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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벵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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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lkata 6.jpg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공화국
서벵골
BN : পশ্চিমবঙ্গ[뽀슈찜봉고]
HI : पश्चिम बंगाल[뻐슈찜벙갈]
West Bengal[웨스트벵골]
파일:서벵골.png
지방 동부
면적 88,752 km²
주도 콜카타
주지사
[[인도 인민당|
인도 인민당
]] | C. V. 아난다 보스
주총리 [[전인도 트리나물 회의|
전인도 트리나물 회의
]] | 마마타 바네르지
하위 행정구역 23 지구
설립일 1947년 8월 15일
시간대 UTC +5:30 (IST)
인구 100,193,142명 (2018년)
공용어 벵골어, 영어
종교 힌두교 70.54%, 이슬람교 27.01%
기독교 0.72%
HDI 0.637 (28위)
1인당GDP $1,600
GDP $ 1,622억
차량코드 WB
웹사이트 주정부 홈페이지


1. 개요2. 지리3. 역사4. 정치
4.1. 공산당의 부상과 몰락4.2. 오늘날
5. 문화
5.1. 문학5.2. 음악5.3. 영화

[clearfix]

1. 개요

인도 동부에 위치한 주로, 동쪽으로는 방글라데시 쿨나 주와, 동북쪽으로는 아삼 주, 북쪽으로는 시킴 주, 부탄, 네팔과, 북서쪽으로 비하르 주, 서쪽으로 자르칸드 주, 남서쪽으로 오디샤 주와 접한다. 인도의 본토와 시킴 주, 동부 지방을 아슬아슬하게 연결해주고 있다. 이 지역이 힌디어로 닭의 목이라 불리는 실리구리 회랑( ###)으로, 폭 20km에 불과한 여기가 국경을 인접한 독립국인 부탄,네팔,방글라데시, 최악인 중국에 넘어갈 경우 인도의 국토는 세 조각[1]으로 잘린다. 이때문에 인도 지정학에도 가장 중요한 요충지에 속한다. 주도는 콜카타이다. 주 수상은 AITC 소속의 마마타 바네르지.

원래 현재의 방글라데시와 함께 벵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47년 8월 15일 인도 분단(Partition of India)으로 종교에 따라 벵골이 동서로 나뉘면서 서쪽을 서벵골로 부르게 되었다. 인도에서도 인구밀도가 높은 주에 속하는데 인구는 2018년 기준 100,193,142명인데 면적은 불과 88,752 km2이다. 쉽게 말해 남한 면적에서도 경상남도를 뺀 면적에 남한의 2배 인구가 모여산 것이다.

2. 지리

위에서 보듯 인구밀도가 매우 높지만 주 면적 대부분이 갠지스 강 삼각주에 속하는 평야 지역으로 대부분 실거주 면적이기에 체감 인구밀도는 상상하는 것만큼 높지는 않다. 실제로 가 보면 주요 도시인 콜카타 실리구리 등을 뺀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냥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인도가 인종에 따른 차별을 막기 위해 인종의 통계를 내지 않아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으나 서벵골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주민은 벵골인이다. 종교는 70.53%가 힌두교, 27.01%가 이슬람, 0.72%가 기독교, 0.30%가 불교이다. 인도의 다른 주에 비해 이슬람의 비율이 비교적 높은 편. 종교 분포는 지역별로는 편차가 있다. 서벵골은 총 23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동북쪽의 무르시다바드의 경우 이슬람이 66%를 차지해 압도적으로 다수이며 역시 동북쪽에 위치한 말다도 이슬람이 51%로 근소하게 다수를 차지한다. 그 이외 지역들은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거의 비슷한 우타르 디나즈푸르 정도를 제외하면 힌두교가 우세인데, 서남쪽의 파스침 메디니푸르와 푸르바 메디니푸르는 힌두교가 85%를 차지해 서벵골에서 가장 높은 힌두교 비율을 기록한다. 주도인 콜카타도 힌두교 비중이 76%로 서벵골 평균을 웃도는 편이다.

3. 역사

동벵골, 즉 방글라데시와 오랜 기간 동안 역사를 공유했다. 2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9600년 전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5300년 전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1200년 경 마가다 왕국이 세워졌고 기원전 400년 경 방글라데시와 함께 방가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후부터 중세까지는 인도/역사 문서 참고. 그러다 15세기 후반 유럽의 상인들이 오기 시작했다. 1764년 영국 동인도 회사 벵골 전쟁을 통해 식민지로 삼았다. 인도 제국이 건국된 뒤에는 1912년까지 콜카타가 인도 제국의 수도였다. 1905년 영국의 벵골 분할령으로 동벵골과 서벵골로 나누어졌다가 인도인들의 거센 반발로 원상복구되었다. 그러나 1947년 인도 제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할 때 다시 분할이 이루어져 동벵골은 동파키스탄이었다가 독립 운동으로 방글라데시가 되었고, 서벵골은 인도의 주가 되었다.

4. 정치

원래는 케랄라, 트리푸라 등과 같이 인도 공산당 및 그 파생 정당들을 전국 정당으로 유지시켜 준 몇 안 되는 텃밭 중 하나였다. 서벵골에서는 인도 공산당(M)이 1977년부터 2011년까지 장기 집권했다.

4.1. 공산당의 부상과 몰락

이하 절의 기본적인 참고 문헌은 Monobina Gupta의 "Left Politics in Bengal"이다. 서벵골 공산당(M)의 몰락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며, 그 결정적 계기인 난디그람 유혈 사태, 싱구르 사건 등에 대해서는 온라인에서도 조금만 검색하면 다양한 온라인 기사와 분석이 있으니 더 알고 싶은 사람은 같이 참조하면 좋다.

인도 독립 후, 서벵골에서 공산당은 1950~1960년대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력한 대중 운동을 주도하며 농민, 노동자 등 사회 하층과 빈민을 중심으로 점차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또 전통적으로 좌파 성향이 강했던 벵골 지식인 계층의 지지도 얻어냈다. 지역에 기반한 활발한 풀뿌리 활동 역시 공산당의 강점이었다. 서벵골에서 공산당은 1967년 처음으로 연립 정부에 참여했고, 1977년 나아가 공산당(M, 이하 서벵골 공산당은 모두 공산당(M)을 뜻함) 중심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공산당은 집권 후 특히 토지 개혁(Operation Barga)에 집중하며 농민 계층의 지지를 더욱 강화했다. 이때만 해도, 공산당은 비교적 청렴했고 민중과 함께하는 친근한 이미지를 가져 부패하고 권위적인 인도 국민 회의와 차별화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의 눈부신 성공 후 집권당이 된 공산당은 한동안 연속 집권에 성공하자 점차 관성에 물들었고, 관료화되며 부패하기 시작했다. 집권 후 엘리트적 상층부는 이론 학습과 정교화에 집중했고, 그들의 추상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서벵골 하층민의 현실과 유리되어 갔다. 박식한 공산당 이론가들과 그들에 동조하는 벵골 지식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종 영역에 대해 평범한 일반인이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너무 많은 것을 미리 논의해 결론을 내렸고, 지적으로 어설픈 모든 반박을 봉쇄했다. 원래 공산당 내부에는 활발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거쳐 합의가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론적 경직성과 엘리트주의는 당내 민주주의를 질식시켰고, 공산당에서는 경직된 상명하달식 의사 결정 구조가 점차 정착해 갔다. 토지 개혁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지만 그 성과가 확대되지 못했고, 결국 서벵골의 토지 개혁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았다. 공산당의 집권 기반이었던 풀뿌리 조직은 점차 각종 불법적이고 때로 폭력적인 수단까지 동원해 야당과 반대파를 탄압하는 시스템으로 변모했다.

1960년대 후반 공산당에 속했던 마오주의 파벌이 무력 투쟁 노선을 따르며 일으킨 낙살라이트 운동은 공산당 정부의 고민거리였다. 제도권에 안주해 점차 엘리트주의적이 되면서 하층민과 단절되어 갔던 서벵골 공산당 간부들과 달리, 낙살라이트들은 그 방식은 과격해도 소외된 하층민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명분이 있었고, 좌익 지식인들도 종종 낙살라이트의 대의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서벵골에서 나온 소설들을 보면 낙살라이트 문제가 종종 다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담론도 서벵골 내부에서는 상당히 다층적으로 전개되었다. 낙살라이트를 다루는 고전적인 소설로 모하슈베따 데비(মহাশ্বেতা দেবী)의 《1084번의 어머니》(হাজার চুরাশির মা, 1974)가 있다.

1990년대에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구공산권이 붕괴하고 공산당의 이념이 근본적으로 의문시되기 시작했다. 토지 개혁 이후 서벵골에서 공산당 정부의 실질적인 경제적 성과는 지지부진했고, 관료화된 공산당은 점차 자유화되고 있던 인도 경제의 기조를 따라잡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 1977년부터 2000년까지 서벵골 총리를 지낸 공산당 지도자이자 이론가인 조띠 보슈(জ্যোতি বসু, Jyoti Basu)가 공산당을 이끌며 행정적 수완을 보일 때까지는 어느 정도 공산당 체제가 유지되었다. 1996년 인도 총선에서 인도 공산당(M)은 제4당이 되었고, 5선 주 총리 조띠 보슈는 연정에 참여해 인도 총리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만약 이때 인도 중앙정부에 공산당이 이끄는 내각이 성립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자당의 공산당 정치국이 내부 의견 대립으로 조띠 보슈를 총리로 지지하기를 거부해 이는 무산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공산당 정부는 기존의 경제, 노동 정책을 보수적으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지켜 나갔지만 동시에 어설프게나마 경제 자유화와 산업화[3]를 시도했다. 모순적으로 보이겠지만, 실제가 그랬다. 공산당은 중앙 정부의 경제 자유화 정책을 원론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서벵골에서는 경제의 부분적 자유화 개혁을 추진하며 경제 자유 구역을 개발하는 등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경제 개혁 과정에서 수반되는 충돌을 해결하는 데 과거처럼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고압적이고 관료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기층 민중의 지지를 크게 잃어버렸다.

이때 특히 결정적이었던 것이 난디그람 유혈 사태(2007년~2008년)와 싱구르 사건(2006년~2008년)이었다. 2007년, 난디그람 지역에서 산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공산당 정부가 토지를 주민들(다수가 농민)과의 상의 없이 징발해 인도네시아의 살림 그룹에 임대해 화학 공장을 건설하려 하자, 난디그람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반 주 정부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외부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다리를 파괴하고 도로에 구멍을 뚫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자, 2007년 3월 공산당 주 정부는 경찰을 투입해 비무장 상태의 주민들에게 발포하며 시위를 진압했다. 이로 인해 14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하고 말았다. 빈민을 대변한다는 공산당 정부가 경찰을 투입해 그들을 학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일으킨 것이다. 결국 공산당의 프로젝트는 취소되었지만, 이를 둘러싼 지역의 폭력 사태는 2008년까지 지속되었다.

싱구르에서는 타타자동차의 자동차 공장 부지를 위해 싱구르 지역 주민들의 토지를 수용하는 건으로 2006년부터 충돌이 벌어졌다. 타타자동차와 공산당 정부는 자동차 산업을 개발하려 했지만, 역시 지역 주민들과 충분한 합의가 없던 상황이었다. 결국 주 정부는 주로 농민이었던 지역 주민들의 엄청난 반대 운동에 부딪혔다. 이때 싱구르 농민들을 지원하며 반대 운동에 동참했던 것이 바로 당시 야당이었던 전인도 트리나물 회의(AITC), 그리고 그 당수 마마타 바네르지였다. AITC는 농지 보호를 내세우며 전통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던 콜카타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환경 운동가들의 지지도 이끌어냈다. 결국 타타자동차는 2008년 말, 이미 시작된 공장 건설을 포기하고 싱구르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농지를 산업 시설로 전환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난디그람과 싱구르에서 벌어진 사건은 공산당 정부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산당의 반대파는 AITC를 구심점으로 결집했고, 2009년 인도 총선을 앞두고 마마타 바네르지가 영리하게 고안한 슬로건 '마 마띠 마누시(মা মাটি মানুষ, '어머니, 땅, 사람들')'는 공산당 정부의 모든 잘못에 달라붙는 꼬리표가 되었다('마 마띠'는 '마마타(모모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당연히 의도된 것이다). 결국 AITC는 2009년 인도 총선에서 공산당을 꺾었고[4], 뒤이어 2011년 주의회 선거에서마저 공산당을 끌어내리고 서벵골의 여당이 되었다. 이렇게 34년에 달하는 서벵골의 공산당 시대는 막을 내렸다.

4.2. 오늘날

2011년 이후 AITC는 새로운 서벵골의 여당이 되어 2016년, 2021년까지 서벵골 주의회 선거에서 연속으로 집권하고 있다.

2019년 인도 총선에서도 AITC의 우세가 이어져 서벵골주의 전체 의석 42석 가운데 AITC가 22석으로 다수를 차지했다. 이때 2009년 1석, 2014년 2석에 불과했을 정도로 서벵골 지역에서 세가 약했던 인도 인민당(BJP)이 강세를 보여 무려 18석을 차지했고, 인도 공산당(M)은 아예 0석으로 전멸했다.

2024년 인도 총선에서는 서벵골이 격전지로 떠올랐다. 여기서 AITC(29석)는 BJP(12석)와의 격차를 벌리며 크게 승리했다. 제3지대에서는 국민 회의와 공산당(M)이 연합했지만, 국민 회의가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21년 서벵골 주의회 선거에서와 유사한 결과로, 현재 서벵골 정치는 AITC-BJP가 사실상의 양당제 구도를 형성한 가운데 AITC의 우위가 이어지고 있다.

5. 문화

5.1.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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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음악

벵골 지방은 중세부터 내려오는 풍부한 음악 전통을 보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벵골의 독특한 바울(Baul) 음유시인들의 담백한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벵골 민속/전통 음악이 있었다. 바울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19세기의 전설적인 음유시인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랄론(লালন)이 있다. 바울 음악이 벵골 전통 음악에서는 자타공인 가장 대표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주요 장르를 조금 더 꼽자면 16세기 이래 동인도 비슈누파 박티 운동에서 신앙 실천의 중요한 요소였던 끼르똔(কীর্তন, 음악과 춤을 통한 신의 찬미)에 쓰이는 노래와 암송구, 칼리 여신의 찬가 샤마 숑기뜨(শ্যামা সঙ্গীত) 등도 있다.

19세기에는 종교 혁신 운동 브라모 사마지(Brahmo Samaj, ব্রাহ্ম সমাজ[브람호 쇼마지])를 위한 노래가 여럿 작곡되었다. 이를 '브람호 숑기뜨'로 부르기도 한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타고르도 브람호 숑기뜨 안팎에서 수많은 곡을 남겼다. 타고르가 작사 및 작곡한 '로빈드로 숑기뜨(রবীন্দ্র সঙ্গীত, Rabindra Sangeet)'로 불리는 약 2230편에 달하는 노래들은 오늘날까지도 벵골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로빈드로 숑기뜨가 바로 방글라데시의 국가가 된 나의 황금빛 벵골과 인도 국가의 원래 판본인 벵골어 조노 고노 모노였다. 다른 중요한 곡을 하나만 들면 간디가 사랑한 곡으로 유명한 '홀로 나아가라(একলা চলো রে[에끌라 쫄로 레])'가 있다.

또한 20세기 전반에는 영국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노래하는 애국적 노래도 다수 작곡되었다. 대표적으로 이 시대의 까지 노즈룰 이슬람(কাজী নজরুল ইসলাম, Kazi Nazrul Islam, 1899–1976)은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노래로 벵골 전체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까지 노즈룰 이슬람의 〈파괴의 황홀〉(Pralayollas, প্রলয়োল্লাস[쁘롤로욜라시])은 독특한 종말론적 어법으로 세계의 파괴를 통한 재생을 노래한 시이자 노래였으며 아와미 연맹의 당가로 쓰였다. 노즈룰이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들인 '노즈룰 기띠(নজরুল গীতি, Nazrul Geeti)' 또는 '노즈룰 숑기뜨' 역시 로빈드로 숑기뜨와 함께 벵골 전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그 밖에 20세기 전반 북인도의 고전 음악인 힌두스탄 음악에 공헌한 작곡가, 작사가, 가수 오뚤 쁘로샤드 셴(অতুল প্রসাদ সেন)도 벵골 음악에서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이러한 음악적 배경하에 벵골어권, 특히 동부 방글라데시 치타공 다카, 서부 콜카타 등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록 음악 포크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자세한 것은 벵골 록에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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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영화

한국에서 전형적인 인도 영화라고 하면 《라가안》, 《 세 얼간이》, 《옴 샨티 옴》 같은 볼리우드식 마살라 영화를 떠올리지만, 벵골에는 이와 전혀 다른 리얼리즘적 극영화 전통이 성립해 있다. 벵골 리얼리즘 영화는 인도 독립을 전후로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병렬 영화(Parallel cinema)라고 하는 인도 뉴웨이브 영화의 흐름을 선도하며 황금기를 맞았다. 이때 등장한 사티야지트 레이(쇼또지뜨 라이), 리트윅 가탁(리띠끄 고또끄), 므리날 센(므리날 셴), 타판 신하(또뽄 신호) 등은 인도 고전 작가주의 감독 가운데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아푸 3부작 등 사티야지트 레이의 작품들은 인도 영화의 고전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서벵골 지역에서 그의 영화는 TV 방영 등으로 흔하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볼리우드에서 전통적인 마살라 영화의 기본 틀이 만들어지고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기 시작했고, 명배우 아미타브 바찬으로 대표되는[5] 볼리우드식 대중 영화의 문법이 새로이 정립되었다. 이후 1980년대까지 벵골의 극영화는 인도 영화의 본격적인 상업화 물결 속에 한동안 정체되었다. 세련된 고급 예술을 선호하는 진보적 바드랄록(문화와 예술을 중시하는 벵골 신사 계층)의 엘리트적 취향이 많이 반영된 벵골 리얼리즘 영화는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새로운 볼리우드 대중 영화에 비해 단적으로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앞 문단에서 언급한 고전 감독들이 1980년대까지 고전적 스타일을 고수하며 활동하면서 세대 교체가 잘 되지 않고 있기도 했다.

1980년대 말 무렵부터는 벵골 영화계에서도 고탐 고시(Goutam Ghose, 고땀 고시), 리투파르노 고시(Rituparno Ghosh, 리뚜뽀르노 고시) 등 신세대 감독들이 등장하며 작가주의적 벵골 영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으로, 스릴러, SF, 호러 등 장르에서 엔터테인먼트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감독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신세대 취향에 맞게 좀 더 가벼운 로맨스 영화들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09년 영화 《챌린지(চ্যালেঞ্জ)》, 2011년 영화 《빠글루(পাগলু, '미친')》 등이 대표적인 벵골 대중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서벵골에서는 여전히 예술성 높은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동시대 벵골 감독으로는 코시크 강굴리(Kaushik Ganguly, 꼬시끄 공고빠다이), 수브라지트 미트라(Subhrajit Mitra, 슈브로지뜨 미뜨로), 스리지트 무케르지(Srijit Mukherji, 스리지또 무코빠다이) 등이 유명하다. 벵골 마살라 영화도 일부 시도되어 왔지만 벵골 영화의 주류는 변함없이 전통적인 극영화다. 벵골 마살라 영화나 젊은층을 겨냥한 경쾌한 액션 영화는 평론가들에게 혹평받는 경우도 비교적 많다.

오늘날 서벵골 영화는 상업적으로는 볼리우드 및 남인도(특히 타밀, 텔루구[6]) 영화와 경쟁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볼리우드 및 남인도에 비해 영화 편당 제작 예산이 크게 적어 감독, 배우, 제작진 등이 박봉과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설비 부실로 타 지역에서 영화를 찍던 사람들이 서벵골 영화 촬영 현장을 방문하고 경악하는 일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벵골 영화계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이론적 전문성은 매우 높은 수준이며, 이에 힘입어 벵골 영화는 여전히 다채로운 인도 영화의 한 축으로 당당히 남아 있다.

서벵골에서 어떤 영화들이 만들어져 왔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싶다면 우선 벵골어 장편 영화 부문 국가 영화상 목록부터 체크하는 것도 좋다.


[1] 본토, 동부 지방, 시킴 [2] 이 점에서 토지 개혁과 함께 문맹 퇴치, 복지 확대 등 뚝심 있게 계속해서 정책을 관철시키고 '케랄라 모델'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게 한 케랄라의 공산당 정권과는 크게 대비된다. 케랄라의 공산당은 서벵골 공산당 수준으로 엘리트주의에 빠지지 않고 기층과 긴밀하고 유연한 연계를 계속해서 유지했으며, 케랄라에 정치 폭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서벵골처럼 공산당이 이를 제도화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한 차이다. 케랄라 공산당은 서벵골처럼 반대파를 억압하며 선거 승리를 얻어내는 데 집착하지 않고 자신들의 장기 정책 개발과 노선 설득에 집중했고, 케랄라에서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행위자들 간의 협상에 기반한 정치 문화도 정착했다. [3] 공산당 정부는 1980년대까지는 산업화를 등한시했다가, 1990년대부터 대규모 산업화 개혁을 시작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바뀐 정책은 서벵골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효과를 내기 어려웠다. 케랄라 공산당은 서벵골 공산당과 달리 정책 연속성을 지켜나가면서 비교적 작은 규모로 협동조합 기반 산업과 서비스업 육성에 지속적으로 집중했다. [4] 정확히 말하면 이때 합계 득표율로는 아직 공산당(M)이 AITC를 앞섰지만, 선거구 형태 문제로 의석 획득 수는 AITC가 앞섰다. 즉 AITC가 이긴 곳에서는 득표율 격차가 작았고, 공산당이 이긴 곳에서는 득표율 격차가 컸다는 것이다. [5] 나온 김에 이야기하면, 벵골식 극영화를 좋아하고 상업화된 볼리우드를 저평가하는 벵골 사람들이라고 해도, 아미타브 바찬까지 싫어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나중 세대인 샤룩 칸은 좀 더 호불호가 갈린다. 샤룩 칸을 싫어하는 사람은 감정 과잉의 판타지만 찍는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배우로서 아미타브 바찬이 선보였던 발군의 연기력과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강렬한 카리스마, 그리고 때로 드러낸 우아한 감정 표현은 벵골에서도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사실, 이론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평론가나 영화학도가 아니라면 두 종류의 영화 모두 서로 다른 장르로서 즐기는 벵골 사람이 많다. [6] 남인도 드라비다어권 영화라고 해도 케랄라 지역의 말라얄람어 영화는 벵골 영화처럼 리얼리즘적, 문예적 극영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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