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운동(保路運動)
1. 개요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이권수호운동의 일종. 특히 쓰촨성의 것이 유명하며, 줄여서 "보로"라고도 부른다. 신해혁명이 발생하게 된 직접적 원인 중 하나다.2. 배경
청나라는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 등 몇 차례 개혁이 시도될 때마다 무술정변이나 의화단 운동과 같은 반동으로 실패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백성들은 물론 지방의 사족 등 유력층조차 청나라를 불신하게 되었고, 유럽 열강들과 미국의 침탈도 심화되었다. 결국 서태후 등 기득권 보수파조차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깨닫고 입헌군주제와 지방자치를 도입하고[1] 군제와 경제, 교육제도 등을 개혁하는 총체적 개혁인 신축신정을 추진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인 철도정책도 입안되었는데,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던 민자철도를 국유화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차관을 들여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미 산업화를 마친 서구열강보다 자본과 기술력이 부족하여 공사가 매우 더디었기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자철도들은 지방 유지들부터 일반 대중까지도 폭넓게 참여하여 자본을 조성했는데, 청나라 중앙정부는 이를 보상해줄 재원이 없었고,[2] 이권수호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족자본 성격까지 띠었기에 반발이 극심했다. 심지어 개중에는 외국에 부설권이 팔렸다가 다시 환수되어 민간에 풀린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다시 되돌리게 된 셈이었다.
3. 전개
청나라에서 추진한 국유화와 외자 유치는 한족 대중으로 하여금 이민족인 만주족이 외세로서 서구열강과 결탁하는 것으로 비추어졌고, 각지 신사 등 상류층도 재산권과 참정권을 침해받아 반발했다. 그 결과 곧 철도를 보호하는 운동 즉 보로운동이 발생했다. 초기에는 주로 대중 시위와 지방의회인 자의국을 중심으로 철회안을 상주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와 대중 간 갈등이 첨예해졌다.그 중에서도 가장 격심했던 곳은 투자금 자체가 커서 현금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동자나 교사 등 일반인의 지분이 컸던 쓰촨성이었다. 처음에는 입헌파 유지들을 중심으로 합법단체인 쓰촨보로동지회가 결성되어 시위와 동맹휴학, 동맹휴업 등 비교적 평화로운 방식으로 저항했으나, 청 정부의 무시와 탄압 속에서 혁명파인 중국동맹회가 동지회 내 주도권을 잡으면서 저항방식도 거세졌다. 이에 정부가 아예 지도부를 체포하고 석방요구집회를 유혈진압하면서 시위대도 쓰촨보로동지군을 결성해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쓰촨 보로운동은 곧 쓰촨성의 성도(省都)인 청두가 함락되고 총독 조이풍이 붙잡혀 참수될만큼 격렬하고 규모가 커졌다.
4. 결과
단순한 소요를 넘어서 혁명파의 지도를 받는 민란으로 격화되면서 이미 지방당국 차원에서 진압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으므로, 중앙정부로서는 다른 지역의 군대를 불러서 진압에 나서야만 했다. 이때 동원된 것이 후베이 신군이었는데, 당시 중국동맹회가 혁명을 위해 후베이 신군의 인원 상당수를 암암리에 포섭해두었던 까닭에[3] 이 공백기를 놓치지 않고 우창에서 봉기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나라가 붕괴되고 신중국의 성립으로 이어진 신해혁명이다.5. 관련 문서
[1]
중국사 최초의
헌법인
흠정 헌법 대강이 이때 탄생했다. 다만, 실제로는
독일 제국이나
대한제국처럼 외견상 입헌군주국(사실상
전제군주국)이었다고 평가받는다.
[2]
기존 민간투자자들에게
주식 대신
공채를 나누어줬는데, 이것도 철도가 완료된 뒤에야 실제 지급에 들어가서 신용을 얻지 못했다.
[3]
이전에
쑨원은 변방을 거점으로 삼고 해외지원을 중시하는 "변경혁명"을 시도했으나 광주봉기 등 일련의 실패로 말미암아 동맹회 내에서 실각했는데, 이후 동맹회는 몇 차례 성급하게 봉기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쑹자오런을 중심으로 이전과는 반대로 내부 중심지에서 혁명을 시작해나가는 "장강혁명"이라는 이론과 전략을 세웠고, 이를 위해 사회 각층 및 군 조직 내에 침투하여 혁명세력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동맹회에서는 이를 "혁명화의"라고 불렀는데, 후베이성에서 꽤 성과를 거두어서 봉기 직전 후베이 신군의
사병 중 1/3 정도는 혁명파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