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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0080,#ddd> 일생 | 일생 | |
가족 |
아버지 장기빈 · 어머니 황루시아 · 동생 장발 · 장극 · 여동생 장정혜 · 장정은 · 장정량 아내 김옥윤 · 아들 장영 · 장진 · 장건 · 장익 · 장순 · 장흥 · 딸 장명숙 · 장의숙 · 장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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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제4대 부통령 선거 · 제5대 부통령 선거 | ||
사건사고 |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5.16 군사정변 | ||
기타 | 장면 내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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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장면의 일생을 서술한 문서.2. 대한제국기
1899년 8월 28일 한성부 서서 적선방 사온동계 사온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의 외할아버지 황성집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구한말 탁지부 주사를 지낸 아버지 장기빈(張箕彬)[1]과 어머니 장수 황씨(長水 黃氏) 황루시아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태어날 당시 아버지 장기빈과 어머니 황 루시아 내외는 인천에 집이 있었고 출생직후 인천에 와서 쭉 유년기를 인천에서 보냈기에 인천 출신으로 본다. 장면은 태중교인으로 어려서부터 순종하는 태도가 밴 생활을 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2대 국무총리가 되고도 어머니에게 무릎꿇고 빌 정도로 순종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2]3. 일제강점기
1921년, 맨해튼 대학에서 |
농림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 장기빈이 이웃 천주교 신자와 사돈을 맺기로 하고 혼사를 추진해, 17세에 2년 연하의 경주 김씨 김옥윤(金玉允)과 혼인성사를 했다. 이후 장면은 한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아내에게만 집중했다고 한다. 소년 시절 친구들이 기방(妓房)으로 끌고 갔을 때 그는 긴장해서 줄행랑을 놓기도 했다. 일제 말기에는 협력을 요청하는 한 조선총독부 관리의 만찬장에 갔다가 기생들이 들이닥치자 역시 줄행랑을 쳤다.
장면은 모자를 쓰고 칼을 차며 호령하는 일본인 관료가 되는 꿈도 없었고 그의 조용한 성격상 소질도 맞지 않았기에, YMCA에서 운영하는 영어학원에 진학했다. YMCA 청년회 영어학원을 2년간 공부하고 YMCA 학원 재학 중 용산예수성심신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학생으로 이중 생활을 했는데, 용산예수성심신학교의 제자들 중 1명이 바로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였다.[4] 그 뒤 미국으로 유학하여 메리놀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맨해튼 칼리지 대학에 진학했다.
1925년 미국 맨해튼 칼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당시 한국인 대표 자격으로 교황청을 방문한 뒤 귀국하여 메리놀 선교회를 도와 천주교 평양교구 개척을 도왔다. 이후 장면은 평양교구 개척을 위해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사하고, 평양성당에서 평신도 대표로 선교 활동과 성당 사무를 보는데 투신했다. 그 밖에 메리놀 선교회의 한국어 강사를 겸임하며 메리놀 선교회 및 외국인 천주교 신부들의 통역을 맡으며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훗날 < 교부들의 신앙>이라는 가톨릭 입문서의 한국어 편역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성실성을 인정받아 천주교 재단의 추천으로 일제강점기에 동성상업학교[5] 서무주임, 동성상업학교 교장, 혜화동 성당 부설 유치원 원장, 계성국민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본인 시학관을 쫓아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교육청에서 지도를 나왔을 당시 동성상업학교 학생이었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서 제출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 때 장면은 김수환을 교장실로 호출했고 뺨을 후려쳤다. 만약 저 상황에서 장면이 저런 제스쳐를 안 했다면 김수환은 나중에 곤욕을 치렀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장이 애 뺨까지 때려가면서 훈육했으니 좀 넘어가주십사" 하는 일종의 쇼맨십. 어쨌거나 장면이 이렇게 나선 덕분에 별 탈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6] 이후에 일본 유학 장학생을 선발할 때는 김수환을 1등으로 추천해서 보냈는데, 이렇게 보면 장면이 사람을 아끼는 안목이 있었다는 평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4. 미군정 시기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영회를 개최했고 민주의원 의원,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이때 미군정과 한국인 대표의 통역 역할을 한 것도 장면의 입신양명에 도움이 되었다. 한국민주당에 직접적으로 입당은 하지 않았으나, 해방정국 당시 행보를 보면 이들과 꽤 성향이 비슷했고,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노선을 더 지지하기도 했다.1948년 1월 유엔 위원단을 환영하며 통일해야한다 주장하였으며 같은해 3월경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위하여 백인제, 전규홍과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뽑혔고 총선거를 위한 회의를 개최하여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종로구 출마를 위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을 사퇴하였다. 그렇게 제헌 국회의원 선거때 23,188표를 받으며 종로구을에 당선되었으며 민주의원 해산식에 참가하였다.
5. 대한민국 시기
1948년 9월 유엔 총회의 가는것이 결정되었고 당시 기자회견에서 미군 철퇴 불가,5월 10일 총선을 승인,대한민국 정식 승인,대한민국 유엔 가입이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1948년 10월 26일 기자회견에서 여순사건에 대해 "대한민국의 유엔총회를 방해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수작"이라 말하였다. 장면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현지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장을 받고 1949년 1월 7일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됐다.[7]이승만 본인은 감리교 신자였지만 " 유럽과 남아메리카 등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신속한 정부 승인을 얻으려면, 미국 사정에도 정통하고 가톨릭계에서 신망이 높은 장면의 활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는 주효하였다.[8] 장면의 노력으로 교황청 및 유럽과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대한민국 정부를 신속하게 승인하기 시작하여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 내에서도 북한을 제치고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헤게모니를 선점하는데 성공하했다. 이런 공로 때문에 태극훈장을 수여받았다.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터지자 장면은 당일 발빠르게 트뤼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을 면담하며 북한이 한국을 불법으로 침공한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미국 국무부와 유엔을 오가며 한국에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며, 유엔군의 신속한 참전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공헌을 하였다. 그 공로로 이승만은 그를 국무총리로 내정했고, 귀국 후 제2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후 원내자유당이 창당되자 거기에 입당했다. 이후 원내자유당 내 친이승만파로서 국무총리 활동을 했으나, 본인이 소속된 당 국회의원 일부가 그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다가[9] 실패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때문에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자유당에서도 탈퇴한다.
야당 정치인 시절에는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되었는데, 당시 이기붕의 평판이 '병약하며 권력에 욕심이 많고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문제가 많다.'는 등 부정적이었고, 반면 장면은 '성격이 온순한 편이며 성실하다'는 평을 받아 이승만의 측근인 이기붕을 누르고 대한민국 제 4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당시 선거에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선거 중 타계해 이승만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부통령으로 장면에게 투표한 이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10]
그런데 당시 이승만은 장면을 지지한 유권자들이 용공( 공산주의 용인과 동조)이나 친일 성향이 있다면서 일명 장면 지지 친일용공설을 주장했다. 그 후 이기붕을 이긴 것이 자유당 세력의 눈 밖에 나서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때 괴한의 총격을 맞아 왼손을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던 것. 저격범들은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며 내부 소행인 것처럼 조작하려다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장면은 대인배같이 선처를 호소하여 감형을 주선했다. 이에 감화된 피고인 중에는 뒤에 천주교 신자가 되거나 목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60년에 다시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당시 자유당 정권이 조작한 3.15 부정선거로 낙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뜻에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대한민국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시행하여 국무총리가 되었다.[11] 1960년 5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국무총리가 된 후에는 민주당 신파의 리더로 활동하면서 당시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려 했던 민주당 구파 윤보선 대통령과 껄끄러운 사이를 유지했다.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큰 권력을 갖지 못하는 대통령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는 바람에 장면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내각의 리더인 장면이 민주당 신파의 리더이기도 해서 내각 장관들이 신파 일색일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 갈등은 클 수밖에 없었다. 국무총리 시절 장면은 이름처럼( 勉 근면할 면) 매우 근면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했고 밤 늦게야 일을 끝마쳤다고 하는데 덕분에 아랫사람들은 죽어나갔다고 한다. 나중에 박정희 군사 정권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리즈의 모태가 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도 장면 내각에 의해 세워졌다.[12]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전문가 여럿이 모여 경제 계획을 수립하고 초기 단계의 몇몇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1년을 못 채우고 쫓겨난 정권치고는 나름 의욕적으로 일한 셈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신구파 갈등이 너무 심하다보니 1960년 말에 민주당 구파가 대거 탈당을 하여 신민당(1960년)이라는 별개의 야당을 차리는 바람에 거대 여당 프리미엄은 누리지도 못했고 4.19 혁명 이후로 고삐가 풀린 언론에서도 갑자기 찾아온 자유를 주체를 못하며 장면을 까대는 사설을 내놓는 등 '장면 총리 흔들기'에 동참하다보니 장면 총리의 지지율이 내리막길을 걸으며 정책 추진력에 있어서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경제 정책의 성과가 나오기도 전에 국무총리직에서 강제로 내려오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17일에는 아침에 프랑스 대사로 추정되는 이가 장면의 편지를 직접 받아 주한미국대사관에 건네주었고 오후에는 장면과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가 전화를 주고 받았다. 18일 오전에는 장면이 직접 총리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취했으며 결국 정오 무렵에는 육군참모총장을 만났다. 그러나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이미 육군참모총장을 설득해 5.16 진압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둔 상태였고 이에 미국은 장면과 연락을 주고 받았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핑계로 사태를 방관하게 된다. 초기 소위 소장파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던 쿠데타 세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으나[16] 서울 중심으로 포섭하여 새벽에 국무총리 집무실, 청와대, 서울특별시장실, 방송국, 대한민국 육군본부 등 주요 기관에 잠입하고 관련 주요 인물을 체포 또는 연금한 뒤 1군 등 자신들의 토벌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일부 부대를 중간 장교들이 높으신 분들을 습격해서 체포하는 형식으로 장악한 정도였기 때문에 선전했다 한들 정부를 무너뜨리지 않아 기반이 불안정했다. 때문에 대통령인 윤보선을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장면을 놓친 것은 쿠데타 세력으로서는 위험이었다. 이때 주한미군 사령관인 카터 매그루더는 자신의 허락없이[17] 함부로 군을 움직인 것은 물론이요 하극상의 극치인 쿠데타까지 일으킨 박정희와 일당들에 대해 격노했으며 요청만 들어오면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반란군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물론 제도상으로는 유엔군 사령관에게 한국군의 동원권이 존재하였으나 미국은 권한의 직접적인 행사를 통한 정치적 개입을 꺼렸고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재가를 받는 형식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재가 과정에서 차질을 빚자 유엔군 사령관이 'take charge(권한 행사)'를 해달라는 장면의 요구는 수용되기 어렵게 된다.[18] 그러나 매그루더의 설득에도 윤보선은 쿠데타 진압을 거절하였고, 매그루더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가서 "사인만 해주면 된다"고 했으나 "우리나라는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안고 나오지 못한다."는 해괴한 발언을 하며 사인을 거부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올 것이 왔구나!"를 두고 그는 쿠데타를 잘 이용하면 장면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니냐는 추론도 있다. 그러나 윤보선 본인은 소식으로만 들은 '온다는 것이 왔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고 반론하였다.[19] 그렇게 미국 정부까지 불간섭 원칙을 내세우자 5월 17일 미국 국무부는 "장면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지도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며 공식적인 개입 거절을 발표하였다.[20] 그리고 이를 전달받은 장면은 5월 18일 오후 1시쯤[21] 가르멜 봉쇄수녀원을 나왔다. 그 사이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이끌고 쿠데타 지지 시위를 하며 점차 반란군의 입지는 탄탄해져 갔고 결국 2일 뒤인 5월 18일 미국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은 뒤 가르멜 봉쇄수녀원에서 나와 내각 총사퇴 서류에 서명하고 하야를 선언하며 쿠데타의 성공을 인정하고 말았다. 군의 정치 불개입을 주장하며 끝까지 반란군 세력에 동조하기를 거부했고 진압을 준비하다가 윤보선에 의해 부하들에게 지도부의 진압 중지 명령이 내려지자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체포당한 1군 사령관 이한림[22] 등 쿠데타를 막으려던 움직임은 이미 완전히 실패한 뒤였다.
6. 사망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이주당 사건이라는 반쿠데타 사건의 배후 인물이라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3번이나 징역 선고를 받는 등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병이 악화되어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하자, 박정희 정권은 장면이 세상을 떠나기 1달 전에야 정치 정화법 대상에서 해제시켰다. 1966년 6월 4일 장면은 향년 66세에 간염으로 사망했다. 사후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 용상골의 혜화동 성당 부설 가톨릭 공원묘지에 묻혔다. 경기도 의정부시 축석고개에서 포천시 소흘읍 내 흔히 송우리라고 부르는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가구단지들이 있고 길 옆에 표지판이 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가톨릭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가톨릭 교육자로 일한 이력이 근거였는데[23] 그가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는 설도 제기된다.[24] 그러나 본인이 주도적으로 나선 친일 행적은 없기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 일화도 그렇고 '적극적 친일'이라기보다는 '소극적 부일'이었다는 동정론도 있기는 하다.[25]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개옹(㝏翁)
장봉한(張鳳翰)의 11대손으로 그의 선대는 본래
경상도 인동도호부(현
경상북도
구미시와
칠곡군) 지역에서 세거해왔으나 7대조 장익붕(張翼鵬)이 처가가 있던
평안도 성천도호부(현
평안남도
성천군)로 이주했으며 고조부 장인각(張仁珏)이 평안도 성천도호부에서 인근의 중화도호부(현
황해북도
중화군)으로 재차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한편, 그의 집안은
영남남인계
양반 출신이었으나 1633년(
인조 11)
생원시에 입격한 10대조
장이유(張以兪)를 제외하고는 그 이후로는
이인좌의 난을 거쳐 사실상 정계에서 소외되었기에 이렇다할
과거 급제자 및
관직에 진출한 선조가 없어 사실상 몰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장기빈이 당시 관직에 진출해있던 조모
진주 강씨의 남동생 강화석(姜華錫)의 권유로 10대 후반부터
한성영어학교와
한성일어학교를 다니며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하여 곧 능통할 수 있었고
외국어 능력 덕에
대한제국 말기에 세무
관리로 진출하면서 가족들 또한
한성부로 올라오게 되었다.
# 1902년부터 1903년까지
탁지부 주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
@
일제강점기 시절 관직 대신
무역업에 종사했고
광복 이후 초대
부산세관(현 부산지방국세청) 세관장을 맡았다. 세무 관료와 사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집안 사정은 유복했다.
[2]
그가 50대의 나이에 무릎꿇은 이유는 국무총리 당시 "옷이 너무 화려하다"는 어머니의 질타 때문이었다.
[3]
현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성당.
[4]
노기남 대주교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나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 이전에 활동한
한국 천주교의 거목이었다.
[5]
현
동성중학교&
동성고등학교
[6]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61회에도 나왔다.
[7]
이때문에 종로 을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8]
실제로
볼리비아,
쿠바,
벨기에,
튀르키예,
호주,
그리스,
아이티,
코스타리카,
룩셈부르크 등과 친선을 하였다.
[9]
일부는 내각책임제 개헌 후 차기 총리로 밀려고 했다.
[10]
당시의 정/부통령 선거는 미국식
러닝메이트 방식과는 달리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다른
정당 소속으로 투표하는 것이 가능했다.
[11]
이 과정에서 장면이 국무총리로 취임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김두한이 장면의 친일 경력 및
창씨개명 사실을 전단으로 뿌리고 다니며 장면 깎아내리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12]
일부에서는 "장면의 5개년 계획은
농업 위주의 정책이었고
박정희의 5개년 계획은
공업화 정책이었기 때문에, 장면은 박정희와 같은 성과를 못 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애초에 5개년 계획은 이후에도 정책이 계속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초기 정책만 보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당장 박정희 정권만 해도 집권 초기
화폐개혁 실패 등으로 미국의 대대적인 정책 수정 개입을 자초한 전력이 있다. 장면은
한국 전쟁으로 황폐화된
산업 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국토 개발 사업을 추진해 국토건설본부를 구성하고 스스로 본부장에 취임했을만큼 농업 정책에만 몰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13]
안타깝게도 장면이 떠난지 10여 분 후 박정희가 보낸
박종규 등 특수부대가 쳐들어와 이를 해체시켜버렸다.
[14]
다급한 나머지
안경도 잃어버렸다. 후일
가르멜 봉쇄수녀원에서 나왔을 때 안경도 없이
연설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5]
장면
홈페이지에 있는 당시 의전비서
이홍렬의 1999년 증언에 따르면 장면의 차를 운전하던 운전수가 영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 대사관에 상황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증언자인 이홍렬 본인도 직접 본 것은 아니라(자신이 운전수와 총리만 태워서 보냈다) 확실하지는 않아서 확인이 필요한 부분. 대사관 직원이 부재 중이라 혹은 신원 확인이 되지 못해서라는 설도 있다.
[16]
쿠데타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병력은 6군단
포병대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 일부에 불과했고 특히 서울을 공격한 부대는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 250명과 병력 3,500명 뿐이었다.
[17]
이 시기 모든
작전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평시작전통제권이 한국에 넘어온 것은 1990년대로,
전시작전통제권은 추후 넘어올 예정이다.
[18]
심지어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했다.
[19]
다만 실제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라서 실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음에도 그 권한을 대통령 윤보선이 휘두르려고 해서 둘이 사이가 안좋기는 했다.
[20]
이후
존 F. 케네디 정권은 쿠데타 정권을 오히려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21]
애초에 몰래 나온거라 정확한 시각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약 1시지만 1시가 조금 안된 시각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12시 30분은 넘었기 때문에, 516 초기에 장면이 수녀원으로 숨었던 5월 16일 오전 4시 30분부터 이 시각까지를 근대사 연구쪽에서는 "장면의 54시간"이라고 부른다.
[22]
이로 인해 예편되었으나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장관직을 지낸다.
[23]
조선인 천주교인들을 총괄해 일제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를 지냈다.
[24]
다만 해방정국당시 장면은 애초에
김구를 필두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보다는
한국민주당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성향을 보였기때문에 정치적으로
김구와는 정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25]
하지만 1961년 국무총리 시절에 일본
쇼와 덴노에게
생일 축전을 보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당시는 한일외교 수립 전이라 굳이 축전을 보낼 필요가 없었는데도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 당시 정계에서 장면에 대한
친일파 혐의를 다시금 부각시킨 대표적 사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