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num Francorum 프랑크인의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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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 프랑크인의 왕 Theuderic III | 테우데리크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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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테우데리크 3세 |
프랑스어 | Theuderic III | |
생몰 년도 | 657년 ~ 691년 | |
재위 기간 |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 | |
673년(1차 재위) 675년 ~ 6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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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인의 왕 | ||
679년 ~ 6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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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 분국의 왕이었다가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왕.2. 행적
657년 클로비스 2세와 바틸다의 3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으로 클로타르 3세와 킬데리크 2세가 있었다. 673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을 맡고 있던 킬데리크 2세가 죽었다. 당시 네우스트리아의 궁재이자 프랑크 왕국 서부의 권신 에브로인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과 어떠한 논의도 없이 그를 새 군주로 내세웠다. 부르군트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와 형제인 파리 백작 바렌 등 주교들은 에브로인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감을 품고 킬데리크 2세와 궁재 울포알드에게 에브로인을 몰아내준다면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킬데리크 2세는 파리로 진군해 귀족들의 호응을 얻었고, 테우데리크 3세와 에브로인은 삭발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생드니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에브로인은 부르군트의 룩셀 수도원으로 보내졌다.675년 킬데리크 2세가 사냥 도중 암살당했다. 그는 수도원에서 소환된 뒤 귀족들에 의해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때 에브로인과 레오데가리우스가 궁재 자리를 놓고 대립한 끝에 에브로인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그는 레오데가리우스와 함께 도주했다. 에브로인은 권력을 장악하고 레오데가리우스를 암살한 뒤 한 소년을 클로타르 3세의 아들이라고 내세우며 클로비스 3세로서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모든 귀족이 호응하지 않자, 그는 클로비스 3세를 도로 폐위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복위했다. 아무런 실권이 없던 테우데리크 3세는 에브로인이 궁재로서 통치를 행사하는 걸 방관했다.
677년, 에브로인은 테우데리크 3세를 대동하여 아우스트라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는 이에 맞서 다고베르 2세와 함께 출진했다. 양군은 랑그르에서 맞붙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678년, 에브로인은 왕을 부추겨 주교 평의회를 소집한 뒤 오툉의 레제 주교를 킬데리크 2세 암살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없었지만, 에브로인의 권세를 두려워한 주교들은 유죄를 평결했고 왕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679년, 울포알드와 다고베르 2세가 잇따라 살해되었다. 에브로인은 아우스트라시아를 병합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테우데리크 3세를 프랑크 전역의 단독 군주로 선포했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인 피핀 2세와 상파뉴 공작 마르틴이 반기를 들었다. 680년, 에브로인은 루코파오 전투에서 두 귀족을 격파한 뒤 아우스트라시아 대부분을 초토화했다. 피핀 2세는 자신의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마르틴은 랑트로 피신했다가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에브로인의 말을 믿고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가 피살당했다. 이제 에브로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얼마 후 그의 잔혹한 성정에 반감을 품은 에르멘프레드에게 궁정에서 살해당했다. 에르멘프레드는 보물들을 챙기고 피핀 2세에게 달려가 귀순했다.
피핀은 새로운 네우스트리아 공작 와라톤과 평화 협약을 맺고 테우데리크 3세의 권위를 인정하되 자신 역시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로 인정받았다. 686년 와라톤이 아들 지젤마르에게 폐위된 후, 처남 베르차르가 뒤를 이었다. 와라톤의 아들 지젤마르와 베르차르는 경쟁자들을 최대한 배제해 권력을 유지하길 희망했고, 이로 인해 많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갖은 탄압에 시달리다가 피핀 2세에게 귀순했다.
687년 군대를 일으킨 피핀 2세는 뫼즈강을 따라 이동했다. 프랑크 국왕 테우데리크 3세는 피핀 2세의 강대한 권력을 경계하여 베르차르의 편을 들었고, 베르차르는 군대를 일으켜 피핀과 맞설 태세를 갖췄다. 피핀 2세는 평화 협약을 제안했지만, 테우데리크 3세는 베르차르의 조언에 따라 거절했다. 이에 피핀은 새벽에 군대를 뫼즈 강 건너편에 은밀히 이동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베르차르는 적 군영이 텅 비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군영으로 들어가서 버려진 물자를 약탈했다.
이때 사전에 매복하고 있던 피핀 2세의 군대가 덮쳤고, 베르차르의 군대는 별다른 대항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베르차르는 적군에게 쫓기다 끝내 피살되었다.( 테르트리 전투) 이후 피핀은 수도 파리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붙잡았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하지는 않고,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까지 맡으면서 프랑크 왕국 전역의 궁재가 되었다. 피핀 2세는 680년대 중반부터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국경을 위협하던 프리지아 부족들을 공략, 원정하여 689년에 물리치고,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알레만니족과 프랑코니아를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켰고, 영향력을 공고히했다. 알레만니아와 바이에른에 기독교 선교사 파견과 수행을 도와 기독교 선교를 지원, 장려했다.
테우데리크 3세는 네우스트리아 귀족 안제기젤의 딸 클로틸데와 결혼하여 아들 클로비스 4세와 킬데베르 4세, 딸 프룸의 베르트라다[1]를 낳았다. 691년 3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장남 클로비스 4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