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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마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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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년 혹은 1147년 ~ 1219년 5월 14일)
노르만어: Williame li Mareschal
영어: William Marshal
프랑스어: Guillaume le Maréchal
라틴어: Guillelmus Marescallus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마상창시합 출전2.3. 두 번의 반란 제압2.4. 3차 십자군2.5. 프레테발 전투2.6. 리처드 1세의 죽음2.7. 섭정
3. 리처드 1세와의 대결4. 봉토5. 마셜의 후손6. 대중매체에서7. 여담

1. 개요

누구보다 위대했던 기사
스티븐 랭턴

윌리엄 마샬은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기사로 평가받는 인물로, 무력뿐만 아니라 지략과 인격에서도 뛰어난 최고의 명장이었다.

그는 키가 193cm에 달했으며, 공식적으로 500회 이상의 마상창시합(joust)에서 승리했다고 전해질 만큼 뛰어난 기사였다.

윌리엄은 헨리 2세, 리처드 1세, 존 왕, 헨리 3세 등 네 명의 왕을 보좌했으며, 특히 존 왕이 사망한 후에는 어린 헨리 3세를 보호하며 섭정을 맡기도 했다. 또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검술 스승이자, 인간흉기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유년기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반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영토 분쟁이 극도로 첨예했던 시기였다. 당시 잉글랜드는 노르만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고,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지방을 중심으로 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 왕실은 영토 확장을 도모하며 잉글랜드와 끊임없이 대립했다.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 시기에는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의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졌는데, 윌리엄 마샬은 이러한 갈등의 와중에 잉글랜드 왕실을 보좌하며 전장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쌓았다.

윌리엄 마샬의 아버지는 앵글로-노르만 기사 중 한 명이었던 존 마샬로, 군사적으로는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혼돈의 시기였다. 노르만 왕조의 제3대 왕 헨리 1세는 자신의 딸인 마틸다를 여왕으로 세우려 했고, 사후에 그녀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스티븐이 마틸다가 잠시 해외로 떠난 사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를 알게 된 마틸다는 분노해서 남편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의 군사들을 빌려 그녀의 이복동생이었던 글로스터 백작과 함께 스티븐과 내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존 마샬은 내전 초기에는 스티븐 왕의 편에 서서 싸웠으나 이내 마틸다의 편에 서서 싸웠고 이 사실을 알게된 스티븐이 분노해 존 마샬의 둘째 부인의 어린 아들을 인질로 잡고, 투석기 위에 올려놓은 후 성 밖에 있던 존 마샬을 보고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때 존 마샬은 "나에겐 망치와 모루가 있고, 나는 아직도 더 좋은 아들을 제조할 수 있다."라는 말을 했고 이 말을 들은 스티븐은 어린 아이를 살려주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윌리엄 마셜이다. 태어난 해는 1146년 혹은 1147년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년도는 알지 못한다.

2.2. 마상창시합 출전

윌리엄 마샬은 이후 노르망디에 있는 그의 어머니 시빌 르 마레샬(Sybilla le Marshal)의 사촌, 기욤 드 탕카르빌의 가문으로 들어가 기사 수업을 받게 되었다. 1167년, 그는 처음으로 마상창시합에 출전해 우승을 거두었다.

마상창 시합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며 창으로 상대방의 갑옷을 맞혀 점수를 얻는 스포츠였다. 윌리엄은 20세 안팎의 젊은 나이에 첫 우승을 거두었고, 이후 500회가 넘는 마상창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전해진다.

1168년, 윌리엄은 외삼촌인 솔즈베리 백작 패트릭을 따라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여왕을 호위하는 임무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엘레오노르를 납치하려던 기 드 뤼지냥의 매복에 걸려들었고, 그 과정에서 외삼촌은 목숨을 잃고 윌리엄은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채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당시 포로가 된 기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거액의 돈을 주고 풀려나든지, 죽든지.[1]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고, 기욤 드 탕카르빌은 죽었으며, 돈은 없던 윌리엄은 죽음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리처드 1세의 어머니로 유명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포로 교환금을 대신 지불했고, 겨우 살아난 윌리엄은 기사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약 2년간 엘레오노르의 가신으로 있는 동안 마상창시합에 나가, 무용을 뽐내며 승리를 밥먹듯이 했다. 이러한 실력에 헨리 2세의 장남이었던 청년왕 헨리[2]가 그에게 기사장 자리를 주었고, 이후 청년왕 헨리가 아버지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윌리엄은 그를 따라 싸웠다.

2.3. 두 번의 반란 제압

1173년, 헨리 2세의 아들 청년왕 헨리가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윌리엄 마셜은 이 반란에 종군했으며, 당시 젊은 헨리는 형제 리처드 제프리, 어머니 엘레오노르, 그리고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손을 잡고 헨리 2세에 맞서 싸웠다. 반란은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헨리 2세의 빠른 대응과 군사적 능력 덕분에 1174년 진압되었고, 엘레오노르는 반란 후 체포되어 수년간 감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윌리엄 마셜은 젊은 헨리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면서 청년왕의 기사가 되었고, 그가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왔다. 마셜은 기사의 이상을 실현하며 청년왕을 섬겼지만, 청년왕의 충동적인 성격과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체스판 사건은 이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였다. 젊은 헨리는 체스를 두다가 자신의 말이 잡히자 화가 나서 체스판을 들어 윌리엄의 머리를 내리쳤고, 윌리엄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한 윌리엄은 젊은 헨리를 훈계하려고 달려들었지만, 헨리는 겁에 질려 도망쳤다. 윌리엄은 결국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으나, 이후에도 묵묵히 젊은 헨리를 섬기며 그의 곁을 지켰다.

1183년,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청년왕 헨리와 동생 리처드 간의 대립이 원인이 되었으며, 청년왕 헨리는 여전히 거만하고 충동적인 태도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반란 도중 열병에 걸려 요절하게 되었고, 임종을 앞둔 청년왕 헨리은 윌리엄 마셜을 불러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윌리엄은 그의 마지막 고해를 받아주고 끝까지 그를 위로하며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 청년왕은 죽기 직전, 마셜에게 자신의 망토를 씌워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1186년 여름, 리처드는 아키텐 공국에서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와의 국경 지대에서는 영토 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리처드와 그의 기사들은 프랑스군 척후병들의 매복에 걸려 포위되고 말았다. 상황이 매우 절박한 가운데, 윌리엄 마셜이 소수의 정예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적진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마셜은 거침없이 적군을 돌파하며 길을 열었고, 그의 창은 적장의 갑옷을 꿰뚫었다. 이어진 백병전에서 그는 프랑스 기사들을 압도하며 리처드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가 끝난 후, 마셜의 군마는 지쳐 쓰러졌고, 그의 갑옷은 화살과 창 자국으로 가득했다. 이 전투 이후, 마셜은 리처드로부터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

한동안 자유로운 삶을 이어가던 마셜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2세의 주선으로 귀족의 딸 이사벨 드 클레어와 약혼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마셜은 클레어 가문의 광대한 영토를 얻게 되었고, 영향력 있는 귀족으로 자리매김했다. 헨리 2세는 윌리엄 마셜의 충성을 높이 평가했고, 이 약혼으로 그를 왕국의 중요한 관리로 임명하며 그의 충실한 기사로 삼았다. 윌리엄이 헨리 2세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받았을 때, 그는 청년왕 헨리와 함께했던 시종 생활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헨리 2세의 설득과 이사벨 드 클레어와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였다.

윌리엄 마셜은 프랑스, 잉글랜드, 그리고 십자군 원정을 다니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갔으며, 특히 기사 토너먼트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어 '당대 최고의 기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1180년대 후반까지 그는 수십 차례의 토너먼트에 참가해 승리하며 재산을 축적했고, 그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심지어 50대 초반까지도 그는 여전히 토너먼트에 참가해 뛰어난 무예 실력을 발휘하며 젊은 기사들에게 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의 신뢰성과 명예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2.4. 3차 십자군

리처드 1세는 1189년 7월, 헨리 2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르자 마샬을 중용하기 위해 이사벨과의 결혼을 허락하고 영지를 하사했다. 당시 마샬의 나이는 40~42세 정도였고, 이사벨과는 25살 정도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5남 5녀가 태어났으며, 마샬은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막대한 부와 권세를 얻게 되었다.

여담으로 헨리 2세는 그를 이용하기 위해 "이사벨을 악명높은 런던탑에 가둬놓고 그를 조종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런던탑=감옥이라고 착각한데서 온 잘못된 서술이다. 헨리 2세는 이사벨의 공식 후견인으로, 이사벨이 성년이 될때까지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런던탑은 헨리 2세의 정식 왕궁들 중 하나였지, 교도소가 아니다.[3] 정말 헨리 2세가 이사벨을 악명 높은 감옥에 가두고 괴롭혔다면, 마셜이 헨리 2세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된 뒤에도 끝까지 충성을 바쳤을 리가 없다. 어쨌든 마셜은 헨리 2세의 충복으로 활약하며 리처드의 반란에서도 맹활약하였고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활약에도 전세는 불리해졌고 헨리 2세는 시농 성에서 고립되었는데 이때도 마셜은 국왕군을 지휘하며 헨리 2세를 보좌했고 헨리 2세가 임종하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키며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헨리 2세 홧병으로 사망하자 [4] 리처드 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리처드는 자신의 심복으로 삼기 위해 런던탑에 있던 17살(!!!)의 이사벨과 43살의 윌리엄을 결혼시켜주며 영지 몇 개를 하사해 주었다. 헨리 2세가 몰락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충성을 바쳤던 점을 높이 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리처드 1세의 동생이었던 이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에 간 사이 통수를 치기 전까지는 존을 지지해주었으나 존이 역심을 드러내자 리처드에 대한 충성을 분명히 했으며, 이후 노르망디에서도 리처드가 가장 신뢰하는 지휘관으로 맹활약을 했다. 이후 마그나 카르타 당시에도 존 왕에게 직언을 많이 하여 존왕에게 미움을 사 영지를 뺏기고 자식들이 인질로 잡혔음에도 존 왕의 편에 서서 반대파들을 개발살내버리기도 했다. 이런 충성스런 모습에 존 왕도 마셜을 신뢰하며 사망할 때 아직 9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후계자를 잘 돌봐 달라며 부탁했고, 윌리엄은 왕의 섭정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헨리 왕자가 반란 도중 사망하면서 윌리엄 마샬은 주군을 잃은 기사가 되어버렸다. 그는 새로운 목표를 찾기 위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성전기사단에 합류했다. 마샬은 1190년 6월, 리처드 1세와 함께 베젤레에서 출발하여 마르세유를 거쳐 해로로 시칠리아에 도착했고, 이후 키프로스섬을 거쳐 1191년 6월 아크레에 도달하여 성지 탈환을 위한 전쟁에 나섰다.

1191년 제3차 십자군이 아크레 성을 포위하는 동안에도 마샬은 이슬람군의 지원군을 상대로 선두에 서서 싸웠으며, 살라딘의 부하 사프 앗 딘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그를 쓰러뜨리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는 십자군의 사기를 크게 북돋우고, 이슬람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마샬은 소수의 기사들과 함께 정찰을 나섰다가 다수의 이슬람군과 마주쳤을 때에도 동료들의 후퇴 권유를 거부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해 많은 적을 물리치고 동료들을 구출해냈다. 이러한 무훈을 통해 마샬은 십자군 내에서 명성을 떨쳤고, 리처드 1세를 비롯한 지휘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1192년 9월,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평화 협정을 맺고 귀국길에 올랐지만, 중간에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붙잡혀 1년 이상 감금되었다. 마샬 역시 1192년 12월경에 귀국했다.

리처드 1세가 1192년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붙잡혔을 때도 마샬은 리처드의 석방을 위해 협상과 재정적 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처드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마샬은 잉글랜드의 평화를 유지하고 왕국을 지키기 위해 큰 공헌을 하며 리처드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했다.

이로써 윌리엄 마샬은 십자군 원정 중이든 잉글랜드에서든 변함없이 리처드 1세의 충실한 동반자로서 왕국의 안정을 위해 힘썼다.

2.5. 프레테발 전투

1194년, 리처드 1세가 오스트리아에서 석방된 직후, 그의 동생 존 왕자는 형의 부재를 틈타 영국 노르망디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이에 가세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레테발에서 양측이 맞붙게 되었는데, 당시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으나 리처드 군의 선봉에 선 윌리엄 마샬이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하여 뛰어난 기량으로 적진을 돌파해 나갔다. 마샬은 혼란을 틈타 필리프 2세의 군마를 쓰러뜨려 왕을 말에서 떨어뜨렸고, 필리프 2세는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 지휘부가 붕괴하며 사기가 꺾였고, 영국군은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리처드 1세가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군사 기록들을 노획해 이후 전략적 우위를 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6. 리처드 1세의 죽음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는 프랑스 샤루 성 포위전에서 석궁에 맞아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당시 윌리엄 마샬은 리처드의 신뢰를 바탕으로 노르망디를 통치하고 있었다. 리처드가 사망하자, 마샬은 즉시 그의 동생 존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로 인해 영국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리처드의 형 제프리의 아들 아서 브리타니아 공작으로서 왕위에 대한 정당한 청구권을 주장하면서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필리프 2세는 아서의 권리를 지지하면서 왕위를 둘러싼 경쟁이 한층 복잡해졌다.

결국 존 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아서는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영국 왕위에 도전했지만, 1202년 미라보 성에서 존의 명령으로 체포되었고, 이 작전에는 윌리엄 마샬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203년 아서는 행방불명되었고, 이후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존 왕의 통치에 심각한 정치적 부담을 초래하게 되었다. [5] 이후 존은 점점 독재적인 성향을 보이며 1204년 보빈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해 노르망디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영국의 대륙 영토 상실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1200년 윌리엄 마샬 존 왕의 특사로서 필리프 2세 노르망디 앙주를 둘러싼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근본적인 갈등은 해소되지 못한 채, 일시적인 평화 협정에 그치면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은 지속되었다.

2.7. 섭정

1214년 보빈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존 왕 프랑스군에 패배하면서,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때 은퇴를 고려하던 60세의 윌리엄 마샬은 귀족들의 봉기를 중재하기 위해 나섰으나, 결국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서명 이후 귀족들은 존 왕에 반기를 들었다.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을 번복하려 하며 불화를 키웠고, 귀족들은 이를 반역으로 간주해 내전이 촉발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왕세자 루이를 왕위에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216년 10월 19일, 링컨셔 뉴어크 성에서 존 왕이 dysentery 이질로 사망하자, 당시 70세의 마샬은 헨리 3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헨리 3세는 겨우 9살이었고, 마샬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연로한 나이에 주요 지도자로 나서 국가의 실권을 맡고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1217년의 링컨 전투는 헨리 3세의 왕권을 위협하던 내전을 끝내는 중요한 전투였다. 당시 프랑스군과 반란군이 링컨 성을 포위하고 있었고, 마샬은 약 400~500명의 기사와 수천 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열세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는 군대를 세 종대로 나누어 프랑스군을 기습해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토마 루이 백작이 전사하고 다수의 프랑스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 승리로 프랑스군과 반란군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고, 램버스 조약(1217년 9월)을 통해 루이는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철수했다. 이를 통해 잉글랜드 내전은 종결되었고, 헨리 3세의 왕권은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전투의 내막을 보면, 왕당파 인사들이 반란군의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마샬은 병력의 열세로 인해 직접적인 공성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양쪽에 매복을 배치한 뒤, 자신이 정면에서 도발을 하여 반란군 지도자들을 격분시켰다. 성문 밖으로 나온 반란군이 그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는 동안, 좌우 측면의 기습이 이어지며 혼란을 가중시켰고, 정면에서의 맹공으로 적장의 목을 베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링컨 전투의 승리로 마샬은 "프랑스인들의 공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70대의 노장이 직접 전장을 지휘하며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투 이후 윌리엄 마샬은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재발행함으로써 존 왕의 사망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수습하고 헨리 3세의 통치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수정된 마그나 카르타는 왕권의 과도한 제한을 완화하면서도 봉신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를 통해 마샬은 귀족들의 지지를 회복하여 내전을 마무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샬은 1219년 초 건강 악화로 섭정직에서 물러났고, 캐버샴 자택에서 황달에 걸려 서서히 쇠약해졌다. 임종이 다가오자 템플 기사단의 수도사 복장을 입고 마지막을 준비했으며, 이는 중세 기사들이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고 영혼의 안식을 구하기 위해 경건한 최후를 맞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의 장례식은 레딩 수도원에서 거행되었고, 수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후 마샬의 유해는 성전기사단의 영국 본부인 템플 교회에 안장되었으며, 영원한 안식을 취했다.

그는 생전에 헨리 2세, 리처드 1세, 존 왕을 포함한 5명의 잉글랜드 왕을 섬긴 충신으로, 중세 유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사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의 후손들은 그의 유산을 이어받아 잉글랜드 사회에서 중요한 귀족 가문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윌리엄 마샬의 생애를 기록한 "히스토리 드 윌리엄 마샬"(L'Histoire de Guillaume le Maréchal)은 중세 기사들의 삶, 전투, 정치적 역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남아 있다.

3. 리처드 1세와의 대결

정말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리처드 1세와의 대결이 있었다. 다만 이와 관련되어서 국내에는 "리처드 1세가 윌리엄 마셜에게 졌대"라는 단편적인 내용만 알려져 있지 상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리처드의 힘을 약화시키려던 헨리 2세의 정책에 분노한 리처드가 1187년경 반기를 들어 스스로 왕이 되려했을 때, 헨리는 그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연대한 리처드 1세 헨리 2세의 베리령을 포위하였을 때, 헨리 2세가 윌리엄 마샬을 불러 가세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1189년, 헨리 2세의 마지막 농성지가 된 르망(Le Mans) 외곽에서 윌리엄 마셜은 리처드를 거의 죽일 뻔 했다고 한다.

헨리 2세가 퇴각하며 윌리엄 마셜에게 후위를 부탁했는데, 이때 리처드가 무리하게 경무장 - 투구와 겹옷만 입고 무장도 검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으로 헨리 2세를 추격하다가 갑옷과 방패,랜스로 풀무장한 윌리엄 마셜과 마주쳤다는 것이다. 리처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경무장을 했으니 자신을 죽이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며 윌리엄에게 목숨을 구명해달라 요청했고, 윌리엄은 리처드 대신 그의 말을 랜스로 찔렀다는 이야기다.[6]

이후 윌리엄은 리처드의 말을 찌른 것을 사과하지 않았지만, 리처드 1세는 그에게 헨리 2세가 약속한 약혼녀 이사벨을 내어주었다.[7] 이후 당연히 둘 간의 정식 대결은 이루어 지지 않았고, 리처드 1세는 이후 이단의 땅으로 건너가 사자심왕으로 거듭났다.

이 사건이 나온 《윌리엄 마셜 연대기》는 동양으로 치면 행장 같은 것이라 믿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는데, 《윌리엄 마셜 연대기》의 대체적인 신뢰성은 교차검증과 여타 역사학적 방법론을 통해 전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흔히 알려진 내용의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에 있는데, 애초에 연대기 자체에서도 이 사건을 서술하는 목적은 "윌리엄 마셜이 이렇게 기사도 있는 기사였고 영명하신 리처드 1세께선 그를 인정해 예전의 대립을 괘념치 않고 등용하셨다"라는 것이지 "윌리엄 마셜이 리처드 1세도 이긴 적 있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히 《윌리엄 마셜 연대기》의 본문에서도 윌리엄이 리처드와 결투 끝에 리처드를 살려보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리처드가 무장하지 않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마셜이 리처드에게 돌진하자 리처드가 '완전한 무구를 갖추지 못한 나를 죽이는 것은 사악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하여, 윌리엄이 그 말이 옳음을 깨닫고 ‘그럼 악마가 그대를 대신 죽이게 하리’ 하며 그의 말을 찌른 것으로 되어있다. 연대기 내에서 이 에피소드의 요점은 비무장자 상대로 퍽치기한 거 자랑하는 게 아니라 "급박한 상황에서도 윌리엄 마셜이 기사도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헨리 2세가 끝내 패배, 화병으로 사망한 후 시신을 지키는 마셜과 동료들을 찾아 온 리처드가 '그대는 나를 거의 죽일 뻔했고 내가 피하지 않았으면 진짜로 날 죽였을 것'이라고 떠본 것에 대해[8] 마셜은 '저는 폐하를 죽이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창을 제 뜻대로 움직일 능력이 있고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말을 찌른 것처럼 폐하의 몸통을 찔렀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리처드는 흔쾌하게 '그대에게 악의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단순히 '사과를 안 했음에도 리처드가 용서한 것'이 아니라 '마셜은 왕의 심기를 거스를 것을 각오하고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또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킨 훌륭한 기사였고, 리처드 1세는 아부보다 그 양심과 기사도를 중히 여긴 훌륭한 군주였다'라는 게 연대기 저자가 전달하려 하는 메시지이다.

이사벨과의 결혼 허가도 비슷한 내용이다. 부유한 상속녀 이사벨의 후견인은 잉글랜드 왕실이었다. 리처드가 마셜을 인정하자 마셜의 동료 모리스가 '헨리 2세께서 이사벨을 마셜에게 아내로 주셨다'고 말하는데, 리처드는 '아니다'라고 답한다. '선왕은 그러겠다고 약속만 하셨을 뿐, 지금 이사벨과 마셜의 결혼을 허락하는 것은 나'라는 것이다. 이 또한 단순히 이사벨을 내어준 것이 아니라, '리처드 1세께서 헨리 2세에게 끝까지 충성한 기사들을 높이 사 진실로 자신의 신하들로 받아들이셨다'는 에피소드다.

요약하면 (에피소드 자체의 신뢰성이 대체로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마셜을 높이기 위해 저술된 것은 맞지만[9] 그 높임의 방식이 '리처드도 이긴 적 있는 강력한 기사!!'라는 1차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4. 봉토

윌리엄 마샬 1세는 웨일스 남동부의 펨브루크셔를 중심으로 한 광대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마샬 가문은 웨일스의 군주로 불릴 만큼 광대한 토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처음 윌리엄은 헨리 2세로부터 펨브루크 백작 작위와 웨일스 남부의 광대한 영토를 받았다. 이는 헨리 2세를 위해 펼친 그의 무훈에 대한 보상이었으며, 특히 펨브루크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을 다스리는 자는 웨일스 남부의 실질적인 지배자와도 같았다.

이후 리처드 1세는 윌리엄에게 글로스터셔 햄프셔 등의 영지를 추가로 하사했다. 이는 리처드의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윌리엄이 섭정으로서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마샬 가문이 명실상부한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클레어 가문과의 혼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윌리엄은 클레어 가문의 상속녀인 이사벨 드 클레어와 결혼함으로써 클레어 가문이 잉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에 보유한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특히 웨일스 남동부의 스트리굴 로더 로즈와 아일랜드의 레인스터 지방에 있는 영지는 마샬 가문의 세력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마샬 가문의 영토는 당시 잉글랜드 전체 영토의 약 5~10%에 이를 정도로 방대해졌다.

5. 마셜의 후손


그러나 마셜의 딸들은 모두 건재했고, 명문가와의 혼인을 통해 마셜의 혈통은 이어질 수 있었다.

6. 대중매체에서

7. 여담


[1] 충성의 서약을 자신을 사로잡은 이에게 할 수 있었지만 당시 분위기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2] 헨리 2세와 공동 국왕이었다. [3] 런던탑은 정복왕 윌리엄이 지은 정식 왕궁이었다. 다만 신분이 높은 정치범을 수용할 경우가 종종 있었을 뿐 헨리 7세와 왕후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출산까지 했다. [4] 안 그래도 궤양으로 위중한 상태였는데, 막내아들 존의 반란이 결정적이었다. 1189년 리처드와 전쟁을 벌이게 된 것도 리처드에게 상속된 아키텐을 존에게 양도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아키텐은 원래 그의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것이었는데, 그녀는 아들 리처드 1세를 매우 흠모 숭배했고, 어렸을 때부터 리처드를 아키텐의 통치자로 키워 아키텐을 상속시키려 했다. 이 때문에 장남인 젊은 헨리와도 반목이 있었으나, 당시 아키텐 지방은 포도주로 막대한 세수가 발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헨리는 존을 위해 아키텐을 그에게 상속시켜 왕이 될 리처드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헨리의 자식들은 모두 헨리에게 반복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리처드는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편에 서서 어머니를 도와 반란을 일삼았다. 그렇기에 유일하게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막내아들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고, 리처드에게 힘이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존에게 아키텐을 물려주려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리처드가 반란을 일으켰고, 존이 리처드에게 가담하면서 헨리의 궤양과 여러 치명적인 질환이 악화되었다. [5] 아서를 죽여 필리프 2세에게 침공 명분을 준 데다가 그 과정에서 황당하게도 사로잡은 귀족들을 지하 감옥에 대량으로 굶겨 죽였다. 당시의 귀족은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는데 존이 의도적으로 그들을 굶겨 죽인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영토 내 영국 봉신들이 전부 필리프 2세 편으로 붙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6] 출처: 외국 인터넷 기사 William Marshal - The Flower of Chivary [7] 말을 박탈당한다거나 하는 것은 당시 기사에게 있어선 커다란 손실이었다. 경제력이 떨어지는 기사라면 자신의 신분자체에 변동이 생길 정도의 일이다. 경제력에 문제가 없더라도 대단한 망신으로 두고두고 명예에 누가 될 수 있다. [8] 맞장구 친다면 리처드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지만, 동시에 마셜은 리처드를 죽이려한 확신범이자 기사도 없는 쓰레기가 된다. 거짓말이란 죄를 짓는 건 물론이다. [9] 전근대 문헌 중 그렇지 않은 것이 드물다. 높이는 것과 낮추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 [10] 마샬이 헨리 3세를 극적으로 구한 일을 생각해 보면, 이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 [11] 모티머 가문과 데스펜서 가문이 후에 왕들과 내란을 불러 일으켰던 걸 보면, 복수는 웃기게도 후손들이 하긴했다. 특히 로저 모티머(Roger Mortimer)는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고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으며, 데스펜서 가문과의 갈등 끝에 데스펜서 부자가 처형당하게 만들었다. 또한, 모티머 자신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처형되었다. 마샬의 후손들이 끝내 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해, 프랑스가 절대왕정을 구축한 것과 달리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12] 인크레더블 헐크 썬더볼트 로스 장군 역을 맡은 그 배우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