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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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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9대 대왕
명종 | 明宗
파일:지릉.jpg
지릉 전경
출생 1131년 11월 8일[1]
(음력 인종 9년 10월 11일)
고려 개경 개성부 연덕궁 추정
(現 경기도 개성시)
즉위 1170년 10월 20일[A]
(음력 명종 즉위년 9월 2일)
고려 개경 개성부 연덕궁 대관전
(現 경기도 개성시)
사망 1202년 12월 10일[B] (향년 71세)
(음력 신종 5년 11월 17일)
고려 개경 개성부 창락궁 / 양화궁
(現 경기도 개성시)
능묘 지릉(智陵)
재위기간 고려 익양후
1148년 12월 24일[4] ~ 1170년 10월 20일[A]
(음력 의종 2년 11월 5일 ~ 의종 24년 9월 2일)
고려 제19대 대왕
1170년 10월 20일[A] ~ 1197년 11월 11일[C]
(음력 명종 즉위년 9월 2일 ~ 명종 27년 9월 23일)
고려 태상왕
1197년 11월 11일[C] ~ 1202년 12월 10일[B]
(음력 명종 27년 9월 23일 ~ 신종 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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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흔(昕) → 호(晧)
부모 부왕 인종
모후 공예왕후
형제자매 5남 4녀 중 3남
배우자 의정왕후
자녀 8남 2녀[10]
종교 불교
지단(之旦)
묘호 명종(明宗)
시호 황명광효대왕(皇明光孝大王)[11]
작위 익양후(翼陽侯)
익양공(翼陽公)
절일 건흥절(乾興節)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즉위 후2.3. 폐위: 정사정변2.4. 최후
3. 가족관계4. 기타5. 평가6. 대중매체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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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19대 대왕.

묘호는 명종(明宗), 시호는 황명광효대왕(皇明光孝大王), 휘는 처음에는 '흔'이었으나 후에 '호'(晧)로 개명했으며, 자는 '지단'(之旦)이었다. 제17대 인종의 아들이자 제18대 의종의 동생이다. 의종에게 아들과 어린 손자가 있었고, 의종 다음으로도 대령후 왕경(王暻)이 있었기에 순번상 왕위계승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맏형 의종이 둘째 형 대령후 왕경을 싫어해 대령후는 정계에서 밀려났다. 1170년 8월, 무신정변으로 인해 의종과 태자가 폐위되어 쫓겨나고 명종이 옹립되었다.

2. 생애

2.1. 즉위 전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문학을 좋아하였다.
고려사절요》 <명종> - 총서- 중
인종과 공예태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동복형제로는 형 의종, 대령후와 동생 충희, 신종이 있었다. 형 의종이 즉위하고 2년에 형의 명령으로 아버지 인종의 시신을 안치한 궁궐에서 해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제사를 지냈다. 이후 의종이 익양후(翼陽侯)로 봉했고, 공작(公爵)으로 진작된다. 봉지인 '익양'(翼陽)은 오늘날의 광주광역시이다.

의종 24년(1170년) 무신정변으로 인해 의종은 폐위된 후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로 유배되었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주동자들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왕호의 집으로 와 그를 정궁 수문전(修文殿)으로 데려갔다.

2.2. 즉위 후

1170년 10월은 명종의 고난의 일대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명종이 옹립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신의 직위를 마구 올려 주는 것이었으며, 무신들이 만족하고 나서야 대관전(大觀殿)에 나아가 만조백관의 경하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임금의 권위는 이미 시작부터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었다.

1171년 10월 고려 정궁에 불이 났다. 당시 정중부, 이준의 등이 궁궐 안에 있었는데 불난리가 나자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생길까봐 궁궐을 폐쇄해버리고 나갔으며, 왕은 타버린 궁을 보고 크게 통곡했다. 이 해에 무신정권 무신정변 주도자인 이고가 죽고 이의방과 정중부의 양립 체제로 운영된다.

1173년 맏아들 왕숙을 왕태자로 책봉했다. 《 고려사》는 이 해에 재앙에 가까운 가뭄이 왔다고 기록했는데 곡식이 없으니 인육을 팔고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등 나라가 엉망이 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속에 동북면병마사(고려 동북면 일대의 군대 지휘관 정도 직위) 한언국과 김보당은 선왕이던 의종을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로 데려오고 김보당의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실패하고 의종은 이의민에 의해 허리가 반으로 접혀 끔찍하게 시해당했다.

1173년 10월 명종은 모든 관리를 무신으로 채우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명령을 누가 내리게 시켰는지는 뻔하다. 같은 달에 고려 개국 전설과 연관이 깊은 옥룡사 선각국사 도선의 비석을 세웠다. 이 비문에는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의 전설과 비슷한 설화가 실려 있다.

1174년 전국에서 반란이 들끓기 시작했고, 서경을 중심으로 한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는데 명종은 조칙을 내려 조위총을 타일러보지만 조위총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이 해 12월에 무신정권은 무신정변 주도자이자 초대 집권자였던 이의방이 살해되고, 일족이 주멸되면서 정중부 체제로 옮겨갔다(갑오정변).

1176년 국가의 기강이 크게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한 장수가 길거리에서 용호군(정규 군대인 2군 6위 중 하나) 소속 장교를 만났는데 장교는 대충 목례만 하고 가려고 했다. 이에 장수는 분노해 장교를 감옥에 가두었는데 장교의 일당이 장수를 위협하고, 그의 집을 부수자 장수가 냅다 도망쳤다.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이 멋대로 구니 그 밑의 무신들도 양아치화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같은 해에는 남쪽의 반란군이 기세가 커져 반란군 수장이 '병마사'(兵馬使)를 자칭했다.병마사는 고려시대 군단 지휘관급 직위다. 명종은 결국 또 군대를 꾸려 정벌을 지시했다.

1177년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는데 역시 제대로 진압이 안돼 군사를 파견했다. 또한 조위총의 잔당이 들끓어 북방이 엉망이 되는데 어떤 수준이냐면 금나라가 정례적으로 사신을 보내올 때 고려는 조위총의 잔당이 그들을 공격할까 두려워 80명의 부대를 보내 배로 호송했다. 하지만 공격을 받아 대부분 호송 부대원이 죽고, 지휘관까지 다쳤다고 한다. 이렇게 나라가 개판이 되가니 명종은 답답했는지 경령전(景靈殿)과 태묘를 참배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경령전'은 태조의 진영을 걸어두고 그를 신격화한 일종의 신전이었는데 1177년 7월 명종은 직접 자신을 탓하는 글을 써서 태조에게 바쳤다고 한다. 보통 임금은 한림학사나 중관을 시켜 글을 쓰게 하며 자신이 직접 쓰지 않는다. 그래서 어필이 매우 희귀한 것이다.

이규보의 《 동국이상국집》에는 당시 이규보가 여러 산, 강, 도교의 신들에게 반란군을 잡게 해달라고 비는 축문이 잔뜩 있다. 그 중에는
"동도(東都)가 감히 상도(上都)에 대항했으니 당신들은 신으로서 나쁜 놈들을 잡는 걸 도와줘야 됨!"
하고 협박문 수준으로 비는 축문도 있다. 동도는 경주를 비유한 것이고, 상도는 고려를 비유한 것이다. 경주의 반란을 제후국의 반란으로 비유한 셈이다.

1179년 9월, 무신정권은 무신정변 주도자이자 제2대 집권자인 정중부와 정균 부자가 참살되고, 젊은 장군이었던 경대승 체제로 옮겨갔다(기해정변).

1180년 궁궐의 대문 하나를 고쳤다. 문 이름이 향복문(嚮福門, 복으로 향하는 문)이었는데 중방(重房)의 무신들이
"향복(嚮福)은 항복(降服)과 발음이 비슷하니 이는 문신들이 우리를 누르려 하는 것이다!"
라고 징징거려 명종은 이름을 고치게 해 영희문(永禧門, 길게 복을 누릴 문)으로 바꿨다.
근데 중방이
"'복 희' 자는 좋은 뜻인데 '길 영' 자는 안 좋은 뜻인거 같으니까 우리 부서 이름을 따서 중희문(重禧門)이라고 해줘!"
라고 또 징징대자 그렇게 해줬다.

1181년 명종은 잔치를 열었는데 견룡군(왕의 호위 부대로 높은 직위의 무신들이 속해 있다.) 소속 무신들이 자기 의자를 높이고 치장해서 명종의 옥좌와 구분이 안됐다고 한다. 근데 명종은 참 속편하게 을 먹고 크게 취해서 일어나 까지 추려다가 근처 신하가 말려서 못했다고 한다.

1183년 무신정권은 제3대 집권자 경대승이 병으로 죽고 천민 출신 무장이자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 체제로 옮겨갔다.

1184년 3월 경성(京城)에 지진이 났다.여기서 경성은 《 고려사》 원문 기록으로 당시 수도였던 개성을 이른다. 이 지진에 명종은 점쟁이를 시켜 점을 처보게 했는데
'신하가 신하답지 못함(臣不臣)'
이라는 점이 나왔다. 사실상 점쟁이가 목숨을 걸고, 지진이 난 게 무신 놈들 때문이라고 비꼰 것이다.

1186년 1월 13일 명종의 조카가 죽자 왕은 저황(儲皇)과 함께 애도했다. 또 처남 공화후가 죽었을 때 시호를 내려주고 우봉군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공화후 묘지명>에는 명종을 '천자'(天子), '제'(帝)로 표현했다.
성수(聖壽)가 천장(天長)하시길 바랍니다.[12]

태자(太子)께선 천추(千秋)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왕(諸王), 궁주(宮主), 공주(公主)는,
각자 안녕(安寧)하시길 바랍니다.

문•호양반(文虎兩班)은,[13]
충정(忠貞)으로써 보좌(補佐)하길 바랍니다.
- 자운사 <의지대사비 비문> 중. 1192년 제작됨. 왕실과 조정의 편안함을 기원하고 있다.

1195년에 어이없는 일화가 있다. 당시 태자였던 왕숙이 자신의 생일인 '천희절'(天禧節, 태자의 절일)을 맞아 하례를 받고 부왕 명종을 보러 갔다. 명종은 민간에 무슨 말이 떠도는지 물어 봤다.
태자: "사람들이 모두 신을 '노태자'(老太子)[14]라고 웃습니다."
명종: "짐이 오래 사니 미안하구나."
명종의 말을 듣고 태자는 자신이 아주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알고 실색했다. 아버지가 오래 재위했다는 걸 농담으로 던진 것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아버지 왜 오래 사냐? 난 늙은 태자 취급 받는데" 같은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1196년 2월 또 경성(京城)에 지진이 났다. 명종은 다시 점을 치도록 했고 점은
'호령이 신하를 따라 나온다(號令從臣出)'
는 답을 줬다고 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무신들이 전횡하는 조정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1196년 4월, 무신 집권자 중 최악이자 최대의 권력을 자랑한 최충헌이 제4대 집권자였던 이의민과 그 일족을 주멸함으로써 봉사 10조를 올린 뒤 역사에 등장했다(병진정변).

1197년 명종은 고려 왕실의 일원인 왕면(王沔)을 광릉후(廣陵侯)로 봉했다. 이에 왕면은
" 천자의 가문(天子之家)을 빛내겠다"
며 감사의 표문을 올렸다.

명종의 치세는 제8대 현종이 만든 전성기가 어찌어찌 제17대 인종 대까지 이어지다가 제18대 의종 때 결국 끝장나고, 본인 대에 무너지기 시작한 시대였다. 중흥의 군주가 필요했으나 권신들의 폭정과 명종의 부족함이 충족시키지 못했다.

2.3. 폐위: 정사정변

1197년(정사년) 9월 최충헌 형제가 반역을 일으키는데 고려사》 <최충헌 열전>에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해뒀다.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는 이전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이 세운 임금인 명종을 폐위시키고, 자신들이 직접 임금을 세우고자 했다. 그래야 전임 집권자들의 잔재를 없애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형제는 명종을 폐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하늘에 초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이 날(음력 1197. 9. 14) 저녁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며 번개가 쳤다고 한다. 이후 최충수는 자신의 생질인 박진재와 함께 형 최충헌을 찾아갔다.
최충수: "금상(今上)이 재위한 지 28재(載)이며 늙고 일하기 싫어합니다. 여러 소군(小君)이 항상 상(上)의 곁에 있으며, 은혜와 위엄을 훔치고 있어 국정(國政)이 엉망입니다.

상(上) 또한 소인배들을 총애해 금과 비단을 함부로 하사해 부고(府庫)가 비어 신민(臣民)의 주(主)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태자(太子) 숙(璹)은 여러 궁비(宮婢)를 가까이 해 아들 아홉을 낳았는데 각각 소군(小君)에게 보내 머리를 깎아 제자(弟子)로 삼게 했습니다.

(태자의) 성품 또한 어리석고 약하니 저부(儲副)[15]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사공(司空) 진(縝)[16]은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총명하며 도량이 있으니, 그를 왕으로 세우면 나라가 중흥(中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 중. -충수가 왕진을 추천하다-.

최충수는 종실의 일원인 왕진을 밀었는데 《고려사》에서는 그 이유를 최충수가 왕진의 여자 노비를 좋아해서 왕진을 돕고자 한 것이라고 했다.
최충헌: "평량공(平凉公) 민(旼)(이후의 신종)은 상(上)의 모제(母弟)이다. 지략이 깊고 도량이 넓어서 제왕(帝王)의 양(量)을 가지고 있다.

또 아들 연(淵)(이후의 희종)도 총명하고 배움을 좋아하니 저부(儲副)로 삼을 만하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 중. -충헌이 왕민을 추천하다-.

최충헌은 이미 늙어 나이가 많고, 안정적으로 최충헌의 의도대로 후계자를 정할 수 있는 명종의 막내동생 평량공 왕민을 밀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안 맞자 박진재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박진재: "진과 민은 모두 군(君)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금나라는 진이 있는지 모르니, 진을 내세우면 무언가 속셈이 있다고 여길 것이니 민을 세우는게 낫습니다.

의종의 고사(故事)[17]처럼 동생으로 뒤를 잇게 한 것이라고 알리면 뒷말이 없을 겁니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 중. -박진재도 왕민을 추천하다-.

결국 이렇게 평량공 왕민이 차기 대왕이 되는 걸로 결정되어 명종은 폐위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가 내리는 날(음력 1197. 9. 23, 양력 1197. 11. 4) 최충헌은 최충수, 박진재, 김약진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개경 만월대의 황성 거리에 나왔다. 그는 모든 궁문을 폐쇄하고, 의 군대인 2군 6위를 5군 진영으로 배치했다. 고려의 평시 편제는 2군 6위였고, 전시에 원정군이 조직되면 중앙군 6위가 5군으로 개편되었다. 최충헌은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여 중앙군을 완전히 장악했다.

최충헌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명종은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혼자서 말을 탄채 향성문(向成門, 본궐의 서대문)을 나가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당했고, 태자 왕숙은 태자비와 함께 걸어서 북궁을 나와 강화도 유배를 떠났으며, 후에 고종(제23대)이 되는 만 5세의 어린 왕손 역시 유배되었다. 왕손의 유배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버지 왕숙과 같이 갔을 수도 있고, 나중에 아버지가 강종(제22대)으로 즉위한 후, 아들을 서해도(西海道) 풍주(豊州) 안악군(安岳郡)(지금의 황해도 안악군)에서 데리고 온 걸 보면 그 쪽으로 유배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후 최충헌이 명종의 막내동생 평량공 왕민을 새 왕으로 옹립하면서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명종의 시대가 끝이 났다.

2.4. 최후

명종은 폐위되고도 5년 정도를 더 생존했다. 《고려사》 <명종 세가> 기록인 1202년 9월에 폐위된 명종이 병에 걸리자 동생 신종이 신하를 보내 물었다.
신종: "의원을 보내 약을 드리려 하는데 누굴 보내 드릴까요."
명종: "난 28년 동안 보위를 더럽혔다.[18] 나이도 이미 일흔 둘인데 왜 굳이 수명을 늘리려 하겠는가."

라고 하며 의원을 거부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폐주 명종의 마지막 말이다.

결국 1202년 11월 17일, 유폐당했던 창락궁에서 죽었다. 향년 72세. 제25대 충렬왕 다음으로 장수한 고려군주이자 충렬왕와 더불어서 70대까지 산 고려 군주이다. 참고로 역대 고려 군주들 중 환갑을 넘긴 군주가 충렬왕과 명종 포함 총 7명으로, 충렬왕과 명종 다음으로 제23대 고종(67세) → 제1대 태조(66세) → 제11대 문종(63세) → 제22대 강종(61세) 순으로 환갑을 넘겼다.

묘호를 '명종'(明宗)이라 하고 태묘에 모셔 제사지냈으며, 시호를 '광효대왕'(光孝大王)이라고 했다. 이후 손자인 고종이 시호 '황명'(皇明)을 추가했다.

조선시대 《 동문선》에 실린 〈명왕 애책문〉(明王 哀冊文)엔 명종의 마지막을 조금 다르게 적었다.

〈명왕 애책문〉은 동생 신종이 최홍윤이란 신하를 시켜 쓴 것인데 <애책문>에선 명종 광효대왕이 1203년 11월 17일에 양화궁(養和宮)에서 붕어(崩于)했다고 썼다. 또한
'너무 늙어 직접 양위하여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가 제향(帝鄕)으로 돌아갔다.'

고 표현했다. 여기서 '제향'은 황제(명종)의 고향이 아니라 '상제(上帝)의 고향', 즉 죽어 승천했다는 뜻이다.

《고려사》와 비교하면 일단 1년 더 살았던 셈이다. 창락궁에서 붕어한 것이 아니라 양화궁에서 붕어했다. 《고려사》는 명종의 죽음을 '훙'(薨, 제후의 죽음)이라고 표현했지만 당시엔 ' 붕어'(崩御, 천자의 죽음. 천붕(天崩))라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명종이 태상왕이 되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전무하다. 또한 명종이 직접 양위했다고 쓰여 있다. 대놓고 권신 최충헌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증거이다. 여러모로 《고려사》와 다른 것이 특징이다.

《고려사》 <예지> -국상-조 기록에 따르면 명종은 죽어서도 능욕을 당했다. 동생 신종이 형의 장례식을 치르려 하자 최충헌이 명종의 장례식을 대왕의 예가 아닌 왕후의 예로 치르게 한 것이다. 신종은 나름 반항한 것으로 보이지만 감히 최충헌을 거스르지 못했고, 결국 명종의 왕후인 광정태후의 예로 장사지냈다. 마치 중방의 무신들이 자신들이 죽인 의종을 싫어했던 것처럼 최충헌도 자신이 내쫓은 명종의 정통성이 강해지는 걸 싫어해 왕후의 예로 장사지낸 것이었다.

최충헌의 명종 격하 시도는 계속 이어졌는데, 명종이 죽었을 때 정기적으로 오던 금나라 사신들이 왔다. 신종은 공예태후의 전례에 따라 연회를 개최하지 않고, 풍악을 연주하지 않으려 했지만 금나라 사신들의 반발과 '누군가'의 암묵적인 압박 때문에 기일에 맞지 않게 큰 연회를 열게 된다.

최충헌은 마지막까지 명종을 괴롭혔는데, 명종의 장례식 날에 친아들이자 폐태자인 왕숙이 참석하는 걸 막았다. 당시 왕숙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아예 오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왕숙은 부왕 명종이 죽고 11년 뒤인 1212년에야 아버지의 능묘를 참배할 수 있었다.

한편 명종 본인 사후 2년 후인 1204년에는 동생 신종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가족관계

4. 기타

5. 평가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말 그대로 도륙내고, 의종과 태자를 쫓아낸 다음 유약한 성격인 그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어느날 갑자기 임금이 되어버렸다. 일정 부분은 조선 중종과 비슷하지만 그 쿠데타 세력의 성격이 매우 달랐다.

그러나 적어도 무신정권의 완전 허수아비까진 아니었다. 이런 진성 허수아비 임금들은 적어도 제22대 강종 때부터였고, 명종은 그래도 그럭저럭 무신들이 서로 견제하던 심리 및 몇몇은 집권하다가 살해당하여 쫓겨나는 형편이었기에 최소한의 권력은 있었다. 하지만 명종은 무신들을 서로 견제하도록 조종만 했을 뿐, 민생에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고, 과거 급제자들의 관직 진출도 차차 막혀가고 있었던 데다 지방관들의 자질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었는데 이런 문제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똑같이 추대됐지만 할 수 있는 한 권신들 틈바구니에서도 최대한 민생을 챙기고 자기 직무에는 나름 책임감을 보인 조선 중종보다 훨씬 못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쉽게 생각하면 조선 중종의 하위 열화판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런 무책임한 행태의 백미는 이의민을 불러들인 것이다. 경대승이 젊은 나이로 급사하면서 잠시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명종은 당시 경주로 낙향했던 이의민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이 때 이의민은 계속해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경대승이 두려운 나머지 경주로 요양을 핑계로 도망와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수도의 군부 세력을 제어하고자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경대승의 도당 잔당에 대한 문제 등이 추측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의민은 선왕 의종을 참혹하게 시해한 자인 데다 천민 출신으로 그나마 만만한 상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명종은 임금 스스로 이의민을 불러서 관직을 제수함으로써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린 셈이 되었다.
사실 경대승의 집권기(79~83) 그 중에서도 특히나 81년 4월 ~ 83년 7월까지의 시기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할 수 있었다. 81년 4월 이의민 경대승을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낙향(고향은 동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의민은 제 딴에는 고향이랍시고 이런 선택을 했겠지만 이것은 4가지 측면에서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1. 기록을 몇 가지 살펴보자.
73년 이의민 김보당의 난 진압, 의종 살해를 임의(이의방의 명)로 처결했다. 바로 동경에서 말이다.
74년 이에 반발한 조위총의 난 진압에 참전했다.
77년 이의민은 조위총의 잔당 진압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79년 경대승이 정권을 잡았다.
81년 4월 낙향
-> 행적이 앞뒤가 다르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73년의 행적이 있는데, 낙향? 동경민들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77년의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25]
2. 경대승에 패해서 물러나는 그림이었다는 것
3.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했다는 것
4. 떠났다는 그 자체도 문제다. 이 말은 곧, 황도(개경)에 중방 세력이 고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6] 이러하듯 상황은 오히려 명종에게 유리했다. 정변을 통한 옹립이라는 약점? 강조의 정변이라는 선례가 있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거리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하는 것이 맞았을까? 실책에 대한 설명 2와 3에서 보건데 경대승을 동경 유수로 보냈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이의민 스스로 공인한 천적이자, 자신(명종)이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인물, 명분(폐주에 대한 미련, 민생 민심 걱정, 군인 본분)에 집착했으니 언행일치를 하는가 아닌가로 진심을 시험할 수도 있으며, 실권자가 복종한다는 황명의 권위 제고의 좋은 그림까지 만들어 줄 수 있는 인물! 명종에게는 정말 좋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이제이 아닌가! 설령 경대승이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보내는 방법도 있었다.[27][28]
자, 이렇게 동경은 경대승에게 맡기고서 중방을 처리해야 할텐데, 두경승을 통해 정변 역적이라는 죄명이든, 부정부패라는 죄명이든 구실이야 만들어서 군사력을 동원, 숙청하는 것이 다음 순서일텐데, 만약 현명한 왕이었다면 두경승을 메인이자 미끼로 사용하고, 시선이 그쪽으로 분산되어 있을 때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일으켜서 중방을 치는 기습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이러한 기회를 명종은 스스로 걷어찼다는 것

그가 이의민에게 권력을 넘겨준 것도 무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인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군부(정중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문벌귀족들보다는 군부 세력이 자신을 옹호할 세력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했고, 그런 판단하에 이의민을 불러올렸던 것이다.

다만 나름의 정치적 센스는 갖추고 있었는지 초기 무신정권의 집정들이 절대로 폭주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제1대 이의방 집권기에는 중방과 정중부를 이용했고, 제2대 정중부 집권기에는 중방의 고위급 무장들과 문신들을 활용했으며, 제3대 경대승 집권기에는 두경승과 조원정을, 제4대 이의민 집권기에는 두경승을 안전장치로 마련하여 서로 견제코자 했고, 나름대로 이는 제대로 적중하여 명종시대의 무신 집정들은 후대의 최충헌 마냥 전횡을 일삼으며 폭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의민 대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 정국이 안정되어 이의민과 두경승이 서로 견제하면서 장장 13년동안 연립 정국식으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다만 이 체제는 문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명종이 국정에 대한 책임감이 없으면 적어도 이의민이라도 챙겨야 하는데, 이의민 자체도 본인의 권력이 너무 강해지자 맘을 놔버리면서 의종 저리가라 할 정도로 놀아제꼈고, 그 아들들도 너무 형편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신들 사이에선 명종과 이의민이 만든 체제 자체에 대해 불만과 의구심, 위기 의식이 점점 커져갔고, 이 기회를 최충헌이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살해한 뒤 명종과 태자를 폐위한 뒤 쫓아내버렸고 기어이 두경승까지 귀양보냈다. 이후 두경승은 유배지에서 의문사했는데 사서에서는 그의 재산을 노리고 있었던 노비가 죽였다는 설과 최충헌이 그를 살해했다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명종은 최충헌의 쿠데타에 기본적으로는 사실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문신들이 최충헌에게 암묵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다면 설령 이의민은 제거했어도 두경승을 비롯한 중방 무신이 최충헌을 제압했겠지만 당시에 일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최충헌은 이의방, 이의민보다도 독재가 심했고, 부정부패는 정중부를 아득히 능가할 정도였으며, 사조직을 만들어 국가 공조직을 능멸하는 월권은 경대승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최충헌은 모든 반대자를 제압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최충헌이 참조한 전임자들은 무신 집권자들 뿐만이 아닌, 명종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충헌은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도, 최소한의 일상 국정에 대한 파악과 시의적절한 조치들은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다. 즉 게으른 독재자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물론 최충헌의 정치는 고려의 건전한 국정 운영을 파괴했지만 아예 국정에 대한 책임감 자체를 놓아버린 명종 말기 때의 한심한 행태보다는 나았다고 여겨질 소지는 있었다.

명종 자체가 자기 보신과 현상 유지에만 심하게 급급한 문제 있는 임금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최충헌의 반란과 이후의 초법적인 통치가 정당했고, 고려 사회에 이익을 주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명종의 게으름과 무사안일, 무책임이 최충헌 일당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한 건 사실이다.[29]

한편 최충헌에 의해 폐위된 태자 왕숙은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그로부터 14년 후에 수도 개경으로 돌아와 강종이 되었다. 명종을 폐위시킨 최충헌은 그의 아우 평량공 왕민을 왕으로 옹립하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명종은 그로부터 5년이나 더 살다가 이질에 걸렸는데, 이 때 의원의 치료를 거부해 붕어했다. 그때 한 말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였다. 실제로 승하할 당시의 나이가 72세였으니 당시의 기준으로는 꽤나 장수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후사는 그로부터 이어졌으니, 신종의 뒤를 이은 신종의 아들 희종이 최충헌의 목숨을 노렸지만 도리어 실패한 후 폐위되자, 유배를 갔던 명종의 아들 왕숙이 강종으로 옹립되었고, 그 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그의 자손이 왕위에 올랐다. 덧붙여서 제34대 공양왕의 경우, 부계로는 제20대 신종의 7대손이었지만, 모계 쪽으로는 명종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

동국통감》의 평은 간신들에 의해 즉위해 혼암이 있는 군주로 평가했다.
명종(明宗)은 용렬(庸劣)하고 혼암(昏闇)하며, 정중부(鄭仲夫)가 왕으로 세웠다가 최충헌(崔忠獻)이 폐출하였습니다. 그를 세우고 그를 폐함이 모두 적신(賊臣)들의 수중에 있었고, 게다가 부녀자[床第]를 사랑함에 빠져 덕이 규문(閨門)에 부끄러우니, 어찌 족히 취하겠습니까?
동국통감》 <고려 공양왕 4년, 임신년(壬申年), 1392년> - 총평-

6. 대중매체

파일:attachment/명종/고려명종.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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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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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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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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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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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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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 신창(창왕)) }}}}}}}}}}}}


[1] 율리우스력 8월 11일 [A] 율리우스력 10월 13일 [B] 율리우스력 12월 3일 [4] 율리우스력 12월 17일 [A] [A] [C] 율리우스력 11월 4일 [C] [B] [10] 《고려사》에 이름이 기록된 자녀 기준 [11] 《고려사》 <명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12] 원문은 '성수천장'(聖壽天長)인데 '성수'는 '임금의 수명'을 이르고, '천장'은 '하늘과 같이 길다'는 뜻이다. [13] '호'는 제2대 혜종의 휘인 '무'(武)를 피휘한 것이다. [14] 1152년생인 강종은 이 당시 44세였는데, 명종이 오래 재위하니 강종은 오랫동안 태자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종을 '늙은 태자'라고 민중이 놀린 것이다. [15] 태자의 다른 말. [16] 제8대 현종의 아들 정간왕의 직계 후손이다. [17] 중방의 권력자들은 의종의 죽음을 외국에 알리고, 동생 명종이 대신 자리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18] 《고려사》 원문에 '더럽혔다'고 되어 있는데, 명군으로서 통치하지 못했다고 겸양하는 표현이다. [19] 신안후 왕성의 아들로 현종의 6대손 [20] 소성후 왕공의 아들로 숙종의 4대손 [21]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첩 [22] 벌과 복을 주는 왕과 같은 권력 [23] 나라에서 승려들에게 수여하는 지위 중 하나 [24] 기녀가 낳은 자식 [25] 우리를 포함한 외부인의 상식선에서는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이 때부터 계림의 황룡이니 십팔자위왕설이니 떠들어대며 역심을 품었는지 동경이 이에 동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26] 이렇게 되면 황도 권력 구도는 명종, 경대승, 두경승, 중방 이렇게 넷이 주요 세력이 된 것인데 조원정이 있기는 했다지만 두경승에게 맞설 수 있었을까? [27] 도방 살림이 어려워져 장사들이 약탈을 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의 족형(먼 친척)인 손석 문서에서 볼 수 있듯 청을 받아들여 오광척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28] 경대승이 명을 받들지 거부할지는 100% 확신을 가지고 단언을 하기는 힘들겠지만 아마도 그도 따를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위의 명종의 입장을 반대로 놓고 보면 이를 거역한다는 것은 황명에 반역뿐 아니라 스스로가 보이던 명분 위주 행보에도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이 아니라, 따르게 되면 되려 실익도 있다. 손석의 건을 넘어가준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도 이득인데, 동경 유수라는 정식 벼슬을 가지고서 자기 명분도 챙기고 봉급도 받는다 그리고 그 봉급으로 도방 장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 거부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29] 우리역사넷 [30] 능력치는 정치 42, 전투 46, 지모 46이고 내정 특기로는 농업 하나뿐이며 전투 특기가 없다. [31] 실제로는 1131년생이니 현실대로 한다면 59세라서 나이 설정이 잘못되어서 컴퓨터가 플레이하면 거의 수하 장수로 있는 최충헌이 후계자가 되어 "최씨 고려"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연회를 해서 최충헌의 충성도를 올림과 동시에 빨리 자손을 만들어야 하는데 고려는 아이템 인삼 때문에 왕비의 회임율이 타국보다 높다는 이점은 있다. [32] 일본 지역 밖으로 공격을 나가지 않을 뿐이지, 일본 지역의 도시가 외국의 세력에 점령되면 이를 탈환하기 위해 즉각 공격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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