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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7:15:16

이엥 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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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캄푸치아 정부 부수상
민주 캄푸치아 외교부장
이엥 사리
អៀង សារី | Ieng Sary
파일:Ieng_Sary_2011.jpg
출생 1925년 10월 7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코친차이나 짜빈
(現 베트남 짜빈 성)
사망 2013년 3월 14일(향년 87세)
캄보디아 프놈펜
직업 정치인( 민주 캄푸치아 정부 부수상 겸 외교부장)
종교 불교
가족 부친 낌 리엠
모친 쩐 티 로이
배우자 이엥 티릿
학력 파리 정치대학

1. 개요2. 일생
2.1. 민주 캄푸치아 이전2.2. 민주 캄푸치아 시기2.3. 민주 캄푸치아 이후

[clearfix]

1. 개요

파일:이엥 사리.jpg
민주 캄푸치아 시기의 모습

민주 캄푸치아의 정치인이자 부수상, 외교부장[1]을 역임했으며,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서열 3위였던 인물이었다. 민주 캄푸치아 시기에는 제3형제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또한 그는 폴 포트 동서이기도 했다. 폴 포트의 전 부인 키우 폰나리의 여동생이 바로 이엥 사리의 부인인 이엥 티릿이었다.

2. 일생

2.1. 민주 캄푸치아 이전

1925년 10월 7일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코친차이나 짜빈성(오늘날의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크메르계 혈통의 부유한 지주인 아버지와 중국인과 베트남인의 혼혈로 어릴 적에 베트남으로 이주한 어머니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2] 원래 이름은 베트남식인 '낌 짱(Kim Trang)'이었으나, 아버지를 잃은 후 15살에 캄보디아 프레이벵 성에 있는 삼촌에게 인수되었을 때 '이엥 사리'로 개명했다.

이엥 사리는 1942년에 기말고사에 합격하고는 프놈펜의 리세 시소와스 중등학교에서 공부한 후 1946년에는 캄보디아 최초의 독립 학생 단체 중 하나인 '프랑스 식민주의로부터 캄보디아 해방'을 창설했다. 이엥 사리는 초반에는 캄보디아 민주당에 가입했으며, 1946~1947년에는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여 캄보디아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는 데 도움을 줬다. 이때 이엥 사리는 후에 아내가 될 키우 티릿/키우 폰나리 자매와 후에 처남이 될 살롯 사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1951년에 파리로 유학을 가기 위해 살롯 사와 같이 떠나기 전에 키우 티릿과 약혼했고, 이후 파리로 떠난 트랑은 학생 급진주의의 온상인 라틴 지구에 아파트를 임대하여 키우 삼판과 손 센 등의 크메르인 학생들을 알게 되며 크메르학생연합을 결성하며 프랑스의 공산주의 지식인들을 만나 그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이후 사리는 키우 티릿과 1951년 여름에 파리에서 결혼했으며, 이에 키우 티릿은 '이엥 티릿'으로 개명했다. 이후 이엥 사리 부부는 아들 3명과 딸 1명을 낳았다.

결혼한 해와 같은 1951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사리는 1957년에 캄보디아로 돌아와 고등학교에서 역사 및 지리 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1960년 9월에 캄보디아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입회하여 당 서열 5위가 되었고 1963년 2월에는 당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당 서열 3위로 승진했으며 같은 해에 캄보디아 내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르자 동년 5월에 지하로 잠복하여 동부 콤폰참의 '제100국' 기지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1966년에 고무 농장 설립과 관련된 몰수로 인해 소수 민족과 군대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캄보디아 북동부로 이주한 사리는 1970년에 크메르 루주 행정부의 첫 배타적 통제에 놓인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1971년 8월에 캄푸치아 왕국 민족 연합 정부(GRUNK)의 정부 국내 특사로 임명되어 베이징에서 중국 자금 수집을 담당했다. 이후 이엥 사리 부부는 1972년까지 베트남에 정착한 크메르인 공동체와 연락을 취하고는 1973년에는 하노이 교회에서 당의 경호원으로 일했다.

2.2. 민주 캄푸치아 시기

1975년 4월 17일에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하고 론 놀 정권을 몰아내자 이엥 사리는 캄보디아 재건을 돕기 위해 국외에 거주하는 캄보디아인들에게 라디오를 통해 개인적으로 호소했고, 이에 응한 캄보디아인들이 캄보디아로 돌아오자 사리는 이들을 '재교육 수용소'에 구금했다. 이후 동년 9월에 사리는 공산당 중앙위원 6인 중 한 명이 되었으며, 동년 10월 9일에는 당과 국가의 외교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이후 1976년 4월 14일에 사리는 민주 캄푸치아의 외교부장이자 부수상에 오른다. 이엥 사리는 외교부장 직분을 이용해 자신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는 유일한 민주 캄푸치아의 고위 인사가 되었으며[3], 이후 1977년 말에 UN에서 사리는 크메르 루즈 정부와 논의를 시작하려는 캄보디아 난민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 시기에 아내인 이엥 티릿은 사회사업부장을 역임했다.

킬링필드 과정에서 이엥 사리는 "우리 모두는 자신 안에 적이 있다"고 말하며 정부 부처에서의 숙청과 체포, '반역자'에 대한 비난을 촉구하고 의심되는 스파이 네트워크를 제거하는 것을 담당했고 이에 당시 민주 캄푸치아 수뇌부에서는 이엥 사리를 '국내 전선에서 승리의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영웅'으로 간주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이엥 사리가 이끄는 외교부는 그 악명높은 뚜올쓸라엥의 대기실 역할을 했다는데 사리는 '외교사절 교육'을 명분으로 지방에 있는 크메르 루주 간부들을 외무부로 호출했으며 이들은 얼마 안 가 뚜올쓸라엥으로 이송되었고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 거기에 사리는 캄보디아에 있는 어린이들을 납치해 소년병으로 기르게 한 최악의 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민주 캄푸치아 시기 이엥 사리의 악행에 대해 자세한 것은 그의 보좌관이던 로렌스 픽(Laurence Picq)이 1996년에 쓴 회고를 참고하길 바란다. #

참고로 당시 이엥 사리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엥 사리는 지능은 높았으나 오만하고 경멸적이었으며 조작에 능했고[4]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동정심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덥잖은 이유로 '지식인' '서구 부역자'로 몰아내던 민주 캄푸치아의 수뇌부였음에도 철테 안경을 쓰고 시가와 코냑에 대해 뚜렷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UN 총회에 다녀오는 길에 푸아그라와 스위스산 치즈를 구매해 캄보디아에 온 적도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 사리의 딸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병원의 원장이 되었고 그의 조카는 영어를 거의 못했음에도 라디오 프놈펜의 영어 번역가가 되었다고 한다.

2.3. 민주 캄푸치아 이후

1979년 1월 7일에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베트남군에 전복되자 사리는 '쑤 하오(Su Hao)'라는 이름의 가짜 중국 여권을 발급받고는 내각의 모든 기록을 챙긴 채 기차를 타고 서부의 태국 국경 인근으로 도망쳐 게릴라전을 전개하였고, 같은 해 8월 19일에 베트남의 괴뢰국이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세운 인민혁명재판소에서 폴 포트와 함께 부재중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엥 사리는 친소련 진영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제 사회에서 캄보디아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로 인정되는 망명 정부에서 외교를 담당했다.

1982년에 크메르 루즈 소속 인물들와 함께 노로돔 시아누크와 손 산의 지지자들을 포함하는 연합 정부가 창설되었을 때 그는 외교 문제에서 자신의 지위를 키우 삼판에게 양도하고 파이린 주의 지도권을 인수했고, 이후 경제 문제에 있어서 다소 자유주의적인 생각을 가졌던 이엥 사리는 중국의 요청으로 재무관으로 재직하며 파이린 주를 거점으로 삼아 태국과의 거래로 막대한 이익을 얻으며 주민들에게 현금 경제를 서서히 침투시켰다. 이 '자본주의적 경향'에 자극받은 북부의 강경파 간부 따 목이 주민들의 사유재산을 몰수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고, 결국 1988년에 사리는 1,6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이후 1996년 8월 8일에 사리는 3천 명의 병사들과 함께 훈 센 정부에 투항한 후 같은 달 19일에 사리는 과거의 동료들에게 학살의 책임을 전가하고는 중립을 선언하며 캄보디아 민족통일당[5]에서 추종자들을 이끌고 탈당하여 민주국민연합운동(DNUM)을 창당하고는[6] 동년 9월 14일에는 노로돔 라나리드 훈 센 양 수상의 요청으로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에 의해 사면을 받아 1979년에 받은 사형 판결이 취소되었고,[7] 이와 동시에 파이린 시가 자치시로 변경되며 파이린 시를 계속 관리할 수 있는 권리도 유지되었다.

사리는 자신이 국가를 운영하는 동안 저지른 범죄는 전적으로 그의 전 동서인 폴 포트의 책임이라고 비난했고, 파이린 주에 있는 루비와 사파이어 광산, 삼림을 개발하여 얻은 수익을 축적하여 상당한 부자가 되었다가 2000년대 초에 보석 광산들이 고갈되고 삼림들이 벌채되자 은퇴하여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프놈펜 남부에 있는, 경비원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3층짜리 호화로운 빌라에서 살았다. 이후 사리는 2004년 7월에 심장병으로 태국의 병원에서 잠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고, 2007년 11월 12일에 캄보디아 재판소에 의해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범죄로 체포되었고 아내도 함께 체포되었으며[8] DNUM도 해산되었다. 이때 이엥 사리 부부는 법적 비용을 충당하기에 불충분한 자원을 제공하여 사법 당국의 지원으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 그들이 가진 모든 재산을 자녀 이름으로 등록했다.

2009년 12월 16일에 캄보디아 재판소는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인과 무슬림 소수 민족에 대한 학살 혐의로 사리를 공식 기소했고, 이후 사리는 심장병과 위장병을 앓다가 2013년 3월 4일에 유치장에서 병원으로 옮겨진 후 동년 3월 14일에 향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참고로 재판 당시에 사리는 "해외 출장이 잦아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 부장은 우리나라의 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는 마오이즘에 더 영향을 많이 받은 공산국가에서 사용했다. 공산국가라고 전부 소련식 직책만 썼던 것은 아니었다. [2] 이 영향으로 사리는 후에도 베트남 억양이 강한 크메르어를 사용했다. [3] 실제로 폴 포트는 얼마나 자신의 공개 석상 노출을 꺼렸는지 집권한 지 2년도 넘은 1977년 9월에야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다. [4] 그러면서 사리는 국민들이 외국 신문을 보고 라디오를 청취하는 것을 '거짓말만 한다'며 전면 금지시켰다. 뭐 이때쯤이면 이미 캄보디아에 신문은 당 기관지를 제외하면 사실상 소멸한 판이었지만. [5] 크메르 루주 동료였던 키우 삼판과 손 센이 1992년 총선에 참여하기 위해 세운 당이다. [6] 이후 삼판도 1997년 5월에 폴 포트를 비난하며 크메르 국민연대당(KNSP)을 창당했다. [7] 참고로 사리는 이에 대해 자신이 투항한 것이 캄보디아에 평화를 되찾은 주요 설계자라고 자처하고 '국가적 화해의 이름으로 고통스러운 사면에 선을 그었다'고 주장했다. [8] 참고로 민주 캄푸치아의 주석이었던 키우 삼판은 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뇌졸중을 일으켜 다음 날에 프놈펜의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