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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E0D><colcolor=#670000> 고려 인종의 부마
소성후 왕공 | 邵城侯 王珙 |
|
작위 |
소성백(邵城伯) 소성후(邵城侯) |
본관 | 개성 왕씨 |
휘 | 공(珙) |
부모 |
부친 영녕군(永寧君) 왕유(王瑜) 모친 개성 왕씨[1] |
형제자매 | 외아들 |
배우자 | 영화궁주 왕씨[2] |
자녀 |
2남 1녀 장남 - 창화후(昌化侯) 왕우(王祐) 차남 - 수사도(守司徒) 왕선(王璿) 장녀 - 개성 왕씨[3] |
생몰연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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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왕족.본명은 왕공(王珙), 작위는 소성후(邵城侯)이다.
2. 생애
소성후 왕공은 숙종의 손자 영녕군(永寧君) 왕유(王瑜)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종과 인예왕후의 딸 영화궁주(永和宮主)와 혼인해 소성백(邵城伯)에 봉해졌고, 명종 12년인 1182년 12월에 수사도 소성후(守司徒 邵城侯)로 진봉되었다.3. 평가
소성후는 탐욕스럽고 비루한 인물로, 저자에 가노를 보내 물건 훔치기를 밥먹듯이 했다. 땔나무나 과채류를 가져가는데도 상인들은 가노에게 두들겨 맞을 것을 걱정해야 했다.하루는 추밀원부사(樞密副使) 조원정(曹元正)의 가노들이 죽은 꿩을 팔러 시장에 나갔는데 소성후의 가노들에게 꿩을 빼앗겼다. 그러자 조원정의 가노들은 법관에게 가서 자기들이 지니던 서대(犀帶)를 빼앗겼다고 허위 진술을 했다. 부처에서 문초하자 소성후의 가노들은 서대를 훔쳤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게 됐다. 자신까지 연좌되게 생기자 소성후는 조원정에게 가서 백금 6근(斤)을 뇌물로 주고 나서야 모두 없던 일로 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무고한 조원정을 욕하면서도 쌤통으로 여겼다.
나이 48살에 종기(腫氣)가 등에 나 소성후가 죽자 사람들은 "이제 우리 모두 살았다!"[5] 라며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