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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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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푸치아 공산당 총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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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제27대 총리
폴 포트
ប៉ុល ពត
파일:Pol_Pot.jpg
출생 1925년 5월 1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캄보디아 깜뽕톰성 쁘렉스버우
사망 1998년 4월 15일 (향년 72세)
캄보디아 왕국 우다르미언쩨이성 안롱뱅
재임기간 제27대 총리
1976년 4월 14일 ~ 1976년 9월 27일
제27대 총리
1976년 10월 25일 ~ 1979년 1월 7일
서명 파일:Pol_Pot_signature.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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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00025><colcolor=#fff> 본명 살롯 사(សាឡុត ស, Saloth Sar)
학력 프놈펜 기술고등학교
프랑스 무선공학학교
종교 불교 무종교 ( 무신론)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925~1953)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캄보디아 제1왕국(1953~1970)

[[크메르 공화국|]][[틀:국기|]][[틀:국기|]](1970~1975)

[[민주 캄푸치아|]][[틀:국기|]][[틀:국기|]](1975~1979)

[[캄푸치아 인민공화국|]][[틀:국기|]][[틀:국기|]](1979~1989)

[[캄보디아국|]][[틀:국기|]][[틀:국기|]](1989~1992)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틀:국기|]][[틀:국기|]](1992~1993)

[[캄보디아|]][[틀:국기|]][[틀:국기|]](1993~1998)
배우자 키에우 뽄나리
미어 손[1]
소속 정당 캄푸치아 공산당
신체 175cm }}}}}}}}}

1. 개요2. 명칭
2.1. 한글 표기
3. 생애
3.1. 유년 시절3.2. 공산주의 입문3.3. 베트남에서의 반미 투쟁3.4. 내전을 통한 집권3.5. 집권
3.5.1. 킬링필드3.5.2. 대외 관계
3.6. 몰락3.7. 최후
4. 평가5. 기타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
폴 포트가 '반동분자'들이라면 가족들까지 모조리 죽여야 한다며 남긴 말. 킬링필드의 잔혹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비서이자 정부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 학살자. 일명 '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불리는 학살을 주도한 인물로, 피비린내 나는 20세기 세계사를 넘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악의 학살자 중 한 명이자 캄보디아 전체를 문자 그대로 황폐화시킨 최악의 독재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가 세운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몰락한 지 반 세기 가까이 된 지금도 캄보디아는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의 어두운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2]

2. 명칭

본명은 살롯 사(សាឡុត ស, Saloth Sâr)로, 그가 사용한 이름 '폴 포트(ប៉ុល ពត, Pol Pot)'는 캄보디아 내전 당시인 1970년 6월 경부터 스스로를 가리켜 사용하기 시작한 통명이다. 본래 '폴(Pol)'이라는 짧은 별명으로 시작했다가 이후 권력을 확대하면서 '포트(Pot)'라는 이름이 붙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폴 포트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치적 잠재력'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Potentiel Politique( 영어 Political Potential에 대응)'에서 따 왔다는 설이 있다.

2.1. 한글 표기

그의 통명인 'Pol Pot'는 '폴 폿'으로 표기하는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매체에서 '폴 포트'로 굳어져 사용된다. 그러나 그의 본명 'Saloth Sâr'은 크메르어 한글 표기법이 고착되지 않은 이유 등으로 인해 일관적이지 않게 표기된다. 크메르어는 t 발음이 종성에 오면 한국어의 받침 소리와 같은 불파음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살로스', '살로트'보다는 '살롯'이 원어에 가깝다.

이원복 교수의 《 가로세로 세계사》에서는 그의 본명을 영어식으로 '샐로스 사르'라고 표기했다. 이외에도 살로트 소르, 썰롯 써, 썰로 써, 살로스 사르, 살롯 사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고 있다.

3. 생애

3.1. 유년 시절

훗날 폴 포트로 알려지는 사(ស)[3]는 1925년 5월 1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어촌 마을인 쁘렉스버우(ព្រែកស្បូវ, Prek Sbauv)[4]에서 아들 7명과 딸 2명 중 8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5] 살롯(សាឡុត)이라는 성은 나중에 붙은 것으로 어린 시절에는 성이 없었다. 아버지 역시 살롯 뻰으로 알려졌는데 이 이름은 훗날 프랑스가 식민정책으로 모든 크메르인들에게 성을 붙이면서 개명한 이름이다. 어머니의 개명 후 이름은 넴 속이다. 그의 가족은 조상 중에 중국계 혈통이 섞였지만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크메르인들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12헥타르의 땅과 물소 6마리를 소유했고, 약 20명으로 논을 경작했으며, 농지의 연평균 수확량은 20명 이상의 가족을 기를 수 있는 6t 정도였다고 할 정도로 그의 집안은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부농이었다. 형 중 한 명은 왕궁의 관방실 서기관이었으며 여기에 사촌누나 메악이 시소와트 모니봉(ស៊ីសុវត្ថិ មុនីវង្ស) 왕자[6]의 첩으로 들어갔다. 모니봉이 1927년에 왕위에 오르자 메악은 사실상 왕비가 되었고 1930년에는 이복누나 로응이 모니봉의 다른 후궁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그의 가문은 잘 사는 집안을 떠나 왕족와 연결된 지배 계층 집안이었던 덕분에 그는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7]을 보냈다. 훗날 이 인간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배경이다.

어찌되었든 아버지 살롯 뻰은 그에게 서양식 고등교육을 시키기로 마음먹고 맏형 수옹과 같이 프놈펜으로 보냈는데 캄보디아 전통대로 여섯 살 때 왕실 불교 사찰인 왓보뚬(វត្តបទុម)에 들어가 사미(沙彌)로 교육받은 뒤 1935년 9월 가톨릭계 학교인 미셰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은 형편없어서 원래 6년 과정인 미셰학교를 유급해 1943년에야 졸업했다. 그는 당시 캄보디아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인 시소와트 고등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낙방하였고 운 좋게도 막 신설된 깜뽕짬 근처의 프레아 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에도 성적은 제법 나아졌지만 바이올린과 축구, 농구를 좀 잘 한다는 것 말고는 크게 특출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예의 바르고 유머 감각이 있고 잘 웃는 데다가 '병아리 한 마리 해치지 못하는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고 한다.

그렇게 1947년에 그는 중학교 생활을 마친 뒤 예전에 떨어졌던 시소와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중학교 시절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정말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한다.[8] 어찌되었든 그는 운 좋게 입학은 했지만 1948년 진학시험에는 떨어졌고 공업학교인 프놈펜 기술학교에 목공반으로 편입했다. 근데 이때도 재수가 터졌는지 당시 프놈펜 기술 학교에서는 성적 우수자 3명을 프랑스 대학에 국비 유학생으로 보내 주었는데 그가 편입한 그 해에 5명으로 유학 대상이 늘어나면서 그는 과거 학교에서 쌓아둔 지식 등을 통해 1949년 여름에 국비 장학생에 선정돼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다.

1949년 10월 그는 프랑스 파리의 프랑스무선공학학교(École Française de Radioélectricité)[9]에 국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때 먼 친적이자 친분이 있던 시소와트 소모노퐁(ស៊ីសុវត្ថិ សុម៉ោនពង្)이 먼저 입학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살롯 사의 매형이자 선대 왕인 모니봉 왕의 조카로의 후궁인 누나 덕에 친분이 있었다. 소모노퐁의 도움으로 파리의 부촌인 아미요 가에서 지방장관의 아들들과 같이 하숙했다. 이후 소모노퐁의 권유로 크메르학생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엥 사리, 손 산, 키우 삼판 같은 훗날 크메르 루주 지도부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50년 11월 켕반삭의 집에서 하숙하게 되었고 1951년 중순쯤 공산당 세포조직인 마르크스클럽을 거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파리 시절 친구들 가운데 그와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훗날 크메르 루주에 의해 처형되는 서구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차이는 필명에서부터 나타났는데 다른 동료들이 ‘자유 크메르’나 ‘크메르 노동자’ 같은 이름을 선호한 데 반해 그는 ‘순수 캄보디아’ 같은 필명을 고집했다.

그는 세 차례나 낙제한 끝에 1953년에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군의 탄압에 맞서 캄보디아 독립 운동이 시작되던 상태였는데 그는 형제인 살롯 차이(សាឡុត ឆ័យ, Saloth Chhay)를 따라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폴 포트로 알려지게 된다. 30대 초반에 사립학교에서 역사, 지리, 프랑스어 문학,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했는데 교사로서의 그는 훌륭한 교사였다고 한다.

1956년에는 바칼로레아를 통과한 최초의 캄보디아 여성이었던 키에우 뽄나리(ខៀវ ពណ្ណារី, Khieu Ponnary, 1920–2003)와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3.2. 공산주의 입문

도시는 개조될 수 없지만 인간은 개조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 봐야 농사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 (People can be reformed, but not cities. By sweating to clear the land, sowing and harvesting crops, men will learn the real value of things.)[10]
필립 쇼트, 폴 포트 평전 pp.517

공산주의, 반외세 운동에 참여한 후 베트남의 반불 저항 운동에 동참하며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절 친구, 동료로서 이후 크메르 루주와 거리를 둔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잔혹한 성격이라든지 음흉한 면은 없었다고 하며 과묵하고 예의 바르며 수더분한 인상이었다고 하며 이 시절에는 조국을 생각하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구하자는 순수한 면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베트남인들과의 충돌과 갈등으로 베트남과 손잡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나서 한때 교사로 착실하게 지내던 적도 있지만 서서히 반왕정 활동을 하면서 시아누크 비밀경찰에게도 수배 대상이 되어 밀림으로 잠적했는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소수 원주민들과 친해지면서 이를 계기로 공동체 의식, 나아가 독자적인 공산주의 정신을 가진 나라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3.3. 베트남에서의 반미 투쟁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 와중에 소수 원주민들이 주역이 된 공산당 분파이자 '붉은 크메르'라는 의미를 지닌 조직인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 크메르어로 크마에 끄라함 · ខ្មែរក្រហម)의 창설에 기여했다. 나아가 북베트남 중국의 지원 아래 무력 저항으로 캄보디아 왕정에 맞섰다.

이 무렵 크메르 루주는 미미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으나 론 놀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에 맞서고자 여러 세력을 끌어들이려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 덕에 무기 지원 및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 베트콩을 지원하는 물자 운송로인 호치민 루트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났기 때문에 미군이 캄보디아에 마구잡이 폭격을 하면서 국경에서 많은 사망자를 내자 국경에 살던 많은 소수 원주민들이 분노하여 크메르 루주에 들어오면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는 결과를 낳았던 데다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이 폭격은 캄보디아 중부 및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국경 지대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프놈펜으로 몰려들게 했다. 론 놀 쿠데타 당시 65만명이던 프놈펜 시민은 1970년 말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1975년에는 25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폭격이 많은 사망자를 내자 국경에 살던 많은 소수 원주민들이 분노하여 크메르 루주에 들어오면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는 결과를 낳았던 데다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평전]

3.4. 내전을 통한 집권

우리는 어떤 외부 세력과도 연계되지 않은 깨끗한 승리를 거두었다. 민주 캄푸치아는 앞으로 고립을 택할 것이다.
1975년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킨 후 승리연설에서 한 연설

론 놀은 부하들에게 뭔가 얘기를 하면 부하들이 항상 졸 정도였고 반공주의를 내세워 미군이 일으키는 학살을 방조하고 군부에서도 학살 사건을 일으키며 민심이반을 더욱 부채질했다.[12] 이 상황에서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크메르 루주의 세력이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시아누크도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며 더욱 입지가 커졌다. 결국 1975년 4월 17일에 폴 포트가 론 놀 군부를 뒤엎으면서 크메르 루주 정권을 설립했다. 이른바 민주 캄푸치아의 탄생이었다. 론 놀은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론 놀의 수하들과 가족들을 잡아다 학살한 뒤 그냥 내다버리고[13] 공산당을 장악하고 공무원 및 군부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다음 반외세 및 반자본주의를 기조로 기존 '사회주의 국가'와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표명했으며 전 국민 머릿속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없애 공산주의로 무장된 투사로 기르려고 했다.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할 당시 깊은 산골의 농민 출신의 12~13세 소년들이 대부분이던 크메르 루주의 병사들은 '한 번도 돈을 본 적도 없었고, 자동차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으며' 돈에도 관심이 전혀 없어 미화 1만 달러가 든 보따리를 열어보고는 강물에 던져 버렸고 생선 통조림통의 생선 사진을 보고 생선을 죽이는 독약으로 착각하는 순진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워낙 무표정하고 조용한 나머지 프놈펜에 있던 기자 디트 프란은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하자 프놈펜에는 행복의 기운이 감돌아 젊은이들은 서로 얼싸안고 입을 맞췄으며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들은 크메르 루주의 프놈펜 점령이 '공포에 떨게 했던 로켓포 공격', '징병', '부패하고 지긋지긋한 이 정권'이 이제 끝났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프놈펜에 있는 모두에게 폴 포트가 세운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에서 1950, 60년대 시아누크 왕정과 70년대 초반 론 놀 정권 때보다 잔혹한 폭정과 피바람이 닥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3.5. 집권

파일:1200px-Nicolae_Ceaușescu_with_Pol_Pot.jpg
1978년 5월 28~30일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폴 포트[14]
우리는 그동안의 투쟁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모든 것을 단절하고 전통은 사라질 것이다. 화폐와 경제체제가 사라져 국가가 국민들의 모든 것을 돌보는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캄보디아 건설을 위해 수도에 있던 3백만의 국민을 농촌으로 분산시켰다. 이제 농촌은 혁명의 전초 기지가 될 것이며 인민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될 여러 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1974년의 폴 포트 (출처 : Grant Evans & Kelvin Rowley 共著, `Red Brotherhood at War`)
역사상 이전에 없었던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한 모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국이나 베트남 모델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이엥 사리 민주 캄푸치아 정부 부수상.
이제 우리는 공산주의를 실현할 백 퍼센트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중국을 앞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크메르 루주의 한 고위 간부

그와 크메르 루주는 모든 인민은 농경 산업에 집중해야만 하며 나아가 위험이 되는 모든 요소, 대중문화 및 퇴폐하고 위험한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은 필요 없다는 농업 중심의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 정립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특히 폴 포트 본인의 롤모델인 마오쩌둥이 시행한 정책인 대약진 운동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다 못해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시행했다. 애초에 대약진 운동과는 궤를 달리하던 것이, 어찌 됐든 도시와 농촌에서 사회주의적 조직과 증산을 노리던 대약진은 기본적으로 도농격차 극복을 목적으로 삼되 둘 모두의 발전을 도모하던 운동이었으며 동시기에 이루어지던 하방 운동 역시 도시민을 다짜고짜 수백 만 단위로 내려보내던 것이 아니라 기존 지식인의 교화 혹은 공산당원의 일종의 파견&지방 독려를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를 유토피아로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수백만 명을 죽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먼저 그는 인민들의 생활을 너무 안락하게 하거나 반동분자들을 더 강력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혁명은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자본주의의 산물인 도시로 보아 수도 프놈펜에 폭격이 떨어진다고 거짓말로 선동을 해 포함한 도시에 거주한 사람들[15]을 내쳤고 심지어 병원에 있던 중환자까지 내보낸 뒤 이들이 가는 길을 군인들로 감시하여 강제로 집단 농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강제로 이주당한 '새 사람'은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했다고 한다.

개인의 사유재산과 시장경제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이전에 있던 화폐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탄으로 폭파되고, 총 62개의 은행이 습격된 후 모든 화폐와 장부는 불태워졌으며, 상점 운영도 금지되어 모든 물건을 물물교환과 배급으로 얻는 원시적인 경제구조로 돌아간 데다 외국과의 무역[16]은 전부 소멸되었고, 국가의 모든 영토는 국가와 집단농장이 소유하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의 관점에서 볼 때 캄보디아는 '2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의 경제적 지배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이 결과 경제적 자유는 커녕 지금도 북한마냥 달러에 종속된 통화를 쓰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한 술 더떠 크메르 루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물물교환조차 금지시켰고 캄보디아 국민들이 가질 수 있던 '사유 재산'은 겨우 숟가락과 그릇 하나가 전부였다. 이렇게 캄보디아의 모든 국민들이 완전히 평등하게 가난해지면서 당시 캄보디아의 지니 계수는 약 0.15라는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수치가 나오게 되었다.[17] 한마디로 북한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 전국민을 가두어 버린 격이었으며 폴 포트 전기를 쓴 필립 쇼트(Philip Short, 1945–)의 말처럼 캄보디아에는 '현대 최초의 노예제 국가'가 열렸다.

크메르 루주는 이제까지의 2천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앙코르 왕국보다 더 멋진 미래를 설계한다는 명분으로 2천년 역사 동안 캄보디아에 전해진 모든 것들을 부인하였다. 이를 위해 캄보디아의 새해인 4월 중순을 맞아 1975년 4월을 모든 것이 무에서 시작된 0년으로 삼았는데 0년 이전 사회에 대한 기록된 기억이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책들을 대량으로 불사르기까지 했다.[18]

거기다가 크메르 루주는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국민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일상에서 쓰는 단어를 바꾸었는데 실제로 크메르 루주는 크메르어에 있던 화자의 계급과 사회적 지위를 정의하는 복잡한 체계를 모두 금지하고 사람들끼리는 단순히 "친구" 또는 "동지"를 의미하는 '밋(mitt)'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권장했으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단수형 "나"가 아닌 복수형 "우리"로 말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도 각각 '포' / '메'로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린이들은 자신의 친부를 "숙부" / "숙모"로 부르고 다른 사람을 "엄마" / "아빠"로 불러야 했다. 심지어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성별로 구분되었다.

그는 학교가 자본주의를 가르친다고 보아 전국에 있는 학교들을 모두 강제로 폐쇄시킨 것은 물론, 그나마 교육을 시킨다고 해도 문학과 과학 등 서구 문물을 가르치는 것은 엄금하면서 기본적인 문해력과 수학, 혁명적 가치를 교육하는 것만 가능해졌다. 물론 혁명적 가치 교육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없었는데 당시 캄보디아의 악명 높은 뚜올쓸라엥 교도소에는 7 이상을 세는 방법조차 모르던 16 ~ 18세 정도의 청소년 교도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캄보디아는 외국의 도움 하나 없이 자립해야 한다는 이유로 캄보디아의 국경은 육상과 해상 관계없이 모두 봉쇄되었으며, 이동수단 보유도 금지되었고[19] 국영 항공사였던 에어 캄보디아(Air Cambodge)도 완전히 폐쇄되었고[20] 정기 국제항공편도 완전히 없어졌으며, 심지어 외국 대사관도 모두 폐쇄되고 대사관 직원들도 모두 쫓겨나면서 캄보디아는 알바니아, 적도 기니 이상으로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육지의 섬'이 되었다. 이런 캄보디아에 대해 프리덤 하우스는 1978/1979년 세계의 자유 연감에서 대놓고 "1977/1978년 캄푸치아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폭정이었을 것이다."(In 1977 Kampuchea was perhaps the world's most complete tyranny.)라고 평가했다. 공식 보고서에서 대놓고 이러한 주관적인 표현을 썼을 정도였으니 폴 포트의 폭정의 극단성을 짐작할 만하다.[21]

그는 1976년 5월 13일에 민주 캄푸치아의 정부총리에 정식으로 오르게 되었다. 사실 이전까지 민주 캄푸치아의 정부총리는 시아누크 시절에 여러 번 총리를 역임한 뻰 눗(ប៉ែន នុត, Penn Nouth, 1908–1985)이었으나 실권은 전무하여 완전히 명목상의 총리에 불과했다. 물론 이 시기에 캄보디아의 공식적인 국가원수로 알려진 시아누크도 명목상의 국가원수에 불과했다.

크메르 루주 고위 수뇌부는 가족들을 전문성이 전혀 없는 요직에 앉히기까지 했는데 대표적으로 국방장관 손 센(Son Sen, 1930–1997)의 부인인 윤 얏(Yun Yat, 1934–1997)은 교육부 장관과 정보부 장관을 역임했고, 폴 포트의 아내 키우 폰나리의 여동생이자 부총리 이엥 사리의 부인이었던 이엥 티릿은 사회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이엥 사리의 딸 중 하나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병원의 원장이 된 데다 이엥 사리의 조카는 영어를 거의 못 했음에도 라디오 프놈펜의 영어 번역가가 되었다고 한다. 민주 캄푸치아 치하에는 폴 포트의 조카들 중 일부도 외무부에서 일했다고 한다.[22]

그는 집권 초기의 2년 동안 외부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베일 속의 인물로 지내다가 1977년 9월 27일에 프놈펜의 올림픽경기장에서 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23] 그가 이렇게 외부로의 노출을 꺼린 것은 비밀의 유지가 혁명의 기본원칙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폴 포트라는 가명은 1970년 7월부터 썼다고 하며 그 외에도 뿍(Pouk), 하이(Hay), 폴(Pol), 87, 형님, 99, 뻼(Pem) 등 수없이 많은 가명을 만들어서 그때그때 바꿔가며 활동했고 본인의 신상정보를 철저히 숨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짜 정보까지 만들어 흘리기도 했다. 실제로 폴 포트의 자기 은폐가 어찌나 철저했냐면 캄보디아의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폴 포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마저 '폴 포트'의 출생일과 본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캄보디아 공산당 총비서 살로트 사르'와 '폴 포트'가 동일 인물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심지어 그의 형과 누나마저 폴 포트의 직위를 1978년에 지방정부의 대형 식당에 남동생의 초상화가 걸린 것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24]

이 때문에 집권 시절 폴 포트 개인에 대한 우상화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폴 포트가 공식 석상에 나온 뒤에야 겨우 초상화와 반신상 등을 제작하라는 지시가 나왔으나 이를 선전용으로 쓰지는 않았다. 크메르 루주 정권의 우상화는 '엉까'로 불리는 정권 및 국가 자체를 대상으로 하였다.

3.5.1. 킬링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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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저는 삼촌의 순수했던 교사 시절이 그리워요.
폴 포트의 조카가 킬링필드에 경악한 뒤에 쓴 글. 그의 아버지인 폴 포트의 형은 동생을 원망하며 자살했다.

이렇게 크메르 루주 정권이 괴상한 정책을 시행하여 론 놀 정권의 폐단을 청산하고 나라를 정상으로 되돌릴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자 민심이 이반하여 시위와 반발이 이어졌는데 결국 그는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취지의 대학살극을 펼치게 되었고 그 결과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최소 1,300,000명 이상에 달하는 엄청난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것이 바로 홀로코스트, 르완다 학살과 함께 근현대사는 물론이고 인류 역사 속에서도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비극 중 하나로 꼽히며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훼손한 사건이라고 평가받는 킬링필드이다. 얼마나 끔찍한 학살이었는지는 항목 참조.

참고로 그는 킬링필드의 참극 속에서도 '캄보디아 혁명'이 "세계 혁명의 본보기"이며 "민주 캄푸치아는 혼란스러운 세계 한가운데 떠 있는 순결의 섬이자, 인류의 귀중한 본보기"라고 했으며 당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학술자료에 따르면 화폐 폐지와 시장 경제의 금지 등을 예로, "우리는 세계 다른 국가에서 한 번도 시행한 적 없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틀린 말은 절대 아니다, 그 덕분에 인류가 수백 년 동안 씨름해온 도시와 지방 간의 모순이 성공적으로 해소되고 있다"는 말을 넘어 무려 전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고 칭찬하면서 우리를 따라 배우고 있다고까지 적혀 있었다. 물론 이 발언들은 킬링필드의 참상들을 보면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망언 중의 망언에 불과하다. 거기다가 '라디오 프놈펜'은 '민주 캄푸치아가 제국주의를 무너뜨린다면 미국인을 비롯한 온 인류가 승리를 맛볼 것이다'며 허황된 자만심을 표출했다.

3.5.2. 대외 관계

집권 직후인 1975년 5월 12~15일에는 영해에서 미국 상선 마야게즈호를 나포했는데 이에 미국이 구출 작전을 벌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이를 마치 미국을 이겼다는 투로 홍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의 베트남인들까지 대거 학살 및 숙청하였고, 베트남을 선제 공격하도록 지시하여 베트남 마을 두 개를 박살내고 수많은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이때 먼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는 베트남에 대한 역사적 반목과 폴 포트의 깊은 불신으로 인한 피해망상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원래 역사적으로도 캄보디아인들은 베트남을 증오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악연이 깊은데 호찌민이 위치한 메콩강 일대 영토가 원래 캄보디아의 영토였지만 이를 참파를 병합한 베트남이 집어삼켰으며 베트남이 캄보디아의 내정에 간섭한것은 물론이고 캄보디아의 국체 전체를 집어삼킬 뻔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태국도 강성했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이러한 이유로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실제로 폴 포트는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들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25] 1978년 8월에는 베트남을 침공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숫자상으로 우리는 1인당 베트남인 30명을 죽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베트남인 30명이 죽을 때 우리는 한 명만 죽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 계산이면 베트남인 6천만을 죽이려면 우리는 군인 2백만만 있으면 됩니다. 사실 이 정도여도 우리는 충분합니다. 베트남의 인구는 사실 5천만 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인 5천만 명을 궤멸하기 위해 우리는 군인 2백만 명만 있으면 되니까 우리에게는 6백만 명의 인구가 남습니다. 이렇게 투쟁방침을 공식화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는 1대 30이라는 목표를 무조건 채워야 합니다.[26]

게다가 킬링필드 때문에 묻혔지만 론 놀 정권도 베트남 양민에 대한 학살을 자주 실행했다. 그럼에도 1979년에 크메르 루주 정권이 붕괴되고 캄보디아-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군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캄푸치아 구국통일민족전선 등 캄보디아의 반 크메르 루주 세력들에 의해 성립된 친베트남 정권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쫓겨난 크메르 루주 세력들의 반란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내내 캄보디아 국내에서 상당한 지지 세력을 유지했다는 것은 민족 간 반목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얼마나 크메르 루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그는 계속 베트남을 자극하던 것도 모자라 무력으로 베트남을 선제공격했는데 이에 분노한 베트남은 베트남군과 크메르 루주의 극좌 노선에 반대하던 반 크메르 루주 계열의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캄푸치아 구국통일민족전선 등과 연합하여 캄보디아를 침공하였다.

3.6.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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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 17일, 캄보디아 정글에서 ABC 뉴스 팀과 인터뷰하는 폴 포트
무슨 깡인지 모르겠으나 미군이 버리고 간 물자들을 흡수하고 전투경험도 잔뜩 쌓은 베트남을 선제공격하여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가 되려 역관광당하여 결국 1979년 1월 7일에 베트남군은 수도 프놈펜을 함락하면서 민주 캄푸치아 정권을 붕괴시켰고, 베트남군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반크메르 루주 공산 세력들의 주도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세워진다. 이때 정권을 잃고 쫓겨난 폴 포트와 키우 삼판 등 크메르 루주 세력들은 밀림으로 들어가 캄보디아에 주둔한 베트남군과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부군에 맞서 저항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한동안 폴 포트의 사망설까지 돌 정도였다.

한편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친베트남 정부를 수립하자 미국 중국은 베트남의 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 투사를 막기 위해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며 정권을 잃고 반군 단체로 전락한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이 때는 소련 견제와 헨리 키신저를 위시로 한 외교 정책에 의해 중국과 더 가까워서 친중적인 캄보디아를 밀어줬다. 미국의 이같은 개입은 지금까지도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이때의 지원으로 인해서인지 크메르 루주 반 병사그 M16 소총이나 56식 자동소총 같이 미국제 총기와 중국제 총기를 함께 사용하는 사진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조차 이를 비난할 자격도 없는 게 이들 스스로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베트남의 불법 괴뢰정부라고 보며 집권 시기 동안 잔혹한 학살과 탄압을 일삼던 크메르 루주를 캄보디아의 합법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글로 도망친 그는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 총지도자에서 물러났으나 실세로서 계속 막후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결국 부하들과 충돌했다. 1989년에 베트남군의 철수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자 시아누크의 민족통일전선(FUNCINPEC), 손 산의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F)과 함께 새 정부 구성을 논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옛날부터 함께 해 온 동료들보다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따 목(Ta Mok, 1926–2006)[27] 총참모장을 의지했고 1990년대에는 따 목이 폴 포트를 대신해서 간부들을 회의에 소집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베트남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던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권이 폴 포트 정권이 자행한 킬링필드의 실상을 전 세계 각국에 홍보하면서 폴 포트와 그 세력에 대한 비난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들을 지원해 준 미국과 중국도 같이 비난을 받으면서 점차 손을 떼기 시작한다. 결국 국제적인 여론과 UN의 개입으로 1993년에 1970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던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복위시키면서 무너졌던 캄보디아 왕국이 재성립되었고 이에 불복한 폴 포트와 그의 측근들이 복귀한 캄보디아 왕실에 반기를 들며 내전을 벌였기 때문에 폴 포트에 대한 비난은 더 커져 갔다.[28]

이런 장기전 아래 폴 포트파의 내분은 더욱 심해졌고, 1995년 부하들의 배신으로 폴 포트는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중국 원조를 착복한 배신자로 규탄받은 이엥 사리는 1996년 숙청에 겁을 먹어서 병사 4천명을 이끌고 캄보디아 왕국 정부군에게 투항했는데 폴 포트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여담으로 폴 포트는 권력에서 쫓겨난 지 얼마 안 있어 본인의 집권 무렵부터 조현병 망상장애에 시달려 온 전처 키우 폰나리와 이혼하고[29] 1985년 여름에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며 자기보다 37세나 어린 23세의 탄약 운반자 미어 손(មា ស៊ុន, Mea son, 1962–)과 재혼하고 다음해 봄에 미어 싯(Mea Sith, 1986–)이라는 이름의 딸을 가졌는데 폴 포트는 61세라는 비교적 고령에 자신이 처음으로 가진 자녀였던 미어 싯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30]

3.7.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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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월 4일(사망 약 3개월 전), 인터뷰에 응하는 폴 포트

그러던 중 1997년 6월 10일 밤에 폴 포트의 최측근이자 민주 캄푸치아의 국방부장인 손 센 일가가 참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손 센은 휴대전화로 캄보디아 정부의 훈 센과 은밀히 교섭을 했는데 폴 포트가 이 사실을 알고 배신자라 하여 부하들에게 손 센 일가를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같은 날에 손 센과 윤 얏, 다른 가족들 12명[31]을 모두 총살했다. 손 센은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으며, 이 날 총살된 시신들은 픽업 트럭으로 깔아뭉개졌다.

따 목은 폴 포트가 그의 오른팔이었던 손 센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위험하다고 생각해 1997년 7월 25일 돌연 손 센 일가 살해죄로 폴 포트를 구속해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종신형을 선고했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포트는 산 중턱에 있는 조잡한 헛간에 연금되었다. 당시 증언으로는 폴 포트의 후처와 경호원, 키우 삼판의 아내가 폴 포트의 시중을 들었지만 폴 포트는 이미 뇌졸중으로 왼쪽 몸이 마비되고, 심각한 심장 질환과 고혈압을 앓는 데다 암에 걸린 몸이었다고 한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폴 포트는 부하들의 질책에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기 반 년 전인 1997년 10월 16일에 미국인 기자 네이트 세이어(Nate Thayer, 1960–2023)와 한 인터뷰에서조차 그는 "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라,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는가. 내 양심은 깨끗하다.", "75~78년의 통치기간 중 우리의 운동이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이는 베트남 침공으로부터 캄보디아와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었으며 나는 투쟁을 수행한 것이다."라며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죄를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했다. 폴 포트 항복

게다가 폴 포트는 정적에 대한 학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주장했고, '오랜 적인 베트남의 지배에서 캄보디아를 구했다'는 말도 남겼다. 폴 포트에게 악명 높았던 '뚜올 슬렝'을 물어 보자 그 고문소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아사 등을 포함한 대량학살은 모두 베트남과 친베트남 정부 측이 주도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다만 폴 포트의 축출을 야기했던 손 센 가족 살해 사건에 대해 폴 포트는 자신이 처형을 명령했다고 시인했으나 "손 센과 그 가족만의 처단을 명령했을 뿐 어린애들까지 죽이라고 하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자료

그러던 중 1998년 3월 케 팍 픽 체앙 등이 크메르 루주 잔당에서 이탈하였다. 동년 4월에는 빌 클린턴 행정부가 폴 포트를 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할 방침을 밝혔고 캄보디아 정부군의 공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간부 중에는 폴 포트를 미국에 인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폴 포트는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상태였는데 크메르 루주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는 중이었던 탓에 태국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던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따 목이 폴 포트를 태국 난민캠프를 경유해서 미국에 넘길 요량으로 위장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폴 포트는 대단히 쇠약해져 있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폴 포트는 1998년 4월 16일에 구금장소로 이동할 것이 예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예정 날짜로부터 하루 전인 1998년 4월 15일에 폴 포트는 잠을 자는 중에 심부전으로 급사해 버렸다.[32] 어쩌면 잔혹하게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빠져 죽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망 당시 정황이 석연치 않아 온갖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전부 폴 포트에게 떠넘기려던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인터뷰를 하러 찾아갔다가 그가 죽은 직후 부인과 대화한 세이어는 폴 포트 본인의 부탁으로 부인이 발륨 클로로퀸 혼합물에 의한 음독 자살을 도와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신은 얼음과 포름알데히드로 보존돼 기자들이 장례식을 보러 올 수 있도록 했다. 태국 법의학 전문가들은 지문과 치과 사진, 머리카락 샘플 등을 채취했다. 한 미국 특파원이 신원 확인을 위해 치아 하나를 제거하기를 원했다. 많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폴 포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옛 지도자와 연루될까 두려워 모른체 했는데 옛 부하들은 외딴 시골에 폴 포트의 시체를 들고 가 폴 포트의 가족들과 옛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찌어가 보는 앞에서 폴 포트의 장례식을 불교풍으로 치렀다. 이때 폴 포트의 부하들도 폴 포트를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게 되었는지 옛 상관의 시신을 동네에 굴러다니던 폐타이어와 쓰레기와 함께 화장해 버렸다. 여러모로 쓰레기에 걸맞는 장례식. 이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장례식이 놀랄 정도로 불결했다며 놀랐는데 실제로 폴 포트를 가택연금시킨 따 목은 캄보디아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폴은 이제 끝났다. 권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소의 배설물에 불과하다. 아니, 폴은 소의 배설물만도 못하다. 적어도 소의 배설물은 거름으로는 쓸 수 있으니.

따 목은 크메르 루주의 집권 전부터 민간인 학살을 명령, 자행하며 도합 10만 명 이상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직접적으로 살상 행위에 가담하여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는데 그렇게 잔혹한 사람마저도 이런 말을 남겼을 정도니 폴 포트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망을 잃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다만 따 목은 상술한 네이트 테이어와의 인터뷰를 할 시점에는 어느 정도 심정이 바뀌었는지 "폴 포트가 인류에 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미국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라며 어느 정도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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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트의 장례식 2007년 7월 3일에 촬영된 폴 포트의 묘지[33]

장례식에 참여한 폴 포트의 후처와 딸은 폴 포트에 대해 '세상이 뭐라고 말하든, 우리에게 있어서 그는 상냥한 남편이며, 아버지였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폴 포트의 묘지는 매장 한참 후에야 세워졌고 원래는 건물도 세워져 있었다지만 누군가가 파괴했다고 전해진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폴 포트가 죽자 그의 만행을 직접 겪은 캄보디아 내부 여론은 그야말로 "천수 누리게 해 준 것만으로도 화딱지 난다." 수준으로 험악했으며[34] 그 어느 누구도 추모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킬링필드를 경험한 캄보디아인들은 지금까지도 폴 포트의 무덤에 오줌을 싸거나 침을 뱉는 등 모욕적인 처우를 하고 있으며 폴 포트의 폴 자만 나와도 '역적', '조국을 파괴한 쓰레기'라는 욕을 퍼붓는다고 한다.[35][36]

폴 포트의 사망 이후 크메르 루주 시대는 막을 내렸다. 크메르 루주 라디오 방송은 중단되었고 직원들은 태국 난민 캠프로 피신했다. 키우 삼판 등을 비롯한 크메루 루주 잔당은 내전에서 패배하고 1998년 12월 누온 찌어와 키우 삼판은 투항했으며, 1999년 3월 따 목 총참모장이 생포되면서 결국 모든 크메르 루주의 지도부는 체포되었고, 2007년부터 이엥 사리, 누온 체아, 키우 삼판, 이엥 티릿, 깡 겍 이우 캄보디아법원특별법정(ECCC)에 회부되었으며, 재판 중에 사망한 이엥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3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고, 누온 찌어와 깡 겍 이우가 각각 2019년/2020년에 옥사하면서 당시의 크메르 루주 최고위층은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 한 명만 살아있는 셈이다.

한편, 폴 포트의 미망인은 1998년 5월 폴 포트의 비서였던 텝 쿤날(Tep Khunnal)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간 후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폴 포트의 딸은 사 파차타(Sar Patchata)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딴 후 2014년에 시 비체카(Sy Vicheka)라는 크메르인 남성과 결혼한 후 캄보디아 북서부의 반띠 메안체이(Banteay Meanchey) 지방에서 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파차타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위해 자주 기도하고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에 아버지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다만 그녀는 아버지가 퇴진한 후에 태어나 아버지의 악행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37]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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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하네. 폴 포트...
이오시프 스탈린: 기다리고 있었소. 동무...
폴 포트: 고맙소 동지들...
지옥에서 불타는 학살 지도자 - 1998년 폴 포트 사망 후에 나온 만평[38]
폴 포트라는 사람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악마 그 이상의 악마에요.[39]- 위살봇[40] , 벌거벗은 세계사의 캄보디아인 패널
폴 포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이자 독재자, 악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물론 근현대사에 잔혹한 독재자는 폴 포트를 제외하고도 무수히 많았는데 이들 중에서는 위 만평에 등장한 히틀러와 스탈린은 물론이고 김씨 3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마시아스 응게마, 이디 아민 정도가 폴 포트와 함께 동렬로 취급받는 극악한 독재자들이지만 이들마저 폴 포트에 비해서는 그나마 잔혹성의 수위가 낮거나 참작 여지가 존재한다.[41][42] 특히나 폴 포트가 집권한 197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집권한 시기로 꼽히는데,[43] 폴 포트는 그들 중에서도 늘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으며 이전 세대의 독재자이자 인류 역대 최악의 독재자인 히틀러, 스탈린과 비견되거나 그 이상으로 평가받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독재자였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선술한 인물들 전원이 인권을 억압하며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을 벌이거나 국가 경제를 후퇴시키는 등의 악행들을 저질러 저들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 지난 현재까지도 널리 회자되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들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진영, 시대 불문 홀로코스트, 르완다 학살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의 근간을 뒤흔든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잔혹하고 야만적인 참극 중 하나인 킬링필드를 일으키고, 문화대혁명[44]보다 심하게 나라 자체를 본인만의 잘못된 사상으로 고의적으로 초토화시켰다는 점에서 폴 포트는 이들 중에서도 특히 최악의 독재자로 거론되기에 절대 부족하지 않다.

당장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금지어가 된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를 6년간 전쟁 속으로 밀어넣어 1700만 명이 넘는 인명을 학살했지만 적어도 그가 죽이려고 한 대상은 지식인이 아니었고, 나치는 오히려 아리아인으로 분류되는 독일인들의 가치를 인류의 상징이자 미래로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독일인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내 굉장히 비인간적인 대우를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홀로코스트의 수준도 폴 포트의 킬링필드 앞에서는 명함을 못 내밀 정도였다. 물론 히틀러와 나치도 유대인, 슬라브인, 집시, 동성애자 등에 대해서 총살과 가스를 사용하여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는데 나치의 학살은 효율성을 계산한 기계적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이 충격적이라면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의 학살은 최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고안한 원시적 수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히틀러의 학살이 특정 민족의 존재를 말살시켜야 한다는 겉보기에도 악질적인 목표 하에서 이루어진 거라면 폴 포트의 학살은 모두가 평등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목표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어느 의미에서는 히틀러보다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킬링필드가 홀로코스트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의 근간을 뒤흔들었다고 평가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학살도 학살이었지만 전국민을 고향에서 강제 이주시켜 한 명도 빠짐없이 집단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게 한 것과 사상 주입을 쉽게 하기 위해 가족이란 '구체제'를 없애고 부모와 자식은 서로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모든 캄보디아 사람들을 전부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자유의사 전혀 없이 국가의 강요로 강제결혼을 강행하며 사실상 ' 가족'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여느 폭군, 독재자들은 물론 상술된 독재자들도(심지어 응게마조차!) 상상도 못했을 극악무도하기 그지없는 정책을 시행했으니 당연히 인류사 최악의 독재자이자 악인으로 평가된다.

물론 폴 포트의 집권 전후로 캄보디아에서는 미국의 폭격, 론 놀의 실정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캄보디아 내전, 베트남의 침공과 이로 인한 혼란상 등으로 죽은 사람도 수없이 많지만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는 그걸 떠나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로 불리는 대참사이자 비극으로 꼽혀오고 있으며, 캄보디아의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일말의 옹호나 참작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잔혹한 학살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나 폴 포트가 비판받는 원인 중 하나는 잔혹한 학살과 더불어 잘못된 신념으로 나라를 고의적으로 붕괴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잔재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교육, 문화, 경제, 외교 등 모든 사회, 인재 인프라의 씨를 박살내다 못해 뿌리까지 뽑아 버려 캄보디아를 극단적으로 후퇴시켰다. 결국 폴 포트의 만행은 집권 기간 내내 국민은 물론 남은 국민의 미래까지 짓밟아 버려 크메르 루주 몰락으로부터 44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흐른 2023년까지 1인당 GDP가 2000달러를 밑돌았던 최빈국으로 만들었다.[45]

얼마나 폴 포트의 만행이 잔혹했는지 크메르 루주 정권을 붕괴시킨 베트남은 물론이고 내전을 통해 공산당 정권이 성립된 캄보디아의 다른 이웃나라 라오스와 한때 폴 포트 정권을 지지했던 중국, 북한 같은 제2세계 국가들조차도 크메르 루주의 실상을 보고는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원을 끊거나 피에 굶주린 살인마 취급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46][47] 매국노 중에서도 그 궤를 달리하는 악질 매국노였던[48] 훈 센 전 캄보디아 총리[49]조차 배반한 국가가 민주 캄푸치아였다는 것 하나 덕분에 매국노 소리를 전혀 듣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오히려 성웅 소리 들어도 모자라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제1세계는 물론이고 제2세계 제3세계 사회주의/ 공산주의 성향 인사들조차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를 옹호하지 않는 경우가 다수다. '폴 포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넘어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과 공산주의 국가를 침공했다는 점을 내세워 '폴 포트는 사실 반공주의자다'라고까지 주장하며 폴 포트가 공산주의자를 자처했고 제2세계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는 사람까지 일부 존재한다. 폴 포트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반응 다시 말해 다른 공산주의 독재자들의 악행들은 어떻게든 목적은 좋았거나 서방권이 과장한 거라고 주장할 근거가 조금이나마 있지만 애초에 폴 포트의 악행들은 진영논리만으로 두둔하거나 정당화하기에는 잔혹성과 피해 모두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고 주체사상과도 같은 자신만의 극단주의적 사이비 이론으로 대학살극을 펼치고 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으니 당연히 폴 포트의 변호를 아예 포기하거나 그 악행을 비판하게 된 것이다.[50] 반미 성향 인사들도 미국을 비판할 때 근거로 드는 것 중 하나가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는 것이며 폴 포트의 학살이 미국의 반공 전략에 따라 과장되었다고 두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킬링필드 과장설을 주장하며 킬링필드 희생자로 알려진 유골들은 대다수가 미국의 폭격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을 대충 묻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여론도 있으나 당연히 그런 여론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이러한 폴 포트의 대학살은 불과 4년 동안 한 것임에도 이 정도니 폴 포트가 더 오래 집권했다면 킬링필드의 학살 규모가 수십, 수백 배로 불어났을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극단적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입장에서 보아도 사유재산 불인정[51]과 전체적이고 폭압적인 가족주의, 우생학과 같은 극우적인 정책과 강령들을 내세워 자신만의 극우 혼합주의적인 사이비 사상을 만들고, 그 사이비 사상에 따라 인민들을 학살했으며 베트남에 의해 축출되자 오히려 서방,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비판한다. 실제로 폴 포트는 미국과 손을 잡는 기회주의적 모습과 호화로운 생활, 덩샤오핑의 수정주의를 옹호했던 등의 이유로 아비마엘 구스만을 추종하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비판의 대상 중 하나가 되고 있다. #

학살과 경제 파괴에 묻힌 감이 크지만 정권 유지 능력도 리즈 트러스[52]도 울고 갈 최악 그 자체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수도 없이 미국도 이긴 나라인 베트남을 도발했다가 분노한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며 정권을 뱃겼으며, 때문에 집권한 기간은 고작 4년도 되지 않는다. 정권 유지 능력이 필수적이다시피 한 독재자의 특성을 감안하면 폴 포트는 아예 독재자로서의 기본도 안 된 인간이었던 셈이다.[53]

놀랍게도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히는 몇몇 극단적인 캄보디아 민족주의자들은 폴 포트의 베트남인 학살은 잘 한 일이었으며 폴 포트는 베트남의 침략으로부터 캄보디아를 방어하려고 했던 국가적 영웅이라고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폴 포트를 쉴드치려는 시도가 있다.

5. 기타

나는 손 센 국방부장 부인 등과 함께 건물 1층에 살고 남편(누온 찌어), 폴 포트, 이엥 사리, 키우 삼판이 3층에 살고 있었다. 근무 장소이기도 하고 숙박 장소이기도 했다. 폴 포트는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잠자는 곳을 때때로 바꾸고는 했다.

내가 맡은 일은 이들에게 하루 세 번의 식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밥 이외에 반찬은 두 종류뿐이고 간부 식사도 결코 사치하지 않도록 정해져 있었다.[54]남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식사를 나를 때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최고 간부 집단 식사뿐 아니라 외국에서 손님이 와 요리사가 요리할 때 입회하는 일도 했다. 요리사가 독을 넣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들을 노린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출처

6. 관련 문서



[1] 키에우와 이혼 후 재혼한 아내. 전처 키에우 뽄나리와는 자식을 두지 못했고 미어 손과는 딸 하나만 두었다. 관련 기사. [2] 그나마 2024년에 최빈국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장하다고 할 수 있다. [3] '하얀, 창백한'이라는 뜻으로 '상대적으로 밝은 피부 안색'을 나타낸다고 한다. [4] 현 캄퐁톰 성. [5] 폴 포트의 출생일이 1928년 3월 19일이라고 서술된 자료들도 있는데 이는 당시 캄보디아인들이 학교 입학 연령에 맞춰 자녀의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6] 당시 캄보디아를 식민 통치하던 프랑스가 명목상으로 내세운 국왕으로 한국으로 치면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이었던 영친왕과 유사하다. 참고로 모니봉 왕의 외손자이자 부계로 육촌 재종조손, 후임자가 다름아닌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다. [7] 이 시절에는 후궁인 이복누나와 자주 만났는데 어린 소년이라 금남구역인 후궁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첫 경험도 16살 시절에 다른 후궁들과 한 것이었다고 한다. [8] 정말 아이러니한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 가운데 론 논이 있었는데 훗날 폴 포트 때문에 축출당하는 캄보디아 대통령 론 놀의 친형이다. [9] 지금의 EFREI [10] 정작 실제로 폴 포트는 어릴 적에 학교에 다녀서 농사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와 비슷하게 고난의 행군 시기에 스위스에서 편안한 유학생활을 했던 김정은도 " 혁명학원 학생들을 귀동자, 귀동녀처럼 고스란히 키우는것보다는 현실속에서 단련시키면서 강쇠처럼 굳세진 참된 혁명인재들로 키우는것이 중요합니다."라는 교시를 남겼다. [평전] ‘폴 포트 평전’, 필립 쇼트 지음, 이혜선 옮김, 실천문학사 [12] 때문에 축출 직전이던 1975년 3월에는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이 선정한 세계 최악의 정치 지도자 5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13] 쿠데타 직후에만 론 놀 정권의 간부들 전부와 고위직들까지 합해 총 700명이 살해당했다. 벌거벗은 세계사 캄보디아 패널 위살봇에 의하면 당시 자신의 조부도 론 놀 정권에서 고위직이었기 때문에 저때 처형당했다고 한다. [14] 왼쪽부터 엘레나 차우셰스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폴 포트, 민주 캄푸치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서열 5위) 키우 삼판이다. 이 때 차우셰스쿠 부부는 민주 캄푸치아 정부의 초청으로 캄보디아에 온 것이었다. [15] 그렇게 도시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크메르어로 '새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의 경계 대상이 되어 숲, 고지대, 늪처럼 가장 척박한 곳에서 가장 고강도의 육체 노동을 하며 가장 비참한 대우를 받아야 했던 건 물론 집중적으로 후술할 숙청과 고문의 대상이 되었다. 반대로 원래부터 농촌에 살던 '옛 사람'이라는 계층은 비교적으로 정치적 탄압이 적었다. [16] 다만 오래 전부터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예외적으로 부분적인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때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과 무기들이 거래되었는데 무기는 베트남과의 전쟁에 사용되었다. [17] 다만 후술되어 있다시피 지도부는 잘먹고 잘살았으니 실질적으로는 1에 한없이 가까운 수치였을지도 모른다. [18] 이 때문에 크메르 루주 집권 기간 동안 크메르어로 쓰여진 작품의 80%가 파괴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 [19] 다만 사람들을 재배치하는 용도와 무기를 이송하는 용도로 트럭을 쓰는 것만은 허용되었으며 지역 단위 서기장 등 고위층들에게는 이 지침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20] 에어 캄보디아는 캄보디아의 혼란상이 잦아든 후인 무려 1994년에야 로얄 에어 캄보디아(Royal Air Cambodge)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으나 2001년에 파산했는데 이 항공사의 후신이 2009년에 세워진 캄보디아 앙코르 항공이다. [21] 사실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집권하던 적도 기니도 민주 캄푸치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극악무도한 정권이었지만 극단적인 쇄국 정책으로 인한 자료 부족 때문에 프리덤 하우스도 적도 기니의 자유도를 실제 수준보다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다. 하다못해 알바니아에 대한 평가조차 당시 적도 기니에 대해 수집한 평가보다는 구체적이었을 정도. [22] 다만 적어도 윤 얏은 프놈펜에 있던 국립 교육학 연구소의 교수 출신이었으며, 이엥 티릿은 소르본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캄보디아인 최초로 영문학 학위를 취득했던 인물이었고, 폴 포트의 부인 키우 폰나리 역시 캄보디아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캄보디아 여성인 것을 넘어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물론 이들은 당대 캄보디아 여성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수준의 엄청난 엘리트였다. [23] 이 날에 크메르 루주가 선전하던 '엉까'의 정체가 캄푸치아 공산당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참고로 이틀 뒤에 이 연설이 라디오로 중계될 때 폴 포트는 베이징으로 집권 기간 동안 유일한 공식 방문을 했다. [24] 그러나 이 비밀주의는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는데 베트남군의 침입 당시에도 상당수의 국토가 점령당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통보하지 않아 대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이는 베트남군의 진공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하지만 이 덕분에 당시 증거물인 뚜올쓸라엥 수용소와 각종 기록들이 고스란히 베트남군에게 넘어가 이들의 만행이 전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다. [25] 다만 이는 키우 삼판이 한 발언이라는 설도 있다. [26] 이와 비슷하게 북한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2017년 9월 27일 실린 동태관 논설 <악마의 제국을 불사르라>에서 " 조선인민은 한사람의 정신력만으로도 양키의 2,500만을 공포에 떨게 할수 있다. 조선사람 2,500만이면 미국의 괴멸은 물론 세계의 모든 원쑤무리들을 멸망시킬수 있다."고 폴 포트의 주장마저 양호해 보일 수준의 극단적인 주장을 했다. 사실 로동신문 논설은 최고지도자의 생각과 의도가 반영된 것이고, 로동신문 논설 작성에도 최고지도자가 직접적으로 개입한다고 하니 로동신문 논설은 사실상 지도자 본인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슨 이 주장도 김정은 본인의 생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 [27] 본명은 칫 초은(Chhit Choeun)으로, 민주 캄푸치아 시절에 캄보디아군의 지도자였으며 말기에는 공산당 제2부비서 겸 서열 3위였다. 다른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과는 달리 소작농 가문 출신이었고, 1970년경에 캄보디아 내전 과정에서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28] 심지어 세계 문화유산인 앙코르 와트도 이 내전으로 큰 수난을 당했으며 당시 총격전으로 인해 총탄 자국과 총알이 석조 조각에 박혔던 흔적도 현재까지 남아 있다. [29] 키우 폰나리는 1970년대 초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폴 포트는 그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다. [30] 정작 폴 포트는 집권 당시 중앙위원회 회합에서 어머니와 자식이 너무 긴밀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최악의 망언을 남겼다. 심지어 국민들의 자유 결혼과 가족끼리의 애정 표현을 모조리 금지시키고 자신들의 사상을 더 쉽게 주입하기 위해 캄보디아의 가족들을 연령과 성별로 구분해 강제로 다른 지역으로 흩어놓아 이산가족을 만들어 놨다. [31] 미성년자 9명 포함. 이들 중에는 젖먹이 손자도 있었다고 한다. [32] 이원복 교수 학습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서는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걸로 묘사되어 있으나 작가의 창작으로 보인다. 다만 죽기 전까지 끝까지 자신이 정당했다고 믿었던 그의 모습을 보면 나름 납득되는 해석이긴 하다. [33] 위에는 '폴 포트는 여기서 화장되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34] 벌거벗은 세계사에 나온 위살봇에 의하면 폴 포트의 편안한 죽음을 듣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다들 원통해 했다고 하며 심지어 사망하기 전 캄보디아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에게 폴 포트를 사형시키라는 상소문을 매년 올렸을 정도였다. [35] 여담으로 뚜올쓸라엥 박물관에는 관련자 사진들 중 하나로 폴 포트 사진이 걸려 있는데 이미 전시되기 전부터 눈 부분이 파여 있는 상태였던 걸 알 수 있다. 실제 모습 잘 보면 사진 속 눈이 파여 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 일부가 찢어져 있고 얼굴 부분에 의도적인 낙서가 가득 차 있다. [36] 이 글의 마지막 댓글에서 킬링필드 피해자 유족의 폴 포트에 대한 증오를 실감할 수 있다. 물론 폴 포트의 존재를 아는 모든 인류도 이 사람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37] 어떻게 보면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22년 전에 죽어서 아들의 악행과 아무런 연관이 없고 오히려 본인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지라 동정받는 김형직 내지 아버지가 처형될 당시 고작 7살이라 아버지의 만행과는 전혀 관련이 없이 살았던 마시아스 응게마의 딸 모니카와 비슷한 케이스인 셈이다. [38] 이외에도 퀘벡 출신의 만평가 고로트(Garnotte)는 폴 포트의 죽음으로 인해 죽음의 신이 초과 근무를 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만평을 그렸다. [39] 그의 악행을 직접적으로 겪을 일 자체도 없었고 글로만 접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인류의 역적" "마귀랑 비교하려고 해도 마귀가 불쌍해 보이고, 쓰레기라고 하면 쓰레기한테 미안해지는 물건"으로 취급되는 폴 포트인데 그 악행을 몸소 겪었던 캄보디아인들에게 폴 포트가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정 이해가 안 간다면 한국인, 특히 광주 사람이 전두환에 대한 감정이 어떨지 생각해 보자. 전두환의 그런 잔혹한 짓을 일방적으로, 전국적으로, 몇 천, 몇 만 배의 규모로 저질렀으니 더 말 할 것도 없다. [40] 어머니 역시 킬링필드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으며 본인도 초등학생 때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가 벌인 내전으로 피난을 가는 경험을 했다. [41] 과거의 전통주의적 견해, 즉 강압적으로 실시된 경제개발 정책을 일종의 학살로 간주하는 입장 중에는 스탈린을 지나치게 악마화했다는 수정주의적 입장도 존재한다. 일례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제노사이드였다는 기존의 입장을 반박하는 식이다. 당시 스탈린이 추진한 급격한 공업화는 부상하던 파시즘 세력으로부터의 위기감과 서방의 러시아 내전 개입으로 인한 군사적 경계심이 작용한 것도 없잖아 있었고 실제로 독소전쟁이 발발한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런 조치가 타당성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당시 소련의 경제 성장이 매우 효과적으로 일어나기도 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스탈린이 비판받는 점은 그러한 조치가 매우 강압적이고 인민에 대한 존중의식이 없이 이루어진 점이지, 그래야 할 이유는 있었던 셈이다. [42] 히틀러는 세계 최초 동물보호법을 제정했고 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올림픽 개최, 산림 녹화 등을 하였기 때문에 당시 국제적 이미지도 좋았으며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 전에는 간체자를 만들어 중국의 문맹률을 낮추고 1911년 청나라 멸망 이래 불안정했던 중국의 혼란을 종식시켰다. 김일성은 항일운동에 가담하면서 조선인들에게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처럼 와전되어 알려지기도 했으며, 마시아스 응게마와 이디 아민은 진짜로 정신이상자였다는 정상참작 요소라도 있다. 그러나 폴 포트는 ( 김정일, 김정은과 비슷하게) 이런 극미량의 업적과 정상참작 요소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다. [43] 당시 유신 체제 박정희도 저들과 비교하면 당대에 흔해빠진 평범한 개도국 독재자 A에 불과했을 정도다. [44] 그 문화대혁명조차 나라의 경제&인재 기반 자체를 완전히 뿌리뽑지는 않았다. 물론 소프트 파워는 완전히 뿌리뽑았지만. 때문에 중국은 현 시점에서도 국력 대비 소프트 파워가 매우 빈약한 판이다. [45] 물론 2024년에는 1인당 GDP가 2628달러를 기록해서 최빈국에서 탈출했지만 역으로 보면 폴 포트가 남긴 경제적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려면 무려 45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는 말이다. [46] 그나마 중국은 마오쩌둥 시기보다 온건하고 서방 친화적이었으며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덩샤오핑 집권기었고 라오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이해가 확고한 데다 비교적 이성적이었던 쑤파누웡, 까이쏜 폼위한 같은 좌파 지도자들이 지휘하고 있었던 좌파 게릴라 단체 파테트라오의 주도로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국가였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지만 북한은 주체사상으로 크메르 루주만큼이나 잔인하게 국민들을 쥐어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이다. 왕조식 3대 세습과 막장스러운 폐쇄주의적 통치로 악명 높은 그 북한마저 경악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크메르 루주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집단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47] 사실 폴 포트가 집권하던 1970년대는 김일성 집권기이자 북한이 그나마 경제적으로 잘 살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의 북한과 캄보디아를 비교하면 말 그대로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상락원 그 자체였다. 게다가 2020년대의 북한조차도 당시의 캄보디아에 비교하면 천국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지경이니 말 다했다. [48] 그도 그럴 것이, 고국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던 인간이 고국의 최대 적대국에 빌붙어 이들이 고국을 침략해 사실상의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일조하고 그 대가로 40년 가까이 최고권력자가 되어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본인도 부귀영화를 잃지 않았으니 전후 맥락을 다 빼고 보면 악질 매국노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49] 크메르 루주 출신이나 크메르 루주가 너무 무도했던지라 친베트남 반군 쪽에 붙게 되었다. [50] 킬링필드의 참극을 발굴하고 세계에 널리 알린 나라가 바로 미국을 이긴 북베트남을 이어받은 나라인 베트남이니 극좌 진영에서 서방권이 공산권을 비방하기 위해 캄보디아 공산정권의 학살을 과장 날조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51]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하는 것이 사회주의이고 자본주의에서의 사유재산은 분명 지양되지만 개인적 소유는 사회주의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다. 예컨대 생필품(물론 사회화는 되겠지만)은 각 가정과 개인이 가지는 식이다. 사유재산은 공산주의에 가야만 소멸되는 것이고, 그로 차근차근 가는 도정이 사회주의인 것이다. 폴 포트의 행동은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사람은 어차피 다 죽으니까' 논리로 삶을 끊는 것과 같은 얼토당토않은 행위인 셈이다. [52] 정책 실패 때문에 2달도 안 되어 쫓겨난 영국 총리. [53] 심지어 폴 포트 이상의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유명한 막장 독재자인 마시아스 응게마도 집권 기간 내내 온갖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자기 경호원들의 월급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등 독재자로서의 기본 소양도 지키지 못했던 와중에도 자기 정권만큼은 무려 11년 동안이나 유지했다. [54] 후술될 내용에 의하면 정작 폴 포트 본인은 집권 기간 동안 온갖 호화 식단을 누렸다. 본인을 제외한 자기 밑의 부하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했던 듯. [55] 폴 포트의 집권 후에는 캄보디아 대사관의 정치 연락관으로 베이징에 파견되어 폴 포트의 모든 사람들과 직접 통신을 담당했다. 참고로 그녀의 남편 피치 체앙(Pich Cheang)은 동시기에 베이징 주재 대사로 일했다. [56] 실제로 그녀의 말에 따르면 폴 포트는 반대되는 말을 함으로써 농담을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약간 짠 음식을 먹고 그 음식이 묽다고 말하기도 했다. [57] 참고로 그녀는 폴 포트의 범죄에 대해서는 "잘못된 일은 그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었고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모두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확고한 지혜를 추구하기 위해 갓난아기까지 남겨두고 머리와 팔에 합류하는 절대적인 결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라며 두둔했다. 그녀는 2020년 3월 4일에 위암으로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58] 애초에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생 출신이다. [59] 신 도라에몽 1기 6화의 한 장면이다. [60] Sinn Sisamouth, 1932?~1976?. 생전에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캄보디아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싱어송라이터이며 짧은 생애 동안 1천여곡을 작곡할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참고로 그는 크메르 공화국을 지지했는데 이 때문인지 크메르 루주 정권 때 행방불명되었다. [61] 이 때문인지 태국어 버전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