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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정치사/전기/서유럽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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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수아송 왕국 ⇒ 프랑크 령 네우스트리아
2.1. 베로됭 조약 이전2.2. 베르됭 조약 이후2.3. 노르망디 백작령2.4. 앙주 백작령(페이 드 라 루아르 북동부·상트르 발 드 루아르 남서부)2.5. 카페 왕실령2.6. 블루아 백작령(현 일 드 프랑스 서부 및 샹트르 발 드 루아르 서부 일부)2.7. 베르망두아 백작령(오드 프랑스와 일 드 프랑스 동부 및 상파뉴 북부 일대)2.8. 플란드르 백작령2.9. 샹파뉴
3. 아우스트라시아 → 저지대 지역· 알자스-로렌
3.1. 베르됭 조약 이전3.2. 베르됭 조약과 프륌 조약 이후3.3. 동·서로 분할과 혼란기3.4. 독일 왕국 5대 부족 공국으로 편입3.5. 상 로트링겐3.6. 하 로트링겐
4. 프리지아5. 브르타뉴6. 부르군트 → 리베몽 조약 후 서프랑크령 부르고뉴와 부르군트 제2왕국
6.1. 부르군트 제1 왕국6.2. 프랑크 왕국령 부르군트6.3. 분단기6.4. 하 부르군트6.5. 상 부르군트⇒통합 부르군트 왕국(아를 왕국)6.6. 서프랑크령 부르고뉴
7. 서고트 왕국(툴루즈 왕국) ⇒ 프랑크 왕국령 아키텐 및 툴루즈 백작령과 바스코니아 공작령
7.1. 서고트 왕국령7.2. 프랑크 왕국령7.3. 서프랑크 왕국령7.4. 바스코니아⇒가스코뉴 공국7.5. 툴루즈 백작령7.6. 셉티마니아 변경백령⇒고티아 변경백(후작)령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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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년 말의 유럽 지도
DOMINIAN of SYAGRIUS라고 쓰여 있는 곳이 서로마의 마지막 갈리아 속주 수아송 왕국이며, 수아송 왕국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브르타뉴 반도에 쓰여진 BRITONS는 당시 앵글로 색슨족을 피해 도망친 로마화된 켈트족인 브리튼인, 서쪽의 FRANKS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 북쪽에 쓰여진 'FRISIAS프리지아족, 서쪽에 쓰여진 JUTES, AGLES, SAXONS은 브리튼 섬으로 이주한 자들을과 달리 잔존한 앵글로족색슨, 주트족'이다. 그외 남쪽으로는 ALAMANI' 알레만니 왕국, 'K,of the BURGUNTLAND부르군트 왕국, K,of the VISIGOTHS서고트 왕국이다.

1000년경의 유럽 지도

서로마 제국의 붕괴 당시 이미 라인 강 동쪽 지역을 제외한 알프스 이북의 모든 지역에 게르만족들의 국가들이 세워진 상태였다. 그나마 수아송만큼은 로마인들의 공동체가 갈리아에서 살아 남아 갈리아에서 주둔하고 있던 서로마군 지휘관이었던 아에기디우스가 스스로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자처했지만 이들의 영토는 동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 이전까지 이탈리아 본토와도 격리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이며 무엇보다 이후 건국된 북쪽의 프랑크 왕국과 남쪽의 서고트 왕국, 동쪽의 부르군트 왕국, 알레만니 등 게르만족 왕국들에게 위협받게 되었다.
2. 수아송 왕국 ⇒ 프랑크 령 네우스트리아
2.1. 베로됭 조약 이전
시아그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기 전 464년 아버지 아에기디우스의 뒤를 이어 갈리아의 독스이자 마기스테르 밀리툼직을 세습했지만 476년 서로마 제국의 붕괴 직후 주변의 게르만족 국가들이 하나같이 왕(Rex)를 칭한 반면 오늘날 역사가들에 의해 왕국으로 불린 것과 달리 여전히 독스직을 고수했다.

그는 아버지가 취한 정책에 따라 킬데리크 1세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에 대항했다. 서로마 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와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영토를 20 여년간 사수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이탈리아와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 동로마 제국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제국 서부를 통치할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제노 황제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자 역시 교류를 끊었다.

481년 그동안 시아그리우스에게 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킬데리크 1세가 사망하고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 왕위에 올랐다. 그는 5년간 주변의 여러 프랑크 부족들을 장악하며 힘을 키웠다. 이윽고 486년, 클로비스 1세는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시아그리우스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수아송 전투에서 참패하여 모든 세력을 잃고 서고트 왕국에 망명했다. 클로비스 1세가 시아그리우스를 내놓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서고트 왕국을 위협하자 서고트 왕 알라리크 2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시아그리우스를 프랑크 왕국에 넘겨줬고 시아그리우스는 곧바로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갈리아에서 버티고 있던 서로마의 잔존 세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시아그리우스는 처형되었지만 그의 후손은 8세기 중엽까지 프랑크 왕국의 귀족으로 남아 있었고 그 이후에는 기록이 끊긴다. 시아그리우스 가문의 기록이 사라진 이후에도 수아송과 파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프랑크 왕국의 핵심 지역 중 하나로 남아있던 네우스트리아 왕국으로 발전했다.

프랑크 왕국으로 편입된 이후 줄곧 수아송으로 불려왔고, 이는 클로비스 1세 사후 세아들에 의해 분할되면서 4남인 클로타르 1세가 이지역을 차지하면서 여전히 수아송으로 불려지다가 클로타르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558년 다시 통일되다가 561년에 그가 죽은 후 다시 네 아들에 의해 분할되었을 때 클로타르와 아레군트의 아들인 킬페리크 1세 때부터 수아송보다는 네우스트리아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본디 단독으로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될 야심을 갖고 있던 킬페리크는 랭스를 공격하면서 다른 형제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인 시게베르 1세와 대립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567년, 파리 일대를 다스리던 카리베르 1세가 사망했다. 이에 킬페리크, 군트람, 시게베르가 카리베르의 영지를 분할했는데, 킬페리크는 레몽, 퀘라르, 닥스, 보르도, 비고르, 베어른 등 피네스 상부 일대를 접수했다. 이때문에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과 경계가 맞닿게 되자, 아타나길드는 그와 갈등을 벌이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킬페리크에게 정부인 프레데군트와 깨끗히 헤어지는 조건하에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했고, 그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567년 3월 갈스빈트를 맞이한 그는 아내의 용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라는 생각이 들자 아내를 별궁에 방치한 채 프레데군트와 대놓고 불륜을 맺었다. 이에 길스빈트가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갈스빈트는 계속되는 남편의 냉대에 질린 나머지 지참금을 포기할 테니 조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568년경, 갈스빈트는 잠자던 중에 목졸려 살해되었다. 킬페리크가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설과 프레데군트가 사주했다는 설이 양립하는데, 정황상 프레데군트가 주도했고 그는 이를 방조 또는 방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킬페리크는 프레데군트를 정식으로 왕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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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있는 갈스빈트 왕비를 목 졸라 죽이는 모습

문제는 갈스빈트가 시게베르의 아내인 브룬힐트의 여동생이었다는 점이었다. 여동생이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브룬힐트는 극도로 분노했고, 남편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했다. 시게베르 1세는 아내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킬페리크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군트람이 두 형제에게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은 569년 전국에서 소집한 대표들이 집결한 궁정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궁정 회의 결과, 킬페리크는 살인에 관여한 책임을 지고 브룬힐트에게 아키텐의 5개 도시(보르도, 리모주, 카오르, 베른, 비고르)를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평화가 이뤄지는 듯했지만, 그는 영토 손실을 만회하고자 시게베르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를 탈취했다. 이에 시게베르는 이참에 킬페리크를 처치하고 그의 영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575년, 시게베르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인들을 대거 고용해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뒤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킬페리크의 장남 테우데베르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으나 킬페리크 편을 들던 군트람 보손이 돌연 편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킬페리크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투르로 도망친 뒤 그곳에서 농성했다. 이후 투르를 포위한 적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와 함께 있던 프레데군트가 아들을 낳았다. 신생아는 투르 주교에 의해 세례를 받았는데, 프랑크 전통과는 달리 삼손(Samson)이라는 게르만식 이름을 받으며, 빈민들이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게 했다.

킬페리크는 투르 공방전이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절망에 빠진 나머지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릴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에 프레데군트가 그를 대신해 행동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경비병 2명을 불러낸 뒤 마약 성분이 든 술을 마시게 한 후 독이 든 단검을 쥐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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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군트가 자신의 추종자 두 명에게 마약성분이 든 술을 먹인 후 가서 시게베르 1세를 죽이라 명령하는 모습
"시게베르 왕을 먼저 죽이는 자는 나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

두 사람은 즉각 투르에서 빠져나와 비트리 앙 아르투아에서 킬페리크의 옛 신하들로부터 왕으로 칭송받던 시게베르를 단검으로 찔러 죽였지만, 시게베르를 호위하던 병사들에게 곧바로 처단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군대는 해산되었고, 킬페리크는 잃어버렸던 영토와 재산을 쉽게 되찾았다. 그 후 파리를 공략해 브룬힐트를 생포한 후 루앙 시로 유배보냈고, 그녀가 파리로 가져온 보물을 탈취했다. 576년, 킬페리크는 아들 메로베에게 군대를 이끌고 푸아티에를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메로베는 명령을 무시하고 투르에 진군해 그 일대를 심하게 황폐화시켰다. 이후 어머니 아우도베라에게 가고 싶은 척하면서 루앙으로 갔고, 그곳에서 브룬힐트를 만난 뒤 그녀와 결혼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분노해 아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떠났다. 오랜 협상 끝에, 킬페리크는 브룬힐트와 결혼하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아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샹파뉴에서 온 이들이 수아송을 습격해 순식간에 장악한 후 프레데쿤트와 킬페리크의 아들 클로비스를 수아송에서 몰아냈다. 이에 킬페리크와 메로베는 잠정적으로 화해한 뒤 수아송으로 진군해 적을 몰아내고 수아송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이 메로베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여겨 아들을 긴급 체포한 뒤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측근 한명을 군트람 보손이 숨은 성 마르틴 대성당이 있는 투르에 보내 자신의 장남 테우데베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를 넘기지 않는다면 투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투르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이끄는 투르 주민들은 "성스러운 성당이 스스로 찾아온 죄인을 보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데 이를 위반할 수는 없다"라고 답했다. 이에 킬데리크는 아들 클로비스에게 투르를 응징하게 했다. 클로비스가 명령을 받들어 데시데리우스 공작과 함께 투르와 앙제 일대를 약탈하고 있을 때,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리모주에 도착하여 이들과 응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군트람은 5,000명의 전사를 잃었고 데시데리우스는 24,000명의 전사를 잃고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 후 군트람은 오베르뉴를 통과하면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부르군트로 돌아갔다.

한편, 감옥에 갇혀 있던 메로베는 상속권을 박탈당한 뒤 수도승에 의해 삭발된 후 아니솔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다 도중에 군트람 보손의 부하들에 의해 풀려난 뒤 투르로 도주했다. 킬데리크는 메로베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투르로 군대를 재차 보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메로베와 브룬힐트의 결혼을 주선한 루아나 주교는 체포된 후 브룬힐트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왕에 대한 불복종을 부추긴 혐의가 적용되어 교회 법원에 회부되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포함한 여러 주교들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왕의 압력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루아나는 주교직을 박탈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밤에 탈출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심하게 구타당한 뒤 저지 섬으로 보내졌다.

577년, 메로베는 아버지의 공세를 피해 아우스트라시아로 도주하여 브룬힐트와 합류했다. 당시 아우스트라시아는 시게리크 1세의 어린 아들 킬데베르 2세가 군림했지만 실권은 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브룬힐트의 권력이 강화되는 걸 꺼렸기에 메로베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메로베는 정체를 숨긴 채 랭스에 숨어있다가 테루안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메로베에게 킬페리크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에 기뻐해 가장 용감한 추종자들만 데리고 테루안으로 갔다가 도중에 붙들려 별장에 갇혔다. 주민들은 별장 주위에 무장한 남자들을 배치한 뒤 킬페리크 1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킬페리크는 메로베가 구금되어 있는 곳으로 급히 갔지만, 메로베는 이미 살해된 뒤였다. 세간에서는 프레데군트가 아우도베라의 모든 아이들을 멸하려고 살인을 사주했을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킬페리크는 아들이 살해된 것을 알게되자 살인자를 처형했다.

577년, 킬페리크와 프레데군트의 아들 삼손이 이질에 걸려 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프레데군트 역시 병에 걸렸지만 곧 회복되었다. 578년, 킬페리크는 브르타뉴 원정을 계획하고 투르, 푸아티에, 베른, 르망, 그리고 앙주의 전사들을 소집했다. 브르타뉴 공작 바로스 2세는 야밤에 원정군을 습격해 대부분의 적병을 격파했지만, 나중에 킬페리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면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하에 빼앗겼던 도시들을 돌려받았다. 이에 킬페리크의 군대가 철수했지만, 579년 바로스 2세는 맹세를 어기고 렌을 공격해 약탈을 자했고, 뒤이어 낭트를 습격해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하고 포도밭에서 포도를 모조리 거둬들였으며, 여러 주민을 포로로 끌고 갔다.

579년, 킬페리크는 프레데쿤트의 조언에 따라 세금 징수량을 늘리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밭, 숲, 집, 가축, 포도원에 대한 새로운 세금이 도입되었다. 580년 2월 갈리아-로마 출신인 마르크가 리모주에 도착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3월 1일 반란을 일으켰고, 마르크는 간신히 도시를 탈출한 뒤 킬페리크에게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킬페리크는 즉시 군대를 보내 리모주의 폭도들을 학살하고 리모주 대표 및 모든 저명한 시민들을 추방했다. 여기에 사람들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된 성직자들을 잡아들인 뒤 도시 광장에서 다양한 고문을 가했다. 이때 처형되거나 추방된 이들의 모든 재산은 국고로 귀속되었고, 리모주 시는 이전에 지불하기를 거부했던 세금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과세를 내야 했다. 당시 킬페리크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의 세금이 너무 무거워서, 많은 이들은 네우스트리아를 떠나 킬데리크 2세가 다스리는 아우스트라시아나 군트람이 지배하는 부르군트로 도주했다.

580년 봄, 론, 소나, 그리고 루아르 일대가 홍수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오베르니 계곡 전체가 물에 잠겼고, 리옹의 많은 집이 파괴되었으며, 도시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해 여름 동안 우박이 쏟아지면서 오베르뉴 일대가 파괴되었으며, 오를레앙 시는 화재로 절반이 파괴되었고, 강한 지진이 보르도를 강타했다. 8월에는 천연두가 갈리아 전역을 휩쓸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이때 킬페리크와 두 아들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도 병에 걸렸다. 킬페리크는 병에서 회복되었지만, 두 아들은 모두 죽었다. 이 일련의 자연재해에 동요한 킬페리크는 추가 세금을 폐지하고 인명부를 불태웠으며, 교회, 바실리카, 그리고 빈민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눠줬다.

프레데군트 사이에서 낳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가 모두 죽자, 킬페리크는 아우도베라와의 사이에서 낳았고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클로비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프레데군트는 클로비스마저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클로비스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를 마법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비난했고, 마법사로 간주된 한 여인을 체포해 화형에 처했다. 클로비스는 조사를 위해 한 별장으로 보내졌다가 프레데군트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프레데군트는 수도원에 사람을 보내 아우도베라를 살해하고, 아우도베라의 딸 바시나를 강간한 뒤 푸아티에 수도원으로 보냈다. 이때 아우도베라의 모든 소유권과 여동생 바시네는 프레데군트의 소유로 넘어갔다.

581년,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가 마르세유 일부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킬페리크는 이를 보고 데시데리우스 공작을 불러서 군트람을 괴롭히라고 명령했다. 데시데리우스는 군트람을 따르는 라그노발트 공작을 몰아내고 페리 시를 공략한 뒤 아제네로 진군해 군트람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도시를 점령했으며, 투르 지역 역시 약탈되었다. 또한 킬페리크의 부하인 블라다스트 공작이 바스크 왕국까지 공격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582년, 킬페리크는 앙소알드 공작, 도미기실 공작 등을 서고트 왕국으로 보내 리우비길드의 아들 레카레드 1세와 약혼한 딸 리군타를 위한 지참금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리우비길드는 군트람의 지원을 받는 장남 헤르메네길드와 내전을 치르고 있었기에 킬페리크와 화목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 덕분에 협상은 순조롭게 끝났고, 사절단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킬페리크는 프레데군트와의 사이에서 아들 테우데리크를 낳았다. 그는 이를 기념하고자 모든 감옥을 열어 죄수들을 석방하고 어떤 형벌도 당분간 시행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583년, 킬페리크의 부하 베룰프, 데시데리우스, 그리고 블라다스트 공작은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는 오베르뉴 지역을 침공했다. 오브레뉴 측은 1만 5천 병력을 소집하여 대응했고, 양자는 사토메안 요새에서 격돌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7천 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하지만 베롤프와 블라다사스트는 별다른 저항없이 순조롭게 진군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육했다. 이에 오베르뉴 주민들이 군트람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군트람은 즉시 진군하여 베롤프와 블라다스트의 군대를 거의 섬멸했다. 킬페리크는 이 상황에 동요해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584년, 테우데리크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어린 아들이 또다시 죽은 것에 극도로 분노해 몸몰 지사가 아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곧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아 풀려난 뒤 곧 사망했다. 이후 킬데베르 2세와 군트람이 연합하여 킬페리크를 공격했고, 킬페리크는 이에 대응해 캉브레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아들 클로타르 2세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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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년 9월 1일, 킬페리크는 딸 리군타를 서고트 왕국으로 보낼 호화로운 호송단을 파견했다. 이후 사냥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 근교의 사냥터로 향했다. 9월 27일, 킬페리크가 사냥에서 돌아와 말에서 내렸을 때 한 사내가 갑자기 달려들어 단검으로 두 번 찔러 죽인 뒤 도망쳐 종적을 감췄다.

킬페리크가 암살되자 프레데군트는 남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국고를 챙겨서 갓난아기 클로타르 2세와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피신해 숨어 지냈다. 그녀는 한동안 정세를 살피다 부르군트의 군트람 왕에게 서신을 보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고 성년이 될 때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섭정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군트람은 즉시 파리에 도착한 뒤 프레데군트 모자를 자기 진영으로 들였고, 나중에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들였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를 자신에게 인도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군트람은 묵살했다. 이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을 불러놓고 당시 사생아로 의심받던 클로타르 2세를 킬페리크 1세의 아들로 인정하라고 명령해 복종을 얻어낸 뒤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삼았다. 당시 그는 브룬힐트의 아들이자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킬데베르 2세도 양자로 들였기에, 사실상 프랑크 왕국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585년 여름에 클로타르 2세의 세례식이 거행되면서 그녀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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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년, 군트람에 의해 로렌의 주교로 임명된 후 자신의 악행을 사사건건 비판하던 프리텍타투스가 부활절에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괴한의 습격으로 검에 찔러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프레데군트가 병실에 방문해 자신을 돌보는 주치의를 옆에 둘 테니 간호받으라고 권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임종을 보기 위한 프레데군트의 변명이라 주장했다. 그레고리우스의 서술에 따르면, 프리텍타투스는 "하느님은 이미 나를 이 세상에서 부르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이 범죄의 주동자인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피 때문에 당신의 머리에 형벌을 내리시기를 바란다."라고 저주를 내린 후 곧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군트람의 허락을 받지 않고 멜란티우스를 새 주교로 세웠다.

얼마 후, 프레데군트는 일찍이 루아르 강과 센 강 사이의 앙제, 생트, 낭트 마을을 장악하고 자신으로부터 독립한 베폴렌 공작을 몰아내고 이 영토를 탈환했다. 베폴렌 공작은 군트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기에, 그녀는 군트람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제안했다. 그러나 사절단은 체포되었고, 군트람은 프레데군트에게 등을 돌리고 브룬힐트의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기로 했다. 587년 11월 28일,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보장하고, 아이가 없을 경우 상호 유산을 확립하고, 상대방에게 모반을 꾀한 자를 넘기기로 했다. 또한 두 왕은 왕국의 분할과 경계를 정했다. 군트람은 파리, 토덴, 반도마, 에탐나, 샤르트르를 받았고, 킬데베르는 모, 상리스, 투르, 푸아티에, 아브론테, 에어, 콩세랑스, 라부르드, 알비를 접수했다. 하지만 군트람이 여전히 킬데베르 2세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는 것에 주저하자, 브룬힐트는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예전에 군도발트를 지지하고 군트람에 대적했던 자들을 넘기기로 했다.

이 움직임에 당황한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는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수아송의 라우칭 공작과 동맹을 맺어 브룬힐트에게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라우칭 공작은 킬데베르 2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궁전 경비원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살해되었고, 많은 이가 브룬힐트를 두려워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다. 브룬힐트는 라우칭이 다스리던 수아송이 언제라도 프레데군트에게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기고, 이를 방지하고자 589년 8월 킬데베르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테우데베르 2세를 수아송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렇듯 갈수록 강성해지는 브룬힐트의 권세를 경계한 프레데군트는 590년 킬데베르 2세와 테우데베르 2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6명의 암살자를 고용해 두 팀으로 나눠서 두 왕을 동시에 죽이게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브룬힐트는 암살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592년, 그동안 프레데군트와 종종 대립하면서도 브룬힐트와 그녀의 대결을 최대한 막던 군트람이 사망했다. 군트람의 부르고뉴 왕국은 아우스트라시아에 병합되었고, 이제 방해자가 사라지자, 브룬힐트와 킬데베르 2세는 오랜 숙적 프레데군트와 클로타르 2세를 타도하려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592년 또는 593년,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로 쳐들어가서 수아송의 드로슈에서 프레데군트의 적군과 격돌했다. 프레데리가 연대기에 따르면,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전투를 중단했다고 한다. 이후 양측은 몇년간 적대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596년 초, 킬데베르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각각 10살과 9살인 두 아들 테우데베르 2세 테우데리크 2세가 왕위에 오르고 브룬힐트가 섭정을 맡았다. 이 소식을 접한 프레데군트는 지금이야말로 브룬힐트를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역을 제패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2살의 아들 클로타르 2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파리로 진격했다. 몇몇 아우스트리아 귀족들의 호응 덕분에 일드 프랑스 일부 지역을 확보한 후,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영내로 진입했다. 이윽고 수아송 인근의 라포에서,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맞붙었다.

막대한 희생자를 양산한 이 전투에서 승리한 프레데군트는 여세를 몰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폐렴에 걸려 쓰러졌고, 1년간 병상에 누워 있다가 사망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클로타르 1세는 위기에 직면했다. 600년, 브룬힐트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다. 당시 16살이었던 클로타르 2세는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의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넘기는 평화 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는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그들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협약을 위반한 클로타르 2세를 응징하자고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그가 독자적으로 진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적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부르군트 선봉대를 이끌었던 베르토랄트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지만, 부르군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여 적장 메로벨을 사로잡고 랑데리크를 패퇴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테우데베르 2세가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하는 바람에 전과를 확대하지 못했다.

606년, 테우데리크 2세는 서고트 왕국의 위테리크 왕에게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오도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룬힐트가 서고트 왕국을 등에 업은 며느리를 제어할 수 없다고 여겨 결혼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우데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각자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연합 공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위테리크를 암살한 뒤 왕위에 오른 군데마르 역시 셉티마니아 공작 불가르를 통해 테우데베르 2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지만 실현에 옮기지 못했다.

이렇듯 주변 정세가 불안해지자, 테우데리크 2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손잡으려 애썼다. 이무렵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부가 메로벨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는 클로타르 2세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던 610년, 테우데베르 2세는 클로타르 2세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이후 브룬힐트의 두 손자간의 내전은 2년간 이어지다가 612년 브룬힐트의 지원을 받은 테우데리크 2세가 막대한 손실을 무릅쓰고 테우데베르 2세를 제압하면서 종결되었다.

613년 8월 23일, 테우데리크 2세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사생아인 시게베르 2세를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증손자를 세우고 계속 권력을 쥐려는 그녀의 야욕에 넌더리가 났고, 숙청을 일삼는 그녀보다는 클로타르 2세의 지배를 받기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아르눌프, 피핀 1세[1] 등이 그를 왕으로 초빙했다. 클로타르 2세가 안더나흐에 도착했을 때, 테우데리크 2세의 아이들과 함께 보름스에 있던 브룬힐트는 그에게 테우데리크에게 정당한 후계자가 있으니 아우스트라시아 왕위를 포기히라고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이에 클로타르 2세는 특별히 소집된 프랑크 민회에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브룬힐트는 클로타르에 맞서기 위해 알보인, 바나차르 및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시게베르를 튀링겐으로 보냈다. 이때 그녀는 알보인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바나차르 등이 클로타르에 합류하려 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알보인은 편지를 읽은 뒤 갈기갈기 찢어서 땅에 던졌지만, 바나차르의 부하 한 명이 이를 발견하고 밀랍판에 붙인 후 주군에게 보였다. 바나차르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깨닫고 다른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그들은 서고트 왕국 출신인 이민족 여자이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한 그녀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고, 이참에 테오데리크의 아이들 중 한 명도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 뒤 브룬힐트와 함께 모조리 죽이고 왕국을 클로타르에게 넘기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연합군이 브룬힐트의 지휘하에 클로타르와 맞서러 진군했다. 샹파뉴의 아시네 강에 이르러 네우스트리아군과 마주쳤을 때, 바나차르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곧바로 귀순했다. 브룬힐트의 원정에 동행했던 시기베르, 코르부스, 메로베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킬데베르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 종적을 감췄다. 브룬힐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딸 테오데린다와 함께 체포되어 클로타르 앞으로 끌려갔다.

클로타르 2세는 메로베의 대부를 맡은 바 있었기에 그를 살려줬지만 시기베르 2세와 코르부스는 죽였다. 이후 브룬힐트에게 40여년 간 프랑크 왕국을 혼란과 고통에 빠뜨리고 여러 왕을 파멸로 몰고 간 책임을 물었다. 이에 모든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한 목소리로 "저 악녀에게 참혹한 죽음을 내려라!"라고 외쳤다. 브룬힐트는 3일 동안 온갖 고문을 받은 뒤 낙타에 태워진 후 조리돌림 당했다. 그 후 발가벗겨진 채 머리카락과 양 팔, 양 다리가 두 마리의 야생마의 발에 묶인 뒤 두 말이 채찍질을 받고 앞으로 내달리면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브룬힐트를 죽이면서 개인적 복수와 함께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지만 622년 새 아내인 시길트와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로부터 자신들을 이끌 왕을 세우라는 강한 압력을 받은 그는 아들인 다고베르 1세에게 아우스트라시아를 넘겼다.

이후 629년 클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네우스트리아인들은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에 반감을 품고 카리베르 2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카리베리의 외삼촌 브로둘프가 이 계획을 주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다고베르는 그들이 미처 왕을 선출하기 전에 재빨리 행동했다. 모든 아우스트라시아 측근들에게 스스로 무장하도록 한 뒤 부르군트와 네우스트리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친히 랭스를 거쳐 수아송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귀족과 주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가 이렇듯 신속하게 움직이자,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다고베르 1세는 브로둘프를 처형했지만, 어릴 때부터 신체가 허약해 오래 살지 못할 게 분명한 카리베르 2세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 632년, 다고베르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3년 전에 왕비 라그네트루드 사이에서 낳은 시게베르 3세에게 넘기고 부르고뉴와 함께 네우스트리아를 통치하다가 638년 사망했다. 죽으면서 네우스트리아 궁재인 에가에게 당시 6살이었던 클로비스 2세를 보좌해줄 것을 부탁했고,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왕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클로비스 2세의 공식적인 섭정은 난틸다 왕비였지만, 실권은 에가 궁재에게 넘어갔다. 에가는 641년 사망할 때까지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다고베르 1세가 귀족들로부터 빼앗아간 재산을 원주인에게 돌려줘서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641년 에가가 사망한 후 새 궁재가 된 에르치노알트는 온순하고 친절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청렴했다고 한다. 그는 648년 색슨족 출신의 노예 바틸다를 사들인 뒤 클로비스 2세의 아내로 삼게 했다.

그러나 부르군트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627년 바나차르 2세가 사망한 후 클로타르 2세가 왕실의 직할지로 삼은 이래, 부르군트에는 별다른 지도자가 세워지지 않았으며, 왕실의 통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부르군트 지역 귀족과 주교들은 프랑크 왕국의 의중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다고베르 1세가 생전에 바스크인을 물리치고 그들과 손잡았던 가스코뉴 귀족들을 통제하고자 세웠던 윌레바트 공작은 리옹과 발랑스 사이의 영역을 사유지로 삼고 권세를 누렸다. 난틸다는 642년 오를레앙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자시느이 조카 라그노베르트와 결혼한 플레차드를 부르군트의 궁재로 삼으려 했다. 플레차드는 부르군트 귀족들에게 그들의 재산과 명예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윌레바트는 이를 따르길 거부하고 프랑크 왕국에 적대적인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642년, 난틸다는 오를레앙 공의회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해 9월, 클로비스 2세는 에르치노알트와 플레차드와 함께 오툉으로 간 뒤 윌레바트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윌레바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확신하고 전 병력을 동원해 오툉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투에서 수많은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전사했고, 윌레바트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플레차드가 부르군트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샬롱에 도착한 직후 열병에 걸려 왈레바트가 사망한 지 11일만에 병사했다.

그 후 그는 전권을 궁재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향락을 누렸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소유물을 조사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고 여자를 유혹하길 즐겼으며, 음식을 미친듯이 먹었고, 술을 퍼마셨다. 말년에는 정신 질환을 앓고 심한 경련에 시달렸다. 또한 이전까지는 모든 왕이 말을 타고 여행했지만, 그는 마차를 탔다고 한다. 657년 9월 11일에서 11월 16일 사이에 사망했으며, 사후 장남 클로타르 3세가 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인 바틸다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에르치노알트 궁재가 사망하자 에브로인을 새 궁재로 삼았다. 에브로인은 집권 직후 614년 클로타르 2세가 반포한 칙령을 폐지했다. 클로타르 2세의 칙령은 귀족들이 판사와 백작 자리를 독점하고 세습하는 걸 허용했고, 왕은 귀족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브룬힐트를 몰아내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에게 보답하고, 그들이 또다시 다른 인물을 왕으로 내세워서 내전을 벌이는 걸 막기 위한 포섭책이었다. 에브로인은 이제는 귀족들이 이 칙령에 의지하여 직위를 세습하는 걸 막았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라고 지시했다.

이 정책에 반감을 품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에브로인을 축출할 임모를 꾸몄고, 파리의 새 주교 시게브란트도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발각되었고, 주교는 처형되었다. 에브로인은 말을 듣지 않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는 한편, 귀족들이 왕궁에 접근하는 것마저 차단했다. 그러나 오툰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가 이끄는 부르군트는 그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관례대로 자치를 누렸다.

662년, 에브로인은 6년 전에 시게베르 3세가 사망한 뒤 그의 양자이자 자신의 아들인 킬데베르 3세를 왕위에 올린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궁재 그리모알드를 처단하기로 했다. 그는 그리모알드와 킬데베르 3세를 네우스트리아로 유인해 처형했다. 이후 수 개월간 차기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될 적임자를 물색한 끝에 시게베르 3세의 조카인 킬데리크 2세를 시게베르 3세의 딸 빌리킬다와 결혼시키고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오르게 했다.

클로타르 3세가 13살에 접어든 665년, 에브로인은 바틸다를 셀라에 있는 수녀원으로 은퇴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그녀가 에브로인을 축출할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에브로인은 이후에도 권세를 누렸고, 클로타르 3세는 별다른 정치 참여를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내다 열병에 걸려 재위 16년째인 673년 3월 10일에서 5월 15일 사이에 사망했다. 사후 동생 테우데리크 3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네우스트리아의 궁재이자 프랑크 왕국 서부의 권신 에브로인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과 어떠한 논의도 없이 그를 새 군주로 내세웠다. 부르군트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와 형제인 파리 백작 바렌 등 주교들은 에브로인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감을 품고 킬데리크 2세와 궁재 울포알드에게 에브로인을 몰아내준다면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킬데리크 2세는 파리로 진군해 귀족들의 호응을 얻었고, 테우데리크 3세와 에브로인은 삭발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생드니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에브로인은 부르군트의 룩셀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675년 킬데리크 2세가 사냥 도중 암살당했다. 그는 수도원에서 소환된 뒤 귀족들에 의해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때 에브로인과 레오데가리우스가 궁재 자리를 놓고 대립한 끝에 에브로인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그는 레오데가리우스와 함께 도주했다. 에브로인은 권력을 장악하고 레오데가리우스를 암살한 뒤 한 소년을 클로타르 3세의 아들이라고 내세우며 클로비스 3세로서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모든 귀족이 호응하지 않자, 그는 클로비스 3세를 도로 폐위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복위했다. 아무런 실권이 없던 테우데리크 3세는 에브로인이 궁재로서 통치를 행사하는 걸 방관했다.

677년, 에브로인은 테우데리크 3세를 대동하여 아우스트라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는 이에 맞서 다고베르 2세와 함께 출진했다. 양군은 랑그르에서 맞붙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678년, 에브로인은 왕을 부추겨 주교 평의회를 소집한 뒤 오툉의 레제 주교를 킬데리크 2세 암살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없었지만, 에브로인의 권세를 두려워한 주교들은 유죄를 평결했고 왕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679년, 울포알드와 다고베르 2세가 잇따라 살해되었다. 에브로인은 아우스트라시아를 병합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테우데리크 3세를 프랑크 전역의 단독 군주로 선포했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인 피핀 2세와 상파뉴 공작 마르틴이 반기를 들었다. 680년, 에브로인은 루코파오 전투에서 두 귀족을 격파한 뒤 아우스트라시아 대부분을 초토화했다. 피핀 2세는 자신의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마르틴은 랑트로 피신했다가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에브로인의 말을 믿고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가 피살당했다. 이제 에브로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얼마 후 그의 잔혹한 성정에 반감을 품은 에르멘프레드에게 궁정에서 살해당했다. 에르멘프레드는 보물들을 챙기고 피핀 2세에게 달려가 귀순했다.

피핀은 새로운 네우스트리아 공작 와라톤과 평화 협약을 맺고 테우데리크 3세의 권위를 인정하되 자신 역시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로 인정받았다. 686년 와라톤이 아들 지젤마르에게 폐위된 후, 처남 베르차르가 뒤를 이었다. 와라톤의 아들 지젤마르와 베르차르는 경쟁자들을 최대한 배제해 권력을 유지하길 희망했고, 이로 인해 많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갖은 탄압에 시달리다가 피핀 2세에게 귀순했다.

687년 군대를 일으킨 피핀 2세는 뫼즈 강을 따라 이동했다. 프랑크 국왕 테우데리크 3세는 피핀 2세의 강대한 권력을 경계하여 베르차르의 편을 들었고, 베르차르는 군대를 일으켜 피핀과 맞설 태세를 갖췄다. 피핀 2세는 평화 협약을 제안했지만, 테우데리크 3세는 베르차르의 조언에 따라 거절했다. 이에 피핀은 새벽에 군대를 뫼즈 강 건너편에 있는 테르트리로 은밀히 이동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베르차르는 적 군영이 텅 비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군영으로 들어가서 버려진 물자를 약탈했다.

이때 사전에 매복하고 있던 피핀 2세의 군대가 덮쳤고, 베르차르의 군대는 별다른 대항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베르차르는 적군에게 쫓기다 끝내 피살되었다. 이후 피핀은 수도 파리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붙잡았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하지는 않고,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까지 맡으면서 프랑크 왕국 전역의 궁재가 되었다. 피핀 2세는 680년대 중반부터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국경을 위협하던 프리지아 부족들을 공략, 원정하여 689년에 물리치고,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알레만니족과 프랑코니아를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켰고, 영향력을 공고히했다. 알레만니아와 바이에른에 기독교 선교사 파견과 수행을 도와 기독교 선교를 지원, 장려했다.

이후 한동안 프랑크 왕국은 단일 왕국으로 있었지만 메로베우스 왕가는 피피누스 가문에 의해 꼭두가시로 전락되어 갔다. 그러다가 714년 그리모알드가 모종의 이유로 급사했고, 뒤이어 피핀 2세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후 그리모알드의 아들 테오도랄드가 궁재를 세습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피핀 2세의 미망인인 플레트루다가 섭정을 맡았다.

카롤루스 가문의 권력 독점과 세습에 반감을 품고 있던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715년 상파뉴 인근의 숲에서 아우스트라시아군을 격파하고 카롤루스 가문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뒤 라간프레드를 궁재로 선출했다. 이후 다고베르 3세가 사망하자, 그들은 킬데리크 2세의 아들로 부모와 형이 암살된 후 수도원으로 보내져 40년간 수도사 다니엘로 살아오던 킬페리크 2세를 수도원에서 꺼낸 뒤 왕에 옹립하기로 했다.

716년, 킬페리크 2세는 라겐프리드와 함께 카롤루스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정벌하기 위한 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는 프리슬란트 왕 라드부드와 동맹을 맺고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을 상대로 쾰른 인근 평원에서 격파했다. 마르텔은 에펠 산맥으로 숨었고, 킬페리크 2세는 라겐프리드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인 메츠에 입성했다. 이제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플레트루다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고를 넘겼으며, 테오도랄드 역시 궁재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롤루스 가문은 몰락하고 메로베우스 왕조가 부활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와 라겐프리드가 네우스트리아로 돌아갈 때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마르텔은 추종자들을 규합하고 병력을 끌어모은 뒤 돌아가는 적을 추격하여 말메디 인근의 앙블레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717년 3월 21일, 카롤루스 마르텔은 네우스트리아로 진군해 캉브레 인근의 빈시에서 킬페리크 2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아우스트라시아로 귀환한 마르텔은 플레트루다와 테오도랄드를 축출한 뒤 클로타르 4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의 세력이 갈수록 커지자, 킬페리크 2세와 레겐프리드는 아키텐의 공작 외드와 동맹을 맺었다. 718년 초, 킬페리크 2세는 외드의 군대와 연합하여 수아송 인근에서 카롤루스 마르텔과 격돌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대패한 킬페리크 2세는 루아르 강 남쪽으로 도주했고, 라겐프리드는 앙제로 도망쳤다. 이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외드는 킬페리크를 버리고 카를 마르텔에게 귀순했다.

때마침 마르텔이 옹립한 클로타르 4세가 사망했다. 이에 마르텔은 외지에 숨어있던 킬페리크 2세에게 전령을 보내 프랑크 왕국 전역의 왕으로 인정할 테니 자신을 궁재로 인정하고 전권을 쥐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더는 대항할 도리가 없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719년 병사들에 의해 방패 위로 올려져서 모든 프랑크인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명목상일 뿐이었고, 마르텔이 사실상 프랑크 군주로 군림했다.

이후 피핀 3세 킬데리크 3세를 수도원으로 몰아내 수도자가 되게 해 메로베우스 왕조를 전복시키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고, 네우스트리아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에 속하였다. 768년 9월 24일 피핀 3세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다시 둘로 분할되어 피핀 3세의 장남인 카롤루스가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대부분을 차남 카를로만이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 일부를 각각 통치했다.

피핀 3세가 봉어할 당시 아키텐에 있던 카를로만은 몸에 열이 나서 아팠지만, 바로 파리의 생드니로 와서 자신의 영지를 획득하였다. 768년 10월 9일 카를로만은 수아송에서 성수 세례를 받고,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 알레만니아, 프로방스, 아키텐 지역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병세는 곧 나았고 그는 정상적인 통치를 시작하였다.

피핀 3세 사후 아키텐에서 독립 운동을 기도하자 769년 3월 카를로만은 형 샤를마뉴가 아키텐을 공략할 때, 카를로만은 지원을 거부했다. 아키텐의 독립 운동을 철저하게 진압한 샤를마뉴는 푸아티에 근처 몽콩투르(Moncontour)에서 프랑크 왕국 군대의 주도권을 쥐려 했지만 카를로만이 반대하여 갈등했다. 카를로만과 샤를마뉴는 수시로 갈등했고 어머니 랑의 베르트라다가 개입해서 중재하였다. 770년 랑의 베르트라다는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와 랑고바르드의 왕 데시데리우스를 갈등 조정에 참여하게 했는데, 후에 샤를마뉴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타실로 3세를 바이에른 공작직에서 폐위시켰다. 그러나 형인 샤를마뉴와 수시로 갈등하였고, 랑고바르드의 왕 데시데리우스는 그를 지지하였다.

아키텐은 명목상 카를로만의 영토였지만 토착 귀족들의 반발이 거셌다. 아키텐을 정벌한 샤를마뉴는 아키텐을 카를로만에게 넘기지 않고, 769년 아키텐에 가스코뉴 공작 루포 2세를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대리 통치하게 하였다. 카를로만은 아키텐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루포 2세와 갈등했다. 카를로만은 자신의 형 샤를마뉴가 자신의 부모 피핀 3세와 랑의 베르트라다가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형 샤를마뉴를 불법으로 태어난 사생아로 믿었다. 형 샤를마뉴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769년 1월 카를로만은 롬바르디아 왕국을 방문했다. 769년 초부터 770년 1월 초까지 카를로만은 롬바르디아 셀츠(Seltz)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한 목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롬바르디아 왕국과 동맹을 맺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를로만은 롬바르디아 왕국의 지원을 확정받았지만, 교황 스테파노 3세는 카를로만에 대해 걱정하였다. 롬바르디아의 왕 데시데리우스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카를로만을 칭찬하였고, 카를로만이 안전하게 자신의 영지로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아인하르트는 카를로만이 형 카롤루스와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려 했다고 지적했는데, 아인하르트는 카를로만의 이탈리아 방문을 형 카롤루스와의 전쟁을 준비하려 한 것으로 인식했다.

770년 1월 어머니 베르트라다는 리에 주에서 샤를마뉴와 부활절을 보내고 난 뒤, 셀츠(Seltz)에 있던 카를로만을 방문했다. 이때 카롤루스는 어머니 베르트라다가 동생 카를로만에게 협력할까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한편 이 무렵 카롤루스는 꼽추 아들 피핀 4세를 낳은 이멜트루드를 폐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다른 딸 데시데리아와 결혼하였다.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를 자신의 정치적 동맹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데시데리우스는 자신의 사위들 중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이는 곧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르드가 갈등하는 원인이 됐고, 샤를마뉴가 랑고바르드와 전쟁을 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771년 6월 카를로만은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상하고, 랭스의 생 레미 수도원 교회에 자신이 매장될 장소를 알아보았다. 때때로 심한 코피를 흘렸던 카를로만은 771년 12월 4일 네우스트리아의 피카르디 지역 서남부 엔의 사모우시(Samoussy)의 자신의 별궁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카를로만이 죽자 부인 게르베르가는 어린 아들들 대신 자신을 왕으로 선언하고 영토를 통치하려 했다. 그러자 카를로만의 장남을 왕으로 세우리라 예상했었던 카를로만의 지지자인 사촌 성 데니스와 풀라드 수도원장 아달하르트(Adalhard)와 바린(Warin) 백작은 카롤루스 대제를 초청했다. 773년 4월 게르베르가는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인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카롤루스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파비아에 있던 이들을 전부 체포한 후 제거하면서 네우스트리아는 더 이상 왕국으로 부르지 않게 되었다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서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2.2. 베르됭 조약 이후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네우스트리아를 비롯한 서프랑크 왕국에 속한 영지들을 차지한 대머리 왕 샤를 2세는 자신의 통치를 반대하는 귀족들을 제압하는데 노력을 기울어야 했다. 네우스트리아의 경우 그나마 안정적이었지만 대신 845년 프랑크 왕국으로 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한 브르타뉴의 노미외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샤를 2세는 브르타뉴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지만 노미외는 851년 죽기 전까지 랭과 낭트, 앙제 등을 계속 공격했다.

샤를 2세는 노미외의 아들인 에리스포외와 앙제에서 조약을 체결해 네우스트리아 서쪽에 위치한 마옌과 셀룬을 양도해 양쪽의 국경을 확정했다.이후 856년 채결된 루비에 조약은 에리스포외가 다시 샤를 2세에게 봉신 맹세를 하는 대신 서쪽 영토를 더 할양했으며, 네우스트리아의 서쪽 영역을 더 축소시켜 투르가 브르타뉴와 접하는 국경도시가 되게끔 했다. 더욱이 바이킹의 침략 또한 겹쳐지면서 샤를 2세는 861년 네우스트리아에 각각 두 명의 변경백을 둬야 했다.

이때 노르만으로도 불리던 바이킹에 대한 변경백으로 최초로 임명된 사람이 보름즈 백작이자 라인가우의 백작인 예스바예의 로베르 3세의 아들인 로베르 르 포르[1]가 임명되어 공동으로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으로 임명된 지라드 가문 출신의 에히터나흐의 수도원장인 아달라트, 랑가우의 백작인 외드, 헤센가우 백작인 베렝가르와 함께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지역을 기반으로 브루타뉴와 바이킹의 침략을 격퇴했다.

한편 샤를 2세는 855년 브리튼 섬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인 웨식스 국왕인 애설울프가 로마 순례후 웨식스로 귀환하는 길에 만나 그동안 공주들은 무조건 수녀원으로 보내는 왕가의 관례를 깨고, 자신의 12살 된 딸 유디트와 재혼시켰다. 그러다가 858년 애설울프가 죽자 첫번째 왕비의 아들이었던 애설볼드가 유디트가 가진 서프랑크 왕국 공주로서의 지위가 너무 탐이 났기에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재혼하다가 860년 만에 사망한 후 유디트가 서프랑크 왕국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본디 관례대로 수녀원으로 보내야 했지만 한때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불순분자마저 기용할 만큼 샤를 2세의 정치적 입지도 좋지 못한 상태였기에 딸의 재혼 상대를 몰색하던 도중이었던 이때 유디트는 이름 없이 무쇠팔(Bras de Fer[2], Iron Arm)이라고 알려진 한 평민[3] 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 평민을 대담한 자(Baudouin)라고 불렀다. 빡친 샤를 2세는 두 연놈을 바로 교황에게 부탁해 파문시키고, 말그대로 추노꾼을 보냈지만 유디트의 사촌이자 로타링기아 왕국 로타르 1세의 장남 로타르 2세에게 피신한다. 그들이 알고갔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로타르 2세의 열렬한 지지 아래 교황에 선출된지라 로타르 2세의 권고와 추천으로 두 커플이 오자 상황을 해명받고 로타르의 부탁으로 파문을 철회한다. 샤를 2세는 3보전진 2보후퇴의 심정으로 그들을 불려들였고 오세르에서 정식으로 결혼한다.

별명이 곧 이름이 된 평민 무쇠팔 보두앵[4]은 바이킹의 공격을 막기 위해 북해에 인접하여 바이킹의 침략이 끊이질 않는데다가 불모지나 다름없으며 조수 간만의 차이로 셀드강에서 하루 두 번의 범람하던 셸드강(Scheldt) 남쪽을 영지로 받았다.

샤를 2세는 그 천하디 천한 사위가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끔살 당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보두앵은 상황을 철저하게 관리했고 그 부부 사이에서 보두앵 2세(Baudouin II van Vlaanderen)가 태어난다. 그는 바이킹의 위협을 진압하고 그의 군대와 영토를 빠르게 확장했으며, 결국 샤를 2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그리고 그의 영지명은 지역의 특색에 맞는 별명을 그대로 붙여 플란데런 백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857년 브르타뉴의 에리스포외가 사촌인 살로몬에게 암살되어 군주 자리를 찬탈당했다. 군주 자리를 차지한 살로몬은 에리스포외가 서프랑크 왕국과 맺은 조약을 그대로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살로몬은 862년 바이킹들을 부추겨 네우스트리아를 공격했고, 바이킹들은 상당 기간 동안 선전했다. 이때 로베르와 함께 공동으로 네우스트라이사 변경백으로 임명되었던 아달라트, 외드, 배렝가르는 해임되어 메인 백작인 가우즈프리드가 임명되었다. 다만 로베르 르 포르만큼은 바이킹 브르타뉴 연합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866년 11월 15일 브리샤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베르 르 포르가 해스테인에 의해 전사하면서 바이킹과 브르타뉴 연합군은 승리했다.

결국 863년 엔트람메스 수도원에서 조약을 채결, 살로몬은 샤를 2세의 봉신이되 사르테 강과 마옌 강 사이의 지역을 할양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로베르의 후임으로 투르의 생 마르탱 수도원장이자 쾰른의 주교인 벨프 가문[5]의 위그가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이자 투르와 앙주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로베르의 장남인 외드는 파리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위그는 886년까지 쾰른의 주교이자 생 마르탱의 수도원장직을 겸하면서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으로 재직한 사이 878년 가우즈프리드가 사망하고 헤르바우게스 백작인 라게놀드가 공동 변경백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874년 카롤루스 1세의 차남이자 롬바르드 분봉왕인 피핀 카를로만의 아들인 피핀이 상리스 백작이자[6]와 발루아 경에 임명하면서 네우스트리아 동부에 정착했다. 이후 886년 베르망두아 백작까지 겸했다. 그 사이 서프랑크 왕국은 884년 샤를로망 2세가 사망하면서 5촌 숙부였던 동프랑크의 왕이었던 뚱보왕 카를 3세가 서프랑크 왕국을 차지하면서 이때 프랑크 왕국이 일시적으로 재통일되었다. 하지만 당시 서프랑크를 침공한 해스테인이 이끌던 바이킹 무리는 여전히 네우스트리아를 위협하고 있었다. 867년 부르쥬를 약탈하였다.

이에 샤를 2세는 콩피에뉴에서 바이킹에 대한 공동 대응을 해줄 것에 대한 댓가로 비레를 비롯한 코탕탱 반도까지 할양해야 했다. 그러나 해스테인의 바이킹 무리는 868년엔 오를레앙을 공격했다. 그리고 872년엔 루아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앙주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 873년 10월에 결국 서프랑크의 왕 샤를 2세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885년 시그프레드와 신리크, 흐로프가 이끌던 바이킹들이 센 강을 거슬려 파리를 포위하자 라게놀드와 위그는 파리를 포위하고 있던 바이킹들을 공격하지만 둘 다 전사하고 만다, 이후 라게놀드가 맡았던 변경백직은 카를 3세의 측근인 포포니드의 하인리히가 맡게 되었지만 그 역시 파리 공방전 중 파리를 돕기 위해 출병후 전사한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외드는 파리 주교 고슬랭, 동생 로베르와 함께 파리 주민들을 상대로 전투를 독려해 거의 1년 동안, 그것도 중간에 역병이 창궐해 공동 지휘관인 고슬랭 등 파리 내의 많은 고위층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공방전을 벌인 끝에 외드가 바이킹들이 다른 지역들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킨 틈을 노려 포위된 파리에서 직접 탈출, 카를 3세에게 원군을 청해서 끌고온 군대에 의해 바이킹들을 공성을 멈추고 후퇴했다.

카를 3세는 전공을 세운 외드를 그의 부친인 로베르 르 포르가 맡았던 네우스트리아 변경백과 함께 서프랑크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또한 하인리히의 후임으로 바이외의 백작인 베렝가르를 임명했다. 하지만 카를 3세는 바이킹들에게 대략 257kg에 해당되는 은 700리브를 뇌물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센 강 통행권을 주어 그들이 부르고뉴를 약탈하게끔 해줬고, 결국 887년 11월 조카 아르눌프의 주도하에 열린 제국회의에서 카를 3세가 폐위되었고, 이때 외드는 카를 3세를 배신 아르눌프를 도왔다. 그리고 17일 카를 3세의 폐위와 함께 서프랑크 왕국은 다시 동프랑크 왕국과 분리되었다.

이때 샤를로망 2세게 이복동생인 샤를 3세가 있었다. 하지만 카를 3세에 의해 서프랑크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되다가 결국 배신해 아르눌프를 도왔던 외드가 자신이 서프랑크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본래 카롤링거 왕조의 본거지는 현재의 저지대 국가들이 들어선 아우스트라시아였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이 베르됭 조약으로 셋으로 분열된 후 여러 조약으로 그 영역으로 조정되면서 점차 변방 지역으로 전락, 심지어 아우스트라시아는 동서 프랑크 국왕들에 의해 그 영역을 동서로 분할되었기에 서프랑크의 왕들은 네우스트리아의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문제는 아우스트라시아에 대한 네우스트리아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 본디 네우스트리아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본거지와 같은 곳으로 메로베우스 왕조에 대해 우호적인 곳인데다가 현시점에서 로베르 가문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상태였다. 또한 외드 본인은 단 수백명의 병력으로 서프랑크 왕국을 침략한 20,000여명의 바이킹을 물리치고, 왕국을 지켜낸 공로가 있었고, 모계쪽으로 루도비쿠스 1세의 외손자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었다.

결국 서프랑크 왕국의 주교들과 제후들은 외드를 왕으로 추대했다. 888년 몽포콩과 다른 여러 곳에서 노르만과 싸워 승리했지만 그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지 못했고 비만왕 샤를의 반대를 받았고 후에는 랭스 대주교 풀크와 몇몇 강력한 귀족의 지원을 받은 단순왕 샤를 3세의 도전을 받았다. 더욱이 카롤링커 왕실의 방계였던 베르망두아 백작 피핀 3세와 그의 동생 헤르베르트 1세가 샤를 3세를 지지하면서 네우스트리아는 사실상 동서로 분열되었다.

한편 외드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지만 모두 일찍 요절했고, 왕이 된 뒤 그는 적자가 없었으므로 파리 백작위와 함께 네우스트라이사 변경백직을 동생인 로베르 1세에게 주었으며, 이때 공동직이었던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을 하나로 통폐합시켰다.

외드는 898년 죽었다. 그의 자식들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직까지 자신에게 반대한 친 카롤링거파 귀족들들도 있었기에 결국 샤를 3세를 다음 왕으로 인정해야 했다. 로베르는 형이 죽자 그의 유지를 받들어 왕위를 주장하지 않고, 샤를 3세에게 충성맹세를 했다. 그는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 및 파리 백작직을 그대로 유지했다.

한편 흐롤프 890년에는 바이외에 상륙하여 카롤루스 왕실의 방계 후손인 바이외 백작 피핀 2세를 살해하고, 그의 딸 포파를 납치해 부인으로 삼았다. 기수를 돌려 서부의 브르타뉴를 침략했으나 브르타뉴의 대공 알랭에게 크게 패배했다. 891년에는 리지외를 약탈했고, 892년에는 다시 한번 파리를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샤를 3세는 군대를 직접 이끌고 흐롤프의 바이킹 군세와 싸웠으나 연전 연패를 한다. 이기세를 몰아 흐롤프의 바이킹 무리는 898년에는 센 강 하구의 루앙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정착했다. 그리고 911년 샤르트르를 습격했다. 이에 로베르는 샤르트르의 주교 및 부르고뉴와 푸아티에의 도움을 받고 흐롤프의 바이킹 세력을 격퇴한다.

하지만 로베르를 정적으로 여기던 셔를 3세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왕국을 역탈을 일삼은 흐롤프와 그의 바이킹 군세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영원히 막아내는 것과 함께 동시에 라이벌인 로베르의 힘을 약화시킬 방도를 찾게되었다. 바로 그들이 정착하고 있는 루앙을 비롯한 그 일대의 땅을 정착지로 내주는 대신 흐롤프와 그의 바이킹 군세를 기독교로 개종과 함께 자신의 봉신을 삼는 것이었다. 샤를 3세의 계획에 네우스트리아의영토를 내줘야할 로베르는 물론이고 왕실의 먼친척이자 헤르베르트 1세의 아들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마저 반대하고 나섰지만 샤를 3세는 독단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나섰다.

911년 7월 20일, 롤로는 서프랑크의 단순왕 왕 샤를 3세와 노르망디인에게 점령되었던 네우스트리아의 일부인 동부 노르망디를 영토를 하사받는 대신 더이상 약탈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롤로는 수락했고, 생 클레르-쉬르-엡트에서 협약에 서명했다. 센강 어귀 양편의 노르망디 땅을 받는 대가로, 루앙 백작에 임명된 롤로는 샤를 3세를 주군으로 받아들였으며 세례를 받았다. 이 조약으로 샤를 3세는 롤로에게 네우스트리아 동부의 일부를 주었는데 이 지방을 그뒤 노르망디라 부르게 되었다. 롤로는 처음에는 샤를과의 약속을 지켰으며 이에 따라 몇 차례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러나 얼마 뒤 롤로는 약속을 어겼고, 단순왕 샤를과 조약을 맺은 지 몇 년 안 되어, 그는 공격을 다시 시작했고 서쪽으로 지배를 넓혀 갔다. 그 때마다 로베르는 롤로의 침략 행위를 방어해갔다. 한편 샤를 3세는 롤로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낸 911년을 전후로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유아왕이 죽자 같은 카롤루스 집안인 자신의 동프랑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로트링겐을 침공했는데 로트링겐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이 땅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직접적인 통치는 하지 못했기에 그는 이들 로트링겐의 귀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해 그들의 인심을 얻으려고 했다.

다만 이로 인해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홀대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왕실의 방계였던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를 비롯한 네우스트라이사의 대다수의 귀족들은 자신들과 친밀한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를 추대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922년 6월 29일, 귀족들은 샤를 3세가 노르드인과 싸우러 간 틈을 타 로베르 1세를 왕위에 추대했다. 로베르 1세는 다음날 랭스에서 대주교의 추도를 받으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샤를 3세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로베르 1세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치러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는 로트링겐으로 도주해야 했다. 그 후 자신 덕분에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루앙 백국을 세울 수 있었던 바이킹 출신의 롤로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롤로는 이를 수락하여 로베르 1세가 장악한 파리 인근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로베르 1세가 롤로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샤를 3세가 이 틈을 타 수아송으로 진격했다. 로베르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친히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샤를 3세를 막으려 했다. 이리하여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건 전투의 막이 올랐다.

922년에 발생한 수아송 전투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여 양측의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전력이 분산된 로베르 1세의 군대에 비해 샤를 3세의 군대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샤를 3세는 개인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지휘권을 풀베르또와 하롤드 백작에게 위임했다. 그는 또 50명의 전사들에게 로베르 1세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이후 벌어진 전투 와중에 로베르 1세가 전사들에게 습격당해 죽으면서, 샤를 3세의 계획이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로베르 1세의 아들인 대(大) 위그[7]가 부친의 시신을 병사들에게 보여주며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면서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대 위그는 각지에서 몰려온 지원병을 규합한 뒤 반격을 가했고, 샤를 3세로부터 지휘권을 위임받은 풀베르또를 붙잡아 '왕을 살해한 혐의'로 처형했다. 이로 인해 사기가 뚝 떨어진 데다, 샤를 3세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싸울 의향이 없었던 로트링겐 장병들은 전장을 이탈했다. 이리하여 수아송 전투는 로베르 1세 측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위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프랑크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대신 매부인 부르고뉴 공작 라울이 왕으로 즉위했다. 위그 드 그랑은 아버지의 지위와 특권을 상속받았으며, 매부인 라울로부터 멘 백작령 등도 받아냈다. 위그 드 그랑은 라울의 저치적 파트너로서 그와 함께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를 견재했다. 라울은 외조카사위이자 동서였지만 정통인 카롤링거 왕실의 일원이자 네우스트라시의 귀족들 중 로베르 가문과 함께 가장 강력한 귀족인 헤르베르트 2세는 교황 요한 10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샤를 3세를 계속 감금하면서 그를 이용해 라울 왕에게 각종 이권을 요구했고, 라올 또한 헤르베르트를 경계했다. 또한 이시기를 기점으로 네우스트리아는 내부적으로 점차 분할되어 갔다. 한때 외드의 수중에 있던 앙주 백작직이 929년 한때 앙주 부백작직을 수행했던 잉젤거의 아들인 폴크 1세에게로 수여되었고, 933년 라울은 자신에게 협조적인 노르망디 백작 기윰에게 체널 제도를 하사했다.

936년 라울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저 멀리 잉글랜드로 도주한 샤를 3세의 아들인 루이 4세가 서프랑크의 왕위에 올랐다. 이때 위그 드 그랑은 말년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서프랑크 왕국의 권신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 또한 그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프랑크의 왕위를 주장하는 것보다는 루이 4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루이 4세는 재위 초까지만 하더라도 위그 드 그랑에게 의존적이었다. 심지어 왕위를 양보해준 댓가로 그에게 프랑크 공작직도 수여했다. 위그 또한 이에 대해 루이 4세의 즉위를 반대해 반란을 일으킨 라울의 동생 부르고뉴 공작 위그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위그는 부르고뉴 북부의 상스와 트루아, 랑그르 등의 지역들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937년 루이 4세는 위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는 이제 동맹이 된 부르고뉴 공작 위그와 함께 위그 드 그랑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는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고, 나아가 939년 독일왕 하인리히 1세의 딸이자 로트링겐 공작 기셀베르트의 미망인이었던 게르베르가와 결혼을 했다. 이에 위그 드 그랑 또한 940년 게르베르가의 여동생인 하드윅과 결혼하면서 두 사람은 동서지간이 되었지만 이미 둘 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와 오토의 동맹은 얼마안가 끝나게 되는데 루이 4세가 무리하게라도 카롤루스 대제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으로 그는 오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로트링겐과 프랑코니아의 공작들인 두 에버하르트들 및 오토의 동행 하인리히의 반란을 원조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적대적 관계가 되었고, 위그 드 그랑은 오토 1세와 가까이 하게 되었다.

943년 2월 23일 루이 4세는 먼 친척이지만 선친의 원수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드 2세에게 회담을 한다는 핑계로 생 캉탱부른 후 그를 체포한 후 교수형을 내렸다. 위그 드 그랑과 함께 네우스트리아를 양분하고 있던 헤르베르트 2세가 제대로 된 후계를 정하기 전 죽으면서 베르망두아 백작령은 그의 아들에 의해 분열되었다. 이과정은 3년 동안 걸렸고 위그 르 그랑의 중재로, 아달베르트는 베르망두아, 생 캉탱을, 로베르는 뫼욱스와 트루아 및 부르고뉴공국 내의 영지를, 귀도는 수아송을, 헤르베르트 3세는 오모이와 수아송 내의 샤토티에리 지역을 상속받는 것으로 협상하였다.

한편 942년 노르망디 백작 기윰 1세가 어린 아들 리샤르 1세를 남기고 암살되자 노르망디 백국은 롤로의 측근이었던 베르나르 르 다누아가 섭정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945년과 946년에는 하랄 1세 블로탄이 공격했을 때는 자신의 공국을 지키기 위해 루이 4세와 위그 르 그랑의 영지를 침략하기도 했기에 루이 4세는 이사건과 함께 리샤르의 나이가 어린 것을 핑계로 자신이 직접 노르망디를 지배하고자 했다.

노르망디를 얻는다면 네우스트리아 북부에 카롤링거 왕조의 직할령이 생긴다는 뜻이고, 카롤링거 왕조의 직할령은 쇠락해가는 카롤링거 왕조의 힘을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자신의 측근 에루앙을 노르망디의 지방관이자 노르망디 백작의 섭정을 자처하게 하여 노르망디로 보냈으며 리처드 1세를 자신의 궁정에서 교육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리처드가 궁정에 온다면 그를 실명시켜 제거할 생각이었다.

결국 945년에 루이 4세는 자신이 노르망디 백국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위그 드 그랑의 귀에 먼저 들어가게 되는데 이미 루이의 궁정에 스파이를 심은 것으로 보이며, 위그 드 그랑은 곧바로 그 소식을 노르망디의 귀족들에게 알렸으며, 노르망디에 있는 노르만 귀족들은 인접한 베르망두아 백작령의 귀족들과 함께 매복하여 에루앙을 죽이고 루이 4세를 감금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루이 4세를 파리에 있는 위그 드 그랑에게 넘기면서 루이 4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포로 신세가 되었다.

1년간 투옥된 루이 4세는 왕비인 게르베르가를 통해 독일왕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토는 위그 드 그랑이 자신이 제어할 만한 수준의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대신 권력이 약함이 만천하에 들어난 루이 4세를 지원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오토 1세는 군사를 보내 서프랑크 왕국의 문제에 개입하여 루이 4세를 풀어주고 요구했고, 이후 교황청이 개입했고, 서프랑크 왕국의 국내 여론도 국왕을 석방하라는 요구가 강해지면서 루이는 풀려나게 되었다. 위그는 루이 4세의 석방을 거부하다가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파문당하고 결국 루이를 풀어주었다.

풀려난 루이는 곧 오토 1세에게 군사를 빌려 946년 랭스를 되찾았으며 949년에는 레온 지역을 다시 손에 넣었다. 948년 오토 1세는 루이 4세와 위그 르 그랑과의 갈등을 중재할 목적으로 잉겔하임(잉겔하임암라인)에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잉겔하임 회의에서는 왕권은 신성 불가침으로 선언되고 이를 어긴 위그 르 그랑은 이를 어겼다며 파문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위그 르 그랑은 파문에 개의치 않았고 루이 4세의 영지였던 수아송 지역을 약탈하였으며, 동프랑크가 점유하던 로렌 지역까지 쳐들어가 약탈하였다. 오토 1세는 루이 4세를 지원하여 서프랑크 왕국의 북동부 지역에서의 루이의 영향력을 키워주었다. 이후 위그와 계속 갈등관계에 있었지만 951년 동,서 프랑크의 종교회의와 교황에 의해 위그는 파문당했다. 위그는 곧 루이 4세와 다시 휴전 겸 화해를 청했다.

950년 초 왕비 게르베르가는 갑작스러운 종말에 대한 불안에 빠져, 몽티에르의 수도자 아드소(Adso)를 초빙하여 그의 자문을 받게 했다. 950년 오토 1세의 중재로 위그 르 그랑과 일단 화해하였다. 954년 9월 10일 루이 4세는 랭스 부근에서 승마 사냥중 늑대 무리를 보고 도피하던 중 갑자기 낙마하여 죽었고, 제위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들 로테르에게 돌아갔다

위그 드 그랑은 왕의 외척인 독일 왕국에서 보내진 고문관들과 함께 서프랑크의 정치를 양분했지만 956년 59세의 나이로 죽으면서 상황이 달라질 것처럼 보였다. 위그 드 그랑은 늦게 아들들을 봤기에 장남인 위그 카페의 나이는 고작 15세였다.

아내인 작센의 하드윅은 하인리히 1세의 딸이었기에 오토 1세와 당시 섭정으로 온 브루노에게도 아들의 후견인이 되 줄 것을 요청한 상태였다. 이때 카롤링거 왕실 측에서 위그 카페가 아버지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네우스트리아 변경백령의 봉신들을 즉각 독립시킬 것을 요구했다. 결국 이 요구는 들어지면서 네우스트리아는 앙주 백작령, 베르망두아 백작령, 블루아 백작령[8]으로 사실상 분할되었으며, 위그 카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름뿐인 네우스트리아 변경백과 파리, 오를레앙과 푸아시, 상리스, 아티니, 몽트뢰유 등의 일부 도시들이나 마을밖에 없게 되었다. 더욱이 이 지역들은 하나의 영토로 된 것이 아닌 제각기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특히 위그 카페 카페가 있던 파리는 외곽 지역만 나간다면 곧바로 베르망두아와 블루아 백작령과 접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가 되었다.

일단 위그 카페의 존재만으로 네우스트리아의 반 카롤링거파 귀족들의 구심점이 되었지만 아버지대에 까지의 영지의 규모를 비교하면 로베르가의 권력은 반 카롤링거파 귀족들을 제어할 수준은 아니었기에 위그 카페는 로테르와 협업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위그 카페는 카롤링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가 성년이 된 시기 로테르는 독일의 작센 왕가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작센 왕가는 노골적으로 서프랑크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로테르의 동생 샤를을 로타링기아의 공작으로 임명해 로테르를 끊임없이 견제하려고 했고, 작센 왕조가 파견한 독일인 고문관들을 프라크 궁정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무엇보다 오토 1세가 죽고 오토 2세가 즉위하면서 로테르는 작센 왕조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위그 카페는 이 기회를 포착해 로테르를 돕는 척 독일인 고문들을 내쫓고, 로타링기아에 대한 로테르의 공격을 돕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이외로 서프랑크의 군세가 독일 왕국을 압도했다. 오토 왕조의 본거지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아헨조차 한때 로테르의 군대 아래에 짓밟혔다. 물론 이 군대를 이끌었던 것은 위그 카페와 그의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앙리였고, 그들은 3일간 아헨을 약탈하였는데, 마지막 날 샤를마뉴의 독수리 상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을 서쪽으로 바꿔 놓았다. Historia Francorum Senonensis에 따르면 이는 로테르가 언제든지 아헨을 정복할 수 있다고 돌려놓았다고 서술한 반면, 메르제부르크의 주교 티에트마르는 단지 로테르가 진짜 샤를 1세의 후손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돌려놓았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이 공격은 사실상 위그 카페의 작품이었기에 단지 로테르가 오토 왕조를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돌려놓았다고 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 형제는 로테르의 통수를 쳤다. 위그 카페는 독일이 서프랑크 따위 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그리고 로테르의 도발에 황제가 어떻게 반응할 지도 알고 있었다. 위그는 딱 3일 뒤에 군사를 물려 서프랑크로 돌아갔고, 오토 2세와 샤를은 아우스트라시아 서부를 중점으로 서프랑크를 약탈합니다.

결국 978년 11월 로테르는 자신의 본거지가 폐허가 되자 위그 카페의 본거지였던 파리로 도망가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상 로테르의 권한은 서프랑크에서 상실되었다는 것을, 오토 왕조는 로테르의 동생인 샤를을 샤를 4세로 삼으려고 하고 위그 카페는 진작에 자신을 추월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오토 2세는 이이상 밀어버리면 되려 위그 카페에게만 힘을 실어줄 꼴이 된다는 것을 알고 980년 평화조약을 채결한 후 물려났다.

이로서 서유렵 세계는 사실상 두 개의 세력이 지배하는 형국으로 바뀌게 됩니다. 독일의 오토왕조와 네우스트리아의 위그 카페이며 이제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은 사실상 잔존세력만을 유지한 채로 랑에 은거하는 형국이 되었다. 결국 로테르는 로타링기아의 지배권을 오토 2세에게 넘기며 생존을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후 로테르는 프랑스 남부의 귀족들의 빌리기 위해 자신의 어린 아들인 루이 5세를 남프랑스의 대영주였던 레몽 3세의 미망인이던 앙주의 아달라이데와 혼인시키려고 하는 것과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와 손잡고, 한 로트링켄 공국을 공격하려고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결국 986년 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19세의 나이로 즉위한 루이 5세는 이제 위그 카페의 꼭두각시였다. 그는 작센 왕조에 대해 복종하자는 위그 카페의 정책을 아무런 정치적 부담감 없이 내세우기 위한 바지사장에 불과했다.[9] 또한 불과 즉위 1년 만에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을 상대로 반역 혐의를 추궁하는 재판[10] 및 콩피에뉴에서 오토 3세의 모후인 테오파노와 협약을 맺기 위해 가고 있다가 낙마 사고로 20세의 나이로 죽게 되었고, 로테르의 동생 샤를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승권이 박탈되었다는 이유와 함께 모든 것을 체념한 대주교 아달베롱에 의해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의 왕이 되면서 네우스트리아는 완전히 해체되어 이제 카페 왕조의 왕령지인 파리, 오를레앙과 푸아시, 상리스, 아티니, 몽트뢰유만이 남게 되었다.
2.3. 노르망디 백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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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식 세례를 받는 흐롤프(롤로).

911년 7월 20일, 서프랑크 왕국단순왕 샤를 3세 바이킹 군벌중 한명이었던 흐롤프는 생클레르쉬레프트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샤를 3세는 흐롤프와 그 무리에게 점령된 네우스트리아의 일부인 센 강 하구 양편을 양도하고, 루앙 백작으로 봉하며 샤를 3세의 서녀인 기셀라를 흐롤프의 부인으로 내주는 대신 흐롤프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장인인 샤를 3세를 주군으로 받들며 다른 약탈자로부터 방어한다는 조건이었다. 측근인 베른하르트를 비롯한 휘하 바이킹들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흐롤프는 로베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흐롤프'였던 본명은 프랑스어로 불리면서 롤로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롤로는 처음에는 약속을 지켰으며 몇 차례 다른 약탈자를 물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장인인 샤를 3세가 로베르 1세와 느스트리 귀족들의 쿠데타에 의해 폐위를 당하자 다시 파리를 습격하고 다른 여러 곳을 약탈했다.

한편 롤로가 센 강 하구에 자리잡자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북부에 정착했다. 후에 이 지역을 북부인의 땅이란 뜻에서 노르망디(Normandie)로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거칠고 무지몽매했으나 프랑크 왕국의 언어와 풍습, 종교를 받아들이고 약탈을 자제했다. 이 프랑스어를 쓰고 가톨릭을 믿는 이 금발벽안의 거인들을 노르만족(Normands)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윽고 923년 수아송 전투에서 로베르 가문의 로베르 1세가 결국 단순왕 샤를 3세에게 암살당하면서 왕위쟁탈전이 샤를 3세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으나 로베르 1세의 아들인 대 위그가 반격하여 샤를 3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샤를 3세를 지지했던 롤로는 약탈을 중지했다. 그러나 923년 로베르 1세의 사위 라울과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샤를 3세가 포로로 잡혀 감금당하자 이를 구실로 다시 서프랑크 왕국의 여러 곳을 침공하여, 약탈했다. 롤로는 중부 노르망디를 빼앗고, 925년 플랑드르까지 진출하여 일부 영지를 점령하였지만 플랑드르의 아르눌프 1세에게 반격으로 점령지를 도로 밷어냈다가 결국 보두엥 2세로부터 플랑드르의 일부 땅을 할양받기도 했다.

927년 롤로는 죽기 전 아들 기욤 1세 롱스워드에게 루앙 백작령을 물려주었으며, 기윰 1세는 즉위 초반부터 아버지의 팽창 정책을 이어 받아 931년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은 대위그와 헤르베르트 2세가 브르타뉴의 바이킹 세력을 공격했을 때 그 또한 같이 공격한 것으로 보이고 있으며 933년에는 코탕탱 반도까지 확장하여 오늘날 노르망디 지방의 영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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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와 아들 기윰 1세에 의해 완성된 노르망디의 강역

다만 기윰은 아버지와 달리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인으로 자랐기에 934년 베른하르트를 비롯한 아직까지 북유럽 이교신앙을 고수하는 아버지의 옛측근들의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고, 반란군들은 루앙 인근까지 치고 들어왔으나 기윰은 중기병들을 돌격시켜 이반란을 진압했지만 반란에 가담한 자들 중 베른하르트는 나중에 섭정을 맡기까지 했기에 처벌자들을 거의 없어 보여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그의 권력이 약함을 반증하고 있다.

935년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의 딸 리우트가르트와 결혼하면서 베르망두아 백작령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936년 라울이 죽자 기윰은 잉글랜드 왕국으로 망명하고 있던 루이 4세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복위시키는데 협력했다. 하지만 롤로때부터 플랑드르와의 악연으로 인해 기윰은 아르눌프 1세와 항상 대립관계였고, 때문에 서프랑크의 다른 귀족들의 지원외에도 독일의 지원을 받기 위해 938년 오토 1세에게 충성 맹세를 하기까지 했다.

938년 아르눌프는 몽트뢰유를 점령하자 기윰은 몽트뢰유를 탈환하기 위해 아르눌프와 싸워 다음 해에 몸트뢰유를 되찾는데 성공했고, 이후 피카르디를의 해안을 봉쇄해 플랑드르가 확장되는 것을 억제했다. 이후 942년 아르눌프는 화의를 구실로 파퀴니에서 만나 화의할 것을 청하자 기윰은 아무런 의심없이 파퀴니에 왔다가 암살당하고 만다.

기윰은 리우가르트와 정식으로 혼인은 했지만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대신 스포르타라는 정부에게서 리샤르라는 이름의 사생아만 있었고, 그의 나이 또한 매우 어렸다. 이는 왕령지의 확대를 노리고 있던 루이 4세의 노르망디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갖게 되었다.

리샤르는 사생아임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노르망디의 공작이자 루앙의 백작이 되었다. 하지만 고작 10살 밖에 되지 않았기에 베른하르트 외의 봉신들이 섭정으로서 노르망디 공국을 통치했다. 자신의 측근 에루앙을 노르망디의 지방관이자 노르망디 공작의 섭정을 자처하게 하여 노르망디로 보냈으며 리처드 1세를 자신의 궁정에서 교육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실제로 리샤르가 궁정에 온다면 그를 실명시켜 제거할 생각이었다.

결국 945년에 루이 4세는 자신이 노르망디 공국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위그 드 그랑의 귀에 먼저 들어가게 되는데 이미 루이 4세의 궁정에 스파이를 심어 왕이 뭘 하고 있는지를 속속히 파악하고 있었고, 위그 드 그랑은 이사실을 노르망디의 귀족들에게 알렸으며, 노르망디에 있는 노르만 귀족들은 매복하여 에루앙을 죽이고 이후 루이 4세의 군대를 공격해 루이 4세를 붙잡아 감금한 후 그리고 곧바로 위그 드 그랑에게 넘겼다.

다만 리샤르가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받기 전꺼지는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는데, 이는 위그 드 그랑을 지지했던 독일 왕 오토 1세가 위그 드 그랑이 통제가 불가능한 생각 이상의 야심가임을 깨닫고 태도를 바꾸어 루이 4세를 지지하면서 양측간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때 리샤르는 위그 드 그랑의 봉신이 되어 간신히 그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고, 이후 베른하르트를 비롯한 섭정들이 물러난 후 노르망디의 공작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다.

960년 리샤르는 조부인 롤로가 바이킹 두령 시절 약탈로 파괴한 노르망디 내의 수도원들을 복구하는 등 노르망디의 재기독교화를 진행했다. 또한 위그 드 그랑의 딸인 엠마와 혼인하면서 로베르 가문과는 더욱 굳건한 봉신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962년, 블루아 백작 티보 1세는 리샤르의 본거지인 루앙을 침공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지휘 아래 노르만족은 센 강을 건너기 전에 블루아 군대를 몰아냈다. 이에 왕인 로테르는 리샤르의 보복이 서프랑시아의 많은 부분을 뒤흔들 것을 두려워하여 둘 사이의 더 이상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중재에 나서면서 일단락 되었다.

리샤르 1세는 자위적으로 변경백 칭호를 자칭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를 전후로 노르망디 가문 구성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백작을 자칭하기 때문에 본가의 가주로서 분가 구성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보다 더 격이 높아 보이는 칭호를 써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968년 아내인 엠마가 적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했다. 하지만 리샤르는 이미 이전에 루앙과 디에프, 루아르브에 걸친 산림 지대를 관리하던 데인족 혈통의 산림지기의 딸인 군도르를 정부로 두어 리샤르 2세를 비롯한 여럿 사생아를 두고 있었다. 이에 리샤르는 동명의 아들을 비롯한 군도르 소생의 여러 사생아들을 적자로 인정받기 위해 군도르와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리샤르는 통치기간 동안 노르망디 내에 봉건제를 도입해 봉신들을 통해 노르망디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통제하려고 했고, 상술한 종교 정책과 맞물려 그의 치세의 노르망디는 그나마 평화적으로 안정되면서도 웅집력이 있는 영지가 되었다. 987년 카롤링거 왕조의 루이 5세가 20세의 나이에 후계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서프랑크 왕국은 이제 누굴 왕으로 내세워야 할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루이 5세에게 숙부인 로렌 공작 샤를이 있었지만 루이 5세가 서프랑크의 왕위에 오르기 전 그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형수인 엠마 왕비가 다른 남자와 사통해서 낳은 사앵아라고 주장하다가 형인 로테르의 노염움을 받고 왕위 계승권이 박탈된 상태였다.

이에 서프랑크의 제후들과 주교들은 이제 이름뿐인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이자 파리 백작인 위그 드 그랑의 아들인 위그 카페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선출하면서 서프랑크 왕국을 선거왕정으로 만들어 내려고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반 키롤링거 파의 의의가 사라면서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이 주축으로 된 반 카롤링거파벌은 해체되면서 위그 카패의 편을 들어줄 귀족들은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

이미 전처인 엠마가 죽은지라 로베르 가문과는 연결고리가 약해지기는 했으나 리샤르 1세는 앙주 백작인 폴크 네라와 함께 위그 카페 몇 안되던 지지 세력중 하나였다.

991년 바이킹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는지 시기미상이나 잉글랜드를 습격했고, 잉글랜드 국왕인 애설레드 2세는 바이킹을 앞세우던 덴마크의 국왕 스벤 트베스케그와 그의 아들 크누트 대왕의 침공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발생한 노르망디의 약탈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했고, 얼마 안가 교황 요한 15세의 주선 하에 양자가 화의를 했다.

996년 리샤르 1세는 페캉에서 병환으로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리샤르 2세가 그 자리를 승계했는데, 서른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숙했는지 리샤르 1세의 이부동생인 라울 드 이브리가 리샤르 2세의 모친인 군도르와 함께 섭정이 되었는데, 이때 노르망디에 농민들과 귀족들의 반란을 직면했는데, 이중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 가운데 리샤르 1세의 또다른 사생아인 에모아 백작 기윰 또한 가담되었다. 라울은 두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고, 기윰을 붙잡아 감옥에 투옥했으나 이후 탈옥했다. 이후 5년간 라울 드 이브리와 군도르가 섭정으로 노르망디 공국을 이끌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루앙 백작 대신 노르망디를 전체를 통치하는 것을 나타내는 노르망디 공작을 쓰기 시작했다.
2.4. 앙주 백작령(페이 드 라 루아르 북동부·상트르 발 드 루아르 남서부)
앙주 백작령은 본래 898년 외드때까지 로베르 가문의 수중에 있던 영지였다. 이때 앙제의 부백작으로 잉젤거라는 있었는데 그는 카롤링거 왕가와는 밀접한 인물로 샤를 2세에 의해 876년을 전후 오를레앙과 투르의 부백작으로 임명된 상태였고, 그의 아내는 투르와 앙제의 대주교들의 조카였다.

879년 루이 2세에 의해 앙주의 백작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루이 2세가 사망한 후인 886~887년 외드가 앙제의 정통 백작임을 공인되면서 앙주 백작직을 인점받지 못하게 되었다. 잉젤거는 888년에 사망했고, 이후 그의 아들인 폴크 1세가 898년 앙주의 부백작직을 승계받았다.

이후 898년 투르의 부백작을 겸하는 것부터 시작해 909년에 로베르 가문의 다른 봉신인 티보에게 넘기고, 낭트 백작직을 맡다가 오타르와 호로알드라는 야를들이 이끌던 바이킹 집단에게 잃게 되었다. 이후 929년 앙주 백작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상 로베르 가문이 앙주를 방치하거나 아니면 잉젤거 가문에게 양도한 것인지는 그것도 아니면 봉신으로 계속 남는 전제하에서 묵인해준 것인지는 불명이다.

어째든 폴크 1세는 942년까지 앙주 백작을 자칭하다가 사망한 후 폴크 2세에게 앙주 백작이 되었다. 앙주 백작이 된 폴크 2세는 잉젤거 가문이 앙주의 지배권이 더욱 공고해지기 위해 결혼 동맹을 활용했다. 장녀인 아델라이데 블랑쉬는 아버지의 명으로 아키텐 동부를 통치하던 제보당 부백작 에티엔과 결혼했다. 950년대 첫부인인 게르게르베가 사망한 후 그는 블루아 백작 티보 1세의 이북 여동생이자 브르타뉴 공작 알렝 2세의 미망인 로실과 재혼했다. 그리고 이결혼을 통해 블루아 백작인 티보 1세와의 결혼 동맹과 함께 브르타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처 사이에서 본 장난 조프루아를 카롤링거 왕조의 방계인 베르망두아 백작 로베르의 딸 모의 아델라이데와 혼인시키면서 앙주 가문이 프랑스 대귀족들의 대열에 합류시켰다. 그녀의 혈통은 카롤링거 왕조 뿐만 아니라 어머니쪽으로 부르고뉴 공작이자 트루아의 백작인 길베르의 외손녀였기에 이들과도 긴밀한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956년 위그 드 그랑이 어린 아들인 위그 카페를 비롯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자식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카롤링거 왕조는 사실상 네우스트리아 변경백령에 속한 영주들을 독립시켜 네우스트리아를 사실상 해체시키라는 요구를 로베르 가에 요구하면서 앙주 백작령은 사실상 독립되었지만 카롤링커 왕가의 생각과 달리 폴크 2세를 비롯한 네우스트리아의 서쪽의 영주들은 여전히 로베르 가에 충성적인 태도를 보였다.

958년 의붓아들인 브르타뉴 공작 드로고가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폴크 2세는 낭트 뿐만 아니라 브르타뉴까지 차지했다. 이는 드로고의 죽음 이후 브르타뉴가 혼란에 빠져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2년 후인 960년 폴크 2세가 사망하자 조프루아 1세가 앙주 백작직을 승계했다.상술한대로 950년대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의 아델라이데와 혼인하면서 조프루아는 서프랑크의 대귀족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다만 브르타뉴 알렝 2세의 사생아인 호엘 1세가 브르타뉴인들의 지지를 받고 공작위를 인정받은 상태였고, 마찬가지로 낭트 백작으로 공인된 상태였다,

이에 조프루아는 호엘 1세에게 낭트까지 넘겨줘야 했다. 이는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의 세력 확장을 저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조프루아는 블루아 백작 티보 1세와 함께 루아르 강가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노르망디 공령의 공세를 몇번이고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970년 아키텐 공작겸 푸아티에 백작인 기윰 4세와 벌인 로슈 전투에서 승전하면서 루덩과 미레보 지역을 점령해 남쪽으로 확장했고, 971년 메인 백작 위그 2세와 르망의 부백작과 주교 간의 발생한 알력을 이용해 르망 교구를 자신의 세력권에 넣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977년 티보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외드 1세가 블루아의 새로운 백작이 되면서 앙주 백작령과 블루아 백작령간 동맹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980년대를 기점으로 30년 가까이를 이어져 온 양 세력의 동맹이 단절되었다.

이는 975년 브르타뉴 공작인 호엘 1세는 렌의 백작으로 브르타뉴 북부를 장악하고 있던 코난 1세와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호엘 1세는 브르타뉴의 전체 통치권을 두고 코난 1세와 내전을 벌어야 했고, 이때 조프루아는 973년 코난 1세에게 자신의 딸인 에르멘가르드를 시집보냈는데, 호엘 1세는 코난 1세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는 과정에서 조프루아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호엘 1세는 브르타뉴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내전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원군을 청하는 댓가로 낭트 백작으로서 조프루아를 상위군주로서 충성맹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조프루아는 호엘 1세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사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때 외드 1세가 코난 1세를 지원하면서 두 세력의 관계 또한 악화되었다. 이후 내전은 호엘 1세의 승으로 끝났고, 호엘 1세는 981년 동생인 게레쉬를 낭트의 주교로 임명하다가 코난이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되고, 동생인 게레쉬가 브르타뉴 공작직을 승계받게 되었다.

984년 게레쉬는 직접 로테르를 찾아가 그에게 충성 서약을 하면서 조프루아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으나 브르타뉴로 귀환하는 도중 조프루아에게 붙잡혀 억류되는 동안 강제로 낭트 백작으로서 충성 맹세를 받게 되었고, 875년이 돼서야 조프루아가 상위 군주임을 인정하고 간신히 억류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987년 카롤링거 왕가의 루이 5세가 사망하면서 서프랑크의 제후들과 주교들은 루이 5세의 숙부인 로렌의 샤를 대신 선거제로 명목상 네우스트라시의 변경백이자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고, 조프루아 또한 진짜 왕이 된 자신의 주군에게 여전히 충성을 맹세했으나 그 동안 반 카롤링거의 기치로 모인 영주들은 제각기 이익을 위해 위그 카페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했고, 블루아 백작인 외드 1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조프루아는 방돔 백작인 부샤르 1세[11] 와 함께 블루아 백작령을 공격했으나 마르송 공성전 중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폴크 3세가 앙주 백작위을 승계했다.

폴크 네라가 불린 폴크 3세는 잉젤거 가문 내에서 가장 독보적으로 폭력적인 인물이자 동시에 뛰어난 지휘자로 아버지가 그랫던 것처럼 카페 왕조에 대해 충성을 다하면서 그들의 얼마 없는 권위를 이용해 카페 왕조에 적대적인 제후들의 영지를 공격해 그의 영토를 천천히 병합했다. 992년 그는 자신의 매부인 브르타뉴 공작 코난 1세와 낭트를 두고 콩퀴어뤼일 전투(Battle of Conquereuil)에 코난 1세를 전사시키면서 낭트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확립하는 것은 물론이고 메인과 투렌의 백작령들까지 합병했지만 대신 마찬가지로 이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와 대립하게 되었다.

폴크 3세는 10세기 말의 통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석조 성채를 축조해 외적으로 영지의 방위와 함께 자신의 권위를 들어내난 식으로 통치했다. 994년 폴크 3세는 자신의 영지가 아닌 블루아 백작령에 자신의 성채를 축조하면서 그의 영토를 잠식하면서 블루아 백작 외드 1세와 분쟁을 일으켰고, 결국 995년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1세와 대치중일 당시 외드 1세는 앙주 백작 폴크 3세 네라를 치기 위해 처남인 아키텐의 기윰 4세, 플랑도르의 보두앵 4세, 한 때 적이였던 노르망디의 리샤르 1세까지 끌여들어 폴크 3세를 랑줴 성까지 몰아 넣는데 성공하나 996년 위그 카페의 개입으로 무산되었 얼마 안가 외드 1세가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블루아 백작이 된 아들 티보 2세 또한 폴크 3세를 축출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999년 폴크 3세는 자신의 아내인 방돔의 엘리자베트를 간통죄로 기소해 산 체로 화형에 처하게끔 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악명을 듣게 된 폴크 3세는 1001년 새로 아내를 맞이 할 때까지 독신으로 있었다.
2.5. 카페 왕실령[12]
현재의 일드 프랑스와 오드 프랑스는 네우스트리아의 동부를 구성하는 지역으로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 나눠질 때 서프랑크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네우스트리아의 동부를 구성하고 있는 지역들은 마찬가지로 여러개의 카운티로 나눠진 상태였다.

834년 블루아 백작령을 통치하던 기윰이 루도비쿠스 1세에게 반기를 든 로타리우스 1세를 지지하다가 투렌에서 전사하자 보름스 백작 로베르 3세의 아들인 로베르 르 르포가 기윰이 소유하고 있던 블루아와 블루아에 속한 모든 지역까지 차지하게 되면서 로베르 가문이 네우스트리아 동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베르됭 조약으로 네우스트리아가 서프랑크 일대가 대머리왕 샤를 2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861년애 바이킹의 침략으로 인해 샤를 2세는 네우스트리아를 변경백령으로 개편 두 명의 변경백을 두면서 이 중 하나를 로베르 르 르포를 임명했다. 이후 866년 오를레앙 백작령을 통치하고 있던 아길롤핑게스 가문의 기윰이 샤를 2세에게 반역을 져지르다가 처형되자 로베르 르 르포는 오를레앙마저 차지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그러다가 로베르 르 르포는 브르타뉴가 고용한 바이킹 군벌인 헤스테인과 싸우다가 전사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들들이 어렸던 관계로 앙주 백작령은 물론이고 그가 현재의 일드 프랑스에서 얻어 왔던 영지들이 투르의 생 마르탱 수도원장인 위그가 대신 맡게 되었다.

이후 882년 로베르의 장남인 외드가 아버지의 후임인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직을 겸하고 있던 생 마르틴 수도원장 위그와 파리 주교인 고즐린의 추천하에 파리 백작으로 임명되면서 파리는 로베르 가문의 본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885년 바이킹들이 센 강 일대를 약탈하자 수도원장 위그는 이를 막기 위해 나서다가 전사하면서 로베르 르 르포의 모든 봉지가 파리를 방어 중이었던 그의 아들 외드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파리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승리로 이끌게 외드는 서프랑크 귀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888년 카를 3세의 폐위와 함께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카를 3세 이전의 국왕인 샤를로망 2세의 이복 동생인 샤를 3세를 추대하는 대신 로베르 가의 외드를 왕을 세우자 외드는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영지 중 네우스트리아 변경백 및 앙주 백작과 함께 오를레앙 백작령을 동생인 로베르에게 양도했다.

이후 898년 외드가 후사도 없이 죽으면서 로베르는 서프랑크의 왕위를 주장하는 대신 형인 외드가 소유하고 있던 나머지 영지들을 모두 물려받는다. 로베르는 살아 생전 네우스트리아 동부에서 세력을 확장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922년 샤를 3세의 무능과 로타링기아 귀족들만 우대하는 등 무책임한 정치에 실증이 난 서프랑크의 귀족들에 의해 로베르는 랭스에서 서프랑크의 대립왕으로 추대되어 내전을 일으켰다가 923년 6월 15일 샤를 3세 단순왕의 지지자들은 군사를 일으켰고, 수아송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는 샤를의 군대와 싸워 이겼으나 로베르 1세는 수아송에서 칼 또는 창에 맞아 전사했다.

로베르의 아들인 로베르 르 그랑은 서프랑크의 왕위를 매부인 라울에게 양보했고, 929년 앙주 부백작이었던 폴크 1세에게 앙주 백작령을 완전히 양보한 이후에도 여전히 파리, 오를레앙, 블루아 등의 백작령을 소유했다. 그러다가 940년 자신의 측근인 티보 1세에게 블루아와 샤르트르 및 샤토됭 지역들을 넘긴다.

956년 위그 드 그랑이 어린 아들인 위그 카페를 비롯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자식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카롤링거 왕조는 사실상 네우스트리아 변경백령에 속한 영주들을 독립시켜 네우스트리아를 사실상 해체시키라는 요구를 로베르 가에 요구하면서 직활지인 파리, 오를레앙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간접적 봉지들이 모조리 법적으로 독립되었다. 그나마 독립한 영주들이 한때나마 위그 드 그랑의 측근들이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하지만 977년 티보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외드 1세가 블루아의 새로운 백작이 되면서 위그 카페와 저차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해 980년쯤 완전히 정치적 원수 관계가 되어 버렸다.

987년 5월 루이 5세는 랭스 주교 아달베롱의 반역죄를 추궁하려는 재판을 하려는 중에 승마를 하다, 상리스 근처 오이세의 알라떼 숲에서 말에서 떨어져 낙마 사고로 죽었다. 친동생인 랭스 백작 외드는 그보다 앞서 986년에 먼저 사망했다.

루이 자신에게는 적법한 후계가 없었고 카롤링거 왕조의 후손중에는 하 로렌로타링기아의 공작 샤를, 루이의 서제인 아르눌프가 있었으나 샤를이 당시 여러 가지 점들에서 서프랑키아 귀족들의 불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977년 무고한 왕비를 간통으로 고발하는가 하면 동프랑키아의 오토 2세와 협력하여 선왕인 로테르의 왕권을 위협하고 왕위 찬탈을 꾀하기도 했다.이러한 이유로 서프랑크 왕국의 여러 제후들이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를 국왕을 선출해 카페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파리와 오를레앙은 왕실 직할령되었다. 이때 카롤링거 왕실의 상리스와 푸아시, 아티니 등도 편입되었다.

988년 위그 카페는 자신의 후계자인 로베르 2세와 플랑드르 백작 아르놀프 2세의 미망인 로잘라와의 혼인을 시키면서 지참금으로 현재의 오드 프랑스의 항구 도시인 몽트뢰유를 왕실령으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이당시 카페 왕조의 왕실 직할지들은 파리를 기준으로 월경지로서 블루아 백작령, 베르망두아 백작령 내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거리 또한 상당히 멀었다. 더욱이 이렇게 월경지로 분산된 각각의 직할지중 오를레앙이 비교적 클 뿐 파리를 포함한 나머지 직할지의 규모는 작았고, 합쳐봐야 고티 후작령만한 수준이었다.

이는 블루아 백작령과 베르망두아 백작령 두 세력 중 하나가 카페 왕가와 척을 질 때 상당히 위험한 요소였고, 실재로 993년 블루아 백작 외드 1세는 랑의 주교와 결탁해 위그 카페와 로베르 2세를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에게 넘기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무산되었지만 카페 왕조의 권력이 대귀족들에 비해 약하는지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다만 공식적인 처벌은 업다는 것이지 995년을 기점으로 블루아와 심지어 이 사건에 연관이 없었던 베르망두아 백작령의 세력권이 약화되고, 대신 카페 왕가의 세력권이 강화되면서 직할지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직활지 주변에 있던 블루아와 베르망두아의 세력 하에 있던 봉지들이 왕실령에 편입되었다. 관련 지도[주의] 997년 로베르 2세는 일드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몽모라시에 위그 카페의 측근이었던 부샤르 1세를 영주로 임명하면서 17세기경 남계 자손이 단절될 때까지 프랑스 왕국의 명문가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2.6. 블루아 백작령(현 일 드 프랑스 서부 및 샹트르 발 드 루아르 서부 일부)
블루아는 486년 이전 프랑크족에 의해 네우스트리아로 병합된 후 최초로 코메스를 파견해 통치하던 카운티였다.[14] 클로비스 1세가 죽자 왕국은 세 곳으로 분할되어 이례로 블루아는 줄곧 네우스트리아에 속해 있었고,

이후 830년대 서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프랑크 국왕이기도 한 루도비쿠스 1세는 오를레앙 백작 아드리앙의 아들 기윰을 블루아의 백작으로 임명해 샤르트르와 샤토됭을 통치하지만 834년 기윰은 자신의 형제인 외드와 함께 로타리우스 1세와 아키텐의 피핀, 독일인 루도비쿠스가 일으킨 반란에 가담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후 블루아는 샤르트르와 샤토됭과 함께 로베르 르 르포에게 수여되었고, 앙주와 함께 네우스트리아 서부의 로베르 가문의 영지로 940년이 될때까지 존속했다. 그러다가 로베르 르 그랑때에 대리인 부백작으로서 현재의 일드 프랑스 내에 위치한 프로뱅의 영주이자 블루아와 투르의 부백작을 겸하고 있던 자신의 측근인 티보 장로공이 죽자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또다른 측근인 티보 1세에게 프로뱅의 영주 승계를 인정하면서 블루아와 투르를 정식 봉지로 넘겨준다.

이후 티보 1세는 956년 위그 르 그랑이 죽기 전까지 그의 봉신으로서 블루아 백작령을 통치하면서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대외적 활동에 집중했다. 권모술수에도 능해 훗날 연대기 작가들은 그를 사기꾼이란 별칭을 붙일 정도였다. 944년 노르망디 공작 기윰의 미망인이자 베르망두아의 백작 헤르베르트 2세의 딸 리에가르트와 결혼해 노르망디 남부에 위치한 에브뢰를 차지했고, 또한 헤르베르트 2세가 루이 4세의해 943년 처형된 이후 베르망두아 백작령이 여러 갈래로 분할되면서 리에가르트 또한 분할된 영지 중 보베와 뫼란을 자신의 세력권 하에 넣었으며, 945년 처남인 헤르베르트 3세와 함께 루이 4세가 있는 몽티니 랭그레인 성을 공격했으며, 이후 루이 4세가 노르망디 귀족들에게 붙잡혀 다시 위그 드 그랑에서 넘겨지자 위그 드 그랑은 오토 1세의 압력으로 루이 4세를 석방하기 전까지 그의 신변을 티보 1세에게 맡겼다. 1년 후 루이 4세는 랑을 포기하는 조선으로 위그 드 그랑과 협상해 풀려났고, 위그는 랑의 통치를 티보에게 맡겼다.

이후 950년 티보 1세는 자신의 이복여동생인 아델라이드를 브르타뉴 공작 알랭 2세와 혼인시켰다. 하지만 952년 알랭 2세가 아들인 드로고를 남기고 죽자 다시 아델라이드를 앙주의 백작이 같은 봉신인 폴크 2세와 재혼시키면서 루아르 강과 투에 강 사이에 위치한 소뮈르 지역을 지참금으로 줬다.

956년 위그 르 그랑이 죽자 카롤링거 왕조의 로테르는 위그 르 그랑의 어린 아들인 위그 카페에게 동생인 앙리의 하부르고뉴 공작직을 주는 것과 위그 르 그랑이 소유하고 있던 직함과 봉지들을 온전히 상속해주는 것을 용인한 대신 네우스트리아 내의 모든 봉신들을 독립시킬 것을 요구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티보 1세는 폴크 1세와 함께 여전히 로베르 가문에 충성했다. 958년 티보 1세와 폴크 2세는 Pays de Véron 곳에서 만난 후 자신들을 네우스트리아의 총독이자 행정관으로 자칭했으며 로베르 가문과의 봉신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정적인 카롤링거 왕조의 로테르와도 이중적인 관계를 맺었다.

960년 티보 1세는 그의 팽창적 정책으로 인해 위그 카페의 처남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리샤르 1세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티보 1세는 노르망디를 공격했으나 리샤르 1세는 뒤노아를 공격, 샤토됭을 약탈하면서 보복을 했다. 다음 해 티보 1세는 루앙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게다가 노르망디 공작령과의 전쟁에서 후계자인 티보가 전사하고 만다.

965년 쿠시 지역을 두고 랭스 대주교인 오델릭과 분쟁이 발생해 오델릭에 의해 파문되었고, 966년 쿠시를 점령하자 아들인 외드에게 이 지역의 방위를 맡게 했다. 970년대에 브르타뉴의 지배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외드 1세는 렌 백작령을 장악했고, 브르타뉴 공작 코난 1세는 영토에서 외드 1세의 권리를 인정했다. 977년 티보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외드 1세가 블루아 백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그는 아버지와 달리 로베르 가문과 척을 지기 시작, 자연스럽게 이웃한 앙주 백작령과도 분쟁이 발생하였고, 그 시발점이 981년 발생한 브르타뉴 공국과 앙주 백작령 사이에서 발생한 전투인 콘커뢰유 전투로 외드 1세는 브르타뉴를 지지했다. 이후 외드 1세는 로베르 가문과 결별하고 카롤링거 왕가를 지지했고, 이에 로테르는 외드에게 궁정백의 칭호를 부여했다.

987년 5월 21일 카롤링거 왕가의 루이 5세가 서프랑크의 제후들과 주교들은 루이 5세의 숙부인 로렌의 샤를 대신 선거제로 명목상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이자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고 하자 외드 1세는 로테르의 동생이나 루이 5세에게로 갈 왕위를 노골적으로 노리데가 계승권이 박탈된 로테르의 동생 로트링겐 공작 샤를를 지지하면서 플랑드르 백작 아르눌프 2세와 그의 아들 보두앵 4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3세와 손잡고 위그 카패에게 대항했다.

이에 위그 카페를 여전히 지지하는 앙주 백작 및 기타 소영주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991년 외드는 멜룬을 점령하는데 성공하나, 이내 앙주의 조프루아 1세와 노르망디의 리샤르 1세, 방돔 백작 부샤를 1세의 공격을 받았다. 공성전 동안 앙주 백작 조프루아가 죽었지만 그의 아들인 폴크 3세 네라가 백작위를 계승했다. 다음 해 폴크 3세는 브르타뉴 공작 코난 1세와 콘커뢰유에서 전투를 벌여 코난 1세를 죽이자, 결국 외드 1세는 샤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위그 카페로부터 생 마르탱과 마르무티에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원장의 칭호를 수여받았지만 문제는 외드 1세가 원하는 것은 Frank dux였다.

결국 993년 외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위그 카페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랑의 주교 아달베롱과 함께 공모해 메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 오토 3세와 만나 위그 카페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로베르 2세가 파리 밖으로 나오면 이들을 납치해 독일로 유배시키고 그 자리를 로트링겐 공작 샤를의 아들인 루이가 앉게끔 계획했다.

하지만 그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995년 동맹인 베르망두아 백작과 함께 오를레앙과 파리, 샹리스를 감싸고 있던 간접적인 봉토들이 박탈되었다. 관련 지도[주의] 하지만 이후에도 외드 1세는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1세와 대치중인 앙주 백작 폴크 3세 네라를 치기 위해 처남인 아키텐의 기윰 4세, 플랑도르의 보두앵 4세, 한 때 적이였던 노르망디의 리샤르 1세까지 끌여들어 폴크 3세를 랑줴 성까지 몰아 넣는데 성공하나 996년 위그 카페의 개입으로 무산되었고, 결국 마르무티에 수두원에 은거하다가 얼마 안가 죽었고, 블루아 백작직은 그의 아들인 티보 2세가 계승했고, 그의 아내인 베르타는 997년 원수와도 같았던 카페 왕조의 로베르 2세와 재혼했지만 근친이라는 이유로 교황청에서 두 사람의 재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2.7. 베르망두아 백작령(오드 프랑스와 일 드 프랑스 동부 및 상파뉴 북부 일대)
현재의 오드 프랑스 및 벨기에 서부 일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834년 카롤루스 대제의 차남인 피핀 카를로만의 서손으로 롬바르디아 왕국의 베른하르트 1세의 서자인 상리스의 피핀이 현재의 피카르디 지방에 속한 베르망두아의 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상리스의 피핀 2세는 840년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가 사망하기 직전 그의 장남 로타리우스 1세가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로타르의 편에 가담해 지원하고 파리를 공략하였다. 경견왕 루트비히 사후, 대머리왕 샤를 3세 등이 로타리우스 1세와 대적했을 때 그는 황제 로타리우스 1세의 편에 섰다.

그러나 843년 베르덩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그는 대머리왕 카를 2세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의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망년이 확실치는 않으나 850년대 기점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네우스트리아 동부는 이후 앙주로 불릴 서부와 마찬가지로 바이킹의 약탈에 시달려야 했는데, 876년 샤를 마르텔의 이복동생인 힐데브란트 1세의 후손인 니벨롱겐 가문의 테오도리크가 베르망두아 백작이 되었고, 다만 샹리스의 피핀의 아들인 베른하르트는 베르망두아 백작직을 요구하고 있던 상태였다. 어째든 그는 마콘의 백작 및 오툉 백작을 겸하면서 생캉탱 주변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900년대까지 베르망두아를 통치하다가 사망했다.

베르망두아 백작이 되기 전 헤르베르트 1세는 877년부터 샤를 2세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형인 베른하르트로부터 베르망두아에 대한 승계권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886년부터 이미 현재의 일드 프랑스에 속한 모와 새로게 만들어진 백작령인 수아송 백작의 백작이 되었다가 888년 혹은 889년 마드리에(madrie) 백작이 되었다. 893년 상리스와 페로네, 생 퀘틴의 영주인 형 피핀의 뒤를 이어 상리스와 페로네, 생 퀘틴의 영주가 되었다. 또한 888년부터는 뫼욱스(Meaux) 백작이자 마드리에 백작 테오데베르트(Theodebert) 혹은 테트베르트(Tetbert)가 바이킹과의 전투 중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는 뫼욱스의 백작직, 마드리에 백작직도 겸하게 되었다.

마드리에 백작 테오데베르트와의 정확한 혈연관계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외가쪽 친척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888년부터 889년까지는 생 캉탱 평신도 수도원장과 수아송의 생 크레핀 수도원의 원장직도 겸하였다. 뫼욱스 백작직은 서프랑크의 왕 말더듬이 루이 2세가 갖고 있다가 877년 서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테오데베르트에게 양도한 자리였다.

어느 시점에 그는 카스트룸 테오도리히(현, 샤토 티에리)로 불리는 지역 역시 니벨룽기드 가문으로부터 상속받았다. 헤르베르트 1세 혹은 그의 자손들은 캄파네(샹파뉴) 시를 건설하고, 샤토 티에리의 중심지로 삼았다. 888년 카를 3세가 퇴위하면서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샤를 3세를 추대하기보다는 로베르 가문의 가주로 바이킹을 상대로 파리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외드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자 랭스 대주교 풀크와 함께 카롤링거 왕조 사람이 아닌 외드의 즉위를 반대하는 귀족들의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889년 이후 그는 외드 왕의 충실한 시종으로 활약했다.

889년 이전에 그는 잠시 수아송의 백작을 역임하였다. 889년 바이킹 족이 침략하자, 오이세 강변에서 바이킹 족을 만나 교전하였다. 889년 무렵 그는 외드의 추종자였다. 890년 무렵에도 바이킹에 대항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외드가 893년에는 죽으면서 랭스 대주교 풀크와 함께 샤를 3세를 불러와 그해 1월 28일 샤를마뉴의 기일을 기해 샤를 3세의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는 이후 상파뉴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했고, 이에 앞서 장녀인 베아트릭스를 외드의 동생이자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겸 파리 백작인 로베르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서프랑크 왕국의 895년 캉브레 백작이자 프랑드르 백작 보두앵 2세의 동생 라울에게 생캉탱과 패로네, 베르망두아를 빼앗겼고, 이후 성 크레핀 평신도 수도원의 주요 후원자였던 그는 896년~898년을 전후하여 성 크레핀 평신도 수도원의 원장으로도 재직했다.

896년 6월 28일 국왕 외드의 동의 없이 베르망두아를 탈환해 라울과 그의 가족 및 친지들을 제거하였다. 그밖에 랭스의 풀크도 그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하지만 라울과 그의 추종 세력을 제거한 것 및 플랑도르로 세력을 확장한 것이 원인이 되어 907년 11월 6일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2세에게 암살되었고, 베르망두아 백작위와 베르망두아 지역 및 수아송 백작위도 계승했다. 그밖에 벡상과 캄파네 지역의 영지와 생 메다드 수도원 등의 봉지들은 모두 아들인 헤르베르트 2세가 승계했고, 이들 지역에서 나온 수입만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고, 당시 그의 사촌 베른하르트도 근처 보베(Beauvais)와 상리스의 백작이었고, 이 두명은 당시 프랑크 왕국 북서부의 영향력있는 영주들이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아버지의 복수 겸 플랑드르로의 확장 정책을 이어받아 플랑드르 백작령과 대립을 이어 갔으나 그가 죽기 전까지 플랑드르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918년 이전에 헤르베르트 2세는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이자 앙주백작으로 있던 로베르 1세의 딸 아델라와 결혼하였다. 아델라는 지참금으로 뫼우(Meaux) 변경백령을 가져왔다. 헤르베르트는 카스트룸 테오도리히 지역에 성곽을 수축하여, 요새를 형성하였다. 플로도하르 연대기에 의하면 이때부터 샤토 티에리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918년에는 메제레(Mezeray) 백작을 겸했고, 벡상 백작 랄프 1세를 축출하고 벡상을 차지했지만, 다시 랄프 1세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헤르베르트 2세는 아들 위그를 랭스 대주교로 앉히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당시 랭스 주교인 919년까지 서프랑크의 수상으로 재임했던 에르베의 두 조카들이자 인근 지역의 영주들은 외드와 에르베가 랭스를 어지럽히자 세울프가 이들을 붙잡아 헤르베르트 2세에게 넘겨 대신 투옥해주는 대신 그의 아들인 위그를 자신의 사후 랭스 대주교로 추천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당시 자녀 중 한 사람을 성직자로 만들어서 집안의 종교적 후광을 얻는 것은 고대 5,6세기 프랑크 왕국 때부터 이어진 관례의 하나였고, 헤르베르트 2세 또한 그러한 관념을 당연시 여겼기에 기꺼이 세울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922년 세울프가 랭스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위그의 랭스 대주교 임명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925년 랭스 대주교가 죽자 헤르베르트는 위그를 랭스 대주교에 앉힌 뒤 926년 교황 요한 10세에게 사자를 보냈고, 교황 요한 10세로부터 위그의 대주교직 승인을 받아냈다. 승인을 확인한 후 헤르베르트는 아들 위그를 오세르에 보내 신학공부를 하게 했고, 실제 권한은 수아송의 아보 주교가 대신 행사하였다.

920년 무렵 바이킹 족을 받아들인 문제와 로타링기아에만 집중하는 문제로 네우스트리아에서는 단순왕 샤를 3세에 대한 반발이 심했고, 네우스트리아 후작 로베르 1세는 885년 이후 계속 왕국 북방을 방어하면서 바이킹 족을 격퇴하고 921년 루아르 계곡에서 바이킹을 격파하고, 살아남은 일부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켜 낭트에 정착하게 하여 귀족들의 신뢰를 얻었다.

단순왕 샤를 3세와 로베르 1세 사이에서 서프랑크의 왕위를 놓고 갈등할 때, 헤르베르트 2세는 노르만 족을 크게 물리친 로베르 1세를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계속 처남인 위그 르 그랑과 함께 단순왕 샤를 3세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922년 서프랑크의 네우스트리아 지방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가담하여, 로베르 1세를 추대하였다. 이후에도 내전은 계속되었고 그는 단순왕 샤를 3세를 체포하여 감금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단순왕 샤를 3세 지지자들의 반발은 계속되었고, 단순왕 샤를 3세 지지파들은 카스트룸 테오도리히에서 바이킹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헤르베르트 2세는 위그 르 그랑과 함께 로베르 1세를 도와 단순왕 샤를 3세파 군대와 계속 교전, 923년 초 그의 군대가 레모아(Rémois)를 점령했고, 923년 6월 15일 최종적으로 샤를 3세파 군대를 격파하고 샤를 3세를 사로잡았다. 헤르베르트 2세는 샤를 3세를 솜의 페로네 성의 감옥에 유폐하였다. 일설에는 헤르베르트가 샤를 3세 단순왕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가 배신하여 그를 포로로 가두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헤르베르트는 샤를 3세 단순왕을 카스트룸 테오도리히(Castrum Theodorici, 훗날의 샤토 티에리) 감옥으로 옮겼다가 페로네의 감옥으로 샤를을 옮겼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923년 6월 15일 로베르 1세가 전사하고, 새 왕으로 그의 사위이자 부르고뉴 공작인 라울(서프랑크)이 추대되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이 샤를 3세를 사로잡아서 데리고 있는 것을 근거로, 외조카사위이자 동서인 라울에게 이런 저런 이권을 요구하였다. 헤르베르트는 샤를을 라울과의 협상 수단으로 이용했다. 라울은 비록 죄수복을 입은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샤를 3세 생쁠을 만나자 그에게 칼을 바치며 군주로 예우하였다. 한편 군주를 납치하고 감금하면서 이런저런 이권을 요구하는 동서 헤르베르트에게 염증을 느낀 라울은 그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기 시작했다.

샤를 3세를 사로잡은 뒤 교황 요한 10세는 그를 규탄, 샤를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 요한 10세는 당시 유럽의 지도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샤를 3세의 구금에 대해 항의하였다. 교황 요한 10세는 헤르베르트에게 샤를 3세를 즉시 풀어주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지만, 헤르베르트는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

924년 헤르베르트는 사위인 플랑드르의 아르눌프 1세 및 아르눌프의 동생 아달울프(Adalolf)와 군대를 이끌고 북부 해안가에 들어오는 바이킹족과 교전하여 물리쳤다. 바로 노르망디를 공격, 노르망디 북동부의 에우(Eu)를 점령했다.924년 헤르베르트는 라울 왕에 의해 페로네 백작에 임명되었다.

교황의 권위를 경멸한 헤르베르트는 925년 아들 위그를 랭스의 대주교로 착좌시켰다. 이 때 헤르베르트는 교황 요한 10세에게 자신의 아들이 주교로 서임되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교구령을 분할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여러 세력에게 배분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라울은 국내 반대파들을 상대해야 하면서, 동시에 계속 영토를 침략하는 바이킹과 북방의 해적들, 마자르 족 등의 침략과 약탈에 맞서 싸워야 했다. 헤르베르트는 자신이 샤를 3세 생쁠를 체포, 포로로 데리고 있는 것을 내세워 라울을 협박했지만 라울은 소극적으로 반응했다.

926년 레온의 백작 로저 1세(Roger I de Laon)가 사망하자 헤르베르트는 라울왕에게 레온백작직을 자신의 아들 외드에게 줄 것을 요구했지만 라울은 거절, 반대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감금된 샤를 3세를 위협하면서 라울에게 레온을 요구하였고, 레온 시내를 점령했지만 라울은 거절했다. 927년까지 레온 백작직을 놓고 그는 라울과 갈등하였다. 그는 감금당한 샤를 3세 생쁠을 위협하거나, 샤를 3세를 풀어주겠다며 라울에게 수시로 으름장을 놓았다.

926년 아미앵을 점령 아미앵백작 루돌프(Rudolf)를 축출하고, 아미앵 백작이 되었다. 927년 생 캉탱에, 929년에는 페로네에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라울은 그를 경계하였다. 928년 레온의 영주를 겸하였다. 같은 928년 아미앵에 성곽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931년 아미앵은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2세는 아미앵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의 아들 위그가 잠시 아미앵 백작직을 얻게 된다. 927년 헤르베르트는 라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927년 헤르베르트는 자신이 샤를 3세 생쁠를 데리고 있는 것을 들어 라울에게 레온 지역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헤르베르트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의 힘을 빌어 라울 왕에게 다시 레온을 요구하여 929년에 확보한다.

927년 헤르베르트는 노르망디공작 롤로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롤로는 들어주는 대신 헤르베르트의 아들 중 한 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아들 외드를 롤로에게 인질로 보냈다. 928년에는 아들 외드를 데리고 부르고뉴로 갔다. 프로방스의 위그는 아들 외드를 비엔나 자작에 임명한다. 928년 라울을 상대로 라온을 넘겨주지 않으면 샤를 3세를 풀어주겠다고 위협하였다.

헤르베르트는 라울의 반대파가 있다는 점과 자신이 샤를 생쁠을 데리고 있는 것을 이용, 라울을 위협했다. 그러나 929년 샤를 르 생쁠은 페로네의 감옥에서 굶어죽었고, 라울을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샤를 3세가 죽자 헤르베르트 혼자 라울에게 저항했고, 930년 초, 헤르베르트는 라울의 형제인 보소가 소유한 비트리 성을 점령했다. 샤를 생쁠의 사망 소식을 접한 라울은 형제인 보소와 네우스트리아 후작 위그 르 그랑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비트리엔페르투아(Vitry-en-Perthois)을 공격했다. 931년 라울과 보소, 위그 르 그랑은 헤르베르트 2세의 아들 위그를 물리치고 랭스까지 진격하여 점령, 헤르베르트를 성공적으로 패배시키고 돌아갔다. 그리고 라울은 이를 수도자인 아스토를 랭스 주교로 임명한다.

샤를의 죽음을 계기로 위그 르 그랑과의 갈등도 표면화되었다. 위그 르 그랑과의 갈등은 위그가 루이 4세와 갈등하는 937년에 가서 화해하게 된다. 라울은 랭스를 점령한 뒤 헤르베르트의 아들 위그를 쫓아내고, 아르토를 랭스 대주교로 임명했다. 931년 그는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와 교섭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한다.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의 아들을 밀어내고 대신 랭즈 주교가 된 아르토와 분쟁을 일으켰다. 당시 랭스 대주교 아르토는 서프랑크 왕국의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플로도하르트(Flodohard)의 후견인이었다. 933년과 934년 라울이 헤르베르트 2세의 세력을 꺾기 위해 랭스로 쳐들어가 헤르베르트 2세가 단순왕 샤를 르 생쁠을 감금했던 요새를 불태웠다. 935년 전후로 그는 라울 또는 루이 4세에 의해 수아송, 비트리, 라온, 샤토 티에리 등을 압수당해 영지를 잃게 되었다. 934년 그는 독일왕 하인리히 1세에게 개입을 요청하였고, 하인리히 1세는 헤르베르트가 라울 왕에게 복종하는 대신, 랭스와 라온을 제외한 헤르베르트의 영토를 헤르베르트에게 돌려받게 했다. 이때 헤르베르트 2세는 라울에게 형식적으로 항복하였다. 라울은 얼마되지 않아 다시 헤르베르트를 공격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샤토 티에리 성을 점령했지만, 936년 1월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었다. 라울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헤르베르투스 2세는 빼앗긴 샤토 티에리 요새를 되찾았다.

그해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의 요청으로 루이 4세가 서프랑크로 귀국, 936년 6월 19일 즉위하자 위그 르 그랑은 헤르베르트 2세와 루이 4세의 화해를 주선하였다. 그러나 위그 르 그랑의 화해 주선은 실패한다. 서프랑크의 왕 루이 4세는 로타링기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고, 939년 독일의 오토 1세는 군사를 이끌고 서프랑크로 쳐들어왔다. 헤르베르트 2세는 위그 르 그랑과 함께 오토 1세의 군사에 합류하였다. 오토 1세는 루이 4세에게 로타링기아 왕국의 영유권을 포기를 강요하여, 로타링기아 포기를 최종 약속받고 되돌아갔다.

939년부터 940년 헤르베르트와 프랑크 공작 위그 르 그랑은 루이 4세에게 도전, 시범적으로 랭스를 점령하고 루이 4세를 위협했다. 이때 헤르베르트는 플로도하르트를 체포해 투옥시키고, 아들 위그를 랭스 대주교에 임명했다. 보다못한 교황 스테파노 8세가 개입하여 바티칸 특사들을 파리로 파견, 서프랑크의 귀족들에게 루이 4세를 국왕으로 인정할 것, 루이 4세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은 교황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보고 누구든지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위그 르 그랑, 헤르베르트 2세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일단 위축되거나 슬슬 지지를 철회했다. 교황 스테파노 8세의 특사들의 칙령에 복종하는 척 했지만, 위그, 헤르베르트 2세를 지지하던 프랑크인 사제들은 일시에 지지를 모두 철회하였다.

교황 스테파노 8세는 헤르베르트에게 아들인 베르망두아의 위그에게 랭스의 대주교 자리를 제안하고, 루이 4세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교황 스테파노 8세는 바티칸 특사를 다시 보낼때 서프랑크 지역을 관할하는 대주교의 상징과 팔리움을 딸려서 파리로 보내 서프랑크 귀족들에게 루이 4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약속받았다.

헤르베르트는 940년부터 941년에 잠시 플로도하르트를 체포했다가 풀어주었다. 941년에는 아르토를 체포하고, 바티칸에 아르토, 플로도하르트의 파문과 아들 위그를 랭스 대주교로 임명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러나 위그의 랭스 대주교 임명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었고, 루이 4세의 군대는 라온을 점령하였다. 941년 헤르베르트 2세는 위그 르 그랑과 윌리엄 1세 롱스워드 등과 동맹을 맺고 루이 4세를 공격했다. 독일의 오토 1세가 개입, 942년 리에주(Liège) 근처 비제(Visé)에서 오토 1세의 중재 하에 갈등은 종결되었다.

943년 루이 4세의 대관식을 치른 뒤, 얼마 뒤 헤르베르트는 체포되어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943년 2월 23일 아시네의 생캉탱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0세기경 프랑스의 가톨릭 성직자이자 역사가 라올 글레버(Raoul Glaber)에 의하면 루이 4세가 헤르베르트의 교수형을 직접 지시, 보고받았다 한다.

헤르베르트 2세의 사후 그의 영지들은 상속 문제를 두고 3년 도안 아들들 간의 분쟁이 발생하다가 위그 르 그랑의 중재하에 분할 상속되어 햄의 영주였던 장남인 외드는 아버지의 반란을 적극 도운 혐의로 인해 국왕인 루이 4세는 물론 중제자였던 위그 르 그랑의 눈밖에 나 상속될 몫도 받지 못했고, 아달베르트가 베르망두아를 위그는 다시 랭스의 주교로 복직, 헤르베르트 3세는 오모아를 로베르는 뫼옥스와 트루아를, 가이는 수아송 지역을 상속했다.

뫼옥스와 트루아를 상속한 로베르는 950년 부르고뉴 백작 겸 살롱 쉬르 손 백작, 트루아 백작 기셀베르트 드 샬롱(Giselbert de Chalon) 또는 길베르 드 살롱과 디종의 이르멘가르드(Ermengarde)의 딸 아델라이드 베라(Adélaïde Werra) 드 트루아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으로 그는 상파뉴 지방을 양도받았다. 952년 위그 르 그랑이 루이 4세를 상대로 전쟁을 할 때는 형인 헤르베르트 3세와 함께 마른 강변 일대를 방어하였다.

955년에는 카페 가문의 위그 르 그랑의 가신이 되었으며, 이때 그의 처형인 리우트가르트를 위그 르 그랑의 아들 부르군트의 오토와의 결혼을 주선시켰다.

한편 베르망두아 백작이 된 아달베르트는 위그를 랭스 주교로 복직시키기 위해 정치적 무리수를 여러반 강행했으나 949년 후고 추대 운동을 포기한다. 954년 로렌 공작 기셀베르트의 딸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게르베르가의 친정어머니 작센의 게르베르가는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의 딸이었고, 기셀베르트가 바이에른의 하인리히와 함께 오토 1세에 반란을 일으키다가 죽자, 그의 먼 친척이기도 한 서프랑크의 루이 4세 투르트메르와 재혼하였다. 아내 로트링겐의 게르베르가의 의붓아버지가 되는 루이 4세는 아달베르트의 5대조 피피노 카를로만의 동생 경건왕 루트비히의 넷째 아들 대머리왕 카를 2세의 증손이었다. 결혼 이후 아달베르트는 루이 4세의 추종자가 되었다. 한편 루이 4세는 자신의 어머니 에드지푸가 소유했던, 랑에 있던 성모 마리아 대수도원을, 의붓 누나인 로트링겐의 게르베르가에게 증여하였다.

오무아와 함께 샤토 티에리의 요새와 수아송의 생 메다르드 수도원을 넘겨받은 헤르베르트 3세는 952년부터 헤르베르트와 로베르는 루이 4세와 위그 르 그랑이 대립할 때 위그 르 그랑을 지지해 동생 로베르와 함께 루이 4세로부터 마른 강변 일대를 방어했고, 그의 군사적 능력을 눈여겨본 로테르는 그를 회유할 목적으로 트루아의 궁정백으로 임명되었다.

가이의 경우 970년대까지 그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956년까지 헤르베르트 백작 가문의 영주들은 로베르 르 그랑에게 충성을 받쳤다. 하지만 위그 르 그랑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인 위그 카페가 그의 뒤를 잇게 되자 로테르를 위시한 카롤링거 왕실은 위그 카페에게 위그 르 그랑의 모든 직책을 물려주는 대신 네우스트리아의 복속된 봉신들을 독립시킬 것을 요구했고, 헤르베르트 백작 가문의 백작들도 이때 로베르 가문의 세력에서 벗어났고. 여전히 로베르 가문에 충성을 받치는 네우스트리아 서부의 귀족들과 달리 이들은 본래가 카롤링거 가문의 분가였던 만큼 카롤링거 왕가로 전향하였다.

959년 로베르는 갑자기 부르군트를 공격, 디종과 디종 주교령을 차지하고 디종 주교를 감금했다가 추방해버렸다. Richeri Historiarum에 의하면 이때 그는 디종 지역을 공격하기 전 주지사를 뇌물을 주고 매수했다 한다. Richeri Historiarum에 의하면 960년 로베르는 쾰른의 주교가 이끄는 2천 병사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960년 서프랑크의 왕 로테르와 독일의 오토 1세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결국 디종 지역을 반납해야 했다. 이후 966 상파뉴 혹은 아키텐에서 사망하였다.

로베르는 뒤를 이을 아들로 헤르베르트 4세가 있었으나 형인 헤르베르트 3세가 재빠르게 뫼옥스를 비롯해 트루아 백작령, 비외(Vieux), 에페르네 사이의 마른(Marne) 계곡을 신속히 점령했고, 트루아 백작직 및 에페르네 일대의 영지도 차지하였다. 이후 헤르베르트 3세는 랭스 백작까지 자처했고, 상파뉴 카운티까지 차지했다.

아달베르트는 970년대부터 로테르의 동생이나 독일왕 오토 1세로부터 하로렌 공작이 되었지만 여전히 서프랑크 왕위를 탐하는 샤를을 두 조카인 헤르베르트 4세와 블루아 백작 외드 1세와 함께 막아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980년대쯤 헤르베르트 3세가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자 헤르베르트 4세는 빼앗겼던 아버지 로베르의 영지를 비롯해 헤르베르트 3세의 영지를 이어받았다. 이후에도 백부인 아달베르트와 함께 로렌의 샤를을 견제했다.헤르베르트 4세의 경우 985년 로렌의 샤를의 측근이며 로테르에게 저항한 베르덩의 고드프리 1세(Gottfried of Verdun)을 체포해 로테르에게 넘겨주었다. 이 일로 고드프리는 죄수 고드프리(Gottfried the Prisoner)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987년 로테르의 외동 아들이자 이제 막 왕위를 이어 받은지 1년도 안된 루이 5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20세의 나이로 낙마 사고로 사망하게 되자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을 계승권이 배제된 로렌의 샤를과 그 소생을 배제한 다른 가문에서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로 결의, 그결과 로베르 1세의 손자 위그 카페가 새로운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고, 그는 샤를의 측근 고드프리 1세를 풀어줬다. 하지만 베르망두아 백작가의 영주들은 위그 카페의 즉위에 대해 반발했다.

아달베르트는 다른 귀족들의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였다. 위그 카페는 로베르 1세의 손자로, 아달베르토의 어머니 아델라의 친정 조카였지만 그는 위그 카페에게 저항하였다. 그는 위그 카페의 즉위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비토했지만, 987년 7월 3일 위그 카페는 누아용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달베르트는 위그 카페를 새로운 프랑크의 국왕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였다. 위그 카페는 그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기도 했다. 아달베르트는 두도 드 생캉탱(Dudo of Saint-Quentin)을 노르망디로 보내 노르망디의 리처드 1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위그 카페는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계속 의심했다.

서프랑크의 왕위를 요구하던 하 로렌의 공작 샤를은 아달베르트 및 아달베르트의 두 명의 조카인 뫼욱스 백작 헤르베르트 4세와 블루아 백작 외드 1세의 도움을 받았지만 987에서 988년 사망하면서 아들인 베르망두아의 헤르베르트 3세가 그 뒤를 이었다. 베르망두아 헤르베르트 3세와 헤르베르트 4세는 블루아의 외드 1세와 함께 991년 샤를이 위그 카페에 의해 투옥된 뒤에도 위그 카페를 반대하여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이들과의 분쟁에 지친 위그 카페는 이들에게 원하는 칭호를 내주는 식으로 회유하려고 했고, 이중 베르망두아의 헤르베르트 3세에게 프랑크 공작직을 수여했다. 이에 프랑크 공작직을 원하고 있던 외드 1세는 격분해 다시 위그 카페와 대립하기를 택하고 랑의 주교 아달베롱과 결탁해 오토 3세와 손잡아 위그 카페와 그의 후계자인 로베르 2세가 파리 외곽으로 나오면 이들을 납치해 독일로 넘기고 로렌의 샤를의 아들 루이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기로 결정되나 이음모는 발각되고 말았다.

표면적으로 처벌이 없었다고 하지만 블루아 백작령의 영향력에 속한 봉지의 일부가 왕령지의 봉지로 편입되었고, 이는 베르망두아 백작령도 예외가 아니라 현재의 일 드 프랑스 내의 있던 봉토 대부분이 왕령지로 편입되는 등 삭감이 있었다. 관련 지도[주의] 이후 헤르베르트 4세는 995년에 사망해 아들인 에티엔이 뫼옥스와 트루아, 오모아의 백작령들을 상속받게 되었다.
2.8. 플란드르 백작령
843년 베르됭 조약 이전까지 아우스트라시아에 속해 있었으나 조약 이후 에노 파구스[17]와 함께 네우스트리아로 편입되었다. 862년 서프랑크 왕국 샤를 2세의 딸 유디트 카를링과 결혼해 귀족이 된 보두앵 1세는 바이킹의 공격을 막기 위해 네우스트리아에 속해 북해에 인접하여 바이킹의 침략이 끊이질 않는 셸드강(Scheldt) 남쪽을 기반으로 하는 플랑드르 백국을 세워 879년까지 바이킹의 침입과 약탈을 막아냈다.

아내의 조력도 있기는 했지만 플랑드르 내의 교회 세력과도 연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교회 등의 지원을 받아 아라스, 겐트, 브뤼헤에 바이킹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요새 등을 세웠다. 또한 백작 부부는 성 도나티우스에게 헌정된 교회를 브뤼헤에 세웠고, 푀르너에 베네딕트 수도회를 유치했으며,성 발부르가의 성물을 기증했다.

870년 관할하고 있던 셀드 강 남쪽을 넘어 중류 및 테르누아즈 강 중류까지 장악해 세습적은 영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후 877년 샤를 2세가 죽고 처남인 루이 2세가 계승권을 위협받고 있을 때 몇안된 지지 세력으로 보좌했다. 이후 차남인 보두앵 2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18] 생 베르탱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나 얼마 후 사망했다.

플랑드르 백작이 된 보두앵 2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918년까지 북해에서 침략해오는 바이킹을 막아냈다. 백작이 된 초반인 2년 동안 어머니 유디트의 보조를 받고 통치했지만 879년 유디트가 사망하면서 직접 플랑드르를 통치해야 했는데 여전히 미숙한 탓이었는지 바이킹들을 테루안을 약탈한 후 880년 겐트에서 겨울 동안 야영을 한 후 881년 투르네가 약탈되었고, 다음해인 882년 캉브레와 아라스가 약탈되었고, 883년 블로뉴, 시디우, 생리키에, 푀르너를 테루안을 거쳐 겐트로 되돌아오면서 플랑드르 각지를 약탈했고, 이후 라인란트 지방과 아라스를 약탈한 후 콩데와 코르트레이크에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를 구축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보두앵 역시 통치자로서의 역량이 생기기 시작해 저 남쪽의 바이킹들에 의해 황폐화된 아르투아, 테르누아, 생 베르탱 수도원 일대, 블로뉴, 트루네시스 일대를 점거해 여러 성채들을 축조해 자신의 측근들을 성주로 파견했다. 이후 911년 생 클레르쉬레프트 조약으로 바이킹 군벌 중 한명이었던 롤로가 루앙 백작이 되어 서프랑크 왕국에 편입되기까지 바이킹들의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888년 동프랑크 왕국의 왕으로서 서프랑크 왕을 겸하고 있던 카를 3세가 조카 아르눌프의 주도하에 결국 퇴위하면서 서프랑크 왕국은 이전 국왕인 샤를로망 2세의 동생 샤를 3세를 세울지 아니면 파리 공방전의 주역이자 로베르 강철공의 아들 외드를 왕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결정하는 기로에 놓였다. 이때 보두앵 2세는 샤를 2세의 외손자였기에 서프랑크 국왕 선거에 참가할 자격이 있었지만 대신 동프랑크 왕이 된 아르눌프를 후보로 세우려고 했지만 아르눌프는 동프랑크 동쪽 지대와 이탈리아 왕위 및 황제 자리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거절했다.

결국 외드가 서프랑크의 왕으로 선출되지만 문제는 외드와 보두앵은 모두 카롤링거 가문을 와가로 둔 사촌지간이었으나 보두앵이 생 베르탱 수도원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면서 양자간 관계과 불편해진 상태였다. 결국 외드는 브뤼헤에서 보두앵을 공격으나 실패했다. 또한 이웃한 베르망두아 백작령과도 영토 문제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893년 전후로 바이킹의 침략을 보다 더 쉽게 막아내기 위해 바다 건너 웨식스 왕국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엘프리스와 결혼하면서 혼인 동맹을 맺었다.[19] 895년 동생인 캉브레 백작 라울이 베르망두아 백작령을 차지하는데 지원을 하나 896년 헤르베르트 1세가 베르망두아를 탈환했고, 라울과 그의 가족 및 친지들을 제거하면서 보두앵 2세는 헤르베르트 1세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다.

이후 양자는 일시적인 화해로 헤르베르트 1세는 딸 아델라이드를 보두앵 2세는 아들 아르놀프 1세와 약혼시키지만 보두앵 2세가 샤를 3세와 반목하게 되면서 양자의 화의는 파토나게 되었다. 보두앵은 페론을 탈환했고, 생배스트 성과 생토메르 수도원을 점령했다. 그 후, 국왕은 랭스 대주교 폴크에게 양도해 주었고, 곧 수아송 근처의 생메라드와 교환했지만 보두앵의 분노를 잠재울수 없었다.

이후 생베르탱 수도원장 라울의 사후, 보두앵은 수도원의 임시관리를 맡게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백작의 학대를 두려워한 수도사들은 풀크에게 호소하고 최종적으로 폴크가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어 외드왕의 사망과 함깨 샤를 3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면서 임명이 되는 것 확인되었다. 893년 수아송 공회의에서의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보두앵은 무력으로 아라스와 수도원을 되찾았다.

보두앵의 탐욕의 명성은 확실히 생베르탱 수도원에 대한 그의 욕망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얻지 못했다. 또한 그는 잔인하다고도 알려져있는데. 보두앵은 900년 6월 17일 릴러스 성주 와인메어에 의해 풀크를 암살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폴크의 후임 주교인 헤르베르트는 격노했고, 곧 범죄를 선동한 자에 대해서는 파문이 전해졌지만, 왕권이 약한 샤를 3세는 너무 강한 봉신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907년 지속적으로 영토 분쟁등으로 충돌하고 있던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1세를 암살해 그동안 악연을 청산하지만 헤르베르트 1세의 아들 헤르베르트 2세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었다. 이후 918년 9월 10일 보두앵 2세가 사망하고 아들인 아르눌프가 그뒤를 승계했다. \

그 또한 처남인 헤르베르트 2세와는 2대째 내려오는 악연 및 영토 분쟁으로 오랫 동안 대립했다. 아르눌프는 922년을 전후로 샤를 3세를 지지 세력중 하나였고, 923년 6월 15일 수아송 전투에서 샤를 3세를 지원하지만 결국 샤를 3세가 전투 전 암살된 로베르 1세의 아들 위그 르 그랑과 사위 라울에게 생포되자 샤를 3세를 버리고 라울을 지지한다.

928년 바이킹 군벌 세력을 이끌던 지크프리트가 기네스를 점령하자 아르눌프는 반격을 포기하고 대신 기네스의 영주로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봉신이 되는 것과 딸인 엘프트루드를 아내로 삼는 조건으로 지크프리트를 포섭한다.

931년 아르눌프는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모르타뉴(Tournaisis) 성을 점령했습니다. 932년에는 아라스(Arras) 성을 점령했습니다. 933년에 형제인 블로뉴 백작 아달올프가 죽자 그는 어린 조카들을 축출하고 블로뉴 시와 부유한 생베르탱 수도원을 소유하게 되었고, 943년에는 이미 생피에르 드 겐트(Saint-Pierre de Ghent)의 수도원장이었던 제라르(Gérard)를 복속시켜 칼레(Calais)를 장악했다.

942년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이자 파리 백작인 위그 르 그랑과 독일왕 오토 1세와 손을 잡고 루이 4세에게 반기를 들어 해상 무역에 부과되는 관세에 중요한 퐁티유의 주요 거점인 몽트뢰유를 무단으로 점거했으나 루앙 백작 기윰 1세의 개입으로 합법적인 백작인 에를뤼앙(Herluin)에게 돌아갔다. 이후 942년 아르눌프는 화의를 구실로 기윰 1세에게 파퀴니에서 만나 화의할 것을 청하자 기윰은 아무런 의심없이 파퀴니에 왔다가 암살당하고 만다.

헤르베르트 1세의 암살에 루이 4세는 격분했으나 아르놀프는 위그 르 그랑을 중재인으로 내세워 이를 모면했고, 루이 4세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후 어린 백작인 기윰 2세를 유폐시키고 루앙 백작령을 삼키려는 루이 4세에게 협조해 루앙을 공격했고, 이 기간동안 플랑드르는 바이킹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945년 7월 루이 4세가 노르망디인들에게 붙잡혀 위그 르 그랑에게 넘겨지자 오토 1세는 위그 르 그랑이 루이 4세 이상으로 통제할 인물임이 아님을 깨닫고 곧장 상리스에 구금된 루이 4세를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아르눌프 또한 오토 1세의 편을 들고 상리스를 치지만 실패하고 결국 947년 위그 르 그랑의 보복 공격을 받게 되었다. 다만 이때의 일로 플랑드르는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추후 상업적 위치에서

948년 아르눌프는 석방된 루이 4세와 함께 다시 몽트뢰유를 정복하려 했으나 로지에 백작의 방어로 실패하고 만다.949년 로베르 가문을 편들던 아미앵 주교구를 점거하나 얼마 안가 위그 르 그랑에 의해 탈환되었다.

수년간의 전투 끝에 아르눌프는 다음 몇 년 동안 자신의 영지의 내정에 집중했다. 우선 그가 한 일은 겐트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과 성 베르탱 수도원의 평신도 수장직을 포기하고 이를 성직자인 게르하르트 폰 브로네(Gerhard von Brogne)에게 넘겨주는 수도원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950년대쯤 아들인 보두앵 3세를 작센 공작헤르만 빌롱의 딸인 마틸다와 혼인시켰고, 늦어도 954년부터 아르눌프는 그의 장남인 보두앵 3세를 정치에 참여시면서 블로뉴 백작령을 넘겼다. 백작직을 넘겨받은 보두앵 3세는 베르그, 뵈른, 이프르, 브뤼헤, 부르부르크를 요새화했다. 또한 겐트를 중심으로 양모 산업과 함께 이를 유럽 각지로 판매해 상업적 이익을 얻었다.

957년 그는 몽트뢰유의 루제로와 아미앵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962년 노르망디를 공격하다가 천연두로 사망했고, 아직까지 생존해 있던 아르눌프는 다시 권좌에 복귀해 보두앵 3세와 작센 공작 헤르만의 딸 마틸다 빌롱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아르눌프가 성장할 때까지 루이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로테르 왕의 후견을 받게 했으나 로테르는 즉시 이를 이용하여 아르눌프가 한때 축출되었던 조카 아르눌프 2세와 화해하도록 강요하여 불로뉴 카운티를 포기해야 했다. 이 밖에도 현재 프랑스 피카르디속한 땅들마저 양도해야 했다.

아르눌프는 964년 3월 27일에 사망하여 겐트의 성 베드로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아직 미성년이었던 손자인 아르눌프 2세가 플랑드르 백작위를 승계했고, 973년 친척인 보두앵 바르소가 죽기 전까지 섭정을 맡게 되었다. 이때 프리슬란트 백작 디트리히 2세에 의해 일시적으로 겐트가 점령되기도 했다. 968년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2세의 딸 로젤라와 결혼했다.

976년 아르눌프 2세가 성년이 되었을 때, 플랑드르는 아르놀프 1세가 획득한 남부 영토 일부를 잃은 상태였다. 다만 보두앵 바르소가 죽은 이후 성인이 되기 3년 동안 로테르는 약조를 지켰다. 하지만 그의 조부인 아르눌프 1세가 정복했던 오스테르반트, 아르투아, 풍티외, 아미앵에 대한 통치 권한은 돌려주지 않았다.

이후 아르눌프는 로테르가 돌려주지 않는 영지를 되찾기 위해 독일왕 오토 2세의 편에 선 후 대부인 베르됭 백작 고트프리트와 함께 몽스를 점령하였다. 978년 로테르의 공격으로 아르투아를 잃었고, 981년 위그 르 그랑의 아들 위그 카페에 의해 몽트뢰유가 점거되면서 인근에 위치한 생베르탱(Saint-Bertin) 수도원의 성물을 생발레리(Saint-Valery) 수도원과 생리퀴에(Saint-Riquier) 수도원으로 돌려보내으나 성물이 도난당했다.

985년에 양부인 고트프리트가가 로타르 왕의 포로가 되자 결국 로테르의 잠재적 정적인 위그 카페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987년 로테르의 유일한 아들인 루이 5세가 샹리스에서 낙마 사고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고트프리트는 풀려나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프랑크 왕을 세우는 과정에서 랭스 주교 아달베롱의 주도하에 선거제로 가면서 로테르 동생이지만 계승권이 박탈된 하 로렌의 공작 샤를을 배제한 채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이에 하 로렌 공작 샤를은 이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서프랑크 내의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아르놀프는 자신의 영지가 하로렌과 접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샤를의 편에 섰다. 그러나 위그 카페의 공격으로 인해 그는 위그 카페를 왕으로 인정했고, 얼마 안가 어린 아들인 보두앵 4세를 남기고 열병으로 사망했다.

이에 아르눌프 2세의 아내였던 로젤라는 어린 아들의 안전을 위해 위그 카페의 아들이자 공동왕이었던 로베르 2세와 재혼하면서 지참금으로 퐁티유와 몽트뢰유를 가져갔고, 조모인 작센의 마틸다가 섭정으로 백작령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겐트의 영주였던 길보드가 반란을 일으켰고, 겐트를 중심으로 와슬란트와 코르트레이크까지 그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다.다.

996년 로젤라는 로베르 2세와 이혼해 플랑드르로 돌아왔으나 그녀가 지참금으로 가져간 퐁티유와 몽트뢰유는 결코 반환되지 않았다. 성년이 된 보두앵 4세는 길보드의 반란을 진압해 겐트와 와슬란트, 코르트레이크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았고, 남부의 블로뉴, 기네스, 헤스댕, 생풀의 영주들에게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하면서 플랑드르 백작령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2.9. 샹파뉴
현재의 샹파뉴 지역은 본래 아우스트라시아-로타링기아에 속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843년 베르뎅 조약 이후 점진적으로 서프랑크 왕국에 일부 지역들이 네우스트리아로 편입되다가 869년 로타링기아 왕 로타르 2세가 사생아 위그를 남기고 죽자 로타르 2세의 숙부들인 서프랑크 왕국 샤를 2세 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 2세가 로타링기아를 두고 첨예한 이권 다툼 끝에 870년 메르센 조약 채결해 로타링기아를 동서로 분할하면서 서쪽의 80%는 동프랑크에 귀속되었고, 나머지 20%인 현재의 벨기에의 플랑드르와 에노 지역과 함께 현재의 샹파뉴를 구성하는 나머지 지역들이 서프랑크 왕국에 귀속되면서 그 기초가 구축되다. 이때 상파뉴는 956년 이전까지 하나의 백작령이 아닌 843년 베르뎅 조약으로 먼서 서프랑크 왕국에 편입된 모 백작령과 함께 트루아, 랭스의 백작령으로 나눠져 있던 상태였다.

모의 경우 862년 샤를 2세의 아들인 루이 2세가 백작으로 있은 후 888년까지 두 명의 티베르트라는 이름의 귀족들이 통치했다. 그러다가 888년 카롤링거 왕실의 방계로 카롤루스 대제의 차남 피핀 카를로만의 서자이자 롬바르디아의 분봉왕 베른하르트 1세의 서자인 상리스의 피핀 2세의 아들인 헤르베르트 1세가 모의 백작이 되었다.

907년 헤르베르트 1세가 죽은 네우스트리아 변경백령에 잠시 귀속되다가 그의 아들인 헤르베르트 2세가 로베르 1세의 딸 아델라와 결혼하면서 지참금의 형태로 모를 백작직을 되찾는다 이후 헤르베르트 2세는 922년 장인인 로베르 1세의 서프랑크 왕으로의 즉위에 찬성했고, 수아송에서 샤를 3세를 사로 잡는데 성공하나 샤를 3세가 옥중에서 사망하면서 잉글랜드로 망명한 그의 외아들인 루이 4세의 증오를 사게 되어 라울이 사망하고 루이 4세가 943년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한 후 체포되어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943년 2월 23일 아시네의 생캉탱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영지는 헤르베르트 2세의 외조카이자 처남이기도 한 위그 르 그랑의 지도 하에 분할 상속되었는데, 이때 현재의 일 드 프랑스에 속한 모와 함께 샹파뉴 아르덴의 샬롱 백작령이 로베르 1세가 물려받게 되었다.

트루아의 경우 820년 최초로 알레랑이 루트비쿠스 1세에 의해 백작으로 임명되었고, 843년 베르뎅 조약으로 트루아가 서프랑크 왕국에 귀속되면서 샤를 2세에게 충성해 849년 툴루즈 포위전에 참여했고, 이후 고티에의 변경백과 함께 850년 바르셀로나 백작을 겸하다가 2년 뒤 후우마이야 왕조의 공격으로 전사하게 되었다.

이후 그의 후임으로 로베르가의 외드 1세가 임명되었지만 858년 샤를 2세가 자신의 아들인 루이 2세를 트루아 공작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 반발해 동생인 로베르 르 포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에게 원군을 청햇지만 이내 진압되었고, 샤를 2세는 자신의 외숙인 풍티외의 로돌프를 트루아의 백작에 임명했다.

이후 871년 외드 1세의 아들인 외드 2세가 트루아의 백작이 되지만 876년 사망하고 그의 뒤를 동생인 로베르 1세가 잇게 되었다. 로베르 1세는 루이 2세의 딸 지젤과 결혼햇으나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외조카인 푸아티에 백작 에메농의 아들 아달렐메가 트루아의 백작이 되었다. 894년 형제인 아데마르와 함께 현재의 오베르뉴에 위치한 오리야크를 공격하다가 붙잡혀 투르네에 구금되다가 사망했고, 당시 네베르와 아우툰 백작이었던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1세[20]가 트루아를 차지했다.

이후 트루아는 상스[21] 901년 리샤르 1세는 자신의 측근인 샬롱 백작 므낫세에게 트루아와 상스에 대한 통치권을 대행하게 했다. 이후 921년 리샤르 1세가 사망하자 아들인 라울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 하지만 일년 만에 장인인 로베르 1세 샤를 3세의 푸대접에 분노한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의 추대로 서프랑크의 왕으로 추대되자 그를 지지했고,

이후 923년 수아송에서의 전투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원해 승전을 거두는데 일조했으나 이때 장인이었던 로베르 1세가 사망했고, 이때 처남인 위르 르 그랑이 왕위를 양도하면서 어떨결에 서프랑크 왕이 되자 부르고뉴의 통치를 자신의 동생인 흑공 위그와 측근들에게 위임해야 했고, 트루아와 상스는 가르니에와 그의 아들 리샤르에게 맡겼다. 두 부자는 930년 전후로 트루아와 상스를 통치했고,

이후 936년 흑공 위그가 트루아와 상스를 통치해야 했으나 대신 샬롱 백작 므낫세의 아들인 길베르 드 샬롱이 대신 대리로 통치했는데 이때 라울이 죽자 위그 르 그랑은 위그 흑공의 세력이 강력한 점을 우려해 그에게 부르고뉴를 분할하도록 강권했고, 결국 위그 흑공은 부르고뉴 공령을 분할했고, 트루아와 상스 또한 독립하면서 길베르 드 샬롱이 통치를 받게 되었다.

모와 트루아가 통합되기 시작한 때는 950년대로 950년 로베르는 부르고뉴 백작 겸 살롱 쉬르 손 백작, 트루아 백작 기셀베르트 드 샬롱(Giselbert de Chalon) 또는 길베르 드 살롱과 디종의 이르멘가르드(Ermengarde)의 딸 아델라이드 베라(Adélaïde Werra) 드 트루아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으로 그는 상파뉴 지방을 양도받았다. 956년 장인 기셀베르트 드 샬롱 또는 길베트 드 샬롱이 사망하면서 그는 트루아 백작령과 백작 작위도 물려받았다.

955년에는 카페 가문의 위그 르 그랑의 가신이 되었으며, 이때 그의 처형인 리우트가르트를 위그 르 그랑의 아들 부르군트의 오토와의 결혼을 주선시켰다. 959년 그는 갑자기 부르군트를 공격, 디종과 디종 주교령을 차지하고 디종 주교를 감금했다가 추방해버렸다. Richeri Historiarum에 의하면 이때 그는 디종 지역을 공격하기 전 주지사를 뇌물을 주고 매수했다 한다. Richeri Historiarum에 의하면 960년 로베르는 쾰른의 주교가 이끄는 2천 병사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960년 서프랑크의 왕 로테르 3세와 독일의 오토 1세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결국 디종 지역을 반납해야 했다. 966년 8월 29일에 상파뉴 혹은 아키텐에서 사망했는데, 967년 사망설, 968년 사망설이 있다.

어째든 로베르 1세가 죽자 그의 영지는 응당 아들인 헤르베르트 4세가 물려받아야 했지만 영토는 그에게 돌아오지 않고, 984년까지 그의 삼촌인 오무아 백작 헤르베르트 3세가 소유하게 되었다. 삼촌 오무아 백작 헤르베르트 3세와의 구분하기 위해, 삼촌 헤르베르트 3세는 장로공(the old), 조카 헤르베르트는 청년공(the Younger)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한다.

980년 또는 988년 그의 삼촌 헤르베르트 3세의 죽음으로 그는 아버지의 원래 영지였던 뫼욱스, 트루아, 비트히를 차지할 수 있었다. 헤르베르트 4세는 서프랑크의 국왕 로테르 3세의 신실한 추종자였고 그의 하로렌 원정을 수행하였다.

로테르를 도와 하 로렌을 공략한 뒤에는 985년 로렌의 샤를의 측근이며 로테르 3세에 저항한 베르덩의 고드프리 1세(Gottfried of Verdun)을 체포해 로테르 3세에게 넘겨주었다. 이 일로 고드프리는 죄수 고드프리(Gottfried the Prisoner)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987년 로테르의 후계자인 루이 5세가 죽은 뒤에는 헤르베르트는 블루아백작 오도 1세와 함께 하로렌 공작 샤를을 지지하였다. 987년 위그 카페가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자, 고드프리에 대한 체포와 양도를 모두 무효로 하고 석방시키게 했다.

995년 헤르베르트 4세가 죽자 아들인 에티엔이 트루아와 모의 백작 위를 상속하게 되었다.그의 행적이나 영지 내에서의 통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에티엔과 그의 아내 아델라이드 또는 알릭스의 이름은 996년 상스의 세윈(Sewin) 주교가 프로뱅에 성 아이굴푸스(Aigulphus, 아이굴포(Aigulf) 또는 에율(Ayoul))의 시신과 유물을 찾았을 때의 관련 기록에 잠시 등장한다. 프랑스의 왕 로베르 2세가 라그니 수도원(Lagny Abbey)에 기부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3. 아우스트라시아 → 저지대 지역· 알자스-로렌
3.1. 베르됭 조약 이전
아우스트라시아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기 전까지 프랑크족들의 본거지였다. 이후 궁정이 네우스트리아로 옮겨졌지만 클로타르 1세 이후인 561년 2차 분할 당시 시게베르 1세가 랭스에서 자리 잡은 후 네우스트리아 왕으로 자칭했다. 562년 아바르족이 튀링겐 일대를 침공하면서 랭스가 위험해지자, 수도를 메츠로 이전한 뒤 아바르족과 격렬하게 맞붙은 끝에 겨우 격퇴했다. 이때 킬페리크는 시게베르가 정신없는 틈을 타 조용히 지내겠다는 맹세를 파기하고 랭스를 공격해 자기 영지로 삼았다. 이에 시게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수아송을 공략하고, 뒤이은 킬페리크와의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데우데베르는 1년 내내 폰티오에서 포로로 남아있다가 다시는 시게베르에게 어떠한 대항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뒤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그 후 킬페리크와 시게베르 형제는 화해했고, 킬페리크는 시게베르가 작센과 전쟁을 벌일 때 함께하기도 했다.

566년, 서고트 왕국의 국왕 아타나길드의 딸 브룬힐트와 결혼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형제들의 아내들이 왕비의 지위에 합당하지 않으며 오직 왕의 딸만이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라는 칭호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브룬힐트는 당초 아리우스파였지만 시게베르와 사제들의 권고에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567년 파리 일대를 점유하던 카리베르 1세가 사망하자, 군트람, 킬페리크 1세와 함께 영지를 분할했다. 그런데 프로방스를 놓고 군트람과 분쟁이 벌어졌다. 그는 군트람의 재산인 아를 시를 기습 공략했고, 브르군트의 파트라케인 켈수스는 즉각 반격하여 아비뇽을 점령하고 시게베르의 부하를 격파하고 아를을 탈환했다. 이후 군트람은 아비뇽을 그에게 반환해 전쟁을 끝냈다.

568년, 킬페리크 1세와 결혼한지 1년된 서고트 왕국의 공주이자 브룬힐트의 여동생인 갈스빈트가 목졸려 살해당했고, 갈스빈트 살해를 사주한 것으로 의심되는 프레데군트가 킬페리크 1세의 아내가 되었다. 이에 브룬힐트가 분노하여 복수해달라고 간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킬페리크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군트람이 두 형제에게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은 569년 전국에서 소집한 대표들이 집결한 궁정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궁정 회의 결과, 킬페리크는 살인에 관여한 책임을 지고 브룬힐트에게 아키텐의 5개 도시(보르도, 리모주, 카오르, 베른, 비고르)를 넘겨야 했다.

얼마 후, 아바르족이 다시 튀링겐을 쳐들어왔다. 그는 즉시 요격에 나섰으나 패배하고 적에게 생포되었다. 하지만 아바르족은 카간에게 상당한 선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석방시켰고, 양자는 영구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몇년 후, 킬페리크 1세는 영토 손실을 만회하고자 시게베르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를 탈취했다. 여기에 573년 시게베르의 포로였다가 풀려났던 장남 테우데베르에게 아키텐 일부를 약탈하게 했다. 테우데베르는 아키텐을 철저히 약탈했는데, 특히 리모주를 공략할 때 성직자까지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이에 시게베르는 이참에 킬페리크를 처치하고 그의 영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575년, 시게베르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인들을 대거 고용해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뒤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그는 군트람이 게르만족을 두려워하여 킬페리크 1세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에 그는 군트람에게 군대가 통과하는 걸 가로막는다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군트람이 어쩔 수 없이 길을 열어주자, 킬페리크는 아부예로 도주했다. 그는 이 도시를 포위한 뒤 킬페리크로부터 평화 협약을 맺는 조건으로 테우데베르가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게베르의 게르만 동맹이 파리 주변을 약탈하는 걸 막느라 애써야 했다.

그 후 킬페리크 1세는 평화 협정을 깨고 군트람과 동맹을 맺은 뒤 테우데베르에게 군대를 맡겨 랭스로 쳐들어가게 했다. 시게베르는 라인강 건너편에서 군대를 소환한 뒤 반격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투에서, '군트람 보손'이 돌연 편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테우데베르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킬페리크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투르로 도망친 뒤 그곳에서 농성했다. 그러나 투르 공방전이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절망에 빠진 나머지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릴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파일:Grandes_Chroniques_de_France_-_XIVème_siècle_-_Assassinat_de_Sigebert_Ier.jpg
프레데군트가 보낸 자객에게 칼에 찔러 죽는 시게베르 1세

파리 일대의 프랑크 귀족들은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고, 킬페리크를 떠나 그에게 귀순하고자 대표단을 보냈다. 그는 비트리 앙 아르투아에서 사절단을 맞아들이고 파리의 왕이 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도중에 프레데군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 2명에게 독이 묻은 단검에 찔려 암살당했다. 시게베르를 호위하던 병사들은 암살자들을 곧바로 처단했다. 지도자를 잃은 군대는 해산했고, 킬페리크는 잃어버렸던 영토와 재산을 쉽게 되찾았다. 이후 여세를 몰아 브룬힐트와 킬데베르가 머물고 있던 파리로 진격했다. 만약 그가 킬데베르를 잡는 데 성공한다면,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 5살배기 아이를 삭발시켜 후계자 자리에서 완전히 배제해버릴 수 있었다.

시게베르 1세의 총신이었던 군도발트 공작은 슬픔과 충격에 빠져 어쩔 줄 몰라하는 브룬힐트를 내버려둔 채 킬데베르만 챙겨 아우스트라시아의 본거지인 메츠로 이동했다. 메츠에 무사히 도착한 후, 57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시게베르 1세의 충복들을 불러모아 킬데베르 2세를 왕위에 올렸다. 이후 누가 섭정을 맡을 지를 놓고 격렬한 대립이 벌어진 끝에 루푸스와 고곤이 섭정을 맡았다. 루푸스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주요 지역인 샹파뉴 공국을 통치했고, 고곤은 막대한 자금을 궁정의 여러 인사에게 빌려주고 영향력을 행사한 덕분에 국정을 장악했다. 두 사람은 "왕의 교육자"라는 칭호를 획득하고 왕국을 좌지우지 했다. 두 사람에게 밀려난 이들은 이에 반감을 품었고, 그 중 상당수는 킬페리크 1세가 다스리는 네우스트리아에 귀순했다.

한편, 브룬힐트는 딸들과 함께 킬페리크 1세의 군대에게 체포된 뒤 루앙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킬페리크는 나중에 브룬힐트와 결혼하고 "킬데베르 2세의 보호자"를 내세워 아우스트라시아까지 집어삼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576년, 푸아티에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던 아들 메로베가 루앙으로 가서 브룬힐트를 만나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킬페리크는 분노해 루앙으로 달려가 아들과 직접 대면했다.

오랜 협상 끝에, 킬페리크는 브룬힐트와 결혼하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아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샹파뉴에서 온 이들이 수아송을 습격해 순식간에 장악한 후 프레데쿤트와 킬페리크의 아들 클로비스를 수아송에서 몰아냈다. 이에 킬페리크와 메로베는 잠정적으로 화해한 뒤 수아송으로 진군해 적을 몰아내고 수아송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이 메로베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여겨 아들을 긴급 체포한 뒤 감옥에 가두었다가 삭발식을 거행해 상속권을 박탈한 후 아니솔 수도원에 보냈다. 이렇듯 부자간의 대립이 벌어질 때, 브룬힐트는 루푸스의 도움으로 루앙에서 빠져나와 메츠로 이동했다.

브룬힐트는 메츠에 도착한 뒤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통치했다. 그러나 킬페리크 1세와 연락을 주고받는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저항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랭스의 에지디우스는 루푸스와 고곤이 잘못되기를 기다렸다.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독립적인 행보를 보였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두 사람은 서고트 왕국 출신인 브룬힐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굴욕감을 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고 기술했다. 브룬힐트는 이런 상황에서 잘못 행동했다간 끝장이라고 판단했다.이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적으로 편을 들지 않고 통치자가 아닌 어린 왕의 어머니 역할을 주로 수행해 귀족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그녀는 친 네우스트리아 파의 반대 세력인 베르테프레드의 딸의 대모를 맡았으며, 고곤과도 친분을 다졌다. 579년, 브룬힐트의 장녀 인군트와 서고트 왕 리우비길드의 아들 헤르메네길드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이는 서고트 왕국의 지원을 토대로 세력을 키우려는 브룬힐트의 계책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이윽고 여러 귀족 집단의 지지를 확보한 브룬힐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정치에 독자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580년, 로데츠의 달마티우스 주교가 56년간 재임한 끝에 선종했다. 차기 주교 선거를 앞두고, 고곤은 토른소바트라는 이름의 지역 신부를 지지하려 했다. 그러나 로데츠 주민들이 달마티우스의 유언장을 읽기 위해 아우스트라시아 궁정에 도착했을 때, 킬데베르 2세는 테오도시우스 사제를 주교로 선출하라고 명령했다. 고곤의 지원을 받았던 후보가 낙마한 것은 "왕의 교육자"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왕비가 그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음을 암시한다.

581년 고곤이 사망했다.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브룬힐트가 고곤을 독살했다고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고곤의 장례가 정중하게 치러졌고 각종 명예 칭호가 수여되었다는 사실이 고곤의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곤이 사망한 후 교육자의 자리는 반델린이라는 인물이 맡았는데, 이 인물에 대해서는 고곤의 지지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섭정의 새로운 '강자'는 랭스의 에지디우스, 우르시온, 베르테프레드였다. 그들은 부르군트 왕 군트람과의 동맹을 추구했던 고곤의 정책을 바꿔서 킬페리크 1세와의 동맹을 추진하기로 했다.

당시 킬페리크 1세는 아들들을 모두 죽이거나 병으로 잃어버리면서 더 이상 후계자를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킬페리크 1세와 가까워져서 후계 자리를 맡아둔다면, 장차 네우스트리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에지디우스는 킬페리크를 찾아가 이 문제를 논의했고, 킬페리크는 자신이 죽으면 모든 영토를 킬데베르 2세에게 상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네우스트리아와 가까이 지내기로 한 것에 불만을 품은 루푸스가 반기를 들면서, 아우스트라시아는 내전에 시달렸다. 브룬힐트는 두 파벌 중 어느 쪽도 승리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만약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무너뜨린다면, 그들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그녀는 중재자 역할을 맡기로 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가 군대를 이끌고 루푸스를 해치려 하자, 브룬힐트는 남자처럼 허리를 두른 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의 진영으로 뛰어들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여러분, 제발 이 악한 행위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지 마십시오. 나라의 안녕을 해칠 수 있는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지 마십시오."

우르시온이 호통쳤다.
"이 여자야, 우리에게서 떨어져라! 당신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통치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당신의 아들이 통치하고 왕국은 당신이 아닌 우리의 것이다. 너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라. 우리 말의 말굽이 너를 짓밟게 하지 마라."

우르시온 일당은 오랫동안 온갖 조롱을 퍼부었지만, 브룬힐트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설득했다. 이에 병사들이 왕비의 입장에 동조하자, 결국 그들은 전쟁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이후 루푸스는 우르시온 일당이 자신의 재산을 약탈하는 걸 보고 킬데베르 2세와 함께 군트람에게 망명했고, 군트람은 킬데베르 2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해줬다고 한다. 그리하여 에지디우스, 우르시온, 베르테프레드 등이 이끄는 친네우스트리아파가 정국을 장악했지만, 루푸스가 여전히 건재했고 군트람이 개입하여 어린 왕의 보호를 천명했기에 모든 걸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581년, 고곤의 오랜 친구였으며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부유한 남부 일대를 다스리던 다이나미우스가 친네우스트리아파를 규탄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는 군트람과 동맹을 맺고 그해 말에 마르세유 절반을 넘겼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 2세의 후견인들과 군트람 왕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 킬페리크 1세는 이 때를 틈타 부르군트를 침공해 페리구스와 아쟁을 공략했다. 결국 군트람은 582년 킬페리크가 점령한 두 도시를 그대로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582년, 킬페리크 1세는 프레데군트에게서 아들 테오도리크를 얻었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측은 불만을 품었다. 얼마 후 네우스트리아군과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부르군트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아우스트라시아군은 일부러 늦장을 부렸고, 네우스트리아군은 부르주 근처에서 군트람의 군대에게 요격당해 막대한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킬페리크는 평화 협정을 이루기 위해 부르군트에게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후 군 내부에서 친 네우스트리아파를 박멸하라는 목소리가 일어나자, 에기디우스 등은 겁에 질러 달아났다. 이 반란이 브룬힐트에 의해 계획되었는지 아니면 자발적인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브룬힐트는 이 덕분에 전권을 쥘 수 있었다.

군트람은 브룬힐트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를 돕기로 하고 584년 초 마르세유의 절반을 킬데베르 2세에게 돌려줬다. 그녀는 군트람의 지원 덕분에 인기를 드높일 수 있었다. 이후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친척인 군돌프 공작 등을 자기 편으로 포섭했으며, 진영을 바꾸기로 한 에기디우스도 끌여들었다. 이후 킬데베르 2세와 군트람이 연합하여 킬페리크를 공격했다. 당시 2살배기 아들 테오도리크가 이질에 걸려 사망한 것에 낙심했던 킬페리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캉브레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또다른 아들 클로타르 2세를 낳았지만 몇달 후인 584년 9월 27일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프레데군트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갓난아기 클로타르 2세와 함께 당분간 숨어 지내다 군트람에게 서신을 보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고 성년이 될 때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섭정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곧바로 파리로 향했다. 군트람은 클로타르 2세를 보호하려 했고, 킬데베르 2세는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인 그를 제거하려 했다. 얼마 후 파리에 먼저 도착한 군트람은 클로타르 2세를 자기 진영으로 들여보냈다.

이에 킬데베르 2세와 브룬힐트가 568년 그와 킬페리크 1세, 시게베르 1세가 파리를 공유지로 남기기로 합의하지 않았느냐며 파리를 접수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자, 군트람은 아우스트라시아군이 577년 부르군트와 동맹을 맺기로 해놓고 581년에 킬페리크와 동맹을 맺고 자신을 공격한 바 있다고 언급하며 묵살했다. 브룬힐트는 다시 사절을 보내 본래 아들의 영역이어야 했으나 킬페리크에게 빼앗겼던 땅을 양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군트람은 시게베르 1세가 형제의 허락 없이 계약을 위반하고 파리에 들어갔고, 나중에 킬페리크도 똑같이 했으니, 그들이 과거에 한 맹세에 따라 왕구의 분할에서 자신의 몫을 잃었으며, 오직 자신만이 그 땅의 주인을 맡을 수 있다고 답했다. 현실적으로 군트람을 거역할 수 없었던 브룬힐트와 킬데베르 2세는 승복했고, 군트람은 클로타르 2세와 킬데베르 2세 모두를 양자로 삼고 프랑크 왕국 전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584년, 쾰른에 숨어지내다가 갈리아에 들어온 클로타르 1세의 아들 군도발트가 아키텐에서 킬페리크의 옛 지지자인 데시데리우스 공작, 블라다스트 공작, 사가타리우스 주교, 와돈 등과 함께 아키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툴루즈, 앙굴렘 등 여러 도시를 공략하며 군트람에 맞섰다. 군트람은 반란 토벌에 전념하기 위해 아우스트리아와 화해하기로 하고, 585년 봄 킬데베르 2세를 궁으로 초대해 군도발트의 공범들 중 일부를 동등한 입장에서 심판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왕좌를 세웠다. 이후 군트람은 그에게 창을 건내주고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 후 군트람과 함께 군도발트를 살해하고 항복한 반역자들을 심판한 뒤 아우스트리아로 돌아갔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한 번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믿을 수 없다며 처형하라고 독촉했고 군트람은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군트람은 킬데베르 2세가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되었으며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선언하며, 그가 자신의 조언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그가 어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권고였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간 킬데베르 2세는 어머니에게 국정을 계속 맡겼다. 그는 라틴어를 잘 이해했고 몇 개의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그리 관심이 관심이 없었고, 취미인 낚시를 즐겼다. 그렇지만 브룬힐트는 혹여 아들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예방 조치를 내렸다. 먼저 아들의 결혼 상대를 페일루바라는 여인으로 정했다. 이 여인의 출신 성분은 알려지지 낳았지만,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없는 것을 볼 때 미천한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외국 공주나 귀족의 여식이 왕비가 되었을 때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릴까 두려워했기에 이같은 조치를 내렸을 것이다. 또한 요직에 자신의 충복과 친구들을 대거 앉혀서 권력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587년 11월 28일,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보장하고, 아이가 없을 경우 상호 유산을 확립하고, 상대방에게 모반을 꾀한 자를 넘기기로 했다. 또한 두 왕은 왕국의 분할과 경계를 정했다. 군트람은 파리, 토덴, 반도마, 에탐나, 샤르트르를 받았고, 킬데베르는 모, 상리스, 투르, 푸아티에, 아브론테, 에어, 콩세랑스, 라부르드, 알비를 접수했다. 하지만 군트람이 여전히 킬데베르 2세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는 것에 주저하자, 브룬힐트는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예전에 군도발트를 지지하고 군트람에 대적했던 자들을 넘기기로 했다. 이 움직임에 당황한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는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수아송의 라우칭 공작과 동맹을 맺어 브룬힐트에게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라우칭 공작은 킬데베르 2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궁전 경비원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살해되었고, 많은 이가 브룬힐트를 두려워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다.

브룬힐트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친네우스트리아파 지도자인 랭스의 에지디우스에게 화해를 제안했다. 이에 에지디우스는 킬데베르 2세를 찾아가 막대한 선물을 바치며 과거에 저지른 무례를 사죄했고, 킬데베르는 그를 용서했다. 루푸스 공작 역시 옛 정적을 용서하기로 했다. 또한 일전에 축출되었던 마르세유의 테오도르 주교도 복위했다. 한편, 브룬힐트는 본래 네우스트리아에 속했지만 라우칭 공작이 아우스트리아에 귀순할 때 함께 딸려왔던 수아송이 언제라도 프레데군트에게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기고, 이를 방지하고자 589년 8월 킬데베르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테우데베르 2세를 수아송의 왕으로 임명했다.

590년, 프레데군트는 킬데베르 2세와 테우데베르 2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6명의 암살자를 고용해 두 팀으로 나눠서 두 왕을 동시에 죽이게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브룬힐트는 암살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어진 조사 결과, 에지디우스가 라우칭의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에지디우스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590년 11월 중순 메츠에서 사법 재판이 열렸다. 에지디우스는 자신이 켈데베르 2세와 브룬힐트를 암살할 계획에 참여했고 네우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킬페리크와 군트람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킬페리크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와 동맹을 이어갔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그가 처형될 거라고 예쌍했지만, 놀랍게도 브룬힐트는 직위 해제 후 스트라스부르로 유배할 뿐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이는 죄를 고백한 거물들을 언젠가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우리키우스에 의해 라벤나 총독부의 총독으로 선임된 로마누스는 킬데베르 2세에게 전리품을 전부 줄 테니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589년 프랑크군을 전격 파견했다. 프랑크군은 3개 대열로 이탈리아에 진입했고, 랑고바르드 왕 아우타리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 회전은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파비아에서 농성했다. 한편 로마누스는 동로마군을 이끌고 모데나, 알티나, 만토바를 공략하였고, 파비아로 가서 프랑크군과 합류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크군은 로마누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아우타리와 10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철수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질이 돌면서 많은 프랑크 병사가 죽어나가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누스가 사절을 보내 제멋대로 후퇴한 것에 항의하며 다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590년 아우타리가 사망한 뒤 새 랑고바르드 왕이 된 아길루프는 프랑크 왕국과의 화해를 꾀했다. 프랑크 왕국 역시 랑고바르드 왕국과 전쟁을 지속하길 원치 않았기에 포로를 교환하고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한편, 브룬힐트의 딸 인군트와 결혼했던 서고트 왕자 헤르메네길드가 580년 아버지 리우비길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583년에 진압당했다. 헤르메네길드는 곧 피살되었고, 인군트와 아들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는데, 인군트는 도중에 시칠리아 또는 아프리카에서 병사했다. 브룬힐트는 손자를 돌려받기 위해 마우리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친척, 최고위 인사, 고위 사제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 간청했지만, 마우리키우스는 아나타길드가 인질로 활용하기 적합하다고 여겨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서고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은 전쟁을 벌이다가 586년 서고트의 새 왕위에 오른 레카레드 1세가 화해를 촉구하면서 관계가 개선되는 듯했다. 킬데베르 2세는 자신의 여동생인 인군타 공주의 죽음에 대해 10,000솔디를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서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군트람은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레카레드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들을 지원했다. 레카레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트람을 따르는 모든 상인이 셉티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 군트람이 레카레드 1세와 전쟁을 벌일 때, 그는 일부 병력을 보낼 뿐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588년, 브룬힐트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게 군트람을 찾아가서 서고트 왕국과의 전쟁을 종식하라고 요구하게 했다. 마침 서고트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해 기세가 꺾여 있던 군트람은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 브룬힐트는 자신의 딸 클로도신다를 레카레드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양자간의 관계를 개선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브룬힐트의 어머니 고이빈타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아리우스파를 탄압하는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하고자 반란을 꾀했다가 발각된 후 곧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자, 양자간의 약혼은 취소되었다. 레카레드는 협상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바도라는 이름의 서고트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리우바 2세를 낳았다.

킬데베르 2세의 통치 말년에 관한 기록은 희소하다. 프랑크 왕국의 역사에 관한 소상한 기록을 남긴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590년대 초에 사망해버렸고, 또다른 연대기 작가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도 모종의 이유로 저술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단지 반 세기 후 편찬되었고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프레데르가의 연대기만 남았기에, 당시 상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592년 군트람이 사망하면서 아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가 통일되면서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된 킬데베르 2세와 브룬힐트는 오랜 숙적 프레데군트와 클로타르 2세를 타도하려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592년 또는 593년,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로 쳐들어가서 수아송의 드로슈에서 프레데군트의 적군과 격돌했다. 프레데리가 연대기에 따르면,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전투를 중단했고, 이후 몇년간 적대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한편, 킬데베르 2세는 군트람이 생전에 굴복시키려 했지만 연전연패하면서 끝내 실패했고 이후에도 변경 지역을 약탈하는 브르타뉴의 바로스 2세를 제압하기로 하고 594년 토벌대를 파견했다. 원정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브르타뉴가 이후로 조용해진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듯하다. 595년, 튀링겐과 북해 살기에 살던 바르네스 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크군은 즉시 투입되어 이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이 지역에 대한 프랑크의 주권이 복원되었다. 한편 바이에른 왕 가리발트 1세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할 낌새를 보이자, 킬데베르 2세는 바이레른으로 쳐들어가서 그를 축출하고 타실로 1세를 왕위에 올렸다. 이렇듯 대외에서 문제가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네우스트리아의 숙적 프레데군트를 축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킬데베르 2세는 입법 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595년 2월 29일에 반포된 '킬데베르 법령'은 593년 안데르나흐, 594년 마스트리히트, 595년 쾰른에서 열린 세번의 사법 회의에 대한 설명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프랑크인과 로마인을 별도로 다뤘으며, 대부분의 조항은 전통 관습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삼았다. 의무적인 일요일 휴식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법이 제정되었으며, 근친상간 금지에 관한 법안을 재확인했다.

596년 초, 킬데베르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프레데가르는 그가 아내 페일루바와 함께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면서도 별다른 근거는 없으며 단지 소문일 뿐임을 인정했다.

10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 된 테우데베르 2세는 마찬가지로 9살의 나이로 부르군트의 왕이 된 남동생 테우데리크 2세와 함께 할머니 브룬힐트 왕대비가 이들의 섭정을 맡아 전권을 잡았다. 이때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은 부르군트 왕국에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서부 프로방스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넘겼다. 이 조치는 두 왕국의 영역을 비슷하게 설정하는 한편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제어하기 위한 브룬힐트의 의도로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와 부르군트의 수도 오를레앙 중 어느 곳에도 거주하지 않고 두 왕국의 국경 지대인 오툉과 오세르에 주로 거주하면서 두 나라를 효과적으로 제어했다.

킬데베르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네우스트리아 왕비이자 브룬힐트의 오랜 숙적인 프레데군트는 지금이야말로 브룬힐트를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역을 제패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2살의 아들 클로타르 2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파리로 진격했다. 몇몇 아우스트리아 귀족들의 호응 덕분에 일드 프랑스 일부 지역을 확보한 후,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영내로 진입했다. 이윽고 수아송 인근의 라포에서,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맞붙었다. 막대한 희생자를 양산한 이 전투에서 승리한 프레데군트는 여세를 몰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폐렴으로 쓰러져 1년간 고통을 겪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죽어가면서 브룬힐트를 잡아오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가 사망한 뒤 곧바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정세가 여전히 불안했고 귀족들이 여전히 독립적으로 구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간 위험하다고 여겼다. 여기에 599년 프로방스에서 역병이 발생해 군대를 일으키는 게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충실한 관료를 임명하고 잠재적인 반역자들을 숙청하고 행정을 돌보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러다 600년 기반을 어느정도 닦았다고 판단한 그녀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고, 16살의 클로타르 2세가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의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넘기는 평화 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바스크인들이 아두르 강과 가론 강 계곡을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602년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복종시킨 후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또한 바스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바스코니아 공작을 세웠다.

이윽고 테우데베르 2세가 15살이 되어 성인식을 거행했다. 브룬힐트는 손자에게 노예 신분이던 빌리힐데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이는 훌륭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녀는 일찍이 아들 킬데베르 2세에게도 평범한 신분이었던 페일루바를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페일루바는 시어머니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충성심을 보이며 공손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빌리힐데는 이와 달리 브룬힐트의 간섭에서 벗어나 여러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할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라고 권고했다. 테우데베르 2세는 아내의 말에 동감했고, 점차 브룬힐트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가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그대신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했다. 이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간에 긴장감이 흘렀지만, 브룬힐트가 내전을 벌이는 것만큼은 원하지 않았기에 몇년 간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브룬힐트가 수아송에 있는 성 메다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 나오는 수입을 받기를 거절했을 때, 테우데베르 2세는 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는 지역 주교에게 할머니가 그 돈을 계속 받기를 바란하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610년, 빌리힐데 왕비가 갑자기 사망하고 테오데힐트가 새 왕비가 되었다. 프레데가르에 따르면, 테오데힐트가 빌리힐데를 독살하고 그 자리를 가로쟀다고 한다. 빌리헬데는 브룬힐트에게 복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왕국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테오데힐트를 비롯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일전에 부르군트에 넘겼던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서부 프로방스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되찾기를 바랐다. 테우데베르 2세는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클로타르 2세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610년 초, 아우스트라시아군이 알자스를 침공하여 강제로 병합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셀츠 요새에서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우데리크 2세가 소수의 무장 수행원과 함께 회담장에 간 것과 달리, 테우데베르 2세는 정예병을 대거 동원해 회담에 참석했다. 결국 테우데리크 2세는 강한 압박을 받고 알자스를 형에게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자, 알레만니인들은 자발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귀순한 뒤 부르군트 왕국에 귀속된 아벙슈 일대를 파괴했다.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편에 서서 테우데베르 2세와 대립했다.

612년 5월, 테우데리크 2세는 전 병력을 집결한 뒤 할머니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들은 안델로트를 통과한 후 툴루즈를 공략했다. 이에 테우데베르 2세 역시 전군을 이끌고 툴루즈 교외에서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브룬힐트와 테우데리크 2세가 지휘한 부르군트군의 압승이었고, 테우데베르는 수많은 정예병을 잃고 아르덴 숲을 통해 도주했다. 이후 색슨족, 튀링겐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612년 7월 톨비아크(현재 췰피히)에서 재차 맞붙었다. 프레데가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 성립 이래 이 전투 만큼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된 전투는 없었으며, 전사자들은 마치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 몸을 기댄채 서 있었다고 한다. 테우데베르 2세는 이 전투에서도 역시 패배한 뒤 쾰른으로 도주했다. 그러다가 추격대가 오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하여 숲속으로 달아려 했다가 테우데리크 2세의 부하 베르타르에게 사로잡혀 끌려왔다.

테우데베르 2세는 왕의 의복과 인장을 빼앗긴 뒤 샬롱 수도원으로 보내져 머리를 깎이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 메로베는 테우데리크 2세의 명령에 의해 돌에 던져지면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 프레데가르의 연대기는 수도자가 된 테우데베르 2세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 기술하지 않았고, <성 콜룸바누스와 제자들의 삶>의 저자 바비오의 요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때 테우데리크와 테우데베르 사이에 반목이 일어났고, 그들 각자는 왕국의 힘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어서 각자 형제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콜룸바누스는 테우데베르에게 가서 오만함을 경멸하고 성직자가 되어 교회의 품에 들어가고 거룩한 믿음에 복종함으로써 왕국을 잃어도 영생을 잃지 않도록 요구했다. 왕과 그의 측근은 웃으며 "왕위에 오른 메로베우스 가문의 후손이 자발적으로 수도원에 갔다는 소식을 아직 아무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축복받은 콜롬바누스는 그들 모두를 경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성직자가 되지 않는다면, 곧 강제로 성직자가 될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곧 이뤄졌다. (중략) 테우데리크의 추격을 받은 테우데베르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체포된 뒤 할머니 브룬힐트에게 끌려갔다. 테우데리크 편에 있던 브룬힐트는 화가 나서 테우데베르를 성직자로 만들라고 명령했고, 며칠 후에 그를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반면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프랑크 역사집>에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테우데리크가 리푸아리 전역을 불태우고 약탈했을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복종하며 요청했다. "우리는 이미 당신의 소유입니다. 우리와 우리 땅, 영주와 왕을 구해주십시오." 그가 답했다. "만약 너희가 살아남고 싶다면 테우데베르를 산 채로 데려오거나 잘린 머리를 가져와라." 그들은 도시로 돌아가서 테우데베르에게 거짓말 했다.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의 보물을 그에게 돌려준다면 그가 군대를 철수시킬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믿고 궁전 보고에 들어가 보물 상자를 열었다. 이때 백성 중 한 명이 칼을 뽑아 테우데베르의 머리를 벤 후 쾰른 성벽으로 가져갔다.

이로써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일대의 군주가 된 그는 클로타르 2세와 대립했다. 613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덴텐 공국을 자신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정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613년 8월 23일 메츠에서 돌연 사망했고 부하들은 집에 돌아갔다. 프랑크 역사집은 그가 브룬힐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브룬힐트가 유일하게 남은 손자를 굳이 해쳐야 할 동기가 없으며,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명시된 대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후 아우스트라시와 부르군트의 왕위는 브룬힐트에 의해 테우데리크의 사생아인 시게베르 2세 잇게 되는 것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아르눌프, 피핀 1세 등 아우스트라시아의 다른 귀족들은 클로타르 2세를 왕으로 초빙했다. 클로타르 2세가 안더나흐에 도착했을 때, 테우데리크 2세의 아이들과 함께 보름스에 있던 브룬힐트는 그에게 테우데리크에게 정당한 후계자가 있으니 아우스트라시아 왕위를 포기히라고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이에 클로타르 2세는 특별히 소집된 프랑크 민회에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브룬힐트는 클로타르에 맞서기 위해 알보인, 바나차르 및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시게베르를 튀링겐으로 보냈다. 이때 그녀는 알보인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바나차르 등이 클로타르에 합류하려 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알보인은 편지를 읽은 뒤 갈기갈기 찢어서 땅에 던졌지만, 바나차르의 부하 한 명이 이를 발견하고 밀랍판에 붙인 후 주군에게 보였다. 바나차르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깨닫고 다른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그들은 서고트 왕국 출신인 이민족 여자이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한 그녀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고, 이참에 테오데리크의 아이들 중 한 명도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 뒤 브룬힐트와 함께 모조리 죽이고 왕국을 클로타르에게 넘기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연합군이 브룬힐트의 지휘하에 클로타르와 맞서러 진군했다. 샹파뉴의 아시네 강에 이르러 네우스트리아군과 마주쳤을 때, 바나차르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곧바로 귀순했다. 브룬힐트의 원정에 동행했던 시기베르, 코르부스, 메로베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킬데베르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 종적을 감췄다. 브룬힐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딸 테오데린다와 함께 체포되어 클로타르 앞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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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타르 2세는 메로베의 대부를 맡은 바 있었기에 그를 살려줬지만 시기베르 2세와 코르부스는 죽였다. 이후 브룬힐트에게 40여년 간 프랑크 왕국을 혼란과 고통에 빠뜨리고 여러 왕을 파멸로 몰고 간 책임을 물었다. 이에 모든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한 목소리로 "저 악녀에게 참혹한 죽음을 내려라!"라고 외쳤다. 브룬힐트는 3일 동안 온갖 고문을 받은 뒤 낙타에 태워진 후 조리돌림 당했다. 그 후 발가벗겨진 채 머리카락과 양 팔, 양 다리가 두 마리의 야생마의 발에 묶인 뒤 두 말이 채찍질을 받고 앞으로 내달리면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으로 시집온 이래 40여 년간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고트족 여인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고, 프랑크 왕국은 클로타르 2세에 의해 통합되었다.

그러다가 622년 클로타르 2세는 새왕비 시킬트와 아우트라시아의 귀족들의 지속되는 강권으로 인해 다고베르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분봉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 된 다고베르 2세는 메츠 주교 아르눌프와 함께 피핀이라는 귀족들이 조언자로서 그를 도와 아우스트라시아를 통치했다. 624년, 다고베르 1세는 바이에른 귀족 크로도알트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용병을 고용한 뒤 자국을 침략하는 것에 분노해 군대를 파견해 격파한 뒤 크로도알트를 체포한 푸 피핀 1세의 조언에 따라 처형 명령을 내렸다. 클로타르는 크로도알트로부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서신을 받고 아들에게 크로도알트를 살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고베르는 아버지의 명을 무시하고 크로도알트를 처형했다. 이 일로 부자간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625년, 클로타르 2세의 아내이자 다고베르 1세의 계모인 시킬트의 여동생 고멘트루트가 다고베르 1세와 결혼했다. 이때 다고베르는 아버지에게 프로방스, 오베르뉴, 랭스 일대를 지참금 형식으로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자, 아르눌프를 포함한 12명의 프랑크 귀족들이 공의회를 개최해 중재에 나섰고, 클로타르 부자는 곧 화해했다. 클로타르는 아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되 루아르와 프로방스의 일부 영토는 계속 가지기로 했다. 626년, 시킬트 왕비와 에탐피아 공작 보소가 간통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627년에는 베르토랄트 공작이 이끄는 작센 봉기가 일어났지만 다고베르 1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다고베르 1세의 입지는 공고해졌다.

629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과 주교들이 이복동생인 카리베르 2세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세우려하는 것을 감지하고 먼저 선수를 쳐 모든 아우스트라시아 측근들에게 스스로 무장하도록 한 뒤 부르군트와 네우스트리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친히 랭스를 거쳐 수아송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귀족과 주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가 이렇듯 신속하게 움직이자,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후 파리를 수도로 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이 군사적 자치권을 누릴 수 있게 해줘서 지지 기반을 강화했으며, 란덴의 피핀 1세를 궁재로 임명해 지역 귀족들을 통제하게 했다. 또한 카리베르 2세의 외삼촌이며 일전에 그를 네우스트리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주도했던 브로돌프를 처형하면서 네우스트리아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632년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3년 전에 왕비 라그네트루드 사이에서 낳은 시게베르 3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세웠다.2살 내지 3살이었던 그가 왕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기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인 난덴의 피핀 1세와 쾰른 대주교 쿠니베르트가 보좌했다. 633년 난틸다로부터 클로비스 2세를 본 다고베르 1세는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그리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불러모은 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인들에게 클로비스 2세를 왕으로 받들고 아우스트라시아인들은 시게베르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639년 1월 19일, 다고베르 1세가 생드니 수도원에서 병사했다. 이후 난틸다 왕비가 클로비스 2세의 섭정을 맡았고, 피핀 1세와 쿠니베르트가 시게베르 3세를 계속 보좌하기로 했다. 피핀 1세와 쿠니베르트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항상 서로를 돕고 지지하기로 맹세했다. 클로비스 2세의 어머니 난틸다 왕비는 다고베르가 축적한 국고의 3분의 1을 얻었고, 클로비스 2세도 3 분의 1을 받았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피핀 1세에 의해 메츠로 이송되어 쿠네베르트에게 전달되었다.

640년, 란덴의 피핀 1세가 사망했다. 아우스트라시아 왕실은 피핀 가문의 강력한 위세를 경계했고, 그들을 견제하고자 피핀 1세의 아들 그리모알트의 승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평소 피핀 가문에 적대적이었던 바이셈부르크 가문의 일원인 오토를 란덴 공작으로 선임했다. 얼마 후, 튀링겐 공작 라둘프가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11~12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히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우선 라둘프의 동맹자였던 크로도알트의 아들 파라를 사로잡아 처단했고, 뒤이어 라인 강을 건너 튀링겐으로 진격했다.

라둘프는 언스트루트의 높은 둑에 울타리를 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 병력과 가족들을 울타리 너머 진영에 세우고 장차 있을 전투를 준비했다. 시게베르 3세는 그의 군대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전투에서 프랑크군이 대패해 수천 명의 전사가 전사했고, 살아남은 프랑크인들은 전부 달아났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시게베르 3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안장에 앉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이때 그리모알드가 달려와서 왕이 탈고 있는 말 고리를 잡고 이끌어서 적에게 죽거나 사로잡힐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줬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한 뒤, 시게베르 3세는 라둘프가 제시한 조건에 승복하고 평화 협약을 맺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라둘프는 자신을 튀링겐의 왕으로 자처하며 주변 종족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의 부추김을 받은 알레만니 공작 로타리가 642년 란덴으로 쳐들어가 오토를 죽였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일전에 자신을 구해줬던 그리모알트를 란덴 공작으로 세우고 왕국의 통치를 일임했다. 이 무렵 알지셀 왕이 이끄는 프리슬란트인이 다고베르 1세가 공략했던 도레슈타트와 위트레흐트를 도로 빼앗았다.

시게베르 3세는 침네차일드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좀처럼 얻지 못했다. 이에 그리모알트는 자기 아들을 양자로 삼을 것을 권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킬데베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침네차일드 왕비가 다고베르 왕자를 낳았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가 왕이 될 가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리모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656년 시게베르 3세가 사망하자, 그리모알트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장악한 뒤 어린 다고베르를 삭발하고 푸아티에의 주교 디도에게 보내 수도자로 삼게 했다. 디도는 이 소년을 아일랜드의 수도원들 중 한 곳으로 데려갔고, 그리모알트의 친자이자 시게베르 3세의 양자인 킬데베르가 킬데베르 3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매우 무리한 행동이었고, 그리모알드는 정통 왕족이 아닌 이를 왕으로 만들었기에 전국적인 반발을 사게 되었고, 킬데베르 3세의 재위 기간인 6년 간의 기간은 기록으로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록의 누락은 이러한 혼란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같은 메로베우스 왕조가 다스리던 네우스트리아 왕국이 아우스트라시아의 정치적 혼란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왕국의 재통합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하던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브로인은 662년 그리모알드와 킬데베르 3세를 네우스트리아로 유인해 처형하고, 시게베르 3세의 조카인 킬데리크 2세를 시게베르 3세의 딸 빌리킬다와 결혼시켜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후 673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이었던 형 클로타르 3세가 죽자 에브로인은 귀족들과 논의하지 않고 클로비스 2세의 셋째 아들 테우데리크 3세를 새 군주로 내세웠다.

부르군트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와 형제인 파리 백작 바렌 등 주교들은 에브로인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감을 품고 킬데리크 2세와 궁재 울포알드에게 에브로인을 몰아내준다면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킬데리크 2세는 파리로 진군해 귀족들의 호응을 얻었고, 테우데리크 3세와 에브로인은 삭발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생드니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에브로인은 부르군트의 룩셀 수도원으로 보내면서 다시 프랑크 왕국을 통합했지만 레오데가리우스 등 귀족들은 킬데리크 2세에게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옹립하는 대가로 3가지 법령에 서명하도록 했다.

첫째 법령는 각 지역마다 고유한 법과 관습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법령은 고위 관리인 공작과 백작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세 번째 법령은 궁재 직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3가지 법령 모두 받아들였다. 다만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는 직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674년 성년이 된 그는 나라를 스스로 통치하려 했다. 레오데가리우스가 이를 막으려 들자 주교 직을 박탈하고 룩셀 수도원에 수감했다. 또한 지금까지 아우수트라시아 왕국만 관장하던 울포알드가 왕국 전체를 관장하게 했다

675년,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며 왕권 강화를 이루려던 킬데리크 2세가 사냥 도중 암살당했다. 이후 귀족들은 테우데리크 3세를 수도원에서 빼내어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포했다. 이때 에브로인과 레오데가리우스가 궁재 자리를 놓고 대립했다. 에브로인은 아우스트라시아로 이동한 뒤 한 소년을 클로타르 3세의 사생아로 내세우며 클로비스 3세로 왕위에 올렸다. 에브로인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테우데리크 3세는 레오데가리우스와 함께 도주했다. 에브로인은 권력을 장악하고 레오데가리우스를 암살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클로비스 3세의 혈통을 의심해 왕으로 옹립하기를 거부하자, 에브로인은 클로비스 3세를 폐위하여 수도원에 보낸 뒤 테우데리크 3세를 복위했다.
하지만 아우스트라시아는 한가지 변곡점이 생겼다. 바로 시게베르 3세의 고명아들로 그리모알트에 의해 강제로 수도사가 되어 아일랜드로 보내졌던 다고베르가 그동안 유폐시켰던 수도원을 탈출해 더블린에서 켈트 공주 마틸다와 결혼한 후 아일랜드를 떠나 브리타니아로 가서 노섬브리아의 요크에 정착한 뒤 요크의 주교 윌프리드와 친구가 된 후 자신의 왕국으로 복귀할 때를 노리고 있었고, 670년 마틸다가 셋째 딸을 낳다 죽자, 윌프리드는 로데스 백작의 딸인 로데스의 기셀라와 약혼하게 했다. 671년, 다고베르는 기셀라와 결혼한 뒤 영불해협을 건너 프랑크 왕국에 잠입했다. 이후 킬페리크 2세의 암살로 왕국이 어수선해졌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울포알드는 요크의 주교 윌프리드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다고베르를 다고베르 2세로 웅립했다.

다고베르 2세는 왕위에 오른 이래 아우스트라시아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하고 질서를 확립하고자 힘을 기울였으며, 왕권에 저해될 정도로 반항적인 귀족들을 숙청했다. 또한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였으며, 랑고바르드족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킬데리크 2세가 670년경에 중단했던 금화 주조를 재개하게 했다. 그는 마르세유에서 동전이 주조된 마지막 왕이기도 했다.

679년, 다고베르는 자신을 도와준 윌프리드 주교가 로마 순례를 가던 중 자신의 궁정에 들리자 환대하면서, 스트라스부르 교구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윌프리드는 요크 시민들을 저버릴 수 없다며 거절했고, 다고베르는 아쉬워하면서도 윌프리드가 로마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호위병을 붙여줬다. 그 후 베르됭 근처의 베르브 숲으로 사냥을 갔다가, 자신들을 숙청하는 그에게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사주한 하인에게 암살당했다. 그를 옹립했던 울포알드 궁재 역시 잇따라 살해되었다.

에브로인은 아우스트라시아를 병합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테우데리크 3세를 프랑크 전역의 단독 군주로 선포했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인 피핀 2세와 상파뉴 공작 마르틴이 반기를 들었다. 680년, 에브로인은 루코파오 전투에서 두 귀족을 격파한 뒤 아우스트라시아 대부분을 초토화했다. 피핀 2세는 자신의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마르틴은 랑트로 피신했다가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에브로인의 말을 믿고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가 피살당했다. 이제 에브로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얼마 후 그의 잔혹한 성정에 반감을 품은 에르멘프레드에게 궁정에서 살해당했다. 에르멘프레드는 보물들을 챙기고 피핀 2세에게 달려가 귀순했다.

피핀은 새로운 네우스트리아 공작 와라톤과 평화 협약을 맺고 테우데리크 3세의 권위를 인정하되 자신 역시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로 인정받았다. 686년 와라톤이 아들 지젤마르에게 폐위된 후, 처남 베르차르가 뒤를 이었다. 와라톤의 아들 지젤마르와 베르차르는 경쟁자들을 최대한 배제해 권력을 유지하길 희망했고, 이로 인해 많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갖은 탄압에 시달리다가 피핀 2세에게 귀순했다.

687년 군대를 일으킨 피핀 2세는 뫼즈 강을 따라 이동했다. 프랑크 국왕 테우데리크 3세는 피핀 2세의 강대한 권력을 경계하여 베르차르의 편을 들었고, 베르차르는 군대를 일으켜 피핀과 맞설 태세를 갖췄다. 피핀 2세는 평화 협약을 제안했지만, 테우데리크 3세는 베르차르의 조언에 따라 거절했다. 이에 피핀은 새벽에 군대를 뫼즈 강 건너편인 테르트리로 은밀히 이동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베르차르는 적 군영이 텅 비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군영으로 들어가서 버려진 물자를 약탈했다.

이때 사전에 매복하고 있던 피핀의 군대가 덮쳤고, 베르차르의 군대는 별다른 대항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베르차르는 적군에게 쫓기다 끝내 피살되었다. 이후 피핀은 수도 파리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붙잡았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하지는 않고,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까지 맡으면서 프랑크 왕국 전역의 궁재가 되었다. 이후 테우데리크 3세가 사망하자, 그는 새 국왕을 직접 선택해 자기 말을 듣게 하였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절대 권력은 그와 카롤루스 가문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717년 우스트라시아 분국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이 킬페리크 2세에 대항하기 위해 출신이 불분명한 자를 데려와 클로타르 4세로서 아우스트라시아 왕위에 올려두었다. 당연히 꼭두각시였기에 제위기간 동안 별다른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718년에 사망했다. 당시 수아송 전투에서 킬페리크 2세와 아키텐 공작 외드의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외지에 숨어있던 킬페리크 2세에게 전령을 보내 프랑크 왕국 전역의 왕으로 인정할 테니 자신을 궁재로 인정하고 전권을 쥐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킬페리크 2세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고 보고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킬페리크 2세가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었지만 실권은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돌아갔다.

이후 751년 11월 피핀 3세에 의해 킬데리크 3세 폐위되고, 피핀이 프랑크 왕위에 오르면서 메로베우스 왕조가 전복되어 카롤링거 왕조가 들섰다. 하지만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으로 나눠졌고, 아우스트라시아는 중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3.2. 베르됭 조약과 프륌 조약 이후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선 후의 아우스트라시아는 9세기경까지 카롤루스 대제의 작센 정복을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 외에는 아무런 정치적 사건이 없었으나 루도비쿠스 1세 즉위 말기에 발생한 지도력 부족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 및 계승 문제로 인해 그의 아들들이 일으킨 내전으로 고통받다가 840년 사망하고 이제 프랑크 제국 전체의 통치자가 되길 원했던 로타리우스 1세와 동등한 왕으로서 대접받기 원했던 샤를 1세 루트비히 2세간 내전이 벌어졌다. 2년간 이어진 내전에서 로타리우스가 밀리면서 결국 842년 6월 마콩 인근의 사오네 강변에서 휴전이 성립되었고, 각 형제 당 40명씩 협상단을 꾸려서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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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년 8월, 1년 2개월간 이어진 협상 끝에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다. 샤를 2세는 대서양에서 뫼즈 강까지 프랑크 제국의 서반부 일대를 통치하고, 루트비히 2세는 라인 강 동쪽의 제국 동부를 다스릴 권한이 주어졌다. 로타리우스 1세는 뫼즈 강과 라인강 사이의 지역과 프로방스, 이탈리아 북부 일대를 맡았다. 또한 양자는 각자의 아들에게 왕국의 상속을 보장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때 아우스트라시아는 가문의 발흥지로서 온전히 장남인 로타리우스에게 돌아가야 햇지만 동생인 샤를 2세는 현재의 플랑드르와 에노 지역들을 가져갔고, 모와 트루아를 비롯한 샹파뉴 또한 서프랑크로 넘어갔고, 나머지 지역들은 그대로 중프랑크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855년 로타리우스는 중병에 걸려 결국 수도원으로 은퇴하면서 장남 루도비코 2세에게 이탈리아 왕좌와 황제 직위를 물려주고, 차남 로타르 2세를 로타링기아 왕으로 삼아 프리실란트 등 북해와 라인강과 뫼즈 강, 그리고 쥐라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맡겼다. 마지막으로 3남 샤를에게 프로방스, 리옹, 부르고뉴, 트란스쥐라나를 맡기고 프로방스의 왕으로 세웠다.

이때 중프랑크에 남아 있던 아우스트라시아 지역은 통치자인 로타르 2세의 이름에서 따와 로타링기아 왕국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부르군트 북쪽 지역이 분할되어 로타링기아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로타링기아의 왕이 된 로타르 2세는 상술한 대로 라인강 서안에서 북해에 이르는 베네룩스 지역 및 현재의 알자스-로렌과 부르군트 북부를 상속받았는데, 이 지역은 로타르의 왕국(Regnum Lotharii) 로 불리는 지역으로 나중에 10세기 초반부터는 로타링기아로 불리는 지역이다. 그밖에 로타르는 아헨과 벨기에 지역도 그의 영토로 지정되었다. 로타르 2세의 형인 루트비히는 황제의 지위와 북 이탈리아를 물려받았고 동생 샤를은 부르고뉴와 프로방스를 물려받았다. 아날레스 연대기에 의하면 로타르 2세와 그의 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동생 샤를이 나이가 어린 점과 간질병을 앓는다는 점을 들어 동생에게 영토를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샤를은 이를 거부했다.

형인 로타리우스 1세가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바로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군사를 이끌고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개입으로 대머리 샤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로타르 1세가 죽자 샤를 2세는 형의 영토였던 로트링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독일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그를 막았다. 그러나 대머리 샤를은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로타르 2세가 죽은 뒤에 다시 로트링겐을 넘보게 된다.

855년 11월 로트링겐의 왕으로 즉위하고, 856년 삼촌인 독일인 루트비히의 집전 하에 기름부음 의식(세례)을 받았다.

863년 동생 샤를이 간질 등의 지병으로 죽자 로타르 2세는 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와 함께 재빨리 동생 영토의 일부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지만, 바이킹 해적의 침략으로 제대로 관리하지는 못했다. 이때 로타르 2세는 프로방스-부르군트 왕국의 동북부 지방과 쥐라산맥의 남쪽 부분을 차지하였다.

로타르 2세의 생애는 아내와 이혼하고 정부와 결혼하는 것과 이를 위해 두 삼촌들, 즉, 샤를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독일왕의 영향력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일찍이 정부인 발트라가가 있었지만 그는 855년 그는 아버지 로타르 1세의 강요에 의해 발루아 백작을 지냈고, 성 마우리키우스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원장이던 힉베르트의 여동생이자 알사스, 토리노, 발루아의 백작 노인 보소(Boso the Elder)의 딸인 토이트베르가와 결혼하였다.

그는 발트라다와 결혼하려 하였으나 아버지 로타르 1세는 그녀의 집안이 지체가 낮음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다. 토이트베르가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로타르 2세는 857년부터 이 결혼을 청산하고 이미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정부 발라다를 정식 아내이자 왕비로 맞이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의 힘있는 집안인 보소 가문의 눈치를 보는 데다가, 잘못이 없는 이혼, 파혼은 신뢰 문제가 걸린 일이고, 교회법상 부도덕한 일이라서 왕을 도와주기를 주저했다.

로타르의 첩들 중 첫 아들을 안겨준 발트라다는 왕비처럼 행세하다가 일부 귀족, 성직자들의 눈밖에 났다. 로타르의 귀족, 사제들 설득은 난항에 봉착했다.

로타르 2세는 이혼에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고자 지역 가톨릭 주교들에게도 꾸준한 설득과 투자를 했다. 857년경 그는 토이트베르가와 이혼을 계획하였다. 동시에 토이트베르가의 친정 오빠 우베르토와도 갈등했다. 그는 결혼 자체를 취소하게 하려 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그의 부도덕성을 지적하는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심하게 싸웠다. 이 일로 그는 교계의 인망을 잃게 된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끝내 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계략을 꾸몄다.

로타르는 아내 토이트베르가를 자신의 친정 오빠인 생 모리스 다곤(Saint-Maurice d'Agaune) 성당의 우베르토와 근친상간했다고 비난하고 재판을 했는데, 그녀가 불에 달군 쇠로 받는 형문과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는 신판(神判)을 모두 이겨내자, 주교단은 모두 무죄를 선언했다.

로타르 2세는 이 판결을 무시한 채 아내를 감금해 결국 죄를 자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의 자백을 들은 주교들은 로타르 2세의 재혼을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그러나 신학자 중 한 명인 힝크마르 대주교가 로타르의 재혼을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학문적으로 탄탄한 보고서를 내놓자 재혼을 반대하는 쪽이 더욱 강경해졌다. 로타르 2세는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과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에게 이혼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청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858년 로타르 2세는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힝크마르 대주교는 로타르의 재혼을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학문적으로 탄탄한 보고서를 내놓아 재혼을 반대하는 쪽이 더욱 강경해졌다. 그러나 힝크마르는 로타르의 삼촌인 서프랑크 대머리 카를의 지도신부였다. 힝크마르는 자신의 후원자인 대머리 카를 가문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에는 대단히 탄력적인 결혼 원칙을 적용한다. 대머리 카를의 딸이 근친상간을 금지한 중세 가톨릭 교회의 명령에 반하여 의붓아들과 결혼했을 때 그는 반대하지 않았고, 대머리 카를이 아들에게 적법한 아내를 버리고 새 아내를 얻으라고 강요했을 때에도 그저 가볍게 항의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머리 카를의 이혼 강요에 말더듬이 루이 2세는 아내를 버리지 않고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하지만 힝크마르는 로타르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는 결혼을 결코 깰 수 없다는 강력한 주장을 펼쳐서 승리를 거뒀다. 858년 초 로타르 2세는 자신의 동생 프로방스의 샤를과 화해하였다. 한편 샤를은 자신이 후계자 없이 죽으면, 자신의 영지는 모두 로타르 2세에게 넘겨준다고 유언을 남겼다. 이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의 루트비히는 반발하였다. 858년 여름 로타르 2세는 대머리 카를의 군대와 연합하여 로타링기아 북방에 출몰한 바이킹을 격퇴하였다.

로타르는 자신의 동맹들에게 호의적인 콜로네(쾰른)과 트리에의 대주교들에게 도움을 호소하였다. 쾰른의 대주교는 로타르가 이혼한 뒤 자신의 조카가 그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860년 2월 로타르 2세는 아헨의 공의회 또는 엑스 라 샤펠에서 아내 토이트베르가가 순결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발라다와의 결혼하려고 토이트베르가와 별거하였다. 곧 아헨의 한 수도원에 감금되었던 토이트베르가는 같은 해에 탈출하여 친정 오빠 힉베르트가 있는 곳으로 갔다. 로타르 2세는 집요하게 토이트베르가와의 이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형 루트비히 황제의 지원을 얻었는데, 그는 형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고 지역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또한 삼촌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지원을 일부 얻어냈다. 로타르 2세는 쾰른 대주교 군타하르와 트리어 대주교 토이트가우트를 사주하여 아헨 2차례 종교회의를 열어 이 결혼을 취소시키고 862년 정부 발트라다와 결혼했다.

862년 로타르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 회의가 엑스에서 열렸다. 로타르는 왕비가 엄청난 짓을 저질러 자신을 배신했다고 감정적으로 설명했으며, 재혼이 허락되지 않으면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죄를 저지르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고백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 자리에 모인 고위 성직자들은 그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로타르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재혼을 허락해주었다 한다. 이듬해 그는 메츠 종교회의에서 이 결정에 대한 교황 대리의 추인을 받았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는 로타르의 숙부 카를 2세의 궁정으로 피신했고, 카를은 랭스 대성당 내 수녀원에 토이트베르가의 거처를 마련하였다. 다시 대머리 카를 2세는 토이트베르가에게 아브네 수도원(abbey of avenay)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로타르 2세의 이혼 허릭 결정을 번복하고 대주교 군타하르와 대주교 토이트가우트를 해임하는 전례없는 조치를 취했고, 로타르 2세의 형인 황제 루트비히는 로마 시내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862년 말 대머리 카를 2세의 반대에 부딛친 카를 2세의 딸이자 앵글로색슨족 왕의 과부 유디트와 플랑드르의 보두앵 1세가 로타링기아로 피신했고, 로타르 2세는 이들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의 친정 오빠들은 교황청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교황은 결혼 무효화와 이혼 결정을 반려하라고 로타링기아의 주교들에게 지시하였다. 로타르 2세와 발트라다의 결혼에 대해서는 성직자들 사이에서 계속 이의제기가 된 끝에 863년 메츠의 공의회에서 다시 로타르 2세의 결혼의 적법성이 논의되기도 했다.

865년 로타르 2세의 삼촌들인 대머리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는 파문의 위협을 하면서 로타르에게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필요하다면 그를 권좌에서 쫓아내서라도 교황의 결정을 실행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하자 로타르는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가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하자 로타르는 1년 뒤 그녀에게 윽박질러 이혼을 신청하게 만들었다. 그해 6월 15일에는 교황청에서 로타르 2세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특사가 로타링기아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로타르 2세는 거절했고 같은 해 파문당했다. 867년 교황 니콜라오의 뒤를 이어 좀 더 융통성 있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자 로타르는 아내에게 직접 새 교황에게 이혼을 요청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토이트베르가가 이혼을 요구하고 나섰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발트라다에게 가해진 파문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토이트베르가가 로타르 2세와 이혼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은 충분한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어서 로타르 2세도 재혼할 수 없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869년 토이트베르가는 메츠의 성 글로신드 수녀원(Abbatiale Sainte-Glossinde)으로 은퇴, 수녀원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869년 로타르 2세는 교황과의 접견을 통해 이혼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귀환하는 중에 열병에 걸려 고생하였다. 한편 그의 정부 발트라다는 그가 이혼 승낙을 받으러 이탈리아로 가던 중이던 869년 4월 9일 병으로 죽어 르미르몽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로타르 2세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 교황 하드리아노 2세를 면담했으며, 이혼 승낙을 받고 돌아오던 길에 말라리아 열병에 걸린 로타르는 그해 8월 8일 피아첸차에서 죽고 말았다. 남겨진 발트라다의 아들 위고는 즉각 샤를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독일왕에 의해 불법적인 사생아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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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로타르 2세의 영토는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두 명의 삼촌 샤를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독일왕에게 분할되어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 로타르의 형이었던 루도비쿠스 2세는 중병에 걸린 상태로 이 영토 분쟁에 개입하기는 커녕 알지도 못했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분쟁에 개입해 이 갈등을 조율하고자 했으나 잘 해결되지 못했고, 위고 또한 알자스 백작직을 박탈되면서 로타링기아에서 추방되었고, 외가가 있는 보름스가우에 있게 되었다.
3.3. 동·서로 분할과 혼란기
이후 로타링기아는 현재의 벨기에의 플랑드르와 에노 지역을 제외한 80%가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로타링기아는 이탈리아를 그 지리적 특성과 철광석 생산지라는 점이 겹치면서 두 프랑크 왕국을 지배하던 카롤링거 왕들간의 대립의 장소가 되었고, 로타링기아의 귀족들 또한 양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려고 줄타기 식으로 이편 저편으로 갈아타기 일쑤였다,

876년, 대머리 샤를은 로타링기아를 점령하기 위해 동부 로타링기아를 침공했으나 안데르나흐 근처에서 루트비히 2세의 아들 루트비히 3세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877년 10월 대머리왕 샤를이 죽자, 루이 2세와 루트비히 3세는 로타링기아(로렌)에서 만나, 로트링겐의 분할을 유지하는 데 동의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인 샤를 2세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게르만인이 870년 메르센에서 로렌을 분할한 조약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바로 리에 주의 푀렌에서 포에렌 조약을 맺어 메르센 조약으로 분할된 로타링기아의 영토를 서로 유지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푀렌 조약이 발효되려는 참에 루이 2세가 사망했다. 요슬랭(Joscelin) 대주교가 이끄는 서프랑크의 일부 귀족이 그를 서프랑크 왕으로 추대했고, 바로 초청하였다. 또 아내 리우트가르트의 부추김까지 더해져 루트비히는 서프랑크를 침공했다. 로타링기아를 손에 넣은 루트비히 3세는 베르덩 전투에서 승리하여 메츠와 베르덩, Scheldt을 수중에 넣었지만, 나중에 내부 반란을 수습하고 출정한 새로운 서프랑크의 왕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 형제에게 로타링기아에서 격퇴당했다.

한편 877년 이후 위그는 자신의 상속분을 냄름 삼킨 두 친척들 간의 싸움을 교묘하게 이용한 후 자신의 직접적 상속지인 알자스를 되찾는데 성공한 후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877년 10월 대머리왕 카를 2세가 죽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이 그를 지원했고 이를 기회로 로트링겐 왕이 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작센의 군주 소 루트비히의 방해로 실패했고, 그 뒤로도 878년, 880년 여러번 부왕의 영지를 되찾으려 기도했으나, 그때마다 번번히 실패하였다.

877년 10월 대머리왕 카를이 죽은 뒤 그는 자신이 로타르 1세의 직계후손임을 내세워 이탈리아의 왕위를 요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탈리아의 귀족들과 제후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교황은 이탈리아의 왕관을 동프랑크의 카를만에게 넘겨주었다. 878년초 교황 요한네스 8세는 위그가 사생아라는 것과 위그의 파문을 선언하고 추방했다. 879년 서프랑크의 루이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이번에는 로트링겐의 서부 지역을 차지하고 이어 서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려 하였으나, 청년 루트비히 3세가 보낸 군사들이 루이 3세와 샤를로망을 보호하였으므로 실패했다. 동시에 그의 군대는 알레만니의 왕이자 그무렵 이탈리아의 군주에 즉위한 뚱보왕 카를의 군사에 의해 격파되었다. 청년 루트비히는 수도원에 있던 그를 호출하였으나, 그는 소루트비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880년 그는 다시 로타링기아를 회복하려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880년 소 루트비히가 베르덩에 있는 위그의 성을 침략하여 파괴하고 돌아갔다. 그뒤 비만왕 카를 3세는 그를 메츠 주교직에 임명하고 주교 교구를 그에게 주었다.

882년 초 부활절에 청년 루트비히가 그를 소환했지만 거부하였고 소 루트비히는 알자스를 공격, 부르고뉴까지 그를 추격했다. 882년 청년 루트비히의 죽음을 계기로 882년 4월 23일 위그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뚱보왕 카를이 보낸 군대에 의해 진압되고, 위그는 부르고뉴로 피신했다. 883년에는 대머리 카를의 시종인 엔겔람(Engilram)을 살해하고 그해에 그의 과부 프리데라다(Friderada)와 결혼했다. 이후 프리데라다는 재혼했지만 두번째 남편과 세번째 남편 역시 곧 사망하고, 네번째 남편인 힉베르트(Wicbert)도 재혼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

883년 위그의 누이인 기셀라가 프리슬란트의 후작 고드프리와 결혼, 이를 이용하여 다시 아버지의 영지를 탈환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884년 위그는 아버지의 영토 로트링겐과 자신의 영지였던 알자스를 회복하기 위해 노르만 바이킹과도 제휴하였다. 885년 뚱보왕 카를과의 전투 중 프리슬란트의 후작 고드프리의 배신으로 885년 6월 바벤부르크에서 프랑켄의 하인리히에게 체포되었다. 고드프리는 프랑켄의 하인리히 간과 밀약을 체결, 885년 6월에 협상이 성사되었다. 그는 곧 뚱보왕 카를에게 넘겨져 뚱보왕 카를의 지시로 장님, 벙어리가 되는 형벌을 받고 풀다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이후 세인트 갈 수도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포에른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카를 3세가 886년 서프랑크의 수도 파리에 침공한 바이킹 집단을 으로 매수해 돌려보낸 일이 발각돼, 조카 아르눌프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아르눌프와 동프랑크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서프랑크의 귀족들 특히 라울 등은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반란에 협력했다. 887년 11월 왕을 자처한 아르눌프는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수도인 아헨에 입성했다. 이어 11월 11일 카를 3세 비만왕은 아르눌프에 의해 개최된 프랑크푸르트 제국회의에서 폐위되면서 간신히 부활할 것 보인 카롤링거 제국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동프랑크 왕이 된 아르눌프는 895년 서프랑크 왕국과 외드, 서프랑크의 샤를 3세 생쁠을 두루 감시할 목적으로 자신의 서자 츠벤티볼트를 로타링기아의 국왕으로 봉하고 파견하였다. 5월 11일에 로트링겐에서 왕으로 즉위한 츠벤티볼트가 로타링기아의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여전히 츠벤티볼트를 거부하였다. 아르눌프는 반항적인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서자를 보호하기 위해 4년간 관리하게 된다. 895년 5월 츠벤티볼트는 상부르고뉴의 왕 루돌프 1세의 군대를 스위스에서 격파하였고, 루돌프 1세는 그의 아버지 아르눌프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896년 아버지 아르눌프가 교황 포르모소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관을 수여받을 때, 이탈리아로 수행하였다. 알프스를 넘을 때, 아르눌프의 봉신인 부르고뉴의 라울이 배신하여 기습공격하자, 츠벤티볼트는 라울의 영지인 하부르고뉴를 약탈하였다.

즉위 직후 성당과 수도원의 후견자로서 가톨릭 신앙을 통해 국민들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였다. 또한 노르만 족의 잦은 침략에 의해 붕괴된 로트링겐의 마을과 성곽들을 재건, 복구하였고 플랑드르 지역에 제철, 제련장을 설치하여 부유한 도시로 건설하려 했다. 비용 마련과 전후 복구를 위해 그는 귀족들의 일부 재산을 헌납받거나 몰수, 압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귀족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또한 그는 취임 초반 로트링겐과 동프랑크의 통합을 주도하였고, 로트링겐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로타링기아의 실력자의 한 사람이었던 쾰른(Cologne)의 대주교 헤르만 1세와 트리어(Trier)의 라트보트 등은 그의 정책에 적극 반발하였다. 897년 아버지 아르눌프가 보름스의 제국의회에서 로트링겐의 문제에 개입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897년 3월 27일 또는 6월 13일 리우돌핑 가문의 작센 공작 오토 1세 걸출공의 딸 오다와 결혼하였다. 오다에게는 베네데타, 세실리아, 레넨다 등의 세 딸이 태어났다. 아들 오토와 고드프리는 사생아들이었다.

898년 초, 새로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한 단순왕 샤를 3세는 로트링겐의 영역을 노리고, 로트링겐의 귀족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 등과 내통하여 쳐들어왔다. 이는 곧 로렌 주교의 중재로 해결할 수 있었다. 898년 츠벤티볼트는 로트링겐의 귀족인 파울리의 에티엔느 후작(comtes Étienne de Pouilly)와 오도아케르(Odoacre), 섭정인 하인아우트 백작 레니에(Régnier I), 메츠의 제라르 1세(Gérard I), 제라드의 형제 만프리드 1세(Matfried I) 등을 공격했다. 츠벤티볼트는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의 땅을 압수하였다. 같은 해, 그는 레니에 대신 오도아케르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가 하인아우트 백작 레니에와 메츠의 제라르 1세와 만프리드 1세 등 다른 로트링겐의 귀족들이 반발하였다. 황제인 아버지 아르눌프가 이들의 반발을 수습하고, 로트링겐 내 영주들과 츠벤티볼트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한다. 898년 말에는 황제 아르눌프의 명으로 서프랑크 왕국의 단순왕 샤를 3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해, 아헨에서 서프랑크의 단순왕 샤를 3세와 교전하였으나 성과없이 되돌아왔다.

그의 아버지 아르눌프는 로트링겐을 동프랑크 왕국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일환으로 규칙을 제정하였고, 이는 츠벤티볼트에 의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로트링겐 지역 귀족들은 저항했고, 대주교인 쾰른의 헤르만 1세, 트리어의 라트보트 등이 지원하였다.

899년 아버지 아르눌프가 병으로 죽자, 아르눌프의 적자이자 동생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동 프랑크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유아왕 루트비히의 동프랑크 왕위 계승을 이용해서 로트링겐의 자치국화를 조건으로 로트링겐 귀족들을 휘어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그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의 반발에 봉착했다. 츠벤티볼트는 유아왕 루트비히의 섭정에게 계속 로트링겐의 독립을 유지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부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동프랑크로 사자를 보내 유아왕 루트비히에게 개입을 요청하기도 했다. 900년 2월 4일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티옹빌에서 회의를 열고, 유아왕 루트비히를 로트링겐의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츠벤티볼트는 귀족들의 선거를 인정하지 않았다.

900년 8월 로트링겐의 귀족들이 일으킨 폭동에 휘말렸으며, 백작 게르하르트, 마테프리드(Matfrid), 스테판 등이 일으킨 반군과 교전하였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동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청하고, 동프랑크의 군대는 라인강을 넘어 로트링겐으로 투입되었다. 8월 30일 동프랑크의 군대와 교전 중 뫼즈 또는 수스터런(Susteren, 현 네덜란드의 수스터런) 근처에서 마테프리드, 하인아우트(Hainault)의 백작 레니에(Reginar)에게 살해되었다. 일설에는 8월 13일에 죽었다고도 한다. 일부 사가들에 의해 그를 다소 무능력한 인물로 평가되며, 그는 교회와 수도원의 건설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의 서자인 팔라틴 백작 고드프리 드 팔라틴과 로트링겐의 오토는 너무 나이가 어렸으므로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그의 배다른 동생 유아왕 루트비히를 추대하였다. 하지만 루트비히는 유아왕이란 이명에 맞게 아직 7세 밖에 안된 어린 아이였고, 어머니인 오타 또한 아르눌프의 치세 말기에 간통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이력인지 섭정을 맡지 않았고, 대신 마인츠 대주교 핫토와 아우크스부르크의 아달베로 주교, 그리고 몇몇 주요 귀족들의 후견인이 된 상황이었다.

이런 배경에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이 루트비히를 추대했고, 이는 루트비히의 섭정들이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을 통제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더욱이 동쪽으로 마자르족들의 침략까지 있게 되면서 결국 903년 랑가우 백작 우도와 유디트의 아들로. 네우스트리아의 베렝가르의 조카이자 아르눌프의 정비 오타와는 사촌 남매간으로, 유아왕 루트비히에게는 외숙뻘이되는 게버하르트 2세가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종의 주지사로서 그는 하인아우트의 레기나르R 백작과 동프랑크 왕국의 지도 아래 로타링기아 귀족과 그의 사촌 샤를 생플의 침략에 맞서 방어하는 한편, 로타링기아 귀족들과 유아왕 루트비히 사이에 연락을 주선하였다. 그는 나중에 돔베르그 (Domberg)에 있는 이전 교회 대신 897년 베츨라르에서 봉헌된 구원자 교회 (구세주의 교회)를 차지하였다.

그러다가 910년 6월 마자르족이 침략하자 교전, 그해 7월 10일 아우구스부르크 근처에서 전사했다.이후 일년 간 로트링겐 공작위는 공석이었고,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마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서프랑크 왕국에 남아 있는 카롤링거의 왕통을 웅립하는 대신 따로 선거로 통해 루투비히 4세의 외조카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웅립했다. 이에 샤를 3세가 자신이 카롤링거 왕실의 적통임을 들어 침략해왔다. 이때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샤를 3세에게 충성 맹세를 핶고, 샤를 3세는 새로운 공작으로 츠벤티볼트를 암살하는데 가담했던 레니에 1세를 내세웠고, 레니에는 915년까지 로트링겐의 공작으로 군림했다. 이후 그의 후임으로 아르덴 가문의 개조인 비제리히가 로트링겐의 궁정백으로 임명되어 922년까지 군림했다.

로트링겐을 차지한 샤를 3세는 로트링겐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로트링겐의 귀족들을 우대했는데, 이는 반대로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홀대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샤를 3세를 제치고 로베르 가문 출신으로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했던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에 대한 지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922년 6월 22일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샤를 3세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샤를 3세는 로트링겐으로 도주했고, 922년 6월 29일 랭스에서 로베르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이후 일년 간 반란을 진압할 준비를 한 샤를은 수아송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로베르 1세의 군대가 샤를 3세의 군대와 싸워 이겼으나 로베르 1세는 전사했다. 샤를 3세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로트링겐 귀족들에게 버림받았고, 베르망두아의 백작 헤르베르트 2세에게 의탁하러 갔다가 923년 7월 17일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투옥되었다.

어째든 로트링겐의 국왕자리는 실질적으로 궐위가 되었고, 그나마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레니에 1세의 아들인 기셀베르트를 왕으로 웅립시켰다. 하지만 새로이 동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한 하인리히 1세는 샤를 3세가 축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로르링겐을 차지하려고 했고, 923년 말, 하인리히는 두 번 라인강을 건너 로타링기아로 들어갔고, 924년 10월까지 로타링기아의 동부 지역은 하인리히의 영향력하에 남게 되었다. 이후 마자르족들과 전쟁으로 로트링겐 문제는 잠시 미루어지다가 925년부터 로트링겐을 공략하여 928년 줄피히(Zülpich)에서 로트링겐 군대를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로트링겐을 함락하는데 성공한다. 이과정에서 925년 알자스 지역이 분리되어 슈바벤 공국에 편입되었다.
3.4. 독일 왕국 5대 부족 공국으로 편입
로트링겐을 편입한 하인리히 1세는 로트링겐의 왕이었던 기셀베르트에게 대신 자신의 가신으로 충성을 약속받고 로트링겐 공작 직위를 주고, 통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대신 자신의 딸 게르베르가를 주어 반발을 무마시켰다. 하인리히는 910년 이후 잃어버린 다섯번째 영역을 다시 왕국의 영역으로 편입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하지만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죽자 그는 탕크마르가 오토 1세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에 가담했다. 동시에 그는 서프랑크의 왕 루이 4세에게 귀순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기셀베르트는 이후 939년 안 더나흐의 전투에서 오토 1세의 군대에 의해 패배할 때까지 3년간 실질적으로 독립하였다. 기셀베르트는 939년에 오토 1세를 상대로 안더나흐 전투에 출정했다가 패배, 도피하던 중 라인강에 빠져 익사했다.사후 그의 영지는 오토 1세가 자신의 형제이지만 기셀베르트와 마찬가지로 반란에 참가했다가 용서받은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1세에게 주었고, 부인 게르베르가는 서프랑크의 루이 4세와 재혼하였다.

로트링겐 공작이 된 하인리히 1세는 막상 로트링겐을 통치하려고 했지만 로트링겐 토착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쳤거, 막상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오토 1세는 로트링겐의 지배권을 현지 귀족 출신인 베르됭 백작 오토에게 넘겼다. 하지만 전임 로트링겐 공작인 기셀베르트의 아들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인정했고, 오토는 하인리히의 후견인으로 로트링겐을 통치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그보다 먼저 죽었고, 오토 또한 944년에 사망하고 만다.이후 로트링겐 공작위는 잘리어 가문 출신의 콘라드 적공에게로 넘어갔다.콘라드는 947년 오토 1세의 딸 류트가르트와 결혼해 오토 왕가와 밀접한 관계가 되었고, 951년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참했다.

이탈리아 원정 중인 952년 오토 1세의 장남인 슈바벤 공작 루돌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오토 1세는 독일로 급히 귀국했고, 콘라드는 남아서 도망친 이브레아의 베렝가르를 쫓는 임무를 맡고 파비아에 남았다. 협상을 통해 콘라트는 베렌가르를 설득하여 오토 1세와 합류하여 마그데부르크에서 평화 협정을 맺었다. 콘라트는 이전에 베렝가르와 이 평화의 세부 사항을 협상했고, 협정 준수를 위한 중재자로서 그에게 자신을 약속했다. 베렝가르가 마그데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콘라트는 그를 왕실의 환영으로 대접했다.

왕위 계승자인 류돌프의 곁에서, 그는 도시 외곽에서 멀리 떨어진 공작, 백작, 신하들과 함께 그를 맞이하기 위해 말을 타고 갔고, 그곳으로 그를 호위하고 특별히 준비된 여관에 묵었고, 이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대동한 후 베렝가르에게 오토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토 1세는 자신의 사위와 한 약조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결국 장인에게 실망한 콘라드는 아내인 류트가르트가 사망한 후 다시 반란을 준비 중이었던 처남 루돌프에게 가세해 953년 오토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처벌 대신 황제에게 충성을 맹약함으로써 처벌을 모면했지만 로트링엔 공작 직위를 박탈당했고, 그의 작위는 당시 쾰른의 대주교공이었던 오토 1세의 막내 동생이었던 브루노가 맡게 되었다.

하지만 브루노는 로트링겐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는데, 이는 1년 후 처남인 서프랑크 왕 루이 4세가 사망하고 여동생인 게르베르가가 아들인 로테르의 섭정을 맡으면서 친정을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브루노는 서프랑크로 들어가 여동생과 함께 로테르의 공동 섭정이 되어야 했다. 2년 뒤 또다른 여동생 하드비히의 아들 위그 카페의 후견인을 2년 동안 맡아야 했고, 여전히 가문 사이의 앙숙이었던 두 조카의 관계를 조율까지 해야 했다.

이후에도 오토 1세가 다시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면서 마인츠의 빌헬름 대주교공과 함께독일에 남아 있던 어린 친조카인 오토 2세의 후견인겸 섭정 자리까지 맡아야 했다.그나마 메츠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르제 수도원 개혁에 발기인으로서 수도원 학교의 진흥에 큰 공헌을 했다.하지만 과로로 인해 965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만다.

959년 브루노는 오토 1세와 함께 로트링겐 공작령을 뫼츠 강의 중류를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할해 상류 일대의 지역을 상 로트링겐, 하류 일대의 지역을 하 로트링겐으로 분할한 후 각각 하 로트링겐 공작으로 베르됭의 고트프리트, 상 로트링겐 공작으로 로타링기아의 궁정백을 밭앗던 비제리히의 아들이자 외조카딸이자 위그 카페의 여동생 베아트리체와 결혼한 바르의 프리드리히를 임명하게 되었고, 965년 사망하기 전까지 로트링겐 공작위를 유지하고 있다가 사망 후 로트링겐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3.5. 상 로트링겐
956년 로트링겐의 상부 지역을 맡게된 바르의 프리드리히는 965년 쾰른의 대주교공 브루노가 죽기 전까지 그의 봉신으로 있다가 브루노가 죽으면서 상부 로트링겐의 공작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는 상부 로트링겐 지역에 대한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978년까지 통치하면서 생디에와 모옌무티에의 수도원 개혁을 감독하다가 사망후 아들인 디트리히 1세가 승계하게 되었다.

당시 디트리히 1세의 나이는 16세로 당시만 해도 갓 성인으로 인정받았지만 987년까지 어머니인 위그 카페의 여동생 베아트리체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985년 그는 로렌의 샤를을 앞세운 오토 2세를 지지한 사촌 베르됭 백작 고트프리트를 도와 서프랑크의 왕 로테르와 싸웠다.

이후 로타르가 상 로트링겐을 침공하자 이를 방어하려고 했으나 베르됭에서 자신의 사촌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후 987년 루이 5세의 사망으로 서프랑크 왕실의 직계가 단절될 때까지 억류되다가 외숙부인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의 왕으로 선출됨에 따라 풀려나게 되었다. 이후 11세기까지 그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3.6. 하 로트링겐
하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된 고트프리트 1세는 959년 하 로트링겐 공작이 되었지만 여전히 상·하로트링겐의 공작을 겸하고 있던 쾰른 대주교공 브루노의 봉신으로 있어야 했고, 브루노가 죽기 1년 전인 964년 사망하면서 독립된 제후가 될 수 없었다. 이후 하 로트링겐의 행정권은 현지 귀족 출신으로 리에주 백작인 리카르트가 973년까지 행사했다.

이후 그의 자리를 승계한 이는 당시 서프랑크왕 로테르의 동생인 샤를이었다. 당시 샤를은 호시탐탐 서프랑크의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결국 자신의 형수인 엠마가 라온의 주교 아달베롱과 간통하고 있다는 중상모략을 일삼다가 서프랑크에서 추방되면서 자신의 친형 로테르와 평소 사이가 갈 때까지 간 사이가 되었다.

이를 눈여겨본 외사촌이기도 한 독일 왕 오토 2세는 구 동 프랑크 왕국 영토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로테르 2세를 견제할 목적으로 그를 후원해 977년 비워져 있던 하 로트링겐의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에 로테르는 978년 아헨을 회복할 명목으로 하 로트링겐을 비롯해 독일 왕국을 침공했다. 오토 2세는 임신중이던 아내 테오파노와 함께 황급히 쾰른으로 도주했다. 로테르는 오토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아헨 점령을 확인했으나 통치를 위해 다시 자기 영토인 서프랑크로 돌아와야 했다. 퇴각하기 전 로테르는 아헨의 제국 궁전을 약탈, 파괴하였다. 로테르의 침공은 실패로 끝났고, 오토 2세와 샤를은 곧바로 반격을 해 978년 10월 파리까지 침공했고, 로테르는 도피했다. 바로 오토는 그의 동생 샤를을 프랑크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위그 카페의 군사력에 의지해 복위할 수 있었다.

986년 샤를의 형 로테르가 죽고 어린 조카인 루이 5세가 즉위했지만 1년만에 샹리스에서 랭스 주교 아달베롱의 반역죄를 추궁하려는 재판을 하려는 중에 말에서 낙마하면서 사망하면서 서프랑크의 왕실의 직계가 단절되어 버렸다. 이에 샤를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그의 계승권은 형인 로테르가 살아 있던 당시 왕비 엠마에 대한 무고죄로 인해 박탈된 상태였고, 서프랑크 왕국의 제후들과 주교들은 그의 요구를 묵살하고 파리 백작이자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인 위그 카페를 선출했다.

이에 샤를은 반발했고, 988년부터 989년 반발을 일으켰다. 위그 카페의 비서이자 고문이었던 제르베르는 샤를이 군사를 일으켜 위그를 폐위시키려 하자 위그와 함께 이에 대항했다.

989년 1월 랭스 대주교 아달베로는 죽기 전에 제르베르를 후임자로 지목했으나, 위그 카페는 전임 왕실을 배려하는 뜻에서 로테르 아들 아르눌프를 랭스 대성당 대주교로 추천했다. 그해 9월 아르눌프는 랭스를 삼촌인 샤를에게 저렴한 가격에 팔았고, 샤를은 제르베르를 랭스에 연금시켰다. 그러나 8개월 뒤 제르베르는 랭스를 탈출, 위그의 궁전으로 피신했으나, 오히려 공작 샤를과 모의하여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거짓 고소를 당했다. 991년 다시 위그 카페에 대해 대항했으나 실패하고, 지원을 약속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3세 역시 지원해주지 못하면서 패하고, 그해 3월 체포당한 뒤 죽을 때까지 랭스에 감금당하였고, 하 로트링겐의 공작위는 그의 아들인 오토가 승계했다.
4. 프리지아
프리지아는 5세기까지 홍수로 인한 점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아무도 살지 않던 땅이었으나 현재의 프리지아족들이 이주해 정착하게 되었다.

6세기 말까지 프리지아 영토는 서쪽으로 북해 해안까지 확장되었고, 7세기에는 남쪽으로 도레스타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후대에 프리지아 마그나(Frisia Magna)라고 불렸다. 초기 프리지아는 여러 부족들의 연합체로서 대왕(High King)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프리지아 왕'에 대해 유물로 통해 이른 시기 실존했을 것으로 밝혀진 왕은 아우돌프로 2000년대 초 현재의 프리슬란트 지방에서 발견된 금화들에 세려진 글로 통해 실존 인물로 밝혀졌으며, 이름과 함께 세겨진 아우둘푸스에게 승리(VICTVRIA AVDVLFO)를 볼 때 인접한 국가들로부터 프리지아를 방어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기록상 최초의 언급은 678년 알지슬로 요크 대교구에서 쫓겨난 윌프리드는 노섬브리아에서 추방되어 교황의 지원을 구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중 678년 프리지아에 상륙해 알지슬로부터 환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윌프리드의 전기 작가인 리폰의 스티븐에 따르면, 알데기젤은 윌프리드가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하지만 8세기 후반까지 프리슬란트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유물 내지는 유적이 없기에 신빙성이 없는 내용으로 보고 있다. 다만 프랑크 왕국의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브로인윌프리드가 살았든 죽었든 그를 구금시키는 댓가로 금화 한 부셸을 제공하겠다고 하지만 알지슬은 궁재가 보낸 편지를 가족과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찢었다고 하는데, 이를 미루어 볼 때 연대기의 기록이 최초로 나오기 전 프리지아인들이 먼저 빠르게 성장한 프랑크 왕국에 억눌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세기 초까지 프리지아인들은 대부분 위트레흐트 부근 밖에서 토르와 오딘과 같은 게르만 신들을 숭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지아 귀족들은 종교적, 정치적이든 간에 동쪽의 프랑크인들과 점점 더 많은 갈등을 겪게 되었다.

680년 알지슬의 다음 왕으로 즉위한 라우바우드는 즉위 초부터 프랑크 왕국과 지속적으로 충돌했고,690년에서 692년 사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피누스 2세가 위트레흐트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프리기아를 공격, 드루스테드 전투에서 패하면서 결국 689년 자신의 딸인 테오텔린트를 피피누스 2세의 아들 그리모알트 2세와 혼인시켜야만 했고, 지참금을 명목으로 영토의 동쪽 대부분을 빼앗겼다.

이후 내부 단속으로 통한 왕권 강화로 708년 강력한 부족장중 한명인 우르싱을 반역죄로 투옥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에 우르싱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그곳에서 정착했다.

714년 사위인 그리모알트가 자신의 아버지인 피피누스 2세가 위중하자 자리를 승계받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던 도중, 리에주(Liège)의 성 람베르트 폰 마스트리히트(Lambert von Maastricht)의 묘소가 안치된 교회를 방문했다가, 반 피핀세력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자객 란가르(Rangar) 등에게 살해되었는데, 다른 기록에 란가르를 고용한 이가 장인이었던 라트보트였다고도 한다.

이 당시 프랑크 왕국은 메로베우스 왕조가 무력화되고, 아르눌프스 가문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상태였고, 아르눌프스 가문의 계승권 문제는 곧 프랑크 왕국의 내분을 의미했다. 얼마 뒤에 피피누스 2세마저 사망하면서 아르눌프스 가문은 곧 피피누스 2세와 그리모알트의 지위를 두고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가 결국 라트보트의 외손자들을 배제되고 피피누스 2세의 서자였던 카를 마르텔의 모든 것을 독점했다.

이 때 라트보트는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한 우르싱 일족과 접촉해 화의를 청했는데, 이때 우르싱 일족들은 완전히 프랑크에 정착한 상태였기에 우르싱의 아들 중 한명인 티아그림(Thiadgrim)이 프리지아로 귀환해 우르싱의 토지 중 페흐트(Vecht) 일대를 되돌려받게 되었다.

716년 당시의 프리지아 왕국

719년 라트보트는 프랑크 왕국을 침공하려고 준비했으나 갑자기 중병에 걸리면서 계획는 취소되었고, 얼마 뒤에 사망하고, 그의 후임 왕으로 포포(Poppo)가 즉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즉위 1년 만에 블리에(Vlie) 서쪽의 프리지아 지역들인 질란트, 네덜란드, 위트레흐트가 프랑크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734년 카를 마르텔은 아들인 피피누스 3세와 함께 프리지아 왕국의 남은 영토인 블리에 동부와 라우베르를 침공했고, 포포는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다가 전사하면서 프리지아는 정복되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이후 프리지아는 동부 지역만 반독립 상태에 있었고, 서부 지역들은 가우/파구스(Pagus)로 개편되어 코메스들이 파견되었다. 동프리지아는 748년 피피누스 3세의 작센 정복 당시에 전초 기지 역할을 해야 했으나 이후 772년 아직 프랑크 국왕이었던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합병되었고, 백작령으로 개편되었다.

서프리지아의 경우 베르됭 조약이 있기도 전인 841년 로타리우스 1세가 북해 연안 일대를 약탈하고 있던 바이킹 군벌들이자 덴마크 군소 왕국의 왕족이었던 하랄드와 로릭에게 서프리지아를 넘겨주면서 그들 군세의 힘을 빌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될 때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였는데, 로타리우스 1세는 프리지아에 있는 하랄드와 로릭의 존재를 거슬리게 되면서 이들을 반역죄로 몰아 투옥했는데, 이중 로릭은 탈옥하는데 성공, 이후 동프라크 왕국으로 망명해, 이후 자신이 점령했던 도레스타드를 탈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했다. 855년 로타리우스 1세가 사망하자 그아들들에 의해 프림 조약으로 다시 분할하면서 프리지아는 아우스트라시아와 함께 로타르 2세의 로타링기아 왕국으로 재편되었다.

이때 로릭은 서프리지아에 대한 통치권을 돌려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후 덴마크의 왕위를 노리기 위해 개입하는 다른 바이킹 군벌들이 서프리슬란트를 공격하면서 포기해야만 했다. 863년 조선소의 인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추방되지만 로타르 2세의 도움으로 서프리슬란트로 돌아와 전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사생아인 위고를 남기고 죽자 로타르 2세의 숙부들인 서프랑크의 샤를 2세와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는 사후 위고를 후계자로 한다는 조카의 유언을 무시한 채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링기아 왕국을 분할하면서 동·서부의 프리지아 지역들은 동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다. 이후 로릭은 루트비히 2세에게 봉신 맹세를 했다는 기록으로 끝으로 872년을 끝으로 더이상 언급되지 않게 되었다.

이후 882년 루트비히의 아들로 서프랑크와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던 뚱보왕 카를 3세는 880년 겐트를 점령 후 플랑드르를 약탈한 후 882년 로트링겐마저 약탈한 바이킹 군벌인 고트프리트를 회유하고자 서프리슬란트를 주어 봉신으로 삼았고, 로테르 2세의 서녀인 기젤라와 혼인했다.

하지만 884년 카를 3세가 무능력으로 인해 조카 아르눌프의 주도하에 폐위되자 두 종숙부들에 의해 후계자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타링기아를 빼앗겼던 로테르 2세의 서자인 위그는 누이인 기셀라와 공모해 로타링기아 왕국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발각되고 말았고, 이때 고트프리트는 위그를 배반했지만 884년 저지대를 약탈한 덴마크를 막는 것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서 동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885년 프랑켄 공작 하인리히 주도하의 로비스의 귀족 회의에서 아내와 처남이 실명형에 처해진 것과 별개로 사형되었고, 이후 한 동안 프리슬란트의 통지 자리는 공백기를 거치다가 889년 고트프리트의 봉신이었던 게롤프가 바이킹을 막은 공로로 서프리슬란트의 백작이 되었다.

896년 게롤프가 죽자 그의 아들인 디르크 1세가 서프리슬란트 백작이 되었다. 디르크 1세는 922년 성 아델베르트 수도원의 전신인 수녀원을 건립한 것 외엔 통치 기록이 없으며 939년 오토 왕조 오토 1세에 대항한 로트링겐 반란 당시 10월 2일 발생한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아들인 디르크 2세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936년 플랑드르 백작 아르눌프 1세의 딸 힐데가르트와 결한 후 950년 6월 15일 성 아델베르트기리기 위해 아버지가 건립한 수녀원을 수도원으로 변경과 함께 석조로 된 수도원 교회를 만들어 에그문트 복음서를 기증했다. 965년 겐트 백작을 겸했으며, 966년 후계자인 외아들은 잃은 매부 하말란트 비히만 4세로부터 하말란트까지 얻게 되었다.

972년 위트레흐트 주교로부터 라이덴 근처의 레인스부르크 주변의 땅을 매입했는데, 이 지역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해 봉기를 일으키지만 3년만에 진압되었다. 981년 아들인 아르눌프를 12명의 기사들과 함께 오토 2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파견시켰고, 차남인 에그베르트는 오토 1세의 동생인 쾰른의 브루노 대주교로부터 교육을 받게 했다.

983년오토 2세가 죽자 왕위 계승으로 인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 디르크 2세는 어린 오토 3세를 지지했고, 985년 왕위가 안정되자 이에 대한 보상으로 리에르와 이셀 사이의 마살란드와 케메널란드, 텍셀를 얻게 되었다. 988년 디르크 2세가 죽자 아들인 아르눌프가 뒤를 이었다.

서프리슬란트의 백작이 된 아르눌프는 영토를 라인 강과 스헬더 강 사이의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해 독일 왕국 내에서 5대 부족 공국의 공작과 엇비슷한 수준의 권력자가 되었다. 하지만 오토 왕가의 지지자이자 하로렌의 공작으로서 서프랑크 국왕 로테르의 동생 카를의 서프랑크 왕위 계승을 지지했고, 그의 확장 정책은 서프랑크 왕국까지 영지를 획득했기에 서프랑크 왕국을 통치하는 위그 카페의 분노를 사게 해 서프랑크 내의 아르눌프의 영지를 빼앗았다.

또한 백작으로 자신의 권력 확대하는 과정에서 서프리슬란드의 주민들은 반감을 품고 아르눌프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아르눌프는 북쪽으로 레케레 강(Rekere)과 블리에 강(Vlie) 사이의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고, 993년 군대를 끌고 침공하나 9월 18일 윙겔에서 패사하고 만다.

이후 그의 자리는 아들인 디르크 3세가 이었지만 너무 어렸기에 아내인 류트가르트가 섭정을 맡았는데, 남편이 오토 왕가의 지지자이기도 했지만 그녀 자신도 여동생인 쿠니군데가 바이에른 공작이자 독일왕 하인리히 1세의 손자 하인리히 2세와 결혼했기에 오토 3세와 모후인 테오파노의 지지를 받아 섭정 자리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고, 1005년 디르크 3세가 성년이 되기까지 섭정직에 있었다.

동프리지아의 경우는 달랐다. 서프리지아와 같이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중프랑크, 855년 로타리우스 1세가 사망하자 그아들들에 의해 프림 조약으로 다시 분할하면서 로타링기아 왕국의 영토로 그러다가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동프랑크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하구임에도 불구하고 늪지대가 늪지대였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귀족 가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동프리슬란트를 지배하려는 귀족 가문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동프리슬란트를 지배하는데 실패하하고 대개 자영농 중 그나마 지주로 턱걸이한 이들이 소규모 단위로만 지배권을 행사 했다. 때문에 이 지역은 한동안 브레멘-함부르크 주교들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일례로 884년 바이킹과 싸운 노르디티 전투에서 동프리슬란트인들로 구성된 해군을 지휘한 인물이 브레멘-함부르크 대주교였던 림베르트였다.
5. 브르타뉴
4세기 말 오늘날의 웨일스와 영국 남서 반도에 살던 브리튼인들이 아르모리카로 이주해 왔다. 연원은 불확실하지만 이렇게 모여든 브리튼인과 앙주 지역 유력자들은 코난 메리아독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앵글로색슨족의 영국 도래는 브리튼 지역에 살던 켈트 부족들을 압박하였고, 상당수의 브리튼인들은 브르타뉴를 비롯한 영국해협 남쪽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브리튼인들은 각각 세갈레로 갈라져 돔노네아(Domnonea), 코르네브(Kornev), 브로베레드(Bro-Wened) 등의 소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497년부터 프랑크족들이 이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침공했고, 브류타뉴에 정착한 브비튼인들은 메로베우스 왕조에서 카롤링거 왕조에 이르기까지 프랑크 왕국에 저항했지만 점차 프랑크 왕국에 투항하는 브리튼인들이 늘어났고, 840년 무렵 루도비쿠스 1세가 811년 자신에게 복종해 반의 코메스로 임명했던 노미노에를 브르타뉴 공국의 첫 번째 공작으로 내세우면서고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었다. 노미노에는 루도비쿠스 1세가 생존할 때까지 프랑크 제국에 충성했다.

하지만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로 갈라졌다. 브르타뉴는 서프랑크 왕국에 속해 대머리왕 샤를 2세에게 충성해야 했지만 노미노에는 이참에 서프랑크 왕국으로 부터 독립하는 것을 택했다. 이후 843년 메삭 전투와 845년 발롱 전투에서 브르타뉴인들은 서프랑크 군대에 승리를 거두면서 849년 샤를 2세는 브르타뉴의 독립을 승인해야 했다. 그리고 시기 미정이나 노미노에는 덴마크의 군소 왕들중 강력한 호리크 1세와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노미노에의 야심은 브르타뉴의 독립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듬해 네우스트리아의 렌과 낭트를 공격해 점령했으나 다음해 사망하게 되었고, 브르타뉴 왕위는 아들인 에리스포에가 잇게 되었고, 8월 22일 쩡랜드 전투에서 샤를 2세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해 앙제에서 평화 조약을 맺게 샤를 2세는 에리스포에를 브르타뉴의 왕으로 인정하는 것과 렌,낭트, 레츠의 땅이 브르타뉴 영토라는 것에 다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대가로 에리스포에는 자신의 주교좌를 액타르 주교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앙제 조약은 미래의 브르타뉴의 영역을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853년 낭트 시가 고드프리드가 이끄는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에리스포에는 반격을 개시했고, 덴마크계 바이킹들을 이끌고 있던 호리크 1세의 조카 시그트리크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에리스포에를 도와 낭트의 하중도인 그랑데 비세를 공격했고, 시그트리크가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랑데 비세에 있던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을 굴복시켰다.[22]

856년 루비에에서 에리스포에는 샤를 2세와 회담을 가지면서 자신의 딸과 샤를 2세의 아들 말더듬이 루이 2세에 대한 약혼을 의논하지만 성사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 회담은 에리스포에에게 자충수가 되어 857년 11월 2일 탈렌삭의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는 와중에서 사촌인 살로몬과 그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살로몬은 그대로 브르타뉴 왕위를 찬탈한다.

왕위에 오른 살로몬은 다음해에 일어난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의 반란을 위에서 조장했고 자신의 왕위와 브르타뉴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당시 오를레앙에 있던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에게까지 사절단을 파견했고, 862년 살로몬은 앙주 백작 로베르 르 르포와 싸우기 위해 바이킹들을 고용한 앙제를 공격했다. 863년 샤를은 군대를 이끌고 브르타뉴를 공격하자 살로몬은 앙트람까지 와서 그에게 복종할 의사를 보이자 결국 앙제 서부를 브르타뉴 일부로 인정해야 했다.

다만 살로몬은 로베르와의 전쟁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865년과 866년에 바이킹과 브르타뉴는 르망 인근을 황폐화시켰고 로베르는 브르타뉴와 동맹을 맺은 바이킹을 이끌던 해스테인을 상대로 브리사르트에서 싸웠으나 전사했다. 살로몬의 위법 헹위에 교황 니콜라오 1세마저 샤를 2세의 봉신으로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867년 샤를 2세는 다시 브르타뉴를 공격하려 했으나 살로몬은 사위이자 반의 백작인 파스크베덴을 콩피에트로 파견해 평화 조약을 채결했고, 그결과 사절로 파견된 파스크베덴이 인질이 되지만 대신 코탕탱 반도를 얻게 되었다.

앙트람과 콩피에트 조약 이후 브르타뉴의 영역

이후 살로몬은 샤를 2세와 함께 9년간 바닷가 밖으로 몰아내는데 주력했지만 한편으로 루아르 강에 살고 있는 노르만인들과 평화를 맺고 브르타뉴 사람들과 함께 앙제 지역에서 자신에게 속한 영토에서 포도주를 생산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촌을 죽인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했으나 그의 사위인 파스크베덴과 에리스포에의 사위이자 렌의 백작인 그룬왈트가 손을 잡고 살로몬과 그의 아들인 기뇽(Guigon)을 죽이고 브르타뉴의 왕위를 찬탈했다. 하지만 공동왕으로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던 두 사람은 바이킹까지 고용하면서 단독 왕이되려고 했으나 공교롭게도 둘 다 876년에 사망하고 파스크베덴의 반의 백작직은 동생인 알랭 1세가 그룬왈트의 렌의 백작직은 그룬왈트의 아들인 주디켈이 이으면서 동시에 브르타뉴 왕위에 대한 계승권을 물려 받았다.

알랭 1세와 주디켈은 브르타뉴의 왕위를 두고 대립했으나 곧 바이킹들이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결국 왕위 쟁탈전을 그만둬고 같이 바이킹들을 막아야 했다. 형 파스크베덴이 살로몬의 사위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브르타뉴 왕가와 연관성이 없어 전통성이 사실상 없는 알랭 1세는 왕위를 주디켈에게 양보했다.주디켈은 888년까지 바이킹들을 막아냈으나 주디켈이 전사하였고, 889년 알랭 1세가 브로에렉(Broërec)의 퀘스템베르(Questembert) 전투에서 바이킹들을 몰아내고 890년 브르타뉴의 왕이 되었다.

알랭 1세는 자신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브르타뉴의 영토 내의 주교들의 인정을 받아내려고 했고, 외교적으로 서프랑크 왕위를 차지한 동프랑크 왕이자 서로마 황제 카를 3세에게 봉신으로서 서약까지 했다.

이후 죽기 전까지 그런대로 정당성을 인정받았는지 브르타뉴는 17년간 평화적인 시기를 보내게 되었으나 그가 907년에 죽으면서 다시 왕위 계승이 불안정해졌는데, 알랭 1세에게 아들인 루달트를 비롯한 아들 다섯 명이 있었지만 두 명이 사위로는 포허의 마투에도이와 탕구이(Tanguy)가 있었는데, 이미 파스크베덴과 그룬왈트라는 사례가 있었기에 알랭 1세가 죽자마자 사위 두 명이 루달트와 왕위 분쟁을 벌였는데, 이때 전형 엉뚱한 인물인 콘월 백작 구르마엘론이란 인물이 끼어들어 왕을 칭하지는 않았지만 브르타뉴의 전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913년 바이킹들이 다시 쳐들어오고, 구르마엘론은 바이킹을 막다가 전사했고, 브르타뉴의 영주들은 서프랑크나 한 때 자신들의 선조의 고향이자 이제는 앵글로 색슨족의 영토가 된 브리튼 섬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여기에 루달트와 마투에도이도 포함되었다. 이제 브르타뉴는 바이킹 군장들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들 중 낭트를 차지한 라게놀프는 현재는 노르망디 일대에 정착한 롤로처럼 919년 기독교로 개종과 함께 서프랑크의 단순왕 샤를 3세에게 봉신 맹세를 해 브르타뉴 북부 브르타뉴를 지배했으나 924년 센과 루아브 강 일대를 약탈했다. 이후 930년경에 사망하면서 인콘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931년 브르터뉴인들은 9월 29일 성 미카엘의 축일 때 봉기를 일으키다가 진압되나 그 과정에서 바이킹 군벌 중 한 명이었 펠레칸을 죽이는데 성공한다.

933년 롤로의 아들인 루앙 백작 기윰 1세는 라울로부터 코탕탱과 아브란치를 얻어냈다. 935년 란데베네크 수도원장 요한의 주도하에 브르타뉴 탈환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마투에도이의 아들인 알랭마저 브리튼 섬에서 나와 브르타뉴에 도착했다. 이에 인콘과 바이킹들은 알랭의 브르타뉴 탈환을 저지하려 했으나 2년 간의 전쟁 끝에 937년 인콘이 죽고 바이킹들이 브르타뉴에서 축출되면서 24년 간의 바이킹의 지배는 종결되었다.

938년 알랭이 알랭 2세로 브르타뉴의 권좌에 앉게되나 이 과정에서 브르타뉴의 약화된 상태로 코탕탱과 아브란치는 루앙 백작령에 귀속된 상태였고, 바이킹들의 지배가 30년 가까이 지속되었기에 의무를 져버린 채 브리틈성과 서프랑크 왕국으로 도망치다가 권토중래한 브르타뉴 귀족들의 기반인 심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결국 알랭 2세는 942년에 브르타뉴의 안위를 위해 코탕탱과 아브란치의 지배권을 포기하고 서프랑크의 루이 4세의 밑으로 완전히 들어가기로 결정되면서 브르타뉴 군주의 대내외적 지위는 공작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다만 이때 루아브 강 남쪽의 헤르보주, 티포주, 마우주 등의 백작령들을 얻어냈다.

다만 이때 브르타뉴에도 봉건제가 들어서 브르타뉴 내의 백작들의 입지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때 알랭 2세는 새로이 블루아 백작이 된 티보 1세와 동맹을 맺으면서 티보 1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와 결혼해 유일한 적자인 드로곤을 낳았다. 952년 알랭 2세가 죽자 적자인 드로곤이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드로곤의 나이가 어렸기에 외숙부인 블루아 백작 티보 1세와 둘의 주교 위코헨, 렌 백작 유헬 베랭거의 섭정단 구성해 블루아를 통치했다. 이때 드로곤의 어머니는 앙주 백작 폴크 2세와 재혼했고, 폴크 2세 또한 의붓아버지의 자격으로 섭정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브르타뉴의 대한 섭정단의 권력은 양분되어 티보 1세는 북부 브르타뉴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했지만 영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이 지역의 행정을 그의 두 동맹, 즉 그의 봉신이 된 렌의 유헬 베렌가르 백작과 돌의 대주교인 위코헨에게 위임했고, 폴크 2세는 낭트 백작령과 젊은 공작의 양육권을 받았다.

그러다가 958년 갑자기 드로곤이 죽었다. 이에 의붓 아버지인 폴크 2세가 브르타뉴 공작을 겸하다가 960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 노르망디인들이 침공한데다가 드로곤의 사망으로 공작의 권력은 봉건제의 심화로 더욱 분열되었으며 브르타뉴인들은 알랭 2세의 서자중 한 명인 호엘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웅립시켜 사태를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65년 교황 요한 13세가 브르타뉴 공작의 지도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우려를 표할 정도로 약화되었고, 우려대로 975년 호엘 1세는 티보 1세의 봉신으로 브르타뉴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코냥 르 토르트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코난은 반의 주교인 오르상드를 봉신으로 삼은 후 바네타이 지역을 차지했다.

결국 981년 호엘 1세는 낭트의 징집병 및 앙주 백작 조르푸아 1세와 동맹을 맺고 콩퀴레이유(Conquereuil) 접전을 벌었으나 양측 모두 승패를 가리는데 실패하고 만다.

이후 호엘 1세는 코난이 상대로 정치적 우세를 점하기 위해 생 브누아 쉬르 루아르에서 사제 수업 중이었던 동생 게레흐를 낭트의 주교로 만들려고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게레흐를 낭트의 주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게레흐가 두르로 향하던 도중 호엘 1세는 코난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호엘 1세에게 쥬디켈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아직 미성년자였다. 이후 형이 암살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게레흐가 낭트 주교직을 포기하고 확속해 낭트의 백작이자 명목상의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이후 게레흐는 형을 암살한 코난과 대립했다. 982년 아키텐 공작 기윰 4세와의 조약을 통해 루아브 강 남쪽의 백작령에 대한 권리를 얻어냈는데, 983년 게레흐는 직접 서프랑크의 왕 로테르에게 봉신으로서의 복종 의식을 마친 후 브르타뉴로 귀환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에게 붙잡혀 오랫 동안 붕신 서약을 강요, 게레흐는 이 요구를 간신히 받아들이면서 풀려났다.

같은 해 그의 아내인 안세니스의 아렘부르가는 안세니스에 요새를 구축했고, 코난 1세는 조프루아 1세의 권세를 등에 지게된 게레흐를 두려워해 게레흐의 주치의이자 생 소뵈르 드 르동 수도원의 수도원장이기도 한 헤로이쿠스에게 게레흐를 독살할 것을 요구했다.

987년 카롤링거 왕가의 정통 계승자인 루이 5세가 죽자 서프랑크 왕국의 제후들과 주교들은 계승권이 박탈된 루이 5세의 숙부인 샤를을 제치고 로베르 1세의 손자인 위그 카페를 새로운 서프랑크의 왕으로 선출했다. 이때 게레흐는 코난과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위그 카페를 지지할지 말지를 두고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988년 게레흐는 코난의 요구를 받은 헤로이쿠스에 의한 독삻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그의 뒤를 고작 9세였던 외아들인 알랭 3세가 이었으나 불과 2년만에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결국 코난이 코난 1세로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브르타뉴 공작이 되기 전 코난 1세는 앙주 백작 조르푸아 1세의 사위로 그의 딸인 에르망가르드와 973년에 결혼했다. 하지만 그의 장인인 조르프아가 코난 1세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기전 987에 사망했다. 하지만 조프루아는 살아 생전 브르타뉴로 귀환하던 게레흐를 자신의 영지 내에 들어서자 그를 구금해 강제로 자신의 봉신으로 삼으면서 브르타뉴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했으며, 조프루아의 뒤를 이은 처남 폴크 3세는 노골적으로 브르타뉴에 세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이에 코난 1세는 992년 과거 호엘 1세와 싸웠던 콩퀴레이유에서 폴크 3세가 이끄는 앙주 백작군과 싸웠으나 패사하고 했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조프루아 1세가 뒤를 이었지만 이때까지 바이킹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블라아 백작 또한 여전히 브르타뉴를 노리고 있었고, 조프루아 또한 아직 성년이 아니었기에 그의 어머니인 에르망가르드가 섭정으로 있어야 했다.

에르망가르드는 바이킹과 블루아 백작의 위협으로 살아남기 위해 남동생인 폴크 3세에게 협조적으로 나와야 했다.
하지만 폴크 3세는 호엘 1세의 사생아인 낭트의 주교 주디켈을 환속시켜 낭트 백작으로 임명해 자신의 조카를 견제하려 했고, 결국 994년 조프루아와 주디켈은 브르타뉴 공작 자리를 두고 대립했고, 이 투쟁에서 조프루아가 이기면서 주디켈은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후 996년 성년이 된 조프루아 1세는 친정과 함께 새로운 동맹 세력으로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와 접촉하기 시작,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누이와 결혼하는 이중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합의했고, 교회의 승인에 따라 결혼식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의 경계에 있는 몽생미셸에서 열렸고, 조프루아는 리샤르 2세의 여동생인 아보아즈와 결혼했고, 리샤르 2세는 조프루아의 여동생인 주디스와 혼인했다.
6. 부르군트 → 리베몽 조약 후 서프랑크령 부르고뉴와 부르군트 제2왕국
6.1. 부르군트 제1 왕국
5세기 후반 부르군트 왕국의 영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의 부르군트 왕국은 이미 3년전 왕인 군디옥(Gundioc)이 사망한 후 동생 킬리페리크 1세가 형의 아들들인 군데바우드와 고데지젤, 킬리페리크, 고드마르과 함께 공동 통치를 했으며, 킬리페리크 1세를 제외한 군디옥의 아들들은 각각 리웅, 발랑스, 비엔느, 제네바 일대등만 통치해 부르군트를 4개의 소왕국으로 분할했지만 킬리페리크 1세가 480년에 죽자 이내 군도바토는 486년 고드마르를 493년에 킬리페리크을 쳐 그들을 죽이고 영토를 합병했다.

이때 곤데바우트는 킬리페리크의 아내까지 죽였지만 킬리페리크의 두 딸만을 살려뒀는데, 동생쪽인 크로마는 수녀원에 들어갔지만 언니쪽인 클로틸데는 그대로 백부인 곤데바우트의 궁정에 억류되었다가 493년 곤데바우트와 협상하고자 찾아온 프랑크족 사절단은 그녀의 우아하고 현명한 면모를 보고 클로비스 1세에게 알렸다. 클로비스 1세는 즉시 곤데바우드에게 그녀를 왕비로 삼고 싶다고 전했고, 곤데바우드는 선뜻 응했다. 당시 클로비스에게는 아내가 이미 있었고 아들 테우데리크 1세도 봤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493년에 클로틸데와 결혼식을 거행하고 정실 왕비로 삼았다.

이후 500년 고데지젤은 곤데바우드에 의해 다른 두 형제가 죽은 것을 보고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 것임을 우려하고 클로비스와 동맹을 맺어 군데바우트와 내전을 벌였다. 이때 클로비스의 프랑크족 군대가 고데지젤을 돕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으로 침공했고, 군데바우드는 아비뇽 안에 포위당했고, 군데바우드는 클로비스에게 공물을 받칠 것을 조건으로 군대를 물리는데는 성공한다.

501년 군데바우드는 서고트 왕국 알라리크 2세와 동맹을 맺고 다시 고데지젤이 있는 비엔을 공격해 고데지젤을을 죽이고 부르군트 왕국을 통합하는데 성공한다.이후 클로비스와 평화 협정을 갱신한 군데바우트는 한동안 부르군트의 내정에만 몰두했다. 그는 부르군트인들과 피지배민으로 격하된 갈로 로마인 사이의 종교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군데바우드 본인은 정교로의 개종을 거부했지만 506년에 사망한 그의 왕비인 카레데네는 정교를 믿었고, 그의 후계자인 지기스문트 또한 정교로 개종했고, 교육 또한 비엔의 주교가 맡았다. 또한 각 도시에 로마인과 부르고뉴인의 두 백작이 재직하고 있으며 각각 자신의 법에 따라 판단한다는 규칙에 의해 유지되었다.

또한 501~502년에 부르군트족의 부족법을 집대성한 부르군트 법과 갈로 로마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부르군트의 로마법을 만들어 반포했다. 군데바우드의 법들은 그가 갈리아의 첫 번째 게르만 통치자로서 그의 신민들에게 국법을 적용했다. 그 당시 법은 "법의 성격"의 원칙에 따라 영토가 아닌 사람, 국적을 기반으로 했기에 판결을 내리기 전에 판사는 고소인이나 피고인의 국적을 물어야 했다.

그 밖에도 토지 소유권 분야에서 "환대"규칙, 즉 토지 분할 조건과 부르고뉴 인, 신규 이민자 및 이전 토지 소유자 간의 각 당사자의 상호 의무와 함께 입법화되었습니다. 이 분할은 폭력 없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중범죄 및 경범죄에 부과되는 처벌에 대해서도 법제화되었다.

507년 군데바우드는 클로비스의 동맹으로 알라리크 2세가 통치하던 서고트 왕국과의 전쟁에 지속적으로 원조를 해줬다. 그결과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서고트 왕국이 패배하고, 직접 군대를 지휘하던 알라리크 2세가 전사하였고, 클로비스의 프랑크군은 세를 몰아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전역을 휩쓸었고,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툴루즈도 함락하여 왕실의 숱한 보물을 노획했다. 한편, 클로비스와 연합한 부르군트 왕국군도 님과 나르본느를 공략하면서 드디어 지중해 연안까지 영토를 넓히게 되었다.

516년 군데바우드는 사망하였는데, 그에게 두 명의 적자로 장남인 지기스문트와 차남인 고도마르가 있었다. 이중 장남인 시기스문트는 502~506년 사이에 정교로 개종한 상태였고,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부르군트의 왕으로 즉위한 지기스문트는 동로마 제국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사절을 파견했으나 사절들은 동고트 왕국의 영토를 경유해 가다가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에 의해 붙잡혔으나 일부나마 탈출에 성공해 아나스타시오스 1세를 만났고, 아나스타시오스는 지기스문트에게 magister militum의 칭호를 수여한다.

이후 지기스문트는 516년 4월 30일에서 5월 15일 동안 현재의 스위스 생모리스인 아가우네에서 공회의를 수도사들을 육체 노동에서 해방시키지만 중단 없이 성무일도를 하도록 요구하는 새로운 교회법을 채택하였고, 다음해인 517년 에파오네에서 열린 공회의에서는 부르군트를 정교로의 개종을 추진하려고 하는 등 비엔의 아비투스 등의 정교 세력을 지원해줬다.

다만 정교 세력과도 관계도 순탄지도 않았는데, 발랑스의 주교 아폴리나리스와 교리 문제로 다툰적이 있었는데, 지기스문트의 재무관인 스테판이 근친혼을 한데 비판, 그를 공직에서 추방시킬 것을 다른 네 명의 주교들과 함께 결의하자 스테판은 지기스문트에게 호소하자 아폴리나리스와 함께 스테판을 탄핵하려 했던 네 명의 주교들은 샤르데냐로 추방되었다.

이후 지기스문트의 분노가 누그려지자 네 명의 주교 중 3명은 자신들의 담당지로 귀환했으나 아폴리나리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일 년 동안 대치 상태에 놓이다가 지기스문트가 병에 걸리자 지기스문트의 왕비가 직접 아폴리나리스에게 찾아가 왕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하자 아폴리나리스는 거절하자 왕비는 아폴리나리스의 망토를 빌려 왕에게 입혀달라고 청하자 아폴리나리스는 흔쾌히 들어주고 아폴리나리스의 망토를 입자 지기스문트는 병에서 낳았고, 아폴리나리스는 사르데냐에서 발렌스로 돌아왔다.

투르의 그레고리오가 저술한 연대기에 따르면 지기스문트는 494년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의 딸과 결혼해 아들 시게릭을 낳았다. 이후 왕비가 죽자 지기스문트는 518년 죽은 왕비의 시녀와 재혼했는데, 이는 왕실의 분란을 야기했는데, 시게릭은 성장하면서 시기스문트의 계비와 대립하게 되었고, 급기야 왕비로서의 그녀의 권위를 인정치않게 되자 지기스문트의 왕비는 지기스문트와 시게릭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왕이 시게릭을 죽이도록 만들었다.

이후 아들을 죽인 자책감에 빠진 시기스문트는 발레의 아가우네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등 종교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523년 그동안 그동안 클로틸데는 그동안 갈고 있던 복수의 칼을 뽑아 아들들인 오를레앙왕 클로도미르, 파리왕 킬데베르 1세, 수아송왕 클로타르 1세를 앞세워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프랑크의 분할 왕들 중 테우데리크 1세는 유일하게 클로디테의 소생이 아닌데다가 부르군트 왕 지기스문트의 사위였지만 그 역시 원정에 참여하지 않을 뿐 사실상 부르군트를 침공하는 것에 대해서는 방관했다.

동생 고도마르가 군대를 이끌고 방어하려 했으나 패배했고, 지기스문트는 처자식들과 함께 수도원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붙잡혀 오를레앙으로 끌려가 처자식들과 함께 끌려갔다. 하지만 고도마르가 동고트의 지원을 받고 클로도미르가 남기고 간 오를레앙 수비대를 궤멸시키자 이에 분노한 클로도미르는 524년 5월 1일 지기스문트와 그의 아내 및 아들을 살해한 뒤 이들의 유해를 우물에 던지게 했다.

그 후 테우데리크 1세를 설득하여 부르군트 왕국에 대한 2번째 원정에 함께 착수하게 했다. 부르군트의 귀족들은 고도마르를 부르군트의 왕으로 웅립한 후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의 지원까지 받은 후 524년 6월 25일 베체롱체 커탱 근교에서 전투에서 부르군트군은거짓으로 퇴각하자 클로도미르는 적을 추격했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진 뒤 효수되었고, 지기스문트와 그 가족들의 유해는 부르군트측으로 반환되면서 부르군트 왕국은 위기를 모면한 것처럼 보였지만 532년 수아송의 클로타르 주도하에 킬데베르 1세, 테우데베르 1세와 함께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2년간의 공세 끝에 534년 부르군트 왕 고도마르 3세를 처단하고 부르군트 왕국 전체를 병합되다.
6.2. 프랑크 왕국령 부르군트
이후 부르군트의 영토들은 분할되어 현재의 프랑스의 북동부에 위치한 랑그르, 브장송, 오툰, 살롱과 스위스의 아르가우에 속하는 아방슈, 빈디쉬,발레주의 마티니가 속한 북부는 테우데베르 1세가 현재의 프랑스 리웅과 마콩,비엔, 그레노블, 제네바, 타렌타이즈 계록이 속한 중부는 킬데베르 1세가 나머지 남부의 영토인 듀랑스 일대는 2차 공격을 주도한 클로타르가 차지했다.

이후 킬데베르와 테우데베르가 죽은 후 558년 다시 프랑크 왕국이 클로타르의 통치 하에 다시 합쳐지면서 분할된 부르군트 또한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이후 프랑크의 통치자들은 부르군트족들인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부르군트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561년 클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아들들에 의해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할되면서 부르군트는 오를레앙을 본거지로 하는 군트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군트람의 영토는 북쪽의 멜룬에서 남쪽의 마르세유까지 이르는 프랑크 왕국 동부 전역을 물려받았다. 565년, 시게베르 1세가 군트람에 속한 아를을 공략하고자 클레르몽의 프림과 아도발라 백작의 지휘하에 군대를 파견했다. 아도발라 공작은 아를에 들어와서 주민들이 시게베르 1세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군트람의 군대가 아를에 도착하여 프림과 아도발라를 포위했다. 두 사람은 요격에 나섰으나 패퇴하고 도주했다. 아를을 탈환한 군트람은 여세를 몰아 아비뇽을 점거했다가 시게베르 1세와 화해한 뒤 돌려줬다.

567년 11월 또는 12월, 파리 일대를 다스리던 카리베르 1세가 사망했다. 이에 그는 킬페리크 1세, 시게베르 1세와 함께 카리베르의 영지를 분할했다. 그런데 프로방스의 분배를 놓고 시게베르 1세와 분쟁이 벌어졌다. 시게베르는 그의 재산인 아를 시를 기습 공략했다. 이에 부르군트의 파트라케인 켈수스가 즉각 반격해 아비뇽을 공략하고 뒤이어 시게베르가 남겨놓은 부관을 물리치고 아를을 탈환했다. 군트람은 아비뇽을 시게베르에게 돌려주고 화해했다.

568년, 서고트 왕국의 공주이자 킬페리크 1세의 아내였던 갈스빈트가 살해되었고, 갈스빈트 살해를 사주한 것으로 의심되는 프레데군트가 킬페리크 1세의 아내가 되었다. 이에 길스빈트의 언니이자 시게베르 1세의 아내인 브룬힐트가 분노하여 남편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했다. 시게베르 1세는 아내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킬페리크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군트람이 두 형제에게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은 569년 전국에서 소집한 대표들이 집결한 궁정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궁정 회의 결과, 킬페리크는 살인에 관여한 책임을 지고 브룬힐트에게 아키텐의 5개 도시(보르도, 리모주, 카오르, 베른, 비고르)를 넘겨야 했다.

570년 또는 57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켈수스를 파견해 요격하게 했으나, 켈수스는 랑고바르드군에게 참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랑고바르드군은 약탈을 자행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571년 또는 572년, 랑고바르드족은 갈리아를 두 번째로 침공하여 암브렌 마을 인근의 무스티아에 도착했지만, 군트람의 장군 뭄몰이 숲의 길을 통해 그들의 후방과 측면으로 돌아간 뒤 포위 공격하여 많은 적을 섬멸하고 포로들을 왕의 앞으로 끌고 갔다. 군트람은 이들을 여러 전선에 보내 병역을 수행하게 했다.

몇년 후, 작센인들이 랑고바르드군과 함께 갈리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라에 지역에 숙영지를 세우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뭄몰이 출격하여 이들을 공격해 많은 적군을 살상했다. 작센인들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하면서, 생포했던 이들을 풀어주고 시게베르 왕을 위해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평화 협약이 성립된 후 돌아가던 작센인들은 아비뇽으로 가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곡식을 수확하던 주민들로부터 곡식을 빼앗았다. 이후 그들은 강을 건너 론 강둑에 접근했다. 이때 뭄몰이 그들과 접촉하여 군트람의 재산을 약탈한 것에 책임을 지고 수천 개의 금화를 지불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지불한 뒤 시게베르 왕의 소유지인 클레르몽에 도착했다.

574년, 3명의 랑고바르드 족장 아몬, 자반, 로단이 갈리아를 침공했다. 아몬은 아비뇽으로 가서 주변 일대를 약탈하고 마르세유 시와 인접한 마을을 싹쓸이하고 인간과 소를 끌고 갔다. 뒤이어 엑상을 포위했다가 주민들로부터 22파운드의 은을 받고 물러났다. 자반은 발랑스로 진군한 뒤 그곳에 숙영지를 세웠고, 로단은 그레노블 시를 점령했다. 뭄몰은 로단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뒤이어 발랑스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자반을 요격하여 제압했다. 이후 로단과 자반이 암브룬으로 후퇴하자 이를 추격해 거의 섬멸했고, 로단과 자반은 소수의 추종자만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아몬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 모든 식량을 챙겨 후퇴하다가 폭설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고 이탈리아에 가까스로 들어갔다.

575년, 시게베르 1세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인들을 대거 고용해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뒤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킬페리크 1세의 장남 테우데베르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군트람은 '군트람 보손'을 보내 테우데베르를 돕게했지만, 보손이 돌연 편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데우데베르가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후 시게베르는 킬페리크가 숨은 투르를 포위 공격하다가 프레데군트가 사주한 암살자들에게 피살되었다. 군트람은 시게리크 1세의 조카 킬데베르 2세의 후견인을 맡았고, 575년 말 또는 576년 초에 후견인 자격으로 마르세유 절반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킬페리크는 측근 한명을 군트람 보손이 숨은 성 마르틴 대성당이 있는 투르에 보내 자신의 장남 테우데베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를 넘기지 않는다면 투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투르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이끄는 투르 주민들은 "성스러운 성당이 스스로 찾아온 죄인을 보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데 이를 위반할 수는 없다"라고 답했다. 이에 킬데리크는 아들 클로비스에게 투르를 응징하게 했다. 클로비스가 명령을 받들어 데시데리우스 공작과 함께 투르와 앙제 일대를 약탈하고 있을 때,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리모주에 도착하여 이들과 응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군트람은 5,000명의 전사를 잃었고 데시데리우스는 24,000명의 전사를 잃고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 후 군트람은 오베르뉴를 통과하면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부르군트로 돌아갔다.

581년,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가 마르세유 절반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킬데베르 2세가 돌려달라고 청하자, 군트람은 자신이 후견인 자격으로서 그 영토를 점유한 것이며, 자신이 죽으면 그에게 왕국을 넘겨줄 테니 기다리라고 답했다. 킬데베르 2세는 그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해 적대시했다. 킬페리크는 이를 보고 데시데리우스 공작을 불러서 군트람을 괴롭히라고 명령했다. 데시데리우스는 군트람을 따르는 라그노발트 공작을 몰아내고 페리 시를 공략한 뒤 아제네로 진군해 군트람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도시를 점령했다.

583년, 킬페리크의 부하 베룰프, 데시데리우스, 그리고 블라다스트 공작은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는 오베르뉴 지역을 침공했다. 오브레뉴 측은 1만 5천 병력을 소집하여 대응했고, 양자는 사토메안 요새에서 격돌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7천 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하지만 베롤프와 블라다사스트는 별다른 저항없이 순조롭게 진군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육했다. 이에 오베르뉴 주민들이 군트람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군트람은 즉시 진군하여 베롤프와 블라다스트의 군대를 거의 섬멸했다. 킬페리크는 이 상황에 동요해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584년, 킬데베르 2세와 군트람이 연합하여 킬페리크를 공격했다. 킬페리크는 이에 대응해 캉브레로 피신한 뒤 전쟁을 이어가다가 그해 9월 27일 괴한에게 살해되었다. 암살자를 사주한 이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군트람은 파리에 무혈 입성한 뒤 킬페리크가 캉브레로 피신한 후 프레데군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클로타르 2세의 후견인이 되었고, 그때까지 킬페리크 1세의 영역을 다스리기로 대신 다스리기로 했다. 다만 야심이 많고 비열한 술수를 자주 구사하는 프레데군트를 경계해 루앙으로 보냈다.

이보다 앞서, 킬페리크 1세는 자신의 딸 리군타를 서고트 국왕 리우비길드의 아들 레카레드 1세와 시집보내기 위해 화려한 보물을 가득실은 수행단을 딸과 함께 보냈다. 수행단 대표 데시데리우스는 여정을 떠나던 중 킬페리크 1세가 살해되었고 군트람이 킬페리크 1세의 영역을 점유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수행단을 해산하고 인군타와 함께 뭄몰에게 도망쳤다. 뭄몰은 데시데리우스와 협의한 뒤 클로타르 1세의 아들 군도발트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들은 블라다스트 공작, 사가타리우스 주교, 와돈 등 킬페리크 1세의 잔여 세력과 합세한 뒤 툴루즈, 앙굴렘 등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반역 소식을 접한 군트람은 투르와 푸아티에를 약탈하고 도르도나 강에 도착하여 반란 토벌에 착수했다. 군도발트는 코멘스로 도피해 농성했고, 군트람은 코멘스를 즉시 포위했다. 며칠간의 공방전 끝에 블라다스트는 도망쳤고, 뭄몰, 사가타리우스, 와돈은 군도발트를 살해한 뒤 군트람에게 수급을 바치며 귀순했다. 군트람은 감히 왕족을 죽인 그들에게 분노해 뭄몰과 사가타리우스 주교를 처형했고, 와돈은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브룬힐트와 합세했다. 반면에 군도발트 살해에 관여하지 않은 데시데리우스는 용서받았다. 한편 데시데리우스와 함께 뭄몰에게 귀순했던 리군타는 어머니 프레데군트에게 보내졌다.

585년, 군트람은 서고트 왕국의 영역인 셉티마니아로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프랑크군은 진군 도중에 자기 나라 주민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심지어 교회를 강탈하고 성직자들을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다. 그러다 고트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작전이 어려워지자 자기들이 황폐화시킨 영토를 통과하여 후퇴했고, 그 과정에서 물자 부족과 전염병 창궐, 자국 주민들의 보복 공격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라우비길드는 차남 레카레드 1세를 시켜 반격을 개시하게 했고, 레카레드 1세는 카바레 요새를 점령하고 툴루즈 일대 대부분을 황폐화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뒤이어 론 강 유역의 잘 요새화된 도시인 우게른을 공략했다. 이렇게 확보된 재산 및 포로들은 님 시로 이송되었다. 586년 레카레드 1세는 재차 공세를 개시해 나르본에 도착하여 여러 전리품을 획득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귀환했다.

586년, 군트람의 부하인 데시데리우스가 셉티마니아의 도시 카르카손을 침공했다. 이 공격을 미리 파악한 도시 주민들과 서고트군은 도시 외곽에서 데시데리우스와 맞섰다. 전투가 시작되자 고트군은 미리 계획한 대로 후퇴했고, 데시데리우스는 즉시 추격했지만 적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주력부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고트군은 즉시 그를 에워쌌고, 데시데리우스는 자신과 함께 오던 소규모 분견대와 함께 살해되었다. 지휘관이 피살당하자, 프랑크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587년 11월 28일,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보장하고, 아이가 없을 경우 상호 유산을 확립하고, 상대방에게 모반을 꾀한 자를 넘기기로 했다. 또한 두 왕은 왕국의 분할과 경계를 정했다. 군트람은 파리, 토덴, 반도마, 에탐나, 샤르트르를 받았고, 킬데베르는 모, 상리스, 투르, 푸아티에, 아브론테, 에어, 콩세랑스, 라부르드, 알비를 접수했다.

587년 셉티마니아에서 나르본 주교 아탈루크와 셉티마니아 백작 그라니스타와 빌디게른이 반란을 일으키며 프랑크 왕 군트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아탈루크는 곧 죽었고 반란도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589년, 군트람의 또다른 부하 보손이 이끄는 대군[23]이 셉티마니아를 침공해 카르카손에 접근했다. 도시 주민들은 대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못내고 군트람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프랑크군이 승리에 취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사이, 레카레드가 파견한 루시타니아의 클라우디우스 공작이 갑작스럽게 습격했다. 프랑크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했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 수적으로 열세한 적을 밀어붙였다. 클라우디우스는 후퇴하는 척 하면서 적군을 미리 준비한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프랑크군은 적을 추격하던 중 메복에 걸렸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랑크군은 약 5,000명을 잃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모든 보급물자를 상실했다고 한다. 나머지 병력은 고트군의 추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프랑크 왕국으로 도주했다.

590년, 브르타뉴의 왕 바로스 2세는 낭트와 렌 주변을 약탈했다. 베폴렌과 에브라하르 공작의 지휘 하에 군대를 브르타뉴로 보냈다. 그러나 프랑스 군 지도자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 독립적으로 군사 행동을 취했다. 그 결과, 베폴렌의 군대는 늪에 빠져들어 많은 사람이 익사했으며 베폴렌 역시 전사했다. 에브라하르는 바로스와 평화 협약을 맺고 브르타뉴를 떠났지만, 바로스 2세는 곧 협약을 파기하고 아들 카논을 파견해 에브라하르의 잔여 병력을 섬멸했다. 군트람은 이 실패에 분노해 에브라하르가 바로스 2세로부터 뇌물을 받고 군대를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하고 추방했다.

군트람은 처음에 친척 중 한 사람의 하인이었던 베레난다를 첩으로 삼아 아들 군도발트를 낳았다. 이후 565년경에 마그나하르 공작의 딸인 마르카트루드와 결혼했고, 군도발트를 오를레앙으로 보냈다. 마르카트루드는 아들을 낳은 후 군도발트가 장차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해 566년에 군도발트를 독살했다. 그러나 얼마 후 마르카트루드가 낳았던 아들 마저 질병으로 사망했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군트람은 몹시 분노해 마르카트루드를 궁정에서 쫓아내고 오스트리아길다와 결혼하여 두 아들 클로타르와 클로도미르, 그리고 두 딸 클로틸다와 클로데베르가를 낳았다. 577년, 군트람은 오스트리아길다와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로 마그나하르의 두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재산을 몰수했다. 577년 군트람의 두 아들 클로타르와 클로도미르가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580년 9월 오스트리아길다가 병사했다. 그는 가족을 연이어 잃자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치의 2명을 살해했다.

592년 3월 23일 숨을 거두었고 성 마르켈리우스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의 영지는 사전에 합의했던 대로 클로타르 2세와 킬데베르 2세에게 분할되었다. 하지만 킬데베르 2세와 브룬힐트는 군트람의 영토를 분할할 생각이 없었고, 오랜 숙적 프레데군트와 클로타르 2세를 타도하려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592년 또는 593년,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로 쳐들어가서 수아송의 드로슈에서 프레데군트의 적군과 격돌했다. 프레데리가 연대기에 따르면,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전투를 중단했고, 이후 몇년간 적대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596년 킬데베르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두 아들이 각각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를 분할하기로 결정해 테우데베르 2세가 아우스트라시아를 테우데리크 2세가 부르군트를 나눠서 통치하게 되었다. 이 둘은 미성년자였기에 조모인 브룬힐트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이때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은 부르군트 왕국에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서부 프로방스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넘겼다. 이 조치는 두 왕국의 영역을 비슷하게 설정하는 한편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제어하기 위한 브룬힐트의 의도로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와 부르군트의 수도 오를레앙 중 어느 곳에도 거주하지 않고 두 왕국의 국경 지대인 오툉과 오세르에 주로 거주하면서 두 나라를 효과적으로 제어했다.

킬데베르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네우스트리아 왕비이자 브룬힐트의 오랜 숙적인 프레데군트는 지금이야말로 브룬힐트를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역을 제패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2살의 아들 클로타르 2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파리로 진격했다. 몇몇 아우스트리아 귀족들의 호응 덕분에 일드 프랑스 일부 지역을 확보한 후,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영내로 진입했다. 이윽고 수아송 인근의 라포에서,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맞붙었다. 막대한 희생자를 양산한 이 전투에서 승리한 프레데군트는 여세를 몰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폐렴으로 쓰러져 1년간 고통을 겪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죽어가면서 브룬힐트를 잡아오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가 사망한 뒤 곧바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정세가 여전히 불안했고 귀족들이 여전히 독립적으로 구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간 위험하다고 여겼다. 여기에 599년 프로방스에서 역병이 발생해 군대를 일으키는 게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충실한 관료를 임명하고 잠재적인 반역자들을 숙청하고 행정을 돌보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러다 600년 기반을 어느정도 닦았다고 판단한 그녀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고, 16살의 클로타르 2세가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의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넘기는 평화 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바스크인들이 아두르 강과 가론 강 계곡을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602년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복종시킨 후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또한 바스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바스코니아 공작을 세웠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가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그들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협약을 위반한 클로타르 2세를 응징하자고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그가 독자적으로 진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적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부르군트 선봉대를 이끌었던 베르토랄트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지만, 부르군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여 적장 메로벨을 사로잡고 랑데리크를 패퇴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테우데베르 2세가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하는 바람에 전과를 확대하지 못했다. 이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간에 긴장감이 흘렀지만, 브룬힐트가 내전을 벌이는 것만큼은 원하지 않았기에 몇년 간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605년, 테우데리크 2세는 할머니의 요청에 따라 프로타디우스를 재무관으로 삼았다. 프로타디우스는 재무 능력은 뛰어났지만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온갖 기발한 방식으로 세금을 매겨 백성들을 착취해 재고를 풍족하게 했으며, 정적들을 잡아들여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병사들이 왕의 천막을 에워싸고 프로타디우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테우데리크 2세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운실렌을 보냈다. 그러나 운실렌은 군인들에게 "왕께서 프로타디우스의 처형을 명령했다"라고 거짓말했고, 병사들은 이에 고무되어 프로타디우스를 죽였다. 이후 새 재무관에 선임된 클라우디우스는 폭식을 일삼아 무척 뚱뚱했지만 좋은 교육을 받아 지성이 뛰어났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온화하게 대해 두터운 인망을 샀다. 그러나 총신 프로타디우스를 죽인 것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운실론을 체포해 유죄를 선고하고 발을 자르고 재산을 몰수하는 조시를 내렸으며, 프로타디우스의 죽음에 연루된 또다른 귀족 울프는 파베른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살해되었다.

606년, 테우데리크 2세는 서고트 왕국의 위테리크 왕에게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오도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룬힐트가 서고트 왕국을 등에 업은 며느리를 제어할 수 없다고 여겨 결혼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우데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각자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연합 공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위테리크를 암살한 뒤 왕위에 오른 군데마르 역시 셉티마니아 공작 불가르를 통해 테우데베르 2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지만 실현에 옮기지 못했다.

이렇듯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손잡으려 애썼다. 이무렵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부가 메로벨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는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던 610년, 테우데베르 2세는 클로타르 2세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610년 초, 아우스트라시아군이 알자스를 침공하여 강제로 병합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셀츠 요새에서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우데리크 2세가 소수의 무장 수행원과 함께 회담장에 간 것과 달리, 테우데베르 2세는 정예병을 대거 동원해 회담에 참석했다. 결국 테우데리크 2세는 강한 압박을 받고 알자스를 형에게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자, 알레만니인들은 자발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귀순한 뒤 부르군트 왕국에 귀속된 아벙슈 일대를 파괴했다.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편에 서서 테우데베르 2세와 대립했다.

612년 5월, 테우데리크 2세는 전 병력을 집결한 뒤 할머니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들은 안델로트를 통과한 후 툴루즈를 공략했다. 이에 테우데베르 2세 역시 전군을 이끌고 툴루즈 교외에서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브룬힐트와 테우데리크 2세가 지휘한 부르군트군의 압승이었고, 테우데베르는 수많은 정예병을 잃고 아르덴 숲을 통해 도주했다. 이후 색슨족, 튀링겐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612년 7월 톨비아크(현재 췰피히)에서 재차 맞붙었다. 프레데가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 성립 이래 이 전투 만큼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된 전투는 없었으며, 전사자들은 마치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 몸을 기댄채 서 있었다고 한다. 테우데베르 2세는 이 전투에서도 역시 패배한 뒤 쾰른으로 도주했다. 그러다가 추격대가 오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하여 숲속으로 달아려 했다가 테우데리크 2세의 부하 베르타르에게 사로잡혀 끌려왔다.

테우데베르 2세는 왕의 의복과 인장을 빼앗긴 뒤 샬롱 수도원으로 보내져 머리를 깎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 메로베는 테우데리크 2세의 명령에 의해 돌에 던져지면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 <성 콜룸바누스와 제자들의 삶>의 저자 바비오의 요나에 따르면, 테우데베르 2세는 수도자가 된 지 며칠 만에 브룬힐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반면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프랑크 역사집>에 따르면, 리푸아리 백성들이 그를 죽여 수급을 보내라는 테우데리크 2세의 지시에 따라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일대의 군주가 된 그는 클로타르 2세와 대립했다. 613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덴텐 공국을 자신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정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613년 8월 23일 메츠에서 돌연 사망했고 부하들은 집에 돌아갔다. 프랑크 역사집은 그가 브룬힐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브룬힐트가 유일하게 남은 손자를 굳이 해쳐야 할 동기가 없으며,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명시된 대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장남 시게베르 2세를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아르눌프, 피핀 1세 등 아우스트라시아의 다른 귀족들은 클로타르 2세를 왕으로 초빙했다. 클로타르 2세가 안더나흐에 도착했을 때, 테우데리크 2세의 아이들과 함께 보름스에 있던 브룬힐트는 그에게 테우데리크에게 정당한 후계자가 있으니 아우스트라시아 왕위를 포기히라고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이에 클로타르 2세는 특별히 소집된 프랑크 민회에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브룬힐트는 클로타르에 맞서기 위해 알보인, 바나차르 및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시게베르를 튀링겐으로 보냈다. 이때 그녀는 알보인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바나차르 등이 클로타르에 합류하려 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알보인은 편지를 읽은 뒤 갈기갈기 찢어서 땅에 던졌지만, 바나차르의 부하 한 명이 이를 발견하고 밀랍판에 붙인 후 주군에게 보였다. 바나차르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깨닫고 다른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그들은 서고트 왕국 출신인 이민족 여자이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한 그녀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고, 이참에 테오데리크의 아이들 중 한 명도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 뒤 브룬힐트와 함께 모조리 죽이고 왕국을 클로타르에게 넘기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연합군이 브룬힐트의 지휘하에 클로타르와 맞서러 진군했다. 샹파뉴의 아시네 강에 이르러 네우스트리아군과 마주쳤을 때, 바나차르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곧바로 귀순했다. 브룬힐트의 원정에 동행했던 시기베르, 코르부스, 메로베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킬데베르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 종적을 감췄다. 브룬힐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딸 테오데린다와 함께 체포되어 클로타르 앞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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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타르 2세는 메로베의 대부를 맡은 바 있었기에 그를 살려줬지만 시기베르 2세와 코르부스는 죽였다. 이후 브룬힐트에게 40여년 간 프랑크 왕국을 혼란과 고통에 빠뜨리고 여러 왕을 파멸로 몰고 간 책임을 물었다. 이에 모든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한 목소리로 "저 악녀에게 참혹한 죽음을 내려라!"라고 외쳤다. 브룬힐트는 3일 동안 온갖 고문을 받은 뒤 낙타에 태워진 후 조리돌림 당했다. 그 후 발가벗겨진 채 머리카락과 양 팔, 양 다리가 두 마리의 야생마의 발에 묶인 뒤 두 말이 채찍질을 받고 앞으로 내달리면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으로 시집온 이래 40여 년간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고트족 여인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고, 프랑크 왕국은 클로타르 2세에 의해 통합되었다.

이후 629년 클로타르 2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다고베르 1세가 프랑크 국왕이 된지 3년 후 아들인 시게베르 3세에게 아우스트라시아의 분국왕으로 임명하면서 네우스트라시와 함께 부르군트를 통치하게 되면서 이후 클로타르 3세, 데우데리크 3세, 킬페리크 2세까지의 세명의 왕들이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를 통치했지만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들과 대립하고, 점차 어린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을 기반으로 하는 피피니드 가문이 점차 성장했다. 초기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직을 세습하던 것에 만족했던 피피니드 가문은 이제 아우스트라시아 밖으로 팽창하고자 했다. 문제는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에 에브로인이라는 또다른 권신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양자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677년, 에브로인은 테우데리크 3세를 대동하여 아우스트라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는 이에 맞서 다고베르 2세와 함께 출진했다. 양군은 랑그르에서 맞붙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678년, 에브로인은 왕을 부추겨 주교 평의회를 소집한 뒤 오툉의 레제 주교를 킬데리크 2세 암살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없었지만, 에브로인의 권세를 두려워한 주교들은 유죄를 평결했고 왕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679년, 울포알드와 다고베르 2세가 잇따라 살해되었다. 에브로인은 아우스트라시아를 병합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테우데리크 3세를 프랑크 전역의 단독 군주로 선포했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인 피핀 2세와 상파뉴 공작 마르틴이 반기를 들었다. 680년, 에브로인은 루코파오 전투에서 두 귀족을 격파한 뒤 아우스트라시아 대부분을 초토화했다. 피핀 2세는 자신의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마르틴은 랑트로 피신했다가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에브로인의 말을 믿고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가 피살당했다. 이제 에브로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얼마 후 그의 잔혹한 성정에 반감을 품은 에르멘프레드에게 궁정에서 살해당했다. 에르멘프레드는 보물들을 챙기고 피핀 2세에게 달려가 귀순했다.

피핀은 새로운 네우스트리아 공작 와라톤과 평화 협약을 맺고 테우데리크 3세의 권위를 인정하되 자신 역시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로 인정받았다. 686년 와라톤이 아들 지젤마르에게 폐위된 후, 처남 베르차르가 뒤를 이었다. 와라톤의 아들 지젤마르와 베르차르는 경쟁자들을 최대한 배제해 권력을 유지하길 희망했고, 이로 인해 많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갖은 탄압에 시달리다가 피핀 2세에게 귀순했다.

687년 군대를 일으킨 피핀 2세는 뫼즈 강을 따라 이동했다. 프랑크 국왕 테우데리크 3세는 피핀 2세의 강대한 권력을 경계하여 베르차르의 편을 들었고, 베르차르는 군대를 일으켜 피핀과 맞설 태세를 갖췄다. 피핀 2세는 평화 협약을 제안했지만, 테우데리크 3세는 베르차르의 조언에 따라 거절했다. 이에 피핀은 새벽에 군대를 뫼즈 강 건너편에 은밀히 이동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베르차르는 적 군영이 텅 비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군영으로 들어가서 버려진 물자를 약탈했다.

이때 사전에 매복하고 있던 피핀 2세의 군대가 덮쳤고, 베르차르의 군대는 별다른 대항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베르차르는 적군에게 쫓기다 끝내 피살되었다.( 테르트리 전투) 이후 피핀은 수도 파리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붙잡았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하지는 않고,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까지 맡으면서 프랑크 왕국 전역의 궁재가 되었다.

이후 8세기경 샤를 마르텔에 의해 부르고뉴는 아를의 부르고뉴와 비엔의 부르고뉴, 알레마니 부르고뉴, 프랑크 부르고뉴 등의 네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네 곳은 모두 백작들이 파견되어 통치되다. 751년 킬데리크 3세 피피누스 3세에 의해 폐위되고, 피피누스 3세가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면서 카롤링거 가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고, 768년 피피누스 3세가 죽고 차남인 카를로만이 형인 카롤루스와 함께 프랑크 왕국을 분할하면서 부르군트 또한 카를로만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통치 1년만에 두 형제 사이는 아키텐의 독립 문제로 인해 카를로만이 협력을 거부하면서 비꺽거리기 시작했고, 사사건건 대립하다가 771년 카를로만이 죽고 카롤루스가 카를로만의 처자식들을 내쫓고, 카를로만의 모든 영토들을 차지하면서 부르군트 또한 카롤루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후 부르군트는 카롤루스와 그의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때까지 평온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루도비쿠스 1세의 치세 후기에 루도비쿠스의 지도력 하락과 그리고 왕실 내의 계승 문제로 인해 그의 아들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840년 루도비쿠스가 죽으면서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가 프랑크 왕국을 완전히 물려받았지만 서로 거의 대등한 입장을 원했던 동생들인 샤를 2세 루트비히 2세가 계속해서 항쟁을 벌었고, 결국 로타리우스가 밀리기 시작하자 842년 6월 마콩 인근의 사오네 강변에서 휴전이 성립되었고, 각 형제 당 40명씩 협상단을 꾸려서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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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년 8월, 1년 2개월간 이어진 협상 끝에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다. 샤를 2세는 대서양에서 뫼즈 강까지 프랑크 제국의 서반부 일대를 통치하고, 루트비히 2세는 라인 강 동쪽의 제국 동부를 다스릴 권한이 주어졌다. 로타리우스 1세는 뫼즈 강과 라인강 사이의 지역과 프로방스, 이탈리아 북부 일대를 맡았다. 또한 양자는 각자의 아들에게 왕국의 상속을 보장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때 부르군트는 센 강을 기점으로 동서로 분할되었다. 센상 서쪽의 작은 지역인 디종 일대가 부르고뉴 공국이란 명칭으로 서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고, 동쪽 부분은 그대로 중프랑크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855년 로타리우스는 중병에 걸려 결국 수도원으로 은퇴하면서 장남 루도비코 2세에게 이탈리아 왕좌와 황제 직위를 물려주고, 차남 로타르 2세를 로타링기아 왕으로 삼아 프리실란트 등 북해와 라인강과 뫼즈 강, 그리고 쥐라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맡겼다. 마지막으로 3남 샤를에게 프로방스, 리옹, 부르고뉴, 트란스쥐라나를 맡기고 프로방스의 왕으로 세웠다.

이때 부르군트는 남북으로 분할되어 북쪽은 로타링기아 왕국에 프로방스, 리옹, 비엔느 등 남쪽은 프로방스 왕국이란 명칭으로 개편되었다.
6.3. 분단기
855년 프륌 조약으로 부르군트는 남북으로 분할되어 북부는 로타링기아 왕국, 남부는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왕이 된 프로방스의 샤를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샤를은 아직 미성년자였고, 심지어 간질병자였다.샤를의 두 형 루트비히와 로타르는 그가 여전히 미성년자이고 간질 발작을 앓는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올베 지역에서 샤를에게 자신의 영토를 포기하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샤를은 형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샤를이 차지한 프로방스와 부르고뉴가 영토가 넓었으므로 형 루트비히와 로타르 2세는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856년 그가 제네바 호수 주변의 오브레, 스위스를 각각 형들에게 양도하여 반발을 가라앉혔다. 또한 이 조약에 의해 리옹(Lyon) 공국의 영유권을 그가 확보한다. 즉위 초 리옹의 공작이던 그의 이모부 루시용 출신 제라드 2세(Girart de Roussillon)가 그의 영토를 침략했다가 루트비히, 로타르 2세에 의해 제지를 받았다. 한편 855년 당시 그는 병약한데다가 나이가 어렸으므로, 856년 리옹 공국이 그의 영지가 되면서 비엔나 백작 겸 루시용 공작 제라드가 860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또한 제라드는 론강과 발랑스 일대를 방어하였다. 교회를 제어하는 것은 프로방스와 아를의 백작 풀카르도(Fulcrado)가 맡았다. 루시용 공작인 제라드는 샤를의 어머니 투르의 이르멘가르트의 여동생이자 위그의 딸 베르타의 남편으로 그의 이모부였다.

샤를 2세는 지병인 간질로 고통받았다. 한편 858년 샤를 2세는 자신이 자녀 없이 죽으면 자신의 영토는 둘째 형 로타르 2세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샤를의 이 유언에 대해 맏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샤를은 859년 로타르 2세를 후계자로 한다는 자신의 유언을 관철시켰다.

858년과 859년에는 바이킹 족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형제들에게 호소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하스팅(Hasting) 일대에 나타난 바이킹 및 지중해 해안가 일대를 약탈하고 아를지역까지 나타난 노르만족을 직접 맞서 싸웠고, 860년 겨울 카마르그 일대에서 노르만 족을 크게 격파하였다. 카마르그에서 프로방스의 샤를 2세에게 격퇴당한 노르만인들은 그 이듬해 봄 이탈리아 지역으로 가서 이탈리아를 약탈하였다.

사실상 프로방스의 두 번째 군주였던 그는 860년 처음 친정하였으나, 그해에 그의 영토를 침범하려던 삼촌 샤를 대머리왕을 물리쳤다. 861년 샤를 대머리왕은 프로방스, 부르군트에 개입해달라는 아를 백작의 개입 요청을 받고 다시 프로방스를 쳐들어왔으나 역시 격퇴하였다. 대머리 샤를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마콘 강(Macon, 후대의 벨기에)을 넘다가 랭스대주교 힝크마르에게 제지당했다. 프로방스의 샤를 2세는 후계자 없이 죽었는데 그의 영토는 맏형인 루도비코 2세가 차지했다. 질병에 걸린 그는 864년 1월 25일 리옹의 리옹 세인트 피에르 레 노망 수녀원(Abbay of Saint-Pierre-les-Nonnains of Lyon)에서 자녀 없이 사망했다.

그의 영토는 당초 로타르 2세에게 자신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모두 넘긴다고 하였으나, 형 루도비코 2세 이탈리아인이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였으므로 제라드가 이를 중재하여 아를과 액 상 브랑을 루도비코 2세 이탈리아인에게 넘겨주고, 나머지 비엔나와 그르노블 지역 그리고 리옹 주교관구를 로타르 2세에게 분배하여 넘겨주었다. 프로방스 왕국 분할 이후 영토 변화 그러나 로타르 2세마저 869년에 사망하여 그의 영지는 1년 동안 루도비코 2세와 그의 두 숙부들 간의 알력으로 어느 왕의 영토로 귀속되지 못하다가 870년 8월 8일 메르센 조약으로 최종적으로 루도비코 2세 이탈리아인에게 돌아간다.

이후 프로방스는 12년 동안 루도비코 2세의 통치를 받다가 그 역시 후사[24]가 없이 있다가 875년 이탈리아 남부를 통제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다가 실패, 회군중 875년 8월 12일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지방의 게디 시에서 사망했고, 일주일 후 밀라노의 산탐브로지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숙부 샤를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건넜다. 루트비히 2세는 아들 카를로만을 프로방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국왕으로 세우려 했고,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가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파비아에 무사히 도착한 뒤 그해 12월 25일에 교황 요한 8세의 주관하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자,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는 샤를 2세를 지원하는 베르가모 백작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고 루트비히 2세는 서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처남 보소를 이탈리아에 두고 이탈리아 총독이자 프로방스 백작으로 임명한 후 급히 갈리아로 돌아갔다. 이후 아헨과 쾰른을 공략하고 동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루트비히 2세가 라인강을 건너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고 강을 도하했다가 루트비히 2세에게 참패하고 파리로 달아났다. 루트비히 2세는 몇달 후인 876년 8월 28일에 사망했고, 세 아들 카를로만, 루트비히 3세, 카를 3세가 아버지의 영지를 분할했다. 한편 바이킹들이 센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생드니 수도원을 위협하자 은화 5,000파운드를 바치고 물러나게 했다. 이후 영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그들이 대규모 영지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877년 6월 말 아내 리실드와 소수의 가신들과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어간 그는 베르첼리에서 교황 요한 8세와 접견했다. 그 동안 카를로만은 상당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브래너 고개를 통과하여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보소를 포함한 영주들은 바이킹들의 침략이 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속히 이탈리아로 오라는 샤를 2세의 명령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귀국하다가 877년 10월 6일 브리데레벵에서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숙부의 사망 소식을 듣게된 카를로만은 이탈리아인들의 추대를 받고 이탈리아 왕이 되었지만 프로방스 만큼은 그대로 서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고, 샤를 2세의 아들 말더듬이 왕 루이 2세가 즉위했지만 재위 2년만에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들인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가 각각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 아키텐을 각각 분할 상속하였는데, 이는 프로방스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백작이자 이탈리아 국왕이자 서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의 사위였던 보소 5세의 야심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6.4. 하 부르군트
879년 4월 말더듬이왕 루이 2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보소는 그의 어린 두 아들의 후견인을 자처하였다. 그러나 서프랑크 왕국의 혼란을 이용, 보소는 879년 7월 론강과 사온느 강 주변의 일부 주교들로부터 축성, 세례를 받았다. 10월 15일 아를, 오툉, 아비뇽, 본느, 브장송의 6개 지역 대주교와 17명의 주교들을 소집하고 스스로 프로방스와 부르군드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영지는 프로방스, 부르군트와 론 강의 남쪽 일대, 그리고 제네바 호수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지역이었다.

살롱, 디종, 제네바, 그르노블, 랑그르, 로잔, 리옹, 마콘, 마르세유, 트루아, 발렌시아, 비엔나, 타렌타이즈(Tarentaise), 토레네(Tonnerre) 등의 주교와 성직자들은 옛 부르군트 왕국을 복원하겠다는 그의 뜻에 동조하여 그를 지지하였다. 보소는 곧 비엔나와 갈리아 지역에서 저명한 법률가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법관으로 삼았다.

이때 보소의 측근들은 혼란상태인 이탈리아의 왕관을 보소에게 수여하려 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네스 8세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880년 7월 보소는 컨피던스 수도원장 길리온 드 투르뉘(Gilon de Tournus)를 랑그르의 백작 주교로 임명한다.

루이 2세 사후 아버지의 영토를 남북으로 나눠서 다스리기로 한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 형제는 880년 아미앵에서 군사를 일으켜 보소를 공격하였다. 880년 6월 루이 3세와 샤를로망 형제와 만나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 그는 881년 8월부터 11월까지 비엔나에서 루이 3세, 서프랑크의 샤를로망 형제 및 동프랑크의 카를 3세의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다. 루이 3세, 샤를로망 형제 및 비만왕 카를 3세의 비엔나 공격은 실패했지만, 보소의 군대는 전쟁 도중 도주했고 그의 영지인 오툉, 브장송, 샬롱, 마콘 등을 점령했다. 이어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형제는 보소의 영역 북부를 공격했고 이어 동프랑크의 카를 3세 비만왕도 이들에게 합세했다.

보소 드 프로방스는 황제였던 자신의 장인 이탈리아인 루트비히가 자신을 후계자로 내정했다며 황제관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882년 8월 보소의 군대는 루이 3세, 서프랑크의 샤를로망 형제 및 동프랑크의 카를 3세의 연합군에 의해 비엔나에서 포위당한 뒤 최종 격파당한다. 882년 8월 보소의 군대는 루이 3세, 서프랑크의 샤를로망 형제 및 동프랑크의 카를 3세의 연합군과 교전할 무렵, 비엔나에 남아 있던 보소의 두번째 부인인 이탈리아의 이르멘가르트와 아들 맹인왕 루트비히는 보소의 친동생인 리샤르 정의공 의 항복 회유로 그해 9월 비만왕 카를 3세에게 넘겨지기도 했다.

보소는 887년 1월 10일에 사망하고 그의 영지는 비만왕 카를 3세에게로 넘어갔다가 이는 보소가 죽자 후계자인 루트비히의 나이가 어려 권력이 불안하였다. 혼란을 틈타 하부 부르고뉴(아를 지방)은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귀족들이 독자적으로 치안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섭정으로는 어머니 이르밍가르트와 친 삼촌 정의공 리샤르 오툉이 그를 대신하여 왕국을 다스렸다.

루트비히의 어머니 이르밍가르트는 프로방스의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러나 삼촌 리샤르 오툉은 그를 보호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결국 이탈리아의 이르멘가르트는 자신의 5촌 아저씨이자 외삼촌이기도 한 동프랑크의 비만왕 카를 3세에게 아들 맹인왕 루트비히의 보호를 요청했고, 비만왕 카를은 흔쾌히 수락하고 동시에 맹인왕 루트비히의 후견인이 되고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그에게 비엔나 백작의 작위도 내려주었다.

그러다가 888년 11월 카를 3세가 조카 아르눌프가 주도한 제국회의에서 폐위되자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르눌프는 그가 아르눌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봉신이 될 것을 인정하자, 아르눌프는 890년 루도비쿠스를 아를, 프로방스 그리고 부르고뉴의 왕으로 인정해고 보호해 주었고, Visio Karoli Grossi를 작성하여 그를 카롤링거 왕가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랭스의 대주교 풀크에 의하면 901년 그가 황제로 즉위한 뒤에,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작성했다고도 한다.

그의 누이 윌라는 상부르군트의 왕 루돌프 1세와 결혼했고, 루도비쿠스 맹인왕은 다시 상부르군트의 왕 루돌프 1세의 딸이자 조카딸인 아델라이드와 결혼했다. 루돌프 1세의 누이인 아델라이드는 그의 숙모로, 루도비쿠스의 삼촌 리샤르 오툉의 아내였다. 루돌프의 딸 윌라는 다시 그의 먼 인척인 토스카나의 보소와 결혼했다. 898년 그의 여동생 엔젤베르그는 아키텐 공작이자 리옹 공작, 마콘 백작인 윌리엄 경건공과 결혼, 동맹을 얻게 된다.

889년 사라센인이 프로방스의 프락시네툼(Fraxinetum, 현 프락시네(Fraxinetum))에 요새를 건설하고, 프로방스의 해안가를 약탈하는 사라센인 해적들과 교전하였다. 889년 5월 루도비쿠스는 어머니 이르밍가르트와 동프랑크의 아헨으로 가 아르눌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돌아왔다. 다시 894년 루도비쿠스는 동프랑크로 가 아르눌프에게 충성을 약속하고 봉신이 되었다. 890년 발랑스(Valence)의 프로방스의 가톨릭 성직자 회의에서 그를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의 국왕으로 선출,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루도비쿠스는 치세 동안 내내 사라센의 침입에 맞서 싸워야 했다. 896년 프로방스의 남부 해안가로 쳐들어온 사라센인 해적과 교전하였다. 898년에는 프락시네트 해변가로 올라오는 사라센 군사를 맞아 교전하였다. 같은 해, 루도비쿠스는 아키텐을 방문했는데, 루도비쿠스의 여동생 엔젤베르그(Engelberge)는 아키텐의 공작이자 레온, 마콘(Mâcon)의 백작인 경건한 윌리엄과 결혼하였다. 루도비쿠스는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6세의 딸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그의 전임자들을 대하듯 그를 프랑크인의 황제로 여겼지 로마 황제로 간주하기를 거부했다.

905년 이브레아의 후작 아달베르토 1세가 루도비쿠스의 이탈리아로 초청했다. 905년 7월 그는 다시한번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는데, 파비아에서 베렝가리오의 군사를 물리치고 베로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이에른 군대의 도움을 받은 베렝가리오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베로나 시내에서 베렝가리오의 군사에게 위치가 노출된 그는 성 페트로의 교회의 성소 안에 숨었지만, 붙잡혀 베로나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905년 7월 21일 그는 서약을 깬 죄목으로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고 (그래서 그의 별명이 맹인왕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황제의 지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것이 카롤링거 왕조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하려고 시도한 것이었고 실패로 끝났다. 베렝가리오는 그가 다시는 이탈리아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를 풀어주었다.[7]

프로방스의 당시 수도인 빈으로 돌아온 루도비쿠스는 그후로도 몇 년간 프로방스를 통치했지만, 911년 이후 사실상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실권은 루도비쿠스의 매제이자 먼 친척으로 할머니 리첼디스의 조카손자였던 아를의 백작이자 비엔나 백작인 위그에게 있었다. 위그는 할머니 리첼디스의 친정오라비 훅베르트의 손자였고, 루도비쿠스의 여동생이자, 상부르군트의 왕 루돌프 1세의 미망인이었던 윌라와 결혼했다. 루도비쿠스는 무력해졌고 프로방스 지역 영주들과 귀족들의 이런저런 요구에 저항하지 못했다.

911년 루도비쿠스는 위그를 프로방스 후작에 임명했다. 924년 루도비쿠스의 여동생 윌라가 죽은 뒤에도 위그는 재혼하지 않고, 프로방스에서 정치적 실권을 행사했다. 크리스찬 스테파니에 의하면 귀족들의 요구에 저항할 수 없었던 루도비쿠스가 위그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장님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로마 황제라 칭하고, 행동에 있어서 로마 황제로서의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였다.

루도비쿠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924년 이탈리아 북부의 귀족들의 초빙을 받은 상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가 이탈리아의 왕위를 차지했는데, 아들인 샤를 콘스탄티누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28년 아를의 위그에게 지위를 양도하였다. 한편 프로방스의 섭정이자 후작인 위그 역시 루도비쿠스가 살아있던 926년 7월 9일 이탈리아 왕으로 추대되었다. 루도비쿠스는 928년 7월 5일 프로방스의 아를에서 사망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루도비쿠스의 사망과 함께 하 부르군트이자 프로방스의 왕까지 겸하게 된 위그는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프로방스를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928년 9월, 위고는 부르고뉴에서 프랑스의 라울과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 2세를 만났고, 위고는 샤를 콘스탄틴에 대항하여 헤르베르트의 아들 오도를 비엔나 백작으로 임명했다. 위고는 여전히 부르고뉴 왕 루돌프 2세와 갈등을 빚고 있었고 부르고뉴 왕가에 대항하여 프랑스 왕과 동맹을 맺기를 원했다.

그러나 930년에 이르러 샤를 콘스탄티누스는 비엔나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931년에는 프랑스 왕 라울이 비엔나와 리옹에 대한 종주권을 요구하였다. 부르고트에서 이러한 정책이 실패하자 위고는 이탈리아에 통치를 집중하고 로마 왕좌를 얻는 데 집중했다. 그는 이탈리아 귀족들에게 그의 아들 로타리오 2세를 차기 왕으로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931년 4월에 그에게 대관식을 거행했다.

같은 해에 토스카나 변경백 람베르토가 자신을 배신할 음모를 꾸몄다는 명목으로 토스카나 변경백의 칭호를 박탈하고 자신의 동생 보소네를 임명했다. 그러나 위고가 람베르토를 폐위시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람베르토는 마로치아와의 결혼 생활에 걸림돌이 되었다.

마로치아는 교황 세르지오 3세의 정부로 이후 두 번째 남편인 토스카나 변경백 귀도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 명의 교황을 자기 입 맛대로 갈아치울 정도로 교황청을 휘어잡고 있었다. 하지만 929년 남편 귀도가 사망한 뒤 적절한 남편을 물색하다가 아를 백작이었다가 이탈리아 국왕이 된 위그와 결혼하기로 했다. 위그는 로마와 그녀와 결혼하면 로마와 토스카나를 손아귀에 쥘 수 있을 거라 여기고 곧장 로마로 향했고[25], 이때 람베르토를 토스카나 변경백 작위를 박탈한 것이었고, 산탄젤로 성에서 마로치아와 결혼식을 거행했다. 랑베르트의 지지자들은 부르고뉴의 왕 루돌프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933년 위그는 상 부르군트의 루돌프 2세에게 프로방스(하 부르군트)를 양도한다. 이로써 고지와 저지 부르군트가 통일되고 아를 왕국이 세워진다.
6.5. 상 부르군트⇒통합 부르군트 왕국(아를 왕국)
상부르군트는 부르군트가 855년 프륌 조약으로 상·하로 분리되면서 로타링기아 왕국에서 속했다.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는 상 부르군트를 통치할 인물로 발루아 백작 보소 장로공의 아들인 헤르베르트를 상 부르군트의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후 864년 헤르베르트가 죽자 로타르 2세는 벨프 가로도 불리게될 구엘프 가의 오세르의 백작 콘라트 2세를 상 부르군트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로타르 2세가 서자인 위그를 남기고 사망하자 로타르의 숙부들인 서프랑크 왕국 샤를 2세 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 2세가 1년 간 로타링기아의 분할을 두고 대립하다가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링기아를 동서로 분할한다. 이때 상 부르군트 또한 동서로 분할되어 대부분의 지역들이 동프랑크 왕국으로 귀속되었다. 876년 콘라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루돌프 1세가상 부르군트 공작직을 승계했다.

880년 2월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왕 카를만이 병으로 상속권을 두 동생에게 분배할 때, 청년 루트비히 3세와 비만왕 카를 3세, 서프랑크의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 간에 리베몽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조약으로, 이때 서프랑크 왕국은 루이 2세의 이른 죽음으로 혼란기에 빠진 상태였기에 이 조약에서는 870년 8월 8일 메르센 조약에 의해 분할되었던 로타링기아(로렌)를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 3세가 차지한다고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서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던 상 부르군트의 영토들이 다시 동프랑크 왕국으로 귀속되면서 상 부르군트의 영역들이 회복되었다..

888년 무능했던 뚱보왕 카를 3세가 조카 아르눌프의 주도 하에 열린 제국회의에서 폐위가 결정되면서 기껏 통일되어 가던 카롤링거 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상 부르군트의 귀족들과 교회 성직자들은 성 모리스에서 모여 루돌프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루돌프 1세는 과거 로타르 2 세의 로타링기아 왕국을 손에 넣으려 하려했지만 동프랑크의 아르눌프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그의 영토인 트란스라니아와 서부 프랑슈 콩테 영토에만 만족해야 했다.

888년 봄, 그는 툴에서 아르노알드(Arnaud) 주교에 의해 부르군트와 로타링기아의 왕으로 축성되었다. 루돌프는 선출 직후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동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왕 아르눌프 폰 케른텐은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일단 아르눌프의 소환 요청에 응해 레겐스부르크를 방문, 아르눌프 폰 케른텐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칭신하였다. 루돌프는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브장송을 받았으며, 상부 부르군트의 왕 지위를 인정받는 대신, 로타링기아 영유권은 포기하였다. 그러나 루돌프와 아르눌프의 상호 적대감은 894년까지 직간접적으로 계속되었다.

894년 황제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 때 은밀히 이탈리아의 귀도 3세, 람베르토 2세 부자를 지원하였다. 분노한 아르눌프는 루돌프를 공격, 발레주를 약탈했지만 곧 되돌아가야 했다. 아르눌프는 다시 츠벤티볼트를 보내 루돌프 1세를 공격하게 했지만 실패하였다.

894년 이후에도 그는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요구하였다. 아르눌프는 보름스에서 자신의 서자 츠벤티볼트가 로트링겐의 왕이라 선언하고 츠벤티볼트를 로트링겐의 왕으로 임명하여 내려보냈다.

루돌프 1세는 다른 이웃과의 혼맥을 형성했다. 그의 누이는 부르고뉴 공작(서부 부르군트의 부르고뉴 공작령) 리샤르 정의공과 결혼했다. 리샤르 정의공은 보소 5세의 남동생이었다. 이들의 아들은 후일 서프랑크 왕국의 군주가 되는 라울이다. 루돌프의 딸 아델라이드는 친척이었던 맹인왕 루트비히 3세(하부 부르고뉴와 프로방스의 군주)와 결혼했고, 다른 딸 윌라는 토스카나의 보소와 혼인했다.

911년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두고 동프랑크의 왕 프랑켄의 콘라트 1세와 서프랑크의 왕 샤를 3세 생쁠(Charles the Simple) 사이에 대립을 이용, 루돌프는 재빨리 바젤지역을 콘라트 1세에게서 빼앗아 왔다. 아날레스 연대기에 의하면 그는 912년 10월 25일 사망했다 한다. 그의 영지는 아들 루돌프 2세에게 성공적으로 계승되었다.

912년 상 부르군트왕 왕위에 오른 루돌프 2세는 베렝가리오 1세의 통치를 반대하는 이탈리아의 일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았으며, 922년 이탈리아를 다스리던 베렝가리오 1세에게 도전하였다. 923년 이탈리아 파비아로 초청되어 롬바르드 왕에 선출되었다. 924년 베렝가리오 1세가 이탈리아의 귀족들에게 축출되면서 루돌프를 왕으로 받드는 일파들의 추대를 받아 롬바르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반군과 맞섰으나 살해됐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왕위에 오른 그도 프로방스 왕인 우고에게 이탈리아 왕 자리를 다시 빼앗기고 부르고뉴로 축출되었다.

932년 토스카나 변경백이었으나 마로치아와 결혼하기 위해 우고에 의해 폐위된 람베르토의 추종자들이 그의 궁정에 찾아와 람베르토의 복위를 도와주면 다시 이탈리이 국왕으로 복권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했으나 933년 우고는 루돌프 2세에게 자신이 이탈리아 국왕임을 인정해주는 대신 프로방스(하 부르군트)를 양도하겟다는 제안을 해오자 람베르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하 부르군트를 얻는다. 이로써 고지와 저지 부르군트가 통일되고 아를를 수도로 하는 아를 왕국이 세워진다.

937년 루돌프 2세는 사망하고 아들인 콘라트가 로잔(Lausanne)에서 부르군트의 군주로 선출되었다. 아를의 위그는 루돌푸스 2세 사후 그의 왕국을 차지하고자, 그해 12월 12일 슈바벤의 베르타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독일 왕국의 오토 1세의 개입으로 아를의 위그의 부르군트 장악 계획은 무산되었다. 938년 오토 1세는 군사를 이끌고 아를로 가 콘라트 3세가 계승자라고 선언하였다. 오토 1세에 의해 독일의 의회로 소환된 콘라트는, 오토 1세에 의해 서프랑크의 왕 루이 4세와 작센의 게르베르가의 딸이자 오토의 외조카 서프랑크의 마틸다와 결혼하였다.

그의 통치기간 중 939년 사라센이 부르고뉴의 북쪽으로 기습, 발레주의 하 발레에 있는 성 모리스 수도원을 약탈해갔다.

콘라트는 오토 1세의 서프랑크 왕국 원정에 처음 동행, 출정하였다. 그의 장인 서프랑크 왕국의 루이 4세는 그가 나이 어린 점을 이용, 부르군트를 수복하려 하였으나, 오토 1세에 의해 저지당한다. 오토는 콘라트를 보호하여 제국의 남부 지방으로 보냈고, 후일 오토 1세가 이탈리아를 원정할 때 동행하였다. 이탈리아 근처에서 콘라트는 프로방스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일단 아를의 위그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콘라트는 비엔나, 리옹, 아를의 대주교관구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콘라트는 나중에 수도를 비엔나로 정하고, 부르군트의 통일 왕국(트란스부르군트, 시스주네 부르군트, 프로방스)의 왕으로 공인되었다.

950년 이탈리아의 로타리오 3세가 의문의 독살을 당한 후, 그의 누이 아델라이드가 베렝가리오 2세의 핍박을 받고 감금되었다. 콘라트는 오토 1세의 951년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정복과 아델라이드의 결혼식에 동행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오토 1세는 다시 콘라트의 아버지 루돌푸스 2세가 930년경 인수한 상부 부르군트의 권리를 공식 승인하였다.

성 갈렌 수도원의 수도사 에케하르트 4세(Ekkehard IV)가 기록한 야사에 의하면 그의 치세기간 중에 마자르족과 프락시네툼의 사라센 인이 쳐들어왔다고 한다. 콘라트는 이들 침략자들에게 첩자를 보냈다. 첩자들은 각 침입자들에게 부르군트어와 편의 시설을 제공했고, 이들 첩자들은 다시 부르군트로 돌아와 이들의 위리르 알렸다. 부르군트 인들은 마자르 족과 사라센 인이 서로 교전하다가, 양측의 손실이 커지자 바로 마자르 족, 사라센 인들을 공격하여 포로들을 사로잡았다. 사로잡은 포로들은 노예로 팔았다 한다. 975년에 콘라트는 프로방스에서 무슬림 군대를 최종 축출했다.

첫 결혼은 963년 3월 23일 벨리(Bellay)의 아델라이드(Adelaide, 966년 사망)라는 여성과 결혼했는데, 아들 쿠노는 일찍 요절했고, 딸 마틸다는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의 손자이자 오토 1세의 조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와 결혼했다. 첫 부인 아델라이드는 일설에는 앵글로 색슨 왕국의 에드워드 장로왕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966년 서프랑크 왕국의 루이 4세 해외왕과 게르베르가 폰 작센의 딸 마틸다 드 서프랑크와 결혼, 베르타, 마틸다, 루돌프 3세,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와 결혼한 게르베르가 폰 부르고뉴 등을 두었다. 첩인 알디우드(Aldiud)에게서는 리옹 대주교 부르크하르트를 낳았다.

치세 후반기인 979년 프로방스후작 기욤 1세의 도전을 받았다. 부르군트의 오토-윌리엄은 콘라트의 종주권을 거부하고, 분리독립을 기도하였다. 콘라트는 993년 10월 9일에 사망하여 비엔나의 성 안드레아 바스 수도원(Saint-André-de-Bas)에 안치되었고, 그의 아들인 루돌프 3세가 아를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10세기 중반부터 부르군트의 백작들은 점점 더 왕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왕들에게 예속되어 봉신이되거나 이중 봉신 계약을 맺었다. 부르고뉴 왕들은 오토 왕조의 통치자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지원 부족을 보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몇 번의 결혼을 통해 그 유대는 강화되었으나 이는 부르군트 내에 오토 왕조의 입지만 강화시키는 결과로 돌아왔다.

루돌프 3세는 론 강 중부의 땅에서 제네바 호수 주변 지역까지만 효과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루돌프가 권력을 잡은 직후 왕권 강화를 위해 백작들의 영토를 몰수를 시도한 것으로도 지역 귀족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그는 전쟁에서 반란군들에게 패배했고, 오토 3세와 그의 어머니이자 루돌프 3세 본인의 누이인 아델하이트의 지원이 있어야만 그의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루돌프는 35개 교구 중 17개 교구에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부르고뉴 최초의 왕으로서 루돌프는 주교에게 백작령을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996년 루돌프는 타렌테즈 안팎의 백작령을 타렌타이즈 대주교에게 양도했고, 999년 시옹 주교는 발레 카운티를 받았냈다.
6.6. 서프랑크령 부르고뉴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 분할되었을 때 부르군트 또한 동서로 분할 각각 서프랑크와 중프랑크 왕국으로 귀속되어고, 서쪽 지역인 손강 이서 지역들이 서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분리되면서 형성되었는데, 9세기 말까지 이지역을 통치한 제후들에 대한 기록이 전무했다. 그러다가 879년 아르덴 백작 고르제의 장남으로 마콩과 샬롱, 오퉁의 백작직을 얻게 된 보소 5세가 879년 루이 2세가 죽고 어린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가 즉위하자 프로방스인들의 지지를 받고 독립해 프로방스 왕을 칭했다. 다만 그의 동생인 리샤르는 형의 편을 들지 않고 서프랑크의 두 공동왕들과 동프랑크의 카를 3세와 함께 형을 공격해 882년 비엔나에 있던 형의 처자식들의 신원을 확보한 후 카를 3세에게 넘겼다.

이러한 공로로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는 리샤르에게 오퉁의 백작직을 수여했고, 887년 보소가 죽자 그의 아들인 루투비히의 섭정으로 루트비히의 어머니인 이탈리아의 이르멘가르트와 함께 리샤르 또한 섭정으로 지목했으나 리샤르는 섭정직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 888년 부르고뉴까지 남하해 약탈하던 바이킹 무리들을 오세르 주교와 같이 협공해 격퇴한 공로로 오세르 백작이 되었고, 890년 아키텐 공작인 경건한 기윰으로부터 느베르 백작령을 매입해 겸했다.

894년 트루아 백작 아달라메가 푸아티에 백작령인 아우릴락을 공격하다가 생포되어 트루네에 포로로 있던 중 사망하자 트루아 백작령을 병합했고, 895년에 센스 백작 등을 겸했다. 898년 바이킹 약탈자들이 다시 부르고뉴로 약탈해 오자 아르장퇴유 쉬르 아르망송에서 생 플로랑탱 사이에서 다시 바이킹들을 격퇴 후 센 계곡으로 몰아 넣는다. 이때의 공로 리샤르는 부르고뉴의 변경백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918년 변경백에서 공작으로 승격되었고, 921년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공작직인 장남인 라울에게 승계되었다.

부르군트의 공작이 된 라울은 얼마 안가 네우스트리아의 변경백이자 파리 백작인 로베르 1세의 딸 엠마와 결혼했고, 그는 혼란스러운 서프랑크 정세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1년뒤인 922년 6월 29일그동안 샤를 3세의 로트링겐 귀족들에 대한 우대로 푸대접을 받게된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키면서 로베르를 왕으로 추대했고, 라울은 장인을 지지해 1년 뒤 수아송에서 장인과 함께 수아송에서 샤를 3세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샤를 3세가 생포되었지만 장인이었던 로베르 1세가 사망하면서 라울은 아직 젋은 처남인 위그 르 그랑으로부터 서프랑크 왕위를 양보받아 서프랑크 국왕이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부르고뉴 공작이 된지 2년만에 공작직을 동생인 흑공 위그에게 양보했다. 936년 라울이 사망한 후 위그는 그의 형을 따라 왕위에 오르려는 열망을 가졌을 수 있으며 외가인 잉글랜드로 망명하다가 귀환한 루이 4세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루이는 위그 르 그랑을 보내 오세르(Auxerre)와 상스(Sens)를 점령하게 했고, 결국 흑공 위그는 루이 4세에게 굴복해야 했다.

위그 흑공은 결혼 여부와 자녀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952년 사망하면서 위그 르 그랑이 부르고뉴에서 종주권을 행사했고, 행정 실무는 오툰과 샬롱, 본의 백작이었던 봉신 질베르 드 샬롱이 총독으로서 맡았는데, 이때 위그 르 그랑의 차남인 오통과 자신의 딸 중 한명인 리에가르드를 약혼시켰고, 다른 딸인 아델라읻 또한 카롤링거 왕가의 방계이자 위그 르 그랑의 고종사촌인 모의 로베르 1세와 혼인했다.

956년 길베르가 부화절 기간 사망했다. 트루아는 모의 로베르가 가져갔고, 부르고뉴만이 남았으나 본래라면 사위인 위그 르 그랑이 아들이자 사위인 오통의 부르고뉴 공작직을 상속받아야 했지만 위그 르 그랑 또한 얼마 안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오통의 부르고뉴 상속이 불투명해졌다.

권신인 로베르 가와 악가정이 있던 카롤링거 왕가는 아직 미성년자였던 위그 르 그랑의 장남인 위그 카페에게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의 모든 봉신들에게 봉신 맹세를 풀어주는 대신 위그 르 그랑이 갖고 있던 모든 지위의 승계를 인정해 주겠다는 정치적 거래를 제안, 위그 카페와 그의 어머니인 작센의 하드윅이 요구를 들어주는데, 오통의 부르고뉴 공작직 승계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로테르는 카롤링거 왕조의 직영지를 확장하기 위해 여러번 군사를 일으켜 주변 귀족들의 봉지를 무력으로까지 병합하려는 시도를 했고, 부르고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오통은 라울 왕 이후 왕실 세무서의 일부였던 디종을 점령했습니다. 958년에 그는 디종 백작 로돌프를 선동하여 본느 성(Château de Beaune)을 탈취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아내 리에트가르드를 납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섭정으로 서프랑크에 파견된 쾰른의 브루노가 위그 르 그랑의 상속자들과 왕 사이의 갈등을 종식시킨 960년에야 오통은 로타르 왕에 의해 부르고뉴 공작으로 인정 받았으나 5년 뒤인 965년에 사망하고 만다. 그의 권좌는 막내 동생인 외드 앙리가가 승계하게 되었다. 다만 이때 부르고뉴 또한 봉건제가 심화되면서 외드 앙리가 직접적으로 통치할 수 있던 곳들은 백작령 3개 뿐이었고, 나머지는 외드 앙리를 따라온 봉신들이 차지했다.

972년, 앙리는 이탈리아 왕 아달베르트 2세의 미망인인 게르베르주 드 마콩과 결혼했다. 게르베르주는 전 남편 아달베르트 2세와의 사이에서 오통 기윰이라는 아들을 낳은 상태였다. 987년 5월 루이 5세는 주교 아달베롱의 반역죄를 추궁하려는 재판을 하려는 중에 승마를 하다, 상리스 근처 오이세의 알라떼 숲에서 말에서 떨어져 낙마 사고로 죽었다. 친동생인 랭스 백작 외드는 그보다 앞서 986년에 먼저 사망한 상태였기에 서프랑크계 카롤링거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루이 자신에게는 적법한 후계가 없었고 카롤링거 왕조의 후손중에는 하 로렌로타링기아의 공작 샤를, 루이의 서제인 아르눌프가 있었으나 샤를이 당시 여러 가지 점들에서 서프랑키아 귀족들의 불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977년 무고한 왕비를 간통으로 고발하는가 하면 동프랑키아의 오토 2세와 협력하여 선왕인 로테르의 왕권을 위협하고 왕위 찬탈을 꾀하기도 했다.이러한 이유로 서프랑크 왕국의 여러 제후들이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를 국왕을 선출해 카페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서프랑크의 제후들과 주교들이 위그 카페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세운 것 자체가 그가 허수아비 왕이 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960년대 위그 카페는 로테르에게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기 위해 네우스트리아의 봉신들의 계약을 해지했기에 네우스트리아 변경백령은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서프랑크 제후들 중 과거 옛 봉신이었던 블루아 백작 외드와 베르망두아와 트루아와 모 지역의 백작들인 카롤링거 왕가의 방계인 베두망두아 백작가, 그리고 처가인 아키텐 공작들은 카페 왕조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적대적인 입장이었던 반면 위그 카페의 동생이었던 부르고뉴 공작인 외드 앙리는 루앙 백작[26], 앙주 백작과 함께 서 프랑스 내의 제후들 중 몇 안되는 지지 세력을 형성했다.

이때 아내인 게르베르주가 사망했다. 둘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에 외드 앙리는 992년 가스코뉴 공작 기윰 산체의 딸 게르센다와 재혼 전후로 부르고뉴 내의 교회 문제에 대해 어려 차례 개입하거나 교회와 수도원에 기부를 하는 것 외엔 무난하게 지냈으나. 두 번째 결혼으로 적자를 얻는데 실패했고, 결국 전부인이 데리고 온 의붓 아들인 오통 기윰을 대자로 삼아 부르고뉴 공작령을 상속할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7. 서고트 왕국(툴루즈 왕국) ⇒ 프랑크 왕국령 아키텐 및 툴루즈 백작령과 바스코니아 공작령
7.1. 서고트 왕국령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상태에서 훈족 아틸라와의 전쟁으로 서로마로부터 가스코뉴에 정착하고 있던 서고트 왕국 에우리크 치세하에 구 서로마 제국령에서 가장 강력한 게르만족 계통의 왕국으로 현재의 프랑스 남부와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인 히스파니아 서북부의 수에비 왕국과 바스크 지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부르군트 왕국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왕국 역시 서고트 왕국에 한 수 접어야 했다. 이때 서고트 왕국은 수도를 툴루즈로 정했기에 툴루즈 왕국으로도 불렸다.

피레네 산맥 이북에 위치한 현재의 프랑스 남부의 지역들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서유럽 내에서 로마의 문화가 짙게 남아 있던 곳이었다. 특히 고트족들 자체가 다른 게르만족들에 비해 로마 문화에 대한 동경심이 남달리 컸던 터였기에 자신들의 세력하에 있던 라틴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좋은 대접을 했고, 서로마의 행정 시스템 또한 고스란히 모방했다.

484년 에우리크가 자연사한 후 아들 알라리크 2세가 즉위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입지는 탄탄했다. 에우리크의 정복 전쟁으로 히스파니아 대부분과 남부 갈리아를 석권했으며, 로마 제국이 건재하던 시기 우수한 밀 생산지로 정평났던 프로방스 일대는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귀속된 후에도 여전한 생산력을 보여 국가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또한 로마 가도는 이 시기에도 건재하여 원활한 물자 운송을 가능케 해주었기에 활발한 상업 활동과 대외무역이 이뤄졌다.

그는 이러한 왕국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피레네 산맥의 통행을 보장하고 히스파니아 일대를 통제하기 위해 에흐-슈흐-라두흐(Aire-sur-l'Adour)에 별도로 궁전을 세웠으며, 오도아케르를 꺾고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한 뒤 강성해지고 있는 동고트 왕국 테오도리크 대왕과 동맹을 맺기 위해 대왕의 딸 테오데고타와 결혼하여 아들 아말라리크를 낳았다.

알라리크 2세는 아버지 에우리크와 대다수 서고트 귀족들처럼 아리우스파였지만, 정교 신자들에 대한 에우리크의 박해 정책을 중단하고 시게리우스가 아를의 주교로 선임되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로마인과 고트인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법전을 만들고자 아니아누스가 이끄는 법전 편찬 위원회를 설립해 로마법과 고트법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은 배제한 신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506년 2월 2일에 반포된 법전은 <브레비아리움 알라리키아눔(알라리크의 서약서)>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갈리아 북부에서 프랑크 왕국의 세력이 급격히 신장하면서 평온했던 왕국에 전운이 감돌았다. 481년 왕위에 오른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는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로마계 군벌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했다. 시아그리우스는 전장에서 탈출한 뒤 알라리크 2세에게 귀순했다. 이에 클로비스 1세가 시아그리우스를 내놓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자,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그는 시아그리우스를 프랑크 왕국에 넘겨줬고, 시아그리우스는 곧바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클로비스 1세는 갈리아 북동부의 튀링겐족들을 제압, 라인 강 상부와 중부에 부르군트족과 알란족을 제압했고, 랭스에서 부하 3쳔명과 함께 정교로 개종해 , 로마 교회와 갈리아 현지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제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은 서고트 왕국과 국경을 마주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서고트 왕국 내의 정교 신자들은 클로비우스에게 귀순하기를 희망했다. 비록 알라리크 2세가 그들에게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서고트 왕국 수립 이래 수십 년간 천대받았고 에우리크 치세 때 가혹한 박해를 당했던 그들이 그 정도로 회유될 리 없었고, 각지에서 서고트 왕국의 지배에 반항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506년 루아르 강 중류의 한 섬에서 클로비스 1세와 만나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낭트, 앙제, 투르, 오를레앙을 프랑크 왕국에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들은 루아르 강 하류에 위치한 주요 도시였는데, 주민들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서고트 족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었다. 알라리크 2세는 아마도 통제가 안 되는 이 땅을 프랑크 왕국에게 넘겨주면서 전쟁을 모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클로비스 1세는 불가침 조약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르군트 왕국의 군주 군도바트와 군사 동맹을 주선했다. 이는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위인 알라리크 2세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걸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부르군트 왕국에 맡기려는 계획으로 추정된다. 이후 507년 2월이나 3월 초에 프랑크 왕국 전역에 군대 동원 명령을 내렸고, 이른 봄에 루아르 강을 건너 아키텐으로 진격했다. 알라리크 2세는 프랑크군이 조약을 깨고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푸아티에에 군대를 집결했다. 양군은 507년 8월 부이예 평원에서 결전을 치렀다.

부이예 전투는 서고트 왕국의 재앙이었다. 고트군은 프랑크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밀려 섬멸되었고, 알라리크 2세는 전사했다. 프랑크군은 여세를 몰아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전역을 휩쓸었고,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툴루즈도 함락하여 왕실의 숱한 보물을 노획했다. 클로비스 1세는 내친 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 했지만,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절을 보내 그러지 말라고 권하자,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부이예 전투 직후, 서고트 귀족들은 알라리크 2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아말라리크는 아직 어려서 난국에 처한 왕국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알라리크 2세의 사생아였던 게살레크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프랑크군에 의해 함락당한 툴루즈 대신 나르본을 새 수도로 삼았다. 얼마 후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은 부르군트 왕국군이 나르본을 함락시켰고, 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로 도피해 그곳을 새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부르군트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를 공격하자, 그는 이에 맞섰으나 참패당하자 히스파니아 내륙으로 도주했다.
7.2. 프랑크 왕국령
프랑크 왕국에 병합된 피레네 이북 지역들은 602년에 아키텐과 가스코뉴에 아키텐 공국과 가스코뉴 공국을 두었고, 629년 히스파니아의 서고트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툴루즈 왕국(Royaume de Toulouse)이란 괴뢰국을 세웠다. 그러다가 얼마 안있어 툴루즈는 프랑크 왕국 휘하 공령으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서고트족과 달리 프랑크족들은 도시생활 및 국가 운영에 대해 미숙했기 때문에 이지역들에 대한 통제권이 미약했다.

555년 전후로 클로타르 1세는 자신의 아들이 크롬을 아키텐의 독스로 임명했지만 560년 크롬은 자신의 처가와 함께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584년 클로타르 1세의 서자인 군도발두스가 아키텐에서 왕으로 자칭하고, 갈리아 남부 지역을 획득하였으나, 부르군트의 영역이던 푸아티에와 툴루즈를 공략하던 중 부르군트의 군트람에게 패하고 축출되었다. 그는 코맹주(Comminges)로 피신했다 한다.

군트람은 그의 영지를 병합하고 587년 오스트로발트(Austrovald)를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 파견하였다. 602년 서고트, 바스크인에 대한 침공을 대비할 목적으로 가스코뉴 지역이 공작령으로 분리되었다. 613년 클로타르 2세가 브룬힐트의 섭정통치를 못마땅히 여긴 피핀 1세, 아르눌프 등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과 내통, 브룬힐트를 처형하고 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하고 다시 프랑크 왕국 산하로 들어왔다.

629년 클로타르 2세는 자신의 아들 중 한명인 카리베르 2세를 아키텐 왕에 임명되었지만 곧 클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네우스트리아인들은 아우스트라시아 왕인 다고베르 1세가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에 반감을 품고 카리베르 2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카리베르 2세의 외삼촌 브로둘프가 이 계획을 주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다고베르는 그들이 미처 왕을 선출하기 전에 재빨리 행동했다.

모든 아우스트라시아 측근들에게 스스로 무장하도록 한 뒤 부르군트와 네우스트리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친히 랭스를 거쳐 수아송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귀족과 주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가 이렇듯 신속하게 움직이자,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다고베르 1세는 브로둘프를 처형했지만, 어릴 때부터 신체가 허약해 오래 살지 못할 게 분명한 카리베르 2세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 그는 다고베르 1세의 예상대로 재위 3년만인 632년에 병환 내지는 바스크족의 침략 때 살해되었다. 이에 아키텐의 귀족들이 카리베르의 아들인 킬페리크를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곧 프랑크 왕국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다고베르 1세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귀족들이 제압하면서 폐위된 후 처형당했다.

다고베르 1세는 아키텐과 가스코뉴를 차지하려 하였지만, 아키텐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카리베르의 다른 아들인 보기스를 내세웠다. 그는 660년경 또는 670년 이전에 사망하였고, 그의 사후 아키텐은 그를 견제하려던 메로빙거 왕가에 의해 다른 파견관리들로 대체되었으나, 보기스의 아들인 외드가 688년 아키텐의 공작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미 궁재인 피핀 가문에 꼭두각시로 전락한 왕가에 충성할 의지가 없어진 외드는 700년대쯤 왕실에서 파견한 관료 세력들을 굴복시킨 후 아키텐의 실권을 장악한 후 714년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외드는 사라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슬람 군대는 아키텐을 침략했고 그는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했다. 714년 궁재 피핀 2세가 어린 손자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이때를 틈타 독립을 기도하였으나, 5년 만인 719년 카를 마르텔에게 굴복했다.

715년 외드는 프랑크 왕국에서 내전이 한창일 때 다시 독립을 선언하였다. 718년에는 바스크족을 이끌고 프랑크 왕국 본토를 침공하였다. 그해 네우스트리아의 킬페리크 2세 궁재 라감프리드(Ragenfrid)는 그의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해 아우스트라시아의 카를 마르텔이 바스크족 군사를 궤멸시키면서 그도 수아송에서 카를 마르텔에게 항복하게 된다. 그는 이후 바이에른의 부족장들에게도 사자를 보내 동맹을 맺는다.

719년 그는 네우스트리아의 킬데베르 2세에게도 아키텐의 분리독립을 지지한다는 조건으로 제휴, 카를 마르텔에 대항하는 레인프로이(Rainfroy)를 지원했지만 719년 10월 14일 네리(Néry)의 생 리스와 수아송에서 카를 마르텔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외드는 살아남은 아키텐 군사 일부를 데리고 루아르강을 넘어 패주하였다.

결국 외드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북쪽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던 우마이야 왕조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721년에는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아키텐, 가스코뉴, 툴루즈의 일부 지역들을 점령되었다. 그나마 툴루즈에서 이슬람 제국의 북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후, 732년 카롤루스 마르텔이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이슬람 군대와 격돌한 끝에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다시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에 따라 외드 역시 카를 마르텔에게 굴복하고 만다.

735년 외드가 사망하자 아들인 후날드 1세가 아키텐과 바스코니아 공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다.741년 카룰루스 마르텔이 사망하고 아들인 피피누스 3세가 궁재 자리를 물려받았다. 공교롭게도 테우데리크 4세가 737년 사망한 이후 왕위가 공석이었기에 후날드는 다음해인 742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와 알레만니아 공작 테우데발트와 동맹을 맺고 피피누스 3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피피누스 3세는 즉각 반란 진압 준비를 시작했다.

피피누스 3세의 군대는 즉각 아키텐 영내에 진입한 후 반란에 대한 응징으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고, 후날드 1세는 도주했고, 피피누스 3세의 군대는 아키텐 주민들을 포로로 잡은 후 루아르 강 이북으로 귀환했다. 피피누스 3세의 군대가 떠난 것을 알게 된 후날드는 루아르 강을 건너 반격하여 샤르트르를 점령하고 그의 동맹인 바이에른 공작 오디로를 지원했다. 피피누스 3세는 743년 테우데리크 4세의 아들 킬데리크 3세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후날드는 피핀 가문에 대항할 수단을 잃어버렸고, 결국 745년 피피누스 3세에게 항복한 후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그의 자리는 아들인 바이페루스가 승계하게 되었다.

아키텐과 바스코니아의 공작 자리를 이어받은 바이페루스는 6년간 겉으로나마 피피누스 3세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751년 피피누스 3세가 교황 자카리아의 묵인 하에 킬데리크 3세를 폐위시켜 메로베우스 왕조를 전복시킨 후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복 형인 피피누스 3세에 의해 사생아로 격하되어 이리저리 떠돌면 자신의 몫을 되찾기 위해 몸부리치던 그리포가 아키텐으로 찾아오자 바이페루스와 그리포는 손을 잡고 바다 건너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피피누스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2년간의 전투 중 성과를 얻지 못했다. 피피누스 3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르고뉴로 왔고, 그들을 따르던 프랑크의 귀족들은 피핀에게 투항하였다. 그리포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753년 프로방스 백작 테오돈과 교전하던 중, 산 지오반니 드 모리아나의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혹은 피핀 3세의 적인 랑고바르드 왕국의 아이스톨프를 만나러 이탈리아로 가던 중, 알프스산맥에서 피핀 3세가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포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페루스는 760년 항복했으나 이후 바이레루스는 교회 토지를 무단으로 몰수한 것에 대한 죄목으로 피피누스 3세에게 공격을 받게 되었고, 아직까지 충성을 맹세한 백작들의 도움을 받으며 피피누스 3세에게 대항했으나 762년 베리와 푸아티에가 공격을 받았고, 부르주가 함락되는 등의 악재가 겹쳐지면서 결국 피피누스 3세에게 굴복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763년 바이레루스는 피피누스에게 아키텐 지방에서 받는 공물을 댓가로 부르주와 다른 아키텐 도시들을 반환해주면 피피누스에게 복종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피피누스 3세는 경고 차원으로 763년에 리무쟁(Limousin)과 쿠에르시(Quercy)까지 아키텐 깊숙한 곳을 습격했다.

다음해인 764년에 열린 샹 드 마이(Champ de Mai)에서 바이레루스는는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와 참석하면서 피피누스 3세의 무례한 대답에 항의했으나 피피누스 3세는 이참에 바이페루스를 제거해 메로베우스 왕조의 흔적을 지워버리기로 결정했고, 결국 바이페루스를 공격했다. 763년에서 766년 사이에 바이페루스는 푸아티에, 리모주, 생트, 페리그, 앙굴렘을 상실했고, 피피누스 3세의 군대는 아키텐과 바스코니아 북부 일대를 무자비하게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이후 부르주 백작인 블란디누스(Blandinus)는 피피누스 3세에게 복종했고, 바이페루스의 가족 대부분은 페리고르(Périgord) 숲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바이페루스 본인 또한 767년 6월 2일 피피누스의 선동으로 추정되는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혹은 추정되는 후날드 2세는 바스코니아 지방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피피누스 3세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둘로 나눠졌고, 이때 아키텐 또한 잠시 카롤루스아키텐의 북서부를 동생인 카를로만이 아키텐 남동부를 나눠 가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날드는 카롤루스의 지배를 받는 아키텐 공작령의 북서부로 귀환해 추종 세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카를로만은 자신의 이복 동생인 카를로만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원조는 묵살되었고, 결국단독으로 직접 군대를 끌고 아키텐으로 진군해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후날드의 반란은 단기간에 끝이 났고, 후날드는 다시 바스코족들에게 도망치려 했으나 측근인 바스크 출신의 볼프가 그를 배신, 카롤루스에게 넘기면서 메로비우스 왕조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아키텐의 반란을 마무리되었고, 카롤루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키텐 공작령에 병합되어 있던 바스코니아 공작위를 볼프에게 수여했다.

반란 진압 후 2년만인 771년에 동생 카를로만이 사망하자 카롤루스는 동생의 가족들을 전부 국외로 추방시킨 후 동생의 영토를 전부 차지했고, 둘로 분할되었던 아키텐 공작령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778년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현재의 툴루즈이 툴루즈 백국으로 개편되면서 떨어져 나갔고, 아키텐의 경우 바스크인들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잠시 왕국으로 개편되어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

그러다가 788년, 툴루즈 백작이 알라릭이라 불리는 지역 지도자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확대된다. 이는 카롤루스에게는 자신의 봉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고,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였던 젤노르의 기윰을 새로운 툴루즈 백작으로 내려보내 대응하게 한다. 그는 790년 알라릭을 제거했고, 뒤이어 바스크족을 압박해 들어갔다.

793년 아브드 알 라흐만 1세(Abd ar-Rahman I)의 후계자 인 히스암 1셉(Hisham I)는 북쪽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히스암은 10만 명명의 군사를 모았는데, 그 중 절반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공격하고, 나머지 절반은 랑그독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나르본까지 꿰뚫었다.

구일렘은 나르본까지 올라온 무슬림 세력을 만나 나르본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아랍 군대의 님(Nimes)의 재정복에 책임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같은 해 그는 오드 강(Aude River)변의 전투에서는 대규모 아랍 군대를 상대로 큰 패배를 당했다.

그는 빌디뉴(Villedaigne)의 오르베이유(Orbieu) 강 근처에서 무슬림 군대를 다시 만나 포위되었으나, 구일렘의 완고한 저항이 무슬림 군대를 너무 소진시켜 스스로 스페인으로 후퇴시켰다.

한편 루도비쿠스는 781년부터 813년까지 그는 주로 궁정 행정관들(궁재들)의 자문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아키텐을 통치했다. 또한, 아키텐의 지역 출신 전임 공작들이 프랑크 왕국에 반항했다가 카를 마르텔과 피핀 3세, 아버지 샤를마뉴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지역의 토호들이 그를 쉽게 다루지는 못하였다. 소년기 무렵 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를 따라 바스크족의 토벌 전쟁과, 분리독립을 시도하려는 아키텐 공국을 진압하는 전쟁에 출정하였다.

791년에는 부왕 샤를마뉴를 따라 레겐스부르크의 원정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잘 관리되고 있던 막대한 토지를 상속받았고 주로 성직자 출신들의 고문관들에게 의존하였다. 794년 샤를마뉴는 아키텐에 아들 루트비히의 저택과 별장을 마련해 주고 현지에 파견하여 원주민들의 의복을 입고, 아키텐 원주민들의 문화에 동화되도록 지시하였다. 797년에 루트비히는 바르셀로나와 코르도바에서 발생한 바스크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되돌아왔다. 이때 루트비히의 다른 형제들인 피피노 카를로만과 소 샤를은 작센족 토벌에 출정하였다.

800년 12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형 소 샤를을 데리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찾아갈 때 루트비히는 아헨의 왕궁으로 소환되었다. 루도비쿠스가 아헨의 왕궁으로 소환되자 아키텐의 실질적 통치는 기윰이 맡게 되었다. 801년 구일렘은 샤를마뉴의 명으로 아키텐의 루도비쿠스와 함께 프랑크, 부르군트, 프로방스, 아키텐 원정에 나섰으며 바스크족이 점령한 가스코뉴 일대와 고트족과 우미야드 왕조가 점령한 바르셀로나 일대를 정복하였다.

801년에 그는 루도비쿠스와 바르셀로나를 점령했고, 그 후 짧은 시간 동안 카탈로니아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비타 흘로도비키 임페라토리스에 의하면 801년 어느 시점에 그는 코르도바에 체류중이었다 한다. 804년 12월 그는 겔론네(Gellone)에 대수도원을 설립하고, 재산을 기부하였다. 806년 후처 구이트부르게가 죽자 806년 6월 29일 구일렘은 자신이 세운 겔론느 수도원에 들어가 삭발, 수도사가 되었다. 아키텐의 통치는 루도비쿠스의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가 맡게 되었다.

800년대 초 카롤루스 대제는 자신의 왕국을 분할하여 루트비히에게는 아키텐과 남부 프랑스를, 소 샤를에게는 네우스트리아와 프랑켄을, 피피노 카를로만에게는 롬바르디아를 유산으로 상속하도록 정하였다. 806년에 카를은 영토분배를 정하고 그에게는 동부 프랑크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810년 피피노 카를로만, 811년 소 샤를과 피핀 곱사등이가 연이어 사망하여 루트비히가 카를 대제의 유일한 적자가 되었으므로, 813년 9월 초 카를에 의해 후계자로 내정되고, 813년 9월 11일 아헨으로 소환되어 후계자 겸 아버지의 공동통치자로서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814년 7월 루도비쿠스는 장남인 로타리우스를 바이에른으로 전봉시키고 대신 차남인 피피누스에게 아키텐을 분배해 줬고 817년 아키텐 분국의 분국왕에 봉했다. 그에게는 아키텐, 툴루즈, 가스코뉴, 셉티메니아의 영지가 주어졌다. 그해 8월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칙령 반포에 의해 확정되었다. 그의 지위는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 및 형 로타르 1세 양자의 권위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또한 황제 후계자이자 공동 황제였던 형 로타르 1세에게도 계속 복종했다.

아키텐에 도착한 그는 유력자였던 가스코뉴 공작 그라시아 1세(Garcia I)와 그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루포 3세(Lupo III)의 호의를 얻으려 노력했고, 자신을 국왕으로 인정해줄 것을 꾸준히 설득하였다. 루포 3세는 피핀을 인정하기를 거절했고, 피핀은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도움을 얻어 루포를 축출했다. 819년 피핀은 툴루즈의 베렝가리오, 오베르뉴 백작 구에리노(Guerino) 등과 함께 가스코뉴를 침공, 루포 3세를 축출하고, 그의 형제 게르산도(Gersando)를 포함, 루포의 지지자들을 체포한 뒤 반역 혐의로 기소, 처형하였다. 곧 루포 3세는 가스코뉴 공작직에서 축출되고, 영지 밖으로 쫓겨났다. 피핀은 가스코뉴 백작직과 툴루즈 백작직을 베렝가리오에게 수여하였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741년과 768년 샤를 마르텔과 피핀 3세의 사후 독립을 시도하다가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그 뒤로도 아키텐의 귀족들은 오랫동안 자치, 분리독립을 염원했고, 피핀은 아키텐의 자치와 분리독립에 찬성하여 아키텐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독립적인 왕국을 원했고 이는 분리독립을 원하던 아키텐 귀족들이 원하던 것이었다. 아키텐에서 그는 어느 정도 부왕 경건왕 루트비히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의도는 후에 아들 피핀 2세의 즉위식에 반영되었다.

822년 마들렌 백작 테오도베르트(Theodobert)의 딸 인겔트루드(Ingeltrude)와 결혼하였다. 다른 이름은 흘린가르트(Hringard) 또는 린가르트(Ringard)라는 설도 있다. 인겔트루드 또는 흘린가르트는 크리스찬 스테파니에 의하면, 후대의 카페왕가의 선조였던 네우스트리아의 귀족 로베르 강철공의 일족이었다 한다. 그에게는 후계자인 아들 피핀 2세와 마인츠의 대주교를 지낸 아키텐의 샤를 형제가 태어난다. 몇명의 딸이 더 태어났고, 그 중 한명은 후일 오베르뉴 백작 게르하르트에게 시집갔다. 일설에는 인겔트루드는 린가르트(Ringart) 또는 흘린가르트(Hringard)의 딸이라는 설도 있고, 마들렌 백작은 아르눌핑 가문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823년 계모 유디트 폰 바이에른에게서 이복 동생 대머리 카를이 태어나면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상속령을 개정하자, 피핀은 형 로타르와 동생 독일인 루트비히를 부추겨 저항했다. 829년 새로 태어난 이복 동생 대머리왕 카를에게 알레만니아를 떼어주자 형제 로타르, 독일인 루트비히와 함께 반기를 들기도 했다. 824년 그는 브르타뉴 출신 자신의 고문인 에르몰두스 니젤루스와 함께 브르타뉴를 공략하였다. 827년 코르도바의 이슬람의 장군 아부 마르완(Abu Marwan)과 마르카 히스패니카(Marpan Hispanica) 등이 쳐들어오자 오를레앙백작 마테프리드, 투르와 상스의 백작 휴고 등과 함께 군대를 모집하여 이들과 맞서 싸웠다.

829년 루트비히 경건왕은 보름스의 제국 의회에서 카를을 알레만니아 공작, 슈바벤 공작, 알사스 공작, 리티아(Raetia, 이탈리아 북부), 부르군트의 공작에 임명했다. 그의 친척이자 카를 마르텔의 아들 베른하르트의 아들 왈라는 그에게 정변을 제의한다. 829년 8월에는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가 카를의 권리를 지지하고 나섰다. 아키텐의 피핀 1세는 베른하르트가 자신의 영토도 넘볼 것이라 보고 로타르에게 거병을 제의한다. 피핀은 로타르 1세의 고문인 왈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들은 가스코뉴를 거쳐 파리시로 진군하였으며, 네우스트리아에서 추종자들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부왕은 브르타뉴를 친 뒤, 콩피에뉴에서 피핀과 로타르 일행을 포위하고, 체포하였다. 이들의 군사는 곧 해산되었다.

830년 셉티메니아의 백작 베른하르트가 분리독립을 기도하고 거병하였으나 루트비히가 보낸 군사들에 의해 진압당했다. 830년 초, 피핀은 형 로타르 1세의 고문인 코르비의 왈라(Wala of Corbie)의 조언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피핀은 반란을 만류하는 자신의 고문 베렝가르 폰 툴루즈의 조언을 무시하고, 동생 독일인 루트비히와 함께 거병하였다. 가스코뉴와 파리, 네우스트리아를 점령했으며 곧 셉티메니아의 백작 베른하르트의 지원을 얻어,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브르타뉴와 꽁피에뉴에서 경건왕 루트비히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831년 2월에 피핀은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와 화해했다. 그해에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로부터 케노마니니쿠스 공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831년 11월 2일 경건왕 루트비히는 피핀을 히스파니아로 추방령을 내렸다. 피핀은 832년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의 지원을 얻어, 독일인 루트비히와 함께 아키텐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형제간의 의사충돌이 있었고, 베른하르트는 셉티메니아 혹은 바르셀로나로 도주했다.

반란은 곧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의 장군 루겐페르트(Lugenfeld)에 의해 진압되고 피핀은 아버지에 의해 아키텐 국왕직을 박탈당했다. 피핀은 리모주(Limoges) 근처에서 군사를 모두 잃고 리모주에서 루겐페르트에게 사로잡혀 트리어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의 왕국은 대머리 카를에게로 넘겨졌다. 832년 리모주 근처 조코디아크 궁(Jocondiac)에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그의 영지 아키텐을 대머리 카를에게 준다고 선언했다. 베른하르트의 모든 소유물은 툴루즈의 백작 현명공 베렝가르에게 넘겨졌다. 피핀은 아키텐 지방에 퍼져 있던 분리주의 감정과 독립운동을 이용해 자신을 지지하면 아키텐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며 아키텐의 귀족들을 설득, 833년 경건왕 루트비히에 대한 재반란에 가담케 했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트리어의 감옥으로 가, 피핀을 탈출시켰다. 경건왕 루트비히의 군대는 피핀을 추격했으나 사로잡지 못했다.833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그를 면직시켰다. 그러나 피핀은 아키텐 지역의 분리 독립 열망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다. 피핀이 아키텐에서 면직되자 833년 로타르 1세는 군사를 일으켜 부왕에게 도전했으며 랭스 대주교 에보(Ebbo)의 도움을 얻었다. 피핀과 로타르, 독일인 루트비히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의 지원을 얻어 거병, 반란을 일으켰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알자스의 지골스하임 부근에서 회의를 열어 다시 부왕 경건왕 루트비히를 폐위했다.

형 로타르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사로잡는데 성공, 롤페르트로 끌고갔다가 말렘으로, 말렘에서 메츠로, 메츠에서 다시 수아송까지 끌고 갔다가 수아송의 생메다드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동시에 이복동생 대머리 카를은 부모에게서 떼어내 아르덴 근처 프륌 수도원에 보냈다. 831년 초 로타르 1세는 제국을 3분할하였으나 아키텐의 피핀과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들의 몫이 적다고 보고 반발했다. 834년 3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다시 황제 지지파들의 지원으로 제위에 복귀하였다.

834년 피핀은 비밀리에 자객을 고용, 수녀원에 갇힌 계모 유디트를 암살하려 했으나 유디트가 수녀원을 탈출함으로써 실패했다. 그해 3월 1일 부왕 루트비히 경건왕은 카리시에쿰(Karisiacum, 현 키에르치(Quierzy))에서 피핀을 다시 아키텐 국왕으로 복직시켰다. 로타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피핀은 이때 아버지의 편을 들었다. 이후 피핀은 줄곧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의 편을 들었다. 834년부터는 황제인 아버지의 권위 회복을 위해 힘썼으며, 아키텐을 다시 얻고 앙주 등도 추가로 차지했다. 그 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에게 줄곧 협력하였다.

837년에서 838년 사이 경건왕 루트비히는 피핀의 영토 일부를 대머리 카를에게 수여했다. 838년 12월 13일 푸아티에에서 의문의 병으로 갑자기 사망한다. 일설에는 정신질환에 걸려서 죽었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11월 13일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아키텐 주민들은 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독립하고 싶어하였고, 838년 12월 말, 아버지 피핀 1세의 죽음에 따라 피핀 2세가 아키텐의 군주로 내정되었다. 피핀 2세의 할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후처 유디트에게서 얻은 대머리 카를 2세 르 쇼브를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아키텐의 귀족들은 반발, 카바네의 아데마르(Ademar de Chabannes), 푸아티에 백작 에메노네(Emenone) 등은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을 선언했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피핀 2세를 아키텐의 군주로 추대하였다. 아키텐 귀족들의 반발이 심화되고 피핀 2세가 사실상 국왕으로 추대되자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푸아티에 지역을 공격했지만 아키텐 군사들에게 패배하고 자신의 계획을 철회했다. 카를은 832년 9월 리모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된 것을 근거로 아키텐의 왕위를 계속 요구했다.

839년의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피핀 2세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카를을 아키텐 왕으로 임명하며, 피핀 2세는 아헨으로 유학할 것을 지시했다.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아키텐에 사자를 보내 피핀 2세를 아헨으로 보내고 대신 총독을 파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키텐의 귀족들은 거부했다. 카를은 아키텐에 대한 통치를 선언했지만 아키텐의 귀족들은 카를을 거부했다. 이후 피핀 2세는 배다른 삼촌 대머리 카를 2세와 수시로 전쟁을 벌였다. 피핀 2세는 보름스 회의 직후 루트비히 2세 독일인에게 의탁, 작센과 튀링겐 등지를 오가며 생활했다.

841년까지 아키텐은 총독의 통치하에 있었고, 아키텐의 총독은 피핀 2세의 큰아버지인 로타르 1세였다. 조부 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사망하면서 대머리 카를은 다시 아키텐을 요구했고, 841년 피핀 2세는 다시 대머리 카를와 퐁트누아 앙 퓌세(Fontenoy-en-Puisay)에서 맞붙었다. 이때 로타르 1세는 피핀을 지원하였다. 841년 피핀 2세와 대머리 카를 2세의 퐁트누아 전투에 큰아버지 로타르 1세가 지원하였으나 피핀 2세가 크게 패배하였다. 로타르 1세와 독일인 루트비히가 피핀을 지원했고, 퐁트누아 전투에서 결국 대머리 카를 2세를 꺾고, 피핀 2세는 정식으로 아키텐 왕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피핀에게 아키텐이 반환되자 대머리 카를은 반발, 이후에도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후 피핀 2세의 실질적 통치는 848년 또는 852년까지였다.

841년부터 843년 카를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가 손잡고 로타르 1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 피핀 2세는 로타르 2세의 휘하 장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루트비히의 군사가 로타르 1세의 군대를 꺾었는데, 이때 대머리 카를은 가스코뉴에 있는 피핀에게 보냈다. 피핀 2세는 카를 2세의 사자를 보자마자 구타하였다. 피핀 2세는 다시 아키텐으로 후퇴하여 카를 2세를 상대로 전쟁을 계속하였다. 피핀은 아키텐으로 돌아가 카를 2세가 대리 통치자로 파견한 툴루즈 백작 베른하르트 드 셉티메니아(Bernhart de Settimania)를 물러나게 했다.

842년 또는 843년에 피핀 2세는 서프랑크를 침공, 툴루즈 지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툴루즈와 루에르그(Rouergue)의 백작 툴루즈의 프레도론(Frédolon)가 그를 배신하여 카를의 편에 가담하였다. 844년 피핀 2세는 바이킹 모험가 야를 오스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피핀은 야를 오스카에게 서프랑크 왕국의 땅을 약탈해서 정복하면 그 지역에 정착지를 주겠다고 하였다. 피핀과 야를 오스카는 서프랑크 왕국의 가론과 툴루즈 일대를 약탈했다. 843년 피핀 2세는 카를 2세와 사로나 섬(Saona)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해에 시민 전쟁이 종료되고, 로타르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대머리 카를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분할을 할 때,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 2세에게는 아키텐, 툴루즈와 셉티메니아 등도 분배되었다.
7.3. 서프랑크 왕국령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아키텐은 서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고, 피핀 2세의 미래 또한 불투명해졌다. 852년 9월 피핀 2세는 가스코뉴의 백작 산초 2세 산시온에게 갔다가 그에게 체포되어 동생 샤를과 함께 서프랑크의 대머리 샤를 2세에게 넘겨졌다. 피핀2세는 수아송의 세인트 메다르(Saint Médard)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피핀 2세를 체포한 공로로 샤를 2세는 가스코뉴의 백작 산초 2세 산시온을 공작으로 승격시켰고, 아키텐을 통치권을 굳건하기 위해 푸아티에 백작 라눌프를 아키텐 백작으로 임명했다..이때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 2세와 전쟁을 벌였고, 청년 루트비히를 보내 대머리 카를 2세와 교전하였다. 전쟁은 855년 청년 루트비히가 리모주(Limoges) 지역 일대를 되찾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아들 청년 루트비히를 아키텐으로 보내 피핀 2세와 샤를을 탈출시키게 했다. 청년 루트비히는 피핀 2세의 탈출 소식을 확인한 후에 바이에른으로 퇴각하였다.

854년 형제 샤를과 함께 세인트 메다르 수도원에서 탈출에 성공한 피핀 2세는 대머리 카를 2세에 맞서 싸울 바이킹 족 용병을 고용하였다. 피핀은 자신의 옛 영토에 바이킹 족의 정착을 주도했다. 대머리 카를 2세의 아들 유아왕 샤를은 군사를 이끌고 푸아티에 지역을 공격하였다. 855년 10월 라모에서 열린 아키텐의 귀족회의에서 유아왕 샤를을 아키텐 왕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피핀 2세는 자신의 옛 영토인 루아르 계곡과 푸아티에, 앙굴렘, 페리, 리모, 클레르몽, 부르주 등을 차례로 회복하였고, 대머리 카를 2세는 피핀 2세를 진압하려고 힘썼다.

859년 피핀 2세는 로베르 강철공 및 브리튼의 주교 솔로몬 등과 동맹을 맺었다. 다시 카를과의 전투를 시작했으나 작은 승리를 몇번 거두었다. 이후 그는 바이킹들에게 의탁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864년 무렵 피핀 2세가 바이킹에 가입해서 바이킹이 된 것으로 기독교 사회에 확산되었으며, 기독교식 예배 대신, 바이킹 족의 하나로 살며 바이킹의 신을 숭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툴루즈 지역을 공격할 때 바이킹 족에 합류되었다. 그러나 피핀은 툴루즈 지역을 공략하던 중, 카를 2세의 추격자에 의해 사로잡혔다. 그는 864년 황제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의 명의의 파이스트레스의 칙령에 의해 면직되고, 피핀 2세는 곧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한등급 감하여 상 리스 감옥에 수감되었고, 얼마 안가 옥사한다. 이후 샤를 2세는 아키텐에 대한 통치권을 공식화하기 위해 장남인 소년왕 샤를을 아키텐의 분봉왕으로 임명한다.

리모주에서 아키텐 국왕으로 즉위한 소년왕 샤를은 이미 성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아키텐의 왕들과는 달리 이 샤를은 실권이 전혀 없는 왕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수도원이나 성당을 처분할 권한도, 왕궁의 재산을 처분할 권한도 없었다.

샤를은 성장해감에 따라서 스스로의 주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샤를은 862년에 아버지의 뜻에 거슬러 백작 훔베르트의 미망인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성과 결혼했으나 이듬해 이혼했다. 그가 훔베르트의 미망인과 결혼했을 대 대머리왕 샤를은 아내를 버리고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865년 아키텐의 일부 귀족들에 의해 결혼이 인정되었지만 자녀는 없었고, 곧 도로 헤어졌다.

864년 3월 아키텐의 피핀 2세가 노르만 용병들을 고용해 아키텐을 침공, 푸아투와 툴루즈를 점령했다. 그해 6월 푸아투의 레녹스 백작이 피핀을 사로잡아 대머리 카를에게 넘긴다. 865년 부왕 대머리 카를의 궁정으로 소환되었다가 그해 5월 다시 아키텐으로 보내졌다.

866년에 모의 전투를 하던 중, 말위에서 머리 혹은 이마에 칼을 맞고 땅에 떨어졌다. 소년샤를은 심하게 멍이 들었는데, 이후 정신적으로 무능력하게 변하였다. 그해 샤를은 후계자 없이 사고 후유증으로 간질을 앓다가 뷔장케에서 죽었다. 시신은 부르쥬의 성당에 매장되었다. 이후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되었던 라돌프 1세 또한 같은 시기에 사망했고, 아키텐은 그의 형제 루이 2세가 왕 대머리왕 카를에 의해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867년 3월 아키텐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875년 아버지 카를 2세가 신성 로마 황제가 되어 교황 요한네스 8세를 위해 서프랑크와 이탈리아를 오가는 동안 2년간 섭정을 맡았으며, 중간 중간 아버지 카를이 바이킹을 정벌하러 갔을 때도 섭정으로써 정무를 관장하였다. 876년 동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했던 형 카를로만이 죽고, 877년 10월 6일 부왕 대머리 카를이 알프스산맥을 넘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루이를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유서를 보냈다. 곧 루이는 랭스 대주교 힝크마르의 주도로 서프랑크의 귀족들에 의해 국왕으로 선출, 877년 12월 랭스 대성당에서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루이 2세는 서프랑크의 왕이 된지 2년만인 879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들 중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가 공동왕으로 즉위했다. 이중 샤를로망 2세는 부르고뉴와 함께 아키텐만을 통치했다. 즉위 초반 아키텐과 부르고뉴의 유력 호족이었던 로고니덴 가문 사람들을 자문으로 삼았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형 루도비쿠스 3세가 북부 해안가로 쳐들어오는 노르만족과 싸울 때 옆에서 지원하였다. 879년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위대한 이교도 군대"를 플랑드르에서 격퇴하였다.그 사이 노르만 및 무슬림의 잦은 침입으로 카롤링거 왕조는 아키텐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아키텐의 실권은 라눌프 1세의 아들인 라눌프 2세가 쥐고 있었다. 882년 루이 3세가 죽자 샤를로망 2세는 루이 2세의 모든 영토를 병합해 서프랑크의 단독왕이 되나 884년 후사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북 동생인 샤를 3세가 있기는 했으나 5살의 어린 아이였기에 결국 동프랑크의 뚱보왕 카를 3세가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은 운으로 과거 카롤루스 대제 때의 모든 영토를 통합한 카를 3세는 그 밑천이 드러나 887조카 아르눌프를 비롯해 반대 세력에 의해 폐위를 강요받게 되어 888년 폐위되었고, 운으로 통합된 프랑크 제국은 다시 여러 갈래로 분할되었다. 이때 샤를 3세는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해었야 했지만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이 파리 공방전의 영웅이었던 외드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선출하면서 다시 한 번 왕좌를 빼앗겼다.

이때 라눌프 2를 비롯한 루아브 강 남쪽의 귀족들은 외드를 서 프랑크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라눌프 2세는 샤를 3세에게 접근해 그를 보호해주는 대신 그가 가진 카롤링거 왕가의 적통 계승자로서의 권위를 빌려 자신을 아키텐 공작이라고 칭했다. 외드는 라눌프의 두 형제인 고즈베르트와 에블레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후 라눌프를 제압하기 위해 푸아티에로 갔지만, 라눌프 또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외드의 군대를 맞으러 갔다. 이에 외드는 싸우지 않고도 라눌프를 악화시키기 위해 협상을 했고, 라눌프는 외드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에게 모호한 충성 맹세를 했다. 6개월 후, 왕은 그에게 몇 개의 영지를 주었고, 라눌프는 파리로 가면서 아키텐 공작직을 포기한다.


라눌프 2세의 퇴임 이후 893년까지 아키텐은 공작이 없는 상태로 있다가 오베르뉴 백작 베르나르의 아들이자 고티아의 변경백인 경건한 기윰이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기윰은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되기 전 고티에는 물론이고 이미 오베르뉴와 마콩, 리무쟁, 리웅, 부르주 등의 백작위를 겸하고 있어 사실상 현재의 남프랑스 일대에 강력한 유력 제후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키텐 공작으로서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부르고뉴 지역에 클뤼니 대수도원을 건립하기 위해 사냥용 토지를 기부한 것과 블루아의 생 라우메르 수도원 등에 후원했다는 기록 밖에 없었다.

918년 기윰 2세가 사망하자 조카이자 카르카손과 라제스 백작 아크프레드 1세의 아들 기윰 2세가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친 카롤링거 인사였는지 919년 네우스트리아의 로베르 1세 라울에게 베리와 마콩 등의 지역을 빼았겨 툴르즈 백작 레이몽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922년 로타링기아 귀족들을 우대하며 실정을 저지른 샤를 3세를 몰아내기 위해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로베르 1세를 왕으로 추대했고, 1년 뒤 수아송에서 로베르와 샤를의 군대가 전투를 벌인 끝에 로베르가 전사했지만 로베르의 군대가 이겨 샤를 3세 생포되었고, 새로운 왕으로 로베르 1세의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라울이 새로운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로베르 가문에 적대적인 기윰 2세는 지속적으로 라울에게 적대적 입장을 보였으나 결국 924년 충성 맹세를 한 끝에 빼앗겼던 베리와 마콩 등의 지역을 돌려받는다. 하지만 927년 라울이 바이킹과 노르만의 침입에 대응하지 못하자 기윰은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얼마 안가 기윰은 루아르 강을 도강한 후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반란에 편승한 그의 동생인 아크프레드가 아키텐 공작을 자처해 반란을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반란은 아크프레드의 사망으로 1년 밖에 이어가지 못해했다.

죽기전 아크프레드는 자신의 조카인 에블레스 만저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하지만 라울은 장인과 달리 카롤루스의 혈통이 섞이지 않은 문제점으로 인해 서프랑크 내에서 지지 기반이 약했고, 때문에 기윰 2세와 아크프레드의 후계자로서 자신의에게 반기를 들었고, 무엇보다 네우스트리아보다 더 강한 아키텐 공작령을 보유하고 있던 에블레스를 본보기로 사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먼저 베리를 몰수했고, 그 다음 932년 아키텐 공작과 오베르뉴 백작의 칭호마저 몰수해 툴루즈 백작 레몽 3세 퐁스에게 줬다.

레몽 3세는 아키텐을 942년까지 무난하게 통치하다가 사망후 아들인 아들 레몽 4세가 승계하게 되어 961년까지 통치했다. 한편 에블레스의 아들인 기윰은 푸아티에 백작령만 유지한 체로 아버지의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기 위해 고분분투했으나 936년 라울이 사망하고 샤를 3세의 아들로 외가인 웨식스에서 망명 중이었던 루이 4세가 왕위를 되찾게 되었다.

이때 기윰은 루이 4세에 의해 위그 르 그랑에게 일부 땅을 양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영지를 일부를 양도했으나 그 이후로 위그와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950년에 위그는 루이와 화해하고 부르고뉴와 아키텐 공작령을 부여받았다. 위그는 루이 4세의 원조 하에 푸아티에를 비롯해 아키텐을 정복하려 했으나 기윰은 그들을 물리쳤다. 이로 인해 기윰의 위세는 높아졌고, 루이 4세의 뒤를 이은 로테르는 이를 위험시 여겨 955년 8월 로테르는 위그와 합류하여 푸아티에를 포위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만다.

959년 기윰은 왕실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에서 아키텐의 궁정백을 자처했고, 962년 완전히 아키텐의 공작을 자처했다. 그리고 시지 미상이나 앞서 언급한 위그 르 그랑과 루이 4세, 로테르의 공격에 대해 방비 때 군사적 원조를 해준 브르타뉴 공작 알랭 2세에게 헤르보주(Herbauges)와 티포주(Tiffauges)의 땅을 기증했다.

963년 기윰 3세는 퇴위하고 푸아티에의 생 시프리앙 수도원으로 은퇴하면서 아들인 기윰 4세에게 아키텐 공작령과 푸아티에 백작령을 넘겼고, 오베르뉴 영토를 클레르몽 가문의 로베르 2세에게 양도하여 그를 부백작으로 삼았다. 아키텐 공작으로 즉위한 기욤 4 세의 통치 초기는 푸아티에의 봉신이었음에도 많은 권위를 부여받았기에 강력해진 남작들과 부백작에게.정치적 암투에서 이기는 것과 앙주 백작령과의 빈번한 충돌로 점철되었다. 특히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가 루앙을 차지한 것으로 인해 그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968년, 그는 블루아 가문의 티보 1세와 그의 아내 류가르드 드 베르망두아의 딸 엠마와 혼인했으며, 비슷한 시기 자신의 여동생인 아델라이드를 위그 르 그랑의 장남 위그 카페와 혼인시켰다고, 삼촌 지간에 해당하는 리모주 주교 에블의 뒷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카로링거 왕가의 로테르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후 979년, 서프랭크왕 로테르는 공피에뉴에서 프랑스 국왕에게 대관한 아들 루이 5세에 아키텐 왕국을 분봉해 부왕으로 하고, 982년에는 오베르뉴에서 루이와 아델라이드 당주의 성대한 결혼식을 열었다. 부왕 루이의 존재에 의해 영내에서 기욤 4세 자신의 입장이 약화 되었다. 그러나 로테르는 곧 아키텐은 이미 공작인 기욤 4세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키텐 군주의 자리를 폐지하고 아들 루이 5세를 왕궁으로 소환하면서 종결했다 .

986년 루이 5세가 왕위에 오른지 불과 1년만에 낙마 사고로 사망하면서 서프랑크의 제후들과 주교들이 왕위 계승권이 박탈된 로테르의 동생인 샤를을 대신해 위그 카페를 선출했다. 물론 위그 카페는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의 모든 직함을 승계받기 위해 카롤링거 왕조가 제시한 네우스트라의 모든 봉신들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기에 네우스트리아의 후작으로서 거의 허수아비만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그 목적은 허수아비 왕이었다.

때문에 프랑크의 제후들 중 루앙 백작 및 앙주 백작 동생인 앙리가 맡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령 외의 나머지 제후들은 중립 내지는 적대적 입장에 놓여 있었고, 기윰 4세 또한 매부인 위그 카페가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다가 988년 로렌 공작 샤를을 지지하면서 위그 카페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루아르 계곡 평원에서 근왕군을 패퇴시켰다.

이후 아내인 엠마와의 치정 문제 겪다가 수도원에 은거했고, 아들인 기윰 5세가 어린 탓에 아내인 엠마가 섭정을 맡았고 이후 989년에는 베네딕트회 마이유제 수도원을 설립했다. 993년 1월에 다시 아키텐의 궁전에 잠시 귀환하다가 임종 직전인 995년 소도원으로 돌아가 사망한 후 아키텐 공작위는 기윰 5세가 승계하게 되었지만 1004년까지 엠마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7.4. 바스코니아⇒가스코뉴 공국
아키텐 공국과 마찬가지로 602년 프랑크 왕국이 점렴한 옛 서고트 왕국의 피레네 산맥 이북의 현재의 누벨 아키텐 남부에 피레네 산맥 이남에 여전히 잔존한 서고트 왕국과 바스크 인들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국으로 서고트 왕국에 복속된 바스크 인들이 이주해 와 살고 있기에 바스코니아 공국으로도 불린다.

바스크인들이 아두르 강과 가론 강 계곡을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602년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복종시킨 후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또한 바스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게니알리스란 프랑크 귀족을 바스코니아 공작을 세웠다.

바스코니아 공국은 가론 강 주변 지역에 통합되었지만,공국이 만들어지기 이전과 시기에 프랑크의 영토였던 칸타브리아까지 확장되었을 수도 있다. 626년 게니알리스가 사망한 후 아이기난이 가스코뉴 공작이 되었지만 얼마 안가 바스크인 부하들의 반란으로 공국 밖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클로타르 2세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바스크인들은 아만드를 지도자로 내세우고 프랑크 왕국에서 독립했다.

바스크인들은 아키텐 분국을 노략질하자 분국왕인 카리베르 2세는 이들을 진압하려고 하다가 사망했고, 오즈의 주교는 바스크 반란군을 지지하거나 동조했다는 혐의로 추방되는 등 현재의 프랑스 서남부는 말그래도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635년 아이기난을 비롯한 아르네베르트 공작 포함한 9명의 다른 공작들에게 부르군트에서 소집한 병력을 이끌고 가스코뉴의 잔존한 아키텐인들과 연합하고 프랑크 왕국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고 있는 바스크인들을 토벌하게 했다. 바스크인들은 전투에서 패한 뒤 피레네 산맥으로 피신하려 했다. 부르군트군은 그들을 맹렬히 추격해 많은 포로를 확보한 뒤, 여세를 몰아 그들의 산악 마을인 현재의 타데츠-소르홀루스까지 들어가서 집을 모조리 불태우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다만 철수하던 중 바스크인들의 습격으로 후위대를 이끌고 있던 프랑크 공작 1명이 전사했다.

636년 아이기난은 바스크인들과 손잡은 현지 귀족들과 함께 다고베르에게 바스크인과 손잡았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아들들을 인질로 보냈다. 다만 이로 인해 아이기난은 메로베우스 왕실의 신뢰를 잃으면서 바스코니아 공국은 660년까지 방치된다. 그동안 바스코니아에 살던 바스크인들은 부족 단위로 생활했으며, 법적 질서 또한 서고트, 로마, 프랑크의 법률이 적용되지 않았다.

이후 660년 네우스트리아의 왕 클로타르 3세와 그의 궁재 에브로인의 지지자였던 펠릭스가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바스코니아의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바스코니아는 아키텐에 속하게 되었다. 658년 루푸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은 2년 만에 성공했는지 670년 루푸스 1세가 아키텐과 바스코니아의 공작이 되었다. 673년에 툴루즈와 보르도의 도시를 점령했으며, 서고트의 왕 왐바에 대항하여 플라비우스 파울루스와 동맹을 맺고 셉티마니아의 베지에를 공격했지만 플라비우스 파울루스가 왐바에게 진압당하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673년에서 675년 사이 언젠가, 루푸스는 보르도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아키텐과 바스코니아의 교회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게 되나 그러나 675년에 그는 리모주를 점령하여 아키텐 공작령을 확장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암살당했고, 그의 후임으로 메로비우스 왕조 출신의 외드 위대공이 아키텐과 바스코니아의 공작이 되었다.

이미 궁재인 피핀 가문에 꼭두각시로 전락한 왕가에 충성할 의지가 없어진 외드는 700년대쯤 왕실에서 파견한 관료 세력들을 굴복시킨 후 아키텐의 실권을 장악한 후 714년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외드는 사라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슬람 군대는 아키텐을 침략했고 그는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했다. 714년 궁재 피핀 2세가 어린 손자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이때를 틈타 독립을 기도하였으나, 5년 만인 719년 카를 마르텔에게 굴복했다.

715년 외드는 프랑크 왕국에서 내전이 한창일 때 다시 독립을 선언하였다. 718년에는 바스크족을 이끌고 프랑크 왕국 본토를 침공하였다. 그해 네우스트리아의 킬페리크 2세 궁재 라감프리드(Ragenfrid)는 그의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해 아우스트라시아의 카를 마르텔이 바스크족 군사를 궤멸시키면서 그도 수아송에서 카를 마르텔에게 항복하게 된다. 그는 이후 바이에른의 부족장들에게도 사자를 보내 동맹을 맺는다.

719년 그는 네우스트리아의 킬데베르 2세에게도 아키텐의 분리독립을 지지한다는 조건으로 제휴, 카를 마르텔에 대항하는 레인프로이(Rainfroy)를 지원했지만 719년 10월 14일 네리(Néry)의 생 리스와 수아송에서 카를 마르텔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외드는 살아남은 아키텐 군사 일부를 데리고 루아르강을 넘어 패주하였다.

결국 외드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북쪽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던 우마이야 왕조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721년에는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아키텐, 가스코뉴, 툴루즈의 일부 지역들을 점령되었다. 그나마 툴루즈에서 이슬람 제국의 북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후, 732년 카롤루스 마르텔이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이슬람 군대와 격돌한 끝에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다시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에 따라 외드 역시 카를 마르텔에게 굴복하고 만다.

735년 외드가 사망하자 아들인 후날드 1세가 아키텐과 바스코니아 공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다.741년 카룰루스 마르텔이 사망하고 아들인 피피누스 3세가 궁재 자리를 물려받았다. 공교롭게도 테우데리크 4세가 737년 사망한 이후 왕위가 공석이었기에 후날드는 다음해인 742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와 알레만니아 공작 테우데발트와 동맹을 맺고 피피누스 3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피피누스 3세는 즉각 반란 진압 준비를 시작했다.

피피누스 3세의 군대른 즉가 아키텐 영내에 진입한 후 반란에 대한 응징으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고, 후날드 1세는 도주했고, 피피누스 3세의 군대는 아키텐 주민들을 포로로 잡은 후 루아르 강 이북으로 귀환했다. 피피누스 3세의 군대가 떠난 것을 알게 된 후날드는 루아르 강을 건너 반격하여 샤르트르를 점령하고 그의 동맹인 바이에른 공작 오디로를 지원했다. 피피누스 3세는 743년 테우데리크 4세의 아들 킬데리크 3세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후날드는 피핀 가문에 대항할 수단을 잃어버렸고, 결국 745년 피피누스 3세에게 항복한 후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그의 자리는 아들인 바이페루스가 승계하게 되었다.

아키텐과 바스코니아의 공작 자리를 이어받은 바이페루스는 6년간 겉으로나마 피피누스 3세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751년 피피누스 3세가 교황 [자카리아]의 묵인 하에 킬데리크 3세를 폐위시켜 메로베우스 왕조를 전복시킨 후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복 형인 피피누스 3세에 의해 사생아로 격하되어 이리저리 떠돌면 자신의 몫을 되찾기 위해 몸부리치던 그리포가 아키텐으로 찾아오자 바이페루스와 그리포는 손을 잡고 바다 건너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피피누스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2년간의 전투 중 성과를 얻지 못했다. 피피누스 3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르고뉴로 왔고, 그들을 따르던 프랑크의 귀족들은 피핀에게 투항하였다. 그리포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753년 프로방스 백작 테오돈과 교전하던 중, 산 지오반니 드 모리아나의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혹은 피핀 3세의 적인 랑고바르드 왕국의 아이스톨프를 만나러 이탈리아로 가던 중, 알프스산맥에서 피핀 3세가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포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페루스는 760년 항복했으나 이후 바이레루스는 교회 토지를 무단으로 몰수한 것에 대한 죄목으로 피피누스 3세에게 공격을 받게 되었고, 아직까지 충성을 맹세한 백작들의 도움을 받으며 피피누스 3세에게 대항했으나 762년 베리와 푸아티에가 공격을 받았고, 부르주가 함락되는 등의 악재가 겹쳐지면서 결국 피피누스 3세에게 굴복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763년 바이레루스는 피피누스에게 아키텐 지방에서 받는 공물을 댓가로 부르주와 다른 아키텐 도시들을 반환해주면 피피누스에게 복종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피피누스 3세는 경고 차원으로 763년에 리무쟁(Limousin)과 쿠에르시(Quercy)까지 아키텐 깊숙한 곳을 습격했다.

다음해인 764년에 열린 샹 드 마이(Champ de Mai)에서 바이레루스는는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와 참석하면서 피피누스 3세의 무례한 대답에 항의했으나 피피누스 3세는 이참에 바이페루스를 제거해 메로베우스 왕조의 흔적을 지워버리기로 결정했고, 결국 바이페루스를 공격했다. 763년에서 766년 사이에 바이페루스는 푸아티에, 리모주, 생트, 페리그, 앙굴렘을 상실했고, 피피누스 3세의 군대는 아키텐과 바스코니아 북부 일대를 무자비하게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이후 부르주 백작인 블란디누스(Blandinus)는 피피누스 3세에게 복종했고, 바이페루스의 가족 대부분은 페리가드(Périgord) 숲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바이페루스 본인 또한 767년 6월 2일 피피누스의 선동으로 추정되는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혹은 추정되는 후날드 2세는 바스코니아 지방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피피누스 3세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둘로 나눠졌고, 이때 아키텐 또한 잠시 카롤루스아키텐의 북서부를 동생인 카를로만이 아키텐 남동부를 나눠 가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날드는 카롤루스의 지배를 받는 아키텐 공작령의 북서부로 귀환해 추종 세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카를로만은 자신의 이복 동생인 카를로만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원조는 묵살되었고, 결국단독으로 직접 군대를 끌고 아키텐으로 진군해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후날드의 반란은 단기간에 끝이 났고, 후날드는 다시 바스코족들에게 도망치려 했으나 측근인 바스크 출신의 볼프가 그를 배신, 카롤루스에게 넘기면서 메로비우스 왕조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아키텐의 반란을 마무리되었고, 카롤루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키텐 공작령에 병합되어 있던 바스코니아 공작위를 볼프에게 수여했다.

하지만 778년 볼프 2세는 카롤루스의 이베리아 반도 공략이 실패된 후 회군 당시 바스크 지방을 공격하다가 실패된 론셰스바예스 전투에서 카롤루스를 배신하고 바스크인들을 도운 것이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그의 아들인 산체스 1세 루포는 801년까지 프랑크 궁정에 억류되어야 했고. 아키텐 분국왕이 된 루도비쿠스 1세가 산체스 1세에게 바스코니아 공작령을 돌려주었다.

802년에 코르도바 에미르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팜플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바스크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카룰루스는 산체스 1세를 앞세워 806년 팜플로나를 차지하는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812년 코르도바 에미르국의 반격으로 원정은 실패했고, 이때의 책임인 산체스 1세는 자신의 공작위를 자신의 동생인 세귄 1세에게 양도한 이후에도 바스크 지방에 대한 원정을 진행한다.

하지만 세귄은 형과 달리 프랑크 왕국에 순종적인 인물은 아니었고, 반란 진압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넘어 아예 동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발각되었다. 바스코니아는 여전히 아키텐 분국에 속해 있었기에 루도비쿠스 1세는 즉각 반란 진압에 들어갔다. 바스코니아에 진입한 프랑크 군대는 이전과 달리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잡아 인질로 삼아 816년에야 완전히 진압했다. 세귄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같은 해 이베리아의 무슬림에 맞서 기독교 영주들의 연합이 형성되었고, 안초 1세 또한 기독교 영주들을 지원했다. 두 군대는 13일간 지속된 판코르보 전투(Battle of Pancorbo)에서 충돌고, 이때 안초 1세는 동생 가르체아와 함께 참전했다가 전사하게 되었다.

이후 바스코니아 공작위는 다른 동생인 가르체아가 이어받지만 그 역시 반란을 일으키다가 818년 사망했고, 조카 로페가 뒤를 이어 반란을 이어갔지만 820년 프랑크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아즈나르 산체스가 바스코니아 공작으로 임명된다.

824년, 제2차 판코르보 전투로 프랭크 왕국의 에브로 백작과 함께 아즈나르 산체스가 판프로네제군과 바누· 카시군의 연합군에 의해 잡혀 독립이 강화되었다. 팜플로나. 9세기 초, 아두르 강 주변의 땅은 바스코니아 카운티의 이름으로 공국에서 분리되었다. 아즈나르의 후계자인 산체스 2세는 루도비쿠스와 샤를 2세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지속적인 반란의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844년 바이킹이 보르도에 침공해 세권 2세를 살해했고, 그의 후계자인 기움은 848년에 보르도를 탈환하다가 죽였지만, 일부 정보통에 따르면, 그는 바이킹들에게 사로 잡힌 후 나중에 샤를 2세에게 돌려보내졌으나 패전의 책임으로 공작위에서 해임되었다. 어째든 산체스 2세는 이틈을 노려 보르도를 점령했고, 이후 853년 샤를 2세는 산체스 2세를 바스코니아의 공작으로 인정했다. 같은 해 바스크 제후의 친척인 투데라의 무자가 바스코니아에 침공하여 산체스 2세를 포로로 삼았다. 855년에 산체스 2세가 죽고, 아르노가 후계자가 되었고, 863년 보르도 백작이 되었지만, 864년에 바이킹과의 싸움으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산체스 3세가 바스코니아를 통치했다. 그의 시기부터 바스코니아는 다시 서프랑크 왕가로부터 사실상 독립된 상태였다. 이시기부터 바이킹의 침략이 사라지기 전까지 바스코니아는 유럽의 어느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바이킹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기존 수도원이 파괴되고 도시가 쇠퇴했다. 바스코니아의 공작은 노르드인(바이킹)과 맞섰고, 이때 팜플로냐의 왕들은 바욘 근처에서 그들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87년 산체스 3세는 가르체아 2세에게 넘겨주었다. 이 당시 서프랑크의 정세는 동프랑크의 국왕으로서 서프랑크의 왕위까지 차지한 뚱보왕 카를 3세의 무능력함으로 혼란스러운 상태로 가르체아 2세를 비롯한 바스코니아의 귀족들은 아키텐의 귀족들과 함께 부르주에 모여 카를 3세의 몰락 후의 상황을 대비했다. 904년에, 가르체아 2세는 "comes et marchio in limitibus oceani(바다의 경계까지의 변경백)"의 칭호를 자처했다.930년 가르체아 3세가 사망하다 그의 세아들을 바스코니아를 셋으로 분할한다.

장남인 산체스 가르체아는 공작 칭호와 함께 가스코뉴 지역을 차남인 기예르모은 아르마냑을 비롯한 페젠삭 지역을 삼남인 아르노 가르체아는 아스타락을 가지게 되었다. 955년 안초 가르체아는 사망하자 그의 아들은 윗세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스코니아 공국을 더욱 분할 상속받았다. 이러한 분할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역의 축소와는 별개로 점차 바스크 정체성이 사라지만 점차 오크어 계열의 방언인 가스코뉴어가 대세를 이루어지면서 바스코니아라는 지명대신 가스코뉴라는 명칭이대신 불려지기 시작했다. 안초 가르체아의 장남인 안초 5세가 961년에 후사도 없이 사망하면서 동생인 기예르모 산체스가 승계했다.

기예르모 산체스는 이때까지 분할된 바스코니아 공국을 다시 하나로 합치려고 했다. 970년 기예르모은 자신을 가스코뉴 공작으로 자칭했고, 사촌인 보르도 백작 기윰이 죽자 그의 영지를 병합한다. 이후 977년, 기예르모은 아쟁과 바자스를 자신의 영지에 추가했으며 가스코니 공작(Duke of Gascony)으로 방킹의 침략 당시 파괴된 라 레올(La Réol) 수도원을 재건했다.

988년 보르도를 완전히 장악한 당시 987년 루이 5세가 낙마 사고로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고, 위그 카페 카페 왕조가 들어섰다. 이당시만 하더라도 가스코뉴 지역은 프랑크 왕실의 통제하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나 보르도는 정반대였기에 기예르모는 위그 카페의 통치년(987년 - 996년)을 이용해 「위그 왕의 통치 중」(regnante rege Hugone)이라는 조항을 붙이고, 자신의 특허장 날짜를 기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977~988년 동안 보르도의 조폐소을 만들어 화폐를 찍어냈다.

기예르모의 통치 도중 동생 '가스코뉴 주교' 곤발드는 가스코뉴의 모든 교구에서 지배권을 확립하여 결국 보르도 대주교가 되었다. 가스코뉴 교회의 모든 지배층은 기예르모의 일족이 지배했다. 기예르모 레콘키스타에 참가해 무슬림과 싸우기 위해 팜플로나로 향했을 때, 곤발드가 가스코뉴를 관리시켰다. 팜플로나에서 기예르모는 팜플로냐 왕 가르체아 1세 사노이츠의 딸 우라카와 결혼했지만 바이킹의 습격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에 가스코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기예르모는은 981년 또는 982년에 소스에서 바이킹을 깨고, 그 후 심각한 위협이 아니게 되었다. 아두르 강을 따라 바이킹의 거주지는 제거되었고, 바이킹은 북쪽의 페이 드 보른 랜드로 쫓겨났다. 한편 그의 통치 기간 중 가스코뉴의 교회들 또한 점차 신의 평화 운동에 동참했다.

997년 기예르모가 사망하자 장남인 베르나르 기예르모가 가스코뉴의 공작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의 시대에 가스 코뉴는 사실상 독립적이며 공작은 주권자였으며 이론적으로 프랑크 왕국과의 연결은 없었다. 그의 통치는 비교적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끝났다. 아버지 시대에 가스코뉴에서 신의 평화운동이 시작되었고, 그의 통치 중에 수도원 개혁이 도입되었고, 바이킹 공격의 시대는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봉건제도의 분열이 진행되는 시기였다.

베르나르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을 딴 화폐를 보르도의 조폐소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화폐를 생산해냈다. 베르나르의 통치 중에 수도원장 아보 드 풀리는 수도원을 개혁하고 베네딕트회의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몇 명의 수도사와 함께 라 레올 수도원을 방문했다. 그는 당시 프랑크 국왕 로베르 2세의 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 레올에서는 왕인 로베르 2세보다 자신의 권력이 강하다고 공공현히 말했다. 풀리의 사절단은 베존 자작 아말비의 보호를 받았다.
7.5. 툴루즈 백작령
778년 이전까지 툴루즈는 아키텐에 속한 지역의 일부였다. 5세기경 서로마 제국의 붕괴 전까지 이곳은 나르보넨시스 속주에 속했지만 서고트 왕국에 정복되었다. 하지만 507년 발생한 부이예 전투를 기점으로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있던 서고트 왕국의 영토는 모두 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툴루즈 지역은 오랫 동안 아키텐의 일부로 있었지만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선 후 피피누스 3세의 장남 카롤루스가 프랑크 전체를 지배하는 국왕이 된 후778년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하려다가 회군 도중 바스크인들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은 채 프랑크 왕구그이 영내로 귀환한 후 바스크인들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잠시 왕국으로 개편되어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세우면서 툴루즈를 분리시켜 코로소를 툴루즈의 초대 백작으로 임명했다. 781년 코로소는 루도비쿠스의 섭정으로 아키텐 분국의 통치까지 맡았다.

하지만 787년이나 789년에 코로소는 '바스크인' 오달릭에게 붙잡혀 강제적으로 충성 서약을 한 후 풀려났기 때문에 790년에 카롤루스는 코로소를 파면하고 기욤 드 겔론을 새로운 백작으로 임명했다. 툴루즈는 이베리야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후우마이야 왕조와 가까운 주요 군사 거점으로 기능했다. 카롤루스의 통치 중 거의 매년 무슬림에 대한 군사 작전이 툴루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기욤은 툴루즈뿐만 아니라 아키텐 공작과 고티에 후작령의 전신인 셉티메니아의 변경백을 겸하고 있었다.

801년에 기욤의 지휘 하에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의 대부분이 정복되었다. 피레네 산맥을 따라 아라곤과 나바라의 북부 지역과 함께, 이 지역은 프랑크 제국의 남부의 에스파냐 변경백령이 설립되었다. 806년 기욤이 자신이 세운 겔론느 수도원에 들어가 은퇴하자 아키텐 공작위는 오베르뉴 게랭이 임명되었고, 셉티메니아와 함게 툴루즈는 루도비쿠스의 축근이자 시종으로 파리 백작 게르하르투스 1세(Gerard I of Paris)의 아들인 베고네가 임명되었다.

베고네는 811년까지 툴루즈와 셉티메니아 일대를 오가면서 생활했다. 이후 815년 형인 에티엔이 사망하자 파리 백작직을 계승하다가 1년 뒤 816년에 사망했다.그의 사망 후 파리 백작은 물론이고 툴루즈와 셉티메니아의 타이틀은 각각 세 명의 귀족들이 나눠서 임명되었다. 툴루즈의 경우 베고네의 외손자이자 아키텐 분국왕 피핀 1세의 측근인 베렌가르가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818년, 피핀은 바스코니아 공작 로페 3세(Loup III)에게 자신의 아키텐 왕위를 인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스코니아는 바스크인들의 비율이 높았던 지역인 만큼 806년 세권 1세부터 프랑크 제국에 봉기를 여러번 일으킬 정도로 반항적인 곳이었고, 로페 3세는 이를 거부했고, 황제 루드비쿠스는 로페를 처벌했지만, 이에 대해 로페는 반란을 일으켰다. 819년, 피핀은 군을 이끌고 툴루즈 백 베란제와 오베르뉴 백겔랑과 함께 가스코뉴를 침공했다. 로페는 패배를 피해 동생 가르체아를 포함한 가신들과 함께 도망했지만 가르체아는 도중에 살해당했다. 로페 3세는 불충분한 지위에서 지위를 박탈당해 추방됐다. 바스코니아는 베고네에게 주어졌다.

여러 문헌에서 825년과 830년 사이에 벨고네는 루트비히의 특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831년, 피핀은 베고네의 충고를 듣지 않았고, 베르나르 드 셉티마니의 지원을 받아 아버지 루드비쿠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베고네는 베르나르의 영지에 침공하여 832년 베르나르를 패배시키고 항복시켰다. 베르나르와 피핀은 루드비히 앞으로 데려왔고, 피핀은 포로의 몸이 되었고, 아키텐 왕국은 샤를 2세에게 주어졌다. 피핀 1세를 도운 베르나르는 이모제 앰프리어스 백작 고셈과 함께 불충실을 비난받아 모든 영지를 압류당했고, 이들의 영지는 베고네에게 주어졌고, 베고네는 바르셀로나 백, 셉티메니아 공, 에스파냐 변경백 및 앰퓌리 백작이 되었다.

834년, 피핀은 아버지 루드비쿠스와의 관계를 복구하고 형 로타리우스와 적대했다. 샤론-쉬르-손의 방어전에서 피핀은 베르나르 드 셉티마니의 지원을 받아 로타리우스를 패배시켰다. 베르나르는 2년 전에 베고네로 건너온 모든 영지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베고네는 항상 황제와 피핀을 충실히 섬기고 있으며,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835년, 황제 루드비히는 로타르와의 평화를 위해 리옹 근교에서 회의를 하기로 하고, 황제로부터 현백이라고 불리던 베고네는 3명의 황제 특사 중의 하나로서 로타르와 협상해 평화를 맺는 역할을 했다. 로타르는 아버지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836년 이탈리아에서 피핀과 함께 아키텐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고네는 갑자기 사망했다. 툴루즈 백령, 바르셀로나 백령, 셉티메니아 공령 및 스페인 변경백령은 베르나르 드 셉티마니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베고네 통치 기간 셉의 영지로 들어온 서고트인들과 분쟁이 발생했고, 838년 9월, 키이지-쉬르-오어스 회의에서 베르나르에 대한 10개의 고소가 이루어졌다. 841년 이후, 베르나르는 루도비쿠스 사후 로타리우스의 통제에 벗어나려는 루트비히 2세 샤를 2세의 반란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영지의 관리를 부백작들에게 위임했다.

베르나르는 841년 6월 25일에 방ㄹ생한 폰트노와의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형 로타리우스 1세에게 승리했고, 로타리우스의 군대는 남쪽으로 퇴각했다. 베르나르는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방관의 입장을 취하고, 승패가 결정된 곳에서 사자로서 아들 기욤을 샤를 2세에게 보내, 샤를에게 신하의 예를 바치고, 아버지 베르나의 약속으로서 아키텐 분국왕 피핀 2세를 항복시키는 것을 전했다. 피핀 2세는 먼저 반란을 일으킨 피핀 1세의 아들이며 아키텐 왕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베르나르에게는 이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샤를 2세는 842년 아키텐 원정 동안 베르나르를 처벌하기로 결정했고, 6월에 툴루즈 백령을 몰수하여 아크프레드에게 주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이 결정을 거부하고, 피핀 2세와 동맹해 843년에는 아크플레드를 툴루즈로부터 쫓아냈다. 이에 반해 샤를 2세는 프로방스 공 겔랑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겔랑은 842년 군을 이끌고 아키텐으로 향했다. 그 후, 바이킹의 침공이나 브루튼인의 습격 등, 기타 사건 때문에 제국의 싸움을 종결시킬 필요가 생겨, 843년 8월, 샤를르, 루트비히 및 로타르의 삼형제 사이에 베르됭 조약이 체결 했다. 셉테마니아와 고티아는 샤를 2세의 지배하에 머물렀지만, 베르나르가 지배하고 있던 유제스 백령은 로타리우스의 것이 되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베르나르의 것이 되고 있어 이어 아들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던 오탄 백령은 프로방스 공 겔랑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844년 피핀 2세의 항복과 툴루즈의 정복을 느낄 수 있는 샤를 2세가 다시 아키텐에 왔다. 844년 툴루즈 전투에서 툴루즈 침공 당시 샤를르 군에 의해, 또는 유제스에서 겔랑에 의해, 베르나르 또한 생포되어 844년 5월, 처형되었다.

하지만 베르나르의 영지들은 그대로 아들인 기욤에게 그대로 상속되었다. 하지만 기욤은 베르나르가 톨루즈 백작을 겸하기 전 품었던 에스파냐 변경백령을 손에 넣을 야심을 물려 받았고, 피핀 2세와의 동맹을 유지한 체로 845년 보르도 백작령과 바스코니아 공국을 차지한 후 848년 바르셀로나와 엠퓌리 백작령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에 850년 샤를 2세는 다시 남쪽으로 원정을 단행하여 반항적인 남부의 귀족들을 굴복시켰고, 이 과정에서 기욤 또한 생포되어 본보기로 유력 귀족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샤를 2세는 남부의 귀족들 중 자신에게 충성적이었던 프레들롱을 툴루즈 백작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2년 후 후사도 없이 사망하면서 형제인 리모주, 루에르그, 케르시의 백작인 레이몽 1세가 툴루즈 백작을 겸하게 되었다. 레이몽 또한 자신의 형제인 프레델로와 마찬가지로 서프랑크 왕가에 지지자로서 855년 샤를 2세의 아들인 샤를 3세가 미성년자로서 아키텐 분국왕이 되자 그의 섭정 중 한명이 되어 아키텐 지역 내의 백작들을 다시 왕가의 권위에 복종시키려고 했다

레이몽는 피작의 대수도원장에게 경의를 표한 최초의 툴루즈 백작이며, 이는 그가 이 수도원의 켈시 카운티도 소유하고 있었다.

862년, 그는 루에르그의 남쪽에 바브르스 수도원을 설립했다. 헌장에는 샤를 치세 24년 7월 19일 파리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샤를 2세는 이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에 기여하기 위해 레이몽에게 은 40파운드를 주었다. 궁정에서 돌아온 백작은 같은 해 11월 3일부의 헌장에 의해 아내 벨테즈와 공동으로 수도원에 루에르그에 소유하고 있던 다양한 토지를 기부했다.

하지만 같은 해 샤를 3세에 대한 지지로 인해 그는 둘루즈인들과 사이가 벌어졌는지 툴루즈인들은 고티에 후작이자 바르셀로나 백작 험프리드와 내통하여 그들의 공격을 받고 툴루즈를 빼앗겼다.하지만 험프리드는 지배는 오래가지 못해 그 역시 툴루즈인들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탈리아 방면으로 도주하였고, 레이몽은 다시 영지를 회복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866년에 사망한다.

레이몽의 뒤를 이어 아들인 베르나르 2세가 툴루즈 백작위를 승계했다. 샤를 2세는 험프리드의 영지를 진압에 참여한 지지 귀족들에게 분배해주었고, 베르나르에게 에스파냐 변경백의 일부를 얻으면서 변경백의 칭호를 얻게 된다.

그 정책은 수많은 수도원 네트워크를 기반으로합니다. 아버지에 의해 루에르그에 설립된 바블르스 수도원은 경제적 호의의 혜택을 받았다.

870년 6월 22일, 그는 국왕에 동행하여 콩피에뉴 근교의 마리엔발 궁전에 가서 바브르스 수도원의 특권 확인을 얻었다. 870년 8월, 베르나르도는 켈시에 있었고, 보류의 수도원장 가일프에 관한 사건을 재판하도록 탄원했다. 871 년에 그는 샤를 2세가 리바 고르 세에있는 산타 마리아 데 알라 온 왕립 수도원에 부여한 특권을 확인하고 그의 보호하에 두었다

이 정책은 버르나르가 다른 교회의 재산을 박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특히 랜스 대성당의 지부가 포와투, 리모주, 오베르뉴의 각 카운티에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둘러싸고 랜스 대주교 힌크마르와 대립했다. 이들 자산은 이미 랜스지부에 의해 그 삼촌인 프레들롱과 아버지 레이몽 1세에 불안정하게 양도되어 있었지만 힝크마르는 이를 거부했다.

베르나르는 어쨌든 그것들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가신들에게 맡겼다. 그러자 힝크마르는 오베르뉴 백작, 베르나르 2세 플랑테벨뤼, 베르나르라는 이름의 루앙 백작에게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예기치 않게 가문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는데 오베르뉴 백작 베르나르 2세는 프레들롱의 전임자였던 셉티마니아의 기욤의 친척ㅇ이기에 현재의 툴루즈 백작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루에르그 가문을 증오하고 있었다.

872년 베르나르는 샤를 2세로부터 카르카손과 라체스 백작령을 받게 되지만 얼마 못가 오베르뉴 백작, 베르나르 2세 플랑테벨뤼의 봉신에게 암살되었다. 암살된 당시 후사도 없었기에 얻었던 봉토들도 형제들에게 넘어갔는데, 그중 툴루즈는 그를 암살한 오베르뉴 백작 베르나르 2세가 차지했다. 이에 샤를 2세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으며 같은 해 리에주 백작령까지 차지한다.

876년 10월 8일 대머리 샤를 2세를 따라 안더나흐 전투에 종군했다.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죽자 대머리 카를은 동부 로타링기아를 합병하려 했고, 876년 가을, 그는 군사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로 가는 서프랑크의 대머리 대머리 샤를 2세를 종군했다. 동 로트링겐에서 대머리 카를의 군대와 교전하여 물리친 뒤 청년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876년 10월 안더나흐에서 맞붙었다. 877년 10월 8일 안더나흐에서 서프랑크 군을 최종적으로 격퇴하였다. 전략과 수적으로 모두 우월했던 동프랑크의 군이었으나 루트비히는 군사들에게 모두 흰 옷을 입혀 망령 군대처럼 보이게 했고, 밤에 이들을 본 서프랑크의 군사들은 귀신으로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우왕좌왕 도주하거나 실신해서 쓰러졌고 샤를 2세는 당황해하며 되돌아갔다.

이때 대머리 카를을 따라 종군한 제롬 백작과 라그니에르가 사망했으며, 베르나르 플랑타빌리는 백작 아달하르드(Adalhard), 파리 주교 고즐린(Gauzlin)과 같이 청년 루트비히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가, 곧 풀려났다. 876년 그는 고티아의 영주직에서 해임되고, 고티아의 베르나르(Bernard of Gothia)로 대체되었다.

877년 10월 6일 대머리 샤를 2세가 죽고 그 아들 말더듬이 루이 2세가 즉위하자, 그는 서프랑크 왕국 내에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곧 고티아를 차지한 고티아의 베르나르를 상대로 전쟁, 고티아의 베르나르를 암살,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고티아 영주 직을 얻지 못했고, 한참 뒤 비만왕 카를의 배려로 고티아에 복귀한다.

말더듬이 루이 2세는 즉위 초 서프랑크 왕국 내 귀족들의 발호를 두려워해, 수상과 궁정 행정관들을 비롯하여 각료들을 해임, 교체하려 했다. 귀족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대가로 충성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말더듬이 루이 2세가 귀족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들자,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879년 4월 초 베르나르 플랑타뷜리는 혼란을 틈타 말더듬이 루이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말더듬이 루이는 그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던 중 사망했다.

884년 그는 프로방스의 보소 5세가 자립하자 샤를로망 3세을 따라, 보소 5세를 치는 전투에 출정했다. 프로방스의 보소 5세와의 싸움 끝에 마콩의 일부를 얻고 마콩 백작직을 차지했다. 884년 보소와의 전투에 참여한 일로 비만왕 카를 3세로부터 리요네를 받았다. 884년 비만왕 카를 3세는 그를 다시 고티아의 영주에 임명했고, 886년에 아키텐 후직 칭호를 받게 되었다.

886년 사망하면서 오베르뉴 백작령과 고티아 후작령은 아들인 경건한 기욤에게 돌아갔으나 툴루즈는 베르나르 2세 루에르그의 동생 외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툴루즈를 되찾는데 성공한 외드는 가문의 툴루즈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906년 장남인 레이몽을 공동 백작으로 삼아 툴루즈를 통치했으며, 910년 클뤼니 수도원의 기초 헌정에 서명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 형의 원수였던 베르나르 플랑테벨뤼의 아들 경건한 기욤이 918년에 사망하자 고티아 후작령마저 차지했으나 얼마 못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이 그의 영지들을 나눠 가졌으며 이중 툴루즈는 툴루즈의 레이몽 2세가 통치했다. 레이몽의 통치에 대해선 알려진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924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레이몽 퐁스가 그 뒤를 잇는다.

932년레이몽 퐁스는 숙부인 루에르그와 고티아 후작인 에르맹골과 가스코뉴 공작 안초 4세와 함께 라올에게 찾아가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936년에는 상테주 수도원을 건립했다. 940년에서 941년 사이에는 오베르뉴를 지배했다. 944년 사망하기 전 위그 르 그랑과 루이 4세가 아키텐으로 왔을 때 위그 르 그랑으로부터 툴루즈 백작령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받는데 성공한다.

이후 그의 백작위는 아들인 레몽 4세가 물려받았다. 그의 치세 또한 생 에르미에 수도원을 건립한 것 외엔 알려진 것이 없으며 961년 레몽 4세가 죽고 백작위를 승계한 위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생으로 972년 백작위를 승계한 레몽 5세 또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

978년 레몽 5세가 사망하고 기욤 3세가 툴루즈 백작위를 계승했다. 당시 서프랑크는 루이 5세가 사망하면서 카롤링거 왕가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고 위그 르 그라의 장남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선출되었지만 역성 혁명 이후의 카롤링거 왕가와 달리 왕권이 허약했다 이때 기욤 3세는 랑그도크의 강력한 제후였고, .기욤은 "marchio prefatus in pago Tholosano"(툴루즈 후작)라는 칭호를 만들었다. 기욤의 영향력은 나르보넨시스와 그의 아내 엠마를 대신하여 프로방스로 확장되었다. 그의 권력은 툴루즈의 영지에서 약해지지 않았지만 지역 귀족과 성직자 회의에 의해 시장에 부과되는 세금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했다.
7.6. 셉티마니아 변경백령⇒고티아 변경백(후작)령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알라리크 2세가 이끌었던 서고트 왕국 클로비스 1세가 이끌던 프랑크 왕국에 의해 패배하여 수도인 툴루즈가 함락당하자 새로 서고트의 왕이 된 게살레크 나르본을 수도로 삼아 저항을 계속하고자 했다. 얼마 후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은 부르군트 왕국군이 나르본을 함락시켰고, 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로 도피해 그곳을 새 수도로 삼았다.

531년 발티 왕조가 단절되고 동고트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파견한 섭정단 군사 고문을 맡은 테우디스가 서고트 국왕으로 즉위한 후 프랑크 왕국을 상대로 반격을 개시해 국경지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프랑크군이 점령한 셉티마니아 일부 지역을 탈환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고, 나르본을 완전히 떠나 바르셀로나로 천도했다. 다만 수도를 정식으로 정하지는 않았고, 툴레도와 세비야도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다. 그리하여 남부 갈리아를 사실상 포기한 그는 그 대신 이베리아 반도 남부 해안 지역 공략에 초점을 맞췄다.

이후 셉티마니아는 서고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580년 아타나길드의 딸이자 아우스트라시아 왕비인 브룬힐트의 딸 인군트와 결혼했던 서고트 왕자 헤르메네길드가 아버지 리우비길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583년에 진압당했다. 헤르메네길드는 곧 피살되었고, 인군트와 아들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는데, 인군트는 도중에 시칠리아 또는 아프리카에서 병사했다. 브룬힐트는 손자를 돌려받기 위해 마우리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친척, 최고위 인사, 고위 사제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 간청했지만, 마우리키우스는 아나타길드가 인질로 활용하기 적합하다고 여겨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서고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은 전쟁을 벌여 585년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셉티마니아로 쳐들어오자 리우비길드는 아들인 레카레드 1세로 하여금 프랑크 군대를 격퇴하였다.

586년 서고트의 새 왕위에 오른 레카레드 1세가 화해를 촉구하면서 관계가 개선되는 듯했다. 킬데베르 2세는 자신의 여동생인 인군타 공주의 죽음에 대해 10,000솔디를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서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군트람은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레카레드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들을 지원했다. 레카레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트람을 따르는 모든 상인이 셉티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 군트람이 레카레드 1세와 전쟁을 벌일 때 그는 일부 병력을 보낼 뿐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588년, 브룬힐트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게 군트람을 찾아가서 서고트 왕국과의 전쟁을 종식하라고 요구하게 했다. 마침 서고트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해 기세가 꺾여 있던 군트람은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 브룬힐트는 자신의 딸 클로도신다를 레카레드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양자간의 관계를 개선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브룬힐트의 어머니 고이빈타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아리우스파를 탄압하는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하고자 반란을 꾀했다가 발각된 후 곧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자, 양자간의 약혼은 취소되었다. 레카레드는 협상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바도라는 이름의 서고트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리우바 2세를 낳았다.

589년 부르고뉴의 군트람은 다시 카르카손에 오스트로발드를, 보소와 안테스티우스를 다른 도시로 보내 셉티마니아의 침공을 시도했다.레카레드 왕은 클라우디우스 장군을 보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프랑크족을 물리치고 비시고트 통치 하에서 셉티마니아의 영토를 보존했다.

이후 셉티마니아는 8세가 되기까지 서고트 왕위를 노리는 찬탈자들의 본거지 외에는 피레네 산맥 밖에 서고트 왕국의 북쪽 경계의 역할을 맡았다. 다만 레카레드가 서방정교로 개종하면서 셉티마니아는 왕실 직활령인 동시에 나르본 대주교가 통치하던 대주교령이었다. 하지만 700년대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하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기 710년경, 서고트 왕국의 국왕 위티자가 승하했다.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아랍인 역사가[27]가 집필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로데리쿠스가 왕실 자문회의 권유를 받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한다. 위티자가 자연사했는지, 로데리쿠스에게 시해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로데리쿠스의 집권이 정상적인 계승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권한 직후, 아길라 2세가 히스파니아 북동부(타라코넨시스 및 나르보넨시스)에서 반기를 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아길라 2세가 위티자의 아들이었으며, 로데리쿠스의 찬탈로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되자 반발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로데리쿠스와 아길라 2세가 서고트의 왕위를 놓고 내전을 치르고 있을 때,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우마이야군이 이베리아 반도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군의 침략을 번번이 막아내던 세우타의 동로마 제국 총독 율리아누스는 돌연 우마이야 왕조에게 귀순했다.[28] 율리아누스는 우마이야군에게 바다를 건널 선박을 제공하고, 서고트 왕국의 지리, 정치, 군사 등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우마이야군은 이에 따라 이베리아 반도 침공을 개시했다.

결국 711년 과달레테 전투에서 서고트 왕국이 우마이야 왕조에게 패배하면서 711년 툴레도가 함락되었고, 713년 사라고사를 거점으로 삼아 대항하던 아길라 2세를 잡아 죽였다. 서고트 귀족들은 이슬람군의 조직적인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테오도미르 같은 몇몇 귀족은 아예 이슬람군과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누리는 대가로 침략자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셉티마니아도 이슬람의 침략은 피할 수 없어 719년 안달루시아 총독 알 삼 말리크가 파견한 이슬람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721년 나르본을 함락시킨 이슬람 세력은 나르본을 아르부나로 개명한 후 이후 주변 지역들 마저 병탄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이슬람 세력은 셉티마니아를 본거지로 툴루즈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메로비우스 왕가 출신이지만 프랑크 왕국을 장악한 피피누스 가문에게 서 벗어나려는 아키텐 공작 외드가 우마이야 왕조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는 아키텐, 가스코뉴, 툴루즈의 일부 지역들을 점령했지만. 툴루즈에서 이슬람 제국의 북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후, 732년 카롤루스 마르텔이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이슬람 군대와 격돌한 끝에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다시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셉티마니아는 27년 동안 우마이야 왕조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동안 우마이야 왕조의 셉티마니아 통치는 비교적 온건적으로 기독교 신앙 또한 어느 정도 용인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은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자라잡고 있는 이슬람 세력의 잔재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737년 이후로 이슬람 세력이 아르부나로 개명시킨 나르본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현지의 고트-갈로 로만 귀족들은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우마이야 왕조의 원조를 받고 지속적으로 프랑크 왕국에 대항했다. 하지만 750년 우마이야 왕조가 붕괴되고 아바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 제국 전역을 와전히 장악하기 전까지의 공백기 동안 지방 역시 이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는데, 프랑크 왕국의 피피누스 3세는 이러한 틈을 놓치지 않고 752년 나르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당시 셉티마니아 또한 우마이야 왕조의 전복과 함께 새로운 아바스 왕조의 지방 장악과 맞물려 내분이 발생했기에 이때 님을 통치하고 있던 고트계 귀족인 안세문트가 피피누스 3세에게 복종했고, 뒤이어 메르겔, 베지에 등의 도시들 또한 안세문트를 따라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었다.

754년, 에르메니아르가 이끄는 반랑크 반란으로 안세문트는 살해되었지만,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고, 라두르프는 프랑크 궁정에 의해 새로운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755년경 아붓 알라프만 이븐 우쿠바가 우말 이븐 우말을 대신했다. 759년, 나르본은 내부 항쟁이 끊임없이 알 안달루스로부터의 원군을 받지 않았다. 알 안달루스의 왈리, 유수프 이븐 압도 알라프만 알 피프리는 756년 사라고사의 반란을 진압해 곧 남쪽으로 향해 압둘 알라프만 1세와 싸울 필요가 있었지만, 아붓 알라프만 1세는 그를 깨뜨렸다.

이베리아 북동부와 셉티마니아의 나머지 지역은 책임을 지는 적절한 지휘관이 없는 채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르본의 고트-갈로 로만 수비대는 프랑크군에 항복하고, 아랍-베르베르인의 이슬람교도군은 모조리 처형되었다. 카로링거 왕조의 피피누스 3세는 나르본을 장악한 후 고트인들이 프랑크 왕국에 온전히 충성한다면 고트의 전통 법들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셉티마니아의 고트 귀족의 충성을 모으고 있었다.

759년에 나르본이 프랑크인에게 항복한 것은, 피피누스 3세가 도시의 귀족들들에게 서고트족의 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후이며, 이 군은 이슬람 시대의 고트족 백미로에게 주어져 이렇게 독립파 와이퍼공에 대한 셉티마니아 고트족의 충성을 획득했다. 759년에 프랑크인이 나르본을 정복한 후, 이슬람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은 기독교인 프랑크인에게 패하였고, 760년 루시용 지역마저 프랑크 군대에 의해 점령되면서 40년간의 점령을 거쳐 안달루시아의 중심지로 추방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셉티마니아는 고티아로도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셉티마니아 내의 고트족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슬람 제국에 의해 40년 동안 점령되었기에 프랑방스를 남프랑스 일대에서 물라디라 불리는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들이 10세기 초까지 남아 있었다.

777년 바르셀로나의 왈리인 슬레이만 알 아라비와 웨스카의 왈리인 압타울은 카롤루스에게 복종했고, 사라고사의 왈리인 후사인의 복종도 제기했으나. 778년 카롤루스 대제가 북쪽 변졍지 침공했을 때, 후사인은 충성을 거부하고 물려날 수밖에 없었다. 778년 8월 15일, 피레네 산맥에서 바스크 인들은 론세스 바레스의 군대를 격퇴했다.

카롤루스는 세프티마니아와 국경지대가 전쟁에 의해 황폐해 인구가 과소화되어 주민이 산속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서고트족 및 기타 난민에게 최초로 확인할 수 있는 영토의 일부인 토지를 주었다. 또한 셉티마니아에 여러 수도원을 설립했고, 주변 사람들이 보호를 위해 모였다. 셉티마니아를 넘어 남쪽으로 가면 카롤루스는 제국의 국경지대에 에스파냐 변경주를 세우면서 루시용 지역을 에스파냐 변경주에 편입시켰다. 영토는 아키텐의 왕 루도비쿠스 1세에게 넘겨졌지만, 790년 구엘렘 드 겔론을 아키텐 공작이자 툴루즈의 백작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셉티마니아의 변경백작으로 임명하였다. 793년 아브드 알 라흐만 1세(Abd ar-Rahman I)의 후계자 인 히스암 1셉(Hisham I)는 북쪽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히스암은 10만 명의 군사를 모았는데, 그 중 절반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공격하고, 나머지 절반은 랑그독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나르본까지 꿰뚫었다.

구일렘은 나르본까지 올라온 무슬림 세력을 만나 나르본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아랍 군대의 니메스(Nimes)의 재정복에 책임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같은 해 그는 아우데 강(Aude River)변의 전투에서는 대규모 아랍 군대를 상대로 큰 패배를 당했다. 그는 빌리딩에(Villedaigne)의 오르베이유(Orbieu) 강 근처에서 무슬림 군대를 다시 만나 포위되었으나, 구일렘의 완고한 저항이 무슬림 군대를 너무 소진시켜 스스로 스페인으로 후퇴시켰다.

801년 구일렘은 샤를마뉴의 명으로 아키텐의 루도비쿠스와 함께 프랑크, 부르군트, 프로방스, 아키텐 원정에 나섰으며 바스크족이 점령한 가스코뉴 일대와 고트족과 우미야드 왕조가 점령한 바르셀로나 일대를 정복하였다.801년에 그는 루도비쿠스와 바르셀로나를 점령했고, 그 후 짧은 시간 동안 카탈로니아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806년 구일렘은 수도원으로 은퇴하면서 아키텐 공작위는 오베르뉴의 와린 1세에게로 넘어갔으나 툴루즈와 함께 셉티마니아의 통치는 베공 등 파리에게 넘어갔다. 이시기에 셉티마니아는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 후 고티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째든 베공은 816년까지 툴루즈와 함께 셉티마니아를 통치하다가 사망했고, 툴루즌와 셉티마니아의 통치권은 분할되어 툴루즈는 베렝거, 셉티마니아는 프로방스 귀족 출신인 레이볼프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셉티마니아 변경백에 오르면서 남프랑스의 대귀족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824년, 11월 7일자의 헌장은 아를 대주교 노턴과의 토지 교환에 대해 언급되었다. 이 교환은 825년 1월 3일에 루도비쿠스 1세에 의해 확인되었다. 레이불프는 렐란 수도원의 후원자로, 장 피에르 폴리에 따르면, 그는 아를의 하류인 론 강 섬에 있는 산탄드레 드 라 카페 수도원의 창설자라고 한다.

826년 레이볼프가 물려났는데,.고티아의 토지에 대한 프랑크 왕권의 개입에 대한 카탈루냐 제후들의 일제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던 베르나르가 툴루즈의 벨렝게일과 카탈루냐인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면서, 루도비쿠스 경건왕은 베르나르에게 포상으로 9세기의 셉티마니아를 대략 구분하는 일련의 카운티들인 나르본, 베지에, 아그, 마가로나, 님, 유제스 등을 주었다. 이후 베르나르는 루도비쿠스의 궁전에 머물며 그의 측근이 되었고, 루도비쿠스의 막내 아들인 샤를 2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하지만 궁정에 들어온지 몇 달도 안 되어 베르나르는 많은 적을 만들었다. 이듬해 베르나르는 로타리우스 1세의 반란을 일으킨 촉매제가 되었다. 트리어의 테간은 그의 저서 '루드비히 황제의 행적'에서 베르나르가 유디트 황후와의 불륜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썼지만,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830년 4월, 이 소문에 근거하여 브르타뉴인들과 싸우기 위해 렌에 집결한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베르나르는 루드비히의 세 아들이 반란군을 지지했기 때문에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궁정에서 사임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갔다고 「생베르탱 연대기」(Chronicle of Saint-Bertin)는 전한다. 그의 남동생 에리베르트는 궁정에 남았으나 추방되었다. 베르나르는 또한 그의 오툰 백작을 몰수했다.

830년 10월 네이메헌 회의에서 루드비히는 아들들의 반란 이후 베르나르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이후 831년 2월 아헨에서 열린 회의에서 루드비히는 제국을 분할하고 고티아를 카를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루드비히가 죽을 때까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베르나르는 주디스와 샤를의 지지를 되찾으려고 애썼지만, 주디스와 다른 사람들은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831년 10월 티옹빌 공의회에서 베르나르는 황제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눴지만, 궁정에서 예전의 지위를 되찾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는 이전의 충성을 버리고 황제의 적이 되었다.

831년 11월, 아키텐의 왕 피피누스 2세는 그의 아버지 루드비쿠스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툴루즈 백작 벨랑제는 피피누스의 행동을 비난했고, 베르나르는 피핀의 행동을 지지했다. 832년 초, 루드비히는 아들의 반란에 맞서 원정을 시작했다.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벨랑제는 베르나르의 영지를 침공하여 루시옹과 발레스필을 점령했고, 라제세와 콩플랑마저 점령했다. 832년 2월 2일, 벨랑제는 엘네에 도착했다.

결국 황제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고, 832년 10월 피피누스와 베르나르는 황제 앞에 끌려갔다. 피핀은 아키텐의 왕좌를 잃고 죄수로서 트리어로 보내졌는데, 그의 모든 재산은 그의 이복동생 샤를의 소유로 돌아갔다. 베르나르는 배신 혐의로 기소되어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셉티마니아와 고티아에서 모든 재산을 잃었으며 모두 벨랑제 백작에게 주어졌다. 그의 형제 고셈 역시 재산을 잃은 것으로 보이지만, 한동안 그의 해고를 무시하고 암푸리아스 백작에 머물렀다.

843년 샤를 2세에 대해 봉기한 베르나트는 툴루즈에서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고티아의 베르나토로 알려진 베르나트의 아들은 865년부터 878년까지 바르셀로나와 지로나의 백작을 맡았고, 또한 고티아와 셉티마니아 변경백을 맡았다.

833년, 이번에는 로타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피핀, 베르나르, 고셈이 루드비쿠스를 따르고 있었다. 834년 3월 1일 로타리우스의 군대가 패배하고 루드비쿠스에게 권력이 돌아온 후, 베르나르는 루드비쿠스의 병력 손실에 대해 불평하고 루드비쿠스에게 그의 영지를 회복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벨랑제는 여전히 합법적으로 영지를 통제했다. 이러한 이유로 황제는 베르나르에게 자신의 재산을 돌려주는 것을 꺼렸지만, 835년 6월 베르나르와 벨랑제를 리옹 근처의 크레미외에서 열린 회의에 소집하여 자신의 결정을 전달했다.

그러나 벨랑제가 이 소집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죽었을 때 아무런 방해가 없었고 황제는 셉티마니아와 백작령, 툴루즈를 베르나르에게 돌려주었다. 암푸리아스와 루실론은 각각 수니에 1세와 알라리크에게 주어졌고, 우르헬과 살다냐는 아즈나르 갈린도 1세에 의해 툴루즈에서 단절되었다. 베르나르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카르카손 백작 올리바 1세의 동생인 스니프레 1세는 아즈나르 갈린도 1세를 축출하기 위해 우르헬과 살다냐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베르나르는 자신의 영토로 돌아갔지만, 한때 벨라와 벨랑제를 지지했던 그의 영토의 고트족은 다시 베르나르와 갈등을 빚었다. 838년 9월, 키이시=수르=오에르 공의회에서 베르나르에 대한 10가지 혐의가 제기되었다. 841년부터 베르나르는 제국 내부의 분쟁에 참여하기 위해 종종 영지를 떠나 있었고, 영지의 감독은 그의 부백작에게 맡겨졌다.

베르나르는 841년 6월 25일에 발생란 퐁트노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서프랑크의 왕 샤를 2세와 동프랑크의 왕 루트비히 2세는 그의 형제 로타리우스 1세에게 패배했다. 로타르의 군대는 남쪽으로 후퇴했다. 베르나르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입장을 취했고, 결과가 결정되자 아들 기욤을 샤를 2세에게 전령으로 보내 샤를의 봉신에 감사를 표하고 아버지 베르나르가 피피누스 2세의 아들 피피누스 3세를 항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샤를 2세는 842년 아키텐 원정에서 베르나르를 처벌하기로 결정했고, 6월에는 툴루즈 백작을 몰수하여 오플에게 주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이 결정을 거부하고 피피누스 3세와 동맹을 맺어 843년 툴루즈에서 아쿠프레를 몰아냈다. 이에 샤를 2세는 프로방스 공작 겔랑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겔랑은 842년 군대를 이끌고 아키텐으로 향했다. 나중에 바이킹의 침략과 브르타뉴의 습격과 같은 다른 사건으로 인해 제국 내의 분쟁을 종식시킬 필요가 있었고 843년 8월 샤를, 루트비히 및 로타리우스, 세 형제 간에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이때 셉티마니아와 고티아는 서프랑크의 왕이 된 샤를 2세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베르나르가 다스리던 우제스 백작은 로타르의 소유였다. 또한 오랫동안 베르나르의 소유였으며 그의 아들들이 나중에 주장했던 오툰 백작은 프로방스 공작 겔랑에게 주어졌습다.

844년, 샤를 2세는 피피누스 3세를 항복시키고 툴루즈를 정복하기 위해 다시 아키텐으로 왔다. 844년 툴루즈 전투에서 베르나르는 툴루즈 침공 당시 샤를의 군대나 우제에서 겔랑에게 포로로 잡혔다. 844년 5월, 베르나르는 샤를 앞에 끌려가 샤를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6월 14일, 피피누스 3세와 베르나르의 아들 기욤은 앙구무아에서 샤를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베르나르의 재산은 이전에 아라곤에서 아즈나르 갈린도 1세의 항복을 강요하는 임무를 맡았던 수니프레드에게 주어졌다. 수니프레드는 전임자처럼 공작 칭호를 얻지 못했지만 그가 비슷한 권한을 행사했다. 그 패권은 고시아와 셉티마니아에 이르렸다. 847년 12월, 아부드 알라프만 2세가 평화조약의 체결을 요청하였다.

수니프레드는 848년에 사망했고, 샤를 2세는 셉티마니아 변경주의 통치자로 트루아 백작 알레랑과 오툰의 이셈바르트가 공동으로 지명했으나 베르나르의 아들인 툴루즈와 바르셀로나 백작인 기욤이 이의를 제기해 반기를 들어 아키텐의 피핀 3세를 지지하면서 후우마이야 왕조 압드 알 라흐만에게 원조를 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노골적으로 반역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압드 알 라흐만 또한 에스파냐 변경주와 접하고 있는 지역의 타이파들에게 기욤을 도울 것을 지시한다.

849년 여름 샤를 2세는 아키텐 공격했을 때, 프레데로는 툴루즈의 문을 열고 그를 환영했고, 국왕은 프레데로의 서작을 재확인했다. 피핀 3세은 서둘러 도망했고, 샤를은 나르본으로 진군했고, 아레란을 바르셀로나, 엠퓰리에스, 루시용 백작 및 셉티마니아 변경백으로 임명했다. 그는 윌프레드에게 지로나 카운티와 베살루 카운티를 주었고, 솔로몬은 세르다냐 카운티, 우르젤 카운티, 컨프렌트 카운티를 주었다.

850년 2월 샤를 2세가 아키텐으로 진군하고 귀족들이 일제히 피핀 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때, 가스코뉴 공 산초 2세 산체스는 보르도를 제압하고 기욤 1세는 카탈루냐에서 진군했으나 샤를 2세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했다. 기욤은 바르셀로나로 도망쳤만, 그곳에서 샤를 2세의 지지 세력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셉티마니아는 샤를 2세의 의향대로 트루아 백작 알레랑과 오툰의 이셈바르트가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852년 바르셀로나 오달릭에게로 통치권이 이양되었다. 이후 오달릭은 에스파냐 변경주를 침탈하는 후우마이야 왕조와 싸우다가 858년 사망하였고, 유니프레드가 고티아의 후작이 되었고, 오달릭이 소유하고 있던 에스파냐 변경주의 바로셀로나와 지로나, 엠퓌리스 백작령 또한 소유하게 되었다.

셉티마니아의 변경백이 된 유니프레드는 직후 코르도바의 세 명의 순교자, 조지, 아우렐리우스, 나탈리의 유골을 생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으로 이장했다. 858년 초 사라고사의 왈리인 압두 알 우와르와 평화조약을 협상한 후 샤를 2세를 돕기 위해 부르고뉴에 가면서 대리 통치를 위해 부백작들을 임명했다. 3월 21일에는 샤를 2세가 소집한 퀴르지 총회에 참석했고, 9월 유니프레드는 샤를 2세가 이복 형인 루트비히 2세와 전쟁하고 있는 동안 본느로 돌아와서 병력을 모집했다. 859년 1월 15일, 샤를 2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산칸탄 전투에서 그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프로방스 지방을 두고 동프랑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는 것과 서프랑크 내에서 지속적으로 약탈을 한ㄴ 바이킹들에 대한 대처 또한 실패하면서 프랑크 귀족의 일부 불만을 품고 샤를 2세에게 적의를 보이기 시작했고,. 아키텐 왕국에서는 특히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고, 샤를 2세의 아들로 아키텐 분국왕 소년 샤를은 후견인 오베르뉴 에티엔 백작에 부추김에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샤를 2세의 실패는 왕국의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유니프레드도 그것에 합류하면서 남프랑크 일대는 반란 세력들이 거의 장악하게 되었다.

862년 8월 19일, 샤를 2세는 궐석 재판으로 유니프레드를 비롯해 남쪽의 반역을 저지르거나 참여한 귀족들. 귀족 신분을 말소했다 하지만 유니프레드는 바르셀로나, 오소나, 나르본느, 아그, 베지어, 메르게유, 님의 각 카운티의 지배를 여전히 유지했다. 862년 말에 그의 두 대리인들인 램버트와 아다울프는 여전히 나르본느에서 탄원을 계속했다. 863년 유니프레드는 툴루즈 시를 점령하고 툴루즈 카운티, 파랄 카운티, 리바 고르세 카운티를 점령했다. 샤를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툴루즈 백작 레몽은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동시에 에티엔느는 오베르뉴 백 베르나르를 추방했다.

그러나 이 순간, 상황은 유니프레드와 그 동맹자에게 불리하게 되었다. 샤를 2세는 그의 군대가 유니프레드와 예티옌의 부르고뉴의 영지를 점령하게 했다. 에티엔이 소유한 누베르에서 소년 샤를은 아버지에게 복종했다. 동시에 우르젤 백과 세르다뉴 백의 살로몬은 코르도바 수장 무하마드 1세를 유니프레드와의 동맹으로부터 돌리기 위해 그와 평화와 중립 조약을 협상했다. 863년 10월 말 베르베리에서 개최된 집회에서 평화가 확인되어 유니프레드는 고립되었다.

863년, 노르만인은 로베르 르 포르에 의해 루아르로 밀려났고, 아키텐으로 향해 산토에 도달했다. 10월 4일, 앵글렘 투르피온 백작이 시로의 습격으로 살해되었고, 노르만인은 푸아티에, 페리구, 리모주의 각 군을 약탈했다. 864년, 서프랑크 군대가 오베르뉴와 클레르몬에 도착했지만, 거기서 전사한 에티엔이 있었다. 그들은 또한 피핀 3세가 포로가 된 보르도를 점령했다. 그 후 그들은 갈론 강을 거슬러 올라가 툴루즈로 향했지만, 샤를 2세의 군대에 의해 밀려났다. 그 직후, 유니프레드는 단신으로 이탈리아에 도망했다. 샤를 2세는 반역자들의 재산들을 모조리 몰수해 딘압에 참여한 귀족들에게 분배했다. 고티아 변경백령은 길 헬미데스 가문의 베르나르 드 고티로 옮겨지고, 툴루즈 백작은 레몽 1세의 아들 베르나르에게로 돌아갔다.

베르나르는 고티아 후작과 에스파냐 변경주에 속한 바르셀로나와 지로나의 백작이 되면서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이었던 람루프 1세가 사망하자 푸아티에를 합병하려고 했지만 샤를 2세의 당시 아키텐 분국왕인 루이 2세의 제지를 받았다.

아키텐 왕의 궁정에서 그는 오베르뉴와 툴루즈 백작 베르나르 플랑테벨뤼, 그리고 아를 백작 보송과 동맹을 맺고 궁정의 다른 파벌에 대항했다. 872년에, 그들은 말더듬이 루이 왕에게 그의 고문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그들을 임명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세 사람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고, 왕은 부르쥬 백작령을 보손으로부터 빼앗아 고티아의 베르나르에게 주었고, 마콩과 오툰의 백작 에카르드가 죽자 고티아의 베르나르에게 베르나르 플란트벨루가 탐내는 아우툰 백작령을 주었다.

875년, 샤를 2세가 서방의 황제로 선출되어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877년, 그는 사라센의 위협을 받은 교황 요한 8세에 의해 소환되었다. 샤를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갔지만, 이탈리아를 점령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카 카를로만에게 막혔다. 샤를은 왕국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전갈을 보냈지만, 보손, 수도원장 위그, 베르나르 플랑테벨뤼, 고티아의 베르나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머리 샤를은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대머리 찰스의 죽음은 반란의 이유를 종식시켰고 대수도원장 위그는 새로운 왕 인 루이 2세의 수석 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고티아의 베르나르는 포기하지 않고 새 왕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영지에서 왕처럼 행동했다. 877년 대수도원장 휴 (Hugh the Abbot)는 푸아티에 (Poitiers) 카운티를 박탈하여 람눌프 1세의 아들 인 람눌프 2세 (Ramnulf II)에게 주었다. 베르나르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878년 트루아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8세에 의해 파문되었다. 그는 베르나르 플란테벨뤼에 의해 패배했고 그의 재산은 여러 귀족들에게 분배되었고, 고티아 또한 베르나르 플랑테벨뤼에게로 넘어갔다[29]

고티아의 베르나르의 자리를 차지한 베르나르 플란테벨뤼에는 툴루즈의 루에루그 백작령을 차지하였고, 885년 동프랑크의 뚱보왕 카를 3세가 서프랑크의 왕위까지 차지한 이후 카를 3세로부터 아키텐 후작의 칭호도 받다가 886년에 사망하고 아들인 경건한 기욤이 물려받게 되었다.

기욤은 고티아로도 불리는 셉티마니아 뿐만 아니라 오베르뉴, 마콩, 리무쟁, 리옹 등의 백작을 겸하고 있었고,889년 부르주의 백작 또한 겸하게 되었다. 이후 893년 아키텐마저 얻으면서 아키텐 공작으로 불리게 되었다. , 그의 치세는 클루니 수도원의 설립 헌장을 수여하면서 헌장의 내용 중 헌장을 존중하지 않는 자에 대한 종교적 경고 조항을 많이 명시했다.

909년 9월 11일에 클루니 수도원을 설립하고 베르논 드 봄을 수도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수도원은 기욤으로 부터 방대한 장원을 받았고, 교황에게 5년마다 세금을 내는 것 외에 경건한 기욤의 보호를 받으며 큰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대신 경건한 기욤과 그의 가계가 단절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야 했다.

이후에도 기욤은 영지 내의 수도원 건립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다. 898년 이전에 그는 부르고뉴-프로방스의 비엔느 보손 국왕과 에르만가르드 왕비의 딸인 잉겔베르게와 결혼해 자식들은 낳았으나 이중 유일한 아들인 보소가 먼저 죽었다. 결국 918년 경건한 기욤이 사망하고 카르카손과 라체스 백작인 아크프레드 1세와 결혼한 누이 아델린다의 아들 중 한명인 기욤 2세가 공작위를 승계하게 되지만 고티아의 경우 툴루즈 백작 외드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외드의 고티아 통치 또한 1년을 넘지 못하고 외드가 사망하게 되었고, 툴루즈는 장남인 레몽 2세, 고티아는 에르맹고가 분할해 가지게 된다.

하지만 고티아 후작령은 툴루즈 백작령에 사실상 종속된 상태였다. 에르맹고와 그의 아들인 루에루그의 레몽 1세와 손자인 레몽 2세의 시기의 고티아는 봉건제의 물결을 피하지 못했다. 샤를 3세는 셉티마니아의 교회와 수도원에 많은 이권을 주었고, 10세기에 첫 번째 성이 도시에 지어졌고, 신도들이 종교적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10세기 말에 기욤이란 이름의 부백작은 베지어와 주교직을 딸에게 유증했습니다.

에르맹고는 형인 툴루즈의 레옴 2세가 924년 죽은 이후 932년 라울에게 충성 맹세를 한 이후 고티아 후작임을 인정받았다. 이후 에르맹고가 937년 사망한 이후 자리를 승계한 루에루그의 레몽 1세의 경우 지배권을 알비와 님, 리무진까지 확장은 해 아키텐의 가장 강력한 영주로 부상했지만 961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가던 중 누군가에 의해 암살당했고, 그의 지위는 레몽 3세가 승계했다. 레몽의 치세는 987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으며, 같은 해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고 위그 카페를 왕으로 하는 카페 왕조가 들어설 당시 남부의 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키텐과 툴루즈에 종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당히 독립적인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1] 858년 샤를 2세에 대항하는 반란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그 만큼 로베르 같은 불순분자를 그대로 면죄하고 중용할 만큼 샤를 2세의 치세는 불안정했다. [2] 팔 씨름 잘하는 [3] 다만 영문,이탈리아 위키에는 유디트 만나기 전에도 이미 백작이였고 그의 할아버지가 샤를마뉴 대제의 차남인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의 사생아였다고 써있다. # # [4] 상술하였듯, '팔씨름 잘하는 대담한 녀석'이라는 뜻.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초로 성씨 이름이 탄생할 때는 다 이런 식이었다. 즉, 개인의 특성이나 별명, 혹은 그 개인에게 기원하는 바를 따라서 본명을 짓고, 연고지나 조상 및 가문의 특성(명망있는 선조 이름 그자체도 포함)을 따라서 성명을 지었는데, 후대에는 본래 어감이나 뜻이 일상에서는 거의 잊힌 채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러한 면은 오늘날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작명하는 순간에만큼은 여전히 고려되는 편이다. [5] 정확히는 고벨프 가문 [6] 피카르디우아즈주 의 도시 [7] 카페 왕조의 창건자인 위그 카페의 부친이다. [8] 당시 블루아 백작 티보 1세는 위그 드 그랑의 생전 당시만 하더라도 최측근이으로 신뢰받던 인물이었다. [9] 다만 이당시 위그 카페의 또한 상술한 대로 아버지 위그 드 그랑이 죽으면서 미상년자였기에 아버지의 봉토와 직함을 물려받기 위해 카롤링거 왕가로부터 네우스트리아의 속한 모든 봉신들의 정치적 독립을 강요받았기에 카롤링거 왕조를 꼭두각시로나마 살려둬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10] 사실 아달베롱이 태후인 이탈리아의 엠마와 정치적 파트너였기에 그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위그 카페의 모략이다. [11] 위그 카페의 친구로서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의 왕이 된 이후에도 그의 최측근으로서 카페 왕조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충신이다. [12] 직할지는 파리, 일드 프랑스 내의 푸아시, 오드 프랑스 남부의 샹리스, 북부의 몽트뢰유, 상트르 발 드 루아브의 오를레앙 일대이다. 이후 995년 전후로 생긴 영향권 하에 있는 봉신들의 영지는 일드 프랑스 대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주의] 해당 지도에 카페 왕조의 세력권이 피카르디 지방 전체를 통제하면서 도버해협까지 닿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나 여전히 베르망두아 백작령에 속해 있어 정확히는 샹리스와 보배까지가 카페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이 타당하다 [14] 정확히는 이때 가우(gau)로 불렸다. 카운티라는 명칭은 9세기 전후에 가우를 대체했다. [주의] 해당 지도에 카페 왕조의 세력권이 피카르디 지방 전체를 통제하면서 도버해협까지 닿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나 여전히 베르망두아 백작령에 속해 있어 정확히는 샹리스와 보배까지가 카페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이 타당하다 [주의] 해당 지도에 카페 왕조의 세력권이 피카르디 지방 전체를 통제하면서 도버해협까지 닿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나 여전히 베르망두아 백작령에 속해 있어 정확히는 샹리스와 보배까지가 카페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이 타당하다 [17] 카운티라는 행정 단위가 생기기 전까지의 지방 행정 단위로 가우(gau)와 같은 의미로 혼용되었다. [18] 장남인 샤를은 일찍 요절했다. [19] 보두앵 2세의 어머니인 유디트는 알프레드의 아버지 애설울프와 형들 중 한명이었던 애설볼드의 왕비였다. [20] 로베르 1세의 뒤를 이어 서프랑크 왕이 된 비카롤링거 왕가의 왕 라울의 아버지로 프로방스 왕을 자칭한 보소의 동생이기도 했다. [21] 당시 상스 뿐만 아니라 주와니, 몬테로폴트욘, 생 플로랑탱 등의 지역들에 걸친 백작령이었다. [22] 전투 후 시그트리크는 부상을 입은 상태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다가 르아브르에서 샤를 2세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23] 서고트 측 기록에 따르면 6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24] 정확히는 딸 둘만 있었다. [25] 사실 위그의 어머니 베르타는 두번째 결혼 때 마로치아의 전 남편이었던 귀도를 낳았기 때문에 이 결혼은 교회법상 성립하기 어려웠지만, 위그는 어머니가 두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녀들의 존재를 지우면서까지 밀어붙였다. [26] 996년 노르망딩 공작을 자처함. [27] 모사라베(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인)로만 알려졌을 뿐 신원은 불명이다. [28] 자기 딸인 플로린다 라 카바가 로데리쿠스 왕에게 강간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귀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9] 베르나르 드 고티아는는 오탄에서 전투을 계속했지만 879년 봄에 빼앗겼고, 프로방스로 도주해 보손의 봉신이 되었다. 이후 보손이 프로방스에서 왕을 선언했을 때, 그는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에서 마콘을 지킨 것 같지만, 마콩이 점령되면서 베르나르의 행방은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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