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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18:40:45

박목월

<colbgcolor=#000000><colcolor=#fff> 대한민국의 시인
박목월
朴木月
파일:external/maro.munjang.or.kr/000937.jpg
본명 박영종(朴泳鍾)
아호 소국(素國)
본관 경주 박씨
출생 1915년[1] 1월 6일[2]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수남리
사망 1978년 3월 24일 (향년 63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자택
학력 건천공립보통학교 (졸업)
계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한국기독교장로회)[3]
부모 아버지 박준필(朴準弼), 어머니 박인재(朴仁哉)
배우자 유익순(劉益順)
자녀 장남 박동규 외 3남 1녀
신체 A형

1. 개요2. 생애3. 비판4. 주요 작품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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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
정지용, 《문장》(1940)

대한민국 시인, 대학교수.

2. 생애

1915년 1월 6일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현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에서 아버지 박준필(朴準弼)과 어머니 박인재(朴仁哉)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준필은 1908년 대한제국 내각에서 문서과원(課員, 주사主事)로 근무하다가 경술국치 이후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기수(技手), 1914년부터 1917년까지는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 기수로 근무했다. 뒤에는 경주군 수리조합 이사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19년 경상북도 경주군 서면 모량리(현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571번지로 이주하였다. 그 뒤 1929년 건천공립보통학교, 1935년 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경주군 동부금융조합에 취직했다가 일본에 갔다. 8.15 광복 이후 귀국하여 동부금융조합에 부이사로 승진했으나 사임하고, 교직에 종사하여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를 비롯해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연세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등에 출강했다. 1956년에는 홍익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가 이후 조교수로 승진했으며, 1959년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영전하여 1978년 3월 24일 사망할 때까지 부교수, 교수, 문리과대학 학장서리 및 학장 등을 역임했다.

처음에는 동시로 출발했으며 1933년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다. 그러다가 1939년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 조지훈, 박두진 등과 청록파(靑鹿派)를 결성하고 청록집(靑鹿集)이라는 시집을 발간하였다. 청록집에 실린 그의 시로는 임, 윤사월, 청노루, 나그네 등이 있다. 참고로 청록집이라는 시집은 그의 시 청노루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그의 시는 한국적인 서정과 극히 간결하고도 리듬감있는 시어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기타 유명한 시로는 하관(下棺), '내 신발은 십구문 반'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가정> 등이 있다. 군가인 < 전우>, 포스코 사가, 한국일보 사가, MBC 사가, 문창고등학교 신정고등학교 교가 등의 작사도 했다. <가정>은 예전 7차 교육과정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개인적인 성품으로는 언제 어디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호인이었다고 한다. 다정다감하고 목소리는 약간 가냘픈 듯하며, 조용조용한 성품에 원고 청탁을 거절해본 적이 없고, 모든 원고는 꼬박꼬박 본인이 직접 가져다 주었다.

1978년 3월 24일 새벽에 산책하고 집으로 가다가 지병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5번지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8시에 결국 63세 나이로 사망했다.

유익순(劉益順, 1920~1997)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박동규가 바로 그의 장남이다.[4] 박동규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풍족하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자녀들을 위해 애쓰는 아버지였다. 가령 만화책을 보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만화책을 한 자루 쓸어담아 왔다거나, 서커스가 마을에 오자 몰래 개구멍으로 아들을 들여보내고 자기는 그 개구멍을 들키지않게 서커스가 끝날 때까지 가로막으며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장성해 대학에 진학할 때 "같이 책을 쓸 수도 있구..."하며 은근히 국어국문학과 진학을 권했는데, 나중에 교수가 된 아들이 자신의 논문을 보여드리자 며칠 후 빨간 펜으로 문법과 용어 사용을 일일이 교정해 방문 앞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 아버지 이전에 시인인 박목월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다. 유안진(柳岸津) 시인[5]은 목월의 추천으로 등단했는데, 나중에 시인을 추천해서 등단시키는 것에 대해 엄격했던 목월의 면모를 회고했다. 11년 만에 추천받은 사람, 다시는 이 집에 발길 안 한다고 치를 떨며 나간 사람, 박목월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유안진에게도 처음엔 "유군은 국문과 영문과도 아닌데, 시 몇 편 좋다고 시인으로 추천했다가 사는 게 힘들어지고 바빠서 시 안 쓰면 추천한 나는 뭐가 되노?"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

3. 비판

일제강점기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외면했다고 비판받는[6] 청록파 3인 중 역사적 행적으로 가장 많이 비판받는 인물이다.

박두진 조지훈은 개인적 성향이 반공 보수주의자였음에도[7] 4.19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시대적 상황에 침묵하지 않는 결기를 보였고 정부의 정책 기조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8] 반면 박목월은 일제강점기에는 금융조합 이사를 지내면서 농촌 풍경의 목가적 정서를 노래했고[9] 이승만 정권 때는 대통령 예우곡을 작사했으며 박정희 정권 때는 육영수의 시 선생 노릇을 하면서 육영수 전기를 지었다.

개인적으로 박목월은 다섯 자녀를 두고 있으면서도 가난했다. 어느 날 집 앞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를 보고 장남이 "힘드시죠?"라고 물은 적도 있다고. 그래서 박목월과 같은 출판사에 몸담았던 소설가 이호철은 그의 이런 행적에 대해 '가난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옹호했다.[10]

2024년 3월, 박목월의 미발표 시 290편 중 166편이 공개되었는데 이 중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한 현실 인식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그에 대한 기존의 평가가 일부 수정될 가능성이 생겼다.[11] 목가적, 서정적인 기존 작품들과 달리 이번에 발굴된 작품에서는 무거운 주제나 사회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또한 그의 시는 짧은 단형적 형태가 특징인데, 새로 발견된 시들에는 장시나 연작시도 있다고 한다.

4. 주요 작품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나그네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도화 1」
한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난」
(중략)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가정」
머언 산(山)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노루」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귀 엄마 닮았네

-「송아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 이별가

5. 여담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


[1] 원적부 등 호적 관계 서류, 한양대학교 인사기록부, 주민등록 등에 모두 1915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2] 음력 1914년 11월 21일 [3] 용산구에 위치한 효동교회의 장로였다. 박목월 시인의 어머니께서 설립하셨다고 하며, 시인의 아들 박동규 교수도 이 교회의 원로장로로 재직중이다. [4] 1996년에는 EBS 중2 국어 강의를 녹화하기도 했다. 강의 중 선친의 시가 나오자 "이 시는 이해하기 쉽지요?"라 말하며 미소짓기도 했다. [5]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명예교수이다. [6] 일제강점기 당시 현실 참여 경향이 떨어지는 유미주의 시인들은 독립운동 경력이 있지 않은 이상 대부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7] 박두진 6.25의 노래를 작사했고 당대의 진보 성향 문인 김수영 김일성 만세에서 조지훈의 실명을 대놓고 언급하면서 그의 반공주의를 비판했다. [8] 조지훈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지지를 철회했다. [9] 박목월의 대표작 나그네가 발표된 시기는 1942년으로 농촌 민중에 대한 전시 수탈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10] 이호철이 어느 날 일 때문에 필요해서 물어물어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티는 안 내려고 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딱하더란다. 그래서 이호철은 박목월의 지조 없다 싶은 행태를 비난하지 않았다. [11] 유사한 케이스로 김소월이 있다. 대부분 현실적 문제와는 거리가 먼 순수문학 계열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도 생전에 현실 문제를 다룬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후 창작 노트에서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고뇌를 담은 글이 발견되었다. [12] 이를테면, 이별가불국사 등의 시... [13] 여의도순복음교회 계열에서 발간하는 잡지이다. 1990년대까지는 개신교계에서 제법 위상이 높았던 잡지였다. [14] 제주대학교 교수, 제주문화원장 역임 [15] 가곡 명태의 초연 실패 후 외무고시에 합격해 포르투갈 대리대사를 지냈다. [16] 박동규 교수에 의하면 선친이 꿈에 나와 '왜 그랬느냐'고 타박할 것이 걱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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