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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9 22:44:34

소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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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의 부마
소성후 왕공 | 邵城侯 王珙
작위 소성백(邵城伯)
소성후(邵城侯)
본관 개성 왕씨
공(珙)
부모 부친 영녕군(永寧君) 왕유(王瑜)
모친 개성 왕씨[1]
형제자매 외아들
배우자 영화궁주 왕씨[2]
자녀 2남 1녀
장남 - 창화후(昌化侯) 왕우(王祐)
차남 - 수사도(守司徒) 왕선(王璿)
장녀 - 개성 왕씨[3]
생몰연도 ? ~ ?

1. 개요2. 생애3. 평가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clearfix]

1. 개요

고려의 왕족.

본명은 왕공(王珙), 작위는 소성후(邵城侯)이다.

2. 생애

소성후 왕공은 숙종의 손자 영녕군(永寧君) 왕유(王瑜)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종 인예왕후의 딸 영화궁주(永和宮主)와 혼인해 소성백(邵城伯)에 봉해졌고, 명종 12년인 1182년 12월에 수사도 소성후(守司徒 邵城侯)로 진봉되었다.
年四十八, 疽發背死
48세[4]에 등에 종기가 나서 죽었다.
고려사』 권90, 종실열전.

3. 평가

소성후는 탐욕스럽고 비루한 인물로, 저자에 가노를 보내 물건 훔치기를 밥먹듯이 했다. 땔나무나 과채류를 가져가는데도 상인들은 가노에게 두들겨 맞을 것을 걱정해야 했다.

하루는 추밀원부사(樞密副使) 조원정(曹元正)의 가노들이 죽은 꿩을 팔러 시장에 나갔는데 소성후의 가노들에게 꿩을 빼앗겼다. 그러자 조원정의 가노들은 법관에게 가서 자기들이 지니던 서대(犀帶)를 빼앗겼다고 허위 진술을 했다. 부처에서 문초하자 소성후의 가노들은 서대를 훔쳤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게 됐다. 자신까지 연좌되게 생기자 소성후는 조원정에게 가서 백금 6근(斤)을 뇌물로 주고 나서야 모두 없던 일로 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무고한 조원정을 욕하면서도 쌤통으로 여겼다.

나이 48살에 종기(腫氣)가 등에 나 소성후가 죽자 사람들은 "이제 우리 모두 살았다!"[5] 라며 기뻐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어머니 왕씨는 통의후 왕교의 딸이다.

4.2. 자녀

아들 창화후(昌化侯) 왕우(王祐)는 명종의 딸인 수안궁주와 혼인해 수사공(守司空) 왕현(王泫)과 수사도(守司徒) 왕선(王璿)을 낳았다. 수사도 주국(守司徒 柱國) 왕선(王璿)에게는 딸만 둘 있었다. 왕선의 사람됨이 물욕이 적고 부처에 빠져 집안 살림을 기르지 않았다. 고종 3년인 1216년에 죽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두 딸이 시집가지 못하고 장사(襄事)도 치르지 못하였다. 최충헌(崔忠獻)이 왕에게 보고하여 관청에서 장사를 치르게 해주었다.

[1] 대방공 왕보의 동생 통의후 왕교의 딸 [2] 인종의 4녀 [3] 인천 이씨 이자덕의 증손인 이간(李侃)의 부인 [4] 세는 나이다. [5] 吾儕得活矣 [6] 문종의 13남 진한공 왕유의 차녀로 추정 [7] 대방공 왕보의 동생 통의후 왕교의 딸 [8] 인종의 4녀 [9] 명종의 차녀 [10] 희종이 태자 시절에 혼인한 비 [11] 인천 이씨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덕의 증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