는 차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국경 지대를 점령하고, [11] 전임 백작을 살해한 레온 왕국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레온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레온 국왕 베르무두 3세는 자신의 누이인 산차와 안초 3세의 아들 페르난도의 결혼을 주선하고 안초 3세가 빼앗아간 영토를 '지참금'으로 가지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안초 3세는 얼마 안가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고, 1034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과 사모라, 아스토르가 등을 함락시키고 베르무두 3세를 갈리시아로 축출한 뒤 스스로 레온 국왕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팜플로나 왕국은 서쪽의 갈리시아 국경에서 동쪽의 바르셀로나까지 이어지는 이베리아 반도 내 기독교 국가들을 통합했다.

한편, 그는 내치에도 힘을 기울였다. 프랑스에서 전래된 봉건제를 이베리아 반도에 도입했으며, 통치 체제를 프랑스 식으로 재편하고 여러 도시를 육성하고 길을 닦았으며,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장에 클뤼니 수도원의 방식을 익힌 수도사 파테르노를 앉힘으로써 서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클뤼니 수도원 개혁을 팜플로나 왕국에 그대로 실시하게 했다. 이렇듯 팜플로나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안초 3세는 1034년 자신을 '히스파니아의 렉스(Hispaniarum rex)'라고 명시한 동전을 주조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1035년 10월 18일에 사망했고, 산 살바도르 데 오냐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망은 이후 팜플로나 왕국의 약소국화로 이어지게 된다.

팜플로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안초 3세가 사망한 뒤, 그가 생전에 확보한 영토는 자식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는 팜플로냐 국왕이 되었고, 라리오하, 부레바, 아라바, 비스카야 등지가 가르체아 3세의 영지로 편입되었다. 아라곤 백작위는 이복형제 라미로 사노이츠의 것이 되었으며, 안초 1세의 차남 페르난도 사노이츠는 카스티야 백작을 맡았으며, 삼남 온잘루 사노이츠는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이 되었다. 1037년 안초 3세에게 축출된 뒤 갈리시아에 망명했던 베르무두 3세가 왕국을 되찾기 위해 쳐들어오자, 가르체아 3세는 페르난도 사노이츠와 함께 이에 맞서 싸워 1037년 9월 4일 타마론 전투에서 베르무두 3세를 전사시켰다. 페르난도 사노이츠는 곧바로 레온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1세가 되었다.

1043년, 라미로는 자신이 가진 영역을 확장하거나 이복형 가르체아 3세가 소유한 팜플로냐 왕위를 빼앗을 의도를 품고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등 무슬림 토후국들과 함께 팜플로냐로 쳐들어갔다. 가르체아 3세는 페르난도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했다. 양측은 타팔라에서 맞붙었고, 가르체아 3세-페르난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가르체아 3세는 수많은 무기와 보급물자를 노획했는데, 그 중 라미로가 타고 다녔던 검은 말을 노획해 자신에게 바친 알페레스(alférez: 중세 이베리아의 왕실 고위 관리) 오르티 사노이츠에게 오로비아 마을을 하사했다.가르체아 3세는 토레타와 바랑켈에 승리를 기념하는 큰 바위를 세웠다. 이후 가르체아 3세와 라미로는 무니아도나의 중재하에 화해했고, 때마침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 온잘루 사노이츠가 사망하자 라미로가 그 땅을 물려받게 했다.

1045년 칼라호라를 공략한 뒤 나이아라 데 리오하에 안드레 마리아 수도원 건설을 명령하고, 왕실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겼다. 1054년경 병환에 시달리던 가르체아 3세는 자기가 죽으면 페르난도가 자신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팜플로나 왕국을 삼키려 들 거라 예상하고, 병문안을 하러 온 페르난도를 체포해 카에 성에 가두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간수를 매수해 극적으로 탈출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가르체아 3세가 무슬림들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하자, 아라곤 백작 라미로 사노이츠와 함께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양군은 아타푸에르카 계곡에서 맞붙었는데, 전투 도중에 가르체아 3세가 전사했다. 다만 팜플로나군은 해질 무렵까지 전투 대열을 유지했고, 왕의 시신을 수습한 뒤 팜플로나로 이송하여 안장했다.

가르체아 3세 사후 왕위에 오른 안초 4세는 18살 때까지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고, 어머니가 1058년 사망한 후 친정을 시작했다. 당시 팜플로나 왕국의 서쪽에 있던 많은 영주들이 카스티야와 레온의 군주 페르난도 1세에게 귀순하자, 아라곤 왕을 칭한 라미로 1세와 동맹을 맺고 페르난도 1세와 대립했다. 그러다가 1062년 12월 29일, 안초 4세와 페르난도 1세는 그들의 국경을 확정짓는 조약에 서명했다. 페르난도 1세는 카스티야의 단독 군주로 인정받았고, 안초 4세는 리오하, 알라바, 비스케이 등지를 돌려받았다.

1063년, 아라곤 국왕 라미로 1세가 사라고사 토후국의 전진기지인 그라우스를 포위 공격하다가 사라고사 토후국에 고용된 용병대장 엘 시드의 역습을 받고 전사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유럽 각국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을 돕기 위해 원조를 보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67년 레온과 카스티야의 산초 2세가 팜플로나 왕국 국경지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팜플로나를 위협하자, 안초 4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이에 산초 라미레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면서, 이른바 "세 명의 산초 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 엘 시드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안초 4세는 부레바, 알타 리오하, 알라바 일대를 카스티야에 넘겨줘야 했다.

1076년 6월 4일, 안초 4세는 나바라 마을 인근의 페날렌에서 사냥하던 중 형제 라몬 가르세이츠가 고용한 암살자가 내지른 단검에 찔려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라몬 가르세이츠는 팜플로나 왕국의 새 국왕이 되려 했지만, 귀족들이 형제를 살해한 그를 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하자 사라고사 궁정으로 도주했다. 이후 레온-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가 비즈카이아, 기푸스코아 등 여러 영토를 빼앗아갔고,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가 팜플로나의 왕위를 겸임했다.

이후 팜플로나 왕국은 산초 라미레스, 페드로 1세, 알폰소 1세 등 아라곤 국왕들의 통치를 받았다. 12세기 중반까지 받는다.

5.2. 12세기

아라곤 왕들의 나라바 지배는 1134년 9월 7일, 알폰소 1세가 무슬림과의 전쟁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하면서 끝을 맺게 되는데, 알폰소 1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왕국을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성묘 기사단에 양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들은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아라곤 귀족들은 알폰소 1세의 동생이며 수도 생활을 하던 라미로를 속세로 꺼내 아라곤 국왕 라미로 2세로 추대했다. 팜플로나 귀족들은 처음에는 아라곤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아타레스 가문의 일원인 페드로 데 아타레스를 왕으로 추대하려했지만, 그가 무척 거만한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들을 깔보자 마음을 바꿔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팜플로나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68년만에 갈라섰다.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팜플로나 왕위에 오른 가르체아 라미리츠는 이에 반발한 아라곤 국왕 라미로 2세이 침공을 준비하자 사절을 보내 화해를 신청했고, 1135년 1월 라미로 2세가 받아들이면서 바둘루엥고 조약이 체결되었다. 가르체아는 아라곤 왕국이 팜플로나 왕국의 주권자임을 인정하며 라미로를 아버지로 모시기로 했고, 라미로 2세는 그가 팜플로나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르체아는 1135년 7월에 입장을 바꿔 자신이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의 봉신이라고 선언하고 알폰소 7세의 보호를 받았다. 알폰소 7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가르체아에게 사라고사를 봉토로 내줬다. 그러나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 레이몬드 베렝가르가 사라고사를 가로채면서, 팜플로나 왕국의 사라고사 통치는 1년만에 종식되었다.

1137년, 가르체아 라미리츠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와 동맹을 맺고 알폰소 7세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1139년에서 1140년 사이에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카스티야와 동맹을 맺고 1147년 카스티야 왕국이 알메리아를 정복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1146년에는 아라곤에 속한 타우스테를 공략했고, 알폰소 7세의 중재하에 아라곤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150년 11월 21일 데예리에서 사망했고 팜플로나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가르체아 라미리츠 사후 안초 6세가 팜플로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나바라 왕국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팜플로나 왕국의 이웃 국가들인 아라곤 왕국과 레온-카스티야 왕국은 자기들을 상대로 봉신을 자처하다가 전쟁을 일으켜서 이득을 챙긴 뒤 화해하는 식으로 일관하는 팜플로나 왕국을 불신했다.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7세와 아라곤에서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여왕 페트로닐라의 남편으로서 왕권을 행사하던 라몬 베렝게르 4세는 1151년 1월 27일 투딜렌 협약을 체결해 나바라 왕국의 영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두 강대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안초 5세는 투딜렌 협약을 따르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이후 안초 6세는 자신의 여동생 블랑카를 알폰소 7세의 장남인 산초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소 7세의 호의를 얻어내려 애썼다. 1153년 중반에는 소리아에서 알폰소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봉신 협약을 갱신했으며, 1157년 6월 2일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현재 팔렌시아)에서 알폰소 7세의 딸 산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7세는 1157년 중순에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맺었다. 안초 6세에겐 다행히도, 알폰소 7세가 레리다 협약을 이행하기 전인 1157년 8월 2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레리다 협약 집행이 미뤄졌다.

이후 알폰소 7세의 아들 산초 3세가 레온-카스티야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으나, 1158년 8월 3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관이 갓난아기였던 알폰소 8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섭정을 놓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서, 레온-카스티야 왕국은 나바라 왕국에 더는 신경쓰지 못했다. 여기에 1162년 8월 8일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사망한 후 홀로 통치를 이어가던 페트로닐라 여왕이 1164년에 7살된 아들 알폰소 2세에게 양위하면서, 아라곤 왕국 역시 나바라 왕국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졌다.

안초 6세는 이 때를 틈타 세력 재건에 착수했다. 우선 아라곤 왕의 섭정을 맡은 인사들과 13년간의 휴전을 체결했다. 이후 'Pampilonensium Rex(팜플로니아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더 이상 쓰지 않고 'Rex Navarre(나바라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때부터 '팜플로나 왕국'이란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왕국의 명칭은 '나바라 왕국'으로 굳어졌다.

1162년 가을, 안초 6세는 카스티야를 침공해 라리오하 지역 일부를 공략했다. 1163년에는 무와히드 왕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무르시야의 타이파 무함마드 이븐 마르다니스(Muhámmad ibn Mardanix)[12]를 지원함으로써 무슬림의 공세를 받을 위험성을 줄였다. 1165년 1월 28일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레온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투델라 협약을 체결해 빼앗겼던 영토를 돌려받았고, 1167년 10월에는 카스티야와 휴전을 맺었으며, 1168년 12월 19일 아라곤의 알폰소 2세와 만나 무슬림으로부터 정복한 땅을 분할하기로 했다.

1170년 6월 카스티아 국왕 알폰소 8세와 아라곤 왕 알폰소 2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중재로 사하군에서 어떠한 적을 만나든지 서로 힘을 합치기로 합의하고 과거에 알폰소 7세와 라몬 베렝게르 4세가 맺었던 투딜렌 협약을 재차 비준했으며,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알폰소 8세의 고모인 산차와 알폰소 2세의 결혼을 주선하기로 했다. 여기에 헨리 2세는 자신의 딸인 엘레오노르를 알폰소 8세에게 시집 보내기로 했다. 이로 인해 나바라 왕국은 또다시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에 포위된 형세에 몰렸고, 여기에 잉글랜드까지 두 나라에 도움을 줬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버거워졌다. 나바라 왕국의 일부 귀족들은 대세가 떠났다고 여기고 아라곤이나 카스티야 왕국에 귀순했다.

하지만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 내부사정과 무슬림과의 전쟁으로 인해 나바라 왕국에 큰 압박을 가하지 못했고,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던 안초 6세는 1173년 카스티야를 공격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뒤 알마잔에서 빼앗은 영토를 귀족들에게 분배했다. 그러나 1174년 봄,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군대가 나바라 왕국을 합동으로 공격했다. 그해 7월 아라곤 왕 알폰소 2세는 밀라그로 성을 공략하고 파괴했으며,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군을 격파한 뒤 안초 6세가 있던 르귄 성을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다. 안초 6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산골짜기로 도주했고, 양군은 나바라 각지를 파괴한 뒤 철수했다.

1175년 여름 아라곤과 카스티야 연합군이 재차 나바라를 침공해 타격을 입히고 돌아갔고, 1176년 여름엔 카스티야군이 쳐들어와 르귄 성을 재차 공략했다. 이에 안초 6세는 그해 8월 25일 알폰소 8세와 7년간의 휴전 협약을 맺은 뒤 영국 국왕 헨리 2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1177년 3월 16일, 알폰소 8세와 안초 6세는 헨리 2세의 중재에 따라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두 나라는 1158년의 국경으로 돌아가야 했다. 안초 6세는 로그로뇨, 나바레테, 엔트레나, 아우세호를 반환해야 했고, 알폰소 8세는 레귄 등 여러 성을 복구하기로 했다. 또한 알폰소 8세는 안초 6세에게 10년간 매년 3,000 마라베디를 보상금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1179년 4월 15일, 안초 6세와 알폰소 8세는 나헤라와 로그로뇨 사이의 지점에서 만나 국경을 명확하게 정의해 영토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도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때 나바라 왕국은 더이상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이 되지 않고 오로지 아라곤 왕국에 복종하겠다는 문구가 협약서에 삽입되었다. 이후 두 나라는 서로에게 빼앗았던 영토를 상호 반환했다.

안초 6세는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간의 분쟁을 종식한 뒤 내치를 다지는 데 힘을 기울였다. 세금 징수를 개선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으며, 여러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고 무역을 장려했다. 1190년 9월 7일에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와 보르하에서 맞아 상호 우호 및 원조 협정에 체결했다. 두 왕은 1191년 7월에 타라조나에서 다시 만나 서로간의 우정을 재확인했다. 또한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에 대항하는 우에스카 동맹(아라곤의 알폰소 2세, 레온의 알폰수 9세, 포르투갈의 산슈 1세)에 가입하라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1192년 아라곤 왕국과 함께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한편, 안초 6세는 푸아티에 백작을 맡고 있던 리처드 왕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리처드는 1186년 아라곤 왕 알폰소 2세와 안초 6세의 분쟁을 조정해준 적이 있었는데, 안초 6세는 이때부터 그를 눈여겨봤던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의 어머니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을 촉발했다는 잉유로 유폐되었을 때, 그는 산차 왕비와 함께 엘레오노르의 석방을 요청했다. 1190년 2월 잉글랜드 왕이 된 뒤 나바라 왕국 국경 근처까지 영지를 순회하던 리처드 1세는 안초 6세와 서신을 주고받은 끝에 그의 딸인 나바라의 베렝겔라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처드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하면서 베렝겔라를 함께 데려가기로 마음먹고 리처드의 모후 엘레오노르를 나바라를 방문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베렝겔라를 데려오게 했다. 베렝겔라는 결혼을 위해 시어머니가 될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도착한 뒤, 리처드 1세의 누이이자 서거한 시칠리아 선왕의 왕비였던 조안과 함께 지중해를 항해하는 리처드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폭풍우를 만나 베렝겔라와 조안이 탄 배가 키프로스에 표류했는데, 키프로스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납치되었다. 리처드 1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키프로스를 공격해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를 체포하고 베렝겔라를 구출한 뒤 1191년 5월 12일 비로소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후 나바라 왕국은 푸아티에 백국의 후원을 받았다.

1194년 6월 27일, 안초 6세는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바라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 우에스카 동맹을 탈퇴하고 카스티야 왕국과 화해했다. 1195년 가을 무와히드 왕조의 침략에 직면한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이, 알폰소 8세의 카스티야군은 레온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알라르코스 전투를 감행했다가 무와히드 왕조군에게 완패했다. 알폰소 8세는 나바라 왕국군이 제때 오지 않아서 패배했다며 책임을 그에게 떠넘겼다. 이에 격분한 안초 7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동맹을 맺은 뒤 카스티야 왕국을 공격해 소리아와 알마잔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알폰소 8세는 앞선 전투의 참화로 인해 대응할 여력이 없었기에 상당한 배상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나바라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19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라르코스 전투 소식을 듣고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레온, 아라곤, 카스티야, 그리고 나바라 왕국에 특사를 보내 하나로 뭉쳐서 무슬림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다. 이에 국왕들은 타라조나 인근에 모여서 통합 논의를 했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너무 커서 무산되었다.

1198년 알라르코스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야쿱 알 만수르가 안초 7세에게 마그레브로 와서 자신을 도우라고 권고하자, 안초 7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직접 마그레브로 향했다.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는 칼라타유드에서 만나서 안초 7세가 없는 사이에 나바라 왕국을 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알폰소 8세는 1199년 가스테이스(현재 스페인 바스크 지방 알라바 주의 주도 비토리아)를 포위 공격해왔다. 당시 안초 7세는 자신의 누이인 베렝겔라를 리처드와 결혼시킬 때 리처드에게 군사적 원조를 하겠다는 약조를 했으나 1196년 봄에 남프랑스 자작들로부터 리처드 1세와 전쟁을 벌일 때 지원을 해주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낼 정도로 리처드 1세를 적대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리처드는 자신을 도와달라는 안초 7세의 호소를 무시했다.

5.3. 13세기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은 1200년 1월까지 알라바, 두랑갈데와가, 기푸스코아 지방을 빼앗았다. 안초 7세는 마그레브에서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듣고 급히 귀국했지만, 무와히드 왕조가 내전에 시달리던 중이어서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기에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을 상대로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1202년, 리처드 1세는 돌연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에 평화와 상호 협력을 위한 협약을 맺으라고 권고했다. 안초 7세는 리처드 1세가 제시한 협약서에 서명했고, 1207년 10월 29일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카스티야 왕국이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그대로 인정받는 대신 더 이상 나바라 왕국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과달라하라 협약을 맺었다.

1212년 교황청의 강한 압력을 받은 안초 7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맺었던 동맹을 해지하고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레온 왕국, 성전 기사단이 연합한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무와히드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의 천막을 보호하는 쇠사슬을 끊는 등 상당히 활약했다. 이후 아버지가 시작한 팜플로나 대성당 건설을 마무리짓고 투델라의 에브로 강 위에 고딕 양식의 다리를 건설했으며, 인구 조사를 실시해 세금을 보다 많이 거둬들이려 노력하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툴루즈 백작 레이몽 6세의 딸 콩스탕스였다. 1200년 콩스탕스와 이혼한 그는 새 아내를 맞이했다. 그가 맞이한 두번째 여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일부 문헌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딸 클레망스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문헌에서는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유수프 2세의 딸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두 아내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러다 오른쪽 다리에 정맥류 궤양이 생긴 이래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비만이 심해지자, 그는 이를 부끄러워 해 투델라에 은거했고, 여동생 블랑슈가 샹파뉴에서 와서 1229년 사망할 때까지 나바라 왕국의 행정을 맡았다. 또한 큰 누나 베렝겔라는 1230년에 사망했고, 안초 7세는 1234년 4월 7일 투델라에서 궤양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히메네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상파뉴 백작 티보 3세와 블랑슈의 아들이자 안초 7세의 유일한 조카였던 티발트 1세가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나바라 왕국의 블루아 왕조를 개창한 티발트 1세는 국정을 샹파뉴 귀족들에게 맡기고 나바라를 4개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프랑스식 법률과 나바라 왕국 고유의 전통을 조합한 성문법을 기획했다. 또한 딸 블랑슈를 카스티야 왕자 알폰소(미래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약혼시켰지만 결혼이 성사되지 않자 브르타뉴 공작 장 1세와 결혼시켰다.

1239년 프리드리히 2세의 제6차 십자군 원정으로 탈환했던 예루살렘 왕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출진한 '귀족 십자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에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 몽포르 공작 아모리 6세, 프랑스 궁재 로베르 드 코트네,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가 참가했으며, 기게스 4세 드 포레즈, 앙리 2세 드 바르, 루이 드 산체르, 잔 드 브라네 드 마콘, 기욤 드 조그니, 앙리 드 그랑프레 등 하급 귀족들도 대거 참여했다. 티발트 1세는 1,500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1239년 8월에 프랑스를 떠났고, 9월 1일 아크레에 도착한 뒤 현지의 기독교 인사들과 접촉했다. 이후 아크레에서 아내에게 보낼 시를 짓는데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과 함께 온 귀족들에게 예루살렘 원정을 맡겼다.

귀족 십자군은 무슬림군을 몇 차례 격파하고 아스칼론과 예루살렘 인근 내륙 지대를 공략하는 등 상당히 선전했지만, 1239년 11월 13일 가자 전투에서 룩 알단 알 히자위가 이끄는 아이유브 왕조군과 맞붙었다가 앙리 2세가 전사하고 아모리 6세가 포로로 잡혔으며 수백 명의 병사들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트란스요르단의 지배자 앗 나시르 도우드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략했다. 이후 티발트는 아이유브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고 콘월의 리처드가 새 병력을 이끌고 현지에 도착하기 직전인 1240년 말에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갔다.

나바라 왕국에 돌아간 후, 티발트 1세는 팜플로나와 트루아를 오가며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러나 1242년 팜플로나 주교로 선출된 페드로 히메네스 데 가졸라스와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었다. 급기야 그로부터 교구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자, 주교는 아라곤 왕국의 나바둔으로 피신한 뒤 1250년 2월 25일 우에스카, 비흐, 레리다, 사라고사, 발렌시아 주교들을 불러들여서 공의회를 개최한 뒤 티발트 1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교황청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나바라 국왕을 파문할 수 없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티발트 1세는 이후에도 통치를 무탈하게 이어가다가 1253년 7월 8일 팜플로나에서 사망했고, 팜플로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장남 티발트 2세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14세 또는 15세로, 21세부터 통치가 가능하다고 규정한 나바라 법률 때문에 어머니 마르그리트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 12명의 배심원으로 구성된 귀족 위원회의 자문을 반드시 받아야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바라 왕국은 인근에서 영역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의 위협에 직면했다. 1254년 3월,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는 자신이 나바라의 국왕이라고 주장하며 에브로 강을 따라 군대를 집결시켜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했다. 티발트 2세는 이에 대응하여 투델라 성 인근에서 군대를 사열시켰다.

그러다 1254년 4월 5일 하이메 1세와 티발트 2세가 에브로 강변에서 대면하여 대화를 나눈 뒤 양국간의 긴장이 완화되었다. 티발트 2세는 나바라 왕국의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신 하이메 1세를 주권자로 섬기며, 아라곤 왕국이 전쟁을 벌일 때 병력을 반드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두 왕은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와 다시 만나 화해했고, 알폰소 10세는 하이메 1세를 나바라 왕국의 보호자로 인정했다.

1255년 4월 6일, 티발트 2세는 멜륀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복 누이 블랑슈의 남편이며 나바라 왕위를 요구하는 인물인 브르타뉴 공작 장 1세과 협상한 끝에, 장 1세가 나바라 왕관을 포기하게 하는 대가로 총 3,000 리브르를 지불했다. 1256년 1월 1일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딸 베렝겔라가 루이 9세의 아들 루이와 약혼했을 때, 카스티야 왕국은 푸엔테라비아와 산 세브스티안 항구 사용권을 나바라 왕국에 양도했다. 그 후 1257년 교회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고, 1259년 프랑스 방식으로 대관식을 치르면서 비로소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티발트 2세는 아버지가 시작한 세입 개선 사업을 이어갔다. 인구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해 총 15만 명의 인구가 나바라 왕국에 거주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티발트 2세는 장인인 루이 9세로부터 파리의 성 앙데르 데스 아르트 교구의 토지를 수여받고, 그곳에 '나바라 호텔'을 건설했다. 1258년에는 루쇠일 레 방(Luxeuil-les-Bains) 수도원의 수호자를 자처했다가 그 땅을 다스리던 바르 공작의 분노를 샀다. 바르 공작은 티발트 2세와 전쟁을 벌이려 했지만, 루이 9세가 이를 금지하자 중지했다. 1259년, 티발트 2세는 루이 9세가 주관한 엥게랑 드 쿠시의 재판에 참석했다. 이때 루이 9세는 왕실 사유지에서 토끼를 사냥하던 3명의 젊은 플랑드르 귀족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1260년, 바르 공자 장과 위그 드 샬롱이 티발트 2세가 가지고 있던 루쇠일 영지를 빼앗았다. 루이 9세는 부르고뉴 공작 외드에게 티발트 2세와 바르 공국의 중재를 요청했지만, 바르 공국 측이 루쇠일을 내놓기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리하여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해 6년간 이어졌으나 승패가 가려지지 않다가 1266년 12월 루이 9세의 중재로 휴전을 맺었다.

1267년, 리니의 영주 발레랑 드 룩셈부르크가 앞으로는 티발트 2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본래 리니 영지의 주권자였던 바르 공작 티보 2세가 본노해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드르 백작 기 드 담피에르, 메츠 주교와 함께 1267년 7월 5일 리니를 공략했다. 티발트 2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바르 공국을 침공해 슈와쇨을 황폐화했다. 이후 양자는 1267년 10월 루이 9세의 중재에 의해 화해했다. 티발트 2세는 리니의 주권자로 인정받았고, 바르 공국과 샹파뉴 백국은 프랑스 국왕에게 더 이상 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는 티발트 2세에게 6만 리브르를 바치고 5개 요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분개한 티발트 2세가 아라곤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후 양자는 곧 화해했고, 하이메 1세가 라틴 제국을 회복시키기 위한 원정에 착수할 때 티발트 1세가 라틴 제국 영토의 1/4를 미리 부여받았다. 1269년에는 루이 9세의 동생이자 앙주 공작 샤를이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카를루 1세를 자처한 뒤 혼란에 빠진 시칠리아를 진정시키는 일에 참여했다.

티발트 2세는 나바라 왕국의 부르주아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받아내는 대가로 그들에게 도시에서 자치를 행사하고 정책 결정에 관여할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 팜플로나의 푸에로스를 란츠로 확장했고, 에스텔라를 티에바스와 토랄바 델 리오로 확장했다. 1269년에는 에스피날 시를 건설했다.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는 산 세르닌, 산 니콜라스, 그리고 나바레리아의 3개 자치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자치구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매우 뚜렷한 특징들을 갖추었으며, 서로간의 분쟁이 심했다. 티발트 2세는 남부 프랑스 출신이 많은 산 니콜라스 자치구를 지지해 현지 주민들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다른 2개 자치구들이 이에 반감을 품고 1258년 산 니콜라스 자치구를 습격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다. 티발트 2세는 폭동 주모자들을 모조리 처형해 치안을 정비했고, 1266년 자치구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으나 합의에 실패했다.

1270년 7월, 루이 9세의 제8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튀니스 원정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동생 헨리케를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하고 이자벨 왕비와 함께 마르세유에서 출발했다. 이후 원정군은 튀니스를 포위했지만, 루이9 세가 8월 25일에 이질에 시달리다가 사망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티발트 2세는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와 함께 전투를 이어갔지만 튀니스 공략에 실패했고, 1270년 11월 11일 시칠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11월 14일 시칠리아의 트라파니에 상륙한 직후 전염병에 걸렸고, 12월 4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티발트 2세는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남동생 헨리케가 헨리케 1세로서 나바라 국왕 및 샹파뉴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카스티야 왕자 펠리페가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자 자기 형인 알폰소 10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그에게 자신의 편을 들면 나바라 왕국에 영토를 일부 떼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일이 잘못될 것을 우려해 펠리페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실제로 펠리페의 반란은 실패했다.

1272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만나 2살된 아들 티발트와 알폰소 10세의 딸 비올란테와 결혼시키는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나 티발트는 1273년에 유모가 에스텔라 성 창문에서 실수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사망했다. 그해 딸 호아나를 낳고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지만, 1274년 7월 22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후 헨리케 1세의 유일한 자녀인 호아나가 1살에 나바라 여왕이자 샹파뉴 여백작 호아나 1세로 등극했고, 어머니 블랑슈가 섭정을 맡았다.

블랑슈는 남편의 장례를 마친 뒤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의회를 소집해 여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나바라 왕국을 다스릴 총독을 뽑았다. 카스칸테의 영주이자 티발트 2세 치세 때 궁재를 맡았던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와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를 구성하는 3개 자치구 중 하나인 나바레리아 대표자인 가르시아 알모라비드, 왕실군 사령관인 곤살로 이바녜스 데 바스탄이 경합했다. 의회는 논의 끝에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를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했다.

얼마 후,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가 나바라 왕위를 노리고 아들 페드로 왕자(훗날 페드로 3세)를 나바라 왕국에 파견했다. 페드로는 여러 나바라 귀족들과 접촉해 지난날 산초 라미레스, 페드로 1세, 그리고 알폰소 1세가 나바라 왕위를 겸했던 과거를 상기시키면서, 아라곤 국왕들은 나바라인들의 관습을 존중했지만 샹파뉴 백국 출신 국왕들은 이를 무시하고 프랑스식 법률을 강요하고 착취를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거나 후계자로 선정한다면 나바라인들의 관습이 존중받고 특권을 인정해주겠다고 제안했다.

1274년 8월 27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의회가 재차 열렸다. 나바라 총독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 팜플로나의 주교,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은 아라곤 왕국과 마찰을 벌이는 것은 좋지 않으니 여왕을 페드로 왕자와 맺어주는 게 좋겠다고 주장했다. 반면 가르시아 알모라비드와 나바레리아 및 산 미구엘 자치구 의회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를 여왕의 후견인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블랑슈와 그녀를 추종하는 샹파뉴 출신 귀족들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보호를 받기를 희망했다. 의원들은 논의 끝에 총독과 주교을 대표로 삼은 사절단을 페드로 왕자에게 보내 자세한 사항을 협의하기로 했다.

나바라 대표단은 타라조나에서 페드로 왕자와 만났다. 페드로는 자신에게 나바라 왕위를 승계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인 하이메 왕자와 호아나 여왕을 결혼시킨다면 여왕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이 결혼이 성사될 경우 나바라 왕국을 지켜주겠으며, 나바라 의회가 국정을 자유롭게 운영하도록 해주겠다고 덧붙였다. 1274년 11월 1일, 올리테에서 팜플로나의 3개 자치구 출신 귀족들 외에도 60개 넘는 마을에서 선정된 성주와 변호사들이 참석한 나바라 의회가 재차 소집되었다. 그들은 페드로 왕자의 제안을 검토한 끝에 나바라 왕국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니, 하이메 왕자를 팜플로나로 초대하여 1년간 지내게 한 후 결혼식을 거행하고 공동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역시 나바라 왕위를 노리고 있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나바라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경 지대인 라 리오하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장남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페르난도는 곧장 군대를 이끌고 나바라 왕국 영내로 쳐들어가서 11월 18일 멘다비아를 공략한 후 비아나를 포위했다. 하지만 비아나 수비대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다가 겨울 추위가 도래하자 많은 병력을 잃고 멘다비아로 철수했다. 블랑슈 왕비는 카스티야 왕국군을 물리친 비아나 시민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그들의 세금을 몇 년간 면제하고 특권을 부여했다.

1275년 4월 14일, 블랑슈는 샹파뉴 백작령에 잠시 들르겠다며 딸을 데리고 팜플로나를 떠났다. 그녀는 샹파뉴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 국왕이자 사촌인 필리프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왕의 두 아들 루이 또는 필리프와 호아나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필리프 3세는 즉시 수락하고 팜플로나에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나바라 왕국의 안위를 보장해줄 테니 자신이 여왕의 후견인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나바라 총독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와 대다수 귀족들은 블랑슈 왕비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친 카스티야 성향인 가르시아 알모라비드, 곤살로 이바녜스 데 바스탄은 일부 귀족들과 함께 나바레리아 자치구 주민들에게 반란을 선동했다. 나바레리아 주민들은 자치구를 둘러싼 성벽 위에 농성전에 필요한 무기를 세우고 식량을 비축했다. 나바라 의회는 이를 문제삼아 나바레리아 귀족들의 포도원, 과수원 및 토지 작물을 베어버리는 식으로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나바레리아 측은 이에 굴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고, 알폰소 10세에게 사절을 보내 속히 팜플로나로 와달라고 청했다.

나바라 총독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는 군대를 이끌고 나바레리아 자치구를 둘러싼 성벽 앞으로 가서 설득을 시도했지만, 가르시아 알모라비드는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페드로 산체스는 총독 직을 사임했고, 호아나 1세의 후견인을 자처한 필리프 3세는 프랑스군 장군이자 남작인 외스타슈 드 보마르카이를 나바라 총독으로 세웠다. 외스타슈는 툴루즈에 기사와 석궁병들을 소집한 뒤 팜플로나에 입성했다. 그 후 나바레리아에 복종하라고 명령했으나 묵살당하자, 나바라 의회를 소집한 뒤 나바레리아 자치구 인사들을 멘다비아를 점령한 카스티야군과 내통한 반역자로 간주하고 토벌하기로 결의했다.

1276년 7월 4일, 프랑스군 및 팜플로나의 다른 2개 자치구(산 세르닌, 산 니콜라스)에서 모집한 민병대를 이끌고 나바레리아 성채를 포위했다. 그 후 2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9월 말 프랑스군이 성벽을 돌파하면서 종결되었다. 가르시아 알모라비드, 곤살로 이바녜스 데 바스탄 등 일부 귀족은 탈출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프랑스군과 2개 자치구 민병대는 나바레리아로 쏟아져 들어가서 그 일대를 철저히 약탈하고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했으며, 곳곳에 불을 질렀다.

많은 주민이 대성당으로 피신했지만, 약탈자들은 대성당 역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했다. 그 결과 대성당에 보관된 재물들을 포함한 모든 귀중품들이 도난당했으며, 금박을 입힌 헨리케 1세의 묘관도 파괴되었다. 나바레리아에 있던 건물들은 대성당을 제외하고 전부 파괴되었고, 인접한 산 미구엘과 유대인 지구도 화재가 번지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나바레리아는 거의 반 세기 동안 버려졌다가 1324년 카페 왕조의 샤를 4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이같은 참극이 벌어졌지만,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내부의 반란과 무슬림들의 침략으로 인해 이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한 추가 병력이 나바라 왕국 전역을 통제했고, 강대국인 프랑스를 적대할 수 없었던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은 프랑스가 나바라 왕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받아들였다.

한편, 호아나 1세는 1275년 필리프 3세의 아들 필리프와 약혼했다. 이후 파리의 프랑스 궁정에서 자란 그녀는 1284년 8월 16일 필리프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1285년 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남편 필리프가 필리프 4세로서 즉위하면서, 그녀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또한 필리프 4세는 나바라의 공동 왕 펠리페 1세로 즉위했고, 나바라 왕국은 이때부터 프랑스와 동군연합이 되었다.

호아나는 프랑스 왕비가 된 이래 나바라에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고 궁정에 머물렀다. 1294년 필리프 4세는 자신이 아들 루이가 아직 미성년자일때 사망할 경우 그녀가 프랑스 왕국의 섭정을 맡는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녀가 이렇듯 프랑스에서 왕비로 지내는 동안, 나바라 왕국에서는 필리프 4세가 선임한 총독들이 통치를 이어갔다. 그녀의 이름으로 칙령이 내려지고 그녀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발행되긴 했지만, 그녀는 나바라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 호아나는 샹파뉴 백국에 보다 많은 관심을 뒀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샹파뉴를 방문해 백작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했다.

6. 포르투갈 백국 ⇒ 포르투갈 왕국

6.1. 11세기

포르투갈 백국은 아스투리아스 왕국 레온 왕국의 봉신국으로 중세 중기 중반까지 복속되어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의 백작인 멘도 곤살베스는 999년 즉위한 5살의 알폰수 5세의 가정교사이자 왕의 어머니인 엘비라 가르시아와 함께 섭정을 맡고 있었다.

포르투갈 백작으로서의 치적은 불명이나 멘도 곤살베스는 섭정 초기엔 레온 왕국을 연이어 침략하는 알 만수르의 침략에 맞서 싸웠지만 1002년 알 만수르가 사망한 후 1003년 만수르의 뒤를 이어 후우마이야 왕조의 실권을 잡은 아브드 알 말리크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랍 측 기록에 따르면, 1004년 레온 귀족 산초와의 분쟁에 시달리던 멘도가 알 말리크에게 분쟁을 중재해달라고 청원했고, 아브드 알 말리크의 대리인이자 코르도바의 판사인 아스바그 빈 아브드 알라 빈 나빌이 멘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1007년 산 페드로 데 로카스 수도원에 기부한 사실이 수도원 기록에서 확인되었다.

중세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Ibn Khaldun)에 따르면, 멘도는 1008년경 '폭력적인 상황'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중세 역사학자 호세 마토수(1933 ~)는 그가 권력 분쟁에 휘말려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후기 아이슬란드 사가 <헤임스크링글라>에 바이킹 지도자 올라프 하랄드손이 군발드스보르그(Gunnvaldsborg)를 공격했다는 문구에서 군발드스보르그가 "곤살레스의 도시(Gundisalvus-burgus)를 의미하고, 멘도가 통치하던 도시 투이를 나타내는 지명이라고 보고, 멘도가 바이킹의 침략으로 피살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주장을 명확하게 증명할 명확히 증명하는 기록이나 유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근거없다고 간주한다.

멘도 곤살베스 사후 2대 포르투갈 백작인 루시디오 비마라네스의 아들 알비토 루시디스의 손자 알비토 누녜스가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1016년 바이킹의 침략을 받고 베르모임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당했다는 것뿐이다. 장남 누누 알비테스가 뒤이어 백작에 올랐고, 모종의 시기에 결혼한 일두아라 멘데스를 공동 백작으로 세워 백국을 함께 다스렸다. 1028년 누누 알비테스가 사망한 후, 일두아라 멘데스는 장남 멘도 누녜스를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하고 1043년까지 섭정했다. 멘도 누녜스는 1050년에서 1054년 사이까지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했는데, 그의 치세 동안 레온 국왕 페르난도 1세가 포르투갈 백국의 중심지인 기마랑이스 일대에서 고메스 엑타스와 디오고 트루크테신데스 등 하급 귀족들을 행정직에 선임하는 방식으로 포르투갈 백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멘도 누녜스의 아들로서 포르투갈 백작에 취임한 누누 멘데스는 1062년 페르난도 1세가 고디노 베네가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직할 통치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65년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한 뒤 그의 세 아들 산초 2세, 알폰소 6세, 가르시아 2세가 아버지의 영역을 세 개로 나눠서 통치했다. 이때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백국은 가르시아 2세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세 형제가 서로를 꺾고 영역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자, 누누 멘데스는 이 때를 틈타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1070년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1071년 페드로소 전투에서 가르시아 2세의 진압군에 참패하고 전사했다.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고, 나중에 페르난도 1세의 영토를 통합한 알폰소 6세가 포르투갈의 총독으로 임명한 부하 시스난도 다비데스에게 넘겼다.

누누 멘데스 사후 레온 왕국의 직할 통치를 받던 포르투갈 백국은 25년 후인 1096년 알폰소 6세가 딸 테레사 데 레온과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를 포르투갈 공동 백작으로 세우면서 부활했다. 엔히크와 테레사 부부는 이베리아 반도 서북부의 작은 영지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영토와 이권을 챙기고자 노력하려고 했다.

6.2. 12세기

영토 확장의 기회를 노리던 중 1109년 알폰소 6세 사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공동으로 칭한 알폰소 1세 우라카 부부가 서로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내전을 벌이자, 엔히크는 상황을 관전하다가 1111년 군대를 일으켜 레온으로 진군했다.

엔히크는 처음에는 우라카를 도우려 했지만, 알폰소 1세가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카스티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인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테레사가 막내아들 아폰수 1세를 포르투갈 공동 백작으로 옹립하고 백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신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웠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녀를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우라카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우라카의 수중에 넘어갔다.

1121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란호소 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두오로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하지만 우라카가 자신의 심복이었던 디에고 헬미레스를 숙청하려 했다가 디에고의 추종자들의 거센 반발을 산 덕분에, 테레사는 패망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여기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와 알폰소 7세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테레사는 레온 왕국의 가신으로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포르투갈 백작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124년 여름, 테레사는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1126년 3월 8일에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우라카의 뒤를 이어 레온 왕위에 오른 알폰소 7세가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포르투갈 백국 각지를 파괴하고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테레사는 알폰소 7세에게 항복했고, 이후로는 레온 국왕의 충실한 봉신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테레사는 갈리시아 귀족이자 트라스타마라 백작인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를 애인으로 삼고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자신이 성년으로 인정받는 18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아들 아폰수 1세는 브라가의 파이오 멘데스 대주교와 손잡고 대 야고보의 유물이 브라가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신께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원하는 징표라고 주장해 귀족들을 끌여들었다. 1128년 6월 24일, 테레사는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레온 왕국 장성들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가 상 마메데 전투에서 아들에게 참패했다. 이후 그녀는 두 딸 우라카, 산차와 함께 페드로 페르난데스를 따라 갈리시아로 망명했고, 1130년 11월 11일 몬테데라모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이후 아폰수 1세는 포르투갈 ' 프린스'를 칭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1139년 무라비트 왕조를 상대로 오우리케 전투에서 승리한 후부터 포르투갈 왕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이후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과 교황청으로부터 포르투갈 왕국을 승인받고자 수년간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1143년 교황 특사인 귀도 데 비코 추기경에게 라틴어로 적힌 서신을 보내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이교도들과 최선을 다해 싸울 테니 포르투갈의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부터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받고 주변 국가들에게도 용인받으면서, 포르투갈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 국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레온 국왕 알폰소 7세는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폰수는 투이 협약을 깨고 갈리시아를 침공해 미뉴 강을 건너 발데베스 계곡의 여러 성채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7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에게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방어하게 한 뒤 1140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출진해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아폰수는 즉시 역습을 가하여 적군 선봉장 라미루 프로일라스 백작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뒤 발데베스 계곡에서 알폰소 7세의 본대와 대치했다. <황제 알폰소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자는 펜하 다 레이하 성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진영이 좀더 높고 거친 지형에 자리잡았다. 이후 전투가 쉽게 결판나지 않고 양측의 여러 기사들이 생포되자, 포르투갈의 늙은 귀족들이 "기독교인끼리 무익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를 페허로 만들 것이니 이쯤에서 황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자"고 제안했다. 아폰수는 그들의 진언에 따라 알폰소 7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알폰소 7세 역시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143년, 알폰소 7세와 아폰수는 사모라 대성당에서 교황 대표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이 치켜보는 가운데 조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7세는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양자는 그동안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아폰수는 귀도 데 비코에게 라틴어로 적힌 서신을 전달해 교황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서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성 베드로의 기사라고 선언하고 포르투갈 왕국을 교황청에 봉헌하겠으며, 매년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고 레콩키스타를 이행할 테니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1146년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3세의 딸 마틸드(마팔다)[13]와 결혼해, 십자군 원정에 적극적이었던 아메데오 3세의 지원을 받고자 노력했다.

1147년, 아폰수는 코임브라에서 250명의 최정예 병사들과 함께 비밀리에 출진해 코임브라 인근의 무슬림 도시인 산타렘을 기습 공격해 단숨에 공략했다. 이리하여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대한 무슬림군의 끊임없는 습격을 가능케 했던 무슬림들의 거점이 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그는 여세를 이어가 리스본을 포위하기 위해 타구스 강 북쪽의 무슬림 거점인 사카벰으로 진군해 무슬림들을 또다시 격파했다. 이후 리스본을 포위한 포르투갈군은 때마침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 원정에 착수해 대서양을 항해 중이던 잉글랜드군과 연합해 리스본을 몇 달간 포위 공격한 끝에 그해 10월 20일에 공략에 성공했다. 일부 십자군은 성지로의 여행을 계속했지만, 대부분은 새로 점령된 리스본에 정착했다. 아폰수는 십자군의 일원인 헤이스팅스의 길버트를 리스본의 주교로 선출했다.

그 후 아폰수는 정복 전쟁을 잠시 중단하고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농업 진흥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새로 정복한 지역에 정착할 이주민들을 모집했고, 지방 귀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면서도 그들을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세금 수취 및 재정 관리를 위해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는데, 특히 야히야 벤 야히야는 포르투갈 왕국 세무장관으로 선임되어 왕국의 재정을 책임졌다. 이후 포르투갈 왕국은 재정을 유대인에게 맡기고 유대인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1160년, 아폰수는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 여왕 페트로닐라의 남편으로서 아라곤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라몬 베렝게르 4세와 산타 마리아 델 팔로에서 만나서 자신의 딸 마팔다와 아라곤 왕자 알폰소 2세의 결혼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1162년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사망한 뒤, 페트로닐라는 마음을 돌려 아들 알폰소 2세를 레온 공주 산차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1165년, 레온 왕국의 새 국왕 페르난두 2세는 아폰수의 딸 우라카와 결혼하고 평화 협약을 맺음으로써 선대 때부터 이어졌던 양국의 갈등을 종식하려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라데스마와 사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고 주민들을 거주시키고 총독을 선임했다. 그러나 아폰수는 자국의 국경 인근에 있는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는 것은 장차 그곳을 요새화해 포르투갈을 공격하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그는 그 전에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166년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침공하게 했다. 산슈 1세는 곧바로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1168년, 페르난두 2세는 갈리시아로 출진해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포위 공격하던 포르투갈군을 급습해 격파했다. 아폰수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갈리시아를 침공해 투이 등 여러 성채를 공략하고 1169년에는 카세레스 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바꿔 일부 병력을 갈리시아에 남겨두고 무슬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바다호스 공략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군의 전력이 분산되자, 페르난두 2세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끌어모아 갈리시아에 침투한 포르투갈군을 격파한 뒤 바다호스 공방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아폰수를 습격했다. 아폰수는 급히 피신하려 했지만 도중에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진 채 사로잡혔다.

그 후 페르난두 2세는 바다호스를 마저 공략한 뒤 레온 왕국의 봉신 노릇을 하는 무슬림들에게 바다호스 성채를 맡겼다. 1070년, 페르난두 2세는 장인 아폰수를 석방시키는 대가로 지난날 아폰수 1세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받고 카세레스, 바다호스, 트루히요, 산타 크루스 데 라 시에라, 몬탄체스 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중 트루히요, 몬탄체스, 산타 크루즈 데 라 시에라 등지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의 영지가 되었다.

이렇게 풀려난 아폰수는 다리가 부러진 중상을 입은 여파로 건강이 약해져서 국정을 돌보기 어렵게 되자 아들 산슈 1세와 딸 테레사에게 섭정을 맡겼다. 1174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시골 지역에서 요양했고, 산슈는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 활동을 담당하고 테레사는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또한 그 해에 산슈 1세와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의 누이인 돌세가 결혼하면서, 포르투갈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결혼 동맹이 성사되었다. 1178년, 산슈 1세는 페르난두 2세가 다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카스티야 방면으로 진군해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를 공격한 틈을 타 갈리시아를 공격하여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또한 세비야 과달키비르 강 인근에서 무와히드 왕조를 공격해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교령 <명백히 입증하는(Manifestis Probatum)>을 포르투갈 궁정에 보냈다. 그는 이 교령에서 아폰수 1세를 공식적으로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하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교도들을 온전히 꺾을 때까지 끝까지 싸워달라고 당부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은 교황청의 공인을 얻은 유럽의 왕국들 중 하나가 되었다.

산슈 1세와 테레사 남매의 통치는 1184년 플랑드르 백작 필립이 테레사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버지와 산슈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아낸 테레사는 왕국을 떠나기 전에 산슈에게 모든 국정을 맡겼다. 테레사가 떠난 지 몇 달 후,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유수프 1세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을 침공해 아폰수가 머물고 있던 산타렝을 포위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몸소 성벽 위를 거닐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포르투갈군은 이에 용기를 얻어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는 적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해 6월 산티아고 기사단이 출격해 무슬림군을 격파하고 유수프 1세가 철수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위기를 모면했다.

1185년 12월 6일, 아폰수 1세가 76세의 나이로 코임브라에서 사망했다. 이후 포르투갈 왕위에 오른 산슈 1세는 1188년 1월 말 페르난두 2세가 사망하고 알폰수 9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어수선해진 레온 왕국을 공격해 갈리시아의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당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알폰수 9세는 포르투갈 왕국과 화해하기로 하고, 산슈 1세와 만나 평화 협약을 맺고 산슈 1세의 딸 테레사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끝낸 산슈 1세는 레콩키스타에 몰두했다. 1189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의 함대의 도움을 받아 포르투갈 남부의 행정 및 경제 중심지인 실베스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반격을 가해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습격해 여자, 아이 3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아쿱 알 만수르는 1190년 포르투갈 남부를 공격해 토마르를 포위했다가 성전 기사단에게 후미를 격파당한 데다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인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산슈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1191년, 무와히드 왕조의 별동대가 포르투갈 왕국에 침입해 산슈 1세가 확보했던 실베스를 도로 공략했다.

한편,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알폰소 8세가 당초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과 함께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사신을 보내 반 카스티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산슈 1세, 그리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1191년 5월 12일 우에스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나바라-레온-아라곤-포르투갈 4개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한 국가가 공격당하면 다른 국가들이 즉시 원조하기로 했다.

우에스카 협정이 체결된 후, 나바라-아라곤 연합군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119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가 다른 연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우에스카 협정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1194년 나바라 국왕 안초 6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협정을 파기했다.

여기에 알폰수 9세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무와히드 왕조의 침공을 우려해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이 역효과를 초래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알폰수 9세가 근친상간을 범하여 교회법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이교도와 손잡기까지 했다며 레온 왕국에 파문과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은총을 레온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산슈 1세는 레온 왕국과 동맹을 끊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투이와 폰테베드라를 공략했다.

산슈 1세는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새 왕국의 정치 및 행정 조직에 쏟아부었다. 그는 국고를 축적하고 중산층 상인들을 지원해 상업을 키우고자 했으며, 구베이아(1186년), 비세우(1187년), 브라간사(1187년), 상 비센트 드 베이라(1195년), 벨몬테(1199년) 등 여러 신도시를 포르투갈 남부 지역에 짓고 포르투갈 북부의 외딴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들과 부르고뉴, 가스코뉴 등 프랑스 이주민들을 모집해 이곳에 정착시켰다. 또한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으며,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포르투갈 학생들에게 국비를 지원해주는 등 포르투갈 유학생들이 유럽 대학에서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줬다.

산슈 1세는 1188/1189년경에 둘세 왕비가 알렌케르, 보우가, 산타마리아다페이라, 포르투 일대의 수입을 가질 수 있다는 유언장을 작성했지만 둘세 왕비는 1199년 그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된다.

6.3. 13세기

둘세 왕비의 사망 후 산슈 1세는 1209년 10월에 두 번째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딸 마팔다, 테레사, 산샤는 여왕의 칭호를 받고 몽테모로벨호, 세이아 알렌케르 등 포르투갈 왕국 중심부의 일부 성과 마을들을 다스릴 수 있었고, 그의 아들 아폰수 2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211년 3월 26일 산슈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아폰수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가 세 누이에게 중심부 일대를 나눠준 것 때문에 왕권이 제약받을 것을 우려해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으려 했다. 이에 누이들과 그녀들을 따르는 귀족들이 반발하면서 1211년부터 1216년까지 포르투갈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아폰수 2세의 남동생인 페드루와 페르난두, 산슈 1세의 사생아인 마르팀 산체스, 로드리구 산체스는 형의 숙청을 피해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개입해 양자의 갈등을 중재하고 나서야 포르투갈의 내란이 수그러들었다. 아폰수 2세는 누이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는 대가로 그녀들이 물려받은 성과 마을들을 회수했으며, 성의 수비는 기사단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기사단은 왕의 통제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때 왕의 허락 없이 전투에 뛰어들었다. 결국 그가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정예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폰수 2세는 조부와 부친과는 달리 확장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갈리시아 국경을 놓고 레온 왕국과 분쟁을 벌인 데 비해, 그는 레온 왕국에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또한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 카스티야 왕국 알폰소 8세, 페르난도 3세 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단행한 데 비해, 그는 무슬림의 영역을 탈취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귀족과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무슬림들의 거점을 공략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국가의 경제와 사회 구조를 개편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211년 성직자와 귀족 대표로 구성된 코르테스에서 포르투갈 최초의 성문법을 반포했다. 이 법률은 주로 사유 재산, 민법 및 주화와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1220년에는 재산의 법적 지위와 소유자의 특권 및 면제가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조사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는 할아버지 아폰수 1세와 아버지 산슈 1세가 귀족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기부금과 특권을 부여받아서 왕권이 제약받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그리고 여러 유럽 국가에 대사를 파견해 무역 조약을 체결했다.

아폰수 1세는 생전에 교황청이 포르투갈 왕국이 레온 왕국에서 독립하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 포르투갈 전체를 봉헌한다고 맹세하고 교회를 위한 다양한 특권을 입법화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가 되어버려서 왕의 통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상당수의 세수입이 교회에 넘어가서 국가 운영을 원활히 하기 힘들어졌다. 아폰수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들의 권한을 악화시키고 교회 수입 일부를 국가 공익 목적에 사용하려 했다. 이에 따라 교회가 누리던 여러 특권이 폐지되고 수도원에 들어가던 재원 일부가 국고로 넘어가자, 성직자들은 강한 불만을 품고 교황청에 이 사실을 알렸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아폰수 2세에게 조부가 교황청에 맹세한 대로 따르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그는 교황청에 사절을 파견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테니 파문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실제로는 정책을 바꾸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1223년 3월 25일에 파문당한 채 사망했다.

1223년 아폰수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산슈 2세는 상당한 곤경에 처했다. 아폰수 2세의 누이 테레사, 산샤, 마팔다는 부친 산슈 1세가 자신들에게 물려준 몽테모로벨호, 세이아 알렌케르 등 포르투갈 왕국 중심부의 일부 성과 마을들을 가로채고 보상으로 주기로 했던 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아폰수 2세의 행위에 불만을 품었다. 특히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수 9세의 왕비였던 테레사는 남편의 후원에 힘입어 상당수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삼아 포르투갈 왕실을 압박했다.

산슈 2세는 이모들과의 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로 하고, 산슈 1세가 그녀들에게 물려줬지만 아폰수 2세가 가로챘던 모든 영지를 돌려줬다. 여기에 산슈 1세가 유언장에서 영지를 물려주라고 언급하지 않았던 또다른 왕녀 브랑카 역시 몽테모어와 에스게이라 일대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또한 이들은 연간 4,000모라비타에 달하는 연금을 받을 수 있었고, 토레스 베드라스 일대에 대한 지분을 일정 부분 소유했다.

산슈 2세는 아버지 아폰수 2세가 교회와 심각한 갈등을 벌인 후유증 역시 수습해야 했다. 아폰수 2세는 생전에 너무 많은 특권이 교회에 넘어가서 나라를 운영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성직자들의 권한을 악화시키고 교회 수입 일부를 국가 공익 목적에 사용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성직자들이 교황청에 직소했고,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아폰수 2세에게 조부가 교황청에 맹세한 대로 따르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아폰수 2세는 교황에게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다가 파문당한 채 사망하여 한동안 가매장되었다.

산슈 2세는 아버지의 교회 규제 정책을 중단하고 다시는 성직자들에게 제약을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포르투갈 사제들은 왕의 요청에 따라 아폰수 2세를 알코비사 수도원에 안장하기로 했다. 그 후 산슈 2세는 교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버지가 등한시했던 레콩키스타를 직접 이끌었다. 그 결과 그의 치세에 베자, 알가르브, 알렌테호 등 남부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무슬림으로부터 공략했다. 그는 이 영토를 산티아고 기사단 등 여러 기사단에게 맡겨서 무슬림과의 전쟁을 자발적으로 치르게 했다.

그러나 산슈 2세가 1226 ~ 1228년 엘바스 공략전에서 실패한 뒤 내륙 진출을 포기하고 해안 도시 포르투로 관심을 돌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포르투는 테레사 데 레온으로부터 자유시로 인정받은 이래 포르투갈 왕국에서 왕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유일한 도시로서 상업 활동을 자유롭게 수행했다. 하지만 잦은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고 싶었던 산슈 2세는 관례를 무시하고 포르투를 국왕의 직할도시로 삼고 세금 징수원들을 잇따라 파견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 대상인들의 왕에 대한 반감이 심화되었다.

또한 산슈 2세는 재위 첫해에 성직자들과 맺었던 약속과는 달리 특권을 보장하지 않고 십일조 역시 납부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폰수 2세의 교회 규제 정책을 재개해 교회 수입 일부를 국고로 돌리고 상당수의 특권을 회수했다. 성직자들이 이에 반발해 교황청에 잇따라 직소하자,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협상해 1232년 교황으로부터 무슬림과의 전쟁을 지속한다면 성좌를 모욕하지 않는 한 파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그는 성직자들과 노골적으로 대립했다. 급기야 1232년 6월 산슈 2세가 성직자들을 "손과 몽둥이"로 폭행했다는 보고가 교황청에 전해지자, 교황청은 교황 특사를 포르투갈로 파견했다. 1234년 8월 16일, 교황 특사가 주관한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의 종교 재판에서. 산슈 2세는 파문당했고 포르투갈에서의 성무 금지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산슈 2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책을 이어갔다.

1140년, 산슈 2세는 아로의 로페 디아즈 2세와 알폰수 9세 사생아인 우라카의 딸인 멘시아 로페스 데 아로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성직자들은 멘시아의 외할아버지 알폰수 9세가 포르투갈 왕비 우라카의 아들인 점을 근거로 근친 관계이니 교회법에 위반된다고 비판했고, 포르투갈 귀족들은 카스티야 귀족의 미망인인 그녀가 왕비가 되는 것은 격에 맞지 않고 그녀의 친족들이 요직을 차지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불만을 품었다.

1245년 7월 24일과 8월 1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리옹 공의회에서 2개의 교령을 발표했다. 하나는 포르투갈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위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교황은 이 교령에서 성직자들과 교회를 부당하게 대하고 그릇된 결혼을 감행한 산슈 2세는 기독교 군주로 인정할 수 없으니 폐위하고 새 왕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이에 다수의 포르투갈 귀족과 성직자들은 당시 볼로뉴 백작을 맡고 있던 산슈 2세의 동생 아폰수 3세를 새 국왕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아폰수 3세는 파리에서 포르투갈 귀족, 성직자 대표들과 접견한 뒤 그들의 특권과 관습을 보장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 왕국에 반납하고 포르투갈로 진격해 1245년 연말에 리스본에 도착했다. 산타렝, 알렌케르, 토레스 노바스, 토마르, 알코바사, 레이리아 등지가 아폰수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산슈 2세는 오직 코임브라와 코빌량, 구아르다 등지에서만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산슈 2세는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의 장남 알폰소가 1246년 초 포르투갈 왕국으로 진군해 레이리아 일대를 파괴하고 1247년 1월 13일 아폰수 3세와 레이리아 인근에서 맞붙어 승리했다.

그러나 알폰소 왕자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산슈 2세의 입지는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급기야 멘시아 왕비가 라이문도 비에가스 데 포르토카레이루라는 귀족에게 납치되어 오랭으로 이송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산슈 2세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오랭으로 달려가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지만, 수비대는 그를 조롱하며 화살 몇 발을 날렸다. 그는 며칠간 오랭을 포위했지만 공략할 가망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멘시아가 오랭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치안판사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납치'는 산슈 2세에게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멘시아가 산슈 2세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벌인 자작극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아내마저 빼앗기자 절망에 빠진 산슈 2세는 1247년 12월 4일 알폰소 왕자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의 호위를 받으며 카스티야 왕국으로 망명했고, 1248년 1월 4일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산슈 2세를 몰아내고 포르투갈 왕국의 새 국왕이 된 아폰수 3세는 내치에 전념했다. 1254년 레이리아에서 포르투갈 역사상 최초의 신분제 형식의 코르테스를 소집해 특권층의 횡포로부터 중산층 상인과 중소 지주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반포했으며, 교회에 많은 특권을 부여해 성직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애썼다. 또한 내전으로 흐트러진 행정 체계를 빠르게 재조직하고 도시 개발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1255년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를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이전시켰다.

아폰수 3세는 왕국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뒤 레콩키스타를 재개해 1249년 파루를 공략하고 알가르브 일대를 왕국에 편입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알가르브 일대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이 촉발되었다. 1253년, 알폰소 10세는 포르투갈 왕국으로 친정해 알가르브 일대를 공략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카스티야 왕국군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아폰수 3세는 알폰소 10세와 협상한 끝에 알폰소 10세의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고 알가르브를 베아트리스에게 줄 지참금으로 삼겠다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 후 마틸다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교황청의 허락을 받으려 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이를 거부하고 베아트리스와 헤어지라고 요구했다. 아폰수 3세는 이에 불복해 교황청과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1259년 마틸다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지만, 베아트리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디니스 1세는 1263년까지 합법적인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다음 교황인 우르바노 4세에 의해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1267년, 아폰수 3세는 알폰소 10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나서 새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카스티야 왕국은 알가르브 일대를 포르투갈에 돌려주고 포르투갈과 상호 방위 협약을 맺는 데가로 아라세나, 모우라, 세르파, 아로체 등 과디아나 강 동쪽의 포르투갈 영토를 가지기로 했다. 이 협약은 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경계를 최초로 정한 것이기도 했다.

1268년, 브라가 대주교, 코임브라 대주교, 포르투 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아폰수 3세가 십일조 금지, 사원 건축을 위한 자금을 유용, 성벽 공사에 성직자들을 동원한 것, 주교의 승인 없이 성직자를 투옥 및 처형한 것, 대주교와 주교에 대한 살인 위협을 가한 것, 유대인을 고위직에 임명시킨 것 등 43가지의 죄목을 저질렀다고 교황청에 고발했다.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죄질이 중하다고 보고 아폰수 3세를 파문했다. 포르투갈 성직자들이 힘을 합쳐 왕을 고발한 것은 아폰수 3세가 초기와는 달리 성직자들을 통제하려 든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탁발 수도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등 외국에서 온 수도사들을 우대한 것에 깊은 반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아폰수 3세는 이에 맞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고, 성, 궁전, 성벽, 해자 및 기타 군사 시설의 건설, 수리에 무상으로 일할 의무를 폐지한 것에 호감을 품고 있었던 평민들은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274년 1월, 산타렘에서 왕에 대한 비난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소집되어 몇 달간의 조사 기간을 거친 끝에 왕의 정당성을 공인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위원회의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폰수 3세에 대한 파문을 재차 선고했다.

1279년 2월 16일, 아폰수 3세가 알코바사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교회에 대한 순종을 맹세하고 자신에게 영지를 빼앗긴 성직자들에게 사과하고 영지를 되돌려주겠다고 밝혔다. 이에 알카코사 수도원장은 파문을 해제하고 그를 그곳에 안장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아폰수 3세 사후 왕위에 오른 디니스 1세는 당시 17세로 미성년자였기에 어머니 베아트리스가 주재하고 궁재 주앙 페레스 드 아보임 등이 참여한 섭정평의회가 통치를 대행했다. 그녀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우호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얼마 안 가서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어머니의 간섭을 배제하고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베아트리스는 이에 반발했고, 카스티야 국왕이자 베아트리스의 아버지인 알폰소 10세도 그녀를 지지하면서 디니스 1세에게 바다호스에서 대면하자고 권고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이를 거부하고 베아트리스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1282년 카스티야 왕자 산초가 알폰소 10세를 상대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몇 년간 포르투갈 왕국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못했다.

1281년, 동생 아폰수가 형의 즉위는 부당하다며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형이 교회로부터 사생아로 간주되었다가 1263년에서야 합법적인 아이로 인정받은 데 비해 자신은 처음부터 교회의 축복을 받았으니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고, 디니스 1세가 군대를 동원해 동생이 영주로 군림하던 라메구, 비제우, 세이야를 회수한 뒤 아폰수가 머물고 있던 비데로 진군하자 아폰수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달아났다.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단절한 뒤 아라곤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에게 그의 딸 이사벨과 결혼하고 싶다고 알렸다. 당시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을 이용해 카를루 1세를 밀어내고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한 뒤 나폴리 왕국을 세운 카를루 1세, 그의 조카인 프랑스 왕국 필리프 3세와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포르투갈 왕국의 이같은 제안에 반색했다.

1282년 2월 11일에 바르셀로나의 산타 아가타 예배당에서 디니스 1세의 대리인의 주재하에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한 달 후에 결혼 조약이 비준되었다. 이에 따르면, 이사벨은 12개의 성과 3개의 별장, 토레스 베드라스 농장 등 여러 영지를 지참금으로 받을 것이었다. 이후 이사벨은 카스티야 왕국의 훼방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1282년 6월 26일 포르투갈에 입국한 뒤 트란코수에서 디니스 1세와 만나 결혼식을 거행했다.

한편, 디니스 1세는 아버지가 치세 말기에 성직자들의 특권을 회수하고 교회에 돌아가는 수입 일부를 국고로 돌린 일 때문에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가 파문당하고 나라 전체에 성무 금지령이 내려진 상황을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288년에 즉위한 교황 니콜라오 4세에게 "포르투갈에 대한 교황과 교회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고, 교황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포르투갈 왕국에 대한 성무 금지령을 해제하고 아폰수 3세에게 내린 파문을 취소했다.

1291년,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와 대면해 자신의 딸 콘스탄사와 산초 4세의 아들 페르난도를 약혼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산초 4세는 1294년에 마음을 바꿔 포르투갈 왕국과의 약혼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딸인 블랑슈와 아들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던 1295년 4월 산초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페르난도 왕자가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로 등극했다. 그해 여름, 페르난도 4세의 모친이며 섭정을 맡은 마리아 왕비는 시우다드 로드리구에서 디니스 1세와 대면해 콘스탄스와 페르난도의 결혼을 예정대로 집행하고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를 디니스 1세의 아들 아폰수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1296년, 카스티야 왕자 후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에 빠졌다. 후안 왕자로부터 자신을 도와주면 상당한 영토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쳐들어가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하며 각지를 약탈했다. 이에 마리아 왕비는 디니스 1세에게 알폰소 데 라 세르다와 후안 왕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면 전년도에 맺은 협정을 파기하겠다고 경고했다. 디니스 1세는 더 이상 반군을 돕지 않기로 하고 지금까지 점령한 영토에 관료를 임명한 뒤 본국에 돌아갔다. 포르투갈군이 끝내 오지 않자, 후안 왕자는 레온으로 철수했고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아라곤 왕국으로 돌아갔다.

1297년 9월 12일, 디니스 1세는 알카니케스 마을에서 마리아 왕비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캄푸마요르, 올리벤사, 오우겔라, 산 펠리시아스 데 로스 갈레고스 등 알폰소 10세가 탈취했던 포르투갈 영토를 돌려주고, 알메이다와 카스텔로 봄, 카스텔로 메호르, 케스텔로 로드리고, 몬포르테, 사부갈, 사스트레스 비야 마요르 일대도 포르투갈 국왕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것을 그만두고, 두 왕국의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은 서로를 지원하고 자신들의 영지와 특권을 지키는 데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은 두 왕국의 군주뿐만 아니라 카스티야 도시 길드, 카스티야와 레온 귀족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렇게 정해진 양국의 국경은 현대까지 거의 변경되지 않았기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국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이 다시 확인되었고,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약혼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디니스 1세는 마리아 왕비를 돕기 위해 300명의 기사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1298년, 후안 왕자와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한 마리아 왕비는 토로에서 디니스 1세와 재차 만나서 후안 왕자와의 전쟁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이를 거절하고 페르난도 4세와 후안 왕자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후안 왕자는 점령한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영토가 페르난도 4세에게 귀속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야돌리드에 모인 카스티야 코르테스는 마리아 왕비로부터 뇌물을 받고 디니스 1세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1] 우라카의 첫 남편 레이몽의 형제였다. [2] 페르난두 2세와 우라카 부부의 할머니인 레온의 우라카와 포르투갈의 테레사 데 레온은 이복 자매였다. [3] 우라카의 첫 남편 레이몽의 형제였다. [4] 페르난도 3세의 아들 [5] 알폰소 10세의 아들이자 산초 4세의 동생이다. [6] 교황 마르티노 4세는 마리아가 산초 4세와 가까운 친척이고 산초 4세의 사생아 중 한명의 대모인 점을 문제삼아 결혼을 불허했다. [7] 알폰소 10세의 장남 페르난도의 아들이다. [8]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름이 이탈리아어인 '베르타'인 것으로 볼 때 이탈리아인 부모를 둔 것으로 추정된다. [9] 페드로 1세는 처음에는 예루살렘 여왕 마리아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고 싶어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0]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에드워드 1세에 맞서 싸우며 모범의회를 출범시킨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다. [11] 이 땅은 카스티야 백국과 레온 왕국이 오랫동안 영토 분쟁을 벌인 지역이었다. [12] 일명 '루보 왕' [13] 프랑스어 이름은 '마틸드(Mathilde)', 포르투갈어 이름은 '마팔다(Mafald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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