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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 | 해체된 사단 |
제20기계화보병사단 {{{#ffffff 第二十機械化步兵師團}}} The 20th Mechanized Infantry Divi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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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긴다 | ||||||
창설일 |
<colbgcolor=#fff>
1953년
2월 9일(제20보병사단) 1981년 8월 25일(제20차량화보병사단) 1983년 6월 1일(제20기계화보병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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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일 | 2019년 11월 29일 | |||||
상징명칭 | 결전부대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
상급부대 | 제7기동군단[1] | |||||
규모 | 사단 | |||||
역할 | 공격 부대, 전시 진격 | |||||
초대 사단장 | 예) 소장 유흥수 | |||||
해체 전 사단장 | 예) 중장 황유성(육사 46기) | |||||
위치 |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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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기도 양평에 위치했었던 대한민국 육군 기계화보병 사단으로 부대 별칭은 결전부대. 경례구호는 단결, 충성을 거쳐 구호는 "결전"으로 바뀌었다.2019년 11월 29일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폐합되면서 해체되었다.
2. 연혁 및 특징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2월 9일 한국군의 2차 증강계획에 따라 제1교육여단을 모체로 창설되었다. 창설 직후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 일대를 방어하던 제7보병사단과 임무교대를 한 뒤 M-1고지 전투를 치른다. 전쟁 말기엔 미 육군 40사단을 대신해 가칠봉 일대를 방어하며 휴전을 맞이했고, 제5군단 소속으로 배속됐다.전후 창설된 제29보병사단이 해체되면서 당시 29사단의 병력은 20사단에 흡수, 승계되었다.
1977년 육군본부 직할 부대로 바뀐 뒤 1981년에 보병사단에서 차량화보병사단으로 승격하였고, 1983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1983년 제7기동군단을 창설하면서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함께 배속되었다. 맹호부대에 이은 두 번째 기계화보병 사단으로 서로 라이벌 관계였다. 육군기계화학교에서는 수기사와 짝을 지어 양기사라고 부르는데, 막상 이 부대 장병들은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2] 사실 훈련이 아닌 이상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장병들은 양기사라는 단어에 대해 별 생각을 가지지는 않는다. 개중에는 양기사가 본래 명칭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K1 전차는 수기사에 최초 배치되었는데, K1A1 전차는 20사단에 먼저 배치되었다. K21 보병전투차량도 20사단에 먼저 배치되었다. 덩달아 기존의 K200은 전장비 이상의 집중관리[3]를 하여 기름과 흙먼지에 찌들은 물건을 준 A급 수준으로 만들어 제8기동사단에 인계하였다. 수기사도 계속 K200 운용하다가 2012년부터 수기사에도 K-21이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20사단이 겪은 생고생을 수기사도 그대로 겪게 되었다. 전차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아 K-2 흑표를 여태까지 시험 운행[4]해왔는데 K-21에 이어서 흑표까지 오면 간부나 병사나 또 다시 죽어나갈 판이다. 그러나 K-2 흑표의 배치가 늦어짐에 따라 K1A1을 개량한 K1A2가 수기사에 배치되니 전세 역전. 하지만 2014년 6월부터 K-2 흑표가 20사단에 1개 중대씩 7월에 배치되었다.
2018년 11월 30일에 올라온 통폐합 소식에 의하면 20사단이 추후 해체되고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합될 예정이라 보도되었다. 일각에서는 광주 5.18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한 보복 내지는 박근혜정권 시절 중시됐던 부대라는 점이 해체사유라고 주장하지만[5] 사실이 아니다. 어느 쪽이 해체되든 통합되면 결과물은 똑같은 상황에서 양평에서는 부대가 빠지기를 원하고 있었고[6] 홍천에서는 존속을 희망하고 적극적으로 주민과 예비역이 나섰기에 11사단 위주로 통합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20사단이 광주 시민 진압에 개입한 부대라서 해체된 거라면 마찬가지로 진압에 개입한 3, 7, 11공수여단과 1212사태 당시 군사반란에 동원된 9사단이 해체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6.25전쟁 영천 대첩의 주역으로 여러번 대승을 거뒀던 10보병연대, 21보병연대를 기반으로 한 8사단의 10기보여단, 21기보여단 또한 26사단과의 통합되며 해체되었으며,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시기부터 존속해온 역사가 긴 2사단 산하의 17연대, 31연대를 2019년에 각각 12사단과 21사단에 넘겨준 뒤 해체됐고, 이후 2021년에 신속대응사단이라는 이름 아래에 후방의 201, 203 신속대응여단을 배속받았으나 사실상 작전통제권은 2작사에 있어 실권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는 부대의 명문 및 위상과 아무 관련없는 국방개혁 정책일 뿐이다. 각 보병연대를 여단으로 격상시킨 뒤 각 대대엔 K808 장갑차, 중형표준차량을 보급하여 기동력&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연대 전투지원중대를 K105A1 자주포를 운용하는 여단 포병대로 격상시키고, 대대 화기중대에 기존 연대용이던 4.2인치 박격포를 넘겨주며 부족한 병력의 수를 화력과 기동력으로 메꾸는 정책일 뿐이다.
2019년 11월 29일 해체되어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합이 완료되고 11사단의 20기보여단이 독립, 3군단으로 이관되어 제20기갑여단으로 창설되었다. 그리고 해체 과정에서 포병여단과 61여단은 11사단으로 편입, 60여단은 8사단으로 편입되었으며 62여단은 해체되었다.
부대해체 후 주둔지에는 제2신속대응사단 사령부가 주둔해 있다.
마크의 의미는 가운데의 빨간 다이아몬드가 공산주의자, 그것을 감싸 옥죄는 4개의 파란 반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화살표 마크는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자유 대한군의 진격이다. 이후에는 부대 마크의 의미는 4명의 병사가 서로의 방탄헬멧을 부딪치며 단결력을 돋우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부대 마크가 자일리톨 껌의 상표와 비슷하다고 해서 자일리톨 부대라고 부르는 병사가 많다. 이에 대해 사단인원들은 맹호부대를 치토스라며 깐다.[7] 이 부대마크와 '결전부대'라는 별명은 제61기계화보병여단이 승계하였다.
3. 예하부대
3.1. 직할부대
사단 해체 시 대부분 해산되어 존속하지 않으나 일부 부대는 현재도 개편 후 존속하고 있다.-
공병대대(별칭: 맘모스대대)
1995년 K1 AVLB(K1 교량전차)가 배치되었다. 직할대 중 양평 시내랑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그만큼 휴가나 외출 외박을 나가기 쉬웠다. 2012년에 지어진 신막사로 침상이 아닌 침대로 이루어져 있어 부대 환경 역시 좋았다. 각 여단의 훈련을 지원해 주어야 해서 분대별로 K200 장갑차가 배치되어 있었다. 다수의 건설장비를 보유하여 사단 내 모든 공사 및 종합훈련장 공사필요시 조작병들이 파견 나가 근무했다. 공병 주특기 훈련 등 전투중대 훈련량이 많았으며 본부중대는 일과 업무가 있으므로 훈련량은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20사단 해체 후 11사단으로 배속되었다.
-
정비대대
정비대대는 일반지원중대만 대대에 있었으며 1,2,3중대는 근접지원중대로 각 여단에 장기 파견되어 모두 떨어져 있었다. 일반지원중대는 근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20사단 해체 후 보수대대와 함께 여단 군수지원대대로 개편되었다.
-
보급수송대대
보급중대와 수송중대로 나뉘어 있었으며, 경계근무는 위병소와 탄약고가 있으며 중대별로 1개월씩 돌아가면서 맡았다. 구막사일 뿐만 아니라 시설이 낙후되어 겨울에 보일러를 틀면 바닥에 물이 새는가 하면, 빨래 건조실이랍시고 빨래를 널어놓으면 한겨울에는 동태가 되기 십상이었다고 한다. 20사단 내 부대와 인근에 다른 부대[8] 들이 매주 월/수/금요일에 보수대로 부식을 받으러 왔는데, 부대 안 도로는 전부 비포장이어서 이날이면 왕래하는 차량들 때문에 흙먼지가 항상 가득했다. 20사단 해체 후 정비대대와 함께 여단 군수지원대대로 개편되었다
- 정찰대
뛰어라! 보아라! 살아라! 최강정찰대
신교대 옆에 있었다. 2019년 10월 18일 해체되어 3군단 직할로 배속 변경된 20기계화여단 정보중대의 모체로 배속 변경되었다.
-
의무근무대
지하철역이 매우 가까웠던 부대로 20사단이 해체되면서 같이 해체되었다.
-
정보통신대대
사단 사령부와 같은 영내에 있던 부대로 후문의 경비를 맡았던 부대이다. 마찬가지로 20사단이 해체되면서 같이 해체되었다.
- 기갑수색대대
우리는 할 수 있다, 기갑수색 화이팅!
차량화보병사단시절 사단 직할 독립전차중대였으나 기계화보병사단이 되면서 기갑수색대대로 변경되었다.
인원에 비해 관리하는 지역이 많아 작업량이 많기로 사단에서 손꼽혔다. 사단 사격장[9], 사단 유격장, 사격장, 전적비 모두 수색대 관할이었으며 제설작업도 전담했다. 수색대대 구막사는 중대 화장실 변기 절반이 복구 불가 상태였고, 그나마 작동하는 변기도 심심하면 막히는 상태였던 것이 리모델링으로 해결되었으며 이때 목욕탕도 대중목욕탕 수준으로 고쳐졌다.
2019년 해체과정에서 기갑수색대대 2중대가 3군단 직할 20기갑여단 기갑수색중대로 재편성되었다.
인원에 비해 관리하는 지역이 많아 작업량이 많기로 사단에서 손꼽혔다. 사단 사격장[9], 사단 유격장, 사격장, 전적비 모두 수색대 관할이었으며 제설작업도 전담했다. 수색대대 구막사는 중대 화장실 변기 절반이 복구 불가 상태였고, 그나마 작동하는 변기도 심심하면 막히는 상태였던 것이 리모델링으로 해결되었으며 이때 목욕탕도 대중목욕탕 수준으로 고쳐졌다.
2019년 해체과정에서 기갑수색대대 2중대가 3군단 직할 20기갑여단 기갑수색중대로 재편성되었다.
- 화생방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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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대대
직할대 중 유일하게 넘버링이 붙었고 부대 별명은 대대장이 바뀔 때마다 변경되었다.
전체 병력은 4개 중대인데, 3중대는 본래 60여단에 파견을 나가 있었으나 아직 사단이 해체되기 전인 2018년 12월에 60여단이 먼저 8사단으로 전속되면서 파견부대였던 방공중대는 대대 본대로 복귀했다. 하지만 곧 이전할 부대라고 해서 막사를 새로 짓지 않고 컨테이너 20여 개를 들여다가 생활관, 행정반, 문화시설 등으로 사용했다.
3개의 방공진지가 존재했으며 덕분에 진지로 항상 인원이 차출됐다. 본부대에도 방공반 인원을 파견보내다 보니 부대 내에 근무를 설 인력이 부족했다.[10] 거기다 진지에 가더라도 그곳 역시 근무가 말도 안 되게 많아서 괴로웠다. 또한 지원을 자주 나가기 때문에 훈련도 굉장히 많았으며, 훈련인원을 보내고 나면 중대는 근무가 더더욱 헬이 되어버렸다.
보통의 다른 부대 같으면 운전병은 보통 근무를 빼주는데, 여기는 그런 거 없었다. 급한 운행이면 근무를 조치해서 가야 했다. 근무 인원이 빡빡하니 근무짜는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셈. 부대 경계구역도 탄약고 위병소에 추가로 유류고초소가 있어서 힘들었다.[11] 이 인원으로 근무가 돌아가는 게 신기했을 정도. 오죽하면 근무취침한 병장당직병이 그날 야간 근무를 들어갔다. 병사들도 근무에 예민해서 조금만 사이클이 잘못되거나 근무에 빠진 인원이 있으면 반발하면서 따지러 왔다. 갑자기 근무자 한 명이 급한 운행이나 업무로 빠져버리면 보통 다른 시간대 근무자랑 근무조치를 하는데 그렇게 하지도 못할 경우엔 근무짜는 간부나 그 날 당직병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근무 때문에 외박, 외출, 휴가 또한 조정해야 하므로 행정병도 스트레스가 심했다. 거진 근무만 서다가 전역하는 병사도 수두룩. 다른 부대와 비교했을 때 여기보다 많은 곳은 본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도 근무이야기는 항상 나왔다.
1개월 동기제에서 선진병영문화 정착을 의미로 2018년 말에 3개월 동기제로 바뀌었다. 생활관도 동기제 생활관으로 바뀌었다. 그 영향으로 계급 간 부조리는 거의 없어졌고 병사들 간 후임들에게 간섭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대신 동기 내에서의 신고가 많아진 것 같았다고 한다.
막사가 굉장히 오래되었지만[12] 2017년 여름에 에어컨을 설치해서 그래도 살만해졌다. 막사내 본부중대에만 전자렌지가 있는데 대회에서 상으로 받아왔다고 한다. PX는 깔끔하고 전자레인지도 넉넉했다.
주 무장은 발칸과 비호, 그리고 복합 비호로 짬뽕되어있으며 당시 어느 간부에 의하면 육군 방공 병과 중 유일하게 지상사격을 꾸준히 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실제 전투력도 수준급이라고 했다.
도심 중간에 있어서 많은 차량이 부대 앞에 차를 대거나 유턴을 하기도 하고 가끔 취객을 상대하기도 해서 위병소 근무자들이 정말 고생했다. 시내가 근거리라 외출 외박 시 이점이 있으며, 걸어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어, 타부대보다 휴가 가기는 나쁘지 않았다.
종교시설은 기독교는 영내에, 천주교는 근처 민간 성당, 불교는 수색대 불교를 갔다. 하지만 인원이 적어 종교활동 때도 트럭을 타고 방탄을 착용한 채로 이동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마찬가지. 전체적으로 직할대 중 화생방지원대와 함께 손꼽히는 열약함을 보여주었다.
- 항공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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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교육대대
해체 시점에서 막사는 2, 3중대가 좋았다. 침대는 아니지만 2008년에 지어진 침상형 막사라 매트리스 2개에 3명이 껴자는 제306보충대대[13]의 참사는 잊을 수 있었다. 1중대는 1990년대 말에 지은 막사라서 상대적으로 낡았지만 사단 본부대보단 나았다. 즉, 1중대 막사가 번쩍번쩍하는 새 막사일 때 2, 3중대는 다 썩어가는 건물에서 지냈다. 세상만사는 역시 돌고 도는 것.
세면시설은 어느 중대나 비슷한 수준이었다. 훈련병 신분에 정수기물을 먹을 수 있으며 10월부터는 온수를 틀어주기에 샤워통제시간 때 행동만 빠릿빠릿하면, 온수샤워를 할 수 있었다.[14]
병영식 또한 (구)제306보충대대에서 갓 넘어왔다면 지옥에서 극락을 맛볼정도로 미각을 정화할수 있었다.하루 지나면 짬밥은 거기서 거기다. 그나마 2010년대에는 조리기구가 신형으로 바뀌어 2000년도처럼 찐밥은 안 먹었다.여담이지만 2010년도에는 짬(음식물 쓰레기)량에 따라서 삼겹살을 지급하라는 사단장의 명령이 있었지만, 결국 신병교육대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혹시 나왔다고 해도, 조교 등 기간병들이 차지했을 것이다.
볼펜이나 수첩 같은 경우엔 첫날 병영생활지도기록부를 작성할 때 지급해주었다.
건물 주변이나 화장실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 하면 무조건 전 중대 훈련병을 죄다 밖으로 소집해서 군기훈련을 시켰다. 그러니 괜한 중대원들 군기훈련 받게 하지 말고 무조건 담배 내랄 때 내는 편이 나았다. 조교들에게 걸려서 빼앗긴 담배는 절대 돌려주지 않았지만, 수거할 때 자진납세한 담배는 훈련소 퇴소 시 돌려받을 수 있었다.
신병교육대인 만큼 훈련장도 주둔지랑 그리 멀지 않아서 이동하기도 편했지만 그만큼 남는 시간도 많았다. 그 남는 시간 동안 조교들이 열심히 굴렸다. 사격장, 각개전투 교장, 가스실습장 등 여러 훈련장에서 가장 가까운 건 1중대였다.
종교시설은 개신교, 불교, 천주교 3종이 있었으며 1중대 연병장 바로 건너편에 교회, 법당, 성당이 순서대로 늘어서 있었다. 이 중 개신교 예배당[15]은 매주 찾아오는 맛소스 찬양단이 유명했다. CCM, 찬양 등을 하는데 원곡에 비해 템포가 빠른 편이라 다른 두 곳에 비해서 분위기는 가장 신났다. 여자를 볼 수 있다는 메리트 때문에 가장 많은 훈련병들이 여기로 갔지만, 먹을 것은 약한 편이어서 주는 건 초코파이 하나와 음료수 한 캔뿐(…).[16] 이에 반해 불교는 떡과 과일[17], 천주교는 핫초코와 3~4개의 초코파이가 있었다. 게다가 신부님이 담배를 주는 경우가 있어서 흡연자인 훈련병들은 눈물을 흘리며 열성 신자가 되기도 했다.
덧붙여서 2010년 천주교는 '쇼 음악중심' 과 같은 음악 프로그램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점차 개신교 불교 인원이 줄고 천주교가 거대해지는 요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다만 개신교의 경우는 아무리 줄어들어도 일정 인원수는 확보되는데 불교는 처참하게 망하는 경우도 발생..(10명 미만) 10년도 초에는 불교에서도 다른 채널의 음악 프로그램을 보여주는 초강수를 두었으나, 보여준 다음 주에 바로 기기 고장으로 인해 방송은 방송대로 나오지 않고, 거기에 더불어서 하필 그날 불어닥친 강력한 바람으로 인해 불교 건물 입구에 있던 간판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훈련병들은 불교에 망조가 들었다, 불교 망했어요 라며 더욱 꺼린 현상이 발생.
한가지 신병교육대에 관련해 흑역사가 있었다면, 신병교육대 훈련장(영점 사격장) 부근을 지나다 보면 호수 옆에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2004년에 TNT폭파 시범을 교육하던 중에 발생한 끔찍한 대형사고 때문이다.
-제20기계화보병사단 신병교육대 TNT 폭파사고-
당시 상황은 2004년 12월 9일, 연말이라 사단에서 교탄소모로 TNT 12파운드를 소모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수중폭파 시범을 보일 때 1회 분량이 통상적으로 2파운드씩 묶어서 사용하는 것을 감안하면 6회 분량이 내려온 셈. 때마침 각개전투 교관은 각개전투 과목을 처음 맡은 하사였고 역시 신임이었던 중대장은 교관교류방문차 다른 부대 방문 중이라 사고가 나려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각개전투의 마지막인 TNT폭파 시범이 끝나면 바로 점심식사가 있었기 때문에, 폭파 시범을 6회나 진행하려면 너무나도 시간이 빠듯했다. 그래서 교관은 TNT를 도폭선으로 2파운드씩 동시에 묶어서 빨리 진행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엄청난 실수가 생긴다. 스위치를 연결한 선들이 6가닥이나 엉켜있는 상황에서 착각하는 바람에 물속에 넣어둔 TNT가 아닌, 다음에 터뜨릴 TNT에 격발 스위치를 연결해 버렸다. 하필 이 TNT는 희생된 조교의 손에 들려 있었으니 결과는 감히 말로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교관은 격발시범을 지겨워하며 바라보는 배고픈 훈련병들에게 격발 스위치를 눌러 보지 않겠냐며 자원자를 받았고 이에 한 훈련병이 자원하여 스위치를 눌렀다. 이때 상등병 조교의 손에 들린 육지 위의 TNT가 터지며 순식간에 교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200여 명의 훈련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망자는 두 명으로 각개전투 교관인 하사[18], 그리고 손에 TNT를 들고 있던 상등병[19]이었다. 두 명의 교관[20]은 지휘소 벽으로 엄폐되어 있어서 직접 다치지는 않았으나 고막이 터지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해를 얻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거리를 두고 격발을 시도했던 훈련병 두 명은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직접 발생한 사상자 6명에 이를 지켜본 훈련병들까지 생각하면 어마무시하고 심각한 사고였다.( 관련 기사) 사단의 교탄소모 종용 및 지휘관의 부재, 교관의 미숙, 어이없는 훈련병 참여, 교탄 사용 안전수칙 미준수 등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5부 합동 조사 이후, 사단의 교탄 과다불출 책임은 무마되고, 신병교육대에서 모든 책임을 떠맡아 신병교육대장 보직해임, 중대장 이하 간부들은 모두 보직 재편성되었다. 이후 위험성 교탄 부사관 및 여군 사용금지, 훈련전문 교관 등용 등의 후속조치가 생겼다. 사고 이후 TNT 격발 시범은 10년이 지난 이후까지도 하지 않았으며 수류탄 훈련 이후 클레이모어 폭파 시범만을 보여주었다. 사망한 교관인, 하사의 부모님의 직업이 석공이었으며, 이를 슬퍼한 나머지 위령비를 만들어 해당 부대에 세웠다.
아침 점호를 받던 중 훈련병이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 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당시 매일 아침 점호 때 연병장에 항상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취사장 앞에 있던 '선웅광장'이 이때 사망한 훈련병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따 지었다. 원래는 명칭과 차광 시설조차 없던 공터였으나 부대에서 훈련병의 부모님께 위로금을 모아 전달했는데 부모님이 이를 되돌려주며 다른 훈련병들과 부대를 위해 써달라고 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신병교육대 측에서는 뙤약볕 밑에서 식사대기하는 훈련병들을 위해 차광 시설을 짓게 되었고, 덕분에 훈련병들이 땡볕과 폭우 아래서도 불편함 없이 식사 대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여담으로 신병교육대는 예전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 때 삼청교육대였던 곳이었다. 신병교육대와 같이 있는 사단 직할대대로 정찰대가 있는데, 정찰대 있는 자리가 바로 舊삼청교육대 자리.
이 신병교육대 출신이고 20사단 정식 복무자가 아닌 유명인사로는 1중대에서 훈련받은 박진영, 3중대에서 4주 기초군사훈련을 이수한 차두리, [엠씨스나이퍼] 배우 박정진, 싸이로 알려진 박재상, 그리고 엠투엠의 손준혁 등이 있다.
2019년 11월 29일 사단 해체로 신병교육대도 해체되었다.
- 본부근무대
- 지형정찰대
3.2. 제60기계화보병여단
자세한 내용은 제60기계화보병여단 문서 참고하십시오.제8기동사단으로 이관.
3.3. 제61기계화보병여단
자세한 내용은 제61기계화보병여단 문서 참고하십시오.제11기동사단으로 이관.
3.4. 제62기계화보병여단
자세한 내용은 제62기계화보병여단 문서 참고하십시오.2019년 11월 30일 사단 해체로 부대 해체.
3.5. 포병여단
-
여단본부
홍천에 있는 11사단 포병여단본부 해체, 20사단 포병여단 존속으로 2019년 12월 01일 11사단 배속변경
- 제69포병대대 맹호 (18년 12월 부대해체 후 대대원 인접, 91대대 78대대로 분산)
- 제70포병대대 백곰 (19년 11월 부대해체 후 대대원 인접, 91대대 78대대로 분산)
-
제78포병대대 승리
2019년 12월01일 11기계화사단 배속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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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포병대대 백호
2019년 12월01일부로 11기계화사단으로 배속변경
주둔지는 경기도 양평 지역으로, 사단본부를 중심으로 각지에 분산되어 있다. 포병여단 예하 대대는 사단예하 여단들과 직할대 사격지원 역할을 한다. 69, 70, 78 대대가 각각 60, 61, 62여단의 사격 지원을 맡고, 91대대는 직할대 및 다른 여단의 요청이 있을 때 지원도 들어간다. 자연히 91대대는 훈련량이 무지막지하게 많다. 여단 훈련이 있을 때에는 해당 여단 지원 포병 대대가 같이 훈련을 나가게 되는데, 이때 사단 정찰대라도 훈련에 포함되면 91대대는 무조건 같이 나간다. 사단 전체 훈련일 때는 물론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여도 보병 여단에서 추가 화력 지원을 요청하면 얄짤없이 불려나가는게 91대대이다. 훈련량이 많다는 제7기동군단 중에서 20사단, 그중에서도 91대대는...정말 훈련이 많다. 4개 대대 중 가장 늦게 K-55자주포를 받아왔으나 2011년 가장 우선 K-9 신형 자주포 변경
91포병대대는 신막사이므로 포병여단 예하 대대 중 가장 시설이 좋다. 완공년도는 2010년 8월이었다. 이때 완공식하느라 10년 군번이 고생했다. 또한 최신 자주포인 K-9이 배치되어 있다. K-9이 가장 먼저 전력화된 이유도, 91대대가 사단 직할대 및 다른 여단의 추가 지원을 맡는 대대이기 때문이다. K-9이 전력화될 때의 일화를 소개하자면, 원래 91대대는 본부포대와 차리 포대가 함께 있고, 알파/브라보 포대는 독립 포대로 떨어져있었다. 그런데 K-9을 운용하려다보니 알파/브라보 포대의 주둔지 입구가 좁아서 K-9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포병 대대와 주둔지를 바꾸면서 대대가 하나로 모이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주둔지가 넓고 다른 대대와 달리 주둔지가 눈에 잘 뛰는 37번 국도변이 아닌 지방도에 위치해 눈에 잘안뛰어 전력노출이 적은 69대대와 2009년에 주둔지 교체가 이루어졌다.
69포병대대
18년 모월 모일부로 부대가 해체되었다. 독립,본부포대 모두 해체되었으며 남아있던 장병들은 다른 대대로 뿔뿔히 흩어졌다.
70포병대대는 포병여단 예하대대 중 가장 시설이 좋지 않다. 영화 실미도에 나왔던 그러한 모습의 통합막사라는 사실...(포반에 신병 전입 간 날, 50명이 같은 내무실을 썼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신교대 건물이 복층이라 단층 막사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곳은... 그냥 부대 전체가 단층 건물들로 이루어져있다. 7~80년대에 지은 기존 단층막사에 샌드위치판넬을 사용하여 이곳저곳 확장한 형태다. 2015년 말 이등병생활관이 각 포대별로 신설되었다. 물론 정식건물이 아니라 컨테이너다. 그래도 에어컨, 전기온돌은 있다.
특이하게도 부대 내에 포병종합훈련장이 있다. 70포병대대는 비가오거나 눈이오거나 대대전술훈련은 여기서 진행한다. 이 훈련장이 참 별로인게 여름에는 덥고 습하고, 겨울에는 그냥 무조건 춥다. (남한강 바람이 시원할거라고 생각하는건 경기도 오산이다)
부대 해체, 인원 및 장비 이동 이후, 해당 부대의 위성사진이 한동안 카카오 지도에 공개된 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다시 가려졌다. 해당 부대의 영내는 여전히 포병 종합 훈련장으로 사용중이다.
포병여단은 예하 대대의 지역이 넓게 퍼져있어 대대마다 외출가능 지역이 다르다. 포병여단 본부는
20사단의 다른 여단들은 정훈병과가 지휘부 소속인 데 비해, 포병여단은 작전과 소속이다. 영내 야근 및 외박(...)을 자주 할 수 있게 된다.
여단 본부를 신막사로 건설하던 중 건축사가 도산해서 여단 본부 인원들이 오랫동안 컨테이너에서 지내야 했다.
4. 출신 인물
4.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
역대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 |||||
역대 | 이름 | 계급 | 임관 | 비고 | 기타 |
초대 | 유흥수 | 예) 소장 | 前 사단장 | ||
2대 | 송석하 | 예) 소장 | 육사 2기 | 前 한국국방연구원장 | |
3대 | 김상복 | 예) 중장 | 군영00기 | 前 육군참모차장 | |
4대 | 박현수 | 예) 소장 | 前 사단장 | ||
5대 | 이정석 | 예) 준장 | 군영00기 | 前 사단장 | |
6대 | 문형태 | 예) 대장 | 육사 2기 | 前 합동참모의장 | |
7대 | 류근창 | 예) 중장 | 육사 2기 | 前 국방부차관 | |
8대 | 김안일 | 예) 준장 | 육사 2기 | 前 사단장 | |
9대 | 최대명 | 예) 소장 | 前 합동참모대학장 | ||
10대 | 박희동 | 예) 대장 | 육사 3기 | 前 3군사령관, 2군사령관 | |
11대 | 김종환 | 예) 대장 | 육사 4기 | 前 합동참모의장 | |
12대 | 윤필용 | 예) 소장 | 육사 8기 | 前 수경사령관 | [하] |
13대 | 이주호 | 예) 준장 | 前 사단장 | ||
14대 | 민경중 | 예) 소장 | 육사 8기 | 前 국방부 인력차관보 | |
15대 | 김인화 | 예) 소장 | 육사 9기 | 前 사단장 | |
16대 | 한민석 | 예) 소장 | 前 사단장 | ||
17대 | 김영동 | 예) 소장 | 현지임관 | 前 사단장 | [22] |
18대 | 이철희 | 예) 소장 | 前 제2관구사령관 | ||
19대 | 박준병 | 예) 대장 | 육사 12기 | 前 보안사령관 | [하] [반] [25] |
20대 | 최세창 | 예) 대장 | 육사 13기 | 前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 [하] [반] |
21대 | 이종구 | 예) 대장 | 육사 14기 | 前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하] |
22대 | 민병돈 | 예) 중장 | 육사 15기 | 前 육군사관학교 교장 | [하] |
23대 | 이문석 | 예) 대장 | 육사 17기 | 前 제1야전군사령부 사령관 | [하] |
24대 | 서완수 | 예) 중장 | 육사 19기 | 前 국군기무사령관 | [하] |
25대 | 표순배 | 예) 중장 | 육사 21기 | 前 제9군단장 | [하] |
26대 | 조성호 | 예) 소장 | 육사 22기 | 前 육군포병학교장 | |
27대 | 정영진 | 예) 중장 | 육사 23기 | 前 합참 작전본부장 | |
28대 | 유홍모 | 예) 소장 | 육사 24기 | 前 품질관리소장 | |
29대 | 정채하 | 예) 소장 | 육사 26기 | 前 육군기계화학교 교장 | |
30대 | 박청욱 | 예) 소장 | 학군 6기 | 前 육군본부지휘통신참모부장 | |
31대 | 정동한 | 예) 중장 | 육사 29기 | 前 국방대학교 총장 | |
32대 | 이종근 | 예) 소장 | 3사 2기 | 前 육군기계화학교장 | |
33대 | 박정이 | 예) 대장 | 육사 32기 | 前 제1야전군사령부 사령관 | |
34대 | 오정석 | 예) 중장 | 3사 10기 | 前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 |
35대 | 임국선 | 예) 중장 | 학군 17기[33] | 前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 |
36대 | 나상웅 | 예) 중장 | 3사 16기 | 前 육군교육사령관 | |
37대 | 김상철 | 예) 소장 | 육사 40기 | 前 육군미사일사령관 | |
38대 | 유무봉 | 예) 소장 | 육사 42기 | 前 육군본부 아미타이거 4.0 통합기획단장 | |
39대 | 강인순 | 예) 소장 | 육사 44기 | 前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 |
40대 | 황유성 | 예) 중장 | 육사 46기 | 前 합동참모차장 |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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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이
육군사관학교 32기. 소장 시절 사단장을 역임. 그 당시 직속상관인 제7기동군단 군단장이 육군사관학교 2년 선배인 김근태였다. 천안함 침몰원인 규명 시 북한군 어뢰 추진체를 발견하여 대장 진급 후 전역. -
박준병
공수특전 여단장 재직 시 하나회 소속으로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고 소장진급 후 사단장으로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투입. -
윤필용
소장 시절 사단장을 거침. -
임국선
학군 17기. 2014년 2작사 부사령관직을 끝으로 중장 전역하였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역임했다. 2009년 7월 예하부대를 순시중 양평군 흑천에서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노인을 발견하자 사단장이 직접(!) 하천으로 뛰어들어 구한 일이 유명해지기도 했다. 기사 전문 학군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가장 대장 진급이 유력한 인사였으나, 소위 시절 특전사에서 부중대장을 지낸 이력이 발목이 되어 소대장 보직이 없어서 중장으로 예편해야만 했다. 대장이 되려면 소대장부터 군단장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하며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
나상웅
육군3사관학교 16기 출신으로 임국선 2작사 부사령관 후임으로 2010년~2012년까지 소장시절 사단장을 역임했다. 사단장 있던 시절 병영생활 부조리 개선에 많이 신경썼다. # 이후, 육군기계화 학교 교장을 거쳐 3스타로 제3군단 군단장 지냈으며, 현재 육군 교육사령관을 끝으로 예편. -
강인순
육군사관학교 44기. 2018년까지 사단장을 역임했다. 중령 시절 7군단 작전처 작전계획과장을 역임했다.[35] 키가 황기철 前 해군참모총장 뺨치게 크다. 작전계획과장 시절 이름이 비슷한 강인철 당시 중사[36]가 7군단 강습대대 3중대 3소대 부소대장으로 있었는데 간혹 그 둘의 이름을 헷갈리는 사람도 있었다.
4.2. 장교/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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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62연대 3대대장 역임. 이후 보병 제25사단장, 육군대학 총장, 국방부 동원국장,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분과위원, 비상기획위원회 사무처장 등을 거쳐 참여정부 때인 2004년에 국방부차관으로 임명됐으나, 후술할 논란으로 인해 2005년 사임함. -
강신철
現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대위 시절 111대대 2중대장 및 사단 작전장교 역임. -
김병기
現 제5기갑여단장. 대령시절 62여단장 역임. -
김한태
前 육군부사관학교장. 중령시절 109기보대대장을 역임. -
김화종
現 지상작전사령부 작전참모부장. 대령시절 참모장을 역임. -
손대권
現 군수사령부 사령관. 중령시절 107기보대대장을 역임. -
안병석
前 연합사 부사령관. 대령시절 60여단장과 참모장을 역임. -
전용범
前 제1군수지원여단장. 대령시절 62여단장 역임. -
채명신
M-1고지 전투 당시 60연대장이었다. -
함희성
前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중령시절 111기보대대장을, 대령시절 60여단장 역임.
4.3.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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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 래퍼
래퍼 자메즈. 62여단 109기보대대 병장 만기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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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순 - 유튜버
핫소스에서 카매라맨 역할을 주로 한다. 핫소스 컨텐츠 중 군대썰 풀기에서 본인이 20사단 신교대 수류탄조교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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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 -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
1994년 4월 21일 입대, 정찰병으로 복무, 1996년 6월 27일 병장 만기전역.
- 이승현 -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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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락 -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1972년 11월 17일 입대, 차량수리병, 1975년 9월 16일 하사 만기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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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만 -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1982년 3월 13일 방위병 입대, 소총수로 복무, 1983년 5월 18일 일병 소집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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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윤 - 배우
예하 모 전차대대 행정병 출신. 진짜사나이 동반입대 특집에서 밝힌 바 있다.
- 한동숙 - 트위치 스트리머, 유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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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 게임 캐스터
신교대를 본 사단에서 수료했다. 자대는 불명.
5. 기타
5.1. 훈련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더불어 훈련량은 전군에서 톱으로 뽑힐 만큼 토나오게 많았다.기계화부대이다보니 기동훈련이 중심이다. 중대 ATT, 대대 ATT, 여단 BCT, 군단 FTX를 전부 전차/장갑차 몰고 나가서 뛰어야 하고, 종종 전차와 기계화보병간의 상호배속훈련, 수기사 훈련에 대항군으로 동원되는데 이건 정규 훈련일정에 없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전차/ 장갑차 숙달훈련/탄약 적제 훈련을 실시하고 기동 연습을 하는데 역시 훈련 일정에 없다. 그리고 어쨌든 '보병사단'이므로 가외의 일정을 잡아 행군도 시킨다. 게다가 K-21로 인해 부사관이 소대마다 무식하게 많이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근처의 특전부대 침투 훈련에도 비정기적으로 참가하여 밤새 차단선을 펼쳐 훈련을 도와주기도 하고 역으로 사단의 경계근무 검열을 위해 각 대대로 침투하기도 한다.
장갑차 숙달 훈련의 경우 비 주기적으로 도로주행 훈련을 실시하여 조종수, 부 조종수의 기량을 평가하기도 한다.[38] 이때는 대대 자체 훈련[39]이라 중대마다 수십 명씩 호출하여 주요 사거리등에 배치[40]하여 교통 통제 등을 하게 된다.
주된 일과는 기동장비 정비 및 교육훈련. 장갑차, 전차는 보유수가 제법 되는지라 정비계획 잘못 짜면 심히 곤란하다. 1개 소대에 단차가 넷 붙는데, 단차 하나에 K6 중기관총과 M60 기관총[41]이 각각 1정씩 있어 전투지휘검열 때 단차와 총기를 기름목욕시켜주다보면 24시간도 모자란다. 탄약은 많이 나오는데 정비 위주로 시간을 잡아먹다보니 막상 사격을 나갈 시간이 부족하여 최소 4박 5일의 일정을 잡아 종훈장으로 가서 왕창 갈겨버리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종훈장 야산은 불도 잘 난다.(...) 게다가 종훈장은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비온후 훈련장으로 가는 건 조종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종훈장 부근에는 대대와 사단 예하 직할대대가 포진하여 기간병들은 매일 포성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국방부에서는 전차/장갑차/자주포 다루는 부대라 좀 있어보이는 사진을 많이 뿌리지만 실제는 기름과 흙먼지에 쩔어 산다고 보면 된다.K-21이 배치된 대대는 장비교육도 받아야 하고 이것저것 테스트 하는 입장인지라 더욱 골치아프다.
전차대대의 경우엔 부족한 인원+많은 경계소초 때문에 GOP만큼은 아니지만 평소엔 근무지옥을 맛볼 수 있다. 한 중대에 병사가 15~20명 남짓인데 이 인원으로 초소 2개를 복초로 24시간 돌리니 상상이 갈 것이다.
2012년 전후로 훈련난이도가 이전보다 엄청나게 빡세졌다. 후술할 사단장의 주기행군 완전부활과 실전기동훈련, 무식한 양의 국지도발 예행훈련이 추가된데다 훈련 시 위장마스크 착용이 금지, 안면위장 크림은 기본이고, 심지어 방탄, 전투조끼까지 최대한 위장 등...
5.1.1. 유격 훈련
유격 훈련장[42]은 용문산 용문사 관광지 바로 옆에 있는데 유격장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식당과 펜션들이 늘어서 있어 유격행군 시 민간인이 구경하기도 한다.[43] 야간 유격장 입구에서 근무를 서게되면 정면에서 벌어지는 바비큐 파티를 관람해야 하는 고문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막타워는 안전 문제로 2009년 이후로 폐쇄되었고 용문산 산악등반으로 대체하고 있다.사단 해체 이후, 해당 유격장은 20사단 유격장에서 7군단 유격장으로 변경되었고, 명칭도 '결전유격장'에서 '북진유격장'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유격장 관리주체가 20사단 수색대대에서 위와 같은 사유로 7군단 예하 제2강습대대로 변경되었다.
요새는 대대에서 전역자들에게 반납받은 전투복을 돌려입는지라 예전처럼 파병부대가 입었던 사막위장 패턴 전투복이나 해병대 전투복은 나오지 않으며,[44]계급 역전현상 또한 막기 위해 위장테이프로 전부 가리거나, 오바로크를 뜯으라 지시한다. 용문산은 국립공원이 아닌 관광지인 지라 길이 잘 닦여 있으며 놀이기구도 있어 소풍 온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다. 그 뒤론 본격 산악등반. 바위산이고 높이도 높은지라 만만하게 보면 큰코 다친다. 장애물 코스에 있는 샛길을 통해 관광지로 들어가는데 주변에 경고표지판이 있긴 하지만 통로가 개방되어 있어 실수로 유격장으로 들어오는 민간인들도 있다. 취사장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연병장이 보이고, 연병장 좌측으로는 기다란 언덕을 통해 숙영지로 올라갈 수 있다. 예전에는 유격 훈련전 작업인원들이 두돈반을 타고 올라가 일일이 24인용 텐트를 각 대대 병사들이 치고 철수하였으나, 2010년경 사단장의 명령으로 숙영지 터마다 공구리를 치고 24인용 텐트는 항시 설치가 되어 기갑수색대대에서 관리, 감독한다. 참고로 유격장 주제에 샤워장(!)도 있지만 시설이 워낙 좋지않고[45] 온수는 매우 부족하여 훈련소 시절처럼 유격 조교와 교관들의 통제하에 30초 물 묻히기, 30초 거품내기 등의 흠좀무한 통제 샤워시간이 존재한다. 그래도 유격장에서 매일 샤워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간부들과 친하면 취사장 옆에 일명 선녀탕이라 불리는 계곡이 있어서 홀딱 벗고 씻기도 한다. 이 외에도 유격장 내에는 폐 창고, 간이 땅굴 등이 있어 야간훈련이랍시고 담력테스트를 실시해 이등병들의 혼을 쏙 빼놓기도 한다.[46]
이후 2010년 사단장 교체 이후인 2012년, 유격조교 선발기준이 바뀌었는데 유격대장이 각 대대에서 인원을 선발해서 뽑아갔다. 즉슨, 유격파견으로 포상은 포상대로 먹고, 유격조교 임무를 약 8개월 가까이하다가 다시 해당 대대에 들어가서 군생활을 한다. 하지만 대다수가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에 최고선임이 갓 상병을 단 상물이라 유격받을 때 말년병장이나 선임급들까지 이젠 이등병한테 신나게 굴러야한다며 뒷담을 까기도. 하지만 2012년 5월 초, 예하 포병대대 중 한 곳이 명령을 무시하고 유격조교 인원을 파견했다가 유격훈련 중인 모 대대를 방문한 사단장에게 걸려 개박살나고 유격조교훈련을 받은 인원들은 강제로 연대복귀한 전설이 있다.
2015년 유격장 내 샤워장이 공사 중에 있었으며, 2016년 완공되어 훈련 후 따뜻한 샤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제한시간 3분.
1987년 이전까지는 유격훈련과 더블어 공수훈련도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전반기 훈련이 공수훈련이면 후반기엔 유격훈련, 그리고 그 다음 해 유격훈련 - 공수훈련으로 바뀌었다. 이 훈련은 1987년까지 진행되었으며 현재 신병교육대 대강당 자리가 있는 곳이 공수훈련장이었다. 당시 사단 수색대에서 차출된 병사가 공수교육 위탁으로 교육받고 사단 공수교장에서 공수 조교로 활동했으며 평상 시에는 논산군번 내부반장으로 업무수행(1980년대 당시 논산군번은 4주 교육 후 20사단 배치 시 자대로가기 않고 여기 신병교육대에서 2주 동안 군기 교육을 받았다.) 후 자대로 배치받았다.
공수훈련 일주일 교육 후 100킬로 행군(받으러 갈 때도 행군으로 갔다.)으로 부대복귀를 했고, 추가로 1985년도 이전까지는 1년에 2번 200킬로 행군 진행했으며 100킬로 행군은 1년에 최소 3, 4회 이상 진행했다. 1983, 84년 군번들은 전역 때까지 2,000킬로~1,500킬로 행군 후 전역했으며, 200킬로 행군은 1986년부터 유야무야 폐지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포병기준이니 보병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외 훈련은 매년 9월 유격 훈련을 기점으로 그 다음 해 3월 말까지 훈련을 하여, 부대 내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덧붙여 지금의 20사단 훈련은 그때와 비교하면 유치원 수준이라고...
5.1.2. 행군
행군의 경우에는 주기적으로 실시하다가 2009년 사단장 왈 "기계화부대인데 왜 행군일정이 이리 빡빡하냐, 조정해라" 이 말 한마디에 행군을 몇 달에 한 번, 심한 곳은 아예 실시하지도 않았으나 2010년 말(호국훈련 끝나자마자 새로부임), 새 사단장이 부임하고 1년 후부터 신년맞이 행군을 하더니 부활시켜 버렸다. 사단장 왈 "장갑차 퍼지면 니들은 행군 안 하냐??" 사단 본부에서 행군량을 한 번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110대대가 압도적으로 1위했다고 한다... 정찰대도 110대대를 따라 잡지 못했다.[47]5.2. 부대 영상
korea army lumix gh3 결전부대 20131003 |
제2회 제20기계화보병사단 안보체험행사 (2013.10.3) - 중대급 사격 및 기동시범 |
2014 기동화력시범 |
사단창설기념 대규모 기동훈련 |
K2 흑표 전차 사격훈련 |
5.3. 사단가
1절
보아라 우리는 무적의 용사다
겨레와 나라 위해 일어선 우리
물이나 불이나 거칠 것이 있으랴
돌진하는 우리 앞에 승리 뿐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사여
빛나라 영원히 이십 사단
2절
나간다 우리는 용맹을 떨친다
삼천리 아름다운 내조국 위해
선봉은 내가선다 당할자가 누구냐
다하리라 이생명 승리의 날까지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사여
빛나라 영원히 이십 사단
-20사단가
보아라 우리는 무적의 용사다
겨레와 나라 위해 일어선 우리
물이나 불이나 거칠 것이 있으랴
돌진하는 우리 앞에 승리 뿐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사여
빛나라 영원히 이십 사단
2절
나간다 우리는 용맹을 떨친다
삼천리 아름다운 내조국 위해
선봉은 내가선다 당할자가 누구냐
다하리라 이생명 승리의 날까지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사여
빛나라 영원히 이십 사단
-20사단가
6. 사건사고
6.1. 월북 사고
본래 20사단은 경기도 연천에 있었던 부대로 최전방 부대였다. 그런데 1977년 10월 20일, 연천 전곡리에 예하부대 62연대 1대대 대대장 유운학 중령이 무전병[48]과 함께 월북하는 대형사고[49]가 발생 후 사단 전체가 후방으로 이동 (경기도 연천 → 강원도 춘천 → 경기도 양평군) 했고, 20사단이 이동한 자리에 주둔하고 있던 5사단이 20사단 담당구역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원래 제5군단 소속이었다가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 부대로 개편한 후, 1983년 제7기동군단을 창설하면서 이곳에 넣었다.6.2. 12.12 군사반란 가담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주도 신군부의 정권 장악 주력부대였다. 당시 하나회 주력 멤버 중 하나였던 박준병 소장이 당시 20사단장이었다. 만약 반란군 측 주요 부대인 1·3·5공수여단, 9사단, 30경비단과 진압군 측 주요 부대인 장태완 소장의 수경사(現 수방사)와 9공수여단 병력이 본격적으로 격돌할 경우 20사단은 곧장 서울로 추가투입 되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장태완 소장의 결단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국군 간 서울시내 대규모 유혈 충돌은 피할 수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현재 기보사단으로 전환된 사단 중 상당수가 12.12 사태 때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부대들이다. 예를 들어 30사단은 반란군의 선봉이었던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방조하였다.6.3. 5.18 민주화운동 학살 가담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으로 미국으로부터 병력이동을 승인받고 포병여단을 제외한 예하 연대(현재는 여단) 병력 전부와 포병 1개 대대가 투입되기도 했다. 다른 5.18 당시 광주의 공수부대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 20사단 군인들도 정상인들이 아니었는데, 공수부대들과 똑같이 20사단 61연대 2대대가 송암동에서 도로를 봉쇄한 채 수하 조치도 하지 않고 그냥 말도 없이 근처를 지나가는 차량이 보이는 족족 사격하거나 대검으로 찌르는 묻지마 살인/살인미수를 저지른 건 물론, "병원에 빨갱이가 있다는 소문"만 듣고 피아 확인도 없이 민간 병원 창문에 민간인들이 맞거나 말거나 묻지마 총질을 해댔다. 뿐만 아니라 5월 22일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시민들에게 총기난사를 저지른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미친 짓을 벌이기도 했다.때문에 관련 역사를 알거나 집안에 5.18 관련자가 있는 병사들 중에는 20사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2010년경에도 광주, 전남 출신 20사단 장병들은 휴가갈 때 사단마크를 떼고 내려갔으며 한 소위는 20사단 마크가 붙은 전투복을 입고 휴가를 갔다가 광주에서 택시기사가 승차거부를 한 적도 있다.[50] 비슷하게 진압군으로 투입되어서 무차별 학살을 벌인 특전사(특히 직접 학살을 벌인 3, 7, 11공수)는 사복을 입고 휴가를 갔다는 풍문이 있다. 현재도 사단 사령부 1층 중앙 통로에 당시 전두환에게 수여받은 훈장이 다른 훈장들과 함께 여전히 남아 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에 5.18 당시 예하부대 62연대 3대대장이던 유효일이 국방부차관으로 임명됐는데 재직 당시 그가 지휘했던 부대는 시민들과 충돌하진 않았으나 과거 이력이 이력인지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장을 맡은 데에 대한 도덕적 논란이 빚어졌고 녹화사업 관여 논란까지 빚어지자 결국 사퇴했다.
20사단이 기계화보병이 된 이유는 5.18 광주 때 진압 공로설과 수기사 견제설이 있으나 실상은 전략예비대로 지리적으로 한강 이남에 위치하였고 수기사 단독으로는 북한의 전차러쉬를 막을수 없었기에 개편한 것. 다만 기계화개편 이후에도 군사정권을 수호하는 충정부대로서 임무는 여전하였는데 군사정부시절 역대 사단장을 보면 민병돈 중장(육시교장 때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를 비판하다 전역됨)[51]을 제외하곤 전원이 4성장군은 물론 국방부장관, 참모총장까지 지냈다.
충정부대의 흔적으로 목봉이 창고에 최근까지도 남아있었으나 2008년에 폐기했다. 1993년 이후 충정훈련을 아예 안 하긴 했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각종 진압장비를 보관하고 있었고, 탄약고에는 CS 수류탄이 있었다.(일부 대대에서는 충정봉을 오분대기조 무기로 활용하기도 했었다.-일명 오대기봉)
7. 여담
-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기 전에 만약 탄핵선고 이후 시위대(촛불 혹은 태극기)의 양상이 과격화되어 경찰력으로 통제가 불가능하게되면 서울로 진입해서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광화문 등에 배치되어 진압작전을 수행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물론 20사단이 직접 계획한 작전은 아니다.
- 20사단과 11사단이 통폐합될때 기계화사단의 역사가 더 긴 20사단 쪽이 해체되는데는 이런 흑역사(대대장의 월북 사건 + 쿠데타의 주요 병력으로 동원)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52]
신인균 국방평론가에 의하면 사실 20사단이 11사단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폐합될 예정이었으나 20사단 때문에 지역발전이 더디다고 여긴 양평 주민의 님비와 함께 11사단이 없으면 지역경제가 파탄날 것으로 여긴 홍천 주민의 핌피가 크게 작용하여 11사단으로 통폐합되었다고 한다. 정작 20사단 사령부 자리에
2사단 창설준비단이 들어가버린게 아이러니하다. 여기까지가 본인의 주장이고 실제로 당시 양평 군민들은 단순히 기계화부대가 떠나길 바랬다. 가장 큰 이유는 인구밀집지역에서 거대한 궤도차량이 수시로 지나가는 문제도 있고 용문산에서 사격훈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굉음이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진 지역 특성상 양평읍 전역으로 소리가 울리는데 이를 싫어하는 주민이 다수. 다만 반대로 홍천 군민들은 기계화부대가 홍천으로 통폐합이 이루어지길 원했다고 한다.
-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라이벌 관계다. 서로가 더 잘났네 하면서 투닥거리는 곳이 훈련이 널널할 수 없다. 양개사단의 여단은 전술훈련평가시 쌍방훈련이 진행되는데 사이가 사이인 만큼 전차 세워놓고 주먹다짐하거나, 기계화보병들은 판정관 무시하고 길가에 단체로 드러누워 육탄저지했다며 우기고, 아예 전차나 장갑차 세워놓고 길막아버리고 도주를 하는 등 치열한 경쟁심이 많았다. 업무 협조조차 상대 사단을 방문이라도 하면 위병소부터 냉랭한 취급을 당하기도. 그리고 결국 수기사는 남고 20사단이 해체 결정되면서 이 라이벌 관계도 끝나게 되었다.
- 2000년 1월 3일에 혹한기훈련을 실시하면서 2000년대 들어 전군 최초의 훈련이라 매스컴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혹한기 훈련의 특성상 조종수들은 추위와 귀찮음에 짬밥을 개밥처럼 몽땅 섞어 따뜻한 조종석에 앉아 먹곤했는데 행보관이 매스컴에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카메라를 피해 숨어다니며 먹었던 웃지못할 사연도 있다. 저녁에 방영되는 생활정보 프로그램이나 뉴스등에서 훈련장면과 인터뷰 등이 소개 되었다한다.
- 육군의 핵심전력이기 때문에 K1A1, K21 보병전투차등 신형장비가 최우선적으로 배치되어왔다. 2009년 12월에는 K21의 도하훈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때 공기흡입구에 물이 들어가 단차 한 대가 침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 침수사고는 도하훈련 이전에 벌어진 일.
- 사단 본부대 입구에는 M48 패튼이 자리잡고 있다.
- 디시인사이드에 20사단 갤러리가 있는데 글리젠은 느린 편이다. 거의 정전갤 수준. 2000년 이전 복무했던 사람들이 간혹 들락거리는 편이다.
- 게임 아머드 워페어에서 K1A1 전차와 국군 흰지렁이 위장, 20사단 데칼을 구매하면 모든 전차에 흰지렁의 도색과 20사단 사단마크를 부착할 수 있다.
-
대부분의 예하부대가 위수지역이 양평인 관계로 외출 외박은 양평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때 서울까지 위수지역으로 잡혀있어서 서울이 집인 사람들은 서울로 갔다고 하나 변경되었다. 그래도
점프를 하려는 사병들은 꽤나 있다. 지금은 지하철도 다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경향이 있는 편. 이때 붙은 별명이 양평 카츄사. 여주 지역 부대의 경우 위수지역이 양평과 더불어 이천시까지 넓게 지정되어 있는데 여주시 자체가 외박을 나가서 놀 만한 장소가 마땅히 없기 때문인 듯 하다.
하지만 양평은 안 가고 전부 이천으로 나간다는 게 함정
- 사단훈련소가 1980년대에 삼청교육대로 쓰였다고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조교들이 하기도 한다. 막사 뒤쪽에 있는 경계초소가 이때 귀신들이 나와서 경계근무 중이던 조교와 훈련병이 그걸 보고 기절했고, 이 때문에 경계초소가 폐쇄됐다는 도시전설급 이야기도 덧붙여서 말이다. 막타워나 위병소도 귀신이 종종 나타나는 장소라고 한다. 삼청교육대 끌려간 아들 얼굴 보려고 막사에 돌 던지던 할머니가 죽어 귀신이 된 이후로 초소에 돌 던지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면 아무도 없다든가, 막사 지붕위를 휙휙 뛰어다니는 뭔가가 보인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신병 훈련소에 무속인들도 가끔 왔었다. 그리고 사단훈련소 근처에 연못이 있는데 무속인들 모두 그 연못에 귀신이 모여 있다고 말했고 후에 그곳에서 TNT폭발 사건이 일어 났다. 일종의 군대 괴담.
- MBC <우정의 무대>에선 1990년 5월 13일 및 1994년 6월 14일에 두 차례 다뤄진 바 있고, KBS1 <TV 내무반 신고합니다>는 2000년 3월 6일 및 2002년 8월 26일, <청춘 신고합니다>는 2004년 7월 26일, MBC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는 2014년 10월 5일 ~ 19일 방영분에 각각 다루어졌다.
- 고성균 예비역 소장의 유튜브 채널에 사단 해체 후 과거 주둔지였던 곳을 찾아 예비역들의 소회를 다룬 적이 있다.
[1]
제5군단(1953~1977),
육군본부 직속부대(1977~1983)
[2]
양기사라는 말이 수기사 측에서 20사단을 비하할 목적으로 지어낸 멸칭이다. 306보충대→20사단 신병교육대 트리를 탄 사병은 제대할 때까지 듣지 못할 수도 있는 명칭이다.
[3]
칠이 전부 벗겨진 궤도까지 검은 칠을 했다고 한다.
[4]
K21처럼 초도 보급 후 성능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20사단의 K-2전차는 단 한 대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 그저 종훈장을 빌려주고 테스트를 할 뿐.
[5]
해당 인터뷰에서는
박정이 예비역 육군 대장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으나 그가 자유한국당 소속에 전 20기계화보병사단장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립적인 인터뷰라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제11기계화보병사단을 일반 보병사단으로 둔갑시키는 등 기본적인 사실관계도 틀려있다.
[6]
양평은 서울과 가깝고 경의중앙선이 연결되어 은퇴하고 노후를 보내는 주민들이 많고, 펜션 등 관광숙박산업이 발달해있어 톡까놓고 말해 군인 없어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도시다. 때문에 시끄럽기 그지없는 기갑사단을 내쫓길 원했다.5월만 되면 전자포 사격 충격파로 유리가 흔들리고 소방헬기가 떠다니는데 참는게 보살이다
[7]
참고로 이 부대 마크는 워낙에 전차를 많이 운영하였기에 유튜브의 전차 사격 영상을 보면 거의 항상 보게되는 마크이다.
[8]
항공대, 7군단, 공군 등.
[9]
사격장관리병은 수색대 출신으로 뽑는다.
[10]
진지에 들어간 상태에서는 휴가를 못 쓰기 때문에 부대에 복귀한 후 휴가를 몰빵해버리므로 근무를 설 인원이 없었다.
[11]
1명당 하루 주간1번, 야간1번 근무는 기본이고 더 설 때도 있었다.
[12]
2018년 2층 1중대로 가는 한쪽계단 천장이 살짝 무너질 거 같아 불안해서 폐쇄하였다. 그래서 중앙계단으로 다녔다.
[13]
2014년에 폐지되어 2015년부터 2019년까지는 사단으로 바로 입영했다.
[14]
다만 훈련소 특유의 고질적인 온수부족으로 조교 두 명이서 50명이 넘는 벌거벗은 인원을 통제했다. 30초 적시고, 비누칠하고 1분 동안 비눗물제거(...)
[15]
하필이면 이름이 샘물교회다. 응?
[16]
1999년에는
소보로빵 하나에
칠성사이다 1캔.
[17]
보통은 초코파이와 커피를, 행사가 있었다면 빵이나 햄버거(!) 등을 뭉탱이로 퍼주었다. 참고로 반야심경을 모두 외워 정독하면 초코파이를 1상자를 주었다.
[18]
사고 직후 후송되었으나 10일을 못 넘기고 숨졌다.
[19]
즉사했다. 슬프게도 사고가 일어난 당일이 생일에 휴가를 나가는 날이었다고 한다.
[20]
남군 중사 1명, 여군 소위 1명.
[하]
하나회.
[22]
유운학 중령 월북 사건으로 보안 부대장인
이학봉과 함께 보직 해임. 김영동 소장은 예편되었으나 이학봉 중령은 하나회 출신 핵심 멤버로 준장 예편했다. 5사단과 임무 교대하여 양평으로 부대 이동.
[하]
하나회.
[반]
12.12 군사 반란 가담자.
[25]
5.18 민주화운동 당시 20사단의 병력을 광주로 이동시켜 시위대를 학살할 당시 사단장.
[하]
하나회.
[반]
12.12 군사 반란 가담자.
[하]
하나회.
[하]
하나회.
[하]
하나회.
[하]
하나회.
[하]
하나회.
[33]
원광대학교
[34]
해체 전 마지막 사단장.
[35]
육군사관학교 내에서조차 엄청난 엘리트로 동기들이 잘해야 이제 갓 중령에 진급해서 대대장을 하고 있을 그 시기에 강인순은 이미 1차 대대장 보직을 완료하고 군단참모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소위로 임관한 이래 이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단 한번도 진급누락된 적이 없었으나 중장 진급에서 2번이나 누락되었다. 현재는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지내다가 전역하였다.
[36]
현재는 상사로 동 부대 화기중대 행정보급관이다.
[37]
원래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군면제 대상이었지만 "남자라면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할아버지 김병로의 말에 따라 군복무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군대는 나름 일찍 가서 군 복무 중에
4.19 혁명을 겪었다고 한다.
[38]
기보대대의 영내는 매우 넓은 편이라 평소 주특기 훈련 시에는 영내를 주행한다.
[39]
일단 장비가 영외로 나가는 것이니 여단장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한다.
[40]
사거리, 사고다발지역 등은 부사관급의 간부를 같이 배치하기도 한다.
[41]
K200 한정. K-21에는 공축기관총(M60)이 1정 배치되어 있고 기다 박격포 소대나 구난차에는 K6 기관총(혹은 MG-50)이 비치되어 있다.
[42]
(구)사단본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60여단의 경우, 유격훈련 시 칠봉산에 가서 한다.
[43]
유격장 행군코스 중 특히 뱀술, 생사탕을 파는 곳이 많이 보인다. 참고로 뱀 수렵은 불법이다.
[44]
가끔씩 유격조교 훈련 인원에게 지급할 때 나온다.
[45]
지하수를 끌어와 물탱크에 저장한 물을 보일러를 이용해 데우는 방식.
[46]
물론 조교들이 귀신담당.
[47]
당시 대대장이 행군을 좋아해서 한 달에 1번씩, 훈련 때문에 행군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으면 2주 건너 한 달에 두 번도 했다. 사단, 여단에서 행군 자제 지침이 내려와도 직접 전화로 담판을 짓고 행군을 했다. 대대원들의 불평 불만이 많았으나, 대대장이 솔선수범하여 행군을 완주하는 관계로 투정에만 그쳤고, 그 덕에 대대통신병과 관리병만 죽어났다.
[48]
본래 운전병도 같이 있었는데 이 병사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총을 맞았다. 무전병은 협박을 당해
납북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이 무전병은 납북 후 행방을 알 수 없다.
[49]
여담으로 이 사건을 처음에는
국군보안사령부 (현
국군방첩사령부 )가 납북이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월북임이 밝혀지고
박정희 대통령이 분노했다. 이로 인하여
중앙정보부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정보처가 폐지되는 등 국군보안사령부의 위세가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1979년 소장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정보처가 부활되는 등 예전의 위세를 되찾았다.
[50]
승차거부만 한 것은 그나마 양반이었고, 20사단을 비롯하여 군 부대에 극도로 원한을 가진 택시기사들은 20사단 병력들 및 장교들에게 한번만 더 세워달라고 하면 니네들 먼저 때려죽이겠다고 위협까지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버스 기사들도 20사단의 병사들은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고 승차거부를 하였다.
[51]
하나회 전두환 직계임에도 오히려 이분이 사단장 부임하고 암흑기를 끝장냈다. 뭔말이냐면 85년 총선 때 부정선거를 거부하다가 청와대에서 29만 원에게 폭행당하고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좌천당했다고(...)
[52]
11사단은 부대 역사성도 역사성이지만, 동부전선의 유일한 기갑부대라는 점과, 20사단이 해편되어도 수기사와 같은 기갑전력이 있어서 사단 해체에 따른 안보 부담이 덜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