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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코 공주

아이코 내친왕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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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
敬宮愛子内親王
파일:敬宮愛子内親王.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2001년 12월 1일 ([age(2001-12-01)]세)
도쿄도 치요다구 황궁 궁내청 병원
학력 가쿠슈인 유치원 (수료)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졸업)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졸업)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 / 학사)[1]
부모 아버지 나루히토 천황
어머니 마사코 황후
오시루시
(お印)
[2]
오엽철쭉(躑躅)
신체 165cm[3], 55kg, A형

1. 개요2. 호칭3. 생애4. 여성 천황 여부
4.1. 결혼과 부마 문제4.2. 여성 미야케4.3. 황권 다툼4.4. 천황 즉위 가능성
5. 성격6. 가족
6.1. 황실 가계도6.2. 조상6.3. 아키시노노미야와의 관계
7.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의 황족. 나루히토 천황 마사코 황후의 무남독녀이자 일본 황실의 유일한 직계 공주.[4] 아키히토 상황 미치코 상황후의 (종법으로) 장손녀이자 (출생 순서로는) 셋째 손녀이다.

천황 부부가 결혼생활 8년간 잦은 유산을 겪은 끝에 어렵게 출산한 자녀이다. 그래서 아버지 나루히토 천황과는 41세, 어머니 마사코 황후와는 38세 차이. 외할아버지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는 도쿄대학 출신의 전직 외교관이자 법학자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주 유엔 대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난 뒤 와세다대학, 하버드 대학교 등 국내외 유수 대학에서 법학 교수를 지내다, 2003년부터 2018년까지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과 재판소장을 역임했다. 외할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는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에어 프랑스에서 근무했다.

'아이코'라는 이름이 발표된 후,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이 "어떤 어려운 이름이 나올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평범한 이름이더라."라고 인터뷰했다.[5] 실제로 여자아이에게 위화감 없는 이름에다가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그런지, 새로 태어난 여자아이의 이름으로 "아이코"(愛子)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불렸던 애칭은 아이짱(愛ちゃん).

2. 호칭


'도시노미야(敬宮)'는 천황과 황태자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개인 이름인 어칭호(御称号)로, 학교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다.

신분은 내친왕(內親王)[6][7]이다. 그러나 매스컴에서는 '전하'(殿下)라는 경칭보다 '아이코 님(愛子さま)'으로 더 자주 불린다.[8]

보통 어칭호는 옛부터 사용하는 것을 반복하여 차례대로 쓴다.

궁내청 홈페이지에서는 도시노미야 전하(敬宮殿下) 내지 아이코 내친왕 전하(愛子内親王殿下)로 칭해진다.

3. 생애

3.1. 출생

파일:3FFD0AAB-BEF5-4937-9408-D50EBF1AE329.jpg
<rowcolor=#dca600> 아이코 내친왕을 낳고 퇴원하는 황태자 부부
파일:external/henmi42.cocolog-nifty.com/photo_4.jpg
<rowcolor=#dca600> 어린 시절, 외가를 방문한 아이코 내친왕.
어머니 마사코 황태자비, 본인, 외할아버지 히사시, 외할머니 유미코.
2001년(헤이세이 13년) 12월 1일, 도쿄 궁내청 병원에서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 장녀로 태어났다.

1965년 후미히토 친왕이 태어난 이후로 일본 황실에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고 딸들만 줄줄이 태어나고 있었기에[9], 황실은 후계자(=아들)를 몹시 필요로 하고 있었다. 여러 번 유산을 거듭했던 황태자 부부의 첫 아이인 데다, 황태자 부부의 나이와 마사코 황태자비의 건강을 생각할 때 이후에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따라서 아이코 공주가 태어날 때, 많은 사람들이 아들이기를 간절히 기대했다.[10] 그 기대에 응하지는 못했으나, 황태자의 딸로서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의 복숭아 장미인 Princess Aiko나 고전풍 장미인 Royal Princess가 아이코 공주에게 헌정되는 등, 인기는 그럭저럭 있었다.
파일:FC21B4AC-902D-491E-B73C-BA9F5EAD815F.jpg

3.2. 가쿠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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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tat.news.ameba.jp/o06000600aikosama.jpg
파일:external/i1.wp.com/82ed0b48388ebb8c202d69e642f12d1c.jpg
<rowcolor=#dca600> 2017년 3월 22일,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졸업식
전통적으로 일본 황족들과 화족들은 가쿠슈인이라는 관립학교에 다녔고, 패전 후 가쿠슈인이 사립학교로 전환되고 평민에게도 개방된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코 공주도 가쿠슈인 유치원,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여자중등과를 거쳐 2017년 4월 가쿠슈인 여자고등과에 입학했다.

초등과 2~3학년 무렵에는 남학생들의 괴롭힘으로 인해 고생했다. 여자중등과로 진학해서도 건강 문제 등으로 지각, 결석, 조퇴 등이 상당히 많은 등, 아이코 공주의 학교 생활은 썩 순탄치 못했다. 다만 이때 당시의 성적은 황실 사람들이 "황실의 재원"이라고 입을 모아서 칭찬할 정도로 상당히 우수하다고 한다. 황태자 내외가 여러 가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아이코 공주의 교육에 상당히 힘썼고, 굉장한 엘리트 출신인 어머니 마사코 황태자비의 영향도 있다는 평이다.

이러한 높은 성적은 2019년 1월 한 일간지 보도를 통해서 현 아이코 공주의 성적은 도쿄대학도 마음만 먹으면 합격 가능한 수준[11]으로 향상되었다고 한다. 대학 진학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2019년 1월 기준으로 아직 고2인지라 아이코 공주의 수험까지는 시간이 남았기에, 그녀의 도쿄대학 진학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한다는 평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도쿄대학 진학 설이 돌아 아키시노노미야를 견제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진학이 가능할 정도의 성적까지 냈지만, 결국 아버지의 즉위 이후 진학 논란과 경호 문제, 황실의 관례라는 이유 때문에[12] 가쿠슈인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결정되었다. 이걸 안 가쿠슈인 여자고등과에서는 "아이코 공주가 가진 능력이 너무 아깝다"면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대신 성년이 된 이후 공무에 최대한 도움이 될 만한 학과로 진학할 예정이며, 가쿠슈인 동기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모양이다.

3.3. 성인이 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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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11201-00377984-fnnprimev-000-6-view.jpg
성년이 된 후의 사진

4. 여성 천황 여부

현재 일본 내에선 천황의 외동딸인 아이코가 과연 차기 천황에 즉위하여 고사쿠라마치 덴노 이후 최초의 여성 천황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을 받고있다.

자유민주당을 위시한 일본 정계는 아직까지도 워낙 수구 세력의 입지가 강해 여성 천황을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여성 천황에 대해 찬성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오고 있다.

4.1. 결혼과 부마 문제

시집살이가 고되다고 하나 처가살이 데릴사위도 그 못지 않게 힘들며, 처가가 명백히 신분이 더 높기까지 하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무리 천황 내외가 잘해주더라도 황실 예법과 풍습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며, 궁내청이나 일본 국민들 그리고 다른 황족들[13]의 압박까지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지금도 궁내청의 시종과 여관( 시녀)을 총괄하는 고위직들은 구 황족 내지는 화족 출신이거나 최소한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해 황족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밖에 없다. 평민 출신 부마가 이런 처가살이를 견디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다.

결국 궁내청이 가지고 있는 부마 리스트에 적힌 사람 중에서도 평범한 상류층 출신은 거르고[14] 1947년에 황적이탈된 11개 구궁가를 위시로 후보를 엄선하는 식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고는 하나, 현재 이들 구황족들 중에서 그나마 2명 이상의 아들을 낳은 미야케가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가능성은 낮다. 구황족들은 부계로 따지면 1370년대까지 올라가야 겨우 현 덴노 직계들과 연결된다.[15]

참고로 이 리스트는 예전부터 암암리에 소문으로 나돌았던 것인데, 이러한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궁내청이 주기적으로 흥신소 등에 의뢰해서 갱신한다는 식의 제법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18년 마코 공주 결혼 문제 이후에 언론들이 황족 결혼에 대한 기사 작성을 위해서 조사를 하던 과정에서다.

4.2. 여성 미야케

카코 공주가 태어난 1994년[16]도부터 간간히 "여성 황족도 미야케(황족 가문) 창설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아이코 공주의 여성 천황 여부 논란과 2006년 히사히토의 탄생 이후에는 더 이상 젊은 황족이 나오지 않고 사망, 결혼 등으로 인하여 일본 황족 수가 줄어들기만 하여, 일본 정부에서도 본격적으로 여성 미야케 창설 허용론이 나오기 시작했다.[17]

그러나 "만약 여성 황족도 미야케를 창설할 수 있도록 인정하게 되면, 이미 시집 가서 황실을 이탈한 공주[18]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여성 황족의 미야케 창설을 전부 인정하면, 이들에게 줘야 하는 세금 때문에 가뜩이나 작금의 황족에 지급하는 비용에 대해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세금 낭비라고 인식되고 있는 상태에서 황족 증가에 따르는 일본의 부정적인 여론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등등, 이런 식으로 논란이 상당히 엇갈리고 있는 상태이다.

문제가 있다면, 현재 황실에 남자아이라고는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 단 하나뿐이다. 그 때문에 나머지 공주들이 결혼하고 다들 떠나면 황실에 사람이 정말로 없게 된다.

2019년 5월 기준 황실에 남아있는 공주들을 보면,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는 결혼 논란을 일으킨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많은 코무로 케이와 어떻게 해서든 결혼할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의 경우에는 결혼 논란 당시 너무 시달려서 결혼에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전해지지만 그렇다고 평생 독신으로 살지도 확실하지는 않은 상태로 보이나, 국제기독교대학 졸업식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태도를 보면 언니 마코 공주처럼 할 게 자명하다.

미카사노미야 家의 장녀 아키코 공주는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선언함에 따라서 여성 미야케가 허용되지 않는 이상 평생 독신으로 남는 게 확실하다. 차녀 요코 공주의 경우에는 30대에도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나 언니처럼 독신 선언을 하지는 않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다카마도노미야 家의 경우에는 차녀 노리코 공주와 3녀 아야코 공주가 이미 출가했다. 장녀 쓰구코 공주의 경우에는 "이전부터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으나, 어머니 히사코 비와 할머니 유리코 비의 강한 반대로 인하여 지금까지도 그와의 결혼에 대해 논의 중"이라고 전해졌다. 그러나 한 주간지가 길바닥에서 취재했을 때, 당시 인터뷰 직전까지 문제의 남자와 식당에서 3시간 정도 대화했던 쓰구코 공주는 이 소문을 부정했다.

아이코 공주의 경우, 2023년까지는 학생 신분이다. 다만 아이코 공주도 아버지 나루히토 덴노처럼 대학 재학 중 혹은 대학 졸업 후 해외 유학을 갈지도 모르니, 학생으로서의 기간이 더 길어질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아이코 공주의 신랑감에 대한 논의는 시기상조다. 이렇게 되면 결국 황실에 남는 건 히사히토 아키코 공주뿐이다.

하지만 2018년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등을 통해 그동안 축적되었던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일본 내에서의 부정적인 여론들이 일시에 터지면서, 이들에 대한 반감이 상당한 수준으로 강화된 여파로 후미히토 일가에 천황을 승계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본 국민들의 급격하게 상승하여, 평상시 '우익들의 소굴'이라고 평가받는 일본야후 댓글의 대부분이 '후미히토 일가를 통째로 황적이탈시키자'라고 하거나 '후미히토 일가 어느 누구도 천황이 되지 않도록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되어야 한다'는 등 주장하는 사람들일 정도였다.

거기에 이번 대 한정이라는 단서조항이 붙었긴 했지만 천황의 생전 퇴위라는 보기 드문 일이 이루어지면서, 일부 일본인들은 이걸 이용해서 "아이코 공주 한정으로 여성 미야케 창설을 허용하게 해서, (그동안 여성 미야케 창설 이슈에서 가장 문제가 되던) 이미 시집가서 평민이 된 공주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것 때문인지 몰라도 나루히토의 황위 계승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자 후미히토의 아내인 키코 비가 황태자 내외와 정양을 요청한 이유 중 하나가 승계 관련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아, 궁내청이나 후미히토 내외도 이들과 거의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18년 12월 후미히토 생일 기념회견에서 차기 천황 취임행사 중 하나인 다이쇼사이(大嘗祭)라는 천황 등극에 따르는 추수감사제례에 대해서 종교성이 짙다는 이유로 "필요한 비용을 전액 국비로 하지 말고 황실 비용으로 하자"는 요구[19]를 대놓고 하면서 그동안 즉위 행사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던 일본 궁내청은 물론 일본 내각도 깜짝 놀라게 만들어 부랴부랴 수습한 전적이 있다.[20]

이러한 발언 때문에 후미히토 본인은 아버지 아키히토의 생전퇴위에 의하여 결정된 형의 천황 즉위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라, 나루히토가 황위 계승 후 사사건건 자기에 대해서 태클을 거는 남동생 때문에라도 황실전범에 아이코 공주 한정 특례법을 가결시켜[21] 아이코 공주를 천황으로 만들려 하지 않을까 하는 말도 돌고 있다.

물론 아이코 공주가 어떻게든 천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일본 황실전범에 근거하면 후계자 문제가 여전히 나올 여지가 있다. 특히 구 황실 복원을 원하는 구 황실 혹은 극우 세력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아이코 공주의 부마는 구 황족 가문의 아들이어야만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구 황족 가문들 중에서 그나마 아들이 있는 집안은 타케다, 카야, 히가시쿠니 집안이다.

하지만 타케다 가문은 문제가 많다. 2대 당주 다케다 츠네요시는 731 부대에서 근무한 악질 전쟁범죄자[22]에다가, 황적이탈 후 유독 타케다 가문 사람들이 안 좋은 방면으로 사고를 치고 다니는 통에 구 세습친왕가 이미지를 먹칠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가장 최근 해당 가문의 실태라고 한다면 2대 당주 츠네요시의 막내 아들 츠네카즈[23] 황적이탈 후에 태어나 황족이 아니었으나 집안이 집안인지라 그 인맥빨로 JOC 회장, IOC 위원을 하기도 했으며 2020 도쿄 올림픽 유치 뇌물 의혹을 받았으나 황족이라는 이유로 일본 정부측이 최대한 쉬쉬해서 처벌을 하지 않고 그냥 임기 만료로 퇴임한 걸로 처리해 그 뒤로 몰래 츠네카즈의 변호사 비용 등을 지원해주다가 들킨 적도 있다.

카야 가문과 히가시쿠니 가문은 각각 후계자들이 너무 어리거나 안정된 직장이 없다. 실제로 한 주간지 기자가 카야 마사노리[24]의 자택을 찾아가 "카야 가문의 아들이 부마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으나, 마사노리는 "아직 어리고 직장도 없어서 그런 일은 꿈도 못 꾼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선뜻 이들과 결혼할 경우, 최악의 경우 제2의 마코 공주처럼 결혼 문제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래도 아이코 공주가 성인이 되기에는 아직까지 시간이 있어서, 그 기간 중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만 하면 괜찮을 수도 있다.

구 황족 집안을 아이코 공주의 부마 후보로 주시하는 이유는, 바로 아이코 공주의 천황 등극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여계 천황 문제에 대해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아이코 공주가 구 황족 가문의 아들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부계와 모계 모두 황손이니 '남계' 황족으로 인정받아 천황 승계권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황실전범을 조금만 수정해서 '구 황족 남성이 황족 여성과 결혼할 경우, 황족으로 복귀시켜 미야케를 창설할 수 있다.'는 정도의 부칙을 덧붙이면 되기에, 나루히토 천황으로서도 부담이 적다. 궁내청, 후미히토, 아베 신조 총리 이하 우익 정치인들의 강한 저항[25]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2022년 기준으로 일본 언론의 부마평에 오르는 구 황족 가문은 그동안 자주 언급되던 히가시쿠니 가문이 아니라 카야 가문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히가시쿠니와 달리 카야는 나루히토 덴노와 가쿠슈인 동창이며 마사코 황후와는 외교관 선후배이므로, 같은 구황족이라도 여러모로 현 덴노 내외가 잘 모르는 히가시쿠니 가문보다는 내외와의 접점이 큰 카야 가문의 아들을 선택하는 게 여러모로 낫기 때문이다. 히가시쿠니 가문이 주목받았던 것은 모계쪽으로 메이지 덴노 쇼와 덴노의 후손이라 현 직황족과 혈연관계가 가깝기 때문이다. 모자란 부계 정통성을 모계로 보충할 수 있다.

실제로 2023년 3월 일본 언론을 통하여 카야 가문의 현재 당주인 마사노리의 차남과 아이코 공주 사이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궁내청 관계자의 전언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

4.3. 황권 다툼

1980년대가 끝나고 1990년이 되면서 일본 황실에서는 황위를 두고 암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루히토 오와다 마사코와 혼인하기 3년 전, 후미히토 가와시마 키코와 혼인해서 장녀 마코 공주를 낳고 황태자의 결혼부터 1년 뒤 차녀 카코 공주를 낳았다. 그렇게 먼저 황손을 낳으면서 황실과 국민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그리고 궁내청은 매우 오래 전부터 황태자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우익과 손잡고 후미히토를 후계자로 밀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동궁 파벌이었던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아키히토의 사촌동생, 즉 나루히토 형제의 당숙) 내외가 "황태자비가 아이를 가지기도 전에 둘째 아이까지 낳다니, 황실의 서열을 알고 행동하시오."라고 일침을 가했고, 천황 쪽에서도 일개 왕자가 황태자보다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동궁에서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아키시노노미야 궁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2001년 초에 마사코 황태자비 임신을 했는데, 처음에는 성 감별을 요청했지만 아이의 몸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26] "하늘의 뜻에 맡기겠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동년 12월에 태어난 아이는 딸인 아이코 공주였고, 이듬해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나루히토는 황실 내의 유일한 지지 세력을 잃게 된다.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는 아이코 공주의 탄생을 기뻐하면서도,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명령한다. 하지만 나루히토는 "아이코가 3살쯤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후에도 몸도 정신도 엉망이 된 마사코 황태자비가 둘째를 임신하지 못하자[27], 결국 아키히토 천황은 동궁이 아들을 낳게 하는 걸 포기하고 대신 차남 내외인 후미히토 키코 비에게 아들을 낳으라고 명령한다. 차남 내외는 2006년에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를 낳았는데, 형 내외를 꺾기 위해 인위적으로 아들을 임신해 낳았다는 의혹이 파다하다.

히사히토가 태어나자 아키시노노미야 궁저+궁내청+우익 세력은 그동안 조용히 준비하던 야심을 대외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천황 자리를 빼앗기 위해 암약했다. 처음에는 황태자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천황은 "첫째는 첫째고 둘째는 둘째", "네 마음대로 해라. 뭔 짓을 해도 너는 천황 못 된다."라는 식이라서 그쪽은 수포로 돌아가자, 천황이 죽은 뒤 여론공작을 빌미로 천황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하지만 감히 황태자를 직접 건드리기는 눈치가 있는지라, 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에게 집중포화를 가했다.

하지만 아키히토가 황태자를 바꿀 의향이 없다는 것이 2004년에 인격부정발언으로 확인되자[28] 황태자는 자신이 천황으로 즉위한 뒤의 입지 안정를 꾀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 궁내청은 즉위하고 나서 그동안 자기에게 했던 걸 이유로 숙청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자신이 즉위한 뒤에도 남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 궁저는 유일한 남자아이인 히사히토를 쥐고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노리며 여러 가지 방면으로 흔들 게 분명했고, 당시 기준으로 후미히토의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의 호감도가 상당히 높았기에 섣불리 후미히토 일가를 건들 경우 역풍이 불 수도 있었기에 천천히 이들의 권한을 빼버릴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루히토의 지위를 반석으로 다지고 종사를 황족으로서의 자각이나 각오 따위는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데로 황족이라는 지위를 악용하는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집안에다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외동딸 아이코 공주를 반드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아이코 공주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녀가 천황에 즉위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아이코 공주의 진짜 문제는 "아이코 공주의 후사를 누구로 하냐?" 또한 "일반인 남성과 결혼한 아이코 공주의 자녀가 과연 천황 승계권이 있는가?"이다. 일본에서는 "황위를 부계로 계승한다"는 원칙이 있는데, 만약 아이코 공주가 황족 출신이 아닌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는다면 상술한 원칙이 깨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가 야망을 드러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루히토에게 고개를 숙였으면, 조금 꺼림칙하긴 해도 사촌인 히사히토와 혼인시키는 것을 고려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마져도 후미히토가 제 발로 걷어차버렸다. 히사히토가 미야케 창설이 가능하다고 굳이 형의 유일한 자녀와 결혼하는 걸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모양인지, 어차피 아이코 공주에게 천황 자리는 못 간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친딸인 아이코 공주의 직계로 이어나가지 못하면 결국 히사히토나 히사히토의 가문에다 물려줘야 하는데, 그걸 막는 것이 나루히토의 목적이었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아이코 공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 마사코 황태자비도 딸의 미래를 위해서 이에 동참했다. 우선 사촌남동생 히사히토를 제치기 위해서는 "히사히토보다 아이코 공주가 낫다"라는 인식을 만들어서 항간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 우익이 주간지들을 통해 아이코 공주에 대해서 자폐증이니 적응장애니 뭐다 하면서 황족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식의 여론전을 벌이고 있었던 만큼 더더욱 아이코 공주의 우수함에 대한 압박이 컸다. 하지만 황태자 부부는 모두 매우 우수한 사람들이었던 만큼 딸의 교육에는 자신이 있었을 것이고, 당시 마사코 황태자비가 건강 문제로 동궁 칩거를 이어나간 게 오히려 아이코 공주의 교육에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은 성과를 보여서, 아이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부터 일본 상위 1% 정도에 해당되는 편차치 72점이라는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냈고, 이러한 성적을 공개한 이후부터 주기적으로 주간지에다 "아이코 공주 도쿄대학 진학 설"을 흘려버리면서 그동안 주간지 중심으로 퍼지던 아이코 공주의 자폐설 등을 일축시키면서도 동시에 학력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아키시노노미야 일족, 특히 키코 비를 상당히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은 오래 전부터 안 좋은 소문이 많았고, 그 시절에도 "남자라는 이유로 직계보다 방계가 앞서도 되냐"는 말이 많았다.

그러자 나름대로 정치 감각이 뛰어난 키코 비는 최대한 마코 공주 카코 공주의 공무를 독려해서 국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히사히토의 성적을 아이코 공주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로는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대학 진학 논란이 있던 시기와 같은 시기였기 때문에 "히사히토가 천황 후계자로 제대로 된 인물인가?"라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키코 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궁에서 아이코 공주의 성적 이상으로 공을 들인 것은 인성교육이었다. 히로히토의 적장손으로 태어나 장래 천황이 될 자로서 엄격하게 제왕학을 배우며 성장한 나루히토는 황족으로서의 고고함과 긍지가 매우 높았고, 마사코 황태자비도 인성에는 문제가 없었다.[29] 그 때문에 아이코 공주의 태도는 오래 전부터 황실 관계자로부터 좋은 평판을 들었다. 후미히토와 결탁한 주간지들이 황태자 일가의 성품을 가지고 온갖 시비를 걸어대자, 황족의 풍모를 갖추게 해서 시비를 피하려고 한 것. 그러한 것은 효과를 발휘하여,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이후 일본 국민들이 황태자 일가에 대한 호감을 가지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이코 공주 본인은 정치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단지 집안 어른들의 싸움으로만 보일 수 있으나, 철들기도 전 어릴 적 이야기라면 모를까 분별을 갖출 정도로 자란 후로는 아이코 공주 자신도 야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일화가 있다. 중학생 때 <나는 의사 아이코>라고 해서 "섬에서 동물들을 성심성의껏 보살폈는데[30], 처음에는 경계하던 동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다가왔다"는 글을 쓴 적이 있고, 오래 전부터 황태자 내외가 언론들에 뿌린 소문대로 도쿄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31], 두 사촌 언니 마코 공주 카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벌어진 이후 자신도 공무에 진심으로 신경을 쓰는 움직임 등은, 단순히 부모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아버지로부터 천황 자리를 이을 의지가 확실하게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가쿠슈인 여자고등과에 진학한 이후에는 종종 해외 귀빈들과의 자리에 참석해서 대화했고, 영국 이튼 스쿨 단기유학 당시 현지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연결 역할을 맡고, 친하게 지내는 사촌언니 마코 공주로부터 공무에 대해 배우곤 한다. 그리고 부모가 천황/황후가 된 이후에는 외국 왕실 축하사절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도 참석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히사히토와는 의외로 사이가 좋다고 한다. 히사히토도 황실의 후계자라는 이유만으로 키코비와 후미히토의 야욕으로 인한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아이코 공주와 놀면서 스트레스가 풀리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성격이 안 좋다고 해도 히사히토가 아이코 공주만은 잘 따른다고 한다. 즉 히사히토는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하지만 아이코 공주처럼 자신을 배려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면 잘 따른다는 것이다. 그 말은 히사히토도 여타 다른 또래아이들과 같이 평범한 소년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환경이 발목을 잡았고 아이코 공주마저 없었으면 히사히토도 어떻게 삐뚤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히사히토가 부모인 키코 비와 후미히토의 바람과는 달리 황위를 포기할 수도 있다.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부모보다 아이코 공주를 더 좋아하고 따르기에 부모가 원하는 걸 하지 않을 수 있고 히사히토도 황위에 큰 관심이 없어보인다.

나루히토는 자식이 아이코 공주 하나밖에 없고, 후미히토 집안에 황위를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코 공주에게 후사를 물려주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빡빡하게 키우지 않았을 뿐이지 아이코 공주에게도 제왕학을 가르쳤을 것이다. 아이코 공주 본인도 태어난 순간부터 상황이 호전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주변으로부터 수많은 음해와 방해공작 등에 시달리면서,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황위를 목표로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로 논란이 많고 현 일본 황실에 존재하는 유일한 남자아이인 히사히토가 있어 후계자로 고려 자체가 되지 않았던 마코 공주, 카코 공주와 친하지만 사촌동생인 히사히토와 소원한 사이라는 것도 단순히 주변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이는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한창 일어나는 와중에 아이코 공주는 그 전까지도 친하게 지내던 마코 공주와 별다른 문제 없이 친하게 지내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현재 일본 국민들의 여론과 선례를 고려했을 때, 후계자 쟁탈전에서 아이코 공주가 사촌남동생인 히사히토를 이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여론조사를 보면 아이코 공주가 여성 천황, 즉 천황가 남성의 딸 자격으로 즉위하는 것은 호의적인 답변이 80%가 넘을 만큼 안정적이지만 여계 천황, 즉 천황가 여성의 자식이 즉위하는 문제는 긍정적인 의견이 60%대 정도다. 높긴 하지만 확고한 수준은 아니다. 따라서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싸움은 본인들의 1라운드,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의 2라운드를 거쳐 아이코 공주의 자손과 히사히토의 자손 간의 3라운드까지 가서야 확실히 결판이 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루히토의 성격상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무작정 아이코 공주를 황위 계승 서열에 넣을 리가 없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코 공주의 자손에 대한 황위 계승 문제를 해결해서 히사히토의 천황 승계를 막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있다.

황실전범의 개정을 논의하기 1주일 전, 작은아버지 후미히토 친왕과 작은어머니 키코 비 부부가 셋째 임신을 발표했다. 그리고 2006년 9월 6일, 기적적으로 사촌 남동생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면서 일본 황실에 드디어 남자 후손이 생겼다. 사실 일본에서는 "기적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힘을 빌려 수정란을 선별해 낳았다"는 게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있다. 사실 키코 비 산부인과를 전전한 것이 그것 때문이란 소문도, 낙태설& 후미히토 친왕의 문란한 여성 관계로 인한 부인과 질환 못지않게 많이 도는 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남성 황족의 수는 적어서, 만약을 위한 '여성 황족의 결혼 후 신분 유지'와 관련된 법이 2012년에 논의되었으나, 노다 요시히코 당시 일본 총리가 "현행 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그의 뒤를 이어서 총리가 된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한 뒤 '황통은 남계로 잇는다'라고 발표하면서 사실상 여성 황족 문제는 현상 유지로 결론이 났다.

2017년 아키히토 천황이 생전 퇴위를 발표할 당시 " 나루히토 황태자가 즉위하면 후미히토를 황태자로 대우하겠다."라고 발표되며 나루히토-후미히토-히사히토의 계승으로 정해지며 내친왕으로만 남는 것이 확정되었다. 문제는 훗날 히사히토의 대가 되면 황실에 남자가 히사히토 하나밖에 없고 동세대 황족 여자들은 다 결혼으로 황실을 떠난 뒤가 된다는 것이다. 남는 자로는 평생 독신으로 남아 황실을 뒷받침하겠다고 선언한 아키코 공주가 있다. 자세한 것은 히사히토 항목 참고.

한편 일본 여론은 "여성 황족의 천황 즉위를 용인해야 한다"는 여론이 8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2019년 5월 1일 나루히토 천황의 즉위 이후, 궁내청에서는 과거 기록들을 뒤적거리면서 과거 여성 천황이 있을 때 각종 제례 행사시 여성 천황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조사를 비밀리에 시작했다. 사실상 궁내청은 나루히토 천황이 향후 아이코 공주의 천황 등극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움직이는 듯하다. 거기에 일본 내각에서도 과거 고이즈미 정부 및 노다 정권 때 여성 미야케, 여성 천황에 대한 조사를 해두었고, 그 결과에 따라서 법률 개정안을 작성했는데 의회에 제출되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상당히 진척되었다.

그러나 히사히토의 탄생 및 아베 신조 총리로 대표되는 여당 내 우익 세력들의 강한 반발 등으로 인해 유야무야되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시절 관방장관 직책이던 아베 신조가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제화하는 걸 강하게 반발했었다고 한다. 이후 아베 총리는 노다 총리의 후임이 되자마자, 노다 총리 임기 중에 하던 여성 미야케 관련 조사를 중단한다. 생전퇴위 특례법 제정 당시 일본 내각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황실의 안정적인 승계를 해결하기 위한 조사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라"는 조항이 있는데 그걸 수 년 이상 무시하고 있으며, 2019년 국회에서 이를 지적하고 빨리 조사하라고 독촉하고도 2019년 6월 기준으로 조사조차도 안 하고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한다면 나루히토 천황이 결심만 하고 아베 총리가 더 이상 실권을 쥐지 못하는 시점[32]이 된다면 아키히토 상황의 생전퇴위 때보다 더 빠르게 여성 천황 및 여성 미야케에 대한 일이 진척될 것으로 보인다. 아이코 공주가 성인이 되며, 현재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히사히토가 고교 진학 시즌에 돌입하며, 무엇보다 마코 공주의 결혼 연기 기한이며 나루히토 천황도 즉위 의식과 2020 도쿄 올림픽을 끝내고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기가 레이와 3년인 2021년에 모조리 겹친다. 일본 언론들은 2021년을 "여성 천황 및 여성 미야케 제도의 향방을 가를 가장 중요한 시기"로 평가했다.

그리고 2019년 5월 이후 추가보도에 의하면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도 여성 천황 용인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욱더 아이코 공주가 히사히토를 제치고 천황 자리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후미히토 키코 비는 권력을 갖기 위해 욕심을 부린 끝에 무리하게 히사히토를 낳았지만, 결국 이로 인해 13년 전 잠잠해졌던 여성 천황 논의는 또 크게 일어나고 있다. 자신들의 과오가 슬하의 3남매의 앞길을 막아버렸고, 본인들의 앞길도 막혀버리고 말았다.

2020년 10월, 아버지 나루히토가 차기 후계자를 왕세제 작은아버지 후미히토로 공식 선언하는 '릿코시' 의식을 11월 8일에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 본래 4월에 치르려했으나 코로나바이러스-19의 범유행으로 미뤘다.

11월 8일 작은아버지 후미히토의 황태제 등극을 알리는 릿코시 선포식(立皇嗣宣明の儀)을 치렀다. #1 #2 #3 이로써 일단 공식적으로는 차기 왕위는 아이코보단 후미히토 - 히사히토의 단계가 될 가능성이 커졌으나 여전히 국민 여론은 후미히토로의 황통 계승에 상당히 부정적이며 이는 2020년 11월, 마코 공주의 결혼 강행 선언 및 11월 30일 후미히토의 마코 공주 결혼 허용 선언으로 더욱 강하게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일본 언론들이 유독 이때 이후부터 마코 공주 결혼 찬성 관련 기사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와이드쇼 진행자들이나 출연진들 대부분이 마코 공주를 옹호하는 이유가 그만큼 국민들의 반응이 안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 황사'라는 직책 자체가 어디까지나 '잠정 승계서열 1위에 황태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존재'이고, 생전퇴위 관련 특례법 등에도 없는 지위이다. 시간이 갈수록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정치권의 태도도 심상치 않아, 후미히토의 지위는 '릿코시 선포식' 이후로도 불안정하다. 후미히토는 이를 해소하기 위함인지 황실의 중요한 제사를 마치자마자 가족과 함께 정치인 장례식에 참여하는 등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정권에 지나치게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일본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일본 정부는 "하가(下嫁)[33]한 여성 황족(내친왕 한정)에게 '코죠(皇女)'라는 이름의 특별 국가직 공무원 자격을 부여하고, 하가 후에도 황실의 공무를 맡기겠다"는 방안을 들고 나왔다. 하필 타이밍이 마코 공주가 " 코무로 케이와의 결혼을 강행하겠다"고 주장하는 문서[34]를 공표하고, 코무로 문제의 근원인 부채 문제를 제기한 장본인의 채무독촉 포기선언까지 일어난 직후였다. 때문에 '코죠' 제도는 사실상 마코 공주를 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무시할 수준을 넘어서니 그동안 잠자코 있던 야당들이 들고 일어서고 여당의 전직 중의원 의장마저도 이 제도에 부정적인 인식을 표출했다.

그래서 황실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후미히토 친왕이 입황사의 의식을 치렀음에도 여전히 후미히토가 덴노가 되지 못할 가능성은 제법 크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는 후미히토에 우호적인 태도를 가진 극우들조차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4.4. 천황 즉위 가능성

이렇듯 후미히토 일가가 2010년대 후반 기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최악인 데다 히사히토의 후사 문제도 골치가 아픈 상황인지라, 2019년 나루히토가 즉위한 이후 현재 아이코 공주의 차기 즉위 가능성이 일본 정치권 내에서도 서서히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나루히토 또한 남동생 후미히토와 조카 히사히토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고 자신의 외동딸에게 물려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기에 정말 황실전범이 수정될지도 모른다.

2019년 7월 기준 당시 일본 정치권에서 바라보는 여성 천황 즉위, 정확히 말하면 아이코 공주의 천황 즉위는 각 정당별로 세부 사항은 좀 다르지만 ‘여성 천황이 즉위할 수 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야당인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은 찬성 입장이며 현 연립 정권을 세운 공명당이나 자민당 내부 일부 중도 온건파 세력들에서도 아이코 공주의 천황 즉위에 조건부로 찬성하는 여론도 제법 있다. 국민 여론도 각종 신문 등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들에서도 80% 이상의 국민들이 ‘아이코 공주의 천황 등극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35] 다만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 등 자민당의 주류를 차지하는 수구세력들이 여계 승계를 반대하지만, 이것도 아키히토가 큰아들 나루히토에게 생전에 양위하는 것을 막지 못한 선례를 생각하면[36], 아이코 공주가 사촌 언니 마코 공주처럼 무리수를 저질러서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다면 딱히 변수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만약 아이코 공주가 정말로 황위 계승 1순위 예정자가 되고 훗날 천황으로 즉위한다면, 근대 이후 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왕이 나오는 것이자,[37][38] 21세기 세계 최초의 여제(Empress Regnant)가 나오는 것이다.[39]

다만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2020년 2월 16일 일본 정부가 부계 황족만 천황 계승 자격을 부여한 현행 황실전범을 "황실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유지하기로 했으며, 일본 정부는 나루히토의 남동생이자 황사 후미히토가 황위 1위 계승권자임을 공표하는 4월 하순 이후 이런 방침을 확인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였다. #[40] # # 한국일보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월간지 인터뷰에서 "남계 (왕위) 계승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역사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발언한 점이나, 자민당 보수의원 단체인 ‘일본의 존엄과 국익을 지키는 모임’이 아베 총리에게 옛 황족이었던 남성들을 황적에 복귀시키는 방안을 건의하기도 했던 점 등을 들어 일본 정부가 여성-모계 천황을 불허하기로 한 것은 집권 자민당의 보수 성향과 무관치 않다고 지적하였다. # 참고로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어떤 입장인지 언급한 적이 없어서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황실 전범 개정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아베 신조 2022년에 선거 유세 도중에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다시금 황실 전범에 대한 개정 논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41]

사실 일본의 부계황족 중심 승계가 확실해진 건 메이지 시대로, 그 전까지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남성 황족이 천황이 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여성 황족도 천황에 오를 수 있었다. 실제로 마지막 여성 천황인 고사쿠라마치 천황도 천황이었던 남동생 모모조노 덴노가 1762년 21살로 요절하고 그 아들인 조카 고모모조노 덴노가 4살로 어려서 땜빵용으로 천황에 올랐고, 조카가 크자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천황에서 물러났으나, 그 조카마저도 일찍 사망하자 세습친왕가 간인노미야로부터 황족 하나를 사후 입양[42]해서 왕위에 올리고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이 섭정을 했다. 다른 여성 천황들도 이와 유사한 환경에서 유사한 행동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 군주권이 강화되면서, 종전에 여성스럽던 황실을 대대적으로 남성화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예외 없이 남계 남자가 승계"라는 원칙이 확고해졌다.

결국 마코 공주가 기어이 코무로 케이와 결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반인인 코무로 부부에 대한 온갖 특혜 의혹들,강해진 언론 통제 등으로 그동안 후미히토 일가에 대해 우호적인 넷 우익들마저 대놓고 코무로 부부를 비난하며 천황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의 즉위에 힘이 실리고는 있지만 보수적인 궁내청, 정확히는 일본회의의 지배하에 있는 자민당 내각이 이러한 여론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가능성이 없다고 점쳐진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여성의 천황 즉위를 금지한 황실전범을 개정하라는 권고를 냈으나[43] 일본 정부는 도리어 해당 문구 삭제를 요구하는 등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이와야 다케시 외무상은 이와 관련해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국가의 기본과 관련된 사안을 권고해 대단히 유감”이라고 유감 표명을 했고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도 “인권과 관련 없는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일본유신회는 “(왕위 계승 문제는) 나라의 문화와 역사 문제”라고 했다.

5. 성격

현재까지 나온 면모를 보면 아이코 공주는 아버지 나루히토와 어머니 마사코 황후를 많이 닮은 외유내강의 성격으로 보인다.

황태자의 유일한 자녀로 태어났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랜 기간 동안 온갖 어려움들을 겪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권력의 잔인한 생리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면서 자라야 했다. 거기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아버지 작은아버지의 권력 다툼, 궁내청의 핍박, 사촌 남동생과의 대립, 황태자인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은 있지만 만세일계 때문에 자신을 지지하지는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권력을 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인내심과 끈질김을 지닌 성격인 듯 하다. 궁내청의 차별이나 국민의 비난 등등, 숨 막힐 정도로 몰려있는 상황에서 부모의 응원과 도움을 기반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을 올렸다. 거기다 편차치 70점대 초반의 성적을 고2 말에는 편차치 80점 대까지 올린다는, 공부 잘 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을 기어코 해내고 마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 나루히토는 친구들에게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공부하는 아이코를 재웠다"던가, "모르는 한자가 있으면 사전을 펼치고 외울 때까지 공부했다"는 식으로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나루히토 본인도 황태자 시절 10년 이상 스페인어를 꾸준하게 공부해오면서도 한 번도 요령 같은 걸 부린 적 없다는 걸[44] 생각한다면 아버지의 성실한 공부 태도를 보고 자라서 그런 것 같다.

상당히 신중한 면이 있는지, 자신의 성적이 도쿄대학 합격 안정권에 접어들었다고 궁내청이나 가쿠슈인 관계자들을 통해서 공언된 후에도 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나 궁내청 직원들로부터 '도쿄대 진학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성 증언만 나올 뿐이다. 결국 아버지가 즉위하고 몇 달이 지나 천황 부부에 대한 지지가 확고부동하고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논란이 지속되는 게 확인되자, "황실 관례와 경호 문제 때문에 가쿠슈인대학으로 내부 진학을 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일본에서는 상당히 아쉬워할지언정 반대 의견은 없었다. 사실 황실과 궁내청은 물론 천황 부부도 같은 이유로 아이코 공주를 가쿠슈인대학에 보내려 했다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블러핑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주변 사람들과도 최대한 원만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지메 문제를 해결한 초등과 고학년 때부터 학교 친구들을 스스럼없이 사귀어서 친구들이 자주 동궁에 놀러왔다는 기사[45]가 있고, 중학생 때 아이코 공주가 거식증에 시달릴 당시 또래 학생들이 "우리들이 나서서 아이코 공주를 지켜야 한다"며 주간지들의 인터뷰를 거부한 적도 있으며, 고등학생 때 아이코 공주의 성적이 오르자 학우 모두가 자기 일마냥 기뻐했다고 한다. 가쿠슈인 직원 측의 증언으로 "동급생뿐만 아니라 하급생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상당하다"는 발언까지도 나오고 있어서, 사실상 주변인들에게 호평을 받는 인덕을 갖추었다. 동궁뿐만 아니라 궁내청 시종들도 "가장 황족답다"고 칭송이 자자했다는 것으로 보아, 과거의 온갖 패싱의 여파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제왕학의 영향인지 몰라도 처세술 자체도 상당히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아이코 공주의 리더십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남들이 자신을 따르게 하는 게 아니라, 동료들을 포용하면서 특정 목표를 향해 일치단결시켜서 이끌어나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형태라고 한다.

거기에다가 잠재적인 라이벌인 사촌동생 히사히토마저도, "황실에서 누구를 제일 존경하느냐"는 어머니 키코 비의 질문에 "아이코 누나를 존경한다"는 대답을 할 정도.

부모와의 사이는 매우 좋은 편이다. 아버지 나루히토는 어머니 마사코 황후에게 무려 7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청혼하여 결혼에 성공했고, 주변에서 이혼이다 뭐다 할 때도 철저히 아내와 딸의 편이 되어주었다. 마사코 황후는 황실에 시집와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아이코 공주를 정성껏 키웠다. 적응장애로 공무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칩거하고 있을 때조차, 아이코 공주가 가쿠슈인 초등과에서 괴롭힘을 당하자 매일같이 등하교를 함께 하고 수업을 참관했을 정도다.

여기에 마사코 황후와 아이코 공주도 자신들을 지켜주는 나루히토를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노력하면서 나루히토의 즉위를 도왔다. 생전 퇴위 이후 궁내청이나 주간지 등 자신들의 편인 줄 알았던 자들이 모조리 배신하고, 가족들끼리 분란이 매우 심하고 가족 모두가 말썽인 후미히토 일가와 비교한다면 한결 바람직한 가족이다.

6. 가족

6.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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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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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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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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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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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6.2.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
(敬宮愛子内親王)
<colbgcolor=#fff3e4,#331c00> 나루히토
(徳仁)
<colbgcolor=#ffffe4,#323300> 아키히토 상황
(明仁上皇)
쇼와 덴노
(昭和天皇)
고준 황후
(香淳皇后)
미치코 상황후
(美智子上皇后)
쇼다 히데사부로
(正田英三郞)
쇼다 후미코
(正田富美子)
마사코 황후
(雅子皇后)
오와다 히사시
(小和田恒)
오와다 타케오
(小和田毅夫)
오와다 시즈
(小和田静)
오와다 유미코
(小和田優美子)
에가시라 유타카
(江頭豊)
에가시라 스즈코
(江頭寿々子)

6.3. 아키시노노미야와의 관계

파일:유년시절의 나루히토와 후미히토.jpg
<rowcolor=#dca600> 어린시절의 아버지(우) 작은아버지(좌)
아버지 나루히토와 작은아버지 후미히토 사이의 황위 계승 다툼과 험악한 사이와는 별개로 아키시노노미야의 사촌언니들과는 어릴 때부터 상당히 잘 지내는 모양이다. 황태자 부부나 후미히토 친왕 & 키코 비 부부가 공무로 집을 떠나 있을 때 어머니 마사코 황태자비가 사촌언니들과 놀게 해주었는데, 그것이 꽤나 재밌었는지 지금도 그런 시간을 종종 갖는다고 한다. 아이코 공주는 형제자매가 없는 외동이고, 사촌 형제들이 바로 근처[46]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언니처럼 따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가장 연령대가 가까운 카코 공주를 상당히 잘 따르고, 카코 공주 역시 아이코 공주를 친동생처럼 예뻐한다고 한다. 아이코 공주가 마코 공주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당시에도 온라인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볼 때, 마코 공주도 아이코 공주를 아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촌 남동생인 히사히토 친왕과 마냥 편한 사이는 아닌 듯하다. 아키시노노미야 家가 히사히토 친왕만 두고 공무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있었는데,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이코 공주가 히사히토 친왕과 놀고 싶어하고 무엇보다도 저택에 혼자 있는 조카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히사히토 친왕을 황태자 저택에 데려가려 했지만,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직원들의 반대로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고모 구로다 사야코가 달려와야 했다고. 아마 본인들의 마음과는 상관 없이 주변의 시선과 부모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가까운 친척임에도 친해지기 어려운 듯하다. 아이코 공주의 성적은 대단히 우수해서, 초등과 고학년 시절부터 도쿄대학에 진학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키코 비는 '내 아들이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예전부터 있었다. 키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에게 게임을 금지시키며, 텔레비전은 뉴스와 다큐멘터리만 보게 하고, 그 외에는 다 금지시킨다고 한다.[47]

그래서 일본 황실에 대해 다루는 주간지의 기사에 의하면, 히사히토 친왕을 너무 억압한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한다. "본인이 공부하고 싶은 학과가 도쿄대학에 있다면 좋겠지만, 미래의 천황이라는 이유로 너무 억압하는 것이 아닐까? 진로에 대해서는 히사히토 친왕이 좀 더 성장한 후에 논의해야 바람직하지 않을까?"라고 썼다. 황실에 대한 비판을 터부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이 정도면, 키코 비의 억압이 엄청나긴 한 모양이다.[48] 2018년에 들어 미치코 황후 후미히토 키코 비의 오만방자하고 문제적인 행동 때문에 히사히토에 대한 걱정이 크다고 한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힘을 실어줘서 차세대 황후로서 입지를 굳히게 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키코 비는 히사히토의 승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동안 척을 지던 황태자 부부에게 나서서 화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황태자 부부는 딱히 마음 열 생각이 없어 보이고 여전히 미치코 황후는 신임하지 않는 데다 남편인 후미히토는 나루히토를 사사건건 방해하는 태도 때문에 더 찍혔다.

2018년 마코 공주의 문제로 크게 문제가 된 시점에서도 여전히 사촌 언니들인 마코 공주나 카코 공주와의 사이가 좋은지, 2018년 여름방학 때 영국 이튼 스쿨에 단기 유학을 갔을 때 마코 공주와 자주 연락하는 등의 어느 정도의 교류가 여전히 있었다는 언급이 나오고 있다.[49]
한편 10월에 들어서 아키시노노미야의 싸움이 시끄러워지는 일이 많아, 그럴 때마다 카코 공주는 큰아버지의 집으로 피신한다고 한다. 이때 아이코 공주는 말없이 사촌 언니를 위로해준다고 한다. 11월에는 그동안 아이코 공주와의 접점이 친누나들과 비교해서 비교적 적었던 히사히토가 아이코 공주에게 고충을 토로하자 아이코 공주가 그러한 고충 해결책으로 둘이서 1,000번 넘는 펑고를 했다거나, 히사히토가 쓴 작문을 조언 및 첨삭을 해주거나[50], 아이코 공주가 가진 책을 히사히토가 빌려 본다는 등 보도가 나오고 있다. 부모들간의 대립과 달리, 사촌 형제들끼리는 나름대로 친분이 깊은 걸로 보인다.

7. 여담



[1] 아버지 나루히토는 동 학부의 사학과를 졸업했다. [2]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 [3] 어머니 마사코 황후가 167cm의 장신이라 그런지 일본 성인 여성 평균신장인 158.9cm 기준으로 꽤 큰 키에 속하고, 한국 기준으로 봐도 평균 대비 3cm정도 크다. [4] 고모인 구로다 사야코는 출가해서 평민이 되었고, 사촌 언니인 카코 내친왕과 7촌 고모들은 방계이다. [5] 일본인 인명의 경우 다른 한자를 사용했는데 결과적으로 같은 발음이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아이코'의 경우 '코'를 '子'로 고정시킨 메이저한 것만 해도 愛子, 藍子, 亜以子, 亜依子, 亜依子 등이 존재한다. 한국과의 차이점은, 길면 6음절 이상으로도 늘어나는 작명의 자유도 때문에 그 바리에이션이 훨씬 다양하다는 것, 이에 더해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고 주장하는 특이한 이름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6] 천황의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부른다. 남자의 경우 손자까지는 친왕, 증손자부터는 왕. [7] ' 친왕 선하(宣下) 후에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는다'고 아는 사람이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예전에는 천황의 자식이라도 친왕 선하를 받지 못하면 '친왕'이 아니라 그냥 '왕'으로 불렸지만, 현 황실전범상으로는 천황과의 관계만으로 태어나는 순간에 결정되기 때문에 '친왕 선하'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다만 '왕'이 즉위할 경우가 생긴다면 그의 형제들이 선하를 거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도상, 실제로는 현 황족 가운데서 '왕'이 없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사문화된 조항. [8] 처음에는 매스컴에서도 어칭호인 도시노미야 님(敬宮さま)으로 불렸었으나 어느새 바뀌었다. [9] 1969년 4월 18일 구로다 사야코([age(1969-04-18)]세), 1981년 12월 20일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여왕([age(1981-12-20)]세), 1983년 10월 25일 미카사노미야 요코 여왕([age(1983-10-25)]세), 1986년 3월 8일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여왕([age(1986-03-08)]세), 1988년 7월 22일 센게 노리코([age(1988-07-22)]세), 1990년 10월 15일 모리야 아야코([age(1990-10-15)]세), 1991년 10월 23일 코무로 마코([age(1991-10-23)]세), 1994년 12월 29일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내친왕([age(1994-12-29)]세). [10] < 일본 황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 황태자비>라는 책에 의하면,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는 아이코 공주가 태어나자 기뻐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다시 임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이를 더 이상 낳을 수 없다고 체념한 이후에는 히사히토를 신경 쓰고 있다고. 다만 후계자로만 여기지 않을 뿐, 황태자의 딸이라고 공주들 중에서는 가장 신경을 썼다. [11] 편차치 80 전후. 참고로 2018년 하반기 기준으로 아이코 공주의 차기 대학 진학처로는 평균 편차치 70점대의 대학들이 언급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여름방학 이후 성적이 오른 것으로 보인다. [12] 궁내청과 황실은 가쿠슈인대학 진학을 지지했고, 어머니인 마사코 황후조차 "아버지의 선례를 따라서"라는 이유와 안전 문제, 장래 신랑감 관련 문제 때문에 가쿠슈인을 지지했다고 한다. 가쿠슈인대학 진학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일본 네티즌들 중에서는 "사촌언니 마코 공주의 결혼문제가 없었다면 도쿄대학도 가능했을 것이다"라면서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였다. [13] 특히 차기 황위를 노리는 황사 후미히토 일가 [14] 하지만 과거 다카마도노미야 아야코 공주와 결혼한 모리야 케이는 아버지가 평민 고위공직자 출신에 불과한데도 부마 리스트에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만일을 대비해서 평민 상류층 인사들도 넣은 걸로 보인다. 실제로 황실 며느릿감 리스트도 구 황족/구 화족뿐만 아니라 재계 거물 등도 집어넣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치다. [15] 실제로 그나마 황실에서 가깝다는 몇몇 미야케들을 보면, 전부 메이지 덴노 혹은 쇼와 덴노의 딸들과 결혼하면서 외가가 직황족이 된 것 뿐이다. [16] 이때 키코 비 카코 공주를 낳고서, 첫째 마코 공주에 이어 둘째도 딸을 낳았다고 구박당했다고 한다. [17] 2019년 3월 28일 한 언론 보도에 의하면, 2004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 천황 허용을 위하여 황실전범 개정 등이 포함된 극비 문서가 작성되었다는 보도를 하면서, 만일 히사히토가 없었다면 아마 저 문제가 많은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이 아니라 황태자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가 정식으로 황태녀에 오르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상당하다. [18] 아이코 공주의 고모 구로다 사야코, 아이코 공주의 7촌 고모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큰 사촌언니 코무로 마코 등. [19] 사실 이러한 요구는 아키히토가 취임할 때도 있어서 일부 시민단체가 이러한 취지로 정식으로 법적 소송을 걸었으나, 일본 대법원, 헌법재판소격인 최고재판소에서는 이를 기각해 버린 적이 있었다. [20] 그도 그럴 것이, 천황제 자체가 신토라는 종교의 정점이기 때문에 각종 행사들은 기본적으로 종교성이 짙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을 차기 천황이 될 가능성이 높고 슬하의 자녀 역시도 차차기 천황이 될 가능성이 높은 황족이 대놓고 거론했으니,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커져서 천황제 무용론으로 번지기 전에 반드시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21] 아키히토의 생전 퇴위와 현 일본 황실의 상황을 볼 때 황실전범 자체를 고치기는 어렵고, 특례법 정도가 현실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아이코 공주의 즉위를 원하는 자들도 '아이코 공주만은 특별대우해도 된다'는 생각을 모토로 이러한 식으로 하길 요구하고 있다. [22] 참고로 패전 전 일본 황족들 중에서 대놓고 전쟁범죄에 가담한 건 이 사람과 난징대학살의 주범 중 하나인 아사카노미야 단 둘뿐이며 이 두 사람 모두 패전 후에는 GHQ로부터 별 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과거 범죄에 대한 반성없이 사망한다. [23] 그의 장자는 넷우익의 아이돌이라는 명칭이 있으며 메이지 덴노의 현손이라는 타이틀로 방송가에서 활동 중인 다케다 츠네야스. [24] 가쿠슈인 초등과 시절 나루히토 덴노와 학우였으며, 이후 궁내청 직원에서 일본 외무성에서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근무했는데, 이때 마사코 황후와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카야 가문도 좋은 선택일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25] 실제로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 국민들의 80%가 아이코 공주의 천황 계승에 찬성했다"는 진보/보수 매체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여론조사 결과가 있는데도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26] 성 감별은 수정란에서 세포를 추출해서 하는 것이다. 발생 중에 있는 수정란에서 세포를 추출하는 것이 수정란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가 없다. 만약 세포 수가 8개인 발생 초기의 수정란에서 세포 하나를 떼낸다면 무려 13%의 손실이 된다. " 히사히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루머가 돌았던 이유도, 히사히토가 성 감별로 태어났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27] 이전에도 임신하긴 했지만, 아이코 공주를 빼고는 모두 유산되었다. [28] ' 마사코 황태자비의 경력과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라고 나루히토가 기자회견을 한 사건. 이때 아키히토는 황태자가 논란을 일으켰다고 질책했지만, 얼마 후 궁내청 장관의 말을 통해 '손녀가 보고 싶으니 부황을 찾아뵈어라'라고 말해서 관계 회복을 했다. [29] 마사코 황후는 황태자비 시절부터 공무 중에 동선에 있는 사람 외에 그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신경 쓰고 다가갈 정도로 배려심이 깊다. 배려가 몸에 배었다는 나루히토 덴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마사코 황후는 외교관의 자녀로 태어나서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매너와 에티켓이 중요한)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외교관 활동 당시 외무성 내에서도 상당히 유능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사실 입사 3년차 신입이 미일 간의 반도체 관련 통상마찰 문제에 통역으로 참여한 것 자체가,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아버지의 백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여러 가지 방면에서 유능하지 않으면 이런 게 불가능했다) 이런 마사코 황후의 경력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30] 아이코 공주는 어머니가 아카사카 어소로 데리고 온 유기견/유기묘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31] 본래 아이코 공주의 성적은 편차치 72점으로 상위 1%였는데, 이때는 츠쿠바대학, 히토츠바시대학, 조치대학, 국제기독교대학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대만큼은 아니지만 명문으로 꼽히는 학교들이다. 그러다가 고2 말에는 상위 0.1%이자 도쿄대학 안정권인 80점 전후로 올렸다고 한다. [32] 아베는 총리 사임 이후에도 사실상 실권을 유지하고 있다가 2022년 암살되었다. [33] 신분이 높은 여자가,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남자에게 시집감. [34] "국민들이 반대하는 것은 알지만, 나는 그것을 다 무시하고 코무로 케이와 결혼할 거고, 국민들이 결혼을 반대하면 난 죽을 거다"라고 겁박한 것이나 다름없는 직설적인 내용이었다. [35] 히사히토 탄생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코 공주의 천황 즉위에 찬성하는 여론은 60%였으나, 2018년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등으로 현 전범상으로는 나루히토 다음 천황이 될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면서, 그와 동시에 그동안 공격을 받아오던 나루히토 덴노 부부 및 아이코 공주에 대한 진실이 알려지면서 이러한 찬성 여론이 높아진 것이다. [36] 원래 일본의 황실전범에는 천황의 생전 양위에 대한 조항이 없었는데, 아키히토가 큰아들 나루히토에게 양위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이를 무시하자 언론을 이용해서 이 사실을 공표해버렸다. 이 때문에 그동안 비밀리에 아키히토의 생전퇴위를 의도적으로 무시해오던 자민당과 아베 신조가 이에 감히 반대나 거부조차 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생전퇴위에 대한 특별법을 발의해서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아키히토의 생전 양위가 실현하게 되었다. [37] 일본 외 아시아 군주국으로는 태국,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부탄, 서남아시아 아랍권의 여러 왕국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오만, 요르단 등)이 있는데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 서남아시아 아랍 왕국들은 성적으로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권인 데다 왕위 승계법상 남계 왕족에게만 물려주도록 규정하고 있어 여계 왕족한테 왕위를 내줄 리가 만무하고, 캄보디아는 이 독신으로 자녀가 없는 데다 애당초 세습이 아닌 왕족 남성 중에서 선출하는 방식이다. 부탄의 경우 자녀가 아들들 뿐이고 태국도 2016년 이 즉위했는데, 막내아들이 왕세자이고 딱히 여성이 차기로 거론되진 않는다. 또 부탄이나 태국 둘 다 아직 여왕을 받아들이기엔 국민여론이 꽤 보수적인 것도 있다. 즉, 현재 아시아에서 그나마 여왕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일본 정도뿐이란 소리. [38] 단, 전체 국가 단위가 아닌 국가 내의 광역자치단체 수준에서는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술탄국(욕야카르타 특별주)의 하믕쿠부워노 10세(슬하 무남 5녀)가 이슬람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딸 망쿠부미 공주를 차기 술탄위 계승자로 지정해두고 있고, 하믕쿠부워노 10세(1946년생)의 나이가 나루히토(1960년생)보다 훨씬 많으므로 욕야카르타 쪽이 일본보다 먼저 여성 군주(술타나)를 배출할 가능성이 높다. [39] 현재 세계사에서 최후의 여황제는 에티오피아 제국 자우디투(1916년~1930년 재위)이다. [40] 요미우리 신문 단독 보도인 것으로 보이는데, 열람하려면 회원가입이 필요하다. [41] 세종대학교 교수인 호사카 유지에 의하면, 아베 신조의 죽음으로 일본 극우 세력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아이코 공주의 훗날 천황 즉위나 그 본인이 당주로 있는 미야케 창설 논의에 청신호가 켜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거기다 총리 기시다 후미오는 여성 덴노, 여계 승계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42] 현 천황의 직계 조상인 고카쿠 덴노. [43] 2003년, 2009년, 2016년에도 권고한 적이 있다. [44] 나루히토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친 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아이코 공주도 종종 공부하는 자리로 와서 자기와 놀았다는데, 그 옆에서 나루히토는 계속 공부에 몰두했었다고 한다. [45] 특히 하계요양 시에는 친구들의 가족들과 같이 요양지 근처의 동물원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요양지에서 여름방학 숙제를 같이 하기도 한다. [46] 황태자 내외와 현존하는 모든 미야케는 아카사카 어소에 거처를 두고 있다. [47] 어느 나라건 간에 어린 자녀를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막장 부모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부부는 막장 부모의 정의에 완벽히 부합한다. 다만 후미히토는 아이를 너무 방임하는 막장 부모인 거고, 반대로 키코 비는 남편인 후미히토와 달리 아이를 너무 잡아대서 막장 부모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48] 아이러니한 점은, 히사히토 친왕을 억압하는 데 크게 공헌한 아이코 공주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인 황태자 내외로부터 성적 강요를 일절 받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노력을 해서 높은 성적을 내고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49] 아이코 공주가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유명한 카코 공주를 닮아가지 않을까 걱정했던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이코 공주와 마코 공주와의 교류를 더 좋아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한편 이런 보도가 카코 공주의 자유분방함이 일본 황실에서 얼마나 파격적인지, 마코 공주의 과묵한 성품이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50] 이 작문은 이후 한 대회에 출품되어 수상하게 된다. [51] 어릴 때부터 동기생들을 직접 모아서 야구를 할 정도였고, 그 열정은 성인이 된 이후 황태자가 되기 1년 전 고시엔에서 기념 시구를 한 적도 있는 등 야구에 상당한 많은 관심이 있다고 한다. [52] 중학생 때 소프트볼 팀에서 활동, 대회에 나가 우승한 적도 있다. [53] 2006 WBC 때도 직관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고위층인 나가시마 시게오, 와타나베 츠네오 옆에서 같이 봤는데 한일전이었고, 눈앞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제70대 4번타자인 이승엽에게 투런 홈런을 맞고 격침당하는 걸 직접 보고 말았다. [54] 초등과 고학년 때 학교 선생의 제안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55] 스키가 원래 일본 왕실 사람들의 주요 취미이긴 하지만(그래서 왕족 경호를 맡는 경찰들은 스키를 능숙하게 수련해야 한다고 한다) 2019년 궁내청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아이코 공주는 상급자 코스에서 별다른 문제 없이 능숙하게 스키를 탔다고 한다. 당시 스다장에 있었던 일반인들이 트위터 등에다 아이코 공주의 스키 실력에 대한 쓴 글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56] 2018년에 아이코 공주의 공연에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서 패닉상태에 빠져서 공연이 상당기간 지연된 것과 천황 내외가 참석할 가능성도 높아서, 2019년 축제 때는 스태프 증강 등 최선을 다해서 준비한 덕에 별 문제없이 공연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57] 물론 후미히토 항목에도 있듯 카더라가 많긴 하다. [58] 실제로 마사코 황후가 나루히토 천황에게 시집오기 전 친정에서 개를 기르기도 했다. [59]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중국어라고 한다. [60] 사촌언니 마코 공주는 고2 때 처음으로 단독공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