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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사업(비밀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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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조치 내용3. 부작용4. 피해자5. 이후6. 대중매체7. 외부 링크

1. 개요

전두환 정부에서 대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뿌리뽑기 위해 국군보안사령부(당시 사령관 박준병)에서 실행했던 공작. 대한민국 정치사의 대표적인 불법사찰행위다.

단어의 유래는 박정희 정부의 녹화사업인데 대학생들 머리에 든 빨간 물을 파란 물로 바꾼다는 의미로 '녹화사업'이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서 '빨간 물'이란 단순히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뜻하는 것 이상으로, 당시는 군사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친북·좌경·용공으로 몰던 시대였기 때문에 의미의 폭이 매우 넓다. 쉽게 말해 대통령을 비판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박정희 정부도 이와 비슷한 공작[1]을 행하였으나 약간 다른 면이 있다.

2. 조치 내용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되면 일단 강제 휴학 & 으로 입대처분,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당시엔 학생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대학 학칙에 '지도 교수가 학생을 휴학시킬 수 있다'는 항목이 있었는데 이를 빌미로 경찰 수사관들이 대학교 지도교수들을 찾아와서 반강제로 대상 남학생을 강제로 휴학시킨 뒤 제멋대로 입영통지서를 뽑아 와서 바로 입대시켜 버렸다. 바로 잡아가서 입대 통지서를 뽑아서 훈련소에 집어넣었으므로 가족이나 친구들 입장에선 어리둥절하게 된다. 심지어 병역판정검사도 안 하고 무조건 현역병으로 집어넣는 경우도 있었는데 6대 독자(녹화사업 당시에는 병역면제 대상), 눈이 나빠 면제받은 학생, 습관성 탈골이 있는 학생도 녹화사업으로 강제징병되었으며 소아마비로 인해 움직이는 데 불편하거나 한쪽 눈을 실명한 학생 등 장애가 있는 대학생도 녹화사업으로 강제입대되었고 만 19세 이하라서 입영연령 미달이었는데 징집된 학생[2] 있었다. #

그리고 반대로 대학생 출신 입대자를 찾아서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하기도 했다. 대학생 출신 중에서 자신이 학군장교 장교후보생이거나 보충역으로 나와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있는 경우에는 상관 없었다고 하고 예비역들도 이미 군복무를 마쳐서 상관 없었다고 하지만 이런 경우라도 군 복무 중에 조지지 않았을 뿐이지 가혹하게 다루거나 인생 꼬이게 만드는 방법은 많았다. 대부분 제대 후 유학 등을 이용해 도피했다.

거주지에 따라 내륙 지역 거주자는 육군, 수도권에선 경기도 김포시 인천광역시, 경기도 부천시, 당시 시흥군 등 서해안 내지 한강 하구 등 해안 지역 및 제주도 도서 지역 거주자들은 전원 해군으로 갔는데 예나 지금이나 수병은 지금은 폐지된 방위병과 그 후신인 현 상근예비역을 빼면 징집이 아닌 지원 형식으로만 뽑기 때문에 해군에 녹화사업으로 끌려간 경우는 밑에 언급할 경우를 빼면 당시 징병권이 있었던 해병대 소속으로 끌려갔는데 이들이 해군 인원으로 집계됐다. 해병대의 임무와 역할을 고려하여 100% 지원자로만 병력을 모집하는 현재와는 다르게 당시에는 각 시도별로 돌아가면서 입영대상자 중 일정 비율을 해병대로 차출해 갔다. 이렇게 해서 해병대에 입대하게 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가수 김흥국. 문제는 아무나 차출하다 보니 해병들의 질이 상당히 나빠졌고 이로 인해 온갖 똥군기, 기수열외 등의 막장스런 병영부조리들이 창궐하는 부작용이 생겼다는 점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차출 없이 100% 지원제로만 병력을 가려 뽑게 되었으나 여전히 각종 부조리가 남아 있다.[3]

강제로 무조건 입대하게 되었는데 육군 군사특기 보병에 주특기는 소총수로만 고정 배정하도록 해 최전방의 휴전선 경계부대로 배속되었으며 해군 제2해병사단 해병대 제6여단 해안 경계 부대로 배치했고 이미 수병으로 근무 중일 때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되거나 대상자가 자진해서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한 훈련병일 경우 전방 고속정에 배치했다. 녹화사업 대상자가 된 수병들은 고속정 외 근무지에서 근무하다가도 전방 고속정에 재배치되기도 했고 통상 6개월 이상 함정 근무한 수병들이 대상이 되는 육상으로의 전출자 선발에서 무조건 제외해 전역할 때까지 고속정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다. 심한 경우 해군에서 전역이 임박한 녹화사업 대상자인 수병을 여러 사유로 전역을 연기해 붙들어 놓은 적도 있는데 피해자 이상석은 전역이 불법하게 연기되어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뒤 해군 이병으로 전역했다. 단 공군에는 군 특성상 없었다. 이 내용대로라면 공군의 특성상 자원입대한 공군병 중에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하려고 하는 병사가 있다고 해도 지정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4]

대상이 대상인 만큼 위에 언급한 예외를 빼고 이들의 신규 장교 임관은 철저히 막았다. 드물게 병 복무기간 만료 혹은 도중에 하사관에 지원해 군에 남는 것은 막지 않았는데 당시 하사관에 대한 처우와 대민 인식이 오늘날 부사관에 대한 그것보다도 낮아 지원률이 바닥을 기어 한 명이라도 지원해 주면 정말 감지덕지였던 데다 불순분자가 알아서 군에 남아 행동을 통제받고 민간에 방출되지 않겠다고 하니 감시 및 세뇌, 전향 등도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장교에 비해 고급 정보를 취급하지도 않아 보안 위험성도 낮았으며 전향만 확실히 시키면 자신이 한때 몸담은 운동권 등에 대해 확실히 꿰뚫고 있는 만큼 관련 업무에 투입하기도 좋았다.

일각에서는 녹화사업 대상자들을 무조건 전방으로 배치한 것은 단순히 고생뿐만 아니라 몸이 망가져서 민주화 운동 & 학생 운동을 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즉 전방의 강원도나 철원 같이 극한의 추위나 열악한 환경으로 고생하는 곳으로 가서 동상에 걸리거나 병들어 제대해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아니면 가서 확 죽으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당시 강제입대자들이 배치됐던 곳들은 지금도 겨울에는 날씨가 워낙 추워서 동상 환자가 속출하는 등 생활환경이 열악하다. 물론 21세기에는 장병들의 복지와 인권을 그래도 챙겨주는 편이지만 1980년대는 일반 입대자들조차 열악한 군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녹화사업 대상자에게는 그렇잖아도 힘든 복무를 더욱 가혹하게 시키는 경우가 많아서 몸이 병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하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보상? 당연히 그딴 건 없었다. 이쯤 되면 전두환은 인위적으로 병들게 하거나 죽게 하려는 의도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당시 녹화사업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꽤 신빙성 있는 증언도 많다.

전두환 정권은 이렇게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된 병사/수병들에게 대학 내 학생운동을 감시하고 방해하는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온갖 폭력이 동반되었다. 이런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 #, #

이 시기에 발생한 수많은 군 의문사 사건의 피해자들 중에는 녹화사업 대상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3. 부작용

부작용도 존재하였는데 전방 철책에 배치된 몇몇 강제입대자들은 군사정권의 탄압에 염증을 느끼고 월북하기도 하였다. 녹화사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강제입영된 육군 병사가 아군을 여러 명 죽이고 월북한 사건도 있었으며 강제입영으로 내부의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원을 최전방에 보낸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도 눈엣가시인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로 군대로 끌고 갔지만 무조건 전방철책으로 보내지는 않았고 일단 입대가 결정되면 다른 신병들과 똑같이 뺑뺑이 돌려서 전국에 분산배치했다. 예를 들어 당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서 강제징집된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정동영은 후방 향토사단이었던 제33보병사단(현 제17보병사단) 본부대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다만 각 부대 보안대(오늘날의 기무부대)가 이들을 집중관리했다고는 한다.

거치적거리는 운동권 대학생들을 가혹한 환경의 전방 전투부대에 배치해서 고통받게 한 뒤 프락치로 회유하는 게[5] 당시 신군부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방이라고 모두 편한 꿀보직도 아니고 오히려 전방철책보다 힘든 곳도 수두룩한데[6] 정권과 체제에 극도의 반감을 가진 인물들을 무조건 전방에 보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신군부의 인물들이 얼마나 군의 현실을 모르는 똥별들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냥 전방은 힘들고 후방은 편하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월북이나 총기사고 등의 위험성 등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최전방을 국가 수뇌부가 이런 식으로 생각했으니[7] 다른 징병 대상자들도 녹화사업 대상자들에 대한 감정이 어떻건 당연히 가능하면 전방에 배치되지 않으려 들고 그게 불가능하면 군대를 빠지려는 병역비리가 횡행할 수밖에 없었다.

4. 피해자

파일:녹화사업항거.jpg
녹화사업 시기 대한민국 육군에서 의문사한 대학생 6명[8]

당시 군 내부, 특히 정보기관 보안사에서 비밀리에 추진한 일이었기 때문에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애초에 강제입대 자체가 워낙 학부모들과 사회의 반발이 심했으므로 1984년 9월 13일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때 녹화사업도 공식 중단되었다고 발표했지만 그로부터 21년 후인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에 대한민국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확인한 것처럼 이러한 발표는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유명 인사가 된 86세대 정치인들 중에도 이 사업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이들이 제법 있다. 대표적으로 참여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현직 작가인 유시민 전 국회의원은 녹화사업 해당자였는데 당시 보고서에는 녹화완료로 처리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명박 정부 시절 문체부 장관이었던 정병국 국민의힘 국회의원도 1980년 5.17 내란 직후 녹화사업 대상자가 되어 해병대에 징집됐다. 김선수 대법관도 녹화사업으로 강제입대했다고 한다.

파일:XRhxhYIr.jpg

상기 사진은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에 있는 녹화사업 희생자 추모비.

5. 이후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은 뒤 이렇게 입대한 이들은 제대한 후 학교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학생들을 강제적으로 휴학시킨 것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이후 남은 학기 동안 전액 장학금을 받았으며 그렇게 모은 돈으로 군 입대 중 의문사한 6명의 학생들(이윤성, 김두황, 정성희, 최온순, 한영현, 한희철)을 위로하는 위령비를 고려대학교 민주광장[9]에 건립했는데 이 비석은 아직도 남아 있다.

2005년 12월 19일에 국방부 과거사위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특별 정훈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강제입대를 안 시켜서 그렇지 대학생 입대자에게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하는 행위나 군내 의문사는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군 내부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다. 심지어 다음 정권인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도 계속되었는데 ' 평양축전 참가를 위한 군산대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다가 강제입영된 최홍기 이병이 가혹행위 및 반공교육을 받다가 1991년에 탈영 양심선언을 했고 1993년에 구속됐다. 해당 사건은 <월간 말> 1991년 6월호에도 보도됐다.

노골적이지 않아서 이슈가 안 되었을 뿐이지 2010년대 중반에도 각 군 훈련소에서 기무사 파견 인원들이 신병들을 모아 놓고 데모에 참여한 적이 있거나 그런 사람을 아는 이는 잠깐 면담할 테니 나와라는 식의 사상검증 행위를 했음이 밝혀졌으며 신병 총원을 불러모은 뒤 설문조사를 실시해 일부를 추려내 면담하기도 했다.

이는 겸사겸사 기무사령부나 기타 정보관련 특기 등에서 근무할 이들을 선발하기 위한 조사 과정이기도 하므로 여기서 대답 잘 하거나 좋은 정보 등을 알려주거나 한 인원들은 기무부대 등에 가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다만 인생 피곤해질 확률이 좀 있고 안 그렇더라도 사람에 따라 뒤가 괴로워질 수 있어 안 가는 게 낫다고 한다. 특히 뭔가를 함구하거나 자신만 알고 묻어 놓는 게 힘든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다. 말은 쉬워 보이겠지만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꺼림칙한 정보를 접하게 될 수도 있다. 예전에 군의 민간인 사찰 사건을 폭로해 버린 사람도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고 망명하였으며 함부로 발을 못 들여놓고 있다. 정보 관련 보직 자체가 굉장히 까다로운 데다 부대 특성상 군기도 심하게 빡세다고 한다. 2005년 디시인사이드에 음어표를 찍어올려서 문제가 되어 결국 잡혀들어간 사람도 군 복무 중 너무 심한 압박을 받은 게 계속해서 발현됐고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서 홧김에 간부에게 보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게다가 선발되고 나서부터 제대 이후까지도 어느 정도 사찰 대상이 된다고 하니 정확한 사실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꺼림칙하니 되도록이면 기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간단하게 면담 때 나는 제대 이후 보안 등의 사항을 준수하기 어려운 주변 관계와 사회적 위치에 있고 성격/성향상으로도 그렇기 때문에 정보병과의 복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된다. 다른 부대라면 인원이 모자랄 경우에는 그에 상관없이 성격개조를 시켜서라도 끌고가려 할 수 있지만 정보 관련 보직들은 간부 입장에서도 매우 예민한 병과이기 때문에 자기 입으로 저렇게 말하는 꺼림칙한 신병을 들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울러 최근까지 알게 모르게 행해졌던 운동권 출신 또는 데모에 참여한 적이 있는 육군훈련소 입대자의 전투경찰 전환복무도 어찌보면 녹화사업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부 입장에선 "데모질 실컷 했으니 군대 가서 데모 진압하며 그간 한 짓거리를 반성하고 속죄하라."는 의미도 있고 운동권들이 이렇게 자기가 가기 싫어도 강제로 끌려가 전경 차출된 이들조차 배신자로 매도해 전역 후 배척하는 성향을 이용해 운동권의 분열을 노린 의도도 있었다. 운동권들이 누가 의경 간다고 하면 좀 안 좋게 보는 분위기가 한동안 남아 있었지만 강제 차출하는 전투경찰은 폐지되었으므로 해당사항이 없어졌고 의무경찰마저도 2023년에 폐지되면서 전환복무 자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21년 12월 15일, 서울지방법원 민사25부(재판장 이관용)는 전두환 정권의 녹화사업 의문사 피해자 이윤성(성균관대 81학번)의 유가족에게 총 5억 2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
[판결] 법원, 전두환 정권 시절 '프락치 강요' 피해자들에 국가 배상 판결

이후 법무부가 국방부의 항소포기 의사에도 항소를 지휘했다가 피해자의 사망 이후에야 항소를 취하했다는 한겨레 단독보도가 나왔다. [단독] 과거사 진영논리 없다? 한동훈 법무부 시간 끌다 피해자 숨져

2024년 9월 24일, 진실화해위원회는 1987년 2월 김용권 의문사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번 결정을 통해 김용권이 국군보안사령부의 가혹행위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이 인정되었고 보안사가 사건을 축소·은폐한 정황도 확인됐다. 보안사는 가혹행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수사에 개입해 김용권의 사인을 정신질환으로 인한 비관 자살로 몰아갔고, 이후 거짓 진상보고서까지 작성했다. #

6. 대중매체


* 2024년 1월 13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다루었다. 녹화사업으로 사망한 이윤성, 한희철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명했으며 녹화사업 피해자들과 사망자들의 친구들이 인터뷰이로 출연해 증언하였다.

7. 외부 링크



[1] 이 중 유신정권의 비슷한 공작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이 병역문제대책위원회 사건이다. [2] 다만 당시에도 만 19세의 지원 입대는 가능했다. 즉 군입대 가능 연령이라는 핑계를 대고 끌고 간 것이다. [3] 물론 해병대뿐만 아니라 육해공군 모두 부조리가 있긴 하다. [4] 공군은 전투기 등 고난이도와 고가의 장비가 많기 때문에 장교, 부사관, 준사관이 아니면 다루기 힘들다. 병 신분은 지원병이다. [5] 일단 한 번이라도 프락치 짓을 하면 이후 운동권에 복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신군부에 협조적이거나 최소한 운동권을 탈퇴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경찰로 특채되어 초대 경찰국장을 역임한 김순호. [6] 예를 들어 후방의 기동예비부대는 장비와 시설이 좋은 대신 일반부대보다 고강도로 훈련시킨다. [7] 정상적인 국가라면 최전방 근무 환경이 열악하거나 개전 직후 다수가 죽고 다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해도 최소한 반대급부로 시설을 잘 갖춰 주고 대우도 잘 해 주는 것이 정상이다. 신군부는 이런 당연한 상식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민간인들보다 군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집단이었다. [8] 최근에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전두환 정권 시절 운동권 출신으로 입대했다가 의문사한 이진래(1981년 사망), 김용권(1987년 사망), 최우혁(1987년 사망)도 포함해 9명으로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9] 학생회관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2012년 홍보관 앞 편의점(소위 깡통이라 불리던 곳)은 철거되었으며 홍보관도 2018년 중순부터 철거 및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갔다. 현재 고려대학교에 재학 중이거나 방문하게 된다면 학생회관 맞은편에 있는 나무로 된 휴게장소(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는 곳) 바로 아래쪽을 찾아보면 된다. [10] 이 역을 맡은 연기자는 김수근으로, 12회에서 유시민 역을 연기하기도 했다. [11] 2023년 11월, 한희철의 40주기 추모식을 준비하면서 오마이뉴스와 6회에 걸쳐 인터뷰했다. [12] 현재까지 최우혁, 김용권, 한영현, 김두황 씨의 사연이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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