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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01:21:52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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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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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 황태자 · 역대 청의 황녀
※ 기록이 있는 인물만 기재
}}}

청의 예친왕(睿親王)
신규 책봉 예충친왕 도르곤 태묘 배향 }}}
<colbgcolor=#ebbd1a><colcolor=#00386a>
황부섭정왕
청 초대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ᡩᠣᡵᡤᠣᠨ
파일:Dorgon,_the_Prince_Rui_(17th_century).jpg
출생 1612년 11월 17일
건주여진 허투아라 숙수후부
(現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사망 1650년 12월 31일 (향년 38세)
청나라 새북 객라하둔행궁
(現 허베이성 청더시 롼허)
능묘 없음
재위기간 예친왕
1636년 ~ 1650년 12월 31일
황부섭정왕
1643년 10월 8일 ~ 1650년 12월 31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bbd1a><colcolor=#00386a> 성씨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중국식 : 다이곤(多爾袞)
만주어 : 도르곤(ᡩᠣᡵᡤᠣᠨ)
부모 부황 태조 천명제
모후 효열무황후
배우자 복진(福晋) 외 기타 처첩
자녀 동고(東莪)
묘호 성종(成宗)[A]
시호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
[A]
→ 예충친왕(睿忠親王)
별호 패륵(貝勒) → 고산패륵(固山貝勒) → 화석예친왕(和碩睿親王) →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 → 황숙섭정왕(皇叔攝政王) →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지위 호쇼이 예친왕(和碩睿親王)[3](1636 ~ 1650)
섭정왕(攝政王) (1643 ~ 1644)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 (1644 ~ 1649)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1649 ~ 1650)
}}}}}}}}}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제위 쟁탈전2.3. 명나라의 멸망과 청군 입관2.4. 권력 강화와 대륙 통치2.5. 사망과 작위 박탈, 그리고 부관참시2.6. 신원 회복
3. 평가4. 조선과의 관계5. 가족 관계6. 창작물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청나라 초기 군인이자 정치가. 청나라의 명재상이었고 섭정을 맡았다. 청의 태조 누르하치의 14남으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며, 8남인 형 홍타이지 밑에서 십수년 연상의 조카와 형들을 압도하는 군공을 세우며 중용됐다. 청나라 팔기군 중 정백기의 수장이었으며, 청나라 최초의 섭정왕이 되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섭정을 받았던 순치제에 의해 성종(成宗) 의황제(義皇帝)로 추존되었으나 생전 국권 찬탈의 혐의가 있었다는 이유로 삭탈되어 폐서인에 추탈되었고, 건륭제 시기 예충친왕(睿忠親王)으로 복권되어 황족에 편입되었으나 황제의 신분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황부섭정왕으로서 순치제 재위 초기 7년간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실권을 행사했다. 청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것은 도르곤이라고 후대에 재평가된다.

조선과는 악연이 있는데, 병자호란 때 쳐들어와 강화도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사로잡은 장본인으로서 그가 왕자들을 데리고 남한산성 인조를 압박하자 조선의 저항 의지가 꺾였다.

2. 생애

2.1. 초기

1612년 11월 17일, 당시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떨치던 건주여진의 추장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14째 아들로 태어났다. 도르곤은 만주어로 오소리를 뜻한다.

도르곤의 어머니는 누르하치의 세 번째 정실, 즉 암바푸진(amba fujin 大福晉, 대복진을 뜻함) 울라나라 아바하이였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고 그녀의 자식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컸다. 도르곤이 5살 때인 1616년 1월 누르하치는 칸을 자칭하며 건국했고, 1618년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정하니 바로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이다.

1626년(천명 11년) 누르하치가 사망하자[4] 누르하치의 아들들 가운데서 8남인 형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가 차기 칸(한)으로 옹립되었다. 칸이 된 홍타이지는 버일러(beile, 貝勒 패륵)[5]들의 지지하에 도르곤 형제의 모친인 울라나라씨를 누르하치의 순장 대상으로 지목하여 강제로 죽인 후 순장했다.[6] 울라나라씨의 소생인 도르곤과 그의 형 아지거, 어린 동생 도도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홍타이지는 그들을 모두 버일러에 봉하여 조정에 출사케 하였다.[7]

1628년(천총 2년), 홍타이지는 군사를 몰아 몽골의 차하르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17세의 도르곤도 종군하였다. 도르곤은 선봉에 서서 차하르의 군사를 대파하였고 1200여 명의 차하르인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1635년(천총 9년) 2월에는 직접 군사를 몰고 몽골을 공략하여 에제이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옛 원나라의 옥새를 획득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크게 치하하고 이듬해인 1636년(천총 10년), 국호를 금에서 청(淸)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도르곤은 그간의 전공으로 호쇼이 친왕(hošo-i cin Wang 和碩親王)에 책봉, 머르건 친왕(mergen cin wang 睿親王 예친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같은 해에는 병자호란시 홍타이지가 친정한 서로군과 별개로 두만강을 건너 들어온 동로군 별동대를 이끌며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때 홍타이지의 장남이자 도르곤의 세 살 위 조카인 호오거도 도르곤을 따라 별동대에 종군했다. 홍타이지의 본군과 합류한 후에는 조선의 왕자인 봉림대군 인평대군, 그리고 세자빈 강씨가 피신해 있던 강화도를 공략하였으나 홍타이지가 엄명을 내려 조선의 왕족들을 살육하지 말라 하니 그 명을 쫓아 포격을 하는 대신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결국 강화를 지키던 봉림대군은 농성을 풀고 도르곤을 성 안으로 영접하였고 도르곤은 대군들과 세자빈 강씨를 사로잡아 남한산성에 숨어있던 조선의 국왕 인조를 압박하였다. 이듬해인 1637년(숭덕 2년, 조선 인조 14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를 올렸다. 전쟁이 끝나자 청군은 조선인 포로와 인삼, 금 등의 공물과 공녀 수백여 명을 사로잡아 수도인 묵던으로 귀환하였다.

1638년(숭덕 3년) 8월,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봉명대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몰아 산해관을 북서쪽으로 우회하여 명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 때 홍타이지의 장남이자 도르곤의 세 살 위 조카인 호오거도 도르곤을 따라 종군했다. 이후 하북성과 산서성의 여러 도시를 공략, 이듬해인 1639년(숭덕 4년) 3월에야 묵던으로 회군하였다. 도르곤은 성 36곳을 함락시키고 6곳의 투항을 받아냈으며 12만여 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1641년(숭덕 6년)에는 홍타이지의 명을 받고 정친왕 지르갈랑과 함께 10여만의 군사를 이끌고 산해관을 공략하였다. 전선 뒤에서는 황제인 홍타이지도 친히 참전하여 응원군을 이끌고 있었다. 명군에서는 당시 북방의 행정과 병력을 관장하던 계료총독 홍승주(洪承疇)가 송산성에서 지휘하였으나 송산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멸하고 성이 무너진 후 생포, 투항하였다. 이후 예전에 홍타이지에게 금주성의 병력을 설득해 항복을 시키겠다 둘러대고는 금주성에 들어가 지휘관이 되어버린 조대수(祖大壽) 역시도 생포하였다. 이로써 명나라는 산해관 이북의 땅을 모두 잃었고 청나라는 요동을 차지하였다.

2.2. 제위 쟁탈전

1643년(숭덕 8년) 9월 21일, 홍타이지는 아무런 유조도 남기지 않은 채 52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홍타이지는 생전에 아무런 후계자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은 큰 파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홍타이지 사후 5일 후에 당시 황족 중 가장 서열이 높았던 누르하치의 차남이자 도르곤의 이복형 예친왕(禮親王) 다이샨은 성경 황궁의 숭정전(崇政殿)에서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하여 다음 황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의정왕대신회의가 소집하기 직전, 도르곤과 도르곤의 세 살 위 조카이자 홍타이지의 장남인 숙친왕 호오거(豪格)가 각축을 벌였다. 도르곤의 친형 무영군왕 아지거와 동복 아우인 예친왕(豫親王) 도도를 비롯한 당여들은 그의 서열이 호오거보다 위이고 전공 또한 호오거보다 높은 데다 원래 누르하치가 도르곤을 한에 앉히려 하였으나 그 자리를 홍타이지를 비롯한 4대 버일러[8]가 가로채갔다고 주장하였다.[9] 당시 도르곤은 팔기군 중 정백기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동생 도도는 양백기를 관장하며 정백기와 양백기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호오거는 정람기를 거느리고 있었고 정친왕 지르갈랑은 양람기[10]를 거느리며 호오거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 사이에 의정왕대신회의의 의장인 다이샨이 정홍기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홍타이지의 직속기인 양황기와 정황기의 무장들이 숭정전을 둘러쌓다. 이 무력시위는 반드시 홍타이지의 아들이 황위를 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들은 홍타이지의 서장자인 호오거가 황위를 잇고 정실인 숭덕오궁 소생의 황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9남 푸린을 태자로 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이샨은 호오거가 이 주장을 받아들이길 바랐다. 그러나 호오거는 황기 무장들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복이 없고 덕이 옅어,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회의에서 퇴장했다.
호오거가 퇴장한 직후, 황기 무장들이 회의장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 "선제의 아들을 황제로 세우지 않으면 죽어서 지하에 계신 선제를 쫓는 것이 낫습니다." 이는 푸린을 옹립하지 않으면 전부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이런 살벌한 상황 속에서 아지거와 도도가 도르곤을 지지했으나, 도르곤은 황기 무장들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도도는 도르곤이 강경하게 나설 생각이 없자 누르하치의 유조에 자기 이름이 있었다며 자신의 황위 계승권을 주장했으나 도르곤이 호응해주지 않으니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황기 무장들 간의 압박감 속에서 다이샨은 부담감에 퇴장하고, 아지거도 뒤이어 퇴장한다. 이렇게 되자 회의장엔 도르곤, 도도, 지르갈랑만 남았다.
도르곤은 이 자리에서 황위 계승권을 주장했다간 목이 날아갈 판이라 어쩔 수 없이 중재안을 내놓는다. 푸린을 황제로 옹립하고 도르곤 자신과 지르갈랑이 섭정왕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회의장에서 도르곤은 황기 무장 이백 여명과 함께 새 황제를 보좌하고 역심을 품지 않겠다고 맹세하는데, 이 황기 무장 이백 여명은 훗날 도르곤이 죽은 직후 그의 측근들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정된 뒤로도 황위를 둘러싼 소동이 있었다. 다이샨의 아들인 패자 쇼토(다이샨의 2남, 석탁)와 다이샨의 손자인 영군왕 아달리(다이샨의 3남 살합린의 1자)가 몰래 도르곤을 제위에 앉히려 도모하였다가 발각되었다.[11] 이에 도르곤은 이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항변하고 둘을 바로 참형에 처한 후 자신이 제위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12]

2.3. 명나라의 멸망과 청군 입관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르갈랑은 섭정왕이 되자 친왕, 군왕, 패륵 등의 종친들이 부족 업무를 관장하는 것을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여 순치제 초기의 청나라 조정은 각부 패륵들이 중심이 된 합의정체에서 섭정왕 2인에 의한 통치 체제로 변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의정왕대신회의의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다. 비록 도르곤은 좌섭정왕으로서 병권을 책임지고, 지르갈랑은 우섭정왕으로 조정의 국사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청나라의 모든 권한은 순치제 즉위 직후 이미 도르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를 눈치챈 지르갈랑은 조정의 의결권까지 그에게 넘겨줌으로써, 도르곤은 단순히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섭정왕이 아닌 사실상의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순치제가 즉위한 이듬해인 1644년(순치 원년) 4월, 숙친왕 호오거의 수하 하락회(何洛會)가 도르곤에게 밀고하였는데 호오거가 도르곤을 죽이고 자신이 섭정왕에 오를 것이라고 모함하였다. 이미 황위 계승을 놓고 호오거와 극심한 알력을 빚었던 도르곤은 이 말을 믿고 즉시 호오거를 체포, 숙친왕의 작위를 박탈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 당여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이 사건으로 도르곤은 자신의 부하들을 호오거가 거느리던 정황기와 양황기의 요직에 임명하며 청나라의 최정예 부대인 상삼기(上三旗)의 지휘권을 손에 넣었다. 이후 호오거는 백의종군으로 군공을 세워 같은 해 10월에 숙친왕으로 복작되어 1646년(순치 3년)에 사천 지역을 평정하는 전과를 올리지만 같은 해 3월 6일에 다시 죄를 받아 작위를 박탈당한 채 유금을 당하였으며, 1648년(순치 4년)에 연금에서 풀리지 못한채 사망하였다. 호오거 사후에 도르곤은 호오거의 아내를 자신의 잉첩으로 취하기도 하였다. 도르곤은 이렇게 자신에게 대항하던 이들을 제거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발판을 마련하였다.

같은 해,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명나라는 이미 틈왕(闖王)을 자처한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 세력을 급격히 잃어갔고 이자성군은 수도인 북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1644년(순치 원년, 명 숭정 17년) 4월 21일 이자성의 군대는 북경성에 공격을 가하였고 그 다음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 뒤의 후원인 매산에서 목을 매 자진하였다. 이로써 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에 의해 건국된 이후 277년만에 그 종말을 고하였다. 청나라의 만주족 대신들은 지금이 중원을 차지할 호기라 주장하였으나 명나라의 항장(降將) 출신으로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고 있던 홍승주나 범문정 등은 이자성이 먼저 북경을 함락하게 내버려두고 때를 기다렸다가 명나라 황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이자성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로 들어갈 가장 중요한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에는 총병관 오삼계가 버티고 있었다. 도르곤은 오삼계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설득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북경을 함락한 이자성의 군사가 오삼계의 아버지와 애첩을 끌고갔다 하자 오삼계는 분노하였고 결국 청군과 손을 잡아 산해관의 빗장을 열었다. 이로써 청군은 아무런 전투도 벌이지 않고 손쉽게 산해관에 입관하여 중원 땅으로 진입하였다.

도르곤은 이 때 총사령관으로서 청군을 지휘하여 오삼계와 연합군을 결성하였고 결국 산해관 근처의 일편석(一片石)에서 이자성군과 대치하였다.[13] 청군과 오삼계군은 이자성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고 이자성은 몰래 북경으로 돌아와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이렇게 도르곤은 1644년(순치 원년) 6월 5일, 북경성을 점령하고 황궁인 자금성을 장악하였다. 곧이어 자진한 숭정제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그 유해를 명십삼릉에다 장사지내는 등 멸망한 명나라의 황실을 존중함과 동시에 북경의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그는 이어서 북경으로의 천도 작업을 서둘렀고 이자성에 의해 불탄 자금성을 복구하였다. 같은 해 10월 19일, 도르곤은 북경성 북문에서 황제인 순치제와 황족들을 맞이하고 열하루 뒤인 10월 30일에 순치제를 모시고 천단에서 제를 올려 이제 북경이 청나라의 수도가 되었으며 천명을 상실한 명을 대신하여 청의 순치제가 새로이 중국의 수명천자가 되었음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2.4. 권력 강화와 대륙 통치

1644년(순치 원년) 11월 8일, 순치제는 자금성 태화전에서 다시 한번 즉위식을 가졌다. 여기서 순치제는 도르곤의 그간의 공적이 고대 중국의 주공 단과 같다며 크게 치하하였으며 도르곤의 칭호를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으로 올렸다. 또다른 섭정왕이었던 지르갈랑은 보정숙왕(補政叔王)으로 제수하였는데, 이는 종전의 섭정왕보다 더 낮은 작위였다.

이듬해인 1645년(순치 2년)에 도르곤은 자신에게 올리는 모든 장계에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이라 일컫게 하는 등 스스로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옥좌에 한단계 더 다가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말년인 1649년(순치 6년)에는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 자칭, 줄여서 황부왕이라 하였다.

도르곤이 숙부와 황부 등의 호칭에 크게 신경을 쓴 이유는 여러 황족들과 같이 친왕이나 군왕 등의 작위로 불리는 것보다 황제의 숙부, 황제의 부친으로 공인받아 불리는 것이 더 격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1647년(순치 4년)에 도르곤은 지르갈랑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작위인 정친왕을 정군왕(鄭郡王)으로 격하시켰으며, 공석이 된 보정숙왕에는 자신의 아우 도도를 황숙보정왕(皇叔輔政王)에 앉히는 등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또한 어릴 때 순장된 자신의 어머니 대복진 울라나라씨를 효열무황후 추숭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높였다.[14]

북경에 들어온지 이틀 후, 도르곤은 칙령을 내려 관리들에게 앞머리를 깎고 변발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조정 출사를 허용했다. 그러나 도르곤은 3주 만에 이 정책을 취소하였는데 북경 주변 도처에서 단발을 거부하는 백성들의 민란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편 도르곤은 북경 이북의 땅을 팔기군에게 하사하여 북경의 방위를 책임지도록 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북경 이북의 전답 또한 종전의 한족에게서 몰수하여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리하여 한족들은 새로이 지주가 된 만주족들에게 일정량의 곡물을 바치며 소작농으로 살아가야 했다.

비록 청나라가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차지하였으나, 남쪽에는 여전히 명나라에 충성하는 신하들과 종친들이 건재하였다. 숭정제가 자살한 직후, 숭정제의 사촌인 복왕 주유숭[15]이 남경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홍광(弘光)으로 정하였다. 도르곤은 친동생인 도도를 총사령관으로 내려보내어 남경을 함락시켰고 도도는 청군에게 항거했던 백성들을 살육하는 양주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도르곤은 한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고 1645년(순치 2년) 7월 21일, 모든 한인에게 변발을 틀 것을 명하고 이를 거부하면 극형에 처할 것이라는 칙령을 내렸다. 한인들은 효경의 구절인 “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 신체발부, 수지부모, 부감훼상, 효지시야”(몸과 머리, 피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이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모든 효의 시작이다.)를 들어 변발을 극렬히 반대하였다. 단발령은 한인들의 적개심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고, 도르곤과 북경의 청 조정은 명나라에서 항복해 온 장수들을 앞장세워 항거하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참살하였다. 일부 한인 지식층은 산 속 깊숙이 은거하며 청나라의 중원 통치를 끝까지 부정하였다.

2.5. 사망과 작위 박탈, 그리고 부관참시

하지만 도르곤은 이전의 송산성과 금주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건강이 나빠져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자주 각혈과 중풍을 앓았다. 1648년(순치 4년), 도르곤의 위세를 두려한 신료들이 도르곤의 건강을 핑계로 들어 순치제에게 도르곤의 신하의 예를 생략할 것을 주청하였고 순치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곤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갔고, 도르곤은 계속 국사에 전념하며 사실상의 황제로서 청나라를 통치하느라 피로가 가시지 않았기에 건강을 회복할 시간이 없었다.

1650년(순치 7년) 12월 8일, 도르곤은 카라호툰(중국명 열하(熱河))으로 친왕, 군왕, 패륵, 패자 등을 이끌고 사냥을 나갔다. 그러나 사냥을 나간 사이 갑자기 병세가 위중해져 북경을 떠나고 23일 뒤인 12월 31일에 카라호툰 성에서 39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위특(魏特)의 《탕약망전》(湯若望傳)에는 사냥 중 넘어져 부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담천(淡遷)의 《북유록》(北游錄), 〈기문〉(紀聞)에는 무릎관절이 벗겨지는 부상을 입었는데 약을 잘못 복용하여 사망한 것으로 적혀있다. 순치제는 도르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장례를 국상으로 하며 황제의 격에 따라 치르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도르곤이 죽고 난 후 도르곤을 추종하던 신료들은 순치제에게 상소를 올려 황부섭정왕 도르곤을 황제에 추숭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도르곤이 죽었으나 명목상으론 여전히 실권이 없던 순치제였기에 그 주장에 따랐고 결국 순치제는 도르곤이 사망한지 며칠 후 도르곤에게 성종(成宗)의 묘호와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의 시호를 올려 황제에 추숭하였으며 그의 장례를 국상으로 치렀다.

그러나 도르곤의 국상을 치르고 한달 반 후, 도르곤의 수하에 있던 정백기와 양백기의 장군들이 도르곤의 형인 영친왕 아지거를 새로이 섭정왕으로 모시고 자신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려 도모했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도르곤에 의해 실각되었던 정군왕 지르갈랑에게 호기가 되었으며 곧 도르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대신들과 팔기군의 장수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아지거는 이에 자진하였고 역모에 관련되어 있던 정백기와 양백기의 장수는 모두 처형되었다. 1651년(순치 8년) 2월 1일, 지르갈랑은 친왕의 작위를 회복함과 동시에 순치제에게 대권을 봉환하였고, 14살의 순치제는 그날로 친정을 개시하였다.

얼마 후, 지르갈랑은 순치제에게 도르곤이 섭정왕으로서 전횡을 휘두르고, 황제만 입을 수 있는 황포를 수시로 입었으며, 또한 순치제의 이복형인 호오거를 모함하여 옥사하게 하고 자신은 그 첩을 취하였다는 등을 쓴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순치제는 이에 격노하여 도르곤의 묘호와 시호를 모두 추탈하고 황실 대동보에서 그의 이름을 제명하였으며, 태묘에 봉안된 그의 신주를 내쳤다.

또한 그의 능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어 그 시체를 황야에다 버리고 몽둥이로 시체를 수십 차례 때리는 형벌을 내렸으며 그 유해의 머리를 잘라서 각지마다 그 머리를 돌려 효수하게 하는 등 도르곤에 대한 순치제의 적개심은 매우 컸다.

2.6. 신원 회복

도르곤은 이후 순치제의 아들인 강희제 연간에 가서야 신원이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황족으로서의 신분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후 1778년(건륭 43년), 건륭제는 비록 소인들의 간계에 빠져 전횡을 휘둘렀으나 개국에 큰 공이 있으므로 개국 당시 활약했던 다이샨이나 동생 도도 등과 같이 태묘에 배향됨과 동시에 도르곤에게 예친왕의 작위를 다시 내리고 시호로 충(忠)을 붙여 예충친왕(睿忠親王)으로 추증하였다.

도르곤은 생전 아들을 두지 못하여 동복아우인 도도의 셋째 아들 도르보를 양자로 들였고 세월이 흘러 건륭제가 도르곤을 추증할 때 도르보의 5세손인 순영(淳潁)을 예친왕으로 봉하여 그 후사를 대대로 잇게 하였다.

3. 평가

누르하치, 홍타이지 청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발전시켰다 하더라도 그들의 재위 기간 동안 청나라는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북방 민족 만주족의 국가에 불과했다. 그랬던 청나라를 중원의 제국으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섭정왕 도르곤이었다. 청나라가 많이 강성해졌다곤 하지만,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중원의 지배자가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던 과업을 이룩해낸 이가 도르곤이었다.[16] 도르곤은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교묘한 책략 등 여러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 끝에 베이징을 차지할 수 있었다. 사실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중원이 혼란에 빠진 그 좋은 찬스 때 청나라의 권력투쟁으로 만주와 내몽골이 중원처럼 계속 혼란에 빠졌거나 도르곤이 아닌 다른 이가 섭정 자리에 있어서 도르곤만큼의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베이징에 입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17]

그리고 베이징을 차지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명나라 항장들을 활용해서 명나라의 부흥세력 남명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도 도르곤의 업적이었다. 즉 베이징을 차지하는 것에만 만족했다면 금나라의 영광을 재현하기는 했으나 금나라처럼 대륙 전체를 평정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러시아 제국/남명에 포위되는 구도가 되어버린다. 이는 남송을 제거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몽골 제국/남송에 포위되는 구도가 되어서 멸망해버린 자신들의 선조 금나라의 전철을 밞았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도르곤은 여기서 결단을 내려서 남명을 제거하여 대륙을 완전히 통일하고 청나라의 수명을 3배 가까이 늘렸다.[18]

어쩌면 청나라 역사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야 할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가 아니었고, 사후엔 결국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복형 홍타이지의 후손들에 의해 부관참시되며 격하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중국의 왕조에서 종종 보이듯 도르곤 역시 쿠데타를 통해 조카를 제거하고 본인이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사실 당대에도 도르곤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순치제도 도르곤을 항상 경계했다. 오히려 도르곤이 끝내 정변을 일으키지 않고 황부섭정왕의 자리에 만족한 것을 기이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도르곤이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를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효장문황후의 아들인 순치제를 해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설을 바탕으로 중국에서는 '대청풍운(원제는 청궁풍운)'이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져 히트를 쳤을 정도.

도르곤이 황제가 되기엔 매우 많은 장벽이 있었다. 일단 그는 팔기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당시 양황기 대신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고 도르곤과 대립했다.[19] 또한 순치제의 적모 효단문황후와 생모 효장문황후 뒤에 있는 몽골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도르곤에게 아들이 없었다. 설령 도르곤이 피바람을 무릅쓰고 제위를 차지한다 해도 물려줄 후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순치 4~5년 경, 도르곤은 자신의 제위 계승권을 정당화하며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하고, 순치제는 그래도 태자로 강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도르곤은 순치제가 의정회의를 통해 적법하게 선출된데다[20] 그 자신도 순치제를 옹립하는데 동의하며 황제의 후견인이 되기로 맹세했기에 순치제를 폐위할 명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법에 따라 적법하게 황위에 오른 순치제를 폐위하는 건 국조인 누르하치를 무시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도르곤은 순치제가 어리다며 그 권위를 깎아내리거나 자신의 웃어른으로서의 권위를 과시하거나 홍타이지가 자신의 황위를 빼앗았다고 주장할 뿐, 순치제의 정통성 자체는 흠집을 내지 못했다. 만약 도르곤이 이 모든 걸 무시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안 그래도 많은 불안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청나라는 내전 상태에 빠질 것이고, 최악의 경우엔 멸망이었다.

결과적으로 도르곤은 황부섭정왕이라는 자리에 만족하고 여생을 마쳤는데, 이것이 워낙 전례가 없는 자리였는데다가 공식적으로 황실의 종친에 불과한 처지였기 때문에 도르곤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도르곤은 황제의 권위를 실추시킨 권신이기도 했다. 그는 선황의 오궁복진들을 우대하지 않았고 황제인 순치제에게 예를 차리지 않았으며 제 권위를 높이며 순치제를 압박했고 어린 황제의 교육과 보좌를 책임져야 하는 후견인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순치제에게 제왕학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후견인으로서나 신하로서나 순치제를 위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도르곤은 사후, 그를 미워한 순치제와 그 후손들에 의해 부관참시 당했고, 이후에는 도르곤의 예를 경계하여 강력한 황권을 다진 청나라의 후대 황제들은 황제가 정무를 처리할 수 없을 때에 대타를 맡을 친왕, 황태후급 고위 황족을 지명하면서도 '섭정왕' 같은 직위를 암묵적으로 꺼리게 된다. 순치제는 자신이 요절하면서 현엽을 후계자로 지목하고는 태황태후의 견제를 받는 보정대신 4인을 임명하였고, 강희제는 자신이 남순을 떠나면 황태자 윤잉에게 직무대행을 맡기려 했으나 여러모로 처참하게 망한 후에는 여러 아들들에게 업무를 분담시켰다. 옹정제는 과로로 말년에 건강을 해치자 태자로 공표하지만 않았지, 사실상 누구에게나 차기 황제로 예측되던 보친왕 홍력조차도 '감국' 자격으로만 일거리를 분담시켰다. 게을러진 말년의 건륭제는 섭정왕 따위 임명할 것 없이 본인이 태상황제가 되고 가친왕 영염에게 황위를 통째로 물려줘버렸다.

이런 직책이 실질적으로 부활한 것은 청나라 말엽의 일.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 동태후, 서태후가 손잡고 유아기의 동치제를 보좌하라고 임명된 보정 8대신들을 숙청한 후 공친왕이 의정왕에 임명되어 사실상의 섭정왕이 되었으나, 양무운동의 리더로 군림하던 공친왕의 권력을 견제하려던 서태후의 술수로 공친왕은 의정왕에서 수석군기대신으로 격하된 신분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서태후가 등장하는 중국 사극에선 서태후가 보정대신들과 공친왕을 욕할 때마다 "도르곤 따라하고 자빠졌네" 하는 레퍼토리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도르곤은 건륭제의 실드와 복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후세인들에게까지 섭정의 대명사이자 잠재적 역적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섭정왕이 없어진 대신 갓난아기 허수아비 황제를 두고 서태후가 실질적인 섭정으로 군림하는 권력구도는 서태후가 사망한 청나라의 망국까지도 감국섭정왕에 임명된 선통제의 생부인 순친왕 재풍에 의해 계속되었다.

삼촌으로서 국가 초기에 어린 왕을 보좌해 국가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선 주공단과 비슷한 면이 있다. 아버지인 누르하치가 일단 황제를 칭하지 않고 사후에 황제로 추증되었다는 점. 형인 홍타이지가 정식으로 국가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주문왕과 주무왕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수회 선교사인 마르티노 마티니(중국명 위광국(衛匡國))는 자신의 저서 《타타르 전기》에서 위아래 모두 도르곤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그를 감히 직접 마주하여 말을 꺼내지 못하였고, 그가 외출하였다 돌아올 시에는 백관이 정렬하여 그를 알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중국의 역사학자 샤오이산(蕭一山)은 청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에 도르곤의 섭정이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중국의 역사학자 옌총니엔은 도르곤이 명-청 교체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개국에 큰 공이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권력욕이 강하여 황부라는 극존칭까지 자칭하는 등 죽을 때까지 조카이자 황제인 순치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하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프레드릭 모트는 도르곤을 훌륭한 정치가요 용맹한 장군이었다고 평했다. 다만 섭정왕에 오른 뒤 오만방자해졌으며 그 오만함이 황족들과 대신들의 불안감을 야기하여 결국 도르곤 사후 그의 모든 명예를 추탈하는 데 큰 일조를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4. 조선과의 관계

그의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고, 청실록에도 부정적인 모습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에, 실제 본인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겉으로만 보면 조선에 유화적이었다. 의순공주와의 혼인을 보더라도 소현세자와 훗날의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이 모두 심양에서 8-9년간 포로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혼기에 찬 딸이 있다는 것을 모를리 없었겠지만[21], 조선측이 "혼기에 찬 공주가 없다"고 변명하고 대신 양녀인 의순공주를 보냈는데도 더 추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또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하자마자 (1644년), 더 이상 조선이 배신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더 붙잡지 않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조선에 귀환시켜주었다.

조선왕조실록》의 〈 효종실록〉에도 도르곤에 대한 평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의 여파로 인한 극도의 반청 정서와 북벌 운동이 한창일 때의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실록에 따르면 정친왕 지르갈랑이 순치제에게 아뢰기를 도르곤이 숙부로서 맹세를 어기고 권력을 자행하고 스스로 황제의 아버지를 자처하는 등 도를 넘은 전횡을 휘둘렀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숙친왕 호오거를 모함하여 죽이고 그 부인을 차지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으며 좋아하는 사람에겐 한없이 높은 관직을 주었으나 싫어하는 자는 내치거나 턱없이 낮은 관직을 주는 등 붕당을 형성했다고도 하였다. 한편 실록에서는 구왕(九王)으로 많이 언급된다. 당시 살아있던 누르하치의 아들들 중 아홉째여서인 듯.[22]

조선인들의 반청 정서와 별개로 도르곤 본인은 소현세자에게 잘 대해줬음을 감안하면, 만약 홍타이지가 아니라 도르곤이 후금의 한위를 계승했다면 명나라와의 적대관계와 별개로 조선을 침략하지는 않았던 아버지 누르하치의 외교 노선을 그대로 계승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실제 역사에서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조선의 적이 된 것도 형인 홍타이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3] 의순공주와의 결혼도 조선인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별개로 도르곤 본인에게는 딱히 악의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은데[24], 청나라의 만주족은 결혼동맹을 통해 몽골인 같은 이민족과의 친선관계를 강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말 그대로 의도만 좋았던 케이스라고 봐야겠지만...

5. 가족 관계

아이신기오로 종보 참조.

도르곤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예친왕 도도의 5남인 예친왕 도르보(睿親王 多爾博, 1643년 ~ 1673년)를 양자로 들였다.

한편 도르곤의 자식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도르곤은 초혼을 한 뒤부터 25년간 십수명 이상의 여자를 처첩으로 들였음에도 아들은 커녕 딸조차 전혀 낳지 못했고, 죽기 직전에야 한족도 만주족도 몽골족도 아닌 '조선인' 측복진으로부터 겨우 딸 하나만 낳았을 뿐이였다. 이에 대해 혹시 도르곤의 사후 숙청 과정에서 도르곤 일가에 대한 조직적인 기록말살형이 이뤄진건 아닌가 하는 의문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도르곤이랑 친하게 지냈던 소현세자가 볼모로 지내던 시절의 기록인 심양일기에도 도르곤의 '(장성한) 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고, 황실 족보를 털어보며 도르곤을 예충친왕으로 복권한 건륭제조차 도르곤의 후손은 찾아내지 못하고 양자 도르보의 후손에게 작위를 주는데에 그쳤다. 그냥 자식 복이 지지리도 없었거나, 도르곤 본인이 심각한 난임이었을 확률이 더 높다.[26]

한편 2005년엔 뜬금없이 광저우에 사는 어떤 남성이 갑툭튀하여 자신의 선조가 도르곤의 아들인데 도르곤의 사후 숙청 당시 정백기의 도움으로 숙청 당시 자금성을 탈출하여 중국 남쪽 끝 광동성까지 도망쳐서는 곤(袞)자와 비슷한 원(袁)씨 성의 한족으로 신분 세탁을 하고 숨어 살아왔다면서[27] 자신은 도르곤에게는 10세손이 된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었으나 만주사학계나 청조 종친들에게나 인정받지 못했다. 이 떡밥은 중문 위키백과에 소개되어 있고 영어 위키백과에도 이 일화가 소개되어 있으나, 기사도 쉬이 찾아볼 수 없고 학자들에게도 헛소리 취급을 당하며 잊혀졌다.

5.1. 형사취수

청 태종의 비이자, 순치제의 어머니인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와 결혼했다는 야사가 있다. 당시 유목 민족의 풍습이던 형사 취수를 했다는 것인데, 은근히 정황 증거가 많이 있어 대중들에겐 거의 정설마냥 취급되기도 한다. 순치제의 등극부터, 도르곤 사후의 복수까지 맞아 떨어지는 점도 많다.

도르곤을 황섭정왕으로 책봉한 것[28], 태후가 혼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장황언의 시, 태후였던 효장문황후가 어린 순치제와 매우 떨어진 궁에서 살았고 얼굴 보기 무척 힘들었다는 점, 각종 문헌에서 '도르곤이 황궁 내원을 드나들었다'는 구절이 발견된다는 점, 효장문황후가 사망 이후에도 그녀를 존경한 손자 강희제나 이후의 황제가 굳이 심양 북릉(베이링(北陵))의 홍타이지와 합장하지 않고, 청동릉에서도 풍수담 바깥에 안장한 점 등이 관련 정황으로 제시되는 편이다.[29]

그러나 이 설에 대해선 반박도 있는데, 상기 정황들의 경우 먼저 황부(皇父)의 경우 그 의미가 무거운 것은 맞으나, 실제 부자 관계가 아니라도 존경의 의미를 담아 부(父)로 호칭한 사례가( 아부, 상부 등) 종종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로는 불충분하다. 또 장황언의 시에 태후의 혼인을 준비한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장황언이 반청복명 인사[30]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를 순수하게 믿기는 어렵다. 사실, 당시 도르곤은 호오거의 부인 보르지기트씨를 계복진으로 취한 바 있었는데 이 일이 같은 호르친 출신인 효장문황후의 일로 와전되었고, 청조를 미워했던 장황언이 이를 일부러 시에 넣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한편 여러 문헌에서 '도르곤이 황궁 내원을 드나들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맞지만, 어디까지나 '드나든' 것이지 '기거한' 것은 아니고(...), 만일 정말 도르곤이 효장과 혼인했다면 내원에 드나든 것은 죄가 되지 않을 것이나, 도르곤이 내원에 드나든 것은 후일 도르곤의 죄 중 하나로 지목된다. 효장문황후의 무덤의 위치 역시 도르곤과의 혼인 탓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굳이 "남편 홍타이지의 무덤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다"는 효장문황후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게다가 도르곤과 효장문황후가 정말로 혼인했다면, 순치제가 도르곤의 시신을 파내어 매질까지 하는 상황을 효장문황후가 방관한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도르곤은 효장문황후를 포함한 홍타이지의 정실인 오궁복진과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효단문황후는 홍타이지의 황후인데도 황태후로서의 존호가 없고, 다른 복진들은 도르곤 사후에야 황실의 어른으로서 봉작을 받았다.

현재 주류 역사 학계에선 효장문황후와 도르곤이 혼인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기류가 강한 편이다. 정략적인 정치적 파트너나 진도가 많이 나가 그나마 연인일 수는 있어도 혼인까지 했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 게다가 효장문황후는 홍타이지가 죽은 직후 순사를 자처한 적이 있다. 이는 진심일 수도 있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수일 수도 있으나, 어느쪽이든 이런 선택을 결심한 사람이 선제의 동생과 재혼한다면 그건 정치적인 자해다.
다만 두 사람의 로맨스는 많은 대중들에게 어필할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현대 사극에선 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다는 설을 많이들 택하고 있다.[31]

5.2. 의순공주

도르곤은 조선과의 관계를 생각해 조선인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보면 도르곤은 이후 만주 황실의 외척이 된 몽골 유력 부족(대표적으로 칭기즈칸의 후예인 보르지긴씨, 누르하치에 가장 먼저 복속한 몽골의 에르더트씨 등) 외에 전주 이씨도 청 황실의 외척으로 편입시킬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32] 물론 당시 도르곤의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아들을 얻기 위해서기도 했다.

그래서 1650년(효종 1년)에 도르곤은 효종의 딸과 혼인하려 했으나, 딸을 다시 청나라로 보내기 싫었던 효종[33]은 "혼기가 찬 딸이 없다"고 거짓말했다.

효종은 청나라의 도르곤에게 자신의 딸이 겨우 2살이라서 혼인할 수 없다고 해명했지만, 이와 달리 효종에겐 그 당시 기준으로 혼인을 생각할 만한 딸들이 있었다. 당시에 효종의 장녀 숙안공주는 15살, 3녀인 숙명공주가 11살이었다. 효종은 자기 딸만 숨긴 게 아니라 조카 딸, 즉 소현세자의 딸들도 지키려고 "이미 혼인했거나 너무 어리다"고 거짓말을 했다. 소현세자에게는 민회빈 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5명이 있었는데, 그 중 2명은 어려서 일찍 죽었고 3명의 군주(세자의 적녀)가 생존해 있었다. 효종은 자신의 친딸 뿐만 아니라 조카딸 3명도 어떻게든 조선인 사위를 데려다가 일찍 결혼시켰다. 다른 방계 왕실의 종친들도 다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거나 숨기기 급급했다고 하는데, 공녀도 아니고 정식 구혼 신청에 이런 반응이었으니 당시 반청 분위기를 알 만하다.

이때 당시 효종과 소현세자의 딸들은 혼사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장성했고, 실제로 숙안공주는 이미 혼사가 진행 중이었다. 어떻게든 청나라에 시집보내고 싶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이 효종은 이 해에 서둘러 소현세자의 장녀인 경숙군주를 혼인시켰고 다음해 1월에 자신의 장녀 숙안공주까지 혼인시켰다. 이때 효종은 청나라의 눈에 띌까봐 왕의 딸 혹은 왕의 조카딸로서는 이례적으로 간소하고 급하게 혼인을 진행했다. 당시에는 선왕 인조의 3년상 중이었는데 원칙적으로 왕이 죽고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왕녀의 혼인은 미루어져야 하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숙군주와 숙안공주 모두 간격조차 얼마 두지 않고 최대한 빨리 부마부터 뽑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주족에게 시집 안 보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신하들이 '아무리 그래도 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국혼을 치르는 건 예법에 어긋납니다'라고 비판했지만 효종은 "그대들이 논한 것은 만세의 떳떳한 예이고, 오늘날 처한 경우는 한때의 권도이다. 상도(常道)와 권도는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이런 거조를 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며 국혼을 강행했다. 효종 1년 11월 5일 을묘 2번째기사 아버지 인조의 3년상이고 예법이고 뭐고 간에 어떻게든 가족들을 두번 다시 청나라에 보내지 않으려 하는 효종의 다급한 심정이 나타나는 부분.

이러던 와중에 금림군 이개윤[34]이 자신의 딸을 보내기로 나섰다. 기록상으로는 금림군이 자원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왕실과 조정에서 금림군에게 어떤 압력을 가했을 수도 있고, 왕족이지만 가난했던 금림군이 청나라에 줄을 대기 위해 딸을 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효종은 금림군의 딸을 양녀로 삼고 의순공주[35]로 책봉해 청나라로 보냈다. 물론 청나라에게 효종의 친딸이라며 속인 것은 아니고, 시집 갈 나이의 친딸이 없어서 종친의 딸을 대신 보내는 것으로 공식 합의하였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당시는 병자호란의 상처로 인해 반청 분위기가 대단했기 때문에, 금림군은 "청나라가 지참금조로 보낸 비단을 노리고 딸을 보냈다"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핍박을 당했다. 또한 후에 청나라에서 귀국한 의순공주도 "오랑캐에게 시집가 정조를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오랑캐 친족과 재혼까지 해서 몸을 더럽혔다"면서 환향녀로 치부하여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금림군이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뭔가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금림군에 대한 나쁜 소문은 그를 모욕하던 이들의 악담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금림군의 의도야 어쨌든 간에, 모두가 딸을 보내는 걸 기피해서 조선 조정이 매우 난처해했다가 금림군과 의순공주 덕에 모면한 걸 생각하면, 금림군과 의순공주를 욕했던 자들은 뻔뻔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후 의순공주가 조선에 귀국하자, 금림군은 삭탈 관작 당했다가 이후 복귀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의순공주 또한 공주 직위를 잃었다.

그런데 정작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오자, 도르곤의 눈에 의순공주 시녀들의 외모가 매우 빈약(...)해서 조선 측에게 시녀들을 다시 보내라며 불평을 터뜨렸다. 하지만 청나라가 사실상 중국을 평정한 상태에서 그 실권자에게 시집 보내는 여자가 상대방이 화낼 정도로 추녀였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아니면 단지 도르곤의 취향이 매우 특이했다거나. 처음에는 의순공주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송골매'라는 별명을 지어줬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선을 기 죽이기 위해 트집을 잡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시녀 중 1명을 측복진(양첩)으로 맞이했고, 그 시녀에게서 유일한 딸을 얻었다.

이 혼담이 오갈 당시, 청나라에서는 김자점 등 친청 세력에 대한 숙청, 산성의 축조 등 조선의 반청 정책들에 대해 정면으로 지적하며 조선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는 도르곤의 청혼을 조선에서 수용하고 이경석 등 일부 대신이 책임질 것을 자청해서 청나라 측이 이를 수용하여 넘어갈 수 있었다. 위에 언급된 도르곤의 불평 때도 겉으로는 이러한 트집을 잡은 뒤 대놓고 "미녀들을 보내면 황부왕(도르곤)이 기뻐하고 무마해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신을 수십 번 보내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서 조선은 이를 수용해야 했다.

이 때 만약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혼인한 뒤 요절하지 않고 찬탈을 이뤄냈다면 대복진이었던 의순공주는 황후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되면 조선 왕실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졌을 것이다. 청나라 법도에 따르면 청나라에서 황후나 태후에 오른 비빈은 친정까지 통째로 정황기 또는 양황기 만주인으로 옮겨 일종의 측근세력을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의순공주는 법적으로 효종의 양녀로써 도르곤과 혼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르곤이 황제에 즉위할 경우 전주 이씨 전체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이성계 이래 효종까지 이어온 왕통 정도는 '양황기 만주 이기야(...)씨'[36] 같은 형태로 팔기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을테고, 효종에게 "님이랑 님들 가족도 이제 전부 만주족ㅋ"이라면서 번왕도 아니고 '친왕'에 봉하는 칙서가 날아왔을 것이다.[37]

그것뿐이겠는가? 만주인도 되었겠다 황제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입조를 요구했을 수도 있고, 변발과 만주족의 복식을 강요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황제 추숭 이후 '황후'로 높여지지는 않은 점은, 역대의 황제 추숭 사례에서 혈연관계도 없는 추존황제의 생존한 부인을 황후로 받든 전례는 없다[38]는 점과 조선과의 난처한 외교관계도 분명 감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순치제의 성모황태후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시니까 의순공주를 '태후'로 모신들 의순공주의 황궁 내에서의 입지는 굉장히 난감했을 것이다. 설령 도르곤이 요절하지 않고 의순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얻었다 해도 순치제의 성모황태후가 살아있는 한 황위 찬탈의 명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도르곤이 미약한 명분 따위는 아랑곳않고 찬탈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후손들 또한 단순히 조선 왕실과 혈연 관계가 있는 청나라 황족 정도로만 남을 뿐 청나라 황위 계승권을 노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39]

의순공주는 혼례까지 치르고 시녀들을 다시 보내는 등의 소동이 있었으나 불과 7개월 만에 도르곤이 죽는 바람에[40] 어린 과부가 되었다. 이후 도르곤의 시호가 추탈되고 역적으로 규정되자 의순공주는 다른 청나라 황족에게 재가했다가 또 과부가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41], 금림군의 요청으로 조선에 귀국해서 현종 때에 병사했다. 현종 실록(현종 실록 5권, 현종 3년 8월 18일 무오 2번째 기사)에서 금림군의 딸이 사망하자 현종이 상수(喪需, 장례비)를 넉넉히 지급하라는 기록이 있다.

이 과정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상당히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금림군이 도르곤 사후 과부가 된 딸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과 사전에 상의 없이, 청나라 조정에 부탁해서 사적으로 환국시켰기 때문이다. 조정에선 "금림군이 나라의 허가도 받지 않고 함부로 귀국시켰다"며 금림군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뒷일에 대한 기록이 중언부언인 걸로 보아 큰 외교적 결례가 되진 않은 듯하다. 의순공주의 귀국에 대해 청나라에서 보낸 문서에서도 '부모 형제와 떨어져서 과부로 혼자 살고 있으니 이를 가엾게 여겨 특별히 돌려보낸다'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효종실록 16권, 효종 7년 4월 26일 갑술 1번째 기사) 도르곤이 죽은 후 그에 대한 명예를 박탈하는 등의 사후 숙청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한때 도르곤과 혼인했다가 사별한 것 말고는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조선 왕족 여성을 청나라에서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야사에서는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가기 직전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해서 시신 대신 유품인 족두리를 매장했다고 한다. 물론 의순공주가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분명히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므로, 이런 야사는 당시 민중 사이에 퍼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금림군과 의순공주에 대한 멸시에서 나온 이야기로 추정된다. 의순공주의 묘는 현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으며 야사에 따라 '족두리묘'로 불리고 있다.

도르곤은 의순공주 이외에도 다른 조선인 부인(측복진[42] 이씨 - 이세서의 딸)이 있었는데, 이 조선인 부인이 낳은 여자아이가 도르곤이 남긴 유일한 자녀다. 도르곤에겐 여러 처부인이 있어서 다른 자녀도 몇 명 낳았지만, 조선인 부인 소생의 딸을 제외하면 모두 갓난아이 시절에 죽었다. 대신 동복형제인 도도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지만 사후 그 아들은 다행히 도르곤 사후 화를 입지 않고 살아남는다. 사실 이는 말 그대로 양자라서 무사했던 거라고도 볼 수 있는데, 만약 도르곤이 친아들을 얻었다면 도르곤 본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는 경우가 아닌 한 도르곤 사후에 그 친아들과 생모까지 숙청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도르곤 본인이 부관참시된 것도 그러한 숙청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도르곤의 장성한 조선인 첩 소생 딸은 말 그대로 딸이라서 황위 계승권과 무관했기 때문에 무사했던 것이다. 비록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도르곤이 친아들을 얻지 못한 게 주변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위의 각주에 나온 것처럼 대놓고 도르곤의 남계 혈통을 단절시킬 가능성은 희박했을 수도 있겠지만,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친아들이 목숨만 건질 뿐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으면서 그것이 간접적으로나마 멸족의 원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격동의 시기였던 청나라 말기의 일이긴 하지만 광서제가 자식을 한 명도 얻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서거한 것은 당시 실권자였던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고 더 나아가 독살당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니, 공식적으로는 숙청에 의해 대가 끊어진 게 아니더라도 비공식적이거나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도르곤의 남계 혈통을 단절시킬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청나라의 황족과 외척 중 정치적 숙청을 당한 이들 대다수는 오삼계급의 대역죄인을 제외하면 적어도 도르곤처럼 비참하게 부관참시되는 일은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무려 창업군주(후금 포함)의 아들이자 창업군주(살아생전에 청나라 황제가 된 첫 군주)의 이복동생이기까지 한 도르곤이 비참하게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건 도르곤에게 친아들이 있을 경우 그 친아들도 끝이 영 좋지 않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도르곤이 황위를 찬탈하여 청나라의 황제로 즉위해 조선인 처첩들에게서 얻은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거나 도르곤 본인은 실제 역사처럼 황제가 되지 않은 상태로 죽더라도 도르곤이 살아생전에 조선인 처첩들에게서 얻은 아들이 부친상 이후 아버지인 도르곤의 기반을 이어받아 황제가 되었다면 청나라 황실의 혈통에 조선인의 혈통이 섞인 혼혈 황제가 등극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도르곤이 부관참시된 것은 순치제가 도르곤이 살아생전에 이것을 염두에 두고 비정상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을 가능성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에서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패배하긴 했지만 조선은 만주족이 가볍게 무시할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조선은 건국 후 초기에는 만주족의 기원이 되는 여진족의 상국노릇을 200여년간 했기 때문에 누르하치도 조선과의 관계는 조심스럽게 여겼고, 실제로 병자호란때는 철저히 짓밟았지만, 이후 입관해서는 청나라는 조선을 그나마 믿을만한 조공국으로 여기고 황제들이 조선사신에 대해 여러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이렇게 만주족에 있어서의 조선의 위상을 감안할 때 순치제의 입장에서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결혼한 것은 조선의 힘을 빌려 황권을 위협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르곤이 아들을 얻기 위해 의순공주와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을뿐더러 결과적으로 의순공주의 삶을 망친 셈이 되어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혼인이 반면교사로 작용했는지, 청나라 황실 남성이 조선 여인과 혼인하는 일은 이후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43] 그로 인해 도르곤은 조선 왕실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민족 부마가 되었다.[44]

6. 창작물에서

여러 중드에서는 간지폭풍의 상남자이자 로맨티스트로 묘사된다. 붐부타이와의 로맨스는 청나라 배경 중국 드라마의 단골소재 중 하나로, 간혹 형 홍타이지와 하르졸도 엮어 사각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트레이드마크는 정백기의 순백색 갑옷. 중드 의상팀에서도 반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도르곤과 도도 형제의 갑옷은 하얀색으로 잘 지켜준다. 실제로는 누르하치가 살아있을 때엔 아버지가 맡던 황기 소속이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백기의 수장인 홍타이지가 한으로 즉위하면서 색깔을 맞교환하여 양백기의 기주가 되었다가 섭정왕에 오른 후 도도가 맡던 정백기와 깃발을 맞바꾼 것이기에 다소 오류가 있는 고증이지만, 팔기군의 역사에서 입관 이전 초창기에는 청나라 황족들간의 권력다툼에 따라 서로 관장하던 세력의 구성원과 별개로 깃발군의 색깔은 휙휙 바뀌곤 했던지라 크게 흠잡을 수는 없는 부분이다. 다만 중국 드라마에선 보통 조선과의 외교관계는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 터라[45] 도르곤의 주요 이력인 병자호란기 별동대 지휘나 강화도 함락, 의순공주와의 국혼 같은 사건은 통편집당하며 첫사랑을 위해 제위에 대한 야심을 누그러뜨리는 순정마초 같은 캐릭터로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파일:405x324540.jpg * 드라마 대옥아전기 - 배우 경악. 코르친에서 대옥아에게 첫눈에 반해서 그녀를 신부로 맞이하려고 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그녀가 형 홍타이지와 혼인하게 되면서 형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평생을 대옥아를 위해 싸웠다.
파일:산하련도르곤.jpg * 드라마 산하련 - 배우 한동.
파일:도르곤.png * 드라마 독보천하 - 배우 굴초소
*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 김혁.[46] 지구용사 벡터맨의 베어로 유명한[47] 김혁이 연기했다. 변발을 하고 만주어로 연기했다. 소현세자와 교분이 깊고, 여러모로 소현세자를 아낀다. 소현세자 사후 소현세자의 아이들을 데려가 양자로 받아들여 직접 키우려고 까지 했다.
파일:133F81404E32560041.jpg * 영화 최종병기 활 - 박기웅이 연기한, 영화 중반부 때 온 몸에 불이 붙어 끔살당하는 황자의 이름이 엔딩 크레딧에서 '도르곤'으로 나온다. 예친왕 도르곤은 위에서도 보다시피 병자호란 끝나고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살다 죽었으니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적지만, 제작진이 이름을 따 왔을 가능성은 있다.
파일:칼부림_도르곤.jpg [48]* 웹툰 칼부림 - 네이버 수요 웹툰 칼부림에서 후금이 배경인 4부에 등장한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아직 어린 나이의 모습이고[49] 역사대로 순장이란 명목으로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 홍타이지와 같이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쩔쩔매는 등 그의 위세를 두려워해 납작 엎드리고 있으며, 독서 중에 부하로 배속된 창수와 덕만을 맞이하는 걸로 4부 에필로그를 장식. 5부에서는 후금의 공세가 원숭환의 방어선에 의해 단단히 저지되자 우회공격을 진언한다. 아민의 비아냥거림에도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칭찬하지만, 홍타이지는 어머니를 죽인 원수이기에 도르곤은 끝내 표정을 풀지 못하다가 양구리에게 처신에 관한 조언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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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권 「장조등전(張照等傳)」
장조 · 감여래 · 진덕화 · 왕안국 · 유오룡 · 양여곡 · 장태개 · 양석불 · 팽계풍 · 손희렴 · 몽린
305권 「전진군등전(錢陳群等傳)」
전진군 · 심덕잠 · 김덕영 · 전재 · 제소남 · 진조윤 · 동방달 · 전유성 · 추일계 · 사용 · 왕창
306권 「조사일등전(曹一士等傳)」 307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조사일 · 이신수 · 호정 · 중영단 · 시조생 · 저인지 윤계선 · 유우의 · 진대수 · 장윤수 · 진굉모
308권 「나소도등전(那蘇圖等傳)」
나소도 · 왕초증 · 서사림 · 윤회일 · 왕서 · 방현 · 풍광유 · 양석불 · 반사구 · 호보전 · 왕창
318권 「아계전(阿桂傳)」 319권 「우민중등전(于敏中等傳)」
장가아계 우민중 · 뉴호록 화신 · 소릉아
322권 「두광내등전(竇光鼐等傳)」 323권 「황정계등전(黃廷桂等傳)」
두광내 · 이수방 · 범의빈 · 조석보 · 사진정 · 전풍 · 윤장도 황정계 · 악미달 · 양정장 · 장유공 · 이시요 · 오미태 · 관보
324권 「방관승등전(方觀承等傳)」
방관승 · 부찰부명안 · 주원리 · 이한 · 이세걸 · 원수동 · 정대진 · 유아 · 육요 · 관간정 · 장조규 · 호계당
325권 「이청시등전(李淸時等傳)」 326권 「개태등전(開泰等傳)」
이청시 · 요입덕 · 이굉 · 하위 · 오사작 · 살재 · 난제석 · 한횡 개태 · 아이태 · 계림 · 원푸
340권 「왕걸등전(王傑等傳)」 341권 「경규등전(慶桂等傳)」
왕걸 · 동고 · 주규 경규 · 유관지 · 대구형 · 대균원 · 탁진 · 장후 · 노음부
342권 「보녕등전(保寧等傳)」 343권 「서린등전(書麟等傳)」
보녕 · 송균 · 배탄 · 박계특 서린 · 각라길경 · 각라장린 · 비순 · 장백령 · 백린
344권 「늑보등전(勒保等傳)」 345권 「영보등전(永保等傳)」
늑보 · 액륵등보 , 호시현, · 덕릉태 영보 · 혜령 · 의면 · 영선 · 복녕 · 경안 · 태승은
386권 「문경등전(文慶等傳)」 387권 「숙순등전(肅順等傳)」 388권 「계량등전(桂良等傳)」
문경 · 문상 · 보윤 숙순 · 목음 · 초우영 계량 · 서린 · 관문 · 문욱
389권 「백준등전(柏俊等傳)」 390권 「가정등전(賈楨等傳)」 391권 「왜인등전(倭仁等傳)」
백준 · 인괴 · 서상 · 전경 가정 · 주조배 · 주봉표 · 단무겸 왜인 · 이당계 · 오정동
392권 「새상아등전(賽尙阿等傳)」 393권 「이성원등전(李星沅等傳)」 394권 「서광진등전(徐廣縉等傳)」
새상아 · 눌이경액 이성원 · 주천작 · 노숭광 서광진 · 엽명침 · 황종한
395권 「상대순등전(常大淳等傳)」
상대순 , 쌍복 왕금수 왕수동, · 장문경 · 도은배 , 다산, · 길이항아 · 나준전 · 서유임 · 왕유령
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403권 「승보등전(勝保等傳)」 404권 「승격림심등전(僧格林沁等傳)」
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405권 「증국번전(曾國籓傳)」 406권 「낙병장등전(駱秉章等傳)」 407권 「강충원등전(江忠源等傳)」
증국번 낙병장 · 호림익 강충원 · 나택남
408권 「이속빈등전(李續賓等傳)」 409권 「탑제포등전(塔齊布等傳)」
이속빈 · 정예의 · 증국화 · 이속의 · 왕진 · 유등홍 · 장익풍 탑제포 · 필금과 · 다융아 · 포초, 송국영 누운경 담등달, · 당인겸 · 유송산
410권 「팽옥린등전(彭玉麟等傳)」 411권 「이홍장전(李鴻章傳)」
팽옥린 · 양악빈 · 왕명산 · 손창개 · 양명해 · 사준여 이홍장
412권 「좌종당전(左宗棠傳)」 413권 「증국전등전(曾國荃等傳)」
좌종당 증국전 · 심보정 · 유곤일
414권 「이신전등전(李臣典等傳)」
이신전 · 소부사 · 이원길 · 유연첩 · 팽육귤 · 장시일 · 오유수 · 주남계 · 나봉원 · 이상화 · 소경연 · 오종국
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황익승 · 정의방 · 왕길 · 오가방 · 이성모 · 이조빈 · 강복산 · 유배원
416권 「정학계등전(程學啟等傳)」
정학계 · 하안태 · 정국괴 · 유명전 · 장수산 · 주성파 · 주성전 · 반정신 · 오장경
418권 「원갑삼등전(袁甲三等傳)」 419권 「낙병장등전(左宗棠傳)」 420권 「한초등전(韓超等傳)」
원갑삼 · 모창희 유장우 · 유악소 · 잠육영 한초 · 전흥서 · 증벽광 · 석보전
421권 「심조림등전(沈兆霖等傳)」
심조림 · 조육영 · 허내보 · 조광 · 주준 · 이함 · 장상하 · 나돈연 · 정돈근 · 방종로
422권 「왕무음등전(王茂廕等傳)」
왕무음 · 송진 · 원희조 · 문서 · 육록 · 서계여 · 왕발규 · 염조윤 · 뇌이함 · 도양 · 오존의 · 은조용
423권 「종직진등전(宗稷辰等傳)」 424권 「오진역등전(吳振棫等傳)」
종직진 · 윤경운 · 왕증 · 목집향아 · 유백천 오진역 · 장량기 · 모홍빈 · 장개숭
425권 「이혜등전(李僡等傳)」 426권 「왕경운등전(王慶雲等傳)」
이혜 · 오당 · 영한 · 유용 · 교송년 · 전정명 · 오원병 왕경운 · 담정양 · 마신이 · 이종희 · 서종간 · 왕개태 · 곽백음
451권 「이조의등전(李朝儀等傳)」
이조의 · 단기 · 정수창 · 증기봉 · 저유립 · 서철산 · 계중행 · 유함방 · 진횡거 · 유지개 · 이용청 · 이금용 · 김복증 , 웅기영 사복가, · 동조용
452권 「홍여규등전(洪汝奎等傳)」
홍여규 · 양종렴 · 사박 · 사극관 · 심보정 · 주기앙 , 주기조, · 종원한 · 서경장 · 서진 · 괴광전 · 진휼성 · 반민표 · 엄작림 · 당석진 · 누춘번
457권 「장동재등전(蔣東才等傳)」
장동재 · 이남화 · 동리고 · 동전승 · 우사한 · 조덕경 · 마복진 · 정문병 · 방요 · 등안방
458권 「서연욱등전(徐延旭等傳)」
서연욱 · 당형 · 하경 · 장조동
459권 「풍자재등전(馮子材等傳)」
풍자재 · 왕효기 · 진가 · 장종한 · 소원춘 · 마성치 · 왕덕방 · 장춘발 · 소득룡 · 마유기 · 오영안 · 손개화 · 소득승 · 장고원 · 구양이견
460권 「좌보귀등전(左寶貴等傳)」 461권 「송경등전(宋慶等傳)」
좌보귀 · 원영산 · 등세창 · 유보첨 · 대종건 송경 · 여본원 · 서방도 · 마옥곤 · 의극당아 · 장순
462권 「정여창등전(丁汝昌等傳)」 463권 「당경숭등전(唐景崧等傳)」
정여창 · 위여귀 · 엽지초 당경숭 · 유영복
464권 「이단분등전(李端棻等傳)」
이단분 · 서치정 · 진보함 · 황준헌 · 증화 · 양심수 · 양예 · 유광제 · 담사동 · 임욱 · 강광인
465권 「서동등전(徐桐等傳)」 466권 「서용의등전(徐用儀等傳)」
서동 · 강의 · 조서교 · 고아랍계수 · 하영년 · 희탑랍유록 · 육현 서용의 · 허경징 · 원창 · 토묵특입산 · 최가연원
471권 「성선회등전(盛宣懷等傳)」 472권 「육윤상등전(陸潤庠等傳)」
성선회 · 서징 육윤상 · 세속 · 이극탄 · 양정분 · 서방 · 노내선 · 심증식
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 진시림, · 요문섭 , 황정린, · 낙종린 ,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 장극억 가박, · 소사요 ,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 유후, · 장기 , 석가소, · 유형 ,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손봉기 · 황종희 · 왕부지 · 이옹 · 심국모 · 사문존 · 고유 · 탕지기 · 육세의 · 심윤 · 응휘겸 · 주학령 · 심호정 · 백환채 · 호승락 · 조본영 · 유원록 · 안원 · 이공 · 조포 · 이내장 · 이광파 · 장형양 · 왕무굉 · 이몽기 · 호방 · 노사 · 고동고 · 맹초연 · 왕불 · 요학상 · 당감 · 오가빈 · 유희재 · 주차기 · 성유 · 소의진 · 고염무 · 장이기 · 만사대 · 호위 · 모기령 · 염약거 · 혜주역 · 진후요 · 장림 · 임계운 · 전조망 · 심융 · 강영 · 저인량 · 노문서 · 전대흔 · 왕명성 · 대진 · 단옥재 · 손지조 · 유대공 · 공광삼 · 소진함 · 왕염손 · 왕중 · 무억 · 장술조 · 척학표 · 정걸 · 손성연 · 왕빙진 · 능정감 · 계복 · 강성 · 전대소 · 허강좌 · 공음식 · 육기 · 광계
484·485·486권 「문원전(文苑傳)」
487·488·499·490·491·492·493·494·495·496권 「충의전(忠義傳)」
497·498·499권 「효의전(孝義傳)」
주용순 · 오번창 오겸목 · 주정 · 적요 · 이경염 · 왕호 · 황농 · 조형 · 황가장 · 정명윤 · 유종수 · 하복한 · 허계각
500·501권 「유일전(遺逸傳)」
502·503·504·505권 「예술전(藝術傳)」
506 · 507권 「주인전(疇人傳)」
설봉조 · 공사연 · 왕석천 · 방중통 · 매문정 · 명안도 · 유상규 · 왕문계 · 주홍 · 박계 · 허여란 · 이황 · 왕래 · 진걸 · 시왈순 · 이예 · 낙등봉 · 항명달 · 정취충 · 사가화 · 오가선 · 나사림 · 고관광 · 좌잠 · 증기홍 · 하란상 · 추백기 · 이선란 · 화형방
508·509·510·511권 「열녀전(列女傳)」
518·519·520·521·522·523·524·525권 「번부전(藩部傳)」
526·527·528·529권 「속국전(屬國傳)」
조선 · 유구 · 월남 · 면전 · 섬라 · 남장 · 소록 · 구르카 · 호한 · 보노특 · 합살극 · 안집연 · 마이갈랑 · 나목간 · 탑십간 · 바다흐샨 · 박라이 · 아부한 · 감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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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청 세조 순치제가 추숭했으나 추후에 삭탈 당했다. [A] [3] 만주어로는 ᡥᠣᡧᠣᡳ ᠮᡝᡵᡤᡝᠨ ᠴᡳᠨ ᠸᠠᠩ이라고 쓴다. [4]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 명장 원숭환의 홍이포에 중상을 입고 얼마 뒤 세상을 떴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헛소문일 가능성도 있다. 상식적으로 왕이 부상당했는데 빠르게 본거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몽골을 침입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다만 누르하치에게 이 전투가 정신적, 심리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전투였던 것은 틀림없다. [5] 버일러는 본래 부족의 수장을 의미하였는데, 명말에는 한(han, 汗)의 아들, 조카 등을 버일러로 지칭하였고, 청대에는 친왕(親王), 군왕(郡王)의 아래, 버이서(貝子)의 위에 있는 세습 작위가 되었다. [6] 울라나라씨를 순장해서 아지거, 도르곤, 도도를 견제하려는 4 버일러(대패륵)들의 정치적인 수였다. 이는 부당한 경우였다. 여진사회에서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 순장 대상이 될 첩을 고르기는 하지만 적처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으며 만약 적처가 순장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어린 자식이 있으면 허용되지 않는다. 도르곤은 아직 어리기는 했으나 혼인을 치른 상태라 성인은 맞고, 도도는 혼인도 치르지 않았다. [7] 아바하이가 죽기 전 자신의 어린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고, 여진사회의 관습상 홍타이지는 계승자로서 적출 동생들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누르하치도 자신을 학대한 계모 하다나라 컨저를 순장시켰지만 컨저의 어린 아들 바야라를 친히 키웠다) 홍타이지가 이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포섭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다. [8] 누르하치가 후금 건국 직후 임명한 네 명의 팔기군 기주(旗主)를 일컫는 말로, 정홍기를 예하로 둔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 양람기를 관장한 누르하치의 조카로 슈르하치의 차남 아민, 정람기를 손에 쥔 누르하치의 5남 망굴타이, 그리고 정백기주 홍타이지이다. [9] 홍타이지는 한으로 즉위하고 황제를 꿈꾸며 자신의 백기와 도르곤 형제들이 물려받은 황기를 인원은 냅두고 색깔만 맞바꿔버린 일이 있었는데 이를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장은 다른 면으로도 근거가 희박한게, 생전에 누르하치는 도르곤보다 아지거와 도도를 더 아꼈다. 그냥 아지거와 도도가 삼형제 중 홍타이지의 신임이 가장 크고 실력도 입증된 도르곤을 팍팍 밀어주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10] 홍타이지가 아민을 숙청한 후 슈르하치의 아들들 중 자기한테 고분고분한 지르갈랑한테 맡겨버렸다. [11] 누르하치 생전에 쇼토가 명나라로 도망가려다 걸려서 다이샨이 저놈새끼를 죽여버리겠다 노발대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쇼토가 할아버지 누르하치 앞에서 아버지(다이샨)가 새엄마한테 정신 팔려서 형(요토)이랑 나는 조강지처 아들인데 신경도 안 쓴다고 서럽게 울자 누르하치가 반역 혐의는 집어치우고 다이샨을 불러다 집안 관리가 어찌 이리 개판이냐며 호통을 치고는 유폐형에서 금방 풀어줬다. 어쨌든 그 덕에 요토와 쇼토 형제, 그리고 다이샨의 다른 자식들까지도 모두 누르하치의 아바하이 소생 늦둥이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이 형제들은 자신의 동생, 조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어린 삼촌들을 귀여워하며 자랐고, 조선 침공 때에도 도도와 함께 움직였으며, 후일 실력을 기른 도르곤의 세력에 포섭되었다. [12] 도르곤은 자기보다 13세 많은 큰형, 아니 큰조카(...) 요토의 부고를 전하며 세상 서럽게 통곡하길래 홍타이지가 애써 달랬던 적도 있었다. 쇼토 역시 정확한 생년은 불명이나 도르곤보다 최소한 9~11살 연상인 큰형님 뻘이다. 비록 이 처분은 도르곤이 쇼토와 아달리를 독단으로 처단한 것은 아니고, 가족들에게 매정해서 아비한테도 한 소리 들을 정도였던 다이샨의 동의가 있었다고는 하나, 한마디로 말해 도르곤이 자신까지 곤란해질 위기에서 손절하는 꼬리자르기였다. [13] 참고로 일편석전투는 중국 사극인 강산풍우정(江山風雨情)에서 재현해줬다. 청군에게 우리의 전투력을 똑똑히 보여주자는 오삼계군의 결의가 돋보인다. [14] 물론 도르곤이 죽고나서 울라나라씨의 황후 추숭은 무효가 되었다. [15] 만력제의 3남이던 복왕 주상순의 아들로 아버지가 이자성의 난 잡아먹히는 동안 도망쳐 복왕위를 이었고 숭정제 사후 황제를 자칭했다. [16] 물론 청이 중원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이자성 순나라가 이미 내부에서부터 명을 멸망시킨 덕분도 있었다. [17] 아무리 청나라가 강성해졌다고 해도 국력 자체는 여전히 명나라가 앞섰고(물론 명의 야전군 자체는 청에 대패해 힘을 못써서 방어만 하는 입장이긴 했다. 이 때문에 이자성의 반란군도 제대로 막지 못한 것.), 이자성이 명을 멸망시키기 전까지도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도르곤이 여기서 꾀를 내어 오삼계를 입발린 말로 구슬리지 않았다면 결코 산해관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여담으로 몽골제국조차도 산해관은 넘지 못해서 다른 루트를 점령해 금나라를 정벌했다.) 조선 또한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것과 별개로 일단 멸망을 면했기 때문에, 만약 순치제 치세의 청나라가 내전 등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면 공민왕 치세의 고려처럼 조선도 삼전도의 굴욕을 복수하겠답시고 언제든 뒤통수칠 모습을 보일 가능성도 있었다. [18] 다만 이때 공을 세운 한족 세력인 오삼계 등을 번왕으로 세워 놔뒀기에 완전히 중원을 청이 장악한건 아니었다. 이후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진압하면서 청이 중원을 확실히 차지하게 된다. [19] 도르곤과 정백기와 양백기는 황실의 측근인 양황기와 정황기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 증거로 황기 대신들은 도르곤 섭정 하에서도 목숨을 부지했다. 또한 순치제가 장성하면서 도르곤은 후일을 대비해 영평부라는 퇴로를 만들었는데 도르곤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다면 영평부를 만들 이유가 없다. [20] 이는 여진족의 부족회의 다수결 선출방식을 계승해 누르하치가 세운 가법이었다. [21] 심지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와 소현세자의 딸인 경숙군주도 1637년 심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도르곤이 이들을 염두에 두고 혼사를 추진했을 것이다. 당시 이들은 혼인 적기였던 15세였다. [22] 한편 호오거는 "호구왕(虎口王)"이라는 묘한 표기로 언급되느라 "호구왕은 곧 홍태시(弘太始)의 맏아들인데 제왕(諸王)들이 나라의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호구를 놓아두고 나이 어린 군주를 세웠다." 같은 내용도 있다.(...) [23] 일본으로 치면 본인은 조선에 비적대적이었지만 임진왜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선의 적이 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와도 비슷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젊은 나이에 죽는 등 끝이 좋지 못했던 것도 도르곤과 비슷한데(도르곤은 요절한 걸로 모자라 아예 부관참시까지 당했음),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는 서군 소속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가 서군이 패하는 바람에 역사의 패자가 되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직후 참수형에 처해졌고 소 요시토시도 처형만 면했을 뿐이지 47세에 죽어서 당시 기준으로도 천수를 누렸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24] 도르곤이 효종이 보인 반청 행보에 대해 홍타이지와 달리 온건한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 점도 크다. 효종의 반청 행보는 강력한 반조선 성향이었던 홍타이지 같았으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이어 세번째 조선 침공을 감행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모습이었지만, 도르곤은 이것을 의순공주와의 결혼이라는 온건한 방식으로 해결한 것이다. [25] 부계로는 효단문황후의 조카손녀이고 모계로는 이부동생이다. [26] 사실 청나라는 황족 및 외척이라면 정치적 풍파에 휘말리거나 크고 작은 사고를 쳐도 후손까지 '멸족'당하는 예는 오삼계급의 대역죄인이 아니고서는 의외로 드물었다. 당장 누르하치 대에도 누르하치는 장남 추연이나 동생 슈르하치를 숙청했지만 후예들은 보전하여 철모자왕 작위와 함께 오래오래 대가 이어졌고(추연의 종갓집은 심지어 옹정 연간 황8자당+천주교 입교 콤보의 사망 플래그가 떠서 순교자가 줄을 이었음에도 끝끝내 멸족만은 면했다!), 도르곤에게 숙청당한 호오거의 후손들도 역시 철모자왕 작위가 이어져 청나라 복벽운동의 주요 리더로서 족적을 남겼으며, 니오후루 허션 역시 건륭제가 세상을 떠난 후 추포되었으나 건륭제의 딸이였던 며느리의 읍소 덕에 자신만 자결하는 선에서 자손은 보전할 수 있었다. 또한 강희제 시기의 황위 쟁탈전에서 옹정제와 대립한 황8자 염친왕 윤사나 윤사의 동생 윤당 역시 거의 기록말살형에 처할 정도였지만 어떻게 후손은 남았고 건륭제 때 다시 황실 족보에 올라 지위는 낮지만 황족으로 대접받는다. 또한 도르곤과 대립한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의 7대손인 정친왕 단화와 이혁보국군왕 숙순, 이혁이친왕 재원역시 기상정변 당시 공친왕 자희태후에게 정적으로 몰리지만 재원과 단화는 자결하고 작위는 불입팔분보국공으로 강등되는 수준으로 끝난다. 오라버니가 죽자 무자비했던 숙청의 황제 옹정제가 연갱요의 죄를 장자에게만 연좌시켜 아비 따라 저승에 보냈을 뿐, 다른 아들들과 일가족에 대해서는 양황기한군 기적을 말소하고 변방 오지로 쫓아내는 선에서 숙청 작업을 마무리지었던 일이 그나마 청 황제들의 외척 숙청시 가장 '멸족'에 가까웠던 예이다. 그런걸 보면, 도르곤의 장성한 아들들은 모조리 숙청당하고 기록말살까지 당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27] 청나라 멸망 이후가 아니라 청나라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 만주족이 한족으로 신분 세탁을 했다면 주로 그 만주족이 속한 가문이 문자의 옥으로 몰락했던 경우다. [28] 처음엔 황숙섭정왕이었다고 한다. [29] 당시 조선 등 주변국에서도 국모가 형사취수된 사례는 없다고 청 상황을 은근히 깠다는 설도 있는데 출처가 필요하다. [30] 정성공의 막료로 있었다. [31] 보통 사랑하던 두 사람이 홍타이지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다가(원래 홍타이지가 그녀의 정혼자였다) 나중에 도르곤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다시 사랑이 불타오르게 된다는 식이다. 물론 작품마다 쓰기 나름이라 어떤 역사 소설에서는 홍타이지 사후 효장문황후의 아들 푸린이 황제 자리에 원만하게 오르기 위해 그녀가 도르곤을 이용했다는 식으로 쓰기도 했다. 결국 사랑했든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든 둘의 관계는 역사 매니아들에게 흥미로운 소재긴 하다. [32] 만주족들은 몽골에게 망한 금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몽골부족의 회유에 특별히 신경을 썼는데, 청황실은 이런 몽골 부족들과 대대로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러니까 몽골 부족의 공주들은 청나라의 비빈으로 오고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황후도 몽골 부족의 하나인 다우르족 출신 고불로씨였다.), 청나라 황실의 공주들은 이런 몽골 부족의 왕들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대에 걸쳐 계속 되다보니 청황제와 몽골공주들은 4-6촌간의 근친결혼(...)이 되어버리는지라 청나라 말기 황제들이 다 단명했다는 설이 있다. [33] 본인도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했다. 게다가 병자호란 이후의 환향녀 문제를 생각하면 조선 왕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인들 모두 자신들의 여성 친족이 청나라 만주족 남성과 혼인한다는 것 자체를 꺼림칙해 했을 것이다. [34] 성종의 8남인 익양군(益陽君) 이회의 후손이라고 한다. [35] 義順公主. "의롭게 순응했다" 하여 효종이 내린 이름이다. 본명은 이애숙. [36] 실제로는 '리기야'라고 불린다. 이렇게 만주 씨족으로 등록된 사례도 실제로 있었다. [37] 보통 버이서, 버일러, 군왕, 친왕 등의 작위는 그냥 만주족 아무개도 아니고 황족 중에서만 임명되었지만, 홍타이지가 차하르부 복속 후 에제이를 비롯한 몽골의 고위 왕공들을 친왕에 봉하여 황족 대접을 했듯 청이 직접 복속한 적국의 군주에 대해서는 예외가 충분히 있을 수 있었으며, 더욱이 정축하성 당시 홍타이지는 실제로 삼궤구고두례를 마친 인조를 자기가 데려온 친왕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히는 등 높은 격식의 의전을 제공했다. 물론 이것도 도르곤이 황제 대 제후왕의 예로서 존중을 해줬을 거란 말이지 조선 입장에서는 고려조 원 간섭기가 다시 재림하는 셈이니 국치 중의 국치였겠지만. [38] 조광윤은 추존황제인 아버지의 부인이자 자신의 생모인 소헌태후 두씨를 태후로서 모셨지만 이는 두씨가 자신의 생모이자 적모였기 때문이지 추존황제의 부인이라 황후로 받든 것은 아니었다. [39] 조선의 성종 제안대군이나 월산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의 쿠데타를 겪지 않고 38세까지 무사히 왕으로 살아간 것도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살아서 수렴청정을 했기 때문이며, 훗날 청나라에서 동치제의 섭정을 하던 공친왕이 처신에 있어 크게 제약이 따랐던 것도 동태후 서태후가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쪽은 태후가 황제를 갈아치우려 날뛰고 삼촌이 조카를 지키려 고생하는 거꾸로 된 구도였지만.(...) [40] 2차로 보낼 예정이던 시녀들은 도르곤의 사망으로 인해 다시 귀국했다. [41] 이 재가 상대가 누구였느냐에 있어 각국 기록들이 제각기 다르다. 심지어 효종실록에서도 말이 왔다갔다 한다. 일단 청사고의 생몰년도 기록을 보면 누르하치의 7남 요여민군왕 아바타이의 3남이자 도르곤의 부하로서 전공을 세워 친왕에 책봉된 단중친왕(端重亲王) 보로가 유력하다. [42] 여진족은 일부다처제였는데, 부인을 적측서로 나누었다. 서영복궁측복진이었던 효장문황후처럼 측복진이 정실로 인정받는 경우도 있지만, 도르곤의 측복진은 양첩에 가까웠다. [43] 건륭제의 후궁 숙가황귀비 긴기야씨는 혈통상 조선계였지만 호적은 정황기의 만주인 포의 신분이라서 법적으로는 만주족으로 대우받았다. [44] 대한제국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 덕혜옹주와 결혼할 당시에는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없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부마로 꼽히지 않지만, 조선 왕조 여성과 결혼한 비(非)한민족 남성으로는 의순공주와 결혼한 만주 만주족인 도르곤 이후 두번째다. [45]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하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등 한민족 왕조와 중국 왕조의 악연을 제대로 묘사하면 서로 우방국인 북중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남한의 경우도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를 다룬 사극·시대극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시기는 대체로 우방국인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였다. [46] 훗날 고려거란전쟁에서 성종 야율융서 역을 맡으며 여진에 이어 거란족 지도자 역할까지 연기하는 이색적인 경력을 기록한다. [47] 벡터맨 2기 1화까지 한정. [48] 옆에 있는 아이는 동생인 도도이다. [49] 임종을 앞둔 누르하치 옆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본 누르하치가 “전사는 울지 않는다”고 한 마디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