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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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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불가리아의 국영방송 BNT 1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불가리아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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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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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칼로얀 두상.jpg
벨리코 터르노보에 소재한 성 40인 순교자 교회 근처에서 발견된 두개골로 복원한 칼로얀의 두상. 하지만 이 두개골의 주인이 칼로얀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이름 칼로얀
(영어: Kaloyan, 불가리아어: Калоян)
출생 1170년
사망 1207년 10월
직위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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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의 3대 차르. 신생 국가인 불가리아를 발칸 반도 최강의 국가로 육성하였고, 동로마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여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로마인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생애

1170년대에 헤무스 산맥 출신의 부유한 목동의 3남으로 출생했다. 세례명은 이반(Ivan)이지만, 두번째 형 아센 역시 이반이 세례명이었기 때문에, '작은 이반'으로 불렸다. 두 형 페터르 4세 이반 아센 1세가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위해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는 두 형제를 따라 여러 전장에 참여했다. 이사키오스 2세가 아센의 아내를 생포했을 때, 그는 1188년 그녀를 돌려받는 대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후 모종의 시기에 불가리아로 돌아간 그는 1196년 이반코가 타르노보에서 아센을 살해했을 때 큰 형 페터르와 함께 그를 몰아냈고, 페터르로부터 타르노보의 군주로 선임되었다.

1197년 페터르 4세가 동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그는 귀족 한 명의 칼에 찔러 죽었다고 한다. 반면 이스트반 바사리는 페터르가 폭동을 진압하던 중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불가리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뒤 두 형의 잇따른 죽음으로 혼란해진 정국을 재빨리 수습했다. 그 후 트라키아를 연이어 습격하여 동로마 제국에 타격을 입혔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협상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알렉시오스 3세는 그런 그를 견제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이반코를 필리포폴리스의 사령관으로 삼았다. 이반코는 로도피 산맥의 두 요새를 점령했지만, 1198년 칼로얀의 회유를 받아들여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동로마 제국이 이반코의 반란으로 정신없는 사이, 그는 쿠만족과 연합하여 1199년 봄과 가을에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브라니체보, 벨버즈드, 스코페, 프리즈렌 등을 공략했다. 1199년 12월 말 인노첸시오 3세의 사절이 불가리아에 도착하여 칼로얀의 조상이 "로마의 도시"에서 왔다는 걸 알았다며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자, 칼로얀은 자신을 불가리아인의 황제라고 칭하며,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불가리아 정교회를 교황의 관할로 하는 대가로 자신을 불가리아 차르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1201년 3월, 그는 쿠만족과 함께 콘스탄티아를 파괴하고 바르나를 함락시켰다. 또한 도브로미르 크리소스(Dobromir Chrysos)와 마누일 카미치스(Manuel Kamytzes)의 반란을 지원했지만, 둘 모두 알렉시오스 3세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쿠만족이 철수하자, 그는 알렉시오스 3세와 평화협정을 맺고 그해 말 트라키아에서 철수했다. 1202년 세르비아에서 쿠데타가 벌어져 스테판 네마니치가 추방되자, 그는 네마니치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뒤 쿠만족이 불가리아를 가로질러 세르비아를 침략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세르비아가 혼란에 휩싸이자, 1203년 여름 세르비아를 침공해 니시를 점령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새 세르비아 국왕 부칸 네마니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칼로얀에게 화해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다시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차르로 추대할 수 있는 추기경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헝가리가 불가리아의 주교국 5곳을 점거했다며, 분쟁을 중재해주고 양국의 경계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204년 초, 교황은 레오 브란칼로니 추기경을 불가리아로 파견해 칼로얀을 불가리아 왕으로 추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브란칼로니는 헝가리-불가리아 국경의 케베에서 헝가리군에게 붙들렸다. 헝가리 왕 임레는 칼로얀을 헝가리로 소환하여 분쟁을 중재할 것을 촉구했지만, 교황이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자 9월 말이나 10월 초에 풀어줬다. 11월 초 불가리아에 도착한 브란칼로니는 바실리오스를 불가리아 대주교로 선임했고, 다음날 칼로얀을 불가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이무렵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하자, 그는 트라키아의 옛 동로마 영토를 공략했다. 그는 동로마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라틴인들에 대한 폭동을 일으키도록 설득했다. 1205년 초 아드리아노폴리스와 인근 마을의 그리스인들이 라틴인에 맞서 봉기했다. 그는 곧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1세가 한발 앞서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칼로얀은 1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소집하여 즉시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격하였고, 1205년 3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군을 섬멸하고 보두앵 1세를 생포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그가 보두앵을 고문하고 살해했다고 기술했고,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필리티스는 보두앵의 두개골이 칼로얀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고 기록했다. 반면 보두앵 1세의 동생이자 후임 황제인 앙리는 칼로얀이 생포된 십자군을 정중하게 대우했다는 내용의 서신을 교황에게 보냈다.

그는 라틴 제국의 영역으로 쳐들어가서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했다. 1205년 5월 하순 세레스를 포위하여 신변 보장을 약속해 항복을 받아냈지만, 약속을 어기고 포로로 잡았다. 이후 베리아의 주민 대부분을 학살했으며, 모글레나에서도 심각한 약탈을 벌였다. 이렇듯 약탈을 심하게 저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그에게 반감을 품은 필리포폴리스 시민들은 불가리아에 반기를 들기로 결의하고, 알렉시오스 아스피에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칼로얀은 필리포폴리스를 에워쌌고 6월에 주민들의 신원을 보장하겠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를 비롯한 도시 지도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알렉시오스는 수 시간 동안 거꾸로 매달려있다가 토막난 뒤 협곡에 던져져서 독수리에게 먹혔다고 한다.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필리티스에 따르면, 그는 바실리오스 2세 불가리아 제1제국을 멸망시킨 후 불가록토노스(Boulgaroktonos, 불가르인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것을 기억하고, 자신을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로마인 학살자)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들은 그의 만행에 격분하여 라틴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앙리 황제는 테오도로스 브라나스를 파견해 아드리아노폴리스와 디디모티콘을 지키도록 하였다. 1205년 6월 불가리아군이 디디모티콘을 공격했지만 십자군의 역공으로 패배했다. 8월 20일 킬리안이 직접 디디모티콘을 함락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 후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앙리 황제의 역공으로 큰 피해를 입고 트라키아에서 철수했다. 그 후 앙리 황제가 10월에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2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라틴 제국을 굴복시키려면 동맹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와 손을 잡았다. 앙리 황제가 소아시아로 건너가 아드라미티온 근교에서 니케아 제국군을 격파하자, 테오도로스 1세는 불가리아에게 구원을 청했다. 칼로얀은 트라키아를 공격했고, 앙리는 소아시아에서 철수했다. 1207년 4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재차 포위했지만, 수비대의 저항으로 좀처럼 함락되지 않다가 함께 싸우던 쿠만족이 초원으로 돌아가자 어쩔 수없이 포위를 풀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에게 라틴 제국과 화해하라고 촉구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1207년 7월 테오도로스 1세와 휴전 협약을 맺은 앙리는 테살로니카 왕국의 보니파시오와도 협의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테살로니카로 돌아가던 중 모시노폴리스에서 불가리아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는 칼로얀에게 전달되었다. 칼로얀은 즉시 테살로니카를 포위공격했지만, 수비대의 저항으로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1207년 10월, 그는 돌연 사망했다.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필리티스는 그가 늑막염으로 죽었다고 기술했지만, 옆구리에 창으로 때린 듯한 흔적이 있어서 신의 분노로 인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밝혔다. 불가리아군은 곧 철수하였고, 칼로얀의 여동생의 아들 보릴이 새 차르가 되었다.

그는 쿠만족 출신의 데시슬라바를 아내로 두었는데, 그녀는 남편 사후 보릴과 결혼했다. 그와 데시슬라바 사이에는 외동딸 마리아가 있었는데, 그녀는 라틴 제국 황제 앙리의 후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