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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11:35:02

루이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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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BF><colcolor=#000> 프랑스 왕국 발루아오를레앙 왕조 초대 국왕
루이 12세
Louis X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ouis-xii-roi-de-france.jpg
이름 루이 도를레앙
(Louis d'Orléans)
출생 1462년 6월 27일
프랑스 왕국 블루아 성
사망 1515년 1월 1일 (향년 52세)
프랑스 왕국 트루넬 저택
재위 프랑스 왕국의 국왕
1498년 4월 7일 ~ 1515년 1월 1일
밀라노 공국의 공작
1499년 9월 6일 ~ 1512년 6월 16일
나폴리 왕국의 국왕
1501년 8월 2일 ~ 1504년 1월 31일
배우자 프랑스의 잔 (1476년 결혼 / 1498년 무효화)
브르타뉴 여공작 안 (1499년 결혼 / 1514년 사망)
메리 튜더 (1514년 결혼)
자녀 클로드, 르네, 미셸(사생아)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샤를
어머니 클레페의 마리
형제 마리, 안
서명
파일:루이 12세 서명.svg
1. 개요2. 가족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오를레앙 왕조의 초대 왕이다.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의 손자이며 그를 계승한 샤를 1세 도를레앙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샤를은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에게 포로로 잡혀 1440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때까지 25년 동안 잉글랜드의 포로로 있었다.

1465년에 3살의 나이로 오를레앙 공작위를 계승하긴 했지만 왕이 될 가능성은 없는 사람이었는데 14세 때 6촌 형[1] 루이 11세의 차녀, 잔 드 프랑스와 결혼하면서 프랑스의 왕세자였던 7촌 조카, 샤를 8세의 매형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샤를 8세 재위 원년에 안 드 프랑스가 섭정인 것에 불만을 품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손잡고 광기 전쟁이란 이름으로 내전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투옥되었다가 1491년에 용서받아 풀려났다. 이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하여 제노바를 점령하고 밀라노를 위협했다.

샤를 8세가 사고로 요절하고 그의 아들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죽자 루이 12세는 《 살리카법》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하자마자 불임인 잔 드 프랑스와 이혼하고, 선왕 샤를 8세의 미망인인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했다.[2][3]. 이때 혼인 무효를 인정받기 위해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후원했으나 교황 사후 이를 철회했다.

이후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제2차 이탈리아 전쟁 제3차 이탈리아 전쟁을 벌였다[4]. 이 전쟁이 프랑스에 르네상스적 분위기를 이끌어오는데 영향을 주었고, 후임 왕인 프랑수아 1세의 치세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전쟁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비군 제도의 정비, 도로 건설, 수리시설 개선, 농민 보호, 관료조직의 확충, 지방관습법 편찬, 소송제도의 개선 등을 단행하여, 1506년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국민의 아버지 칭호를 얻게 되었다.[5]

2. 가족

2.1. 성녀 잔 드 프랑스

파일:Arms_of_the_Kingdom_of_France_(Ancien).svg
프랑스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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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왕조
위그 로베르 2세
아키텐의 아델라이드 이탈리아의 로잘라 부르고뉴의 베르타 아를의 콘스텐체
앙리 1세 필리프 1세
프리슬란트의 마틸다 키예프의 안나 홀랜드의 베르타 몽포르의 베르트라드
루이 6세 루이 7세
로슈포르의 루시엔 모리엔의 아델라이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카스티야의 콩스탕스
(루이 7세) 필리프 2세
샹파뉴의 아델 에노의 이자벨 덴마크의 잉에보어 메라니의 아녜스
루이 8세 루이 9세 필리프 3세
카스티야의 블랑카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 아라곤의 이사벨 브라반트의 마리아
필리프 4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 헝가리의 클레망스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
샤를 4세
부르고뉴의 블랑슈 룩셈부르크의 마리아 에브뢰의 잔
발루아 왕조
필리프 6세 장 2세
부르고뉴의 잔 나바라의 블랑슈 보헤미아의 보나 오베르뉴 여백작 잔 1세
샤를 5세 샤를 6세 샤를 7세 루이 11세
부르봉의 잔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앙주의 마리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루이 11세) 샤를 8세 루이 12세
사보이아의 카를로타 브르타뉴 여공작 안 프랑스의 잔 브르타뉴 여공작 안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잉글랜드의 메리 프랑스의 클로드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카테리나 데 메디치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로렌의 루이즈
부르봉 왕조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마리아 데 메디치 오스트리아의 아나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루이 15세 루이 16세
마리아 레슈친스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오를레앙 왕조
루이 필리프 1세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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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eanne de France.jpg
1464년 4월 23일 ~ 1505년 2월 4일 (향년 40세)

프랑스의 왕인 루이 11세와 두 번째 왕비인 사보이아의 카를로타[6] 사이에 태어난 8명의 자녀 중 4번째 자식이자 2번째 딸이었다. 잔의 부모는 총 8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어린 시절을 지나 살아남은 것은 잔의 언니인 안 드 프랑스와 잔, 그리고 남동생인 샤를 8세뿐이었다. 잔이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무래도 후계자가 불안했던지 6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의 결혼이 결정되었고, 그로부터 10년쯤 후 잔이 12세 때 결혼하게 된다. 잔은 약간의 기형과 약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이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했을 것이다. 잔이 19세가 된 1483년에 아버지 루이 11세가 사망했고, 14세의 남동생인 샤를 8세가 뒤를 이었는데 샤를 역시 잔과 마찬가지로 몸이 병약했다. 병약하고 어린 샤를을 대신해서 언니 안 드 프랑스가 섭정을 맡았다. 동생 샤를은 1498년에 후계자없이 사망했고, 잔의 남편 루이가 '루이 12세'로 프랑스 국왕에 즉위했다.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자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녀와 이혼을 하고, 잔의 올케였던 안 드 브르타뉴와 2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루이 12세와 이혼한 후 잔은 베리 여공작의 칭호를 받았고,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는 수녀회를 창립한 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1562년 5월 27일에 위그노들이 잔의 묘를 훼손하고, 시신을 불태웠는데 시신이 불후[7] 상태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1742년 4월 21일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50년 5월 28일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2. 안 드 브르타뉴

파일:Anne of Brittany.jpg
1477년 1월 25일 ~ 1514년 1월 9일 (향년 36세)

샤를 8세와 루이 12세와의 결혼으로 두 번이나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두 번째 부인 나바라의 공주 마르그리트 드 푸아와의 사이에 태어난 두 명의 딸 중 장녀였다. 그의 아버지가 두 번의 결혼에서 남자 후계자를 얻지 못한 채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11세의 안이 브르타뉴 공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나이도 어렸고 도와줄 어머니 역시 사망한 다음이라 브르타뉴 공국을 탐내는 사람이 많았다.

안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8]와 대리혼까지 마쳤는데 브르타뉴 공국이 넘어갈 것을 아까워하던 샤를 8세가 가까운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서 막시밀리안 1세가 신부를 데려가기 전에 안을 냉큼 빼앗아와서 왕비로 삼아 버렸다. 이 때 샤를 8세와 결혼하기 위해서 막시밀리안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가 미래의 왕비 자격으로 2세 때부터 프랑스 왕실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딸도 아빠도 결혼 상대를 빼앗기고 팽당한다.

샤를 8세와의 첫 번째 결혼에서 총 7번의 임신을 했고, 해마다 임신 출산을 반복했는데 살아남은 후계자가 없었다. 그리고 남편이 사고로 사망하자 루이 12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루이 12세는 부인이던 잔 드 프랑스와 혼인 무효를 하고, 안 드 브르타뉴와 2번째 결혼을 단행했다. 안은 이 2번째 결혼에서 9번의 임신을 했고, 역시나 거의 해마다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으나 2명의 딸을 제외하고는 남자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인생 내내 임신과 출산, 유산을 반복한 그녀는 3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남편인 루이 12세는 역시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메리 튜더와 3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루이 12세와 안 드 브르타뉴의 첫째 딸 클로드 드 프랑스는 프랑수아 1세의 첫 번째 왕비이기도 하며, 앙리 2세의 모후이다. 둘째 딸 르네 드 프랑스는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2세 데스테와 결혼하여 페라라 공작 부인이 되었다. 남편인 에르콜레 2세 데스테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 딸인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장남이기도 했다.

2.3. 메리 튜더

파일:MaryTudorQueenofFrance-e1425662050856-787x1024.jpg
1496년 3월 18일 ~ 1533년 6월 25일 (향년 37세)

두 번째 왕비인 안 드 브르타뉴와의 사이에서 적법한 남자 후계자를 얻지 못한 루이 12세는 자신보다 34세나 어린 잉글랜드의 왕녀 메리 튜더와 3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메리 튜더는 헨리 8세의 여동생이자 헨리 7세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에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메리의 오빠인 헨리 8세는 여동생 메리와 사이가 좋았다고 하며, 메리를 아껴 자신의 딸의 이름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메리로 지었다고 한다[9]. 또한 군함의 이름을 '메리 로즈'로 명하기도 했다. 메리는 당대 유럽 제인의 미인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외모가 아름다웠기에 의붓 사위이자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한 다음번 왕인 프랑수아 1세가 찝쩍거렸다는 소문도 있다. 18세의 메리는 52세의 노인[10]이었던 루이 12세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 3개월 만인 1515년, 루이 12세는 침실에서 격심한 활동을 하다가 복상사(...)했다. 이에 왕위는 루이 12세의 5촌 조카이자 사위가 되는 프랑수아 1세에게 가게 되었다.

아직 어린 메리 튜더는 오빠인 헨리 8세의 친구이자 신하인 찰스 브랜든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다. 동생을 예뻐했지만 메리는 공주의 신분이었고, 공주는 나라에 이익에 되는 결혼을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 결혼에 헨리 8세는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두 번째 결혼에서 메리는 총 4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 중 딸 프랜시스 브랜든은 이후 '9일의 여왕'으로 불리는 제인 그레이의 어머니였다.


[1] 형이라지만 루이 11세와 루이 12세는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나이차가 많이 났다. [2] 안 드 브르타뉴에게 합스부르크 황실의 막시밀리안 1세가 청혼한 것이 루이 12세가 조강지처(...)인 잔과 혼인 무효를 하고, 안과 혼인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서부의 브르타뉴가 신성 로마 제국에게 넘어갈 경우,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동북부의 플랑드르와 서부의 브르타뉴 양 측면에서 포위되기 때문이었다. [3] 한편 또다른 이유로는, 잔이 임신을 못 하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샤를 8세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루이 11세는 지방 각지의 봉건귀족들을 제압하며, 서유럽 최초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했는데, 제아무리 왕족이기는 하지만 강력한 귀족인 루이 12세의 집안이 탐탁치 않게 보였고, 그로 인해 자신의 딸이기는 하지만 임신을 못하는 여자와 결혼시켜서 자연스럽게 대가 끊어지게 하려 한 것이었다. 왕비에서 내려온 이후 잔은 수녀가 되었다. [4] 시기로 치면 1499~1504년, 1508~1516년. 다만 루이 12세 자신은 1515년에 죽었고, 뒤를 이은 프랑수아 1세가 전쟁을 계속했다. [5] 마키아벨리는 《 군주론》의 제 16장 <관대함과 인색함에 대하여>에서, 이런 루이 12세의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전쟁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이 튼튼해진 것이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는 한편 루이 12세 자신이 근검절약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6] 부모의 나이 차이는 거의 20세 가까이 났고, 카를로타는 겨우 9세 때 27세의 남편과 결혼했다. 루이 11세의 첫 번째 왕비는 스코틀렌드의 마가렛 스튜어트였는데 인형처럼 예쁜 외모를 가졌었다는 그녀는 남편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20세에 사망했다. [7] 시신이 썩지 않음을 이르는 말. 기독교에서는 신의 개입으로 인해 시신이 썩지 않음으로써 해당 인물이 성스러운 인물임을 나타낸다고 한다. [8] 막시밀리안 1세의 두 번째 부인이다. 막시밀리안 1세의 첫 번째 부인은 부르고뉴 공국의 여공작 마리 드 부르고뉴로 '황금의 신부'라 불릴 만큼 부유한 여성이였다. 하지만 마리는 막시밀리안 1세의 3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낙마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막시밀리안 1세는 그녀가 죽자 매우 상심했다고 한다. [9] 헨리 8세가 자신의 장녀인 메리 왕녀(훗날 메리 1세)를 박대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앤 불린을 만나기 전에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메리 모녀를 매우 총애했다. 그러니 아끼는 여동생의 이름을 따서 장녀의 이름을 지은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10] 당시 기준으로는 노인에 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