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곤 왕 페르난도 1세에 대한 내용은 페르난도 1세(아라곤)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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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nando I de león | ||
가문 | 히메네스 왕조 | |
출생 | 1015년 | |
출생지 | 팜플로나 왕국 | |
사망 | 1065년 12월 27일 (향년 50세) | |
사망지 | 레온 왕국 레온 | |
재위 기간 |
카스티야 백작 | 1029년 - 1065년 |
레온 왕국 국왕 | 1037년 - 1065년 | |
아버지 | 안초 3세 | |
어머니 | 무니아도나 | |
형제 |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 세메나 사노이츠, 온잘루 사노이츠, 라미로 사노이츠(이복형제) | |
배우자 | 레온의 산차 | |
자녀 | 사모라의 우라카, 산초 2세, 토로의 엘비라, 알폰소 6세, 갈리시아의 가르시아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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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백작, 레온 왕국 히메네스 왕조 초대 국왕. 일생 동안 카스티야의 왕으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후대에 카스티야의 초대 국왕이자 카스티야 군주제의 창시자로 간주되기도 했다.2. 생애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3세와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딸 무니아도나의 아들이다. 형제로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 세메나 사노이츠, 온잘루 사노이츠가 있었다. 또한 아버지가 정부 안차 오이바르코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형제 라미로 사노이츠도 있었다. 1029년,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가 레온 국왕 알폰수 5세의 딸인 산차와 약혼한 뒤 결혼식을 치르러 레온으로 향했다가 카스티야에서 추방됐던 귀족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초 3세는 즉시 카스티야 백작령을 점거한 뒤 페르난도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세워서 카스티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했다.1032년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수 5세의 딸이며 가르시아 산체스의 약혼자였던 레온의 산차와 결혼했다. 이때 레온 왕국은 지참금으로 케아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땅을 카스티야 백국에 넘겼다. 1035년 아버지 안초 3세가 사망한 뒤 비로소 카스티야 백작으로서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1037년 레온 왕국의 국왕이었다가 안초 3세에게 패배해 갈리시아로 망명했던 베르무두 3세가 왕국을 되찾기 위해 쳐들어오자, 그는 형이자 팜플로냐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와 연합해 대항했다.
1037년 9월 4일, 페르난도는 타마론 전투에서 베르무두 3세를 전사시키고 레온 국왕이 되려 했다. 레온 왕국의 대표적인 귀족인 페르난도 플라네즈 백작은 찬탈자에게 도시를 양도할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더라도 그의 지위와 직책을 유지해주고 상당한 보상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자 이내 페르난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페르난도는 아내 산차와 함께 레온에 입성한 뒤 성 마리아 성당에서 레온 주교 세르반데스에 의해 레온 국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는 고인이 된 장인 알폰수 5세가 부여한 레온 헌장을 재확인하고 서고트 왕국의 법전을 레온 왕국의 기본법으로서 계속 준수하도록 했으며, 왕국의 관습법과 귀족들의 권리 역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1043년, 라미로는 자신이 가진 영역을 확장하거나 이복형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가 소유한 팜플로냐 왕위를 빼앗을 의도를 품고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등 무슬림 토후국들과 함께 팜플로냐로 쳐들어갔다.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는 페르난도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했다. 양측은 타팔라에서 맞붙었고, 가르체아 3세-페르난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가르체아 3세는 수많은 무기와 보급물자를 노획했는데, 그 중 라미로가 타고 다녔던 검은 말을 노획해 자신에게 바친 알페레스(alférez: 중세 이베리아의 왕실 고위 관리) 오르티 사노이츠에게 오로비아 마을을 하사했다. 그 후 가르체아 3세와 라미로는 무니아도나의 중재하에 화해했고, 때마침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 온잘루 사노이츠가 사망하자 라미로가 그 땅을 물려받게 했다.
1054년경 병환에 시달리던 가르체아 3세는 자기가 죽으면 페르난도가 자신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팜플로나 왕국을 삼키려 들 거라 예상하고, 병문안을 하러 온 페르난도를 체포해 카에 성에 가두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간수를 매수해 극적으로 탈출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가르체아 3세가 무슬림들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하자, 아라곤 백작 라미로 사노이츠와 함께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양군은 아타푸에르카 계곡에서 맞붙었는데, 전투 도중에 가르체아 3세가 전사했다. 다만 팜플로나군은 해질 무렵까지 전투 대열을 유지했고, 왕의 시신을 수습한 뒤 팜플로나로 이송하여 안장했다.
그 후 팜플로나 왕국의 서쪽에 있던 많은 영주들이 페르난도에게 귀순했다. 이에 가르체아 3세의 뒤를 이어 팜플로나 왕위에 오른 안초 4세는 아라곤 왕을 칭한 라미로 1세와 동맹을 맺고 페르난도와 대립했다. 그러다가 1062년 12월 29일, 안초 4세와 페르난도는 그들의 국경을 확정짓는 조약에 서명했다.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단독 군주로 인정받았고, 안초 4세는 리오하, 알라바, 비스케이 등지를 돌려받았다.
한편, 페르난도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국가들을 상대로 레콩키스타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1057년 포르투갈 북부의 라메고(Lamego)를 공략했으며, 뒤이어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해 몬데고 계곡을 확보했다. 1058년 7월 포르투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비제우(Viseu)를 접수하면서 대서양으로 진출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1060년, 페르난도는 무슬림의 치하에 있던 사라고사를 침공해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 베를랑가, 바도르레이 등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톨레도와 사라고사 사이의 로마 가도까지 진격했다. 당시 사라고사의 에미르 아흐마드 알 무콰디르는 사라고사와 이웃한 토르토사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던 터라 이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알 무콰디르는 지금까지 팜플로나 왕국에 보내던 조공을 레온 왕국에 보내고 충성을 서약하며, 페르난도가 빼앗아간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사라고사를 복속시킨 뒤, 페르난도는 톨레도 에미르 야히아 이븐 이스마일 알 마문에게 관심을 돌렸다. 1062년, 페르난도는 톨레도 토후국으로 쳐들어가서 탈라마아를 공략하고 알칼라 데 헤나레스를 포위했다. 알 마문은 도저히 대항할 방도가 없다고 여기고 알 무콰디르처럼 레온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했고, 페르난도는 이에 만족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1063년, 세비야와 바다호스의 아랍 토후국들에 대한 대규모 약탈을 감행했고, 세비야와 바다호스 토후국들은 그가 철수하는 조건으로 내걸은 몸값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했다. 1064년 1월 몬데고 강 어귀에 있던 코임브라(Coimbra)를 포위하고 6개월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064년 7월 25일에 함락시켰다. 페르난도는 모자라비아 백작 시스난도 다비디즈(Sisnando Davídiz)에게 코임브라를 비롯하여 대서양에서 두에로 강을 따라 이어지는 레온 왕국의 남쪽 국경 지대를 관장하게 했다.
1065년 발렌시아 토후국을 침공해 수 개월간 포위했지만 함락할 기미가 없는 데다 중병에 걸리자 철수하기로 했다. 이때 페르난도는 적이 추격할 것을 예상하고 파테르나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발렌시아 에미르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아브드 아지즈 알 무샤파르는 레온 왕국군을 추격하다가 페르난도가 숨겨둔 매복병에 걸려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발렌시아는 톨레도 에미르 알 마문의 수중에 넘어갔다.
1065년 12월 24일에 레온에 도착한 페르난도는 산 이시도르 교회를 방문해 승리를 연이어 안겨준 하느님을 칭송했고, 성탄절 새벽에 거행된 미사에 참석해 영성체를 받았다. 이후 죽음이 임박하자, 12월 26일에 주교, 대수도원장, 성직자들을 불러 왕의 망토와 면류관을 건네고 교회로 가져가라고 명령한 뒤, 성 이시도르의 유해가 담긴 관이 놓인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달라고 간청했다.
"주님. 당신은 모든 왕 위에 계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왕국이 당신에게 넘겨졌습니다. 저는 주님에게 받은 자유의지로 나라를 지금까지 다스렸습니다. 이제 이 나라를 주님께 바치고 이 세상의 소용돌이에서 나오려는 제 영혼을 평화롭게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후 머리에 재를 얹고 땅에 엎드린 채 공개 고행을 거행했다. 이튿날인 1065년 12월 27일 정오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상속인 사이에 왕실 소유물을 분배하는 것을 금지한 서고트 및 레온 법 대신 왕국을 분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나바라 법 원칙을 따르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장남 산초 2세는 카스티야를 물려받았고, 차남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3남 가르시아 2세는 갈리시아를 물려받았다. 이 세 아들은 각기 왕을 칭한 뒤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알폰소 6세가 최종적으로 승리해 왕국을 통합했다.
3. 가족 관계
- 레온의 산차(1018 ~ 1067): 레온 국왕 알폰수 5세의 딸.
- 사모라의 우라카(1033/34 ~ 1101/03): 남동생 산초 2세를 암살한 범인으로 추정됨. 이후 전쟁에 전념하는 알폰소 6세를 대신해 내치를 수행하다가 말년에 레온 수도원으로 은퇴함.
- 산초 2세(1036/38 ~ 1072):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
- 토로의 엘비라(1038/39 ~ 1101): 토로 시의 여성 영주.
- 알폰소 6세(1040/41 ~ 1109): 레온, 갈리시아, 포르투갈, 카스티야, 톨레도의 국왕,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 가르시아 2세(1041/43 ~ 1090): 갈리시아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