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9:34:25

테르트리 전투


1. 개요2. 상세

1. 개요

687년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궁재 피핀 2세가 네우스트리아 - 부르군트 연합군을 솜 일대의 테르트리에서 격파한 전투. 카롤루스 가문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상세

서기 639년, 프랑크 왕국 메로베우스 왕조의 군주 다고베르 1세가 사망했다. 이후 왕국은 두 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왕국의 동부 일대인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은 시게베르 3세가, 서부인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은 클로비스 2세가 물려받았다. 그러나 어린 왕들은 유력 귀족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렸고, 결국 아우스트라시아의 권력은 피핀가의 수장인 그리모알드에게 넘어갔고,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분국은 바틸드 왕비가 통치했다. 이후에도 어린 왕들이 잇달아 즉위했다 일찍 죽었고, 궁재가 왕을 대신해 나라를 대신하는 구도가 이어지면서, 궁재를 둘러싼 대가문 간의 기나긴 분쟁으로 왕국은 쇠락해졌다.

680년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를 맡은 피핀 2세는 네우스트리아와 수 차례 전투를 치렀다. 680년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브로인을 상대로 치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위기를 맞이했지만, 얼마 후 에브로인이 암살당하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681년 에브로인의 뒤를 이은 와라튼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와라튼이 아들 기슬마르에 의해 폐위되면서 파기되었다. 기슬마르와 그의 후계자인 베르차르는 피핀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두 분국 간의 전쟁이 다시 한 번 발발했다. 이때 베르차르에게 소외된 많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피핀에게 가담하면서, 전세는 피핀에게 유리해졌다.

687년 군대를 일으킨 피핀 2세는 뫼즈 강을 따라 이동했다. 프랑크 국왕 테우데리크 3세는 피핀 2세의 강대한 권력을 경계하여 베르차르의 편을 들었고, 베르차르는 군대를 일으켜 피핀과 맞설 태세를 갖췄다. 피핀 2세는 평화 협약을 제안했지만, 테우데리크 3세는 베르차르의 조언에 따라 거절했다. 이에 피핀은 새벽에 군대를 뫼즈 강 건너편에 은밀히 이동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베르차르는 적 군영이 텅 비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군영으로 들어가서 버려진 물자를 약탈했다.

이때 사전에 매복하고 있던 피핀의 군대가 덮쳤고, 베르차르의 군대는 별다른 대항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베르차르는 적군에게 쫓기다 끝내 피살되었다. 이후 피핀은 수도 파리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붙잡았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하지는 않고,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까지 맡으면서 프랑크 왕국 전역의 궁재가 되었다. 이후 테우데리크 3세가 사망하자, 그는 새 국왕을 직접 선택해 자기 말을 듣게 하였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절대 권력은 그와 카롤루스 가문의 수중에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