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강원도의 고개 단발령(斷髮嶺)에 대한 내용은 단발령(고개) 문서 참고하십시오.
조선 말기 화가 김준근의 풍속화 《단발한모양》 |
1. 개요
단발령( 斷 髮 令)은 조선 후기에 두 차례 공포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칙령이다. 1895년과 1900년 두 차례 행해졌으나 보통 단발령이라고 하면 큰 반발이 있었던 1895년 1차 단발령을 의미한다."머리털을 자르느니 차라리 머리를 자르겠다(죽겠다)"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이순신의 후손으로 음직의 혜택을 받은 한 관리도 단발령에 따라 상투를 잘랐는데, 그 아내가 "이순신의 가문이 다름아닌 왜놈의 명령에 따라 상투를 자르니 하늘 보기 수치스럽다"면서 자살하는 일까지 있었다.
2. 1차 단발령
내부대신 유길준[1]의 주도로 김홍집 내각이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에 공포했다.내부(內部)에서 고시(告示)하기를,
"이제 단발(斷髮)은 양생(養生)에 유익하고 일하는 데에 편리하기 때문에 우리 성상 폐하(聖上陛下)가 정치 개혁과 민국(民國)의 부강을 도모하며 솔선궁행(率先躬行)하여 표준을 보인 것이다. 무릇 우리 대조선국(大朝鮮國) 민인(民人)은 이러한 성상(聖上)의 뜻을 우러러 받들되 의관 제도(衣冠制度)는 아래와 같이 고시(告示)한다.
1. 나라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으니 의관(衣冠)은 나라의 거상 기간에는 그전대로 백색(白色)을 쓴다.
2. 망건(網巾)은 폐지한다.
3. 의복 제도는 외국 제도를 채용하여도 무방하다."
하였다.
-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음력 11월 15일 신해 9번째 기사
"이제 단발(斷髮)은 양생(養生)에 유익하고 일하는 데에 편리하기 때문에 우리 성상 폐하(聖上陛下)가 정치 개혁과 민국(民國)의 부강을 도모하며 솔선궁행(率先躬行)하여 표준을 보인 것이다. 무릇 우리 대조선국(大朝鮮國) 민인(民人)은 이러한 성상(聖上)의 뜻을 우러러 받들되 의관 제도(衣冠制度)는 아래와 같이 고시(告示)한다.
1. 나라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으니 의관(衣冠)은 나라의 거상 기간에는 그전대로 백색(白色)을 쓴다.
2. 망건(網巾)은 폐지한다.
3. 의복 제도는 외국 제도를 채용하여도 무방하다."
하였다.
-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음력 11월 15일 신해 9번째 기사
일본에서 단발령을 시행할 때 천황이 머리를 자르자 다들 따랐듯 위에서 선례를 보여주기 위해 일단 고종과 세자( 순종)가 먼저 자르고, 이에 따라 각료들도 반쯤 강제로 상투를 잘랐다. 이후 상투보다는 단정하고 짧은 머리가 위생적이고 일상에서 작업 효율을 높여 준다고 선전하면서 전 국민에게 머리를 깎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유교의 가르침 중 하나인 "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즉 "사람의 신체와 털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치되었으며[2] '손발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선비와 유생들은 물론이고 일반 민중들마저 크게 반발했다.[3]
그러나 강제로 시행하면서[4] 지방으로까지 관리들이 파견되어 지나가는 길마다 다짜고짜 상투를 자르고 가는 일이 많아졌고 그 결과 사람들이 왕래를 하지 않아 물자가 부족해져 잠시간 인플레이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동시에 이전까지만 해도 사진 찍는 걸 꺼리는 풍토 때문에[5] 파리만 날렸던 사진관들은 머리 자르기 전에 상투의 온전한 사진만이라도 남겨 두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갑자기 호황을 누렸다.
결국 을미사변과 함께 반일 감정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어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친러 내각이 등장해 단발령을 철회하여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고종의 머리카락을 잘랐던 정병하는 아관파천 이후 암살당했고 순종의 머리카락을 잘랐던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3. 2차 단발령
대한제국 선포 이후 스스로 본격적인 서양풍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양 풍속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줄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박은식 등 유학의 개신을 주장하는 청년 유림들이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1900년 근대화의 일환으로 2차 단발령이 시행되었다. 민중들도 스스로 근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었을 뿐더러 청년 유림들이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널리 퍼뜨리면서 별 탈 없이 단발령이 시행되었다. 이후에는 모든 관리들이나 군사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하고 서양식 복장으로 관복을 변경하였다. 즉, 정책의 뒷배경에 의도가 의심스러운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첫 단발령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고 스스로의 필요성을 자각한 상태에서 두 번째로 진행한 단발령은 성공적으로 정착한 셈이다.물론 국가 단위의 큰 사회에서 진짜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성공적이었던 2차 단발령도 예외는 아니어서 보수주의자 중에는 1930년대까지 단발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딱히 단발령을 다시 시행하지 않았고 상투를 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뒀다.[6]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발을 아예 강제를 안한것은 아니고 순사, 교사 등 공무원, 군인, 학생들은 무조건 단발을 하도록 되어있었고, 1912년 조선감옥령 제정 이후로 재소자들도 삭발을 강제당했어야 했다. 이러한 두발규정은 광복후에도 관리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남아서 재소자들은 1995년 이전까지 까까머리를 해야되었고(두발자유화는 2000년), 일선학교에서 학생들의 머리를 고속도로냈다는 일화가 2010년대 초반까지도 흔하게 남아있던것도 이 당시의 흔적이다.
일제는 보천교에게 이들이 단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로 삼았지만 상황을 보면 명백히 억지스러운 시비였다.
아무튼 이 당시에는 상투보다는 단발이 더 인식이 좋았던 걸로 보이는데 만세전에서는 주인공 이인화가 상투 튼 노동자를 보고 상투 자르는 게 편하지 않냐고 묻자 노동자는 "상투라도 있으면 내지 사람들이 '무식한 놈인갑다' 하고 그냥 봐줍니다요ㅎㅎ"라고 웃어넘긴다.
일제강점기 한국 남성들 사이에서는 짧은 스포츠머리보다는 요즘의 젊은 남성들마냥 머리카락 기장을 어느 정도 길게 하여 드라이하거나 크림을 발라 단정하게 하는 스타일이 대체로 유행했는데 이는 일본과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8.15 광복 직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6.25 전쟁 당시에도 중공군과 조선인민군 사병들이 머리를 빡빡 깎았다면 대한민국 국군들은 사병들도 머리카락이 긴 편이라 백병전에서도 머리카락 길이 유무로 적을 분간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도 노년층 중에서는 기존의 상투 차림으로 생활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1960년대까지도 가문의 뼈대를 자랑하는 양반 유림들 중에는 상투와 갓차림을 고수하는 소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늙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1970년대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서구화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상투 차림은 급속히 사라져갔고 현재에는 청학동마을 같은 곳의 극소수 훈장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
4. 현대
물론 실제로 단발령이 시행된 것은 아니고 상대방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게 하는 행위를 드립의 목적으로 단발령이라고 부른다. 유신 시대에는 미니스커트 길이 단속과 함께 남자는 장발 단속이 있었다. 걸리면 이발소 가서 하는 것처럼 예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대충 보기 흉하게 밀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단정하게 손질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버렸다고 한다.해방 이후로도 일선 학교에서 머리를 빡빡하게 깍는 광경은 1980년대 초반까지도 흔했고, 1970년대에는 아예 정부 차원에서 성인남자들의 머리를 강제로 이발하기도 했다. 두발단속은 길이규제만 완화된채로 2010년대 초반까지도 흔했다가,[7] 201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대다수 중 고등학교에서 머리길이 제한규정이 없어졌으나 규정이 남아있는 곳은 주로 대경권 지역에서 오래된 학교나 보수적인 남자 중 고등학교는 아직도 머리길이 규제가 남아있는 학교가 많다.
5. 유사 사례
대표적인 사례인 동시에 조선의 단발령의 모티브가 된 사례로 일본의 단발령이 있다.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촌마게[8]를 하고 있었는데 서구화의 명목으로 이를 자르게 한 것이다.[9] 당연히 일본에서도 큰 반발이 일었지만 메이지 덴노가 직접 머리를 자르자 잠잠해졌다. 하지만 폐도령과 국민개병령 등의 조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자 실업자가 될 위기에 처한 사무라이들이 반발해서 전쟁이 터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의 단발령은 일본의 소수민족들에게도 적용되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의 후손들이 하던 조선식 상투, 류큐인들이 하던 류큐식 상투 카타카시라(欹髻, かたかしら), 아이누족· 윌타족· 오로치족 등 홋카이도 원주민들의 전통 머리모양도 단발령의 예외가 되지 못했다.중국의 경우 청나라 초기 막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이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한 적이 있다.[10] 이때 한족들이 변발이 오랑캐의 머리라며 심하게 반발하자 각종 강경책을 포함한 정책들을 동반하여 한족들에게 변발을 정착시켰다. 그런데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변발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는 오히려 변발이 새 전통으로 자리잡은 한족들이 변발 금지령에 반발해 옛 전통을 되찾으려는 한족 정부가 가위를 들고 강제로 변발을 잘라가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해야 했다. 결국 이렇게 한족의 변발은 자취를 감췄다. 만주족은 신해혁명 당시 양주십일-가정삼도 등 조상들이 저지른 한족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한족 혁명군에게 대거 학살당했기 때문에 변발 금지령 후에는 살기 위해 스스로 변발을 잘라 한족으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이족도 청나라에 복속된 후 변발을 강요당해 이에 반발하다가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으나 중화민국 초기에 변발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는 한족들처럼 만주족식 변발이 새 전통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신해혁명에 가담했거나 도사인 이들을 제외한 일반 한족들처럼 변발 금지령에 반발하다가 한족 민족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변발이 잘렸다. 청나라 치하 위구르족은 4품 이상의 관리인 경우에만 만주족식 변발을 강요당하고 나머지는 위구르식 변발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한족 및 후이족에 비해 상황이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출세를 원하던 위구르족들 사이에서는 반발이 있었다.
대만의 경우 대만일치시기에 일본 제국에 의해 일본 본토와 같은 단발령이 내려져 만주족식 변발이 일본 본토의 촌마게처럼 금지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반발하는 한족과 만주족이 많았으며 이들은 끝내 체념하고 변발을 잘라 계속 대만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변발을 자르지 않기 위해 청나라 치하의 중국 대륙으로 도망치는 경우도 일부 존재했다. 후자의 경우 결국 신해혁명 때 강제로 변발이 잘리거나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말았지만...
몽골인들의 경우 자신들이 살던 나라인 몽골, 중국,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몽골 문화가 대거 탄압받아 변발 문화가 사라졌다. 위구르족 또한 몽골 인민 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치하에서 자신들의 문화가 탄압의 대상이 됨에 따라 더 이상 변발을 하지 않게 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조선과 비슷하지만 다르게 털을 소중히 아꼈다. 이들은 머리카락이 아닌 수염을 소중히 아꼈는데 수염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소중한 것이므로[11]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1세가 러시아 사람들에게 프랑스 식으로 머리를 하고 수염을 밀자고 하자 하느님의 것을 어찌 훼손하냐며 크게 반발했다. 이때 "차르가 사탄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말까지 돌았는데 결국 억지로 정책을 밀어붙여 정착되었다. 사실 표트르 대제가 반항하는 자들을 집단 처형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전제 군주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이 수염은 몽골의 영향을 받은 턱수염을 말한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전 러시아 귀족들의 초상화를 보면 턱수염이 매우 길다. 턱수염을 미는 대신 유럽식 콧수염을 오히려 장려했다고 한다. 실제로 표트르 대제 본인도 콧수염이 있다. 사실 이게 턱수염을 그냥 자르게 한 게 아니라 수염에 세금을 매겨서 귀족들에게 근대화와 군비 확충 -특히 나르바 전투 패배 이후의 복구- 을 위한 자금을 뜯어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귀족과 평민들은 세금을 내면 전통식 수염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들과 수사들, 그리고 농노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전통식 수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는 소수민족들의 문화가 한창 탄압받을 당시 자국 치하에 있었던 몽골계[12], 튀르크계[13], 퉁구스계[14] 민족들의 변발 문화도 탄압을 받았다. 애초에 소련에서는 주류 민족인 러시아인들의 전통문화도 탄압했으므로 딱히 변발 문화만 탄압하거나 소수민족 문화만 탄압했다기보다는 그냥 전근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문화를 전부 탄압한 것에 가깝지만... 아무튼 해당 사건을 기점으로 오늘날 구소련의 몽골계, 튀르크계, 퉁구스계 민족들은 변발이 자취를 감췄다. 중국계 러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한족계 러시아인들 중 청나라나 초창기의 중화민국[15]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이주해 온 이들은 자신들의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의 퉁구스식 변발을 유지하다가 소련 건국 이후 소수민족 문화 탄압 차원에서 강제로 변발이 잘린 경우가 많았으며 신해혁명을 피해 러시아 제국으로 망명한 만주족 또한 훗날 소련이 건국되고 나서 자신들의 변발 문화가 탄압을 받아 러시아의 다른 퉁구스계 민족들처럼 퉁구스식 변발 문화를 상실하였다.
가톨릭의 성우 사제들과 수사들이 전통적으로 정수리를 삭발하는 스타일을 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이 1972년에 바오로 6세에 의해 폐지될 때 가톨릭계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현재는 삭발하지 않는 머리 모양이 완전히 정착되어 가톨릭의 사제들과 수사들 사이에서도 삭발 문화를 부활시키자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6. 기타
스타크래프트 2: 공허의 유산 스토리에서 칼라이 프로토스가 스포일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경삭을 자르는 선택을 하는 것이 꼭 단발령을 생각나게 한다. 단, 엄밀히 말하면 프로토스 신경삭은 인간 머리카락과는 전혀 별개의 부위다. 외형이 땋은 머리처럼 비슷하게 생겨서 나온 드립일 뿐. 다만 해외에서도 단발령이라고 역사속의 소재를 차용하지 않을 뿐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인식하는 건 동일해 보인다.창작물에서 여캐들이 머리카락를 자르는 경우가 있다 보니 이것을 단발령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유적으로 학교측에서 두발 단속을 하거나 군대에서 용모를 단정히 하라는 지침이 내려와 일병, 이등병은 물론 평소에 어느 정도 넘어가는 상병, (말년) 병장까지 깎아야 하는 경우 등을 단발령이라고도 한다.
[1]
조선 최초의
일본,
미국 국비 유학생이었던 만큼 해외 정세에 많이 밝았다.
[2]
일본과의 차이점이자 단발령이 쉽게 진행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촌마게가 단순한 풍습의 일종인 것에 비해 조선의 상투는 종교에 근접한 이념이 있어서 실제로 사람들이 더 심하게 반발했던 것이다.
[3]
다만 상투를 튼다고 해서 머리를 전혀 깎지 않는 건 아니었고 정수리의 머리카락 일부를 밀어야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통풍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조선인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것은 단순히 '머리를 잘라야 해서' 가 아님을 명심하자.
[4]
강제 시행이라는 방식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를 외부 문물 유입에 의한 민족 정서 약화와 연관짓곤 한다. 하지만 후술할 내용처럼 중국의 경우 청나라 초기 막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이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할 때 반발이 심해 각종 강경책을 동반하여 변발을 정착시키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한 후 변발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는 오히려 변발이 새 전통으로 자리잡은 한족이 이에 반발해 가위를 들고 강제로 변발을 잘라가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해서 변발이 자취를 감춘 역사가 있다. 단발 정책은 민족 정서와는 크게 관련 없는 사례이며 본질은 단순히 머리를 자르고 말고의 문제만이 아닌 문호 개방 후 급격한 사회 체계 변화에 대한 반발이었다.
[5]
다만 이건 유독 조선만 그랬던 건 아니고 카메라를 발명한 서구에서조차도 초기에 사진이 영혼을 뺏어간다는 미신이 횡행했다.
[6]
단발령 때의 전국적인 반대 여론을 생각한 것도 있겠지만 만세전의 인식을 보아 그냥 냅두는 게 나은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투를 한 조선인들이 찍힌 엽서가 조선 관광 상품으로 쓰이기도 해서 이윤이 쏠쏠하기도 했고.
[7]
1982년에 중고교
두발자유화, 2000년에 두발규제 완화가 전국적으로 단행되었다고는 하나, 이때의 두발자유화 혹은 두발규제 완화는 길이규제를 완화한 정도였으며, 이 당시에도 머리길이가 일정수준을 넘으면 강제로 깍이거나 이발소와 미용실로 보내진것은 여전했다.
[8]
원래는 투구를 쓰는 사무라이들이 머리에 땀이 차는 걸 줄이기 위해 하던 헤어 스타일이었으나 통일 이후 관료의 상징이 됐고 나중엔 유학자, 승려 등 특정 계층을 제외하곤 신분에 관계 없이 하는 헤어 스타일이 됐다.
[9]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이러한 일본의 단발령이 묘사되었다.
[10]
그냥 강요만 한 수준이 아니라 만주족식으로 변발을 안 하는 자는 모두 죽인다는 살벌한 협박이었다. 이는 머리카락을 훨씬 많이 남기는 북방민족식 변발(
몽골족,
다우르족 등 몽골 제민족과
위구르족,
카자흐족 등 튀르크 민족이 하는 변발)을 해도 청나라의 변발령에 불복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치하의 진짜 몽골·튀르크 제민족에 대해서는 한족만큼 극단적인 변발령이 없었지만... 심지어 이 명령에 반발해서 변발을 지시하러 온 청나라 관리를 양자강 남쪽의 도시인 양주와 가정의 주민들이 죽여 버리자 분노한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가 수십만의 주민들을 대량학살하는 이른바
양주십일-가정삼도를 저지르기도 했다.
[11]
이러한 사고방식은
구약성경
사사기(판관기)에서 등장하는 영웅인
삼손이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던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또
그리스 신화에서도
크레타 왕국을 다스린
미노스 왕이 정수리에 난 자줏빛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다는 일화에서 보듯이 고대부터 서구에서는 남자의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비롯한 털에 신성한 힘이 깃들어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12]
대표적으로
부랴트인,
칼미크인,
다우르족.
[13]
대표적으로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우즈베크인,
투르크멘인.
[14]
대표적으로
어웡키족,
나나이족,
우데게족.
[15]
중국 땅이 워낙 넓다 보니 당시에는 변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정부의 단속을 피해 계속 변발을 하던 한족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