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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 충남 부여군·청양군) | ||||||||||||||||||||||||||||||||||||||||||||||||||||||||||||||||||
제18대 이진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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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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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이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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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2년 11월 26일 ([age(1952-11-26)]세) | ||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진호리 비안동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74년 ~ 2009년 | |||
재임기간 | 제34대 제1야전군사령관 | ||
2008년 3월 ~ 2009년 9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
배우자 | 황금례 | |
자녀 | 슬하 1남 1녀 | ||
학력 |
공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30기 / 학사)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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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 ||
소속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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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19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30기) | ||
최종 계급 | 대장 | ||
최종 보직 | 제1야전군사령관 | ||
주요 보직 |
제7기동군단장 제11기계화보병사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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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의 전직 군인이다. 제11사단장, 제7군단장, 제1야군전사령관을 역임했다.2. 생애
1952년 11월 26일 생.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진호리 비안동에서 태어났다. 참조공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 30기로 입학하여 1974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육군대학 정규 34기를 1등으로 졸업하였다. 그 이후 수 많은 요직을 역임하고 육군 11사단 사단장, 육군대학 총장을 거쳐 중장으로 진급한 이후 2004년 4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육군 제7기동군단의 군단장으로 재직했다. 그 이후 2006년부터 2008년 3월까지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3]을 역임하고 대장으로 진급한 이후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전역했다.
군 복무 중에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3. 정치 활동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충남 부여군· 청양군 선거구에서 43.5%의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사전 선거 운동 혐의 및 정당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당선 무효형인 벌금 700만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다.당시 의원직 상실을 보도하던 MBC가 자료 화면에 1947년생 김근태의 초상을 내보내 물의를 빚었다. 참고로 그 김근태는 이미 2011년에 사망해서 이 당시에는 있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주시·부여군·청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미래통합당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정진석 당시 현역 국회의원에 밀려 컷오프되었다. 이에 민심을 묻는 경선 과정을 생략한 일방적 공천에 승복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3월 6일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고 3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좀 다르다. 미래통합당에 공천을 신청한 것이 아니라 자유한국당에 공천을 신청했다. 또한 정진석 당시 현역 국회의원에 밀려 컷오프돼 공천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경선 자체가 없었다. 지역 민심의 향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여론 조사 결과는 정진석 후보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이 아니었다. 때론 앞서거나 대등한 경우도 나왔다. 이러한 상태에서 경선 자체를 붙이지 않자, 자유한국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것이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경선을 붙였으면,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팽팽한 접전이 되었을 것이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정계 복귀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김근태 장군은 "국방과 군사 전문가로서 북한군 군사위협에 대한 평가와 이에 대한 우리 군의 대응방안 연구를 통해 국가안보에 도움을 주고 싶다."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경선이 아닌 정진석을 단수공천한 것은 김근태가 충남 부여·청양의 국회의원에 당선은 되었으나, 만기퇴임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미래통합당에서는 안 그래도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분위기가 뒤숭숭했고, 더군다나 의원직을 만기 퇴임을 해도 힘든 상황에서 의원직을 중도 하차한 김근태를 공천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가 대통령에서 쫓겨날 정도로 극악의 대사건이고 미래통합당의 입장에서는 안전빵을 노린 것이다. 김근태는 그냥 출마 시기가 도와주지 않은 것이다.
2021년 윤석열 대선캠프의 국방포럼 대표로 합류했다. 이왕근 전 공군참모총장, 김용우 전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윤 후보 캠프에 합류한 3명의 전직 4성장군이 되었다.
2023년 4월 5일 주주총회 의결을 통해 KAI 사외이사로 선임되었다.
4. 기타
- 1947년생 김근태와는 제1야전군사령관 시절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상대방과 서로 만난 적이 있다.
- 외모로 따지자면 키 175cm 정도에 굉장한 미남인데 늙어서도 매우 곱게 늙었다.
- 군 시절에 본인이 직접 초임 간부들에게 신경을 썼을 정도로 초임 간부들의 역량을 매우 중요시해왔다. 보통 타 장성들이 병사들에게 신경을 쓰는 것과 다르게 김근태는 초임 간부들에게 신경을 썼고 초임 간부들의 처우 개선에 온 힘을 다했다.[4]
-
11사단장 재직 시인 2002년 8월, 태풍 루사가 강릉지역을 강타하여 전대미문의 피해가 발생하였을 때 11사단 병력이 수해 복구작업에 투입되었다. 이에 김근태 당시 사단장은 물난리 현장에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수해복구 10대 수칙을 작성하여 국민들에게 군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있다.
다음은 10대 수칙의 일부 항목이다. - 복구작업을 위해 주민들이 이동하지 않는 새벽에 이동한다.
- 작업중 커피, 라면 등을 제공하는 주민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지않은 이들로 인지하여 즉시 복구작업을 중단하고 더 피해가 심각한 곳으로 이동한다.
- 2007년 7월 아프간에 우리 국민이 인질로 잡혀 있을 때, 합참 작전본부장으로서 그들의 안전한 석방을 위해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는 미군지휘관들을 설득하는 등 국내외 기관과의 유기적인 협조관계를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강구함으로써 희생을 최소화한 채 피랍인들을 안전하게 석방하도록 애쓴 일은 작전에 탁월한 전문가라는 평가를 확인시켜 준 사례이다.
- 군인으로서의 역량과 별개로 정치적 역량, 안목은 다소 아쉬운 편.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껏 이겨놓고 선거법 위반에 연루되어 의원직을 상실한 점도 그의 정치인 행보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요인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선 결과를 무시한 채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 현저히 낮은 표로 낙선을 한 점은 뼈아픈 실책이라고 밖엔 할 말이 없다.
5. 선거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 충남 부여·청양 |
[[새누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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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 충남 공주·부여·청양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604 (3.05%) | 낙선 (3위) |
[1]
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
[2]
석사 학위 논문:
國防費用分析의 事例硏究에 관한 考察 (2009. 02.)
[3]
작전직능 중장 보직 중 최고의 요직으로 손꼽힌다.
[4]
사실 이렇게 하는 것도 매우 좋다. 왜냐하면 병사들이야 강제로 끌려왔고 또 사회에서 보는 눈이 있으니까 군 간부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만, 초임 간부들은 스스로 왔고 또 사회에서도 신경을 거의 안 쓴다. 실제로 초임 간부들의 자살률이 병사들의 자살률보다 매우 높다. 현역병들과 예비역들은 강력히 반발할지 모르나 초임 간부들은 병사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는 엄청난 3D 직종이다. 급료가 높고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점이 현역병이나 병 출신의 예비역 입장에서는 굉장히 크게 다가오지만 사실 이것을 제외하면 누릴 수 있는 권리나 직무적인 권한은 현역병들만큼 없다시피 하지만, 어쨌거나 간부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할 책임은 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큰 것이 초임 간부이다. 실제로 병의 경우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만 아니라면 웬만한 사고를 쳐도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도 많으며, 심하더라도
군기교육대나
영창 정도의 비교적 가벼운 징계만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 간부는 좀 큰 사고를 쳤다 하면 설령 인명 피해가 없었다 하더라도 근무평정이나 인간관계가 박살나 버리면서 앞으로의 군 생활 전체가 오락가락하게 되고, 심하면 정식으로 처벌을 받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인생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수도 있다.
[5]
2013. 3. 28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