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서(蜀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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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芝
178년 이전 ~ 2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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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사 등량의 아버지로 자는 백묘(伯苗).[1]형주 의양군 신야현 출신.[2] 후한의 복국 1등공신 등우의 후손.[3]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일찍 촉으로 들어가 활동하였지만 듣보잡 인재 정도로 취급당해 중용되지는 못했다. 이 시기 익주종사 장유가 등지의 관상을 보고는 그가 70줄 넘어서 대장군 지위에 오르고 또한 후에 봉해질 것이라 평하였다. 이후 파서 태수 방희가 인재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의탁했다. 전체적으로 유비의 입촉 전에는 별다른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연의에서 등장부터 문무겸비 고급인재로 나오는 것과는 꽤나 다른 행보.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비저각독에 임명되었으며, 유비와 대면한 자리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때 유비가 등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비현 현령으로 임명했다가 곧 광한태수로 승격시켰다. 나중에는 중앙정부로 불려가 상서에 임명되기도 했다.
2.2. 촉· 오의 외교관
유비 사후 제갈량은 손권이 딴 마음을 먹고 촉에 위협을 가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등지가 찾아와 촉오동맹을 굳건하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자 제갈량은 등지를 적임자로 보고 오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등지가 제갈량을 만나 말했다.
"지금 주상은 유약하며 방금 즉위하였으니, 응당 중요한 사신을 보내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두텁게 해야 합니다."
제갈량이 대답했다.
"나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얻었습니다."
등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질문했다. 제갈량이 말했다.
"당신입니다."
제갈량은 곧바로 등지를 파견하여 손권과 우호 관계를 맺도록 했다.
등지는 후주 유선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손권을 설득시켜 오가 위와 관계를 끊고 촉과 공수동맹을 맺도록 주선하였고 더불어 오에 붙잡혀있던 장예의 석방 협상도 성사시켰다.
이때 등지와 손권이 했던 대화는 가히 호걸들의 대화라고 할 만한데 <등지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손권은 과연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불시에 등지를 만나게 되었다. 등지가 직접 표를 올려 손권을 만날 것을 요청하며 말했다.
"신이 오늘 온 것은 또한 오나라를 위하려는 것이지, 비단 촉나라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손권은 곧 만나보고 등지에게 말했다.
"나는 진실로 촉나라와 화친하기를 원하지만, 촉주는 유약하고 국토가 작고 형세가 빈약하여 위나라가 틈을 타고 침입하면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이오. 이 때문에 유예(猶豫)시킬 뿐이오."
등지가 대답하여 말했다.
"오와 촉 두 나라는 네 주의 땅을 갖고 있고, 대왕은 한 시대의 영웅이며, 제갈량 또한 한 시대의 호걸입니다. 촉에는 첩첩의 험준한 요충지가 있고, 오에는 삼강의 험준함이 있으니, 이 두 장점을 합쳐 함께
입술과 치아의 관계가 된다면, 나아가서는 천하를 겸병할 수 있을 것이고, 물러나서는 삼국 정립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대왕께서 지금 만일 위나라에 귀순하게 된다면, 위나라는 반드시 위로는 대왕의 입조를 바라고,
아래로는 태자가 궁으로 나아가 받들기를 요구할 것입니다.[4]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반란을 토벌한다는 이유를 들 것이며, 촉은 반드시 흐름을 따라 할 수 있음을 보고 나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강남의 땅은 다시는 대왕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말했다.
"당신 말이 옳소."
그러고 직접 위와의 관계를 끊고 촉과 우호관계를 맺고 장온(張溫)을 보내 촉에 답례했다.[5] 촉도 다시 등지에게 오나라로 가도록 했다. 손권이 등지에게 말했다.
"만일 천하가 태평하다면, 두 군주가 나누어 다스려도 또한 좋지 않겠소?"
등지가 대답했다.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명의 군주가 없습니다. 위를 병탄한 후일지라도 대왕은 천명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군주가 각각 자신들의 덕행을 함양하고, 신하가 각각 자신들의 충성을 다하며, 장수들은 전쟁용 북을 울려 출전한다면, 전쟁이 비로소 시작될 뿐입니다."
손권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성실함으로써 당연한 답변이오."
손권이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이전의 사자 정굉(丁厷, 丁宏)은 언사가 화려하며 속으로는 변화가 끝이 없었습니다. 두 나라를 화합시킬 수 있는 자는 오직 등지뿐입니다."
손권은 등지의 변설과 외교관으로써의 역량에 감복하여 제갈량에게 별도의 서신을 보내 등지를 칭찬했다. 그 이후로도 손권은 몇 차례 편지를 보내 등지의 안부를 묻고 예물을 보내기도 했다.
촉한은 기본적으로 한실부흥을 명분으로 삼고 있었기에 손권 역시 궁극적으로는 토벌 대상임을 여지없이 드러낸 등지나 그걸 듣고 흔쾌히 웃은 손권이나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제갈량은 손권이 칭제하자 분개하여 반대하는 신하들 상대로 등지와 비슷한 논리로 우선 위나라를 먼저 치고 손권의 찬역은 나중에 논해야 한다고 하였는데(절맹호의) 이는 분명 촉한의 대의명분적 파탄이요, 손실이었다. 그러나 당시 촉한에서도 진밀이나 비시, 조운 등의 중신들이 손오보단 한실을 직접적으로 무너뜨렸고 가장 세력이 강대한 위나라를 먼저 주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오나라는 그 다음이어야 한다는 현실적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등지의 교섭 결과나 손권의 야망 넘치는 언행 등이 촉한 조정에 알려진 상황이었기에 손권의 칭제는 거의 기정사실화 되었음에도 이런 반대여론이 대세였던 점, 이후에도 비의 등 촉한의 사신들이 오나라 중신들과의 접견에서 계속 자국의 우위를 과시하는 신경전을 펼친 정황을 보건대 그만큼 당시 촉한의 국시인 '한적불양립'의 사고방식이 촉한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것을 것을 의미한다. 등지의 이런 태도는 절대로 이 외교관계가 촉한의 명분상실로 넘어가는 걸 좌시하진 않겠다는 촉한의 의지표명이었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사실 손오 입장에서도 촉한이라는 동맹이 있는 게 더 이득이었다. 촉이 아니라 오 vs 위의 1:1 매치였으면 결국 무너질 상황인 것이다. 촉한과 규모의 차이는 분명 있었지만 손오의 지방 호족이나 세족들은 손씨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보니 오의 경우엔 반란도 상당히 잦았고 외침 시에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명분이 부족했다. 애초에 오는 호족들의 사병을 모아 오군으로 편성해서 전쟁을 치르다 보니 지휘체계의 혼선도 많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당장 한나라의 후손이자 황제의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 집권 구조 체제를 구축한 촉한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았고 위와 천하를 놓고 결전을 벌인다 가정했을 때 우군으로서 촉한처럼 안정된 세력은 필수적이었다. 손권이 그렇게 동맹을 맺기 위해 공을 들인 요동의 공손연이나 고구려 등은 결과적으로 위나라에게 대차게 깨지거나 손권의 사절단을 이용만 하고 버리거나 하여 손권의 바람이 헛된 것임이 드러났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손권에게 남은 최선은 제갈량 휘하에서 국력을 단단히 다지고 그 병사들이 강병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촉한과의 동맹일 수밖에 없었다.[6]
여담이지만, 나중에 종예가 사신이 되어 손권에게 나아가서 당당하게 맞받아치자 손권이 감탄하며 "경은 예전에 왔었던 등지만큼 대단한 사람이오."라고 말한 바 있다.
2.3. 무관으로서의 면모
제갈량의 북벌이 시작되자 중감군, 양무장군으로 임명되어 종군하였고 1차 북벌에서는 조운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제갈량 사후에는 전군사, 전장군, 연주 자사에 임명되고 양무정후로 봉해졌으며, 나중에는 거기장군으로 승진하였다.등지의 직책이 중감군 양무장군이 된 것은 제갈량의 한중출병 당시의 일로 되어 있는데, 이엄 탄핵 당시 등지의 보직은 독좌부 행중감군 양무장군, 겸직이다. 등지가 한중출병과 231년 북벌 사이에 승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직속상관이었던 조운의 보직을 등지가 대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엄 관련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는 촉군 편제상 감군은 호군보다 위인데 등지가 227년 당시 중감군이었다면 조운이 주장으로 출전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248년에 부릉군의 대성호족인 서거가 도위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등지가 군대를 인솔하여 토벌하였다. 화양국지에는 이 기록이 25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 화양국지》에 따르면 등지가 부릉을 정벌할 때 활 쏘기를 좋아했던 등지는 검은 원숭이에게 화살을 맞히었다. 그런데 원숭이가 그 화살을 뽑고 나뭇잎을 말아 상처를 감싸자 등지가 탄식하며 "아, 내가 사물의 본성을 어겼으니 장차 죽게 되겠구나!"라고 말했다.
일설에 따르면 등지가 새끼 원숭이를 안고 있는 어미 원숭이에게 화살을 맞혔는데 새끼가 어미에게서 화살을 뽑고 나뭇잎으로 어미의 상처를 감쌌다. 등지가 마침내 탄식하며 활을 물 속에 던지고는 스스로 마땅히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2.4. 사망
251년에 죽었다. 향년 73세. 당시의 낮은 평균 수명과 발달하지 못했던 의학 상황을 고려하면 장수하였다. 등지는 오랫동안 촉의 중직을 맡았지만, 생활은 관에서 주는 녹봉에만 의존하였고 재산을 모으는 데도 영 관심이 없다 보니 가족들이 끼니를 걱정해야 될 정도로 상당히 가난했고, 죽었을 때 남은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진수는 등지가 정조가 곧고 간결명료한 인물로써 관직에 있으면서는 가업을 잊었다고 평가했다.그 외에도 강직했지만 나름대로 모난 성격이었는지 다른 신하들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나마 강유 정도만이 등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등지 사후에는 아들 등량이 뒤를 이었다.
3. 삼국지연의
정사처럼 촉오동맹을 놓고 고뇌하고 있던 제갈량의 눈에 들어 따로 회동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 제갈량의 인정을 받아 오의 사절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손권은 촉에서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펄펄 끓는 기름을 담은 솥을 준비하고 무장한 병사들을 잔뜩 세워 놓은 채 맞이한 것으로 나온다. 다음은 연의의 내용이다.
유비가 죽고 유선이 그 뒤를 잇자, 위나라의 조비는 사마의의 조언을 따라 5로군[7]을 내기로 하고 그 중 한 축으로서 오나라의 손권을 꼬드기기로 한다. 이미 조비가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눠 동오를 침공했을 때 막아낸 이후(
조비의 남정)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손권은
육손의 조언을 따라 조비의 5로군에 합류하는 척하면서 승산이 보이면 그 때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한다. 한편 막 제위에 오른 유선은 위나라의 5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뒤집어졌고 바로 제갈량에게 신하들을 보내 조언을 구했으나, 막상 제갈량이 '생각해 볼테니 기다려라'라는 대답만 하고 소식이 없자 답답해서 직접 제갈량의 집으로 찾아간다. 유선은 연못의 잉어들을 보며 상념에 잠긴 제갈량에게 말을 걸어 놀래키고 제갈량이 죄를 빌며 엎드리자,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고는 5로군이 온다는데 어찌하여 두 손 놓고 있느냐며 물었다. 이에 제갈량은 이미 적재적소에 장수들을 보내 막았고,[8]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관흥과 장포가 중앙에 보고하지 않고 위급한 지역을 구하러 가도록 별동대 역할을 맡겼다. 5로군 중 마지막인 오나라의 손권에 대해서는 역시 육손의 생각대로 위나라와 안 좋은 감정을 이용해 설득시켜서 군사를 물리는 것으로 결정했으나, 적임자를 찾지 못해 고민했던 것이었다. 근심이 해소된 유선은 제갈량의 집을 나와 들어갈 때와 달리 함박웃음을 지으며 성도로 돌아갔으나 신하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9] 모두가 궁금하게 여겼는데, 제갈량은 등지만이 홀로 하늘을 보며 웃는 것을 눈치채고는 그를 불러들여 의견을 물었다. 등지가 위나라를 꺾으려면 이릉대전의 원한을 접고 오나라와 협력해야 한다고 대담한 의견을 내놓자 제갈량은 크게 만족했고, 드디어 오나라를 설득할 적임자를 찾았다면서 등지를 오나라에 보낸다. 한편 출진하는 척하면서 상황을 보기로 했던 손권은 아니나다를까 다른 4로군이 모두 제갈량의 계책에 막혔다는 소식을 듣자, 역시 가만히 있기로 한다. 마침 촉나라에서 등지라는 사신이 왔다고 하기에 손권이 의견을 구하자, 장소는 이것도 제갈량의 계책이라면서 이렇게 간했다. " 역이기가 제나라를 설복하려다 튀겨져 죽은 일화를 얘기해 겁을 주십시오."[10] 이에 손권은 등지를 맞이할 때 무사들을 줄세우고, 큰 북을 울리며 솥에 기름을 팔팔 끓였다. 하지만 등지는 웃음까지 지으면서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손권에게 나아갔다. 등지가 절을 하지 않자 손권은 왜 절을 하지 않냐 따졌고, 등지는 이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 큰 나라에서 온 사신은 작은 나라의 왕에게 절하지 않는 법입니다."[11] 이에 손권이 장소가 말한대로 기름솥에 쳐넣으라며 겁을 줬지만 등지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며 "아무리 내가 하찮은 세객이라지만 그래도 오나라를 위해 좋은 말을 해주러 온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속좁은 짓거리로 맞이해서야 어떻게 큰 일을 해내겠는가?"라고 반박했으며, 이에 손권은 무작정 화만 낼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무사들을 물린 뒤 등지를 맞이했다. 손권은 등지에게 "나는 촉주 유선과 함께 힘을 합쳐 위나라를 치고 싶은데 촉주가 어려서 걱정이다."라고 하자 등지는 "대왕께서는 오나라의 영걸이고 제갈량은 천하의 기재인데 어찌 힘을 합쳐서 치지 못하겠습니까? 설령 물러나셔도 솥발처럼 천하를 세 갈래로 나누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나라에 몸을 굽히신다면 위나라는 대왕을 여러모로 길들이려 할 것이고, 이를 거부하면 쳐들어올 것이며 우리 촉나라도 대세를 따라 오나라를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말이 틀리다면 저는 이 기름솥에 몸을 던져 세객이란 이름을 씻겠습니다."라며 진짜로 기름솥에 몸을 던지려 하자 |
4.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등지(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伯이 맏이라는 뜻이라
장남으로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2]
다만 등지가 태어나고 성장할 당시에는 남양군 신야현이었다. 의양군은 위나라 때 설치되었다.
[3]
위나라의
조상의 심복
등양도 마찬가지다.
[4]
아닌게 아니라 위나라 문제
조비는 손권의 태자
손등의 입조를 요구하고 손권이 이에 응하지 않자 손권을 지속적으로 공격했었다.
[5]
정작 장온은 사신의 자격으로 촉나라에 갔다온 뒤, 거기에 매료되었는지 촉나라를 자주 찬미하는 발언을 했는데다가 본인이 가진 인망도 높았으므로 사람들이 장온을 너무 칭송만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손권에게 찍혀 다른 일을 핑계로 쫓겨났다가 몇 년 뒤에
요절했다. 장온 문서로.
[6]
다만 유리한 상황이라 해도 등지의
외교적 수사는 촉오가 서로 앙금이 안 남을 최적의 수사였다.
[7]
요동의 가비능, 남만의 맹획, 오나라의 손권, 촉나라의 배신자 맹달, 위나라의 조진. 대촉 연합군이라고 봐도 무방한 군세였다.
[8]
요동의 가비능은 서량의 인기인인 마초가, 남만의 맹획은 똑같이 바보인 위연이, 배신자 맹달은 똑같이 파촉 출신이자 맹달의 친구인 이엄이, 위나라의 조진은 조운이 막았다.
[9]
이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독자들의 추측을 자아낸다. 이 때 제갈량의 신적인 판단력을 처음 접한 이후 본격적으로(…) 천하태평해졌다는 해석도 있다.
[10]
사실 역이기가 튀겨져 죽은 것은 역이기의 문제가 아니라 제나라의 항복을 받아냈음에도 한신이 괴철의 꼬임에 넘어가 무방비인 제나라를 공격했던 게 문제였다. 항복하고도 공격을 받아서 화가 난 제나라 왕 전광이 역이기에게 자신을 속였다며 죽여버린 것. 인과관계를 봐도 역이기는 잘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였고 당대에도 이름 날릴 만큼 비범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았다. 애초에 등지가 권유하러 온 건 동맹이지 항복이 아니다. 다만 장소의 주장을 "네 말 믿고 촉이랑 손을 잡고 위에 맞섰을 때 위나라가 쳐들어오면 촉이 구하러 오겠다는 보장이 있냐? 너도 인간 튀김이 돼서 죄값을 치르고 싶다 이거지?"라고 해석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11]
이희재 화백의 만화 삼국지에서는
유선은 촉의 황제이고, 손권은 아직 왕이니, 동오가 그만큼 작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12]
이희재 삼국지에서 이 부분이 압권인데, 기름솥에 진짜로 뛰어드는 등지를 손권이 '스톱!!!'이라고 외치고 직접 달려들어서 두 다리를 붙잡아 바닥에 처박아버린다. 당연히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등지의 몰골은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