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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 프랑크인의 왕 Theudebert I | 테우데베르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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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테우데베르 1세 |
프랑스어 | Theudebert I | |
출생 | 500년경 | |
사망 | 547년 / 548년 (향년 46~48세) | |
재위 기간 | 랭스 프랑크인의 왕 | |
533년 / 534년 ~ 547년 / 5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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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랭스 프랑크 왕국의 왕.2. 행적
500년경 테우데리크 1세와 부르군트 왕 지기스문트의 딸 수아베고타의 아들로 출생했다. 여동생으로 테우데칠트가 있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일찍부터 위엄을 갖추고 활동적인 성품으로 아버지가 통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여러 전쟁에 참여해 승리에 일조했다고 한다. 531년 또는 532년, 아버지의 튀링겐 정벌전에 참여해 운스트루트 강 전투 승리에 일조했으며, 튀링겐 왕 헤르만프리드가 숨은 줄피히(Zülpich) 성 공략에 기여했다.532년 아버지가 오베르뉴 정벌에 착수하는 동안, 그는 클로타르 1세, 킬데베르 1세와 합세해 부르군트족 정벌전에 뛰어들어 534년에 부르군트족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영역을 분할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이 탈취한 로데츠와 알비를 되찾기 위한 클로타르 1세의 원정에 참여했다. 이때 클로타르 1세는 로데츠에 도착한 뒤 알 수 없는 이유로 철수했지만, 그는 베지에 장악에 성공했다. 그는 베지에에서 데오테리아라는 젊은 여성을 만나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에 흠뻑 빠져 애인으로 삼았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아를 시가 테오도리크 1세에게 인질을 보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아를 역시 무력으로 복종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533년, 친척 시기발트가 클레르몽에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재산을 빼앗았고 부하들이 절도, 살인, 강도 등 여러 범죄를 저지르는 걸 방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테우데리크 1세는 시기발트를 불러들여 단칼에 죽여버렸다. 이후 아들 테우데베르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시기발트의 아들 시기발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테우데베르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기에 편지를 시기발트에게 보여주고 이탈리아로 도망쳐서 조용히 살게 했다.
533년 말 또는 534년 초, 테우데리크 1세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왕국에 도착하지 않으면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랭스를 빼앗아갈 것을 우려해 서둘러 랭스로 향했다. 도중에 클레르몽에서 임신한 데오테리아를 남겨두고 여정을 이어갔다. 그러나 테우데리크 1세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 이에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가 즉시 군대를 일으켜 랭스를 공략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서고트 왕국과의 전쟁에서 확보한 전리품을 랭스 일대에 주둔한 프랑크군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자, 이에 감화된 그들이 선왕의 아들을 받들기로 결의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유산을 무사히 물려받은 그는 두 왕에게 뇌물을 줘서 자신을 인정하게 했다. 이후 데오테리아를 클레르몽에서 데려와서 결혼했다. 얼마 후, 그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한 시기발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왔다. 그는 시기발트를 환대하면서, 테우데리크 1세가 몰수했던 재산을 돌려주게 했다.
536-537년, 킬데베르 1세는 클로타르 1세와 함께 프로방스를 공략한 뒤 이곳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결국 클로타르 1세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동원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킬데베르는 "내게는 아들이 없으니 네가 내 아들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며 막대한 선물을 줬다. 테우데베르는 잘만 하면 클로타르 1세를 꺾고 그의 영지를 빼앗고 후에 킬데베르 1세가 사망하면 그의 영지마저 접수해 프랑크 왕국 전체를 차지할 호기라고 여기고 이를 받아들었다. 두 왕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클로타르 1세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투르의 수녀원에 있던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의 어머니 클로틸데는 하느님에게 아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킬데베르 1세와 테우데베르 1세가 합세한 장소에서 번개와 천둥이 내리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반면 클로타르 1세의 진영에는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이에 공포를 느낀 두 사람은 바닥에 엎드린 채 형제를 해치려 한 죄를 회개할 테니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윽고 날씨가 개이자 클로타르 1세와 화해한 뒤 즉시 철수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내치에 전념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랭스에서 나라를 공정하게 다스렸고 주교들을 공경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기꺼이 많은 선행을 했다고 한다. 또한 파르테니우스, 아스테르올루스, 세쿤딘 등 교양 있고 유능한 갈리아-로마 고문들로 둘러싸인 채 정치를 잘 이끌었다고 한다.
이 무렵,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를 탈환하기 위해 동고트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테우데베르 1세는 이에 경각심을 품고 게피드족 및 랑고바르드족과 협약을 맺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때 랑고바르드 족장의 딸 비지게르다와 결혼해 관계를 굳건히 했다. 사실 그는 데오테리아와 7년간 함께 살면서 아들 테우데발트를 낳았지만, 프랑크 귀족들이 데오테리아의 미천한 기원에 반감을 품자 어쩔 수 없이 데오테리아와 이혼하고 비지게르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의 팽창에 경각심을 품었지만, 동고트 왕 비티게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동로마 장성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의 위명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고, 자국의 국력이 동로마 제국과 정면 대결하기엔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538년 밀라노가 동로마 제국에 호응하여 동고트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비티게스는 자력으로 반란을 토벌하기엔 로마군과의 전쟁이 급했기에 그에게 다시 한번 구원을 요청했다. 그는 고심 끝에 프랑크인이 아닌 부르군트 출신의 10,000명을 파견해, 동고트 왕국을 도우면서도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파탄내지 않으려 애썼다. 부르군트인과 연합한 고트군은 밀라노를 포위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539년 3월에 함락시키고 철저하게 파괴한 뒤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은 부르군트인들에게 넘겼다.
539년 여름, 비티게스로부터 "라벤나에서 포위된 우리를 도와준다면 북이탈리아 전체를 주겠다"라는 제안에 넘어간 테우데베르 1세는 대군[1]을 일으켜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강에 도달한 뒤 강의 양안에 진영을 세웠다. 동고트군은 그들을 환영했지만, 프랑크인들은 돌연 태도를 바꿔 이들을 물리치고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동로마 군대도 싸움을 걸었다가 패하고 토스카나로 후퇴하였다. 동로마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그가 "갈리아에서 채굴된 금으로 볼로냐에서 금화를 주조했는데, 관습에 따라 로마 황제의 형상을 쓰지 않고 자신의 형상을 새긴 최초의 야만인 왕이었다"라며 분개했다. 그러나 프랑크 진영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프랑크 사절이 비티게스를 접견하여 동맹을 제안하였으나, 저번 침략을 기억하던 비티게스는 이를 불신해 거부했다.
541년, 테우데베르 1세는 알레만니 장군 부틸루스를 이탈리아로 파견해 리구니아 일부 지역과 알프스 산맥 지역 및 대부분의 베네티 지역을 공략하고 공물을 부과하게 했다. 하지만 토틸라와 로마의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다 547년 말 또는 548년 초, 중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사후 아들 테우데발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생전에 통치를 잘 했지만, 전쟁을 연이어 벌이는 과정에서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인두세를 도입하여 프랑크 평민들의 불만을 샀다. 그들은 왕이 죽은 뒤 인두세 도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파르테니우스를 붙잡아 돌로 쳐 죽였다. 한편, 아스테르올루스와 세쿤딘은 왕의 생애 동안 서로 다투었고, 종국엔 세쿤딘이 아스테르올루스를 죽였다. 테우데베르 1세는 세군딘의 재능을 아껴 불문에 부쳤다. 왕이 사망한 뒤 아스테르올루스의 아들이 복수하려 하자, 세쿤딘은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적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1]
마리우스 연대기에 따르면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