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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공 장

파일:부르고뉴 십자가(옛 깃발형-기본형).svg
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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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01a0><colcolor=#ffffff> 부르고뉴의 공작
장 1세
Jean Ier de Bourgogne
파일:용맹공 장.jpg
출생 1371년 5월 28일
부르고뉴 공국 디종
사망 1419년 9월 10일(향년 48세)
프랑스 왕국 몽뜨흐
재위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
1404년 4월 27일 ~ 1419년 9월 10일
배우자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 (1385년 결혼)
자녀 마르그리트, 마리, 선량공 필리프, 카트린, 잔, 이자벨, 안, 아녜스
아버지 호담공 필리프
어머니 플란데런의 마르그리트
형제 마르그리트, 카트린, 앙투안, 마리, 필리프

1. 개요2. 생애3. 가족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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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루아 왕조의 2대 부르고뉴 공작. 프랑스 왕국의 최고 권력을 놓고 아르마냑파와 내전을 벌이다가 잉글랜드 왕국의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마냑파와 화해를 시도했으나 몽뜨흐 다리에서 암살당했다. 별명인 용맹공은 sans Peur의 번역으로, 좀 더 직역에 가깝게 '무외공'(無畏公)이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The fearless로 번역한다.

2. 생애

1371년 5월 28일,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의 부르고뉴 공작 궁전에서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의 딸인 마르그리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손자였으며, 장자 상속의 원칙에 따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을 운명이 주어졌다. 형제로 마르그리트[1], 카트린[2], 본[3], 앙투안, 마리[4], 필리프가 있었다.

1384년 느베르 백작에 선임된 그는 1396년 프랑스에서 결성된 십자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으로 가서 부더에서 유럽 각지의 군대와 합세한 뒤 오스만 술탄국과 대적하려 했다. 십자군의 목표는 도나우강을 따라 이동해 니코폴리스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396년 9월 25일, 십자군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에게 궤멸되었고, 장은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버지 필리프는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세를 거둬들였다. 1398년, 필리프는 술탄에게 200,000 두카트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하고 장을 석방시켰다. 프랑스로 돌아온 장과 그의 동료들은 목숨걸고 이교도와 맞서 싸운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명성은 올라갔다.

1404년 4월 27일, 아버지 필리프가 사망했다. 장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뒤 5월 23일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앞에서 경의를 표했고, 디종으로 돌아가서 1404년 6월 17일 부르고뉴 공작으로 즉위했다. 그는 주민들 앞에서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도시민과 귀족들의 특권의 유지를 보장했다. 지난날 호담공 필리프와 치열한 정쟁을 벌였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은 장이 아직 미숙한 나이인 점을 이용해 부르고뉴 공국의 영향력을 프랑스 궁정에서 배제하려 했다. 장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샤를 6세의 왕비인 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호의를 사는 데 성공함으로써 프랑스 왕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1405년 2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준비하겠다며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했다. 장은 오를레앙 공작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지나치게 자극하고 있으며, 세금을 부과해서 얻은 돈을 갈취해 부를 챙기려 든다고 강력하게 비판했고,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도 동의했다. 그러나 루이 1세가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새로운 세금은 끝내 부과되었고, 이로 인해 민심이 악화되었다.

1405년 3월 21일,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사망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플란데런 백국, 아르투아 백국, 부르고뉴 백국(프랑슈콩테)을 상속받으면서 생전의 아버지만큼 강력해졌다. 이후 플란데런의 여러 도시로 가서 오를레앙 공작이 부과하려는 새로운 세금은 플란데런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며, 플란데런과 잉글랜드간의 상업 관계가 중단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해 그들을 안심시켰다. 이후 플란데런 해안을 파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제방 건설 사업을 단행했는데, 특히 기존의 여러 개의 작은 제방을 단일 구조로 통합했다. 이 제방은 덩케르크 인근 즈윈에서 사스드겐트를 거쳐 테르뉴젠으로 이어졌다.

1405년 7월, 루이 1세는 샤를 6세를 부추겨서 노르망디 공작위를 수여받았다. 노르망디 공작은 전통적으로 왕태자에게 수여되는 작위였는데, 그가 이 직위를 받은 것은 샤를 6세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과 같았다. 이에 노르망디와 북부 프랑스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루이는 어쩔 수 없이 노르망디 공작을 포기했다. 장은 이 기회를 틈타 루이 1세를 권좌에서 밀어내기로 마음먹었다. 1405년 8월 15일, 장은 찬탈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사치와 부패, 과도한 세금을 거둬들인 데다 무익한 전쟁을 벌여 백성을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간 오를레앙 공작을 타도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600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했다. 루이는 이에 크게 놀라 도팽 루이 이자보 왕비를 데리고 파리에서 도피했다. 그러나 장은 8월 19일 쥐비시 인근에서 왕태자를 가로챘고,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장은 행정, 사법, 재정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파리 대학교의 교수들도 대부분 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의 파벌이나 동맹이 다수 포함돼 있었던 파리 고등법원은 장의 개혁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루이는 자기 영지에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 파리로 진군했고, 장 역시 이에 대항하고자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베리 공작이며 선왕 샤를 5세의 형제인 장 드 베리의 중재 제의를 받아들였고, 1405년 10월 16일 평화 조약을 맺고 두 공작이 영원한 형제가 될 것을 맹세했다.

그 후 장은 칼레를 잉글랜드로부터 탈환해 플란데런 영지의 입지를 강화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위한 군자금을 준비했다. 그런데 1406년 하반기에 가스코뉴 원정을 단행했다가 부르 공방전에서 고전하고 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부족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장이 모으고 있던 자금을 빼돌렸다. 이로 인해 칼레 원정은 취소되었고, 장은 이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1406년 12월, 프랑스 함대가 생쥘리앵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에게 참패하면서 부르를 포위한 프랑스군에게 해상을 통해 보급할 길이 막혀 버렸다. 결국 프랑스군은 1407년 1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부르 원정이 실패하면서 위신이 떨어지자, 루이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경책을 내놓았다. 1407년 4월 28일, 그는 왕실 의회에 종사하던 부르고뉴 인사 26명 중 2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축출했다. 이에 분노한 장은 루이 1세의 무능과 독단을 공개적으로 성토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발발할 조짐이 일자, 이자보 왕비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루이와 장 1세에게 화해할 것을 거듭 호소했다.

파일:Assassinat_louis_orleans.jpg
오를레앙 공작 암살.

1407년 11월 20일, 두 사람은 프랑스 궁정에서 엄숙한 화해 서약을 교환했다. 그러나 불과 사흘 후인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은 막 출산한 이자보 왕비를 방문하기 위해 왕궁으로 향하던 중 마레 지구에서 장의 부하였던 라울 당크통빌이 이끄는 복면을 쓴 암살자 15명의 습격으로 암살당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심복들과 파리의 프레보는 수사 끝에 암살자들이 장과 접촉한 정황을 밝혀냈다. 파리 프레보가 추밀원 회의에서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의 자택 수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장은 베리 공작 장 드 베리와 앙주 공작 루이 2세에게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한 뒤 플란데런으로 도주했다.

1407년 12월 13일, 오를레앙 공작의 미망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가 검은 말이 끄는 검은색 천으로 장식된 마차를 탄 채 상복을 입은 대규모 수행단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샤를 6세 앞에 엎드리며 복수를 간청했다. 이에 파리 시의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은 모두 동정심을 보이며 그녀를 지지했다. 그러나 막대한 세금을 뜯어가면서 가스코뉴 원정 실패 등 온갖 실책을 저지르던 오를레앙 공작을 경멸했던 북부 프랑스의 도시들과 파리 시민들은 장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민심으로 인해 장을 섣불리 공격할 엄두를 못낸 오를레앙파 지도부는 1408년 1월 아미앵에서 장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초기에는 보복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장은 뜻밖에도 정적들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기세가 살아났다. 그는 수많은 귀족과 무장한 호위대를 이끈 채 아미앵에 입성한 뒤 왕족들 앞에서 오를레앙 공작은 악인이었으니 그를 죽인 건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파리 대학교 총장이자 신학자 장 프티를 비롯한 파리 대학교 신학과 교수들은 오를레앙 공작이 폭군이었으며, 폭군을 살해하는 건 정당하다며 장을 옹호했다. 이후 협상이 결렬된 뒤, 장은 기병 1,500명을 이끌고 파리로 진격해 2월 28일 파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발렌티나 비스콘티를 비롯한 오를레앙 지지자들은 사전에 빠져나갔고,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는 왕궁에 틀어박혔다. 그 대신, 도팽 루이가 호텔 생폴의 그레이트홀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장은 파리 대학 총장과 교수들, 파리 시민 대표 400인, 몰래 들어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을 살해한 이유에 대한 공개 변론을 했고, 모두의 지지를 받아냈다. 이후 그는 샤를 6세를 찾아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하지만 장이 찬탈하려 들 것을 두려워한 이자보 왕비는 3월 11일에 도팽 루이를 데리고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그의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를 탈출했다.

1408년 6월, 리에주 시민들이 주교 요한 3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리에주 주교는 장의 주요 동맹자였기에, 장은 그를 돕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 친 오를레앙 세력은 이 때를 틈타 파리로 쳐들어가서 곧바로 장악한 뒤 장에게 내려졌던 사면령을 취소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장은 오테여 전투에서 리에주 반란군을 궤멸시켰다. 이때 그는 반란군을 향해 앞장서서 돌격해 용맹을 떨쳤고, 이 때문에 지지자들로부터 '용맹공(sans Peur)'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이 오를레앙 공작 암살을 정당화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저항 의지를 상실한 오를레앙 세력은 11월 16일 투르로 후퇴했고, 장은 11월 28일 파리에 입성했다. 그 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1409년 3월 장은 정식으로 국왕의 사면을 받고 오를레앙 공작의 유족들과 공개적으로 화해했다.

이후 장은 추밀원과 재무부를 비롯한 주요 요직에 자리잡고 있던 오를레앙 파벌을 대거 숙청했다. 특히 샤를 6세의 총신이었던 장 드 몽테규를 체포해 약식 재판을 거쳐 참수했다. 또한 1409년 11월 이자보 왕비를 압박해 국왕 대리인의 권한을 도팽 루이에게 양도하게 했다. 1409년 12월 31일, 도팽 루이는 정신병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대신해 왕실 추밀원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12살에 불과했기에, 장이 추밀원을 진두지휘했다.

1410년, 살해된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인 샤를 1세 도를레앙은 장인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에게 자신 대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요청했다. 베르나르 7세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 클레르몽 백작 장 1세 드 부르봉 등을 끌어들여 부르고뉴에 맞섰다. 그가 부르고뉴파에 대항하는 정파의 리더를 자처했기에, 이들 파벌은 그의 가문 이름을 따서 '아르마냑파'라고 불렸다. 하지만 부르고뉴군이 파리를 강력한 군세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섣불리 파리로 진군하지 못했다.

1412년, 도팽 루이는 장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샤를 6세의 고문이었다가 장에게 밉보여 피살된 뒤 방치되어 있던 장 드 몽테규의 유해를 장과 상의 없이 매장했다. 이는 도팽이자 국왕 대리인으로서 장에 맞서는 아르마냑파를 포용하는 동시에 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1413년 1월, 장은 파리 삼부회를 소집해 정부를 개혁하고 잉글랜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촉구했다. 장의 지지 세력인 북부 프랑스 도시 대표들로 채워진 삼부회는 부유한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안했고,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이에 호응하면서 정부의 부패와 귀족들의 재정적 착취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부르고뉴파의 정책과 개혁의 방향성이 명확해지면서 장은 상류층 시민들과 대귀족들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도팽 루이는 이 때를 틈타 대귀족들과 면밀히 접촉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1413년 3월, 도팽 루이는 아르마냑파와 동맹을 맺은 뒤 장의 측근인 장 드 베이를 상서직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뱅센에서 열릴 예정인 토너먼트를 구실로 샤를 6세를 파리에서 탈출시킬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부르고뉴파 기사들과 정치 조폭들, 그리고 급진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폭도 수천 명이 4월 27일 그레브 광장에 모여 대재무관 피에르 데 에사르를 비롯한 도팽 루이의 측근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루이가 머물고 있던 별장으로 쳐들어갔다. 도팽 루이는 처음에는 자신의 측근들 중 누구도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군중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반역죄로 처벌받은 50명의 명단을 발표해야 했다.

군중은 이후에도 반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파리 시의 부유한 시민들과 귀족들 사이에 공포를 뿌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당파의 상징으로 하얀 색 두건을 맞춰 입으며 세력을 과시했고, 부르고뉴파의 주요 지지 세력인 파리 시 도축업자 조합과 그들의 대장인 시몽 카보슈의 이름을 따서 카보쉬앵이라고도 불렸다. 루이는 이 상황에 강한 불만을 품고 카보쉬앵의 배후에 있는 장에게 항의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힘이 없었기에 이들의 전횡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해 5월, 일명 카보쉬앵 칙령이라 불리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도팽의 파벌과 부유한 시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숙청을 이어갔다. 이에 격분한 파리 유력자들이 맹비난을 퍼부었는데, 특히 장을 그동안 지지했던 파리 대학마저 카보쉬앵의 만행을 비난했다. 7월,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이끄는 아르마냑파가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했다. 카보쉬앵의 전횡으로 수많은 이들이 피살당하고 상거래가 마비되면서 생업에 지장을 받는 등의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파리 시민들이 즉시 성문을 열어줬고, 아르마냑파는 파리에 입성한 뒤 카보쉬앵들을 모조리 섬멸했다. 장은 급히 파리를 탈출해 플란데런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아르마냑파는 장을 지지했던 모든 동조자들에 대한 맹렬한 탄압을 실시했고, 도팽 루이는 루브르 궁에 사실상 연금되었다. 이에 루이는 장에게 서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장은 이를 기회삼아 루이가 아르마냑파 반역자들의 인질로 이용당하고 있으니 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일으켰다. 1414년 1월, 장은 파리로 진격했다. 그러나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철수했다. 이후 아르마냑파는 도팽 루이가 부르고뉴파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해 측근 몇 명을 체포했다. 그해 4월, 아르마냑파는 샤를 6세의 이름으로 신민소집령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피카르디에서 부르고뉴파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부르고뉴 지지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뒤, 일부는 부르고뉴로 행군하고 주력군은 아르투아로 향했다. 이에 장의 동생인 느베르 백작 필리프가 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아르마냑파에 항복했다. 장은 수세에 몰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414년 7월, 아르마냑파 주력군이 아라스를 포위했지만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아르마냑파 원정군에 끌려왔던 도팽 루이는 장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르마냑파 수뇌부 역시 내전에 지쳐있던 터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9월 4일, 장은 잉글랜드와의 동맹 협상을 그만두는 대가로 사면받았고, 아르마냑파는 철수했다. 이렇게 양자의 화해를 중재하는 데 성공하면서 입지가 강화된 도팽 루이는 1414년 9월 4일 '부르고뉴파(Burgundians)', '아르마냑파(Armagnac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리고 아르마냑파의 일원이었지만 아라스 평화 협상 과정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한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높이 평가하며, 장을 계속 지지했다가 아르마냑파에게 몰수된 장 2세 드 파르테나이의 영지인 보베, 생투엔, 파르테나이를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게 수여했다.

아르마냑파는 도팽 루이의 입지가 갈수록 강해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끝에 그를 납치해 믈룅 성에 감금하고는 아라스 평화 협약에서 합의된 사면 대상 중 장의 측근 일부를 제외하는 칙령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장은 이에 격노했지만, 잉글랜드의 침공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들과 싸웠다가 매국노라는 비난을 살 것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칙령을 인정했다. 1415년 4월, 도팽 루이는 타네기 3세 뒤 샤스텔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도움으로 믈룅 성에서 빠져나온 뒤 파리에 돌아왔다. 이후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바스티유 요새의 통제권을 장악한 뒤 브르타뉴 군대를 입성시켜 파리 시의 요충지들을 점령했다. 아르마냑파는 주요 관직에서 대부분 해임되었고, 도팽 루이의 측근들이 이를 대신했다. 또한 도팽 루이는 아내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를 파리 시 외곽으로 쫓아냄으로써, 부르고뉴파에게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보였다.

1415년 10월 25일,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장의 두 형제 앙투안 필리프가 전사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아르마냑파가 막심한 피해를 입고 위세가 약해졌다. 장은 이 기회를 노려 잉글랜드군으로부터 샤를 6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다. 도팽 루이는 잉글랜드군과 싸우려면 칼레로 진군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무시당했다. 이에 아르마냑파의 수장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된 뒤 부르고뉴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장에 동조한다는 의심이 드는 파리 시민들을 모조리 체포해 처형했다. 이렇듯 잉글랜드의 침략과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갈등 재개로 정국이 혼란스럽던 1415년 12월 18일, 도팽 루이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일각에서는 아르마냑파가 도팽 루이가 장과 손잡고 파리를 넘길 거라고 의심해 독살했을 것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거라고 본다.

1416년, 장은 베리 공작 장 드 베리가 사망한 틈을 타 불로뉴 백국을 점령했다. 이후 1417년 4월 29일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었다. 한편, 아르마냑파는 새로운 도팽인 샤를 왕세자를 손아귀에 쥔 채 파리에서 권력을 이어갔다. 그들은 이자보 왕비가 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신들의 대의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해, 1417년 7월 샤를 왕세자를 부추겨서 그녀를 투르로 내쫓았다. 이자보는 이에 분노해 장과 합세했고, 장은 트루아 정부를 세우고 아르마냑파에 대적했다.

파일:Massacre of the Armagnacs by the Bourguignons, Paris, 1418.jpg
부르고뉴파의 파리 학살.

1418년 5월 29일 새벽, 부르고뉴군이 파리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들은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해 하루 동안 4,000명을 살해했다. 며칠 후, 군중이 살아남은 아르마냑파가 갇혀 있던 감옥을 공격해 수감자 1,600명을 추가로 살해했다. 아르마냑파 수장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는 특별 감옥에 갇힌 뒤 끊임없는 고문에 시달리다가 6월 12일에 처형되었다. 당시 생폴 호텔에 있던 도팽 샤를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을 비롯한 몇몇 아르마냑파 장교들에 의해 구출되어 베리 공국의 수도인 부르주로 피신했다.

그 후 파리에 입성한 장은 부르주로 피신한 도팽 샤를에게 사절을 보내 저항을 포기하고 수도로 돌아와서 부모인 국왕 샤를 6세 이자보 드 바비에르 왕비의 보호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는 아르마냑파의 조언에 따라 이를 거부했다. 이에 장은 1418년 9월 16일 생모르데포세에서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 만나 아르마냑파가 도팽 샤를의 두 형( 루이 드 기옌, 장 드 투렌)을 살해했고 도팽 샤를을 납치했다고 성토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반포했다.

1418년 7월 31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루앙 공방전을 감행했다. 루앙 수비대와 시민들은 파리 정부가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가는 대도시이며 프랑스 경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 도시를 버릴 리 없다고 믿고 구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에겐 불행하게도, 장은 헨리 5세와 밀약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는 구원을 호소하는 루앙 대표단에게 500명의 무장병, 1,000명의 궁수, 12,000명의 파리 민병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보내주지 않았고 단지 600명의 민병대만이 루앙에 찾아왔다. 이후 루앙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전령이 지원을 호소하자, 장은 냉랭하게 답했다.
"너희 자신을 스스로 돌봐라."

결국 1419년 1월 19일, 루앙은 오랜 굶주림으로 수많은 이들이 아사하는 참변을 겪은 끝에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은 루앙을 공략하면서 노르망디 전역을 석권할 수 있었고, 프랑스 국민들은 이에 분노해 장을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여기에 잉글랜드군이 파리를 노골적으로 위협하자, 장은 위기감을 느끼고 샤를 왕세자 및 아르마냑파와 화해하기로 했다. 1419년 7월 8일, 장은 푸이르포르에서 샤를 왕세자와 만나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평화 조약과 동맹을 제안했다. 퐁소 평화 조약으로 알려진 이 조약은 샤를 왕세자와 고문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다만 아르마냑파는 장이 부르고뉴인들이 점령한 요새를 포기하고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행위를 재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샤를 왕세자와 장의 동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자, 프랑스 전역에서 내전 종결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1419년 7월 31일, 잉글랜드군이 우아즈강의 요충지 퐁투아즈를 기습해 점령했다. 파리의 중요한 방어 거점인 퐁투아즈의 함락과 겁에 질린 난민들의 도착은 수도 전체에 공황을 퍼트렸다. 장과 이자보 왕비는 파리 방어를 포기하고 샤를 6세를 데리고 라니쉬르마른으로 황급히 도주했다. 이후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파리 주변을 약탈했다. 이로 인해 파리를 지키지 못한 장의 명성은 추락했다.

파일:Assassinat_de_Jean_sans_Peur.jpg
용맹공 장의 최후.

1419년 9월 10일, 샤를 왕세자와 아르마냑파는 정부의 통합과 군사적 협력을 논의하자며 몽뜨흐에서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고, 몽뜨흐 다리에서 샤를 왕세자와 대면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을 거라는 첩보를 듣고 보안을 강화하기로 했다. 장과 샤를 왕세자는 각각 10명의 호위를 받으며 다리에 입장하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다리로 향하는 모든 문을 닫기로 했다. 그들은 신의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한 뒤 오후 5시부터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 주치의인 장 드 마이시를 포함한 도팽 샤를의 고문들은 장이 다리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그를 향해 전진하며 외쳤다.
“이리 오십시오, 각하. 그분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Venez devers, Monseigneur, il vous attend!)

이후 시작된 협상에서, 도팽 샤를은 장이 이전의 협약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와 싸우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며 비난했다. 이에 장은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전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qu'il avait fait ce qu'il devait)

그 다음의 일에 대해 부르고뉴 측과 아르마냑 측의 기록이 상반된다. 부르고뉴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장은 토론을 시작하지도 않고 즉시 공격받았다고 한다. 반면 아르마냑 측 연대기 작가들은 장이 너무 오만했으며, 도팽 샤를에게 "나는 당신의 아버지인 왕을 보호하고 있으니, 파리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했으며, 자기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칼집에서 칼을 뽑는 동작을 취했고, 이 모습에 위협을 느낀 도팽 샤를의 호위 기사들이 대응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장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 기욤 2세 드 나르본, 아르노 기욤 드 바르바잔을 비롯한 아르마냑파 기사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5]

장의 유해는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암살된 후 장의 하수인들이 했던 것처럼 오른손이 절단되었다. 이후 수습되어 아버지 호담공 필리프가 묻혔던 디종의 샴몰 샤르트뢰즈 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4. 여담

'겁이 없다'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치고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순간마다 일단 도주했다(...) 위의 본문만 봐도 도주라는 단어가 3번 언급되는데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정국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들로 2번은 수도인 파리에서 도주했다. 그 뒤 노련하게 기회를 잡아 다시 치고 올라왔지만 이래서야 용맹공이 아니라 교활한 장이라고 불러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 최후도 어쩌면 몰아붙이는 것만으로는 장이 도망쳐서 더 강하게 반격한다는걸 깨달은 아르마냑파가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고 그냥 쳐죽이는 걸로 끝을 맺은게 아닐까(...)

[1] 1374 ~ 1441, 니더바이에른 공작,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작 빌헬름 2세의 부인 [2] 1378 ~ 1425,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의 부인 [3] 1379 ~ 1399, 미혼인 채 사망 [4] 1380 ~ 1428,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의 부인 [5] 부르고뉴 측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은 "죽어! 죽어라!"라고 외치며 도끼로 공작의 얼굴을 쳤다고 한다.