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804000 0%, #A52A2A 20%, #A52A2A 80%, #804000); color: #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테르빙기 왕조 | ||||
초대 | 2대 | 3대 | 4대 | 5대 | |
아리아리크 | 아오리크 | 아타나리크 | 알라비부스 | 프리티게른 | |
발티 왕조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알라리크 1세 | 아타울프 | 시게리크 | 왈리아 | 테오도리크 1세 | |
발티 왕조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토리스문드 | 테오도리크 2세 | 에우리크 | 알라리크 2세 | 게살레크 | |
발티 왕조 | |||||
섭정왕 | 제11대 | - | - | - | |
테오도리크 대왕 | 아말라리크 | - | - | - | |
동고트 계열 국왕 | |||||
초대 | 제2대 | - | - | - | |
테우디스 | 테우디기셀 | - | - | - | |
아리우스파 국왕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 |
아길라 1세 | 아타나길드 | 리우바 1세 | 리우비길드 | - | |
가톨릭 국왕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헤르메네길드 | 레카레드 1세 | 리우바 2세 | 위테리크 | 군데마르 | |
가톨릭 국왕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시세부트 | 레카레드 2세 | 수인틸라 | 시세난드 | 친틸라 | |
가톨릭 국왕 |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툴가 | 친다수윈트 | 레케스윈트 | 왐바 | 에르위그 | |
가톨릭 국왕 | |||||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에기카 | 위티자 | 로데리크 | 아길라 2세 | 아르도 | |
반왕 | |||||
vs 레카레드 1세 | vs 시세난드 | vs 레케스윈트 | vs 왐바 | vs 에기카 | |
세가 아르기문드 |
유딜라 | 프로이아 |
힐데리크 플라비우스 파울루스 |
수니프레드 | |
반왕 | |||||
vs 로데리크, 아길라 2세 | - | - | - | - | |
오파스 | - | - | - | - | }}}}}}}}}}}} |
서고트 왕국 가톨릭 군주 Wittiza | 위티자 |
||
제호 | 한국어 | 위티자 |
라틴어 | Wittiza | |
생몰 년도 | 미상 ~ 710년 | |
재위 기간 | 701년 11월 15일 ~ 710년 |
[clearfix]
1. 개요
서고트 왕국 가톨릭 17대 국왕.2. 행적
에기카 왕과 에르위그 왕의 딸 시실로의 아들로, 698년 아버지에 의해 공동 왕으로 선임된 뒤 옛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할당받았다. 701년 11월 15일 톨레도로 소환된 뒤 정식으로 왕위에 선임되었고, 702년 말 에기카가 사망하면서 단독 군주가 되었다.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무슬림 역사가가 집필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불신자들과 유배된 이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여 하급 관료의 지위를 회복했고, 아버지가 부과한 세금을 줄여 백성들을 기쁘게 했으며, 아버지가 부정직한 신하들에게 부과한 모든 벌금을 공개적으로 해제시켰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강한 속박에서 해방시켰고, 그들의 소유물을 돌려주고 재무부가 몰수한 것을 보상했다고 한다.반면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위티자는 자유분방하고 불경건한 인물로 조언을 좀처럼 듣지 않았으며, 많은 아내와 첩이 있는 것에 대한 추문을 방지하기 위해 주교, 장로, 집사들에게 아내를 맞이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707년에서 709년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에 전염병이 강타하여 많은 이들이 기근과 역병으로 희생되면서, 서고트 왕국의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그가 망명자들을 불러들이고 성직자들이 아내를 들여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어떻게든 인구를 보충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망명자들은 에르위그의 지지자들일 수도 있고, 에기카의 친척인 왐바 왕의 반대자들일 수도 있다.
그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들인 아길라 2세에게 왕권을 넘기려 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는 에기카 왕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했던 파빌라도 있었는데, 파빌라의 아들인 펠라요는 아버지가 처형된 후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했다. 위티자는 710년경에 사망했는데, 친다수윈트 왕의 손자로 전해지는 로데리크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제거했다는 설과 위티자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제시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로데리크는 툴레도 등 남부 서고트 왕국의 영토에서 군림했고, 아길라 2세는 이에 맞서 아버지의 측근들을 거느린 채 북부에서 할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