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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3:09:38

이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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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양방송 로고_White.svg 공채 탤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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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동양방송 탤런트
1기(1964) <colbgcolor=#ffffff,#191919> 김호정 · 윤소정
2기(1965) 김세윤 · 김희준 · 서우림 · 신귀식 · 전양자
3기(1966) 윤여정 · 지윤성
4기(1967) 김종결 · 박용식 · 서승현
5기(1967) 김창숙 · 노주현 · 안병경
6기(1968) 강태기 · 김시원 · 김하림 · 정영숙
7기(1968) 남성훈 · 봉혜선 · 하용수
8기(1969) 김인문 · 연규진 · 임동진 · 정재순 · 최정민
9기(1969) 반문섭 · 유승봉 · 임병기 · 한진희
10기(1970) 김성환 · 김형자 · 박혜숙 · 엄유신 · 이효춘
11기(1971) 박영목 · 장용 · 최윤석
12기(1972) 문숙 · 박칠용
13기(1972) 곽정희 · 남윤정 · 백찬기 · 이덕화
14기(1973) 연운경 · 유지인 · 이계영 · 정운용
15기(1974) 김주영 · 유병준 · 조양자
16기(1975) 장미희
17기(1976) 김보미 · 김영란 · 백준기
18기(1977) 임성민 · 조은덕
19기(1978) 김영철
20기(1978) 경인선 · 원미경 · 이미숙 · 차화연
21기(1979) 최란 · 최화정
22기(1979) 김영기 · 오혜림 · 이기선 · 정한용
23기(1980) 유동근 · 이경표 · 한정국
}}} †: 사망한 탤런트
※ 특채 탤런트는 제외
※ 나무위키 등재 인물 기입}}}}}} ||

이덕화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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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S 로고.svg 연기대상 대상
하희라
(1993년)
이덕화
(1994년)
나문희
(1995년)

파일:MBC 로고.svg 연기대상 대상
김수미
(1986년)
이덕화
(1987년)
김혜자
(1988년)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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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주연상
제26회
( 1987년)
제27회
( 1989년)
제28회
( 1990년)
이영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이덕화
(추억의 이름으로)
신성일
(코리안 커넥션)
제29회
( 1991년)
제30회
( 1992년)
제31회
( 1993년)
이영하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덕화
( 개벽)
이덕화
( 살어리랏다)
제30회
( 1992년)
제31회
( 1993년)
제32회
( 1994년)
이덕화
( 개벽)
이덕화
( 살어리랏다)
안성기
박중훈
( 투캅스)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제23회
( 1987년)
제24회
( 1988년)
제25회
( 1989년)
신성일
(레테의 연가)
이덕화
(접시꽃 당신)
안성기
( 성공시대)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5년
이름 이덕화
분야 배우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문화화관.jpg
연도 1993년
이름 이덕화
분야 배우
화관문화훈장(5등급)

}}} ||
}}} ||
<colbgcolor=#424242><colcolor=#FFFFFF> 이덕화
Lee Duk-hwa
파일:이덕화.jpg
이름 이덕화 (李德華[훈음], Lee Duk hwa)
출생 1952년 5월 8일[2] ([age(1952-05-08)]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3]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연안 이씨 (延安 李氏)
신체 174cm[4], 85kg, B형[5], 275mm
가족 아버지 이예춘[6], 어머니 강원숙[7]
배우자 김보옥(1952년생)[8]
아들 이태희[9]
이지현(1984년생)
학력 서울동신국민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졸업)
경희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연극영화학[10] / 학사)[11]
종교 불교
병역 대한민국 공군 보충역 방위병 상병 소집해제[12]
소속사 디에이와이엔터테인먼트
데뷔 1972년[13] 동양방송 13기 공채 탤런트
취미 낚시, 골프, 축구, 검도
만광(滿光)[14]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연기 활동3. 예능 MC 활동4. 정치 활동
4.1. 정치 경력4.2. 소속 정당4.3. 선거 이력
5. 특징6. 사건 사고
6.1. 교통사고
6.1.1. 오토바이 사고6.1.2. 자동차 충돌
7. 여담8. 출연 작품9. 수상 경력

[clearfix]

1. 개요

부탁~해요![15]
대한민국 배우.

당대 터프가이의 대명사. 이덕화는 전성기에 반항적이고 거칠지만 여성을 목숨 걸고 사랑할 줄 아는 남성상을 연기했다. 1970년대엔 청춘스타로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엔 주연급 남자배우로서 활약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군 장성, 재벌 총수, 기업 경영자, 국가정보원장, 국회의원, 전직 대통령 높으신 분들을 연기한다.

2. 연기 활동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 시절 비교적 어린 나이로 동양방송 13기 공채에 합격해 연기계에 입문했으며 야성적인 이미지로 큰 인기를 모은 하이틴 스타였다. < 진짜 진짜 잊지마> 등 영화 "진짜 진짜" 시리즈에서 임예진과 콤비로 찍은 작품은 장안의 화제였다. 물론 24살의 나이에 고등학생 역을 맡았으며 게다가 당시 20대는 지금 20대보다 노안이라 지금의 30대 중반~40대 초반같이 보여 좀 괴리가 있다.[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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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임예진은 명실상부한 국민 여동생이었고, 상대역은 당연히 이덕화 아니면 전영록이었다. 영화 < 진짜 진짜 미안해>, < 진짜 진짜 잊지마>, <이런 마음 처음이야>, <이 다음에 우리는>, <첫 눈이 내릴 때>, <맨발의 청춘(1979)>등을 이덕화와 함께 찍었다. 전영록과는 <너무 너무 좋은 거야> 등을 함께 했는데 작품의 숫자로만 봐도 이덕화와 함께 한 작품이 많다. [18] 1970년대에는 TBC 공채로 간판스타였으나 1980년대 초반부터는 MBC로 무대를 옮겨 TV 드라마와 쇼프로그램 MC로 활약했다. 이 시절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이라는 대표작을 남겼는데 워낙 흥행작이라 그런지 자료가 남아서 2020년대 가끔 KTV에서 방영 중이다. TBC 시절 작품은 테이프 재활용으로 대부분 사라졌는데, 그래도 유튜브에 한두회 업로드된 작품이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복귀하여 많은 흥행 영화의 주연을 맡았고, 1989년, 1992년, 1993년에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획득했으며 1993년엔 살어리랏다로 모스크바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이 지긋한 아버지 역이나 사장님, 회장님, 혹은 조선시대 왕, 역사 유명인물 등으로 많이 출연해서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카리스마 연기를 보여주며 거물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현재는 과거와 달리 웃기면서 카리스마 있는 인물( 대조영 설인귀), ( 샐러리맨 초한지 진시황)이라든가, 마냥 웃긴 인물(최근 드라마에서 그의 역할)을 맡기도 하면서 희극적인 방향으로 연기 변신을 꾀하고 있다. 물론 천추태후 강감찬이나 근초고왕의 주몽 역처럼 고전적인 카리스마 역할도 여전하다.

당대의 탑 연기자로 청춘스타부터 액션, 멜로 등 다양한 연기를 했지만, 악역 연기까지 최고 수준이었다. 사실 악역 연기가 독보적이다. 특히 사랑의 종말의 남현필 회장은 인간이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는지를 똑똑히 알려준 배역이다.[19]. 이덕화는 여기서 전무후무한 최강의 악역을 시전했다. 악역 전문 배우 지망생들에게는 사랑의 종말이 최고의 추천작이다. 그리고 제5공화국 흑화되는 육군 장성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했다. 외모는 박용식이 갑이지만 행동은 이덕화가 갑이라는 얘기까지 있다. 악역이라면 이 사람, 이 사람, 이 사람이 그나마 맥을 이어가지만, 카리스마는 아직도 이덕화가 엄청나다.

준수한 외모로 패션 모델, 광고 모델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쌍방울 트라이 광고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음악은 요사이나 큰 차이가 없다.

MC계에서도 대활약했으며 곽규석의 뒤를 이어 1970년대 후반, MBC의 <토요일 토요일 밤에>의 남성 진행자로 당시 인기 여성 배우 겸 MC 명현숙과 호흡을 맞추면서 처음 MC로 활동 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토요일 토요일 밤에>가 1981년에 <쇼 2000>으로 개편되면서 배우 이자 라디오 DJ 겸 TV MC 정애리와 호흡을 맞추었고, 그 이후로 여러 여자 MC와 호흡을 맞추어 진행하면서 쇼 프로그램 MC계의 간판 스타로 활약하게 되었고, <쇼 2000>이 1985년 11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이란 주말 밤 초대형 호화 버라이어티 쇼로 개편되면서 송옥숙을 시작으로 1991년 김희애 와의 진행을 끝으로 토요일 저녁 생방송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 거의 1n년 동안 MC를 본 경력이 있다. 또한 1991년 민영방송국 SBS가 개국하면서 SBS로 넘어가서 개국 축하쇼를 진행하기도 하였고, SBS의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쇼 서울서울>의 초대 진행자로 1992년 까지 진행한 이후에 <쇼 서울서울>은 정재환과 뮤직파워가 뒤를 이어 진행하면서 그는 MC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 이후 1993년 4월 11일 '93 KBS 신인탤런트쇼'에 MC를 맡았고[20] 12월 31일 93 MBC 한국가요제전을 끝으로 MC는 당분간 보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MBC의 <댄싱 위드 스타>란 동명 외국 프로그램의 한국판 리메이크 춤 경연 시리즈 프로그램을 마지막 시즌인 시즌 3까지 이소라(시즌 1), 김규리(시즌 2, 3)와 함께 진행하며 다시 MC로 복귀하여 다시 활약 하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에는 KBS에서 이덕화쇼를 진행한 경력이 있고, 2020년대에는 MBC Every1에서 <나는 가수다>의 트로트 가수 버전인 <나는 트로트 가수다>를 단독 진행하기도 한 MC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나 신출귀몰한 레전드. 그때의 이덕화는 지금으로 치면 장동건 유재석을 합쳐놓은 수준의 인물이었다. 당시 킨사이다 광고 #와 로얄디 # 광고를 보라! 금성 캐논 카메라 # 광고에서는 손도 안대고 플래시를 터트린다.

연기에 집중하느라 예능계에선 한동안 볼 기회가 없었지만 2008년부터 다시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 녹슬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덕화가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 출연하면 시청률이 5~7% 정도 오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3개의 고비가 있었다. 그것은 젊은 나이에 찾아온 탈모와 오토바이로 인한 교통사고, 총선 출마였다.

2001~02년 여인천하 윤원형 이래 2003~04년 무인시대 이의민 금쪽같은 내 새끼 송민섭 - 2005년 제5공화국 전두환 황금사과 박병삼 - 2006~07년 대조영 설인귀 - 2008년 애자 언니 민자 한범만과 강적들 강민국 - 2009년 천추태후 강감찬 - 2010년 전우 사단장 자이언트 황태섭 회장과 근초고왕 동명성왕 - 2011년 마이더스 김태성과 스파이 명월 주회장 - 2012년 샐러리맨 초한지 진시황 메이퀸 장도현 - 2013년 야왕 백창학과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인조 비밀 조한일 - 2014년 호텔킹 이중구 - 2015년 내 마음 반짝반짝 이진삼과 빛나거나 미치거나 왕식렴 하이드 지킬, 나 구명한과 장사의 신 - 객주 2015 신석주 - 2016년 몬스터 황재만과 38사기동대 왕회장 - 2017년 피고인 2460과 수상한 파트너 변영희와 최고의 한방 이순태와 이판사판 도진명 - 2018년 착한마녀전 오평판 테크를 밟으며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2010년 이후부터는 두개 이상 동시에 하고 있다. 착한마녀전 이후로 드라마는 잠시 휴식기를 가졌으며 2022년부터 다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 대배우이다.

3. 예능 MC 활동

MC로써의 능력은 탁월하며 타고난 달변가이다. 작정하면 낚시라는 소재 하나로 2시간 짜리 예능 프로그램을 꽉 채울 수 있는 사람이다. 원로배우답게 여태까지 삶의 경험으로 쌓인 각종 썰의 양도 어마어마한데, 타이밍을 조절하며 썰을 풀어내는 능력까지 탁월하다.

대표적인 취미이자 소재거리는 낚시다. 앞서 말했듯이 낙선 뒤에 무인도에 가서 낚시를 하며 지냈다는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전부 뒤로 자지러질 수준으로 재미있는데 지금까지 한 방송에서 똑같은 소재의 낚시 얘기를 겹쳐서 한 적이 거의 없다. 한 예시로 무릎팍도사(2008년 8월 27일)에 출연했을 때는 방송 분량의 상당량을 그냥 낚시 이야기로 채웠다. 진행자인 강호동과 유세윤, 올밴이 다른 이야기도 넣어서 진행해야 되는데, 낚시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MC들이 빵터지고 당황하며 중간에 끊지도 못하고 계속 이덕화의 얘기에 끌려다녔다. 실제 내용은 낚시 이야기라기보단, 낚시하러 갔다가 갑툭튀해서 생포한 다른 야생동물들 이야기라 월척은커녕 물고기도 아닌 이야기들이 많았다. 유명하고 인증샷도 있는 상어 낚시 말고도, 낚시하다 야생 오리, 갈매기, 노루, 거북이, 고슴도치를 우연히 생포했던 이야기를 무릎팍도사에서 털었다. 여기에 낚시 이야기에 맞는 장면을 합성하다가 포기했는지 제작진들이 '이젠 어떻게 합성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라는 자막을 올릴 정도였다. # 도시어부에서 자녀들한테도 낚시를 상당히 권유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이 좋은거를 왜 안하냐는 푸념은 덤.

다른 주력 소재로는 가발 이야기로 수십분을 채운적도 있었는데 이때도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은게 허다하다. 나이차이가 굉장히 많이나는 이하늘과 낚시와 대머리를 소재로 하여 접근하자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사실 가발이나 낚시썰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걸 재밌게 풀어내는 이덕화의 언변이 대단한것. 무슨 썰을 풀던 엄청 흥미있게 말할 수 있는 달변가이다.

유행어는 그의 리즈시절에 "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MC시절 선보인
"부, 타아악~ 해요~"
특히 이 멘트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들을 소개하면서 곁들인 최고의 멘트였다. 당시 무대에서 최고의 카리스마로 인기를 얻었던 전영록이나 김완선을 소개하는 순서에서는 이 멘트가 절대로 빠지지 않았다. 아니, 이 멘트가 붙여지지 않으면 인기가수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멘트였다.[21]

그리고 하이모 광고에서 나온[22]
~야~
모발~ 모발~
[23]타악이 키 포인트. "해요~"는 말미에 살짝 붙이듯 하면 된다. 최대한 느끼하고 목소리를 최대한 깔면서 허스키하게 해야한다.[24] 이 느끼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붙어서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을 때도 자신을 돕던 행인이 "어? 이덕화 아니야?"라고 하자 "맞~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992년에 SBS 쇼 서울서울을 마지막으로 정규 프로그램 MC를 은퇴한 이후 이후 간간이 특집프로그램 위주로 가끔 나오다가 1993년 MBC 한국가요대제전 MC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2009년 KBS 연기대상의 MC를 맡은데 이어서 2010년 추석, SBS 추석특집으로 ' 추석특집 스토리쇼 부탁해요'를 했다. 이덕화쇼에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선보였던 마이크 뜯어먹기 같은 것을 다시 보여주기도 했다. 보조MC들로 신봉선, 아이유, 이홍기, 이수근, 주현미였다.

2011년 설날에는, 설날특집으로 MBC ' 아이돌 7080'을 호란과 진행한다고 한다. MBC 쇼프로 MC를 맡는 것은 거의 20년 만에 맡았다.

2011년 6월 MBC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후속으로 정규 프로그램인 댄싱 위드 더 스타의 진행을 맡았다. 시즌 1의 파트너는 이소라. MC를 그만둔지 20년이 지났지만, 20년만에 녹화방송이 아닌 생방송 진행을 잘 소화했다. 그리고 시즌 2~3의 파트너는 김규리였다. 반응은 극과 극인 듯. 어떤 이는 그의 진행을 반기는 이도 있고, 신선하다는 평이 있지만, 촌스럽다는 평도 있다.

이후 그는 2010년대에 KBS에서 <이덕화 쇼>를 진행하기도 하였으며, 2020년에는 MBC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나는 가수다의 트로트 가수 버전인 MBC Ever1의 나는 트로트 가수다를 단독 진행하기도 하였다. 나는 트로트 가수다 에서 그는 보여주세요~! 라는 또 다른 유행어 겸 전설적인 MC 멘트를 남기기도 하였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 프로그램인 도시어부에 고정으로 출연하며 진정한 덕업일치 중이다. 도시어부에서 열정적인 낚시 모습과 꿇리지 않는 예능감을 보여주며 올드 세대는 물론 젊은 세대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4. 정치 활동

4.1. 정치 경력

1995년 김진명 원작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대통령으로 나왔으나 흥행과 평에서 아주 쫄딱 망해서 타격을 받았던 이덕화는 오래가지 않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25] 경기도 광명시 갑 선거구에 신한국당 후보로 나가 동교동계의 중진인 새정치국민회의 남궁진 후보와 붙어서 근소한 차로 졌다. 당시 남궁진 25,852표, 이덕화 24,405표로 불과 1,447표 차이였다.

사실 이덕화가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그를 위해 충고를 한 사람도 있었는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구리시에서 출마해서 당선된 정주일 의원, 즉 코미디언 이주일이었다. 이주일은 평소 이덕화, 조용필과 나이를 초월하며 자주 어울려 놀던 절친 관계였는데 선거 유세 기간에도 인기 연예인으로서의 체면만 살리고 인기에만 연연하며 돌아다니는 이덕화를 보자 이주일이 "너 그러다 진다"며 최대한 불쌍해 보이도록 도 마시지 말고 마른 입술에 다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덕화가 이주일의 이 충고를 안 들었다고 한다. 만약 이덕화가 이때 이주일의 충고를 들었다면 연기가 아닌 실제 정치인 이덕화가 탄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이덕화는 이 선거에 워낙에 많은 돈을 부어서 거의 재기불능상태가 되었다.[26] 결국 이 때문에 연기 활동 등을 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무인도에서 한동안 혼자 짱박혀 살았다. 국회의원 낙선 이후부터 가발 CF를 찍기 이전까지 전혀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낚시하면서 물고기랑 이야기(...)하고 지냈다고 한다. 이덕화는 1997년에 잠깐 돌아왔고, 1998년 초부터 드라마를 통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한다.

아직도 총선 출마는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회고한다고. 은둔 생활 중에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몇 주년 특집 프로가 나갔다. MBC에서는 원조 MC인 이덕화를 초청하려고 했는데 무위로 돌아가고 대신에 낚시터에서 걸으면서 시청자들에게 인사하는 동영상으로 대체했다. tvN에서는 실패한 연예인 중 한 명에 꼽혔으며 멘트가 "대선은 연기로만 하면 될 껄 그랬다"라고 말했다. 도시어부에서도 "다들 당선 된다고 그러다가 떨어지니 다들 모른척 했다면서 그거 왜 했나..."라는 언급을 한적이 있다.[27]

그런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덕화가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이유는 이덕화와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였기 때문이었다. 김영삼의 장녀 김혜영은 이덕화와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안면이 있었는데, 1992년 LA 폭동이 터지고 나서 한인 교민의 피해가 막심했기에 이주일 등과 함께 자발적으로 교민을 위한 위문공연차 LA를 방문했다가 김혜영과 만났고, 이 인연으로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까지 만나 곧 있을 제14대 대통령 선거 지원을 부탁받았다. 이덕화가 김영삼을 처음 만났을 때 김영삼은 이덕화에게 친근한 말투로 "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 아빠를 잘 알고 있으모 연락을 해야지 내한테 와 연락을 안 하노? 연락 좀 하고 살재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덕화 자신은 단지 친구의 아버지가 잘 되라고 별 생각 없이 지원 유세에 참가했고 # 실제로 김영삼의 대선 후보 TV 광고의 단독 모델로도 출연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김대중 걸음걸이 비하 논란이 일자 국회에 방문하여 해명하는 일도 생겼다. #

그렇게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덕화는 김영삼의 힘으로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광명시 갑[28] 선거구 국회의원에 도전했지만 상술했듯 낙선하고 이 이후로 정치에는 다시 뛰어들지 않았다. 낙선 이유는 아무래도 친서민적 이미지가 약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주일 말이 맞았다. 조선왕조오백년에서 장희재라는 무뢰배 캐릭터 연기를 하는 등 계속 악역을 많이 맡아온 데다가 그것 때문에 이주일이 최대한 불쌍해 보이라는 조언을 했음에도 본인의 유명 연예인 신분을 맹신한 탓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한 상대인 새정치국민회의 남궁진 김대중의 가신이라 김대중 지지자들의 표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그래도 이덕화의 유명 연예인 버프와 표를 갈라놓은 통합민주당, 자민련으로 인해 박빙의 접전이 벌어졌고 개표율 90%까지 가도 당선이 결정되지 않았을 만큼 치열하게 맞붙기는 했다.

이후에 연기자로 재기하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공식 지지했으나 공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29] 다만 관청 주도의 영화제라는 충무로국제영화제[30] 집행위원장을 맡은 적은 있으나 영화제가 막장이 되면서 이것도 그에게 별로 안 좋은 기억이 됐다.

이명박을 지지했음에도 이명박이나 박근혜의 정책에 부정적 의견을 보이기도 했으며, 정계 입문 계기와 함께 생각해 보자면 보수정당의 열성 지지자가 아니라 생활 보수 정도지만 친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4.2. 소속 정당

<rowcolor=#FFFFFF> 소속 기간 비고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6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6 - 현재 탈당
정계 은퇴

4.3.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광명 갑

[[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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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05 (33.30%) 낙선 (2위)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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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총선 ( 경기 광명시 갑) }}}}}}}}}

5. 특징

탈모 때문에 현재 그의 머리는 가발이다. 사고 후유증 때문에 머리가 타버려서 그랬다는 루머도 있으나, 그의 탈모는 사고 이전부터 있었다.[31] 게다가 그의 부친이던 이예춘도 탈모가 있었고, 가발을 착용하거나, 일제 발모제를 쓰다가 냄새 때문에 상대 여배우한테 면박을 받기도 하는 등 2대가 탈모로 고생했다.

탈모가 시작되고도 한참을 가발을 쓰지 않아서 다들 대머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본인이 컴플렉스가 있어서 쉬쉬하지만 전부 다 알고 있는 그런 공공연한 비밀이었을 뿐. 하지만 본인이 가발회사 모델이 되어 크게 기사회생에 성공한 이후로는, 대놓고 대머리와 가발을 개그 소재로 쓰고 있다.

힐링캠프에 나온 바에 의하면, 처음에는 가발 CF가 들어온 것은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나서 일이 뚝 끊긴 뒤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꾹꾹 눌러참으면서 거절한 뒤 부인에게 속상한 자신의 심경을 위로 받고자 그날 일을 하소연했으나, 이미 대머리인 남편과 10년을 살며 적응한 부인의 입장에서는 굴러들어온 일을 발로 차는 뻘 짓거리로 느껴졌고 그래서 이덕화에게 그게 어때서 그래?!?!!!! 이라고 한심하다는 듯이 일갈했다고 한다. 그래서 와이프때문에 등떠밀려 하게 된 CF 덕분에 이후 재기에 성공하였다. 현재 24년째 같은 회사 모델을 하고 있다. 참고로 이 쯤되니 가발회사에서 이덕화를 반쯤 명예 이사급으로 챙겨준다는 농담이 있다. 실제로 자기가 어떤 배역을 하게 되면 아예 그 회사에서 TF팀을 짜서 그 배역에 어울릴 가발을 만들어 보낸다고. 특히 제 5공화국 드라마 촬영 당시, 일반적으로 굳이 수요가 없는 반 대머리가발을 배역에 맞게 커스텀해서 만들어준것도 해당 회사이다. 따지고 보면 가발회사와 상부상조하게 되고나서 이덕화 본인도 배우로서도 상당히 이득인데 배역에 어울릴 헤어스타일을 미리 준비만 해뒀다면 즉석에서 교체가 가능하고 흐트러지거나 손상의 걱정도 다른 배우에 비해 거의 없다시피 한다.

아예 일요일 일요일밤에 에서도 가발 언급이 있는데 이쯤 되니 해당 회사에서 가발을 선택하는 메뉴얼에 별다른 설명도 없이 "덕화형 가발" 이라는 상품명이 떡하니 대표로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옵션으로는 운도형 가발도 있다고...

처음에는 탈모가 와도 가발을 쓰지 않았기에 고뇌하는 장면에서 남들은 고개를 앞으로 숙이는데, 이덕화만 하늘을 쳐다보는 등 탈모를 숨기려 노력했다. 가발을 처음 착용한 때가 1987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인데, KBS2 <상상플러스> 시즌2 2008년 8월 5일 방송분 '대박대담' 코너에서 본인이 증언하길, 김수현 작가가 그 머리로 어떻게 주인공을 하느냐며 가발을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 촬영 중에 땅바닥에서 구르는 장면에서 가발이 180도로 돌아가서 다시 같은 장면을 서너번 찍었단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매니저의 가장 큰 업무가 가발을 가지고 다니면서 맞춰주는것이라는데 만에 하나 기자들 앞에서 대머리가 공개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90년대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개인적인 일로 멀리 있던 매니저 기자보다 빨리 다가와서 황급히 환자머리에 가발을 씌워주었다 고 한다. 당시 자료 화면에도 침대 위에서 아파하는 이덕화의 머리 부분은 카메라 화면이 잘려있다.

파일:external/www.mule.co.kr/%EC%9C%BC%ED%9D%90_650.jpg
사진의 탈모 상태가 엄청나 보이지만 실제로 사진만큼 벗겨진 것은 아닐 것이고 가발 착용을 위해 뒷머리와 윗머리 상당 부분을 삭발한 걸로 보인다. 자세히 보면 M자형으로 옅게 머리를 민 흔적이 있다. 2002년 5월 1일 수원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한일 연예인 친선 축구대회에서 헤딩을 선보이다 카메라 앞에서 모자가 벗겨져 실제 머리가 공개 된 이후에는 대머리를 숨기는 컨셉에서 벗어났다. 위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다.

파일:/image/081/2005/04/15/SSI_20050414175545.jpg
그 후 2005년 제5공화국에서는 주인공역으로 출연하게 되는데, '이덕화가 가발을 벗고 TV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방영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 물론 다 깐게(?)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전두환의 대머리 스타일을 맞추기 위해 위를 살짝 가리는 반백 가발(부분가발)을 쓰는 등 오히려 스타일링에 신경썼다. 어쨌든 연기는 대단했는데다, 이 땐 오히려 대머리라는 점이 장점이 되어 악역으로서의 굉장한 시너지효과를 발휘해서, 이덕화의 전두환 연기는 그야말로 전설로 남았다.[32] 외모로는 박용식이 더 닮았지만 카리스마 담긴 연기에 본방 방영 이후는 일부에서 제기하던 미스캐스팅 이야기가 쑥 들어간 것은 덤이다.[33]

설운도와 함께 연예계 대머리 투톱이다. 이덕화와 호형호제하는 개그맨 최병서는 나중에 그의 조카딸과 결혼했는데, 신혼여행을 갔다가 수영장에서 누가 아는 척을 했다. 최병서가 누구시냐고 묻자, "나야, 나! 설운도!"라고 대답했다. 그걸 본 새색시가 깔깔 웃으면서 "어머, 우리 아저씨[34]보다 심해!"라고 말했다는 뒷얘기가 있다.

2012년 연말시상식에는 반백 가발을 쓰고 나왔다. 이 이후로도 이제 나이가 [age(1952-05-08)]세이며 반백 가발을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서 쓰고 있다. 1999년 가발회사 '하이모'의 광고를 찍으면서 총선실패의 후유증을 이겨내고 다시 화면에 나올 수 있게 되었는데, 이후 당당한 탈모인으로써 2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하이모의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하이모 회사 측에는 아예 이덕화에 대응하는 가발 전담팀이 있으며, 드라마나 영화에 이덕화가 캐스팅되면 대본부터 연구해서 극중 캐릭터에 가장 잘 맞는 가발을 맞춤 제작한다고 한다.

또한 이덕화에게는 가발에 대한 슬픈 에피소드가 있다. 코미디언 이주일과는 살아생전에 나이를 초월해서 거의 절친에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는데[35] 말년에 그만 이주일이 폐암 진단을 받고, 병세가 너무 심각한 수준이라서 그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할 것이라는 통보를 듣게 된다. 이 사실을 이주일 본인에게는 알릴 수 없었으나 가까운 주변인인 이덕화는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주일은 가발 모델로 활동하던 이덕화에게 맞춤 가발을 부탁했고, 이덕화는 퇴원하고 나서 가발 맞추면 되지 않겠느냐고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결국 이주일이 원하는 대로 가발을 맞춰줬다. 이주일은 이덕화가 맞춰온 가발을 써 보더니 매우 흐뭇해 하면서 "내가 완치되면 이 가발을 쓰고 미국을 다녀온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때 이덕화는 눈물이 핑 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주일이 2002년 월드컵을 산소 튜브끼고 관람했던 게 바로 이 시기이며, 그로부터 2주일 뒤 이주일은 사망했다. 이덕화는 이를 회고하면서 "그 가발 쓰고 미국이나 한번 가 보고 돌아가시지..."라고 아쉬워했다.

절친 김하균이 모발이식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 모발이식을 권유 받았지만 가발회사와의 24년 전속광고 모델의 관계를 생각해서 거절한게 밝혀졌다.

6.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6.1. 교통사고

무려 2번이나 큰 교통사고를 당한 인물이다. 특히 첫번째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 했다.

6.1.1. 오토바이 사고

청춘스타로 잘 나가던 1977년 4월 7일, 오토바이를 몰고 가던 중 현재의 한남동 타워호텔 앞 고가차도 부근에서 시내버스와 충돌하여 수십미터를 끌려가는 큰 사고를 당했다. 이때 정말 크게 다쳐서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각 일간지 사회면에 기사가 실릴 정도였으며, 당대에도 재기하지 못할 것이란 얘기가 많았다. 3년 넘게 투병해야 했는데, 이덕화 본인 말로는 처음 10달 정도는 중환자실에 있었는데 아침에 비명으로 깨서 저녁에 비명에 잠든다고 표현했을 정도. 그도 그럴것이 그 10개월 동안 이덕화는 툭하면 생명이 위독해져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덕화 때문에 긴급호출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렇게 생명이 위독할 때마다 이덕화는 '아, 이제 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운 좋게 버텨냈고 살아남아서 일반병실로 옮겨져 2년 정도 더 치료를 받았다. 당시 영화 상대역으로 자주 호흡을 맞추었던 임예진이 문병을 갔는데, 사고를 당한 몰골이 너무 처참한지라 사람이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있어서 마치 시트와 매트리스 사이에 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너무 무서워서 가까이 못 가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봤어야 했다고 술회할 정도.[36]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고였냐 하면 이덕화는 엉덩이살이 아예 없어져서 다른 부위의 살을 이어 붙여 엉덩이를 새로 만들어야 했으며 1,500바늘이나 꿰매는 초대형 수술을 받았다.

이 당시 이덕화의 아버지인 원로배우 이예춘은 투병 중이었는데,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그만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덕화의 아내인 한국무용가 김보옥 씨의 말에 따르면 병실 앞에서 이예춘이 선 채로 의식을 잃어 실금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최불암 등 MBC 소속 탤런트들이 이덕화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이덕화에게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덕화 본인은 훗날 방송에서 여러 번 아버지를 언급하였는데, 위독해진 아버지를 자신(이덕화 본인도 부상이 심각하니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과 어머니 등 주변 사람들이 병원의 다른 층으로 침대를 밀며 이동시키는 중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덕화 본인의 손을 잡고 운명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사고를 당한 충격 때문에 아버지가 사망한 것에 부채감을 느낀다고도 언급하였다. 이예춘은 사망 직전까지도 아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고의 여파로 정도가 2019년 6월까지는 3급 지체장애인이었다. 본인이 장애가 있음에도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공식 석상에서 상대 후보였던 김대중 정주영을 장애인에 빗대 비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이로 인해 비판받았지만 본인은 이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애초에 저 두 사람은 각기 친구 아버지와 애증의 관계이거나 정치에도 뛰어든 지인을 직접 영입한 입장이니 타격만 받을 일이다. 사고 당시에 생긴 흉터가 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대중목욕탕을 갈 수 없다고 한다.

사고가 난 오토바이는 가수 겸 배우 전영록의 오토바이였다고 한다. 전영록의 부친 황해는 아들이 오토바이를 절대로 못 타게 막았고, 이덕화가 빌려 타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사실 이덕화는 당대 기아(기아-혼다)[37]에서 판매하던 오토바이 광고 모델도 하는 등 오토바이를 매우 좋아하였다.

후에 이덕화는 방송에서 이 당시에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 김보옥이 3년간 힘들게 자신을 돌봤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것도 자신의 대소변까지 다 받아주는 수준으로. 자기 만나지 말고 다른 사람 만나라고 하는 이덕화를 정말 헌신적으로 돌본 모습에 감동받아 결혼했으며, 자신의 인생은 내인생이 아니라 이제 부인이 만든 인생이다 생각해 재산 전부를 부인 명의로 해놨다고 한다. 이덕화 본인이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2019년 2월 26일 시작한 1인방송 티비의 1화 에피소드의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아내가 아들을 임신했을 때는 자신도 병원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몸이 욱신거린다는 느낌은 들었었지만, 아내가 자신이 입원했을 때 3년을 이러고 살았었다는 걸 회고하면서 참아냈었다고 한다.

6.1.2. 자동차 충돌

관련 기사: #1, #2

1990년 6월 24일 전라북도 정주시(현 정읍시) 정일동의 한 삼거리에서 이덕화가 몰던 지프가 대한고속 버스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다행히도 첫번째 사고만큼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아서 치료 도중에도 영화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치명상만 입지 않았을 뿐이지 이 사고도 대단히 위험할 뻔했다. 두시탈출 컬투쇼 2015년 8월 4일 방송에서 당시 정황을 언급했는데, 낚시를 하러 가다가 당한 사고였다고 한다. 자동차 전방 유리를 뚫고 보닛까지 상반신이 나왔지만 갈비뼈는 유리 사이에 끼어 버린 상태였다. 근처에서 가게를 하던 어느 아주머니가 수건을 갖고 나와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돌봐 주었는데, 이덕화가 나중에 그 여성에게 따로 찾아가 감사인사를 했다고 한다.

7. 여담

8. 출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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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9. 수상 경력



[훈음] 빛날 [2] 조기입학으로 1958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3]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4] [제5공화국] 제22부에서 183cm인 배우 김성겸보다 확연히 작아보였다.(8분 7초) [5] 네이버 프로필 기준. [6] 참고로 대를 이어 배우로 활동한 사람들은 전영록, 최민수, 독고영재, 박준규, 허준호, 하정우가 대표적 케이스. [7] 2003년 별세 [8] 무용가. 배우 김진규 부인 김보애의 동생. 따라서 김진규와는 동서-형님간의 사이지만 둘의 나이 차이는 무려 29세로 김진규가 이덕화의 아버지 뻘이다. KBS 공채 1기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알고 지낸 소꿉친구다. 결혼생활은 40년이지만, 알고 지낸 건 무려 60년이라고 한다. [9] 자신의 소속사 대표이자 매니저이다. [10] 연출 전공 [11] 성우 배우 장광과는 대학 동기. 이 때 장광과 같이 다른 학교 무용과 여학생들과의 집단 미팅을 주선했다고 한다. [12] 도시어부 2에서 밝혀졌다. [13] 2015년 인터뷰에서 본인이 정정을 요청했다. [14] 이덕화 본인 낚시 별명으로. 세상 가득한 빛이라는 뜻. 유래는 당연히 본인의 이것 [15] 1980년대 최대의 인기를 누렸던 MBC의 주말 프라임타임대의 버라이어티 '쇼 2000' →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MC를 10년 넘게 맡으면서 그야말로 최고의 진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당시 인기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전영록, 김완선과 같은 스타들을 소개할 때 냈던 이 멘트는 그야말로 명MC의 표본을 보여주는 최고의 멘트였으며, 꽤 오랫동안 여기저기서 패러디되었다. 이 멘트를 만든 사람은 이덕화가 아니라 조카사위인 최병서다. [16] 24살이지만 대략 30대 정도로 보인다. 이미 당시 탈모가 조금 진행되어 더 그런 면이 있다. 현재도 24살 배우가 고등학생 역을 맡는 경우는 많아도, 남자 기준 고등학생과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30대로 보이는 그 당시라면 괴리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17] 개발도상국인 1980년대까지와 그 잔재가 있는 1990년대 중반까지는 10대 후반~30대의 남자 청년들의 외모가 겉늙어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까지도 현재보다 겉늙어보이지만 그 이전보다는 젊어보인다. [18] 참고로, 제목이 비슷한, < 진짜 진짜 좋아해>는 이덕화, 전영록이 아닌 김현이란 이름의 남자배우와 함께 한 작품. [19] 그리고 이때 이덕화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원미경 역시 최고의 악녀역으로 맹위를 떨쳤다. [20] 이로써 방송 3사 MC를 다 본 셈이다. [21] 반대로 자신에게 예의없게 대한 가수 등 좋게 평가할 수 없는 가수를 소개해야할 경우는 "(목소리 내리깔고)한번 보시죠."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해피투게더에서 이를 밝히자 다른 출연자들은 단체로 충격을 받았었다. [22] 광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탈모의 신성 배우 이진우가 가발이 얼마나 좋은지 만지자 (또는 잡아당기는) 그에 반응하면서 친 대사다. [23] 최대한 짧게 발음한다. [24] 일부에서는 "부탁해여~"라고도 한다. [25] 공교롭게도 김진명 역시 15대 총선 시기 새정치국민회의 서울 송파구 을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맹형규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6] 지금은 당선 시, 후보자 사망 시, 그리고 낙선 시에도 득표율이 15% 이상이면 법정선거비용 전액을, 10% 이상 15% 미만 득표율이면 반액을 돌려주지만, 이때는 이 환급 제도가 도입되기 전이었기에 낙선한 후보는 그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27] 낙선후에 한동안 낚시만 다녔다고 한다. [28] 여담으로 이 지역에 그 유명한 교회촌이 있다. [29] 하지만 이 때문인지 아들이 이명박 대통령 임기 기간동안 청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30] 이 영화제는 묻혀졌다. 관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영화제치곤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만 준다면 된다고?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 바르셀로나 항목에 나오는 바르셀로나 국제영화제를 참조할 것. 그리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관이나 정치인이 주도하려다가 말아먹을 뻔 한 바 있다. [31] 80년대 초반에 찍었던 킨사이다 광고들을 보면 이미 탈모증세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32] 정작 전두환 역의 아랫사람들 중 두 명이 유명한 가발인이다. 허화평역의 이진우, 이학봉역의 이재용. 이 두 사람도 평소에 가발을 착용하고 있으며, 작 중에서 두 사람은 정상적으로 가발을 쓰고 연기. [33] 다만 다른 의미로 미스캐스팅이긴 한데 원래 제5공화국 자체가 전두환의 부정적 면모를 드러내는 작품이어야 하는데 전두환 역할을 연기한 이덕화가 너무 카리스마 있어서 팬 층을 형성하면서 전두환 미화 논란까지 나오고 말았다. [34] '아저씨'가 현재는 혈연 관계가 없는 사이에 쓰는 말로 거의 정착됐지만, 본래는 한 항렬 위의 남성 친척(백부, 숙부, 당숙 등)을 통틀어 일컫던 말이다. [35] 이 술꾼 멤버가 이덕화, 이주일, 조용필, 최병서 [36] 덕화티비 1화 참조(2019.2.26 방영분) [37] 기아-혼다는 당시 브랜드 명칭이었고 법인명은 기아기연이었다. 1962년 기아산업과 일본 혼다가 2륜차 기술도입 제휴를 맺은것이 그 시작이며 이후 대림자동차로 기아기연이 넘어가면서 대림혼다가 되었다. [38] 가 만광이라고 한다
파일:이덕화.full.jpg
[39] 종류에 상관없이 낚시란 낚시는 다 좋아한다. 차이점이라면 마츠카타가 매년 남태평양 한 가운데로 어선 타고 가서 첨단장비를 동원한 참치 낚시 기록을 갱신하는 등 좀 더 스케일이 크다는 점이다. [40] 실제로 마츠카타는 여성편력과 별개로 화끈한 큰형님 스타일에다 씀씀이가 크고 배포가 넓어서 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선배였다. 이건 이덕화에 대한 후배 연예인들의 평가들이 일치한다. [41] 일례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국민여동생 임예진과 작품을 함께 하며 서로 호감을 갖기도 했지만, 이덕화가 감정을 절제한 덕분에 관계가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42] 특히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차남, 니시나 마사키의 악평이 유명하다. [43] 앞의 사고와 병수발 이야기 건만 해도, 그렇게 가장 아름답던 20대 시절을 병수발하며 바쳐줬고, 스스로 나 잊고 다른 남자 만나라는 말까지도 싹 거부하고 3년을 헌신해준 아내에게서 어찌 눈이 돌아가겠는가? [44] 남궁연이 쓴 표현. 물론 신해철을 두고 한 말이다. [45] 당시 신문기사에는 4개나 2개로 나오기도 했으나 오보였고, 훗날 본인이 해피투게더라는 방송에서 5개라고 고백했다. [46] 그런데 정작 딸을 부를 때는 그냥 이름 부르거나 지지배라고 부른다고 한다. [47] 도시어부 시즌 2 41화에 따르면 도시어부에서 낚시에 집중하다가 이수근의 칭찬을 잘못 알아들어 이수근에게 버럭한 장면이 나간 뒤 부인에게 `인간이 방송도 모르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라고 호되게 혼났다고 한다. [48] 그리고 개그맨 이봉원에게도 제의가 왔었지만 시트콤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거절했다고 한다. [49] 양준일이 방송 정지를 당한 이유는 1993년에 보그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50] 오로라 블랙 펄 색상에 9인승 노블레스 트림 [51] 나이 어린 후배가 다소 짖궃게 나와도 크게 웃어주며, " 야~ 너 재미있다." 라며 잘 받아주고, 리액션을 잘해준다. [52] 지창욱이 이덕화와 같이 드라마를 찍었는데, 이덕화가 친히 입대식과 면회식때 왔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53] 앞서 최수종과의 친분도 그렇고 이렇게 나이차가 많은 후배들과 친분이 많은 것은, 이주일과의 친분이 영향을 끼친 듯 하다. 이덕화 본인이 1952년생이지만, 이주일이 1940년생으로 두 사람은 띠동갑이다. 나이에 관해서는 엄격한 한국 사회에서는 정말 파격적인 인간 관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이 점은 상술한 마츠카타 히로키와도 똑같이 겹치는데, 문란한 사생활과 별개로 대단히 화끈하고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대인배 마인드라서 따르는 후배들도 많았다. [54] 앞의 두 작품에선 서인석이 상급자, 이덕화가 부하로 나왔지만, 제5공화국에선 상하관계가 역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