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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0:51:52

파블로 에스코바르

메데인 카르텔 지도자
제22대 콜롬비아 하원의원
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
파일:external/f.tqn.com/pablo_escobar2.jpg
<colbgcolor=#000> 본명 <colbgcolor=#ffffff,#1f2023>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
Pablo Emilio Escobar Gaviria
출생 1949년 12월 1일
콜롬비아 안티오키아주 리오네그로
사망 1993년 12월 2일 (향년 44세)
콜롬비아 안티오키아주 메데진 로스 올리보스
국적
[[콜롬비아|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콜롬비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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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별명 엘 독토르, 돈 파블로, 파블리토, 코카인의 제왕
신체 167cm
종교 가톨릭
지위 메데인 카르텔 지도자
약력 콜롬비아 자유당 하원 국회의원[1]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마약왕이 되다2.3. 쫓기는 범죄자 생활
3. 평가4. 여담5.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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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데인 카르텔의 설립자이자 지도자, 기업가. 정치인. 전성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깔려 있는 마약 유통망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이 당시 추정 자산이 300억 달러에 달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부유한 사람으로 추정될 정도였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1949년 12월 1일 콜롬비아의 메데진 근교 도시인 리오네그로(Rionegro)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벨 에스코바르의 직업은 농부였고, 어머니 에르밀다는 교사로 일했다. 출생 직후 그의 가족은 메데진 교외의 엔비가도(Envigado)로 이사했다.

에스코바르에 대한 대표적인 통념 중 하나는 그가 빈곤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코카인 밀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자수성가했다는 것이다. 사실 에스코바르는 가난과는 거리가 먼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가계 계보도를 보면 친척 가운데 영부인이나 사업가, 목장주가 있는 등 결코 한미한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2] 그의 외종사촌 호세 오브둘리오 가비리아는 상원의원으로,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의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계 진출을 꾀하던 시기, 에스코바르는 주 공략층인 메데진 빈민의 지지를 얻고자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도 어린 시절에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허구의 배경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그를 둘러싼 자수성가 신화의 기원이 되었다.

본인 주장에 따르면,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로 학교에 다녀야 했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고급 신발 한 켤레를 훔쳐 그에게 가져다 주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그는 신발을 받아 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자라면 어머니께 모든 것을 다 드리겠습니다."
성적은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17세 생일 직전에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2년 후에 복학했으나 다시금 자퇴했다. 정치인이 꿈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위조해 대학에 들어갔으나 역시나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편 에스코바르는 10대 시절에 이미 화려한 범죄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소문에 따르면 인생 최초의 범죄는 무덤의 비석을 훔쳐 가난한 상주에게 판 것이라고 한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그의 최초의 범죄 경력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차량절도단에 합류한 것이다. 그는 위조 복권 판매와 담배 밀수 사업에도 뛰어들었고 몸값을 노린 납치 강도에도 나섰다. 메데진의 고위공무원을 납치해 몸값으로 10만 달러를 뜯어낸 적도 있는데 그가 마약을 팔기 전까지 한 번에 가장 큰 돈을 손에 쥐었던 일이다.

젊은 에스코바르의 꿈은 22살 전까지 100만 달러[3]를 모으는 것이었다. 에스코바르가 본격적으로 코카인 사업에 뛰어든 26살에는 이미 300만 달러를 가지고 있었다.

2.2. 마약왕이 되다

에스코바르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은 아니면 납(Plata o Plomo), 즉 돈 아니면 총알 정책이었다.[4] 이는 경찰, 공무원, 정치인과 판검사들에게 '내게 협조해서 부자가 되거나 내게 적대해서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협조한 경찰이나 군인, 정치인, 기업인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이용하여 안전도 보장시켜 줬지만 협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납 세례를 확실하게 내렸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죽이고 그를 대신해서 나온 같은 정당의 또 다른 대통령 후보가 타기로 되어 있었던 여객기를 폭파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인 M19에게 돈을 주어 고등법원을 공격하게 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5] 다만 초창기에는 대놓고 테러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고 테러 노선을 걷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기는 했다.

여하튼 에스코바르는 마약 밀매를 하고 때로는 경쟁 조폭들과 게릴라들을 때려잡으면서 경찰관들을 뇌물로 매수하는 무자비한 행각을 보이면서도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서인지 메데진의 막장 상황에 여러모로 관심을 가졌다. 마약을 통해 벌어온 돈으로 농장을 인수하고 건설업과 자동차 대행판매에도 손을 댔는데 이 사업들로 추가로 수익을 창출하는 데도 성공하면서 단순 조폭 카르텔에서 메데진 그룹으로 키워나갔다. 그는 자신을 사회 밑바닥에서 콜롬비아 수위급의 기업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포장했고 처음에는 콜롬비아 양대 정당에 정치자금을 대면서 콜롬비아의 여러 게릴라 및 우익 민병대와도 이합집산을 거듭했지만 자신이 스스로 정치인이 되어서 안정적인 사업을 벌여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유는 면책특권 때문이었다. 마약을 팔아 더럽게 벌어온 돈 중 일부를 메데진의 사회 인프라와 복지 투자에 쓰고 빈민층에게도 상당한 돈을 나누어 주었으며 빈민층을 위한 학교와 병원을 건설했다. 노숙자들과 거지들을 위해서 무료 급식소도 열었고 성당과 가옥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축구팀도 창설하였다. 자연스럽게 메데진 주민들의 삶도 나아지면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인심을 얻게 되자 눈 가리고 아웅 격으로 파이사 로빈 후드(Robin Hood Paisa)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콜롬비아 자유당에 입당하면서[6] 1982년 콜롬비아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한때 차기 대통령을 꿈꾸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이전에도 경찰을 상대로 매수를 하는 등의 짓거리를 해 오기는 했지만 적어도 사업가로나 정치인으로서나 재능이 있기는 했다.

2.3. 쫓기는 범죄자 생활

1992년 하반기에 송출된 에스코바르 현상 수배 방송
그러나 정치인으로 주가를 올릴 때 즈음 법무부 장관 로드리고 라라 보니야가 에스코바르의 범죄 행위와 경찰을 상대로 한 매수 등 비리를 폭로한 데다 마약으로 골머리를 앓던 미국과 콜롬비아 정부의 합동 작전으로 결국에는 국회의원직에서 쫓겨났다. 그 길로 정치생명은 끝나고 추적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범죄자가 되어 쫓기는 와중에 본격적으로 각성하여 법무부 장관 보니야를 대로에서 암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콜롬비아군과 경찰, 사법부, 정치인, 게릴라 등을 매수하고, 응하지 않으면 사지를 찢거나 불태워 죽이고, IED를 설치하는 등 테러도 불사하는 잔혹한 짓을 저질렀으며 수도인 보고타에 자신의 사병을 잠입시켜서 전투까지 벌이는 등 당시 콜롬비아 정부의 진을 뺐다. 현실적으로 메데인 카르텔보다 돈을 많이 버는 대기업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생명은 끝났어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7]

추적당하는 신세가 된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 정부의 부채를 자신이 갚겠다고 했지만 결국 미국의 눈치로 인해 콜롬비아 정부가 그의 사면을 거절했으며 협상을 거쳐 자수를 한 후 자신이 지은 교도소 라 카테드랄(La Catedral)에 스스로 수감됐다. 그런데 그 교도소는 말이 교도소지 웬만한 특급 호텔보다도 시설이 좋았는데 면적이 무려 40만 평에 달했고 교도관도 자신이 직접 선발했다. 교도소 안에는 정원, 수영장과 당구장, 볼링장, 나이트클럽, 바도 딸려 있었다. 게다가 외출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가서 외출하고 왔다.

이때부터 에스코바르가 자기를 체포하고 방해하려는 관료, 기자까지 마구 죽여 대다 보니 콜롬비아 정부는 그의 범죄를 파헤칠 수 없었다. 특히 그가 마약을 팔아 번 돈으로 사회 고위층을 매수하거나 협박을 가해서 모가지가 날아갈 위험도 있었고 더군다나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그를 잡으려고 해 봐야 에스코바르 자신이 상당한 경호원과 군사력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폭탄이나 총에 맞아서 죽을 판이었다.

당시 콜롬비아는 좌익 게릴라 무장단체들의 상당수와 휴전상태에 돌입하려고 했던 참이었지만 여전히 내부 사정은 어지러웠다. 이런 이유로 에스코바르는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었고 매일 같이 춤추면서 놀아재끼는 삶을 살게 되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마약 밀매 사업은 여전히 벌였다.

그런데 이때 미국이 콜롬비아 정부에 더욱 압력을 가했다. 미국은 자국에 코카인을 수출함으로써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키고 미국 내의 마약 중독자 수를 늘리는 데 기여한 국가적 차원의 적이 감옥에 수감되지 않고 호텔에서 매일 밤 술 마시고 춤추고 놀며 자기 나라에 마약 밀매를 하며 지내는 꼴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콜롬비아 정부에 그를 미국으로 보내라고 압력을 가했으며 당시 콜롬비아에도 그에게 당한 사람이 수천 명씩이나 있기 때문에 여론도 좋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그의 부하 조직원 두 명이 그와 시비가 붙어서 그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콜롬비아 정부가 그를 다른 감옥으로 이감을 시키려고 했고 결국 그는 탈옥했다.

이제 콜롬비아 정부에서 수배자 신세가 된 에스코바르는 메데진 주민들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도피 생활을 했다. 그런데 자기 가족이 독일에서 입국이 거부되자[8] 콜롬비아 대통령궁 근처에 220파운드의 C4를 터트려 버렸다. 다친 사람은 대부분 어린이들이었고 이 사건으로 콜롬비아인들에게 에스코바르에 대한 분노가 커져서 이제 모두 이 천인공노할 인간을 쫓아 죽여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콜롬비아 정부도 더는 참지 않고 수사기관과 군대를 동원하여 미국 수사기관들이랑 협조하여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추적을 피해 은신처에서 숨어 지냈는데 자기 자식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여서[9] 보고타에 있던 아들과 약 20초간 통화를 하다가 위치가 발각되어 DEA와 콜롬비아 특수부대가 투입되었으며 1993년 12월 2일 탈출 와중에 포위되자 소총으로 DEA 요원들과 콜롬비아 특수부대원들과 교전하다가 그들이 쏜 3발의 총알에 맞고 사망했다. 그는 경호원 엘 리몬과 같이 있었는데 총격전 와중에 리몬은 사살되었고 그도 지붕을 통해서 탈출하다가 총에 맞아 사살되었다. 가장 치명상은 귀를 뚫고 간 총알이었는데 이것이 자살인지 확인 사살인지는 정확하지 않다.[10] 사살 기념 촬영(시체 주의), 스티브 머피가 보인다(시체 주의).

3. 평가

파일:DAS 폭파사건1.png
DAS 본부 폭파 사건의 참상. 아비앙카 항공 203편 폭파 사건으로부터 불과 9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에스코바르는 잔혹한 성격으로 살아 있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초기에는 마음에 안 드는 깡패와 방해꾼, 마약 시장의 경쟁 카르텔 조직원들을 죽이는 수준이었지만 국회의원직에 쫓겨나고 나서부터는 완벽히 악당 기질에 눈을 떠 정부나 언론사까지 테러를 벌이며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여대기 시작했다. 경찰뿐만 아니라 군인,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판사, 검사, 정치인들까지 마구잡이로 제거해 버렸다. 개인적으로도 수백 건의 살인을 범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에스코바르의 애인이었던 뉴스 앵커 비르히니아 바예호는 그가 스스로를 ' 연쇄살인범'이라고 소개하고 약 200건의 살인을 저질렀다며 자랑한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라 카테드랄에 수감된 동안, 그는 살해한 전 동업자의 신체 일부를 구워 먹는 식인 행위까지 벌였다. #

심지어 에스코바르의 카르텔을 소탕하려고 시도했다는 이유로 1990년 대선에 출마한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기도 했다. 바로 신자유주의당 소속의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으로, 당선이 유력시되었던 후보였기에 콜롬비아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1989년 8월 18일 그가 암살당한 사건을 시작으로, 닷새 뒤 에스코바르와 곤살로 로드리게스 가차를 필두로 한 메데진 카르텔은 콜롬비아 정부와의 전면전을 선포, 거의 매일 전국 대도시[11] 폭탄 테러를 가했다. 이것을 '마약테러 전쟁(Guerra del Narcoterrorismo)\'이라고 부른다.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폭탄 테러로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공격함으로써 나라에 공포감을 조성하고, 콜롬비아 정부에 압박을 가해 미국과의 범죄인 인도조약을 폐지시키려 한 것이다.

그가 저지른 테러 사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89년 11월 27일 발생한 아비앙카 항공 203편 폭파 사건으로, 해당 항공기에 탑승한 정보원 2명을 살해하고자 비행기를 통째로 날려버렸다.[12] 결국에 탑승객 107명 전원이 사망했고, 지상에 있던 3명의 소아차 주민도 파편에 맞아 숨졌다. 희생자 중에는 미국 시민권자 2명도 있었는데, 이는 조지 H. W. 부시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미국이 에스코바르 수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이게 에스코바르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충격적이게도 1990년 초에 부시를 겨냥한 암살 시도가 발생했다.[13][14]

아비앙카 사건으로부터 9일 뒤인 12월 6일에는 보고타에 있는 콜롬비아 행정보안국(DAS) 본부 앞에 정차한 버스를 폭파시켜 63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부상했다. 버스에 실은 다이너마이트의 양은 500kg이 넘었고, DAS 빌딩뿐만 아니라 근처 거리가 싸그리 초토화되었다( 현장 사진). 당시 DAS 국장이었던 미겔 마사 마르케스[15]를 겨냥한 공격이었지만 그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건물 1층에 DAS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집이 있었던 탓에 사망자 중 20여 명은 어린이였다. 에스코바르의 최측근 시카리오인 라 키카 재판에서 나온 증언에 따르면 버스를 고의로 어린이집 앞에 정차시킨 후 폭파했다고 한다.

당시 콜롬비아가 마약 카르텔뿐만 아니라 여러 무장단체의 난립으로 워낙 개판이었고 강제실종이 횡행했기 때문에 그가 죽인 사람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터넷상으로는 5000명 가량을 살해했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DEA에서는 1만 5천~2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에스코바르의 부하로 활동한 바 있는 존 하이로 벨라스케스 바스케스는 1980년부터 1993년까지 5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는데, DEA 요원이었던 하비에르 페냐 역시 이를 거론하면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긍정했다. 또한 페냐는 한 강연에서 약 1만~1만 5천 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이 에스코바르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학살은 물론이고 기세 좋게 카르텔을 지휘해 콜롬비아 정부군과 교전하면서 수도로 진격한 적도 있으니 단순히 마약왕의 범위를 넘어서 군벌에 가까운 인물로 악명을 떨쳤다. 그의 형도 동생 덕에 한몫하면서 살았으나 감옥에 폭탄이 와서 다치는 등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의 장남 세바스티안 마로킨은 꽤 정상적으로 자랐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나머지 언론사와 인터뷰하던 중에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 개새끼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 내가 직접 죽이겠다"며 복수를 맹세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으로 인해서 아르헨티나로 망명하면서 이름을 바꿔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범죄와 비리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난 후에는 피해자들을 만나서 마약 밀매와 아버지의 범죄에 대해 손수 사과하고 있으며 건축가로 일하며 조용히 살고 있다. 드라마 《 나르코스》를 왜곡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가 자기 아버지의 범죄를 미화해서라고 한다.

전술한 악명 때문에 묻히는 거지만 사실 잔혹한 행동만 했던 건 아니고 의외로 선행을 베푼 적도 있었다. 에스코바르는 메데진의 환경 개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여서, 마약을 팔아 번 돈으로 메데진의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공을 세웠고 당시 막장이었던 콜롬비아의 상황 속에서 빈민층들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풀어서 집을 지어주거나 병원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1년 넘게 피신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진실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빈민층의 지지를 강화하고 신입 시카리오 채용을 용이하게 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메데진 주민들이 그를 존경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관광 가이드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에스코바르는 메데진의 로빈 후드격인 인물이고 사람들에게 무척 존경받는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관광상품화를 위해 사실을 과장한 것이고, 절대다수의 시민들은 에스코바르를 싫어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 그를 좋게 보는 빈민층들이 있긴 하나 극소수에 불과하고, 에스코바르에게 은혜를 입었으며 별다른 피해는 받지 않았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에스코바르가 초기에 여러 자선 사업을 했던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는 메데진에서도 민간인을 겨냥한 수많은 폭탄 테러를 저질렀고, 얼마나 심각했는지 레바논 내전 당시의 베이루트에 버금간다며 '베이루트화되다(Beirutizar)'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애초에 메데진 주민을 위해 공을 세웠다고 범죄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건실한 산업을 키우는 대신 마약을 팔아 도시를 발전시키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마약왕이 지역 주민들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것도 멕시코의 로스 세타스 시날로아 카르텔 지도자들까지도 다 하는 흔한 일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 메데진의 치안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최악이었다. 특히 1989~1993년에는 10만 명당 살인율이 거의 400명에 육박하면서, 시우다드후아레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범죄와 폭력이 난무했다.[16] 에스코바르의 시카리오들은 정해진 타깃만 깔끔하게 제거하는 살인청부업자라기보다는, 무고한 민간인을 밥 먹듯이 죽이고 약탈하는 연쇄살인범에 더 가까웠다. DEA 요원 하비에르 페냐에 따르면 그 멕시코 카르텔보다도 더 폭력적이었던 게 콜롬비아 카르텔이었다. 살해한 사람 수가 200~240명 되는 것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수치로 취급되었고, 조금만 신경에 거슬려도 길거리에서 총기나 마체테로 죽이고 보거나, 재미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이 성행했다. 메데진 안에서도 특히 치안이 나빴던 북부 지역에서는 시카리오가 길을 걷다가 마주친 민간인 가족을 아무 동기 없이 몰살한 사건도 발생한 적이 있다. 이러한 만행이 빈번했음에도 에스코바르는 자기 부하들의 잔학행위를 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비호했고, 체포되어 교도소에 보내지더라도 어떻게든 탈옥시켜주었다. 본인도 부하들을 시켜 납치해온 10대 중반의 소녀들과 성관계를 맺고, 수틀리면 살해한 뒤 실종시키기도 했다.[17]

다만 에스코바르가 경찰에 의해 사살된 이후, 붕괴 후 혼란기가 찾아오면서 메데진 시민들이 '차라리 에스코바르 통치기가 더 나았다\'며 한탄한 적도 있었다. 이 시기의 혼란상은 페르난도 바예호의 소설 《청부 살인자의 성모》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동안 에스코바르에게 고용되었던 말단 시카리오들이 일자리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들은 서로의 갱단으로 복귀해 도시 각 지역을 장악하고자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메데진 카르텔이 건재했던 시절에는 에스코바르가 메데진의 모든 갱단을 자신의 부하로 포섭하여 충돌을 최소화했지만, 그가 사라지자 이들이 적대 세력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갱단원들은 확실한 증거 없이, 피해자가 상대 조직의 일원으로 의심되기만 해도 가차없이 살해했다고 한다. ELN이나 FARC 계열 도시 게릴라들과 에스코바르 간의 동맹도 무효화되어, 그의 죽음과 함께 메데진 갱단과 도시 게릴라 사이 충돌이 격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게릴라 척결 목적으로 극우 준군사조직이 개입하면서 갱단을 지원했고, 그 잔혹성이 배가 되었다.[18] 설상가상으로 과거 에스코바르의 시카리오들에게 보이는 족족 살해당해 제대로 나서지 못했던 강도, 연쇄살인범과 같은 일반 범죄자들마저 활개치기 시작했다는 모양. 다행히도 현재는 치안이 많이 나아졌다.

에스코바르는 마약 카르텔이 10대 초반에서 중후반에 이르는 미성년자 소년들을 시카리오로 고용하는 악습을 확산시킨 원흉이기도 하다. 콜롬비아 마약 밀매의 1세대 격인 그리셀다 블랑코 시절까지만 해도 미숙함 때문에 어린아이는 시카리오로 고용되지 않았고, 성인만이 선호되었다. 그러나 게릴라의 소년병 징집에 영감을 받은 에스코바르는 '젊을수록 좋다'는 신조를 내세우며 메데진의 북부 빈민가 출신 소년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카르텔 시카리오의 길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19] 에스코바르의 최측근 시카리오였던 피니나와 라 키카는 각각 16살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의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런 유명한 시카리오들은 막대한 돈을 벌었고, 출신 지역에서는 축구 선수나 연예인보다도 더 큰 인기를 누렸다. 이로 인해 많은 빈민가 아이들이 그들을 롤모델처럼 여기고, 장래희망을 시카리오로 정하게 되었다.[20] 에스코바르 시절부터 시작된 메데진의 소년 시카리오 양성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데, 일례로 2019년에 14살 시카리오 소년이 12건의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도시 빈민의 삶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케이블카와 도시철도 등의 인프라 건설에는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않았다. 메데진의 도시 기반 전체가 그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대중의 무지에 충격을 받는 사람도 많다. 메데진 도시철도는 그가 판을 치기 전인 1979년부터 계획되었으며 1995년 1차 완공되었다. 1979년 그 같은 속칭 "마약왕"들이 교외도시의 치안을 망쳐 놓는 것을 우려해 메데진 시 정부의 상위 기관인 안티오키아 지방정부에서부터 계획했으며 이는 뉴욕, 리우 등 먼저 발전했던 도시들이 교외 도시 공동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식 대안으로 도시철도를 건설했던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를 들면 부산 도시철도 4호선이라고 할 수 있다. 반송동, 금사동, 서동 등 교외지역 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되어 견딜 수 없어질 지경에 이르자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건설된 것이 부산 도시철도 4호선이며 메데진 케이블카도 마찬가지다. 2004년 1차 케이블카가 완공되었으니 역시 파블로 그와 연결하기는 힘들다. 가디언 지를 인용하자면 케이블카를 건설한 후 "건설 지역의 살인, 강력 범죄율이 80% 이상 감소했다"고 한다. 에스코바르의 공헌 아닌 공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가 치안을 망쳐 도시를 지옥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이루어진 일이다.

전 세계에 10억 달러 이상 재산 소유자가 겨우 226명[21]이던 1989년 그의 재산은 250억 달러로 세계 7위의 부자로 알려졌다. 1990년에 포브스지는 그의 재산을 300억 달러(약 33조 원)로 추산했다. 1990년 기준이기 때문에 오늘날 시가로 따지면 60조원 정도 된다고 한다. 참고로 삼성그룹 이건희의 재산이 14조 원 정도다. 그의 현금은 죽을 때 일부밖에 회수되지 않았다. 수천만 달러가 콜롬비아 일대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전 세계의 특수부대 출신들이 보물찾기에 나섰다고 한다. 재산 액수가 과장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재산이 현금이 아닌 다음에야 정확히 평가하기도 힘들고 그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평가한 사람이 없는 터라 신빙성은 없다.

사실 정부가 해자국의 갱단에 대한 반감을 키우기 위해 갱단의 실태를 과장하는 경향도 있다. 미국의 전설적인 갱단 두목이었던 마이어 랜스키에 따르면 FBI 등은 갱단이 취급하는 돈을 열 배 이상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쿠바 혁명으로 미국 마피아가 입은 손실을 자체 조사한 결과 의외로 규모가 작아서 놀랐을 정도라고 한다.

전술한 대로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 정부의 부채를 자신이 전부 갚는 조건으로 자신과 자신의 조직원들을 전부 사면해 달라고 탄원한 적이 있다. 당시 콜롬비아 정부의 부채는 대략 350억 달러 수준으로 추산되는데 내전+ 석유 파동+이자율 증가라는 3콤보가 겹친 결과물이었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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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중문화에서


[1] 국회가 열리자마자 범죄 혐의에 대해 추궁과 공격을 받았다. 저 위에 프로필 사진은 1976년에 체포됐을 때 싱긋 웃으면서 찍은 사진인데 이 사진을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드리고 라라 보니야가 직접 국회에 공개해서 여론에 악영향을 줬다. 에스코바르는 비난의 증거를 대라며 반격했지만 결국 몇 달만에 당에서 축출되었다. 1983년 10월 면책특권을 상실했고 결국 1984년 1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3개월 뒤 보니야 장관은 메데진 카르텔 시카리오의 공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2] Kirk, Robin. More Terrible Than Death: Drugs, Violence, and America's War in Colombia, 2004. [3] 약 13억. 1970년대 초의 달러 가치는 2020년대보다 10배는 더 컸고 달러 가치가 많이 떨어진 현재도 콜롬비아 기준으로 30여 년 어치 최저임금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콜롬비아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더라도 10~17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아야 저 돈을 모을 수 있다. [4] 콜롬비아에서는 은이란 단어 Plata가 돈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총알을 으로 만들어 왔기 때문에 납은 곧 총알의 은유로도 통용된다. 물론 통짜 납이었다간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중독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물렁물렁한 재질 특성상 강도 문제도 생기므로 지금은 구리로 씌우거나 혼합재질을 사용한다. [5] 하지만 이때의 공격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해서 M-19 단원들도 상당수 사망한 데다가 애꿎은 민간인도 다수 희생된 탓에 여론이 나빠졌고 결국 1990년에 협상을 통해 합법정당 활동으로 노선을 전환하며 보고타 시장을 배출하는 등 현재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6] 그가 죽였던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과 죽이려 들었던 세사르 가비리아도 자유당 소속의 정치인이다. 같은 자유당에서 한솥밥을 먹기는 했지만 국회의원직에서 쫓겨나면서 제대로 원한이 박힌 것이다. [7] 당연히 메데진 일대를 장악한 만큼 여러 정치인들과 인연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이 있다. 에스코바르가 아주 돈이 많고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코바르한테 찍히면 죽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소속 정당도 같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어쨌든 인프라 확충에는 도움을 주고 빈민층들에게도 돈을 나눠주다 보니 메데진에 나쁠 것이 없던 인간이어서 여러모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물론 나중에 에스코바르 일당이 몰락하자 우리베는 그 잔당을 일부 흡수해서 우익 민병대 조직을 창설하는 데 앞장섰고 2002년 대선 때 자유당을 탈당한 다음 대통령이 되었다. [8] 물론 파블로 에스코바르 본인이 입국이 지연되자 독일 대사관과 루프트한자에 전화해 모든 독일인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며 협박했기 때문이다. [9] 실제로 에스코바르의 아들의 인터뷰를 보면 자기 자식에게는 매우 자상했던 아버지는 맞다. 어차피 바깥에서 망나니 짓을 해도 자기 자식이나 부모에게 자상한 부모, 효자나 효녀인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니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에스코바르는 자식에게는 아낌없는 사랑을 보였다고 하며, 총에 맞아 죽을 때도 어머니에게 보낼 편지를 품에 지니고 있던 등 그 때 키워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효자에 아내를 사랑한 애처가였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 과한 탓인지 아들 후안이 언론을 통해 아버지가 사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그 개새끼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 내가 직접 죽이겠다."면서 생방송을 통해 보복을 맹세하고 어머니 에르밀다 역시 아들이 저지른 온갖 폭탄 테러를 선행 물타기로 애써 감추며 사람들이 파블로만 나쁜 놈으로 왜곡하고 있으며, 자기한테만큼은 좋은 아들이라고 인터뷰에서 발언하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결국 콜롬비아와 미국 정부는 물론 칼리 카르텔, 노르테 데 바예 카르텔, 연합자위군 등 에스코바르와 사이 안 좋았던 세력들에게 찍히면서 후안, 에르밀다와 타타를 비롯한 남은 에스코바르 가족들은 이름을 숨기면서 모잠비크 아르헨티나를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해야 했으며 칼리 카르텔과 노르테 델 바예 카르텔이 몰락하고 연합자위군까지 힘을 잃은 나중에야 겨우 메데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생전 루프트한자를 비롯한 여러 항공사들에 자기 가족들의 망명을 도우라고 온갖 협박을 가한 아버지 때문에 항공사들이 에스코바르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며 판매를 거부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의 범행을 제대로 알게 된 후에는 피해자에게 사과하면서 반성하고 있다. 현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착하여 아버지와 달리 건축가로써 건실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10] 에스코바르의 아들은 아버지가 언제나 했던 말이 '절대 적에게 죽지는 않겠다.'였다면서 자살을 주장하지만 당시 DEA요원이었던 스티브 머피는 갖고 있던 총으로 자살했다면 근거리에서 총알을 맞게 되므로 화상이 있어야 하지만 현장에서 자신이 사진을 찍을 때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면서 100% 확실하게 군인들에게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드라마 나르코스에서도 군인들이 복수로 확인사살한 것으로 나온다. [11] 보고타, 메데진, 칼리, 카르타헤나, 페레이라. [12] 표적이 당시 대선 후보였던 세사르 가비리아라는 설이 있는데, 1993년에 아비앙카 사건을 주도했다고 자백한 '엘 아레테'라는 시카리오의 증언을 출처로 한다. 그러나 아레테는 비행기 폭파에 사용된 폭발물이 사고 현장에서 검출되지도 않은 다이너마이트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 밖에도 증언에서 여러 오류가 발견되었다. 당시 검찰총장 구스타보 데그레이프는 에스코바르 측으로부터 동일한 사건으로 미국에서 기소된 시카리오 라 키카를 무죄로 만들어 달라는 사주를 받았는데, 이때 아레테가 감형을 조건으로 데그레이프와 짜고 본인이 하지도 않은 일을 허위 자백했다는 것이 중론인지라 정말로 세사르 가비리아가 표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우선 사건 발생 직후 메데인 카르텔 측에서 정보원 2명을 노리고 저지른 일이라고 밝히긴 했다. [13] 이는 1990년 2월 15일 카르타헤나에서 개회 예정인 미국,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 대통령 간 마약 관련 정상회담을 방해하기 위해 수립되었다. 에스코바르는 휘하 테러리스트 집단을 공항에 배치하고, 부시 대통령이 탑승한 에어 포스 원 로켓 병기로 격추하려 했으나, 메데진 카르텔에 잠입해 있었던 DAS 정보원의 보고로 인해 부시 측이 다른 공항으로 경로를 변경하면서 계획이 실패했다. 다만 DAS의 공식 발표대로 에스코바르가 부시를 실제로 암살하려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경고 차원에서 벌인 일인지를 두고 논쟁이 일기도 했다. 메데진 카르텔의 마약 운송업자였던 카를로스 보테로는 라 키카 재판에서 DAS 측 주장을 지지하며, 같은 해에 수립된 또 다른 부시 암살 작전에 대해서도 상세히 증언했다. 반면, 해당 계획을 최초로 보고한 DAS 정보원(前 칼리 카르텔 조직원)은 1990년 이후 마약 밀매 혐의로 미국 교도소에 수감된 후, DAS 측이 사실을 부풀렸다고 주장하며, 에스코바르는 미국 정부에 대한 경고 목적으로 계획을 추진했을 뿐이고 부시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반군도 아닌 일개 마약왕이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테러 작전을 실행했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일이다. [14] 드라마 《 나르코스》에서는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이 미국의 보복을 우려해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을 꺼리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부시 암살 미수 이전에도 1988년 3월과 9월 보고타 주재 미국 대사관에 로켓 공격을 가한 전례가 있었다. 이후 1991년, 에스코바르의 최측근 시카리오인 단데니 무뇨스 모스케라(라 키카)가 뉴욕에서 체포되었는데, 그의 미국 파견 목적은 마이애미 연방법원의 마누엘 노리에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었던 카를로스 레더 등 전직 메데진 카르텔 조직원들을 암살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암살 방법은 법원 자체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카르텔의 주요 운송책인 경비행기 조종사 로베르트 스트리딩거(Robert Striedinger)는 에스코바르와 라 키카가 마이애미 연방법원뿐 아니라 DEA 샌디에이고 지부를 폭파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에스코바르는 미국 본토에서까지 테러를 저지르려 했다는 것이다. [15] 이미 같은 해 5월 30일에도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해 그 대신 4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에스코바르는 마사 마르케스를 제거하기 위해 무려 7번이나 암살을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고 애꿎은 행인들만 죽어나갔다. [16] 최고점 380명(1991년). 메데진과 칼리 카르텔뿐만 아니라 도시 게릴라, 극우 준군사조직, 사회정화집단 등 여러 범죄조직이 활동했고, 심지어 경찰조차도 사회정화 작업으로 노숙 아동을 살해하거나 빈민가의 10대 청소년들에게 잠재적 시카리오라는 낙인을 찍고 조직범죄와 관련이 없더라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등 죽음이 일상화된 상황이었다. 마약테러 시대보다 살인율이 낮았던 1986년 자료에서조차 주말에 최대 200명이 죽어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17] 많은 창작물에서 조명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에스코바르는 헤베필리아 내지 에페보필리아 성향이 있어 14~17세의 소녀들을 성적으로 선호했다. 그의 아내 마리아 빅토리아 에나오는 12살 때부터 에스코바르와 교제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에스코바르는 23세의 건장한 성인이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에나오의 나이는 불과 14세밖에 되지 않았고, 에스코바르는 그녀에게 낙태를 강요했다. 이 일은 에나오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뻔뻔스럽게도 에스코바르는 그녀가 10대 후반으로 성장하자 14~15살 된 소녀들과 간통했다. [18] 본래 메데진 갱단원들은 세력 싸움에서 보통 총기를 사용했지만, 준군사조직이 개입하고부터 피해자를 그냥 죽이지 않고 산 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눈에 철사를 박아넣고, 신체를 절단하는 등의 끔찍한 고문을 가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 참수된 머리를 '할로윈 장식으로 쓸 만한 선물'이라는 문구와 함께 피해자의 가족에게 보내는 만행도 벌어졌다. [19] 게릴라들이 소년병을 선호한 이유는 콜롬비아 법체계의 허점을 이용한 것으로, 소년범은 아무리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이들이 수감되는 소년보호시설은 성인 교도소보다도 보안이 취약해 탈옥이 빈번했다. 참고로 당시의 콜롬비아 교도소는 보안이 매우 열악해서 미국 고등학교만도 못하다고 평해졌다. [20] 당시 메데진 남성의 기대 수명은 22세에 불과했기에, '어차피 얼마 못 살고 죽을 텐데 돈이나 많이 벌어서 짧게라도 즐기자'는 사고방식이 팽배하기까지 했다. [21] 2012년에는 1425명이지만 23년 동안의 인플레이션율(특히 양적완화 정책이 이어진 2008년 이후의 인플레이션율)을 감안하면 당시의 Billionaire는 지금의 trillionaire 수준이다. [22] 평범한 체격인 나르코스와 달리 현실처럼 에스코바르가 후덕한 체격으로 나와서 싱크로율이 더 높다. [23] 노먼스 케이는 정확히는 에스코바르 소유 섬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메데인 카르텔 소속 에스코바르의 동업자였던 카를로스 레더와 그의 단짝 '엘 아메리카노' 조지 영이 처음 알아내서 거주민들을 죄다 내쫓아버리고 섬의 영주 노릇을 했고, 나중에 에스코바르도 같이 썼던 것에 가깝다. 섬 주인이 에스코바르 이야기에 기겁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24] 일종의 티켓 같은 것을 긁어서 등록하는데 이것은 1회용으로 한번 쓰면 그 티켓의 가치가 소멸된다. [25] 1991년에 콜롬비아 정부로 돌아왔다. [26] 하지만 증언에서 여러 불일치와 모순이 있었고, '에스코바르의 오른팔'이라는 언플과 달리 실제로는 조직에서 딱히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남을 웃기는 재주가 워낙 뛰어나 에스코바르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거라고. 서치 블락 작전 사령관 우고 아길라르는 2015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에서 벨라스케스에 대해 하는 말의 20% 정도만 진실인 심각한 거짓말쟁이라고 강조했으며 DEA 전직 요원 스티브 머피와 하비에르 페냐도 이 방송을 보고 구라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벨라스케스를 갈란 암살 사건, 아비앙카 항공기와 DAS 빌딩 폭파 사건의 주동자로 묘사하는 일부 언론 보도 또한 알고 보면 몹시 과장된 것으로, 세 사건 모두 실제 주범은 따로 있었고 그는 옆에서 거들기만 하는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심지어 카를로스 레더와 에스코바르의 아들조차도 그를 광대라고 깠다. [27] 물론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에게 욕을 잔뜩 들어처먹기는 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는 뽀빠이의 부하들이 던진 수류탄을 되던지려고 잡았으나 폭발하여 팔을 잃은 전직 여경과의 만남이 주선 되었는데 여경은 뽀빠이를 실제로 만나 보고는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음이 확실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뽀빠이가 말로는 죄송하다고 했으나 눈꼽만큼도 반성하는 태도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그 테러를 기획했는지 세세하게 자랑하기까지 한다. [28] 더군다나 진짜로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구스타보 페트로 시장이 유세를 나갔다가 일련의 암살 시도를 당한 후에 한 말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29] 더 그랜드 투어 시즌 3 콜롬비아 스페셜에서 에스코바르의 하마들이 등장한다. 제레미 클락슨이 파블로 뭐시기라는 사업가가 들여온 하마가 있다고 현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고 메데진에 방문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인증했다. [30] 미국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두목이었던 존 스탠파의 조카이기도 했다. [31] 제목은 ' 메데인 카르텔' [32] 에스코바르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콜롬비아에 짱박혔고 수에뇨는 멕시코 출신이다. [33] 에스코바르는 길바닥 마약상으로 시작, 엘 수에뇨는 13세에 시카리오(원래는 히트맨, 즉 청부 암살자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꼬붕을 의미한다. 한국 조폭으로 보았을 때 직접 힘쓰고 폭력을 저지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조폭 구성원 부류의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로 시작. [34] 에스코바르는 아무리 잘나 봤자 메데진 및 그 인근 지역만 완전히 지배, 장악 및 행정을 유지(운영)했지만 엘 수에뇨는 볼리비아 전토를 자신의 나와바리로 두는 차원이 다른 전국구급 스케일을 자랑한다. 거기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카르텔 영역까지 추가하면 말이다. [35] 에스코바르 이 양반은 전술했듯이 주민들 복지 창출 정도밖에 안 된다면 수에뇨는 아예 산타 무에르테 신앙을 이용한 종교적 교화까지 써먹고 있다. [36] 구스만 이 양반도 멕시코 출신이다. [37] 참고로 루비오는 에스코바르 말고도 카를로스 레더도 같이 오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