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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12:21:26

태황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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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1.1. 중국1.2. 한국
1.2.1. 고려1.2.2. 조선
1.3. 베트남1.4. 서양
2. 실존인물
2.1. 한국2.2. 중국2.3. 서양
3. 가상인물

1. 설명

太皇太后 / Grand Empress Dowager

황태후의 다음 단계로, 일반적으로는 선선대 군주의 정실부인[1]이 갖는 지위다. 정석대로 황위가 부자 계승된다면, 이 지위를 갖게 되는 여성은 선선대 군주의 정실부인임과 동시에 선대 군주의 법적 어머니이며 현 군주의 법적 할머니이다. 하지만 세세하게 따지자면 현 군주의 조모 = 태황태후라는 공식은 암묵적으로 용인된 것이지 현 군주의 할머니라고 하여 항상 태황태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같은 경우 태황태후(대왕대비)의 이미지가 정희왕후 소혜왕후에 맞춰져 있어 착각하는 부분인데, 정조 대에 정조의 할머니였던 정순왕후는 당시에 왕대비로 불렸다가 다음 군주인 순조 대에 들어서야 대왕대비로 승격되었다.[2] 반면 영조 대에 대왕대비로 간주된 인원왕후는 영조의 법적 어머니가 되므로[3] 태황태후(대왕대비) = 군주의 조모라는 공식을 절대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황태후(왕대비)도 마찬가지.

가끔 태상태후(太上太后)라는 단어를 쓴 경우가 발견되는데, 태상태후의 경우 태황태후의 다른 표현일 뿐, 태황태후의 승격된 표현까지는 아니다. 실제로 황제의 법적 증조모로서 살아있던 경우가 극히 드물게 있었는데,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중간에 태황태후로 승격되었어야 했는데, 그냥 황태후로 지내다 나중에서야 태황태후로 승격된다. 이외에도 몇몇 케이스들이 확인되지만 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태황태후까지만 호칭을 받았지 그보다 상위에 놓인 명칭을 받은 적이 없다. 고로 확인되는 명칭 중 황실 여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큰 위치는 태황태후인 것이 맞다.[4]

원래 황태후는 현대 황제의 어머니가 되는 여성에게 주는 지위였기 때문에, 꼭 황후였던 여성만 황태후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5]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황후였던 사람만 황태후가 될 수 있는 걸로 체계화되어, 황제가 황후가 아니었던 자신의 어머니를 황태후로 만들려면 어머니를 추존 황후로 만들거나,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주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의료수준 및 수명이 크게 늘어난 현대로 올수록 태황태후(대왕대비)는 보기가 힘들어진다. 사실, 왕대비만 하더라도 왕비로서 배우자인 왕이 죽을 때까지 장수해야 하기 때문에 왕대비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왕위가 자식에서 손자에게 넘어가야 하는 대왕대비는 1. 무리수를 두며 일찍 양위하거나, 2. 왕대비 본인이 장수하여 자식보다 오래 살거나, 3. 자식인 국왕이 요절해야 가능하지만, 셋 중 어느 하나도 쉽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1.1. 중국

궁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이며, 황제의 나이가 어리거나 유고 상황이어서 섭정을 실시하게 될 때에는 이를 담당하게 된다. 황실을 한 집안에 비유한다면, 그 집안의 가장 장자(長者)이다.

황태후와 마찬가지로 현 황제와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따질 때 실가(實家)의 항렬이 아니라 황통(皇統)을 봤으므로, 꼭 선선대 황제의 정실부인만이 태황태후가 된 건 아니다. 중국에선 후궁이 정실부인이 된 게 아닌데도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총애한 후궁이 사망한 뒤에 황후로 추존한다거나, 후계자를 낳은 후궁이 황후급으로 대우를 받는다거나 등.

청나라 시기는 황제들 중 도광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어날 때 후궁 출신의 어머니였으나 정실황후와 황제의 모친 모두를 황태후로 올렸다. 청나라가 만주족의 황실이었으므로 황제 계승에는 적서의 구분이 없었다. 특히 강희제 시대 이후에는 능력 위주였다. 서태후와 청나라의 유일한 태황태후 효장문황후 후궁이지만 후계자의 어머니로서 황태후가 된 경우다.[6]

이 지위에 오르려면 최소한 부자상속으로 2대 이상의 황제의 치세를 겪어봐야 하는데, 대부분은 황태후일 때 사망했기 때문에 실제로 태황태후가 되는 이는 드물었다.

황태후와 비슷한 단어로 태상황후가 있다. 중국, 베트남 등에서 쓰였는데 황태후는 태상황이 붕어했을 때, 태상황후는 태상황이 살아있을 때 쓰였다.

1.2. 한국

1.2.1. 고려

한국 왕조 중 최초로 태황태후 지위를 사용한 국가는 고려 왕조이다. 고려 최초의 태황태후는 신정대왕태후.[7] 다음은 효숙인혜순성대왕태후.[8]

근데 고려의 사용례는 중국과 달랐다. 일단 위의 두 사람은 사후 시호로 태황태후에 추존된 것이고 고려사상 생전에 태황태후 자리에 오른 사람은 없었다. 생전 태황태후의 위치에 있었거나 그에 준하는 지위에 있었던 사람도 그냥 태후(太后) 명칭을 썼다.[9] 효숙인혜순성대왕태후는 현종이 어머니를 대왕태후로 올린 것으로, 국왕의 친할머니만 태황태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왕태후(大王太后)와 태황태후가 혼용되었다.[10]

1223년, 고려사엔 고려 고종 때 황태후를 태황태후로 올렸다는 기사가 있다. 당시 황태후는 사망한 희종의 모후 선정태후, 살아있는 고종의 모후 원덕태후 두 명이 있었다. 선정태후가 태황태후에 올려진 것이라면 이는 기존의 전통대로 사후 추존이 된다. 만약 원덕태후가 태황태후로 올려진 것이라면 원덕태후는 고려 역사상 유일하게 살아생전 태황태후가 된 것으로, 태황태후가 시호로만 쓰이지 않은 예외가 된다. 사면령을 베풀었다는 점을 볼 때 살아있는 인물에게 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고려는 태후 생전에 태황태후 또는 대왕태후 존호를 받은 적이 거의 없어 공원왕태후 등 자격이 충분한 태후가 있어도 올리지 않은 듯 하다. 대신 위에도 나오듯 사후 시호로 태황태후(대왕태후)가 쓰였다.[11]

1.2.2. 조선

중화권의 인식에 입각한 사용례는 조선 왕조 때 등장한다. 조선에서 쓰던 대왕대비의 황제국 버전이 바로 이 태황태후다. 명나라의 책봉국이 되어 황(皇)과 태(太) 자를 사용할 수 없어, 각각 왕(王)과, 대(大) 자로 낮추고 후(后)도 비(妃)로 사용해 대왕대비(大王大妃)로 명명했다.[12]

조선의 경우엔 처-첩 간의 차별을 강화해 왕비에 책봉된 자만이 왕대비가 될 수 있었으므로, 후궁의 자식이 군주가 되어도 후궁은 왕대비나 대왕대비에 오를 수 없었다. 헌종 때는 왕들이 요절해 대비들이 많았기 때문에, 원래는 왕대비의 준말이었던 '대비'를 임시로 별도의 지위로 만들어 지위 체계가 '왕대비→대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3단계가 되어 철종대와 고종대에는 선선선대 왕비만이 대왕대비라 불렸다[13]. 덕분에 사극 명성황후에서 이 3가 우르르 몰려나온다.

어쨌든 일국의 최고 어른으로 예우받았으며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였다. 왕이나 조정의 대신이라 할지라도 대왕대비의 판단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여성으로 이루어진 내명부 외명부뿐만 아니라 조정에도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다. 정희왕후, 문정왕후, 정순왕후, 순원왕후 등은 아예 수렴청정을 하여 막후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의 경우 효가 나라의 근본 교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대왕대비는 물론, 왕대비는 국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지위와 권력이 있었다.[14] 물론 조선 경국대전의 법도상 수렴청정을 제외하고는 대왕대비가 직접 정치를 하지는 못했으나 왕의 어명에 반대하여[15] 벌이는 단순한 단식투쟁 조차 왕이 당장 하던일을 멈추고 바로 달려가게 만들 정도로 궁에서 벌어지는 커다란 사건 중 하나였다.

단적인 예로 당장 광해군이 폐위된 가장 첫번째 명분이 바로 폐모살제다, 그만큼 효는 조선시대에서 왕조차 거역할 수 없는 나라와 정치의 근본이였고 그 중심의 대왕대비는 궁의 제일 큰 어른이자 막강한 권력자였다. 이런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도 자신의 양할머니이자 대왕대비가 된 인목왕후에게 굽신거렸을 정도다.

대왕대비 중에서도 입지가 좁은걸로 유명한 장렬왕후조차도 왕대비 시절 효종의 정통성을 세워주는 지위에 있었기에 병을 오래 앓았다고 아예 창덕궁 만수전을 지어 선사하기도 했고, 대왕대비라는 위엄이 없는건 아니었어서 막나갈정도로 왕권이 강하기로 유명한 숙종조차 모친 명성왕후가 사망한뒤에도 장렬왕후가 살아있을때는 내명부 문제에 끼어들지 못하고 왕권을 남용할수 없었기에[16] 장렬왕후 사후에야 본격적인 환국을 일으켜 왕권을 크게 행사할수 있었고,[17] 내명부 문제에도 간섭하여 억지로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세울 수 있었다.[18][19]

원래 중국의 태황태후까지 보더라도 이 지위에 오르는 이들은 많지 않은 편이나, 언급했듯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초기에 비해 단명하거나 방계 혈통으로 보위에 오르는 임금들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조선의 경우는 이 지위에 오른 이들이 많았다. 세도가문 출신의 대왕대비들이 수렴청정을 하는 경우로 인해 왕권 실추를 상징하는 지위로 보이기도 한다.

1.3. 베트남

베트남의 경우 여러 왕조들에서도 태황태후가 나왔지만, 응우옌 왕조의 경우엔 티에우찌 황제의 황후인 의천장황후 팜티항은 세 명의 손자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프랑스에 의해 폐위 또는 사망하고, 증손자인 타인타이 황제가 즉위하자 태태황태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태황태후를 넘어 태태황태후까지 오른 유일한 사례이다. 중국은 황제의 증조모뻘이 태황태후까지 올랐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그 이상의 호칭이 논의되지 못했던 데에 반해[20] 타인타이 황제가 즉위했을 때는 증조모, 조모, 모친이 모두 생존했기에 각각 태태황태후, 태황태후, 황태후로 모실 수가 있었다.

1.4. 서양

서양의 경우 장수한 왕비가 많음에도 왕대비는 많아도 되려 대왕대비는 조선과 중국보다도 적다. 이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왕들이 단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왕비가 먼저 사망하는 경우도 많고, 자식들보다 나이가 적은 계비를 들이더라도 역시 왕위를 물려받은 자식들이 꽤 오래 사는 탓에 법적 손자, 손녀가 왕위에 오르는 것까지는 못 보는 것이다. 근현대 유럽 왕실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할머니인 테크의 메리가 대왕대비에까지 올라간 대표적 사례로 꼽히지만 그녀는 되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에 대왕대비의 권위를 누리지도 못한 채 급격히 쇠약해져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2. 실존인물

2.1. 한국

시대에 따라 기준이나 호칭이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대왕대비라 불렸던 이들 외에 대왕대비에 준하는 지위를 받은 이들도 다룬다.[21][22]
왕조 배우자 해당인물 출생 사망 나이 당시 국왕
조선 세조 정희왕후 윤씨 1418.11.11 1483.3.30 66세 성종
덕종 소혜왕후 한씨 1437.9.8 1504.4.27 68세 연산군
예종 안순왕후 한씨 1445.3.12 1498.12.23 54세 연산군
중종 문정왕후 윤씨 1501.10.22 1565.4.6 65세 명종
선조 인목왕후 김씨 1584.11.14 1632.6.28 49세 인조
인조 장렬왕후 조씨 1624.11.7 1688.8.26 65세 현종~ 숙종
숙종 인원왕후 김씨 1687.9.29 1757.3.26 71세 영조
영조 정순왕후 김씨 1745.11.10 1805.1.12 61세 순조
순조 순원숙황후 김씨 1789.5.15 1857.8.4 69세 헌종~ 철종
문조 신정익황후 조씨 1808.2.6 1890.4.17 83세 철종~ 고종
헌종 효정성황후 홍씨[23][24] 1831.1.22 1903.11.15 73세 고종

2.2. 중국

왕조 배우자 해당인물 출생 사망 나이 당시 황제
전한 고제 고황후 여씨 ? BC 180 ? 소제 유공~ 유산
고황후 박씨 ? BC 155 ? 경제
문제 효문황후 두씨 ? BC 135 ? 무제
소제 효소황후 상관씨 BC 88 BC 37 49세 원제
선제 효선황후 왕씨 ? BC 16 ? 성제
원제 효원황후 왕씨 BC 71 13 84세 애제~ 유자영
후한 효인황 효인황후 동씨 ? 189 ? 소제
조위 무제 무선황후 변씨 159 231 71세 명제
북위 태무제 태무황후 혁련씨 ? 453 ? 문성제
문성제 문성문명황후 풍씨 441 490 49세 효문제
북송 인종 자성광헌황후 1016 1079 63세 신종
영종 선인성렬황후 1032 1093 61세 철종
남송 고종 헌성자열황후 1114 1197 83세 광종~ 영종
효종 성숙황후 1132 1203 71세 영종
이종 수화성복태후 사씨 1210 1283 73세 공제
원나라 문종 옹기라트씨[25] 1305 1340 36세 혜종
명나라 홍희제 성효소황후(誠孝昭皇后) 장씨(張氏) 1379 1442 63세 정통제
정통제 효숙황후(孝肅皇后) 주씨(周氏) 1430 1504 72세 홍치제
성화제 효정순황후(孝貞純皇后) 왕씨(王氏) 1442 1518 76세 정덕제
청나라 숭덕제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 1613 1688 76세 강희제

2.3. 서양

3. 가상인물

드라마 인물 연기자
궁(드라마) 태황태후 박씨 김혜자
해를 품은 달 대왕대비 윤씨 김영애
야경꾼 일지 청수대왕대비 서이숙
황후의 품격 태황태후 조씨 박원숙
랑야방 태황태후 정육지


[1] 정실부인이 아니었어도 효장문황후의 예처럼 황후로 추존되어도 가능했다. [2] 이 경우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왕대비가 될수 없었기에 정순왕후가 선대 왕비로서 왕대비가 된것이다. 순원왕후의 경우 선대 왕비이지만 왕의 조모이고 모후가 왕대비가 되어야했기에 왕비에서 거의 바로 대왕대비가 되었다. [3] 이 경우 영조의 형수이자 선왕의 비인 선의왕후가 왕대비였다. [4] 한국에서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사도부인을 가리키는 명칭 중 하나로 썼기 때문에 꽤 유명해서, 태황태후의 한국식 표현 중 하나인 걸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실은 그녀의 시어머니에 해당하는 위치다. 참고로 화랑세기의 영향으로 사도부인을 사도태후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정사에서 그녀는 태후라고 불린 적이 없어서 태후가 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5] 예를 들어 중국의 전한의 고황후 박씨는 후궁이었지만 황제의 친모-친조모라서 황태후-태황태후가 되었다(그녀가 황후의 지위를 얻은 건 후한 광무제 때다). 한국에선 고구려의 부여태후와 신라의 지소부인은 남편이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음에도 왕의 친모라서 왕태후가 되었다. [6] 단, 지위상 황제의 정실부인이었던 태후가 더 존귀했다. 선황 사망시 황후는 모후황태후라고 불렸지만 황제의 어머니인 후궁은 성모황태후라고 불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태후도 사실은 성모황태후였고, 선황의 정실부인인 동태후가 모후황태후였다. [7] 고려사 후비 열전 기준. [8] 현화사비(玄化寺碑) 기준. [9] 대표적으로 살아 생전에 충숙왕의 왕후이자 충혜왕, 공민왕의 모후, 우왕의 할머니였던 명덕태후. [10] 중국의 예법 상으론 천자는 태황태후, 제후는 대왕대비 존호를 쓴다. 대왕태후는 고려가 새로 만든 것인 셈. [11] 중국의 예법 상으론 생전 지위가 어땠든 시호는 무조건 왕후(황후)로 고정이다. [12] 왕대비 명칭은 고려 후기부터 썼다. 당시 원나라의 제후국이 되면서부터 지위의 격을 한 단계씩 낮춰 왕태후가 왕대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3] '대비'는 어디까지나 임시 작위였으므로, 철종 때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가 사망하자 왕대비였던 신정왕후가 대왕대비, 대비였던 효정왕후는 왕대비가 되었다. [14] 설령 권력이 없다시피해도 기본적으로 대비들은 왕비이기도 했던만큼 명문가 집안 출신이라 완전 허수아비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며 효라는 근본 교리상 아무리 왕권이 강력한 왕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하고 권력욕 넘치는 선조조차도 피 한방울 안섞여있고 적모도 아닌 큰어머니에 불과한데다 반남 박씨라는 명문가 집안이란거 외에는 아무런 권력기반이 없었던 인성왕후에게도 극진했으며 적모 인순왕후 승하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의 아들 광해군은 정반대로 계모 인목왕후를 핍박했다가 그 명분으로 발목잡혀 쫓겨났다. [15] 물론 어명에 반대하는것은 최고 역모까지도 엮일 수 있는 중한 벌이였으나 대왕대비나 왕대비는 자식(손자)이 그릇된 일을 하는것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얼마든지 행해 질 수 있는 일이였다, 그만큼 효와 어머니의 도리는 왕이라도 결코 어기거나 함부로 할 수 없었다. [16] 멀쩡히 왕실어른이 살아있는데도 그들을 무시하고 막나갔다가 폐위를 당한 연산군 광해군의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연산군과 그래도 사이가 좋았던 대비 정현왕후 조차도 감쌀수 없을 정도로 막나가는 명실상부 폭군이라 그렇다 쳐도 후자는 사실상 폐모살제 하나가 폐위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만큼 아무리 천하의 숙종이라도 이를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17] 환국의 큰 분기점이자 붕당정치가 사실상 와해되는 계기가 된 기사환국이 바로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사망 직후 벌어진 일이며 장렬왕후가 10년만 더 살았어도 일어나지 않았거나 판도가 많이 달랐을것으로 평가받는 환국이기도 하다. 물론 장렬왕후의 굴곡진 인생사 및 당시 시대상 60대 나이까지 산 것도 오래 산데다 기적이긴하지만..... 조선에서 대왕대비의 생존 및 사망은 정치 구도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방증의 사례이다. [18] 장렬왕후가 사망한지 3개월도 안되어서 태어난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을 숙종이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던것도 장렬왕후가 사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왕실의 오랜만에 후사라서 급하다고 해도 젊은 정실 왕비 및 역시 젊은 왕 본인이 멀쩡히 있는 상태에서 태어난지 1년도 안된 후궁의 아들을 장차 보위에 오르는 자격의 상징인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이례적이고 현대 기준으로 해석하면 비상식적이며 이 비상식적이라고까지 해석할수 있는 행동이 막무가내로나마 가능했던게 바로 경종 출산 이전에 대왕대비이자 유일한 왕실어른인 장렬왕후가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장렬왕후가 최소 경종 출산 후 1년 정도만 더 살았어도 원자정호문제는 천하의 숙종이라도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밀어붙일수는 없었을 것이다. [19] 게다가 대왕대비는 선선대왕의 왕비이자 왕의 할머니이지만 종친(왕족)들의 가장 웃어른이기도 하다. 당시 숙종이 자식 없이 사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던데다 장희빈이 낳은 자식들이 경종 포함 모두 아들이 아니고 딸이였다면 인현왕후가 자식을 못낳는다해도 종친들 중 가장 계승에 적합한 사람을 숙종 생전에 왕세제 내지 왕세자로 입적하는 권한에도 관여할수 있고 또 그러할 자격도 된다. [20] 남송의 경우 황제의 양부가 태상황으로 물러나면서 자동적으로 황제의 양모는 태상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황태후는 대개 황제의 양조모가 받았다. [21] 참고로 인성왕후 박씨는 문정왕후 사망 및 선조 즉위 이후에도 효정왕후와 달리 대왕대비에 준하는 지위조차 받지 못했는데 이는 선조의 양어머니가 된 인순왕후 심씨와 동일 항렬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풀어 말하자면 소혜왕후-안순왕후와 똑같은 항렬의 왕대비로서 서열만 본인이 더 높은 식으로 된 것이다. [22] 정작 인성왕후 본인의 권력 기반은 기껏해야 자신의 가문인 반남 박씨와 일부 인척 이외에는 없다시피했고 선조의 양어머니 자격도 서열이 더 높은 자신이 아닌 인순왕후가 가져가서 똑같이 자식이 없던 인순왕후보다 공식서열은 더 높았음에도 인순왕후의 권위가 훨씬 막강했다. 이를 반증한 인물이 바로 인순왕후의 동생이자 붕당정치를 발단시킨 심의겸이다. [23] 헌종 때 지위체계가 바뀌는 바람에 그녀의 마지막 지위는 왕대비( 대한제국 때는 황태후)였다. [24] 선선대 왕비임에도 갑오개혁 이전인 1890년 신정왕후 조씨가 사망한뒤에도 대왕대비로 승격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왕대비의 자리를 비우지 않는 걸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법적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를때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에 머물렀다가 순조가 즉위하고 정조비 효의왕후가 왕대비가 되고나서야 대왕대비로 승격되었다. [25] 보통 원나라 측 기록에선 이름인 '부다시리'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혜종이 그녀를 폐위해 추방한 후 사사했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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