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조셉, 프랜시스, 앨버트, 매디슨, 조지.
1. 어떤 사람들인가?
태평양 전쟁 당시 미 해군에 복무한 수병 5 형제. 태평양 전쟁 중 타고 있던 군함이 어뢰 공격으로 격침당해 전원 전사했다.- 장남 조지 토머스 설리번: 1914년 12월 14일생. 28세.(이하 모두 향년)
- 차남 프랜시스 헨리 "프랭크" 설리번: 1916년 2월 18일생. 26세.
- 삼남 조셉 유진 "조" 설리번: 1918년 8월 28일생. 23세.
- 사남 매디슨 에이블 "맷" 설리번: 1919년 11월 8일생. 22세.
- 막내 앨버트 리오 "앨" 설리번: 1922년 7월 8일생. 20세.
아이오와주 워털루 출신. 차남과 삼남 사이의 고명딸인 누이 제너비브 마리 설리번(Genevieve Marie Sullivan, 1917 ~ 1975)까지 합해 6남매로 태어났다. 진주만 공습 당시 제너비브의 약혼자가 USS 애리조나에서 전사한 것을 계기로 모두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원래 한 가족은 같은 함정에 배치될 수 없었으나, 해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던 맏형 조지가 해군 장관에게 "우리 형제는 언제나 함께였고 함께 승리할 것입니다."라는 같이 배치를 원한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내 애틀랜타급 경순양함 CL-52 주노(Juneau)에 다같이 배치되었다. 이들 형제는 미군의 선전물에도 등장하여 많은 미국인들이 알고 있었다.
2. 어떻게 됐는가?
1942년 11월 13일 새벽, 과달카날 해전에서 설리번 5형제가 타고 있던 주노 함은 일본 해군 구축함이 발사한 어뢰 중 1발에 뱃머리를 피격[1]당했고, 수리를 위해 에스피리토 산토 항구로 철수하던 도중 일본 해군의 순잠 을형 잠수함 I-26의 어뢰에 의해 탄약고가 대폭발, 침몰하였다.철수하는 함대를 이끌던 후버 대령은 일본 잠수함이 득실거리는 바다에서의 구조활동은 무리라 판단했는지 주노의 구조를 포기하고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그대로 에스피리토 산토 항구로 가버렸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육군 항공대의 B-17 폭격기를 보고 구조요청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원인모를 이유로 구조요청은 전해지지 않았다. 당시 주노에서는 100여명의 승조원이 탈출했지만, 구조가 늦어진 결과, 함장 리먼 K. 스웬슨을 포함한 대다수가 기아, 탈수, 상어의 공격으로 인해 숨졌다.
이 사망자들 중에 설리번 5형제가 모두 포함되었다. 3명은 폭발에 의해 즉사, 막내인 앨은 다음날 익사했고, 맏형 조지는 며칠 후 구명보트에서 죽었다.[2] 결국 약 8일 후 형제를 제외하고 구조된 생존자는 약 10명에 불과했다.[3] 주노의 격침과 대규모 인명피해를 보고받은 홀시 제독은 그 책임을 물어 후버 대령을 직위해제했다.
이들의 부모는 전사통보를 받지 못하고 단지 미 해군이 교전으로 인해 많은 함정이 침몰했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어 해군측에 물어보았지만 M.I.A.(Missing In Action, 교전 중 실종) 통보만을 받고, 나중에야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쓴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3. 사후
이 사건 이후로 미군은 한 형제가 같은 부대나 군함에 근무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후에 설리번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미 군함이 '설리번 형제'(The Sullivans)로 명명되었다. 초대 USS 설리번 형제는 플레처급 구축함 DD-537로 태평양 전쟁과 6.25 전쟁에 참전한 뒤 1965년에 퇴역하여 보존함 처리되고, 뉴욕주 버팔로 해군 및 군사공원에 기념함으로 전시되어 있다. 2022년 4월 15일에 설리반 형제 함의 선체에 파손이 생겨 배가 일부 침몰하였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3 2대 USS 설리번 형제는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DDG-68로 1997년에 취역하여 아직 현역에 있다.[4]
이 형제의 이야기는 영화 《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도 관련이 있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2차대전 당시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501연대 3대대에 복무중이었던 프레더릭 닐랜드 병장(Frederick Niland)인데, 닐랜드 병장의 형제들이 설리번 형제와 같은 참사를 막기 위해 각각 다른 부대에 흩어져서 복무 중이었음에도 비슷한 시기에 태평양 전선 뉴기니와 노르망디의 유타와 오마하에서 전부 죽거나 실종되어서 홀로 살아남은 프레더릭 닐랜드 병장만이 본토로 귀국조치 되었고, 이런 닐랜드 병장의 이야기와 설리번 형제의 비극을 모티브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뉴기니에서 실종된 형 1명은 일본 육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전후 귀국했다. 실제로 영화 초반 조지 C. 마셜 육군참모총장에게 장교들이 몰려가서 라이언 4형제 중 형들이 모두 전사하고 막내 제임스만이 살아있음을 논하던 장면에서도 설리번 5형제가 언급된다. 주노에서 설리번 5형제가 죽은 후, 라이언 4형제를 모두 다른부대에 배치했다고. 라이언 4형제가 원래 미 육군 제29 보병 사단에 함께 있었으나 설리번 5형제가 전사한 후 각각 따로 배치되었다는 설정.
그나마 누이 제너비브[5]가 전쟁 후까지 살아남았고, 유일하게 막내 앨이 슬하에 자식을 두어 후사를 남겼던지라 집안 대가 끊기는 것만은 간신히 면했다. 앨의 아들 제임스 설리번은 아버지처럼 해군에 입대하여 첫 번째 The Sullivans(DD-537) 함에서 근무했는데, 해군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제임스를 이 구축함에 배치한 듯 하다.
이 부분은 2018년 2월 1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4. 유사 사례
또 다른 같은 군함에 배치된 형제로 코네티컷 뉴 헤이븐 출신의 로저스 3형제 외 최소 30형제가 있다.[6] 당연히 형제를 다 합쳐 30명이라는 게 아니라 형제들이 자원입대해서 같은 함정에 배치된 게 30형제나 된다는 뜻이다. 이들 역시 설리번 형제의 몰살 이후 전부 근무지가 다르게 변경됐다.다만 근무지가 다르게 배치되었음에도 형제들이 줄초상 나는 일이 생기기도 했는데 1944년 미합중국 육군(4명, 이 중 항공대 2명) 및 해병대(1명)에 입대한 보그스트롬 5형제[7] 가운데 4명이 1944년 6월~8월 동안, 즉 단 두 달 만에 모두 줄초상이 났고(!) 결국 가족들이 마을 주민들과 주 의회의 도움으로 마지막 남은 아들의 군복무 중단을 청원한 일이 있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 청원은 받아들여져 마지막 남은 아들은 미국으로 돌아왔다.[8]
이후 형제 혹은 자매들이 군복무를 하다 한 명만 남고 나머지가 모두 죽으면 나머지 한 명은 반드시 귀국 및 전역시키도록 하는 유일한 생존자 정책(Sole Survivor Policy)[9]이 1948년에 도입되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칭과 조금 다르게 복무중인 형제 자매 중 하나 이상이 전사할 경우 둘 이상의 형제가 생존하더라도, 혹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군 복무중 전사했을 경우 전역을 신청할 수 있다. 또한 해당 정책은 강제가 아니고, 형제 자매의 전사를 통보받은 나머지 형제 자매, 혹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전사한 자손이 원하면 전역을 신청하지 않고 해당 부대에서 계속 근무하거나, 아니면 현역 복무를 하되 안전한 본토에서 복무를 마칠 수 있도록 전속하는 수준에서 끝낼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이자 아예 한 고장이 절단나는 경우가 있다. 영국의 경우 1차 대전 당시 육군에선 'Pals(팔스, 지역연대)'라고 해서 한 부대에 같은 지역/구역의 사람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는 과거 영국 육군이 지역 영주들이 자기 영지에서 직접 징병 혹은 모병해 연대를 꾸리고, 국왕이 소집령을 내릴 때마다 이들을 끌고 참전했던 전통의 영향, 서로들 잘 아는 사이니까 전투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징병 행정의 편의성 확보 차원 등에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개미 목숨마냥 죽어나갔던 1차 대전의 솜 전투에서 한 지역의 젊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사태가 빈번해져서 마을이 사단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진 것이다. 이런 '팔스'에 소속되어 참전한 어떤 젊은이는 전쟁이 끝나고 동네에 돌아와 보니 자기 또래의 남자가 모두 죽어 자신만 남는 암울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몇 년간 죽도록 싸워서 겨우 살아남아서 고향에 돌아갔더니, 어린 시절부터 알던 수백 명이나 되던 동네 친구들, 형, 동생, 심한 경우 삼촌, 아저씨들까지 전부 죽거나 상이군인이 되어 멀쩡한 사람은 많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반겨주는 건 가족뿐이고 주변사람들은 자식이나 형제, 남편 잃은 분노에 생존자들을 '겁쟁이라서 살아남았다'고 매도했다. 이들의 더 심한 비극은 지인들이 수백 명 단위로 계속 죽어나가는 걸 바로 옆에서 계속 지켜봤다는 것이다. 워낙에 많이 죽어서 오히려 멀쩡히 살아 견뎌낸 사람이 비정상인 지경이었다. 이외에도 영연방인 캐나다군 소속의 뉴펀들랜드 연대는 공격개시 20분 만에 총원 780명 중 712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비단 영국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편성은 독일 육군과 유럽의 군제를 그대로 베낀 일본 육군도 이랬으며, 그 결과는 비슷했다.
이렇게 생존자를 동향 유가족들이 비난하는 분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되어서야 없어졌는데, 1차대전 때 생존했던 사람들이 유가족 및 참전용사의 부모나 삼촌 등이 된 경우가 많아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후방에 있던 여성들도 무차별 폭격에 맞고 가족이나 친지를 잃는 등 전쟁의 참화를 직접적으로 겪자 진짜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남자들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간인 사상자가 합쳐서 천만 넘게 나온 독일이나 소련 같은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1]
미국 쪽에서는 구축함의 어뢰라고 판단하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일본 쪽에서는 아마쓰카제에서 발사한 어뢰 중 1발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정황상의 심증일 뿐 이 최초 피격이 어떤 배의 어뢰였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
고나트륨혈증(체내에
나트륨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병)으로 발작을 일으켜 죽었다는 설과 혼자 살았다는 충격에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3]
생존자중 한명이였던 오렐 세실은 2008년
오스틴급 수송상륙함 USS 주노의 퇴역식에 초청 받아서 주노의 퇴역식을 보기도 했다. 그는 주노의 생존자 10명중 마지막 생존자였으며, 2009년에 사망하였다.
[4]
2대 USS 설리번 형제의 진수식에는 막내 앨의 손녀가 참석하여 샴페인을 터트렸다.
[5]
오빠 둘과
남동생 셋, 전술했듯
진주만 공습으로 약혼자까지 몰살당하는 참사를 겪고는 그 이듬해인 1943년에 예비역 해군 산하 여성
군무원(WAVE in the U.S. Naval Reserve)으로 지원, 임용되어 1년 9개월 간 근무 후 퇴직했다. 최종 직급은 모병 담당 주무관(Specialist R).
[6]
로저스 3형제는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USS 뉴올리언스에 승선 해있다가, 과달카날 해전이후 벌어졌던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형제 3명 모두 전사했다.
[7]
본래는 7형제였으나 장남은 전쟁 전 사망했고, 막내아들은 징집연령에 미달된 상태여서 참전하지 않았다가 형들이 연달아 죽은 후에는 군 면제가 되었다.
[8]
이 인물이 그 유명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실제 모델 중 하나다.
[9]
정식 명칭 국방부 지침 1315.15 "생존한 자손에 대한 전역 정책" (DOD Instruction 1315.15 "Separation Policies for Survivorsh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