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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8:49:17

주윤발

저우룬파에서 넘어옴
주윤발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홍콩 금상장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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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발
( 영웅본색)
주윤발
( 용호풍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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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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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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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주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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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발
( 용호풍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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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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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금보
(칠소복)
주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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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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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룡
( 영웅본색)
제23회
(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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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제25회
( 1988년)
적룡
( 영웅본색)
주윤발
(가을날의 동화)
만재량
(대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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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e6df><colcolor=#011b29> 주윤발
周潤發|Chow Yun-fat[1]
파일:주윤발 보그 홍콩 2023년 2월호.jpg
본명 周潤發[표준중국어][광동어]
Donald Chow Yun-fat (도널드 차우 윤뺏)
별명 따거, 發哥, 小馬哥
국적
[[틀:국기|
파일: 국기.svg
국가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영국령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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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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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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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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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출생 1955년 5월 18일 ([age(1955-05-18)]세)
영국령 홍콩 레이더우구 라마섬
(現 홍콩 신계 레이더우구 라마섬)
신체 183cm[4] O형
언어 광동어, 만다린, 영어
활동기간 1974년 – 현재[5]
종교 불교 ( 창가학회[6])
학력 중학교 졸업[7]
가족 아버지 주용윤, 어머니 진여방
배우자 여안안 (1983년 결혼~1984년 이혼)
진회련 (1986년 결혼)
데뷔 1974년(드라마 기준) TVB 드라마 <제소인연(啼笑姻緣)>[8]

1. 개요2. 특징
2.1. 이름2.2. 데뷔 초2.3. 전성기 (80년대중반~90년대초)2.4. 할리우드 진출 (90년대말~00년대초)2.5. 중국 활동기 (00년대중반~)
3. 개인사4. 기타5. 대표 출연작
5.1. 드라마5.2. 영화
6. 음악
6.1. 수상 내역 -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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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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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 영화 《영웅본색》中[9]
홍콩 배우이자 사진작가. 20세기 홍콩 영화 르네상스기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한 명이었으며, 《 영웅본색》으로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영화에서 보여준 멋있는 모습은 물론 실생활에서도 드러나는 대인적인 면모로 인해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영원한 따거'[10]로 불린다. 대표작으로 영화에서는 영웅본색(英雄本色), 용호풍운(龍虎風雲), 첩혈쌍웅(喋血雙雄), 와호장룡(臥虎藏龍)등이 있고, 드라마에서는 상해탄(上海灘), 소걸아(蘇乞兒), 양가장(楊家將) 등이 있다.

2. 특징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대한민국의 홍콩 영화붐을 일으킨 아이콘으로, 당시 홍콩 영화의 인기는 이전과도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이전까지의 홍콩 영화는 사실 국내에서 홍콩 영화가 인기라기보단 이소룡, 성룡 등 일부 액션배우의 무술영화가 산발적으로 인기가 있는 정도였는데, 주윤발 이후 홍콩 영화는 영웅본색의 영향으로 홍콩 느와르가 가장 인기를 끌긴 했지만, 그 외에도 멜로, 코믹, 무협 등 그야말로 홍콩 영화하면 장르 가리지 않고 팔리던 최전성기를 열었다. 그리고 주윤발은 그 최전성기에서도 장국영, 왕조현, 임청하[11]와 함께 가장 인기있던 배우였다.[12]

1955년 홍콩 라마 섬에서 출생했다. 라마 섬의 한 마을 중에서 주씨 집성촌이 있는데 그 곳이 고향이라고 한다. 조상의 고향은 중국 광둥성 카이핑(개평)이라고 한다.

2.1. 이름

한자로는 周潤發(중국 간체자로는 周润发). 외래어 표기법에 의한 표준중국어 발음표기는 저우룬파(Zhōu Rùnfā). 사실 광동어 발음으론 짜우연팟(Zau Jeon Faat)에 가까우나 한국에서 표기할 때는 중화권 인명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표준중국어 발음으로만 표기하기 때문에 저우룬파가 공식 표기다.[13]

당사자는 (실제 만나본 한국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런 표기법과는 관계없이 ' 성룡'과 마찬가지로 굳이 부른다면 한국식 '주윤발'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일단 홍콩 출신 인물들은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자신의 이름에 있어 표준중국어보다는 모국어인 광동어 발음 표기를 선호하고,[14][15] 주윤발의 광동어 발음인 Chow Yun-Fat[16]의 경우 '저우룬파' 보다는 '주윤발'이 차라리 더 가깝기 때문이다.[17]

2.2. 데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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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오맹달과 함께 출연한 홍콩 RTHK의 드라마 "사자산하(獅子山下)" 中

주윤발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계가 어려워지자 중학교를 중퇴했다. 그리고 상점 직원과 우편배달부, 구두닦이, 사무 보조, 호텔 웨이터, 카메라 세일즈맨 및 택시 운전사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던 중 친구의 권유로[18] 1972년 연극배우로 처음 데뷔하게 되었다고 한다.

1973년 TVB 연기 훈련반에 들어갔는데, 주윤발 본인은 연기를 시작한 해를 1973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연기를 배우면서 1년 후 졸업할 수 있으면 배우를 하고, 아니면 1년 연기 배운 셈 치고 좋은 인생 경험으로 여기자고 생각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이후 TVB 연기 훈련반을 졸업하고[19], 1974년부터 TVB의 민간전기 시리즈[20]에 단역으로 출연하다, 1976년 광조라는 드라마에서 첫 주인공을 맡게 된다.

최초의 영화 데뷔작은 1976년작 영화 투태인. 그러다 1980년작인 드라마 상해탄[21]이 홍콩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스타가 되었고, 이후 1984년에는 등대여명으로 대만 금마장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소오강호 드라마에서 영호충역을 한 것도 이때이다.

그의 드라마 초기 출연작에서 주 상대 여배우는 적파랍(사정봉의 엄마), 무건인(1976년 미스홍콩 출신), 정유령(가예전시 1기생), 진수주, 조아지(73년 미스홍콩 4위), 장문청(TVB 1기생, 상해탄에서 조아지의 친구, 천왕군영회에서 주윤발의 아내 역) 등이 있다.

2.3. 전성기 (80년대중반~90년대초)

그는 따뜻한 마음씨와 현대적인 기사도의[22] 풍모를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다.
-주윤발과의 첫 만남에 대한 오우삼의 회고
주로 드라마판에서 활동하던 주윤발이 영화판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한건 오우삼 감독과의 만남이 주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영웅본색 촬영을 위해 마크 역의 배우를 물색하던 오우삼 감독은 어느날 지역신문을 보다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한 주윤발의 기사를 읽게 되었고 그를 만나보기로 한다. 그리고 오우삼은 주윤발과의 첫 대면에서 '따뜻한 마음씨와 현대에 잃어버린 의협과 기사도의 풍모가 느껴지는 사람이다.'라고 느껴 캐스팅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1986년 개봉한 영웅본색은 주윤발을 내수용 스타에서 단숨에 아시아의 스타로 발돋움시켰다.[23]

이 영화에서 주윤발은 의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연연하지 않는 비장한 카리스마를 보여줘 홍콩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권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홍콩 느와르 풍의 도시적 유혈액션이 강조되는 이 영화에서 그는 이후 ' 마지막 보이스카웃', ' 매트릭스',' 페이스 오프(영화)'등 많은 헐리웃 영화에서 패러디하게 되는 멋진 쌍권총 액션을 보여주었고, 한국에서 썬글라스와 바바리 코트의 느와르식 패션과 담배 대신 성냥개비를 씹는 특유의 모습을 크게 유행시켰다. 여담으로 주윤발은 사실 총기를 싫어한다고 밝힌 바 있는 평화주의자다.

이후 영웅본색의 속편들을 비롯해서 많은 느와르 영화와 도신 시리즈 등 도박물, 멜로, 휴먼 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등 여러 장르의 영화에 다작으로 출연하였는데, 느와르식의 고독한 킬러 Badass 분위기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풍부한 표정과 유머러스한 입담을 가지고 있는 연기파 배우로 '대장부일기', '장단각지연', '공자다정' 같은 영화에서는 코미디 역할도 굉장히 잘 소화해낸다. 또한 악역에도 도전했는데, 1985년작 드라마 '충열전기 양가장'[24]에서 자존심 때문에 송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는 신선 여동빈 역을, 1987년작 영화 소생몽경혼(국내 개봉명은 몽경영웅)에서는 처절할 정도로 찌질한 부패경찰 역을 연기하기도 했다.

최전성기인 1980년대 말 주윤발은 매년 1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그야말로 몸이 남아날까 싶을 정도의 다작을 했는데[25], 이는 결과적으로 이미지 소비를 불러오기도 했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홍콩 반환을 앞두고 일종의 허무주의를 반영한 도박물이 대거 나왔는데, 주윤발도 도신 등 여러 편에 출연하며 여전히 기세를 이어갔다. 이런 다작은 주윤발의 인기와 더불어 의리있는 그의 성격상 무명 시절 도움 받은 감독과 제작자들의 출연 제의를 잘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도 있었고, 한편으론 당시 홍콩 영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삼합회 등의 조폭 계열 일부 회사들이 배우의 이미지 소비를 딱히 고려하지 않고 돈만 벌면 장땡식으로 아류작을 남발한 사정도 있었다.[26] 그리고 이는 결국 1997년 홍콩 반환으로 인한 인재 유출 등과 겹쳐 홍콩 영화계 전체의 쇠락으로 귀결되는 한 원인이 된다.

2.4. 할리우드 진출 (90년대말~00년대초)

미국으로 먼저 진출한 절친 오우삼 감독[27]의 요청으로 1998년 리플레이스먼트 킬러란 액션 느와르 영화에 출연해 헐리우드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데, 아무래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지라 과묵한 킬러 모습으로 등장해서 연기폭이 줄어든 평면적인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그 후 1999년 애나 앤드 킹, 커럽터에 출연했지만 큰 히트는 못쳤다.

주윤발이 서구권에서도 인지도를 높인건 2000년 개봉한 영화 와호장룡이 북미권에서 대히트하면서부터였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제작했지만 표준 중국어 영화라[28] 그래도 주윤발 입장에선 영어보단 대사 처리가 쉬웠고, 평소 무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본인의 연기력으로 커버해[29] 은둔 강호고수 이모백(리무바이) 역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할리우드는 이런 무림고수 이미지를 써먹으려고 했든지, 이후 방탄승에 캐스팅 했으나, 역시 영어 연기의 한계를 드러내며 망작이 되었다. 지못미

그리고 이후부턴 캐리비안의 해적, 드래곤볼 에볼루션 등의 영화에서 조연을 주로 맡으며 헐리웃 영화 속에서 역할 비중이 확 줄게 되었다. 사실 주윤발의 이런 굴곡은 1997년 중국 귀속을 앞두고 홍콩을 떠나 할리우드 진출을 모색했던 대부분의 홍콩영화인들이 겪은 일이다. 홍콩에서는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유명한 영화인들인데, 할리우드에서는 이방인이라 기반이 없던 데다 영어라는 언어적 한계까지 겹쳐 알게 모르게 차별대우를 받거나 틀에 박힌 역할만 맡게 됐던 것. 그래서 1997년을 전후하여 해외로 이주했거나 진출했던 많은 감독, 배우들이 2000년대 중반 들어선 다시 홍콩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2.5. 중국 활동기 (00년대중반~)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할리우드 작품에도 출연했지만, 주 활동 무대는 중국이 된다. 2006년 영화 황후화에서 냉정한 황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으며 2010년 영화 공자의 공자 역을 맡았고, 2012년 10월 조조: 황제의 반란[30]에서 조조역을 맡아 열연했다. 주윤발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지만, 영화 자체는 평이 썩 좋진 않았다.

오우삼의 중국 복귀 영화 적벽대전에 (본인의 조상인) 주유 역을 제안받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론 하차했다. 적벽대전에서 하차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데, 개런티나 대본 문제, 긴 촬영기간 등 설만 난무했다. 실제로 적벽대전은 촬영 직전까지도 대본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며, 예상 촬영기간도 무려 6개월이어서 대본과 긴 촬영기간 때문에 하차한 것이 결정적이라고 한다. 주유 역을 맡은 양조위도 대본과 촬영기간을 이유로 하차를 선언한 적이 있었고, 이후 다시 복귀했지만 양조위는 결국 2008년 적벽대전 한 작품에만 매달려야 했다.

2014년은 주윤발 본인에게 여러 일이 있던 해였다. 중공 정부에 불만을 표출하는 홍콩 우산 시위가 있었고, "홍콩 학생들의 용기에 감동했다"며 시위를 지지하는 포지션을 취했다. 그 후 주윤발에게 중국 당국이 1년간 대륙 방송 출연 금지를 시키자, 주윤발 본인은 "괜찮다. 돈을 좀 덜 벌면 된다."면서 개의치 않는다는 답변을 내놓아 민주 진영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주윤발은 1989년 5월 30일에도 중국에서 천안문 시위가 일어났을 당시 이들을 지지하는 의미로 홍콩에서 콘서트를 열면서 반독재 성향을 드러낸 바 있다.[31]

다만 한가지 고려할 점은, 지금도 주윤발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긴 하다.[32] 사실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겠다 싶으면 표현의 자유를 어느정도는 허용하는 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페이스북, 유튜브 등 서구권 SNS는 죄다 금지시켜놨지만, 대만 영화는 조건에만 맞으면 중국 개봉도 한다. 결론적으로 주윤발은 2014년 민주화 시위를 지지했고 중국 당국과 사이가 나쁜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아주 사이가 틀어진건 아니다. 애당초 중국의 눈밖에 난 연예인은 황추생처럼 중국 활동이 전면금지되지만, 주윤발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며 홍콩 반환 후 현재까지 중국 본토에서 어느정도 활동하고는 있다.[33]

2016년 홍콩 영화인 콜드 워 2에 출연했다.

2018년 홍콩에서 제작한 무쌍 곽부성과 함께 출연하여 흥행에 성공했다.

2018년 SBS 예능프로 런닝맨에서 홍콩에 가 주윤발을 만나는 미션을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사전 조사도 안하고 다짜고짜 간거라 결국 집도 못찾고 만남에 실패하고 만다. 이후 주윤발이 이 소식을 들은건지 어쨌는지 MBC 실화탐사대의 취재에 응해 오래간만에 국내 방송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

2019년 당국이 시위대의 마스크 착용을 금지한 이른바 복면금지법을 발표하자 얼마 안가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거리로 나와 조깅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대놓고 정치적 퍼포먼스를 한 건 아니지만 그간의 행적을 보면 묘한 지점이 있어 네티즌들 사이에선 나름 화제가 되었다.

2023년 6월 29일 오랜만에 영화계에 복귀한 원영의와 함께 출연한 "별규아도신"(别叫我赌神, 나를 도신이라고 부르지 말라)이 개봉했다. 오랜만에 도박 관련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 영화는 1990년대의 도신 시리즈와는 직접적 연관은 없고 도박물보단 가족 드라마물이다.[34]

2023년 홍콩 언론 등에서 7월 6일 자로 뇌졸중으로 인한 혼수 상태에 빠졌다는 내용을 보도했으나, 이는 가짜 뉴스로 밝혀졌다. 7월 초에 코로나 19 확진 판정을 받고 한창 홍콩과 대륙의 영화관을 돌면서 벌이던 "별규아도신" 프로모션 활동을 며칠 중단했는데, 이것이 와전된 듯 싶다. 7월 9일 영화 홍보차 무대인사에 오른 근황이 포착되었다.

2023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을 겸해서 오래간만에 내한한다. #

2023년 10월 4일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고 아시아영화인상도 수상했다. 소감으로 주윤발은 "올해로 배우 생활을 한 지 딱 50년이 됐다. 확실히 긴 세월이지만, 어떻게 보면 금세 지나간 것도 같다"면서 "배우가 될 수 있게 해준 홍콩TV를 비롯해 홍콩 영화계와 연기할 수 있도록 응원해준 아내, 의미 깊은 상을 주신 부산국제영화제, 오랜 시간 사랑과 응원을 주신 한국 팬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더불어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건강하세요"라며 한국어로 "기뻐요. 감사합니다. 사랑해요밀키스!"를 외쳐 환호를 받았다. #

10월 5일 기자회견에서 자긴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라며 소탈한 면모를 보였다. 또 상기한 건강 이상설 관련해 마라톤 대회도 준비할 정도로 여전히 건강하다며, 마라톤하다 실제로 죽으면 가짜뉴스는 아닐 것이라며 본인에 대한 가짜뉴스 사건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내한 동안 주윤발은 해운대 해변에서 오전마다 조깅을 했다. 그 외 한국 영화의 강점으로 창작 자유를 꼽으며, 가끔은 이런 이야기까지[35] 다룰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36] 한 기자가 '따거'라고 한번 불러보고 싶었다며 따거라고 부르자, '니하오 니하오'라고 유머스럽게 응해주기도 했다.

오픈토크 핸드프린팅 행사도 가졌는데, 본인 왈 홍콩스타거리에도 본인이 핸드프린팅한건 없다며 본인의 첫 핸드프린팅이라고 밝혔다. 실제 홍콩 구룡(까우룽) 스타의 거리(Avenue of Stars)에[37] 가보면 주윤발 이름이 새겨진 타일은 있지만 손바닥을 찍는 곳은 다른 스타들과 달리 비어있는 상황이다. 아마도 해당 거리가 조성되던 시기 주윤발은 헐리웃에서 활동하고 있을때라 참여하지 못했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길바닥에 직접 찍으러 가기도 뭐해서인지 그냥 놔둔 것으로 보인다.[38]

3. 개인사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 제독 주유의 직계후손이라고 한다. 정확히는 주유의 후손이자 송나라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한 주응두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배우개그인지 적벽대전에서 원래 제의받은 역할은 주윤발이 주유, 양조위가 제갈량이었는데 주윤발과 양조위가 동시 하차. 양조위는 오우삼 감독의 간곡한 요청으로 복귀했지만 이미 제갈량 역은 금성무가 캐스팅 되어버려서, 주윤발이 맡기로 한 주유를 연기하게 되었다.[39] 조조역에는 장풍의가 캐스팅 되었다.

1978년 무명 시절부터 사귄 TVB 시절 후배 여배우로 진옥련(陳玉蓮)[40]이 있었으나, 주윤발 모친의 교제 반대로 1982년 헤어지고 충격으로 가정용 세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 진옥련이 병원에서 한동안 병간호를 했을 정도다. 허나 결국 헤어졌고 이에 대해 주윤발은 훗날 "가슴 깊이 새겨둔 사랑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배우 여안안(余安安)[41]과 결혼하였고[42], 9개월 만에 이혼함으로서[43] 세간의 비웃음을 산 적도 있었다. 이후 다시 재혼하는데, 아내는 80년대 중후반 결혼한 진회련으로 지금까지도 부부간 금슬은 좋은 듯하다. # 다만 친자식은 없다. 1991년 진회련이 유산을 한 번 한 이후[44] 아내의 충격과 건강을 염려해서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대신 입양한 양아들이 있는데 언론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입양해 호주에 유학 보냈다가 2010년 처음으로 양아들의 존재를 알려 화제를 모았다. # 기타 자세한 내용은 이 글 참조.

추정치라 언론마다 왔다갔다하는 면이 있지만, 대략 한화 수천억원의 재산이 있다고 알려져있으며[45], 죽은 뒤 자기 재산 중 99%를 사회사업에 기부하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이렇게 갑부임에도 불구하고 검소가 몸에 배어있는지 2010년대 기준 매달 용돈으로 약 1000홍콩달러(한화로 약 17만원)를 아내에게 받아서 쓰고 있으며, 자신의 정확한 수입은 아내만이 알고 있다고 한다. 또 평소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걸로도 유명하다.

파일:external/www.bulgyofocus.net/69915_42677_814.jpg
지하철을 탄 주윤발.

2018년 10월, 다시 한 번 56억 홍콩달러(약 8100억 원)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46]. 이에 MBC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실화탐사대 팀에서 직접 주윤발을 찾아갔는데 위에 쓰여있는 얘기들을 주윤발 본인의 입으로 들을 수 있다. 다만 차는 갖고 있다고 하며, 운전기사가 자신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싫고 지하철이 편해서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영상에는 주윤발이 어린 시절 살던 주씨 집성촌 달동네의 생가도 나오며, 그 외 애용하는 식당에서 팬들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면 팬이 일어나서 자신에게 오는 것이 아닌, 자신이 팬의 식탁으로 가서 핸드폰을 들어서 셀카를 찍어 준다는 얘기 등 현지 취재를 통해 알아낸 정보들도 보여줬다.

홍콩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주윤발은 평소에도 슬리퍼를 신고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진짜 평범한 시민처럼 다닌다고 한다. 홍콩의 뒷산 걷기길인 드래곤스 백에서도 주윤발을 종종 만날 수 있다고 하며, 한국인 관광객들의 사인과 사진 촬영도 응해준다.

2020년 2월에 모친상을 당했다. #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며 몇 차례 사진 전시회에도 참가했다. 그래서인지 이쪽 물건에는 제법 관심을 보이는 듯한데, 본인 왈 이것도 중고로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참고로 영화 콜드 워 2편에 카메라와 사진을 좋아하는 캐릭터로 출연하기도 했다.

'교양세월'이라는 영화를 찍던 중 머리에 부상을 입어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하는 사고를 겪기도 했으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중에도 주위를 안심시키고 촬영스탭을 배려해서 또 한 번의 미담을 남겼다. 영화 교양세월은 몇 차례 제목이 바뀐 끝에 '별규아도신(別叫我賭神 나를 도신으로 부르지 마라')[47]으로 제목이 정해졌으며, 6월 10일 상해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21일 중국 본토 개봉, 29일부터 홍콩에서도 개봉했다.

4. 기타

5. 대표 출연작

5.1. 드라마

국내 출시작은 볼드체. 주윤발의 드라마 출연은 과거 TVB 소속이었을 때가 전부. 본 항목에 기재된 드라마들은 주인공이나 비중 있는 역할로 출연한 장편 드라마에 한해 기록하였으며, 단막극이나 단역 출연 작품은 기재하지 않았다. 참고로 주윤발의 첫 드라마 출연은 1974년작 제소인연(啼笑姻緣)으로 엑스트라로 잠깐 나왔었다.

5.2. 영화

6. 음악

왕년엔 가수 활동도 잠시 했었다. 1980년대 후반 홍콩 가요계의 발전을 도모하며 영화 주제곡들을 불렀으며, 1988년 '십이분십초(12分十分吋)' 를 발매해서 5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1990년에는 첫 정규앨범을 발매했고, 그의 곁에는 장국영, 장학우 등 많은 동료들이 있었다. 몇 년 뒤 언론에서 그의 가요계 활동에 묻자, 주윤발은 "당시 장학우가 미래의 가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요계를 그만두고 배우 활동에 전념했다.[75]"고 밝혔다.

6.1. 수상 내역 - 음악



[1] 대다수의 홍콩 배우들은 자신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시 영국식 이름을 사용하지만 주윤발은 광둥식 이름인 Chow Yun-fat(짜우연팟)으로 표기하고 있다. [표준중국어] 周润发, Zhōu Rùnfā, 저우룬파 [광동어] Chow Yun-fat, 짜우연팟 [4] 183~4cm 정도인 적룡과 같은 키로 같은 183cm인 최양락과 섰을때도 키가 비슷했다(주윤발은 1991년 유머1번지에 깜짝출연해서 최양락과 함께 연기한 적이 있다). 적룡이나 진상림(1948년생 배우), 성규안같은 180대 장신배우들이 흔치않은 홍콩남자 연예인들과 섞여서 그런지 실제키(183cm)보다 더 커보인다.(실물을 접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대략 187cm는 돼 보인다고 밝혔다.) 186cm인 이종석보다는 살짝 작았다. 근데 마라톤을 하고 6년 사이 키가 2cm 더 커졌다고 한다. # [5] 기간이 좀 애매한데, 아마도 후술되어있듯 연기 세계는 1972년 연극을 처음 하며 입문한 것으로 보이며, 주윤발 본인은 1973년 TVB 연기 훈련반에 들어갔을 때를 본격 연기를 시작한 해라고 말하고 있다. 이후 1년간 연기를 배워 1974년 TV에 모습을 비친 것으로 보인다. [6] 일본에서 생긴 종파로, 일반 불교와는 조금 다르다. [7] 출처: 1991년 2월 21일호 경향신문. [8] 단역(구경꾼)으로 출연했었다. [9] 마크 리를 연기한 주윤발이 위조지폐를 불로 태워 담배를 피우는 씬으로 영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10] 大哥. 거거(哥哥)라고 하면 형, 오빠이고(중국어는 older brother, older sister라고 하는 영어처럼 형과 오빠, 언니와 누나의 구분이 없다.) 따거는 문자 그대로 '큰형', '맏형'의 뜻. 여기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를 높여 부르는 '동생'의 뜻도 생기게 되었다. 홍콩 영화로 인해 잘 알려진 말이다. 그러나 '따거'라는 말은 만다린 발음이고 광동어로는 '따이꺼'에 가깝다. [11] 1992년 영화 동방불패 이후. [12] 롱런으로 치면 장르적 대체재가 적던 무술쪽 배우들이 좀 더 길었지만, 폭발력 측면에선 당시 이들의 인기를 따라오지 못했다. 참고로 주윤발은, 장국영과 영웅본색 1, 영웅본색 2, 종횡사해 등을 같이 했고 왕조현과는 공처2인방, 의개운천 대장부일기, 장단각지연, 도신(정전자) 등을, 임청하와는 몽중인을 같이 했다. [13] 한국에서 중국 인명의 경우 신해혁명 이후 출생자들은 출생 지역에 상관없이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된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14] 이는 표준중국어 영문표기법이 확립되기 전부터 홍콩인은 광동어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표기해 왔고, 이것이 전통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문표기는 광동어 영문 표기보다도 아예 영문명을 선호하며, 광동어 발음 영문 표기를 고수하는 주윤발은 좀 예외적인 경우. 이는 오맹달도 마찬가지로, 영화 크레딧에는 꾸준히 Ng Man-tat으로 표기해왔다. [15] 다만 2010년대 이후부턴 일국양제의 훼손 등으로 홍콩 거주자들의 중국 본국(?)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는 양상 등을 감안한 모양인지 (초르노빌/체르노빌 병기하는 것처럼) 주윤발/저우룬파 병기하는 경우도 보인다. [16] 본인이 출연한 영화 크레딧에 초기부터 이렇게 표기해왔다. 오리지널 광동어 발음이 아닌 광동어 발음을 영국령 홍콩에서 영국인들의 몬더그린 필터를 거쳐 영국식으로 표기한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우리말로 치면 표준 발음 표기 Gim Dong Su 대신 Kim Tong-Soo로 표기하는 느낌 정도. [17] 'ㄹ' 때문에 광동어 발음과 큰 차이가 있다고 여길 수도 있는데 한글을 의식하지 않고 들으면 '주윤발'에서 마지막 'ㄹ' 발음은 거의 탈락되어 '추우윤파(ㄹ)'에 가깝게 들린다. 그러니 한글을 의식하지 않고 듣게되는 주윤발 본인 입장에서는 또박또박 발음한 '저우룬파'에 비하면 익숙하게 발음해주는 '주윤발' 쪽이 훨씬 본인 이름처럼 들리는 것. [18] 임영동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19] TVB 연기 훈련반 3기 출신으로 영화감독 임영동, 오맹달, 노해붕 등과 동기고, 영화감독 두기봉, 임달화, 이국린이 한 기수 아래 후배다. [20] 유튜브에 출연했던 진어사교감금차전(1974년)과 자차기(1975)가 있다. 앞에 건 대사가 없고 오맹달의 족쇄를 풀어주는 포졸 역이었고 뒤에 건 정소추와 왕명전을 못 만나게 하는 장교 역이었는데 대사가 조금 있었다. 초향기(1975)도 있는데 소 머리 분장을 하여 출연했으나 대사는 없다. [21] 여기서부터 이미 느와르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주윤발이 맡은 주인공 허문강(許文強)은 20세기 초 상하이에서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가 한 파벌의 두목이 된 뒤 다른 조직에 당해 사망한다. 이 드라마의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1991년 주성치의 도협 2 상해탄도성에서 오마주 되었고, 1996년에는 영화로 리메이크 되어서 장국영이 주인공 허문강을 연기했는데, 이 때 한국배우 정우성이 잠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 후에 2007년 리메이크판 드라마에서는 황효명이 허문강을 연기했다. [22] 협객이라 번역한 이도 있다. [23] 사실 영웅본색에서 그는 정확히 말하면 주연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화 스토리상의 진짜 주연은 적룡이었다. [24] 주윤발 외에도 양조위, 유덕화 등이 출연한 초호화 캐스팅으로 유명했다. [25] 단순 계산으론 약 1달에 1편꼴로 영화를 찍은 셈이다. [26] 다만 덕분에 오늘날 와선 주윤발 리즈 시절 작품이 많긴 해서 팬들 입장에선 볼거리가 많은 장점도 되긴 한다. 물론 작품성이 많이 낮다면 과유불급일 수도 있지만. [27] 장 클로드 반담이 주연한 < 하드 타깃>으로 1993년 진출했다. [28] 그런데 사실 표준중국어도 주윤발의 모어는 아니다. [29] 검술 동작이 어설펐기에 액션 동작에서 뒷짐을 지고 한손으로 검을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되레 배우의 연기력과 싱크로되어 정말 최고의 검술 달인처럼 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30] 원제 : 동작대. [31] 이 콘서트에는 주윤발, 유덕화, 매염방, 장학우, 알란 탐, 증지위, 성룡 등이 참석했는데 이 중에서 알란 탐, 증지위, 성룡은 후에 친중으로 전향하게 된다. [32] 헐리웃에서 복귀한 이후 2010년대 초엔 중공선전영화라 할 수도 있는 건당위업(2011)에 원세개역으로 출연한 적도 있었는데, 물론 원세개는 애초에 악역격이고 비교적 빨리 죽는지라 주윤발 본인이 어떤 큰 메시지가 있어 출연했다고 보긴 어렵다. [33] 때문인지 2020년대 들어선 중국 정부의 홍콩 국가보안법이나 기타 반민주적인 행태에 성룡이나 증지위가 공개적으로 찬동하는 것과 달리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후술되어있듯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창작의 자유 발언 등을 하긴 했다. [34] 주인공이 과거 타짜 출신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미혼모로 키우던 옛 애인과 재결합한다는 지극히 가족주의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35] 뉘앙스를 보면 사회파 영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36] 영어 인터뷰에선 좀 더 직접적으로 검열 때문에 제작에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당 발언이 중국 웨이보에 퍼지면서 중국 누리꾼들 사이에서도 찬반 논쟁이 오가 관련 게시물이 삭제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 [37] 헐리웃 스타의 거리를 참고해 2004년 조성되었다. [38] 참고로 장국영처럼 이미 사망한 스타들은 손도장 대신 별이 새겨져있다. [39] 여담으로 주유 역에 배용준이 물망에 오른 적도 있었다. [40] 1983년에 제작한 신조협려에서 소용녀 역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1989년작 지존무상에서 유덕화 알란 탐의 사랑을 받는 카렌 역을 맡기도 했었다. [41] 영화 동방불패에서 동방불패의 애첩 시시 역을 맡았던 배우. [42] 당시 여안안은 이동승(爾冬陞)과 오래된 연인 사이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헤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안안은 주윤발과 결혼을 한다. 참고로 두 사람은 이동승이 16세, 여안안은 14세였던 시절부터 연애를 한 장기 커플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세간엔 주윤발이 진옥련과 결별하고, 또 여안안은 이동승과 결별한 상태에서 두 사람이 충동적으로 결혼한 거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43] 주윤발이 동료 여배우인 무건인과 친하게 지냈는데, 여안안이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했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이후 여안안은 1987년 카레이서 이만기와 재혼하여 딸 둘을 두었으나 2003년 또 다시 이혼했다. 그러다가 2012년쯤 22살 연하의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국내에서도 가십거리가 된 적이 있다. [44] 뱃속의 아기가 탯줄에 목이 감겨 질식사했다고 한다. [45] '13억 홍콩 달러'(한화 2천여억 원)란 말부터 후술되어있듯 2018년 방송에 의하면 재산이 늘어났는지 '56억 홍콩 달러(한화 약 8100억 원)'란 말까지 설이 다양하다. (국내 언론에선 2018년 이후 8100억원에 꽂혔는지(...) 이 금액으로 확정하듯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환율이나 재테크, 기부 여부 등에 따라 재산은 얼마든지 변동될 수 있다.) 2023년 내한 당시 인터뷰에 따르면 주윤발 본인도 재산은 아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인지 모른다고 한다. 다만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안 갖고 왔기 때문에 갈 때도 아무것도 안 갖고 가도 상관없다고 밝혔고, 이미 후술된 2018년 인터뷰 때도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소박한 생활이라며, 매일 세끼 밥을 먹고(사실 아침을 거의 먹지 않아 평소엔 2끼만 먹는다고 한다) 잘 수 있는 작은 침대 하나만 있다면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밝혔다. [46] 5년 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제가 어렵게 번 돈이라 기부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내가 약속해 버렸다’는 농담을 했다. 이후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며 철학을 설명한 뒤 다시 한 번 ‘나한테 찾아와봐야 돈이 정말 없다’고 농담. [47] 공교롭게도 주윤발은 전성기 시절 도신 역할로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주윤발 하면 가장 떠오르는 이미지인데, 애초에 이걸 노린 제목인 듯 하다. [48] 연예인이 아닌 외국인이 출연한 국내 CF는 그 전에도 많았다. 외국 스타가 나오는 국내 방영(제작은 외국의 광고 회사가 한) CF도 꽤 있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해외 광고를 그냥 보여준 것이라 예외. [49] 여담으로 주윤발은 광고료로 수천만원을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주윤발과 더불어 다른 외국 연예인들도 광고료가 너무 쎈 거 아니냐고 당시엔 논란이 있기도 했던 모양. 예를 들어, 소피 마르소도 주윤발과 같은 시기에 한국 화장품 CF에 출연했는데, 광고료가 무려 2억원이었다고 한다. 이는 같은 시기 원톱스타였던 조용필이 맥콜 광고를 촬영하며 받은 광고료 2억원과 똑같았으니, 아무리 그래도 자국 톱스타보단 범국민적 인지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외국 연예인의 광고 단가 거품이 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도 크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당시 프랑스나 홍콩 물가와 한국 물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거품은 어쩔 수 없긴 했다. 게다가 1989년은 외국인 광고 모델 규제 해제가 첫 적용되는 원년이었기 때문에 주윤발, 소피 마르소와 같은 외국 연예인들을 한국 광고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시기였고, 처음으로 외국 연예인을 CF의 주연으로 출연시킬 수 있었으니 마치 주식시장에 처음 상장된 기업처럼 거품이 낀 광고 출연료가 형성됐었다. [50] 유덕화, 장국영 등 영화에 따라서 전문 성우가 더빙을 맡는 경우가 있는데, 주윤발의 경우는 거의 90% 이상 확률로 본인 더빙이다. [51] 천녀유혼 1편 귀신 역으로 출연했던 여배우. 이 귀신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섭소천(왕조현), 영채신(장국영)의 수중키스 명장면이 나오게 된다. [52] 여담으로 브루스 윌리스가 머리숱 적은 것 빼면(...) 주윤발과 공통점도 제법 있다. 애연가, 주력무기인 베레타 등. [53] 오맹달의 회고에 따르면 그동안 자기가 일방적으로 주윤발을 미워했으니 사과를 하긴 해야 했는데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그저 주윤발에게 울먹이면서 미안하다고만 했는데 주윤발은 친구끼리 그 정도도 못해주겠냐며 되려 웃으며 그를 위로했고 이에 감정이 폭발해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꼴사납게 우는 동안 주윤발은 그저 자길 다독여줬다며 주윤발이야말로 진정한 사내대장부라 언급했다. [54]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한 말이다. 참고로 오맹달과 주윤발이 함께 출연한 영화로는 영웅본색 2, 우견아랑, 도신(국내 개봉명 정전자, 1989년 작품) 등이 있으며 그 이후 천장지구, 여락, 절대쌍교, 묘가십이소, 도성, 도협, 도협 2 상해탄도성, 호문야연, 정고전가, 도학위룡, 신정무문, 심사관, 무장원 소걸아, 녹정기, 구품지마관, 서유기 월광보합/선리기연, 파괴지왕, 식신, 희극지왕, 소림축구 등으로 필모그래피가 이어진다. [55] VHS 시절부터 향화강으로 한국식 이름 표기가 알려져 있으나 '상화강'으로 표기할 수 있다. 영화 제작자이면서 삼합회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는 인물. 도신 시리즈에서 용오 캐릭터를 맡으면서 연기도 하게 되었고 아들 향좌(상좌) 역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버지 향전(상전)이 유명한 삼합회 조직 신의안의 따꺼였고 향전의 아들 중에 향화염, 향화강, 향화승 등이 있었다. 향전의 뒤를 이어 아들 향화염이 조직을 맡았으나 황화염이 구속된 이후 따꺼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이후 이복동생 향화강(상화강)에게 조직 관리를 맡기게 된다. 또한 향화강(상화강)의 동생 향화승(상화승) 역시 영화계와 삼합회를 주름잠았던 인물로, 유덕화 등 영화인들과 호형호제하며 영화 출연까지 했던 형 향화강에 비해 향화승은 몇몇 연예인들을 힘들게 하기도 했었다고. 향화승은 영성전영공사(永盛電影公司)를 운영했으며 식도암 투병 끝에 2014년 11월 20일 64세로 사망했다. [56] 주윤발은 물론, 유덕화, 왕조현도 특급 스타가 되어 있을 때라서 도신 출연 배우들의 스케줄 조정이 어려웠는데 향화강이 캐스팅되면서 배우들의 스케줄 조절이 쉬워졌었다고 왕정 감독이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57] '수렴청정'으로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홍콩영화계의 주목을 받으며 몇편의 영화에도 출연했으나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58] 당시 홍콩배우들은 대만 배우협회에 의무가입이 원칙이었으나 양가휘가 이를 거부하여 타깃이 되었고, 대만 정부에 불려가 영화출연 관련 진술 및 다시는 중국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강요받았으나 거절했다. [59] 거의 2년간 연기를 하지 못해 형편이 어려워져 홍콩 외곽에서 노점을 운영하기까지 했다.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강가년의 도움으로 라디오 드라마에 단역 출연하면서 배우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지만, 홍콩 영화판에서 본격적으로 주연급 배우로 활동하며 큰 명성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된 인물이 바로 주윤발이다. 덕분에 단역부터 시작하여 주조연을 거쳐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고 1993년 금상장 남우주연상을 다시 받게 된다. [60] 정확히 표현하자면 총을 품에 숨기는 제스쳐를 취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손을 숨기는 듯한 연습을 수십번 한 것. [61] 참고로 주윤발은 영화 용호풍운에서 범죄 조직 내부에 잠입한 스파이 경찰 역을, 유덕화는 영화 무간도 시리즈에서 경찰 내부에 잠입한 스파이 삼합회 조직원 역을 맡은 바 있었다. [62] 주윤발을 홍콩의 스타로 만들어준 레전드 드라마. 한국으로 치면 모래시계급이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영화에서 오마쥬 리메이크가 되었고, 주윤발의 대장부일기에서도 상해탄 인기가 어느정도였는지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지금도 홍콩 드라마 최고의 캐릭터를 뽑는 설문조사에서 주윤발의 허문강이 1위에 뽑히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63] 이후 주윤발과는 의개운천, 대장부일기, 장단각지연에서 커플로 연을 맺었다. 커플은 아니지만 같이 출연한 영화는 더 있다. [64] 다만 주윤발의 신체 노출은 거의 없는 편이다. 여주인공 중 한 명인 양설의의 노출이 있다. [65] 삼국지연의 속 관우의 존재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지존무상에서 주인공을 맡은 알란탐보다 친구와의 의리를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터를 연기했던 유덕화의 인기가 높기도 했었고. [66] 김용, 홍콩 4대 재자(香港四大才子)로 유명한 홍콩의 통속 소설가. 국내에는 천룡팔부를 일부 대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모험소설이 주 분야였으며, 홍콩에서 유명한 소설은 <남혈인(藍血人)>, <노묘(老猫)>, <육지금마(六指琴魔)> 등이 있다. 이 중에 육지금마는 여러 번 영화,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임청하, 원표 주연의 1994년 영화판은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67] 1992년 영화 <캣츠(老猫)>에서는 같은 역을 후배 배우 이자웅이 맡았다. [68] 그래도 끝에 나와 대전차 로켓으로 최후의 한 방을 날려준다. [69] 임영동은 주윤발과 TVB 연예인 훈련반 3기생이고 동갑이다. 때문에 주윤발에게 연기를 추천한 친구가 임영동일 가능성도 있다. [70] 주연 및 카메오 출연(영웅본색 마크)으로 1인 2역. [71] 과거 한국의 경우, 똑순이 캐릭터로 유명했던 아역배우 김민희가 소년 역을 맡기도 했었다. [72] 이 중에 후반에 나오는 병원 총격전 씬 중에 롱테이크 로 찍은 장면(11분 즈음부터)이 있는데, 주인공 콤비가 총을 번갈아 쏘거나 콤비의 등 뒤에서 보는 것처럼 샷을 유지하는 등 건슈팅 게임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준다. [73] 특히 호텔 [74] Jiang Wen, 지앙 웬. 부용진, 붉은 수수밭, 진송, 송가황조, 시황제 암살, 귀신이 온다, 양자탄비, 삼국지 명장 관우(조조 역), 일보지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등에 출연했으며 햇빛 쏟아지던 날, 귀신이 온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양자탄비, 일보지요 등의 감독을 맡았다. 그 자신이 연출, 각본, 주인공을 맡았던 '귀신이 온다'로 2000년 제53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75] 실제로 장학우는 당시 가요계의 스타 3인방이었던 장국영, 매염방, 알란 탐 바로 밑의 인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