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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4 21:59:47

외드 4세

파일:부르고뉴 십자가(옛 깃발형-기본형).svg
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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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01a0><colcolor=#ffffff> 부르고뉴의 공작
외드 4세
Eudes IV de Bourgogne
파일:외드 4세.png
출생 1295년
부르고뉴 공국
사망 1349년 4월 3일
프랑스 왕국 상스
재위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
1315년 5월 9일 ~ 1349년 4월 3일
배우자 부르고뉴의 잔 3세 (1318년 결혼 / 1347년 사망)
자녀 필리프
아버지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
어머니 프랑스의 아녜스
형제 블랑슈, 마르그리트, 잔, 위그 5세, 마리, 루이, 로베르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2. 생애

1295년경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 로베르 2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인 프랑스의 아녜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블랑슈[1], 마르그리트[2], 잔[3], 위그 5세[4], 마리[5], 루이[6], 로베르[7]가 있었다.

1315년 형인 위그 5세가 사망한 뒤 부르고뉴 공작을 계승했으며, 동생 루이에게 듀스메 성과 4만 파운드의 수입을 양도했다. 1316년 7월 17일, 프랑스 국왕 루이 10세는 임종을 눈앞에 두고 필리프 드 푸아티에를 왕국의 섭정으로 선임했다. 1316년 11월 19일 아기 국왕 장 1세가 요절하자, 필리프 드 푸아티에는 살리카법을 내세워 루이 10세의 딸인 의 계승권을 부정하고 필리프 5세의 이름으로 프랑스 국왕에 등극했다.

외드 4세는 이에 불복해 잔이 여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랭스에서 열린 필리프 5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이 호응해주지 않아서 필리프 5세의 프랑스 국왕 등극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잔을 나바라 왕국의 여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필리프 5세가 나바라 왕위마저 자기 것으로 삼는 바람에 실패했다. 외드 4세는 잔이 정당한 상속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관습적이고 신성한 법적 권리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필리프 5세를 전복하기 위해 플란데런 백국의 반란 세력과 공모하기도 했다.

1318년 3월 27일, 외드 4세는 필리프 5세와 협상한 끝에, 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다면 브리와 샹파뉴 백국은 잔에게 승계되기로 합의했다. 또한 외드 4세는 필리프 5세의 딸 잔(부르고뉴 여백작 잔 3세)와 결혼했고, 루이 10세의 딸 잔은 에브뢰 백작 루이의 아들 필리프[8]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리하여 외드 4세는 부르고뉴 백국의 관리권을 확보했다. 1321년, 1316년 사망한 형제 루이로부터 물려받은 아카이아 공국에 대한 권리를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자 앙주 백작 카를로 2세의 아들인 필리포 1세에게 상당한 금액을 받고 양도했다.

1322년 필리프 5세가 사망한 뒤 새 국왕 샤를 4세의 국왕 등극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프 5세의 딸이었던 아내의 권리를 내세워 푸아티에 백국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의회는 영지법에 따라 남성 상속인이 부족하여 프랑스 왕실에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왕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1328년 샤를 4세가 사망하자, 외드 4세는 발루아 백작 필리프에 대항해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려는 에브뢰 백작부인이자 루이 10세의 딸 잔을 재차 지지했다. 그러나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경쟁에서 승리해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되었고, 잔은 그 대신 나바라 여황 호아나 2세가 되었다.

그 후 외드 4세는 필리프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플란데런 백국 반란 진압에 참여해 카셀 전투에서 필리프 6세의 결정적인 승리에 기여했으나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1329년,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아르투아 백국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에 외드 4세는 아르투아 백국의 소유권은 현재 아르투아 여백작이자 부르고뉴 여백작인 잔의 딸이며 자신의 아내인 부르고뉴의 잔 3세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이에 맞섰다. 두 사람은 파리 의회에서 소송전을 벌였다. 재판에 참석한 필리프 6세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헌한 로베르 3세 다르투아를 소중한 동료로 여겼지만, 부르고뉴 공작과 척지기도 싫었기 때문에, 그에게 아르투아 백국을 분할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아르투아 백국 전체가 자신의 관할에 들어가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파리 재판에 참석한 법률가들이 면밀히 조사한 끝에, 1330년 12월 14일에 로베르가 제시한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위조 문서를 제작한 이는 베쑨 성의 영주 하벳 드 디비옹의 딸 잔 드 디비옹으로, 부친이 아르투아 여백작 마호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전 재산을 상실한 뒤 로베르 3세가 아르투아 백작이 되게 해준 후 재산을 돌려받고자 문서를 위조했다. 필리프 6세는 문서를 위조해 자신을 기만한 것에 분노했다. 잔 드 디비옹은 화형에 처해졌고, 로베르는 왕실 행정의 신뢰성을 훼손해 국왕의 권위에 모독을 가한 혐의로 형사 재판에 회부된 뒤 1332년 4월에 유죄 판결을 받고 모든 소유물을 영구히 박탈당한 뒤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이리하여 아르투아 백국은 외드 4세의 아내인 잔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아르투아 백국의 귀족들은 강력한 권세를 지닌 부르고뉴 공작을 주군으로 섬기게 되면 자치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 거라 여기고 1335~1337년, 1342 ~ 1343년, 1346~1348년에 걸쳐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백년전쟁 시기, 외드 4세는 프랑스 왕국의 편에서 잉글랜드군에 대적했다. 1340년 로베르 3세 다르투아의 공세에 맞서 생오메르 전투를 치러 생오메르를 지켜냈다. 이후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장 드 몽포르과 대결하던 샤를 드 블루아를 지원했으며, 필리프 6세의 장남인 노르망디 공작 장의 고문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 1346년에는 노르망디 공작 장이 지휘한 에기용 공방전에 참여했다.

1346년 말, 아르투아 귀족들은 외드 4세로부터 무거운 세금을 계속 부과받는 데다 잉글랜드군이 아르투아 일대를 약탈하는 걸 잘 막아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 왕실의 직할지가 되어서 필리프 6세의 보호를 받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피리프 6세는 1346년 12월 2일 공작의 권리와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 대신 아르투아 백국을 대신 지켜주고, 외드 4세가 수행하지 않은 지역 방어에 사용하기 위해 아르투아인들이 제공한 세금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외드 4세는 어쩔 수 없이 왕의 지령에 따라야 했지만, 3주 후에 필리프 6세가 다른 귀족들의 강한 압력을 받은 끝에 명령을 취소하면서 아르투아 백국에 대한 통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

1347년 아내 잔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백국은 그의 관할권에 확실히 들어갔다. 같은 해에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와 동맹을 맺고 피에몽테에서 군사 원정을 벌였다. 1347년 브장송의 부르주아들과 동맹을 맺은 프랑슈콩테 남작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이를 어렵사리 진압했다. 1349년 4월 3일 금요일 상스에서 급사했는데,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아내 잔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을 낳았으나 필리프를 제외하면 모두 요절했으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필리프마저도 1346년 에기용 공방전을 치르던 중 에기용 요새 도랑을 건너다가 낙마하는 바람에 전사했다. 따라서 필리프의 아들이자 그의 손자인 필리프 1세가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했다.


[1] 1288 ~ 1348, 사보이아 백작 에도아르도의 부인 [2] 1290 ~ 1315, 프랑스 국왕 루이 10세의 왕비 [3] 1293 ~ 1349,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왕비 [4] 1294 ~ 1315, 부르고뉴 공작 [5] 1298 ~ 1323년에서 1336년 사이, 바르 백작 에도아르도 1세의 딸 [6] 1297 ~ 1316, 테살로니카 왕국의 명목상 국왕 [7] 1302 ~ 1334, 샬롱 여백작 잔 1세 드 샬롱토네르의 남편 [8] 아버지 루이 10세의 사촌. 필리프의 아버지 에브뢰 백작 루이와 잔느의 할아버지 필리프 4세가 이복형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