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27:33

김말봉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현재 회원
[분과별 예술 분야]
문학분과: 소설, 시, 아동문학, 평론
미술분과: 건축, 공예,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태피스트리
음악분과: 국악, 바이올린, 성악, 작곡, 지휘, 첼로, 피아노
연극분과: 극작, 무대미술, 연기, 연출
영화분과: 감독, 시나리오, 연기
무용분과: 무용
문학분과 미술분과 음악분과 연극·영화·
무용분과
유종호 전뢰진 안형일 김정옥
김우창 이신자 황영금 임권택
황동규 최종태 이경숙 조흥동
이근배 윤명로 이재숙 최청자
김원일 이종상 서계숙 박정자
서정인 유희영 한명희 김숙자
한말숙 박광진 윤대성
김후란 엄태정 나인용 김지미
김화영 김숙진 나덕성 손숙
김주연 강찬균 신수정 정승희
오세영 최의순 이경숙 김민희
정현종 정상화 김민 박명숙
유안진 윤승중 이영자 손진책
정연희 홍석창 백병동 정지영
김주영 조정현 장혜원 이호재
오정희 김형대 김성길 신영균
신달자 이철주 윤미용 신구
윤흥길 - 정진우 이강백
천양희 - 이만방 안성기
전상국 - 김우진 김긍수
최동호 - - -
권영민 - - -
김광규 - - -
작고 회원
문학분과 미술분과 음악분과 연극·영화·
무용분과
박종화 고희동 박태준 안종화
염상섭 이상범 현제명 이규환
조연현 장발 이주환 유치진
유치환 손재형 김성태 이해랑
서정주 배렴 김동진 오영진
윤백남 김환기 성경린 변기종
오상순 윤효중 김영의 서항석
이헌구 노수현 김원복 이광래
김동리 도상봉 정훈모 김동원
황순원 김인승 이흥렬 박진
김말봉 배길기 임원식 김정환
곽종원 허백련 김생려 이진순
모윤숙 이종우 김세형 조택원
신석초 김은호 이혜구 유한철
박영준 이병규 이상춘 이병일
김광섭 장우성 장사훈 이원경
이은상 김경승 김자경 김천흥
박화성 이순석 김기수 김소동
박목월 오지호 박민종 김충실
백철 김종영 전봉초 차범석
최정희 박영선 김성진 유현목
안수길 박득순 정희석 송범
윤석중 천경자 홍원기 장민호
오영수 이유태 황병덕 김수용
김기진 유영국 정회갑 최금동
임옥인 류경채 김순열 임성남
구상 김원 김순애 이근삼
손소희 김기창 이성천 신봉승
이범선 이종무 황병기 김기영
조병화 김충현 이인영 박현숙
김춘수 이준 백낙호 김문숙
정한모 허건 권오성 강성희
김윤성 박노수 강석희 김지헌
박연희 권옥연 김남윤 임영웅
선우휘 백문기 이규도 이병복
정한숙 문학진 박노경 김기덕
신동집 남관 백성희
강신재 이대원 박조열
박양균 권순형 황정순
한무숙 오승우 송수남
김성한 이광노 김학자
전숙희 윤영자 변장호
홍윤숙 권영우 남궁원
김남조 손동진 오현경
이호철 민경갑
김종길 조수호
김요섭 이수덕
홍성유 서세옥
문덕수 김흥수
이어령 김병기
박두진 한도용
서기원 송영방
조경희 권창륜
성찬경
김윤식
최일남
박완서
이청준
박희진
오탁번
신경림 }}}}}}}}}

파일:20030409000285_0.jpg

金末鳳

1901년 4월 3일 ~ 1961년 2월 9일

1. 개요2. 생애
2.1. 학창시절2.2. 작가활동2.3. 광복 이후
3. 작품 성향4. 작품5. 기타6.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 소설가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개신교 장로. 호는 끝뫼, 본관은 김해 김씨.

필명은 노초(蘆草).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인 망명녀를 투고할 때는 필명을 보옥(步玉)이라고 했다.

활발한 신문소설 연재로 대중소설 세계를 개척한 대중소설가이다.

대표작으로는 <밀림>과 <찔레꽃>, <생명> 등이 있다.

2. 생애

2.1. 학창시절

1901년 4월 3일 부산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일신여학교(지금의 동래여자고등학교) 고등과 3년을 수료했다. 그 뒤 1917년 서울로 와서 정신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뒤 4년 과정을 졸업했다.

그 뒤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타카네 여숙에서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1923년 도시샤여자대학 영문과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이때 신생활 잡지에 발표한 <이상향의 남녀생활>이란 평론이 문학계에서 인정을 받았다. 한편 1925년 4월에 동아일보 신춘문단에 <시집살이>를 발표하기는 했으나, 이때는 문학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문단에 등단하지 않았다. 1927년, 도시샤여자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한국으로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하면서 전상범과 결혼했다. 중외일보에 취직한 이유가 있었는데, 민족 정기를 일으키기 위해, 재정난을 겪던 중외일보를 인수해 사장이었던 안희제의 뜻을 따른 것이다.

2.2. 작가활동

중외일보 기자 시절 쓴 탐방기나 수필이 높은 평가를 받자,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193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한 <망명녀(亡命女)>라는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고행>, <편지> 등 작품을 발표하다, 남편 전상범이 죽자 이종하와 재혼했다.

1935년에 <신가정>에 <5월의 노래>를 발표해 인기를 얻으면서, 동아일보 편집국장인 설의식과 학예부장인 서항석의 주선으로 장편소설 <밀림>을 연재했다. <밀림>을 쓸 당시 거처인 부산 동구 좌천동에 머물고 있었다. <밀림>은 인기를 얻었고, 김말봉은 저널리즘 스타가 되었다.

이어서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이 인기를 얻으면서 통속소설가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찔레꽃> 역시 부산에 머물면서 썼다. <밀림>과 <찔레꽃>으로 인해 대중소설 작가로서의 지위를 얻어 통속소설이 저널리즘과 영합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 후 일제가 조선 청년들을 징용하고 있을 때, 어떤 조선 청년이 찾아와 일본어로 소설을 쓰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몰라서 못 쓴다"고 둘러댔지만, 김말봉이 일본 유학을 갔다왔다는 사실이 온 조선에 퍼져서 그 변명이 소용없게 되자, 결국 일시적으로 절필하고 주부생활을 하며 은둔했다.

2.3.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김말봉은 곧바로 교회로 가서 거듭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펜을 들고, 해방된 이 나라에서 좋은 글을 많이 쓰겠습니다.

그 후 온 가족을 설득해서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같은 해 <카인의 시장>과 <화려한 지옥>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1949년에는 하와이로 시찰여행을 갔다.

서울로 올라와서 공창지대인 중구 묵정동과 용산구 원효로로 가서 공창을 폐지하는 운동을 벌였고, 공창은 폐지되었다. 그 후 박순천과 함께 "남성의 성노예가 된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입법화에 앞장섰다. 윤락 여성들을 돕기 위해 박애원을 경영했으며, 소년, 소녀들의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이러한 사회활동을 위해 <학원>, <새벗>, <여원> 등 월간잡지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공창제도는 법적으로 해산되었지만,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공창제도는 부활했다. 결국 공창폐지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문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온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자주 다니던 교회가 성남교회였는데, 자체적인 건물이 없어서 조선신학교(지금의 한신대학교)에서 일본 천리교 경성본부를 접수하고 학교를 사용하지 않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김말봉은 건축위원회 총무가 되어 매일 새벽기도를 했고, 결국 성남교회는 자체적인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 1954년에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되었다.

한국예술원 위원과 한국문학가협회 대표위원을 역임했다.

1962년 2월 9일,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후 남편인 이종하와 함께 망우리공원묘지에 묻혔다.

3. 작품 성향

김말봉은 문학의 순수성을 중점으로 하는 문예 사조와는 달리, 처음부터 흥미에 중점을 둔 통속소설을 썼다. 애정의 욕구로 인한 갈등 속에서도 '정의는 이긴다'는 도덕성을 갖추되, 독자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신조를 가졌다.

광복 이전에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여,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애욕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광복 이후에는 사회에 눈을 돌려 인간의 애욕 문제와 동시에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김말봉의 작품 세계는 대중적인 멜로드라마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찔레꽃> 이후, 청순하고 가련한 여학생과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청년인 두 주인공을 둘러싼 복잡하고 단계적인 애욕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나타나는 고난과 그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서사 구조는 대중적의 멜로드라마의 한 유형화된 틀을 이루고 있다. 또한 <생명>은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이러한 서사구조를 토대로 집필되었다.

작가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에 눈을 돌려 대중과 함께 살아가햐 한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때문에, 예술성과 인간을 탐구하는 것을 문학의 제일가치로 둔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문학의 본질을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대로 김말봉은 순수문학에만 초점을 맞춘 문단을 비판하면서 "순수귀신을 버리라"고 말했다.

한국 작가 중에서 단편소설보다 장편소설을 자주 썼다.

현대소설과는 달리 구성의 밀도나 진지한 감도 면에서 약하지만. 일제강점기 속에서 의지를 가진 인간의 인간애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 작품

5. 기타

일신여학교에 다닐 때, 후에 정치인이 되는 박순천과, 박시연을 동기로 두었다.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가곡 그네를 작사하기도 했다. 참고로 <그네> 작곡한 금수현의 아내 전혜금의 어머니이며, 지휘자 금난새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따라서 금수현은 김말봉의 사위다.

<끊어진 한강교에서>라는 아폴리네르풍 시로 유명했던 시인 이현우( 1934년 ~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중퇴.)의 계모[1]이기도 했다. 이현우가 3살 때부터 김말봉이 키웠는데, 이현우는 기행과 방랑으로 유명했고, 그 방랑이 심화되어 1960년대 이후 정말로 거지패와 구걸을 다니는 거지가 되었다. 부모가 별세한 후 1970년대 부산에서 거지짓을 하고 다니면서 형제 모두에게 외면을 당했고, 1983년에 모 시인이 돈을 모아 서울 기차를 태워보낸 이후에는 그를 목격한 사람이 없다. 지인들은 "1980년대 군부의 사회정화 운동 때, 부랑자로 몰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2014년부터 소명출판에서 김말봉 전집을 출판하고 있다. 2021년 12월 현재 10권까지 출판된 상황이다.
순서 제목
1권 밀림(상)
2권 밀림(하)
3권 찔레꽃
4권 가인의 시장, 화려한 지옥
5권 꽃과 뱀
6권 별들의 고향
7권 해방 전 단편서사 모음
8권 해방기 단편서사 모음
9권 태양의 권속
10권 옥합을 열고

2022년 김말봉의 생애와 그녀의 소설 3편을 소재로 한 연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가 공연되기도 했다.

6. 관련 문서


[1] 마지막 남편 이종하의 전처 소생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