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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국민정부 | 난징 국민정부 |
국민당 좌파 왕징웨이 쉬첸 쑨커 쑹쯔원 탕성즈 탄옌카이 |
국민당 우파* 장제스 후한민 다이지타오 우징헝 리스쩡 리지선 리쭝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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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미하일 보로딘 천두슈 저우언라이 |
* 난징 국민정부는 국민당 우파가 주축이었지만 우징헝, 리스쩡 등 아나키스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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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 난징 국민정부 초대 정부주석 난징 국민정부 초대 행정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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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 <colbgcolor=#ffffff,#191919>譚延闓 | |
간체 | 谭延闿 | |
한국식 독음 | 담연개 | |
영문 | Tan Yankai | |
호 | 무외(無畏), 절재(切齋) | |
자 | 조안(祖安), 조암(祖庵) | |
출생 | 1880년 1월 25일 | |
청나라 호남성 다릉현 | ||
사망 | 1930년 9월 22일 (향년 50세) | |
중화민국 난징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청나라 진사 | |
직업 | 정치가, 군인, 관료 | |
종교 | 유교 | |
주석 재임 기간 |
1대 1928년 2월 7일 ~ 1928년 10월 10일 | |
행정원장 재임 기간 |
1대 1928년 10월 10일 ~ 1930년 9월 22일 |
[clearfix]
1. 개요
청말의 정치가,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상계군벌의 실력자였으나 자오헝티에게 밀려 몰락한 이후 중국국민당에 합류했다. 1928년 난징 국민정부 수립 이후 1대 국민정부 주석을 지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80년 1월 25일, 호남성 다릉에서 태어났다. 신사층 출신으로 이전부터의 호남의 개혁성향 엘리트들의 리더였고 입헌운동, 보로운동 등 청말부터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호남성 자의국(諮議局)의장이 되었고 1911년 호남성 참의원 의장에 임명되었다. 청원운동에 참여하여 예비입헌을 요구했으나 청조의 태도가 미온적이자 실망하여 호남으로 돌아가 혁명당원과 접촉했고 곧이어 신해혁명이 발생하면서 호남의 사회적 안정과 내부 대립 회피를 주장하여 황흥을 비롯한 혁명당원들의 지지를 받아 1911년 10월 호남도독에 추대되었다. 이후 타협적인 정국 운영으로 사회적 혼란과 군의 분열을 막으면서 호남의 질서를 안정시키는 한편 지방 신사층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5만명 규모로 폭증하여 기존 군사예산의 4배나 되는 예산을 잡아먹던 호남군의 대규모 군대 해산을 단행했다. 이를 위해 난징 임시정부의 도움을 얻어 자오헝티의 광서군이 호남에 파견, 그들의 감독 아래에 혼란 없이 군대 해산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이후에 북양군벌이 손쉽게 호남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12년 국민당에 가입했다.2.2. 계축전쟁에서 호법전쟁
위안스카이의 임시 대총통 취임 이후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3독 해직 사건 등의 정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탄옌카이는 성재정 상태가 좋지 않고 호남의 군사력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관망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1913년 7월 25일, 국민당의 압력으로 호남성의 독립을 선언했다. 허나 강서, 사천의 혁명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8월 13일 독립을 취소했다. 이 일로 위안스카이에게 찍힌 탄옌카이는 1913년 10월, 차오쿤의 3사단을 비롯한 북양군이 악주에 남하한 상태에서 도독에서 해임되고 북양군벌 탕향명이 도독이 되었다. 이후 호남은 3년 동안 북양군벌의 통치를 받았으나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면서 호국전쟁이 발생, 청첸을 비롯하여 호남을 떠난 과거 호남군의 장령들이 대거 복귀하여 반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북양군벌이 호남에서 축출되고 탕향명은 1916년 7월 5일 도주했다. 이후 호남의 원로 유인회가 호남도독 겸 성장에 추대되었으나 본인이 고사하고 호남 출신 황싱, 차이어 등이 거론되었으나 그들 역시 모두 거절하고 대신 탄옌카이를 적극 추천하여 1916년 8월 4일 탄옌카이는 다시 호남도독 겸 성장에 추대되었다. 호남의 반발을 의식한 북양정부도 호남성장과 도독을 자신들이 임명하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탄옌카이를 승인했다.다시 호남성을 지배하게 된 탄옌카이는 1916년 7월부터 9월에 걸쳐 다시 재병작업에 착수, 청첸의 군대를 정리하고 자오헝티 군대를 호남군으로 재편하면서 청첸을 숙청하고 돤치루이의 지방군 정리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이 신뢰하는 자오헝티를 중심으로 한 군대를 잔존시켰다. 또한 호국전쟁 과정에서 조직된 여러 민군을 조직하여 전문적 군대로 재편했다. 이 시기에 탕성즈, 루디핑, 예카이신 등 상계군벌의 중요 인물들이 대대장, 연대장을 거치면서 성장했다. 그러던 중 1917년 8월, 돤치루이가 자신의 측근인 육군부 차장 푸량쭤를 호남독군에 임명하면서 1917년 9월 탄옌카이는 성장을 사직하고 상하이로 떠나야 했다. 이어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호남성은 호법군과 북양군의 전쟁터가 되어 전란으로 인해 극도로 황폐화되었다. 돤치루이는 새로운 호남독군으로 장징야오를 임명하였는데 이때 탄옌카이는 자신이 공을 세우고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해 돤치루이에게 불만을 품은 직예군벌의 우페이푸와 접촉하여 호남에서의 정전을 도모하였다. 탄옌카이의 중재로 5월 25일 상군의 각 대표와 직군의 각 대표가 담판하여 6월 15일 정식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 호남에서의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돤치루이는 우페이푸를 대신하여 니쓰충을 파견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1918년 5월, 전계군벌 탕지야오와 계계군벌 루룽팅, 정학회 정객 천춘쉬안이 결탁하여 남방 군정부를 대원수제에서 7인 총재제로 개편했고 실망한 쑨원은 광저우를 떠났다. 1918년 8월 21일, 천춘쉬안이 수석총재에 취임하자 우페이푸는 펑궈장 앞으로 내전 중지를 호소하는 통전을 보냈고 이어 천춘쉬안이 찬성 통전을 보내면서 탄옌카이, 청첸 등 호남의 실력자들도 연명으로 화평통전을 보내면서 상계군벌은 한동안 직예군벌과 협력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런 남북화평의 분위기에 편승한 탄옌카이는 계계군벌, 직예군벌과 11월 28일 구국동맹군조약을 체결하고 계계군벌의 지지를 받아 영주에서 재야독군에 취임, 영주행영을 설치하면서 다시 한번 호남의 권좌를 꾀하였다.
2.3. 5.4운동과 구장운동
이후 호남에서 탄옌카이는 상군총사령관 청첸과 대치하면서 호남의 패권을 다투었다. 1919년 6월 청첸이 북양정부와 내통하여 광저우의 호법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한 밀서가 적발되면서 자오헝티 등 상군의 주요 장령들은 청첸이 적과 내통했다고 비난하며 그와 단절했고 청첸은 호남을 떠나야 했다. 이 사건 덕분에 청첸의 휘하 병력은 상군 1사단장 자오헝티가 흡수하였으며 1919년 7월, 탄옌카이는 우페이푸의 양해를 얻어 광동군정부에 의해 상군 총사령관 겸 호남독군에 취임하여 북양정부가 임명한 장징야오와 대치하였다. 탄옌카이는 청첸과 탄옌카이 어느 쪽에도 충성하지 않던 호남 서부군벌들을 차례로 진압하며 1919년 11월 즈음에 장징야오가 지배하는 지역을 제외한 전 호남성을 장악했다. 하지만 탄옌카이는 과거의 문치독군에서 군사실력자로 거듭났음에도 장징야오를 축출할 정도의 힘을 갖추지는 못했다.그러던 중 1919년 5.4운동이 벌어지면서 호남성의 세력균형이 깨졌다. 장징야오는 호남성에 가혹한 수탈과 폭력정치를 자행하였으며 농민협회, 공인협회, 교육협회, 성의회를 모두 자신의 측근들이 장악한 어용기관으로 만들었고 교육경비를 군비로 횡령하는가 하면 은행을 통해 지폐를 남발하여 호남성 인민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또한 호남성의 중요한 자원들을 마구 매각하여 호남성 인민들의 분노를 샀다. 결국 학생들을 중심으로 호남의 각계 단체들이 5.4운동에 호응하여 반일운동을 벌였는데 장징야오 정권이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자 분노한 호남인들의 반일구국투쟁은 반장징야오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1920년 5월 16일 장사에서 호남인민선언문이 발표되어 장징야오 타도를 선포했다.
장징야오는 병(兵)을 이끌고 호남에 와서 시민, 학생들과 싸우고, 그 악질 측근들이 장사를 누비며 암살과 착취를 일삼았다. 장징야오가 하루라도 빨리 죽지 않으면 우리 호남인은 하루도 살수가 없다. 호남인의 이같은 비참함에 이른 이유를 따져보면 그 원인이 군벌에서 비롯되어 우리 인민을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자연히 깨닫는다. 호남은 현재와 미래의 호남지역에서 정당한 직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호남이다. 호남의 일은 마땅히 전체 호남 인민들이 자결해야 하니, 이 자결을 돕는 자는 호남인의 친구이고 이 자결을 방해하는 자는 호남의 원수라고 할 것이다. |
우페이푸와 펑위샹의 지원 아래에 장징야오를 축출하자는 구장운동이 적극적으로 벌어졌고 호남인민들은 탄옌카이와 호남서부 군벌, 심지어 계계군벌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며 장징야오 축출을 호소했다. 탄옌카이는 이에 즉시 응하여 우페이푸, 루룽팅과 연계하여 구장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우페이푸는 탄옌카이와 철병협정을 체결하고 안휘군벌과의 일전을 위해 호남에서 철수했고 철수하는 직계군을 따라 상군이 북상하여 주요 요충지를 차례로 점거하고 장징야오 정권을 공격했다. 장징야오는 2개 사단을 동원해 상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1사단장은 도주하고 2사단장은 전사하여 결국 6월 11일 장사를 버리고 악주로 도주했다. 6월 12일 상군이 장사를 점령하면서 장징야오 정권은 붕괴되었고 탄옌카이는 호남에 주둔한 모든 북양군벌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호법전쟁 이래 진주했던 펑위샹 등 직계, 환계, 봉계 군대가 모두 철수하였다. 장사에 입성한 탄옌카이는 호남독군, 호남성장, 상군총사령관 직을 독점하면서 제3차 탄옌카이 정권을 수립하여 호남 자치를 주장, 연성자치론을 내세웠다. 하지만 탄옌카이파의 독주는 상군 내부의 자오헝티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2.4. 자오헝티의 집권
장징야오 축출 이후 탄옌카이는 1920년 9월 13일 자치방법을 토론하며 화폐 발행과 증세를 통해 거액의 군비 요구를 충당하려 했는데 호남성 의회는 이를 '포악한 것을 포악한 것으로 바꾸는 것'에 불과한 일이라고 여겼다. 여기에 상군 내부의 알력이 거세지면서 탄옌카이가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상군 내부의 청첸 계열의 파벌이 반란을 일으켰다. 쑨원과 가까워던 청첸파 장령들은 탄옌카이가 자신들을 백안시하고 쑨원, 천중밍 연합과 루룽팅의 싸움에서 탄옌카이가 중립을 표방하며 방치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더 이상 호남의 정국을 어지럽히는 객군마저 없어지자 1920년 11월 평강정변을 일으켜 탄옌카이의 주요 심복들을 암살하고 탄옌카이의 하야를 요구했다.당시 호남 최고 군사 실력자였던 자오헝티는 탄옌카이에게 불만이 많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호남의 요직을 탄옌카이파가 독점하는 점이라거나, 과거 1918년 탄옌카이가 장징야오를 축출하면 군정은 자오헝티에게, 민정은 임지우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자 자오헝티는 겉으로는 탄옌카이를 극히 존대하면서도 내심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여러차례 하야 소동을 벌이며 불편한 심정을 드러낸 바가 있었다. 결국 자오헝티는 이기는 편에 붙겠다는 태도를 보이며 탄옌카이의 구원 요청을 묵살했고 결국 탄옌카이는 11월 23일 하야하고 호남을 떠났다.
탄옌카이의 하야 이후 성의회의 추대로 자오헝티가 상군 총사령관, 임지우가 호남성장에 취임했다. 이후 호남성은 자오헝티가 탄옌카이계의 잔여세력과 힘을 합쳐 '병향지급 투쟁'을 통해 자신을 몰아내려고 한 청첸계를 숙청하면서 호남성은 자오헝티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2.5. 국민당 합류와 담조전쟁
호남에서 축출된 탄옌카이는 상하이에 은거했는데 쑨원의 중국국민당이 호남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대표를 파견하여 접촉하는 한편 1922년 북벌을 선포하면서 탄옌카이를 북벌토역상군총사령관 겸 호남성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호남 내부에서도 북벌 호응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탄옌카이를 총사령관에 추대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탄옌카이가 상하이에 거주하는 동안 자오헝티는 탄옌카이에게 호남으로 돌아와 성정을 같이 맡자고 회유했으나 탄옌카이는 쑨원의 회유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자오헝티와 점점 더 대립하게 되었다.1922년 6월 임시 약법과 구국회가 회복된 이후 대총통 리위안훙으로부터 내무총장에 추대되었으나 탄옌카이는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 영풍함 사건이 벌어져 쑨원이 상하이로 피신하자 1922년 늦여름, 탄옌카이는 쑨원과 회동하여 정식으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때 호남성장 선거에 출마하여 아직 호남 내부의 세력이 건재함을 보여주었으며 완전히 연성자치론을 포기하였다. 이후 쉬충즈, 양시민, 유진환의 도움으로 천중밍이 축출되고 국민당이 다시 광저우롤 장악하자 탄옌카이는 쑨원과 함께 광저우로 남하하여 1923년 대원수부 대본영 비서장 겸 건설부장에 취임, 내무부장을 역임했다. 1923년 6월, 9.1 정변을 계기로 호남에 출병하여 담조전쟁을 통해 자오헝티를 몰아내고 호남성을 거의 장악할 뻔 했으나 우페이푸가 자오헝티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면서 철수하여 광동정부에 완전히 귀속되었다. 이후 장덩쉬안 등과 접촉하며 봉천군벌과 국민당의 동맹을 꾀했다.
2.6. 국민혁명
1924년 중국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면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24년 강절전쟁이 터지자 북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장제스와 함께 광저우 상단 사건 진압을 맡았다. 1925년 8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후한민, 쉬충즈 숙청에 앞장서 왕징웨이와의 합작을 통해 최고 군사실력자가 된 장제스와 대립했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 조직 이후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5년 7월 6일 군사위원이 되었다. 국민혁명군이 창설되자 국민혁명군 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이 터지자 장제스의 편을 들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장제스 진압을 요청한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의 편을 들지도 않고 중립을 유지하여 왕징웨이 실각을 초래했다. 왕징웨이 사퇴 이후 국민정부 주석 대리를 지냈다. 1926년 1월 중국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재선,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2기 2차 중앙전체회의에 대표로 참석했다.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호남군을 이끌고 2군 사령관을 맡았으며 영왕운동과 천도논쟁 중에 장제스를 지지하여 장제스와 함께 난창에 체류했으나 1927년 3월 2기 3중전회 이후로 우한 국민정부 상무위원에 취임, 우한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하지만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마일사변 등지로 혼란해진 우한이 국공결렬을 결정하고 영한합작이 이루어지자 장제스를 지지했다. 영한합작 과정에서 쑨커와 함께 후한민이나 서산회의파같은 반 우한 세력을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갔고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설립 이후 왕징웨이, 후한민, 차이위안페이, 리례쥔과 함께 국민정부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 1월,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가면서 장제스 복직에 힘을 실어주었다.[1]
1928년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민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 이후 국민정부조직법이 발표되면서 10월 8일 행정원장에 임명, 장제스에게 주석 자리를 내주고 행정원장에 취임했다. 동북역치에도 조금 관여했으며 1929년 2기 5중전회에서 정치분회 폐지 결정 이후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3월, 국민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재선되었다.
2.7. 말년
1929년 편견회의에 참석하여 재병을 감독하였으나 이에 반발한 우한 정치분회 주석 겸 군사 참의원장 리쭝런이 호남 사건을 일으켜 탄옌카이의 사람인 호남성 주석 루디핑을 무단 해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리쭝런에게 탄옌카이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으나 리쭝런은 정당한 권한을 집행한 것일 뿐이었다고 맞섰고 결국 1929년 1차 장계전쟁이 발발했다. 탄옌카이는 반장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를 옹호하였다.이후 행정원장으로 재직하던 중 중원대전의 막바지인 1930년 9월 22일, 난징에서 병사했고 국장이 거행되었다.
3. 주요 경력
난징 국민정부 역대 주석 | |||||||
난징 국민정부 수립 | → | 1대 | → | 2대 | |||
탄옌카이 ( 1928년 2월 7일 ~ 1928년 10월 10일) |
→ | 장제스 |
난징 국민정부 역대 행정원장 | |||||||
북양정부 대행 국무총리 판푸 | → | 1대 | → | 대행 | |||
탄옌카이 ( 1928년 10월 10일 ~ 1930년 9월 22일) |
→ | 쑹쯔원 |
호남성 역대 지방장관 | |||||
신해혁명 | → | 1대 호남도독 | → | 2대 호남도독 | |
탄옌카이 ( 1911년 10월 ~ 1913년 10월) |
→ | 탕향명 | |||
임시 호남도독 겸 성장 | → | 1대 호남독군 | → | 2대 호남독군 | |
유인희 | → |
탄옌카이 ( 1916년 8월 4일 ~ 1917년 8월) |
→ | 푸량쭤 | |
5대 호남독군 | → | 6대 호남독군[2] | → | 7대 호남독군 | |
장징야오 | → |
탄옌카이 ( 1919년 7월 ~ 1920년 11월 23일) 장징야오 ( 1918년 2월 ~ 1920년 6월) |
→ | 자오헝티 |
4.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湖南軍閥政權의 崩壞와 變貌 : 唐生智의 執權過程(1923-1926)을 중심으로, 김세호, 중국근현대사연구 3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湖南 軍閥政權의 再編 : 北伐時期(1926-27) 唐生智 政權의 정치적 성격, 김세호, 동양사학연구 86권 86호, 동양사학회.
- 民國 初期(1912 - 1920) 湖南軍閥의 形成, 김세호, 동아시아역사연구 4권, 동아시아역사연구회.
- 1920年代初 조항척 軍閥政權의 政治的 性格, 김세호, 역사학보 113, 역사학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5. 관련문서
- 신해혁명
- 쑹자오런 암살 사건
- 선후대차관 사건
- 계축전쟁
- 중화민국 국회 해산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안직전쟁
- 1차 직봉전쟁
- 담조전쟁
- 회선 사건
- 강절전쟁
- 2차 직봉전쟁
- 북경정변
- 제노전쟁
- 선후회의
- 1차 국공합작
- 국민당의 1차 동정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국민당의 2차 동정
- 서산회의
- 중산함 사건
- 국민혁명
- 편견회의
- 호남 사건
- 반장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