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호 | 이혁이친왕(怡革親王)[1] 재원(載垣) |
한자 | 애신각라 재원(愛新覺羅 載垣) |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 자이유완 (Aisin Gioro Dzai Yūwan)(ᡯᠠᡳ ᠶᡡᠸᠠᠨ) |
출생 | 1816년 |
사망 | 1861년 (향년 44~45세) |
1. 개요
이희친왕 홍효의 후손[2]인 이각친왕 혁훈(怡恪親王 奕勛)의 둘째아들이자 청 황실의 종친이다.2. 생애
재원은 가경 21년(1816)에 혁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도광 17년(1837) 21살 나이에 청나라 종실 관료직에 출사를 하였다. 이후 함풍 11년(1861년)에 함풍제 혁저가 피서산장에서 임종 전 재원과 7명에게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그후 명목상 고명 보정8대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3] 그렇게 9월 10일 조문을 마치고 고명 보정8대신들은 연호를 기상(祺祥)으로 정하고 동치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였다. 이때 공친왕 혁흔과 문상, 보윤을 비롯해 베이징 조약을 비롯해 서양 열강과 교섭을 담당하기 위해 북경에 남아있던 재경대신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았다. 동태후, 서태후는 재원을 포함한 고명보정대신 8명을 싫어하였다.[4]9월 14일 산동도감찰어사 동원순이 양궁(兩宮)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라고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재원을 포함한 8대신들이 싫어하여 거부했다. 이 상소가 올라온 이후로 재원을 포함한 8대신들은 태후들과 대립하였다. 서태후는 형의 빈소에 찾아온 공친왕[5]을 이용하기로 결정, 그토록 싫어하던 고명대신들을 없애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 그후 서태후가 재경대신들을 매수하고 10월 26일 정친왕 단화, 이친왕 재원, 양궁 태후, 동치제가 북경으로 출발하였고 이혁보국군왕 숙순이 함풍제 운구를 하루 늦게 하였다.
11월 1일 늦은 밤 양궁 태후가 재원과 단화에게 술잔을 건네고 연회를 베풀어 이들의 경계를 늦췄다. 11월 2일 새벽 동치제와 양궁 태후가 먼저 북경에 도착을 하였고 11월 2일 늦은 아침 단화, 재원은 잠에서 깨어 늦게 북경에 입성하였다. 그후 태후들의 지시로 보군통령에 막 부임했던 순군왕 혁현[6]의 빠른 지시로 둘이 입궁하자 마자 체포를 하였고 숙순은 북경 북동쪽 밀운에서 체포를 당하였다. 11월 3일 서태후가 연호 기상을 폐지하려는 의논을 시작하게 되었고 공친왕 혁흔을 사실상의 섭정왕인 의정왕[7]에 임명하였다. 11월 8일 단화와 재원이 자결명령을 받았다. 그날 밤 재원은 자금성 안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쯔진청)에서 독이 든 포도주를 마시고 음독자살을 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재원의 작위였던 이친왕작은 박탈당하고 영랑군왕의 후손인 재돈이 이친왕작을 계승하였다.
[1]
'이혁'이란 칭호는 '작위의 박탈'을 의미한다.
[2]
이현친왕 윤상의 5대손이다.
[3]
그 중 2인자인 정친왕 단화 또한 명목상 우두머리였다. 단화의 이복동생 이혁보국군왕 숙순이 내각대학사직을 맡은 실세였기 때문이다.
[4]
서태후는 그중 정친왕 단화를 정적으로 여겼다. 동치제의 황후
효철의황후가 단화의 외손녀이기에 동치제 사후에 서태후가 효철의황후를 저수궁에 유폐시키기도 하였다.
[5]
원래 숙순 등의 열하 대신들이 번거롭게 올 필요 없다고 전했지만, 친형제인데 어찌 모른 척하냐고 성화를 부려 조문이 허락되었다.
[6]
광서제와 재풍의 친아버지. 혁흔과 뜻을 같이 햇으나 부인이 서태후의 여동생이라서 서태후와 더 가까웠다.
[7]
도르곤의 예를 반면교사 삼아 섭정왕보다는 한 단계 낮은 자리에 임명되었다. 지위는 황제와 양궁 태후 외에는 만인지상이지만 양궁 태후가 매우 심하게 견제하였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위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