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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20:02:32

브로그웨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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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그웨네드 | Bro-Gwened( 웨일스어)
브로에레크 | Broërec( 프랑스어)
반 백국 | Pays Vannetais(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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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 7세기
위치 하부 브르타뉴
수도 반(Vannes)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언어 웨일스어, 브르타뉴어, 프랑스어
종교 가톨릭
민족 켈트인, 프랑스인
성립 이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브르타뉴 왕국

1. 개요2. 상세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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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세기부터 7세기까지 웨일스에서 이주한 켈트인이 반(Vannes)을 중심으로 모르비앙 일대에서 건국한 왕국.

2. 상세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래, 브르타뉴는 특정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러던 중,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에 시달리던 웨일스의 궨트 왕국에서 살던 켈트족이 바다를 건너 브르타뉴 남부 해안에 상륙했다. 그들이 정착한 지역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을 단행할 당시 항전했다가 모르비앙 해전에서 패배한 뒤 로마 공화국에 복속한 베네티족(Veneti)이 거주하던 곳으로, 'Gwened'는 궨트에서 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이 중심지로 삼은 도시는 나중에 반(Vannes)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는 베네티족을 프랑스어로 변형한 것이다.

켈트족이 정확히 언제부터 이 지역에서 나라를 건국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브르타뉴 전승에서 첫번째 국왕으로 전해지는 와로흐 1세는 다섯 아들을 낳았다. 와로흐 1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장남 차나오 1세(Chanao I)는 왕위 경쟁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세 형제를 살해했고, 마지막 생존자인 맥리아우(Macliau)는 포로로 지내다가 낭트의 주교 펠릭스의 중재로 차나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차나오 1세는 나중에 맥리아우가 배신하려 한다고 여기고 살해하려 했고, 맥리아우는 그를 피해 브르타뉴의 한 지역을 다스리는 백작 코노모르에게 망명했다. 이후 차나오 1세는 아버지 클로타르 1세에 대항했다가 자기에게 망명한 크람과 동맹을 맺고 클로타르 1세에 대적했다가 560년 클로타르 1세와의 전투에서 패사했다.

차나오 1세 사후 맥리아우가 브로에렉으로 돌아왔다. 이후 코르누아이유 지역은 부디크(Budic) 백작의 영역이 되었고, 반은 맥리아우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은 왕국을 공유하기로 했으며, 한 사람이 먼저 죽을 경우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들을 자기 아들인 것처럼 보호하기로 했다. 이후 부디크가 먼저 죽었지만, 맥리아우는 약속을 어기고 부디크의 아들인 테우데리크(Theuderic)를 무력으로 몰아내고 코르누아이유를 탈취했다. 577년, 테우데리크는 군대를 모아 반격을 가했고, 맥리아우와 아들 자코브(Jacob)는 전투 중에 테우데리크에게 전사했다. 테우데리크는 코르누아이유를 되찾았고, 멕리아우의 영토에 대한 통제권은 맥리아우의 또다른 아들인 와로흐 2세에게 돌아갔다.

578년, 네우스트리아 프랑크 왕국의 국왕 킬페리크 1세는 브르타뉴 원정을 계획하고 투르, 푸아티에, 베른, 르망, 그리고 앙주의 전사들을 소집했다. 와로흐 2세는 야밤에 원정군을 습격해 대부분의 적병을 격파했지만, 나중에 킬페리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면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하에 빼앗겼던 도시들을 돌려받았다. 이에 킬페리크의 군대가 철수했지만, 579년 와로흐 2세는 맹세를 어기고 렌을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뒤이어 낭트를 습격해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하고 포도밭에서 포도를 모조리 거둬들였으며, 여러 주민을 포로로 끌고 갔다. 와로흐 2세는 휴전 협상을 다시 하기 위해 반의 주교 유니우스를 앙제로 파견했다. 그러나 프랑크 공작 베폴렌은 합의를 거부하고 브르타뉴의 여러 지역을 황폐화했다. 이에 분노한 와로흐 2세는 렌과 낭트를 재차 침공해 막대한 곡물을 탈취했다. 낭트의 펠릭스 주교가 중재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87년, 와로흐 2세는 다시 낭트를 침공했다. 부르군트 프랑크 국왕 군트람과 클로타르 2세는 오를레앙의 주교 나마티우스와 르망의 주교 베르트랑을 포함한 사절을 그에게 보내 휴전 협상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그는 두 왕에게 보상으로 1,000솔을 지불하는 대가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와로흐 2세는 수확물을 탈취하고 포도주를 반으로 가져갔다. 이에 군트람은 징벌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실제로 감행하지 않았다. 이후 와로흐 2세는 수년간 프랑크 왕국의 렌과 낭트에 대한 습격전을 꾸준히 이어갔고, 프랑크 왕국이 보복하려 하면 사절을 보내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그들의 봉신이 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이행하지 않았다.

590년, 와로흐 2세가 또다시 낭트와 렌 주변을 약탈했다. 이에 군트람은 베폴렌과 에브라하르 공작의 지휘 하에 군대를 브르타뉴로 보냈다. 그러나 프랑스 군 지도자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 독립적으로 군사 행동을 취했다. 그 결과, 베폴렌의 군대는 늪에 빠져들어 많은 사람이 익사했으며 베폴렌 역시 전사했다. 에브라하르는 와로흐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브르타뉴를 떠났지만, 와로흐 2세는 곧 협약을 파기하고 아들 카논을 파견해 에브라하르의 잔여 병력을 섬멸했다. 군트람은 이 실패에 분노해 에브라하르가 와로흐 2세로부터 뇌물을 받고 군대를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하고 추방했다.

593년, 와로흐 2세는 다시 낭트와 렌 백국을 약탈했다. 일부 학자들은 프레데군트가 정적인 브룬힐트 킬데베르 2세 모자를 약화하기 위해 와로흐 2세에게 침략을 사주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594년, 킬데베르 2세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보냈다. 원정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브르타뉴가 이후로 조용해진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듯하다. 이후 와로흐 2세는 더 이상 프랑크 또는 브르타뉴 연대기 작가들에게 언급되지 않았다. 와로흐 2세는 지역 지명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연대기에 따르면, 와로흐 2세에게는 차나오 2세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와로흐 2세 사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이나, 언제 왕이 되었으며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635년경 돔노네의 왕이었던 주디카엘이 브로그웨네드를 포함한 브르타뉴의 왕으로 거론된 것을 볼 때, 브로그웨네드가 모종의 시기에 돔노네와 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브로그웨네드는 브르타뉴 왕국과 뒤이은 브르타뉴 공국 내에서 반(Vannes) 백국이라는 호칭으로 불렸고, 9세기부터 브로에레크(Broërec), 즉 와로흐의 나라라고 일컬어졌다.

3. 역대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