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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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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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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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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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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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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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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여자)
윤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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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주연상
제12회
( 1973년)
제13회
( 1974년)
제14회
( 1975년)
윤연경
( 비련의 벙어리 삼룡)
김지미
( 토지)
김지미
( 육체의 약속)
제13회
( 1974년)
제14회
( 1975년)
제15회
( 1976년)
김지미
( 토지)
김지미
( 육체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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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제24회
(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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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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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제5회
( 1969년)
제6회
( 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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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로 온 손님들)
김지미
( 대원군)
윤정희
( 독 짓는 늙은이)
제9회
( 1973년)
제10회
( 1974년)
제12회
( 1976년)
[1]
윤정희
( 석화촌)
김지미
(잡초)
김자옥
(보통 여자)
제22회
( 1986년)
제23회
( 1987년)
제24회
( 1988년)
이보희
( 어우동)
김지미
( 티켓)
이보희
(접시꽃 당신)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6년
이름 김지미
분야 배우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문화보관.jpg
연도 1997년
이름 김지미
분야 영화
보관문화훈장(3등급)

}}} ||
<colbgcolor=#8cb0b6><colcolor=#fff> 김지미
金芝美 | Kim Ji-mi
파일:jjj.png
본명 김명자 (金明子)
출생 1940년 7월 15일 ([age(1940-07-15)]세)
충청남도 대덕군 북면 석봉리
(現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2]
신체 160cm, 48kg
가족 전 배우자 최무룡, 나훈아, 홍성기, 이종구
슬하 2녀, 외손주 6명
데뷔 1957년 영화 '황혼열차'
학력 신탄진국민학교[3] (졸업)
대전여자중학교 (졸업) 덕성여자중학교 (졸업)
덕성여자고등학교 (중퇴)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수료)
종교 불교 가톨릭 ( 세례명 : 세실리아)

1. 개요2. 생애3. 논란4. 4번의 결혼
4.1. 홍성기 감독4.2. 배우 최무룡4.3. 가수 나훈아4.4. 이종구 박사
5. 출연6. 주요 수상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img.sbs.co.kr/30000440057_700.jpg

대한민국 여배우이자 영화제작자.

한창 활동할 땐 미모와 파란만장한 남성편력 덕분에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이 있었다.[4]

2. 생애

3. 논란

4. 4번의 결혼

정확히 말하면, 나훈아와는 사실혼 관계였으므로 법적 결혼은 총 3번이었다. 이혼 역시 3번 했다.

4.1. 홍성기 감독

1957년 황혼열차로 영화계에 데뷔한 김지미는 1958년 18살의 어린 나이에[12] 12살 연상의 노총각인 영화감독 홍성기와 결혼한다. 하지만 홍성기 감독은 계속되는 영화 제작의 실패와 홍성기 감독의 외도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4.2. 배우 최무룡

홍성기와 결혼한 김지미는 홍콩에 합작 영화를 촬영하러 갔다가 최무룡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13]사실 김지미와 최무룡 모두 당시에 톱스타였기에 겹치기 출연이 굉장히 많았고, 두 사람은 많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추며 친밀해졌다.거의 매일 만난 셈. 어쨌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러다 1962년 당시 한국 최고의 톱스타 최무룡 간통 혐의로 함께 구속되었다. 수갑을 찬 두 사람의 행복해 하는 모습에 당시의 언론은 연일 화제가 되었다. 지금 관점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지만, 당시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초대형 스캔들이었다. 결국 1963년 최무룡은 아내인 배우 강효실과 이혼하는데, 이 때 이혼 위자료를 김지미가 지불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위자료인 400만 원[14]을 지급하면서 또 다시 화제가 되었다.[15] 심지어 6년 뒤, 최무룡과 이혼할 때도 김지미가 이혼 위자료를 전부 부담했다고 한다. 당시 여성 혼자 그정도의 재력을 갖고 있기가 힘든 시대였고, 통상적으로 이혼 위자료를 남성이 다 책임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김지미의 위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참고로 간통 당시, 최무룡은 세 딸과 백일무렵의 아들 최민수를 둔 상태였고, 김지미는 딸 하나를 두었었다. 김지미는 몇 년동안 최민수를 맡아 기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최민수는 성장한 후에도 어머니처럼 모셨다고 한다. 사실 최민수가 굉장한 대인인 셈이다. 아버지와 김지미의 불륜관계로 인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했고, 이후 대부분을 친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도, 대외적으로 김지미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원망을 보인 적이 없다. 최민수 본인이 말하기를, 정말 이상하게도 그런 원망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16]

결혼한 후에 슬하에 1녀를 두었는데, 바로 최영숙(1968년 ~ )으로 최민수의 이복여동생이다.

하지만 최무룡의 계속되는 영화 흥행 실패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1969년 두 사람은 결국 이혼한다.(이혼한 후에도 영화에서 부부로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의 관계는 유지했다.) 두 사람 사이의 혈육으로 딸 "밍크"가 있다. 딸 "밍크"(최영숙)는 훗날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손정호와 결혼했다. 최무룡은 후일 19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지만,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2003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4번의 결혼 이혼을 회고하며, "나이 많은 남자, 어린 남자, 능력 있는 남자, 다 살아봤는데 남자는 별거 아니더라. 4번 결혼해본 자이기에 그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다 남자는 다 어린애고,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그렇지만 함께 자녀를 낳아 길렀던 최무룡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4.3. 가수 나훈아

1976년 36살의 김지미는 7살 연하[17]의 가수 나훈아(본명 최홍기)를 만나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연예계에선 2번째로 연상연하 커플의 결혼이었다.[18]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혼인신고는 한 적이 없고, 1976~82년까지 동거한 것으로, 사실혼 관계였다. 두 사람의 교제 기간은 6년이다.

원래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고 같이 다니는 사이일 뿐이었으나, 언론의 오해로 교제 중이라고 보도가 나고, 이에 김지미는 오기가 생겨 정말로 교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3년, MBN 예능 프로그램 " 아궁이"에 출연한 연예기자 1호 정홍택 교수에 의하면, 김지미는 "내가 나훈아를 만난 것은 잘못인 것 같다"는 후회를 했었다고 전한다.

김지미는 훗날 "내가 한 결혼은 3번 뿐이다"라며, 나훈아와의 동거를 후회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게 되는데... 원인은 자신의 동거에 마음의 상처입은 로 인한 말 못할 아픔이라 카더라. 최민수: ???

나훈아 팬들은 김지미에 대한 악감정이 큰 편이다. 두 사람은 부부였던 시절 함께 지상파에 등장한 적도 있는데, 이 영상이 업로드 된 유튜브 댓글을 보면, 김지미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4.4. 이종구 박사

1991년 심장 질환의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4번째 결혼, 나훈아와의 만남에 힘들어 했던 그녀는 이종구 박사와의 만남에서는 가정적인 여성으로서의 변화를 원했지만, "나는 마누라가 필요한 사람이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훗날 한다. 보스 기질 있는 자신의 성격에는 주부가 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결혼 11년 뒤에 이혼한다.[19]

신성일의 회고에 의하면, 신성일은 김지미와도 친했고, 이종구와도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종구가 김지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신성일은 "형님, 4번째 남편이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하며 만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구는 신성일의 말을 듣지 않고 김지미와 결혼하였고, 애초부터 바람이나 피던 놈의 충고를 들을 리가 이로 인해, 신성일과 김지미의 사이도 멀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5. 출연


8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하나,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 기록에 따르면, 남아 있는 편수는 300~400여편 밖에 없을 뿐 아니라, 본인도 정확하게 몇 편을 나왔는지 모른다. 무리한 겹치기 출연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영화를 찍었는지 제대로 모를 정도 혹사 수준의 출연으로 인하여 벌어진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50~70년대 영화들 중 없어진 영화들이 많아, 이 영화들이 발굴되지 않는 이상 정확하게 몇 편의 영화에 나왔는지 알 수 없다.

6. 주요 수상

<rowcolor=#fff>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1969 제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대원군
제15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여우주연상 너의 이름은 여자
1970 제7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1972 제15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 옥합을 깨뜨릴 때
1974 제1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잡초
제13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토지
1975 제14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육체의 약속
1985 제24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길소뜸
1987 제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티켓
제2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1989 제27회 대종상 여우조연상 추억의 이름으로
1992 제30회 대종상 기획상 명자 아끼꼬 쏘냐
2000 제37회 대종상 영화발전공로상
2016 제7회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1] 1975년에는 수상자 없음 [2] # [3] 현 신탄진초등학교 [4] 정작 본인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고, 나는 나다"라며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쪽으로도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연기에 열정적이었으며 좋은 연기자 타이틀을 원했다.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미모의 여배우라는 수식어에 약간 묻힌 감이 있지만, 둘 다 연기력에 있어서 호평을 받는 편이다. [5] 김한경(金漢經)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6] 그의 부친이 '계림양행'이라는 인쇄 업체를 운영했는데, 남한은 물론이고 북한에도 사업망이 있었을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다고 한다. [7] 뷰익은 현재에도 존재하는 GM 산하의 자동차 브랜드인데, GM의 여러 브랜드 중에서도 고급차 포지션이다. 당시 1940~50년대에는 자가용 자체가 최고 부유층의 상징이었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고급차 브랜드였던 뷰익이었을 정도면, 그야말로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갑부였을 것이다. [8] 김지미는 원래 장래 희망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때 쌓은 영어 실력을 살려서 1961년 미군의 한국 홍보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 [9] 김지미와 함께 이 작품을 통해 영화에 데뷔한 유명한 데뷔 동기가 바로 안성기이다. 이 영화에서 김지미는 보육원의 선생님, 안성기는 보육원의 고아 역할의 단역으로 출연했다. [10] 하지만 이 발언은 좀 모순적인데, 후술할 내용 참조. [11] 주로 이들과 공연이 겹칠시 서브주연을 맡았다. 이들의 엄마 역할을 맡은 적도 있었다. [12] 당시에는 20대 초반에 결혼하는게 당연시되고 흔했지만 당시 기준으로도 20살이 채 되지 않은 미성년자 나이에 결혼하는건 다소 이르다는 말도 많았다. [13] 김지미의 인터뷰에 따르면 , 최무룡은 김지미가 갓 데뷔했던 시절부터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14] 위자료 330만 원+채무 70만 원 [15] 60년대 당시 400만 원은 서울 한복판에 집을 사고도 남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16] 사실 이건 최민수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한 후, 친할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어머니 강효실을 거의 못 보고 자라, 어린 시절 형성된 애착 관계가 전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당시엔 이혼을 하면 지금과는 달리,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거의 아이 아버지 쪽으로 양육권이 주어지고, 친할머니가 주양육자가 되며, 이혼을 한 여성은 아이와 연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최민수가 기억하는 어머니를 처음 본 순간이 고등학교 2학년 때라고 하니, 어머니에 대한 모정이 깊게 생기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몇 년 동안 김지미가 최민수을 돌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이혼당하게 만든 장본인임에도 최민수 입장에선 마냥 미워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이다. [17] 김지미는 1940년생, 나훈아는 연예계 프로필 상으로는 1947년생이다. 그런데 나훈아의 경우, 주민등록상의 나이가 1951년생이라는 이야기가 많아서, 둘은 사실 11살 차이라는 설도 있다. [18] 최초는 신성일, 엄앵란 커플. [19] 옛날 신문기사 미국에 살고 있는 딸(33)을 만나고 1달 전 귀국한 김씨는 이후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자택에 홀로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이동 자택은 원래 김씨와 이 박사가 함께 살던 집이었으나, 이 박사가 이달 초 홀로 이태원동으로 거처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