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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기계화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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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사단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
※ 둘러보기: 해체·해편된 각급 육군 부대
사단 | 해체된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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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기계화보병사단
{{{#ffffff 第二十機械化步兵師團}}}
The 20th Mechanized Infantry Division
파일:제20기계화보병사단 부대마크.svg
우리는 이긴다
창설일 <colbgcolor=#fff> 1953년 2월 9일(제20보병사단)
1981년 8월 25일(제20차량화보병사단)
1983년 6월 1일(제20기계화보병사단)
해체일 2019년 11월 29일
상징명칭 결전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7기동군단[1]
규모 사단
역할 공격 부대, 전시 진격
초대 사단장 예) 소장 유흥수
해체 전 사단장 예) 중장 황유성(육사 46기)
위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1. 개요2. 연혁 및 특징3. 예하부대4. 출신 인물
4.1. 사단장4.2. 장교/부사관4.3. 병
5. 기타
5.1. 훈련
5.1.1. 유격 훈련5.1.2. 행군
5.2. 부대 영상5.3. 사단가
6. 사건사고7. 여담

[clearfix]

1. 개요

경기도 양평에 위치했었던 대한민국 육군 기계화보병 사단으로 부대 별칭은 결전부대. 경례구호는 단결, 충성을 거쳐 구호는 "결전"으로 바뀌었다.

2019년 11월 29일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폐합되면서 해체되었다.

2. 연혁 및 특징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2월 9일 한국군의 2차 증강계획에 따라 제1교육여단을 모체로 창설되었다. 창설 직후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 일대를 방어하던 제7보병사단과 임무교대를 한 뒤 M-1고지 전투를 치른다. 전쟁 말기엔 미 육군 40사단을 대신해 가칠봉 일대를 방어하며 휴전을 맞이했고, 제5군단 소속으로 배속됐다.

전후 창설된 제29보병사단이 해체되면서 당시 29사단의 병력은 20사단에 흡수, 승계되었다.

1977년 육군본부 직할 부대로 바뀐 뒤 1981년에 보병사단에서 차량화보병사단으로 승격하였고, 1983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1983년 제7기동군단을 창설하면서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함께 배속되었다. 맹호부대에 이은 두 번째 기계화보병 사단으로 서로 라이벌 관계였다. 육군기계화학교에서는 수기사와 짝을 지어 양기사라고 부르는데, 막상 이 부대 장병들은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2] 사실 훈련이 아닌 이상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장병들은 양기사라는 단어에 대해 별 생각을 가지지는 않는다. 개중에는 양기사가 본래 명칭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K1 전차는 수기사에 최초 배치되었는데, K1A1 전차는 20사단에 먼저 배치되었다. K21 보병전투차량도 20사단에 먼저 배치되었다. 덩달아 기존의 K200은 전장비 이상의 집중관리[3]를 하여 기름과 흙먼지에 찌들은 물건을 준 A급 수준으로 만들어 제8기동사단에 인계하였다. 수기사도 계속 K200 운용하다가 2012년부터 수기사에도 K-21이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20사단이 겪은 생고생을 수기사도 그대로 겪게 되었다. 전차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아 K-2 흑표를 여태까지 시험 운행[4]해왔는데 K-21에 이어서 흑표까지 오면 간부나 병사나 또 다시 죽어나갈 판이다. 그러나 K-2 흑표의 배치가 늦어짐에 따라 K1A1을 개량한 K1A2가 수기사에 배치되니 전세 역전. 하지만 2014년 6월부터 K-2 흑표가 20사단에 1개 중대씩 7월에 배치되었다.

2018년 11월 30일에 올라온 통폐합 소식에 의하면 20사단이 추후 해체되고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합될 예정이라 보도되었다. 일각에서는 광주 5.18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한 보복 내지는 박근혜정권 시절 중시됐던 부대라는 점이 해체사유라고 주장하지만[5] 사실이 아니다. 어느 쪽이 해체되든 통합되면 결과물은 똑같은 상황에서 양평에서는 부대가 빠지기를 원하고 있었고[6] 홍천에서는 존속을 희망하고 적극적으로 주민과 예비역이 나섰기에 11사단 위주로 통합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20사단이 광주 시민 진압에 개입한 부대라서 해체된 거라면 마찬가지로 진압에 개입한 3, 7, 11공수여단과 1212사태 당시 군사반란에 동원된 9사단이 해체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6.25전쟁 영천 대첩의 주역으로 여러번 대승을 거뒀던 10보병연대, 21보병연대를 기반으로 한 8사단의 10기보여단, 21기보여단 또한 26사단과의 통합되며 해체되었으며,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시기부터 존속해온 역사가 긴 2사단 산하의 17연대, 31연대를 2019년에 각각 12사단과 21사단에 넘겨준 뒤 해체됐고, 이후 2021년에 신속대응사단이라는 이름 아래에 후방의 201, 203 신속대응여단을 배속받았으나 사실상 작전통제권은 2작사에 있어 실권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는 부대의 명문 및 위상과 아무 관련없는 국방개혁 정책일 뿐이다. 각 보병연대를 여단으로 격상시킨 뒤 각 대대엔 K808 장갑차, 중형표준차량을 보급하여 기동력&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연대 전투지원중대를 K105A1 자주포를 운용하는 여단 포병대로 격상시키고, 대대 화기중대에 기존 연대용이던 4.2인치 박격포를 넘겨주며 부족한 병력의 수를 화력과 기동력으로 메꾸는 정책일 뿐이다.

2019년 11월 29일 해체되어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합이 완료되고 11사단의 20기보여단이 독립, 3군단으로 이관되어 제20기갑여단으로 창설되었다. 그리고 해체 과정에서 포병여단과 61여단은 11사단으로 편입, 60여단은 8사단으로 편입되었으며 62여단은 해체되었다.

부대해체 후 주둔지에는 제2신속대응사단 사령부가 주둔해 있다.

마크의 의미는 가운데의 빨간 다이아몬드가 공산주의자, 그것을 감싸 옥죄는 4개의 파란 반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화살표 마크는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자유 대한군의 진격이다. 이후에는 부대 마크의 의미는 4명의 병사가 서로의 방탄헬멧을 부딪치며 단결력을 돋우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부대 마크가 자일리톨 껌의 상표와 비슷하다고 해서 자일리톨 부대라고 부르는 병사가 많다. 이에 대해 사단인원들은 맹호부대를 치토스라며 깐다.[7] 이 부대마크와 '결전부대'라는 별명은 제61기계화보병여단이 승계하였다.

3. 예하부대

3.1. 직할부대

3.2. 제60기계화보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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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61기계화보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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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기동사단으로 이관.

3.4. 제62기계화보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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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30일 사단 해체로 부대 해체.

3.5. 포병여단


주둔지는 경기도 양평 지역으로, 사단본부를 중심으로 각지에 분산되어 있다. 포병여단 예하 대대는 사단예하 여단들과 직할대 사격지원 역할을 한다. 69, 70, 78 대대가 각각 60, 61, 62여단의 사격 지원을 맡고, 91대대는 직할대 및 다른 여단의 요청이 있을 때 지원도 들어간다. 자연히 91대대는 훈련량이 무지막지하게 많다. 여단 훈련이 있을 때에는 해당 여단 지원 포병 대대가 같이 훈련을 나가게 되는데, 이때 사단 정찰대라도 훈련에 포함되면 91대대는 무조건 같이 나간다. 사단 전체 훈련일 때는 물론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여도 보병 여단에서 추가 화력 지원을 요청하면 얄짤없이 불려나가는게 91대대이다. 훈련량이 많다는 제7기동군단 중에서 20사단, 그중에서도 91대대는...정말 훈련이 많다. 4개 대대 중 가장 늦게 K-55자주포를 받아왔으나 2011년 가장 우선 K-9 신형 자주포 변경

91포병대대는 신막사이므로 포병여단 예하 대대 중 가장 시설이 좋다. 완공년도는 2010년 8월이었다. 이때 완공식하느라 10년 군번이 고생했다. 또한 최신 자주포인 K-9이 배치되어 있다. K-9이 가장 먼저 전력화된 이유도, 91대대가 사단 직할대 및 다른 여단의 추가 지원을 맡는 대대이기 때문이다. K-9이 전력화될 때의 일화를 소개하자면, 원래 91대대는 본부포대와 차리 포대가 함께 있고, 알파/브라보 포대는 독립 포대로 떨어져있었다. 그런데 K-9을 운용하려다보니 알파/브라보 포대의 주둔지 입구가 좁아서 K-9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포병 대대와 주둔지를 바꾸면서 대대가 하나로 모이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주둔지가 넓고 다른 대대와 달리 주둔지가 눈에 잘 뛰는 37번 국도변이 아닌 지방도에 위치해 눈에 잘안뛰어 전력노출이 적은 69대대와 2009년에 주둔지 교체가 이루어졌다. 나머지 예하 대대는 K-55 자주포... 이래저래 밖으로 보여지는 얼굴 마담격이라 가장 시설이 좋다. 20사단 포병교육대 훈련도 91대대에서 받는다. 하지만, 훈련병들은 컨테이너박스에서 지낸다.

69포병대대
18년 모월 모일부로 부대가 해체되었다. 독립,본부포대 모두 해체되었으며 남아있던 장병들은 다른 대대로 뿔뿔히 흩어졌다.

70포병대대는 포병여단 예하대대 중 가장 시설이 좋지 않다. 영화 실미도에 나왔던 그러한 모습의 통합막사라는 사실...(포반에 신병 전입 간 날, 50명이 같은 내무실을 썼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신교대 건물이 복층이라 단층 막사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곳은... 그냥 부대 전체가 단층 건물들로 이루어져있다. 7~80년대에 지은 기존 단층막사에 샌드위치판넬을 사용하여 이곳저곳 확장한 형태다. 2015년 말 이등병생활관이 각 포대별로 신설되었다. 물론 정식건물이 아니라 컨테이너다. 그래도 에어컨, 전기온돌은 있다.

특이하게도 부대 내에 포병종합훈련장이 있다. 70포병대대는 비가오거나 눈이오거나 대대전술훈련은 여기서 진행한다. 이 훈련장이 참 별로인게 여름에는 덥고 습하고, 겨울에는 그냥 무조건 춥다. (남한강 바람이 시원할거라고 생각하는건 경기도 오산이다) 언덕 너머가 포대인데 왜 가질 못하니 2006년도에 3포대에서 휴가자 미복귀 및 자살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다. 당시 소문에는 군 부적응자라서 사고가 났다며, 일명 '관심병사'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70포병대대 근처에는 7군단 1000대대가 있다.

부대 해체, 인원 및 장비 이동 이후, 해당 부대의 위성사진이 한동안 카카오 지도에 공개된 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다시 가려졌다. 해당 부대의 영내는 여전히 포병 종합 훈련장으로 사용중이다.

포병여단은 예하 대대의 지역이 넓게 퍼져있어 대대마다 외출가능 지역이 다르다. 포병여단 본부는사시사철 온수가 나오던 부대. 여기로 경계지원 갔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다른 여단본부들과 다르게 주둔지에 대대를 예하에 두지 않고, 독립중대 형태로 위치하고 있는데 문제는 주둔지 사이즈가 다른 대대들과 비슷하다! 사람은 오지게 없는데 땅만 큰 격. 여단본부 행정병을 제외하고는 사시사철 작업에 시달린다 보면 된다. 눈오는 날은 제설작업 비오는 날은 배수로 까는 작업, 해뜬 날은 제초 및 나무가지 정리 등. 영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 밖에도 정리한다. 여단장 관사 및 군인아파트가 부대 뒤에 위치하기 때문. 게다가 사람이 없는 만큼 근무도 많다.

20사단의 다른 여단들은 정훈병과가 지휘부 소속인 데 비해, 포병여단은 작전과 소속이다. 영내 야근 및 외박(...)을 자주 할 수 있게 된다.

여단 본부를 신막사로 건설하던 중 건축사가 도산해서 여단 본부 인원들이 오랫동안 컨테이너에서 지내야 했다.

4. 출신 인물

4.1. 사단장

볼드체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유흥수 예) 소장 사단장
2대 송석하 예) 소장 육사 2기 한국국방연구원
3대 김상복 예) 중장 군영00기 육군참모차장
4대 박현수 예) 소장 사단장
5대 이정석 예) 준장 군영00기 사단장
6대 문형태 예) 대장 육사 2기 합동참모의장
7대 유근창 예) 중장 육사 2기 국방부차관
8대 김안일 예) 준장 육사 2기 사단장
9대 최대명 예) 소장 前 합동참모대학장
10대 박희동 예) 대장 육사 3기 3군사령관, 2군사령관
11대 김종환 예) 대장 육사 4기 합동참모의장
12대 윤필용 예) 소장 육사 8기 수경사령관 [하]
13대 이주호 예) 준장 사단장
14대 민경중 예) 소장 육사 8기 前 국방부 인력차관보
15대 김인화 예) 소장 육사 9기 사단장
16대 한민석 예) 소장 사단장
17대 김영동 예) 소장 현지임관 사단장 [9]
18대 이철희 예) 소장 前 제2관구사령관
19대 박준병 예) 대장 육사 12기 前 보안사령관 [하] [반] [12]
20대 최세창 예) 대장 육사 13기 前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하] [반]
21대 이종구 예) 대장 육사 14기 前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하]
22대 민병돈 예) 중장 육사 15기 前 육군사관학교 교장 [하]
23대 이문석 예) 대장 육사 17기 前 제1야전군사령부 사령관 [하]
24대 서완수 예) 중장 육사 19기 국군기무사령관 [하]
25대 표순배 예) 중장 육사 21기 제9군단장 [하]
26대 조성호 예) 소장 육사 22기 前 육군포병학교장
27대 정영진 예) 중장 육사 23기 前 합참 작전본부장
28대 유홍모 예) 소장 육사 24기 前 품질관리소장
29대 정채하 예) 소장 육사 26기 前 육군기계화학교 교장
30대 박청욱 예) 소장 학군 6기 육군본부지휘통신참모부장
31대 정동한 예) 중장 육사 29기 前 국방대학교 총장
32대 이종근 예) 소장 3사 2기 前 육군기계화학교장
33대 박정이 예) 대장 육사 32기 前 제1야전군사령부 사령관
34대 오정석 예) 중장 3사 10기 前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35대 임국선 예) 중장 학군 17기[20] 前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36대 나상웅 예) 중장 3사 16기 前 육군교육사령관
37대 김상철 예) 소장 육사 40기 前 육군미사일사령관
38대 유무봉 예) 소장 육사 42기 前 육군본부 아미타이거 4.0 통합기획단장
39대 강인순 예) 소장 육사 44기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40대 황유성 예) 중장 육사 46기 합동참모차장 [21]

4.2. 장교/부사관

4.3.

5. 기타

5.1. 훈련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더불어 훈련량은 전군에서 톱으로 뽑힐 만큼 토나오게 많았다.

기계화부대이다보니 기동훈련이 중심이다. 중대 ATT, 대대 ATT, 여단 BCT, 군단 FTX를 전부 전차/장갑차 몰고 나가서 뛰어야 하고, 종종 전차와 기계화보병간의 상호배속훈련, 수기사 훈련에 대항군으로 동원되는데 이건 정규 훈련일정에 없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전차/ 장갑차 숙달훈련/탄약 적제 훈련을 실시하고 기동 연습을 하는데 역시 훈련 일정에 없다. 그리고 어쨌든 '보병사단'이므로 가외의 일정을 잡아 행군도 시킨다. 게다가 K-21로 인해 부사관이 소대마다 무식하게 많이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근처의 특전부대 침투 훈련에도 비정기적으로 참가하여 밤새 차단선을 펼쳐 훈련을 도와주기도 하고 역으로 사단의 경계근무 검열을 위해 각 대대로 침투하기도 한다.

장갑차 숙달 훈련의 경우 비 주기적으로 도로주행 훈련을 실시하여 조종수, 부 조종수의 기량을 평가하기도 한다.[25] 이때는 대대 자체 훈련[26]이라 중대마다 수십 명씩 호출하여 주요 사거리등에 배치[27]하여 교통 통제 등을 하게 된다.

주된 일과는 기동장비 정비 및 교육훈련. 장갑차, 전차는 보유수가 제법 되는지라 정비계획 잘못 짜면 심히 곤란하다. 1개 소대에 단차가 넷 붙는데, 단차 하나에 K6 중기관총 M60 기관총[28]이 각각 1정씩 있어 전투지휘검열 때 단차와 총기를 기름목욕시켜주다보면 24시간도 모자란다. 탄약은 많이 나오는데 정비 위주로 시간을 잡아먹다보니 막상 사격을 나갈 시간이 부족하여 최소 4박 5일의 일정을 잡아 종훈장으로 가서 왕창 갈겨버리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종훈장 야산은 불도 잘 난다.(...) 게다가 종훈장은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비온후 훈련장으로 가는 건 조종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종훈장 부근에는 대대와 사단 예하 직할대대가 포진하여 기간병들은 매일 포성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국방부에서는 전차/장갑차/자주포 다루는 부대라 좀 있어보이는 사진을 많이 뿌리지만 실제는 기름과 흙먼지에 쩔어 산다고 보면 된다.K-21이 배치된 대대는 장비교육도 받아야 하고 이것저것 테스트 하는 입장인지라 더욱 골치아프다.

전차대대의 경우엔 부족한 인원+많은 경계소초 때문에 GOP만큼은 아니지만 평소엔 근무지옥을 맛볼 수 있다. 한 중대에 병사가 15~20명 남짓인데 이 인원으로 초소 2개를 복초로 24시간 돌리니 상상이 갈 것이다. 기보대 한 소대 인원이 전차대 한 중대 인원이다 불쌍하게도 훈련만 되면 전차 위에서 취침한다. 시동을 끈 상태에서도 전차엔진의 열기는 한겨울에도 매우 오래간다. 혹한기 훈련때에도 방수포를 덮개로 쓰고 침낭에 들어가면 핫팩도 필요없고, 덥다고 난리친다. 단, 여름에 대대, 여단, 사단전술훈련 시 쪄죽는 거 아니냐 우려할 수도 있지만 이때는 짱박아놓은 더블백에 텐트를 싸간다(...) 편제상 텐트가 있긴 하나 군장에 들어가지 않는 고로 여름을 제외하곤 대부분 안 가져간다.

2012년 전후로 훈련난이도가 이전보다 엄청나게 빡세졌다. 후술할 사단장의 주기행군 완전부활과 실전기동훈련, 무식한 양의 국지도발 예행훈련이 추가된데다 훈련 시 위장마스크 착용이 금지, 안면위장 크림은 기본이고, 심지어 방탄, 전투조끼까지 최대한 위장 등...

5.1.1. 유격 훈련

유격 훈련장[29] 용문산 용문사 관광지 바로 옆에 있는데 유격장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식당과 펜션들이 늘어서 있어 유격행군 시 민간인이 구경하기도 한다.[30] 야간 유격장 입구에서 근무를 서게되면 정면에서 벌어지는 바비큐 파티를 관람해야 하는 고문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막타워는 안전 문제로 2009년 이후로 폐쇄되었고 용문산 산악등반으로 대체하고 있다.

사단 해체 이후, 해당 유격장은 20사단 유격장에서 7군단 유격장으로 변경되었고, 명칭도 '결전유격장'에서 '북진유격장'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유격장 관리주체가 20사단 수색대대에서 위와 같은 사유로 7군단 예하 제2강습대대로 변경되었다.

요새는 대대에서 전역자들에게 반납받은 전투복을 돌려입는지라 예전처럼 파병부대가 입었던 사막위장 패턴 전투복이나 해병대 전투복은 나오지 않으며,[31]계급 역전현상 또한 막기 위해 위장테이프로 전부 가리거나, 오바로크를 뜯으라 지시한다. 용문산은 국립공원이 아닌 관광지인 지라 길이 잘 닦여 있으며 놀이기구도 있어 소풍 온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다. 그 뒤론 본격 산악등반. 바위산이고 높이도 높은지라 만만하게 보면 큰코 다친다. 장애물 코스에 있는 샛길을 통해 관광지로 들어가는데 주변에 경고표지판이 있긴 하지만 통로가 개방되어 있어 실수로 유격장으로 들어오는 민간인들도 있다. 취사장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연병장이 보이고, 연병장 좌측으로는 기다란 언덕을 통해 숙영지로 올라갈 수 있다. 예전에는 유격 훈련전 작업인원들이 두돈반을 타고 올라가 일일이 24인용 텐트를 각 대대 병사들이 치고 철수하였으나, 2010년경 사단장의 명령으로 숙영지 터마다 공구리를 치고 24인용 텐트는 항시 설치가 되어 기갑수색대대에서 관리, 감독한다. 참고로 유격장 주제에 샤워장(!)도 있지만 시설이 워낙 좋지않고[32] 온수는 매우 부족하여 훈련소 시절처럼 유격 조교와 교관들의 통제하에 30초 물 묻히기, 30초 거품내기 등의 흠좀무한 통제 샤워시간이 존재한다. 그래도 유격장에서 매일 샤워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간부들과 친하면 취사장 옆에 일명 선녀탕이라 불리는 계곡이 있어서 홀딱 벗고 씻기도 한다. 이 외에도 유격장 내에는 폐 창고, 간이 땅굴 등이 있어 야간훈련이랍시고 담력테스트를 실시해 이등병들의 혼을 쏙 빼놓기도 한다.[33]

이후 2010년 사단장 교체 이후인 2012년, 유격조교 선발기준이 바뀌었는데 유격대장이 각 대대에서 인원을 선발해서 뽑아갔다. 즉슨, 유격파견으로 포상은 포상대로 먹고, 유격조교 임무를 약 8개월 가까이하다가 다시 해당 대대에 들어가서 군생활을 한다. 하지만 대다수가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에 최고선임이 갓 상병을 단 상물이라 유격받을 때 말년병장이나 선임급들까지 이젠 이등병한테 신나게 굴러야한다며 뒷담을 까기도. 하지만 2012년 5월 초, 예하 포병대대 중 한 곳이 명령을 무시하고 유격조교 인원을 파견했다가 유격훈련 중인 모 대대를 방문한 사단장에게 걸려 개박살나고 유격조교훈련을 받은 인원들은 강제로 연대복귀한 전설이 있다.

2015년 유격장 내 샤워장이 공사 중에 있었으며, 2016년 완공되어 훈련 후 따뜻한 샤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제한시간 3분.

1987년 이전까지는 유격훈련과 더블어 공수훈련도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전반기 훈련이 공수훈련이면 후반기엔 유격훈련, 그리고 그 다음 해 유격훈련 - 공수훈련으로 바뀌었다. 이 훈련은 1987년까지 진행되었으며 현재 신병교육대 대강당 자리가 있는 곳이 공수훈련장이었다. 당시 사단 수색대에서 차출된 병사가 공수교육 위탁으로 교육받고 사단 공수교장에서 공수 조교로 활동했으며 평상 시에는 논산군번 내부반장으로 업무수행(1980년대 당시 논산군번은 4주 교육 후 20사단 배치 시 자대로가기 않고 여기 신병교육대에서 2주 동안 군기 교육을 받았다.) 후 자대로 배치받았다.

공수훈련 일주일 교육 후 100킬로 행군(받으러 갈 때도 행군으로 갔다.)으로 부대복귀를 했고, 추가로 1985년도 이전까지는 1년에 2번 200킬로 행군 진행했으며 100킬로 행군은 1년에 최소 3, 4회 이상 진행했다. 1983, 84년 군번들은 전역 때까지 2,000킬로~1,500킬로 행군 후 전역했으며, 200킬로 행군은 1986년부터 유야무야 폐지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포병기준이니 보병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외 훈련은 매년 9월 유격 훈련을 기점으로 그 다음 해 3월 말까지 훈련을 하여, 부대 내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덧붙여 지금의 20사단 훈련은 그때와 비교하면 유치원 수준이라고...

5.1.2. 행군

행군의 경우에는 주기적으로 실시하다가 2009년 사단장 왈 "기계화부대인데 왜 행군일정이 이리 빡빡하냐, 조정해라" 이 말 한마디에 행군을 몇 달에 한 번, 심한 곳은 아예 실시하지도 않았으나 2010년 말(호국훈련 끝나자마자 새로부임), 새 사단장이 부임하고 1년 후부터 신년맞이 행군을 하더니 부활시켜 버렸다. 사단장 왈 "장갑차 퍼지면 니들은 행군 안 하냐??" 사단 본부에서 행군량을 한 번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110대대가 압도적으로 1위했다고 한다... 정찰대도 110대대를 따라 잡지 못했다.[34]

5.2. 부대 영상

korea army lumix gh3 결전부대 20131003
제2회 제20기계화보병사단 안보체험행사 (2013.10.3) - 중대급 사격 및 기동시범
2014 기동화력시범
사단창설기념 대규모 기동훈련
K2 흑표 전차 사격훈련

5.3. 사단가

1절
보아라 우리는 무적의 용사다
겨레와 나라 위해 일어선 우리
물이나 불이나 거칠 것이 있으랴
돌진하는 우리 앞에 승리 뿐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사여
빛나라 영원히 이십 사단

2절
나간다 우리는 용맹을 떨친다
삼천리 아름다운 내조국 위해
선봉은 내가선다 당할자가 누구냐
다하리라 이생명 승리의 날까지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사여
빛나라 영원히 이십 사단

-20사단가

6. 사건사고

6.1. 월북 사고

본래 20사단은 경기도 연천에 있었던 부대로 최전방 부대였다. 그런데 1977년 10월 20일, 연천 전곡리에 예하부대 62연대 1대대 대대장 유운학 중령이 무전병[35]과 함께 월북하는 대형사고[36] 발생 후 사단 전체가 후방으로 이동 (경기도 연천 → 강원도 춘천 → 경기도 양평군) 했고, 20사단이 이동한 자리에 주둔하고 있던 5사단이 20사단 담당구역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원래 제5군단 소속이었다가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 부대로 개편한 후, 1983년 제7기동군단을 창설하면서 이곳에 넣었다.

6.2. 12.12 군사반란 가담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주도 신군부의 정권 장악 주력부대였다. 당시 하나회 주력 멤버 중 하나였던 박준병 소장이 당시 20사단장이었다. 만약 반란군 측 주요 부대인 1·3·5공수여단, 9사단, 30경비단과 진압군 측 주요 부대인 장태완 소장의 수경사(現 수방사)와 9공수여단 병력이 본격적으로 격돌할 경우 20사단은 곧장 서울로 추가투입 되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장태완 소장의 결단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국군 간 서울시내 대규모 유혈 충돌은 피할 수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현재 기보사단으로 전환된 사단 중 상당수가 12.12 사태 때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부대들이다. 예를 들어 30사단은 반란군의 선봉이었던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방조하였다.

6.3. 5.18 민주화운동 학살 가담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으로 미국으로부터 병력이동을 승인받고 포병여단을 제외한 예하 연대(현재는 여단) 병력 전부와 포병 1개 대대가 투입되기도 했다. 다른 5.18 당시 광주의 공수부대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 20사단 군인들도 정상인들이 아니었는데, 공수부대들과 똑같이 20사단 61연대 2대대가 송암동에서 도로를 봉쇄한 채 수하 조치도 하지 않고 그냥 말도 없이 근처를 지나가는 차량이 보이는 족족 사격하거나 대검으로 찌르는 묻지마 살인/살인미수를 저지른 건 물론, "병원에 빨갱이가 있다는 소문"만 듣고 피아 확인도 없이 민간 병원 창문에 민간인들이 맞거나 말거나 묻지마 총질을 해댔다. 뿐만 아니라 5월 22일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시민들에게 총기난사를 저지른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미친 짓을 벌이기도 했다.

때문에 관련 역사를 알거나 집안에 5.18 관련자가 있는 병사들 중에는 20사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2010년경에도 광주, 전남 출신 20사단 장병들은 휴가갈 때 사단마크를 떼고 내려갔으며 한 소위는 20사단 마크가 붙은 전투복을 입고 휴가를 갔다가 광주에서 택시기사가 승차거부를 한 적도 있다.[37] 비슷하게 진압군으로 투입되어서 무차별 학살을 벌인 특전사(특히 직접 학살을 벌인 3, 7, 11공수)는 사복을 입고 휴가를 갔다는 풍문이 있다. 현재도 사단 사령부 1층 중앙 통로에 당시 전두환에게 수여받은 훈장이 다른 훈장들과 함께 여전히 남아 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에 5.18 당시 예하부대 62연대 3대대장이던 유효일이 국방부차관으로 임명됐는데 재직 당시 그가 지휘했던 부대는 시민들과 충돌하진 않았으나 과거 이력이 이력인지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장을 맡은 데에 대한 도덕적 논란이 빚어졌고 녹화사업 관여 논란까지 빚어지자 결국 사퇴했다.

20사단이 광주에서 작전을 했던 작전보고서 내용 원 링크는 삭제되어서 블로그 링크로 대체

20사단이 기계화보병이 된 이유는 5.18 광주 때 진압 공로설과 수기사 견제설이 있으나 실상은 전략예비대로 지리적으로 한강 이남에 위치하였고 수기사 단독으로는 북한의 전차러쉬를 막을수 없었기에 개편한 것. 다만 기계화개편 이후에도 군사정권을 수호하는 충정부대로서 임무는 여전하였는데 군사정부시절 역대 사단장을 보면 민병돈 중장(육시교장 때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를 비판하다 전역됨)[38]을 제외하곤 전원이 4성장군은 물론 국방부장관, 참모총장까지 지냈다.

충정부대의 흔적으로 목봉이 창고에 최근까지도 남아있었으나 2008년에 폐기했다. 1993년 이후 충정훈련을 아예 안 하긴 했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각종 진압장비를 보관하고 있었고, 탄약고에는 CS 수류탄이 있었다.(일부 대대에서는 충정봉을 오분대기조 무기로 활용하기도 했었다.-일명 오대기봉)

7. 여담

신인균 국방평론가에 의하면 사실 20사단이 11사단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폐합될 예정이었으나 20사단 때문에 지역발전이 더디다고 여긴 양평 주민의 님비와 함께 11사단이 없으면 지역경제가 파탄날 것으로 여긴 홍천 주민의 핌피가 크게 작용하여 11사단으로 통폐합되었다고 한다. 정작 20사단 사령부 자리에 2사단 창설준비단이 들어가버린게 아이러니하다. 여기까지가 본인의 주장이고 실제로 당시 양평 군민들은 단순히 기계화부대가 떠나길 바랬다. 가장 큰 이유는 인구밀집지역에서 거대한 궤도차량이 수시로 지나가는 문제도 있고 용문산에서 사격훈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굉음이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진 지역 특성상 양평읍 전역으로 소리가 울리는데 이를 싫어하는 주민이 다수. 다만 반대로 홍천 군민들은 기계화부대가 홍천으로 통폐합이 이루어지길 원했다고 한다.


[1] 제5군단(1953~1977), 육군본부 직속부대(1977~1983) [2] 양기사라는 말이 수기사 측에서 20사단을 비하할 목적으로 지어낸 멸칭이다. 306보충대→20사단 신병교육대 트리를 탄 사병은 제대할 때까지 듣지 못할 수도 있는 명칭이다. [3] 칠이 전부 벗겨진 궤도까지 검은 칠을 했다고 한다. [4] K21처럼 초도 보급 후 성능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20사단의 K-2전차는 단 한 대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 그저 종훈장을 빌려주고 테스트를 할 뿐. [5] 해당 인터뷰에서는 박정이 예비역 육군 대장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으나 그가 자유한국당 소속에 전 20기계화보병사단장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립적인 인터뷰라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제11기계화보병사단을 일반 보병사단으로 둔갑시키는 등 기본적인 사실관계도 틀려있다. [6] 양평은 서울과 가깝고 경의중앙선이 연결되어 은퇴하고 노후를 보내는 주민들이 많고, 펜션 등 관광숙박산업이 발달해있어 톡까놓고 말해 군인 없어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도시다. 때문에 시끄럽기 그지없는 기갑사단을 내쫓길 원했다.5월만 되면 전자포 사격 충격파로 유리가 흔들리고 소방헬기가 떠다니는데 참는게 보살이다 [7] 참고로 이 부대 마크는 워낙에 전차를 많이 운영하였기에 유튜브의 전차 사격 영상을 보면 거의 항상 보게되는 마크이다. [하] 하나회. [9] 유운학 중령 월북 사건으로 보안 부대장인 이학봉과 함께 보직 해임. 김영동 소장은 예편되었으나 이학봉 중령은 하나회 출신 핵심 멤버로 준장 예편했다. 5사단과 임무 교대하여 양평으로 부대 이동. [하] 하나회. [반] 12.12 군사 반란 가담자. [12] 5.18 민주화운동 당시 20사단의 병력을 광주로 이동시켜 시위대를 학살할 당시 사단장. [하] 하나회. [반] 12.12 군사 반란 가담자. [하] 하나회. [하] 하나회. [하] 하나회. [하] 하나회. [하] 하나회. [20] 원광대학교 [21] 해체 전 마지막 사단장. [22] 육군사관학교 내에서조차 엄청난 엘리트로 동기들이 잘해야 이제 갓 중령에 진급해서 대대장을 하고 있을 그 시기에 강인순은 이미 1차 대대장 보직을 완료하고 군단참모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소위로 임관한 이래 이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단 한번도 진급누락된 적이 없었으나 중장 진급에서 2번이나 누락되었다. 현재는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지내다가 전역하였다. [23] 현재는 상사로 동 부대 화기중대 행정보급관이다. [24] 원래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군면제 대상이었지만 "남자라면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할아버지 김병로의 말에 따라 군복무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군대는 나름 일찍 가서 군 복무 중에 4.19 혁명을 겪었다고 한다. [25] 기보대대의 영내는 매우 넓은 편이라 평소 주특기 훈련 시에는 영내를 주행한다. [26] 일단 장비가 영외로 나가는 것이니 여단장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한다. [27] 사거리, 사고다발지역 등은 부사관급의 간부를 같이 배치하기도 한다. [28] K200 한정. K-21에는 공축기관총(M60)이 1정 배치되어 있고 기다 박격포 소대나 구난차에는 K6 기관총(혹은 MG-50)이 비치되어 있다. [29] (구)사단본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60여단의 경우, 유격훈련 시 칠봉산에 가서 한다. [30] 유격장 행군코스 중 특히 뱀술, 생사탕을 파는 곳이 많이 보인다. 참고로 뱀 수렵은 불법이다. [31] 가끔씩 유격조교 훈련 인원에게 지급할 때 나온다. [32] 지하수를 끌어와 물탱크에 저장한 물을 보일러를 이용해 데우는 방식. [33] 물론 조교들이 귀신담당. [34] 당시 대대장이 행군을 좋아해서 한 달에 1번씩, 훈련 때문에 행군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으면 2주 건너 한 달에 두 번도 했다. 사단, 여단에서 행군 자제 지침이 내려와도 직접 전화로 담판을 짓고 행군을 했다. 대대원들의 불평 불만이 많았으나, 대대장이 솔선수범하여 행군을 완주하는 관계로 투정에만 그쳤고, 그 덕에 대대통신병과 관리병만 죽어났다. [35] 본래 운전병도 같이 있었는데 이 병사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총을 맞았다. 무전병은 협박을 당해 납북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이 무전병은 납북 후 행방을 알 수 없다. [36] 여담으로 이 사건을 처음에는 국군보안사령부 (현 국군방첩사령부 )가 납북이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월북임이 밝혀지고 박정희 대통령이 분노했다. 이로 인하여 중앙정보부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정보처가 폐지되는 등 국군보안사령부의 위세가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1979년 소장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정보처가 부활되는 등 예전의 위세를 되찾았다. [37] 승차거부만 한 것은 그나마 양반이었고, 20사단을 비롯하여 군 부대에 극도로 원한을 가진 택시기사들은 20사단 병력들 및 장교들에게 한번만 더 세워달라고 하면 니네들 먼저 때려죽이겠다고 위협까지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버스 기사들도 20사단의 병사들은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고 승차거부를 하였다. [38] 하나회 전두환 직계임에도 오히려 이분이 사단장 부임하고 암흑기를 끝장냈다. 뭔말이냐면 85년 총선 때 부정선거를 거부하다가 청와대에서 29만 원에게 폭행당하고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좌천당했다고(...) [39] 11사단은 부대 역사성도 역사성이지만, 동부전선의 유일한 기갑부대라는 점과, 20사단이 해편되어도 수기사와 같은 기갑전력이 있어서 사단 해체에 따른 안보 부담이 덜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