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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0:34:14

파블로 에스코바르

메데인 카르텔 지도자
제22대 콜롬비아 하원의원
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
파일:external/f.tqn.com/pablo_escobar2.jpg
<colbgcolor=#000> 본명 <colbgcolor=#ffffff,#1f2023>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
Pablo Emilio Escobar Gaviria
출생 1949년 12월 1일
안티오키아 메데진 시 리오네그로
사망 1993년 12월 2일 (향년 44세)
안티오키아 메데진 시 로스 올리보스
국적
[[콜롬비아|]][[틀:국기|]][[틀:국기|]]
별명 엘 독토르, 돈 파블로, 파블리토, 코카인의 제왕
신체 167cm
지위 메데인 카르텔 지도자
약력 콜롬비아 자유당 하원 국회의원[1]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마약왕이 되다2.3. 쫒기는 범죄자 생활
3. 평가4. 여담5.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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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데인 카르텔의 설립자이자 지도자, 기업가. 정치인.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콜롬비아 역사상 최대 마약 카르텔의 두목 자리에 올랐다. 전성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깔려 있는 마약 유통망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이 당시 추정 자산이 300억 달러에 달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부유한 사람으로 추정될 정도였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1949년 12월 1일 콜롬비아의 메데진 시 리오네그로(Rio Negro)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의 직업은 농부였고 어머니는 교사로 일했다. 출생 직후 그의 가족은 메데진 교외의 엔비가도(Envigado)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은 메데진 시 당국에 기초수급을 신청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로 학교에 다녀야 했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고급 신발 한 켤레를 훔쳐 그에게 가져다 주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그는 신발을 받아 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자라면 어머니께 모든 것을 다 드리겠습니다."
성적은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17세 생일 직전에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2년 후에 복학했으나 다시금 자퇴했다. 정치인이 꿈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위조해 대학에 들어갔으나 역시나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편 그는 10대 시절에 이미 화려한 범죄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소문에 따르면 인생 최초의 범죄는 무덤의 비석을 훔쳐 가난한 상주에게 판 것이라고 한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그의 최초의 범죄 경력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차량절도단에 합류한 것이다. 그는 위조 복권 판매와 담배 밀수 사업에도 뛰어들었고 몸값을 노린 납치 강도에도 나섰다. 메데진의 고위공무원을 납치해 몸값으로 10만 달러를 뜯어낸 적도 있는데 그가 마약을 팔기 전까지 한번에 가장 큰 돈을 손에 쥐었던 일이다.

젊은 그의 꿈은 22살 전까지 100만 달러[3]를 모으는 것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코카인 사업에 뛰어든 26살에는 이미 300만 달러를 가지고 있었다.

2.2. 마약왕이 되다

그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은 아니면 납(Plata o Plomo), 즉 돈 아니면 총알 정책이었다.[4] 이는 경찰, 공무원, 정치인과 판검사들에게 '내게 협조해서 부자가 되거나 내게 적대해서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협조한 경찰이나 군인, 정치인, 기업인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이용하여 안전도 보장시켜 줬지만 협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납 세례를 확실하게 내렸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죽이고 그를 대신해서 나온 같은 정당의 또 다른 대통령 후보가 타기로 되어 있었던 여객기를 폭파하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인 M19에게 돈을 주어 고등법원을 공격하게 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5] 다만 초창기에는 대놓고 테러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고 테러 노선을 걷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기는 했다.

여하튼 그는 마약 밀매를 하고 때로는 경쟁 조폭들과 게릴라들을 때려잡으면서 경찰관들을 뇌물로 매수하는 무자비한 행각을 보이면서도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서인지 메데진의 막장 상황에 여러모로 관심을 가졌다. 마약을 통해 벌어온 돈으로 농장을 인수하고 건설업과 자동차 대행판매에도 손을 댔는데 이 사업들로 추가로 수익을 창출하는 데도 성공하면서 단순 조폭 카르텔에서 메데인 그룹으로 키워나갔다. 그는 자신을 사회 밑바닥에서 콜롬비아 수위급의 기업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포장했고 처음에는 콜롬비아 양대 정당에 정치자금을 대면서 콜롬비아의 여러 게릴라 및 우익 민병대와도 이합집산을 거듭했지만 자신이 스스로 정치인이 되어서 안정적인 사업을 벌여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고[6] 개인적으로도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정계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마약을 팔아 더럽게 벌어온 돈 중 일부를 메데진의 사회 인프라와 복지 투자에 쓰고 빈민층에게도 상당한 돈을 나누어 주었으며 빈민층을 위한 학교와 병원을 건설했다. 노숙자들과 거지들을 위해서 무료 급식소도 열었고 성당과 가옥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축구팀도 창설하였다. 자연스럽게 메데진 주민들의 삶도 나아지면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인심을 얻게 되자 눈 가리고 아웅 격으로 가난한 자들의 로빈 후드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콜롬비아 자유당에 입당하면서[7] 1982년 콜롬비아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한때 차기 대통령을 꿈꾸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이전에도 경찰을 상대로 매수를 하는 등의 짓거리를 해 오기는 했지만 적어도 사업가로나 정치인으로서나 재능이 있기는 했다.

2.3. 쫒기는 범죄자 생활

그러나 정치인으로 주가를 올릴 때 즈음 법무부 장관 로드리고 라라 보니야가 그의 범죄 행위와 경찰을 상대로 한 매수 등 비리를 폭로한 데다 마약으로 골머리를 앓던 미국과 콜롬비아 정부의 합동 작전으로 결국에는 국회의원직에서 쫓겨났다. 그 길로 정치생명은 끝나고 추적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범죄자가 되어 쫓기는 와중에 본격적으로 각성하여 법무부 장관 보니야를 대로에서 암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콜롬비아군과 경찰, 사법부, 정치인, 게릴라 등을 매수하고, 응하지 않으면 사지를 찢거나 불태워 죽이고, IED를 설치하는 등 테러도 불사하는 잔혹한 짓을 저질렀으며 수도인 보고타에 자신의 사병을 잠입시켜서 전투까지 벌이는 등 당시 콜롬비아 정부의 진을 뺐다. 현실적으로 메데인 카르텔보다 돈을 많이 버는 대기업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생명은 끝났어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8]

추적당하는 신세가 된 그는 콜롬비아 정부의 부채를 자신이 갚겠다고 했지만 결국 미국의 눈치로 인해 콜롬비아 정부가 그의 사면을 거절했으며 협상을 거쳐 자수를 한 후 자신이 지은 교도소스스로 수감됐다. 그런데 그 교도소는 말이 교도소지 웬만한 특급 호텔보다도 시설이 좋았는데 면적이 무려 40만 평에 달했고 교도관도 자신이 직접 선발했다. 교도소 안에는 정원, 수영장과 당구장, 볼링장, 나이트클럽, 바도 딸려 있었다. 게다가 외출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가서 외출하고 왔다. 이쯤 되면 수감 생활이 아니라 휴가를 보내는 수준이다. 그러나 미국이 콜롬비아 정부에게 그를 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이를 알게 된 그는 이 호화 교도소에서 탈옥(?)했다.

게다가 이때부터 그가 자기를 체포하고 방해하려는 관료, 기자까지 마구 죽여 대다 보니 콜롬비아 정부는 그의 범죄를 파헤칠 수 없었다. 특히 그가 마약을 팔아 번 돈으로 사회 고위층을 매수하거나 협박을 가해서 모가지가 날아갈 위험도 있었고 더군다나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그를 잡으려고 해 봐야 에스코바르 자신이 상당한 경호원과 군사력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폭탄이나 총에 맞아서 죽을 판이었다.

당시 콜롬비아는 좌익 게릴라 무장단체들의 상당수와 휴전상태에 돌입하려고 했던 참이었지만 여전히 내부 사정은 어지러웠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었고 매일 같이 춤추면서 놀아재끼는 삶을 살게 되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마약 밀매 사업은 여전히 벌였다.

그런데 이때 미국이 콜롬비아 정부에 더욱 압력을 가했다. 미국은 그가 미국에 코카인을 수출함으로써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키고 미국의 마약 중독자 수를 늘리는 데 기여한 국가적 차원의 적이 감옥에 수감되지 않고 호텔에서 매일 밤 술 마시고 춤추고 놀며 자기 나라에 마약 밀매를 하며 지내는 꼴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콜롬비아 정부에 그를 미국으로 보내라고 압력을 가했으며 당시 콜롬비아에도 그에게 당한 사람이 수천 명씩이나 있기 때문에 여론도 좋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그의 부하 조직원 두 명이 그와 시비가 붙어서 그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콜롬비아 정부가 그를 다른 감옥으로 이감을 시키려고 했고 결국 그는 탈옥했다.

이제 콜롬비아 정부에서 수배자 신세가 된 그는 메데진 주민들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도피 생활을 했다. 그런데 자기 가족이 독일에서 입국이 거부되자[9] 콜롬비아 대통령궁 근처에 220파운드의 C4를 터트려 버렸다. 다친 사람은 대부분 어린이들이었고 이 사건으로 콜롬비아인들에게 에스코바르에 대한 분노가 커져서 이제 모두 이 천인공노할 인간을 쫓아 죽여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콜롬비아 정부도 더는 참지 않고 수사기관과 군대를 동원하여 미국 수사기관들이랑 협조하여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추적을 피해 은신처에서 숨어 지냈는데 자기 자식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여서[10] 보고타에 있던 아들과 약 20초간 통화를 하다가 위치가 발각되어 DEA와 콜롬비아 특수부대가 투입되었으며 1993년 12월 2일 탈출 와중에 포위되자 소총으로 DEA 요원들과 콜롬비아 특수부대원들과 교전하다가 그들이 쏜 3발의 총알에 맞고 사망했다. 그는 경호원 엘 리몬과 같이 있었는데 총격전 와중에 리몬은 사살되었고 그도 지붕을 통해서 탈출하다가 총에 맞아 사살되었다. 가장 치명상은 귀를 뚫고 간 총알이었는데 이것이 자살인지 확인 사살인지는 정확하지 않다.[11] 사살 기념 촬영(시체 주의), 스티브 머피가 보인다(시체 주의).

3. 평가

그는 잔혹한 성격으로 살아 있을 동안 말 그대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초기에는 마음에 안 드는 깡패와 방해꾼, 마약 시장의 경쟁 카르텔 조직원들을 죽이는 수준이었지만 국회의원직에 쫓겨나고 나서부터는 완벽히 악당 기질에 눈을 떠 정부나 언론사까지 테러를 벌여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경찰뿐만 아니라 군인,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판사, 검사, 정치인들까지 마구잡이로 제거해 버렸다.

심지어 그의 카르텔을 소탕하려고 시도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후보 3명까지 무차별 암살하기도 했다. 원래는 후보 4명을 죽이려고 했으나 나머지 네 번째인 세사르 가비리아 트루히요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가 1989년 11월 27일 아비앙카 항공 203편 비행기에 폭탄을 설치해 폭파시켰는데 이 사람은 다행히 그 비행기에 타지 않아 죽음을 면했지만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107명과 소아차 주민 3명, 총 110명이 죽었다. 이 폭탄 테러에서 살아남은 가비리아는 28대 대통령이 되었고 결국 에스코바르를 찾아내 죽였다.

9일 후인 12월 6일에는 보고타에 있는 콜롬비아 행정보안국(DAS) 건물 앞에 있는 트럭을 폭파시켜 63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부상했다. 당시 DAS 국장이었던 미겔 마사 마르케스[12]를 겨냥한 공격이었지만 그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건물 1층에 DAS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집이 있었던 탓에 사망자 중 20여명은 어린이였다.

당시 콜롬비아가 마약 카르텔뿐만 아니라 여러 무장단체의 난립으로 워낙 개판이었고 강제실종이 횡행했기 때문에 그가 죽인 사람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터넷상으로는 5000명 가량을 살해했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DEA에서는 1만 5천~2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에스코바르의 부하로 활동한 바 있는 존 하이로 벨라스케스 바스케스는 5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는데, DEA 요원이었던 하비에르 페냐 역시 이를 거론하면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긍정했다.

이러한 학살은 물론이고 기세 좋게 카르텔을 지휘해 콜롬비아 정부군과 교전하면서 수도로 진격한 적도 있으니 단순히 마약왕의 범위를 넘어서 군벌에 가까운 인물로 악명을 떨쳤다. 그의 형도 동생 덕에 한몫하면서 살았으나 감옥에 폭탄이 와서 다치는 등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의 장남 세바스티안 마로킨은 꽤 정상적으로 자랐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나머지 언론사와 인터뷰하던 중에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 개새끼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 내가 직접 죽이겠다."며 복수를 맹세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으로 인해서 아르헨티나로 망명하면서 이름을 바꿔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범죄와 비리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난 후에는 피해자들을 만나서 마약 밀매와 아버지의 범죄에 대해 손수 사과하고 있으며 건축가로 일하며 조용히 살고 있다. 드라마 나르코스를 왜곡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가 자기 아버지의 범죄를 미화시켜서라고 한다.

전술한 악명 때문에 묻히는 거지만 사실 잔혹한 행동만 했던 건 아니고 의외로 나름대로 동정심도 있던 성격이기는 했다. 그는 어렸을 때 하도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메데인의 환경 개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하며 마약을 팔아 번 돈으로 메데인의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시키는 공을 세웠고 당시 막장이었던 콜롬비아의 상황 속에서 빈민층들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풀어서 집을 지어주거나 병원을 지어주는 등의 행보를 보였으며 꿈도 희망도 없던 실업자들을 손수 고용시켜서 당대 콜롬비아의 경제난을 그나마 완화시켰다는 점이나 좌파든 우파든 가릴 거 없이 사람들을 끌어모았다는 점에서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질도 있기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1년 넘게 피신할 수 있었다. 현재도 메데인에는 그를 좋게 보는 빈민층들이 은근히 많다고 하지만 메데인 주민을 위해 공을 세웠다고 범죄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에스코바르가 여러 자선 사업을 한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는 메데인에서도 수많은 폭탄 테러를 저질렀고, 얼마나 심각했는지 레바논 내전 당시의 베이루트에 버금간다며 'Beirutizar'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애초에 건실한 산업을 키우는 대신 마약을 팔아 도시를 발전시키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마약왕이 지역 주민들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것도 멕시코의 로스 세타스 시날로아 카르텔 지도자들까지도 다 하는 흔한 일이다.

그가 도시 빈민의 삶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케이블카와 도시철도 등의 인프라 건설에는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않았다. 메데인의 도시 기반 전체가 그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대중의 무지에 충격을 받는 사람도 많다. 메데인 도시철도는 그가 판을 치기 전인 1979년부터 계획되었으며 1995년 1차 완공되었다. 1979년 그 같은 속칭 "마약왕"들이 교외도시의 치안을 망쳐 놓는 것을 우려해 메데인 시 정부의 상위 기관인 안티오키아 지방정부에서부터 계획했으며 이는 뉴욕, 리우 등 먼저 발전했던 도시들이 교외 도시 공동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식 대안으로 도시철도를 건설했던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를 들면 부산 도시철도 4호선이라고 할 수 있다. 반송동, 금사동, 서동 등 교외지역 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되어 견딜 수 없어질 지경에 이르자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건설된 것이 부산 도시철도 4호선이며 메데인 케이블카도 마찬가지다. 2004년 1차 케이블카가 완공되었으니 역시 파블로 그와 연결하기는 힘들다. 가디언 지를 인용하자면 케이블카를 건설한 후 "건설 지역의 살인, 강력 범죄율이 80% 이상 감소했다"고 한다. 그의 공헌 아닌 공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가 치안을 망쳐 도시를 지옥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이루어진 일이다.

전 세계에 10억 달러 이상 재산 소유자가 겨우 226명[13]이던 1989년 그의 재산은 250억 달러로 세계 7위의 부자로 알려졌다. 1990년에 포브스지는 그의 재산을 300억 달러(약 33조 원)로 추산했다. 1990년 기준이기 때문에 오늘날 시가로 따지면 60조원 정도 된다고 한다. 참고로 삼성그룹 이건희의 재산이 14조 원 정도다. 그의 현금은 죽을 때 일부밖에 회수되지 않았다. 수천만 달러가 콜롬비아 일대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전 세계의 특수부대 출신들이 보물찾기에 나섰다고 한다. 재산 액수가 과장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재산이 현금이 아닌 다음에야 정확히 평가하기도 힘들고 그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평가한 사람이 없는 터라 신빙성은 없다.

사실 정부가 해자국의 갱단에 대한 반감을 키우기 위해 갱단의 실태를 과장하는 경향도 있다. 미국의 전설적인 갱단 두목이었던 마이어 랜스키에 따르면 FBI 등은 갱단이 취급하는 돈을 열 배 이상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쿠바 혁명으로 미국 마피아가 입은 손실을 자체 조사한 결과 의외로 규모가 작아서 놀랐을 정도라고 한다.

전술한 대로 그는 콜롬비아 정부의 부채를 자신이 전부 갚는 조건으로 자신과 자신의 조직원들을 전부 사면해 달라고 탄원한 적이 있다. 당시 콜롬비아 정부의 부채는 대략 350억 달러 수준으로 추산되는데 내전+ 석유 파동+이자율 증가라는 3콤보가 겹친 결과물이었다.

4. 여담


파일:파블로_에스코바르_백악관_앞에서.webp

5. 대중문화에서



[1] 국회가 열리자마자 범죄 혐의에 대해 추궁과 공격을 받았다. 저 위에 프로필 사진은 1976년에 체포됐을 때 싱긋 웃으면서 찍은 사진인데웃지마! 이 사진을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드리고 라라 보니야가 직접 국회에 공개해서 여론에 악영향을 줬다. 에스코바르는 비난의 증거를 대라며 반격했지만 결국 몇 달만에 당에서 축출되었다. 1983년 10월 면책특권을 상실했고 결국 1984년 1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3개월 뒤 보니야 장관은 메데인 카르텔 시카리오의 공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2] 의외로 가계 계보도를 보면 친척 가운데 영부인이나 사업가, 목장주가 있는 등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다고 한다.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몰락했지만... [3] 약 13억. 1970년대 초의 달러 가치는 2020년대보다 10배는 더 컸고 달러 가치가 많이 떨어진 현재도 콜롬비아 기준으로 30여년 어치 최저임금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콜롬비아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더라도 10 ~ 17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아야 저 돈을 모을 수 있다. [4] 콜롬비아에서는 은이란 단어 Plata가 돈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총알을 으로 만들어 왔기 때문에 납은 곧 총알의 은유로도 통용된다. 물론 통짜 납이었다간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중독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물렁물렁한 재질 특성상 강도 문제도 생기므로 지금은 구리로 씌우거나 혼합재질을 사용한다. [5] 하지만 이때의 공격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해서 M-19 단원들도 상당수 사망한 데다가 애꿎은 민간인도 다수 희생된 탓에 여론이 나빠졌고 결국 1990년에 협상을 통해 합법정당 활동으로 노선을 전환하며 보고타 시장을 배출하는 등 현재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6] 이유는 면책특권 때문이었다. [7] 그가 죽였던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과 죽이려 들었던 세사르 가비리아도 자유당 소속의 정치인이다. 같은 자유당에서 한솥밥을 먹기는 했지만 국회의원직에서 쫓겨나면서 제대로 원한이 박힌 것이다. [8] 당연히 메데인 일대를 장악한 만큼 여러 정치인들과 인연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우리베 대통령이 있다. 에스코바르가 아주 돈이 많고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코바르한테 찍히면 죽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소속 정당도 같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어쨌든 인프라 확충에는 도움을 주고 빈민층들에게도 돈을 나눠주다 보니 메데인에 나쁠 것이 없던 인간이어서 여러모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물론 나중에 에스코바르 일당이 몰락하자 우리베는 에스코바르 딜당의 잔당을 일부 흡수해서 우익 민병대 조직을 창설하는 데 앞장섰고 2002년 대선 때 자유당을 탈당한 다음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우리베는 에스코바르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고 발뺌하기 바쁘기는 하다. [9] 물론 파블로 에스코바르 본인이 입국이 지연되자 독일 대사관에 전화해 모든 독일인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며 협박했기 때문이다. [10] 실제로 에스코바르의 아들의 인터뷰를 보면 자기 자식에게는 매우 자상했던 아버지는 맞다. 어차피 바깥에서 망나니 짓을 해도 자기 자식이나 부모에게 자상한 부모, 효자나 효녀인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니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에스코바르는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았던 탓인지 자식에게는 아낌없는 사랑을 보였다고 한다. 그 사랑이 너무 과한 탓인지 아들이 언론을 통해 아버지가 사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그 개새끼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 내가 직접 죽이겠다."면서 생방송을 통해 보복을 맹세했는데 결국 이름을 숨기면서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다만 아버지의 범행을 제대로 알게 된 후에는 피해자에게 사과하면서 반성하고 있다. [11] 에스코바르의 아들은 아버지가 언제나 했던 말이 '절대 적에게 죽지는 않겠다.'였다면서 자살을 주장하지만 당시 DEA요원이었던 스티브 머피는 갖고 있던 총으로 자살했다면 근거리에서 총알을 맞게 되므로 화상이 있어야 하지만 현장에서 자신이 사진을 찍을 때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면서 100% 확실하게 군인들에게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드라마 나르코스에서도 군인들이 복수로 확인사살한 것으로 나온다. [12] 이미 같은 해 5월 30일에도 DAS 관리직 요원인 미겔 마사 마르케스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해 그 대신 4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13] 2012년에는 1425명이지만 23년 동안의 인플레이션율(특히 양적완화 정책이 이어진 2008년 이후의 인플레이션율)을 감안하면 당시의 Billionaire는 지금의 trillionaire 수준이다. [14] 평범한 체격인 나르코스와 달리 현실처럼 에스코바르가 후덕한 체격으로 나와서 싱크로율이 더 높다. [15] 일종의 티켓 같은 것을 긁어서 등록하는데 이것은 1회용으로 한번 쓰면 그 티켓의 가치가 소멸된다. 지폐는커녕 기프트카드도 못한 쓰레기. [16] 1991년에 콜럼비아 정부로 돌아왔다. [17] 서치 블락 작전 사령관 우고 아길라르는 2015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에서 포페예에 대해 하는 말의 20% 정도만 진실인 심각한 거짓말쟁이라고 강조했으며 당시 DEA 요원이었던 스티브 머피와 하비에르 페냐도 이 방송을 보고 구라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18] 물론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에게 욕을 잔뜩 들어쳐먹기는 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는 포페예의 부하들이 던진 수류탄을 되던지려고 잡았으나 폭발하여 팔을 잃은 전직 여경과의 만남이 주선 되었는데 여경은 포페예를 실제로 만나 보고는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음이 확실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포페예가 말로는 죄송하다고 했으나 눈꼽만큼도 반성하는 태도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그 테러를 기획했는지 세세하게 자랑하기까지 한다. [19] 더군다나 진짜로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구스타보 페트로 시장이 유세를 나갔다가 일련의 암살 시도를 당한 후에 한 말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20] 더 그랜드 투어 시즌 3 콜롬비아 스페셜에서 에스코바르의 하마들이 등장한다. 제레미 클락슨이 파블로 뭐시기라는 사업가마약상가 들여온 하마가 있다고 현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고 메데인에 방문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인증했다. [21] 미국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두목이었던 존 스탠파의 조카이기도 했다. [22] 제목은 ' 메데인 카르텔' [23] 에스코바르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콜롬비아에 짱박혔고 수에뇨는 멕시코 출신이다. [24] 에스코바르는 길바닥 마약상으로 시작, 엘 수에뇨는 13세에 시카리오(원래는 히트맨, 즉 청부 암살자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꼬붕을 의미한다. 한국 조폭으로 보았을 때 직접 힘쓰고 폭력을 저지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조폭 구성원 부류의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로 시작. [25] 에스코바르는 아무리 잘나 봤자 메데인 및 그 인근 지역만 완전히 지배, 장악 및 행정을 유지(운영)했지만 엘 수에뇨는 볼리비아 전토를 자신의 나와바리로 두는 차원이 다른 전국구급 스케일을 자랑한다. 거기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카르텔 영역까지 추가하면 말이다. [26] 에스코바르 이 양반은 전술했듯이 주민들 복지 창출 정도밖에 안 된다면 수에뇨는 아예 산타 무에르테 신앙을 이용한 종교적 교화까지 써먹고 있다. [27] 구스만 이 양반도 멕시코 출신이다. [28] 참고로 루비오는 에스코바르 말고도 카를로스 레더도 같이 오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