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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만 해전

구리다 턴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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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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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만 해전
The Battle of Leyte Gulf[1] | レイテ沖海戦[2]
파일:musashi.jpg
1944년 10월 24일, 시부얀해 통과 중 공격받는 야마토급 전함
날짜
1944년 10월 23일 ~ 26일
장소
필리핀
결과
연합국의 승리, 일본 제국 연합함대 붕괴
미군의 필리핀 상륙 성공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미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윌리엄 홀시|]]
[[틀:깃발|]][[틀:깃발|]][[토머스 킨케이드|]]
[[틀:깃발|]][[틀:깃발|]][[월터 크루거|]]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제시 올덴도르프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프랭클린 C. 시버트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존 콜린스
[[틀:깃발|]][[틀:깃발|]][[틀:깃발|]] 구리다 타케오
[[틀:깃발|]][[틀:깃발|]][[오자와 지사부로|
오자와 지사부로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니시무라 쇼지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시마 기요히데
전력
정규항공모함 8척[3]
경항공모함 8척[4]
호위항공모함 18척[5][6]
전함 12척[7]
순양함 23척[8]
구축함 및 호위구축함 99척[9]
390척 이상의 어뢰정, 잠수함, 상륙함, 상륙지원함[10]
항공기 약 1500여 기
정규항공모함 1척[11]
경항공모함 3척[12]
전함 9척[13]
중순양함 14척[14]
경순양함 6척[15]
구축함 약 35척
항공기 약 300여 기 이상
피해 규모
경항공모함 1척 침몰
호위항공모함 2척 침몰
구축함 2척 침몰
호위구축함 1척 침몰
잠수함 1척 좌초
어뢰정 1척 침몰
항공기 255기 손실
사상자 약 3,000여 명
정규항공모함 1척 침몰
경항공모함 3척 침몰
전함 3척 침몰
순양함 10척 침몰
구축함 11척 침몰
항공기 약 300여 기 손실
사상자 약 12,000여 명

1. 개요2. 배경3. 전투 이전
3.1. 일본군
3.1.1. 군령부 및 연합함대의 구상3.1.2. 전함파 장교들의 반발3.1.3. 일본군의 전투서열
3.2. 미군
3.2.1. 미군의 전투서열
4. 해전의 경과5. 결과
5.1. 양측의 피해
6. 해전 이후의 이야기들
6.1. The world wonders6.2. 홀시의 북상 결정에 대한 논란6.3.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논란6.4. 매케인이 홀시의 명령을 준수했다면?6.5. 태풍 코브라6.6. 사마르 해전 후일담6.7. 미 전함부대 VS 구리다 함대6.8. 오자와 지사부로가 홀시를 낚았는가에 대한 논의6.9. 노출된 야마토급 전함6.10. 일본군
7. 구리다 턴은 적절했는가?
7.1. 야마토가 히어만을 물리쳤다면?7.2. 진입했어야 했다7.3. 진입했으면 전멸했다7.4. 구리다의 입장7.5. 작전이 성공했다면?7.6. 구리다 함대 군함들의 평가7.7. 결론
8. 기타

[clearfix]

1. 개요

필리핀이 함락당하면 남방이 차단되어 일본이 말라 죽는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함대가 많아도 쓸데가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필리핀을 뺏겨서는 안 된다. 이 결전에서 연합함대를 전부 잃는다 하더라도 후회는 없다(중략) 이것이 바로 사령관의 결심입니다.
연합함대 사령부 작전참모 가미 시게노리 대좌, 1944년 8월 10일 마닐라, 첩호작전 사전 논의 중

미국 일본 제국 해군을 완전히 재기불능 상태로 만든 전투이자 일본 해군의 총력전. 그리고 인류의 전쟁사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다.[16] 태평양 전선 기간인 1944년의 필리핀 탈환전역 중 10월 22일에서 27일까지 벌어진 시부얀 해전, 수리가오 해전, 엔가노 곶 해전, 사마르 해전을 통틀어 말하는 함대결전급 해전이다. 야마토급 전함, 나가토급 전함, 아이오와급 전함 등 미국, 일본 둘 다 최신 거함들을 한데 끌고 나왔다.

이 해전은 레이테 만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나,[17] 일본군의 목표가 레이테 만을 통해 상륙을 벌이려던 미군을 저지하는 것이었고 각 해전[18]이 연관되어 있기에 레이테 만 해전으로 불리는 것이다.

2. 배경

1943년부터 태평양 곳곳에서 일본군에게 착실히 반격을 가한 미군의 2개 전구(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 니미츠의 태평양해역군)는 1944년 9월 15일[19], 필리핀 열도에서 불과 900km 내외에 위치한 현 인도네시아의 말루쿠(Maluku) 제도의 모로타이 섬과 중태평양 최서단의 팔라우 제도의 펠렐리우 섬에 각각 동시 상륙했다.[20] 미국은 이제 전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함을 확신하게 되었고, 전쟁 초반에 잃었던 필리핀 탈환을 원하고 있었다.[21]

반면 일본의 경우, 만일 필리핀이 미군의 손아귀에 떨어질 경우, 일본이 아직 점유하고 있는 남방지역과 본토가 완전히 유리되게 되므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도 그에 대응해서 미군 필리핀 탈환전을 저지하려 했으며, 동시에 잔존한 해군전력 전체를 동원해서 미국의 필리핀 상륙부대와 미 해군에 심대한 타격을 줌으로써 추가 침공을 방지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미군의 상륙지점인 레이테 만을 공격할 계획을 짜게 된다.

3. 전투 이전

3.1. 일본군

3.1.1. 군령부 및 연합함대의 구상

일본군의 항공모함 세력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패배한 결과 재기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므로, 연합함대는 좋든 싫든 전함 위주의 작전을 짤 수밖에 없었다. 항공모함은 후일을 기약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일본 해군 수뇌부는 이 해전에 올인하기로 결정했고, 내일이 없게 된 항공모함은 미끼로 쓰는 것 외에는 별다른 써먹을 구석이 없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내내 그렇듯이 일본 해군은 양동작전을 준비한다. 남쪽을 통해 니시무라 함대와 시마 함대가 레이테 만으로 진입하고, 주력인 구리다 함대는 산 베르나르디노(San Bernardino) 해협을 통과하여 레이테만 동쪽으로 진입하기로 한다. 또한 오자와 지사부로가 이끄는 함대가 북쪽에서 항공모함을 이끌기로 하였다.

니시무라와 시마, 오자와 함대는 전부 구리다 함대를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그 말인즉슨, 일본군의 구상은 북쪽과 남쪽으로 주력함대를 전부 끌어낸 다음, 당시의 연합함대가 내밀 수 있는 최고의 패였던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 남은 공고급 순양전함과 중순양함을 모두 과감히 올인해서 적의 심장부를 타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이 성공해 미 육군 수송선단에 괴멸적 타격을 입힌다 해도 수상함대가 살아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22]

올인하는 최고의 팻감이 전함이라는 점과 그 결과 잃게 되는 항공모함 들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기존의 일본 해군과 크게 다를바 없어보이긴 하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면 함대도 없다'는 말도 그렇고 가진 것을 과감히 밀어넣어서 승리를 얻겠다는 구상은 아랫 문단에서 서술된 일선 장교들의 악평과는 달리, 여태까지의 일본군 답지 않은 것이었으며, 오히려 과달카날 해전의 미 해군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적어도 연합함대는 필리핀을 사수함으로서 본토-남방간 해로를 유지한다는 명확한 목적은 가지고 있었다.[23]

참고하자면, 구리다 제독이 지휘한 2함대 1유격부대(미군 명칭 중앙함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3.1.2. 전함파 장교들의 반발

허나, 일본 함대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였다. 연합함대가 미 육군 수송선단을 직접 공격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구리타 중장의 2함대에 작전 내용을 전달하면서 벌어진 다음의 대화를 보자.
코야나기 토미지 제2함대 참모장
"이 계획은, 적 주력의 격멸을 포기하고 적 수송선단을 작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술의 상도에서 벗어난 기책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적 주력 격멸을 제 1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미 시게노리 연합함대 참모
"적 주력의 격멸에는, 기동부대의 항공병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이판 공방전에서 대타격을 받은 기동부대와 항공대의 재건에는 적어도 반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그런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동시에 적이 다음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필리핀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거기서 필리핀의 기지항공병력과 호응해, 제1유격부대의 전력으로 적 상륙선단을 격멸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 작전의 주안입니다.

코야나기
"좋습니다. 적의 만내에 돌입하면서까지 수송선단을 격멸하라면 그것도 하지요. 연합함대 사령부는 이 돌입작전으로 수상부대가 괴멸되어도 상관없다는 결심입니까?"

카미
"필리핀을 빼앗기면 본토는 남방과 차단되어, 일본은 말라죽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함대를 가지고 있어도 보물을 썩히는 꼴입니다. 필리핀은 도저히 놓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일전으로 연합함대가 괴멸되어도 필리핀을 확보할 수 있다면 후회는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함대도 없습니다. 돌입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장관의 결심입니다."

코야나기
"그렇습니까. 연합함대 장관이 그만큼의 결심이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돌입작전은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 함대는 전력을 기울여 이를 저지하려 할 겁니다. 따라서, 호불호를 묻기 이전에 적 주력과의 결전 없이 돌입작전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구리다 함대는 명령대로 수송선단을 목표로 적 항만에 돌진하지만 만에 하나 도중에 적 주력부대와 대립해, 양자를 택일해야만 할 경우 수송선단을 버리고 적 주력의 격멸에 전념합니다. 지장 없겠습니까?"

카미
"지장 없습니다."

코야나기
"이건 중요한 요점입니다. 장관에게 잘 전해주십시오."

카미
"알겠습니다."

<출전: 小柳冨次著「栗田艦隊 レイテ沖海戦秘録」pp51-52, 佐藤和正著「レイテ沖海戦~日米海軍最後の大激突」上巻 pp93-94>

군령부와 연합함대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수송선단을 격멸해야 한다고 했으나, 정작 일선 부대에 전달할 때는 그 취지를 납득시키지 못했으며, 거함거포주의 함대결전사상에 찌든 전함전대 승조원들이 함대결전의 기회가 온다면 결전을 벌이겠노라고 고집부리는 것을 꺾지 못했다. 함대결전을 벌인 이후의 지침도 명확하게 주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구리다 턴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또한 아래와 같이, 제독들 사이에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사회
토요다 씨는 19년 9월 케이오 대학 히요시 교사로 연합함대 사령부를 이동시켰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요코야마
지휘관 선두라는 건 항공기가 아무리 발달해도 지켜져야 해. 최고 지휘관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진 싸움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령 하와이도 그렇지. 야마모토 장관이 기동부대와 같이 가서 항공모함을 찾으라고 명령했으면 좋았을 텐데, 무선 봉쇄로 아무런 지휘도 할 수 없었지.

마츠다
적어도 장관은 제일선에 있어야만 해, 이건 원칙입니다. 레이테에서 진 다음에는 아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으니까 육상이라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구리다(타케오)씨가 타고 있는 '야마토'라도 '무사시'라도 좋으니까 타고 있었으면 좋았잖아.

요코야마
타고 있었다면 레이테 만에 돌입할 수 있었다는 거지.
(중략)
노모토
수뢰전대에서 힘차게 달리는 걸 보고, 믿을만한 놈이라고 중앙부는 생각했겠지. 그 때까지 큰 사고도 일으키지 않고 무사히 보냈으니까. 차라리 해상 경험이 풍부한 것치고는 머리도 좋았던 코무라 케이조(45기 소장)같은 사람을 5, 6년 정도 더 키웠으면 최적임이었을 텐데. 구리다 씨도, 그저 수뢰전대에서 달리기만 했을 뿐 머리는 없었어. 레이테 때는 내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어떤지는 모르지만, 여기 있는 분들 말을 들어보면 장관으로서 자주성이 없어. 오자와 씨와는 전혀 다른 점이야. 레이테 출격 때 브루나이에서 작전회의 때는 - 이야기를 들은 것 뿐이라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 다른 사령관에게서 레이테 만에 난입이라니 해군의 타락(*)이라고 한참 악담이 나왔는데, 그런 걸 휘어잡을 능력이 구리다 씨에게는 없었어.

*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연합함대의 작전 목표는 미 육군 수송선단의 격파였지만, 수십년간 함대결전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연합함대의 전함전대 승조원에게는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역주)
(중략)
마유즈미
해대를 나오지 않아도 중앙근무를 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것은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레이테의 반전에는 비판이 있습니다만, 그 때는 장관만이 아닌 참모장도, 우리 말단 함장도, 맥아더의 부대는 전부 상륙을 끝내 결국 가봤자 빈 배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 2함대를 희생시키며 돌입해도 의미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사기도 높지 않았죠. 작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쓰시마 해 해전에서는 네보가토프 제독이 주력함을 이끌고 항복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뭐 이런 얼간이가 다 있나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부하를 살려 해군 재건에 사용하려고 네보가토프는 생각한 것 아닐까 합니다. 구리다 장관은 우리 함장 클래스와는 달리 네보가토프 같은 심경이 조금은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출전: 중앙공론 역사와 인물 1981년 5월호, 특집 증언 일본해군의 전역(中央公論 歴史と人物 昭和56年5月号 特集 証言 日本海軍の戦歴)>, 번역 출처

위의 글은 당시의 지휘부를 비판하는 일선 함장급들의 회상인데, 마츠다 치아키는 4항전 전대장으로 이세급 전함 2척을 지휘하며, 마유즈미 하루오는 중순양함 토네의 함장으로 레이테에 참전했다. 좋게 말하면 지휘부를 비판하는 것이지만, 간단히 말해, 일선의 함장, 제독들이 수뇌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구 일본군의 연공 서열이 어땠는지를 알고 있다면 정말 놀라울 정도.

당시 일본 해군에서는 파벌이 갈려있었는데,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간단히 나누면 전함파 VS 항공파이다.[24] 그리고 이 파벌에 따라서 전술에 대한 관점이 많이 달랐다. 가령 기함이 앞장서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전함파 내부에서도 수뢰전과 포술과의 의견조차 갈렸고, 기함은 어떤 배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전함파와 항공파는 의견이 달랐다. 전함파는 그 외에도 전파 침묵과 야간전에 광적으로 집착했는데, 이 점 때문에 수리가오 해협 해전의 패전을 자초하게 된다.

그러나, 이노우에 시게요시 오자와 지사부로 등 일부 비주류를 제외하면 단지 수단이 전함이냐 항모이냐의 차이일 뿐 한방 승부의 함대결전에 모든 걸 건다라는 시각은 거의 동일했다.[25] 게다가 파벌과는 무관하게 잘 지내는 이들도 꽤 있었다. 따라서 레이테 만의 전개는 단지 기존의 전함파 vs 항공파의 대립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일선 장교들이 보기에, 문제는 연합함대 사령부에 있었다. 일선에서 함대결전을 지휘하는 조직이었던 러일전쟁 도고 헤이하치로 시기와는 달리 2차대전기에는 연합함대 지휘부는 실전에 나가지 않았다. 전함을 호텔로만 써먹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부를 지상으로 옮긴 코가 미네이치,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사령부를 이동시키며 본토로 도망친 도요타 소에무를 비롯한 연합함대 사령장관들의 추태에 이어 함대결전을 포기한 2함대 사령장관 구리다 타케오 같은 높으신 분들의 행태는, 실전에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작전을 담당하는 상급 총사령부 격인 군령부의 입지만 애매하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미 태평양 함대처럼 컨트롤 타워로서의 역할을 해내지도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 반면, 지휘관의 미덕인 기함이 선두에 선다는 연합함대의 자랑스러운 전통[26]은 일선의 중견 지휘관에게만 강요되었다.[27]

오히려 지휘관이 어디 있어야 하는가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항공모함을 기함으로 삼았던 나구모나 오자와는 당연히 선두에 설 수는 없었지만 당연히 일본군에서도 이들에게 지휘관 선두를 들먹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보신주의에 젖은 높으신 분들이 아예 싸움을 피해버리는 바람에[28] 최고사령부의 의도가 현장에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진주만 공습은 대표적 항공파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에 의해 주도되었음에도 함대결전급 전력(정규항모 6척, 고속전함 2척)을 동원한 대규모 작전에 정작 본인이 참가하지 않는 바람에 전함보다 전략적 가치가 높은 항공모함과 항만 시설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미드웨이 해전 역시 함대결전급 전력이 동원된 전투임에도 작전목표는 명확하지 못했고 수뇌부는 주력(항공파 입장에서)인 정규항모 4척의 상실을 초래했으며, 과달카날 전역에서는 높으신 분들이 몸을 사리며 주력함의 투입을 미루는 사이 고속전함 2척과 정예 항공승무원들을 대거 상실하면서도 전과를 얻지 못했고, 대전 말기 레이테 만 해전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네들은 본토로 도망치면서 잔존 함대에는 황국의 흥폐가 여기에 달렸다고 훈시하면서 미 육군 수송선단과 동귀어진하라는 명령을 내린 도요타 소에무는 전함파였다. 표리부동 그 자체였던 것. 상층부가 일선 장병들에게 권위와 신뢰를 상실하기까지 이르기에는 이런 경위가 있었다.

3.1.3. 일본군의 전투서열

쇼고 작전시 연합함대 편성표

연합함대 (사령장관:도요타 소에무 대장)

육군

3.2. 미군

미군은 레이테 만에 지상군을 상륙시켜서 필리핀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상륙에 앞서 미군은 9월부터 필리핀에 전개된 일본 제1항공함대(해군)와 제4항공군(육군)을, 10월 중순부터는 필리핀 인근 해역인 류큐 제도, 대만의 일본군 항공 세력을 차례로 공습하였다.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해전을 앞둔 10월 18일 시점에서 일본군 항공세력은 700기 이상(미군 측 자료는 1,200기)을 손실하는 대타격을 입었다. 이로써 대만 및 일본 본토에서의 항공 지원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다음 과정으로 레이테 만에 맥아더 장군의 육군 6군을 상륙시켜 레이테 섬을 탈환하도록 한다.[31]

킨게이드 제독의 7함대는 여러 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3개의 호위항공모함 전단(태피 1&4, 2, 3)은 레이테 만 동쪽과 남쪽 외곽에 전개하여 지상군에게 항공 지원을 제공하고, 6척의 구형 전함과 7척의 순양함, 그리고 10척이 조금 넘는 수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77.2 임무전대는 올덴도르프 제독의 지휘 하에 레이테 만에 직접 들어가서 포격 지원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홀시 제독의 3함대는 좀 더 외곽에 전개되어 일본 해군의 역습을 맞받아치는 함대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7함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고속전함들이 다수 배치된 마크 미처 제독의 38 임무부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또한, 7함대의 77.2 임무전대처럼 3함대 역시 주목할만한 하위 제대가 존재하였는데, 존 매케인 1세 제독이 3척의 에식스급 항공모함인 와스프, 호넷, 행콕을 포함한 38.1 임무전대를 이끌었다. 이 전대는 38임무부대의 8척의 정규항공모함과 8척의 경항공모함 중 3대의 정규항모, 2척의 경항모가 소속되어 있고 함재기만 따지면 38임무부대 전체의 1/3이 넘는 강력한 전대였다. 이 전대는 울리시 해군기지에 재보급을 받으러 가다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 해군이 침입해 올 만한 경로는 남쪽의 수리가오 해협과 북쪽의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 그리고 북쪽의 대양이었는데, 남쪽의 수리가오 해협에 어뢰정을 잔뜩 보내서 초계하도록 하고, 적이 발견되면 77.2 임무전대가 호위항공모함의 항공 지원을 받으면서 격퇴하기로 하였다. 북쪽의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은 매우 구불구불해서 침공하기 불리한 장소였긴 하나, 일단 배치상으로는 3함대가 방어할 영역에 해당했다.

그 당시 미군의 전력은 일본군의 전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특히 미군은 항공모함과 지상 기지로부터의 압도적인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일본군은 그렇지 못했다. 원래라면 각각의 함대가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기만 해도 일본 해군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나, 명령·작전계통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필리핀 탈환전은 독립적인 작전권을 가지고 각자의 해역에서 전투를 벌이던 태평양 전구의 2개 해역군.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해역군과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이 합동 작전을 펼친 첫 대규모 전투였던 것이다.(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을 남서태평양해역군에 빌려 주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온전한 합동 작전은 아니었다.) 홀시 제독의 3함대는 태평양해역군 소속이었고 킨게이드 제독의 7함대는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이었다. 작은 규모의 전투라면 두 해역군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인물을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하면 되나 필리핀 탈환전은 2개 해역군이 동원되는 규모의 대전투였다. 니미츠나 맥아더 중 한 사람이 전역을 총괄하게 되면 다른 쪽은 굴욕감을 느끼고 격분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상급자로서 워싱턴에 있는 합동참모회의 의원(윌리엄 리히, 조지 마셜, 어니스트 킹, 헨리 아놀드)을 사령관으로 모셔오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태평양해역군이 해군 중심이고 남서태평양해역군은 육군 중심이라는 이유도 작용했다. 그런 이유로 통합사령관 없이 독자적인 전투를 실행하게 되었다. 필리핀 탈환전의 명목상의 지휘관은 맥아더 장군이었지만 그의 지휘권은 남서태평양해역군에게만 해당되었고 태평양 함대에 대해서는 니미츠 제독을 통해 '협조 요청'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3함대와 7함대간의 비협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3.2.1. 미군의 전투서열


4. 해전의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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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과

일본군은 이 해전에서 동원할 수 있는 함선이란 함선은 다 동원해서 미군을 공격했으나 이미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던 미군은 압도적인 수준의 함대와 병력들을 이 해전에 투입하면서 더 이상 일본군이 상대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어있었다. 특히 미군은 여유롭게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에 일본군은 그렇지 못해서, 함포사격시대를 방불케 하는 구시대적 함대결전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도박조차 실패했고, 그 뒤의 일본군에겐 더 이상 미군을 막아낼 해군 전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에 아시아/태평양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틀을 보면 이후 공격측과 수비측이 완전히 바뀌었고 일본이 공격한다해도 제대로된 공격은 하나도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격 목표는 미 해군이 아니라 레이테 만의 상륙부대였고, 해상에서의 교전 역시 미 해군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미 일본 연합함대는 모든 가용 전력을 동원해도 미 해군 격멸은 고사하고 미군 상륙부대에 포격 한 번 하기에도 벅찬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도박이 성공해서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 만을 성공적으로 공격했더라도 일본군이 레이테 섬을 지킬 수는 없었다. 레이테 만의 상륙부대를 날려버리더라도 미 해군의 대함대는 건재하며, 미국의 공업력은 훼손되지 않으니 상륙부대를 다시 만들면 된다.(다만 레이테 섬에 상륙한 6군 병력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완편된 정예병력 10만 손실은 미국이라도 경시할 수 있는 피해가 아니다.) 이미 미국은 홀시와 니미츠의 구형 전투함 + 항모함대가 번갈아가며 일본 연합함대를 두들겨 패는동안 본토에서 만들어진 최신예 전투함과 최신예 항공모함이 일본군이 주둔한 섬들을 차례차례 버스터 콜 시켜버리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상륙부대를 복구하고 나면, 미군은 다시금 레이테 만으로 몰려올 것이다. 그러면 일본군은 다시 레이테 만을 공격해야 하는데, 미군이 두 번씩이나 레이테 만에 일본군이 들어오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번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대함대로 구리다 함대를 받아치면 될 뿐이다.

아무튼 홀시는 전함 무사시를 격침시키고 구리다 함대가 도망치는 것을 정찰기로 확인한 후, 적이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한 후에야 정찰기를 회수했다. 구리다 함대가 없어졌으므로 홀시도 어느 정도 안심했고, 해협 방비를 7함대에 맡겨도 된다고 봤었다. 이것은 니미츠가 내린 기본 명령에 위반되며, 구리다 함대가 미군 정찰기가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는 U턴을 해서 다시 쳐들어왔다는 게 문제였다. 매케인이 홀시의 명령을 무시하는 바람에 원래의 구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변수도 있었다. 결국 홀시는 이 해전 이후 평생까임권을 획득하여 두고두고 씹히게 된다. 후에 홀시가 해군 원수로 진급할 때 해군 내부에서 반대하던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인명경시사상을 상징하는 카미카제도 이 전투에서 처음 등장했다.[37] 하지만 이는 도덕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군사적으로도 물자와 인력만 낭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는 이런 비인간적인 광경이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랜 세월동안 일본 해군을 지배하던 함대결전사상이 헛소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 해전이다. 일본은 미국과 역사상 최대규모로 미증유의 대결전을 치렀고, 그 해전에서 무려 항공모함 4척, 전함 3척, 순양함 10척이 침몰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전쟁수행의지를 꺾지 않았다.

5.1. 양측의 피해

이 전투의 의의는 홀시가 낚였느냐, 구리다가 오판을 했느냐 정도가 아니다. 이 전투로 인해서 일본군은 해상전력이 사실상 와해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입은 손실은 아래와 같다. 반면 미군의 손실은 다음과 같다.
1944년 봄까지만해도 일본 해군은 그동안의 상당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외형상으로나마 전력은 어찌저찌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1944년 3월 말 각종 군함[40] 280척 총 117만 4,710톤(개전 당시의 92.6%)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41] 하지만 미군이 태평양에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선 1944년 하순부터는 주력 함정 손실이 급증하였다. 앞서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을 거치며 일본 해군의 손실은 건조량을 아득히 멀리 앞질러나갔고 일본 해군 자체의 전면적인 붕괴가 시작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 기간인 1944년 10월 23일부터 28일까지 일주일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일본 해군은 군함 32척[42] 30만 3,600톤을 한꺼번에 상실하여 그야말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944년 12월 말에는 함정보유량이 250척 68만 2,050톤(개전 당시의 53,8%)으로 급감했다.[43][44]

일본해군은 그 동안 누적된 피해와 더불어 이 해전으로 인해 받은 치명상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제대로 된 해상 작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전함 6척, 경/중순양함 10척을 포함한 일본의 일부 수상함들은 미군 지휘관 홀시의 오판에 힘입어 격침되지 않고 퇴각하는데 성공했으나, 후퇴 과정에서 전함 공고, 중순양함 나치, 중순양함 쿠마노, 구축함 우라카제 등이 추가로 격침되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간의 연결이 끊어진 탓에 상당수의 배가 동남아에 고립된 것도 뼈아픈 일이었다. 제대로 된 수리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겨우 살아 돌아간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와 타카오급 중순양함 타카오는 싱가포르까지 견인받았지만 수리하러 본토로 귀환할 수가 없어서 부양방공포대업무만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묘코급 중순양함 4번함 하구로는 싱가포르에서 보급 임무 중 페낭 해전에서 격침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의 수상함 전력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요다 소에무 제독이 전후 미군 조사관에게 한 다음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만일 일본이 필리핀을 상실하게 되면, 일본 본토와 남방의 자원지대는 완전히 분리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함대가 본국에 있는 경우 연료를 공급받을 수 없고, 남방 해역에 있을 경우 본토로부터 탄약 및 기타 보급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필리핀을 상실하면서 함대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살아남은 일본 함정 대다수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상태에서 차례차례 미군의 공격으로 파괴된다. 또한 미군은 더 이상 일본 해군의 활동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전투는 미군의 필리핀 상륙을 막지 못한데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전략적(미군의 필리핀 탈환을 저지)으로도 전술적(레이테 만에 상륙한 맥아더의 6군에게 함포사격)으로도 일본군의 완전한 참패로 끝났다.

그런데 연합함대는 (전투에 참가한 부대원들의 과장된 보고를 그대로 믿고) 자신들이 7척의 미군 정규항모를 격침시켰다고 발표하고는, 레이테 섬에 병력을 증원하기 위해 수송작전을 개시하게 된다. 일명 오르목 만 전투(다호작전)으로, 이 작전에 참가한 함선들은 당연히 살아남은 미군의 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된다.

6. 해전 이후의 이야기들

6.1. The world wonders

1차적으로는 니미츠가 홀시에게 전달한 내용과 다르게 문건이 전달되었으므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홀시가 당시에 내뱉은 욕설이 뭐였냐는 질문을 받고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스스로의 행동을 수치스러워했던 점과, 주변인들도 저주했다(curse)라고 에둘러 말한 것으로 보아 니미츠와 홀시 사이에 있었던 오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뿐이다. 이는 최고 지휘관 사이를 심각하게 이간질한 것에 해당했으니 당연히 사후 조사가 들어갔다.

앞뒤의 더미 문장을 넣은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통신장교는 '그냥 생각나서 그랬다(popped into my head).'라고 진술한다.

함대를 점검한 결과, 모든 함이 니미츠가 의도한대로 통신문을 받아서 전달했다. 오로지 홀시의 기함인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의 통신요원들만이 뒷부분의 더미 문장을 함께 전달했다. 사령부는 뉴저지의 통신장교들을 심문했고, 아래와 같은 답변을 들었다.
but the trailing phrase looked appropriate and he seems to have thought it was intended and so left it in before passing it on to Halsey
하지만, 뒤쪽의 (더미) 문장은 적절해보였고, (통신장교가 생각하기에) 의도된 것이었고, 그래서 홀시 제독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에 남겼다.
이제 잊힌 앞쪽 더미 문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TURKEY TROTS[45] TO WATER
칠면조가 물가로 뛰어간다.

당시의 사마르 해전을 생각해보면, 뒤의 더미 문장은 물론, 앞의 더미 문장까지도 홀시의 행동을 비꼬려는 의사가 있는 것으로도 해석이 된다. 하지만, 홀시 제독에게는 앞뒤의 더미 문장이 전달되지 않을 것이므로, 비겁한 이들이 제독을 조롱하는 문장을 읽지 못할 것이었다. 뉴저지의 통신 요원들은 그 사실에 분개한 것으로 보인다.[46]

하지만, 실제로 사령부의 통신장교가 어떤 생각으로 저 문장들을 넣었는지는 알 길이 없는 것도 사실이며, 뉴저지의 통신 요원들이 벌인 일은 결과적으로 홀시와 죄없는 니미츠 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유발했다.

또한 뉴저지의 통신요원들은 이미 전술했듯이,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의 스펠링도 틀렸다. 그래서 통신요원들이 아직 미숙했다고 평가할 여지도 있었다.

해당 통신장교들은 이후 직위에서 잘렸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애초에 The world wonders 사건의 레퍼런스는 홀시의 자서전 하나다. 단지 그것이 다른 배의 통신 담당자들의 증언으로 너무 많이 교차 검증돼서 실제 있었던 사실로만 인정될 뿐. 하지만 군대 특유의 계급 문화로 보았을 때 일개 통신장교가 5성 총사령관과 4성 함대 지휘관 사이에 의도하건 의도치 않았건 큰 불화를 일으켰으니 장교라곤 해도 내리갈굼 등으로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이라곤 추측 가능하다. 웬만한 병사들은 듣기도 싫은 군사재판에 불려가 심문까지 받았는데 더 할 말이 있을까?

6.2. 홀시의 북상 결정에 대한 논란

홀시의 결정에 대한 논란은 생각보다는 복잡하고, 또 팽팽한 편이다.

일단, 홀시의 결정으로 인해 7함대는 위기에 처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당사자인 클립튼 스프레이그 소장과 킨케이드는 공적인 보고서에서 조차 홀시의 행동에 대해 신랄한 평을 남긴다. 킨케이드는 전후에는 홀시와 사이가 크게 벌어진다.
In the absence of any information that this exit was no longer blocked, it was logical to assume that our northern flank could not be exposed without ample warning.
더 이상 출구가 막혀있지 않다는 정보가 없다면, 우리 함대의 북쪽 측면이 충분한 경고 없이 (적에게) 노출될리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해설 :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방어하는 부대가 없다는 것을 몰랐기에, 7함대의 북쪽으로 적이 올 줄 몰랐다.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이 후일에 회고함.
38.1 임무전대의 존 매케인 시니어 역시 홀시의 결정이 옳지 않다고 비판했고, 나중에는 홀시를 저격하며 발목을 잡는다.

34 임무부대의 윌리스 리 역시 '전함에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는 불필요한 논평을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34 임무부대가 구리다 함대를 저지하는 것이 사마르 해전 당시의 전함의 의무였고, 그에 따른 피해는 마땅히 감수해야했으나, 그에 응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에둘러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No battle damage was incurred nor inflicted on the enemy by vessels while operating as Task Force Thirty-Four.
34 임무부대로 활동하면서, 어떠한 전투 손실도 발생하지 않았고, 적의 수상함으로부터 타격을 받지도 않았다.
34 임무부대의 보고서 : 1944년 10월 26일 ~ 11월 3일. #

여기까지는 홀시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당대의 제독들이 남긴 의견이다.

이제 이 논란을 해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관점으로 바라보자면, 가장 잘 알려진 다수설은 미 해군에 복무했던 하버드 대학 교수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이 1947년부터 1962년까지 저술한 역작,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의 관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킨케이드, 니미츠는 홀시의 예상치 못한 전장 이탈에 당황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었므로, 홀시는 북상하지 말고 제 자리를 지켜야 했으며, 아침이 되면 구리다 함대와 교전을 해서 저지했어야 했다. 사마르 해전은 미군에게 행운이 따랐으나, 만에 하나 77.4함대와 77.2함대가 뚫리고 방어선이 무너졌을 경우 상륙병력은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이며, 이는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리고 모리슨은 오자와가 홀시를 낚았다고 해석했다. 오자와 지사부로가 홀시를 낚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본의 전쟁사 연구자들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모리슨의 저작은 권위가 있었고,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므로, 한국에도 이 시선은 자연스럽게 수입된다.

하지만 해당 저술에서 나오지 않은 사실들과 해석들이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하게 추가되었고, 이제 아래와 같이 이에 도전하는 소수설들이 출현한다.
우선 홀시가 북상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만 바라보자.

우선 홀시의 지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3함대 제독은 태평양함대 사령관보다 격이 낮긴 하나, 3함대는 자신의 재량에 따라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제대 단위였다. 거기에 더하여, 홀시와 스프루언스, 킨케이드같은 최상급 지휘관들은 어니스트 킹 제독이나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태평양 전쟁의 전략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47] 홀시가 이 지위를 이용하여 북상을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북상을 하기 위해 전략적인 내용들을 고려할만한 자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마냥 주제넘은 행동도 아니었다.

그럼 실제로 전략적으로 고려한 내용들이 무엇인고 하니, 홀시는 항공모함이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 배들을 전부 배제하는 것이 태평양 함대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일단 적 항공모함 세력을 일소하면, 미 일간의 균형추는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갈 것이고, 일본 해군의 전술적인 승리는 미 해군에게 의미있는 역습 내지는 치명적인 일격은 되지 못할 것이었다. 이 생각은 실제로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서 지배적이었으며, 과달카날 해전을 시작으로 그 이후로 이어진 일련의 해전을 통해서 엄연한 사실로 증명되었다.

모리슨은 이미 이 주장에 대해 비판한 바 있는데, 오자와 함대는 이미 껍데기였다는 주장이 모리슨의 비판이다. 이것은 사실이긴 하나, 태평양 함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홀시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오답이긴 했으나, 바로 그 순간 북상을 결정한 것이 잘못된 것인가? 모리슨의 주장은 결과론인데다가 전후에 알게된 지적인 우위를 이용한 비판이고, 1944년 10월의 홀시에게 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할 수 있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가 사실상 재기 불가능할 타격을 입었고 미군도 전투 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해군 항공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일본 항모가 껍데기인 것을 진작 알았을 수도 있지 않냐고 반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홀시, 리, 메케인, 미처 제독같은 제독들과 미군 참모들도 상술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홀시에게 이거 깡통으로 하는 낚시 아닐까요? 하고 건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항모 자체가 실존하고 있고(그것도 진주만을 때리러 온 철천지원수) 일본이 그 사이에 본토에서 훈련시킨 다른 해군 항공대를 채워왔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 실제로 미국은 일본의 완전 항복 전까지 승기를 잡았다는 확신은 해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홀시에게의 건의 중 확신에 찬 건의는 하나도 없고 모두 추측성 건의였다.

그렇다면 백번 양보해서 항공모함은 올라갈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면 신형 고속전함은 왜 끌고 갔냐고 반론할 수도 있으나 이 부분도 미해군의 항모 전술을 고려하면 참작이 가능하다. 미군은 대전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 넉넉한 배수량과 떡장을 갖춰 몸빵이 가능하며 각종 대공 무기와 대공 관제 시설을 되는대로 장비할 수 있고 속도도 항모랑 함께 다니기에 충분한 고속전함들을 함대의 방패로 세워서 작전을 했다. 이들은 기동하는 항모전단 가장자리에서 레이더 관제를 하며 일본의 항공기나 수상함 세력으로부터 항모를 호위하였는데 방법만 다르지 이들은 오늘날의 이지스함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즉 항모전단의 대공, 대함 방어의 당당한 한 축인 고속 전함들은 항모전단과 쉽게 떼어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즈이카쿠가 미해군에 충분히 위협이 되며 깡통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전을 위해 북상하는 항모 전단에서 고속전함을 빼고 간다는 건 마치 미드웨이에서 항모를 선두 돌격시켰다가 4척 모두 말아먹은 일본 해군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신형 고속전함은 대부분 항모 전단 호위를 위해 가고 포격전이나 상륙 지원 업무는 굳이 빠른 기동이 필요하지 않은 구형 전함이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 해군의 돌입을 함포 사격을 통해 차단할 수리가오 해협의 올덴도르프 제독의 함대가 구형 전함으로만 구성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두 번째로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는 대공 요격에 전념하여, 공격의 근원지인 항공모함을 발본색원하지 않은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은 상황을 든다. 스프루언스는 비판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이 통쾌하겠지만,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라고 해명한다. 스프루언스는 어니스트 킹 제독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으로부터도 사적인 자리에서 판단이 옳았다는 격려를 받았다. 자신을 저지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울화통을 터트린 마크 미처 제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석에서 참모장 알레이 버크 대령과 식사를 하며 '뒤돌이켜보니 스프루언스 제독이 옳은 판단을 한 것 같다.'고 자신의 돌출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들은 공개석상에서 언급하지 않았으며, 홀시는 이런 비난, 즉 사령부를 뒤덮다 못해 제독들에게까지 압박을 주는 그 시선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사령부에서, 제독들은 참모들과 다른 제독들의 의견을 경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자기 확신이 있다 한들 그렇게까지 다수의 비판에 몰리면, 스프루언스 제독같이 돌부처 같은 사람조차도 자신이 독선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기 위해서라도 궁색한 변명이나마 내놓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결국, 홀시의 북상은 홀시 혼자만의 실수가 아니라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잘못된 집단 의사 결정이 누적된 것이며, 문제의 원인은 니미츠가 스프루언스의 옳은 결정을 옹호해주지 않는 대신 사령부 전체의 불화를 가라앉히는 선택을 한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홀시 역시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 실수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는 왜 이 전쟁을 시작했느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 먼저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진주만 공습이었다. 미국 대한민국보다 한참 먼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도 전에 미국 독립 전쟁 남북 전쟁을 겪었다.[48] 시끄러워질 일들은 다 끝나고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것이 안정되고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으로 나날이 발전할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뜬금없이 자기들 집에 불을 지르고 줄 생각도 없는 자원을 두고 김칫국을 마시면서 찬물을 끼얹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 인간들을 보면 화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49]

미 태평양 함대의 베테랑들은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진주만 공습에서 지인을 잃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으며, 새로 들어온 신병들도 전부 진주만 공습에 분개해서 들어왔다. 진주만 공습의 최후의 생존함인 즈이카쿠를 격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태평양 전쟁 그 자체가 미 해군 장병에게 있어서는 감정의 문제였고, 남들이 비판을 하든 말든 간에 그들도 기꺼이 인정했다. 둘리틀 특공대도 그런 면이 있었고, 전함 웨스트버지니아는 실리보단 순전히 감정의 문제 때문에 건져내서 대개장한 것이었다.

거기서 한발 물러선 채로 거기에 동참하지 않고 즈이카쿠를 돌려보낸 스프루언스는 함대 장병은 물론이고 미국 언론으로부터도 욕을 먹었다. 2번째가 전술적인 판단에 대한 관점이라면 3번째는 말 그대로 국민 감정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홀시 역시 거기에 동감하는 축에 속했고, 홀시와 의견을 같이 한 사람들이 태평양 함대 장병의 절대다수였다.

게다가 스프루언스는 인디애나폴리스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를 5함대 기함으로 삼는 기행을 벌였기 때문에, 한발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전쟁을 바라봤다는 옹호조차도 하기 힘들었다. 기함 선택은 함대 사령관 재량이고 인디애나폴리스에 기함 설비가 있던 건 사실이므로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단순한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그걸 감안해도 당대엔 기행으로 통했다. 보통 기함은 함대 사령관 보호를 위해서라도 크고 튼튼한 배를 고르는 편이고, 정보 수집과 중계를 통한 원만한 작전 지휘와 스트레스 받으며 잠도 못 자고 고생하는 참모들을 위해서라도 큰 공간을 가진 배로 선정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래서 보통은 전함, 항공모함에 함대 사령관이 탑승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프루언스는 상당히 감정적인 이유[50]로 겨우 중순양함을 기함으로 선택했고, 그 좁아터진 배에서 고생해야 하는 참모들의 처지를 감안하면 이는 명백한 기행이다. 결국 카미카제로 큰 손상을 입은 인디애나폴리스를 떠나 구형전함 뉴멕시코로 기함을 옮겼는데, 여기서도 카미카제 2연타를 맞고 화재가 발생했다. 참모들은 스프루언스 제독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함 내를 동분서주했는데, 찾고 보니 수병들과 함께 소방호스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솔선수범하는 거야 좋지만 함대 사령관은 함대 전체의 생사를 책임지는 위치이므로 위험상황에는 대피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 기함 선정은 함대 사령관의 특권이지만, 먼저 참모들을 배려해야 했기에 결국 홀시와 같은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로 기함을 옮긴다. 뉴저지에서는 사령관과 참모들을 위해 큰 선실을 2개나 마련해놓아 참모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사마르 해전 이후, 구출된 태피 3의 장병들은 홀시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에 분개했으나, "당시 즈이카쿠를 잡으러 갔고,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설명을 듣고는 홀시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전쟁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부대의 사기가 중요하고, 사기와 감정은 떼어놓을 수 없으므로, 즈이카쿠를 격침하는 선택은 태평양 함대 수뇌부가 언젠가는 해야 할 선택이었다.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의 주력함은 거진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즈이카쿠의 격침은 이 해전이 마지막 기회[51]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1944년 이후, 태평양 함대는 카미카제로 피해를 입으면서, 함대 장병들의 사기를 유지하지 못해 많은 곤란을 겪은 것도 사실이고, 그 결과 진주만의 복수를 외치던 미 해군처럼 프린스 오브 웨일즈 리펄스의 보복을 하기 원했던 영국 태평양 함대의 참전을 허락해야 했다.

네 번째는 홀시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카미카제 문제다. 일본의 항공모함을 모조리 일소하면서, 일본의 자살 항공기가 날아올 방향은 뻔하게 되었고, 함대 방공망의 배치도 단순한 원형진이 아니라 육지 쪽을 더 촘촘하게 구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미카제는 평범하게 돌입하는 뇌격기, 급강하 폭격기보다 더 막기 어려웠다. 그런데 만일, 적에게 경항공모함이 남아있었다면? 네 번째 지적은 상상의 영역이긴 하나, 첫 번째 지적과 맥이 닿아 있다. 일본의 항공모함 세력은 몰락하였으나, 완벽하게 파멸한 그 해전에서 써먹을 구석이 등장한 아이러니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6.3.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논란

어찌되었든 북상을 할 수도 있지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 다음으로 나오는 논쟁거리가 이것이다.

홀시가 처음 밝힌 구상에서는 34 임무부대로 틀어막고, 38.4 임무전대가 항공지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구리다 함대가 새벽 3시에 해협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구리다 함대와 34 임무부대의 포격전은 아무리 늦어도 새벽 3시 이전에 시작되므로, 당일 항공 지원이 시작된 아침 6시 30분까지는 최소 3시간 30분 동안 구리다 함대가 포격전을 벌일 기회가 있다. 3시간 반도 사실 많이 양보한 것이며, 상식적으로 4~5시간 동안 야간 포격전을 벌인다는 이야기인데, 이쯤되면 대부분의 해전은 결말이 나온다.

그 말인즉슨, 38.4 임무전대를 남겨두고 가봐야 잉여가 되며, 홀시는 차라리 모든 항공모함을 이끌고 오자와를 치러가는 게 이득이 된다. 게다가 전후에 홀시는 실제로 같은 취지의 발언, 즉 오자와를 때려잡으려면 모든 항공모함을 끌고 가야했다는 변명을 해서 불에 기름을 붓게 된다.

어쨌든, 그렇게 해전이 전개된다면, 미 해군의 고속 전함은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 해군이 사마르 해전이 벌어지기 전에, 최선의 방식으로 구리다 함대를 저지하려면, 항공 우세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개방하고 구리다 함대를 아침 항공 작전이 가능해지는 새벽 6시 반까지 자유롭게 풀어주며 감시한 뒤 공습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된다.

미군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구리다 함대를 가지고 놀 정도로 전지전능하게 흘러가기는 커녕 그 근처에도 오질 못했다. 그런데 태피 3이 일본 함대의 공격에 휘말린 것을 제외하면, 구리다 함대는 결과론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시나리오로 미 7함대의 반격을 받은 것이다. 이는, 사마르 해전이 거기에 휘말려든 개개인들을 외면하고 큰 그림에서 바라볼때, 미 해군에게 있어 과연 최악의 결과였는가? 라는 의문까지 이어진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어떻게 틀어막냐에 대한 논의는 오로지 IF 떡밥 내지는 말장난으로 가득하며, 위에 소개한 내용은 그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지만,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고를 칼같이 단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언급하자면, 홀시는 구리다 함대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곳을 아예 막지 않았다고 했다. 몇가지 변수가 바뀜으로서 결과가 바뀔순 있겠지만, 홀시 본인이 오판한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홀씨가 평생까임권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리스크를 만들면서도 필요한 제반 조치는 제대로 취하지 않은 것 때문이다. 해당 시점에서의 홀시의 판단이 옳았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미 작전 계획에 따른 홀시와 그 휘하의 함대에는 담당 임무가 할당되어 있었고, 전장 상황에 따른 작전 계획의 변경이야 자연스러운 일이더라도 그렇다면 그 계획의 변경에 대한 책임 역시 해당 지휘관이 부담하는 게 당연한 것.

하다못해 일본군 오자와 함대를 때려잡는 게 괜찮은 판단이었다 해도, 자신이 방어하던 곳을 두고 전 전력을 이끌고 북상한다면 최소한 그걸 명확하게 전파했어야 했다. 홀시가 보낸 전문은 누가봐도 1개 전단은 놔두고 간다는 의미로 보이지, 1개 전단은 보급하러 가서 없으니 가용한 3개 전단 모두를 이끌고 간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일본 항공모함 함대 격멸보다 상륙부대 보호가 우선이라는 니미츠의 기본 명령이 있으면 더더욱.) 또한 그렇게 모든 전력을 이끌고 간다면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 방어는 누가 할 것인지 논의가 있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일본군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일본군 구리다 함대가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노리고 진출한 것을 경항모 인디펜던트에서 출격한 야간정찰기가 보고했기 때문이다. 홀시는 이미 일본군 구리다 함대는 퇴각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고 고위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 하나가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생각하면 이는 충분히 까일 요소가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이 졸전을 치르고 패퇴하였다고 하여 멀쩡히 해협 안으로 진입한 함대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해석한다면 반대로 그런 졸전을 치른 함대에 의해 태피 3의 불필요한 아군 희생이 초래한 것이라 지적할 수도 있다. 아예 IF 식의 얘기를 한다면, 만약 그 자리에 태피 3가 아닌 정규함모와 최신전함이 모여 있다가 구리다 함대의 기습을 받고 개박살이 났다면? 만약 구리다 함대가 태피 3를 무시하고 곧바로 레이테만으로 진입해서 미군 상륙부대에게 멘붕을 선사했다면? 그런 가정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면, 반대로 홀시가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 방어 임무를 7함대에게 이관할 수 있게 조치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7함대에서 정찰기나 어뢰정을 띄워서 감시했을 거고 구리다 함대는 일찍 발각되어 태피 1, 2, 3에서 띄운 항공기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을 거라는 것이 너무 지나친 추측일까?

6.4. 매케인이 홀시의 명령을 준수했다면?

홀시에 대한 옹호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우선 홀시가 3개의 항모 전단을 데리고 오자와 함대, 정확히는 즈이카쿠를 때려잡기 위해 올라가겠다고 했을 때, 38.1 임무전대를 즈이카쿠를 잡는데 데려가지 않겠다고 의사표명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매케인은 소극적인 항명을 할 것을 결심했다.

이후 킨케이드가 구원을 요청했을 때, 홀시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38.1 임무전대에게 구원을 명령한다. 하지만 38.1 임무전대의 지휘관 매케인 제독은 이미 새벽에 3함대와 합류하는 침로가 아닌 7함대 사이의 어중간한 침로를 타면서 물타기를 하고 있었고, 8시 0분의 킨케이드 제독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이미 독단적으로 남쪽으로 전속 항해를 시작한 상태였다. 상원위원이었던 존 매케인 3세가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쓴 책에서 언급된 말이다.

그런데 홀시가 구리다 함대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매케인 제독에게 명령한 시점에 즉시 출항했다면[52], 38.1 임무전대는 태피 3이 구리다 함대와 조우할 시점에, 매케인 제독의 항명과는 별도로 일본 함대를 즉시 공습할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전개하게 되고, 구리다 함대는 항공기가 날아오는 북쪽 방향의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하를 강요받아 77.2 임무전대와 반드시 교전을 해야 했다. 홀시가 이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홀시의 명령을 매케인이 따랐다면 사마르 해전의 구도는 상당히 달라진다. 아군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킨케이드가 구원을 요청했을 때 홀시 제독은 관련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정확히는 킨케이드가 곤경에 처한 건 알았지만 야마토가 태피 3을 공격해오는 최악의 사태까지는 몰랐다고 변명했는데, 매케인 제독이 자신은 이 메시지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홀시의 입장에서는 명령위반을 저지른 놈이 자기 등 뒤에 칼을 꽂은 셈이다.

그렇다면 홀시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 홀시의 명령대로 매케인이 움직였다면 위에 서술했듯이 태피 3에게 곧바로 증원을 보낼 수 있다. 38.1 임무전대와 77.2 임무전대가 구리다 함대를 포위하고 섬멸하는 것도 가능하다. 굳이 홀시의 잘못을 꼽자면 구리다 함대를 감시하던 정찰기를 철수시킨 것 정도이지만, 적군이 줄행랑치고 있다고 확신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매케인의 38.1 임무전대도 남겨뒀다. 게다가 미국 국민들은 즈이카쿠의 목을 요구하고 있고, 홀시에게는 "일본 항모전단은 빈 깡통이다"라는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니미츠를 비롯한 상부의 허락도 얻었다. 홀시는 38.1을 제외한 3개를 가지고 올라간다고 했고, 킨케이드, 니미츠, 킹 제독은 38.4를 제외한 3개를 가지고 올라간다고 이해했기에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아무도 이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홀시만 착각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부하들의 반대 의견도 모조리 추측성 견해일 뿐이었고, 확실히 홀시를 설득할 수준은 되지 않았다. 적의 최강 전력인 항모전력을 쓸어버리고 즈이카쿠를 때려잡아서 진주만의 원수를 갚자는 결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더욱 홀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구리다 함대가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돌파하긴 했지만, 태피 3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레이테 만 돌입에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홀시는 자신이 즈이카쿠를 잡으러 가더라도 남은 병력만으로 일본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봤는데, 결과적으로 맞은 셈이다.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가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쫓겨서 줄행랑칠 거라고 홀시가 예상한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아무튼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홀시를 죽도록 미워하던 일본군과, 그들의 전함 야마토가 졸전을 벌여서 홀시를 도와준 셈이다.[53]

결국 홀시 한 명에게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며, 매케인의 항명이 미군에게 얼마나 큰 악영향을 끼쳤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매케인 제독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온당하지는 않다. 먼저, 매케인 제독이 홀시 제독의 복귀 명령에 다시금 보급 우선을 요청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재보급을 허락했던 것도 결국 홀시 제독이다. 만약 홀시 제독의 오판이 당시에 여러 정황을 알 수 없었다는 이유로 옹호받아야 한다면, 그 잣대는 매케인 제독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즉, 매케인 제독이 홀시 제독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재보급을 다시금 요청했던 것은 물론 보급이 다급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54] 태피 3이 그런 식으로 위기에 처할 것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55] 더불어 설마하니 홀시 제독이 정위치를 벗어나 오자와를 추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위에서도 언급되지만 38.1전대의 보급은 홀시 제독의 허가를 얻은 뒤에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명령 위반이라고 볼 정황은 어디에도 없다. 위에서 38.1전대가 홀시 제독의 명령에 따라 바로 북상하지 않았던 사실을 가지고 명령위반이라고 운운한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말인 셈. 하급 지휘관이 상급 지휘관에게 그 어떤 제안도 할 수 없다면 일본군과 다를 바가 없다. 38.1의 북상이 그 정도로 다급하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매케인 제독의 재요청을 거부하고 단호하게 북상을 명령했으면 될 일이었다.

더불어, 매케인 제독이 킨케이드 제독의 지원 요청을 들었던 사실을 폭로한 것이 무슨 죄인 것처럼 언급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내부고발자들도 전부 죄인이라는 주장이 성립한다. 킨케이드 제독의 지원요청을 들었으면서도 듣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홀시 제독의 과실이 분명히 맞다. 그것까지 옹호하려는 것은 지나치게 홀시 제독에게 감정 이입을 했다고밖에 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매케인 제독이 홀시 제독의 명령을 준수했다면?"이라는 질문은 애시당초 해전 초기 38.1전대의 보급에 대해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아니라 북상 명령을 듣고도 제7함대쪽으로 치우쳐서 이동하다가 킨케이드 제독의 지원 요청에 독단적으로 태피 3을 구하러 움직였던 사실에 대해서 물어야 하는 질문이 된다. 매케인 제독이 제대로 항명했다고 할 만한 부분은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답은 "별 차이 없었을 것."이다. 이미 38.1전대가 구원을 위해 이동 중일 때조차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56] 7함대쪽으로 기동하지 않고 북상했다 하더라도 전황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홀시의 38.1 전대에 대한 지시사항이 구리다 함대의 행동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정황이 전혀 없는 이상[57], 위와 같은 논의가 홀시의 북상이라는 판단에 대한 유의미한 판단자료가 되지도 않는다. 설령 38.1 전대가 홀시의 지시에 철저히 따랐고, 마침 딱 들어맞아 일본군을 견제할 적절한 위치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홀시의 전술적 능력이 아닌, 의도치 않게 마주한 그야말로 행운이 되는 것이다.

6.5. 태풍 코브라

레이테만 해전 이후, 12월이 되었지만, 홀시와 3함대는 필리핀 탈환전에서 항공 지원을 계속한다. 하지만 함대에 MIT 출신의 기상학자를 예보관으로 두고 있었음에도, 태풍이 다가오는 해역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함대의 급유를 진행했다가 큰 비전투손실을 보았다. 그 결과 구축함 3척이 침몰, 다수의 함선이 손상, 함재기 146대가 손·망실, 약 79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인명피해까지 있었다. 코브라(태풍)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피해 규모가 그 당시까지 태평양에서 벌어졌던 주요 전투에서 입은 개별 전투손실 및 인명피해와 맞먹거나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홀시는 사마르 해전, 태풍 코브라, 그다음 해에 코브라와 달리 함선 침몰 같은 피해는 없었지만, 태풍 코니에 3함대가 또 비전투손실을 보게 되어, 자신의 군 생활에 흠집으로 남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이에 대한 합리화와 반론이 있었다고 한다. 이게 진짜 카미카제

6.6. 사마르 해전 후일담

태피 3의 사령관 스프레이그 제독은 사마르 해전에서의 전공으로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미 해군이 물량만으로 전쟁에 이긴 게 아니라는 산 증인이 되었다. 또한 자발적으로 가장 먼저 돌격하고 격침 되기 전까지 지휘하다가 전사한 USS 존스턴의 함장 어니스트 에반스는 미군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이 추서됐다. 사실상 혼자서 일본의 결전함대를 막아낸 USS 히어만의 함장 아모스 T. 해서웨이는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는데 그쳤지만[58] 히어만은 미국과 필리핀 양국으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으며, 어니스트 에반스와 달리 살아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광에도 그림자가 있었으니, 태피 3의 생존자들은 사마르 해전 이후 이틀이 지난 10월 27일이 지나서야 구출받았다. 중간에 항공기가 이들을 발견하고 좌표를 보냈으나, 틀린 좌표였다. 상당수의 생존자들이 탈진, 갈증과 상어떼의 공격으로 사망한다. 마침내 78.1.2 임무분대의 상륙함(LCI)가 이들을 발견해서 건져낸다. 그나마도 아래의 일화를 보듯이, 이들을 찾아온게 아니라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배가 오는 걸 봤는데, 우리 주변을 선회하기 시작했어요. 함교에 어떤 사내가 서서 메가폰을 들고 소리를 질렀죠.
너희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
우리는 다함께 사무엘 B 로버츠요! 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배는 여전히 선회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다시 묻기를,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게 누구냐? 라고 물었죠.
우리는 다함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라고 외쳤죠.
그러자 배의 엔진이 멈추고, 배 옆에 우리가 기어올라갈 수 있는 그물이 펼쳐졌습니다.
우린 그렇게 구출되었죠.
설리번 5형제에 이어, 미 해군은 또다시 물에 빠진 전우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망각한다. 원래대로라면 이것을 바로잡을 군기반장 노릇을 하는 사람이 홀시 제독이었으나, 익히 짐작할 수 있듯이 홀시는 그럴 처지가 되지 못했다.

생존자 중에는 사무엘 로버츠의 승무원인 잭 로버츠도 있었다. 이 사람은 함선의 원래 이름을 딴 새뮤얼 로버츠 본인의 동생이다.

하지만 위 이야기와는 다르게 실제 미 해군이 구조작전을 등한시 하지도 않았고 조난자들이 우연히 구조된 것은 아니다.

사마르 해전에서 살아남은 테피 3의 함정들은 카미카제의 공격으로 침몰한 세인트 로의 조난자들을 구조했지만 호위함이 한 척도 없어 일본 잠수함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고 아군 선박의 침몰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다른 조난자들을 구출 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이에 태피 3의 스프레이그 제독은 킨케이드 제독에게 침몰한 함정들의 승무원 구조를 요청했고 킨케이드 제독은 조난자들의 구조작전을 명령한다.

구조명령이 떨어지자 수상기모함 샌카를로스에서 출발한 몇 대의 PBY 카탈리나 비행정이 조난자들의 위치추적에 나섰는데 이중 한 대가 25일 12시 30분 경에 레이테 만 북쪽 해상에서 표류중이던 수 백명의 조난자들을 발견해 위치를 보고, 태피 1의 호위구축함 두 척이 조난자 구조를 위해 출발을 한다.
하지만 카탈리나기가 알려준 좌표는 실제 조난자들의 위치보다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잘못된 정보였고 25일 오후 5시 카탈리라가 알려준 좌표상의 해역에 도착한 호위구축함들은 하루종일 주변해역을 수색하며 조난자들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고 다음날 오후 태피 1의 호위를 위해 귀환을 한다.

그때 77기동부대의 다니엘 바비 소장의 참모장인 찰스 어데어 대령이 우연히 아군 침몰 조난자들에 관련된 전문을 보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구조작업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다 구조를 위해 파견된 호위구축함들이 조난자들을 발견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되었고 바비 소장에게 보고 구조작전을 건의하게 된다. 바비 소장은 초계정 2척과 대형상륙정 5척으로 구성된 구조선단을 만들어 급파하였고 제임스 백스터 소령의 지휘하에 26일 아침 조난자들이 발견되었다고 보고 된 장소에 도착했지만 전술한 태피 1의 호위구축함들처럼 조난자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백스터 소령은 구조선단의 선박들을 1해리(약 1,800m) 간격으로 벌리고 해류와 바람의 방향들을 토대로 조난자들을 수색했지만 발견하지 못했고 되려 표류중이던 일본 해군 조종사 1명을 구조하게 된다. 조난자들에 대한 수색은 늦은 밤 까지 이어졌는데 26일 밤 10시 30분 경 침몰한 호위항모함 겜비어 베이의 조난 승무원들이 쏘아올린 구조용 조명탄 불빛을 초계정 한 척이 보게 됨으로써 가까스로 조난자들의 위치를 파악 할 수 있었다.[59] 구조선단는 27일 새벽 겜비어 베이 승무원 구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27일 오전 로버츠와 존스턴, 호엘의 조난자들을 구조 할 수 있었지만 초기 잘못된 좌표로 인해 구조작업이 늦어지면서 약 100명 가량의 조난자가 부상 악화등의 이유로 죽거나 실종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해전이였고 그만큼 전투 후 상황은 크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조난자 구조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잘못된 초기 조난자 위치를 수정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많은 것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는다. 또한 77기동부대의 찰스 어데어 대령이 우연히 아군 조난자에 대한 전문을 보고 관심을 가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구조는 늦어졌을 것이며 조난당한 병사들의 피해는 더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위 주장처럼 미 해군이 동료의 구조를 망각했다는 주장을 사실이 아니며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이야기 또한 사실이 아니다.

후술되어 있는 징병제의 언급한 부분 또한 맞지 않는 지적인데, 징병제의 단점 중 하나가 모병제 대비 질적 하락일지는 모르지만 군에서 전략을 세우고 실행을 명하는 건 스스로 군에 자원을 한 영관급 이상의 장교들이지 징병제로 입대한 사병들이 아니다.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고 역시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인디애나폴리스함이 침몰한 날짜는 1945년 7월 30일, 일본의 패망을 며칠 앞두지 않은 시점이였고 위협이 될 만한 일본해군도 이미 몰락한 시점이였기에 그로 인한 태만이 주 원인이였지 징병제와는 상관이 없는 사건이다.

6.7. 미 전함부대 VS 구리다 함대

이 VS 놀이는 주로 일본에서 즐겨 이야기하는 떡밥이다. 여기서 구리다 함대가 이길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구리다 턴에 대한 평가를 바꾸기 때문인 점도 있고, 야마토, 나가토가 미국 전함과 교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인 점도 인기있는 떡밥인 이유이다. 이 주제의 미국 버전은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라 봐도 좋은데, 해협을 막는 주제는 전함간 VS 놀이와는 달리 인터넷 상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다.

구리다와 교전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미군의 전함부대는 총 3개였으며, 각각의 함대가 보유한 전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 34 임무부대 3척의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1척의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77.2 임무전대 3척의 개장된 표준형 전함 : 콜로라도급 전함 웨스트버지니아, 테네시급 전함 2척
3척의 표준형 전함 : 콜로라도급 전함 메릴랜드, 뉴멕시코급 전함 1척,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1척
34.5 임무전대 2척의 아이오와급 전함
구 34 임무부대는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에서 야간전을 벌이게 되며, 77.2 임무전대는 레이테만으로 돌입하면 오전에 교전하게 되고, 34.5 임무전대는 태피 3에 대한 추격을 더 지속했을 때 오후에 교전하게 된다.

구 34 임무부대와 34.5 임무전대는 16인치 SHS를 운용하는 전함들이므로 야마토와도 피해를 주고받을 수 있다. 77.2 임무전대는 사정이 좀 다른데, 유이하게 16인치 포탄을 운용하던 콜로라도급 전함들 조차도, 전함의 주포가 야마토의 주장갑을 쉽게 관통할 수 없었다. 테네시급 전함 캘리포니아는 수리가오 해협에서 포격을 하다가 포탑의 양탄기가 고장난 것이 있었다. 올덴도르프 제독의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에서 교전한 탓에 탄약과 어뢰의 재고도 가장 적었으나, 교전에 필요한 양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근처에 탄약 보급함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미 해군의 전함들은 야마토를 제외한 모든 일본 배들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었고, 개장받지 못한 표준형 전함 3척을 제외하고는 일본 전함들보다 먼저 레이더 관제 사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77.2는 호위항공모함 2개 전단(태피 1과 4)의 항공지원도 받을 수 있고, 34.5는 34.1 임무전대의 에식스급 항공모함의 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 이후는 개인의 상상의 영역이라 볼 수 있겠지만, 구 34 임무부대는 초반 뇌격전과 야간 레이더 사격으로 판도가 결정될 것이고, 일본 함대는 지나가는 선택을 하든, 승패와 무관하게 도망가는 선택을 하든 간에 3함대 휘하 4개 항모 전단의 보복 공습을 받을 것이다.

77.2는 숫적으로 우세한 미군 전함이 질적으로 압도하는 순양함, 구축함들의 포격과 뇌격 및 태피 1, 4의 항공 지원, 그리고 미군 전함의 더 뛰어난 전자 장비를 이용하여, 일본 해군의 수뢰전 시도와 그 이후에 힘으로 밀고 들어올 야마토와 나가토를 저지할 수 있느냐 여부가 될 것이다.

34.5와 구리다가 교전하는 것은, 구리다 함대가 보급을 마치고 돌아와서 전개한 34.1 임무전대의 공습을 버티면서 필리핀 해에서 숨바꼭질을 한다는 뜻이므로 가능성도 낮고, 공습의 주 목표는 십중팔구 나가토와 야마토가 될 것이다.

실제 보듯이 77.2가 제일 승산이 있는 상대로 보이므로, 일본에서 야마토로 VS 놀이를 할 때는 구리다 턴을 하지 않고 레이테 만으로 돌입했다.는 전제를 즐겨쓰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야마토와 나가토가 제대로 싸운다는 조건이 붙는다. 두 전함이 이번에도 사마르 해전에서처럼 바보짓을 한다면 구리다 함대는 순식간에 괴멸되기 때문이다. 사마르 해전이 끝난 시점에서 구리다 함대에 남은 중순양함은 하구로와 토네 뿐이고, 야마토와 나가토를 받쳐줄 전함은 노령함인 공고와 하루나밖에 없었다. 경순양함과 구축함 전력이 미군에 비해 크게 뒤지는 현실에서, 야마토와 나가토의 분발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애초에 테피 3를 상대로도 졸전끝에 패퇴한 이들이 미국 전함과의 교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으리라는 가정 자체가 무리수에 가깝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며, 실제로 전함간의 교전이 있었다면 더더욱 비참한 결과가 나와서 일본해군의 멸망이 더 빨리 앞당겨졌을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6.8. 오자와 지사부로가 홀시를 낚았는가에 대한 논의

정리하자면, 홀시를 낚은 것은 오자와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함대를 거기에 배치한 일본 해군의 지휘부였다. 일본해군병학교 72기 홈페이지 나니와 회에 게재된 증언에 의하면 오자와 함대에는 작전 개시 때부터 전멸을 각오하고 적 기동부대를 북방으로 유인해 구리다 함대에 대한 공습을 경감시켜라라는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출처

이는 오자와 스스로도 레이테 만 해전에 대해 전후 미군의 심문을 받을 때, 동일하게 답변한바 있다. 출처
Q. How, principally were you to support KURITA's mission; by delivering an air attack with your remaining planes, or by acting as a target, or how?
A. Exactly those two ways, sending out what planes I had and also to be a target for your attack. A decoy, that
was our first primary mission, to act as a decoy. My fleet could not very well give the direct protection to KURITA's force because we were very weak, so I tried to attack as many American carriers as possible and to be the decoy or target for your attack. I tried to let KURITA's fleet have little attack from you. The main mission was all sacrifice. An attack with a very weak force of planes comes under the heading of sacrifice of planes and ships.

심문자 : 구리다 함대의 작전을 지원하는 주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남은 항공기로 공습을 하는 것이었나, 혹은 표적이 되는 것? 아니면 다른 것이 있었나?
오자와 :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 가지였고, 내가 가진 함재기를 날려보내는 것과 미군의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미끼가 되는 것이 더 우선적인 임무였다. 우리 함대는 전투력이 약해서 구리다 함대의 방공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고, 그래서 가급적 많은 미군 항공 모함을 공격하면서, 미군의 공격을 뒤집어쓰려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구리다 함대가 미군의 공격을 덜 받게 하려 했다. 미끼가 되는 임무는 함대를 희생시키라는 뜻이었다. 미약한 항공세력으로 공격한 것도, 배와 비행기를 희생시키는 임무의 일부였다.

(이후 미군 심문자는 오자와에게 카미카제에 대해 캐묻고, 오자와는 하나도 몰랐다고 답변한다.)

Q. Who was responsible for this idea of using the fleet as a lure; was that your plan or Admiral TOYODA's?
A. Basically it was TOYODA's idea.

심문자 : 함대를 미끼로 쓰는 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나. 당신의 계획인가 아니면 도요타 제독인가?
오자와 : 기본적으로 도요타의 생각이었다.

Q. What made you feel that you could successfully lure our Task Force in this fashion? The only previous precedent was the battle of the MARIANAS, and in the MARIANAS our Task Force stayed very close to the Invasion Force and did not come forward to attack Japanese forces at an early time; therefore, what made you think you could successfully lure us?
A. I had not much confidence in being a lure, but there was no other way than to try.

심문자 : 미군 임무부대를 꾀어내는데 성공할 거란 확신은 어떻게 할 수 있었나. 선례는 마리아나 해의 교전뿐이었고, 마리아나에서는 임무부대가 상륙부대 근처에 머무르며 일본 함대를 향해 한번도 이동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끼 작전이 성공하리라 생각한 근거는 무엇인가.
오자와 : 성공하리라는 자신감은 딱히 없었다. 그저 해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오자와의 판단은 아니었더라도 유인부대를 지휘한 것은 오자와였으므로 오자와가 홀시를 낚았다는 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6.9. 노출된 야마토급 전함

이 해전에서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가 촬영된다.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다른 배들과 촬영된 사진을 바탕으로 야마토급의 크기와 배수량을 추론해냈으며[60], 일본의 신전함이 정보부의 16인치일 것이라는 예상을 뛰어넘은 18인치급 주포를 장착한 것을 알게 된다.[61]

해전 이후 무사시가 격침된 것을 알았으므로, 미국 해군에게 있어 야마토가 부담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사후에 해당 전함의 존재를 알게된 전함파 제독들이, 이에 가장 확실하게 대항할 수 있는 탈조약형 고속전함인 아이오와급이나 사우스다코타급을 전부 이끌고 북상한 항공파 제독 홀시의 결정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미 해군 내부에서는 이 전함을 항공기로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소모적인 갈등이 생긴다. 무사시가 보수적인 추산으로도 항공 어뢰를 최소 19방은 버티는 탱킹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뇌격으로 처리해야 했던 전함이라면 차라리 잠수함이나 야간 뇌격하는 구축함/어뢰정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항공 주특기 장교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폄하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후 오키나와 해상에서 일본 해군의 야마토 특공을 맞닥뜨리게 되자, 마크 미처 제독과 알레이 버크는 자신들이 먼저 항공세력으로 공격하겠다고 주장하여 스프루언스 제독의 동의를 얻어낸다.[62] 하지만 스프루언스는 5함대 전체로부터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 인디애나, 메사추세츠와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 미주리, 위스콘신, 도합 총 6척의 고속전함을 전부 모으고, 총 11척의 순양함 중에서 알래스카급 대형순양함 알래스카와 괌을 포함한 탈조약급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등의 7척의 순양함, 그리고 총 54척의 구축함 중에서 21척의 구축함을 동원한 함대결전급 전력을 집결시켜 항공 작전이 실패했을 때 수상함 교전을 벌일 준비를 한다.

결과적으로 야마토는 5함대의 고속전함들이 기다리는 오키나와 해상까지 가지 못했고, 규슈 남쪽 100킬로미터 해상에서 굉침된다. 수상함, 잠수함, 항공의 세 주특기들 간의 자존심 경쟁 끝에 트로피를 거머쥔 것은 항공이었다. 하지만 미 해군 항공 주특기 장교들의 투쟁은 이제 막 시작이었고, 제독들의 반란으로 이어진다.

6.10. 일본군

1차 다호 작전은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차라는 이름이 붙은데서 알 수 있듯이, 그 이후로 다호 작전이 계속 입안 되어 실행된다.

구리다 제독은 오판으로 일찌감치 철수한 것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그 때 너님이 상륙부대 있는 곳까지 처들어갔으면 더글러스 맥아더를 고기밥으로 만들 수 있었을 거임!"이란 이야기를 들으며 두고두고 씹혔다. 이게 오판인지는 아래에 있는 '구리다 턴은 올바른가?' 항목을 참조하자.

오자와 지사부로는 성공적으로 미끼 작전을 이끈 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지만, 그가 이끌 함대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함대 없는 사령관으로 패전을 맞게 된다.

7. 구리다 턴은 적절했는가?

구리다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구리다 제독은 레이테 만에 진입하지 않고 함대를 철수시켰기에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이 사건은 진주만 공습 당시에 나구모 제독이 3차 공습을 포기한 것과, 사보섬 해전에서 미카와 군이치 제독이 미군 수송함대를 공격하지 않고 퇴각한 것과 함께 두고두고 일본인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구리다 턴은 희대의 오판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7.1. 야마토가 히어만을 물리쳤다면?

야마토가 사마르 해전 초기에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을 격침시켰거나 몰아냈다면 태피3은 순식간에 전멸했을 것이다. 전함 상대로 호위항모와 구축함이 포격전으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사마르 해전을 하느라 낭비한 시간이 고스란히 레이테 만 습격에 배당될 것이고, 레이테 만을 불바다로 만들고 탈출할 시간이 생겼을 것이다. 맥아더의 상륙부대가 사태를 눈치채고 대비할 시간도 크게 줄어들게 되므로, 공격이 성공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졌을 것이다.

그렇게 공격이 성공했다면 전후 야마토의 평가도 달라졌을 것이다. 해상호텔에서 수훈함으로 격상되기 때문이다. 전황을 보면 사실상 거저먹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상층부에서 너무 안 써서 그렇지, 출전하면 일은 제대로 했잖아?"라는 변명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매함 무사시에게도 "무사시의 희생 덕분에 작전이 성공했다"는 평가가 붙게 된다. 야마토급 전함이 세계 최대의 삽질이라는 현재의 평가를 조금은 바꿀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현실은 전함이 구축함한테 구축당한 초유의 사태였지만.[63]

7.2. 진입했어야 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군은 무조건 레이테 섬을 지켜야 했다. 레이테 섬을 빼앗기면 곧바로 필리핀 상실로 이어지고, 이는 일본의 패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걸 막기 위해 일본군은 오자와 제독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즈이카쿠, 치토세, 치요다, 즈이호 4척과 항공전함 이세, 휴가로 편성된 항모전단을 미끼로 사용했다. 일본군에게는 다행하게도, 홀시의 3함대는 미끼에 낚여서 북쪽으로 사라졌고, 레이테 섬은 진공상태가 되었다. 태피 3 같은 호위항모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지만, 홀시의 3함대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16전대가 호위한 수송선들이 레이테 섬에 성공적으로 도착해서 병력을 내려놓았으니, 남은 건 구리다 함대의 일격 뿐이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레이테 만에 진입을 해야 했다. 작전 성공이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진입하지 못하면 필리핀 상실은 필연적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은 멸망하니만큼 무조건 작전을 성공시켜야 했다. 구리다 함대가 그 당시 일본군의 전함과 중순양함을 모조리 긁어모은 최상급 부대였으니만큼, 태피 3 같은 시시한 부대 따위는 단숨에 밀어버리고 들어갔어야 했다. 사마르 해전이 끝났을 때, 태피 3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므로 힘으로 밀고 들어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맥아더의 상륙부대가 저항하겠지만, 야마토 같은 강력한 전함은 그들에게 없었다. [64]

일본 함대가 치른 막대한 희생도 돌입을 시도해야 할 이유이다. 금쪽같은 항공모함 4척을 보유한 오자와 함대는 무시무시한 홀시의 제3함대를 꾀어내기 위해 미끼가 되었고, 기함 즈이카쿠를 포함한 항공모함 4척이 모두 격침당했다. 니시무라 함대도 훈련함으로나 쓸만한 고물인 후소급 전함 2척을 주축으로 돌입을 시도했다가 올덴도르프 함대에게 괴멸당했으며, 그 덕분에 레이테 만으로 향하는 입구는 활짝 열린 상태였다.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면서 만든 기회라면 당연히 써먹어야 했다. 돌입하면 구리다 함대도 큰 피해를 입겠지만, 어차피 돌입하지 않으면 일본은 망하고, 남겨진 함대는 전리품으로 전락할 뿐이다.

7.3. 진입했으면 전멸했다

문제는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 만 진입에 성공한다고 해서 상륙부대를 다 괴멸시킬 거란 보장은 없다는 거다. 아니, 오히려 작전 실패하고 실제역사보다도 더 안 좋게 끝날 가능성이 더 컸다.

제공권은 미국에 있는데다가 맥아더도 그런 상황이 되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고[65][66],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일본 함대를 아작내버린 올덴도르프의 포격지원함대도 슬슬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많은 포탄을 소모했지만 구리다 함대와 마주쳤으면 화끈하게 한판 뜰 정도의 포탄은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전함의 수도 더 많았다.[67] 이 함대의 전함들은 구식전함들이었지만[68] 구리다 함대의 전함들도 아먀토를 제외하면 구식 전함들이었으니 미 해군이 숫자를 앞세워 우세를 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가토의 경우 16인치 주포로 무장했기에 웨스트버지니아와 메릴랜드를 제외한 올덴도르프의 나머지 전함들 상대로는 화력상 우세를 점할 수 있었으나 방어력이 썩 좋지 못한 편이고, 공고와 하루나는 순양전함인 만큼 구형 전함들 상대로도 속도를 제외한 하드스펙상 애초에 열세라서 숫자에서도 밀리는 상황에서는 크게 기여하기는 힘들 것이었다.[69] 구리다가 맥아더의 상륙부대를 괴멸시키기 전에 올덴도르프의 포격 지원 함대가 도착하면 구리다 함대는 꼼짝없이 포위당한 채 싸워야 할 거고,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면 곧 홀시의 3함대도 돌아올 것이니 일본 함대는 진작에 전멸했을 것이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일본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일본군은 지휘관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만을 요구할 뿐 정작 그러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는 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쉽게 말해 미드웨이에서 나구모 주이치가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거다. 레이테에서의 구리다는 일본군의 다른 함대와의 통신도 두절되었고 미군의 상황을 정찰할 수단도 없었으므로 올바른 판단만을 내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남은 건 최소한 본인이 가진 정보에 입각하여 최선의 판단을 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가 구리다 턴이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위에 언급된 코야나기 토미지 제2함대 참모장의 발언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그렇습니까. 연합함대 장관이 그만큼의 결심이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돌입작전은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 함대는 전력을 기울여 이를 저지하려 할 겁니다. 따라서, 호불호를 묻기 이전에 적 주력과의 결전 없이 돌입작전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구리다 함대는 명령대로 수송선단을 목표로 적 항만에 돌진하지만 만에 하나 도중에 적 주력부대와 대립해, 양자를 택일해야만 할 경우 수송선단을 버리고 적 주력의 격멸에 전념합니다. 지장 없겠습니까?"
사마르 해전에서 구리다 함대는 적 주력부대(사실은 태피 3)와 마주쳤고,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적 주력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니 이제 빠져나가도 된다고 판단했다. 안 그래도 수송선단 같은 시시한 목표를 격파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기 싫었는데, 주력부대와 싸우느라 중순양함 다수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으니 탈출하고 싶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침 우는 애의 뺨을 치는 격으로 적에게 포위당했다는 정보까지 날아왔으니, 더더욱 탈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2함대의 군인들 입장에서도 구리다 턴이 꼭 무리한 판단인 건 아닌 게, 연합함대는 함대결전을 현장지휘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방기한 채 2함대에 사실상의 카미카제를 강요했고[70] 그런 와중에 작전 한 달 전 빤스런이나 하는 참 꼴사나운 마당이었으니 2함대의 사기가 높을 리가 만무하다. 만에 하나 구리다가 여기서 수상함대마저 싹 말아먹게 된다면 일본은 그야말로 수상함과 항공모함 모두를 한꺼번에 말아먹은 꼴이 되고, 사실상 연합함대는 명목 상의 존재까지 레이테만 해전에서 끝났을 것이다.

7.4. 구리다의 입장

구리다 턴 이후로 구리다는 욕을 아주 많이 먹었지만, 그가 과연 무능한 겁쟁이인지 그의 입장에서 한 번 살펴보자.

구리다는 해전 첫 날부터 기함 아타고를 잃고 바다에 빠졌으며, 그를 도와줄 사령부 요원들을 대부분 잃었다.[71] 시작하자마자 손발이 잘려나간 셈이다. 거기에 홀시의 공습이 가해졌고, 구리다가 가진 막강한 전함 무사시는 자기 주포로 자기 대공포를 날려버리는 삽질을 한 끝에 침몰했다. 결국 구리다는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지만, 홀시의 정찰기가 사라지자마자 재빨리 뱃머리를 돌리고 다시 레이테 만으로 진격했다. 홀시를 멋지게 속여넘겼으니 나름대로 잘한 셈이다.

태피 3과 마주쳤을 때에도 구리다는 특별히 실수하지 않았다. 포격전 진형으로 바꾸지 않은 것을 지적할 수가 없는 게, 태피 3의 항모들이 함재기를 대거 발진시키고 있었다. 적이 공습할 게 뻔하니 당연히 대공진형으로 바꾸고 돌격해야 하고, 최대한 빨리 항모들을 박살내야 했다. 구리다가 태피 3을 홀시의 3함대로 착각한 것을 탓하기도 뭐한 게, 항모가 6척이나 나타났다면 당연히 강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서두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본군의 레이더가 먹통이니 눈으로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자.

사마르 해전이 시작되자마자 중순양함 2척이 적함에게 대파되었지만 이것도 구리다 탓은 아니다. 곧바로 일본군이 반격해서 적함[72]을 대파했으니까. 미군의 군함 3척이 접근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곧 처리될 것이었다. 마침 적함 하나가 기함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지만 구리다의 기함은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였고, 일본의 자랑인 전함 나가토와 공고급 전함 하루나도 있었다. 당연히 이긴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전함 3척이 적함[73]한테 패했다. 일본군은 적함이 순양함이라고 착각하긴 했지만[74]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순양함 1척이 전함 3척을 물리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75] 게다가 막무가내로 돌격해오는 미국의 구축함들을 효율적인 속사로 저지해야할 일본군 중순양함들은 되려 먹잇감인 구축함들에게 줄줄이 박살나고 있었고, 지휘를 해야 하는 기함 야마토는 최신예 고속 전함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구축함의 어뢰에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가고 있었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지휘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구리다가 모든 배들을 집합시킨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단 모아놔야 뭘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일단 모아놓고 보니 피해는 막심했다. 함대를 받쳐줄 중순양함이 괴멸해버린 것이다. 남은 중순양함은 하구로와 토네밖에 없었는데, 토네가 항공순양함임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중순양함은 하구로 뿐이었다. 어차피 적함한테 패배한 토네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게 무리이긴 했다. 그나마 믿음직한 수훈전함 공고는 건재했지만[76], 그 외에는 매우 믿음직하지 못한 잉여 전함 3척밖에 없었다. 그들의 전투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게, 적함한테 쫓겨서 줄행랑치는 꼴을 구리다 자신이 목격했다. 거기다가 "적이 몰려오고 있다"는 무전은 날아오는데 "미끼 작전이 성공했다"는 오자와의 무전은 어째서인지 날아오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싶어도 제공권을 미군이 장악했으므로 정찰기를 마음껏 내보내기도 힘들었다. 증원군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원래 구리다 함대에 들어올 예정이었던 16전대는 수송선을 호위하며 오르목 만으로 향하고 있었고, 레이테 만으로 올 예정이었던 니시무라 함대와 시마 함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구리다의 입장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보자. 당신의 함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적이 몰려오는 데다 미끼 작전이 성공했다는 길보는 안 오는 상황이고, 당신의 어깨에는 연합함대 전체의 명운이 걸려있다. 믿을 수 있는 전함은 공고밖에 없는데, 공고는 14인치포를 탑재한 노령함이다. 당연히 미군 전함과의 정면대결은 무리다. 중순양함은 하구로밖에 없다. 성능은 제쳐두더라도 수량부터가 모자란다. 경순양함과 구축함들은 성능과 수량 면에서 미군의 적수가 못 된다. 덤으로 미드웨이에서의 삽질로 악명높은 항공순양함 토네가 있고, 당신의 눈앞에서 추태를 보인 잉여 전함 3척이 있다. 당신을 도와줄 증원군도 없다. 사마르 해전이 2시간이나 걸렸으니 레이테 만의 미군도 도망가거나 전투준비를 완료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신이 돌입 명령을 내린다면 레이테 만의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하고, 미 함대에 따라잡혀 괴멸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고 해도, 레이테 만의 미군 상륙부대가 모두 달아난 후라면 임무완수도 못하고 개죽음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탈출을 선택하면 나라가 망한다. 레이테 섬을 뺏기면 필리핀도 잃을 것이고,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가 단절되면서 자원조달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연료가 없는 배는 그저 고철덩어리일 뿐이고, 고철로 미군을 막을 수는 없다. 후일을 기약하며 철수해봤자 그 후일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과 당신 부하들은 목숨을 건진 대가로 영원히 욕을 먹게 될 것이다. 과연 당신은 레이테 만으로 진격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구리다 턴을 하겠는가.

구리다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구리다 턴은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어쨌든 오자와 함대의 미끼 작전은 성공했고, 구리다 함대에 비하면 빈약한 전력인 16전대는 레이테 섬 돌입에 성공했으며, 니시무라 함대는 최후까지 임무를 수행하다 전멸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구리다 턴이 나왔으니, "패배의 원인은 구리다 턴 때문이다"라는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후 구리다는 "피로가 극에 이르러 판단착오를 일으켰다"고 술회했지만, 그렇다고 구리다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구리다가 겪은 여러가지 어려움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월 22일에서 27일까지 치러진 해전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제대로 된 정보도 안 주고, 싸우라고 준 전함은 구축함한테 깨지는 잉여들이니 실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거슬러가면 결국 일본 해군이 정찰이나 통신을 게을리 한데다가, 함대간의 연계를 신경쓰지 않고 제대로 된 훈련도 시키지 않아서[77] 구리다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어려웠다. 구리다를 탓하기 전에, 이런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78]

7.5. 작전이 성공했다면?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대로 구리다 함대의 레이테 만 돌입이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매우 두루뭉술한 목표였지만 아무튼 목표를 달성했을 경우, 일본 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대부분의 군함이 가라앉게 되겠지만 레이테 만에 남아 있던 미군 상륙부대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이미 상륙일로부터 5일이 지난 상황이었기에 대부분의 물자가 하역됐고 상륙지를 벗어났을 부대가 많겠지만, 중장비와 상당량의 보급물자, 그리고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수뇌부는 레이테 만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도 필리핀 상실을 피할 수는 없다.

우선, 미 함대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필리핀에서 생산하는 물자를 나를 수송함을 지킬 수단이 없어진다. 호위함들은 어느 정도 남았어도 그걸로 미 항모전단을 막을 수는 없다. 위에서도 언급한 말이지만 미군이 상륙부대를 다시 만들어서 쳐들어오면 그때는 정말로 답이 없다. 작전이 성공한 후에 어떻게 필리핀을 지킬 셈이었을까?

구리다가 ‘적 주력(태피3가 너무 열심히 싸워 든 착각이지만)도 어느 정도 격파했고 우리 피해도 큰데 포위될 위기까지 처했으니 일단 후일을 기약하자’ 하는 식으로 철수한데는 이런 생각 역시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현실은 필리핀을 상실하는 시점에서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므로 후일 자체가 없어지지만, 연합함대는 일선부대를 설득하지 못했다. 위에서도 언급한 코야나기 토미지 제2함대 참모장의 발언 중 핵심은 이것이다.

"양자를 택일해야만 할 경우 수송선단을 버리고 적 주력의 격멸에 전념합니다."

결국 작전의 배경과 의도와 목적 그 모든 것이 그야말로 인지부조화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일선에서 싸워야 할 제2함대에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그렇기에 그들은 수송선단 괴멸이라는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를 무시하고 적 주력(사실은 태피3)의 격멸에 전념했으며, 어느 정도 타격을 입혔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뒤돌아선 것이다. 그렇게 했다간 일본이 망한다는 연합함대 사령부의 설득을 무시하고서 말이다.

게다가 일본 해군은 몰랐지만, 미 육군 수뇌부는 수리가오 해협에서 일본 해군이 북상하는 것을 감지한 미해군의 요구에 따라 상륙함에서 하선해서 해변의 보급 물자 집적소에 머무르고 있었다.[79] 만에 하나 수리가오 해협 해전이나 사마르 해전이 일본 해군의 승리로 끝나서 보급물자를 타격하러 몰려온다 치더라도, 태피3의 항공기들이 집결할 활주로가 건설된 필리핀 상륙전의 새로운 핵심거점인 타클로반[80]으로, 이미 하역한 장갑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플랜 B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속된 말로 말해, 레이테 만은 맥아더와 미 육군의 본진이 아니었고, 털려도 진짜 본거지인 타클로반으로 빤스런하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미육군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타격은 보급품 파괴였고, 수뇌부에게 피해를 주긴 어려웠다. 상대가 미군인 까닭에, 보급품이 다시 전달돼서 미 육군의 공세가 재개되는 것도 그저 시간 문제였다.

7.6. 구리다 함대 군함들의 평가

여기까지 보면 단순한 의견충돌로 보이지만, 제2함대의 함선들도 잘한 건 없다. 아니 그들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일선의 군함과 함장, 승조원들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사마르 해전을 보며 알아보자.

우선 제2수뢰전대를 포함한 구축함과 경순양함들은 그저 그런 수준의 전투력을 보여줬다. 어뢰를 발사했는데 모조리 빗나가는 시점에서 변명할 수가 없다. 양쪽 모두 구축함이고, 미군 구축함의 성능이 보다 우수하다곤 해도 일본 구축함들도 수 년간의 실전으로 갈고닦은 기량을 갖고 있다. 특히 제2수뢰전대는 일본 구축함들 중 최강의 정예부대로 명성이 높았다. 수적으로도 밀리지 않는 게, 미군은 호위구축함 4척과 구축함 3척이 전부였지만 일본군은 구축함이 11척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레이테 만 돌입에는 실패했다. 완패다.

중순양함들도 정말 거지같이 못 싸웠다. 시작하자마자 미군 구축함 존스턴에게 얻어터져 함수와 함교가 날아가 일본군의 기세를 죽인 쿠마노, 그걸 피한다고 속도를 줄이고 선회하다가 미군기에게 얻어터진 스즈야, 두 멍청이가 개박살나면서 선두에 섰다가 호위구축함에게 얻어터진 치쿠마, 자매함이 박살나는데도 원수를 갚기는 고사하고 줄행랑친 토네, 확실한 돌파구를 열지 못한 하구로의 입장에서는 잘 싸웠다고 변명하기가 힘들다. 중순양함 초카이의 경우, 호위항모 화이트 플레인즈에게 포격전으로 패배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후에 공고에게 팀킬 당했다는 정황증거가 밝혀졌기에 그래도 변명거리는 있다. 치쿠마 역시 항공순양함이니 포가 앞에만 달려 있어서 포격전에는 불리하다는 핑계 정도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중순양함의 주요 임무중 하나가 구축함 사냥인데 사냥감에게 사냥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벌이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전함의 경우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조차 없다. 전함 공고는 수훈함답게 열심히 싸웠지만 아군 중순양함 초카이를 팀킬했다는 것이 문제다. 하루나는 제대로 된 전과를 올리지 못했지만 지난 전투로 함의 컨디션도 좋지 않았고 지금까지 쌓아온 수훈이 있으니 정상참작은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의 자랑이라는 나가토와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는 그런 변명조차 불가능하다. 세상천지에 벌건 대낮에 구축함한테 전투해역에서 쫓겨나는 전함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많고 많은 전함의 역사상 구축함이 무서워서 벌건 대낮에 제독 명령 씹고 줄행랑이나 치는 쫄보 전함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특히 야마토는 기함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도망가는 바람에, 함대 사령관인 구리다 제독이 지휘할 수도, 전황을 파악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구리다가 아니라, 전함 야마토가 삽질하는 바람에 패배한 것이다. 구리다 턴이 올바르냐는 이 문단 맨 위에 "야마토가 히어만을 물리쳤으면 반드시 이겼다"고 써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다못해 낡아빠져서 훈련함으로나 쓰이던 후소급 조차도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미군에게 압도적인 열세인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포격전으로 싸워가며 침몰했다. 고작해야 구축함 한 척 따위가 무서워 도망친 이들 전함들에게 무슨 낯짝이 있다고 변명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일본의 변명을 들어보면 더욱 기가 막히다. 야마토와 나가토가 구축함한테 쫓겨서 줄행랑친 사건에 대해 일본에서는 "그 후 다시 반전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데, 그 말대로라면 야마토와 나가토는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 한 척을 상대로 두 시간이나 싸웠는데도 끝내 이기지 못하고 패주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제 2함대 함장들과 장병들의 무능함과 멍청함, 비겁함은 구리다 제독이 구리다 턴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일을 잘했으면 그런 결정을 내릴지를 놓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레이테 만 돌입이 위험해질 일도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면 이미 레이테 만을 불바다로 만든 후가 되기 때문이다. 구리다 턴이 일본의 멸망을 확정하는 선택이고, 레이테 섬의 일본 병사들과 16전대를 팽개치고 도망가는 빤스런임을 감안하면 최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결정을 지휘관에게 내릴 것을 강요한 것은 제 2함대 군함과 함장, 장병들이다. 그들의 무능이 구리다에게 불명예를 짊어지게 만들었다. 그 책임은 너무나 무겁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은 구리다 함대와 태피3의 전력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열심히 싸운 장병들에게 왜 그러냐는 변호가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제대로 싸웠다면 변명이라도 가능하겠지만, 현실은 중순양함들이 구축함에게 포격전으로 격파당하고 전함들이 구축함에게 구축당했다. 그래도 중순양함들은 구축함에게 4척이 격파당하는 굴욕을 맛보긴 했지만 적어도 자신들도 구축함에게 맞아가면서도 흠씬 두들겨패며 차례차례 저승길 동무가 되긴 했다. 허나 공고를 제외한 전함들은 싸우긴 했다는 변명조차 불가능하다. 고작 플레처급 구축함 USS 히어만 한 척이 무서워 도망친 연합함대 최강의 전함'들'과 그 장병들을 변호하라는 건 그 어떤 변호사에게도 너무 가혹한 것이다. 이딴 걸 일본 최강의 함대라고 지껄였으니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오합지졸 그 자체요,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앞서 압도적인 미 해군을 맞아 오자와 함대, 16전대, 니시무라 함대가 보여준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7.7. 결론

일반적으로는 구리다가 실수를 했다는 평이 많지만 진입했더라도 레이테 만 습격이 성공했을지, 성공하더라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실제로 싸워봐야 결론이 나올 문제이고, 구리다 함대가 결국 레이테 만에 진입하지 않았으므로 정답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태피3이 구리다 함대의 레이테 만 습격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것이 승리로 이어졌다는 것, 그리고 함대를 전부 소진시키더라도 필리핀을 방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만 하고 있었지 그 과정을 관리하는 것에서는 손을 놔버렸던 연합함대의 의사결정 시스템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연합함대 사령부도 나름대로 변명할 건 많겠지만 그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제 2함대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은 분명히 사령부의 책임이며, 위에 나와있듯 구리다의 힘만으로 작전을 성공시키기에는 방해요소가 너무 많았다. 당장 제 2함대부터가 전투 하나 제대로 못하는 트롤 중에 상트롤 집단이었는데 무엇을 바라겠는가.

잘 되면 내 탓 못하면 남 탓인 식의 전후 연합함대의 변명을 무비판적이게 수용하여 잘 한 점이 분명히 있음에도 그 부분은 의도적이게 무시당하고 마치 일본 제국 패망의 원흉인 역적으로 몰려 무조건적인 비판에 희생된 나구모 주이치, 구리다 타케오, 미카와 군이치, 기무라 마사토미 등 평범하고 능력도 어느 정도 있던 일본의 제독들을 오늘날까지 부당한 비방만을 하며 속죄양으로 삼는 일본 극우 밀덕계의 한심한 현실과 자기들이 개전의 중심이 돼 놓고 ‘에라 될대로 되라’ 식의 무책임한 명령만을 남발한 대전 말 연합함대 사령부의 답이 없는 상황을 다시 한 번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8. 기타



[1] The Second Battle of the Philippine Sea / Operation KING Ⅱ [2] 比島沖海戦 / フィリピン沖海戦, 捷一号作戦(しょういちごうさくせん)/ キングⅡ作戦 [3] 엔터프라이즈, 에식스, 인트레피드, 호넷, 프랭클린, 렉싱턴, 와스프, 핸콕 [4] 프린스턴, 벨로 우드, 인디펜던스, 랭글리, 몬테레이, 샌 재신토, 카봇, 카우펜스 [5] 팬샤우 베이, 세인트 로, 화이트 플레인즈, 칼리닌 베이, 킷쿤 베이, 갬비어 베이, 나토마 베이, 마닐라 베이, 마커스 아일랜드, 카다샨 베이, 사보 아일랜드, 오매니 베이, 페트로프 베이, 사기나우 베이, 산티, 체난고, 생가몬, 수와니 [6] 이중 실질적으로 교전에 참여한건 12척 정도이다. 나머지 6척은 전투에는 있었는데 교전을 안한 배들이다. [7] 웨스트버지니아, 매릴랜드, 테네시, 켈리포니아, 펜실베이니아, 미시시피, 아이오와, 뉴저지(이중 뉴저지는 홀시의 기함이다.), 워싱턴, 사우스다코타, 매사추세츠, 앨러바마 [8] 내슈빌, 보이시, 피닉스, 호놀룰루, 오스트레일리아, 슈롭서[83], 미니애폴리스, 포틀랜드, 루이빌, 덴버, 컬럼비아, 버밍엄, 산타페, 모빌, 휴스턴, 빈센스, 마이애미, 위치타, 보스턴, 캔버라, 샌디에고, 오클랜드, 레노 [9] 호주 해군 소속 2척 [10] 이중 7척은 호주 해군 소속, 1척은 영국 해군 소속. [11] 즈이카쿠 [12] 즈이호, 치토세, 치요다 [13]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 공고, 하루나, 이세, 휴우가, 후소, 야마시로. [14] 아오바, 묘코, 낫치, 아시가라, 하구로, 타카오, 아타고, 마야, 초카이, 모가미, 스즈야, 쿠마노, 토네, 치쿠마 [15] 아부쿠마, 이스즈, 노시로, 야하기, 오요도, 타마 [16] 미·일 양측 함대의 총 배수량 약 250만 톤. 미래에도 이 기록은 깨지기가 매우 힘들다. 미국의 통상적인 항모전단 하나의 배수량이 커봐야 30만톤을 넘지 않는데, 항모 전단 하나만으로도 한 나라의 군사력을 넘어선다는 평이 있을 정도이므로, 250만톤을 넘기려면 제3차 세계 대전이 해전 위주로 벌어진다 해도 도달할까 말까의 수준이다. [17] 전투가 벌어진 구역을 모두 포함하면 중부 필리핀의 절반에 해당할 정도로 넓다. [18] 수리가오 해전, 엔가노 곶 해전, 사마르 해전, 시부얀 해전. [19] 정확히 이 시점에서 미군 수뇌부가 기존에 수립했던 전략 계획을 급히 변경하여 필리핀 탈환전의 첫 시작이었던 레이테 섬 전투의 작전 기획이 시작됐고, 작전에 동원될 병력, 물자, 함선들이 집결지로 이동 시작한 시점이었다. [20] 이 두 섬은 미군이 필리핀으로 향하는 마지막 징검다리였으며 바로 비행장이 건설되어 레이테 섬까지 미군의 지상발진 항공기들이 단순한 편도비행으로는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로 레이테 섬 전투(지상전)당시에 섬의 제공권을 둘러싼 공중전에서 후속 증원에 효과적으로 일조한다. [21] 필리핀은 맥아더의 정치적 기반이었지만 최종 목표로 정해진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일본 해군의 고위 지휘관도 전후 심문에서 "필리핀을 잃는다면 일본 본토와 동남아 자원지대는 완전히 분리되어 함대가 본국에 있으면 연료 보급이 안 되고, 남방 해역에 있다면 탄약과 기타 보급이 안 된다. 따라서 필리핀을 상실하면 함대 보존이 무의미했다"는 취지로 발언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기에 목표물이 된 것이다. 물론 맥아더는 정치군인으로서 필리핀 바닷가를 걸어들어오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등 이를 프로파간다로 적절히 활용했다. [22] 실제 구상에서는 구리다 함대와 니시무라, 시마 함대가 랑데뷰한뒤, 퇴각할 경로는 두 경로 중에서 임의로 고를 수 있었는데, 남쪽이 유력했다. [23]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기본적인 방침은 함대결전사상이었고, 그에 따라 언젠가 크게 맞붙을 것을 대비하기 위해 주력 전함들은 전쟁기간 내내 전력 보존을 이유로 본토나 트럭 섬에 짱박혀 있었다. 때문에 스펙이 가장 딸려 주력에서 제외되어 버린 공고급 순양전함들이 주력 전함들 대신 항모들과 함께 일본해군의 화력을 담당하며 태평양을 누비며 수훈함이 된 것이다. [24] 실제로는 전함파 내부에서 수뢰전(여기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나구모 주이치)과 포격으로 파벌이 갈렸고, 조약파가 개전 이전에 대거 갈려나간걸 감안하더라도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야마모토 이소로쿠) 여전히 잔류한 조약파와 함대파 사이의 불화가 남아 있었있으므로, 대립의 구도가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 [25]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 [26] 이것은 전함파에서도 수뢰전 파벌이나 소장파(상술한 마유즈미 하루오가 대표적)가 주장했고, 높으신 분들자기네들의 호텔이 되어야 하는 주력함의 투입 자체를 함대결전사상 점감요격작전을 핑계삼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전함파만의 문제도 아니었고 대표적 항공파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동일했다. [27] 과달카날 해전의 아베 히로아키, 타사파롱가 해전 등에서 활약했지만 상층부에 반대하고 기함을 선두에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된 다나카 라이조, 레이테에서의 오자와 지사부로/니시무라 쇼지, 대미개전을 반대한 유능한 행정가였지만 전쟁 말기 독박을 뒤집어쓴 야마토 특공 당시 2함대 사령장관 이토 세이이치 등이 대표적인 희생자. [28] 御田俊一『帝国海軍はなぜ敗れたか』 [29] 팔라완 해로에서 미 해군의 가토급 잠수함에 피격돼 침몰. [30] 일본군 3대 오물로 유명한 그 도미나가가 맞다 [31] 필리핀 탈환전을 총 지휘한 최고 사령관은 맥아더였으며, 이 문서에 나오는 레이테 만 해전의 컬러 지도들은 전부 다 맥아더의 보고서에 첨부된 것들이다. [32] 마운트 맥킨리급 지휘함 [33] 호주 해군과의 연합부대 [34] 런던급 중순양함의 파생형 [35] HMAS 아룬타 [36] 각 함모당 함재기로 FM-2 와일드캣, TBM 어벤저를 30대쯤 탑재했다. [37] 이 카미카제를 한 조종사가 남긴 유서 비슷한 것을 보면 대본영은 물론이요, 덴노도 까고 있다. 자세한 건 카미카제 문서 참고. [38] 카미카제 특공으로 인한 격침. [39] 일본군 중순양함 타카오를 추격하던 도중 실수로 해안에 좌초, 예인 시도 실패 후 자침되었다. [40] 전함, 항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수상기모함, 잠수모함, 포함, 해방함, 기뢰부설함, 수뢰정 [41] 개전 당시 일본해군은 군함 291척 총 126만 7,550톤을 보유했고 미드웨이 해전 직전인 1942년 6월초에 함정보유량이 정점을 찍었다. [42] 전함 3척, 항모 4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11척, 잠수함 4척 [43]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은 1944년 내내 필사적으로 함정을 확충했다. 결과적으로 두 해전 이전과 비교하여 함정보유랑은 척수로 30척이 줄어든 것에 그쳤다. 하지만 톤수로는 무려 50만톤 가까이 줄어들었다. 1944년에 지금까지 아껴두었던 대형함을 잇달아 손실했으나 신규 취역한 대부분의 함정은 구축함, 잠수함, 해방함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44] 야마다 아키라(山田朗);윤현명 역,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일본군의 팽창과 붕괴(軍備拡張の近代史 :日本軍の膨張と崩壊), (서울:어문학사, 2019) [45] Trot : 종종걸음으로, 속보로. [46] 더미 문장에 있는 'Trot' 라는 단어는 전쟁사에서 기병 용어로 쓰인다. 기병대가 급속 돌격 전에 서로 열과 오의 진형을 맞추며 서서히 진격하는 것을 Trot라고 한다. 뒤쪽 더미 문장의 'The world wonders'의 기원이 발라클라바 전투의 경기병대의 삽질을 다룬 시에서 나온 내용이므로 앞쪽 더미 문장의 Trot라는 단어 선택은 뒤쪽 더미 문장과 매우 상관이 깊으며 이는 상당히 의미 심장하다. 즉 발라클라바 전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볼 때 'Turkey trots to water' 라는 문장은 단순한 더미 문장이 아니라 홀시 제독을 바보 취급하며(Turkey, 즉 칠면조는 미국에서 바보에 가까운 이미지다) 비꼬고 모독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된다. [47] 가령 스프루언스는 니미츠 제독과 함께 킹 제독의 고집을 꺾고, 영국 태평양 함대가 일본 근해에서 작전하도록 방침을 바꾼다. [48] 한국사를 기준으로 보면 미국 독립 전쟁은 영조 말~정조기이며, 남북 전쟁은 철종~고종 초에 일어났다. [49]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우크라이나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 정부에 연설할 때 진주만을 언급하자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이 함께 단합되어 동맹국도 아닌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과 러시아 제재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을 정도면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진주만 공습이 미국에게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지는 명확하다. 해외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직도 진주만 이야기만 나오면 일본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미국인들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50]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고, 주력함에게 지휘 통제나 지휘부 보호와 같은 가외의 부담을 주지 않고 주력함의 전투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51] 물론 결과론적 관점에선 구레 군항 공습 등 일본 본토 공습 과정에서 군항 안에 오리처럼 앉아 있는 즈이카쿠를 격파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허나 종전 이전에 부족한 시간과 일본의 국력으론 복구가 불가능한 실질적인 격침 전과를 거둔다 한들, 군항 내에서 가라앉으면 진주만의 미 전함들처럼 항구 내에 대파착저 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일본에게 정신 승리의 구실은 줬을 것이다. [52] 그러니까 집결 명령을 무르고 보급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53] 다만 태피 3의 분전이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미군 구축함대의 예상치 못한 자발적 돌격과 구리다 함대의 당황이 겹치지 않았다면 태피 3는 전멸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수송함대도 큰 타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작전을 평가할 때는 가능한한 비판적으로 해야 하며, 이런 식으로 잘 풀렸으니 된 것 아니냐는 식으로 넘기는 것은 딱 일본군이 했던 짓이다. [54] 제38기동부대는 레이테 만 해전 이전에 작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근의 일본군 비행장을 타격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탄약과 항공기의 손실은 그렇게까지 큰 수준은 아니었지만, 장병들의 피로가 위태로운 수준까지 다다랐기 때문에 재보급 겸 휴식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55] 당초의 작전상으로는 태피 3은 지상항공지원에 나서야 할 전력이고, 3함대와 77기동부대에 보호되고 있어야 했다. [56] 610 km 떨어진 거리에서 공격대를 발함시켰지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구리다의 퇴각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고는 하는데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57] 홀시는 구리다 함대가 이미 패퇴했다고 판단하였으므로 [58] 명예훈장 바로 다음 등급의 영예로운 훈장이기는 한데, 전공에 비해 너무 박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어쨌든 수훈기준 깐깐하고 상훈제도가 잘 정비된 미국의 훈장답게 해군십자훈장을 수훈하는 정도만으로도(수백만 미해군 장병 중 누적 수훈자가 겨우 약 7000여명 뿐이다) 해군 역사의 레전드 중 하나로 남을 수 있다. [59] 겜비어 베이의 조난자들과 불빛을 발견한 초계정은 약 4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60] 이 문서에 있는 사진들이 그 용도로 쓰였다. [61] 물론 이 역시 당시 상황에선 확신은 아니고 유력한 추측이었으나, 기존 정보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단서가 나온 것만으로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62] 야마토를 노리는 건 잠수함대도 마찬가지였으며, 최초로 발견하여 보고를 올린 잠수함 2척이 뇌격을 시도하나 전부 빗나간다. [63] 상술했듯 만약 적의 전함이 떴다 하면 구축함이나 순양함은 근처에도 가지 말고 아군 전함이 나타나면 호위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역할이었다. 야마토가 바보 멍청이라 히어만이 살았던 거지, 다른 전함이었다면 히어만은 어뢰를 쏘기도 전에 부포 세례에 맞아 격침당하거나 전선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64] 당시 240mm M1 블랙드래곤 곡사포 나 203mm M115 8인치 곡사포같은 중포를 다수 보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전함의 화력에 비할 물건은 아니다. 중순양함만 상대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여전한 게 240mm M1은 단발 화력이야 중순양함급이지만 발사 속도와 포구 초속, 즉 관통력에서 밀리고(2분에 1발 vs 분당 3~4발) M115의 경우는 구경은 똑같은 203mm라도 탄이 더 가볍고 포구 초속에서 밀리기 때문에 중순양함의 203mm 함포와 동급으로 볼 수 없다. 게다가 함대를 보자마자 포를 다시 뒤로 돌려서 재방열하는 시간이 걸리고 함대는 고폭탄으로 갈기면 되는데 비해서 중포들은 철갑탄으로 정확하게 때려야 하는 건 덤. 거기다 8인치 이상급 중포들이 지상 표적을 사격할 때는 사실 철갑탄이 딱히 필요가 없으므로, 보유 탄종의 대다수가 착발 신관을 쓰는 고폭탄이었을 것이다. 잘 해봐야 고폭탄 내지 반철갑탄 탄체에 탄저 지연신관을 꽂은 정도. [65]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많은 양의 중포, 곡사포 등 때문에 일본 함대와 포격전을 해볼 만도 했다. 전함의 집중 방호 구역을 뚫지 못한다 뿐이지 그 외 나머지 함정들에겐 충분한 위력이고, 전함 역시 비장갑 구획의 피해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중순양함이면 집중 방호 구역 방어는 빠듯한 마진으로 가능했을 것이나, 일본 측 중순양함은 대부분 포탑 장갑이 파편/근접한 적의 대공포/기총 사격이나 막아볼 법한 25mm 남짓에 불과했다. [66] 이미 상륙으로부터 5일이 지났기에 대부분의 부대는 상륙지를 벗어났을 상황이었고, 아무리 못해도 티거 전차를 구축함과 경순양함이 씹어먹었던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보다는 더 나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67] 올덴도르프 휘하의 이 77.2 임무전대에는 웨스트버지니아, 메릴랜드, 테네시, 캘리포니아, 펜실베이니아, 미시시피까지 총 6척의 전함이 있었다. 한편 구리다 함대는 야마토, 나가토, 공고, 하루나로 총 4척. [68] 신형 전함들은 이미 홀시가 모두다 끌고 갔다. [69] 다만 올덴도르프 함대는 애초부터 상륙부대 지원이 주 목적이었는 통에 철갑탄이 부족했다는 문제가 있다. 만약에 구리다 함대가 돌입했다고 가정하면 안 그래도 부족한 철갑탄을 니시무라 함대에게 다 쏟아부어버리고 온 상황이라 승산이 줄어들었을 가능성도 제법 있다. 특히 니시무라 함대를 직접 두들겨 팬 웨스트버지니아, 테네시, 캘리포니아와 달리 메릴랜드와 미시시피, 펜실베이니아의 경우는 사통이 구식이라 수리가오에서도 적을 제대로 찾지 못해 본격적인 포격을 할 수 없던지라 탄이 남았겠지만 말이다. [70] 상술한 2함대 참모장과 연합함대 참모의 대담에서 작전 결행시 2함대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은 양 쪽 모두 인지하고 있다. [71] 이때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타고는 미군 잠수함의 중어뢰에 제대로 맞아 손쓸틈도 없이 빠르게 침몰했고 구리다 제독은 실종되어 전사할 뻔했다. 하마타면 레이테 만 돌격이고 뭐고 초장에 작전이 끝날 뻔 한 것. [72] 구축함 존스턴. [73] 구축함 히어만. [74] 사실 이것도 매우 비루하기 짝이 없는 변명인데.. 플레처급 구축함인 히어만의 함형은 미국의 어떤 순양함과도 닮은 것이 없다. 따라서 이 착각은 견시의 눈에 문제가 생긴게 아니고서야 일본 수뇌부의 구차한 변명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75] 미사일이 발달한 요즘이야 상대적으로 적은 배수량을 가진 배도 배수량이 큰 배에 경우에 따라서는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도 있지만 2차대전 당시의 전함끼리의 전투는 그럴 일이 없었다. 더 높은 배수량 = 더 큰 구경의 포 = 더 많은 포를 의미하기 때문에 순양함이 전함을 잡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괜히 미국이 순양함들을 전문적으로 사냥하기 위해서 더 큰 체급의 알래스카급 대형순양함을 만든 것이 아니다. [76] 공고는 존스턴을 대파시키거나(이건 야마토의 전과라는 설도 있긴 하다.)사무엘 B.로버츠를 격침시키는 등 구리다 함대 중엔 제법 잘 싸운 편이었다. 다만 공고 역시도 초카이에게 오인사격을 가해 팀킬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77] 니시무라와 시마는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라서 작전중에 통신도 안했고, 오자와는 통신은 했는데 통신설비 고장으로 구리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78] 물론 근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구리다가 삽질한게 컸다. 태피 3와 조우해서 적당히 쳐냈으면 후퇴하는 태피 3를 쫓지말고 얌전히 목표를 향해 진격했어야 했는데 괜히 태피 3를 맹렬히 쫓느라고 피로와 탄약 소모를 누적하는 바람에 저렇게 된 것이기 때문. [79] 맥아더가 올덴도르프의 요구로 하선하게 된 수리가오 해협 해전이 저녁부터 밤까지 이어졌고, 다음 날 새벽에 사마르 해전으로 이어진다. 바쁜 시기였기에 미 육군 수뇌부는 이미 옮긴 설비를 몇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에 상륙함으로 도로 가지고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80] 필리핀 탈환전의 미 육군 최초 상륙지였다. 이때 미 육군 공병대가 건설한 대규모 활주로는 후에 대니얼 Z. 로무알데즈 국제 공항이 된다. [81] 애초에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윌리엄 홀시 제독보다 앞서 치른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 특히 항모 기동부대가 사실상 작살나버렸다. 그래서 이 해전에서 오자와 지사부로가 이끌던 항모 부대는 항모이긴 하지만 항공대가 없는 사실상 깡통부대였다. 필리핀 해 해전을 미 해군에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 [82] TV 더빙판에서는 방송사마다 번역이 약간 다르다. 예로 당신이 틀렸소, 홀시는 어리석었소라던지... 국내 번역된 모 출판사 판 붉은 10월에서는 일본어판 중역 때문에 하루제 제독으로 나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