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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6:58:55

이정훈(1963)

이정훈(1963년생)에서 넘어옴
이정훈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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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OF 상원고

OF 상원고

OF 광주일고

SS 경북고

2B 경북고

3B 배명고

RHP 경북고

LHP 세광고

1B 선린상고

C 경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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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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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2~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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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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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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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ba628> 1983 1984 1985 1986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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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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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타율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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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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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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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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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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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
롯데 자이언츠 / 0.364
이대호
롯데 자이언츠 / 0.357
<rowcolor=#fff> 2012 2013 2014 201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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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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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2017 2018 2019 20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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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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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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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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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2대 3대 4대
정연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
백기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
감독 대행
정구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
이희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5~1996)
김충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
<rowcolor=#fff> 5대 6대 7대 8대 9대
김정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
유승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0)
박용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2003)
차동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유종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
<rowcolor=#fff> 10대 11대 12대 13대 14대
손상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5)
백기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
최동원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2008)
우경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9)
정영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2012)
<rowcolor=#fff> 15대 16대 17대 18대
이정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3~2015)
전대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6)
최계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7~2019)
최원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0)
감독 대행
전상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0)
<rowcolor=#fff> 19대 20대
21대
최원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2023)
김성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이대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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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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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2대 3대 4대
강대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1984)
배수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
이충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6)
이선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
감독 대행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
5대 6대 7대 8대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
감독 대행
이선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1990)
윤동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1991)
정연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1994)
손상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5~1996)
9대 10대 11대 12대 13대
김윤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
손상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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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손상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2003)
송재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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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15대 16대 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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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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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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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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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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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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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이정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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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44번
박찬
(1985.7.26.~1986)
<colbgcolor=#000><colcolor=#fff> 이정훈
(1987)
송일섭
(1988.6.30.~1991)
빙그레 / 한화 이글스 등번호 10번
김정태
(1986~1987)
이정훈
(1988~1994)
김승권
(1995~2001.4.2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번
김용국
(1985~1993)
이정훈
(1995)
김재걸
(1996~1998)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0번
결번 이정훈
(1996)
황성관
(1997~2001)
OB 베어스 등번호 55번
장건희
(1996)
이정훈
(1997)
이혜천
(1998)
한화 이글스 등번호 72번
임광규
(1998)
이정훈
(1999~2005)
조경택
(2006~2014)
LG 트윈스 등번호 89번
결번 이정훈
(2006~2008)
박정훈
(2009~2011)
한화 이글스 등번호 77번
한용덕
(2006~2012)
이정훈
(2013~2014)
김광수
(2015~2017)
한화 이글스 등번호 70번
김응용
(2013~2014)
이정훈
(2015~2016)
김성래
(2017~2020)
두산 베어스 등번호 76번
장원진
(2011~2020)
이정훈
(2021~2024)
결번
}}} ||
파일:23이정훈2군감독.png
이정훈
李政勳 | Lee Jeong-Hun
출생 1963년 8월 28일 ([age(1963-08-28)]세)
경상북도 대구시 중구
(現 대구광역시 중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삼덕초 - 경상중 - 대구상고[1] - 동아대
신체 169cm, 80kg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87년 2차 1라운드 (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 한화 이글스 (1987~1994)
삼성 라이온즈 (1995~1996)
OB 베어스 (1997)
지도자 시애틀 매리너스 연수코치 (1998)
한화 이글스 1군 타격보조코치 (1999)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00~2001)[2]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01~2003)[3]
한화 이글스 1군 주루코치 (2004~2005)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2006)[4]
LG 트윈스 2군 타격코치 (2006)[5]
LG 트윈스 2군 수비·주루코치 (2007~2008)
천안 북일고등학교 감독 (2009~2012)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2013~2015)
한화 이글스 육성군 타격코치 (2016)
한일장신대학교 코치 (2020)
여주대학교 타격 인스트럭터 (2021)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21)[6]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21)[7]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22)[8]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22)[9]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23~2024)
프런트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 팀장 (2017~2018)
한화 이글스 기술자문위원 (2019)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2014 시즌 이후3.2. 두산 베어스
4. 스카우트 팀장 경력5. 평가6. 연도별 성적7. 여담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빙그레 이글스, 삼성 라이온즈, OB 베어스 소속 외야수이자 前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선수 시절 이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까지 그 유명했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심 멤버이자 당대를 대표했던 교타자이다. 이글스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의 신인왕[10]이며 특유의 악바리 근성으로 유명했다. 선수시절 준우승만 4번 경험했지만 팀의 첫 우승 당시 코치로서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2. 선수 경력

2.1. 빙그레 이글스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8, 1990 ~ 1992)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3731364533_266f27ec24_o.jpg

대구광역시 출신이긴 했으나 당시에는 삼성 라이온즈 1987년 1차 지명으로 내야수 강기웅, 류중일과 좌완투수 장태수를 연달아 지명하는 바람에 2차 지명으로 밀리면서 빙그레 이글스의 2차 1순위(전체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1][12][13] 이때 나를 뽑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고 말하면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여 같은 대구 출신인 이강돈, 강정길[14][15][16]과 함께 빙그레의 " 다이너마이트 타선"에서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당시 삼성의 전력으로서는 타자보다 투수가 더 아쉬운 상황이었다. 특히 외야 요원은 장효조- 허규옥- 장태수로 이어지는 날고 긴다는 쟁쟁한 멤버들로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이정훈이 삼성에 입단했다면 신인왕은 고사하고 주전 자리를 제대로 챙겼을지 미지수. 실제로 이정훈이 신인이던 1987년은 삼성이 KBO 리그에서 전무한 팀 타율 3할을 기록하며[17]타자 전원이 거의 3할을 치던 막강한 타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투수 쪽은 김일융이 트레이드로 일본에 복귀하는 통에 좌완 투수의 공백을 메워야 할 상황. 게다가 그 전해 해태 타이거즈와의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투수력의 격차를 실감하면서 패했기 때문에, 좌완투수 장태수를 지명한 것은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단지 결과가 기대했던 대로 안 나온 것 뿐. 결과적으로는 이정훈의 근성을 과소평가한 삼성의 오판으로 귀결되었다.

1987년 22게임 연속 안타 기록을 수립하고 타율 0.335(3위), 안타 124개(1위)를 기록하면서 신인왕을 수상하였으며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 그리고 근성 있는 플레이 스타일로 악바리란 별명과 더불어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더군다나 1991년 17홈런, 1992년 25홈런을 쳐봤을 정도로 장타력도 어느 정도 받쳐주던 편이었다. 1992년에는 여기에 21도루까지 추가해 20-20을 찍기도 했다.

1987년 데뷔부터 1992년까지 3할을 넘지 못한건 1990년(.291) 단 한 해 뿐일 정도로 꾸준했으며, 1991(.348), 1992(.360) 2년 연속으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다만 1991년은 김영덕 감독의 타율관리를 빙자한 타이틀 만들어주기[18] 장효조(.347)와 같은 팀 장종훈(.345)을 근소한 차이로 제치고 얻은 타이틀이라 본의 아니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19] 이듬해인 1992 시즌에 타율 .360으로 다시 타격왕을 차지해 1년 전의 논란을 자신의 실력으로 떨쳐 버렸다. 이정훈 이후로 2010~2011년에 이대호가 타격왕 2연패를 달성하기까지 20년동안 타격왕을 2연속으로 차지한 타자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수 시절에 우승 경력은 없는데, 빙그레에서 4번 준우승으로 1999년까지 콩라인이 되었던 선수. 삼성에 있었을 때도 팀이 부진했고... 다만 1999년 한화 코치로 있으면서 우승을 맛보았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1989년을 제외하고 5시즌 동안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1991년 개최된 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6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맹타를 휘둘러 한국프로야구 타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타율(.391)을 기록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20] 이처럼 한때 국내 야구계를 대표하는 왼손 타자 중 하나였다.

선수 시절의 전반 6시즌과 이후 5시즌의 기록이 같은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딴판인데, 이는 온갖 잔부상에도 특유의 근성으로 출전을 강행하는 바람에 노쇠화가 급격히 찾아왔기 때문. 1993년에 손목 부상을 당했는데, 문제는 이 때 부터였다. 손목 통증 때문에 속칭 "대포 주사"로 불리는 데포메드롤을 세 번이나 맞고 나섰으나, 그 부작용은 은퇴할 때까지 고스란히 그의 선수 생명을 갉아먹었다. '야구가 좋아'라는 사이트에서 연재한 최훈의 레전드 카툰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로는 후배를 데리고 무리하게 연습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는데[21], 그 상황에서도 계속 타격 연습을 할 정도로 몸을 무리하다가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렸다고 한다. 일본이나 미국의 의료 수준으로는 충분히 수술 후 재활하면 완치가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오로지 근성만으로 극복하려는 당시 국내 풍토로 수술 시기를 놓쳐 버린 것. 본인도 이런 수술 방법이 있는지 은퇴 후에 알았다고 한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교타자가 이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사라졌다.

170cm의 작은 체격에 비해서 단단한 체형과 파워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체격의 한계 탓에 노쇠화가 빠르게 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사실 170cm도 반올림으로 올린거고 실제 키는 168cm라는 얘기도 있다. 삼성에서 지명하지 않은 건 물론 타선이 충분히 좋았던 덕도 있지만 이정훈의 작은 체격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빙그레 시절 1990년 7월 31일 무등 야구장에서 한 관중이 난입해서 외야 수비를 보던 이정훈에게 시비를 걸었던 적이 있었는데, MBC의 재연프로 타임머신에도 나온 내용이다.(132회, 제목은 그라운드 위의 무법자. 2004년 7월 25일 방영) 그런데 일반인이 운동선수를 상대로 맞시비를 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취기도 있었고 키도 워낙 작았던 이정훈이 만만해보였는지도 모른다. 뭐 그냥 웃고 넘어간 해프닝 수준이지만.[22]

1993 시즌부터 성적이 급락했으며, 1994년에 김영덕의 후임으로 부임한 강병철 감독은 이정훈을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2.2. 삼성 라이온즈

결국, 1994 시즌 후 장정순과 묶여 정영규 정경훈을 상대로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 트레이드되었는데, 1995년 시즌 후 부임한 백인천 감독은 강병철 감독과 마찬가지로 이정훈, 강기웅, 이종두 등의 노장 선수들을 싫어하는 편이었다.[23]

고향 팀인 삼성에 있었을 적에는 7번을 달은 적이 있으며(1995년 한 시즌만), 나중에 0번으로 바꿨을 때에는 최저 타율인 0.213를 기록했다.

2.3. OB 베어스

이 때문에 1996 시즌 후 강영수+박현영과 1:2 트레이드로 OB 베어스로 이적,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방출당하며 은퇴했다.[24]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97년 OB에서 뛸 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친정 팀 한화 정민철 노히트 노런 경기에 출장하여 대기록의 희생양 중 한 명이 된 적도 있다.[25][26]

선동열을 상대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특히 198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시리즈를 통틀어 선동열을 상대로 9타수 5안타라는 흠좀무한 기록을 찍기도 했다. 선동열 역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는 타자로 이정훈을 꼽았었다. 아무리 유인구를 던져도 자신감 있게 속지 않고 제 스윙을 가져간다나.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에는 친정 팀인 한화 이글스가 그에게 지도자 연수를 지원해 주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에서 1년간 연수를 받았다.[27] 귀국한 뒤 1999년부터 친정 팀 한화 이글스의 타격코치로 선임되어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한화 타격코치 시절이던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이 우승함에 따라 선수 시절 껴보지 못한 우승반지를 처음으로 껴보게 되었다. 이후 2003년까지 1군 타격코치를 맡았고, 2004년부터 2005년까지는 작전 및 주루코치를 맡았다.

2006 시즌을 앞두고 한화 구단은 그를 계속 주루코치로 기용하려고 했으나, 이정훈 본인은 다시 타격코치로 선수들을 가르치고 싶어했고, 결국 이로 인해 친정팀 한화를 떠나 LG 트윈스의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겼다.[28] 그러나 LG가 2006 시즌 초반부터 하위권으로 떨어짐에 따라 이순철 감독과 함께 쌍으로 까이는 등 LG 타격코치 잔혹사에 이름을 올렸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데려온 이순철 감독이 6월 초 자진사퇴하면서 입지가 애매해졌다. 2006 시즌 후 김재박 감독이 선임됨과 동시에 김용달 타격코치가 영입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2군 작전 및 주루코치로 좌천당했고, 2008 시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나오면서 LG와 3시즌에 걸친 인연이 정리되었다.

LG 트윈스를 떠난 후 2009년부터는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되었다. 북일고등학교에서는 선수들에게 근성을 강조하며 강훈련을 지시했으며, 한화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2009년 제 63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2009년 제39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대회 때는 아마추어 지도자 자격증 신청 기한을 놓쳐 관중석에서 작전을 지시했지만 두 번 다 준우승까지 나아갔고[29], 벤치에서 제대로 지도한 봉황대기에선 우승했다.

2011년에는 덕수고등학교에서 북일고로 전학을 왔던 내야수 길민세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기도 했다.[30]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었던 북일고를 강팀의 반열에 다시금 올려놓으며 고교야구의 정점에 선 지도자로서 명성을 쌓았지만, 한화그룹의 전폭적인 지원 덕이지 이정훈 감독의 순수한 능력이 아니라며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31] 하지만 이정훈 본인의 악바리 근성에 힘입은 강훈련 등도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절대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좋은 자원을 보유하고도 그에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팀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2012년 8월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면서 김성근과 함께 한화의 차기 감독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특히 한화와 연줄이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더 높게 점쳐졌으며, 29일 김성근 감독이 고양 원더스와의 2년 재계약을 하면서 최유력 후보가 되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의 감독으로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고 여러 국가의 대표팀과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8월 31일의 첫 상대팀은 베네수엘라. 특히 한화의 차기 사령탑으로 자주 거론된 인물이기 때문에 한화 팬들을 비롯하여 여러 야구팬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 결과만 놓고 본다면 2-1로 이기긴 했다. 다만 서로가 팽팽한 투수전을 벌인 것이 아니라 12안타에 4사구 9개를 얻어냈음에도 2점밖에 얻어내지 못할 정도로 견제사, 주루사, 작전미스가 많이 발생했다. 윤형배가 3과 ⅔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막아내지 않았다면 질 수도 있었던 상황. 작전 미스뿐만 아니라 덕아웃에서의 표정변화와 리액션 또한 심했기 때문에 뭇 한화 팬들은 ' 한대화+ 이만수=이정훈'이 아닌가 걱정하였다.

9월 6일 한일전이 있기 전 일본 청대에서 압축 배트를 사용한다는 의혹을 그가 제기했으나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고, 이후 2:4로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야구 팬들에게 입만 살았다는 비난을 당해야 했다.

9월 14일 언론에 "한화 감독을 맡고 싶다"라고 의사표명을 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는데 이 기사에서 그가 한 "선수들이 감독 눈치를 보면서 경기를 하면 안 된다. 감독도 삼진 당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선수를 노려봐서도 안 된다. 그런 팀은 좋은 경기를 할 수 없다"는 발언은 청소년야구선수권에서 보여 준 행동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에 반대 여론이 한층 커지게 되었다.

결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을 5위로 마감함으로써 한화 감독 선임에서 멀어졌다는 풍문이 돌았고, 실제 한화의 새 감독은 김응용으로 결정되었으며, 이정훈은 2군 감독으로 내정되어 북일고등학교 감독직을 이강돈에게 넘겼다. 선수 육성에는 일가견이 있는 만큼 한화 이글스 2군에서 지도자 경험을 쌓은 뒤, 김응용이 물러날 때가 되면 차기 감독을 맡기려는 의사가 있는 듯하다. 2군 선수들도 다 죽었다

2013 시즌 팀은 비록 3할대의 승률을 기록하며 1군과 마찬가지로 퓨처스 11개 구단 중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조정원, 박상규, 장운호, 엄태용 등 2군에서 육성되던 선수들이 1군에서 좋은 모습을 종종 보여 주었고, 은퇴 기로에 있던 추승우, 이양기 등이 1군의 활력소 역할을 한 것으로 볼 때, 2군 감독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3.1. 2014 시즌 이후

2014년에 들어 한화 이글스 2군이 파죽의 10연승을 기록하는 등 퓨처스의 절대 강자 상무에 이어 남부리그 2위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성장속도가 더디었던 이학준을 비롯한 조정원, 강경학, 김기현, 조영우 등 신진급 선수들이 1군에 올라와서 짧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고 있어 한화 이글스 갤러리 등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한용덕과 함께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팬들도 생겨나고 있다.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이 대활약 후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2군에서 너무 힘들어서 1군에서 죽어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2군에서 신인들을 잘 조련해 보내는 것만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고도 훈련과 거기에 얻어지는 땀을 매우 중시하는 일명 식초 야구를 구사하는 이정훈. 김일배, 김성근의 계보를 이은 식초 야구 1세대라고 평가하는 팬도 있다.

한 네티즌이 로 패러디 했던 서산 식초 부대 훈련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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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감독과 한화이글스 2군 선수들의 꿈을 위한 도전

2014 시즌이 끝난 후 한화 프런트에 의해 한용덕과 함께 차기 감독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전부터 '칰무원' 문제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고 있고,[32][33] 반대로 이정훈이나 한용덕을 지지하는 의견도 만만찮아서 한화 팬덤이 두쪽날 것 같을 정도로 반응이 엇갈리고 있었으나, 김성근 감독을 영입하면서 모조리 정리되었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에는 1군 김성근, 2군 이정훈이라는 피할 곳 없는 지옥훈련 헬게이트가 열렸다.

2014 시즌 후 U-21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팀에서는 강경학, 엄태용, 장운호와 함께 참가했다. 그러나 이 때 투수 혹사를 시키면서 던질 투수가 없었다는 변명을 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자세한 것은 후술.

그러나 2015 시즌 김성근 감독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란 당초의 기대와 달리 김성근 감독의 지나친 간섭과[34] 이정훈 감독 특유의 혹사성향이 겹쳐 2군 중부리그 4팀 중 4위를 기록하였고 타 팀과 비교하면 선수양성의 성과도 눈에 띄지 않았다.

2016년부터 육성군 타격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35] 새 한화 2군 감독은 전대영.

2019년 2월말 엠스플과 스카우트 시절에 대해 인터뷰하는 도중 '야구인생에서 참 많은 명장들과 함께 했다'고 언급하며 김영덕, 백인천, 김응용 등을 언급했으나 김성근의 이름은 실리지 않았고, 팬들은 '그 감독 때문에 노수광 뺏겼다'며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임과 동시에 명장에 이름이 없는 걸로 보아 쌓인 게 많은 게 아닐까 하는 반응도 보였다.

2017년부터는 스카우트와 기술 자문역 역할을 맡았고 2019 시즌 종료 후 정들었던 친정팀 한화 이글스를 떠나게 된다. 이후 모교인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공모에 지원했으나 후배 김승관에 밀려 탈락했고 2020년 한일장신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들어갔다.

3.2. 두산 베어스

2021년 초, 여주대학교 야구부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한 뒤, 3월 3일에는 현역 말년 시절을 보냈던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영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보직은 2군 타격코치로 이천에서 타자 유망주들을 지도하게 됐다.

2021년 8월 22일, 이도형 코치와 자리를 맞바꿔 1군 타격코치로 올라왔다. 1군 타격코치를 맡은 뒤 거짓말 같이 팀 타격이 대폭발했고, 팀은 근 1주일 만에 최근 15경기 기준 11승 3무 1패를 기록하며 7위에서 4위로 수직상승했다. 선수들이 인터뷰를 통해 계속 이정훈 코치에게 감사를 표하고 파이팅을 불어넣는 식의 코칭 덕분에 두산 팬들에게 평가가 좋은 편이다. 당장 베어스포티비에 올라오는 경기 중 직캠에서 이정훈 코치가 경기 중에도 끊임없이 타자들을 지도하는 모습이 많이 포착된 바 있다. 참고로 이도형 코치는 그런 게 거의 없었다.

2022 시즌에는 다시 이도형 코치와 자리를 맞바꾸면서 이천으로 돌아가게 됐다. 팬들 사이에서는 ‘왜 이정훈 코치가 계속 1군에 있지 않고 다시 이도형 코치가 올라왔는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다만 이정훈 코치 본인이 한 인터뷰에서 2군에 남아 더욱 육성에 집중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 의견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두산의 고구마같은 타격 꼬라지로인해 모든 두산팬들이 1군 콜업을 매우 희망하고있다.

계속 되는 타자들의 부진으로 인해 마침내 다시 복귀하였다. #

이정훈 코치가 복귀하자마자 팀은 거짓말 같이 7월 첫째주 잠실 키움전에서 위닝시리즈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미 망가진 타선은 침묵-폭발-침묵-폭발을 반복하며 퐁당퐁당을 하고 있는 상황.근데 대부분 팬들은 이도형 직무유기 수준으로 지금의 팀타선 꼬라지를 만든 주 원흉이라서 깠으면 이도형을 깠지 이정훈을 까는 팬들은 많진않다. 오히려 두산 타자들이 미미하게나마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며 순위가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신기루였는지 8월이 되며 타자들이 집단 슬럼프에 빠지면서 팀타율 최하위까지 추락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지난해와 달리 이정훈의 적극적인 승부가 먹히지 않으며 고전하고 있는 상황. 이도형의 트롤링으로 인한 후유증이 완치되지 않은 모양이다. 팀이 9위까지 추락, 작년의 평가도 많이 떨어져 이정훈에 대한 비판 여론도 올라오는 중.

게다가 시즌 후 고토 코지 코치가 다시 돌아오면서 두산에 잔류한다는 보장이 없어졌다. 다만 선수단 내의 평가가 좋아 다른 보직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

2022년 10월 20일, 2023 시즌 2군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신임 감독인 이승엽과는 고향팀인 삼성 시절 2년간 선수로 같이 뛴 적이 있으며, 신인 체력 테스트에서도 직접 선수들을 찾아가 참관하는 등 적극적인 육성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24 시즌, 서서히 비판여론이 올라오고 있다. 사유는 야수 육성 실적의 부진. 다른 팀들의 경우에는 2000년대생의 젊고 유망한 야수들이 1군에 모습을 보이며 서서히 주전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두산의 경우에는 최근 몇 년 간 주전급으로 올라섰다고 볼 수 있는 선수가 98년생의 이유찬 정도밖에 없고, 큰 기대를 받고 입단했던 야수 상위지명자인 김대한, 장규빈 등은 전혀 맥을 못추고 있다. 또한 멀리 갈 것도 없이 투수 파트에서는 지속적으로 양질의 신예 선수들을 육성하여 이 선수들이 1군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36][37] 두산의 2군 야수진이 멸망하고[38] 세대교체가 전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이정훈 코치 등 2군 코치진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2024년 10월 31일, 두산이 이정훈 감독과 재계약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며 결별하게 되었다.

4. 스카우트 팀장 경력

2016 시즌 후 스카우트 팀장으로 이동했다. 파비오 카스티요, 에릭 서캠프와 재계약하지 않아 2명의 외인 투수를 구해야 하는 상황. 한동안 소식이 없어 한화팬들을 속타게 만들었다가 1월 10일. 박종훈 단장을 도와 현역 메이저리거 알렉시 오간도를 총액 180만 달러에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라고 말하며 하루아침에 한화 팬들의 찬양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한화 통산 3번째 10승 투수가 되어 규정이닝은 미달이었지만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39]

2018 KBO 신인드래프트에서 픽을 전부 고졸로 도배했다. 이승관, 박주홍, 정은원 등 당초 예상보다 과감한 오버픽을 많이 했는데 본인은 대단히 만족했는지 드래프트가 끝난 후 싱글벙글하더라는 얘기가 있다. 이 중 정은원이 일찌감치 포텐을 보여주며 스카우트로서 이정훈의 평가가 올라갔다. 그러나 이승관과 박주홍이 폭망하고 2라운드에 정은원을 뽑으려던 걸 박주홍을 위해 한턴 걸러서 KIA에 뺏길 뻔했다는 게 알려지며 평가가 떨어지는 중.

이후 이상군과 자리를 맞바꾸며 기술자문으로 선임되었다. 한화의 팜 지역인 충청지역 중·고교 야구부를 순회하면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프런트 쪽에 유망주 정보를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5. 평가

간단히 적자면 선수 보는 눈이 좋다고 평가 받으나 동시에 혹사 논란이 있다.

한화 이글스와 북일고에게는 명지도자. 그러나 연령대 대표팀에서는 혹사, 부진한 경기력 등을 보여주는 최악의 감독.

일단 타격코치로서의 평가는 좋다고 할 수 없다. 한화 이글스 코치 시절에도 1군 타격코치로 시작했다가 시즌 중 분위기 쇄신 명목으로 자행되는 코칭스태프 보직 변경 조치에 따라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2군에서 시즌을 마치는 경우가 잦았다. 이정훈이 1군 타격코치를 맡던 시절 한화는 2002~2003년 2년 연속으로 팀 타율 7위를 기록하는 등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비해 전반적인 팀 타격 스탯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곃국 2004년부터 작전 및 주루코치로 아예 보직이 변경됐다. 2005년 김인식 감독이 부임하면서 '이정훈 코치를 원래 보직으로 되돌리겠다'는 발언을 했지만 정작 1군 메인 타격코치는 김인식 사단의 주축 인물 중 하나인 우경하가 맡았고, 결국 이정훈은 1군 주루코치와 타격보조코치를 겸직해야 했다. 결국 이름뿐인 겸직이 되자 타격코치 보직을 맡고 싶었던 이정훈은 한화를 떠나 2006년부터 LG 트윈스의 1군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LG 타격코치 시절에도 부진한 팀 성적과 더불어 평가를 뒤집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데려온 이순철 감독이 물러나면서 이정훈도 2군 코치로 강등, 이후 LG 2군 코치로 있다가 조용히 팀을 떠났다. LG 코치직을 그만둔 후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한동안 프로 구단에서 1군 타격코치로 부름받지 못한 걸 생각하면, 현장에서도 타격코치로서의 평가가 결코 좋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40]

선수 시절의 불같은 성격은 지도자가 된 후에도 여전하여 몇 가지 에피소드를 남긴 바 있다.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서의 팬들의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이것은 한화의 암울한 현실 때문에 선수들에 대한 질타가 큰 여론에 기반한 것이고, 남부리그 2위의 성적만으로는 아직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다만, 김성근 감독은 이정훈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마냥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는 게 고양 원더스에 있던 송주호를 추천해 한화로 신고선수로 입단시킨 게 이정훈이다.

그러나 U-21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쌍팔년도식 감독으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대만전에서 임기준에게 6⅔이닝 동안 무려 133구를 던지게 해놓고 낼 투수가 없다고 핑계를 댄적도 있으며, 경기중에 작전 실패를 하자 덕아웃에서 성질을 부리며 실패한 선수를 선수들 보는 앞에서 다그치는 등 유망주들을 이끌고 출전한 대표팀 감독으로써의 모습이 아닌 시대에 뒤쳐진 감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수 보는 눈이 좋다고 평가받은 일화는 U-21 대표팀 감독 시절에도 있었다. 당시 상무에서 군 복무 중이던 구자욱의 타격 재능을 알아보고 전역하면 1군에 자리잡아 대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며 좋게 평가했다. 실제로 대회 종료 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복귀한 뒤 유망주였던 구자욱을 트레이드로 영입해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안했지만, 삼성이 일찌감치 트레이드 불가 선수로 묶어둔 탓에 실패했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 역시 해당 보고를 전달받자 삼성이 절대 내줄 리 없으니 그냥 포기하라고 했을 정도.

스카우트 팀장으로서의 평가는 아주 좋은 편이다. 정은원을 예상보다 빠른 3라운드에 지명하자 정은원을 노리던 타 팀 스카우트들이 탄식을 내뱉었다는 일화는 유명. 정은원은 데뷔시즌에 바로 1군에 자리잡으며 무려 정근우를 1루로 밀어낼 정도로 좋은 활약을 보였다.

2018, 2019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보여진 이정훈 체제 스카우트팀의 성향은 다음과 같다.
더불어 김태균이 신인 시절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에서 좌절해 있을 때 극복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줬음이 알려지면서 지도자로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엠스플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면 드래프트는 시대적 요구, 개인보단 전체를 생각해야'라는 입장을 밝힌 것 때문에 꽤나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후 전력 불균형 및 수도권으로의 선수 유출 등으로 인해 성시헌, 박수현이 방출되는 등 지방구단 1차+상위 지명자들이 속속 방출, 육성선수로 전환되자 전면 드래프트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나왔고 그의 발언은 재평가되었다.

6.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7 빙그레- 한화 100 370 .335
(3위)
124
(1위)
13 7
(2위)
4 34 56 20 45 .441 .405
(5위)
1988 96 366 .309 113 20
(5위)
3 4 34 69
(3위)
18 41 .413 .377
1989 51 198 .323 64 20 2 1 23 30 14 17 .460 .372
1990 114 402 .291 117 20 3 7 52 71
(4위)
22
(5위)
47 .408 .360
1991 111 379 .348
(1위)
132
(4위)
21 12
(1위)
17 55 81
(4위)
18 47 .602
(2위)
.417
(3위)
1992 111 369 .360
(1위)
133 17 2 25
(4위)
68 89 21 56 .621
(3위)
.435
(4위)
1993 41 111 .225 25 5 1 2 12 10 3 15 .342 .313
1994 67 239 .247 59 7 2 2 22 35 13 27 .318 .321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5 삼성 74 236 .250 59 9 0 1 10 33 12 18 .301 .302
1996 61 136 .213 29 4 2 1 10 16 3 20 .294 .314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OB 92 266 .237 63 16 3 2 33 24 7 23 .342 .296
KBO 통산
(11시즌)
918 3072 .299 918 152 37 66 353 515 151 356 .437 .368

7. 여담

8. 관련 문서



[1] 55회 졸업생이다. [2] ~6월 9일 [3] 6월 10일~ [4] ~6얼 6일 [5] 6월 7일~ [6] ~8월 21일 [7] 8월 22일~ [8] ~7월 4일 [9] 7월 5일~ [10] 이후 김태균 류현진, 문동주가 이글스 소속 신인왕이 되었다. [11] 그 해 2차 지명 때 지난 시즌 최하위와 6위를 기록한 빙그레와 청보 핀토스가 번갈아가며 2차 1순위 지명권을 2장씩 받아 전체 1~4순위를 지명하게 되었다. 투수난으로 속을 끓이던 빙그레는 1순위로 군산상고-동국대 출신의 투수 이동석을 지명했고 청보가 2순위로 이상훈(1971년생 야생마 이상훈과는 동명이인)을 지명하자 그 다음으로 이정훈을 지명했다. [12] 그런데 이것은 배성서 감독의 허허실실 작전으로 이룬 쾌거였다. 2차 지명 직전에 청보의 박정삼 단장이 배성서 빙그레 감독과 노진호 빙그레 단장에게 "누굴 뽑을 거냐" 라고 묻자 배성서는 대번에 이동석이라고 얘기했고 그 다음에 노진호 단장이 외야수 정상진이라고 하자 배성서는 "투수가 부족한 판에 투수를 더 뽑아야지 야수는 필요없다" 라고 펄펄 뛰며 이정훈에겐 관심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13] 이에 낚인 박정삼 단장은 '그럼 우리도 2순위는 투수를 뽑은 뒤에 이정훈을 4순위로 찍어야지' 라고 안심했는데, 빙그레가 전체 3순위로 이정훈을 낼름 낚아채자 청보는 완전 닭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청보의 강태정 감독은 책상을 발로 차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후였다. [14] 강정길 이강돈은 본래 삼성의 지명을 받았으나 지명권을 양도하여 빙그레에 입단한 케이스이다. 이강돈은 이정훈의 대구상고 2년 선배기도 했다. [15] 한편, 빙그레 초창기 시절에는 유독 대구 출신 선수들이 많았다. 삼성에 잉여 전력이 다른 팀에 비해 월등히 많았던데다가 빙그레가 창단될 때 인심쓰듯이 삼성에서 자유계약선수로 많이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진호 빙그레 단장이 직전까지 삼성 구단의 이사였던 것도 컸다. 유이의 아버지 김성갑도 이러한 케이스. [16] 다만 김성갑의 경우는 프로야구 선수 시절 처음에는 잠깐 삼성 유니폼을 입은 적이 있었다. 첫 시즌을 보내고 방위병으로 복무하다가 1986년에 전력보강선수로 이적했다. [17] 원래 유일한 팀타율 3할이었지만 2014년 삼성이 팀타율 .301을 기록하며 깨졌고, 이후 극 타고투저 성향이 지속되며 2017년 KIA, 2018년 두산 등이 팀타율 3할을 넘겼다. 하지만 2014년이 희대의 타신투병 시즌이었기에 wRC+ 등의 세부 스탯은 1987년이 압도적이며(1987년 135.1, 2014년 107.9. 애초에 1987년 135.1이 KBO 팀 wRC+ 역대 1위이다.), 2014년은 오히려 wRC+ 기준으로는 삼성의 정규리그 5연패 기간인 2011~2015년 중 두번째로 낮았다. 17년 기아와 18년 두산 역시 wRC+는 87년 삼성보다 낮다. [18] 롯데 장효조는 5연속 고의사구로 거르고, 이정훈은 출전시키지 않았다. 장종훈은 홈런과 타점 신기록이 진행 중이어서 계속 출전시켰다. 장종훈에게는 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할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19] 하지만 장종훈의 경우에는 단일 시즌 홈런, 타점 신기록이 걸려있어서 타율이 떨어지는 부담을 감수하고 계속 뛰었다. 게다가 당시 장종훈에 대해서는 홈런 신기록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서 타격왕 경쟁은 '이정훈 대 장효조' 구도로 진행되었다. [20] 이 대회에서는 국내에서 내로라는 타자들이 일본 투수들의 공에 고전하여 빈타에 시달렸고, 특히 한대화는 13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21] 후배가 베이스 러닝을 못하자 잘 보라면서 자신이 앞서 나가 시범을 보이다가 발목이 아작났다고 한다. 본인은 단순히 조금 삔줄 알고 훈련하다 난리가 났다고. [22] 타임머신에서는 간접광고 때문에 원정 팀이었던 빙그레 유니폼이 "방그레"로 바뀌었고, 홈 팀인 해태 유니폼은 "황태"로 바뀐 채로 방영했다. 재연했을 때의 해설은 송인득 아나운서와 허구연 해설위원이 진행했다. [23] 물론 삼성 시절에도 악바리답게 연습벌레였고, 당시 신인이었던 이승엽은 이정훈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좌우명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도 이정훈을 통해 얻었다고 한다. [24] 박명환야구TV에서 박명환이 술회하길 별명답게 정말 악바리였다고 한다. [25] 정민철은 이정훈이 빙그레 시절에 팀 고참으로서 유독 신경을 썼던 선수기도 했다. [26] 하루는 정민철이 훈련 중 요령을 피우는 것 같자 이정훈이 자기 휴식시간을 포기하면서 "민철아 너 나랑 한 번 뛰자" 하고는 둘이 단내날때까지 런닝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미래에 악동님으로 불릴 분답다. [27] 이때 불렸던 영어 이름이 찰리 리인데 이걸 선수들에게 알려주었는지 베어스 유튭에 등장시 선수들이 그를 부를때 찰리라고 부르곤 한다. [28] 기존 LG 타격코치였던 이건열 코치가 KIA 타이거즈로 옮겨감에 따라 1군 타격코치 자리가 공석이었다. [29] 당시 북일고 코치였던 임수민은 이정훈의 작전 지시를 이어폰을 통해 들었다. [30] 길민세는 넥센에 지명되어 입단했지만, 예상대로 문제를 일으켜서 2012 시즌 후 방출당했다. [31] 일부에서는 전국의 유망주들을 싹쓸이하는 북일고를 대한민국 고교야구계의 뉴욕 양키스라고도 한다. 자율형사립고 전환 후로는 예전 같은 공격적인 스카우트를 하지 못하지만. [32] 사실 이정훈 감독이 2군 감독 시절 나름 보여준 게 많지만 이글스 프랜차이즈 출신의 또 다른 코치들인 이상군, 강석천, 송진우 등의 삽질이 이 무렵 철밥통으로 욕을 먹던 시기였다. 거기에 이정훈 본인 역시 과거 타격코치 시절 실적이 좋지 못했던 게 한 몫했다. [33] 그 외에도 외야수 출신 감독들의 실적도 백인천 정도를 빼면 모두 나쁜편이었으니 반대를 받았다. [34] 1군 선수 등록하지 않은 유망주를 1군 선수단과 대동시키며 특타,특투 및 1군 배팅볼 훈련 투수로 활용하였다. [35] 2군 감독직은 1군 수석코치와 함께 코칭스태프 서열 2, 3위에 해당되는 보직이고 실제로 차기 감독 후보를 2군 감독에 임명해 미리 감독 수업을 받는 사례가 있을 정도로 팀 내에서 요직인 것과 달리 육성군 코치는 대개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초임 코치 또는 인스트럭터 성격의 코치가 담당한다. 이는 2015년 부진한 2군 성과로 인한 좌천이거나 혹은 팀 내 유일한 내부승진 차기 감독 후보였기 때문에 선수단 전권을 가졌던 김성근 감독의 견제로 생각할 수도 있다. [36] 대표적으로 최지강, 최종인 등이 있으며, 특히 이 둘은 각각 육성선수와 9라운드 지명자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던 선수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진 능력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육성의 좋은 선례를 보여주었다. [37] 이외에도 올라오는 투수마다 150km/h 대의 최고구속을 찍으면서 타팀 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38] 물론 이쪽은 오재원 게이트의 영향으로 1.5군급 선수들이 대거 출전을 못하게 된 탓도 있다고 봐야 한다. [39] 그러나 후반기 타선지원을 받아 승수를 쌓은 것이지 세부스탯은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40] 이렇게 보면 현역 시절 플레이 스타일이 유사했던 선배 장효조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장효조도 2010년부터 타계 전까지 삼성 2군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로서 평가가 올라갔지만, 은퇴 후 곧바로 지도자가 되어 롯데, 삼성 타격코치를 맡았을 때는 평가가 그닥 좋지 못했고 2000년 삼성 코치직을 그만둔 후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야 했다. [41] 2020년도 신인 드래프트부터는 의무적으로 대졸 선수를 지명해야 한다. 김응용이 유독 심했지만 정작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는 해태 뿐만 아니라 모든 팀들이 대졸들이 주로 활약했다. 당시에는 고교 졸업 후 프로 직행이 아닌 대학 진학 후 프로로 가는 게 루트였다. 삼성 감독 시절에도 고졸성애자 경향이 여전했는데 채태인, 최형우, 안지만, 조동찬, 박석민이 대표적이었다. [42] 이 쪽은 성시헌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한화팜에는 그냥 뽑을 선수가 마땅찮아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린 결과로 보인다. 201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스카우트 팀장 부임 이후 처음으로 지역 내 고교 선수 1명을 뽑긴 했다. [43] 도쿄돔. [44] 잠실야구장. [45] 결과는 범타. [46] 실제로 이정훈은 빙그레 현역 시절 우승은 한번도 경험 못해보고 준우승만 4회(1988, 1989, 1991, 1992)나 해봤을 정도로 대표적인 콩라인이었다. [47] 아들 이윤규는 2002년생이고 2001년생인 딸이 한명 있다. 딸은 대전외고 출신이라 한다. 아버지 이정훈이 1963년생인 걸 생각하면 한국 나이 서른아홉에 아이를 본 셈이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의 선수 정보에 중3 때부터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야구를 늦게 시작했거나 이 과정에서 유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윤규의 고교야구 프로필 사진을 보면 이정훈과 상당히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