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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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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92년

앙코르
អង្
2008년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ប្រាសាទព្រះវិហារ​របស់​
2017년

삼보르 프레이 쿡 사원,
고대 이샤나푸라의 고고 유적
សំបូរព្រៃគុ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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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ngkor-Wat-temple-complex-Camb.webp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gkor-Wat-from-the-air.jpg
앙코르와트의 전경.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앙코르
영어 Angkor
프랑스어 Angkor
국가·위치 캄보디아 씨엠립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2년
등재기준 (i)[1], (ii)[2], (iii)[3], (iv)[4]
지정번호 668

파일:앙코르 와트.jpg

1. 개요2. 역사3. 구조
3.1. 건축3.2. 부조
4. 투어5. 사건사고6. 여담7.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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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អង្គរវត្ត (ʼɑngkɔɔ vŏət) ( 크메르어)
Angkor Wat ( 영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불교 성지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사원. 본래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고, 완공된 후 30년은 힌두교 사원이었으나, 그 이후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캄보디아 씨엠립성의 성도 씨엠립에서 북쪽으로 약 4 km 정도 떨어진 곳,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 톰(Angkor Thom)에서는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앙코르(Angkor)는 크메르어(語)로 왕조를 뜻하며 와트(Wat)는 사원을 뜻하기 때문에 왕조의 사원이라고도 한다. 가장 높은 3층의 중앙 성소까지의 높이는 총 65m이고 계단이 매우 가파른 것이 특징이다.[5]

이 유적이 위대한 이유는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는 물론이고 오래 전에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음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고도의 정교한 건축기술에 있다. 또한 사람의 손에서 방치되는 역사를 겪으며 덩굴과 나무 등이 사원의 벽을 뚫고 자라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건축물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며, 문명의 무상함이라는 불교적 메세지와 인간과 자연이 큰 시간 단위에서 결국 어우러지는 우주의 질서를 몸소 나타낸다. 앙코르 와트 건물은 동향으로 지었지만, 건물의 축을 정동쪽이 아니라 시계 방향으로 0.5도 틀었다. 이는 실수가 아니다. 주야평분시(晝夜平分時), 즉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 무렵 서쪽 통로에서 일출을 보면, 땅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사원의 중앙 탑 꼭대기를 지나가는 듯이 보인다. 만약 건물을 정동향으로 지었다면 태양이 떠오르면서 남쪽 하늘로 움직이기 때문에 중앙탑과 태양이 틀어져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직접 보면 장관이다. 중세 크메르인들의 고도의 지식과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

2. 역사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제국의 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1122년부터 1150년까지 28년에 걸쳐 세웠다. 불교 성지로 알려진 지금과는 달리 사실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사원인데, 당시 크메르 제국의 국교가 힌두교였기 때문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이만한 거대한 사원은 시바 신에게 봉헌하던 전통을 깨고 앙코르와트를 질서의 신 비슈누에게 바쳤다. 비록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와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6] 앙코르와트는 완공된 이래로 국왕 직속의 핵심사원이자 크메르 제국의 가장 중요한 사원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완공되고 30년도 되지 않은 1177년, 크메르 제국은 인근의 참족에게 공격을 당해 치명타를 입었다. 이때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도 이때 참족에게 약탈당해서 크메르 제국은 나라가 휘청거려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나마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가 다시 제국을 회복하고 수도를 앙코르 톰으로 옮겨 천도하면서 크메르 제국은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꿨는데, 그동안 힌두 신들을 그렇게 믿어왔는데도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으니 힌두교 신앙심이 완전히 떨어져버렸던 것.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불교로 바꾸면서 앙코르와트에 있던 각종 힌두교 부조와 석상들도 상당수 불상으로 대체했다.

안타깝게도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 이후로 크메르 제국은 끝없이 쇠락했다. 인근의 태국, 베트남 등에 치이면서 고대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허구한 날 공격당하는 약소국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앙코르에 세운 각종 사원들과 건축물들도 모조리 잊혔고, 앙코르와트 역시 17세기 말 이래로는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워낙 면적이 엄청난 건축물이라 아예 잊히진 않았고, 일본 순례자들이 찾아와 작은 초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7] 이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가톨릭 수도자 안토니오 다 마달레나도 1586년에 이 곳을 찾아와 방명록을 남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앙코르와트가 아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파일:754da2022a7dc1265308346a9b686d43.jpg
앙리 무오의 여행록 속 삽화.

물론 앙코르와트가 완전히 사람들에게 잊히진 않았어도 어디까지나 일부 호기심 많은 탐험가나 여행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다. 동남아인들을 제외하면 세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코르와트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이렇게 방치된 앙코르와트를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알린 사람이 그 유명한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61)이다.[8] 프랑스 출신 박물학자 앙리 무오는 1860년에 캄보디아를 탐험하는 과정에서 앙코르와트를 방문했고, 그가 쓴 여행록이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앙코르와트는 마침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앙리 무오는 '이 신전의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신전이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비견될 정도'라고 극찬하면서 앙코르와트를 유럽인들에게 소개했는데, 이 여행록이 이색적인 신세계에 관심이 많던 당대 유럽인들의 입맛에 딱 맞았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는 얼마 지나지 않은 1863년 캄보디아를 보호령, 즉 사실상 식민지로 삼았다. 의도치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의 영토가 넒어지기도 했는데, 유적에 관심이 많던 프랑스가 크메르 유적들을 모조리 손에 넣기 위해서 당시 태국령이던 씨엠립과 바탐방, 시소폰 일대를 침공해서 합병한 후 캄보디아령에 붙여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프랑스인들의 앙코르 유적 사랑은 계속돼서 1931년에는 앙코르와트의 모형을 파리 만국박람회에 통째로 전시하기도 했고, 수많은 학자들이 앙코르와트를 방문해 연구와 발굴작업을 계속했다. 그동안 앙코르와트에 무성하던 초목과 나무들을 모두 뜯어내고 보존 처리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인들이 앙코르와트에 좋은 일만 한 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선 동남아시아인들이 이렇게 위대한 건축물을 지었을 리 없다며 고대 로마의 후예들이 남겼다든지 심지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후예가 남아 만들었다든지 하는 별별 억지 주장이 다 나왔다. 심지어 처음 이 유적을 발견한 앙리 무오도 캄보디아인들이 이런 유적을 만들었을 리 없다고 의심했을 정도. 그리고 프랑스는 여기 있는 문화재들을 상당수 약탈해 뜯어가 루브르 박물관에 두기도 했는데, 심지어 훗날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작가 앙드레 말로도 이곳의 문화재를 훔쳐간 전력이 있었는지라 이 사실이 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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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앙코르와트 옆을 행군하는 크메르 루주. 앙코르와트를 점거한 크메르 루주의 모습.
캄보디아는 1953년 11월 9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캄보디아 내전의 발발, 크메르 루주라는 최악의 살인집단의 득세 등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앙코르와트 역시 좋은 꼴은 못 봤다. 특히 문화재 보존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크메르 루주가 그나마 앙코르와트에 남아있던 목조 건축물들을 모조리 잘라 장작으로 썼고,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군 사이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곳곳에 총탄이 박히는 등 앙코르와트는 이때 꽤나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게다가 앙코르와트는 오히려 전쟁이 끝난 80년대와 90년대에 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유물에 눈이 돌아간 태국인 도굴꾼들이 전후 캄보디아의 치안이 허술해진 틈을 타 앙코르와트에서 뜯어갈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뜯어가버렸기 때문. 심지어 기껏 복원해놓은 부분까지 도둑에게 훔쳐졌다.

199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전쟁과 약탈로 인해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소실, 전체 유적지의 70%가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사원 근처의 왕궁에 있는 유물 천여 점이 도난 및 파괴되는 등 유적지의 훼손이 매우 심각하다. 실제로 해자의 다리와 벽에 기관총으로 생긴 홈을 볼 수 있을 정도. 이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는 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전인 1982년에 유적지 복구를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9] 다만 2000년대 들어서 캄보디아의 치안이 그럭저럭 안정화되고 난 이후, 앙코르와트가 사실상 캄보디아의 상징이기 때문에 조금씩 복구와 유지 작업에 시동을 거는 중이다.

3. 구조

파일:99b264d592dfb16144f7b7709c177205.jpg

3.1.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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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으로 들어가는 석조 다리. 다리를 지나면 마주하는 서쪽의 중앙 고푸람.
앙코르와트는 전체적으로 해자와 외벽, 그리고 사원 본체로 구성된다.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해자는 폭이 무려 190 m, 둘레는 5 km에 이르고 깊이는 대략 4 m 정도로 꽤나 깊다. 해자는 원래 사원으로 상징되는 탈속적인 공간과 세속적인 현세를 구분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는데, 의도한 바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앙코르 와트의 기반을 단단하게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사원 아래의 지하수 수면이 너무 높아지지 않도록 조절해 사원 기단이 물러지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 뿐만 아니라 몇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주변의 열대우림이 사원을 완전히 집어삼키지 않도록 1차적으로 차단해주기도 했다.

해자를 건너 앙코르와트로 들어가는 다리는 해자 서쪽에 있다.[10] 석판으로 포장된 다리에는 석조 사자상이 양 옆을 지키고 있다. 원래는 이 다리 앞에도 건물과 문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졌다고 추정된다. 동쪽에도 들어가는 다리가 있지만 사실상 흙길이 깔린 제방에 더 가깝다. 다리를 따라 해자를 건너가면 고푸람[11]이 나온다. 해자에서 약 30 m 정도 떨어진 곳에 앙코르와트의 외벽과 고푸람이 있는데, 정문이 있었던 서쪽의 고푸람이 가장 거대하다. 서쪽에는 윗부분이 살짝 무너진 고푸람이 총 3개 있는데 개중에 중앙에 있는 고푸람이 가장 크다. 중앙 고푸람 내부에는 팔이 여러개 달린 비슈누 석상이 있다. 앙코르와트가 힌두 사원이던 시절에는 아마 중앙 탑에 안치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신상이다.

앙코르와트 외벽은 그 길이가 무려 가로 1024 m, 세로 802 m에 달하며 높이는 약 4.5 m 정도로 꽤 높다랗다. 외벽은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바깥쪽 부분에는 사각기둥들이 열을 지어 서있고 안쪽 부분은 벽으로 막혀있다. 기둥들 사이의 천장은 연꽃으로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있으며 벽면에는 웃는 압사라[12]의 모습이 조각되었다. 특히 이 서쪽 고푸람에는 앙코르와트에서 유일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고 유명한 압사라 부조가 있다. 어쨌든 외벽은 총 82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둘러싸는데, 원래는 이 외벽 안에 빽빽하게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야 목조로 만든 궁전과 건물들이 죄다 썩어서 돌로 만든 가장 중앙의 사원만 남았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외벽 안에 발 디딜 틈도 없이 건축물들이 들어섰다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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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푸람을 통과하면 나오는 석조 보도. 석조 보도와 양 옆의 도서관의 모습.
서쪽의 고푸람을 통과하면[13] 석조 보도를 따라서 쭉 중앙 사원으로 향하면 된다. 이 보도의 길이는 무려 350 m에 달하고 옆에 나가의 모습을 조각한 난간들이 조각난 채로 세워져 있다. 보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양 옆에는 '도서관'이 한 채씩 있다. 동서남북을 맞추어 문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앙코르 와트의 전성기 때는 도서관이 아니라 제사용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서관 뒷편에는 인공 연못이 한 개씩 팠는데, 가로 50 m, 세로 65 m로 꽤나 널찍하며 왼편 연못은 물이 차있으나 오른편 연못은 상대적으로 말라있다. 당시에는 사원에 들어가기 전 이 곳에서 몸을 씻거나 제사용기들을 닦곤 했다. 사원 바로 앞의 십자형 테라스는 '영광의 테라스'라고 부르는데 나가로 조각된 난간과 사자상들이 있다.

보도를 걷다보면 마침내 사원 본건물에 도착할 수 있다. 중앙 사원 본체는 크게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갈수록 높아지며 맨 마지막 3층에 중앙 탑이 위치하는 구조이다.[14] 모든 층에는 사면의 정중앙에 고푸람들이 1개씩 세워져 있으며, 특히 2층과 3층에는 중앙뿐만 아니라 모서리 부분에도 고푸람이 1개씩 세워져 있다. 사원이 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세워졌기에 사원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동쪽으로 치우친 구조다. 또한 왕이 들어올 때 가장 잘 보이는 부분이 정문과 가까운 서쪽 부분이었던 터라 서쪽 부분에 가장 정교하고 자세한 부조들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또한 왕이 주로 사용했던 서쪽의 계단들이 다른 방향의 계단보다 상대적으로 경사가 낮게 만들어진 것도 특징이다.

사람들이 앙코르와트의 겉모습만 보고 채석장에서 채굴한 돌로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겉부분만 회색 사암을 사용해 만들었고 그 안은 적갈색의 라테라이트 벽돌로 채워넣은 구조이다. 라테라이트는 산화철을 함유하고 있는 적갈색 토양으로 땅 속에서는 부드럽지만 땅 밖에서는 철분 때문에 습기가 말라 굳으면서 굉장히 단단해진다. 가공하기는 쉽고 건물을 지은 나중에는 단단해지는 특성 때문에 아열대 지방에서는 라테라이트를 이용한 경우가 많았고, 앙코르와트 역시 라테라이트를 이용해서 지었다. 앙코르와트 유적을 잘 보면 일단 라테라이트 벽돌을 쌓은 다음 겉에는 사암 덩어리를 깎아서 덮었다. 물론 라테라이트를 쌓지 않고 통째로 사암으로 만든 부분도 일부 존재한다.

1층 회랑은 가로 215 m, 세로 187 m이다. 2층과 3층 회랑과는 달리 모서리 부분에 고푸람 대신 작은 파빌리온이 하나씩 있다. 회랑은 사원 외부로 뚫렸고 사각 기둥들이 회랑을 받친다. 1층을 2층과 연결하는 통로가 서쪽에 있는 십자 회랑인데, 이를 '1천 신령들의 홀(Hall of Thousand Gods)'라고 부른다. 순례자들이 이 곳에 불상이나 부조를 새겼으나 싸그리 약탈당해서 현재는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특히 1천 신령들의 홀에는 순례객들의 선행에 대한 글들이 유난히 많은데, 대부분은 크메르어지만 일부 버마어 일본어도 있다. 십자 회랑 사이의 공간에는 한때 물이 차 있었다고 추측된다. 남북쪽의 회랑은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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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신령들의 홀.[15] 2층에서 올려다본 3층의 모습. 3층의 중앙 성소.
참고로 앙코르 와트에는 층과 층 사이마다 '중간단'이라는 독특한 구조가 있다. 주 목적은 1층과 2층을 완만한 경사로 연결시켜 사람들이 더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워낙 경사가 가파라서 자칫하면 제대로 오르지도 못할 수 있었기 때문. 중간단을 거쳐 1층에서 올라가면 2층 회랑이 나온다. 2층 회랑은 가로 115 m, 세로 100 m이며, 메루산( 수미산)을 둘러싼 거대한 바다를 상징한다. 2층 회랑에는 압사라들이 대략 4명 정도 짝을 이루어 춤을 추는 모습을 새겼다. 사면에 3단의 계단이 있어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이 2층과 3층 사이 계단들은 경사가 높기로 소문난 앙코르와트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매우 경사가 가파르다.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

3층 회랑은 2층에서부터의 높이가 약 40 m에 달할 정도로 그 경사가 극히 가파르게 올라간다.[16] 정사각형 모양의 단에는 모서리에 각각 2개씩, 중앙에 1개씩 총 12개 계단이 있는데, 각 계단에는 단이 약 40여 개 정도가 있고, 이 경사가 70도 정도로 매우 가파를 뿐만 아니라 폭도 보통 계단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이러한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취하는데, 크메르인들이 사원을 지을 때 바로 이와 같은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17]

3층의 정사각형 모양 기단 둘레는 60 m이고, 모서리 쪽 계단이 올라오는 부분에 고푸람들이 1개씩, 그리고 정중앙에 가장 거대한 고푸람이 1개가 있어 총 5개 고푸람이 있다. 2열 기둥으로 장식된 지붕 덮인 회랑이 외벽 역할을 하는데, 이 회랑이 십자형 통로와 연결되어 자연스레 중앙의 성소로 향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맨 중앙에 있는 고푸람은 그 높이가 지면에서 65m나 되는데, 특히 크메르 특유의 그 솟구치는 듯한 장식 때문에 더더욱 그 높이가 높아 보인다. 본디 이 성소에는 비슈누 상이 있었으나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비슈누가 쫓겨나고 그 자리에 불상이 놓였다. 허나 원래 있던 불상은 진작에 도굴당해 사라졌다. 그나마 1934년에 고고학자 조지 투르베가 중앙 성소 아래에서 모래와 물이 찬 비밀 구덩이를 발견했지만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고.[18] 현재는 이 중앙 성소 한가운데에 새로 불상을 안치해 놓았다.

3.2.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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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에서 복잡한 건축 양식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빽빽하게 새겨놓은 부조들이다. 대부분 힌두교 신화나 불교 설화의 내용들을 1층 회랑벽에 새겨놓은 것들인데, 정말 공백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벽에 그득그득 부조를 새겨서 보고 있다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19] 위의 그림은 부조의 위치와 그 내용을 설명한 그림이다. 왼쪽이 서쪽이고 오른쪽이 동쪽인데,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데바 아수라의 전투', ' 크리슈나의 승리', ' 비슈누의 승리', ' 우유 바다 휘젓기',[20] '천당과 지옥',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렬', ' 쿠룩셰트라 전투', '랑카의 전투' 순서다. 개중 가장 유명한 건 '우유 바다 휘젓기', '천당과 지옥',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렬', '랑카의 전투' 정도다.

앙코르와트 회랑에는 위처럼 수많은 부조들이 새겨져있으나 개중 가장 볼만한 부조는 역시나 '우유 바다 휘젓기'다. 신과 악마들이 만다라 산을 꽁꽁 둘러싼 뱀의 왕 바수키의 머리와 꼬리를 잡은 채 맷돌처럼 천 년 동안 우유 바다를 휘저었다는 내용인데, 이 과정에서 불사의 영약 암리타와 신들의 무희 압사라, 그리고 락슈미 여신 등 수많은 존재들이 탄생했다는 일종의 창세신화다. 더 자세한 내용은 우유 바다 휘젓기 문서 참조. 어쨌든 앙코르와트의 우유 바다 휘젓기 부조는 대단히 알아보기가 쉬운데, 일단 중심이 되는 신 비슈누, 남쪽의 악마왕 라바나, 그리고 북쪽의 하누만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92명의 아수라들이 바수키의 머리 부분을 잡고 있고, 88명의 데바들이 바수키의 꼬리를 잡고있다.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렬' 역시 유명한 편이다. 앙코르와트를 창건한 수리야바르만 2세 대왕의 모습을 새겨놓은 부조인데, 보통 관람객들도 한 번쯤은 쓱 둘러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부조의 길이는 약 93.6m, 위치는 남쪽 회랑의 서편에 있다. 이 부조의 내용은 크메르의 대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공주와 신하, 그리고 군사들을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행진한다는 내용이다. 곁에는 그에 충성하는 왕 18명이 따로 새겨졌다. 참고로 당시 동남아에서는 왕이 쓴 일산과 부채가 많을수록 그 왕의 권위가 높음을 상징했는데, 당시 동남아 전체를 호령하던 수리야바르만 2세 위에는 무려 일산 14개와 부채 5개가 올라가 있다.[21] 이 부조에는 시암 용병들을 묘사한 부분이 훼손되어 있는데, 학계에선 아마 태국인들의 짓이 아닐까 추정한다.[22]
파일:churning-of-the-sea-of-milk-gallery-at-angkor-wat-temple-siem-reap-cambodia-CAVF79159.jpg 파일:cambodia_angkorwat_11_8_2014_101_SW_1_rs_wm_suryavarman_procession_suryavarman_court.jpg
우유 바다 휘젓기 부조.[23] 앙코르와트 부조 중 가장 유명하다. 1층 회랑에 새겨진 수리야바르만 2세의 모습.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부조는 길이 66m 정도의 '천당과 지옥' 부조다. 라마야나나 다른 힌두 신화를 몰라도, 착한 사람은 천국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 간다는 권선징악적 이야기라서 부조를 보고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둥 27개에 천국 모습 37개와 지옥의 모습 32개를 자세히 새겼는데, 보통 사람들은 지옥의 모습을 더 흥미롭게 본다. 부조 자체는 3단으로 나누어 맨 위가 천국, 중간이 지옥의 재판관 야마의 법정, 하단에는 지옥이다. 검은 물소에 올라앉은 야마는 18개의 팔로 법정에 들어온 사람들을 심판하고, 선한 사람들은 가루다가 끄는 전차를 탄다. 반대로 지옥행 인간들은 야마의 관리들에 의해 지옥으로 내던져진다. 지옥의 부조에서는 다리가 찢기거나, 산 채로 맷돌에 갈리거나, 코에 밧줄이 꿰이는 등 온갖 유린을 당하는 모습이 자세히 새겨졌다.[24]

'랑카의 전투' 부조도 볼만하다. 자세한 내용은 라마야나 문서를 읽으면 더 잘 이해되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 랑카의 전투는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클라이맥스이자 최종 결전의 장이다. 선한 영웅 라마와 그의 동료 하누만이 함께 랑카 섬에서 사악한 악마 라바나를 물리치는 내용이다. 기둥 19개에 장면 총 19개를 묘사했는데, 보통 라마와 원숭이 군대 쪽이 왼쪽에, 라바나의 악마 군대가 오른쪽에 있다. 원숭이 군대는 무기를 거의 쓰지 않고 이빨로 물어뜯거나 눈을 찌르는 모습이고 악마 군대는 정교한 갑주를 차려입은 모습이다. 서로 싸우는 모습도 가지각색인데, 이빨로 목을 물어뜯는 원숭이, 발로 가슴을 누르고 위에서 의기양양해하는 원숭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악마 병사의 모습 등 자세히 보면 온갖 군상들의 모습이 다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 부조는 '쿠룩셰트라 전투', 혹은 '쿠루 평원의 전투'로 불리는 부조다. 라마야나와 함께 힌두 서사시의 양대산맥인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내용인데, 전체적인 내용은 판다바 형제들과 카우라바 형제들이 왕위를 놓고 싸운다는 이야기다. 판다바 형제들이 선한 쪽이고 카우라바 형제들이 악한 쪽이다. 당연히 선한 판다바 형제들이 크리슈나 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한다. 이 부조 역시 마찬가지로 전투 도중 활을 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 온 몸에 수많은 화살이 꽂힌 채로 죽어가며 유언을 남기는 영웅 비슈마의 모습 등 볼만한 장면들이 많다. 다만 부조의 전반적인 모습이 위의 '랑카의 전투'와 상당히 겹치기 때문에 관광객들 중 시간이 없거나 빠르게 둘러보는 사람들의 경우 이 쿠루 평원의 전투 부조는 안 보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4. 투어

패키지 투어라면 여행사에서 일정이 만들어져 있어 따라서 소화하면 되기에 자유여행자들의 경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자유여행자들의 경우엔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앙코르 유적군을 묶어서 투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크게 스몰 투어와 그랜드 투어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지 여행사를 통해 조인해서 가거나, 툭툭 기사를 고용해서 코스를 도는 방법, 한국어가 가능한 캄보디아인 가이드 고용, 현지 한국업체의 한국인 투어상품, 이렇게 보통 4가지를 많이 이용한다.

5. 사건사고

2003년에는 태국의 여배우인 수와난 콘잉이 "앙코르와트는 태국의 유물.", "캄보디아에서 앙코르와트를 태국에 반환하지 않으면 캄보디아 공연을 하지 않겠다."[30]라고 발언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성난 캄보디아 군중들이 주 캄보디아 태국 대사관과 태국 음식점, 그리고 태국계 상점 등을 습격하고 태국의 국기를 찢거나 불태우기도 하였다. 실종자까지 발생하자, 열받은 태국이 국경지대에 전면 경계령까지 내리며 캄보디아 씨엠립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자국 업체의 전기를 끊어버렸다. 결국 캄보디아 정부가 사과를 하게 된다. #

2012년에는 인도의 한 힌두교 재단이 앙코르 와트 복제를 추진하려고 하자, 캄보디아 정부가 이에 발끈한 적도 있었다. 재단 측에선 "앙코르와트는 비슈누를 모시던 힌두교 사원이었으나 훗날 불교 사찰[31]로 사용된 것이다."라며 재차 사업의지를 밝혔다. # 이후로는 후속 보도가 나오지 않고 있다.

6. 여담

파일:Equinox-at-Angkor-Wat.jpg
앙코르와트의 춘분 일출의 모습.

파일:unfinished-apsaras-angkor-wat-22980503.jpg
앙코르 석공들이 만들다만 압사라의 모습. 훼손당한게 아니라 애초부터 미완성으로 남은 조각이다.
앙코르와트에 스테고사우루스와 닮아 보이는 동물의 부조가 있어서 한동안 떡밥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지어질 때 사람들이 스테고사우루스에 대해 알 리가 없을테니 아마 하마 같은 동물을 표현한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있는 골판처럼 보이는 것도 동물의 일부분이 아닌 넓은 꽃잎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그래도 스테고사우르스처럼 보이는 이 부조의 존재로 인해 고대왕자 공룡킹 TVA같은 공룡 배틀물에서는 앙코르와트가 스테고사우루스의 출몰장소나 홈그라운드로 나왔다.

7. 매체에서의 등장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경사가 급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이고 때로는 앞의 계단을 잡고 기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올라야 한다. 즉 신 앞에서 겸손하라는 의미로, 다른 힌두교 사원도 가파르다. 경제적인 이유로 계단 폭을 줄이고 간격을 넓힘으로써 석재를 절약하는 효과도 노렸다고 한다. [6] 앙코르와트가 완공되기 몇 년 전에 죽었다고 추정한다. 그래서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은 이후에 만들어진 부조들에는 약간 성의없게 마감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7] 일본인 순례자들은 앙코르와트를 불경에서 석가모니가 오래 머울고 설법했다고 설명한 사찰 '기원정사'라고 생각했다. 이 곳에 살던 일본 순례자가 크메르 신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남긴 비석도 남아 있다. [8] 따라서 앙리 무오가 앙코르와트를 발견했다는 말은 틀렸다. 캄보디아인들은 앙코르와트란 장대한 건축물이 어디 있는지는 잘 알았다. 앙리 무오는 단지 앙코르와트를 서양에 처음 알렸을 따름이다. 우리로 따지면 어느 백인 탐험가가 1800년대에 조선을 여행한 뒤 '내가 석굴암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9] 거대한 규모는 확실히 경이롭지만 천장을 떠받치는 구조가 그리 정교한 편은 아니라 자체적으로도 조금씩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있다. 예를 들자면 아치, 볼트, 과 같은 천장 구조가 미흡한 편인 것. 아치를 만들고 싶었지만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의견도 있다. [10] 서쪽은 힌두교에서 비슈누를 상징하는 방향이다. [11] 힌두교 사원의 독특한 탑문 양식. [12] 힌두교와 불교의 여신들이자 천상의 무희. 물을 관장하며 굉장히 아름다운 존재들이라고 한다. [13] 고푸람의 크기가 코끼리가 통과해도 될 정도로 크다고 해서 '코끼리 문'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14] 어떤 학자들은 이 층들이 왕, 브라흐마, 달, 비슈누에게 봉헌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5] 저 계단으로 내려가는 공간에 물이 가득 차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16] 워낙 경사가 가파르고 안전사고의 위험이 커서 3층에는 한 번에 100명밖에 못 올라간다. 3층을 구경하는 데에는 딱히 시간제한이 없어서 만약 3층으로 올라가고 싶은데 사람이 꽉꽉 찼다면 누군가 내려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17] 참고로 크메르 제국 시기 앙코르와트의 3층은 오직 최고위 승려들과 국왕만 올라갈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평민들은 고작 해봐야 1층 회랑까지만 들렀다 가는 게 끝이었다. [18] 다만 이 곳에서 도굴꾼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황금 잎사귀 유물을 발굴하는 성과를 남겼다고 한다. [19] 다만 왕이 드나들던 서쪽 벽과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기 전에 만들어진 부조들은 정말 정교하게 새겨져있는데,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고 난 후 새겨진 부조들은 약간씩 대충 마감한 곳들도 보인다. [20] 이름이 생소해 보이지만 사실 힌두교의 창세신화다. [21] 다른 왕들은 모두 일산 8~9개 남짓만 썼다. [22] 이때까지만 해도 크메르, 곧 지금의 캄보디아가 동남아의 패왕국이었고 반대로 현 태국의 전신인 시암은 크메르의 속국 신세였다. 이 걸 그대로 새겨놓은 부조를 태국인들이 보기 싫어해서 일부러 훼손했다는 것. [23] 해당 인물은 뱀의 왕 바수키의 머리 부분을 잡고 우유 바다를 휘젓고 있는 악마와 왕 라바나다. [24] 이 외에도 자세히 찾아보면 재미있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야마의 법정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람들이 쭉 줄을 서서 기다리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어떤 아이가 어머니에게 안아달라고 조르는 장면까지 묘사해놓았다. [25] 인면상으로 유명한 바이욘사원과 코끼리 테라스, 문둥왕의 테라스. [26] 툼 레이더의 촬영지로 유명. [27] 보통 그랜드 투어 $15, 스몰투어 $13이다. [28] 보통 그랜드 투어 $18, 스몰투어 $15이나 툭툭 한대 가격이기 때문에 사람이 늘어나면 가격이 훨씬 싸진다. [29] 현지인 가이드의 경우 가이드 가격이 $50으로 통일되어있고 차량이나 툭툭 대절은 따로다. 차량 이용시 $85부터 시작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캄보디아 카페나 태사랑 등 여행 커뮤니티에서 투어 동행을 구하는 경우가 더러있으니 경비절감을 위한다면 컨택해보는것도 추천한다. [30] 한국으로 치면 일본 배우가 " 석굴암, 금동대향로는 일본의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한 격이다. [31] 캄보디아는 국민 다수가 상좌부 불교를 믿는다. [32] 라마 4세는 이 작업을 실패한 이후에도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방콕의 왓 프라깨오 한복판에 앙코르와트 모형을 만들어놨다. [33] 참고로 루치아의 나라인 북태평양 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는 가쿠토의 침략에 의해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