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군벌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북양군벌 | 염계군벌 | 서북군벌 | 상계군벌 | 천계군벌 |
계계군벌 | 월계군벌 | 전계군벌 | 검계군벌 | 국민혁명군 | }}}}}}}}} |
滇系軍閥 |
Diān Clique |
1. 개요
운남성(현재의 윈난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민국의 지역군벌. 계계군벌과 함께 서남군벌로 꼽히는데 중화민국 초기 역사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탕지야오를 중심으로 하는 구 전계군벌과 룽윈을 중심으로 하는 신 전계군벌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구 계계와 신 계계를 엄격히 나누는 계계군벌과 달리 그리 엄격하게 구분하진 않는다. '운남의 군벌'이라고 그냥 운남군벌이라고도 부른다. 眞과 滇을 혼동하여 진계군벌이라고 잘못 읽는 경우도 있다.2. 역사
시초는 청말에 운남에 주둔하던 19진이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운남육군사관학교장 차이어가 운남성의 성도 곤명에서 봉기를 일으켜 운남성을 장악, 운남도독으로 추대되어 운남군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가 차이어의 영향력을 경계하여 1913년 베이징으로 소환하고, 탕지야오가 후임 운남도독으로 임명받아 운남의 지배자가 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베이징을 탈출한 차이어, 진보당 당수 량치차오 등이 운남에 모여들어 운남군을 호국군으로 개칭하고 위안스카이의 칭제에 대항하여 호국전쟁을 일으켰다. 이 무렵 운남군은 3개군이었다가 8개군 7만 명으로 확대되었고, 호국전쟁이 위안스카이의 제제 취소와 사망으로 끝난 뒤에는 사천, 귀주에 큰 영향력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1917년 부원지쟁을 틈타 안휘독군 겸 장강순열사 장쉰이 장훈복벽을 일으켰다. 전계군벌은 이를 토벌하겠다고 통전했지만, 장훈복벽을 진압하고 다시 집권한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했다. 전계군벌은 계계군벌의 수장 루룽팅과 상하이에 있던 쑨원을 광저우로 초빙하여 그곳에 호법정부를 수립,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전계군벌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서남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함이었기 때문에 쑨원이나 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호법전쟁 발발 이후 원하는 바를 얻자 즉각 북양군벌과 화친을 도모하하고, 1918년에는 정학회 수장 천춘쉬안과 결탁하여 군정부 개조와 쑨원 축출을 계획했다.
1920년에는 다시 입장을 바꾸어 쑨원이 월계군벌 천중밍과 합작하여 루룽팅과 천춘쉬안을 광저우에서 축출하고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는 데 손을 거들었지만, 이듬해(1921) 탕지야오 휘하에 있던 구핀전이 사천군벌 웅극무에게 지원받아 반란을 일으켜 탕지야오를 축출하고 쑨원의 북벌에 동조하자 내분이 벌어졌다. 이후 구핀전의 잔여세력인 양시민이 천중밍 토벌에 참가하여 국민당에 합류했지만, 이후 탕지야오ㆍ 천중밍ㆍ 돤치루이 등과 결탁하여 태업과 명령불복종을 일삼았지만, 끝내는 1925년 대리대원수 후한민이 군민재정 통일을 선언함에 반발하여 계계군벌 유진환과 합세,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1922년 탕지야오는 고품진을 사살하고 운남성장에 취임, 운남의 지배권을 다시 되찾고 총 8만 군세를 휘하에 두었다. 그러나 중국국민당과 관계가 악화되고 1925년 쑨원 사후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다가, 국민당에 복종하는 리쭝런ㆍ 바이충시 등 신 계계군벌에게 반격받아 박살났다.
|
룽윈의 정변 |
이후 탕지야노는 천중밍과 결탁하고 민치당(民治黨; Democratic Party)을 조직하여 국민당을 견제하려 했지만, 1927년 휘하에 있던 룽윈 등이 정변을 일으켜 민치당을 해체하고 탕지야오를 실각시킨 뒤 전계군벌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후 룽윈은 국민혁명군에 합류하면서도 한동안은 실질적으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남았다. 그러나 제5차 초공작전 이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붕괴되자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중국공산당과 홍군이 대장정에 올라 운남성으로 들어오자 중앙군이 이들을 토벌하고자 역시 운남에 진입했다. 운남에서 중앙의 힘이 커지자, 롱윈 세력도 차차 중앙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 3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이전과 같은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항일전쟁에 나섰다. 왕징웨이는 왕징웨이 공작으로 일본에 포섭되어 일본과 화평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전계군벌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끝난 직후 장제스는 전계군벌 숙청을 단행하여 룽윈을 운남성장에서 해임하고, 대신 룽윈의 의형제인 룽한을 운남성장에 임명했다. 1948년 전계군벌의 수장 룽윈이 영국령 홍콩에 망명하여 전계군벌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룽윈은 중공에 귀순했고 룽한 등도 12월 9일, 사천군벌 류원후이 등과 함께 서남기의를 일으켜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했다.
3.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의 군벌정치 연구(1916~1928), 최관장, 중국연구 20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 중국 군벌의 성쇠와 국민정부에 미친 영향, 오수열, 한국 동북아 논총 18권 2호, 한국동북아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