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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4-27 20:15:00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최전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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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I. 희망에 찬 군단3. II. 전쟁의 대가4. III. 아만다가 꿈을 꾸다5. IV. 수호 천사6. V. 잠들지 못하는 망자7. VI. 현기증8. VII. 왕좌

1. 개요

2. I. 희망에 찬 군단

발 마라그는 인간들이 '데드 존'이라 부르는 곳에 몇 년째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령관도, 연락책도 없었다. 그 영토는 그의 것으로, 그는 악취를 풍기는 군체 벌레들로부터 그곳을 지켰다. 놈들을 보면 고향의 모래 위를 기어 다니는 작디작은 빨간색 딱정벌레가 떠올랐다. 전쟁 야수 우리에 몰려들어 우글거리다가 직물 의복 속으로 파고드는 미물들. 그런 벌레들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껍질의 이음매에 불길을 가까이 가져가는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러면 열을 받은 벌레가 펑, 하고 깔끔하게 터져 버린다고 하셨다.

군체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그를 찾아올 자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의 침공은 사형 선고가 되었다. 그의 지위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그는 군단을 위해 죽을 것이다. 보상이 따르든 말든 상관없다.

발 마라그는 카이아틀 여제의 교신에 귀를 기울이면서, 입대한 후 얼마나 먼 곳까지 왔는지 새삼 실감했다. 고향 행성의 가장 빈곤한 자치구에서 선발된 이후, 지금까지. 새로운 도전과 함께라면, 그리고 행성계 전체에 자신의 의지를 전하고 있는 새로운 여제와 함께라면, 그는 아직도 더욱더 먼 곳까지 갈 수 있었다.

///

유로파는 차가웠다. 바실리우스도 추운 곳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는 사라지기 전의 화성에도 주둔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발루스가 그와 부하들을 행성 외부의 정찰 임무에 파견했다. 그는 첩보니 자원 수집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발루스는 법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랬다.

네소스에서 첫발을 잘못 내디딘 후, 그들은 순양함을 유로파로 가져왔다. 그 얼음 위성에는 도둑질에 혈안이 된 몰락자가 우글거렸지만, 그 얼음 아래에는 비밀이 묻혀 있었다. 앙증맞은 인간의 기술은 그의 흥미를 돋우지 못했다. 하지만 사이온들은 이것저것 들쑤시기를 좋아했고, 여기에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흩어진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여제가 주목할 만한 것. 가치 있는 칭호나 명성을 얻지 못한 그와 같은 병사를 새로운 차원에서 주목받게 해줄 만한 것.

그리고 그가 합당한 존경을 받게 해줄 것이 있다고 믿었다.

///

자칭 여제라는 자의 목소리가 낡아 빠진 무전기에서 웅웅거리는 사이, 병사들은 식사를 했다. 드라부스 사령관은 무릎에 총을 얹은 채 새 통구이의 뼈에 붙은 고기를 뜯었다. 네소스에 사는 작은 자주색 날개 달린 생물은 고기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덫에 빠뜨려 잡는 재미가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립니까? '고대의 의식'?" 어린 군단병이 물었다.

사령관은 고개를 들었다.

"영감들의 전통입니까?" 그녀는 말을 이었다.

드라부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명예로운 전통이다." 그는 말했다. "집정관들이 사랑하는 전통이지. 전사들은 도전자들을 상대로 싸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는 부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너 같은 애송이들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

"아무나 참가할 수 있습니까?" 군단병이 물었다.

그는 웃었다.

"흠." 그녀는 으르렁거렸다. "당신도 도전에 응할 겁니까?" 그녀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저부터 시작하시죠."

드라부스는 대담한 젊은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머리를 굴렸다. 실각한 황제의 오만방자한 딸의 눈에 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가 목숨 바쳐 섬겼던 지도자는 도미누스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일을 통해 돈이라도 벌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새 뼈다귀를 옆으로 내던지고는 총을 들어 군단병의 복부를 쐈다. 그녀는 쓰러졌다.

"내가 이겼다." 그는 말했다.

///

사람들이 그녀를 원대한 자 익셀이라 부르는 건, 그녀가 찰나의 인생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원대한 자 익셀이라 부르는 건, 그녀가 기억에서 사라졌어야 하는 것들을 정신으로부터 끄집어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원대한 자 익셀이라 부르는 건, 그녀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사실이었다. 네소스 센타우루스군의 기이한 지형에서, 익셀은 지휘실을 떠났다. 발루스는 창의력이 부족하고 좀스러운 자였다. 그는 익셀의 사이오닉 능력을 증폭시켜 줄 수 있는 벡스 기술에서 아무런 가치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자를 죽이고 부대 최고의 투사들을 가로챘다.

이 대회라는 것이 제국의 배신자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이 새로운 여제는, 확실히 멍청하긴 해도, 대담한 행동에 반응을 보일 것 같았다.

익셀이 예측 엔진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여제의 상상을 넘어서는 정보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녀를 원대한 자 익셀이라 부르는 건, 그녀의 야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었다.

3. II. 전쟁의 대가

시부 아라스가 토로바틀에 나타났을 때, 카이아틀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 모두 그랬다. 그녀는 전투와 승리를 위해 양육된 자신의 백성들이 압도적인 적에 맞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사랑하던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지켜봤다.

카이아틀은 모든 실패로부터 배웠다. 이번에는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장군들이 전쟁 탁자 앞에서 아무리 반박을 한다고 해도, 전사들은 게임판의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떤 전사들이라 해도 전쟁의 신이 자기 규칙에 따라 자기가 지배하는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승리라 부를 수 있는 요소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생존자와 함께 고향 행성을 떠날 수 있다는 건 나름의 승리였다. 군대를 재구축하는 것도 승리였다. 수호자들과의 전면전을 피하는 것 또한 하나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수호자는 협상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가울의 공격 이후, 그들은 또 한 번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여기에 발이 묶인 붉은 군단 서기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다면, 이 행성계에는 도무지 재앙이 끊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수호자는 안전한 탈출로를 거부한 걸까?

물론 그녀도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토로바틀에서 대피령을 내리기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시부 아라스의 거대한 형체가 키틴질 장화로 수천 년에 걸쳐 성장해 온 문명을 짓밟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봤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거부감. 오만.

하지만 카이아틀은 그 이후 성장했다. 그녀는 손실을 평가했다. 지속적으로 계산했다. 언제나 수치를 분석하며, 그들의 본질을 잊지 않았다.

수호자들도 살아남으려 한다면 성장해야 했다. 신들이 이 세계에 거닐고 있는 지금, 거부감과 오만만으로는 그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새로운 길을 깎아내야 할 것이다.

4. III. 아만다가 꿈을 꾸다

산탄총의 녹슨 자리. 경질 점토 지면에 뚫린 구멍. 어머니의 낡은 재킷을 뒤덮은 곰팡이. 잘게 잘린 뿌리가 곤히 잠든 그녀를 향해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어깨에 놓인 쭈글쭈글한 손. 뱃속을 갉아대는 구덩이. 굶주림일까 슬픔일까? 뒤에서는 아버지의 콜록, 콜록, 콜록, 소리가 들렸다.

부서진 차량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조종석에는 부패한 해골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미소를 짓듯 드러난 치아 사이로 낮은 노래를 불렀다. 그 이름 모를 곡조는 깜빡이는 불빛을 뒤따라오는 소리였다. 그중 하나가 루시아일까?

그녀는 터덜터덜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거친 굳은살이 녹슨 자국 같았다. 등 뒤에서는 흔들리는 손수레의 콜록, 콜록, 콜록, 소리가 들렸다. 신발에 뚫린 구멍이 커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딸의 손을 놓고는 입을 가렸다.

어머니의 눈은 무슨 색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건망증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해골들의 행렬이 앞쪽으로 뻗어 있었다. 뒤쪽에는 아버지가 무릎에 손을 얹고 있었다. 숨쉬기가 힘들어 보였다. 갈색이었나?

아버지의 손은 가슴을 가로질러 어깨에 놓여 있었다. 누가 눈을 감겨 주었을까? 누가 구멍을 팠을까?

그녀의 주머니 속에서 길을 잃은 산탄.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그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건망증을 극복하기 위한 상징물이었다.

혼자서 수레를 끄는 손의 녹슨 자리가 아파왔다.

아만다 홀리데이는 부들부들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에서 최후의 도시가 이름 모를 곡조를 흥얼거렸다. 여행자는 죽음처럼 창백하게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5. IV. 수호 천사

"우린 지금 첩보원이잖아요. 그러니 제게 뭐가 필요한지 아세요? 위장 의체예요. 뭔가… 신비한 느낌을 주는 그런 거 말이에요." 글린트가 까마귀의 어깨 위에서 의체 덮개를 잔뜩 펼쳤다. "테스한테 가 봐요."

"일단," 까마귀가 중얼거렸다. "우린 첩보원이 아니야. 이번 임무의 목표는 정찰이지 침투가 아니라고."

"그거야 그렇죠." 글린트가 삑삑거렸다. "하지만—"

"그리고," 까마귀가 말을 이었다. "위장이 필요한 건 나지 네가 아니야. 아무도 네가 누구인지 모르잖아."

"그렇지 않아요." 글린트가 반박했다. "저도 수백 년 동안 살았잖아요! 안 만나 본 사람이 없다니까요."

"'돼지수육'이나 그 비슷한 이름으로 살았지." 까마귀가 넌지시 놀렸다. "탑에 있는 어느 누구도 네게 새 수호자가 생겼다는 건 모를 거야."

글린트는 낮은 소리로 윙윙거렸다. 까마귀도 이제는 그게 투덜거리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각성자 빛의 운반자는 토라진 고스트를 무시하고는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몇 걸음 물러나 더 짙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후 다시 자발라 사령관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타이탄이 쌍안경에 반사된 빛을 보는 일은 없어야 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은 항상 이랬다. 까마귀는 낮 동안에는 멀리서 저격총으로 자발라를 엄호했다. 낯선 물질 전송 신호나 은폐 기술의 아지랑이가 눈에 띄지는 않는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밤이 되어 시야가 제한되면, 둘은 탑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사령관의 눈에 띄지 않는 경호원 역할을 했다.

까마귀는 새로운 헌터 망토 안에 깊이 파묻혔다. 정말 아름다운 의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글린트가 고르고 오시리스가 선물로 준 그 섬세한 천을 감상했다. 그들의 너그러운 마음을 실감하고 있으려니, 인색하게 굴었던 것에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까마귀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 자발라에게 아무 문제 없이 이번 임무가 끝나면, 네 위장을 준비해 보자."

글린트는 까마귀의 얼굴 앞으로 날아들었다. 갑자기 그의 기계 홍채가 쌍안경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정말 그래도 돼요?"

"괜찮겠지." 까마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앞을 가린 고스트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게 꼭 필요하단 얘기는 아니야."

"우린 친구니까 그런 거겠죠." 글린트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래. 흔치 않은 친구지. 치졸하고 전설적인 친구일 수도 있고." 까마귀는 고스트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경이로운 친구라 할 수는 없겠지. 그러려면 네가 새 수호자를 찾아야 할 거야."

"당신이 최고예요." 글린트가 잔뜩 신이 난 듯 웅웅거렸다. "살라딘 경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죠."

까마귀는 강철 군주의 이름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우린 모두 같은 편이야. 조만간 살라딘도 그 사실을 깨닫겠지. 그러고 나면 날 제대로 된 수호자로 대접해 줄 거고."

"걱정하지 마세요." 글린트가 삑삑거렸다. "전설적인 돼지수육이 당신과 함께하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어요?"

6. V. 잠들지 못하는 망자

아이코라는 마당의 자기 자리에 있는 자발라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느 때처럼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령관이 되기 전부터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맹렬한 투지와 사랑, 두려움이 한데 뒤섞인 모습. 아이코라 또한 익히 잘 아는 감정의 조합이었다.

그녀는 자발라 곁에 서서 난간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들어 여행자와 별들을 바라봤다.

"붕괴 전에는, 도시의 불빛이 워낙 밝아서 별보다도 빛났다고들 하죠."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수백 년을 살아도 다른 사람을 속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긴밀하고 지속적인 협력 관계가 유지되어야 그럴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도 자발라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가슴 깊은 곳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일의 공포를 묻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참을성을 발휘하다 보면, 그도 그녀에게 속내를 드러내곤 했다. 적어도 가끔은 그랬다. 그래서 아이코라는 기다렸다.

"그의 얼굴이 자꾸 보이네." 자발라가 오랜 침묵을 깨고 조용히 말했다.

아이코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슬픈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케이드 말씀이신가요?"

"아니." 자발라가 말했다. 그는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았다.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은 사람의 몸짓이었다. "울드렌 소프."

아이코라는 깜짝 놀라 몸을 꼿꼿이 세웠다. 허를 찔렸다는 느낌, 뭔가 놓친 게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날카로운 느낌에 그녀는 잠시 얼어붙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탑에서였네." 자발라가 말했다. "군중들 속에서…" 그는 주저했다. "그를 봤네… 정원에서 말이야. 그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네. 암살자가 있다는 경고를 했지."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자발라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축제 기간에 에바에게서 황금기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어 본 적 있나? 망자의 현신에 대한 이야기?"

"유령 말씀이시군요." 아이코라가 재빨리 말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동화 속 이야깁니다." 망자가 실제로 되살아나 걸을 수 있는 세상에서, 유령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곁눈질로 자발라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물어보기를 기다렸다.

"왜 자꾸 옛 이야기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그게 아니라면…"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겠죠." 아이코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발라의 말을 끊었다.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니까요."

자발라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자발라가 침묵을 깨뜨렸다. "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는 말했다.

아이코라는 앞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가 그녀를 평가하듯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지쳐 있었다.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그녀 말이라면 뭐든 믿을 것이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죄책감에 뱃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상냥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었겠죠."

자발라가 그녀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들은 함께 서서 지구 최후의 안전한 도시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이코라는 두 사람 사이가 그 어느 때보다 멀리 떨어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7. VI. 현기증

"너희 사이온들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살라딘 경은 장벽 너머 아래쪽의 바위 황무지를 바라봤다. 옆에는 오시리스가 수백 년 동안 녹슬어 온 강철 족쇄에 묶인 사이온 포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살라딘은 말을 이었다. "너희는 기갑단에게 정복됐다. 그래서 압도적인 군세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했지. 그건 수치스러운 게 아니다."

그 사이온은 얼굴의 축축한 거죽을 활짝 펼치고는 하나뿐인 눈을 강철 군주에게 고정했다. 살라딘은 상대가 반항심을 표출하는 것인지, 헬멧이 없어 숨 쉬기가 고통스러워 그러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는 그 혐오스러운 모습을 경탄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칼루스가 달아나고 가울이 패배한 뒤에도, 너희는 계속해서 카이아틀과 같은 폭군에게 굽실거리는 길을 택했지. 너희가 저항했더라면, 여제의 오만한 자비에 기대지 않고 진정한 독립을 맛볼 수 있었을 거다." 살라딘은 경멸에 가득 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겁쟁이처럼 구는 바람에 너희 힘이 낭비된 거야."

그 이후 따라온 침묵에서, 강철 군주는 주변 환경이 이상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날카로운 주파수가 대기를 가득 채웠다. 그건 소리가 아니라 강렬한 진동이었다. 두통이 꽃을 피우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방출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오시리스가 키들키들 웃었다. "우리 친구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군."

살라딘은 이를 드러내며 족쇄를 채운 사이온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포로를 장벽 가장자리로 끌고 간 후, 그 너머의 낭떠러지 위로 들어올렸다. 방어구를 벗은 사이온은 놀랍도록 가벼웠다.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작은 새 같았다.

오시리스는 불쾌한 듯 콧방귀를 뀌더니 고개를 돌려 최후의 도시를 바라봤다. 살라딘의 서툰 심문 기법이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이온은 오시리스의 교묘한 접근 방법에도 충분히 저항하고 있었다.

"빛 감쇄 기술은 어디에서 구한 거냐? 예측 엔진은 어떻게 개조했지?" 살라딘이 매섭게 물었다. 강철 군주는 미약하게 버둥거리는 사이온을 단단히 붙잡았다. "지금 어디에 있나? 나머지 조직원은 어디 있어?"

사이온의 하나 뿐인 눈이 이리저리 희번덕거렸다. 살라딘은 자기가 수백 미터 낭떠러지 위에 매달린 것처럼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타이탄은 강철 같은 의지로 자신을 다잡았다.

"결국엔 우리가 찾아낼 것이다. 그건 너희도 어쩔 수 없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살아남는 것뿐이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당장 얘기해라."

사이온은 추운 곳에 홀로 떨어진 짐승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또 한 번의 현기증이 강철 군주를 덮쳤다.

발아래 장벽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휘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악다문 이 사이로 으르렁거렸다. "마지막 기회다. 어디에 있나?"

갑자기 오시리스가 살라딘 곁에 나타났다. 현기증이 사라졌다. "살라딘 경," 오시리스가 말했다. "이건 시간 낭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라면, 굴복시킬 수 없는 완강함은 알아봤어야지."

"맞는 말이야." 살라딘은 아무 말 없이 인정하는 눈빛으로 사이온을 바라봤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나 또한 충성을 버리느니 목숨을 버렸을 테니까."

강철 군주는 사이온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아무렇지도 않게 장벽 너머로 내던졌다.

중력이 상대를 붙잡기 직전, 살라딘 경은 사이온의 눈을 바라봤다. 그 생물의 Y자형 홍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속 방어구를 몸에 두르고 거친 폭력성이 가득 들어찬 흉포한 오우거. 신의 힘이 주입된 따분한 영장류. 불멸이라는 저주에 희생된 여린 정신.

살라딘은 그 생물의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사이온 선조들의 광대한 정신이 드넓게 펼쳐지는 것을 느꼈다. 선조들의 손길이 뻗어 나와 그를 포근한 공허로 감싸 안았다. 시간을 초월한 그들의 합창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변화무쌍한 감정이 그의 가슴에서 부풀어 올랐다. 인간으로서는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그는 평화를 찾았다.

.

.

.

그리고 사이온은 소멸했고, 살라딘은 다시 오시리스와 홀로 남았다.

8. VII. 왕좌

카이아틀은 화려한 조각과 희귀한 금속으로 장식된, 등받이가 높은 왕좌에 앉아 있었다. 고향 행성이 최후를 맞던 때, 충실한 조신들이 회수하는 데 성공한 왕좌였다. 여제는 그것이 전함 함교에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 생각했다.

타우룬만 아니었다면 그 천박한 골동품을 당장이라도 에어록 밖으로 던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중한 조언자는 왕좌가 단순히 권위의 상징물이 아니라,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의 성물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들 문화의 기념비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었다.

붉은 군단과 도미누스, 고향 행성까지 잃은 카이아틀의 백성들은 종족의 부활을 가능케 할 전통이 필요했다. 무시무시한 미래로 이끌어 줄 과거의 시금석이 필요했다. 그들 종족은 기갑단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단이 필요했다.

카이아틀은 왕좌를 바라보며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선봉대의 지도자는 증명의 의식으로 양측의 논쟁을 해결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단 한 번의 결정적인 교전으로 힘겨운 소모전을 막아 보려는 의도였다. 솔직히 그녀 자신도 생각해 보지 못한, 대단히 영리한 전술이었다.

증명의 의식은 원래 이웃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전투를 통한 재판이었다. 하지만 왕좌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실용적인 의미를 넘어 미화되었다. 칼루스의 정권이 종식된 이후, 이 의식은 그 결과를 바꿔 보려는 지지자와 각료, 정치가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말았다.

카이아틀은 실패한 기갑단 제국의 철 지난 유물을 혐오하기는 했지만, 타우룬이 모든 걸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여제를 설득했다. 여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자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조언자는 말했다.

"타우룬, 결정했다. 할파스 엘렉투스에서… 이그노분을 우리의 용사로 지명할 것이다. 작은 자들이 그 안으로 들어서면, 그들 안에 빛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여제 폐하." 영민한 조언자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 결정이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않을 거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너라면 전통을 존중할 거라 생각했는데." 카이아틀은 화가 난 듯 엄니의 고리를 흔들었다. "그런 결정이라면 다수가 받아들일 것이다."

"사실입니다, 여제 폐하." 타우룬은 잠시 입을 다물고는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골랐다. "하지만 원대한 자 익셀과 같은 일부 사령관들은 승리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를 증명의 의식에 맡기면, 그들의 영예가 위태로워질 겁니다."

카이아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 "일말의 허영심을 느끼겠다고 우리 모두를 희생하려는 건가. 이번 대장정에는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쯤 너도 나만큼 잘 알고 있지 않더냐. 더 강한 적에 맞서려면 군을 재정비해야 한다."

타우룬은 위험을 무릅쓰고 눈썹을 추켜올렸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폐하께서는 승리보다도 그 결과를 더 중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카이아틀은 엄니를 쳐들면서 위협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타우룬은 긴장한 듯 뒤로 물러섰다.

"지금은 승리보다 중요한 게 있다." 여제는 우스꽝스러운 왕좌를 더듬었다. "우리는 전통을 존중할 것이다. 증명의 의식을 수락할 것이다. 그리고 기갑단으로써 승리하거나 패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