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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3:42:30

간인노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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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신적강하한 미야케
 
 
 
 
 
 
 
 
 
 
 

구황족 가계도 · 구 미야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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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閑院宮,ruby=かんいんのみや)]
간인노미야
파일:간인노미야 문장.pn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본가 황실(皇室)
가조 나오히토 친왕(直仁親王)
종별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
직궁가(直宮家)
출신지 야마시로국 오타기군 교토
(山城国愛宕郡)
근거지 교토
도쿄도
당주 단절[1]
파일:external/pds.exblog.jp/a0287992_2172573.jpg 파일:external/pds.exblog.jp/a0287992_1282730.jpg
6대 당주 고토히토 친왕(載仁親王) 7대 당주 하루히토(春仁)의 말년
1. 개요2. 성립3. 역대 당주4. 1947년 신적강하와 이후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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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閑院宮

일본 황실에 존재했던 세습친왕가. 에도 시대에 있었던 네 세습친왕가 중 가장 나중에 생겼으며 현재의 황실은 이 궁가의 후손이다. 고토히토 친왕 미야케를 계승한 뒤 구 미야케 11곳 중 하나가 되었다.

2. 성립

당시 일본 조정에서는 황위 계승 예정자 이외의 황자들은 세습친왕가의 후계자를 제외하면 모두 출가시켜 법친왕(法親王)이 되는 것이 관례였다.[2] 그런데 1654년 고코묘 덴노가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급서하자 혈통상으로 가까운 남자 황족이 죄다 출가해버린 탓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당시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에게 황실에 새로운 세습친왕가를 둘 것을 건의했다. 당시 히가시야마 덴노도 같은 생각이어서 자신의 아들 히데노미야(秀宮)[3]를 새로운 궁가의 당주로 하기 위해 쇼군에게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으며 1710년 새로운 세습친왕가인 간인노미야(閑院宮)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뒷날 간인노미야의 2대 당주 스케히토 친왕의 아들 모로히토(師仁) 친왕[4]이 119대 고카쿠 덴노로 즉위했다. 만약 간인노미야가 없었다면 황위는 부계혈통상 한참 먼 후시미노미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히가시야마 덴노는 이러한 점을 우려했던 듯하다.

3. 역대 당주

대수 당주 생몰년
1대 나오히토(直仁)[5] 1704-1753
2대 스케히토(典仁) 1733-1794
3대 하루히토(美仁) 1758-1818
4대 다쓰히토(孝仁) 1792-1824
5대 나루히토(愛仁) 1818-1842
6대 고토히토(載仁)[6] 1865-1945
7대 하루히토(春仁) 1902-1988

4. 1947년 신적강하와 이후

113대 히가시야마(東山) 덴노의 차남 나오히토(直仁)가 개창한 세습친왕가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후시미계 마지막 직계 황통인 118대 고모모조노 덴노가 붕어하자 2대 당주 스케히토(典仁)는 장남 하루히토(美仁)에게 친왕가를 잇게 하고 6남 토모히토(兼仁)에게 황통을 계승시켰는데 그가 바로 119대 고카쿠 덴노로 현 직황족의 직계 조상이다. 황적이탈 당시에는 직황족을 뺀 간인가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당주 하루히토(春仁) 부부가 강하했다.[7] 전후 하루히토는 이혼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1988년에 단절되었다.

5. 기타


[1] 남성 혈족은 끊겼으나 여자로 이어오는 혈통은 이어오고 현재 인스타 계정도 있다. [2] 친왕이 출가하는 경우 입도친왕(入道親王)과 법친왕(法親王)이 있는데 둘 다 왕자 출신 승려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건 환속해서 자식을 보면 그 자손이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가의 여부에 차이가 있다. 입도친왕의 자손은 가능하지만 법친왕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3] 뒷날의 나오히토(直仁) 친왕. [4] 나중에 토모히토(兼仁)로 개명했다. [5] 113대 히가시야마 덴노의 아들. 그의 딸 이소노미야 도모코 여왕이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에게 출가했다. [6] 봉사손으로 입적. [7] 적손은 아니며 원래는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16남이었으나 간인 궁가가 단절하자 하루히토의 아버지 고토히토(載仁)가 봉사손으로 입적했다. 하루히토는 황적이탈한 뒤 스미히토(純仁)로 개명했다. [8] 하루히토는 종전 당시 육군 소장이었다. 군대가 해체된 뒤에도 그의 부관은 하루히토 개인의 집사로서 계속해서 수발을 들었다. [9] 야마노테선 타마치역 앞의 NEC카스가(春日) 빌딩이 그의 재산이었다. [10] 12월 29일부터 이듬해 1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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