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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22:29:12

조제핀 드 보아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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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AA39D><colcolor=#000000> 프랑스 제국 나폴레옹 1세의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
[1]
이름 마리 조제프 로제 타셰 드 라 파제리[2]
(Marie Josèphe Rosé Tascher de La Pagerie)
출생 1763년 6월 23일
프랑스 왕국 마르티니크
사망 1814년 5월 29일 (50세)
프랑스 왕국 뤼에유말메종
배우자 보아르네 자작 알렉상드르 (1779년 결혼 / 1794년 사망)
나폴레옹 1세 (1796년 결혼 / 1810년 이혼)
자녀 외젠, 오르탕스
아버지 조제프 가스파르 타셰 드 라 파제리
어머니 로제 클레르 데 베르제 드 사누아
형제 카트린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처녀 시절2.2. 첫번째 결혼 생활2.3. 두번째 결혼, 나폴레옹과의 결혼 생활2.4. 나폴레옹의 이혼 선언2.5. 이혼하다2.6. 죽음2.7. 조제핀과 마리 루이즈의 차이
3. 일화4.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조제핀은 늘 거짓말을 했어. 하지만 늘 우아하게 처리했지. 그녀는 내가 일생 동안 가장 사랑한 여자였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조제핀의 죽음을 듣고 말하길.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첫 황후. 나폴레옹 3세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한때 형수, 그리고 장모였다. 자녀로는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있다. 나폴레옹과의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었다.

현재 스웨덴, 덴마크, 벨기에,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공가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외젠의 장녀 조제핀 드 로이히텐베르크 오스카르 1세와 결혼하면서 그 후손들이 각국의 왕이 되었다.

2. 생애

2.1. 처녀 시절

처녀 시절의 본명은 마리 조제프 로즈 타셰 드 라 파제리였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3]에서 태어난 크레올[4]이다.

그녀의 친가인 파제리 가문은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허리케인으로 인해 사업이 망해 빈궁한 처지로 전락했다. 결국 데지레라고 불리던 마리 조제프 로즈의 고모가 본토의 부자 귀족의 정부가 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살게 되었지만 데지레를 정부로 삼은 귀족 내연남은 여색의 대가로 데지레에게 장기간 경제적 지원을 해주기엔 나이가 좀 많았다.[5] 결국 데지레는 자신의 12살짜리 조카딸을 프랑스로 불러 내연남의 막내아들과 결혼시키겠다는 장구한 계획을 세웠으나 불행히도 오기도 전에 죽어 버렸고 다시 15살짜리 조카딸을 대타로 불러들여 결국 결혼시켰다. 그렇게 결혼한 남편의 이름은 알렉상드르, 아내의 이름은 마리 조제프 로즈였다. 마리 조제프 로즈는 이후 남편의 성을 따라 마리 로즈 드 보아르네라 불리게 된다.[6]

2.2. 첫번째 결혼 생활

하지만 이 부부의 사이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들을 하나씩 낳기는 했지만 남편 알렉상드르는 결혼한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아버지의 내연녀의 조카딸보다는 본인이 직접 선택한 내연녀(...)를 선호했고 아예 집을 나가 사창가를 돌아다녔다. 결국 법원은 남편이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별거를 인정했고 마리 로즈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렇게 생과부가 되는가 싶었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며 그녀는 진짜 과부가 되었다. 남편 알렉상드르가 처형된 것이다. 알렉상드르는 비록 귀족 신분이었지만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하고 프랑스 혁명 전쟁에도 장군으로 참전하는 등 비교적 혁명파에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불성실한 지휘로 패전을 자초했다는 혐의를 받아 수감되었고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피해갈 수 없었다. 마리 로즈도 투옥되었으나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풀려났다. 참고로 그녀가 풀려난 건 처형 바로 전날이었다. 반면 남편은 반동을 불과 4일 앞두고 처형당했다. 게다가 마리 로즈는 감옥살이를 할 당시 만난 감방 동기 테레사 탈리앵과의 친분으로 총재 정부 아래의 파리 상류층에 들어가면서 이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면서 테레사 탈리앵과 공유하게 된 바라스 총재를 비롯해 수많은 연인을 두었다.[7] 이 와중에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나폴레옹의 인연을 계기로 나폴레옹과 교류하게 되어[8] 결국 얼마 뒤인 1796년에 나폴레옹과 결혼하였다.[9] 나이는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이었다. 정말로 인생사 새옹지마. 이때부터 마리 로즈는 역사에 흔히 알려진 조제핀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2.3. 두번째 결혼, 나폴레옹과의 결혼 생활

나폴레옹은 파리 사교계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인 조제핀에게 푹 빠져 열렬히 구애하던 것에 비해 상류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조제핀은 볼품없는 외모[10]의 군인 나폴레옹에게 크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폴레옹과 결혼하게 된 이유는 조제핀의 애인이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바라스가 나폴레옹의 장래가 유망하다며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군인으로 여자 대하는 데 서툴렀던 나폴레옹은 조제핀을 보자마자 그녀의 매력에 홀딱 빠져 첫눈에 반해 버렸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에게 보내는 편지에 "당신의 편지를 보고 있으면 결혼한 지 50년 된 부부 같아!"라고 적기까지 했으며 훗날 '내가 여자의 매력에 무관심한 건 아니지만 나는 여자 때문에 정신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여자와 함께 있으면 수줍어지고 불편하다. 그러나 조제핀은 나에게 자신감을 준 최초의 여자였다' 고 회상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1796년에 어느날 밤 자고 있던 시장을 두들겨 깨워 약식 결혼을 치르기에 이른다. 당시 혁명 정부 하에서 유행하던 이 약식 결혼은 본인들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파기가 가능했다. 나폴레옹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고 마지못해 결혼한 조제핀은 나중에 쉽게 헤어질 생각으로 이런 결혼식을 올렸으나 이는 나중에 결정적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런 마인드로 결혼했으니 조제핀이 나폴레옹을 사랑할 리가 없었고 나폴레옹이 결혼 이틀 만에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자 조제핀은 미모의 연하남 이폴리트 샤를을 불러들여 거의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폴레옹은 신혼의 아내가 보고 싶다며 아내를 보내주지 않으면 파리로 철군해 버리겠다고 바라스에게 징징댔고 바라스와 총재 정부는 조제핀의 등을 떠밀어 반강제로 원정지까지 보내는데 그 때도 연인 샤를을 데려갔다고 한다.

급기야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조제핀의 아들 외젠을 데려갔을 때 그녀가 파리 근교의 저택에서 연인과 밀회를 즐기기에 이르자 이 소식은 파리 전체에 퍼졌다. 이를 모르던 유일한 사람인 남편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그 소식을 듣고 홀딱 뒤집어졌다. 거기다 이 사실이 외국까지 퍼지면서 전 유럽이 신이 나서 비웃는 와중에 귀환한 나폴레옹은 분노하여 아예 이혼을 생각했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도 복잡했고[11] 조제핀도 울면서 사죄한 데다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던 그녀의 아이들까지[12]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결국 화해했다. 이후 조제핀은 자신의 불륜을 반성하고 정숙한 아내로 살게 된 반면 나폴레옹은 더 이상 조제핀에게 열중하지 않고 유명 여배우나 귀부인들을 총애하게 된다.

2.4. 나폴레옹의 이혼 선언

조제핀은 낭비벽이 심한 데다 결정적으로 후사마저 없었기 때문에 결국 1810년에 나폴레옹과 이혼하게 되었다. 자신의 무수한 바람과 냉담함에도 자신을 기다려주는 나폴레옹에게 감동한 조제핀이 마침내 진심으로 나폴레옹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정작 나폴레옹은 이미 조제핀에 대한 애정이 식은데다[13] 자신의 합법적인 후계자를 얻는 동시에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고자 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에게 이혼을 통보받았을 때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고 졸도까지 했으며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나중에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안 아들 외젠의 설득으로 이혼에 동의했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졸도한 건 완전히 쇼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만큼 충격을 안 받은 건 아니지만 젊어서부터 많은 시련을 겪었던 경험이 있어 그 정도 일로 졸도할 만큼 심약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놀라서 안아 옮기는 하인에게 날린 대사는 "불편하니 살살 좀 안아라"였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의 사교계 여인들의 필수 스킬엔 기절하기가 있었다. 남자들이 결투 등 남성스러움을 과시하는 문화가 있듯 여자들은 충격을 받으면 기절하는 여성스러움을 과시하는 문화가 있었다.

파일:illo-front.jpg

이혼 통보에 졸도(하는 척)한 조제핀.

2.5. 이혼하다

이혼을 결정하긴 했으나 나폴레옹도 조제핀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라서 이혼할 때도 나폴레옹은 그녀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충분히 지원해 주었다. 유명한 말메종 궁전이 바로 그녀가 말년을 보낸 궁전이다. 더불어 조제핀에게 황후로서의 지위와 의전 절차를 계속 유지시켜 주었고 이혼 후에도 계속해서 서신 교류와 만남을 이어갔다.

혼란스러운 혁명기에 살아남았던 처세술의 달인답게 파리에 연합군이 입성한 후엔 딸인 오르탕스와 함께 말메종에서 무도회를 열고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1세를 초청하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르 1세는 조제핀을 여전히 황후인 것처럼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고 한다. 탈레랑과 알렉산드르 1세의 지원에 힘입어 루이 18세의 새로운 정부도 조제핀에게 공작부인의 작위를 내리고 재정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지만 그녀는 나폴레옹의 몰락에 대해서 무척이나 슬퍼했고 엘바섬의 나폴레옹에게도 비밀리에 접촉하여 줄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14]
"때때로 나는 우울해서 절망감에 죽을 수도 있을 지경이다. 나는 보나파르트의 운명을 견딜 수 없다."

2.6. 죽음

그러던 중 5월 말에 알렉산드르 1세와 같이 승마를 하던 조제핀은 갑자기 오한을 느끼고 폐렴에 걸려 앓아 누웠는데 5월 29일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그녀의 유언은 "보나파르트, 엘바, 로마 왕."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이틀 동안 방안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심적 괴로움에 시달렸다. 나폴레옹의 유언은 "프랑스, 군대, 선봉, 조제핀"이었다. 후일 엘바 섬을 탈출해 백일천하 기간 동안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한 후 퇴위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 나폴레옹은 도중에 조제핀이 말년을 보낸 '말메종' 성을 방문해 눈물을 흘리며 "나의 불쌍한 조제핀, 그렇게 좋아하는 장미꽃을 꺾으며[15] 길을 걷는 그녀의 모습을 지금 볼 수 있을 것만 같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2.7. 조제핀과 마리 루이즈의 차이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버리고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 것을 정치적 실수로 보기도 한다. 당시 조제핀은 "승리의 부인(마담 드 빅투아르)"이라고 불리며 병사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함께 하던 시기는 프랑스와 그 자신이 잘 나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손녀인 마리 루이즈[16]와 결혼한 후 국내적으로는 국민들이 마리 루이즈를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하고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몰락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이 대체 어떤 사건인가. 민주주의, 자유주의, 전체주의 같은 후세에야 완성된 이념은 집어치우고 아베 세예즈가 했던 "제3계급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라는 말처럼 민족주의를 새로운 시대의 정치 이념적 글로벌 스탠다드로 각인시킨 사건이다. 안 그래도 '프랑스인', '프랑스 민족'이란 담론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절에 그 험악한 혁명 시기를 다른 파리 시민들과 함께 겪으며 어찌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던 조제핀은 프랑스 민중의 입장에선 사생활의 일탈이나 사치와는 별개로 '그들 중 하나', '동네 언니에서 황후까지 올라간 자랑스런 혁명의 딸'로 인식했다. 본인의 배경이 '서민'은 좀 오버라고 할지라도[17][18] 어쨌든 조제핀은 프랑스 혁명기의 평지풍파를 남들과 똑같이 겪으며 서민들의 고충과 정서를 잘 이해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국뽕 쩔게 나라 위엄 세워주는 황제의 아내이면서도 민중과 정서적으로 가까웠던 황후를 쫓아내고 전통적인 적국이자 프랑스 혁명이 타도하려 했던 구 체제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녀를 새로 들였으니 민중의 반응이 좋을 리가 없었다.

3. 일화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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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는 조세핀으로도 불리지만 프랑스어로는 조제핀이 올바른 발음이다. [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드라파제리'로 표기한다.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3] 그녀의 부모가 1771년까지 세인트루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실제 출생지는 세인트루시아일 가능성이 높지만 대혁명의 여파로 세인트루시아가 영국령이 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세례를 받은 곳이자 프랑스 점령시절 세인트루시아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마르티니크를 공식적인 출생지로 처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오늘날에는 흑/백 혹은 백/적 혼혈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지만 당시에는 그냥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혈통을 의미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페닌술라르 문서 참조. [5] 당시 이미 60대 중반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막내 아들, 즉 조세핀의 남편보다 오래 살았다는 점이 함정이다. [6] 묘하게도 당시에는 조제프라는 이름을 빼고 마리 로즈라는 이름을 썼다. 이후 조제프의 여성형인 조제핀은 다음 남편 전용 이름이 되지만 당연히 이때의 이름도 남편의 성을 딴 조제핀 보나파르트였으므로 오늘날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는 정작 거의 사용하지 않은 이름인 셈이다. [7] 그중에는 나폴레옹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라자르 오슈 장군도 있었다. [8] 다만 이는 후대에 윤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로베스피에르파로 간주되어 사실상 실직한 나폴레옹이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하러 바라스에게 눈도장을 찍으러 다녔으며 따라서 이 과정에서 이미 바라스의 안방마님 격이었던 조제핀과 어느 정도의 교류는 있었을 것이다. [9] 사실 조제핀의 정부이자 총재 정부의 주역 바라스가 조제핀에게 질리기 시작하고 관계를 정리하면서 대신 구해준 조제핀의 신랑감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는 것이 당대의 세평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바라스를 몰락시킨다. [10] 얼굴 자체는 미남이었지만 프랑스 황제가 되기 전의 나폴레옹은 정말로 너무 말라 볼품없어 보이긴 했다고 한다. 게다가 코르시카 출신이었던 나폴레옹은 사교계에서 보기엔 발음이나 행동 면에서 촌티가 줄줄 흘렀을 것이다. [11] 당시 나폴레옹은 본인을 '개선장군'으로 포장하여 얻은 인기를 기반으로 쿠데타에 가담할 계획이었지만 귀국하자마자 이혼부터 하면 대중의 이미지는 개선장군이 아니라 속된말로 NTR당한 걸 알자 군대도 내팽개치고 달려온 바보 남편이 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폴레옹과 가장 친한 부하 장 란 역시 이 때 같은 처지에 놓였는데, 이쪽은 정치적 입지가 필요없었기 때문에 가차없이 이혼했다(...). [12]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아들딸을 몹시 아꼈다. 혼사도 자기 집안이나 유럽 굴지의 명문가와 엮어주었고 이후 유배갔을 때는 '내 유일한 가족은 외젠뿐이었다'고 회상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녀의 딸 오르탕스는 자기 남동생과 결혼시켰는데 이후 오르탕스가 바람을 피워 사생아를 낳아왔을 때조차 이혼하겠다는 동생의 요청을 거부한다. [13] '평범한 이들의 잣대를 위대한 이들에게 들이대지 말라'고 말하며 피차 바람을 피워댔기 때문에 애정 문제는 아니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자신의 다른 정부까지 아이를 낳은 상황에서 자신의 생식 능력은 증명되었으니 합법적인 후계자를 얻고 싶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14] 그러나 나폴레옹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마리 루이즈와의 관계를 회복해 나폴레옹 2세를 다시 데려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데다 조제핀이 알렉산드르 1세에게 줄을 댄 것을 배신행위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15] 조제핀은 장미를 매우 좋아해서 나폴레옹과 이혼한 후 '말메종' 성에서 생활할 때 250 종류의 장미를 말메종의 뜰에 심고 장미를 채집하러 돌아다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을 배려해 자신이 모은 장미를 식물 화가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Pierre Joseph Redouté, 1759-1840)에게 그리게 하여 기록에 남겼을 정도였다. [16] 마리 루이즈의 친할아버지인 레오폴트 2세의 막내 여동생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다. 마리 루이즈에게 앙투아네트는 고모할머니인 셈. [17] 조제핀의 출생지는 마르티니크 섬으로 부유한 설탕 농장 경영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물적으로는 풍족하지만 신분 자체는 평민이었는데 본래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이렇게 돈 많고 교육을 받은 평민, 즉 제3계급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물적인 의미에서 '서민'은 아니었어도 나름 혁명기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이었지만 조제핀의 처녀적 성인 타셰 드 라파제리에서 타셰 가문은 프랑스의 지방 영주 출신인 귀족 집안이며 타셰 드 라파제리는 타셰 가문의 종가이므로 완전히 평민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18] 사실 유럽은 귀천상혼 배제가 심하기 때문에 왕실에서 신분이 맞지 않는 결혼, 즉 왕가보다 급이 낮은 가문과 결혼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괜히 현대까지도 영국에서 캐서린 미들턴이 결혼 당시 평민 왕세자비라며 화제가 되었던 게 아니다. 하물며 시대를 감안하면 아무리 재벌가라도 제3신분 출신이 황후까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컸다. [19] 독일 왕족 여성인 아말리아 제피린을 애인으로 두고 있었으며 아이들에게도 무심했기 때문에 조제핀의 아이들이 친아버지 보아르네보다는 양아버지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20] 조제핀은 귀족에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바라스의 정부였으니 빽이야 있었지만 워낙 낭비벽이 심하다보니 재정적으로는 완전히 파산 상태였다. 살고있던 집도 남의 것인데다 생활도 완전히 빚으로 꾸려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미모가 남아 있고 여기저기 인맥이 남아있어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바라스에게 버림받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바라스도 그녀가 부담이 되나 그냥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나타난 나폴레옹에게 바톤 터치하는 식으로 넘겨버렸다. [21] 황실에 기본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아닌 특별세금으로 사치를 하는 것은 자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